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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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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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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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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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 노태우 · 정호용 · 황영시 · 이희성 · 최세창 · 박준병 · 하나회 · 주영복 · 신군부 · 지만원 · 김대령 · 이주천 · 서석구 · 김진태 · 이종명 · 김순례
저항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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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
5.18
관련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 광주교도소 습격 조작 사건 ·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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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임을 위한 행진곡/논란 · 광주 폭격 시도 논란 · 전두환 손자 폭로 사건 (전우원)
왜곡 관련
5.18 민주화운동/왜곡 (북한개입설 · 무장폭동설) · 광주민주화운동 진보편향 명칭설 · '5.18 광수' 날조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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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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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blog-imgs-26-origin.fc2.com/kimwansup03.jpg
이름
김완섭 (金完燮)
출생
1963년 (60~61세)
전라남도 광주시 (現 광주광역시)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학력
살레시오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천문학 / 학사 중퇴)^
종교
가톨릭
가족
부모, 1남 2녀 중 첫째[1]

1. 개요
2. 행적
3. 친일반민족행위 옹호자로서의 행적
4. 사건과 논란
4.1. "독립운동가는 폭력집단" 발언 논란
4.2. 조선총독부 찬양
4.3. 고소 협박
4.4. 독도는 일본땅 발언
4.5. 반영남 지역감정
4.6. <창녀론>
4.7.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
5. 그 외
6. 저서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기자 출신 작가, 번역가, 문학 평론가, 언론인, 인터넷 논객이다. 1963년 現 광주광역시인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태어나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2000년대 당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대명사와도 같은 인물이며 여러 부적절한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인물이다.


2. 행적[편집]


살레시오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82년 서울대학교 이과 계열에 입학해 천문학을 전공하다 1989년에 중퇴했다. 서울대 노래 동아리 메아리에서 활동하였다. 학창시절 때부터 가톨릭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후 열성 가톨릭교도로서 관련 저서의 번역과 편집을 맡았다. 자칭 맑스예수의 제자라 불렀으며, 1987년까지 주사파로 활동하였다. 북한의 실상을 접한 후에는 주체사상에 회의를 느끼고 주사파 활동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 등으로 인해 수차례 투옥된 적이 있으며, 서울대 복학생 협의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이해찬 의원 보좌관으로 일한 적이 있다.

나중에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로는 서울대학교 82학번인 원희룡, 진중권과 동기였다고 한다. 물론 재학 당시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복잡하던 시대에 사회에 대한 참여는 없고 얌전하게 학교만 다닌 진중권이 지금 사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이야기를 했다.[2]

그러나 진중권은 유시민이나 심재철처럼 학생운동의 지도부는 아니었지만, 각종 시위나 집회에는 뻔질나게 참여한 인물로, 스스로도 "나는 그냥 되는 대로 따라다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와서 보니 학생운동의 역사에 남은 현장에는 꼭 내가 가 있었더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실제 진중권은 서울대 PD계열 운동권의 이론가로 학생운동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특히 조국, 이진경(본명 박태호)[3]와 함께 <주체사상비판>을 출판하면서 당시 운동권에서 광풍을 일으키고 있던 주체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졸업후에는 독일 유학 직전까지는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약칭 노문연)에서 활동했다.

진중권의 학자나 사회평론가로서의 능력이나 노선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4]하지만, 엄연히 학생운동, 사회운동 경력이 있는 사람을 얌전히 학교만 다녔다고 폄하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것은 국내에서 좌파 논객의 대표로 자리잡은 진중권에 대한 김완섭의 열폭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파일:external/www.study21.org/wanseop.jpg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 참가하여 민주화 유공자가 되었으며[5] 이때 계엄군에게 엄청 맞고, 몇 달 동안 구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하다가 풀려났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혔다. 1987년 12월에는 서울 구로구청 농성사건으로 또 수감된 바 있다.

1989년부터 '하이테크 정보', '소프트 월드' 등 잡지사 기자 등을 역임하다가 소설가, 문학 평론가로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3> 같은 컴퓨터 전문도서를 냈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의 진화>를 번역한 바 있다. 다른 한편 한국 사회 내부의 파시즘적 요소를 자의적으로 비난하는 책을 출간했다가 송사와 비판을 받았다. 1990년대 초중반 PC 통신 하이텔에서 활동했다. 당시 하이텔 ID는 자신의 영문 이름인 'WANSUP'.

