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백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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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에 경기도 가평군에서 창궐한 사이비 종교.
백백교는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동학에서 파생된 종교로 전신은 백도교다. 정확히 말하면 1919년에 백도교의 교주인 전정운(全廷芸, 1868 ~ 1919)[2] 이 사망한 후 교주 자리를 놓고 장남 전용주(全龍珠), 차남 전용해(全龍海, 1895? ~ 1937?), 3남 전용석(全龍石) 등 세 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 각각 인천교, 백백교, 도화교로 독립했다. 1930년에 죽은 전정운이 자신의 첩 4명과 신도 일가족 8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것을 비롯해 여러 범죄 행각이 드러나면서 이들은 한 차례 철저하게 박살났다.[3]
이 와중에 차남 전용해는 무사히 도망쳤다가 돌아와 비밀리에 백백교를 재건했다.
입교식은 돈 1원을 내고 행하는데 먼저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 후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세 번 손을 들었다 놓은 후 해괴한 주문을 7번씩 세 차례 외웠다. 이렇게 외우면 무병장수한다고 전용해는 주장했다.
입교 후에는 다른 주문을 외웠는데 성별과 나이에 따라 주문이 달랐다. 남자 쪽 주문은 유명하지만 여자 쪽 주문은 세간에는 덜 알려졌다. 이런 종류의 '주문 수행'은 동학 등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신흥종교들 사이에선 흔했다. 대개 무속이나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4]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용으로는 '동자주문', '선녀주문'이라고 해서 각각 '백응선(白應善)', '백선응(白善應)'이라는 3글자짜리 주문을 따로 외워야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팔도(八道)주문, 몇백 번을 외운다면 신령을 볼 수 있게 된다는 통신(通神)주문, 옥황상제 다음 가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는 비장의 주문 등등도 있었다. 옛날 뉴스 아카이브를 잘 찾아보면 나오는데 어감들이 하나같이 이상하다.
종말의 날에 서양은 불, 동양은 물의 심판을 받아 인류가 멸망한다는 종말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백백교가 마련한 본소에서 생활하다가 물의 심판 날에 금강산의 피수궁(避水宮)[5] 으로 옮겨가면 대원님(백백교 교주)이 불로장생하고자 하는 자는 동해 천리 밖의 신대륙 영주로 보내주고 부귀영화를 원하는 자는 계룡산으로 인도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교리를 설파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하지만 당시 일제강점기의 상황 속에서 사회가 혼란했고 평균적인 사람들의 교육 수준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백교는 홍보를 위해 폐광이 된 금광에 금을 숨긴 다음에 전용해의 힘으로 금광이 다시 터졌다고 속여 사람들을 모았다. 이는 홍경래의 난 당시에도 나왔던 고전적 수법으로, 조선시대 후기 각종 예언서들이 횡행할 때 유행한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6] 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백백교의 중심 교리는 '한 사람(교주)의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하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것으로, 이는 유불선 3교가 모두 성쇠를 거듭하며 3천년을 흐르는 동안 그 본질이 쇠퇴하고 거죽만 남았고 이제 '백백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나설 때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하고 백백교가 통치하게 되리라는 주장까지 했다.
교주 전용해는 학식이 전혀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였다. 또 총참모 격인 이경득과 벽력사 문봉조(文鳳朝) 등 간부들을 각지로 보내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 뒤 그 딸을 전용해의 시녀로 바치게 하여 성폭행했는데 전용해는 이렇게 끌어들인 젊은 여자들을 항상 첩으로 거느리다가 싫증나면 죽이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심지어 여신도가 임신했을 경우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여신도와 태아까지 전부 살해했다.
배교자, 교단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도 함께 살해했다. 나중에는 이것이 더 심해져서 신자가 너무 많이 몰려서 먹여 살리기 힘들다고 죽이기도 하였고 경찰에게 들킬까봐 죽이기도 했다. 또한 내부 다툼으로 부교주를 살해하고 매장까지 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백백교에는 이른바 '부엉이 부대[7] '라고 불리는 첩보원들이 있어 신도들의 행동을 비밀리에 감시했는데 신도들의 이상행동을 포착하면 그 즉시 간부들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부엉이 부대'의 보고를 받은 간부들은 행동대원들을 시켜 신도들을 살해했다.
