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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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합의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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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eaeaea[[https://namu.wiki/thread/VenomousDustyUppityDog]] * 리다이렉트를 625 전쟁, 6·25 전쟁, 6.25, 한국 전쟁, 한국전쟁, 6.25전쟁, 6.25 사변으로 하고, 조선전쟁은 6.25 전쟁/인식 문서의 일본 문단으로 연결하기[[https://namu.wiki/thread/FreshBrainyNoiselessOrganization]] * '교전국 및 교전 세력'에는 일본과 멕시코를 등재하지 않으며, '물자 및 기타 지원국' 란에 '연합군 점령하 일본'과 '멕시코'를 등재한다. 효력을 위해 '교전국 및 교전 세력', '의료 지원국', '물자 및 기타 지원국'의 구분은 고정한다. * '연합군 점령하 일본'은 파일:연합군 점령하 일본 상선기.svg 연합군 점령하 일본, '멕시코'는 파일:멕시코 국기.svg 멕시코로 표기한다. * 각각 각주로 '물자 지원 이외에도 '멕시코와 미국 간 상대국 거주 자국민 병역에 관한 협정'에 따라 미국에 거주하던 멕시코 국적자들이 미군에 소속되어 참전했다. 6.25 전쟁/관련 기록 참조.', '물자 지원 이외에도 연합군 점령하 일본의 대원들이 기뢰제거에 투입되었다. 이외에도 미군의 해상운송 등에 연합군 점령하 일본인들이 동원되었고, 미군이 연합군 점령하 일본의 민간인을 대동하여 일부가 전투에 참가한 기록도 있다. 6.25 전쟁/관련 기록 참조.'라고 서술한다. * 각주 외 세부 정보는 넘겨주기한다.

참고사항}}}


6.25 전쟁 관련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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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ness World Records
파일:기네스 세계기록 로고.svg
Most countries to support an ally in war
(가장 많은 나라가 단일 연합국으로 참전한 전쟁 )

장소
(Where?)

대상
(Who?)

규모
(scale?)

등재 시일
(When?)

KOREA (REPUBLIC OF) (SEOUL)#
KOREAN WAR
67개국
2010년 9월 2일
Longest ceasefire without a peace treaty
(종전 없이 지속된 가장 긴 휴전)

장소
(Where?)

대상
(Who?)

규모
(scale?)

등재 시일
(When?)

KOREA (NORTH)#
SOUTH KOREA, NORTH KOREA
25324일(현재 진행형)
2011년






























































6·25 전쟁
六二五戰爭 | Korean War | A War in Korea
한국전쟁(韓國戰爭) | 조선전쟁(朝鮮戰爭)


6·25전쟁 전개도
기간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20분경 ~ 현재[1]
(1953년 7월 27일 22시 이후 25324일간 정전 상태)
장소
한반도 본토 및 연안과 부속도서 일부[2]
원인
김일성적화통일 야욕에 따른 북한군의 남침
교전국 및 교전세력
파일:UN기.svg 유엔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14px-Hammer_and_sickle.svg.png 공산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파일:벨기에 국기.svg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3]
파일:룩셈부르크 국기.svg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4]
파일:필리핀 국기.svg


파일:태국 국기.svg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파일:호주 국기.svg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파일:에티오피아 제국 국기.svg

[5][6]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파일:그리스 국기(1863-1924, 1935-1973).svg 그리스 왕국[7]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8]
파일:북한 국기.svg


파일:중국 국기.svg

[9]
파일:소련 국기 (1936-1955).svg 소비에트 연방[비공식]
의료 지원국
파일:스웨덴 국기.svg 스웨덴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A]
파일:덴마크 국기.svg 덴마크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노르웨이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10]
파일:독일 국기.svg 서독[11]
파일:동독 국기.svg 동독
파일:루마니아 인민공화국 국기(1948-1952).svg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헝가리 인민 공화국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A]
파일:폴란드 국기.svg 폴란드 공화국
물자 및 기타 지원국[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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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만 국기.svg 대만
파일:에콰도르 국기.svg 에콰도르
파일:쿠바 국기(1902-1906, 1909-1959).svg 쿠바 공화국[1]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아르헨티나
파일:코스타리카 국기.svg 코스타리카
파일:멕시코 국기.svg 멕시코[2]
파일:도미니카 공화국 국기.svg 도미니카 공화국
파일:팔라비 왕조 국기.svg 이란 제국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파일:레바논 국기.svg 레바논
파일:라이베리아 국기.svg 라이베리아
파일:리히텐슈타인 국기.svg 리히텐슈타인
파일:모나코 국기.svg 모나코
파일:바티칸 국기.svg 바티칸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베트남국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사우디아라비아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자치령
파일:연합군 점령하 일본 상선기.svg 연합군 점령하 일본[3]
파일:스위스 국기.svg 스위스
파일:이집트 왕국 국기.svg 이집트 왕국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스페인국
파일:버마 연방 국기.svg 버마 연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Syria_%281932-1958%3B_1961-1963%29.svg.png 시리아[4]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인도네시아
파일:아이슬란드 국기.svg 아이슬란드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헝가리 인민 공화국[5][6]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엘살바도르
파일:아이티 국기.svg 아이티
파일:페루 국기.svg 페루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우루과이
파일:베네수엘라 국기.svg 베네수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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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몽골 인민 공화국 국기.svg 몽골 인민공화국[1]

교전 및 지원 의사 표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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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만 국기.svg 대만[1]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스페인국[2]
파일:니카라과 국기.svg 니카라과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볼리비아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지휘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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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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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포레스트 P. 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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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호이트 반데버그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나프탄 F. 트위닝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토머스 D. 화이트
파일:UN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더글러스 맥아더
파일:UN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매슈 리지웨이
파일:UN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월튼 워커
파일:UN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제임스 밴 플리트
파일:영국 국기.svg 조지 6세
파일:영국 국기.svg 엘리자베스 2세
파일:영국 국기.svg 윈스턴 처칠
파일:영국 국기.svg 클레멘트 애틀리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921-1957).svg 루이 생로랑
파일:호주 국기.svg 로버트 멘지스
파일:터키 국기.svg 아드난 멘데레스
파일:터키 국기.svg 타흐신 야즈즈
파일:에티오피아 제국 국기.svg 하일레 셀라시에
파일:에티오피아 제국 국기.svg 케베데 게브레[1]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뱅상 오리올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파일:벨기에 국기.svg 레오폴드 3세
파일:벨기에 국기.svg 보두앵
파일:벨기에 국기.svg 조제프 폴리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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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필리핀 국기.svg 엘피디오 키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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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콜롬비아 국기.svg 라우레아노 고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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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최소 92만 명[14]
+전투 협조 병력
약 120만여 명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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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
1951년 1월 4일 1.4 후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1972년 7월 4일 7.4 남북 공동 성명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월 15일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월 4일 10.4 남북공동선언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선언
2018년 9월 19일 9월 평양공동선언

현황
휴전[15]
영향
미소 주도의 냉전 체제 가속화
분단 고착화와 남북 체제 대결 심화
남북 독립 체제 수립
휴전선 형성
이산가족 발생
한국의 징병제 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피해규모
• 군인 170,927명 전사, 32,585명 실종[16], 566,434명 부상
• 민간인 100만여 명 사상 추정
• 민간인 납북, 월북
• 공업 기반의 절반 소실, 30억 달러 또는 국부의 1/4 손실[17]
• 군인, 민간인 최소 250만여 명 사망[18]
• 민간인 월남
•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 공업의 70% 소실

파일:attachment/k28_12040357.jpg
1951년 퓰리처상 수상작
무너진 다리를 건너 탈출하는 피난민들,
맥스 데스퍼[19]


6.25 전쟁 이후
D26452일

1. 개요
2. 명칭
3. 전개
4.1. 유엔군
4.1.2. 미국
4.1.3. 캐나다
4.2. 공산군
5. 기타
6. 관련 자료
6.1. 학계
6.2. 군사적 자료
6.3. 다큐멘터리
7. 관련 작품
7.1. 문학
7.2. 영화
7.3. 드라마
7.4. 뮤지컬
7.5. 만화, 애니메이션
7.6. 게임
7.7. 노래
7.8. 미술 작품
7.9. 동영상
8. 관련 사건
9. 어록
10. 외부 링크
11.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국군[20]


독립문에 올라가 환호하는 중국 인민지원군[21][22]
파로호로 도망치는 중공군을 추격하는 국군
6·25 전쟁() 또는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치밀한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대한민국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하여 발발한 전쟁으로 유엔군중국 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한 국제전으로 비화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1129일)간 교전이 이어졌으며, 현재까지 72년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역이용해, 극동아시아의 미소 냉전 사이에서 승기를 잡으려 한 의도가 있어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한다.[23]

6·25 전쟁은 김일성의 강한 주도로 발발한 전쟁이며,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미국의 강력함에 혀를 내두르고 있어 직접 충돌을 꺼렸다. 그래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으나 국제정세에 문외한인 김일성은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려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허락을 받아 내고 전쟁을 일으켰다.[24][25][26] 김일성이 없었더라면 발발하지 않았을 전쟁인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6·25전쟁의 평화 협정(Peace treaty, 종전 협정 또는 강화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아직도 진행 중인 전쟁이지만 현재 남북 양측의 국민들에게는 전쟁 중이라는 인식은 드물다. 이는 법적으로는 평시(平時)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시(戰時)에 시행되는 비상 법령을 계속 발동하기에는 유례 없이 긴 휴전이 지속되고 있는 중이라, 준전시(準戰時)라는 특수한 대치 상태로 구분된다. 대법원의 판례는 지금이 '전시'인지 '평시'인지 명확하게 입장을 내린 적이 없으며 사안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국회 또한 그렇다. 대표적인 사례로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과 남북 관계의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남북의 지도자가 전쟁 상대인 적대 세력 원수를 만나고 스포츠 행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등의 일도 이러한 특수한 상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비록 휴전 중이라고 하나 6·25 전쟁은 아직까지 종전되지 않았고, 전쟁이 지속 중인 상태이다. 참고로 2022년 6월 25일은 6·25 전쟁 발발 72주년이며, 휴전 이래로도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틀:대한민국의 대외 전쟁ㆍ전투 참조)[27]이 있고 징병제가 유지되는 등 아직 전쟁이 유효함을 어느정도 실감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이후 당시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사이의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한 사례 중 하나로 꼽히며,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받아 남한을 침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 중에는 그나마 가장 최근에 벌어진 전쟁이기도 하다.

6·25 전쟁에서 각각 통일에 실패한 대한민국북한은 이후 한반도의 정통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걸고 체제 대립을 하게 되었고, 이는 국가 운영과 국민 여론 및 국민의식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 이 전쟁으로 굳어진 각 체제(體制, Regime)는 유지되고 있다.

한편 일본은 이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하였고[28], 제2차 국공내전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내몰린 대만중국이 병력을 한반도로 투입하는 바람에 살아나게 된다. 반면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이루는 데 실패하고,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규정되어 20년 넘게 외교적 고립을 면하지 못하는 등 현대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확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6·25 전쟁의 원인으로는 외적 기원(김일성 또는 스탈린의 기획, 제2차 세계 대전 후유증인 냉전, 일제 강점기 악영향 등)과 내적 기원(내전의 확대, 남북한 모두에 부정부패, 갑질이 만연하는 등), 더한 복합적 요인으로는 보는 경향이 크다. 또한 제1세계 vs 제2세계로 대립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 최대의 국제전쟁이다.

2. 명칭[편집]


일반적으로 전쟁은 분쟁의 주체, 전투는 발생한 장소를 그 명칭으로 쓴다. 반면 이 전쟁은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발발한 날짜가 전쟁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및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공식적으로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민간에서도 관습적으로 날짜-사건을 조합해 6·25전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방송공사에서는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으로 표기하고 있다.[29]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정전협정 체결일인 7.27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이라고 포장하여 매년 열병식등의 행사를 주최하여 기념하고있다. 당시 북한에서는 남측을 미국의 괴뢰정권, 미국의 하수인들이 지배하는 악의소굴, 미군정의 지배하에 놓여있는 침략당한 영토라는 기준으로 보았기 때문에 남쪽에 잔존하는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조국의 남반부를 해방시키자는 의미에서 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다닌다.

영어로는 The Korean War라고 부른다. The Forgotten War라고도 한다. Korean War라는 이름은 제1세계 진영에서 전쟁을 주도한 UN군 사령부에서 붙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한국전쟁'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명칭 외에도 6·25전쟁을 호칭하는 몇몇 어휘들이 있는데, 가령 북한에서는 조선전쟁 혹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한편 중국에서는 조선전쟁 혹은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의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임진왜란을 부르는 표현은 보통 '만력조선지역'이지만,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战争)이라고도 한다. 이는 왜적에 대항해 (명나라가)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로 6·25를 의미하는 항미원조와 대상만 다르다.[30] 중국 측이 6·25전쟁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전쟁을 중립적으로 바라보고자 할 때에는 조선전쟁(朝鲜战争)이라 칭한다.

일본에서는 조선전쟁(朝鮮戦争, 초센센소), 조선동란(朝鮮動乱, 초센도란) 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한국(韓國)을 한반도 남반부의 국가(대한민국)에 한정된 의미로 보고 아직도 조선(朝鮮)을 '한반도' 혹은 '한민족'을 일컫는 말로 쓰기 때문에 '조선전쟁'이라는 용어를 쓴다.

