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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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사건의 관련자와 내용
3.1. 가해자
3.2. 피해자
3.3. 가해 내용
4. 이후 진행 과정 및 재판 결과
4.1. 군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와 밝혀진 추가 사실
4.2. 1심: 제3군야전군사령부 보통군사법원
4.3. 2심(항소심): 국방부 고등군사법원
4.4. 3심(상고심): 대법원
4.5. 파기환송심: 국방부 고등군사법원
4.6. 최종심: 대법원
5. 사건 발생 원인 및 추정
6. 국방부의 조직적인 사건 축소/은폐
8. 사건 이후
8.1. 선진병영 정책 도입 & 관심병 관리제 개선
8.4. 가해자 측 변호사의 양심선언
8.5. 국가 상대 배상청구와 최종패소
8.6. 사인 조작 재조사 각하와 항의 그리고 유가족 수사
9. 기타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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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14년 4월 7일, 대한민국 육군 제28보병사단 포병여단 977포병대대 의무대에서 선임 병사들이 후임 병사를 집단 구타해 죽음에 이르게 한 살인사건. 해당 사건의 피해자 윤승주 일병의 성을 따 윤 일병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게다가 조사 과정에서 이들이 그 전부터 행했던 각종 가혹행위들이 하나하나 밝혀졌는데 그 수준이 인간 말종 종자들이나 할 짓들이라 온 국민을 분개하게 만들 정도였고 아울러 대한민국 육군의 역대 사건 사고들 중 최악의 살인 사건으로도 꼽힌다. 그리고 이 사건과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을 계기로 병사 인권 개선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동기생활관 도입과 더불어 구타, 가혹행위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계기가 되었다. 비유하자면 스마트폰 도입 이전의 세상과 그 이후의 세상을 나누는 기준점 같은 대사건이었다.
2. 상세[편집]
제22보병사단에서 집단괴롭힘에 앙심을 품은 병장이 총기를 난사하여 다수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과 더불어 2010년대 대한민국을 뒤흔든 충격적인 군 내 사건으로, 두 사건으로 인해 군대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국방은 신성한 의무라는 군대에 대한 자부심은 싹 사라지고 "군대는 뺄 수 있으면 무조건 빼야 한다."로 바꿔 놓았다.
또한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활약으로 부조리가 거의 없어졌다는 의무경찰의 지원율이 치솟았고 기존 국군과는 차원이 다른 한 용병으로서 대우를 받으며 미군기지에서 복무하는 KATUSA의 지원 역시 매년 경쟁률이 높아졌다. 의무경찰을 비롯한 전환복무요원의 신규선발이 중단된 만큼 대체복무들의 지원률은 더더욱 높아질 것이며 아들의 군 생활을 확인하려는 부모가 많아지는 등 군대에 대한 불신과 인식의 저하는 현재진행형이다.
윤승주 일등병(사망 당시 21세, 1993년생)이 제977포병대대 의무대 생활관에서 선임 병사들과 만두 등 냉동식품을 나눠 먹던 중 의무대에 파견된 구급차 운전병인 이찬희 병장(당시 25세, 1988년생)을 포함한 선임병 4명에게 정수리와 가슴 등을 수십차례 구타당하고 쓰러진 뒤 쓰러진 상태에서 추가적으로 구타와 폭행을 당하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 사건이다. 윤 일병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들은 생명을 구하는 일엔 아랑곳 없이 폭행을 멈추지 않는 비정함을 보였다. 결국 구타로 인해 뇌사 상태에 빠진[4] 윤 일병은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지만 다음 날 사망하고 말았다. #
처음 수사 가닥이 잡혔을 때에는 단순히 냉동식품 취식 중에 일어난 우발적 폭력으로 인한 폭행치사 사건으로 가닥이 잡혔으나, 여러 증언들이 더해지고 정밀한 수사가 심도 있게 진행되면서 해당 사건이 무려 4개월[5] 에 걸쳐서 지속된 폭력 사건의 참담한 말미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전국적으로 국민들에게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폭행을 당해서 다리를 절뚝거림에도 그걸 꾀병이라고 하면서 도리어 더 심하게 폭행하고 성기에 안티푸라민을 발라 성적인 수치심을 주기도 했으며 치약 한 통 먹이기, 잠을 안 재우고 기마자세 서기 등의 가혹행위를 일삼았다고 한다. 이 내용이 7월 30일 KBS 9시 뉴스에서 단독 보도되고 31일 군인권센터의 발표로 드러나 사건이 다시 한 번 이슈가 되면서 2014년 7월 31일 23시 기준으로 네이버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황당한 것은 다른 부대 입실 환자들이 다 보던 앞에서도 가혹행위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윤 일병 사망 직후 무마를 위해서 가해자들은 입실 환자들에게 "당신들은 자고 있었던 거고 아무것도 못 본 거다."라고 협박을 가했다고 한다. 특히 가해 주도자 이찬희 병장은 자신의 아버지가 유명한 조직폭력배라면서 가혹행위를 가하는 후임들에게 "만약 이 일을 고발하면 아버지한테 말해서 가족들에게 위해를 가하겠다."며 협박을 했다고 한다. 주요 피해자 윤 일병에게는 "니 애비 사업을 망하게 하고, 니 애미는 섬에 팔아버리겠다."는 협박성 패드립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이 조직폭력배 집안이란 걸 과시해서 부대를 장악하는 데 활용했으면서 막상 후임들이 조직폭력배 얘기를 꺼내면 또 미친 듯이 구타를 일삼았다고 한다.
정밀수사 결과 새롭게 밝혀진 사실에서 목격자 김 일병(당시 의무대 환자)에 따르면 피고인 및 주범인 이찬희 병장이 평소에 후임병들에게 "심부름센터 같은 데에 돈 몇 억 주고 사람 몰래 죽이는 것은 간단하다. 아버지가 이전에 영남 근방에서 굉장히 잘 나가던 조직폭력배이고 자기(아버지) 밑에 대신 살인죄로 들어간 부하도 있다."고 말했다. 이찬희 병장과 이상문 상병은 평소에도 피해자 윤 일병에게 "너 계속 이러다가 죽는다. 네가 제대로 해야 살잖아."라고 여러 차례 협박을 했다고 한다. 또 가해자들은 평소 "우리는 영창 갈 생각하고 널 패는 거다"라는 말도 했다고 증언했다.
윤 일병의 얼굴이 구타로 부어 있었는데, 가족이 면회를 오거나 종교 활동을 나가면 자신들의 폭행 사실이 발각될까 봐 종교 활동을 못 나가게 하고 윤 일병을 협박하여 가족 면회를 막기도 했다. 거기에 이찬희 병장은 평소 기독교 자체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개신교 신자인 윤 일병이 교회에 가는 것을 막은 것으로 알려졌다.[6] 또 윤 일병의 역할까지도 가해자들은 바꿔치기했다. 사실 윤 일병의 역할은 5분대기조였다. 의무대에는 5분대기조라는 이름으로 동일한 연대하의 대대 행정실에 상주하면서 치료를 하는 역할이 있다. 5분대기조는 다른 부대에 나가 있어야 하기에 힘들어서 보통 가장 계급이 낮은 이가 담당하게 된다. 그런데 이찬희 병장은 윤 일병을 보내지 않고 이 모 일병을 보내고 윤 일병에게 응급 대기를 시켜서 식사를 못 하게 했다. 주범 이찬희 병장은 3개 대대에 5분대기조를 보내야 할 때도 하선우 병장과 이상문 상병을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윤 일병은 보내지 않았다. 가장 말단 계급인 윤 일병이 해야 할 일인데도 왜 그랬을까? 식사를 못 하게 하는 등[7] 계속 괴롭히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윤 일병이 폭행당하는 사실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가 주도한 극악무도한 폭행은 사실이 드러날 경우 아무리 해당 부대와 간부가 구타에 관대하더라도 넘어가지 못했을 수위였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간부인 유경수 하사(사건 당시 23세, 1991년생)는 비록 윤 일병을 사망에 이르게 한 폭행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나 사병들의 폭행을 방관 및 묵인하고 두둔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폭행(사망 사건 이전)에 가담한 적이 있다고까지 한다. 거기에 이찬희 병장, 하선우 병장과 함께 휴가 기간에 성매매를 하기도 했으며 이후 이찬희 병장과 의형제 같은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나이와 계급을 보면 알겠지만, 전역 직전의 말년병장이 하사에게 형님이라고 하는 흔한 게 아니라 나이 어린 하사가 병장에게 알아서 긴 것이다. 계급체계부터 완전히 붕괴된 막장이다.[8][11] 있어야 하는 군기를 어디 갖다 버리고 있어서는 안 될 똥군기만 세운 셈이다.
아래에 서술된 일지를 통해 알 수 있겠지만 자대 배치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폭행이 시작되었다. 구타 및 가혹행위가 만연하던 1980~1990년대에도 전입 후 100일이 되지 않은 신병한테는 손을 대지 않는 나름대로의 규칙과 면회나 전화 같은 건 막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배려가 있었는데, 이 사건은 21세기에 일어난 일임에도 이런 것조차도 없었다. 이 사건의 비참함이 배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윤 일병의 자대 배치 이후 사망까지의 폭행 일지가 소개된 기사 "나는 고발한다". 이 정도 악행이면 인간 쓰레기 확정이다. 전시 포로나 범죄자에게도 해서는 안 될 끔찍한 행동을 평시 군부대에서 아군에게 벌였으니 4월에 터진 개막장 사건인데도 더 늦게 일어난 제22보병사단 사건이 당장 눈에 보이고 숨길 수도 없는 사건이라서 먼저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제28보병사단은 제22보병사단과 함께 육군의 대표급 병영부조리 부대로 낙인이 찍힌 상태다.[12]
이후 윤 일병은 순직 처리되었고 2014년 5월 8일 1계급이 추서되었으며[13] 윤 일병의 유해는 서울 현충원 충혼당에 봉안되었다. 생전 계급을 따라 "윤 일병 사건"으로 보통 알려져 있으나, 국방부 장관 한민구의 기자회견 이후에는 추서된 계급을 따서 "윤 상병 사건"으로 표기하는 언론사도 있다.
3. 사건의 관련자와 내용[편집]
3.1. 가해자[편집]
이 사건의 주범은 이찬희 병장이며 이외에도 공범들이 있다. 그 중에는 강요로 피해자를 폭행한 맞선임 이 모 일병도 포함된다. 공범으로 알려진 하선우 병장, 지정현 상병, 이상문 상병도 유경수 하사와 이찬희 병장이 휴가 나갔을 때 이찬희 병장 못지않게 폭행을 자행한 정황이 드러났다.
2014년 8월 5일에 열린 공판이 시민들에게 공개됨에 따라[14] 이들의 실명을 보고 온 시민들이 2014년 8월 6일 블로그, 카페, 커뮤니티, SNS 등을 통해 가해자들의 실명과 사진[15] 구체적인 신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가해자들은 페이스북도 있었으나 수많은 테러로 인해 일부는 폐쇄된 상태다.[16] 특히 피고인 유경수 하사의 가족은 자신의 아들이 이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됐다는 이유로 네이버, 다음 카페에서 명예훼손으로 신고했다.
죄책은 무거워졌는데 형은 오히려 가벼워진 것은 2심이 가볍다기보다는 1심이 상해치사라는 죄명으로는 무리수인 형을 선고한 것이다. 상해치사로는 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망사건 같은 십몇 년 형도 흔하지 않은데 그것의 두세 배의 형이 나왔으니 상해치사 죄명이 유지되었다면 양형부당으로 감경량이 훨씬 컸을 것이다.
1심 재판의 관할이 제28보병사단 보통군사법원에서 제3야전군사령부 보통군사법원으로 이전된 이후 추가 범죄 혐의가 드러났고 죄목이 추가되었다.
3.1.1. 이찬희 병장[편집]
이 사건의 주동자이다. 전입 1개월만에 사고 부대로 전입했다. 이등병 때 레토나를 모는 선임의 운전 실력이 쓰레기라고 혹평하면서 그것을 자기가 몰고 싶다고 대놓고 불평했고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선임병[17] 들이 자기에게 '할배'라고 부르면서 놀린다고 '배때지를 칼로 쑤셔 죽여 버리고 싶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18] 또한 사고 부대에서는 모범병사로 뽑혀서 포상휴가까지 갔다 왔다. 이 사건에서 살인, 재물손괴, 폭행, 상습폭행, 위력행사가혹행위, 의료법위반, 강요, 군인등강제추행, 협박, 성매매, 공갈의 죄목이 인정되었다. 게다가 징역 35년을 선고받은 뒤 어차피 인생 끝났다는 걸 명분 삼아 국군교도소 내에서도 다른 수감자를 구타 혹은 성추행하는 등 횡포를 일삼다가 발각되어 군검찰에 송치되기까지 했다.
원래 다른 부대인 '262포병대대'에 있었는데 제설하다가 선임인 황 모 상병에게 제설 못한다고 욕 먹고 연대 이등병캠프 가서 연대장한테 마음의 편지로 '이런 부대에서는 못 살겠다'고 한 뒤 포대 전출 후 사건이 일어난 '977포병대대'로 전출되었다. 이후 국군교도소에서의 추가 범죄가 드러나 육군에서 불명예 제대로 제적되어서 교정본부 산하 교도소로 이감되어 복역 중이다.
윤 일병에게 저지른 폭행이 충격적이라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후 공범이 된 다른 병사들도 심하게 폭행했다. 목격자의 말을 빌리면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윤 일병이 오기 전부터 저질렀고 서열이 낮은 쪽으로 폭행의 주요 대상이 옮겨가면서 새로 전입 온 윤 일병에게 넘어간 것이다.[19] 그리고 이것은 부대에서 원래 그래서 따라한 것이 아니라 선임이 전역하고 자기가 왕고가 되자마자 벌인 짓이다.[20] 심지어 부조리 못 버티겠다고 부대를 옮긴 인간이 이러한 짓을 저질러서 '힘들다고 선임 찌르는 놈은 나중에 후임에게 부조리 할 놈'이라는 널리 퍼진 편견이 한층 강화되기도 했다.[21]
희한하게도 나무위키에선 이찬희가 민간교도소로 이감된 뒤 윤승주 상병의 부조리를 그대로 당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진 바 있다. 허나 이후에 지워진 걸 보면 단순 유언비어로 보인다.
3.1.1.1. 이찬희의 아버지는 진짜 유명한 조직폭력배인가?[편집]
결론부터 말하자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가해자 이찬희 병장의 아버지는 이찬희가 중학생이었던 시절에 가출해서 오래 전부터 같이 살지도 않았으며, 조직폭력배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조직폭력배라는 허풍을 고등학교 때부터 떨어 왔고 20살을 훌쩍 넘긴 20대 후반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 아빠는 유명한 조직폭력배"라는 허풍을 계속 떨고 있었던 것이다. 유치찬란한 허풍에 온 부대원이 벌벌 떨고 상관마저 형님이라고 불렀으니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2014년 8월 12일 방송된 MBC '리얼스토리 눈'에서 본 사건을 다루었는데, 인터뷰에서 이찬희 병장의 동생은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형은 아버지 취급도 하기 싫었을 거다. 알아서 뭐하냐? 도망갔다는 사실이 중요한데...", "형이 3명이서 '아버지 같은 거 없어도 된다', '같이 잘 살아보자'라고 해놓고 자신이 한 말 자기가 어기고... 이렇게 그냥..."이라며 답답하고 억장이 무너진 심정을 토로했다. 한마디로 가족들에겐 아버지 같은 존재 따윈 없어도 된다고 했으면서 자신은 그 아버지보다 더 악랄한 짓을 저질러 가족들에게 살인자 가족이라는 굴레까지 씌워버린 것이다.
궁금한 이야기 Y 2015년 11월 6일 방영분에서 이찬희 병장의 아버지의 실체가 드러났는데, 이찬희 병장의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인해 20억의 빚을 지고 있으며 그 빚을 갚지 못해 지명수배가 내려졌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어머니에 관해서 인터뷰 요청을 했는데, 묵묵부답 피해가기에만 바빴다. 대법원 기자회견장에서 윤 일병 유가족들이 말하길 이찬희 병장 본인은 물론 그의 가족들조차 윤 일병 유가족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3.1.2. 유경수 하사[편집]
신체 183cm
이 사건에서 직무유기, 폭행, 폭행방조, 집단·흉기등폭행, 성매매의 죄목이 인정되었다. 초급 간부라고는 하지만 병 출신 하사(공판 중 언급됨)다. 병장한테 짬으로 밀려서 기던 것조차 아니었다는 소리였다. 2019년 출소 후 불명예 제대를 한 걸로 추정된다. 페이스북 계정에서 여동생이 부대 영창에 수감되어 있다고 한 뒤 이 글에 힘내라고 한 사람들이 더 가관이었다. 그리고 유경수의 페이스북에 적반하장 식의 글을 올렸다가 욕을 얻어먹고 그 계정은 삭제되었다.[22] 출소 이후의 근황은 밝혀지지 않았다.[23]
3.1.3. 하선우 병장[편집]
신체 167cm
이 사건에서 상해치사, 재물손괴, 폭행, 집단·흉기등폭행, 강요, 성매매의 죄목이 인정되었다. 현재는 출소했다. 페이스북 계정도 있었으나 친구 수는 거의 없는 걸로 보여졌으며 현재는 계정이 있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2021년 출소 후 서울특별시에서 거주 중이며 휴대폰 대리점 직원 일명 폰팔이 일을 하고 있다고 밝혀졌다.