당시 체포된 간부 24명[8] 은 한 사람[9] 을 제외하면 소학교[10] 도 다니지 못해 무지해서인지[11] 모두들 교주인 전용해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를 '신의 아들'로 믿고 그의 말에 철저하게 복종했다. 그리고 가족인 신도들을 지역별 지부에 흩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도망치면 다른 가족들이 살해될까 봐 복종하는 경우도 있었다.[12]
훗날 조사받았던 이경득과 문봉조 등의 진술에 따르면 자신들도 이런 일에 회의감을 느껴 도망갈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전용해가 다 꿰뚫어보고 있으니 허튼 짓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경득은 전용해의 잔인함과 포악함을 알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한다. 심지어 나중에 전용해가 죽었다고 발표됐음에도 조사 과정에서 늘 대원님이라고 존칭을 붙였던 걸 보면 정말 전용해를 신으로 믿었을 수 있다.
당시 수사의 한계로 백백교에 대해서 완전히 조사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광복 이전과 이후를 포함해도 전무후무한 살인 종교단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1935년 황해도 신천군에 살던 유곤룡(柳崑龍, 1906 ~ ?)[13] 은 조부의 임종을 앞두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부는 본래 약방을 운영해 천석꾼을 능가하는 재산을 모았는데 백백교를 믿는 바람에 이렇게 집안이 파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7년에는 마찬가지로 백백교에 빠졌던 아버지 유인호(柳寅鎬)가 자신의 여동생 유정전(柳貞全, 당시 18세)을 교주에게 첩으로 바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유정전은 전용해에게 제대로 세뇌를 당해 전용해를 열렬히 모시는 여신도가 돼버렸다. 그와 별개로 유인호는 전재산과 딸을 들어다 바쳤음에도 원로 대접만 받았을 뿐 낡은 단칸방에 궁색하게 살고 있었다. 이에 유곤룡은 분통을 참을 수 없었던 나머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들의 소굴 속에 들어가 한 번 맞부딪쳐 보겠다는 결심으로 경기도 양평군·양주군·연천군, 강원도 화천군·평강군·철원군·김화군, 함경남도 안변군 등 이른바 9개의 본소(本所)에 변장하고 탐방했다. 그리고 그동안 자기 집안에서 홀로 백백교를 믿지 않은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핑계로 해주군에서 약종상을 해서 번 3만원과 인삼, 녹용 등을 교주에게 선물로 바치겠노라 하고 당시 경기도 경성부 하왕십리정(現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에 있던 아버지의 집에서 1937년 2월 18일 밤 12시에 교주를 만나기로 했다. 그전에 유정전은 오빠 유곤룡에게 교주의 말을 끊거나 말대꾸하지 말 것, 무엄하게 거부나 반대 의사를 밝히지 말 것, 얼굴을 빤히 쳐다보지 말 것 등 금기사항을 간단히 일러 주었다.
약속 시간이 되자 전용해는 자신의 심복인 이경득과 문봉조 등을 대동하고 나타났고 방 안에는 아버지 유인호와 어머니, 여동생 유정전, 4촌 동생 유대열(柳大烈) 등이 먼저 와 있었다. 유곤룡은 4명의 가족과 전용해와 함께 방에 같이 있었다. 전용해는 "처남 매부 사이에 만남이 너무 늦었다"며 술상을 차려 오라고 시켰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유곤룡이 술에 어느 정도 취하자 "(네가 약종상을 해서) 10만 원을 번 것으로 안다"며 금전을 더 요구하는 뜻을 내비쳤다. 이에 유곤룡이 "4년 후면 10만 원이 될 것이다"라고 하며 그 뜻을 돌려 거절하자 전용해는 "내 분부를 좇지 않겠다는 거지."라고 혼잣말을 하며 곁에 앉아 있던 여동생 유정전에게 "네 오라비 심났다"고 말했고 유곤룡이 화를 내며 백백교를 엉터리 사이비 종교라 꾸짖자 전용해도 언성을 높이며 항상 휴대하던 독일제 오덕도(五德刀)를 빼어 여동생을 찌르려 했다.