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한전(韓戰)이라고 부른다. 대만에서는 베트남 전쟁도 월전(越戰)으로 부르고 있다. 다만 대만에서도 지명으로서는 조선(朝鮮)이 더 익숙하기에 민간에서는 조선전쟁(朝鮮戰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52년 공보처에서 발간한 정부 간행물 "6·25사변 피살자 명부"와 1952년 국방부에서 간행된 정부 간행물 "한국전란지"로 표현되기도 했다. 행정 관서에서는 주로 '6·25'로 표기했다. 1973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제정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도 6·25사변일(六二五事變日)이 등장하고, 2014년 3월 24일에는 6·25 전쟁일로 개정되었다. 반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한국전쟁이 등재되어 있다. 민간에서는 전쟁이 발발한 날짜를 근거로 6·25 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6·25사변 또는 6·25 동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6·25전쟁이란 말은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단어로 한국인(남한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하나 국제적으로 통용되지는 않는다. 한편 국제적으로 (영어권에서) 통용되는 Korean War라는 명칭은 객관성 중립성을 보여준다고는 하나, 그 번역어인 '한국전쟁'은 엄밀하게 말해 중립적이지는 않다. 전쟁의 한쪽 주체인 북한에서 스스로를 '한국'이 아니라 '조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한국학계에서는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서 대체로 6·25전쟁 또는 한국전쟁으로 쓰인다.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6·25'라는 명칭을 통해 우리가 얻을 교훈은 북한의 '적화 야욕'을 경계하고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하자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우리는 이제 이런 단세포적인 역사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6·25라는 용어는 사건 발생일을 기준 삼아 단일의제로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냉전시대 절대적 사유체계로서의 6·25 담론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명섭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009년에 『한국정치외교사논총』에 발표한 논문에서, The Korean War를 “한국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과 ‘한국’이 가지는 역사적, 개념적 차이를 간과한 것으로 기계적인 번역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통일이후 ‘조선’이나 ‘한국’을 대신할 새로운 국호가 등장하거나 혹은 한국이라는 국호가 계속 사용될 것을 가정한다면, 그 때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명명이 적당하다고 볼 수 있느냐고 문제제기 하였다. 또한 7월전쟁, 8월전쟁, 겨울전쟁 등과 같은 다른 나라의 전쟁명명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사건발발 날짜를 기준으로 명명하는 것은 오히려 자국 민중의 경험이 온축되어 있는 동시에 가장 객관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할 경우 '한국전쟁'은 ‘남한전쟁’, ‘한국이 일으킨 전쟁’ 같이 전쟁 발발 주체가 모호해지거나 전도될 우려가 있다면서 6·25전쟁이라 부르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6·25가 당시 미소 냉전체제 하에서 국제전의 성격을 띤 점을 감안하면 이 전쟁의 영문 표기는 ‘The 6·25 War in Korea 1950-53’ 혹은 ‘The Communist War in Korea 1950-53’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2

노무현정부에서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바 있는 서동만 상지대학교 교수 역시도 “한국전쟁은 분명히 잘못된 명칭이기 때문에 더 이상 쓰지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대한민국의 약칭이기 때문에, 한반도 전체를 무대로 남북이 모두 당사자인 이 전쟁의 성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전쟁의 무대, 전장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반도 전쟁’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하지만, “더 적합한 명칭을 찾을 때까지 잠정적인 것으로서 일부 연구자들이 제안한대로 6∙25전쟁이라는 명칭이 적절하다”고 주장하였다.

국방부에서 발간한 군 공식 간행물을 보면 1952년부터 2004년까지 발간된 서적은 제목이 ‘한국전쟁’으로 되어 있었지만, 2004년부터 '6·25 전쟁'이 사용되기 시작해 2005년부터는 6·25 전쟁 한 가지만 사용하고 있다.[31] 국방부 지정 공식 용어가 과거에는 한국전쟁이었으나 2004년부터 6·25 전쟁으로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 중인 단행 자료를 검색하면 1980년 이전에 발간된 자료 중 제목이 한국전쟁으로 되어 있는 자료는 제목이 6·25로 되어 있는 자료보다 2배가 더 많이 검색되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출판계나 학계에서도 '한국전쟁'이란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32]

한국의 역사에서 벌어진 전쟁이 6·25 전쟁만 있는 게 아닌데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혼동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고, 6·25가 사건의 성격을 포괄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5·18 민주화운동이나 6·10 만세 운동 등도 바꿔야 하느냐는 지적도 있다. 유럽에서도 2월 혁명이나 7월 혁명처럼 사건이 발생한 시기에 근거해 명칭을 부여한 예가 존재하므로 6·25 전쟁이라고 쓰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역사적 용어는 해당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즉 역사관이 반영된 것으로서 날짜 또한 그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군사적인 충돌의 의미를 가진 'conflict'라는 단어를 사용해 6·25 전쟁을 지칭했다. 6·25 전쟁이 대규모 국제 전쟁으로 비치면 안된다고 봤던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 의원들에 의해 'war'라는 단어의 사용이 사실상 금기시되었다. 6·25 전쟁이 World War III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6·25 전쟁이 '전쟁이지만 전쟁같이 느껴지지 않도록' 이를 축소하여 지칭한 것이었다. 당시엔 'Korean Conflict'라 불렸다.[33][34]후에 6·25전쟁이 정치인들의 손에서 역사가들의 손으로 넘겨질 때쯤, 'war'가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과 북한이 싸웠다고 해서 남북전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미국의 내전[35]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져 있는 데다, 남북으로 갈라진 (적이 있는) 곳이 한국과 미국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36] 쓰이지 않는다.

3. 전개[편집]


The attack upon Korea makes it plain beyond all doubt that communism has passed beyond the use of subversion to conquer independent nations and will now use armed invasion and war. It has defied the orders of the Security Council of the United Nations issued to preserve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I know that all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will consider carefully the consequences of this latest aggression in Korea in defiance of the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A return to the rule of force in international affairs would have far-reaching effects. The United States will continue to uphold the rule of law.

대한민국에 대한 이러한 공격(북한의 공격)은 공산주의가 독립 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체제전복이라는 수단을 넘어 이제는 무장침략과 전쟁을 사용할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국제평화와 안보를 지키기 위한 UN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또한 무시하였습니다.

(중략)

저는 UN에 소속된 모든 국가들이 유엔헌장을 무시한 채 한국에 대한 침략의 결과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려할 것이라 봅니다. 국제관계에서 힘에의한 통치로의 복귀는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미국은 계속해서 법치를 지킬 것입니다.

해리 S. 트루먼. 1950년 6월 27일 연설문#


한국전쟁은 중소 양국의 흉도와 사주밑에 북괴의 기습침략으로 발발된 민족공통의 참화이며 수난이었다.

한국전쟁사1:북괴의 남침과 서전기, 국방부, 1977년, p.17#


이 전쟁은 북한의 남침에 의한 남북한간의 민족전쟁의 성격과 소련의 세계 공산화 전략의 성격을 지닌 전쟁이었으며, 비록 전장이 한반도에 국한되었지만 남침 이후 20개국의 전투부대가 참전함으로써 양대 진영간의 국제전적인 성격을 띤 전쟁이었습니다.

6.25 전쟁사 1권, p.5 #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김일성의 한반도 무력 통일 구상이다. 스탈린이 전쟁을 주도했다는 주장, 내전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어느 누구도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내의 경우 한국전쟁의 원인을 김일성이 주도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선 한국전쟁에 대해서 해주진공설을 기반으로 남한의 북침설과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남침유도설이 있으나 이러한 유도설은 오래전에 이미 논파되었다. 한국에서는 90년대에 갑자기 이런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이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당시 국내에서 한국전쟁에 대해 김일성 및 공산권의 야욕에 의한 기습남침으로만 규정되 있었다가 87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조사 중에 여러 서적들이 국내로 들어왔는데, 이 중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등에 남침유도설 등이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남침유도설은 수많은 반박자료에 의해서 논파되었다.

2010년 이후 국지전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6·25 전쟁을 외적 기원(김일성 또는 스탈린의 기획)과 내적 기원(내전의 확대)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발생한 것으로 보는 복합 기원설에 국제적으로 힘이 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37]에서 6·25 전쟁에 대한 명확한 원인과 기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이 대립하고 있으며, 주류 역사학계의 정설은 존재하지 않는다.[38]

소련은 직접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하지는 않았지만 만주의 북한 비행학교에서 소련 전문가들이 조종사 양성에 참여했였으며, 북한의 기초적인 군사교육을 담당했다.6.25 전쟁사. p.544 심지어 일부 파일럿들을 중공군으로 위장시켜 투입까지 하였다. 이 파일럿들의 통신이 감청되기도 했지만 소련이 개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미군과 UN군에서는 이를 일부러 모른 척 했다. 6·25 전쟁이 무조건 한반도 내의 국지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 입장에서는 자꾸 전쟁을 키우려고 하는 맥아더가 굉장히 위험한 인물로 인식되었다. 당시 맥아더는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장제스와 함께 중국 해안에 상륙하자는 작전을 구상했다고 한다.

결국 트루먼에 의해 해임된 맥아더는 일단 전쟁 영웅으로 미국에 귀국하지만 이후 미 의회 상원위원회 청문 과정에서 그 진실이 드러나 명예가 실추됐다. 한편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전되면 안 된다고 봤던 사람은 트루먼뿐만이 아니었다. 세간에 공개된 스탈린의 서필에 의하면, 스탈린 역시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전될까 봐 노심초사했다.[39][40] 양측 모두 확전의 두려움에 자기들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전쟁 억제력을 확보해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은 것이다.

3.1. 전쟁 발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전쟁 발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전쟁의 전개[편집]





3.3. 미군의 참전과 역할[편집]





3.4. 전쟁의 영향[편집]





3.5. 전쟁에 대한 인식[편집]





3.6. 관련 기록[편집]





3.7.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편집]





4. 전쟁범죄[편집]



4.1. 유엔군[편집]


※ 유엔군, 국군, 미군, 우익이 저지른 학살 행위는 6.25 전쟁 학살/유엔군, 국군, 미군, 우익 문서 참조.


4.1.1. 대한민국[편집]


6.25 전쟁 당시 호남 지역의 학살 피해자는 8만 4003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학살 피해자 12만8936명의 65%에 이른다. 이는 극심한 좌우대립의 결과로서, 이 지역에 내재해있던 지주-소작농 갈등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대한민국 통계연감(1953년)」 내무부 통계국.

지난 세기에는 독재 정권이라서 진상 조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이유와 반공이 국시였던 점으로 인해 북한의 사악함과 국군의 영웅적 희생을 강조하기 위해 냉전이 끝날 때까지 은폐되었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군도 전쟁 범죄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전라도는 그 역사적 특이성[41]과 복잡함으로 인하여 좌우대립이 극심했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사실 양반들이 6.25 전쟁으로 망했다는 옛날의 믿음[42]과 달리 전라도 양반들조차 물론 피해를 크게 입은 사람들도 있으나 오히려 자신들을 적대하는 사람들에게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히고도 멀쩡한 사람들도 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혐오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에 대비한 만만치 않은 상대였기 때문에 공격자나 범죄자 혹은 무고한 사람들[43]에 대해 거의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대표적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있는데, 대한민국 국군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단체에 의해 10만~30만 명의 38선 이남 거주 대한민국 국민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그나마 유엔군이 전쟁 범죄 행위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살을 저지르는 한국군 및 경찰을 유엔군이 저지하여 목숨을 건진 케이스는 있다. 영국군이 서울 홍제리 집단총살 사건 당시 추가적인 학살을 막은 사례 등.

그 외에도 한강 인도교 폭파, 소년병 징집,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 있다.

다만 이런 학살들에 관련된 내용들은 아직도 대다수 국민들이 모르고 있는데, 한국 정부에서 이런 사실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44]


4.1.2. 미국[편집]


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문서에 나와있듯 한반도 전역에서의 미군의 전술, 전략 폭격은 큰 민간인 사상자와 영향을 남겼다. 예를 들면 서울 일대 폭격으로 1950년 6월부터 9월까지 4,280명의 서울 시민이 사망했는데 이는 서울시 사망자의 24.8%다. 이는 서대문구, 중구, 용산 같은 인구 밀집 지역에 폭격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서울은 용산과 종로, 중구 정도만 서울이었고 나머지는 다 경기도였기 때문에 서울 전체를 폭격한 것. 민간인에 대한 폭격 문제는 최근 미국의 기밀문서들이 비밀 유지 기한이 풀리면서 당시 폭격기나 전투기 조종사가 쓴 비행 일지가 드러나며 밝혀지고 있다.

국군, 북한군, 중국군은 물론이고, 미군 스스로가 저지른 학살까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모조리 사진과 자료로 남겼다. 그렇게 남은 미군의 대표적인 학살 사건은 제1기병사단이 했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다. 그 밖에 세균전을 행했다는 의혹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으며 미국 측도 이를 부인하고 있다.

최근 민간에서 진행된 조사로 미국이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에 생각보다 더 깊이 개입했음이 밝혀지고 있으나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는 이승만 정권 범죄보다 미군 범죄 규명에 소극적인 경향이 있기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승만 정부가 이들을 대전형무소에서 미군이 운전하는 미군 트럭에 싣고 와 미군이 촬영하는 감독 하에 대량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학살이 '미군 몰래' 자행된 게 아니라 '미군의 지휘 아래'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손호철


4.1.3. 캐나다[편집]


한국전쟁 당시 캐나다군 또한 양민을 대상으로 학살과 전쟁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다. 아래의 기사는 캐나다 빅토리아 대학교 존 프라이스 교수가 밝혀낸 자료다. 한국전 때 ‘캐나다군 범죄’ 캐는 프라이스 교수


4.2. 공산군[편집]


※ 공산군과 좌익이 저지른 학살 행위는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 문서 참조.