3.1.4. 지정현 상병[편집]
신체 176cm
이 사건에서 상해치사, 재물손괴, 폭행의 죄목이 인정되었다. 현재는 출소했다. 수사 중 대부분의 자백을 지정현이 했다.[24][25] 페이스북 계정은 있으나 실형을 살아서 그런지 친구는 없다.
이 기사에 따르면 사건이 터진 2014년 1월 이찬희 병장에 의해 방탄헬멧으로 머리 부분을 구타당했다. 지정현을 구글이나 유튜브 등지에 치면 연세대와 연관지어서 나오는데 만약 재학 중이었다면 출학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2021년 출소 후 인천광역시에서 거주 중이며 노가다를 뛰며 공장에서 일한다고 밝혀졌다.
3.1.5. 이상문 상병[편집]
신체 174cm
이 사건에서 상해치사, 재물손괴, 폭행의 죄목이 인정되었다. 현재는 출소했다. 페이스북 계정이 있었으나 친구는 없고 현재는 계정조차 찾을 수 없다. 2021년에 출소 후 경기도 수원시에서 거주 중이며 근황은 식품 공장에서 일한다고 밝혀졌다.
3.1.6. 이 모 일병[편집]
공범 이 모 일병 (당시 21세, 1993년생)
이 사건에서 폭행, 증거인멸의 죄목이 인정되었다. 다른 가해자들과 달리 선임의 강요에 의해서만 폭행하고 폭력의 강도가 약했기에 다른 가해자들보다 비판은 적게 받았다.[26] 윤승주 일병이 자대배치를 오기 이전까지는 가혹행위의 피해자였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약품 이름 암기 테스트를 하는데 1개라도 틀리면 맞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 모 일병은 사건 이후 28사단 262대대 의무병에 있었던 걸로 알려졌는데, 부대 내에서 사건 사고 없이 성실하게 군 생활을 하고 만기 전역한 것으로 보인다.
3.1.7. 지휘계통 간부[편집]
당시 지휘계통상에 있는 간부 5명은 처음에는 같은 사단 내의 헌병대 및 군 검찰로 인해 입건하지도 못했으나 3군사령부의 조사 이후 직무유기 등으로 형사입건되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모두 불기소되었다.
- 본부포대장 김모 중위: 직무유기, 공전자기록등위작, 위작공전자기록등행사
- 본부포대 행정보급관 김모 상사: 공전자기록등위작, 위작공전자기록등행사
- 977대대 주임원사 박모 준위[27] : 직무유기, 공전자기록등위작, 위작공전자기록등행사
- 977대대장 임 모 소령[28] : 직무유기
- 977대대장 우 모 중령[29] : 직무유기
2014년 10월 18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영분에서 3군사령부 조사로 직무유기 혐의로 형사입건된 대대장은 사건이 커지기 이전에 윤 일병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용서는 나를 위로하고 안식을 주는 힐링입니다. 과거를 용서하고 미래와 진정한 가치를 위해 생각을 바꿔보십시오"라는 말을 했다. 참고로 이 발언은 참척을 당한 유족에게 한 발언으로, 사실상 사고로 죽은 유족에게 책임자가 고인드립을 한 꼴이기 때문에[30] 군 장교가 아니라 다른 일반인이 저런 소리를 유족에게 해도 그 자리에서 충분히 폭행당할 수 있을 정도로 과격한 발언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용서라는 것은 오로지 피해자만의 고유한 권리이지, 다른 사람이 함부로 입에 담을 것이 아니다. 심지어 고급 장교라고 할 수 있는 대대장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상식조차 결여된 저런 후안무치한 소리를 지껄였으니 군대 전반의 병에 대한 인식 수준이 어떨지는 안 봐도 비디오일 것이다. 결국 뭘 배워 왔는지 도대체 모를 저런 장교들 때문에 이런 참담한 사건이 계속 터지는 것이다.
결국 해당 대대장은 후에 정직 3개월 처분이 부당하다며 행정소송까지 했지만 패소했다.[31]
해당 대대의 상급 지휘계통으로도 줄줄히 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포병연대장과 제28보병사단장 이순광 소장은 보직해임[32] 에 6군단장 이범수 중장[33] 과 제3야전군사령관 권혁순 대장[34] 은 경질, 육군참모총장 권오성 대장[35] 은 사퇴하였다. 또한 제6군단 헌병단장(대령)은 부실수사, 양주병원장(대령)은 사자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으로 모두 보직해임되었다.
3.2. 피해자[편집]
윤승주 상병[36] (향년 20세, 1993년 6월 13일생)
이런 사건에서 나오듯 군생활 부적응자이거나 관심병사가 아니냐고 넘겨짚는 사람이 많은데[37] 윤 일병은 162cm, 50kg으로 체격이 작고 왜소했지만[38] 단지 몸이 약했을 뿐, 그가 재학했던 대학에서도 간호학과에서 과대를 맡을 정도로 사회성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특히 간호학과는 어느 대학이든 남성 비율이 매우 적은 것을 생각하면 윤승주의 사회성은 보통 좋은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초 사회에서 남성이 대표를 맡았을 정도면 사회성이 웬만한 사람보다 좋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목격자 김 일병과 공범 이 일병의 말에 따르면 피해자는 처음 자대 배치를 받을 때는 굉장히 낙천적인 데다 활발하며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가해자들의 반복되는 폭행과 억압적인 분위기에 짓눌리면서 점점 말투가 어눌해지고 표정이 어둡게 변해갔다. 활기찼던 신병 윤 일병, 이렇게 무너져갔다. 말투가 어눌해진다는 건 말하기 전에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까?", "비위에 거슬리지 않을까?"라는 것을 먼저 고민하기 때문으로, 각종 학대 피해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피해자가 그렇게 된 걸 가지고 또 트집잡아 거슬려하며 학대 빌미로 삼는 것 역시 흔한 일이고, 이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윤 일병의 수첩에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배워야 하는 부분을 꼼꼼히 기록하고 처음에는 누구보다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군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또한 이런 고통 속에서도 가족들을 면회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한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다수 발견되면서 국민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원래는 더 많은 내용이 적혀 있던 수첩이었으나, 가해자들이 조직적으로 범행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상당 부분을 찢어서 버리는 등 증거인멸을 했고, 육군 헌병대가 초동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아서 사라진 페이지들이 그대로 쓰레기로 버려지는 바람에 다른 내용들은 영원히 확인되지 못하게 되었다.
3.3. 가해 내용[편집]
그들이 하였던 잔인한 행동은 마치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일본 제국의 생체실험과 동일했다.
- 표창원 (표창원범죄수사연구소 소장)
이들이 한 가혹행위는 다음과 같다.혹여 이번 일을 알게 될까봐서 가해자가 자기 어머니를 섬노예로 팔아버리겠다고 협박한 적도 있고, 자기 아버지가 깡패라고도 말하였다. 피해자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서 미쳐서라도 면회를 갈 것을 후회하셨다고 한다. 피해자 소견을 들어 보니 가해자들이 감시하고 있어서 집에도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다고 한다.
- 새벽 3시까지 기마자세로 있으라 하기
- 강제로 치약 한 통을 짜넣어 먹이기
- 누워있는 채로 물 1.5리터를 강제로 먹이기
- 성기에 안티푸라민을 강제로 바르게 하기
- 폭행을 해놓고 다리를 절뚝거리면 절뚝거린다고 또 폭행하기
- 바닥의 가래침을 개처럼 자세를 하고 핥아먹으라고 하기
- 윤 일병의 속옷을 찢고 윤 일병의 나라사랑카드를 갈취[41] # 더군다나 군대에서 타인의 금품 갈취는 엄벌 대상이다. 정훈 만화책 '소대 열중쉬어'에 후임[42] 의 돈을 갈취하려는 선임에게 반말을 하며 하극상을 벌이려던 병이 어느 정도 참작을 받는 장면[43] 이 나올 정도다.[44]
그리고 3군사령부 보강수사에서 추가적인 가혹행위가 드러났다.
- 개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하고 바닥에 과자를 떨어뜨려서 개처럼 멍멍 하고 짖어서 과자를 먹게 하기
- 5kg의 역기를 들어서 피해자 폭행
아래는 군인권센터 홈페이지에서 발표한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사건 일지이다. 가해자들의 진술서대로 작성되었으며, 목격자 김 일병(당시 의무대 입원 환자)의 증언과 대치되는 부분도 있으니 참고하자. 보면서 혐오감이 들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45]
4. 이후 진행 과정 및 재판 결과[편집]
4.1. 군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와 밝혀진 추가 사실[편집]
군은 현장 검증 날짜를 윤 상병의 장례일로 잡아 유족이 참관하지 못하게 유도했으며, 당시 의무대에 있었던 환자이자 목격자 김 일병이 이미 그 때 있던 일을 진술했는데도 자고 있는 것으로 처리해 현장 검증에서 제외하는 등 축소 은폐하려는 정황이 밝혀졌다.
그리고 2014년 8월 7일 군인권센터가 추가로 밝힌 내용에 의하면 윤 일병이 의식을 잃기까지 25분가량 64회 정도 폭행을 당한 것으로 부검 결과가 나왔다. 종아리, 허벅지의 근육이 터지고, 갈비뼈가 14개 손상되고, 웬만한 장기에 피가 고여 있고, 비장은 아예 터져 있다는[48] 충격적인 부검 결과가 나왔다. 한 마디로 고문이다. 이것을 밝히면서 군인권센터는 윤 일병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조차 "음식물이 기도에 막혀서 기도 폐색으로 사망했다."는 군의 발표 내용이 아니라 "폭행으로 인한 사망"이 진짜 사인이라고 의견을 냈고 부검 결과는 이 내용이 더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해당 내용을 정리한 8월 7일 정치부회의 기사 이 외에 사망 시각도 이전에 발표한 4월 7일이 아니라 4월 6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치료 중에 사망한 게 아니라 폭행으로 사망했거나 폭행 이후 환자 이송이 신속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군 상층부의 조직적인 축소 의도가 의심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같은 날 국방부는 이러한 군인권센터의 발표에 반박하며 파손된 갈비뼈 15개 중 14개는 가해자들이 심폐소생술을 하여 윤 일병을 살리기 위해 발생한 상해라고 발표했다. 또 군인권센터가 주장한 타살에 의한 살인을 부정하며 질식에 의한 사망을 계속 고수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아래에도 후술되어 있지만 당장 부검 결과와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찬희 병장의 폭행이 윤 일병의 사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는 가해자들의 법정 진술과도 상반되는 주장이다.
그리고 다음 날인 2014년 8월 8일 국방부는 또 다시 공식 브리핑을 열고 윤 일병의 사망 원인은 기도폐쇄성 질식사가 확실하다며 거듭 강조하였다.
2014년 8월 11일에 수사는 완벽했다며 육군법무실장이 군 검찰 내부망에 글을 투고한 것이 확인되었고 수사 결과에 자꾸 이의를 제기하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는 표현까지 들어 있었다. 이러한 글이 폭로되자 법무실장은 "오해가 있었다."고만 내뱉고 바로 잠수를 탔다.
그런데 국방부의 발표는 지적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가해자들이 행한 응급조치부터 틀렸다. 음식물을 먹다가 기도가 막혔으면 심폐소생술이 아니라 환자의 등 뒤에서 환자를 끌어안고 명치 부근을 깍지를 낀 두 손으로 쳐올리듯 압박하는 하임리히법부터 시술해서 기도를 확보하는 게 우선이고 심폐소생술은 그 다음이다. 기본적으로 기도를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심폐소생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해자들은 의무병이기 때문에 이를 몰랐을 가능성도 만무하고 이를 감안하면 가해자들이 책임 회피를 위해서 심폐소생술을 하는 척한 걸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그리고 심폐소생술로 인한 갈비뼈 골절도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심폐소생술을 강의할 때 "아예 부러뜨릴 생각으로 세게 해라."고 가르치기도 하고 의료인들도 거의 100% 부러진다고 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 두 개' 정도일 뿐 절대로 좌우 12개씩 해서 총 24개인 갈비뼈의 절반 이상인 14개나 부러질 수가 없다. 그리고 갈비뼈야 백 보 양보를 해서 심폐소생술 때문이라고 해도 내장 출혈과 비장 파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위에 나온 국방부의 발표는 이후 모든 게 다 완전한 거짓인 것으로 밝혀졌다.
목격자 김 일병의 진술에 따르면, 피해자 윤 일병은 2014년 4월 5일 가해자들의 심한 폭행 고문으로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인 과호흡증후군 증세가 나타났고 행동이 느리고 말을 잘 못 하는 정도가 굉장히 심했다. 그동안의 폭행, 고문으로 심신이 매우 쇠약해졌던 것이다.
사건 당일 4월 6일 이찬희 병장이 체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윤 일병에게 냉동만두를 입에 강제로 넣게 한 후에 폭행을 했으며 바닥에 떨어진 만두를 핥아먹게 했다. 그 이후에는 음식물 섭취를 하지 않았다. 이후 이 상병과 지 상병의 폭행이 이어지고 윤 일병이 물을 마셔도 되냐고 말하자 이찬희 병장이 3초 안에 마시고 오라고 하며 시간을 채우지 못했다고 계속 폭행했다. 윤 일병이 오줌을 싸고 쓰러졌는데도 가해자들은 더럽다며 괴롭히고 산소포화도 측정기로 측정해서 맥박이 정상으로 나왔다며 눈을 감고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에서 또 폭행을 했으며 윤 일병의 눈이 조금은 감기고 조금은 뜨였는데 눈동자가 돌아가서 흰자가 보였는데도 이찬희 병장은 윤 일병의 배 위에 올라가서 발로 밟았고 주먹으로 가슴을 엄청 세게 폭행했고 이상문 상병도 가담했다. 상태가 이상하자 1.5리터 페트병의 물을 그대로 입에 넣었지만 맥없이 흘러내려갔으며 산소포화도를 측정했지만 이미 맥박은 떨어진 상태였다. 하선우 병장이 흉부 압박을 하는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힘이 부족해서 제대로 못 하자 지정현 상병이 심폐소생술을 거들다가 기도를 확보하기 위해서 삽관을 했다. 이 과정에서 보듯이 질식 상태였다면 쓰러졌을 당시 피해자가 켁켁거리거나 목을 잡는 행동을 보여야 하는데 그러한 행동을 보이지 않은 점과 가해자 진술서의 내용과 일치한다. 가해자들도 윤 일병이 질식으로 쓰러지지 않은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부에서는 계속해서 "기도 폐쇄로 사망했다."고 끝까지 거짓말을 했다.
4.2. 1심: 제3군야전군사령부 보통군사법원[편집]
제3야전군사령부 보통검찰부에서 보강수사를 통해 추가적인 가혹행위가 드러났는데 이찬희 병장은 독실한 신자였던 윤 일병에게 "나는 교회를 정말 싫어한다. 막내가 주말에 교회 가고 이러면 선임들이 남아서 응급대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냐."라며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막았고 윤 일병이 꾸지람을 당하면서 다른 곳을 쳐다봤다는 이유로 한 번에 20여 분씩 세 차례에 걸쳐 관물대 아래 비좁은 공간으로 들어가게 했다. "개처럼 기어봐라. 멍멍 짖어봐라."라고 강요한 다음 침상에서 바닥으로 과자를 던지며 "개처럼 먹어봐."라고 위협한 건 물론 "마음의 편지 등으로 어려움을 제기하면 네 아버지 사업을 망하게 하고 어머니를 섬에 팔아버리겠다."라며 패드립성 협박까지 서슴없이 저질렀다.
하선우 병장의 경우 생활관에서 5kg의 역기를 들어 윤 일병을 내리쳐 폭행하려던[49] 혐의가 드러났고 이상문 상병의 경우 윤 일병이 암구호를 팔에 보이도록 적었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가슴을 5회 폭행했고 윤 일병의 맞선임인 이 모 일병도 평소 말끝을 흐린다며 가슴을 9회 폭행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사건 발생 뒤인 2014년 4월 7일, 자신들의 범행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윤승주 일병의 관물대, 의류대(더블백)를 뒤져서 스프링 노트 1개, 수첩 1개를 찾아내서 하선우 병장에게 건넸고 하 병장은 10~15장을 찢었다. 이상문 상병과 이 모 일병은 찢어낸 종이와 다른 A4 용지 50여 장, 이찬희 병장이 후임들로부터 받은 반성문 20여 장, 이 병장이 윤 일병을 폭행하던 중 찢은 러닝 2장, 의무지원관 유경수 하사가 윤 일병을 폭행을 하면서 부러뜨린 스탠드 유리조각 등을 분리수거장에 버려 증거를 인멸한 혐의도 추가되었다.