이 시기에는 하이텔 내 서울대 통신망 '버들골'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처음에 운동권을 매개로 논란을 일으켰고 그 다음으로는 성 문제를 소재로 삼으면서 천리안의 극렬 페미니스트논객 신정모라[6]와 대립각을 형성했다.

1995년 '피씨 통신'지에서 발표한 '창녀론'이 화제가 되며 일약 문제 작가로 발돋움했다. 그 내용은 아래 내용을 참조. 이후 그해 9월에 그간 올려 온 게시글들이 분란의 소지가 있어서 하이텔에서 이용정지를 당하고 ID를 개명한 뒤 신생 PC통신 서비스인 나우누리로 이적했으나, 하이텔 시절이나 다름없는 행보로 인해 '불량이용자' 딱지를 달며 나우누리에서도 추방당하고 하이텔에서도 ID가 회복된 틈을 타서 복귀했으나 거기서도 추방당했다.

전체적인 행보의 흐름을 살펴 보면, 사상 혹은 성향의 일관성이 아니라, 운동권/사회운동 - 여성/성담론 - 친일문제 - ... 등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시점에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안에 관하여 의도적으로 논란을 촉발하는 모습으로 일관되어 있는데, 그 논란도 선도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거나 새로운 관점을 제창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핫토픽을 따라 다니며 작위적으로 반대 포지션을 취하는 행태로 노이즈 마케팅적인 모습을 보인다.

1997년 호주로 잠시 이주했으나, 1998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3. 친일반민족행위 옹호자로서의 행적[편집]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국민들을 속여 왔습니다. 역사를 날조해 착한 일본인들을 마치 강도였던 것처럼 매도하고 우리 민족의 황금기였던 일제시대를 마치 지옥이라도 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하지만 역사에 관한한 국민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도 세뇌당해 있습니다. 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그동안 속아 살아온 것이 너무도 분해서 며칠동안 잠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이같은 한국의 역사날조와 반일세뇌교육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진실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지난 2002년에 처음 나왔지만, 한국 정부기관의 탄압으로 인해 서점에서는 판매되지 못하게 되었고, 저자는 반일단체들의 잇따른 고소고발과 경검찰>의 편파적인 수사, 테러 등으로 인해 수배 상태에서 도피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서점들이 모두 >판매 금지시키고 매장에서 철수시켰기 때문입니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 저자소개에 나오는 김완섭의 글인 "한국인 여러분".


전에도 그런 기미가 더러 있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부터는 아예 대놓고 본격적인 친일파가 되었다. 2001년에는 '다음 칼럼'을 통해 <일본을 존경하는 마음>이란 인터넷 칼럼을 게재해 비난을 받은 바 있으며, 칼럼 내용 중 명성황후를 모욕하는 내용 때문에 여흥 민씨 종친회로부터 고소당해 이듬해 7월 불구속 기소됐다.

2002년 초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냈는데, 일제강점기를 합법적이라 주장하는 등 일제 침략을 매우 긍정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발간 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역사적 사실 왜곡 등을 이유로 청소년 유해매체물(간행물)로 지정'했지만,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논리 때문인지 일본에서는 이미 2001년 7월에 나온 후 4개월 각 무려 35만 부가 팔려 식민지 수혜론이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이 덕분에 쇼가쿠칸의 월간 <SAPIO> 지 2003년 1월 22일 ~ 2월 5일자 합본호에 그의 대담이 실렸으며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같은 일본 극우세력과의 거두와의 대담도 하였고, 일본에서 왜곡 교과서 발행을 주도하는 극우단체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사람들과 인맥을 쌓았다.

이 와중에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일본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고 하나, 문전박대당했다. 그런데 이것 자체도 본인 주장일 뿐이고 실제 신청을 했는지 여부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더구나 본인이 5.18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민주화 유공자임을 근거로 그리고 한나라당 비판등을 이유로 진보주의 세력임을 자칭 중이나 어떤 주장을 보나 진보와는 매우 거리가 있다.

그런데 더 웃긴 것은 일본어를 아예 못한다. 나라를 일제에 갖다 바친 친일파 이완용이나[7]

2003년에 다음 칼럼 및 <친일파를 위한 변명> 건으로 서울지법으로부터 벌금 700만원형을 선고받았고, 2005년에도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유관순 모욕 건으로 검찰에 기소됐다가 2011년 대법원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벌금을 물고 만다.

