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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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이순철과 박재범, 창종빈[1] , 정덕수 등이 결성해 1999년에 잔혹한 살인 사건을 벌인 범죄조직. 물론 조직 내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 자체는 흔하지만 문제는 살인을 저지른 뒤 인육을 먹는 매우 잔혹한 짓을 했다는 데 있었다. 결국 사형까지 선고되었는데 당시 한 사람을 살해한 사건으로 사형이 내려지는 경우는 살인재범,[2] 경찰관 살인이나 유괴살인 등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들이 저지른 범죄를 사회가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2. 영웅파 결성[편집]
1989년 살인죄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던 이순철[3] 은 10년 8개월 만에 가석방되어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출소하자마자 소년원 출신 동생들과 영웅파라는 미니 조폭을 결성했다. 32살의 최고 연장자인 이순철은 두목으로 추대되었다.[4]
대전의 신흥 폭력 조직인 영웅파는 대부분의 조폭들이 유흥가를 무대로 활동하는 데 비해 여타 조직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청부 폭력과 사설 경호 등의 분야에 손을 대 자금을 모아 왔다. 이와 같은 차별성 때문에 영웅파는 검·경찰이 파악해 온 조폭 계보 명단에서도 배제되어서 사건이 묻힐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또한 조직원 정덕수(29세)의 경우 뒤늦게 2년제 대학의 생활체육과에 입학해 자금력을 바탕으로 모학과 1학년생 김모(21)씨를 러닝메이트로 해 학생회장 선거에도 뛰어드는 등의 모습도 보이기도 했다. 덤으로 《무술경호봉사대 회장》, 《범죄추방운동본부 기획실장》 등의 직함을 명함에 새겨 소지하고 다녔다. 이처럼 조폭들이 경호업체 등의 합법적인 사업체를 만들어 체대 출신들을 영입하는 방식으로 조직원을 늘리곤 한다.[5]
변호사 사무장을 대상으로 한 납치 강도와 창종빈의 교통사고 보험금, 그 외 각종 보험사기로 큰 돈을 벌어서 꽤 호화로운 생활을 했는데 대전 서구 도마2동 소재 2층짜리 단독주택을 전세로 빌려 합숙소로 활용했고 평소에 크라이슬러, 다이너스티 등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검거 당시에 발견된 현금, 달러화, 엔화, 예금 통장도 상당했다.
3. 엽기 살인[편집]
조직원들이 워낙 어려서부터 친분이 있어서였는지 일반적인 폭력 조직의 위계 질서를 기대하긴 힘들었던 모양이다. 1999년 10월 22일 새벽 5시쯤 대전 서구 탄방동의 한 편의점에서 영웅파 일당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신규로 영입한 조직원 곽종길(29)이 주사가 심해 두목 이순철의 친구인 창종빈[6] 에게 욕을 하고 동거녀 강정숙(25, 여)에게 반말을 섞어 가며 하대하고 성희롱을 했다. 아무리 구멍가게 수준의 조직이어도 감히 보스의 친구와 애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7]
이에 이순철은 '버릇없다'며 다른 조직원들에게 곽종길을 폭행하도록 지시했고 집단 린치를 당한 그는 곧바로 기절했다. 일당은 기절한 곽종길을 승용차에 싣고 자신들의 합숙소로 데려 왔다.
아지트에서 무자비한 폭행이 이어졌으나 곽은 굴복하지 않고 계속 욕설을 내뱉으면서 "죽여버리겠다"면서 소리를 질렀다. 곽이 실신하자 정덕수는 병원에 데려다 주자는 말을 하였으나 창종빈과 박재범은 곽이 깨어나서 "혹시 병원에서 사망하거나 신고를 하면 바로 검거될 것"이라며 살해할 것을 주장했다. 같은 날 오전 6시경 야구방망이와 회칼, 쇠망치 등으로 폭행하다 복부를 칼로 찔러 곽종길을 무참히 살해했다.
창은 곽의 절친인 유덕희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순철은 유씨를 죽이면 자기 애인인 강씨도 증인이니 죽이자는 얘기가 나올까 걱정되어 유씨에게 "너도 죽고 싶지 않으면 동참하라"고 협박했다. 결국 곽을 살해하고 최대한 흔적을 숨기기 위해 해체극을 벌였다. 회칼 3개를 이용해 집 목욕탕에서 뼈와 살을 따로 떼어내 토막을 내고 이빨, 지문까지 없앴다.
유씨는 자신도 저렇게 될까 두려워서 같은 편이라는 증거를 보여주고자 "이를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오를 다지자"며 사체에서 간을 꺼내 일곱 조각을 낸 뒤 소주를 마시며 조직원과 이씨의 애인 강씨와 함께 안주로 먹었다.