2014년 9월 16일, 5차 공판에서 재판부는 가해병 4명에게 주혐의를 살인죄로 예비혐의를 폭행치사죄로 하는 3군사령부 공소장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가해자들은 살인의 고의성이 없었다면서 강하게 부인했다. 한술 더 떠서 주범 이찬희 병장 변호인은 강제추행죄와 목격자 협박에 관해서도 고의가 없었다고 부인했다. 다음 재판에는 증인 김 일병(의무대 입원 환자) 출석과 피해자 윤 일병의 아버지의 피해자 진술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2014년 9월 25일, 국방부 측에서 사건을 축소, 은폐한 관련자 징계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윤 일병 유가족들이 육군 제28보병사단 헌병대장, 제28보병사단 헌병수사관, 제28보병사단 본부중대 의무지원관 유 모 하사, 국방과학수사연구소 법의관, 제28보병사단 검찰관 등 이렇게 5명을 고소하였다. 여기서 윤 일병 어머니는 제28보병사단에서 처음 사고가 난 뒤에 "우리는 한 편이다.", "한 가족이다."라고 말해서 변호사 선임도 하지 않고 100% 믿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유가족을 우롱하는 걸로 모자라 기만을 하고 속았다고 하면서 고소장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고소장을 접수하면서 추가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의무지원관 유경수 하사는 윤 일병이 연천군 보건의료원에서 국군양주병원과 가톨릭대학교 의정부성모병원으로 이동하는 내내 따라다니며 "입 안에 음식물이 많았다."는 허위사실을 양주병원 의무기록지에 기재하게 만들고 의정부 성모병원에서는 국군양주병원의 관계자인 양 "윤 일병이 떡을 먹었다."고 허위로 진술을 한 사실이 드러나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와 공무원 자격 사칭 혐의가 추가로 발견됐다. 국방과학수사연구소 법의관은 부검감정서에 "민간병원 의사가 입 안에 음식이 가득했다고 한다.", "민간병원 의사가 사인을 질식사라고 했다."는 근거 없는 내용을 기재한 혐의를 발견했으며, 법의관이 증인신문에서 "석션(흡입)은 기도 부분에 음식물이 차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한 것이다."라고 답변하자 검찰관은 이를 캐묻기는 커녕 오히려 "질식사의 강력한 증거다"라며 질식사로 사인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윤 일병이 연천군 보건의료원에 도착 당시 심정지 상태였는데도 심장과 맥박이 뛰고 있었다는 허위사실을 수사보고서에 기재한 의혹이 제기된 제28보병사단 헌병수사관은 허위 공문서 작성 혐의로, 제28보병사단 헌병대장은 직무유기 혐의로 고소했다. 한 마디로 합심해서 사건을 조작, 축소, 은폐한 정황이 드러났다.
2014년 10월 24일, 마지막 공판에서 군 검찰은 이찬희 병장에게 사형, 하선우 병장, 이상문 상병, 지정현 상병에게 무기징역, 유경수 하사는 징역 10년, 상급자들의 강요로 구타에 가담했고 사망 사건과는 관련이 없던 이 일병은 징역 6월을 구형했다. 10월 24일 오후 8시 기준으로 네이버 검색 순위에서 "윤 일병"이 1위, "구형"이 2위를 차지했다.
군 검찰의 구형 후 이뤄진 피고인 최후 변론에서 가해자들은 때늦은 참회를 했다. #1, #2, #3 하지만 가해병들은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아 설사 선고를 내리더라도 항소를 할 뜻을 밝혀서 제대로 뒤통수를 쳤다.
- 이찬희 병장은 "윤 일병과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 제가 다 잘못했고 제가 한 짓은 비난 받아 마땅하니 벌을 달게 받겠다"라고 뒤늦게 사죄성 발언을 했다. 하지만 교도소에 수감되면서도 성질을 못 버린 걸 보면 단순히 자신이 비난받는 걸 회피하기 위한 가식적인 발언에 불과하다.
- 유경수 하사는 "분대를 이끌어 적과 맞서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아군인 윤 일병과 유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줬다."며 "간부로서 전후방에 근무하는 장병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려 죄송하다."라고 말했다.
- 분대장인 하선우 병장은 "다른 병들의 행위를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나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이기적인 마음에 모른 척하고 가담하기까지 했다."라고 뉘우쳤고 "윤 일병이 쓰러진 뒤에도 잘못을 감추려고 거짓말하고 은폐해 마지막 양심까지 저버렸다."며 다른 누구보다 내 잘못이 크고 못난 분대장을 만나 이렇게 된 윤 일병에게 사죄한다."라고 흐느꼈다.
- 지정현 상병은 "윤 일병을 때리라고 누가 시켰든, 시키지 않았든 간에 저는 동료의 불행을 외면했다."라며 "벌을 달게 받고 죽어서도 반성하겠다."고 울먹였다.
- 이상문 상병은 "군 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윤 일병을 도와줬어야 하는데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 윤 일병과 유족에게 죽을 죄를 지었다."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사죄했다.
허나 피해자가 사망한 이상 위의 발언들은 모두 입 발린 말들, 그저 감성팔이에 불과하다. 진심으로 후회한 것이라 해도 이미 늦었다. 살아 있을 때 도움을 줄 것이지, 이미 억울하게 죽은 사람한테 반성해 봤자 방관자이자 살인에 가담한 잔인한 인물들이라는 것은 똑같다. 어리석어서 동료의 불행에 가담하고 방관한 것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폭행을 가한 인간 말종들이다.
당연하지만 윤 일병의 유가족들은 가해병들의 뒤늦은 사죄를 일절 받아들이지 않고 제대로 된 처벌을 요구했다.
2014년 10월 30일,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고 폭행치사로 인정해 이찬희 병장에 대해 징역 45년을 선고했다. 하선우 병장은 징역 30년, 이상문 상병과 지정현 상병은 각각 징역 25년, 유경수 하사는 징역 15년, 폭행 가담 정도가 낮으나 증거인멸에 가담한 죄가 있는 이 모 일병은 징역 3개월 집행유예 6개월[50] 이 선고되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살인죄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나 상해치사 과정의 죄질이 극악무도하기에 4명에 대해서 "살인죄에 버금가는 중형이 불가피하다."[51] 고 평가했고 유경수 하사에 대해서도 그 죄질이 매우 나쁘다고 하여 검찰의 구형량보다 더 엄하게 선고했음을 밝혔다. 그래서 주범 이찬희 병장은 징역 45년을 선고받았다. 전 국방부 검찰단 고등검찰부장은 살인죄를 무죄로 판단하고 상해치사로 인정한 마당에 45년형은 상당히 이례적이므로 법적 기준보단 여론을 의식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법원 양형 기준에 비춰 봐도 상해치사죄에는 적용될 수 없는 형량이라는 지적도 제기된 상태인데, 이건 과다 형량 논란으로 이어져 나중에 형이 줄어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이다.
이에 군 검찰은 사실오인과 양형부당을 이유로, 피고인 측 변호사 역시 양형부당을 이유[52] 로 항소 의사를 밝혔다.
윤 일병의 어머니는 "어떻게 살인이 아니냐고 이게.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해봐, 그래도 나는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어요. 이 나라를 떠날래요."라고 분노를 표시했다. 2014년 11월 5일 여의도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에서 윤 일병의 어머니는 가해자들이 항소심에서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게 하고자 1,0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2014년 11월 17일, 지난 10월 30일에 군 검찰 측이 주요 가해자가 살인죄로 인정되지 않아서 즉각 항소장을 제출한 데 이어 가해자 6명도 항소장을 제출하였다. 이 사건을 담당하는 피고인 측 변호사는 "가해병들이 잘못을 저지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군이 모든 책임을 가해병들에게 떠넘기려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53] 고 말했다.
4.3. 2심(항소심): 국방부 고등군사법원[편집]
2014년 12월 29일,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에서 2심 재판이 진행되었다. 육군 측은 미리 심판관 제도를 없애고 군 판사로 구성하여 재판을 진행했다.
2015년 1월 8일, 제28보병사단 보통군사법원과 3군사령부 보통군사법원의 1심 재판에서 무시되었던 당시 윤 일병의 부검을 맡았던 부검의 증인 신문이 진행되었다.
2015년 4월 9일, 선고공판에서 1심과 달리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었지만 형량이 과다하다고 평가하여 줄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주범인 이찬희 병장과 유경수 하사를 제외한 나머지 병들은 이찬희 병장 때문에 가담한 점과 유가족이 탄원서를 냈다는 점을 참작하여 좀 더 선처 하였다.
이에 따라 주범인 이찬희 병장은 살인죄 등으로 징역 35년, 하선우 병장, 지정현 상병, 이상문 상병도 각각 살인죄가 적용됐으며 징역 12년, 유경수 하사는 상해치사죄로 징역 10년을, 이 모 일병은 폭행죄로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
형량이 줄어든 원인은 이찬희 병장의 경우 뒤늦게나마 반성의 뜻을 표하고[54] 공탁금을 낸 점[55] 과 형량이 지나치게 과다한 점[56] , 나머지 가해자들 역시 반성의 뜻을 표하고 윤 일병 유가족들이 주범 이찬희 병장과 유경수 하사를 제외한 나머지 병들의 선처를 탄원한 점이 고려되었다고 한다.
윤 일병 유가족들은 판결 전날 재판부에 주범인 이찬희 병장과 유경수 하사를 제외한 나머지 가해자들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에 윤 일병의 어머니는 "탄원서를 내는 것에 대해 유족들의 의견이 마지막까지 분분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기도를 했다.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아들의 영정사진을 보면서 대화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때 아들의 얼굴이 밝은 모습이어서 나도 '가해자들이 자의보다는 타의가 많았다. 우리 승주에 이어 후임병이 전입 왔으면 승주도 가해 그룹에 끼었을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탄원서를 제출한 이유를 설명했다. #
이 모 일병은 상고를 포기하여 벌금 300만원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4.4. 3심(상고심): 대법원[편집]
2015년 10월 29일, 대법원은 이찬희 병장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는 취지로 피고인들에 대해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다시 하도록 환송했다.[57]
이로써 2심에서 다시 재판하여 살인죄를 인정할지, 하지 않을지를 다시 결정하게 됐으며 살인죄가 부정된다면 이찬희 병장을 제외한 3명의 형량은 추가로 줄어들 것으로 보였다.[58] 또한 사건의 특성상 특정인만 재판에서 빼 줄 수 없기 때문에 상고를 포기한 이 일병을 제외한 나머지 5명 전원의 원심을 파기하여 고등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하였다. #
이찬희 병장에 대해서도 적용된 폭처법이 위헌 결정을 받았기 때문에 그 부분은 무죄 판결하였다. 따라서 이찬희 병장의 형량도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졌다. 물론 살인죄는 그대로 인정한 데다 교도소 수감자 폭행 부분을 합쳐 재판할 가능성이 높으니 실질적으로는 그대로일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다만 해당 사건의 피해자들은 죽거나 심한 장애를 입거나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윤 일병 사건과는 다르고 오히려 인분교수 사건에서 집단폭행을 뺀 것과 비슷하다.
이찬희 병장은 윤 일병이 사망에 이르게 된 원인이 되는 가슴, 배 등에 대한 폭행을 직접 주도적으로 했고 이런 부위를 계속 때리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59] 이며 결정적으로 윤 일병이 쓰러진 뒤에도 폭행을 가하려다가 제지를 당한 점에서 윤 일병이 사망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을 가졌을 거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므로 윤 일병의 사망에 대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가 인정된다고 봤다.
그러나 나머지 3명은 평상시 폭행을 일삼는 등의 죄는 분명 있으나 이찬희 병장에게 사실상 지배당하는 상태였기에 마지못해 가담한 측면이 있고 그 정도도 덜하다는 점, 윤 일병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된 폭행은 이 병장이 주로 했다는 점, 결정적으로 윤 일병이 쓰러지는 순간 이 병장의 추가 폭행을 제지했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등 윤 일병을 살리려고 노력했던 점[60] 으로 보건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61] 는 적어도 하 병장 등 3명에게는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다.
물론 이와 같은 대법원의 판단을 두고 "사람이 죽었는데 주범은 살인을 했지만, 공범은 살인을 하지 않았네"란 오해를 낳기 쉽지만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법리상으로는 살인죄라고 100%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대법원은 나머지 3명이 윤 일병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 정황, 폭행의 정도, 이후 행적 등으로 보건대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만 했을 뿐이다. 따라서 다른 죄로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으며, 이들이 살인의 고의는 없으나 의무병으로써 심한 구타를 당하던 윤 일병의 사망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상해치사죄가 적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만일 대법원의 판단이 파기환송심에서 확정된다면 군사법원 1심은 이찬희 병장의 미필적 고의까지도 봐준 점, 2심은 하 병장 등 3명에게 유리한 정황을 고려하지 않고 살인죄를 일괄 적용한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윤 일병 유가족 측은 이전에도 이찬희 병장과 유경수 하사를 제외한 나머지 3명에 대해서는 이미 용서하겠다는 뜻을 밝혔기에 이번 파기환송에 대해선 유감이나 대체로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다만 "주범인 이찬희 병장의 살인죄가 인정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사실 제 마음 같아서는 그 감형된 10년 다시 되돌려주고 싶어요. 이찬희 병장은 이 세상에 다시 발을 디디면 안 되는 사람이잖아요."라면서 이찬희 병장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또 사건을 조직적으로 축소, 은폐한 군 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찬희 병장은 살인자가 맞으나 하 병장 등 3명의 살인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한 김정민 변호사[62] 도 대법원이 전원합의체도 아니고 그냥 4명으로 구성된 1부에 사건을 배당한 뒤 선고 당일 바로 파기환송시킨 점을 들어[63] 군 법원의 판단이 아마추어적이었다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
4.5. 파기환송심: 국방부 고등군사법원[편집]
2016년 4월 27일,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에서 8차 공판(이미 2심에서 7번 했기 때문에 첫 파기환송심 공판)이 열렸으며, 아래 후술할 이찬희 병장의 교도소 폭행 사건을 병합하여 진행하였다. 이미 앞서 사실관계에 대해서 다루었고, 양형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대부분 이전의 공판동안 했던 것으로 갈음하고 공소장 변경, 일부 추가 신문 정도만 있었다.
검찰은 이찬희 병장에게 극단적인 인명경시를 보여줬으며 앞에서는 반성한다면서도 정작 뒤에서는 국군교도소 수감자를 대상으로 폭행 사건을 또 저지르고 교화의 여지가 없으며 이전에 사형을 선고받은 임도빈 병장보다 죄질이 더하다며 이전처럼 사형을, 하 병장, 이 상병, 지 상병은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상해치사죄를 적용했다. 이찬희 병장의 범행에 상당수 가담했으며, 단독으로도 상당수 폭행한 점을 들어 징역 12년은 죗값으로 부족하다며 징역 35년을, 유경수 하사에게는 폭행을 은폐하며 심지어 본인도 폭행을 하여 폭행을 방치한 책임이 있지만, 폭처법 적용이 불가능해진 점을 감안하여 징역 7년 6개월을 구형하였다.
2016년 6월 3일, 국방부 고등군사법원 파기환송심 결심 공판에서 주범 이찬희 병장은 살인죄를 적용해 징역 40년, 하 병장과 이 상병, 지 상병은 상해치사죄로 징역 7년, 유경수 하사는 징역 5년형이 선고되었다. #
4.6. 최종심: 대법원[편집]
2016년 8월 25일, 대법원에서 지적한 사항이 모두 반영되어 형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 주범인 이찬희 병장을 제외하고는 1심에 비해 대폭 감형된 형을 받았다. 윤 일병 유가족의 선처 때문이기도 하지만 1심의 형이 여론을 반영해 과하게 무거운 형량을 때렸던 것도 사실이다.
2014년 4월 10일[64] 에 구속되었으므로 현재는 이찬희를 제외한 나머지 가해자들은 모두 출소한 상태이다. 이찬희는 2054년 출소 예정이나 워낙 많은 시간이 남은 만큼 중간에 달라질 수도 있다. 가석방될 가능성도 있고[65] 그 사이에 또 사고쳐서 징역이 추가되거나 옥사할 수도 있다.
이찬희 병장의 경우 군 병적에서 제명당해 현재 교정본부 예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중이다. 즉 현재는 민간인으로 기록은 병적 제적되어 예비역 신분도 아니다.
5. 사건 발생 원인 및 추정[편집]
5.1. 부대 자체의 문제[편집]
사건의 근원을 따지자면 참 가관인 것이, 이 부대 자체도 상당히 문제가 많았다. 제28보병사단/사건 사고 또는 의무병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해당 부대는 말이 의무반이지 7~8명만 주둔하는 분대 규모의 부대였고 본부와도 떨어진 고립된 부대였다. 해당 의무대 위치도 문제인 게 본래 3포대 근처의 작은 건물을 사용했으나 2000년대 초 건물 노후를 이유로 3포대 내무반 끝 일부를 잘라서 의무대로 쓰기 시작했고 이대로 10여 년 동안 계속 그대로 썼다.