유곤룡은 이를 틈타 몸을 날려 발길질로 전용해를 차 쓰러뜨렸고 전용해가 "사람 살려"를 연발하자 밖에서 망을 보던 심복들이 방에 난입해 한바탕 격투가 벌어지더니 곧 전용해를 둘러 업고 달아났다. 유곤룡은 몽둥이를 들고 전용해의 심복들을 뒤쫓아가 왕십리고등보통학교(現 서울무학초등학교) 앞에서 심복들 중 한 명인 이경득에게 몽둥이를 휘둘러 이마를 깨뜨리기도 했다. 이후 전용해의 심복들을 놓치자 왕십리파출소에 달려가 신고했고 이렇게 백백교의 마각이 드러나 일본 제국 경찰에 의해 대검거가 시작되었다.이에 대해 자세히 다룬 신동아 기사
1937년 당시 일본 제국 경찰은 8개월에 걸쳐 전용해의 아지트와 전국 각처의 백백교 비밀장소에서 시체 346구를 발굴했다. 물론 이들 외에도 희생자는 더 있을 것이다.
전용해는 이날 첩 장자봉(張子鳳, 당시 21세)과 시녀들을 데리고 경성부 앵정정에 있던 비밀 아지트를 탈출해 양평군 단월면 향소리 산 속에 있는 비밀 아지트로 도주해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아무나 보면 그 기운을 감당치 못해 죽게 된다면서 항상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 데다 자기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고 심지어 함께 잠자리까지 같이 한 여자들도 전용해의 얼굴을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해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가까운 측근이나 가족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거기다 가명 16개를 쓰는 등 매우 치밀했다.
이후 전용해의 심복 이경득의 자백에 따라 양평군 단월면 향소리 인근 용문산 밀림지대를 속속들이 수사한 끝에 1937년 4월 7일 향소리 마을에서 약 393m 거리에 있는 도일봉(道一峰) 아래 솔밭에서 동쪽을 향해 누운 채 칼로 목을 찌른 사체로 발견되었으나 얼굴을 산짐승이 먹어치운 탓에 신원확인이 어려웠다. 양복 주머니에서는 전용해가 평소 차고 다니던 시계와 현금 80여원이 나왔다. 이 탓에 세간에는 신출귀몰한 전용해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잡아서 자기 옷을 입히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여 도망쳤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전용해의 자식 전종기(全鍾基, 당시 15세)가 직접 보고 아버지라고 울부짖었다는 기록이 있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15]
이 사건은 당시 영어권 언론에도 기사로 보도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잡힌 사람만 해도 100여 명이 넘고 확인된 살인만 해도 300여 건이 넘었기 때문에 수사와 예심을 준비하는 데만 3년이 걸려 1940년에 첫 공판이 열렸다.
재개한 공판에서는 무수히 많은 방청객들이 몰려들었고 연일 언론에서 백백교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살인 행각보다는 교주 전용해의 무수히 많았던 첩들과 음란 행위와 관련한 가십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긴 첩이 60여 명이었으니. 1941년 1월에 마무리된 백백교 사건의 선고 공판 결과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金西珍),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나머지 십수 명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백백교 사건은 종결되었고 교단도 해체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위의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진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재판 직후 일본 제국에 더 중대한 일인 태평양 전쟁과 8.15 광복이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은 이들에 대해 크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광복 이후에는 당연히 관여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16] 사형 선고를 받은 간부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불명이고 징역형을 선고받은 다른 간부들은 8.15 광복과 함께 1945년에 모두 출옥하여 아래에서 언급할 잔존 세력을 만들거나 다른 사이비 종교에 관여한 듯하다.
이후 백백교는 한국 사이비 종교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사건으로 자리잡아 사이비 종교 관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상당히 자주 언급되고 다시 조명받게 되었다.