4. 사건과 논란[편집]



4.1. "독립운동가는 폭력집단" 발언 논란[편집]


위안부 문제 피해자들을 해외여행 겸 쾌락의 즐거움을 주었으니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며 욕되게 하고 유관순 열사를 폭력시위를 주도한 여자깡패, 안중근김구[8]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등의 행동을 하다가 독립운동가들의 명예훼손 혐의로 몇 번이고 소송에 걸려서 패소하기도 했다. 김좌진 장군을 '산적떼 두목'이라고 비방한 적도 있다.

"김구는 민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배포하여 검찰에 불구속 기소되었으며, 2008년 항소심에서 벌금형 750만원이 확정되었다. 김완섭은 2003년에도 김구, 유관순을 비방하여 사자명예훼손죄로 700만 원 벌금형에 처해졌다.

재판부는 김완섭에게 벌금형을 선고한 판결문에서 김완섭이 유관순이 주도한 시위는 폭력적이었다고 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유관순에 대한 판결문 및 번역본에 의해 당시 시위는 평화시위였음이 확인되는 바 김완섭의 기술은 허위사실 적시에 해당된다고 판결하였다.
 
또 김구에 대해서는 김완섭의 주장과 달리 김구는 한 일본인을 살해한 후 복역 중 탈옥해 국내 활동을 하다가 더이상 활동이 어려워져 사건 20년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사건 직후 체포를 피하기 위해 중국으로 도피했다고 김완섭이 표현한 것은 구체적 허위사실 적시명예훼손에 해당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다만 유관순을 '여자 깡패'라고 표현한 부분과 김구를 '조선왕조의 충견'이라고 표현한 부분, 그리고 김좌진을 '산적떼 두목'이라고 표현한 부분에 대해서는 개인적 의견 표명이나 논평에 불과하다고 판단, 무죄를 선고했다.

이것에 대하여 대한민국 법원김좌진을 산적떼 두목으로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의 표현이 개인적 의견 표현의 성격이 강하며, 당시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광복단이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강제력을 행사한 사실이 국사편찬위에 의하여 인정되므로 완전한 허위사실 적시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건에 한하여 일부 무죄 판결했다고 해명하였다.

이는 법리상 개인적인 의견 표명은 명예훼손이 아니라 모욕죄의 구성 요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산적떼 두목이란 표현은 충분히 모욕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할만한 언사이지만, 한국의 형법상 사자 명예훼손죄는 있으나 사자 모욕죄는 없기 때문에 무죄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김완섭은 법원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였다는 논지를 폈으나 엄연히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법에 명시되어 있는 사항에서는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 맞다.

그리고 꼴에 5.18 민주화운동은 자신이 참여했다고 여전히 민주화 운동으로 고평가하는 주제에 3.1 운동에 대해서는 종교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중이다.

2006년 2월 24일 쿠키뉴스와의 인터뷰에서는 왜 안중근을 민족의 원수라고 하는지 묻는 기자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평화주의자로 절대 조선의 병합을 바라지 않았다. 폭도 안중근이 이토를 암살하여 결국 일본이 조선을 핍박하게 만들었으니 민족의 원수가 아닌가"라고도 발언했으며 "한국인들은 수준이 낮아 내 책도 안 읽고 욕을 한다"라는 말을 했다.읽을 가치가 없으니 안 읽을거라 생각안하나?

4.2. 조선총독부 찬양[편집]


김완섭은 조선총독부의 총독정치가 조선의 근대화를 가져왔으며 덕분에 헐벗고 가난한 조선이 뒤늦게나마 발전을 했던 것이라고 하고 심지어는 조선 민족은 일본에게 감사를 해야한다는 망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덧붙여 조선이 해방되지 않고 총독정치를 통해 20년 즈음 더 지속되었다면 한국은 오늘날 일본의 은덕을 이어받아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인데 조선이 해방되고 총독정치가 끝나게 되어서 매우 슬프다는 발언을 했다.[9]