부대 관리 부문에 있어서 본부포대장은 포대장 대로 남의 포대 건물이니 가기 애매했고 같은 건물인 제3포대장 역시 남의 포대라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결국 장교가 통제하지 않는 괴상한 부대였다.[66] 국군은 타국군에 비해 장교를 많이 뽑는 편이다. 서방 세계에서는 소대장은 고참 중사와 초임 소위를 섞어서 배치하고 중대장을 중위로 임명하는 방식인데 비해 한국군은 대대 본부중대가 아닌 이상 대위나 되어서야 중대장을 시키고 소대장은 거의 전부 중위 또는 소위를 배치시키며 중사, 소대장은 정말 장교를 부임시키기 뭐할 정도로 머릿수가 적은 부대에만 배치한다. 그 정도로 장교를 많이 뽑는 군대인데, 장교가 통제를 하지 않는 부대가 된 것이다. 이에 더해 유경수가 서류상 이 부대의 지휘자가 되어 버린 데다가 그 유경수가 이찬희보다 나이가 3살 어렸다.
간부들이 수시로 개입하는 사령부나 일선 대대, 최소한 장교와 중사급 이상의 부사관이 상주하는 소대급 이상 수준의 부대였다면 이 정도 사태까지는 벌어졌을 가능성이 낮다. 물론 이 부대에 간부가 없는 건 아니었다. 유경수를 상주시키긴 했으나 이 인원은 계급도 하사인 데다가 이찬희보다 나이가 어렸다는[67] 이유로 호형호제를 자신이 허락하고 동생으로 굽혀 들어갈 정도의 사람인 점이 문제였다. 애시당초 국군에 구타가 만연해 있고, 간부들이 전반적으로 편의주의와 무사안일주의, 과중한 업무를 후임이나 병사들에게 미루는 행태를 어느 정도 선호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군기가 빠진 오합지졸들이 모인 군대라도 이 정도까지 용납할 수준은 아니다.
예를 들어, 부대를 빡세게 굴릴 필요가 있다면 간부들이 상병이나 병장들에게 일부러 지나가는 식으로 짜증내며 압박을 가하는 언질을 주는 식이다. 나중에 이 때문에 병영부조리가 생겨도 "아래에서 멋대로 해석한 거지. 나는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 적 없다." 라고 오리발이나 내밀며 변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잘 먹힌다. 가해 병사들이 죄질이 나쁘면 교도소 직행 코스도 타고 호적에 빨간줄도 긋는데 가해자 간부들은 대부분 보직해임으로 끝나며, 기껏해야 군대에서 완전히 퇴출당하기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게 그 증거다. 물론, 상병장들도 눈치가 빠르니까 이런 부조리한 행태를 잘 알아서 요즘 부대는 간부가 군기 잡으라고 시켰다는 명분으로 무작정 후임들을 구타하거나 가혹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차피 잘못은 상병이나 병장들이 전부 다 덤탱이로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행태는 장군급으로 올라가도 다 똑같다. 군사재판 1심은 군대가 짜고 치는 고스톱에 가까워서 그렇다.
이런 곳은 가끔 군의관이 들를 뿐이고, 의무병과 의무대 관리자인 초급 간부 혼자밖에 없는데 이 사건에서는 그 유일한 초급 간부가 사건에 가담했다. 덕분에 해당 부대를 장악한 이찬희 병장이 부대를 사조직화해서 왕 노릇을 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결국 이 끔찍한 학대에서 윤 일병을 구해줄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하다못해 군의관이 단 한 명이라도 상주하는 부대였거나 지휘관이 제대로 감시를 했다면 상황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5.2. 병력 관리의 문제[편집]
본부 포대장인 김ㅇㅇ 육군 중위[68] 는 윤 일병이 처음 배치되었을 때 한 번 정식 면담을 하고 이후에 몇 번 더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폭행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포대장인 김 중위는 2014년 8월 4일 국방위원회의 국방부 현안보고에서 전입한 당일에만 개인적인 면담을 했다고 했다.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국회 국방위원회 김성찬 위원은 육군참모총장 권오성 장군을 향해 "간부들이 부대 관리하는 기법도 모른다"며 질책하기도 했다.[69] 알고 보니 본부 포대장은 학군 출신이며, 다른 부대에서 문제가 생겨서 전입 왔던 사람이라고 한다.
윤 일병이 받은 괴롭힘이 가해자들이 면회까지 막을 정도로 티가 날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몇 번이나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말은 책임회피용 거짓말이며, 병력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육군도 보직을 박탈하고 징계를 내린 것이다. 부대 자체의 문제에서 언급했듯이 같은 막사를 쓰던 포대의 포대장과 본부 포대장 중 누가 관리 책임을 맡을지도 정해지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문제의 유 하사 말고는 관리 책임자가 아무도 없이 방치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게다가 근무지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본부하고 떨어진 부대 관리를 초급 간부인 "하사"를 넣었다는 점도 문제이다. 사건의 피고인인 유경수 하사의 경우 이찬희 병장보다 나이도 어렸고, 근무 경험 부족으로 병 관리가 개판 5분 전이었다. 그래서 보통 본부하고 떨어진 부대 관리는 경험이 많은 "중사" 이상급이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의무병으로 근무했던 사람에 의하면 전에는 "상사"가 의무병을 관리했다고 한다. 보통 본부하고 떨어진 부대나 독립부대의 책임자는 일반적인 부대보다 높은 계급을 배치하게 되어 있다. 육군의 경우 사단급 이상의 부대의 직할중대 중대장은 일반적으로 대위가 맡게 되어 있는 것과 달리 소령이 보직된다.
또한 수송부대 소속 앰뷸런스 운전병이 의무대에서 내무 생활하는 것 자체도 문제가 있다. 아마 응급대기를 핑계 삼아 의무대 내무실로 눌러 앉은 것으로 추정된다. 실질적으로 앰뷸런스 운전병인 이찬희 병장은 의무대에 대한 지휘권이 없는 고정 파견병이었다. 지휘권이 없음에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생활반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보통 육군 독립중대 등의 경우에도 의무병이나 운전병 등을 한 명씩 고정적으로 파견시켜 눌러앉힌다. 5분대기조 출동 때 5분 이내로 위병소를 나가야 되는데 운전병이 오기까지 기다릴 수는 없으며 단순한 찰과상이나 미열 같은 가벼운 증상인데 의무병이 없어 수~수십 km 떨어진 의무대까지 가야 되는 것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타 부대 병이 파견 부대병들과 선후임 관계를 맺는지, 그냥 아저씨로 선을 긋는지는 부대마다 다르다. 해당 부대가 후자 같은 분위기였다면 타 부대 아저씨에 불과한 이찬희 병장이 선동 이상으로 폭행을 주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다른 한 가지 관리상 문제로, 당시 시행되었다는 신규 전입병을 부대장이 챙기는 제도에 헛점이 있었다. 병 복무 기간이 단축된 결과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전입한 신병이 부대에서 이등병 생활을 하는 기간이 많이 짧고 바로 일등병이 되는 관계로 신병 생활을 부대 고급 간부가 눈 여겨보도록 한 이 제도의 보호망 아래 있는 부대 적응 기간이 짧아졌다. 그리고 윤 일병은 의무병이라 신병 훈련을 마친 뒤 국군의무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느라 그만큼 이병 계급으로 실무 생활을 적게 했기에 한 달 정도만 그 대상이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5.3. 신고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편집]
불만사항이나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쓰는 마음의 편지[70] 제도. 지금은 제대로 작동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 때는 이름만 그럴싸할 뿐이고 실제로 간부들이나 선임들이 필적을 대조하며 색출해서 오히려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주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마음의 편지가 위력적인 물건으로 바뀌어 가는 이유 자체가 이 사건 때문이다. 당시에는 리그베다 위키의 소원수리 항목에 적당한 말이나 적고 되도록 쓰지 말라는 서술이 있었을 정도였다.
3군사령부 조사 결과 이 부대는 더 심각했는데, 이찬희 병장이 윤 일병에게 소원수리를 쓸수 없게 협박하였으며[71] 사건 목격자 김 일병(당시 의무대 환자) 말에 따르면 28사단 자체 소원수리나 마음의 편지를 하면 못 내려가게 하고 선임들이 있는 곳에서 쓰게 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28사단 간부들은 병들 관리에 무관심했고 병들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고 물자 취급을 해 왔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72] 따라서, 윤 일병은 방어수단 및 도움 받을 곳이 전혀 없었던 셈이다. [73]
신고할 수 있고 그로 인해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의무대를 들락거리던 목격자들이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해당 부대의 간부인 유 하사는 알고도 가만히 있고, 다른 지휘체계에 보고하면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봐' 신고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당장 아래의 신고자가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자신에게 피해가 온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찬희 병장에게 폭행당한 병사들의 진술도 왜 구타를 당할 때 신고하지 못하고 가해자가 된 피해자로 변했는지 보여준다. 이 모 일병은 왜 폭행을 보고하지 않았냐는 수사관의 말에 보고하면 관심병사가 된다는 말을 들어서라고 진술했다. 지 상병은 아예 소원수리로 찌른 선임이 자대로 복귀해서 더 힘들어진 경험이 있었다. 해당 법정 진술이 인용된 글.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소원수리를 하라는 동료의 권유를 거절하기까지 했다.
이찬희 병장 본인도 소원수리를 한 사실이 부대 내에 알려져서 전출을 간 케이스다. 소원수리의 내용이 어떤가에 대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선임의 말이 있으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비밀이 보장된다고 해 놓고 소원수리를 누가 했는지 다 알려지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당시 이 사건을 본부 포대장에게 처음으로 알렸던 김재량 상병(사건 당시 기준, 육군 병장 만기전역)은 그 이후 간부들이 모욕하거나 부대 업무에 훼방을 놓는 등 엄청나게 시달렸다고 한다. 자기가 장기복무 짤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74] '누가 봐도 명백한 엄청난 범죄 행위'를 국방부나 육군본부가 아닌 자대 직속 상관인 본부 포대장에게 '지휘체계를 지켜서' 보고했는데도 이 꼴이다. 간부 탓만 할 수도 없는 게 전출을 간 이후 병들도 선임 취급 안 하는 것은 예사, 대놓고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왕따로 지냈다고 한다. 사실 육군 병의 경우[75] 전출을 갔다면 부대 해체를 제외하고는 문제 일으켜서 전출되었을 것이라는 선입견, 그리고 선임이 늘어나는 것을 싫어할 수 밖에 없는 상황 때문에 선임 대우를 못 받는 것은 흔하다. 문제는 따돌린 이유가 '이 사건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선임 취급 안 하고 따돌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신고는 그냥 부조리 신고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죽인 사건을 신고한 것이었으니 아무리 똥군기를 좋아해도 용납하지 않아야 정상이었고 오히려 이 병장을 욕해야 했다. 즉, 전출 부대 병 전원이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의미이고 이들은 사회에서 완전 배제시키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상황이다. 그냥 사회 전체적으로 내부고발자 보호 체계가 얼마나 허술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군 내부의 지휘체계를 지켜서 내부에만 보고했으므로 내부고발자조차 아닌데도 이렇다.
5.4. 부적격 인력의 입대?[편집]
이는 국군의 전반적인 문제로 본 사건과는 별 관련이 없다.
국군의 온갖 열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사고가 생각보다 적은 건 정상적인 사람들을 입대시키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필자에 대해서는 조직 생활 적응 못한다는 말은 나와도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잘 안 나오는 것이다. 특히 조폭, 범죄자 출신 등의 비도덕적 인력의 입대는 원천봉쇄되며, 이들은 대부분 보충역이다. 운 좋게 실형을 받지 않아 입대한다고 해도 폭력 등으로 처벌을 받은 것이 발각될 경우 보충대나 입소대에서 걸러내거나 조기 전역시킨다.
일부에서는 복무 기간이 짧아지면 이런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주장하기도 했으나 복무 기간이 짧아지면 같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입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역 판정률이 더 올라가 복무 부적합자를 가려낼 수 없게 되니까 그것은 틀린 주장이다.[76] 예를 들어 동일한 병력50만/병사30만을 유지하기 위해 현역판정률 6~70%면서 24개월 복무할 때와 8~90%면서 18개월 복무할 때 어느 편이 장애인 징병의 위험성이 줄어들겠나? 당연히 6~70%에 24개월 복무일 때다.[* 1990년 현역판정률이 64%, 1993년 현역판정률이 72%였다. 이 당시 복무기간이 4개월 줄어들었고, 바로 다음해인 1994년부터 신체검사 기준이 급격하게 막장화되었다. 방위병이 폐지되고 공익요원과 상근예비역 제도가 신설된 것도 이 때이다.] 병 생활 환경을 개선하고 합당한 봉급을 지불하는 것은 이것과는 별도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실제로 국군도 1980년대 2년6개월 복무했을 때는 현역 판정률이 60%도 채 안되었는데[77] , 1년 9개월 복무하게 되면서 90%에 가까운 수치를 보이고 있다. 보수 쪽 정치인들이 복무기간 늘리자는 말을 그냥 한 게 아니다!
사실 이찬희 병장이 자신의 부모가 조폭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패드립을 친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을 인간 쓰레기로 소개한 것과 다름없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건 조사 결과 이찬희 병장의 아버지는 실제 조폭도 아니며 평범한 사람으로, 단순히 후임병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허세를 부렸다고 한다. 사회생활에서도 툭하면 아버지가 조폭이라고 허세를 부리고 다녔다. 심리검사에서 "자신은 물론 타인을 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왔는데도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그대로 놔 둔 것이 오히려 화를 키웠다. 그러나 이찬희 병장 본인도 그 이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으며, 가해자 모두 대체로 사회에서는 특별히 문제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적격 병력들이 입대해서 문제가 커졌다는 주장은 군 가혹행위의 구조적 문제를 개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축소시키려는 의도로 사용될 수 있다. 당장 이찬희 병장 본인도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돈을 벌기 위해서 이모부가 운영하는 세탁기 부품회사에서 영업직 운전기사로 일했으며 입대 전에 4000만 원을 모으는 등 그 또래에 비해 성실하다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었다. 지금은 살인마 취급받는 흉악 범죄자로 전락한 이찬희 병장이지만, 대다수의 병들처럼 중~대대급 이상 부대에 배치됐거나 관리를 제대로 받았다면 '좀 폭력적인 성향의 병'정도의 취급만 받고 평범하게 보내다가 평범하게 제대했을 가능성도 높다. 나머지 3명의 가해자는 아예 문제랄 것이 나오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즉 이 사건은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서 그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지, 군이 부적격 인력을 마구 입대시켜서 벌어진 사건이 절대 아니다.
이찬희 병장의 심리검사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전문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은 것도 아니고 군대의 모든 검사가 대개 그렇듯이 그냥 형식적인 검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은 이찬희 병장은 자기보다 나이 어린 선임들에게 "할배"로 불리고 괴롭힘을 당해서 심지어 죽이고 싶다고 토로한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나이 어린 동생들에게 집단으로 능욕당하고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무조건 참고 있는 상태였다면 오히려 심리상태가 분노로 뒤틀려 있는 게 정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심리 이상은 그냥 입대를 하고 나중에 심리 이상이 심각해지면 그린캠프 가서 치료를 받고 그래도 안 되면 현부심 받으면 된다.
애초에 군대의 심리검사라는 것이 소원수리처럼 자신의 문제를 딱히 해결을 해 줄 만한 것도 아니라서 대부분은 그냥 소원수리 작성하듯이 심리검사도 적당히 괜찮다고 체크하는 경우가 많다. 소원수리와 마찬가지로 괜히 솔직하게 응했다가 귀찮아질 수 있기에... 괜히 문제 생기면 "관심병사여서 그렇다."는 식으로 책임이 떠넘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군 생활이 적성에 맞는 타고난 것이 아닌 이상 딱히 흥미가 없는 상태에서 군대로 강제징집된 상태라면 심리 상태가 어느 정도는 불안정해질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으므로 심리검사에서 조금 이상하게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복무 부적격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찬희 병장도 훈련병 시절에 작성한 것에는 긍정적인 내용이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훗날 불안정한 심리 상태가 된 것은 나이 어린 선임들의 가혹행위, 피해의식, 열등감[78] , 타고난 공격성 등 모든 것이 뒤틀려 발생한 비극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군대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있었는데, 바로 강남대 회화디자인학부 교수 가혹행위 사건이다. 그나마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장애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 악마성은 이찬희 일당에 비해 못할 것이 없다.
5.5. 전투형 군대 전환 방침의 부작용[편집]
YTN에서는 북한의 도발을 억제시키기 위해서 전투형 군대로 전환시키는 방안을 내세워서 안보를 크게 강화한다며 제대로 된 개선 없이 무작정 병들과 초급 간부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였으며 그로 인해 병들과 초급 간부들의 피로 누적도가 크게 높아지고 병 관리에 대한 부실이 커진 게 원인이라고 보도했다.