총독부는 이 사건이 전국에 충격적인 화제로 떠오르자 신종교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면서 특히 민족의식이 있는 종교단체를 해체시키는 구실로 삼았다.#
백백교 사건 종결 이후 일제는 범죄형 두상에 대한 연구 목적으로 교주인 전용해의 머리를 잘라내 포르말린으로 절여 범죄형 두상 표본으로 만들었다. 전용해의 머리는 해방 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보관하였다. 1992년작 영화 《백백교》의 끝부분에서도 전용해의 머리를 보관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잘 알려진 사실이기는 했으나 흐르는 세월 속에서 전용해 수급 표본이란 존재는 점차 잊혀지면서 도시전설 비슷한 형태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로부터 세월이 제법 흐른 2004년 SBS 프로그램인 백만불 미스터리의 42회 '국과수 X파일-일제시대 사이비 종교 백백교의 비밀'을 통하여 그 존재가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당시 국과수에 백백교의 신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교주님(전용해)의 머리를 돌려달라.'고 수시로 전화를 걸어서 직접 확인해 본 것. 이 프로그램에서 최초로 전용해의 수급으로 만든 액침표본의 모습이 전파를 타고 공개되기까지 하였다.[17]
그러다가 2010년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인 승려 혜문이 인체표본 보관 중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한 차례 이슈가 되었다.[18]
이와 관련해서 국과수에서는 이 머리가 전용해의 것이 맞는지, 왜 이 머리가 보관되는지는 모르고 단지 '역사적인 이유'[19] 때문에 아직까지 보관했다고 설명했으며 조만간 적법한 절차를 거쳐 처리하겠다고 공언하였다.#
2011년 10월 25일 수급 표본은 화장되었고 이틀 후 봉선사에서 위령제도 지내 줌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당시 처형되지 않은 간부가 일제가 패망하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유야무야 물러난 후 백백교를 재건했는데 워낙 커다란 사건이었던 데다 당시에도 사람들에게 살인종교로 몰려 별다른 성장을 하지 못했고 이 자가 1978년에 죽으면서 흐지부지되었지만 잔존 세력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앞서 말한 교주 머리를 돌려 달라고 했던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워낙 국내외적으로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설령 잔존 세력들이 있었다고 해도 재건될 리도 없고 재건되었다고 해도 같은 이름을 내세울 리가 없다.
2010년의 전용해 두개골 보관 중지를 요구하는 소송과 관련하여 '백백교의 신도들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며 교주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역시 사실무근이다. 몇몇 사람들은 전용해의 머리를 돌려 달란 신도의 전화가 혹시 교주급 노년의 간부는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는 말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상식적으로 그때까지 살아 있을 사람은 많지 않다. 일부 간부나 신도들이 사건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고 해도 명맥을 이어나갈 정도의 의미는 없을 것이며 대부분 이미 사망했을 것이다.
2006년에 출간한 전봉관 교수의 『경성기담』 중 '살인마교 백백교 사건' 파트를 보면 당시 살인 용의자의 재판 내용 등을 알 수 있다.
경기도 가평군 북면의 석룡산 부근에 백백교 터가 있다. 전용해가 이곳에서 처음 백백교를 세웠으며 접근하기도 어려운 곳이라 딱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백백교 잔당이 머물렀던 奧地 겨울의 끝자락도 좋은 산[20]
한편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덕수 사거리에는 교주 전용해가 마지막까지 머물렸고 백백교 신도들이 생활했던 신앙촌이 있었다. 백만불 미스터리에도 나왔던 곳으로 이 자리에 교회 수양관이 위치해 있다.
한편 백백교 사건은 사실 일제의 소행이었다거나 일제가 방조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나 민족이나 문화를 가리지 않고 혹세무민 살인종교를 용인하는 통치세력은 없다.[21]
일단 일제가 체포 전에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었음은 사실인 듯하다. 전용해를 신고한 유곤룡은 밀정 이력이 있다고 한다. 즉, 유곤룡은 배우였을 뿐이고 극적인 과정을 만들기 위해서 지어내거나 과장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렇게 해야 겨우 소탕할 만큼 세력이 의외로 강했을 가능성이 높다.