해방 직후 남한에 식민지 자산이라고 할 것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한국전쟁 이후 오히려 소득이 소폭 올라간 것을 생각해봐도 이것이 틀린 말임이 명백하다. 선진국이라는 일본에서 아직도 암암리에 행해지는, 전근대적인 풍습인 부락민 천대가 왜 한국에서 없어졌는지 생각해보라. 그만큼 식민지 기간동안 전국의 경제적 기반이 송두리째 뽑혀나갔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비록 냉전의 여파가 한국에 뻗쳤으며 신분차별을 없앨 정도로 크나큰 전쟁에 국토가 다시 박살나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냉전의 폐해지 한국이 일본에게서 독립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김완섭은 일제가 조선의 근대화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조선총독부 공식조사에 따르면 1933년 조선의 문맹률은 77%였다. 이후에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아서 미군정의 조사에 따르면 1947년 남한의 문맹률은 78% 정도로 추정된다. 일제는 조선의 보통교육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의 문맹률 조사는 자기 이름 석자 쓸줄 알면 문맹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처참한 수치가 나올 정도인데 이게 근대화인가??

게다가 김완섭의 희망과는 달리, 당시 실제 일본에서는 조선 지역 및 주민의 식민지 지위 유지가 비효율적이라 판단하여 아예 일본 영토로 만드는[10] 정식 병합을 추진 중이었고, 이에 따라 1946년 조선 지역 총선거가 계획되어 총독정치는 지속될 수 없었다. [11]

4.3. 고소 협박[편집]


2006년경, 김완섭이 다수의 네티즌을 상대로 고소를 운운하며 협박하기도 했다. 이에 대항해 당시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이 직접 김완섭을 비판하였다. 기사

사실 서울대 동기동문이기도 한 김완섭과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전 국회의원)간의 악연은 꽤 오래된 것으로, 김완섭 자신도 "원희룡 그 친구는 왜 자꾸 나만 갖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네요. 그러지 말라고 좀 전해주세요"라며 원희룡을 천적으로 취급할 정도다(출처). 이에 대해 원희룡은 "학교 다닐 때는 몰랐는데, 뭐 이런 동기가 다 있나 싶다"라고 말했다.


4.4. 독도는 일본땅 발언[편집]


2006년에는 개한민국 독도강점 55년째라는 칼럼을 인터넷에 퍼뜨리기도 했는데, 김완섭의 가치관을 파악할 수 있는 글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해당 칼럼이 삭제되고 없지만 디시인사이드 근현대사 갤러리에 박제되었다.(...) 접근 제한이라서 못들어간다.

요약하자면, "일제시대 조선은 전세계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인민의 낙원이었으며, 반일 파시스트 노무현은 독도에 대해 일본이 침략 전쟁으로 빼앗은 땅을 되찾았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본은 침략전쟁을 한 적도 없으며 개한민국은 국제공인 강도국이 된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4.5. 반영남 지역감정[편집]


지독한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경상도를 매우 싫어한다. 김완섭은 자신의 《창녀론》에서 "한국 사회의 모든 병폐의 근원이 경상도 남성들에게서 비롯된다"는 말을 했다. 단적으로 신종플루가 한참 유행할 때는 하느님 경상도 놈들이 한 5백만 정도만 죽게 해주세요라는 말까지 했다.

간혹 친일파는 곧 뉴라이트라는 선입견적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는데, 애당초 본인 스스로가 진보라 주장하며 뉴라이트와 담을 쌓고 있다. 거기에다가 한나라당을 욕한 일도 있다.

4.6. <창녀론>[편집]


이 책의 논지를 요약하자면 여성의 순결은 하나의 상품이고, 결혼은 남편이 아내와 태어날 자식의 양육을 떠맡는 대신 아내의 육체적 관계를 자유로이 할 수 있는 매춘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 비추어 매춘과 결혼의 차이는 일시불이냐 분할 납부냐의 차이다...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여성이 당당히 화대를 요구해야 남성과 동등한 위치를 점하며 '해방'될 수 있다고 김완섭은 주장한다. 책에는 김완섭이 여성들을 여러 번 희롱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대생들과 함께 MT를 가서 진실게임 비슷한 것을 했다고 한다. 그 중에 어떤 여대생이 아직도 처녀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자, 김완섭은 3학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처녀냐 라는 식으로 말해서 여대생을 울렸다고 한다.

또한 당시 산부인과 치료를 받던 노처녀가 치료 중에 자신의 처녀막이 파열된 것을 두고 병원 측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는데 김완섭은 미친년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 노처녀를 줄기차게 비난했다.