이게 맞는 말인데, 군의 전투력이 강해지려면 뛰어난 성능의 화기와 그 운용 노하우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간부와 병들간의 연계 능력과 보급, 병참 능력까지 전반적으로 상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강군! 전투형군!"이라는 방안을 이루어 내라는 강요를 해 대니 밑에서는 그저 병들과 그들과 함께 있는 초급 부사관 및 장교들만이 개고생을 하게 된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 수 있다. 전시 전투 상황은 훈련 상태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사기이다. 사기가 바닥인 상태에서의 싸움은 필패나 다름 없다. 그런데 강한 군대를 만든답시고 피로 누적으로 사기를 크게 저하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가혹행위에 대한 관리가 약해졌다는 것이다.
이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전역한 예비역들이 이 사건을 접하고 "우리 부대는 안 그랬는데?"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적발된 구타 사고가 꽤 되지만 이 사건 수준으로 극악무도한 악행이 벌어진 일은 많지 않았다. 심지어 쌍팔년도 군대조차 이렇게까지 끔찍한 사례는 별로 없다. 그러나 명심하자. 내가 모른다고 해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그가 복무했거나 그 가까이에 있던 부대에서 의문사나 사망사고가 발생했는데 전혀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군대 속 작은 사회란 말이 있을 정도로 병영 문화 개선의 손길이 닿지 못한 곳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에 지금도 쌍팔년도보다 못한 막장 부대는 구석구석에 조금씩 존재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이 사건을 저지른 의무대일 것이고. 당장 방 하나에 70~80명씩 지내는 중대 단위 침상형 생활관임에도 같은 방을 쓰는 다른 소대의 내무 부조리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심하게는 아직도 1980년대 수준의 화장실을 쓰는 곳도 있다고 한다. 즉,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군 전체로 일반화하려는 건 무리가 있다. 우리 때는 안 그랬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안 그런 부대가 더 많다.
그리고 이 사건도 윤 일병이 화기애애한 내무반에서 만두를 잘못 먹다가 죽은 걸로 처리될 뻔했던 걸 생각해 보자. 이 사건은 원래 단순질식사로 끝날 확률이 높았다.
- 만약 윤 일병이 변호사를 삼촌으로 둔 어느 정도 법학 관련 지식이 풍부한 집안이 아니었다면?
- 그래서 윤 일병의 상태를 보고 의혹을 품을 수 있는 친족이 없었더라면?
- 목격자가 '너만 비밀 지키면 된다'는 지속적인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여 양심선언을 포기했더라면?
- 그리고 가해자 중 하나인 지정현 상병이 처음에 쫄아가지고 목격자 한테 사실 대로 구타 때문에 살해 당한 것이라고 애기하지 않았다면?
- 군인권센터가 국방부의 조작, 은폐, 축소 등 갖가지 방해공작에 포기 하였다면?
이처럼 지금까지 말한 것들 중 한둘이라도 빠졌다면 밝혀지지 않고 그대로 묻혀 버렸을 수도 있었다. 군대가 이전에 비해서 많이 투명해졌다는 21세기에도 자칫하면 조용히 넘어갈 뻔한 사건이었다. 밑에도 나와있지만 군 의문사가 왜 발생하는지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인 것이다. 하물며 은폐가 비일비재하고 투표권, 소원수리조차도 없던 시절이라면 어땠겠는가? 만약 원래대로 '화기애애한 내무반에서 만두 먹다가 목에 걸려 질식사'한 것으로 처리되었다면 윤 일병 역시 유가족들이 시신의 상태를 보고 의문을 제기해도 극소수의 군 인권단체 관련 사람들을 제외하면 관심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잊혀져 세월만 흐르는 수많은 군 의문사 피해자 중 하나로 끝났을 것이다.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았다면 그 인근 부대의 평범한 병들은 그런 사건이 있었단 것도 모른 채 제대한 후 훗날 군 문제 관련 기사를 보고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같은 말을 하게 됐을 것이고. 오죽하면 군 의문사 유족들이 "잔인한 얘기지만 윤 일병이 부럽다. 그래도 다 밝혀지지 않았나"라고 이야기할까.[79]
병도 그렇고 부사관도 그렇고 장교도 그렇다. 군대는 각 계층마다 전부 다 작은 사회이다. 장교의 경우는 육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육군3사관학교, ROTC, 학사장교, 간부사관 등 각 출신이 곧 파벌이다. 부사관들도 장교들만큼은 아니나 민간에서 시작한 부사관후보생, 특전사 출신, 병 출신 신분전환자 혹은 재입대자, 전문하사 등의 사이에 약간의 알력이 존재한다.
6. 국방부의 조직적인 사건 축소/은폐[편집]
국방부도 방관자들이다. 아니, 공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도로 조직적인 은폐 공작을 벌이다 들통나 놓고도 국방부는 반성은 커녕 "조사는 정당했고, 군인권센터에서 끼어들어 물을 흐렸다"라는 망언으로 일관했다.
6.1. 살인죄 적용 여부[편집]
사건이 알려지기 이전의 1~3차 공판 관련 기사를 보면 가해자 중 1명인 하선우 병장의 변호인 쪽에서 오히려 살인죄 적용을 주장했음에도 무시했다고 한다. 다만 해당 변호사가 살인죄 기소를 주장한 것은 이찬희 병장 한 명뿐이고, 실제로 대법원에서도 그런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다만 군 검찰이 살인죄를 선별하기 어려워서 4명 모두 기소할 수도 있다고는 했다. 가해자 측 변호사라고는 하지만 사건 공론화를 시도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유가족들이 진실을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고심 끝에 군인권센터와 접촉하였다고 한다. 하 병장의 아버지마저 수사 기록을 보고 자기 아들이 형량을 더 받는다 하더라도 이찬희 병장에게는 살인죄를 적용하는 것이 맞다고 할 정도였다.
공범 하 병장 변호인의 말에 따르면 1~3차 공판이 열리는 동안 피해자 유가족들은 군 검찰로부터 사건 수사 기록을 넘겨받지 못해 군인권센터를 통해 사건 수사 기록을 받기 전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사건이 공개되기 전 재판 과정에서 군 검찰과 부검의가 말을 짜맞추는 등 군에서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축소, 은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검찰이 사건을 은폐하고 피의자 변호인이 사건을 파헤치는 황당한 사건이 되었다. 하 병장의 변호인은 군이 질식사로 은폐하려는 것을 걸고 넘어지기도 했으며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임 병장의 변호인일 때 유가족 대리인으로 알게 된 군인권센터에 수사 기록을 넘겨주었다. 장윤선의 팟짱에서 변호사 본인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사건의 잔혹성도 잔혹성이지만, 이런 사건을 대놓고 은폐하려는 군의 태도도 황당했다는 듯.
가해자인 이찬희 병장의 폭행으로 윤 일병이 죽은 게 맞다며 이찬희 병장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라고 공범들이 법정에서 진술했다고 한다. 공범들의 직접적인 증언에도 불구하고 군 검찰이 살인죄가 아닌 상해치사로 기소했다가 최근에 여론에 밀려서 다시 살인죄의 고의성을 밝히기 위해 고심한다는 걸 보면서 국민들의 반응은 매우 싸늘해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들을 윤 일병의 진짜 사망 원인인 '구타로 인한 쇼크사'를 적용해 처음부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로 기소했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다.
군에서는 가해자들에게 국민의 여론을 감안해서 살인죄를 적용한다고 하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검토 중이라고.
더욱 심각한 것은 의무병은 의료보건 계열 혹은 생물학 계열 전공자 혹은 자격증 소지자만이 지원할 수 있는데 가해자 의무병들 모두 보건의료 계통의 전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역을 하면 당연히 환자를 다루는 일을 하게 됐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이 벌어지자 대한민국 경찰청에서도 의경 내 폭행과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점검에 나서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 이후 폭행과 부조리를 피해서 의경으로 지원자가 몰리는 반사이익을 봤다.
2014년 8월 5일, 이찬희 병장에게 강제추행죄가 추가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오전 10시에 28사단 보통군사법원에서 시작한 공판에서는 이 사건을 3군사령부로 넘기기로 결정했다. 이 공판에서 가해자들이 고개를 떨구거나 하지도 않고 표정 변화도 없이 태연한 태도로 일관했다는 소식이 알려져서 더욱 울분을 샀다.
군에서는 가해자들에게 국민의 여론을 감안해서 살인죄를 적용하겠다고 검토만 하다가 2014년 9월 2일 오전 11시부로 3군사령부 검찰 측에서 살인죄가 적용하였다. 가해자 6명 중 4명에 대해 살인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할 수 있다고 보고 우선적으로 '살인죄', 예비적으로 '상해치사죄'를 적용하는 것으로 공소장을 변경한 것이다. 3군사령부 검찰부는 "4월 6일 범행 당일 윤 일병은 극도로 신체가 허약해진 상황에서 많은 이상징후를 보였다는 것을 피고인들이 인지하고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잔혹한 구타가 계속됐으며, 대부분의 피고인들은 대학에서 의료 관련 학과 재학 중 입대한 의무병으로 일반인보다 우월한 의료 지식을 갖추고 있어 지속적인 폭행과 가혹행위로 사망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며 살인죄 적용 배경을 설명했다. 또한 유경수 하사와 이찬희 병장, 하선우 병장이 휴가 중 성매수를 한 혐의도 공소장에 추가되었으며[80] 지휘계통상의 직무유기 혐의와 관련, 대대장 등 5명의 지휘관과 간부를 입건하기도 했다.
2014년 9월 16일, 5차 공판에서 재판부가 가해병 4명에 대해 우선적으로 '살인죄', 예비적으로 '상해치사죄' 를 적용하는 공소장 변경을 받아들였다. 2014년 10월 24일 결심 공판에서 이찬희 병장은 사형, 나머지 3명은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10월 30일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도의적으로는 분통할지 몰라도 형법상 살인죄의 구성요건과 그외 치사와 관련된 죄의 구성요건을 알아보면 알겠지만 단순히 사람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것만으로 살인죄가 적용될 수는 없다. 살인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살인의 고의인데, 재판부는 이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해치사가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비록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잔인한 폭력을 장기간 행사한 가해자들의 죄질이 워낙에 악질인 데다 수많은 범죄자들이 가석방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에[81] 국민들이 군대와 법에 대한 불신을 키우게 되었다.
다만 2심에서는 살인죄가 인정됐고 또 가석방을 하더라도 주범인 이찬희 병장은 죄질이 나빠서 적어도 70% 이상, 그러니까 최소 25년은 복역해야 사회 복귀가 가능할 것이며 이후에도 살인자의 낙인이 찍혀 평생을 회한 속에 살 것이라는 게 위안이긴 하다. 게다가 교도소에서 또 다른 수감자를 장기간 구타하다가 걸려서 검찰에 송치되는 등 사고를 계속 쳤으니 형량의 대부분을 복역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 사실상 물 건너갔다. 무기수의 최소 복역 기간이 법적으로는 20년이고, 보통 여기에 10년 정도를 더하기에 실질적으로는 30년 정도다.
법학적인 관점에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이 사건 그 자체인 상황에 대한 법률적 해석인데 다음과 같다.
법률은 이런 상황에 대한 답을 갖고 있다. 형법이란 것이 그렇게 어설픈 것이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대입할 수 있도록 수천 가지 가능성을 가정하고 만들어지는 것이 형법이다.여러 명의 사람이 한 명을 상대로 조금씩 나눠 때렸는데(또는 수천명의 사람이 한 명을 상대로 1대씩만 때렸는데) 맞은 그 한 사람이 사망했다.
살인죄는 누구에게 적용될 것인가?
상해의 고의로 사망의 결과가 발생했으며, 상해한 사람은 여러 명이지만 사망의 결과를 일으킨 사람이 누군지는 모른다면 상해죄의 동시범이 적용되어 상해를 한 사람 모두가 상해치사죄의 공동정범이 된다.
6.2. 유가족과 핵심 목격자의 만남을 조직적으로 방해[편집]
군 검찰은 3차례나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핵심 목격자인 의무대 입원 환자 김 일병을 법정에 부르지도 않았고 증인은 달랑 2명 출석하는 등 노골적으로 상해치사로 마무리하려고 했다. 무엇보다 유가족 측은 군 검찰에 핵심 목격자인 김 일병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김 일병 측도 유가족과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요청했음에도 대놓고 묵살했다. 김 일병은 3군사령부 보강수사에서도 유가족과의 만남이 거부되었고 군인권센터를 통해서야 유가족과 핵심 목격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군 의문사가 왜 발생했는지 정확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6.3. 국정감사[편집]
2014년 10월 7일, 국정감사에서 군 검찰 뿐아니라 육군과 국방부 전체가 윤 일병 사건의 조직적인 은폐·축소에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윤 일병이 사망한 4월 7일 오후 4시 30분으로부터 2시간 30분 후인 저녁 7시께 육군이 언론 브리핑을 하면서 사망 원인을 "음식물이 기도를 막아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어 발생한 뇌 손상"으로 명시했다. 사고 당시 "숯불 통구이 등 9개 품목으로 회식 중이었다."며 우발적인 폭행 사건처럼 브리핑했다.[82] 사망 직후 발부된 의정부 성모병원의 사망진단서에는 직접 사인이 '미상'으로 적혀 있었는데 육군은 병원의 사망진단서를 무시하고 "음식물이 기도를 막아 산소 공급이 중단되어 발생한 뇌 손상"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 같은 보도자료를 당시 육군참모총장 권오성 장군을 중심으로 한 수뇌부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권오성 장군도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으며 육군 수뇌부가 사건을 은폐, 축소하기 위해 총동원한 사실로 드러났다. 이 사실을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를 하지 않고 무려 3달 동안 쉬쉬한 것이다. 이로 인해서 군 검찰부는 사건을 우발적인 폭행으로 몰고가기 위해 윤 일병 가족들의 현장 검증[83] 을 대놓고 막았고 육군의 수뇌부가 총동원되어 국민과 윤 일병 가족을 속이기 위해 축소, 은폐한 사실이 드러났다. #
6.4. 사건 축소/은폐 가담자 무혐의 처분[편집]
2014년 9월 25일, 윤 일병 유가족은 조직적으로 사건을 축소/은폐한 가담자들에 대해 고소했다. #
- 육군 28사단 헌병수사관: 허위 공문서 작성 혐의. 윤일병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나 질식사로 조작.
- 28사단 헌병대장: 직무유기 혐의
- 28사단 검찰단: 사건 축소/은폐 혐의
- 국방과학수사연구소 법의관: 허위진단서 작성. 최초 진료를 본 민간 의사가 이미 사망 상태로 내려졌음에도 허위 진단을 내림.
- 의무지원관 유경수 하사: 공무집행방해, 공무원자격사칭 혐의
이후 대법원 앞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은 사건 축소/은폐 가담자들을 다시 고소했다. 여기서 윤 일병 어머니는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고 밝혔다.
6.5. 험난했던 국가유공자 지정[편집]
2015년 5월, 윤 일병 유족들은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 지정을 신청했다. 언론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2014년 8월 초만 하더라도 영내 폭행으로 자살한 군인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JTBC 단독보도에 따르면 유족들은 윤 일병이 국가유공자보다 한 단계 낮은 보훈보상대상자로 지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여기서 더욱 충격적인 것은 장교가 대놓고 대필로 작성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명백한 공문서위조죄에 해당된다. 해당 장교는 사실을 인정했고 유족들이 보는 앞에서 썼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니 군이 대놓고 사건을 축소/은폐한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국가보훈처 직원의 말은 아주 가관인데, 국가 수호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경우[84] 라고...기사 1, 기사 2.
이후 유가족은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해야 할 듯 싶다. 하긴 예전에도 군이 암 환자 방치하다가 사망해서 그 유족들이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국가유공자 신청했는데 군이 거부하면서 소송으로 겨우 인정받은 사례도 있다.
윤 일병의 유가족은 해당 결정에 대해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을 제기하였으나, 2016년 2월 29일 행정심판은 기각 재결되었다. 그리고 2016년 5월 25일, 유가족은 윤 일병의 국가유공자 인정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후 국가보훈처는 윤 일병의 복무부대에서 2017년 11월 17일 법원에 제출한 사실조회 회신서와 2017년 12월 6일 현지 사실조사를 통해 윤 일병이 의무병으로서 주중과 주말 구분 없이 상시 대기 상태로 직무를 수행한 것을 확인하였고, 보훈심사위원회는 윤 일병이 순직군경에 해당된다고 재의결하였다.
