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희 피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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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동영아파트 5층 자택[1] 에서 버스 기사[2] 박기서가 1949년에 일어난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의 범인 안두희를 방망이로 때려 살해한 사건.
2. 진행[편집]
국부를 시해한 자가 세 치 혀를 놀리며 천수를 다하는 것을 그냥 놔둘 수 없었습니다. 인간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의 심정으로 (안두희를) 처단했습니다.
살해 시점이었던 1996년 당시 박기서는 47세[3] 로, 부천시의 버스회사인 소신여객의 버스 기사였다. 박기서는 '백범일지'와 평생에 걸쳐 안두희의 배후를 쫓았던 권중희의 저서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은 뒤, 민족정기를 해친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 살해를 결심했다고 한다.
안두희는 1965년에도 곽태영이라는 김구 지지자에게 목을 찔려 살해당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범행동기가 공분이라는 이유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피살 당시 안두희는 80살에 가까운 노인인 데다 건강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지 힘이 상당히 없어 저항도 하지 못했고[4] 사망한 모습은 꽁꽁 묶인 채 맞아 죽은 처참한 모습이었다고 하며 박기서가 사용한 몽둥이엔 정의봉(正義棒)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덕택에 당시 교사들의 회초리에 이를 새기는 게 유행이 되기도 하였다.[5]
그는 재래시장에서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를 구입한 다음 매직으로 '정의봉'이라는 이름을 썼고 근처 문구점에서 장난감 총을 구입한 뒤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사전답사했던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동영아파트 502호 안두희의 집에 침입해 안두희의 동거녀[6][7] 를 장난감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준비해간 나일론 끈으로 손발을 묶고 안방으로 밀어 넣었다.[8]
옆방에 누워 있던 안두희에게는 장난감 권총을 겨누면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권총이 불을 뿜는다."고 고함을 친 후 나일론 끈으로 두손을 뒤로 묶고 정의봉으로 때려 죽였다. 중간에 숨이 차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면서 두들겼는데 나중에 경찰이 와서 보니 방 안에는 피가 흥건했고 피 묻은 정의봉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만 박기서의 사적제재 때문에 김구 암살의 배후가 영원히 묻혀 버렸다는 비판도 소수나마 존재한다. 물론 수십년 동안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진술을 시작한 1992년 이후에도 횡설수설하는 등 살해당하지 않았어도 죽을 때까지 뭔가를 언급했은 가능성은 매우 낮았을 것이며 만약 박기서에게 타살당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고령이었기에 곧 자연사했을 가능성도 다분한 편이었다.[9]
애초에 무기수였던 인물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차례로 감형되었고[10] 출소 후에도 군에 복귀하여 승진을 거듭하고 장교로 예편한 데다 쫓기기 전까지는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증언[11] 도 있다.[12] 이후 김구 암살의 진상을 밝히려는 이들의 추적을 받게 되자 가족과 함께 이민을 시도했지만 본인은 추적자들의 방해와 이어진 법무부의 출국금지 조치로 나가지 못했다.
3. 사건 이후[편집]
박기서는 범행 직후 부천으로 택시를 타고 본인이 다니던 삼정동 성당에 고해성사를 하러 갔는데 신부가 자리에 없어서 심곡본동 성당으로 옮겨가 그 성당의 이준희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고해성사를 마친 뒤 신부는 박기서에게 토스트와 우유를 제공한 후 경찰에 자수하도록 전화를 걸어줬다고 했는데 박기서는 자수를 권유하는 신부의 말에 따라 경찰에 자수했다.[13] 이 신부가 검찰에서 참고인으로 행한 진술에 범행 직후 박기서의 심정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고해성사 후에는 자유롭게 얘기했는데, 박기서 씨는 김구 선생을 죽인 안두희는 당연히 처벌되어야 하는데 역사가 그 일을 하지 않으니 자신이 사명감을 가지고 안두희를 죽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 행위에 대해 잘잘못을 가려 말하기가 모호하여 그러냐고 하면서 듣기만 했다. 그러면서 박기서 씨는 안두희의 장례와 그 영혼에 대해 걱정을 하면서 성당에서 안두희 장례를 치르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위로도 할 겸 예수님께서도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면서[14]
그 문제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했으며 이어 박기서는 아내에게 전화로 안두희를 죽인 사실을 알리고 경찰에 자수하였다.