다만 좀 넓은 시각에서 보자면, 이건 김완섭의 순수한 독창적인 주장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하의 결혼과 가족을 보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관점에 강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엥겔스 역시 결혼제도를 남자가 여자에게 음식과 집을 주고, 대신 여성을 남성의 전속창녀이자 하녀로 만드는 제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주의 제도이니,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여 진성한 양성평등을 이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혁명론을 주창했다. 다시 말해, 이러한 개념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이라고 깐 것인데 비해, 김완섭은 성매매야말로 여성 해방의 궁극적 형태라는 아전인수식 주장을 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엥겔스가 그의 저서인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에서 주장한 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남편)의 전속 창녀이자 하녀> 인데 <이는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인한 병폐> 이므로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 <이러한 병폐를 해결해야 한다 =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써 존중받으며 대등한 결합을 이루어야 한다> 는 것이었고, 이를 <여성의 해방> 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즉, 엥겔스가 주장한 바는 간단히 요약하면 <여성이 남성(남편)의 전속 창녀이자 하녀인 상태를 벗어나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마르크스 생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조롱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재산(생산수단)의 공유를 주장한다고 알려진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그러면 너희는 아내도 공유하겠구나?> 라고 보수주의자들이 조롱하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건 너희가 너희 아내를 너와 대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네 소유물(재산)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아내도 공할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아내를 남편과 대등한 인간(인격체)로 존중하기 때문에 부부문제를 소유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고 받아친 것. 따라서 김완섭의 관점은 엥겔스의 관점과 아무 공통점이 없다. 문제 인식의 시작 부분에 유사점이 있기는 하나, 그 문제를 해석하는 관점은 정 반대인 것이다.

사실 여성주의자나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 자유지상주의자 중에서도 성매매(성노동)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러나 얼핏 보면 비슷해 보여도 김완섭은 기본적 관점 자체가 편향적으로 치우쳐 있기에 실질적으로는 정반대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12] 이쪽의 관점과 비교하자면 여성주의나 아나키즘,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에서 성매매/성노동을 포함한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의 차원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과 어떠한 형태로 성적 관계를 맺느냐는 자신의 자유이니 사회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것에 가깝다. 이 관점은 얼핏 보면 그나마 김완섭의 관점과 유사해 보일수는 있지만 이는 단지 김완섭이 창녀론에서 주장한 내용 중 일부분만을 떼서 비교했기 때문에 유사해 보이는 것이고, 후술된 바와 같이 해당 책에는 '성고문 가해자가 무죄'라거나 '직장 내 성추행 피해자가 오히려 비난받아야 한다' 와 같은 주장도 포함되어 있다. 당연하지만 이런 관점은 '성적 행위의 자발성' 을 전제로 하는 여성주의나 아나키즘, 자유지상주의적 관점과는 절대로 화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결혼한 여성은 단순히 아이를 낳아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가정 교육도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고, 본래 결혼은 남녀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양 집안의 결합이라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성매매=결혼이라고 등치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아내는 가정에서 선생님의 역할, 어르신을 돌보는 요양보호사의 역할, 가사 도우미의 역할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 했으니, 단순히 성적인 서비스만 제공하는 성매매 여성과는 대우가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김완섭이 이런 주장을 한 것에는 개인적인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김완섭이 서울대에서 천문학을 공부할 때 사귀었던 여자가 김완섭을 버리고 서울대 법대 출신의 법조인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그런데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사실 그렇다고 볼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김완섭의 주장을 살펴보면 매춘 및 포르노 산업을 국가에서 육성해야 한다, 문귀동(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가해자)은 무죄다, 우희정(서울대 신정휴 교수 성희롱 사건, 속칭 우조교 사건의 피해자)[13]은 욕을 먹어 마땅하다 등이다. 매춘과 포르노 산업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나 자유주의 좌파들도 그것을 국민의 혈세를 들여서 굳이 육성해야 한다고 하지는 않는다.[14][15][16] 이런 식의 논리는 마초적 관점에서 남성의 성욕 해소 수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에 불과하다.[17]

또한 사랑 없이 조건만을 따지는 매매혼을 비판하는 사람일지라도, 과도한 혼수 문화를 배격하고 스몰 웨딩을 정착시켜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성매매와 결혼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전통적인 관점으로 보면 결혼의 기능 중에 성욕 해소는 부차적인 것이었고, 어차피 사람은 혼자서 생존이 어려우니 신의로 관계를 맺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이 결혼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18] 결혼에 낭만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어르신 세대일수록 특히 신의, 의리에 방점을 찍는 경향이 있는데, 과거에는 설령 비즈니스 관계였다 할 지라도 의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고, 결혼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런데 성매매는 애초에 신의의리를 지킬 의무가 없는 관계이다.