4.2.1. 북한[편집]


소위 인민재판으로 알려져 있는 행위가 가장 유명하다. 각 점령지역의 주민을 학교 운동장이나 마을 입구등으로 소집해 모아놓고 자신들이 체포하거나 납치한 인물들을 형식적 재판이후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이때 처형당한 인물들은 기업인, 교육자 정치인, 대한민국 군경 및 공무원 가족 등 북한과 좌익세력에 의해 반동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다.

이외에도 서울대병원 학살사건, 서천등기소 학살 사건,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 함흥시 학살 사건 등 인민재판이라는 형식적 절차조차도 없이 자행한 학살들도 빈번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 탄압과 학살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에 의해 개신교인 1,026명, 천주교인 119명이 희생되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정지용, 손진태, 박열, 정인보, 이광수, 방응모 등 유명 인사들을 납북하였다. 납북자의 88.2% (84,659명)가 한국 전쟁 발발 이후 3개월(1950년 7월~9월) 동안에 납북되었으며, 그중 80.3% (77,056명)가 자택이나 자택 인근에서 납치되었다. 납북된 한국 인사 중에는 법조인이 190명, 교수 및 교원이 863명, 언론인이 226명이었다.[45] 또한 이러한 납치의 기획은 전쟁 중에뿐만 아니라 전쟁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생산된 북한 당국의 문서에서도 확인이 된다.[46][47]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그 외에 국군, 유엔군 포로에 대한 처우가 매우 처참했다. 전방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은 2~4주씩 걸어서 가깝게는 평안북도 멀리는 중국 만주지역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이때 부상을 입은 포로의 경우 들것 수송이 금지되어 걷지 못하면 길에 버려져 죽거나 사살당하는 일이 있었다. 포로들에 대한 배급 역시 열악하여 말린 채소 소량 혹은 부패한 생선 따위가 배급되었고 이마저도 이송시에는 제공되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 휴전 이후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은 적대계층으로 차별받으며 중노동에 시달렸다.

전면 남침으로 6·25 전쟁을 일으켰으며, 정전 협정을 한 뒤에도 협정을 위반하고 계속해서 대남 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4.2.2. 중국[편집]


흔히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들먹이며 중국군은 범죄가 없는 깨끗한 군대였다는 환상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사실 중국군이 전쟁 범죄가 아예 없었다기보다는 일단 북한군 쪽이 더욱 악랄했기 때문에[48] 상대적으로 비교되어서 중공군이 그나마 좀 나았다는 식의 증언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하고, 한편 중국 지휘관들이 아군도 자주 처벌[49]해서 나온 이야기에 가깝다.[50] 중국군도 식량을 배급하지 않고 행군을 시키거나, 낄낄 웃으며 포로들을 쏴 죽이거나, 채찍 등으로 구타, 부상당한 포로들을 산 채로 불태우는 등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하는 전부 중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유엔군 장병들이 증언한 내용이다.

'6·25전쟁'이나 '한국전쟁'으로 부르는 대한민국과 달리 중국은 미국에 대항해 북한('조'선)을 지원했다는 뜻의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부른다.중국의 6.25 전쟁 시각

수용소에 있던 포로 일부는 손이 뒤로 묶인 채 살해되었고, 부상당한 포로들은 수류탄 혹은 몸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태워 죽였다.

중국군에게 잡힌 유엔군 포로 중 건강하거나 걸을 수 있는 상태의 부상자들은 수용소까지 걸어갔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들은 그 자리에 버려두고 가거나 총살시켰다. 포로들이 죽은 이유는 대부분 위생 관리 부재, 식량 부족, 이질, 폐렴 등이었다. 중국군들은 소량의 식량을 주거나 아예 주지 않았고, 배급된 식량 또한 영양가가 없었다.

또 중국군은 포로들을 자그마한 철장에 가두고 살을 에는 추위에 맨발로 서 있게 하거나 찬물에 몸을 담갔다 빼게 하곤 했다. 적군은 포로들을 두들겨 패고 물로 가득한 구덩이에 한동안 집어넣기도 했다.

죽음의 수용소들 중 한 곳은 '동굴'이라는 이름의 수용소였다. 이곳에 보내진 포로들은 담요도 없고, 화장실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활했다. 벨리 아타소이 병장은 이러한 포로 수용소들 중 한 곳인 450m짜리 터널에서 며칠을 지냈는지 모르며, 이틀에 한 번 주 모래 섞인 보리밥을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터키인이 본 6·25전쟁' 지음: 알리 데니즐리, 옮김: 이선미, 감수 이난아


중국군은 부상당한 나를 다른 포로들과 함께 차에 태우고 새끼줄로 묶었다. 차는 여차하면 전복될 것만 같았다. 자동차 바퀴는 울퉁불퉁한 돌길 위를 지나갔다. 부상자들 중 자동차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떨어진 사람은 다시 차에 태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총을 쏴 죽여 버렸다. 중국군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흑인 미군 1명이 떨어졌다. 그는 밧줄을 붙잡고 차 뒤에 질질 끌려오다가 힘이 빠지자 그 줄을 놓았다. 중국군 중 1명이 그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러다 중국군 1명이 내게도 총을 발사했다. 총알이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머리에 닿을 듯 지나갔다.

터키군 무자페르 쉔부르치 하사의 증언


장진호 전투 제3일째인 11월 30일 저녁까지 사망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땅은 얼어 붙어서 파지지 않았다. 시체들은 잘라 놓은 목재처럼 3겹, 4겹으로 쌓아 올려졌다. 12월 1일 오후 1시를 기해 포위 돌파전은 오후 늦도록 일대 도살극을 연출했다. 이날 오후 늦게 대열이 유린되자 중국군은 부상병들이 실려 있는 트럭으로 기어 올라가서 무력하게 누워 있는 아군 부상병들을 쏘고, 찌르고 했다. 또 어떤 차에 휘발유를 끼얹어 부상병들을 산 채로 불태우기도 했다. 대열을 벗어나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명백하고 완전한 살인이었다. 나는 열두 평생을 살아도 다 하지 못할 너무도 많은 아픔과 피, 죽은 자와 다친 자들을 보았다.

미 육군 7사단 제임스 블롬 하사의 증언



5. 기타[편집]