그리고 2017년 12월 28일 보훈심사위원회는 윤 일병에 대해 국가유공자로 결정 처분하였으며, 2018년 1월 4일 국가보훈처는 윤 일병의 유가족에게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하였다. #[85]
6.6. 국군양주병원의 진료 차트 조작[편집]
윤 일병이 처음 연천군 보건의료원에 도착할 당시에는 응급처치로 호흡과 맥박이 한때 돌아왔다. 그래서 이때 의료진은 바로 민간종합병원으로 후송할 것을 권유했지만 군은 사건을 축소, 은폐하기 위해서 이를 대놓고 묵살하고 국군양주병원으로 거쳐서 1시간가량 머문 뒤에야 민간 종합병원으로 옮겨졌다. 국군양주병원 입원 당시 이재혁 육군 군의대령 및 담당 군의관인 이모 대위와 김모 대위가 민간병원 진료 차트에도 없는 '기도와 인두에 구토와 음식물 많았다고 함'이라고 언급했다. 조직적으로 사건 축소/은폐 정황의 명확한 근거가 발견된 것이다. 이 차트를 본 경기도 의료원 응급센터장이 "도둑이 제 발 저려서 빨리 쓰고 싶은 걸 썼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황이죠. 이게 지금 사인을 질식사로 가고 싶은 거 아니에요"라고 말할 정도니. 국가인권위원회도 이 부분을 수사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군이 협조하지 않았다. #
사건이 발생한 의무부대부터 진료 기록을 위조한 의무부대까지 민간에서 의사 등 의료 자격을 취득하고 복무 중이던 자들 중 어느 하나도 처벌 받지 않고 전역했다는 점이 이 사건의 또 다른 통탄할 점이다.
7. 사건 여파[편집]
자세한 내용은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사건 여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사건 이후[편집]
8.1. 선진병영 정책 도입 & 관심병 관리제 개선[편집]
기존의 보호 관심병사 관리 제도는 병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병들을 A급(특별관리), B급(중점관리), C급(기본관리) 등으로 구분해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칭 자체가 문제아로 인식된다는 시각이 매우 강했고 사람에게 등급을 부여해 인권침해 소지가 있었다. 또한 등급마저도 지휘관 재량으로 선별하는 단점이 있었다. 이에 국방부는 2015년 2월 16일 장병 병영생활 도움제도로 변경했다. #
또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병영문화 개선을 위해 병사 수신용 공용 휴대폰과 같은 병들의 전자기기 사용 및 반입 허용의 계기가 되었다. #
8.2. 이찬희 병장의 국군교도소 내 추가 범행[편집]
이찬희 병장은 살인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뒤에도 정신을 차리긴 커녕 국군교도소에서 동료 수감자들을 상대로 또 폭행[86] 과 성희롱[87] , 가혹행위[88] 를 일삼아 군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고 한다. #
SBS가 피해를 입은 전 수감자의 증언을 단독 보도한 내용에 의하면 국군교도소 안에서 나이부심+형량부심을 부렸고[89] 자신이 저지른 가혹행위로 숨진 윤 일병을 모욕하다 못해 유족까지 조롱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윤 일병의 어머니는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이찬희 병장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을 원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
아래는 피해 수감자가 들은 이찬희 병장의 발언이다.
안녕. 나 그 윤일병 사건 주범 이찬희야. 만나서 반갑다.
윤 일병 걔도 너처럼 대답을 잘 안했는데 너도 걔 같다. 너도 당해볼래? 너도 걔처럼 해줄까? 걔가 죽어서 내가 지금 이렇게 됐다.
- 국군교도소 내 피해 수감자에게 이찬희 병장이 한 발언
피해 수감자마저도 소름이 끼쳤다고 말할 정도였다. 또 국군교도소의 허술한 수감자 관리에도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수감자 관리를 군사경찰 간부들이 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군사경찰 병들이 관리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찬희 병장이 다른 수감자에게 위협하고 소리 지르고 욕하는 상황이었는데도, 심지어 창문 너머로 피해자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그냥 지나갔다고 한다. 사실 병 입장에서 보면 의무 복무하는 상황이고 권한도 별로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이찬희 병장을 관리하려 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원래 이런 문제 때문에 교도병은 수감자와 적극적으로 접촉하지 않고 직접적인 관리는 부사관급 이상의 교도관이 맡게 되어 있는데 그동안 수감자 중에 병 계급으로 이찬희 병장처럼 초장기형을 받은 사례가 없었다 보니 그런 측면도 있다. 사실 명목상 적극적인 접촉은 부사관이 하게 되어 있지만 교도소 내에서 적지 않은 통제를 근무병이 직접 해야 하기 때문에 군사경찰의 경우도 중요한 건(재판 진행 같은)에 대해 대화를 하지 않을 뿐이지 충분히 수용자들과 적극적으로 접촉한다.
이외에 이찬희 병장을 국군교도소 혼거방에 수감한 것부터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징역 35년이면 양형 기준상 아무리 관대하게 잡아도 28~30년은 교도소에서 살아야 하니까 사실상 중간 출소가 가능하다는 것 빼고는 무기수나 다를 바가 없다. 보통 수감 기간이 구속 기간을 포함한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수감 중에 이런 짓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이상 형량이 증형되었으면 증형됐지 결코 감형되지는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찬희 병장의 형량은 전술한 35년에서 최소 1년이라도 늘어난다는 가정 하에 결국 이찬희 병장은 1988년 생인 관계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멸망해서 법 집행을 할 수 없게 되거나 미국식 엄벌주의를 정면으로 도입해 교도소가 진짜 포화 상태가 되지 않는 한 만 60살이 되기 전에는 어지간해서는 석방될 일이 없을 것이다. 유기징역의 상한선이 늘면서 법조계에서는 무기수들의 가석방이 봉쇄되는 걸 막기 위해 장기 징역의 가석방 기준을 현재의 80% 안팎에서 50~60% 정도로 완화하고 무기수도 과거처럼 가석방 자격 부여 시점에서 +10년이 아니라 그냥 자격이 부여되면 가석방을 시켜 주는 쪽으로 가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찬희 병장처럼 대형사고를 치는 자들 말고 얌전히 지내는 자들의 경우다.
그런데 국군교도소 수감자는 사형수[90] 와 장교나 장기부사관, 군무원 정도를 빼면 전원 1년 6월 이하의 실형을 선고받은, 즉 단순 폭행사범이나 가혹행위범, 성추행범 혹은 중대한 군기 위반 행위자 등 소위 '잡범'이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데다 어쨌건 빨간줄 긋더라도 빠른 사회 복귀가 가능하기에 막나가기 어렵다는 점을 이찬희 병장이 악용했다는 것이다. 원래 장기수는 미래가 거의 없기 때문에 교도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형수가 그나마 교도소 내에서 통제되기 시작한 게 역설적이게도 사형 집행이 동결된 1998년부터다. 이들이 사형은 당하지 않지만 교도소에서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 고분고분해졌고, 무기수나 20년 이상 받은 수감자들이 되려 흉악 범죄를 저지른 조폭들조차도 감히 건드리지도 않는 악질인 경우가 많다. 방장도 이들을 손 대지는 못하고 그냥 사고 못 치게 막는 수준이며 대부분 독방에 수감되고 교도관들도 일반 수감자들과는 태도를 달리한다. 그 흉악범들에게도 이렇게 두려운(혹은 꺼리는) 존재인데 잡범들을 가둬 놓는 교도소 혼거방에 넣었으니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뻔하지 않을까? 피해자가 지적장애인으로 확인되긴 했지만 지적장애가 없었다고 해도 결국 똑같이 당했을 것이다.
또한 SBS 추가 보도에서 국군교도소 내에서는 라면 취식이 금지임에도 불구하고 이찬희 병장은 라면을 좋아해 몰래 먹는 건 물론[91] , 흉기로 사용될 수 있어 반입이 엄격히 금지된 가위나 손톱깎이도 쉽게 빌리는 등 수감자 관리가 매우 허술했다. 특히 이찬희 병장이 가위를 가지고 들어갈 때 다른 수감자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고 24시간 계속 경계했다고 한다. 국군교도소 안에 진정함이 있지만 아무도 그 존재를 알려주지 않았을 정도니, 결국 국군교도소 관리 소홀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
이 와중에 이찬희 병장은 정신 못 차리고 오히려 피해자 중 한 명을 맞고소한 사실이 밝혀졌다. # 그러나 당시 목격자들은 전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고 심지어 같은 방 수감자에게 허위 진술까지 요구한 것이 밝혀졌다. 허나 수감자들 중에서는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고소 당한 피해자는 지적 능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문제도 있다. 피해자의 지능이 떨어져서 대응을 제대로 못 한다는 말도 있는데 보통 이런 상황에 내몰리면 지능이 낮건 높건 피해자의 심리 상태가 되면서 결국 이찬희 병장 같은 악마들에게 당하게 되어 있다. 즉 피해자가 지능도 낮아서 대응을 못 한 것이지 지능이 낮아서 대응을 못 한 것이 아니다. 이 건도 황당한 것이 그가 국군교도소에 들어갈 당시 피해자의 지적장애를 처음 파악한 것이 피해자의 국선 변호사였다. 주먹구구식 입대 검사 탓에 입대 시 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은 물론 교도소 입소 전의 복무 기간 중에서도 복무 부적합자임을 파악하지 못한(혹은 은폐한) 것이다. 물론 진짜 지적장애인은 아니고 경계선 지능으로 추정되지만 적응을 못 하기는 마찬가지다. #
군인권센터의 브리핑에 따르면 언론에서 말한 피해자는 총 3명이지만, 군인권센터 자체조사에서 2명이 추가로 피해를 입은 사실이 드러났다.# 누군지는 조사해 봐야 알 수 있지만 이찬희 병장과 같은 방을 쓰던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찬희 병장은 독방으로 이감되었다.
2015년 10월 28일, 국방부 검찰단은 이찬희 병장을 교도소 내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상습폭행, 강요) 등의 혐의로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에 기소했다.# 검찰이 기소한 죄명은 총 7가지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상습 강요, 강제추행, 위력행사 가혹행위, 모욕, 무고, 강제추행 미수, 상습 협박... 군 검찰은 이찬희 병장에 대해 30년을 구형했다. 이대로 형이 확정되더라도 윤일병 사건과 해당 사건을 결합하면 최대 50년형 선고도 가능했다. #
다만 군검찰이 구형한 형량이 이찬희 병장의 죄질을 감안해도 일반 사회의 형량과 괴리가 상당히 심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길어야 35년에 10년 정도 추가되어 통합 선고하는 걸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가석방 기준도 3분의 1 규정이 그대로 적용된다. 일부에서는 이찬희 병장이 가석방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데 형량이 확정된 뒤 새로 받았다면 맞는 말이지만 이찬희 병장은 기존 형량이 확정되기 전에 새로운 혐의로 다시 기소된 거라 재판을 다시 하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다.
2015년 12월 30일, 1심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은 국군교도소 동료들에게 폭행과 가혹행위를 한 혐의를 인정해 이찬희 병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즉 원래 징역 35년에서 3년 더 선고받아서 38년이 된 것. # 이는 30년에서 크게 감형된 것이다. 재판부는 검찰의 구형보다 많이 감형한 이유에 대해서 "이찬희 병장이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며 모욕과 협박 등 혐의에 대해서는 피해자들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합의서를 제출한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보다는 사실상 통합심리해야 할 상황에서 어차피 35년이 사실상 확정된 이찬희 병장에게 추가할 수 있는 형량은 길어야 15년이고 그것도 현실적으로 기존에 선고된 법정 최고형이 42년이며 그마저도 계획적 강도살인으로 법적 죄질은 이찬희 병장과 비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그 이상의 형량 부과에 부담이 큰 상황에서 사실상 형식적인 처벌을 내렸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2심은 통합심리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40년형이 선고되었으므로 실질적으로 이 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 셈이다.
8.3.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 발표[편집]
2016년 1월 25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윤 일병 사건을 포함해 2014년 한 해 일어난 군부대 사건의 직권조사를 발표했다. 관련 글.
2014년 8월, 군인권센터가 언론을 통해 먼저 윤 일병 사건에 대한 심각성이 밝혀진 뒤 2달 전에 이 사건을 기각했던 국가인권위원회는 부랴부랴 재조사에 들어갔다. 당시 부대원 83명을 면담한 결과 구타·가혹행위를 당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는 병이 22명(26%)이었고 간접적으로 들은 적 있다는 병은 9명(11%)에 달한 걸로 밝혀졌다. 당시 부대원들이 신고하지 못한 이유는 구타·가혹행위를 신고해도 형식적으로 접수되어 개선되지 않는 문제, 제3자 신고의 경우 당사자에게 불리할 수 있고 신고자에 대한 비밀이 지켜지지 않아 부대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등이다.
2016년 3월 16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찬희 병장 국군교도소 폭행 사건 관련해서 직권조사를 발표했다. # 조사 결과 국군교도소는 2015년 3월 교도소 입소 당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 정신지체 장애 3급 수준의 A(22)씨를 '윤 일병 폭행 사망사건'의 주범으로 징역 35년을 선고받은 이찬희 병장과 같은 방에 수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가 가벼운 정신지체를 앓고 있어 혼자 두기보다 옆에서 누군가 도와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는 게 국군교도소의 설명이었지만, 그럴 거면 재소자가 아니라 교도관이 도와줬어야 했다. 또한 이찬희 병장처럼 악질적이지는 않았지만 A씨와 같은 방에 있던 다른 2명의 병도 폭행·가혹행위에 어느 정도 가담한 사실이 밝혀졌다. 다만 이들에 대해 별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강요당한 행위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인권위 관계자는 "A씨를 처음 면담했을 때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어려웠다"면서 "A씨는 성추행 방조 등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도 제대로 된 조력을 받지 못했고, 수용 뒤에는 자신이 성추행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8.4. 가해자 측 변호사의 양심선언[편집]
2016년 10월 6일, 재판에서 가해자 중 한 명의 변호를 맡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소재의 모 법무법인 소속의 아무개 변호사는 이 사건에 대한 양심선언을 했다. #
윤승주 일병이 사망한 것에 대해 질식과는 아무 상관 없고 오직 구타만이 사망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유인 즉 이찬희 병장의 구타로 사망하기 직전에 윤승주 일병이 "소변이 나왔다"고 말하는 등 정황상 질식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했으며 기도에 음식물이 고여 있는 것은 사후간섭일 뿐 질식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했다.
덧붙여 어떤 변호사는 이렇게 해서 해당 부대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발버둥쳤다고 주장했다.
8.5. 국가 상대 배상청구와 최종패소[편집]
2021년 7월 22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 결과가 나왔다. 이찬희는 4억여 원을 유가족에게 배상해야 하지만, 국가에 대한 배상청구는 기각한다는 판결이다.
살인자에 대한 배상청구는 극히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인정되기 때문에 이찬희에 대한 것은 특기할 것이 없다. 되려 다른 가해자에 대해서 청구하지 않은 것이 특이할 정도다. 문제는 국가에 대한 배상청구를 기각한 사유가 쉽게 얘기하면 '수사기관이 불성실하게 조사하거나 은폐했다 단정할 수 없다'는 건데, 이전에 부실 수사 혐의로 고소된 군 관계자를 군 검찰에서 모두 불기소한 데에 이어 성추행 피해 공군 부사관 사망 사건이 터지면서 판결 얼마 전 군 수사와 사법체계가 다시 구설수에 오른 상황이었는데도 민사재판에서 이러한 판결을 내림으로[92] 군 사법체계에 면죄부를 내린 꼴이 된 것이다. 부천 탈영장교 살인사건에서 2003년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도 있는데 오히려 퇴보한 것이다.
재판 직후 윤 일병의 어머니는 군의 잘못을 묻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 건데 이런 결정이 나와 억울하다며 군의 책임을 끝까지 묻기 위해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2심도 기각되었고, 대법에서도 최종패소하였다. 법조계 종사자들은 이미 사법당국의 쌓이다 못해 넘쳐나는 국군 감싸주기 선례가 있어 처음부터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었으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유가족들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윤승주 일병의 매형 김진모씨는 "10년간 내가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결실도 있었다"면서 "앞으로는 제도 개선에 집중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8.6. 사인 조작 재조사 각하와 항의 그리고 유가족 수사[편집]
유가족들은 윤일병 관련 재진정 사건에 대한 기각 결정을 항의하기 위해 인권위 건물에 들어갔는데, 김용원 군인권보호관은 오히려 이들을 건조물 침입 등의 혐의로 경찰에 수사의뢰했다. 군인권보호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윤 일병 사건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세바시에 나와 “군인권보호관 제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라”고 홍보한 사람이 바로 윤 일병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김용원은 이게 끝이 아니라 송두환 인권위원장이 서울 중부경찰서에 처벌불원서를 냈을 때 크게 화를 냈으며, 검찰에 송치되고 난 뒤에야 검찰에 처벌불원서를 냈다. ‘경찰 조사를 통해 충분히 벌을 받는 등 원하는 목적 달성했으니 처벌 불원서 내준다’는 식으로 얘기했는데, 윤 일병 유가족은 본인이 냈던 수사의뢰서가 공개되며 인권위 직원들까지 공범으로 적시한 것이 알려져 주위에 신망을 잃었으니 뒤늦게 입장을 바꾼 것 아니겠느냐고 냉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족들은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이찬희보다 김용원이 더 싫다’고, 자식을 둔 부모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기막혀했다.