결국 김완섭의 창녀론은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이자 남성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대상' 으로 보는 수구적/전현대적 남성우월주의 관점에 기반하되 그 수단에 대해서만 현대 급진주의자들의 주장을 접붙여놓은 기묘한 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정작 김완섭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는 "부모님이 더 나이 드시기 전에 2세를 안겨 드리고 싶지만, 나이도 적지 않은데다 빈털털이여서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19]


는 것을 몹시 의외라고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으나, 사실 이는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부모님이 나이드시기 전에 2세를 안겨드리고 싶다> 는 욕망 자체는 몹시 보수적인 가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는데, 김완섭 자신이 창녀론에서 보여준 관점은 이러한 보수적 욕망을 충분히 긍정할 정도로 보수적이다 못해 수구적이다. 다만 <나이도 적지 않고 빈털터리> 라는 약점 때문에 '보수적 남성상' 에 요구되는 부담을 감당하기는 힘들고, 따라서 자신이 져야 하는 부담에 대해서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현대 급진주의자들의 주장을 대폭 받아들인 것이라고 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즉, 일부 비뚤어진 대안 우파의 원조격인 셈.

4.7.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편집]


김완섭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책. 대표적으로 창씨개명은 모든 조선인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한 것이다란 말이 있으며, 이 책 하나로 김완섭의 이름을 한국과 일본 모두에 널리 알렸다.

김완섭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일단 이완용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점을 조명했다. 여기에 따르면 이완용의 장례식때는 이완용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여 10만이 넘는 참배객들이 왔다고 한다. 그 외에 김옥균을 비롯한 친일적 개혁가, 친일파(2번 항목)들을 긍정적으로 재조명했다.

그리고 한국이 일본에 쌀과 콩, 면화(목화)를 수출해서 큰 돈을 만졌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토지 신고제의 경우 전 농민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골고루 나눠주는 사회주의 제도보다 훨씬 합리적이지 않느냐며 옹호했다. 주장의 근거로는 주로 이영훈 교수나 안병직[20], 윤덕한의 자료를 인용한다. [21]

그런데, 한 TV 인터뷰에서 책의 주장들의 근거를 직접 묻자, "인터넷에 보면 많이 있어요"라고 답해버렸다.(...)

재조선 일본인 이야기가 하나있는데, 1945년 8월 15일, 한국의 고아들을 키워준 부산의 일본인 가즈오가 한국인인 자신의 양아들들에게 일가족이 참살된 이야기도 서술하고 있으며 그때 참가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보복이 두려워서 동참했다고 한다. 뭔가 요코 이야기 필이 나는 내용인데 참고로 저건 제대로 된 기록이 없고, 어디까지나 일본인이 보낸 이메일에서만 나온 이야기다. 어째서인지 그가 유포한 날조문이 일본 웹에서 절대로 검색해서는 안될 검색어중의 '가즈오 조선' 로도 돌고 있다. 사실 내용 자체는 소설/희곡작가 김성한의 단편에서 나오는 스토리를 그대로 따른 것이고 소설에서는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다. 일가족은 참살당하지도 않았고 일본인 목사만 죽었으며 아내는 조선으로 흘러들어와 소련군과 한국인 양아치에게 검열삭제를 당한 후 양아치 영감을 죽이고 자살한다는 이야기다. 원래 주제는 당연히 혐한이 아니고 인간세태의 부조리를 고발한 작품이다.

그리고 김구명성황후 민씨, 고종 등의 비사를 서술하고 있다. 저서에서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도와준 것이니 마땅히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라는 개소리를 지껄이기도 했다. 김구의 치하포 사건을 비난할 때, 국모의 원수라는 추정만으로 죽였다고 해서 흉악하다고 했다. 아무래도 치하포 사건 취조문을 안 읽어본 듯 하다.

이 책은 문예춘추사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으나, 물론 일본의 그 잡지사는 아니고 본인이 한국에서 설립하고 이름만 따왔다.

2004년박기서에게 구타당했는데 "박기서는 안두희 살해범 박기서가 아니라, 나 김완섭 구타범 박기서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고 지껄이기도 했다.