  • 이 전쟁에서 양쪽 어디도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대한민국 국군강계시를 단 한 번도 점령을 못 했으며 조선인민군 역시 부산광역시를 단 한 번도 점령을 못했다.
  • 소련김일성 주석이 1948년 초부터 1950년 3월까지 모스크바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몇 번이나 남침 허가를 조른 까닭에 영토 안에서의 교전만 허가했을 뿐 전면적 남침을 허가한 적이 없다.[51] 오히려 미국과의 충돌이 두려워 김일성이 북한을 말아먹기 직전에도 참전하지 않다가, 중공군과 인민군의 공군력이 너무나도 형편없어서 약간의 소련 공군을 중국군으로 참전 허가를 내렸지만 38선 위 북한 점령 지역에서만 작전을 허가했다. 독소전쟁으로 한 세대 전체가 갈린 거나 다름없는 소련이 5년 만에 미국과 싸우는 게 부담되어 참전한 소련 공군에게 한국어, 중국어, 몽골어러시아어를 사용 못 하게 했지만 생판 모르는 외국어를 강요하다 보니 사고가 빈번하고 작전 진행 자체가 방해되어 암암리에 교신 중 러시아어를 사용했고 이를 미국이 감청을 통해 소련 공군이 참전한 걸 파악했다. 그렇지만 소련이 미국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미국도 이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제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까 하여 소련을 부담스러워했고 이미1949년에 소련도 핵개발을 실시했다. 미국 내에서도 전쟁 극초창기엔 반공 의식이 높아 전의가 높았지만 1·4후퇴 이후 장기화되자 전쟁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여론이 대세였고 이 때 맥아더의 핵무기 투하 발언과 얼마 전에 있었던 소련의 핵 개발 성공으로 인한 공포감이 어마했었다고 한다. 도심을 중심으로 비상식량을 사거나 마당에 방공호를 짓기도 했었다고. 해리 트루먼 의 후임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전쟁 영웅이었지만 대선 공약 중 하나가 전쟁의 빠른 종결이었을 정도다. 이 와중에 소련군과 싸우게 된다면 미국은 한반도는 물론 자국에서도 여론과 전쟁을 치러야 했었다. 소련군의 참전 사실을 극비에 부쳐 모르쇠로 일관했다 90년대가 돼서야 사실이 밝혀졌다.[52]
  • 미국의 역사학자 존 톨랜드가 윌리엄 딘 장군의 유족을 찾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딘 장군이 전쟁 중에 얻어먹었던 음식 중 하나가 마늘장아찌였는데, 딘 장군은 마늘장아찌의 맛에 매우 감탄하여 일부러 하산해서 더 얻어오기까지 했다. 전후 샌프란시스코 육군 장교 회관에서 백선엽과 점심을 먹으면서 하는 말이 "백 장군, 요즘 내가 말이지요, 김치를 잘 담근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김치 맛에 푹 빠졌나 봅니다." 였다고 한다.
  •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전선 각지의 부대에 알리는 전보를 쳤던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송해였다고 추정된다. 고향이 이북인 송해는 6·25 전쟁 당시 전보병으로 근무했는데, KBS2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하여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당시에 쳤던 모스 부호를 기억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앞서 소개된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휴전 회담 중 1번 항목의 상호 안전 보장 조약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 이오시프 스탈린은 6·25 전쟁 중 인민재판에 대한 정보를 전파받자마자 "김일성 동무는 이 미친 짓을 중단하지 않고 무얼 하는 건가?"라며 매우 화가났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군이라는 집단은 인민의 협조를 얻는 것을 미덕[53]으로 삼는 집단인데 그 인민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짓을 하는 건 정신 나간 행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탈린에게는 충격적이겠지만 인민재판을 도입한 것은 다름 아닌 김일성 본인으로, 스탈린은 자제하길 바랬던 그 짓을 김일성은 되려 자기가 앞장서서 부하들에게 명령한 것이다.
  • 이 전쟁에서 양측이 한반도에서 사용한 탄약량은, 2차 대전기 유럽 전선 전체에 쏟아부은 것에 비견될 정도로 많다.[54] 전선이 교착된 후에는 하루에 수십만 발을 쓰기도 해서, '밴플리트 탄약량'이라는 소비량 단위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6·25 직전의 국지전 때 국군 포병대가 사용한 탄약량을 보고 '좀 아껴 효율적으로 쓰라'며 탄약 보급량을 줄이고 탄약고를 걸어 잠근 것이 미국 고문단이었다는 것. 근데 이건 고문단의 잘못이 아니라 초기 한국군이 대책 없이 탄약을 낭비한 게 문제였다고 보는 게 맞다. 미군이 1949년 6월에 5,100만 발의 각종 탄약을 제공했는데, 6개월 동안 3,000만 발 이상을 소모했다. 그 와중에 옹진반도에서는 6일 동안 105mm 곡사포탄 5,572발, 각종 박격포탄 19,000여 발을 포함하여 100만 발 이상을 소모했고 전과는 북한군 69명 사살. 거의 북한군 한 명 죽이는 데 14,700여 발을 쓴 거다. 포탄만 따져도 1명당 350발을 넘기는 판이라 고문단장인 로버츠 준장이 "한국군이 탄약을 너무 낭비하니 달라는 대로 주면 답이 안 나온다"는 소리를 할 지경이었다. 참고로 당시 1개 포병대대가 동원되었으니 15문의 야포가 투입된 셈이니 1문당 하루에 62발을 갈겨댄 셈인데, 미군 포병의 탄약 제한이 105mm 야포는 하루에 50발로 제한되어 있었고 저 양이 크게 부족한 것도 아니었으니, 얼마나 갈겨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렇게 탄약을 소모해서 전과라도 있었으면 모를까[55] 사실 미군도 6.25 때 세계 대전 급 화력을 퍼부어서 돈을 너무 많이 낭비했다. 그렇게 갈겨서 올린 전과가 최대로 잡아도(즉 모든 적 병력이 105mm 탄에 죽었다고 가정할 경우) 69명 사살하는 데 그쳤으니 제한을 걸어도 할 말이 없다.
  • 6·25 전쟁 중 미군의 흑백 인종 통합 운영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인 미 육군 부사관, 아이작 우더드(Isaac Woodard, 1919~1992) 병장 피격 사건으로[56] 제33대 미합중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유색 인종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1948년 7월 26일 행정명령 9981호를 통해 미군 내의 인종 간 분리 정책 폐지를 명령했다.[57] 당시 미 해군과 공군은 즉시 대통령의 명령을 수용했지만, 보수적인 미 육군과 해병대는 그렇지 않았다. 미 극동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를 비롯한 당시 대다수 미 지상군 고위 지휘관들은 미 합중국 대통령의 이 행정명령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시된 채 남아있던 흑인 연대인 제24보병연대가 6·25 전쟁에 급파되고[58], 이런저런 논란을 거쳐 맥아더 해임 후인 1951년 10월 1일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은 24연대와 같은 유색 인종 부대를 해체하고, 유색 인종 장병들은 인종 통합을 위해 백인 부대로 전출시켰다. 이후부터는 백인 부대에서도 흑인 신병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 육군에서 완전한 인종 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더더욱 보수적이었던 미 해병대는 1952년부터 백인 부대에서 흑인 신병을 매우 제한적으로 받았고, 1960년이 되어서야 완전한 인종 통합이 이루어졌다.[59] 보수의 끝판왕인 군에서 민간보다 먼저 인종 간의 화합을 시작하도록 명령한 트루먼 대통령의 혜안은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 하와이의 한국계도 적지 않게 참전했으며 용산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에서 이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PARK, WATANABE 등) 유명한 인물로는 한국계 김영옥 대령, 장진호 전투의 중국계 커트 리 해병중위가 있다.(중국명 리추웬) 커트 리 중위는 중공군 포로가 "중국인이 제국주의자가 되었냐"며 발악하자, 영어로 "나 커트 추웬 리 중위이고 미합중국 해병대 소속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커트 리는 현재 타계하였고 "중국계로서 중공군과 맞서는 것이 어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나는 용맹한 미합중국 해병대의 장교로서 명령에 따랐고, 부하들과 함께 고국(미국)으로 귀환했다. 그것이 다이다."라는 굵직한 소회를 남겼다. 그리고 중공군 측에는 통역병으로 다수의 조선족이 참전했고 한국군 측에서는 역시 비슷한 용도로 화교들이 지대급 병력으로 참전하거나 일선부대에 배속되었다. 전후 근래 들어 지속적 청원으로 화교 참전병들은 훈장수여로 명예회복을 한 상태. 한국 화교의 절대다수가 대만계이기에 가능했던 사항으로 보여지며 대만에서 "전 병력을 파견, 참전해서 북진 후 본토(중국) 수복을 하고 싶다"며 UN측에 의사를 전달했으나 확전을 우려한 맥아더에 의해 묵살당하였다고 한다.이 외에도 캐나다, 영국군에 배속되어 전투에 임한 호주, 뉴질랜드연합군인 ANZAC군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야전에 있어 미군, 터키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정예였으며 의정부, 양주, 가평 등지에서 용맹하게 싸운 정예부대이다. 경기북부에 이들의 전승비가 있으며 소수로 중공군 인해전술을 대파한 전사는 호주 역사에 남을 정도. 당시 미군 장성이었던 월튼 워커 중장은 호주군에게 "강철과 같은 병사"들 이라는 찬사를 남겼다.
  • 근세기 가톨릭 성인 중 가장 유명한 성인 중 한 명인 파드레 비오(오상의 비오 신부)의 경우에는 6.25 전쟁을 세상 종말의 전조라는 사적 계시를 하기도 했다. 1950년에 일어난 전쟁은 6·25 전쟁뿐이므로 6·25 전쟁을 두고 말하는 게 분명하겠지만 이 사적 계시의 날짜가 6·25 전쟁이 일어나기 거의 5달 전인 2월이다.
  • 북한의 남침 1시간 전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는 제4회 브라질 월드컵의 개막전 킥오프가 있었다[60].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고 있을 때 브라질멕시코를 탈탈 털고 있었으며 경기 결과는 브라질 4:0 멕시코였다.
  • 관우의 67대손이자 관평의 66대손인 관충금(關忠金)이 중공군 신분으로 이 전쟁의 1·4후퇴에 참전하였다.
  • 1960 로마 올림픽1964 도쿄 올림픽 남자 마라톤을 2연패한 아베베 비킬라가 이 전쟁에서 에티오피아군 참전 부대인 강뉴 부대의 대대장 경호병으로 참전했었다.
  • 아폴로 계획 당시의 우주 비행사였던 닐 암스트롱 역시 6·25 참전 용사이다. 미 해군 장교로, F9F-2B 팬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그와 함께 아폴로 계획에 참여했던 우주 비행사 버즈 올드린미 공군 소속의 F-86 세이버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소련군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군공을 세운 6·25 전쟁 참전 용사이다.
  •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레전드 테드 윌리엄스는 포항 K-3 비행장에 주둔한 미 해병대 제33해병항공전대 311해병공격비행대대에 소속되어 F9F 팬서 조종사로 참전하여 총 39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미국인 최초로 지구 궤도를 도는데 성공한 존 글렌이 그의 윙맨으로 함께 작전에 참가하였다.
  • 뉴욕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칭송받는 화이티 포드월드시리즈 역사상 유일하게 퍼펙트 게임을 기록했던 돈 라슨 역시 6.25 전쟁 참전용사이다.
  • 영국의 원로 영화배우 마이클 케인 역시 이 전쟁에 영국 육군의 병사로 참전하였다.
  • 필리핀의 제12대 대통령인 피델 라모스 역시 이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이다.
  • 미국의 제48대 부통령 마이크 펜스의 부친인 에드워드 펜스(Edward Joseph Pence Jrㆍ1929~1988)도 6·25 참전 용사이다. 미 육군 소위로 참전한 그는 이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다.
  • 일본 병사 70명이 참전했다. 일본군이나 자위대 자격이 아니라 미군 군속 자격으로 참전했는데 원래 전투병이 아닌 취사요원으로 참전했었지만 워낙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조리병에서 소총수로 역할이 전환되어 실전에 투입되었다. 이 중 4명의 일본인이 전사했다고 한다. 그 중 1명이 다부동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그의 이름은 '히라츠카 시게하루(平塚重治)'이며 그의 동생 히라츠카 아키마사(平塚昭正)가 직접 다부동 전투의 격전지 중 하나인 경상북도 가산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미국의 스키 선수 린지 본의 할아버지 도널드 킬도도 6·25 참전 용사이다.[61] 특히 그는 동계 올림픽이 열린 정선 인근에 주둔한 부대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킬도는 손녀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워 지킨 땅에서 열린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 때문에 린지 본은 할아버지의 유골 일부를 정선 알파인 경기장에 뿌렸다고 한다.
  • 미국 출신 방송인이자 가수 연습생인 마리아 엘리자베스 리스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 출신이라고 한다.
  • 케이툰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연재되는 웹툰 야오네집 21화에서는 6·25 전쟁을 거쳤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의 어머니는 피난길에 친어머니에게 버려지려다가 그걸 본 유엔군의 흑인 군인이 "아이를 버리지 말라"고 어머니에게 준 담요와 크래커로 버텼고, 그럼에도 결국에는 나무에 묶인 채로 버려졌는데 이를 후퇴하던 북한 인민군의 한 군인이 보고는 안쓰럽게 여겨 나무에서 풀어주고 돈을 쥐어주고는 마을에서 따듯한 걸 사먹으라고 했다고 한다.[62] 그 돈을 가지고 마을로 내려가다가 한국군 장교의 눈에 띄었고, 그 장교의 지인에게 맡겨졌다가 우연히 그 집을 찾아왔던 영어교사 부인이 데려가 부부가 양녀로 삼았다고 한다. 덧붙여 작가가 어린 시절 옆집에 살았던 할머니는 평소보다 불편했던 체험쯤으로 회고했다고 하고, 작가의 시어머니는 맛있는 음식들이 많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작가의 아버지는 평범하게 모내기하다 미군부대 카투사에 들어가 스크램블 에그 만드는 법을 배워온 게 다라고 한다.
  • 이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의 6월 26일, 즉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과 월과 일이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49년 6월 26일백범 김구가 암살되었던 날이였다. 그러니까 전쟁 발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6일은 백범 사망 1주기를 맞이하였던 해였다. 이것은 대한민국에 하나의 징크스처럼 굳어져 가고 있는데, 이른바 30년 주기 국장설로, 30년 간격으로 국상을 치르고 나면 반드시 대규모 유혈사태를 겪는다는 것. 첫 번째로는 1919년 고종 황제 승하 후 3.1 운동으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으며, 2번째가 1949년 김구 선생 서거 후 발생한 이 전쟁, 3번째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전두환의 집권 과정에서 일어난 12.12 사태5.18 광주 민주화운동, 4번째는 2009년 김대중 대통령 서거 후 일어난 천안함 피격 사건연평도 포격 도발이다.
  • 1950년 5월에 첫 발매하였던 칠성사이다는 사이다 출시 1달 만에 전쟁으로 사이다 생산이 중단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밀리터리 FPS 게임인 콜 오브 듀티배틀필드 시리즈에는 2020년 6월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배경으로 등장한 적이 없다.[63] 북미권에서의 “Forgotten Wars”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오랫동안 휴전 상태인 데다 중국군이 적으로 나와서 중국 시장에 출시가 불가능해지기에 게임으로 내놓기에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전쟁이다.
  • 이 전쟁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매년 6월 25일마다 전투 준비 태세 훈련을 한다.
  • 제주도가 전쟁 당시 전장이 되지 않았던 이유 때문에, 실제 제주도로 한국 정부를 피난시키는 방안이 나타나기도 했다.[64] 만약 현실이 되었더라면 지금의 중국대만관계처럼 되어버렸을지도.
    • 제주도가 전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제주도는 이미 제주 4.3 사건으로 말이 아닌 상태였다. 게다가 4.3 사건으로 구속되어 본토로 수감된 사람들은 당시 전국에서 벌어진 학살로 인해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 당시 제주 출신들은 4·3 사건으로 인해 빨갱이 이미지가 덧씌워져 많은 수의 제주인들이 전쟁 때 해병대에 입대해 싸웠고 상당수의 해병이 제주 출신이었을 정도였다.
  • 지금도 서울 중심부에는 '9·28 서울 수복 작전' 당시의 치열한 전투를 암시하듯 오래된 건물이나 유적지의 석재 등을 살펴보면 탄흔이 남아 있다. 경복궁, 숭례문, 흥인지문 등의 건축물은 물론 신라 시대 때 세워진 북한산진흥왕 순수비에는 지금도 선명히 탄흔들이 남아있으며, 연세대학교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동상 또한 살펴보면 기단에 수많은 탄흔을 볼 수 있다.
  • 중공군은 말도 안 되는 미군의 화력을 막기 위해 지하 만리장성을 수천 km 규모로 건설했다. 중공 기록만이 아니라 UN군 기록에도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공격하는 데 화력 지원을 할 수 없어 피해가 심했고 결국 UN군의 계속된 공세로도 밀지 못하고 포기했다고 한다.
  • 일부 언론사에서는 6·25 전쟁 정전 협정을 맺은 1953년 7월 27일을 종전일인 것처럼 쓰고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6·25 전쟁은 종전된 것이 아니다.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정전과 종전은 엄연히 다른 거다. 풀이하자면 정전은 전쟁을 잠시 정지한다는 뜻이고, 종전은 전쟁을 종결한다는 뜻으로 확연하게 다르다. 매년 6월 25일마다 기념식을 국가에서 주최하는 것도 단순히 전쟁이 있었던 걸 기념하는 게 아니라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이니까 사기 진작과 애국심 고취를 위해 행사를 갖는 것이다. 다만, 전쟁 양상이 전면전에서 국지전으로 바뀌었을 뿐이며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제2연평해전 등 계속 전투가 발생했다.
  • 한국군의 전투보병휘장은 6·25 전쟁 기간의 공적으로만 수여하고 이후 폐지하였다.
  • 한국인에겐 가장 임팩트 있고 현재에도 영향이 있는 2개의 근현대사 이벤트[65] 중 하나지만 그동안 세계사로 볼 땐 제2차 세계대전베트남 전쟁 사이의 이벤트 정도로 취급됐으며 물론 냉전 시기 제1세계제2세계가 맞붙은 첫 무력 분쟁이라는 상징성이 있지만 전쟁 과정과 전후 세계에 임팩트가 앞뒤 전쟁들만 하지 못해 묻힌 감이 있었다. 하지만 2010년대 말부터 미중 관계에 긴장감이 돌며 재평가되었고 특히 중국에서 미국과 처음으로 싸운 6.25 전쟁, 정확히는 전쟁 내 중공군을 고평가하기 시작했다. 2020년에 관련 영화만 3개 이상이 나왔고 방탄소년단이 6.25 전쟁 때 대한민국 쪽의 참전 용사들에 감사를 표하자 전국적인 보이콧이 있었을 정도였다.
  • 대한민국의 참전 용사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전 이후 받은 돈은 32만원 정도 밖에 안 되고, 정신적 부담이나 신체적 부담에 대해서도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비무장지대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있었는데, 이를 일부에서는 제2차 한국전쟁(Second Korean Wa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3년에 걸친 분쟁에서는 한국(남한)-미국(주한미군) 측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한국군 1사단, 주한미군, 카투사 등이 참전했으며 중소규모 국지전, 게릴라전에서 박격포를 사용한 소규모 포격전까지 있었을 정도로 나름 격렬했고 파주, 문산, 동두천까지 총탄음이 들렸을 정도였다.
  • 휴전 기간이 워낙 길다 보니 참전국[66]그리스 왕국그리스로 왕정이 폐지되고, 남아프리카 연방남아프리카공화국이 되고, 서독동독이 통일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독립국가연합의 국가들로 쪼개지고, 에티오피아 제국에티오피아 공화국이 되는 등 많은 국가들이 사라졌다.
  • 한국전쟁 과정에서 국군과 유엔군에 잡힌 인민군 포로들 중 일부는 휴전 후 북한으로의 송환도, 남한으로의 귀순도 아닌 제3국행을 원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남북한 당국자들의 설득, 회유로 남한에 남거나 북송되었으나, 76명의 포로들은 끝까지 남한도 북한도 선택하지 않은 채 결국 한반도를 떠나 이들을 수용할 의사를 밝힌 인도,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흩어져서 떠났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이러한 남도 북도 아닌 제3국행을 택한 포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며, MBC에서는 이들의 이후 행방을 추적하여 1992년에 6.25 특집 다큐멘터리 "76인의 포로들"을 제작, 방영하였다.
  • 이 전쟁 직후 미군한국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한국에게 햄, 소시지, 베이크드 빈즈 등을 주었는데 이것을 찌개로 끓인 것이 부대찌개이다. 한국에서 발명되었으며 부대찌개의 기원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 이 전쟁에서 공산권 국가로 참전한 나라들은 72년 후 카타르 월드컵에서 모두 지역예선 탈락했다. 북한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기권, 중국은 베트남에게 져서 탈락,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죄로 실격당했다.
  • 우연의 결과이기는 하나 6.25 전쟁의 시작과 끝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대한민국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었다. 먼저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선에서 다발적으로 올라오는 보고를 접하여 본격적인 침략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최초로 인지한, 즉 공식적인 6.25 전쟁의 시작을 접한 육군본부 당직 장교는 후일 5.16 군사정변의 주역이 되고, 국무총리를 두 번 맡은 유력 정치인이 되었다. 또한 정전 협정 석상에서 휴전 사실을 협정장 밖으로 전달하며 6.25 전쟁의 끝을 알린 한 무전병은 훗날 유명 코미디언이자 국민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방송인이 되었다. 그 두 사람이 각각 김종필송해다.
  • 일본 연예기획사 쟈니스의 창립자 쟈니 키타가와는 1952년 CIA소속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67] 10개월만에 한국어를 마스터 한 후[68] 판문점에서 전쟁고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동시에 첩보활동을 하였으며 고아들에게 미군들의 세탁물을 세탁해오는 일을 시키면서 수익을 만들어줘 고아들이 자립할 수 있게 해주었다.