사실 김용원은 유가족들이 처음에 '같은 날(2014년 5월 2일) 같은 사람이 작성했는데 혐의가 다른 두 공소장이 있다, 이상하지 않느냐'[93] 고 했을 때는 관심을 보이며 조사하려 했는데, 해병대 제1사단 일병 사망 사고(일명 채 상병 사건)이 나고 윤 일병 유족들이 박정훈 대령 편을 드니까 갑자기 180도 태도를 바꿔 갑자기 ‘사건 발생 1년이 지난 경우라 각하하겠다’고 한 것이다. 유족은 보복성 조치를 의심하고 있다.
9. 기타[편집]
- JTBC의 시사보도 프로그램 중 하나인 보고합니다! 4시 정치부회의에서는 이 사건의 진상이 폭로된 다음부터 매일 주요 뉴스로 다루었다. 첫 발제 당시 이 사건을 입에 담기도 끔찍한 일들이라고 평하였고 진행자인 최상연 정치부장은 방송 중에 "제 아들이 곧 입대를 하는데 이 사건을 보니 군대 보내기가 무섭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 사실 이것은 군 입대하는 아들을 둔 모든 부모님들의 공통된 심경일 것이다.
- 이 사건을 접한 북한은 살인과 폭행으로 길들여진 식민지 고용군, 윤일병 사건은 인권유린 만행이라며 노동신문에 이 사실을 적으며 맹렬히 비난했다. 사건은 북한에서도 욕먹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이에 대해 국내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김정은이 자기 고모부를 처형한 북한 니네들이 할 말은 아니다.'라는 가만히 있으면 백이라도 간다의 반응이 대부분이다.
- 그런데 이런 일도 일어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듯 하다. 추가로 군대에서 아예 의문사한 장병의 시신을 유족의 동의 없이 강제화장을 추진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추가 내용 1. 이후 3년 이상 인수를 거부한 시신을 가족 동의 하에 화장해 임시로 보관하는 방안이고, 동시에 사망 원인이 업무상 관계가 없어 순직 처리가 되지 않은 사망자라고 하더라도 군이 업무 연관성을 규명하는데 실패하는 경우 유골을 현충원에 안장 하는 방안을 동시 추진한 것으로 바뀌었다.
- 심지어 병들에게 신고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며 책임을 떠넘길 모양이었다. 사실 이것이 별로 특이하지는 않은 게 군대는 원래 무슨 사건만 터지면 항상 병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해 왔다. 이 인터뷰 전에도 군의 비협조로 당시 의무대 입원환자 김 일병이 윤 일병의 유족과 연락하지 못했는데, 군에서 일방적으로 김 일병이 진술을 거부했다고 발표하여 불쌍한 김 일병은 안 그래도 윤 일병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상태였는데 군 발표로 인해서 악플에 시달리고 신상털이까지 당해 친척집에서 살고 수면제가 없으면 잠 못 드는 지경까지 갔다고 한다.## 다행히 김 일병은 이후 호루라기 재단이 수여하는 '호루라기 인권상'을 수상하여 조금이나마 보상을 받게 되었다.
- 윤 일병 사건을 처음 신고한 김재량 상병[94] 은 참여연대에서 2014년 의인상을 수여했다. 김 상병은 수상 소감에서 "7살 어린 남동생이 군대에 가서 이런 일을 겪는다면... 눈이 뒤집힐 것 같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작은 신고가 군 쇄신의 계기가 됐다는 것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상병은 가해자 중 한 명인 지 상병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고 사건의 전말을 처음 들었을 때 바로 신고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지 상병에게 자수를 권유했으나 이 병장한테 맞아죽는다는 말만 계속 반복하면서 사건 은폐를 유도해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구가 작았던 윤 일병에게 종종 안부를 묻곤 했다는 김 상병은 "윤 일병이 아쉽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상을 받아도 기쁘지만은 않다"고 수상 소감을 말했을 때 행사장이 숙연해지기도 했다.
신고 이후 김 상병은 다른 부대로 강제전출을 가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부대에 소문이 퍼져 간부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부대원들에게 기수열외를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아~아! 네가 그 유명한 재량이냐?"어차피 대한민국 사회에서조차 내부고발자에 대한 보호 장치가 부실한 판인데 대한민국 군대에서 신고자의 신분을 보호해줄 리가 만무하지만 전출간 부대에서 간부들은 그렇다 쳐도 일반병들까지 김 상병을 "영웅이 되겠다고 같은 부대원을 잡아 먹은 놈" 취급하며 기수열외를 시켰다는 점이 정말 끔찍한 대목. 기수열외를 시킨 다수의 병과 간부들이 사회로 돌아와 우리 주변에 아무렇지 않게 섞여있다는 사실이 더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95] 그럼에도 김재량 병장은 전역 후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밝히며 그것을 위해 공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이야기 1, 2
"저 새끼 때문에 (내가) 부대에서 장기 복무가 안 돼."
"전출 가고 싶지 않냐? 갈래? 말래?"
― [나는 왜 배신자가 되었나1-②]'왕따·전출'... 윤 일병 사건' 내부고발자의 시련 (오마이뉴스, 2015.04.01.)##
- 윤 일병 사건에 대해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김관진 장관은 "군 복무 부적격자를 완전히 걸러내어 이찬희 같은 사람이 군복무를 하는 불상사를 막아내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 윤 일병의 유가족은 병원 진료비 문제로 제2의 고통을 겪기도 했다.##
- 당시 복무 중이었던 군인들이 전역하고 그 당시 분위기를 말하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부 부대에서는 초창기에 은폐되었던 대로 냉동식품을 먹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냉동식품 섭취 시에 조심하라'고 하거나 냉동식품을 금지하는 촌극이 있었다고 한다. 전말이 은폐된 채로 사건을 들었으니 그들도 속아서 그랬겠지만, '냉동식품이 원인이라고 냉동식품을 금지하는 것은 참으로 군대답다'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폭력과 가혹행위를 경험해 본 병사나 그런 전력이 있던 부대에서 장기 근무했던 부사관들은 '저놈들이 사고를 쳐놓고 헛소리를 한다'는 감을 잡았다고 한다. 폭력과 가혹행위로 인한 부상에 대해 군대에서 용인하는 변명은 실소가 나오는 말도 안 되는 변명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 40년형을 선고받은 이찬희를 제외한 유경수, 하선우, 이상문, 지정현 등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것으로 보인다. 유경수는 그 가족들이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한 반면 지정현과 하선우, 이상문은 페이스북 계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96] 또한 이들은 실형 전과와 이름이 이미 알려졌기 때문에 나와 봤자 제대로 된 취업길은 거의 막히고 사회생활을 종친 것이나 마찬가지로 평생 꼬리표와 낙인을 달고 살아야 마땅하고 어찌어찌해서 자신의 이름과 사건을 잊은 사람들이 고용해 줘서 먹고산다 해도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면서 정체가 발각되면 바로 쫓겨나거나 그 정도는 아니라도 당장 왕따가 되는 사회적 매장을 당하며 살아야 하는 죄악의 대가를 받아야했으나 역시나 그 공범들 중 하선우 병장, 지정현 상병, 이상문 상병은 현재 (사이버 렉카들을 비롯한 폭로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2021년에 출소 후 각각 폰팔이, 공장 노가다, 식품공장 등 질이 좋은 곳이라고 하기는 어려워도 멀쩡한 직장에 취직해서 평범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정황상 신분세탁이 꽤 진행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사건 당시 일부 군필자들은 '피해자(윤일병)이 구타를 유발했을 것이다, 혹은 지가 잘했으면 맞았겠냐. 지가 못해서 선임 잡아먹었다'고 피해자에게 끔찍한 2차 가해를 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97] 어떻게 미필도 아닌 군필자가 이런 생각을 하겠냐 싶겠지만, 어떻게 보면 군필자라 더 그럴 수도 있다. 당장 이 사건이 이슈화되기 한 달 반 전쯤 일어난 임병장 사건에서도 '군대가 학교 왕따도 아니고, 지가 잘했으면 괴롭힘 당했겠냐. 임병장 불쌍하단 사람 다 미필'거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라고 하는 사람 미필' 자체가 자기 의견과 반대되는 사람을 매도하는 이상의 의미가 없지만, 반대로 '군대가 고등학생 티도 못 벗은 사람들 모이는 곳인데, 잘못한 것 없어도 괴롭히는 곳이다. 임 병장 불쌍하지 않다는 사람 다 미필' 이라는 정반대의 반응도 꽤 많았으며 당시도 이쪽이 우세했지만 윤 일병 사건이 보도된 이후 완전히 이쪽으로 기울어졌다.
- 군대 내 일반병의 휴대폰 사용에 대한 논의가 이 사건 이후 처음 시작되었다. 이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국회의원들이 국방부를 질타하던 도중 윤후덕 의원이 "차라리 부모한테 이를 수 있게 휴대전화를 지급해라"고 발언했고 이 발언 이후 병의 휴대폰 소지를 허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기 시작하면서 병사 수신용 공용 휴대폰을 거쳐 개인 휴대폰 사용 허용으로 이어졌다. 그 전에도 병이 핸드폰 쓰면 안 되냐는 선구자적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없진 않았지만 '군대 다녀온 것 맞아요?' 정도 취급이었다. 그런데 진짜로 통신보안이나 군대 시설을 촬영하는 보안을 걱정하는 것이 문제였다면 먼저 간부들부터 핸드폰을 못 쓰게 했어야 했다. 결국 똥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윤후덕 의원의 발언에서도 "차라리" 라는 말이 쓰인 데서 보이듯 '병이 핸드폰 쓰는 건 원래 안 될 일이지만, 국방부가 영 못 미더우니' 정도로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은 '옛날에는 왜 "병이 핸드폰 쓰는 건 원래 안 될 일"로 여겼지' 하는 분위기이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98] .
- 2023년 6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제보를 받기 시작했다. #
- 2023년 4월 피해자의 부모님은 서울 노원구에 작은 복권방을 오픈하였다.##
- 2024년에 제12보병사단 훈련병 사망 사건이 발생한 후에, 윤 일병의 어머니가 인터뷰에 응했다: "사고가 난 지 열흘이 넘도록 왜 이 나라는 누구 하나 사과하지 않는 것입니까? 어떤 의혹도 없이 바르게 진상규명, 진심으로 촉구합니다."
10. 유사 사건[편집]
자세한 내용은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유사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부와 군 수뇌부가 강한 군대를 천명하면서도 정작 군인들의 복지 및 훈련 강화 여파에 대한 대책 마련에는 무관심하다 보니 병사 및 초급 장교와 부사관들 사이의 병영부조리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 그 결과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으로 조금씩 드러나던 군 내 사건 사고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봇물이 터지듯 보도되었다. 2014년은 대한민국 국군의 병영부조리로 인한 문제가 드러나는 한 해가 되어 버렸고 병영 문화를 이 때를 기준으로 나눌 정도다.
이런 사건들의 가해자는 대부분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과거 온갖 병영부조리로 유명한 러시아군, 일본군들 또한 대부분 고향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 위험 인물의 입대를 막는 것만으로는 가혹행위의 발생을 완전히 방지할 수 없고 운영하는 조직이 어떻게든 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 뜻이다. 앞서 언급된 미국 대학의 교도소 생활 체험 실험을 참고하자.
11. 관련 문서[편집]
12. 둘러보기[편집]
[1] 윤승주 일병[2] 조한진 뒤에 나오는 이재열은 되레 조한진의 거주지 경상남도 진주시의 동남 방언을 구사하고 조한진이 되려 이재열의 거주지 충청북도 충주시의 충청 방언을 구사하는데 방송국에서 실수로 바꿔 내보낸 것이다. 사진 속 인물은 충청북도 충주시에 거주하는 이재열이 맞고, 뒤에 나오는 인물이 경상남도 진주시에 거주하는 조한진이다.[3] 언론에서 인터뷰를 해서 유명해졌고 지금도 이 분의 발언이 캡쳐본으로 나돌고 있지만 발언 자체는 사건이 터졌을 당시 네이버 뉴스 등에서 베스트 댓글로 이미 유명해진 말이었다.[4] 초기에는 음식물이 기도를 막아 뇌사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도되었으나 잘못된 정보였다.[5] 이 사건의 가해자이기도 한 다른 병이 당한 폭력 행위를 포함해서 계산한 것이다. 2013년 말부터 계속되어 왔다. 윤 일병이 당한 기간만으로 따지면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이다.[6] 실제로 그는 "할머니가 기독교에 심취해 집안일을 소홀히 했고, 할아버지와 다툼이 잦았다. 또 목사인 숙부에게 몰래 돈을 주는 것을 보고 기독교가 싫어졌다"고 진술한 바 있다.[7] 참고로 군대에서 식사는 선택이 아닌 '명령'으로, 특수한 사정(휴가 등)이 아닌 이상 결식하면 명령불복종으로 처벌이 가능하다. 물론 이런 경우 고의로 결식한 것이 아니므로 처벌 사유가 되지 않고 대신 이찬희 병장 같은 가해자가 후임을 굶긴 가혹행위범이 된다. 제 아무리 군대 내에서 쓰레기 같이 구는 인간이라도 어지간해선 '식사를 아예 못 하게' 하지는 않는다. 가끔 밥 먹는 속도가 느리다는 트집을 잡아 가혹행위를 하는 경우가 좀 비슷하긴 해도 아예 작정하고 굶기려 하는 행동을 한 경우는 거의 없다.[8] 물론 군대가 아닌 바깥에서야 나이 차이가 있고 자신이 원한다면야 형님이라 부르든 뭘 하든 상관 없지만, 엄연히 군대 내에서 그랬다. 거기다 혹시 전역이 가깝다면 또 모를까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러는 건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9] 현역부사관은 일등병-병장이 지원대상인데 유경수의 경우 일등병, 상등병 복무도중에 부사관 양성교육부터 임관종합평가까지 완전 합격해 중도에 하사를 달았다.[10] 병장까지 마치고 하사를 다는 임기제부사관이면 짬에서 더더욱 밀릴 상황도 아니었다.[11] 이 문제는 병 및 부사관에게서 발생하는 고질적 문제로 계급이 사관학교 기수를 씹어먹는 장교와는 달리 병과 부사관은 계급의 권위가 희미해서 짬과 나이가 계급을 앞지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일례로 본부대 의무담당관이 중사, 인접부대 행정보급관이 상사인데도 행정보급관이 이 의무담당관보다 임관년도가 뒤쳐지면 쩔쩔맨다. 반면 장교는 무시 및 구타, 가혹행위만 안 할 뿐이지 계급이 높으면 사관학교 선배라 하더라도 (형태가 부탁으로 바뀌지만) 명령을 내리고 할 말을 다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유경수는 민간부사관이 아닌 현역부사관[9] 출신이라서 짬에서 밀려 쩔쩔맬 상황이 아니었으며[10] , 실제로 이후 재판에서도 이찬희에게 쩔쩔매서 그랬다는 얘기는 변명으로도 꺼내지 못했다. 그냥 자의적으로 가혹행위에 동조한 셈이다.[12] 두 사단의 사고 사례를 살펴보면 대략 할 말을 잃는다. 사실 원래부터 각종 소문도 별로 좋지 않았다.[13] 추서계급 상병[14] 사실 군사 재판이라도 일반인의 방청은 가능하다. 방청되지 않는 경우는 법정이 비공개를 결정했을 때뿐이다.[15] 사진은 가해자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페이스북 계정의 사진들인데, 이 사건이 보도된 지 얼마 후에 해당 계정에서 나는 가해자가 아니라고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계정을 폐쇄하거나 사진을 내린 것으로 볼 때 신빙성이 높다.[16] 피고인 유경수 하사의 페이스북의 경우 군인권센터와 언론이 사건을 발표한 이후 동생이 계정을 삭제했다. 아무래도 윤 일병 사건에 대한 분노를 담은 쪽지가 가족들에게까지 간 듯하다.[병적제적] A B C D E [17] 이 자가 자대배치를 받은 직후인 2012년 11월 당시 병장은 대부분 1991~92년생으로 나이 차이가 꽤 있는 편이다. 참고로 당시의 동갑내기들은 거의 예비역 1~3년차였다.[18] 이는 이전 부대에서 이찬희와 같이 복무했던 선임병이 증언한 것이다. 물론 온갖 인간군상들이 젊은 나이에 강제로 갇혀서 갖은 부조리를 강요 당하는 군대에서는 이와 비슷한 반응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걸 더 심각한 형태로 후임에게 자행했다는 것이다.[19] 심지어 이 때 '말 안 들으면 윤 일병처럼 맞는다'고 협박하기도 했고 폭행 대상이 옮겨가면서 덜 맞게 된 다른 병사들이 자기가 덜 맞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폭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신이 직접 폭행하지는 않았던 하 병장에게도 "말로만 하니까 애들이 이딴 식이지"라며 무시하면서 폭행에 가담하도록 유도했다.[20] 그 전에는 부조리가 전혀 없었다는 진술이 있지만 지 상병이 이병일 때 소원수리를 썼지만 가해자가 영창에 다녀온 후 자대에 복귀하여 더 고통스러웠다고 진술했고 이 상병은 이전 선임들이 가혹행위를 했다고 진술하는 등 정말 없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21] 하지만 이건 부조리 신고자를 매도하는 말이다. 그리고 반례인 부조리를 그냥 당하고만 있다가 후임에게 똑같이 자행하는 사람이나 선임 찔려서 부대가 평화로워진 후 아무 일 없이 전역하는 사례도 충분히 많다.[22] 하지만 이는 유경수의 행동을 옹호하기보다는 당시에는 사건의 심각성을 몰랐기 때문에 힘내라는 식의 댓글을 남겼을 수도 있다.[23] 병 출신 하사는 현역부사관이나 임기제부사관인데 현역부사관임을 밝혔다.[24] 윤승주 일병이 실려간 뒤 사건의 내막을 김재량에게 이야기했다. 