4. 사체 유기[편집]
이들은 완전히 훼손된 시체를 쓰레기 봉투 11개에 나눠 담은 뒤 승용차에 다시 싣고 이날 오후 3시경 대전시 유성구 성북동 산림욕장 부근 야산 정상 부근까지 1.5㎞ 정도 떨어진 도로에서 계곡 쪽으로 20m 아래 떨어진 곳 10m 사이에 3개 구덩이를 파 시체를 암매장했다.
성북동 산림욕장 관리소 직원에 따르면 암매장한 현장을 지나는 도로는 가로등이 없고 포장도 안 된 산길로 평소 낮시간에만 3-4대 정도의 차량만 지나갈 뿐 밤에는 차량 통행이 없는 데다 평일에는 찾는 사람이 없고 주말에만 수십 명 정도 찾아 올 뿐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국 유씨가 범행 이후 서울지검 특수부에 자수함으로써 같은 해 10월 29일 조직원 전원이 검거되었다. 이후 시신을 확인했는데 영웅파 조직원들이 시체를 완전히 해체해 쓰레기 봉투 11개에 나눠 담아 버렸기 때문에 사망자의 신원 확인이 어려워 DNA 감정까지 해야 했다.
5. 처벌[편집]
- 이순철: 1심 무기징역→2심 사형→3심 상고기각
- 박재범: 1심 무기징역→2심 항소기각→3심 상고기각
- 창종빈: 1심 무기징역→2심 항소기각→3심 공소기각[8]
- 정덕수: 1심 징역 25년→2심 항소기각
이후 2심에서는 인육까지 먹은 죄질이 너무 나빠 주동자에게는 더 엄격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이순철[11] 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나머지 세 명의 양형을 유지했으며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는데 창종빈은 2000년 8월 자살했고 이후 대법원이 상고를 최종 기각하여 이순철 사형, 박재범 무기징역, 정덕수 25년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나머지 2명은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에 살인 및 인육 사건에는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자수한 유씨에게는 징역 10개월이 선고되었다.
6. 기타[편집]
지존파가 체포되어 사형된 지 4년, 막가파 일당이 체포되어 처벌이 확정된 지 2년밖에 안 지났기 때문에 워낙 사회적으로 더블로 충격이 컸었다. 묘하게도 막가파 일당 체포 날짜와 같은 10월 29일에 체포되었다. 자세히 말하면 지존파 1994년, 막가파 1996년, 영웅파 1999년.
이순철은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2009년 서울구치소로 이송되어 미결수로 복역 중이다.
창종빈은 친구가 자기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은 게 마음에 걸렸는지 자살하면서 사실 자신이 비선실세이며 이순철은 바지사장이었다며 이순철이 사형만은 면하게 해 달라는 탄원서를 유서로 남겼다. 그러나 누가 봐도 친구를 감싸기 위한 목적이 보였기 때문에 재심 신청은 기각되었다.
2021년 7월 28일 표리부동 4회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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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씨는 전국에 1,000명도 안 되는 희귀 성씨이다.[2] 후술하지만, 이순철이 사형 선고가 된 원인에 살인재범도 한몫했다.[3] 전북 익산 출신으로 어려서 불우하여 전남 광주와 정읍, 파주 문산, 서울 일대를 떠돌아다녔다. 출소하고 대전에 정착한 것은 친구들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4] 이순철의 수기에 따르면 어려서 소년원을 들락거리면서 자연스럽게 조폭 친구들과 인맥을 쌓았고 파주 문산과 익산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 지역 조폭들과의 인맥도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큰 형도 익산에서 생활하는 조폭이었다.[5]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조폭들이 체대 출신들이나 은퇴한 운동선수들, 젊은 퇴역군인들을 스카웃하는 일이 많이 있다.[6] 원래는 멀쩡했으나 교통사고로 척추를 다쳐 1급 장애인이 되었다. 거동이 불편했고 감옥에 갈 때쯤엔 스스로 대소변도 처리하기 힘든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이런 몸으로 감옥 생활을 하기 암담했는지 자살했다.[7] 흔히 조폭들은 수틀리면 자신의 부인이나 애인도 폭행한다지만 그렇다고 부하들이 자기 여자한테 함부로 대하게 하진 않는다. 심지어 여성인권이 지금보다 낮았거나 저 당시보다도 더 낮았던 시절이라도 마찬가지였다.[8] 재판 중 사망(형사소송법 제328조제1항제2호)[9] 만일 1997년이었다면 사형을 선고받았을 것이다.[10] 당시 유기징역의 최상한이다.[11] 참고로 이순철은 1989년에 살인 사건을 1건 저지른 상태라 이번 살인사건 까지 포함하면 2건의 살인을 저지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