6. 관련 자료[편집]



6.1. 학계[편집]


  • 브루스 커밍스: 대표 저서: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1(한국전쟁의 기원)은 6.25 전쟁 발발 전까지 대한민국의 내부 상황을 다뤘는데 최고의 실증 연구를 보여줬고 실제 많은 한국의 학자들이 감탄했다. 그러나 정작 6.25 전쟁과 그 이후를 다룬 2권은 추측과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가득해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69] 특히 군사학적 분석을 무시한 지나친 실증주의 집착이 주 원인이었다. 반대로 1권은 주로 한국 내부를 미군 문서를 중심으로 분석했기 때문에 실증주의 집착이 오히려 강점이 됐다. 최근에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 캐서린 웨더스비: 대표 저서 "Korea, 1949-1950: To Attack, or Not to Attack? Stalin,Kim Il Sung, and the Prelude to War”,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국제적으로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 역사관을 깨트린 장본인이다.[70] 다만 국내에서 인지도는 낮다.커밍스만 알고 웨더스비는 모르는 한국 국제적으로 냉전사 연구의 선봉이자 중심인 우르도윌슨센터에서 "냉전 국제사 프로젝트"의 6.25 전쟁 연구 책임자로 일했다. 특히 그녀는 6.25 전쟁에 관련된 구소련 문서 번역을 주도했다. 그녀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브루스 커밍스와의 설전이다. "냉전 국제사 프로젝트 회보(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에서 커밍스의 수정주의에 비판을 가했고, 커밍스는 공개된 소련 문서의 신빙성에 태클을 걸면서 수정주의를 방어했다.

  • 김학준: 대표 저서 "김학준. 『한국전쟁: 원인, 과정, 휴전, 영향』. 서울: 전영사. 2010." 1980년말 6.25 전쟁에 대한 미국 학계의 연구 성과를 국내에 소개하였다. 김학준은 추후에 6.25 전쟁을 연구하지 않았지만, 6.25 전쟁의 원인에 대한 미국의 연구 결과를 한국 학계에 소개한 것만으로 엄청난 것이었다.[71] 1980년 계간 현대사가 폐간된 일로 한국 학계에서는 6.25 전쟁을 금기시해 왔는데, 그 터부를 깨부쉈기 때문이다. 물론 김학준의 저서와 논문은 기존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고, 정교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 학계의 터부를 깨부순 것만으로 언급될 만하다. 참고로 해당 도서는 1980년대 말 논문집을 집대성한 것이다.

  • 박명림: 대표 저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정치학 박사 학위 논문으로 브루스 커밍스의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서 주장된 남침 유도설을 논파하였다. 1999년 한국전쟁의 기원을 출간하여 당시 국내 기준에서는 최고의 실증 업적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술적인 연구를 할 때 봐야 하는 책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내놓은 한국전 요약의 비중이 크다는 한계가 있다. 이 요약은 당시 스탈린과 소련의 개입을 축소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2010년대 중반에도 6.25 전쟁기를 전후한 시기의 외교 문서 관련해 가끔 새로 발굴한 자료 소식이 들려온다.

  • 김영호: 대표 연구 논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스탈린의 세계 전략이 6.25 전쟁에 미친 파급력을 분석하였다.

  • 김명섭: 대표 연구 저서 『전쟁과 평화 (6.25전쟁과 정전체제의 탄생)』, 정전 협정과 한미 동맹으로 구성된 6.25 전쟁과 정전 체제에 관한 연구를 집대성하였다.

  • 와다 하루키: 좌파 성향의 일본인 학자이다. 소련사와 북한사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다. 북한사와 김일성 항일 투쟁사를 연구한 학자이다 보니 뉴라이트를 비롯한 세력들에게 빨갱이로 까이기도 한다. 6.25 전쟁 관련한 책도 썼다.

  • 김동춘: 대표 연구 저서 '전쟁과 사회'

  •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라는 책을 집필했다. 미군 참전자들의 회고록과 기록을 모아서 만든 책이므로 추천한다.

  •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교수가 쓴 책이며, 책 서문에 몇 년 동안 집필한 혼신을 기한 책이라고 한다. 6.25 한국 전쟁을 다루지는 않았고, 한국 8.15 광복 후, 한국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까지 북한과 남한의 상황을 보여준다.
사실 매우 추천할 만한 책인데, 한국전쟁 원인을 놓고, 세계 다른 나라의 교수들의 발언을 일일이 반박한다.
대표적으로, 1장 내용 중 인도 교수나 미국의 교수 몇몇의 책에선 북한은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을 뿐인데, '남한은 전쟁을 원해서 남한이 선제 침공했다느니,' '한국전쟁은 이승만과 맥아더가 지구 정복을 이유로 짜고 친 것이다.' 같은 이상한 음모론 등을 다 철저히 반박하고 있다. 38선 경계선 형성 이유. 왜 37이나 39도 아닌 하필 38도일까? 라는 자세한 설명도 쓰여 있으며, 2장부터 본격적으로 소련군과 미군의 38선 분쟁, 소련군과 미군이 물러간 후, 북한과 남한 경비대 간의 국경 분쟁, 나아가 연대급 전투까지 다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주로 북한과 소련의 시각에서 보여줘서 한국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그때 북한과 소련은 뭘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대한민국, 북한, 미국, 소련의 문서들을 교차 검증한 국내 최초의 학술 도서다. 실제 정병준 교수는 미군 문서와 북한군 노획 문서를 미국까지 가서 1년이 넘게 직접 확인하고 복사해서 가져왔다. 또한 당시 소련 문서는 미국에서 완벽히 번역된 상태였다. 실증 연구로 브루스 커밍스와 박명림을 능가하는 최고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건 정병준이 꼭 박명림이나 브루스 커밍스보다 뛰어난 학자라기보단 당시에 소련 문서가 미국에서 완벽하게 번역된 이유도 있고, 정병준 자신도 이 점을 자세히 설명하며 미국 측 학계의 대단한 점을 저서 '한국전쟁'에서 자세히 설명하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6.2. 군사적 자료[편집]


지난 60년간 세계 각국에서 발간된 엄청나게 많은 자료가 존재한다. 아마존에서 'Korean War'로 검색하면 5,263종의 책이 검색된다. 절반 이상이 참전 용사들의 수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보니, 한글로 된 책자도 그 양이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그러나 수준이 제각각 천차만별이라 기본 텍스트는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공식 간행물부터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초등학생용부터 중고등학생용, 일반인용, 전문가용 각종 버전의 자료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세금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사례 중 하나다. 물론 책으로 소장하려면 구입도 가능하다. 오프라인상으로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 내부 1층 우측의 카페에 책꽂이에 판매 도서용이라 해서 진열되어 팔고 있다. 재고가 있다면 1권당 거의 2만 원대 돈으로 살 수야 있겠지만 상업용 서적(?)이 아닌 비매품에 가까운 책이라 상설 재고 여부는 불투명하다. 군에서 발간한 전문 학술 자료인 만큼 흥미 위주의 민간 서적에 비해 훨씬 자세하게 전쟁 기간 동안 군사적, 전술적 상황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두드러진 점은 어느 전투, 전역, 작전이 있으면 세부 내용과 특정 전장의 지리 환경, 투입 부대, 전투 서열과 각 제대 지휘관 성명, 전술 지도(?)로 당시 상황 구현과 일자별 각 제대,부대의 전투 기록 명시가 있다.

그 다음은 미 육군 당국의 공간사를 읽어 보는 게 좋다. 영문판은 미 육군 전사감실 홈피에서 무료로 구독할 수 있다. 한글판은 국립중앙도서관 홈피에서 무료로 원문 보기를 할 수 있다.
<정책과 지도> 제임스 F. 슈나벨, 온창일 옮김, 육군본부, 1974. (James F. 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OCMH, 1972.)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로이 E. 애플먼, 육군본부, 1984.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OCMH, 1961.)
<밀물과 썰물> 빌리 C. 모스맨, 대륙연구소출판부, 1995. (Billy C. Mossman,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 OCMH, 1990.)
<휴전천막과 싸우는 전선> 월터 G, 허메스, 육군본부, 1968.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OCMH, 1966.)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명한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저《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The Coldest Winter)는 꼭 읽어보도록 하자.[72] 한국전을 둘러싼 열강들의 정치 싸움과 맥아더의 삽질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단, 미국인이 지은 책인 만큼 한국의 시각과 한국군에 대한 내용은 전무하다시피 하니 이 점은 참고하도록 하자.


6.3. 다큐멘터리[편집]


  • KBS 제작 10부작 <한국전쟁>: 개론적이지만 전반적으로 꼼꼼히 설명된 자료를 찾는다면, KBS에서 제작, 방영한 10부작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추천할 만하다. 원작은 1990년에 제작, 방영되었고 그해 한국방송대상 대상까지 받았던 작품이며, 1994년에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선정한 세계 100대 다큐멘터리에 선정됐다.#

전 세계 아카이브를 동원해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 과정, 휴전 이후 1990년까지의 상황을 정리한 프로그램이다. 전쟁의 배경, 당시 한반도와 관련된 국제적 역학, 관련 인물들의 증언 등이 잘 소개되어 있다. 이후 2010년에는 1990년 다큐를 기초로 하여 새롭게 밝혀진 사실과 자료들을 증보하여 새롭게 제작됐다. 구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문서/영상 자료와 중국 측의 협조를 받은 자료 등을 대폭 보강하였다. 또한 그간 추가로 축적된 자료에다가 각국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더했다. 이 다큐는 현재까지도 KBS가 제작한 대표적인 웰메이드 다큐멘터리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특히 1990년판 당시 생존해 있던 여러 관련자들의 증언을 많이 실어놓았는데 DVD에서 갑자기 화면비가 4:3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다면 90년판 내용을 활용한 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한편으로는 비참한 전쟁의 충격에 대한 당시 휘말린 사람들[73]에 대한 인터뷰도 많이 담겨 있다. DVD로도 출시됐으며, 현재는 유튜브에 전 편이 올라왔다. KBS 홈페이지에서도 다시보기로 볼 수 있다.

  • BBC 제작 4부작 <한국전쟁>: 1988년에 KBS를 통해 방영된 영국 BBC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는 고품격의 다큐멘터리를 많이 제작한 BBC의 명성에 비해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당시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 오르칸키노 제작 2부작 <한국전쟁의 실상>: 1994년 SBS에서 방영된 러시아 오스탄키노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는 6.25 전쟁 당시 소련, 중국 등 공산권의 동향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기밀 해제된 구 소련 문서를 통해 당시 소련이 6.25 전쟁에 비공식적으로 참전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SBS에서 먼저 방영되고 다음 날 KBS에서 방영되었다. 당초 방송 3사가 공동 구매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SBS 측이 이를 깨고 프리미엄을 얹어서 독점 방영권을 따냈고, 이에 KBS 측이 시청자의 보편적 접근권을 내세워 항의하는 바람에 SBS는 해당 프로그램을 KBS에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다. 당시 SBS 가시청권은 서울 및 수도권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KBS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고, KBS는 정규 편성을 변경하여 긴급 편성 방영했다.

  •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잔인한 장면이 있으니 시청에 주의할 것.1부 영상, 2부 영상

  • MBC 제작 <76인의 포로들>: MBC에서 제작된 2부작 다큐멘터리로 1993년 방영되었으며, 그해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다. 6.25 전쟁 당시 남북한 대신 중립국행을 택한 76인의 포로들의 이후 행적과 현재의 삶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로, 인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현지 취재를 통해 제작되었다.

  • <끝나지 않은 전쟁>: KBS가 미국의 공영방송사 WETA, 영국의 공영방송사 BBC, 프랑스의 다큐멘터리 전문 배급사인 ZED와 공동제작한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2019년 방영되었으며, 총 2부작이다. KBS 홈페이지에서 다시보기로 볼 수 있다.


