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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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씨)
이름
기서
출생
1948년 12월 9일 (75세)
출생지
전라북도 정읍시
본관
반남 박씨[1]
직업
택시 기사
가족
부인 원미자, 슬하 1남 2녀
신체
160cm, 63kg
종교
가톨릭
범죄 유형
살인
1. 개요
2. 안두희 처단
3. 출소 이후의 근황
4. 세간의 평가
5. 정의봉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전북 정읍 출신. 일면식도 없던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를 직접 찾아가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그의 집에서 처단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안두희를 처단했을 당시의 직업은 버스 기사. 당시 사건을 다룬 1996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이후 1998년 3월 1일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동년 3월 13일에 수감된지 1년 5개월만에 출소했으며 이후로는 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다.


2. 안두희 처단[편집]


국부를 시해한 자가 세 치 혀를 놀리며 천수를 다하는 것을 그냥 놔둘 수 없었습니다.

인간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의 심정으로 (안두희를) 처단했습니다.


대법원 1997. 11. 14., 선고, 97도2118, 판결

처단한 시점인 1996년 당시 박기서는 48세로, 부천시의 버스회사인 소신여객버스 기사였다. 1995년, 박기서는 어느 날 초등학생용 백범일지를 읽은 뒤 민족정기를 해친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 거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에 매직으로 '정의봉'이라는 이름을 썼고 근처 문방구에서 장난감 총을 구입한 뒤, 사전답사했던 안두희의 집에 침입해 안두희의 부인[2]을 묶은 후, 자리에 누워있던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때려 죽였다. 범행 직후 본인이 다니던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했고, 고해성사를 담당한 신부는 토스트와 우유를 제공한 후 경찰에 자수하도록 전화를 걸어줬다고 한다.

범행 이후 구속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에서 1심에서 8년 구형에 5년이 선고되었으나, 최종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죄의 법정 최저형량이 5년임을 감안하면 징역 3년은 엄청난 선처인 셈이다. 당시 법원은 '박기서의 살인 행위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3]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밝혔는데, 이것만 보면 원칙을 고수한 것 같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법조계가 박기서의 행위에 면죄부를 준 게 아니냐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안두희'라는 요소를 빼고 보면 해당 사건은 48세 장년이 면식도 없던 79세 노인을 찾아가 잔인하게 때려죽인 사건이다.[4]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판사가 국민정서를 감안하여 엄청나게 관대한 판결을 했음에도 판결문을 읽어나가던 판사에게 일제에 부역하는 판사랑 뭐가 다르냐며 소리 친 방청객이 있었고 박기서측 변호인들도 무죄 판결을 선고했어야 했다며 사법부를 비난했다는 것이다.

안두희는 사실 1965년에도 곽태영이라는 김구 지지자에게 목을 찔려 살해당할 뻔 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살인미수에 그친 곽태영이 박기서보다 더 중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수감된 이후 1998년 3월 1일 3.1절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3월 13일에, 다행히도 그 3년도 미처 채우지 않고 1년 5개월만에 출소했다.

이 사건은 뉴스에 크게 보도되는 등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여론이 강세였던 사회적인 환경 때문에 일반적인 여론은 박기서를 옹호하는 쪽이었다. 박기서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 각계 단체 및 개인들이 박기서의 안두희 처단을 응원하는 취지의 격려금과 편지들을 보냈다. '박기서 구명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여기에 서명한 시민 수만 무려 9,000명이었다. 박기서를 위해 변론하겠다는 변호사도 줄을 섰다.

박기서의 아들이 다니던 태권도학원 관장은 아들의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백범기념사업회에서 그의 아내에게 취업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박기서 본인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출소할 때까지 매달 백만 원씩을 받았다고도 한다. 출소 후에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자리, 집 등을 제공받았다고 한다. 출소 후 원래 일하던 소신여객에 복직하여 얼마간 근무했고, 이후 택시 기사로 전직했다.

오마이뉴스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그를 여러 번 인터뷰했는데, 본인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바로 죽일 생각이었으나 막상 대면하고 보니 안두희는 이미 병 들고 힘 없는 노인이어서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안두희의 눈을 보았는데, 눈빛이 매우 날카로웠기에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역으로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범행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족들은 인터뷰에서 평소 그가 이런 거사를 행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면서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한편 안두희 사망 전 그를 추적하면서 김구 암살의 배후를 밝히려고 하던 몇몇 인사들은 그의 죽음으로 진상이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면서 다소 유감스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구를 살해한 악행이 그대로 자신에게 있는 안두희가 민족주의자들에게 수십 년동안 여러 번의 린치를 당했음에도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점, 이승만이 배후였다고 한 고백[5]도 사실은 자신이 고문을 못 이겨 허위로 말한 것이라고 번복했던 점(당시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장택상은 외무부 장관도 아니었고 야인이었다) 등 때문에, 박기서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도 죽을 때까지 끝내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박기서가 당시 안두희를 처단하고 자수했을 때 그를 담당한 형사가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하면서 수갑을 채우지 않고 연행했다고 하는 뜬소문도 있다. 박기서가 팟캐스트 고상만의 수사반장 시즌 2에 출연했을 때 그러한 말을 들었다고 회고를 했는데(해당 팟캐스트 내용) 본인의 주장일 뿐이라서 진위는 알 수 없다.