5. 그 외[편집]


김완섭이 아고라에 올린 글들[22]

행동 자체만 보면 역사 갤러리 유저와 판박이인데 그래서 역갤에는 김완섭의 발언이 자주 인용되곤 했다.

2009년, 광우병 사태가 있었을 때 나름대로 반대하는 의견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워낭소리의 불법 다운에 대해서 옹호하는 듯한 태도의 글을 썼다가 네티즌들에게 비판만 받았다. 김완섭 본인은 워낭소리를 마구 욕했다.

2014년에는 천안함 피격사건한국미국조작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는 글을 남겼다. 그러면서 선장 등에게서 발견되는 특정지역 사투리가 우연이겠느냐고 하는 등 또다시 지역비하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2010년대 말 이후로는 거의 잊혀진 수준이다. 김완섭이 글을 올린 지 2달 정도 됐을 때 '이제 관심도 못 받는구나 한심한 놈아' 라는 댓글이 달릴 정도였다.

2017년 12월에 다음 아고라에 작성한 글에는 2018년 7월이 되어서야 답글이 달렸고, 조회수도 150 안팤이다. 이미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다.

가족들이 여동생의 결혼식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김완섭을 부끄러워 한다는 증거이다. #

2020년 12월 현재 스타크래프트 여캠 방에서 비조리 또는 pizory라는 닉네임으로 별풍선을 쏘면서 여러 방에서 열혈팬이라는 칭호를 달고 활동하며, 와이고수에서 동일 닉네임으로 활동중이다. 한 여자 비제이가 본인이 응원하는 여캠에게 리그 오브 레전드 한 판 하자고 했다는 이유로 해당 여캠을 저격하고, 그 방에서 전화번호를 공개하며 어그로를 끌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이후 다시 와이고수에 글을 올리며 본인만의 억울함을 표출했다.


6. 저서[편집]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3(편역) - 기한재. 1991.
  • 정통해설판 한글 윈도우 3.01 - 하이테크정보 출판부. 1992.
  • 물리학의 진화(번역)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저. 과학세대. 1994.
  • 창녀론: 21세기형 인간을 위한 혁명적 여성이론 - 천마. 1995.: 2003년 춘추사에서 복간함.
  • 친일파를 위한 변명 - 문예춘추. 2002.: 일본판은 소시샤(草思社)에서 냈는데, 정치평론가 아라키 카즈히로(荒木和博)와 한국 연구가 아라키 노부코(荒木信子)가 번역했다.
  • 일한 '금단의 역사'(日韓「禁斷の歷史」) - 쇼가쿠칸. 2003.
  • 일한대토론(日韓大討論, 니시오 칸지와 공저) - 후소샤. 2003.
  •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 일제시대는 우리에게 축복이었다 - 춘추사. 2003.: 일본판은 2004년 후소샤에서 냈는데, 호시노 토모미(星野知美)가 번역했다.

7. 관련 문서[편집]