7. 관련 작품[편집]


당연하게도 한국의 작품들이 많다. 외국 것도 있기는 한데, 잊혀진 전쟁 취급의 인지도다 보니 적은 편이다.


7.1. 문학[편집]


  • 거제도 (손영목) -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중심으로 한 작품
  • 광장 (최인훈)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 그을린 대지와 검은 눈 - 한국전쟁의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 (앤드루 새먼 지음/이동훈 옮김) - 전쟁 당시 영국군들의 눈부신 활약 및 지금까지 묵인돼 왔던 영국군의 민간인 학살 등을 담은 작품.
  • 기억 속의 들꽃 (윤흥길)
  • 나무들 비탈에 서다 (황순원)
  • 노근리 그해 여름 (김정희) -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위의 노근리 학살 사건에 대해 아이의 관점으로 서술한 책이다.
  • 남부군 (이태)
  • 마당 깊은 집 (김원일)
  • 불의 제전 (김원일)
  • 목마와 숙녀 (박인환)
  • 몽실 언니 (권정생) - 주인공 몽실이는 사회적인 약자의 모든 걸 가진 인물로, 전쟁으로 아버지 정씨를 잃는다.
  • 병신과 머저리(이청준) - 주인공 형제는 둘 다 전쟁으로 큰 상처를 입은 인물들이다. 형은 군의관 출신이고 동생은 소설가이나 두 사람 다 전쟁으로 형은 몸에 큰 상처를, 동생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 불꽃 (선우휘)
  • 불신 시대 (박경리)
  • 비 오는 날 (손창섭)
  • 소문의 벽 (이청준) - 주인공이 겪는 중요한 트라우마의 시작이 6.25 전쟁 때의 일이다.
  • 수난이대 (하근찬) - 장애를 가진 부자의 이야기로 아버지는 일제 징용으로 외팔이가 되었고, 아들은 전쟁으로 외다리가 된 상이군인이다.
  • 스탈린의 편지 (노재성) - 대체역사소설.
  • 어둠의 혼 (김원일)
  • 여명의 눈동자(드라마의 원작)
  • 오발탄 (이범선) - 주인공의 동생이 6.25 전쟁에 참전해 부상자가 되었으며 상이군인도 등장한다.
  • 요한 시집 (장용학)
  • 육촌형 (이현주)
  • 유예 (오상원)
  • 은마(는 오지 않는다) (안정효)
  • 장마 (윤흥길) - 빨치산 아들을 둔 친가와 국군 장교인 아들을 둔 외가댁을 배경으로 남북 간의 대립을 무속이란 공통 정서를 통해 화합을 이루게 하는 이야기.
  • 종군 신부 카폰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번역) -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 소속으로 참전한 가톨릭 군종 신부 에밀 카폰의 실화.
  • 초토의 시 (구상)
  • 태백산맥(조정래) (조정래)
  • (황순원)
  • 흥남 철수 (김동리)
  • 흰종이 수염 (하근찬) - 상이군인 출신인 아버지를 둔 소년 이야기. 처음에 아들은 사친회비로 인해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어 아버지는 학교에게 사정을 얘기한 뒤 돈을 벌고자 홍보 일을 하지만 그마저도 아들을 괴롭히는 못된 일당들에게 걸려 놀림감이 되고 이에 아들은 아버지를 모욕하는 그놈을 흠씬 패준다.


7.2. 영화[편집]


한국 영화가 아닌 것은 괄호 안에 제작 국가를 명시하였다.

  • M.A.S.H. (미국)
  • DEVOTION (미국) #
  • 격퇴 - 베티 고지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 고지전 - 전쟁의 아이러니함과 그 속의 다면적인 인간상을 극렬히 드러냈다.
  • 국제시장 -1,000만 관람 돌파작이지만 6.25 전쟁만을 다룬 영화는 아니라서 진정한 전쟁 영화 수작의 타이틀은 밑에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가 가지고 있다.
  • 금강천 (중국)
  • 남부군
  • 낙동강은 흐르는가
  • 남과 북의 당신 (1972 作)[74]
  • 돌아오지 않는 해병
  • 마이 워 (중국)[75]
  •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미국)
  • 배틀 힘 (미국)
  •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 (66년 作)
  • 빨간 마후라
  • 서부전선
  • 순교자들(65년 作)
  • 스윙키즈
  • 아벤고 공수군단
  • 아일라(터키 영화) - 2017년 10월 터키에서 개봉해서 500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 터키군과 전쟁고아의 실화 이야기. MBC스폐셜에서 다루었다.
  • 에미의 들(92년 作)
  • 영호작전(미국) - 1952년 개봉.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다루기도 한 독특한 작품. 한국에는 1957년 개봉되었고, 동명의 한국 영화가 1967년에 제작된 바 있다. 물론 전혀 다른 영화다.
  • 오! 인천 (미국/한국)
  • 울지 않으리[76]
  • 원한의 도곡리 다리 (미국)
  • 웰컴 투 동막골 - 800만 명 관람으로 6.25 전쟁만을 다룬 영화 중 흥행 2위이자, 반전과 평화의 중요성을 잘 나타낸 영화.
  • 은마는 오지 않는다 - 전시 미군 성매매를 다루고 있는 작품.
  • 인천상륙작전 -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을 위해 활약했던 특수 부대원들을 다룬 영화.
  • 작은 연못
  •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 2019년 개봉. 772명의 학도병들이 인천상륙작전이 시행되기 전 장사상륙작전을 다룬 영화이다.
  • 적과의 동침
  • 증언
  • 집결호(중국)
  • 죄없는 병사들(90년 개봉)
  • 철모(미국) - 미군과 전쟁 고아의 이야기. 다만 인종 차별이라는 평도 있다.
  • 태극기 휘날리며 - 한국전쟁 영화 최고의 수작, 천만 돌파 흥행작.
  • 포화속으로 -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학도병들을 다룬 영화.
  • 태백산맥(영화)


7.3. 드라마[편집]


  • 로드 넘버 원
  • 백마고지 - 1986년 KBS에서 방영.# #
  • 비극은 없다 - 1980년대 후반에 KBS에서 방영. 정비석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함.
  • 서울 1945 - 2006년 KBS에서 방영.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해석과 더불어 한국전쟁을 민족의 비극이라는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점근했다. 시작인 1화와 2화에서 한국전쟁을 다루다가 1930년대 일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49화에 와서 다시 한국전쟁 시점으로 돌아온다. 마지막 화인 71화까지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다.
  • 야인시대 - 그 유명한 4딸라가 6.25 전쟁 중에 김두한이 임금 관련해 미군이랑 협상할 때 나온 거다. 이 외에도 김두한의 친구이자 오른팔 같은 존재인 문영철이 전투 도중 전사한다.

  • 여명의 눈동자
  • 왕초 - 김춘삼이 북한군과 싸우다가 위기에 몰릴때 박정희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김춘삼박정희의 계급 차이가 너무 심하다.
  • 일월 - 1993년 KBS에서 방영. 드라마 후반부가 6.25 배경인데 그것도 주인공 자매의 부산 피난 생활까지다.
  • 전우 - 6.25 배경인 드라마 로드넘버원과 다른 배경 스토리. 현재까지 3편이 제작되었다.
  • 지리산 - 1989년 KBS에서 방영.
  • 천둥소리 - 1986년 MBC에서 방영.
  • TV소설 은희 - 2013년 KBS2에서 2회에서 6.25 피난길에서 잠시 장면 나온다.
  • M.A.S.H. - 위 영화의 드라마판. 문서 참조.
  • 3840 유격대 - 1983년 MBC에서 방영. 제목의 의미부터 북위 38도선과 북위 40도선을 강조하는데 실제로 북위 38도선과 북위 40도선을 오가며 싸우는 대한민국 국군 특수부대를 다뤘다. 김희라 주연.(3840 유격대장 이철근 대위 역.)
  • 팔콘과 윈터 솔져 - 작중 버키와[77] 한국전쟁에서 마주친 참전 용사라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슈퍼 솔저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물이기도 한데 본인은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의 존재를 몰랐었다. 성공적인 실험체였지만 흑인이란 이유만으로 정부에게 버려졌고 흑역사 취급당했다.


7.4. 뮤지컬[편집]




7.5. 만화, 애니메이션[편집]


  • 6월의 끝
  • 인천상륙작전
  • 태극기 펄럭이며
  • 꿀벌의 친구 - 전쟁 직후가 배경
  • 바우트 원 - 딘 헤스 소령이 창설한 대한민국 공군 대대 “바우트-원(Bout One)”을 다룬 웹툰.
  • 신비아파트 크리스마스 특별편: 할머니의 소원, 북에서 온 밀동귀 - 정확히는 이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이산가족이 소재이고, 회상 장면에서 전쟁 당시 장면이 짧게나마 묘사된다.
  • 신비아파트 시리즈 - 망태할아범의 사인이 이때 총에 맞은 것이고 사토룡의 봉인이 풀어진것도 이 전쟁 때문이다., 밀동귀도 북에서 피난길을 내려갈 때 폭격에 맞아 사망해 폭죽 소리에 트라우마가 있다.
  •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 TVA 10화에서 등장하는 카누카 클랜시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B-29의 기장으로 참전하였으나, 중공군의 남하를 막기 위한 출격에서 전사하였다.
  • 내일의 죠김용비의 과거 에피소드
  • 슈퍼맨: 레드 선 - 소련의 지도자가 된 슈퍼맨이 전쟁에 개입하여 3시간 만에 적화 통일시켰다.
  • 맨발의 겐 - 겐의 일행이 음모에 의해서 스파이가 되라고 압박받는 와중에 겐 일행은 어떤 고문을 받고 빈사상태인 어떤 남자를 보는데, 이때 그 자신들과 같은 국적인 남자가 자기처럼 겐 일행을 가리키면서 "너희들도 나처럼 될 거다"라고 하는데 겐 일행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며 묻자 남자는 몸이 망가진 상태로 이유를 말해준다. 알고 보니 "한국에 6.25 전쟁이 났는데 뛰어난 스파이가 필요해서, 길거리에서 국적을 불문하고 스파이가 될 사람을 잡는다고 한다"면서 경고를 한다. 물론 이 이유는 후에 알게 되는데, 전쟁이 나면 무기가 대량으로 필요한데 무기를 팔려고 해서 정보를 얻기 위해 스파이가 필요하다고 나중에 이유가 나온다.


7.6. 게임[편집]



  • 스틸 팬더스 시리즈 - 몇몇 시리즈에서 6.25 전쟁 배경의 캠페인과 시나리오가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들로 장진호 전투를 다룬 캠페인인 Chosin Few, 북한군을 지휘해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를 궤멸시키는 시나리오인 Task Force Smith 등이 있다.

  • Theatre of War 3: Korea




  • 워게임: 레드 드래곤은 6.25 전쟁이 직접적인 배경은 아니지만 부산 포위의 작전 계획이 낙동강 방어선, 인천 상륙 작전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또 2번째 DLC로 추가된 신규 캠페인이 '제2차 한국전쟁'이기도 하다. 워게임: 레드 드래곤/캠페인 참고.

  • 스타크래프트 2의 유즈맵 한국전쟁 korean-war의 배경이며, 나무위키를 참고하여 고증을 맞춘 게임이다. 제작자는 국가 유공자인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한다.

  • 6월 25일 - 2015년 경기컨텐츠진흥원 제작.


  • War Thunder: 후기 제트기에 한해 6.25 전쟁 당시 미 공군의 교전 지역이던 춘천맵을 플레이할 수 있다. 지상군의 경우 한국을 배경으로 한 맵이 존재한다.

  • 도미네이션즈에서 미국의 낙하산병이 낙하해 한국의 병사들과 강력한 대대를 형성하는 한국 전쟁 대대가 전술성 병력으로 등장한다.



  • 세계 정복자 4의 나토 2번째 시나리오가 한국전쟁 시나리오이다. 플레이어 국가는 미국이고 동맹국은 한국과 영국까지만 등장한다. 다만 여기서는 중공군이 아닌 소련군이 나온다. 아마 중국 회사인지라 검열 때문일 것으로 예상된다

  • People's General: 1998년 Strategic Simulations, Inc[78]가 제작한 턴제 전략 게임으로 시나리오[79] 중 Korea Revisited가 가상의 제2차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을 다루고 있다.


7.7. 노래[편집]


(가나다 순)


7.8. 미술 작품[편집]


  • 한국에서의 학살(파블로 피카소)[80]

피카소는 사회주의 계열이었기에 UN군의 민간인 학살을 그렸다.


7.9. 동영상[편집]







8. 관련 사건[편집]




9. 어록[편집]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게 하며 고난과 파괴를 더하고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 측이 더욱 전진하여 오게 되는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정전이 조인되었음에 나는 정전의 결과에 대한 나의 그동안 판단이 옳지 않았던 것이 되기를 바란다."

- 이승만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 더글러스 맥아더


"포탄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조그맣게 갈비 조각이 나요. 사람이 분해돼 버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펑 하고 터지고 나서 가 보면 (손바닥을 반절쯤 붙잡아 보이며) 나무에 창자 조각 요만큼 걸려 있고 살 토막 요만큼 걸려 있고 그래요. 포탄 맞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버린 게 아니라 (시체를) 찾을 수가 있어야 버리죠. (영화 고지전을 보았느냐는 질문에) ...그런데 그건 애들 장난이지."

