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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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심영구.jpg
파일:attachment/20120607_175123_4.jpg
이름
심영구(沈榮求)
출생
1961년
충청북도 제천시
사망
1992년 12월 29일 (향년 31세)
서울구치소
범죄 유형
연쇄살인

1. 개요
2. 생애
3. 사건
4. 검거
5. 결말
6. 여담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89년 5월부터 12월까지 8개월 동안 서울특별시 강남구 등 수도권 도심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칼로 마구 찔러 8명을 살해하고 3명에게 중상을 입힌 연쇄살인범. 묻지마 살인과도 조금 비슷한 유형의 범죄를 저질렀다. 훗날 정남규가 저지른 노상 살인, 상해 범죄와 수법이 유사하다.



2. 생애[편집]


1961년 충청북도 제원군[1]에서 태어난 심영구는 가정 환경이 좋지 않았다. 이미 8세 때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누나를 데리고 가출하였다. 끔찍한 학대를 당하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일은 어린 심영구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고 그것은 훗날 사람을 아무 거리낌 없이 찌를 수 있는 잔혹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계모와 이복동생들의 틈에서 성장한 심 씨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결국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중퇴한 그는 그 길로 가출했다. 그때부터 신문팔이와 구두닦이, 막노동 등으로 하루살이 같은 생활을 했다. 그리고 26살 때 심 씨는 강도상해죄로 수감되어 3년 6개월의 형을 살다가 1988년 출소했다. 이 무렵 심 씨는 수소문 끝에 친모와 극적으로 재회해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모도 인형 공장에 다니며 버는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처지였기 때문에 심 씨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꿈도 희망도 없이 셋방에서 뒹굴며 지내던 심 씨는 결국 돈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슴에 등산용 칼을 품고 사람들을 해치기 위해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목적이 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휘두르다 보니 도리어 폭력에 중독되어 점점 끔찍한 살인 행각을 저질렀다. 실제로도 "일단 한번 찌르고 나면 이성을 잃고 마구 찌르게 되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당시 경찰조사에서 심 씨는 “새벽에 영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사람들이나 장사꾼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첫 범죄는 강도상해죄였다. 여튼 수형 생활을 마치고 1988년 여름 출소했다.


3. 사건[편집]


1989년 5월 21일 새벽 1시 20분경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미용실 앞에 한 남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미용실 내부를 살피던 남자는 능숙한 솜씨로 문을 따고 미용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미용실 주인 이 씨(23)가 잠을 자고 있었다. 괴한의 침입에 놀란 이 씨는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고 당황한 남자는 등산용 칼로 이 씨를 마구 난자했다. 이 씨는 중상을 입고 쓰러졌고 남자는 미용실 안에 있던 현금 7,000원을 들고 달아났다. 이 씨는 이웃의 도움으로 응급실로 긴급후송돼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출소한 지 9개월이 채 안 되는 시점이었다.

그 남자가 또다시 성남시 일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 씨가 봉변을 당한 지 20일이 지난 6월 11일 새벽 4시 30분께였다. 주점을 운영하는 신 씨(42)는 영업을 마치고 귀가하고 있었다.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의 으슥한 골목길을 지나던 신 여인의 눈앞에 한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주점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동네 청년이었다. 신 씨의 눈에는 젊은 나이에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돈도 없이 주점을 드나들던 이 청년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특히 그는 순진하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술만 마시면 온갖 행패를 부리면서 영업을 방해하던 불청객이기도 했다.

신 씨가 청년을 혼내자 청년은 주머니 안쪽에서 등산용 칼을 꺼내 신 여인을 위협했다. 주점 안이었으면 바락바락 악을 써대며 단박에 내쫓고도 남았겠지만 이날은 사정이 달랐다. 야심한 시각인 데다가 장소가 으슥한 골목이었던 것.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한 신 여인은 황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붙잡히고 말았고 이후 청년은 신 여인을 무참히 살해했다. 신 여인은 다음날 아침 인근 초등학교 건물 틈 사이에서 끔찍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5일 후인 6월 16일 새벽 2시 30분경 서울특별시 관악구에서 또 한 건의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남현동의 노상에서 한 여인의 시신이 피투성이인 채로 발견됐다. 피해자는 김 씨(42)였는데 일을 마치고 귀가하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시신의 상태 및 현장 상황으로 보아 범인은 김 여인을 따라오다가 등 뒤에서 급습한 것으로 짐작됐다. 김 여인의 몸은 가슴과 등 부분이 예리한 흉기에 난자되어 처참한 몰골이었다.

수사팀은 범인이 김 여인의 손가방에서 10만 원을 꺼내간 것을 확인해 일단 전형적인 노상 강도살인 사건으로 가닥을 잡고 수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앞선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목격자가 없어 수사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특히 당시 이 사건은 관악구에서 발생해 앞선 성남 살인 사건과 동일범의 소행일 거라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던 범인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8월 4일이었다. 새벽 1시경 성남시 수정구 단대동의 한 골목길에서 여성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인근 주민들이 놀라 깨어나 경찰에 신고했고 잠시 후 경찰이 출동했지만 범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현장에 남아 있는 것은 골목길 벽면 여기저기에 묻은 혈흔과 피가 낭자한 상태로 쓰러져 있는 중년 여인의 시신뿐이었다. 피해자는 박 씨(43)로 등과 어깨가 6차례나 찔려 있었고 과다출혈로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러다 박 여인이 죽은 지 약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성남시에서 또 한 건의 살인 사건이 터졌다. 11월 16일 새벽 2시경 철야기도를 마친 강진만 씨(가명·53)는 성남시 수정구 수진동의 한 대로를 급히 가고 있었다. 그때 골목 한켠에서 낯선 남자가 불쑥 뛰쳐나왔다. 조그만 검은색 가방을 가슴에 안고 걸어가는 강 씨를 유심히 보고 따라온 남자였다. 남자는 다짜고짜 흉기로 강 씨를 확인사살한 뒤 그가 안고 있던 가방을 빼앗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가방 안에는 성경책만 있었다.