[1] 여동생 2명과는 나이터울이 꽤 된다고 한다.[2] 애초에 대학이란 곳은 소속 학과가 다르면 동아리 활동을 같이 했거나, 같은 강의를 듣는 게 아닌 이상, 서로 남남일 수 밖에 없다. 원희룡공법학과, 진중권미학과, 김완섭은 천문학과 출신이니, 만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일단 서로가 문과이과라는 차이도 있다[3] 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1987년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약칭:사사방)을 출판해서 당시 운동권과 사회과학계에 사회구성체 논쟁이란 파란을 일으켰던 사람이다. 이진경은 공안기관의 추적을 피해기 위해서 지은 가명으로 '이'것이'진'짜'경'제학이다의 약자.[4] 진중권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미학 전공자로의 전문성과 학문적 성취, 시사평론가로서의 팩트체크에 대해선 많은 논란이 있다.[5] 실제로 5.18 단체에서는 김완섭의 유공자 취소를 결의했지만 5.18유공자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6] 그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신정모라 문학서재’, ‘엄마성쓰기협회’, '통일시대 여성주의' 등의 개인 홈페이지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2010년경에 포털사이트 다음의 종북성향 카페 '태양계통신' 및 네이버 카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바로알기' 등지에 참여하여 종북 성향 게시글을 올려오다 2013년에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기사[7] 이완용은 일본어를 못했다. 대신 그는 영어에 능통했으므로 일본인들과 영어로 소통했다. 이토 히로부미도 영어가 유창했으므로 둘이 코드가 잘 맞았을 것이다.[8] 다만 김구의 경우 해방 후 백색테러를 저지르기는 했다. 또한, 김구는 무고한 일본인을 죽였다.[9] 참고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낙성대경제연구소 계열 학자들도 이런 개소리는 하지 않는다. 낙성대학파의 대표주자인 이영훈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모순된 체제로 이미 2차대전 이전에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었다고 평가했고, 김낙년은 일제가 남긴 경제적 유산은 사실상 없으며 한국의 경제성장은 해방 이후 제로에서 시작했다고 분석한다.[10] 그래서 포츠담 회담 당시에도 조선만큼은 유지하겠다고 버틴 것이다.[11] 이영훈이 지적한대로 식민통치 자체가 이미 한계에 봉착한 것이었다.[12] 더군다나, 왕이 많은 후궁을 거느렸던 조선 시대에도 연산군 같은 경우는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성욕만 추구한다고 비판을 받았다. 임금이 많은 후궁을 거느렸던 것은 어디까지나 자손을 많이 남기기 위한 것이지 결코 쾌락이 우선이 아니었다. 따라서 결코 결혼성매매와 동일한 개념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결혼제도를 신성하게 보는 입장이 아니라면, 그것 역시 포함하여 결혼과 성매매의 본질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즉 성적만족뿐만 아니라 가사노동+자녀생산을 여성이 제공하고, 경제적 부양 및 물리적 보호(사회적 차원에서의 병역)을 교환하는 거래가 되는 것이다.[13]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대학교 화학과 실험실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우희정 조교를 신정휴 교수가 지속적으로 성추행한 사건. 당시 우조교는 신교수로부터 원하지 않던 신체접촉을 수시로 당했고, 이것을 명백하게 거부하자 계약연장에서 탈락하였다. 우조교가 대자보로 성추행 사실을 폭로하면서 엄청난 사회적 관심을 불러모았다. 당시 가해자인 신교수가 우조교를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먼저 고소했고, 우조교가 신교수를 맞고소하면서 시작된 민사소송은 무려 6년을 질질 끈 뒤에야 신정휴 교수가 우희정 조교한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대법원 판결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조교는 엄청난 2차피해를 입었고, 결국 취업이나 진학에도 모두 실패하면서 인생이 망가졌다. 반면 신교수는 그뒤에도 계속 사회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학계의 학자들은 일제히 학교와 정치성향을 막론하고 모두 신교수를 옹호하면서 우조교를 매장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있었고, 정운찬 교수도 나중에 서울대 총장에 취임한 뒤에 신교수는 억울한 피해자라는 식으로 물타기해서 욕을 먹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성희롱이란, 성추행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 시킨 사례이다. 그 이전에는 성폭력 문제하면 강간만 생각했지, 성희롱이란 개념자체가 없었다.[14] 단지 현실적으로 박멸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합법화해서 공공의 감시에 두고 사회적 약자인 성노동자들의 인권침해를 막자는 주장이다. 더불어 성매매가 조폭의 자금줄이 되는 것을 막고, 지하경제 규모를 줄이는 효과를 기대하는 의견도 있다.[15] 21세기 들어서는 행복추구권의 일종으로 모두가 자유롭게 성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예를 들어 호주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섹스를 하기 힘든 장애인 전용의 성매매업소들이 있다. 여기에서는 공공기관에서 장애인 도우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성적유희를 제공한다.[16] 성매매나 포르노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가장 급진적인 관점조차도 그것이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했다면) 사회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지 '일삼아 육성할만큼 좋은 일이다' 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17] 성매매 특별법이 입법되었을 때도 전경련이나 여러 보수 세력, 남성들은 사회적으로 욕망을 처리할 하수구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는 성노동 해방을 주장하는 논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18] 과거에는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해야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19] 사실 20대 시절 한 번 다녀온 적이 있긴 있다.[20] 1980년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으로 NL(정파) 이론의 기초를 제공했으나, 이후 우익으로 전향해서 2000년대에는 뉴라이트의 대부가 된 인물이다.[21] 정작 이영훈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일제시대를 모순으로 가득찬 시대로 비판하기도 했다.[22] 다음 아고라 서비스가 종료되어 제목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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