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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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범죄자.
2. 생애[편집]
1948년 경상북도 영일군(현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난 방영근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후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후처 소생이라는 이유로 가족에게 냉대를 받으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 방영근의 아버지가 죽자 방영근의 어머니는 방영근과 함께 가출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방영근의 어머니는 방영근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렇게 양쪽 부모를 모두 잃게 된 어린 방영근은 혼자서 외로이 살아가게 되고 어린 나이에 학교를 중퇴해 여러 가지 잡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제대로 살아 볼 기회가 생겼는데 그와 같은 곳에서 잡일을 하던 여성과 마음이 맞아 행복한 삶을 이어나가게 되었지만 곧 일터에서 학력을 속였다는 이유로 둘 다 해고당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들은 재취업을 꿈꾸며 행복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나 이때 집을 마련하라고 방영근에게 돈을 마련해 준 그의 처형마저 불경기에 처해 돈을 빨리 갚으라고 독촉하자 방영근은 돈을 빠르게 갚기 위해 집주인의 텔레비전을 훔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TV를 도난하는 과정에서 집주인이 그를 발견하게 되고 집주인과 몸싸움을 벌이다 방영근은 집주인을 세게 밀쳐 넘어뜨렸는데 집주인은 뇌진탕으로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강도살인 등의 혐의로 체포된 방영근은 대구지방법원, 대구고등법원에서 차례로 사형을 선고받고 1976년 1월 끝내 그에게 사형이 확정되었다.
3. 사형 확정 이후[편집]
1976년 사형이 확정되고 나서 방영근은 대구교도소에서 죽을 날을 하루하루 기다리던 중 1976년 3월의 어느 날 삼중스님이 대구교도소에 교화 활동을 하러 오자 그 날부터 불교에 귀의하여 그 누구보다 모범적인 수형생활을 했다고 하며 화장실 청소 등 궂은 일도 도맡아 하고 임신한 재소자를 위해 분유와 기저귀를 사주는가 하면 피해자 유족에게 사죄하고 용서받는 등 교도소 내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한편 형이 집행되는 그 날까지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했다고 한다.[1]
여담으로 다리를 다친 참새가 대구교도소에 날아오자 방영근이 다친 참새를 치료하고 날 수 있을 때까지 돌보아 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방영근은 본인의 사형 집행을 예견하고 있었는지 그의 사형 집행 하루 전날인 1976년 12월 27일 다시 자연으로 방생했다고 한다.
이때 대구교도소 교도관들도 방영근의 정성에 크게 감동했는지 중징계를 감수하고 방영근에게 몰래 좁쌀과 콩 등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교도소 교도소장에게 들켰다. 엄연히 교도소의 규칙을 당당히 어겨 버린 방영근은 죽음을, 담당 교도관들은 해직을[2] 면할 수 없었으나 교도소장 역시 법무부에 보고하긴커녕 무기수도 아닌 사형수인 방영근에게 자신의 앵무새를 맡기고 열심히 키워 달라는 말을 했다. 참고로 그 앵무새들은 1976년 12월 28일 사형 집행 몇 시간 전에 교도소장에게 돌려주었다.
또 그는 감방 동기인 사형수 양동수의 사연을 전해 듣고 삼중스님에게 전해주었고 그와 더불어 양 씨의 감형을 탄원했다.[3]
양동수는 방영근의 사형이 집행된 후인 1977년 1월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삼중스님과 생전의 방영근과 친분이 있는 대구교도소의 무기수였던 박은석 등의 노력으로 탄원서 제출이 받아들여져 1978년 12월 27일에 무기수가 되었고 1999년 12월에 21년간 복역을 끝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4]
4. 사형 집행[편집]
1976년 12월 28일 그의 사형이 대구교도소에서 집행되었다.[5]
그는 유언으로 어머니를 뵙고 싶다는 말을 남겼으나 끝내 그의 어머니는 방영근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고 그는 대구교도소가 관할하는 무연고 사형수 묘역에 이름도 없이 현재까지 47년 동안 외로이 누워 있다.
삼중스님이 그의 묘역에 찾아와 매년 12월 28일 무렵에 그의 명복을 빈다고 한다.
사형수 방영근의 명복을 빌고 있는 삼중스님의 모습.(왼쪽에서 네 번째)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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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1985년 삼중스님이 그의 모친과 인연이 있는 사람을 찾았으나 그의 모친은 7개월 전인 1984년에 사망했다고 한다.[2] 당시 사형수가 교도소의 규칙을 어기면 다음날 바로 처형당하고 담당 교도관들도 업무 태만으로 인한 해직, 정직 등 중징계를 면할 수 없었다.[3] 양동수는 1973년 12월 24일 술에 취해 모르는 여성의 집에 침입했고 여성이 저항하자 죽여서 구속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이때 그의 노모가 양 씨의 고향인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대구교도소 근처로 이사를 온 후 매일같이 막내아들의 옥중수발과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매일 피해자의 명복을 비는 등 아들의 감형을 위해 뭐든지 했고 양동수 역시 실수로 일을 저지른 만큼 매일같이 피해자와 노모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은 채로 불교에 귀의하고 교도소 내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등 모범수로 지냈다.[4] 그러나 그의 노모는 양동수의 석방 3년 전인 1996년에 향년 93세로 사망해 아들의 가석방을 못 보고 말았다. 양동수는 출소 이후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5] 같은 날 김대두, 임병석 등은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