그 뒤 김재량에게 아무에게도 사건의 내막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한 뒤 윤승주 일병이 아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자신도 이찬희에게 맞아 죽을 것 같다고 말한 건 덤이라고 했지만 이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뻔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25] 그나마 변호를 해준다면 저기서의 모습은 연기라고 보는 것이다. 당장 저 사진에 있는 윤 일병이랑 이 일병만 해도 행복하게 있으니. 물론 이 일병과 윤 일병이 있게 되면서 지 상병이 상대적으로 편해진 것은 사실일 것이다.[26] 재판을 방청한 시민들이 가해자들의 이름을 알리면서 다른 가해자들의 신상이 털렸는데, 이 일병은 또 다른 피해자에 가깝다 보니 방청객들이 이름을 공개하거나 신상을 터는 일은 거의 없었다.[27] 당시 원사였고 도중 준사관으로 임관함[28] 실제로는 중령(진) 계급이었는데 해당 사건으로 인해 진급이 취소되었고 소령으로 불명예 전역했다.[29] 임 소령이 당시 사건 발생 3개월 전까지 있던 대대장이었다.[30]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 이준 전 회장이나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이준석 선장처럼 핵심 책임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책임자 중 한 명임은 확실하다. 당장 이준 전 회장이나 이준석 선장은 인명사고의 책임자로써 처벌받고 국민적인 꾸지람를 받았는데, 이들이 유족에게 용서를 강요했다고 생각해 보자.[31] 중징계 이상의 징계를 받을시 진급이 취소되면서 (진) 표시가 삭제된다. 그래서 중령(진)에서 소령으로 강등되었다.[32] 후임자는 육군사관학교 2기수 후배인 김승겸 장군이었고, 병영문화쇄신과 북한의 서부전선도발을 훌륭히 대응하여 중장은 물론 대장까지 진급했다.[33] 후임자는 당시 감찰실장이었던 3사관학교 출신 박종진 장군이며 제1야전군사령관까지 영전했다.[34] 후임자는 하나회 끝물기수인 김현집 장군이다.[35] 후임자는 육군사관학교 동기이자 제2작전사령관인 김요환 대장이다.[36] 사후 1계급 추서[37] '장병 병영생활 도움제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사회에서의 모습과 군대에서 관심병사가 되느냐의 여부는 완전히 비례하지는 않기 때문에 밖에서 사회성이 있었느냐의 여부만으로 관심병사가 아니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해자들의 행각, 특히 자대 배치 직후부터 폭행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볼 때 그 사람이 누가 되었건 같은 길을 걸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심병사나 왕따 등 배척 행위는 결국 피해자가 아닌 주변인들이 가해자고, 경우에 따라서는 조폭과 같은 비정상적인 인물들이 주류인 집단의 경우 보통 사회에서 정상인이나 모범적인 인물이 오히려 배척당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실제 부대에 따라선 폭발물 관련 보직 등 특정 보직을 맡았다는 것 자체만으로 관심사병으로 지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만약 정말 사회성이 부족한 인물이었더라도 저런 만행은 정당화될 수 없다.[38] 아이러니하게도 주범인 이찬희도 168cm로 작은 체격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자기 기준으로 본인보다 작은 사람들을 비열하게 폭행다는 뜻이다.[39] 비교적 약한 처벌이다.[40] 엄벌주의국가인 미국은 아마 최대 50년 이상의 징역 또는 3억원의 벌금형이었을 것이다.[41] 가해자들은 윤 일병이 자진해서 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동안 이들의 만행을 생각해 보면 당연히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사실 이건 이찬희를 인간 쓰레기 끝판왕으로 만들기 위한 일부 네티즌들의 뇌피셜에서 시작된 가설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정말 사실로 드러남으로서 더는 가설이 아니게 되었다.[42] 전입 온 지 얼마 안 된 이등병이었는데, 이름은 선인식이었고 잦은 실수로 인해 폐급 취급을 받았다.[43] 선인식 이병은 자신의 돈을 갈취하려는 선임의 눈치를 보았다. 군장보행을 했다. 주인공은 그 이후 자신의 맏후임에게 냉정하게 대한다.[44] 주인공이 멋 모르고 대든 게 아니라 선임이 자신의 대학 동기라는 설정이 있었다.[45] 사실 저 자료도 극히 일부에 불과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저 중 가장 자세하게 서술된 자료는 4월 6일을 토대로 한 자료 밖에 없다.[46]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이 현장검증 영상 풀버전을 구했을 가능성이 낮으니 유가족 측이 입수해서 올려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영상에 가해자로 나오는 사람들이 가해자치고는 너무나 처연한 모습을 보여 대역이 아니냐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현장검증 영상이니 당연히 재연배우가 아닌 실제 가해자들이 해야 한다. 물론 피해자 역은 대역이다.[47] 가해자들이 현장 검증에 매우 협조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의아할 수 있지만, 이들의 증언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사관들이 적극적으로 유도한 것이 크다. 자백의 내용이 끔찍하기 그지없어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어가면서 '너희들이 솔직하게 해 줘야 우리도 선처를 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영리하게 유도해 냈다. 실제로 현장검증 진행자들의 말투를 보면 전혀 분노가 담긴 말투가 아니라 마치 그냥 물어보는 거야~ 같은 느낌으로 진행한다. 또 이들도 이를 믿고 검증에 성실히 응해 줬다. 실제로 경찰수사관이 피의자 조사를 할 때 자주 사용하는 수사 기법이다.[48] 비장은 혈액의 정화 및 면역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한번 파열될 경우 과다출혈로 사망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장기이다. 비장이 없을 경우 노동력이나 신체능력 자체가 굉장히 떨어지며, 아예 군 면제까지 가능하다. 이런 부위가 아예 파열될 정도로 구타했다는 것은 얼마나 구타 수준이 충격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49] 이 모 일병의 만류로 실제로 때리지는 못하였다고 전해진다.[50] 이 일병에 대한 선고에는 문제가 있다. 집행유예 기간은 형법 제62조상 1년 미만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51] 살인죄가 인정되면 처음 사건을 축소, 은폐한 헌병대 등이 처벌받기 때문에 자기 조직 보호하려고 재판부는 처음부터 살인죄에 대해 처벌할 의사가 없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다만 이찬희 병장 일당의 진술 자체가 상해치사로 볼 소지가 충분했던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상태를 봐 가면서 때렸다는 건 죽을 줄 알았다는 말도 되지만, 동시에 그렇게까지 봤기 때문에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해석이 될 소지도 충분하기 때문이다.[52] 원래 상해치사죄는 죄질이 중하더라도 10~15년 정도가 일반적인데, 판사가 징역형을 25~45년씩 때린 것은 군법의 특수성과 죄질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가혹하다는 것은 물론이고 재판부가 언론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얘기했다.[53] 물론 절대로 가해자들의 범죄를 정당화시키려 한 취지의 발언이 아니라 일단 군 검찰이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고 판결도 비상식적이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즉, 가해자와 군 모두가 공범이었다는 의미.[54] 이는 사형을 면하기 위한 반성 코스프레였음이 확실하다,후술 하는 육군 교도소 수감 당시 추가 범행을 감안하면 이는 빼박 사실.[55] 교도소 수감자들 사이에서는 2억원 냈다고 했지만 사실은 거짓이고 재판 진행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이 말하길 1,000만원 냈다고 한다.[56] 실제로 계획적 강도살인을 저지른 범인도 징역 42년을 선고받은 상황에 이병장의 형량인 징역 45년은 계획적 살인죄 등이 아님을 감안하면 살인죄가 인정되더라도 확실히 무리수라는 일부 법조계의 의견이 있었다. 무엇보다 1심은 언론을 의식한 판결이었기에 더 그렇다.[57] 정확히 말하면 이찬희 병장은 살인죄가 인정되나, 나머지 3명에게는 살인죄 적용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 병장의 변호인도 윤 일병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건 이찬희 병장이고 나머지 3명은 폭행에만 가담했을 뿐이라며 이찬희 병장에 대해서만 살인죄 적용을 주장한 바 있다.[58] 다만 상해치사를 적용할지, 살인 방조를 적용할지는 알 수 없었다. 대법원은 당시 윤일병 폭행에 나머지 3명은 사건의 정황 및 폭행의 정도, 방법 등으로 보건대 살인죄 적용은 불가하다는 말만 했을 뿐이다.[59] 삼단봉으로 범인을 제압할 때도 절대 가격하면 안 되는 부위가 바로 몸통과 머리다. 범인이 식칼을 들고 달려드는 등 삼단봉을 닥치는 대로 휘둘러서라도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야 하는 상황 같은 경우 아니면 경찰조차도 정당 방위를 인정받을 수 없다.[60] 일반 의무병 정도의 수준으로는 윤 일병이 뭐가 걸려서 쓰러진 건지, 구타에 따른 폐색전증으로 쓰러진 건지 알 수 없다. 즉, 대법원은 이들이 윤 일병이 쓰러진 상태만 인지했지 어떤 상태인가를 100%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61] 미필적 고의는 피해자가 죽을 수도 있다는 예견만으로는 부족하고, 죽어도 자기는 상관 없다는 투로 행동할 정도여야 성립한다. 형량이 일반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와 같기 때문에 판단 기준이 굉장히 까다롭다.[62] 하 병장의 변호인으로 국방부가 대놓고 축소, 은폐하려고 했던 윤 일병 사건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이후 김 변호사는 박정훈 대령의 제1변호인으로써 채 상병 사건 수사 외압 사건의 진상규명에도 힘썼다.[63] 즉, 이 말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64] #출처[65] 가석방은 보통 형기를 70-90% 채운 시점에 되므로 4-12년 정도 일찍 나올 가능성. 단, 교도소에서 폭행을 저질러 교화가 안 되었음을 보여줬으니 가석방이 허가될 가능성이 낮다.[66] 사실 본부 포대장의 잘못 역시 크다,지리적인 위치 보다는 소속이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암만 남의 포대 막사지만 본인 휘하 소속이니 제대로 감시를 하는게 의무다.[67] 이 병장 1988년생 > 유경수 하사 1991년생[68] 대위(진), 포병 병과[69] 김성찬 제독은 2006년 1함대사령관 시절 수병들의 휴대전화 소지 허가를 검토하는 등 이쪽에 신경을 썼던 인물이다.[70] 2014년 당시에는 2009년 이전 이름인 소원수리로도 많이 불렸다.[71] 윤일병 신병 전입 이전에 피해자였다가 윤일병이 전입 오고 가해자가 된 지정현 상병 역시 똑같이 당하였다.[72] 소원수리를 제대로 하는 시늉이라도 내는 부대라면 선임의 눈치를 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같은 계급 끼리 집합시킨다. 그래도 2차 피해는 발생하지만 그나마 후임이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있다.[73] 그리고 상술 하였듯 애초에 내무반 지리적 위치 자체 부터가 비극의 씨앗이었다, 본부포대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3포대 막사 일부에 위치하여 본부 포대장은 본부 포대장 대로 남의 포대 막사이니 가기가 뻘쭘하고 그렇다고 3포대장 역시 본인 소속 내무반이 아니니 가기가 뻘쭘하였다.[74] 오히려 병들은 김 상병을 이해해 주었다고 한다. 이찬희 병장이 아무리 똥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선을 한참, 그것도 엄청나게 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출 간 이후로는...[75] 해군 수병들은 함정이나 섬 등 1차 발령지 근무자는 중간에 육상 후방부대로 전출을 많이 가기 때문에 전출 사실 자체로 문제 삼는 일이 없다.[76] 사족으로, 유럽국가들은 1991년 소련 해체로 인해 군축이 가능해졌기에 복무기간을 급격하게 줄여도 문제가 없었던것이다.[77] 1986년 현역판정률이 51%.[78] 특히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이찬희 병장이 굳이 자기 아빠가 조폭이라고 허세를 부리고 다니거나 윤 일병이 그에 대해 감명 깊었다고 하자 폭주하여 미친 듯이 구타한 것을 보면 가정사에 대한 열등감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79] "이처럼 잔인하고 끔찍한 일을 부럽다고 말하는 우리가 제정신일까요", "만약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면 일반 사망이자 자살로 처리되어 조용히 덮이고 '적응 못하고 자살한 지 잘못'이라고 취급되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분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미 그런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가혹행위로 자살한 정황이 있는데 어떤 조사나 처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살인임이 강력하게 의심되는데도 자살로 처리된 사건도 여럿이니.[80] 다만 중형이 확실한 판에 성매수가 양형에 별도로 반영된 것 같지는 않다. 하 병장에게 내려진 형량은 같이 살인죄 공범으로 기소된 후임병 두 명과 똑같았다.[81] 반도 채우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틀렸다. 물론 규정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 운용상으로는 70% 이상은 복역해야 가석방 대상이 된다. 오히려 형기를 거의 다 채우고 가석방이 되는 사례가 많아 가석방이 의미가 있느냐는 의견도 있다.[82] 당시 저런 내용의 공문이 하달되어 병사들 대상으로 음식물을 꼭꼭 씹어 먹으라고 교육하는 촌극이 발생하기도 했다.[83] 현장 검증을 윤 일병의 장례가 진행되는동안 하였다.[84]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직원이 책상을 옮기다 허리 삐끗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국가유공자로 올리고 자식을 유공자 자녀 콤보로 취직시킨 썩어빠진 사례도 있다. 일명 정일권 국가보훈처 차장 사건이다.[85] 시기적으로 봐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이다. 당시 보훈처장인 피우진은 본인이 군인이었을 때 휘하 병력 처우 및 인권에 관심이 많았기에(당장 휘하 여군의 술자리 관련 일화만 봐도 이해가 된다) 처장의 성향과도 어느 정도 일치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86] 피해자의 목을 조르기, 1.5리터짜리 음료수 병으로 때리기, 볼펜으로 찌르기[87] 성기를 보여주면서 성희롱을 했다.[88] 수감자 3명에게 옷을 벗긴 채 화장실에 무릎을 꿇게 하고 소변을 보는 행위[89] 단, 형량부심은 민간 교도소에서도 흔하다. 조폭 방장들이 왜 사형수, 무기수, 10년 이상 장기수들은 터치를 하지 않는지 생각해보자. 갑질도 잃을 게 있는 사람 상대로나 가능한 거다.[90] 군형법상 사형은 총살형밖에 없으며, 민간 교도소에는 총살시킬 장소가 없기 때문에 사형수는 신분을 막론하고 국군교도소에 수감한다. 그리고 사형수는 독방 수용이 원칙이다.[91] 사실 사식을 몰래 반입해 먹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교도소 환경이 그리 좋지 않고 음식도 제한되기에 이런 위반은 생각보다 흔한 편이고, 특히 장기수들이 신경쓰는 일은 거의 없다. 어차피 인생 끝장난 상황인데 교도소 규율 따위가 중요하겠는가?[92] 민사재판은 무죄추정의 원칙이 없이 더 타당한 쪽의 손을 들어준다. 즉 저 사유는 '부실수사, 은폐일 가능성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아서 기각' 정도로 해석되는 게 아니라 '부실수사, 은폐로 보이지 않는다' 정도인 것이다.[93] ‘상해치사’에서 ‘살인’으로의 공소장 변경은 2014년 9월2일 28사단에서 이관된 3군사령부에서 이뤄졌다. 그런데 5월 2일 28사단 검찰관에 의해 쓰인 두 개의 공소장이 있는 것이다.[94] 사건 당시 기준, 의인상 수여 당시는 병장[95] 더욱이 아무리 본인의 사상이 군대에 찌들었다한들, 전국민이 들고 일어서 이찬희와 가해자들을 비난하는 가운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국민들 사이에 섞여 그들을 비판할 것이다.[96] 실형을 살아서 그런지 페이스북 친구 수도 급감했다.[97]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적어도 대놓고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엄연히 극소수였다. 이 사건은 훨씬 가혹행위가 심하던 쌍팔년도에 군생활을 한 사람들까지 경악시킨 사건이었다.[98] 실제 장병들의 휴대전화 사용이 전면 허가된 이후로도 엄청난 보안사고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방부도 애초부터 카메라 장치를 가리는 스티커를 배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병사들도 괜히 보안사고 일으켰다가 여론 악화등으로 휴대전화 사용이 통제될수도 있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하는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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