그는 성남시에서만 벌써 4번째 피해자였다. 더구나 강 씨가 변을 당한 당일 새벽 4시경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의 노상에 주차돼 있던 이 지역 주민의 승용차가 유리가 파손된 채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련의 사건으로 주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수사팀에 비상이 걸렸다. 범인이 성남을 헤집고 다니는 연쇄강도살인범일 거라는 얘기가 수사팀 내부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대부분의 범행이 새벽에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특히 피해자들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인물들이 아니었다는 점 등은 범인이 특정 대상을 노렸다기보다는 금품갈취를 목적으로 아무나 골라 범행을 저지른다는 분석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문제는 사건들이 하나같이 야심한 시간에 인적이 없는 으슥한 골목길에서 발생해 목격자가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범인은 매번 불과 몇 분 안에 범행을 마치고 감쪽같이 사라졌고 현장에 어떤 단서도 남겨 놓지 않았다. 수사팀은 피해자들의 주변인물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성남 일대의 우범자와 동일 수법 전과자들을 상대로 탐문 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강 여인이 살해당한 지 열흘이 지난 11월 26일 새벽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에서 또 의문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이 씨(57)였는데 범행 장소나 흉기를 휘두른 방식, 들고 있던 손가방이 사라진 점 등이 이전 사건들과 비슷했다. 유사한 사건이 계속 터지자 수사팀은 하루하루 피가 말라갔다. 하지만 범인의 윤곽은 드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미치광이의 연쇄 살인극은 멈추지 않았다.

또 약 1달 후인 12월 23일 오후 8시 30분경 서울특별시 종로구 예지동의 노상에서 한 중년 여인이 흉기에 찔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피해자는 노점상을 하던 장 씨(54)였는데 그날 장사를 마치고 돈을 세고 있었다. 범인은 장 여인을 살해한 뒤 17만 원과 버스 승차권 240장을 훔쳐 달아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새벽 4시경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의 한 슈퍼마켓에 강도가 들었다. 범인은 슈퍼마켓 여주인에게 달려들었으나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격렬하게 반항했다. 그 소리에 여주인의 아들(11)이 잠을 깨 방에서 나왔다. 어린 아들은 궁지에 몰린 어머니와 합세해 범인의 위협에 맞섰고 다급해진 범인은 들고 있던 흉기로 이들 모자를 무참히 찔러 살해했다.

모자의 비명을 듣고 이웃 사람들이 모여들 것을 두려워한 범인은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왔는데 이때 슬리퍼 한 쪽을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수사팀은 범인이 남기고 간 슬리퍼 한 쪽을 단서로 현장 일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내사와 탐문 수사를 진행했다.


4. 검거[편집]


수사 결과 슬리퍼의 주인은 인근 주택가에 살던 청년이라는 사실이 확인됐고 이상하게 생각한 수사팀은 심 씨의 행적을 역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심 씨의 동선이 그동안 발생한 살인 사건과 모두 일치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냈다. 심 씨는 8개월에 걸쳐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남시, 구리시 등지에서 무려 8명을 살해하고 3명에게 중상을 입힌 연쇄살인마였던 것이다.

1달여 간의 끈질긴 탐문수사 끝에 검거된 심영구가 성남시 수정구에 거주하던 걸 확인했다. 당시 심 씨는 집을 떠나 애인의 집에서 은신 중이었는데 그가 거주하던 집에서는 손가방과 미처 처분하지 못한 장물, 버스 승차권 등 범행 증거물 21점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1990년 1월 22일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동의 셋방에서 그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5. 결말[편집]


심영구는 재판 끝에 같은 해 11월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양형 부당으로 항소하였으나 2심과 3심에서도 사형이 확정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2년 12월 2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6. 여담[편집]


심 씨가 8명의 생명을 빼앗고 손에 쥔 돈은 다 합쳐서 수십만 원에 불과했다. 아무 원한도 없는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인 이유에 대해 심 씨는 범행 대상을 선택하면 무조건 칼을 휘두르게 되고 한번 찌르면 내 자신도 모르게 연달아 찌르게 됐으며 특히 술을 마시면 성격이 포악해지고 내 자신을 주체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에 묻혔는데 애초에 범인이 당대에 엄청난 인기를 끈 영구심형래를 연상시키는 별난 이름을 지닌 데다[2] 8명이나 살해당하고 3명이나 중상을 입은 굉장히 심각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신문면에서 단신으로 처리했을 뿐이고 그나마 프로파일러 표창원이 자신의 저서 '한국의 연쇄살인'에서 다시 언급하지 않았으면 기억하는 이도 드물었을 정도로 묻혔던 사건이다. 당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사회적인 불안감이 높아지던 마당에 심영구라는 또 다른 연쇄살인자가 활개를 치고 다녔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사회적 불안이 더 가중될 것을 염려한 권력자들이 일부러 보도를 자제하게 했다는[3] 말도 있다.

주로 심야에서 새벽 사이에 마구 공격해 살해하고 금품을 훔쳐간다는 기본적인 스타일이 김대두와 비슷하다.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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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충청북도 제천시 일부.[2] 1980년대 중후반에 심형래가 여로영구를 패러디한 게 인기를 엄청나게 얻어 영화까지 히트했다. 다만 작중 영구의 성은 송씨다.[3] 당시에는 직접적인 언론통제가 어려웠기에 기자들을 술로 달랜다거나 하는 식의 회유책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