이후 박기서는 권중희를 불러 함께 택시를 타고 인천중부경찰서에 자수하였으며 아래와 같은 기자회견을 가졌다.
지난 6월 26일이 백범 김구 선생 추모일이다. 나는 올해 추모행사에 참석, 김구 선생의 위업을 기렸다. 그때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를 죽임으로써 역사가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두희를 살해하러 갔을 때) 안중근 의사의 '見利思義 見危授命(이로움을 보거든 옳은가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을 화선지에 쓰고 내 이름을 써넣었다. 큰딸이 고등학교 3학년[15]
이다. 입시를 앞두고 있는데 이런 충격을 전해주어 미안하다. 고등학생인 둘째딸[16] 과 초등학생인 막내아들[17] 에게도 미안하다. 그러나 아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백범 선생을 죽인 안두희를 살해한 아버지를 두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리라 생각한다.
박기서는 범행 이후 살인죄로 구속기소되었는데 인천지방검찰청 박환용 검사는 살인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공소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고인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면서 약 2년간 기본적인 한학을 공부하고 1970년경 서울로 올라와 택시기사, 마포 걸레 제조업, 쌀가게 운영, 오디오 부품 생산업체인 대륭전자 회사원, 화물운송업등에 종사하다가 1995년 6월경부터 시내버스 운전기사로 종사하여 오던 자인바, 1985년경부터 <백범일지>를 수차례 읽으면서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반면에 위와 같은 민족의 지도자를 암살한 안두희를 살해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사후 안두희의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그의 장례식장 풍경은 그가 살해한 뒤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던 김구는 말할 것도 없고 그냥 평범한 사람들의 장례식과 비교해도 초라하기 그지없었는데 그의 빈소에는 조문객이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상주도 없었는데 친척은 물론 가족들조차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정조차 없이 이름 석 자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고 아무도 오질 않으니 향도 피워지지 않았고 조화도 없었다. 조화를 보내려고 한 사람이 있긴 있었으나 장례식장에 받을 사람이 없어 무산되었다. 옆 빈소에서 다른 고인의 장례를 챙기던 장례지도사가 보다못한 나머지 안쓰러운 마음에 아무도 없는 빈소에 대신 촛불을 켜 주기는 했다고 한다. 그는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는 이런 빈소는 처음 본다, 너무 딱하다'고 얘기했다. 오죽하면 당시 뉴스에서도 대놓고 '암살범의 쓸쓸한 최후'라는 식으로 말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자업자득인 셈.
이 사건은 뉴스에 크게 보도되는 등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박기서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 각계 단체 및 개인들이 박기서의 안두희 처단을 응원하는 취지의 격려금과 편지들을 보냈다. 사회 각계 인사들이 '백범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 의사 석방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1997년 1월 22일에는 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용삼 등 서명자 9,200명의 명의로 인천지법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박기서를 위해 변론하겠다는 변호사도 줄을 섰다. 박기서의 아들이 다니던 태권도 학원 관장은 아들의 수업료를 면제해 주고 백범기념사업회에서 그의 아내에게 취업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박기서 본인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출소할 때까지 매달 100만원씩을 생활비로 받았다고도 한다.