- 김달육 육군 소령(퇴역), 6사단 7연대 2대대 6중대장, 8사단 16연대 1대대 2중대장으로 6.25 전쟁에 참전.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평화 시에 한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I cannot in good conscience return to Korea as a Christian missionary in peacetime if I am not first willing to be there to help the Koreans defend their freedom in time of war,”

- 미 해군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대위,

(미 해병대 제1사단 5연대 본부중대 정보장교로 6.25 전쟁 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녹번리에서 전사.)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 백선엽[81]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 월튼 워커


"Stand or die."

고수 혹은 죽음뿐.

- 월튼 워커


"가거라!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고, 전부 거기에 가서 모두 맹렬하게 싸워서 전사하거라![82]

만약 사지가 멀쩡하게 돌아온다면, 짐의 이름을 걸고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너희들의 죽음의 대가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것을 저들의 손에 꼭 안겨주거라! 우리 민족이 과거에 이탈리아인들에게 무엇을 당해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그 고통은 뼛속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짐도, 너희 모두도 잘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 모른 척한다면, 침략자들보다 못한 더러운 위선자일 뿐이다."

- 하일레 셀라시에[83]


"한국은 걱정마세요. 한국은 걱정마세요. 여기 영웅들이 모인 군대가 가고 있습니다."

"ስለ ኮሪያ አትጨነቅ... ስለ ኮሪያ አትጨነቅ... የጀግኖች ሰራዊት እዚህ አለ።"

- 에티오피아 제국 황실근위대 메할 세파리[84]

, 배멀미로 인한 구토와 곧 닥칠 피바다의 두려움을 이기는 자기암시를 위한 노래를 부르며


"저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 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 라울 마그랭베르느레 프랑스 육군 중장[85]

[86]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

- 신성모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

- 박헌영


"중국이 혁명에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남조선을 해방시킬 때입니다"

- 김일성


"장관님은 숙소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장관님은 영국에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 않고 또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 신동우


"어느 나라에서든 인민은 그들의 주권과 독립을 위해서 유혈 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주저해서는 안되고 지금부터라도 장기전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된다."

- 박헌영


"이 전쟁은 내전이므로, 남조선군이 38선을 넘는 것은 무방하나,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이는 중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

- 저우언라이[87]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88]

-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이승만 본인 입으로 말한 것을 포함해서 이를 재구성하고 각색한 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튼 방송. 정작 이 방송이 들린 시점에서 이미 이승만은 국군과 피난민들의 유일한 퇴로인 한강 다리마저 끊고 서울에서 도망친 후였다.


"우리 인민군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군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릴 때까지 용감히 싸우라."

-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향해 진격해 오던 1950년 10월 11일 밤 평양에 방송된 김일성의 음성. 그리고 몇 시간 뒤 김일성은 평양에서 도망쳤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도 책임이 있어!"

- 김일성[89]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 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

- 이오시프 스탈린


"조선 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대한민국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 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마오쩌둥


"대한민국은 미국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나라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중요합니다. 6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독립 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북한의 남침은 유엔 헌장 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 해리 S. 트루먼


"딘,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개새끼들을 막아야 하오. 그게 전부입니다."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and that’s all there is to it.”

- 해리 S. 트루먼


"이곳은 극동의 그리스다. 만일 우리가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만 하면 다음 단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해리 S. 트루먼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이오."

- 해리 S. 트루먼[90]


"인천 상륙작전은 5,000 대 1의 도박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확률에 익숙합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고, 나는 그들을 격멸할 것입니다."

"...Inchon is a 5000 to 1 gamble, but I am used to taking such odds... We shall land at Inchon and I shall crush them."

- 더글러스 맥아더


"우리는 지금 인천 앞바다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오늘 상륙 작전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야말로 불법 남침한 북괴군을 분쇄하고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정의와 자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 손원일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USS Pikaway (APA-222)함 함교에서 상륙 개시를 기다리는 해병대 장병들에게 한 훈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 손원일


"알라후 아크바르!!!"

"Allahû ekber!!!"

- 금양장리 전투에서 600명의 터키군이 몇 배는 많은 중공군을 상대로 착검돌격을 하며[91]

[92]


"친애하는 동포 형제자매들,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과 남녀 빨치산들, 용감한 중국인민지원군 장병들, 친애하는 동지들, 지난 7월 27일 10시에 판문점에서는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들을 일방으로 하고 미 제국주의자들을 위수로 한 무력침공군 대표들을 타방으로 하여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조선에서 정전의 달성은 외래 제국주의 련합 세력을 타승하고 미 제국주의 리승만 매국도당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여 우리 조국 인민이 3년간에 걸친 영웅적 투쟁의 결과이며 우리나라와 우리 인민이 쟁취한 위대한 력사적 승리입니다."

- 김일성[93]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다.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다. 전 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

- 후세 다쓰지[94]


6.25 당시에 만주를 폭격했으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95]

(1996년 6월 24일 중부전선 시찰 당시 김영삼 대통령 발언)[96][97][98][99][100][101]


10. 외부 링크[편집]




11. 관련 문서[편집]