3. 출소 이후의 근황[편집]


2004년 각종 친일반민족성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김완섭을 구타하면서 불구속 입건된 적이 있다. 이때 구타당한 김완섭은 "박기서는 안두희 살해범 박기서가 아니라, 나 김완섭 구타범 박기서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는 말을 지껄였다. #

2011년 김삼웅 前 독립기념관장과 사진을 찍었다. 안두희 주살 15주년 기념 서울의 소리 인터뷰

2013년 8월 4일 장준하 관련 최고 의혹 용의자 김용환을 찾아가 따귀를 때리고 추궁하기도 했다. 이후 김용환이 박기서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하여 별다른 충돌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4. 세간의 평가[편집]


살해당한 피해자 안두희는 김구를 죽이고 나서 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1953년 소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군에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리고 제대 후 강원도 양구로 건너가 군납업자로 상당수의 재산을 축적하였다. 이렇듯 김구를 암살했음에도 잘 살고 있던 그를 대다수의 사람들은 좋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박기서에게 처단된 것은 지은 죗값을 뒤늦게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따라 박기서에게 호의적인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사고가 일어난 당시인 1996년대한민국1987년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을 통해 군사독재에서 벗어난 지 10년도 되지 않던 해다 보니 반일감정민족주의 열풍이 뜨겁던 때였고, 범죄자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지금에 비해 낮은 편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상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루머 또한 당시 박기서의 행동에 통쾌해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도 박기서와 관련된 기사에는 그를 칭찬하는 댓글들이 많이 올라오며 '반도의 퍼니셔, 다크나이트, 각시탈, 기서노트'라고 긍정적 희화화를 하는 표현도 있다.

오프라인에서도 국내 김구와 관련한 전시회나 시민단체들의 민족주의 고취 행사에 심심찮게 이 사람이 정의봉을 들고 있는 사진이 등장한다. 분명히 그는 적지 않은 한국인들로부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 시대의 의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하지만 그를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단순히 김구에 대한 평가나 정치 성향 때문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박기서는 엄연히 법의 테두리 밖에서 독단적으로 사적제재를 범했기 때문이다. 또한 법을 중시해야 할 법원이 엄연히 계획적인 살인사건에 대해 법정형보다 적은 선고를 내려 국민정서를 이유로 사적제재를 일정 부분 용인했다는 점에서, 평소엔 정당방위조차 잘 인정 안해주는 주제에 이 역시 민족주의가 과잉되었던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공정성과 객관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5. 정의봉[편집]


파일:견리사의견위수명.jpg

正義棒

정의봉 옆에 쓰인 글자는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논어 현문편 13장에 나오는 구절로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주어라' 라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 갇혔을 때 쓴 글로도 유명하다.

박기서가 안두희를 죽일 때 사용한 도구이다. 이 도구는 사건 이후 경찰이 증거물로 압수하였으나 재판 후 되돌려줬다. 살인에 사용한 흉기를 범인에게 다시 줬다는 점에서부터 이 사건이 일반적인 살인 사건과는 매우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파일:촛불문화제 정의봉 할아버지.png
앞서 서술했다시피 이 사건 이후로 '정의봉'이라고 써놓은 몽둥이가 시위나 집회 때 흔히 사용되곤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2016년 11월 12일 민중총궐기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다큐 3일에 직접 출연해서 인터뷰한 장면이 꽤나 화제가 되었다.

그 뒤 정의봉은 쭉 한지로 감싸서 박기서의 집에 잘 보관되어 있다가, 2018년 10월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역사의 한 자료로 보존되게 되었다.


6. 관련 문서[편집]


  • 국민정서법
  • 권중희: 박기서 이전에 안두희에게 사적 제재를 가한 인물. 안두희 처벌 탄원운동을 하던 권중희는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안두희를 쫓아다니면서 폭행을 통해 안두희의 증언을 유도해냈다고 한다.
  • 김구
  • 김다운: 이희진의 부모를 칼로 살해한 범인. 참고로 이희진은 수백억대 사기꾼으로, 사건이 일어난 당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사건 직후 많은 네티즌들은 박기서와 종종 비교를 하곤 했다.
  • 장대호: 장대호의 주장이지만 이는 엄연히 장대호의 잘못이다. 많은 네티즌들이 장대호와 종종 비교하는 글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 민족주의
  • 사적제재
  • 안두희
  • 범죄자/목록/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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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5세손 서(緖)자 항렬을 쓴다.[2] 이름은 김명희 사건당시 63세였다(동거녀라는 설도 있다). 슈퍼마켓을 가려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서성거리면서 대기하고 있던 박기서가 장난감 권총으로 위협하여 그녀를 밀어 젖히면서 다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안두희를 처단한 후 약 30분간 감금했다.[3] 대법원 1997. 11. 14., 선고, 97도2118, 판결의 판시사항이 '범행의 동기와 목적이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사람을 살해한 행위는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정당행위가 될 수 없다고 한 사례'이다.[4] 당시에는 양형기준 제도가 없었지만, 3년의 형은 현재 양형기준상 살인에 줄 수 있는 가장 최저의 형량이다. 양형기준에 비추어 보면 안두희는 79세의 고령이었기에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에 해당하며, 안두희가 박기서 개인에게 뭔가 해를 끼친 것도 없기 때문에 살인범죄 양형기준의 제1유형인 참작 동기 살인에 해당하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제2유형인 보통 동기 살인에 특별양형인자인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가 겹쳐 적어도 15년형을 받았을 것이다. '참작 동기 살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더라도,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 잔혹한 범행수법(둔기로 두들겨 패서 죽임)이라는 특별양형인자의 가중요소가 산적해 있으므로 양형기준상 5년 이상의 형에 해당한다.[5] 하지만 어떤 증거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