게다가 박기서의 변론을 자청하는 변호인들이 줄을 이었고 그 가족들을 돕겠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판결을 내린 판사는 징역 3년이라는 매우 가벼운 형량의 판결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무죄를 선고하지 않았냐며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18] 이런 일화만 보더라도 그동안 안두희의 평판이 어느 정도로 나빴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기서는 각계각층의 탄원으로 법정형이 최소 5년형인 살인죄를 감경받아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후 1998년 3월 1일 3.1절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동년 3월 13일에 1년 4개월만에 출소했다. 오마이뉴스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그를 여러 번 인터뷰했다.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바로 죽일 생각이었으나 막상 대면하고 보니 안두희는 이미 병 들고 힘 없는 노인이어서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안두희의 눈을 보았는데 눈빛이 매우 날카로웠기에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역으로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범행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가족들은 인터뷰에서 평소 그가 이런 범행을 저지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면서 나중에 범행 사실을 알고는 매우 당혹스러워했다.[19]
한편 안두희가 사망하기 전 그를 추적하면서 김구 암살의 배후를 밝히려고 하던 몇몇 인사들은 그의 죽음으로 진상이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면서 다소 유감스러워하기도 했지만 안두희가 민족주의자들에게 수십년 동안 여러 번의 린치를 당했음에도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점, 이승만이 배후였다고 한 고백도 사실은 자신이 고문을 못 이겨 허위로 말한 것이라고 번복했던 점[20] 등 때문에 박기서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절대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4. 판결[편집]
1심에서 검사의 징역 8년 구형에 징역 5년이 선고되었으나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상고심이 기각돼 징역 3년을 확정했다. 살인죄의 법정 최저형량이 징역 5년임을 감안하면 징역 3년은 엄청난 선처인 셈이다. 당시 법원은 '박기서의 살인 행위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21]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는데 이것만 보면 원칙을 고수한 것 같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법조계가 박기서의 행위에 면죄부를 준 게 아니냐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당시에는 양형기준 제도가 없었지만 징역 3년은 현재 양형기준상 살인에 줄 수 있는 최저의 형량이다. 양형기준에 비추어 보면 안두희는 79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에 해당하며 안두희가 박기서 개인에게 뭔가 해를 끼친 것도 없기 때문에 살인범죄 양형기준의 제1유형인 참작 동기 살인에 해당하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제2유형인 보통 동기 살인에 특별양형인자인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가 겹쳐 적어도 10년형을 받았을 것이다. '참작 동기 살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더라도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 잔혹한 범행수법(둔기로 두들겨 패서 죽임), 반성 없음 등 특별양형인자의 가중요소가 산적해 있으므로 양형기준상 5년 이상의 형에 해당한다. 사실상 검사의 8년 구형도 어느 정도 가벼운 형을 구한 것이다.[22]
대법원 판결은 이러하다.(대법원 1997.11.14., 선고, 97도2118, 판결) 판결문상의 '피고인'이 박기서, '공소외 1'이 안두희다. 박기서의 행위가 정당행위(형법 제20조)에 해당하지 않아 위법성을 조각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판결요지에 포함되어 있다.
5. 루머[편집]
박기서가 당시 안두희를 살해하고 자수했을 때 그를 담당한 형사가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하면서 수갑을 채우지 않고 연행했다고 하는 뜬소문도 있다. 박기서가 팟캐스트 고상만의 수사반장 시즌 2에 출연했을 때 그러한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는데(해당 팟캐스트 내용) 본인의 주장일 뿐이다.[23]
다만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당시에는 박기서가 한 일에 대해 굉장히 대단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때문에 진짜로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었다. 무료 변호해 주겠다는 변호사, 선처를 부탁하는 사회적으로 지위 있는 사람들의 탄원서가 실제로 줄을 잇기도 했으니... 판사가 여론을 의식해 최저형을 선고했음에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금전적, 실질적인 도움을 받고 있을 정도로 사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기에 저런 경찰이 있을 법했다. 실제로 경찰에서는 그가 범행에 썼던 정의봉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살인에 사용한 무기는 몰수 후 폐기한다는 원칙을 깨고 범인에게 돌려주었다는 것은 이 사건이 경찰에게도 일반적인 살인 사건과는 매우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야사에서 수갑 채우지 않고 연행했다는 말이 돈 것도 이게 와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