[1] 휴전 협정 이후에도 몇 차례 군사 충돌이 있긴 했지만 전쟁이 '진행 중'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지속 중'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다만 휴전 협정을 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남북한 간에 전쟁이 다시 벌어질 경우 이를 6.25 전쟁의 연장선으로 봐야 하는지, 새로운 전쟁의 발발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2] 제주도, 울릉도, 독도에서는 섬은 물론이고 인근 해역에서도 교전이 없었다. 다만 대한해협 해전 등 반도 연안과 서해 5도, 거제도 등 도서 지역에서는 많은 전투가 있었다.[3]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끝난 직후 자원자에 한하여 참전했다.[4] 이후 캐나다로 독립하였다.[5]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해외파병을 추진했고, 마침내 황실친위대 소속 군인들도 포함된 칵뉴 대대가 창설되어 파병되었다.[6] 이후 황실이 무너지면서 공산주의 국가인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 공화국으로 바뀌었으나, 지금의 에티오피아 연방 민주 공화국으로 바뀌었다.[7] 이후 왕정이 폐지되면서 지금의 그리스 공화국이 되었다.[8] 이후 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되었다.[9] 중국은 ‘사회주의 형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의용군이 참전한 것이다.’라는 입장을 표명했으나, 이들의 정체는 정규군인 중국 인민해방군 제3, 4 야전군 이다. 당시 중국군의 무장 상태와 공세는 명백한 정규군 수준이었다.[비공식] 비공식적으로 참전. 실제로 소련 공군 일부가 교전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소련이 참전함으로써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되는 것을 미소 양측 모두 원하지 않았던데다가 소련은 불과 5년 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과의 캐삭빵 수준의 물량전으로 2천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낸터라 군대를 투입할 여력도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북한군 공군으로 위장하고 평양 이북에서만 소수가 제한적으로 투입되었고 삼팔선 근처에서는 중국군이 미 공군에 궤멸당하고 있어도 항공지원을 하지 않았다. 미국도 소련 공군의 존재를 감지했지만 모른 체하고 넘어갔다. 다만, 소련은 북한과 중공에게 대량의 무기를 지원했다.[A] A B 제3세계 중립국으로서 양쪽 상관없이 다친 병사들만 돕겠다는 이유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에 모두 간접적으로 지원했다.[10] 사실 이탈리아는 6·25전쟁 발발 5년 후인 1955년 12월 22일에 UN에 가입했지만 6·25전쟁 당시에는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하였다. 링크[11] 서독 정부는 1953년 5월 80여 명 규모의 의료 지원단을 대한민국에 파견해 휴전 이후인 1954년 5월부터 약 5년간 의료 지원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의료 지원 활동 시점이 휴전 이후였다는 이유로 의료 지원국으로 인정받지 못 했으나 2018년에야 대한민국 국방부는 공식적으로 독일을 6번째 의료 지원국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전쟁기념관이나 UN 평화 기념관 등지에서 내용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12] 참전국 및 의료지원국 제외[13] 참전국의 파병 책임자 및 통수권자는 볼드체로 표기. 북한 측 지휘관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사연표에 근거함.[14] 전쟁 말기 한국군 58만, 미군 34만가량이었기에 이 이상의 수치로 추산된다. 최대 수치는 공산군보다 적은 걸로 추정된다.[15] 2018년 4월 27일,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과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판문점 선언을 통해 연내에 종전을 선언하겠다고 합의한 적이 있으나 지켜지지 못했다.[16] 국군 162,394명, 미군 36,574명, 기타 4,544명[17] 이대근, 현대한국경제론: 고도성장의 동력을 찾아서, 경기: 한울 아카데미, 2008, p.60[18] 공산군의 경우 누락된 수치가 많기에 정확한 수치 추산은 힘들다. 그래서 자료를 보면 온갖 추측이 다 있다. 다만 중국과 북한과는 다르게 소련 측 자료는 확실한데, 소련군 사망자는 299명, 335대의 각종 군용기 손실.[19] '무너진 다리를 건너 탈출하는 피난민들(Flight of refugees across wrecked bridge)'은 1950년 12월 4일 사진작가 맥스 데스퍼(Max Desfor, 1913~2018)가 촬영했으며, 이 사진으로 데스퍼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흔히 한강대교라고 잘못 알려진 사진이지만 실제로는 대동강 철교로, 한강대교(인도교)는 폭파 당시 완전히 무너졌다. 이 사진이 촬영될 시기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 철수를 하고 있었다.[20] 사진 속 주인공은 당시 6사단 청성부대 소속이었던 신찬균(1932~) 예비역 대령이다. 서울 선린상업고등학교 재학시절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북진 6사단 7연대 선봉에 서서 압록강에 다다랐고, 당시 지휘관이던 임부택 대령에게 보고한 뒤 흐르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인물이다. 이 공적으로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는 영광을 안았고, 6개월 간의 광주보병학교 훈련 뒤 11사단 20연대 12중대 소대장으로 임관한 그는 베트남전쟁까지 참전한 후 1979년 10월 31일 30사단 90연대장을 끝으로 육군대령으로 전역했다. 2021년 현재도 매우 정정하다.[21] 독립문은 1897년에 세워졌으며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해 세워졌다.[22] 중국 기록영화에선 독립문 위에서 오성홍기까지 흔든다.[23]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6년[24]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김일성의 지원 요구를 몇 차례 거절하였으나, 이후 생각을 바꿔서 중국의 지원약속을 받아낸다는 조건으로 남침에 동의했다.[25] 소련은 미국과의 정면 충돌을 꺼렸으므로 자신을 대체할 북한의 지원국으로 중국을 골랐던 것이다. 중국도 소련이 미국과의 승부를 떠넘기려는 의도를 잘 알아 군수물자등 간접적인 지원만 했을 뿐 처음부터 참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군과의 충돌을 꺼리는 만큼 미국에 대한 경계심도 상당하여 저우언라이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38선을 넘어 북진하려는 미군에게 남한이면 몰라도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다면 참전할 것임을 시사했고 미군이 이를 무시하고 북진하자 대병력을 동원해 참전했다. 당시 스탈린은 영국인 첩자를 통해 미국의 핵능력을 잘 파악했고 늘 두려워했다. 1950년 가을,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되자, 스탈린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우리의 이웃이 되도록 내버려두라"고 측근들에게 지시했다.[26] 이때 중국의 참전으로 미국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는 후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 지역으로 진격하지 말라는 중국의 경고를 받아들이는 원인이 되었다.[27] 휴전 기간이 워낙 오래되었고, 국력 차이가 많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북한의 안보 위협과 군사적 도발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그 71년간의 지속적인 군사 도발의 피해가 누적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전술한 전쟁이나 국지전과는 다른, 국가 간의 게릴라식 무력 충돌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28] 일본이 6.25 전쟁에서 얻은 이득이 크지 않다는 수정주의적 이론이 있으나 6.25 전쟁에서 일본이 상당한 이득을 얻은 건 사실이다. 다만 이 이득이 완전히 무너졌던 일본을 살려냈냐와 조금씩 재건하며 성장하던 일본 경제의 기폭제가 되었냐로 일본 내에서 논쟁 중이다.[29] 일반적으로 전쟁의 명칭은 전쟁이 벌어진 지역이나 세력의 명칭이 붙는 경우가 많다. 그도 아니라 기간이 긴 경우를 의미하고자 할 때는 전쟁이 일어난 기간넣기도 한다. 전쟁이 발발한 날짜를 넣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30] 물론 항왜원조의 조선은 옛 조선왕조라 오늘날의 남북한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반면, 항미원조의 조선은 북한 한정이고 남한은 적의 입장에 있다.[3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간행물 목록에서 확인 가능.[32]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자료 검색에서 확인 가능.[33] 굳이 번역하자면 한국에서의 충돌, 한국 사태[34] Police Action(치안활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35] 한국어 명칭으로 정작 미국에서는 쓰이지 않는다.[36] 대표적으로 베트남. 다만 이쪽은 월남전이라는 명칭이 따로 있다.[37] 구소련 문서는 매우 파편적이고 제한된 기록이기에 6·25 전쟁의 기원을 해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38] 김태우, "한국전쟁 연구 동향의 변화와 과제,1950-2015." 『한국사학사학회』, 32권, 2015, pp. 325-364[39]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제2차 세계대전 종전은 1945년, 6·25 전쟁 발발은 1950년으로 고작 5년 뒤의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누가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싶겠는가. 대규모로 전쟁했다가는 전 세계의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심지어는 패배에 망신까지 살 수 있을 일이다. 이 때문에 맥아더는 미국 내에서 전쟁광으로 불리며 해임까지 당했다.[40] 특히나 소련은 2차 대전으로 수천만에 달하는 인명이 희생되었고 핵심 농공업 지대는 초토화되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대병력은 있지만, 한창 전후 복구 중인 소련이 또다시 대전쟁을, 그것도 어마어마한 경제력(렌드리스 참조)을 보여준 미국을 상대로 여력 없었다.[41] 전라도 각지에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한 동학 농민군의 4대 강령은 권귀(權貴)를 모두 죽이겠다고 선포하였고 당연히 그 대상인 권귀들은 이 선포를 좋아하지 않았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6865[42] 북한도 양반들이 패배하기는 했으나 북한의 주장처럼 순순히 죽었는지는 의문이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고위층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제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높으신 분들을 제거한 나라들이 휘청거리는 것도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실례로 오스만 군을 무찌른 사우디 귀족들이나 일본 제국 사무라이 출신들을 전부 제거하는 일은 그 시절 그 나라 사람들에게 작지 않은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대한민국도 어떤 사람들 주장처럼 양반들을 북한처럼 제거하려고 했다면 기록에는 축소될 수도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엄청난 피가 흘렀을 수도 있다.[43] 서로 말이 다르긴 하다.[44] 사실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는데, 만약 한국 정부에서 한국전쟁 와중에 국군과 경찰 및 반공 단체들이 국민들을 상대로 벌인 온갖 민간인 학살들을 대대적으로 공론화하고 가르친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통성 자체가 심각하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냥 침묵만 지키고 있는 바도 있다. 더구나 자세히 들어가면 민간인들도 그리 깨끗하지 않을 수도 있다.[45] 이미일,〈6·25전쟁 중 한국 민간인 납북 문제에 대한 전후 처리 현황과 과제〉[46] 1949년 8월 5일 〈연천주재지사업보고서〉"…반동분자들을 분열.와해시키고 납치함으로써 국토완정의 결정적 역할을 높일 임무…"[47] 1950년 8월 17일〈북조선 군사위원회 결정사항 제18호〉"서울시임시인민위원장은 각 부 각 청의 요구에 맞추어 북조선의 농업 및 산업 현장으로 50만 명을 후송하도록 한다."[48] 인민재판 문서에 나오듯, 특히 초창기 북한군의 점령지 관리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49] 전쟁 범죄를 저지른 아군을 처형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6.25 회고록을 보면 중국군을 꽤 고평가한 장군들이 있다. 그런데 학살이나 약탈을 명령하지 않았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하면 처벌하는 게 일반적 군대라 딱히 특별한 건 아니다. [50] 어떤 중년의 미군은 젊은 중국군 병사가 몰래 풀어줘서 본대로 복귀할 수 있었는데, 중국군 병사가 풀어준 이유가 압권이다. (그 병사가 한 말) “난 어릴 적부터 항일 동지들이었던 미국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이제 그 소원을 이뤘으니 어서 여기서 떠나라.”[51] 실제로 소련은 남한을 지원하자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고 보이콧이라는 명목하에 불참한 후 사후 항의만 하는 식으로 퉁쳤다. 1세계 국가들은 물론 3세계 국가들의 지원이 남한으로 들어가는 걸 저지하려 들지 않은 것이다.[52] 물론 문서가 공개되기 이전까지도 알사람은 안 사실이긴했다[53] 미덕이기 이전에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스탈린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가 그 "미덕"을 무시할 수 있었던 배경은 강력한 집권 체계와 전시 동원 체제가 완비된 다음이라 점령지 주민을 짓밟아도 전쟁을 수행하는 데 지장 없었기 때문이다.[54] 물론 중공군은 비뢰포 같은 빈자의 무기를 사용해서 직접 비교는 곤란하다.[55] 물론 항목에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정말 아무 효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56] 1946년 2월 12일 미 육군에서 명예 제대하고 민간 버스 편으로 집으로 귀가하는 도중 화장실에 가고 싶어 휴게소 정차를 요구한 아이작 우더드 병장과 이를 거부한 버스 기사 사이에 시비가 붙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이 아이작 우더드 병장을 집단 구타 후 유치장에 불법 감금하고 부상당한 눈을 치료를 하지 않고 방치하여 실명에 이르게 한 사건으로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에서 이 사건을 공론화하여 미합중국 정부의 흑백 분리 정책 철회를 이끌어냈다.[57] 당시에는 주요 전투 병력은 대부분 백인이었고 흑인황인종, 히스패닉등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입대 자체가 힘들었다. 입대했더라도 대부분 비전투직에다 인종별로 나누었다. 지금이야 다민족국가의 대표 주자지만 이 시절만 해도 미국은 '백인의 나라'였다.[58]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연대장 성씨가 화이트였다고 한다. 전쟁 전 한국 근무 경험이 있어서 백선엽하고도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59] 지금처럼 피부색 따윈 상관없이 여러 인종의 병사들이 같은 참호와 막사에서 먹고 자며 부대끼는 풍경은 6·25 전쟁 당시에는 아주 생소한 모습이었으나 월남전에 이르러서는 매우 당연시되었다. 물론 아직 인종 차별이 만연하던 시절이라 장교진은 대부분이 백인이었고 끼리끼리 어울리거나 패싸움을 하는 등 순탄치만은 않았다.[60] 그 유명한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난 그 대회이다.[61] 또한 본의 전 남자친구였던 타이거 우즈의 부친은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이다.[62] 그 때문에 작가의 어머니는 그 유엔군에게 고마워서 아프리카 고아를 입양하고 싶다고 말버릇처럼 말했고, 겨울만 되면 길가에 보이는 군고구마 장수의 모자를 보면 그 인민군이 생각나서 항상 고구마를 사 온다고 한다.[63] 콜 오브 듀티의 경우 몇몇 등장인물들의 배경으로 간간히 언급되었고 미래전을 다룬 어드밴스드 워페어에선 2차 한국전쟁 미션이 있기도 하다.[64]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으로 대한민국 국군이 밀려났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측근으로부터 "제주도로 피난해야 한다"는 제안을 들었으나 이를 묵살했다고 한다. 월튼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아예 대한민국 정부서사모아로 이전하는 계획을 고려하기도 했는데, 이때 정부 이전 후보지 중에 제주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 제주도는 면적이 너무 좁고 농경, 식수 환경이 척박하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결국 후보지에서 제외되었다.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1.4 후퇴로 대표되는 위기가 닥치자,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유엔군 사령부가 북한군과 중공군이 금강-소백산맥 방어선을 도달할 경우, 한국 정부를 제주도로 이전해서 차후 공세 전환의 거점으로 삼자는 구체적인 안건이 나왔지만 연합군이 서울을 재탈환하면서 백지화되었다.[65] 다른 하나는 일제강점기.[66] 비공식 참전국 포함[67] 일본계 미국인이었기에 당시 병역의무가 있어 징집되었다.[68] 훗날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던 쟈니스 소속 아이돌의 발음을 교정해주기도 했다.[69] 원서는 레이건 집권 초기인 81년에 나왔으나 한국어판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 나왔다.[70] 그렇다고 해서 웨더스비의 시각이 전통주의 시각은 아니다. 자세한 것은 6.25 전쟁/전쟁 발발참고.[71] 김학준은 주로 러시아학 관련 연구를 진행했다.[72]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과 엘리트들의 실수를 조명한 '최고의 인재들(The Best and the Brightest)'를 집필한 인물이기도 하다.[73] 참전 당시 끔찍한 기억을 증언하는 군인이나 학살이 일어난 지역의 주민 등[74] 분단된 이산가족의 비극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박노식 김지미 최무룡 출연. 동명의 성인만화가 존재한다.[75] 중국판 이름은 아적전쟁. 참고로 이 영화의 홍보 동영상이 중공군의 6.25 참전을 미화하고 한국 측을 조롱하여 문제가 되었다. 물론 영화는 흥행 평가 모두 거하게 망했다.[76] 오! 인천 못지않은 괴작인데, 감독은 놀랍게도 임권택이다![77] 이 당시 버키는 윈터 솔저로서 소련의 하수인 시절이다. 즉 이 둘은 적으로서 마주친것.[78] 팬저 제너럴의 제작사.[79] 21세기 초반 아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80] 참고로 타 퀴즈 프로그램에도 나온 적이 있다.[81] 다부동 전투 당시 방어 담당 구역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후퇴한 11연대 1대대 장병들에게 한 발언. 이 발언 직후 백선엽은 주머니 속 권총을 뽑아 사단장 일선 돌격을 감행한다. 참고로 김석원은 맨날 이런 짓 하다가 미군에게 일본군 출신답다고 찍혔다. 결국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인식이 다른 것이다.[82] 이는 정말로 가서 죽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원정군의 결의와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발언이다.[83]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편입되고 국제적인 평판을 올리려는 계산도 있지만 1,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가 침공하자 도움을 요청했음으로 끝내 무시당하자 이가 아득바득갈린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집단 안보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84] 보병, 기병, 포병, 저격병 중에서 최상위의 성적을 낸 초일류를 혹독하게 훈련시켜 구성된 부대로 창과 방패를 든 기병대가 기관총을 들고 온 이탈리아군을 여러번 깨부순 전적이 있으며 이탈리아군 내부에선 이 자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성기를 자르고 다닌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6.25 전쟁에서는 스위스군의 훈련을 받은 황실 근위대말곤 별 다른 전력이 없었던 에티오피아의 상황을 고려하면 사실상 정예병 올인에 가까운 6037명이 투입되어 253전 253승의 괴물같은 전적을 쌓았으며 중공군과 북한군 내부에서는 난생 처음보는 검은 귀신들사람을 잡아먹고 다닌다는 헛소문이 돌았다.[85] 한국전쟁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와 베트남 독립문제로 병력 대부분이 동남아에 주둔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본국에서 대대급인 외인부대를 파견하는데, 당시 대대장에 위임하려면 중령이어야 했음으로 중장이던 그를 중령으로 강등시킨 후 위임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한다.[86] 게다가 본국 프랑스에선 이미 2차대전 전쟁영웅인 그가 제발로 가려는걸 만류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 국방차관인 막스 르젠이 "미군은 대대장이 중령인데 중장인 당신이 대대장을 하는건 이치에 안맞는다." 라는 식으로 만류했다. 하지만 위의 말을 남기며 스스로 강등을 자처하여 파병되었고 몇개월 후에 본 계급인 중장계급을 돌려받는다.[87] 1950년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 제3보병사단이 강원도 양양에서 38선을 넘어 북한 영토로 진격을 시작한 직후 한 발표.[88] 이 연설은 영화 부산행의 안전행정부 장관의 연설의 모티브가 되었다.[89] 1950년 11월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한 말이었다.[90] 1950년 6월 28일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 행위를 유엔의 경찰 행위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한 기자에게 트루먼이 한 대답.[91] 터키군은 대개 돌격할때면 알라를 외친다.[92] 몇 몇 처형해야 마땅한 변절 사이비 이단자들 때문에 이 말의 평판이 상하긴 했지만 터키는 세계 최대 이슬람제국이자 근본 그 자체였고 그 근본 넘치는걸 계승했다는 자존심이 넘치는 그들 입장에서의 전쟁 명분은 국가무신론을 주장하며 모든 종교를 탄압하려는 사악한 악마인 공산당에 맞서 싸워 한국을 해방시키는 성전이라 선포했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였다. 터키는 아타튀르크의 여섯 화살 비준을 필두로 가장 세속적인 이슬람 국가가 되어 같은 신을 믿는 유대교나 기독교는 물론 아예 다른 신인 불교도 관대하게 받아들이지만 무신론자와는 같은 하늘에 있기를 싫어한다. 요즘도 무신론자나 하라는 관광은 안하고 방문 목적을 구라쳐서 선교를 하는 사람을 패버렸다는 꼴통같은 사람들은 있으며 터키 내에서도 앞 뒤 꽉막힌 꼰대 취급을 당한다.[93] 1953년 7월 정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 전쟁 승리를 자축하는 이른바 ‘전승열병식’에서 한 연설 내용 #[94] 6.25 전쟁과 관련이 깊지 않지만 정치인이나 외교관이 아닌 일개 변호사가 무서울 만큼 한반도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통찰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발언을 한 후세 다쓰지는 한국전쟁 발발과 정전까지 모두 지켜보고 사망하였다. 이후 발칸반도에서도 구 유고 내전,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연방의 대립, 키프로스 분쟁을 비롯한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그것을 구 1세계 및 유럽권 전체가 떠안게 됨으로써 이 발언이 역으로 실행되기도 하였다. 뭐 이 발칸반도는 1차 대전의 원인으로써 지목된 것이고 구 유고 내전은 그렇게 전 세계에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95] 여야, 김대통령의 6.25 만주 폭격 발언 놓고 치열한 성명전[96] 김영삼대통령의 6.25만주폭격주장 회고 관련 안보 논쟁 가열 1996.6.26 kbs뉴스[97] 김영삼 대통령 만주 폭격 발언 일파만파[98] 여야 만주 폭격 공방[99] 김영삼대통령의 6.25만주폭격주장 회고 관련 안보 논쟁 가열 1996.6.26 kbs뉴스[100] 김영삼 대통령 만주 폭격 발언 일파만파[101] 여야 만주 폭격 공방[102] 국군의 전투보병휘장은 오로지 50년대에 6.25 전쟁의 포상으로만 수여되고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