백백교 간부들이 지역의 일본 경찰에게 뇌물을 먹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미 백백교는 한 차례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소멸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던 만큼 한 지역에서 신도가 늘어나자 경찰에게 안 들키려고 늘어난 신도를 살해한 선례도 있었다. 때문에 그렇게 신빙성이 높은 설은 아니다. 무엇보다 전용해는 신도들 앞에서 언젠가 자신이 신통력으로 일제를 몰아낸다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에[22]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후 일본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걸 고려해서라도 도리어 뿌리 뽑아야 할 반사회단체로 간주하여 더욱 철처하게 수사를 진행했다. 물론 앞서 말했듯 태평양 전쟁과 광복 이후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2014년 유병언의 시신이 발견된 후 백백교 교주 전용해가 잠깐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둘의 시신이 발견된 경위가 유사했기 때문에 닮은 꼴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는 물론이고 현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충격스러운 사건이기에 영화나 소설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 영화에 대한 내용은 백백교(영화) 문서
참고하십시오.흉포의 극, 참학의 절, 마도 백백교의 죄상
독수에 참살된 교도
판명자만 백오십팔명
추정피살자 남녀 사백여명
범죄 사상 공전의 참기록
-백백교 사건을 보도한 1937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 사진 중앙의 인물은 교주 전용해가 아니라 살인을 주모한 백백교의 총참모 격인 이경득(李敬得)이다.[1]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에 경기도 가평군에서 창궐한 사이비 종교.
2. 역사[편집]
2.1. 탄생[편집]
백백교는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동학에서 파생된 종교로 전신은 백도교다. 정확히 말하면 1919년에 백도교의 교주인 전정운(全廷芸, 1868 ~ 1919)[2] 이 사망한 후 교주 자리를 놓고 장남 전용주(全龍珠), 차남 전용해(全龍海, 1895? ~ 1937?), 3남 전용석(全龍石) 등 세 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 각각 인천교, 백백교, 도화교로 독립했다. 1930년에 죽은 전정운이 자신의 첩 4명과 신도 일가족 8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것을 비롯해 여러 범죄 행각이 드러나면서 이들은 한 차례 철저하게 박살났다.[3]
이 와중에 차남 전용해는 무사히 도망쳤다가 돌아와 비밀리에 백백교를 재건했다.
제제자 제제자 천혼도우 제여자 제여자 지후도우도 신인천주 임조화상고령천영주전장생노도학삼층삼계사신고우 삼층삼계현신도우
(諸弟子 諸弟子 天混禱于 諸女子諸女子 地后禱又禱 新人天主 荏造化尙告靈天靈主前長生勞禱學三層三階司神告于 三層三階玄神禱于)
입교식은 돈 1원을 내고 행하는데 먼저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 후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세 번 손을 들었다 놓은 후 해괴한 주문을 7번씩 세 차례 외웠다. 이렇게 외우면 무병장수한다고 전용해는 주장했다.
(성인 남성)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
(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
(성인 여성)백의부인선선감감응
(白衣婦人善善感感應)
입교 후에는 다른 주문을 외웠는데 성별과 나이에 따라 주문이 달랐다. 남자 쪽 주문은 유명하지만 여자 쪽 주문은 세간에는 덜 알려졌다. 이런 종류의 '주문 수행'은 동학 등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신흥종교들 사이에선 흔했다. 대개 무속이나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4]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용으로는 '동자주문', '선녀주문'이라고 해서 각각 '백응선(白應善)', '백선응(白善應)'이라는 3글자짜리 주문을 따로 외워야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팔도(八道)주문, 몇백 번을 외운다면 신령을 볼 수 있게 된다는 통신(通神)주문, 옥황상제 다음 가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는 비장의 주문 등등도 있었다. 옛날 뉴스 아카이브를 잘 찾아보면 나오는데 어감들이 하나같이 이상하다.
종말의 날에 서양은 불, 동양은 물의 심판을 받아 인류가 멸망한다는 종말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백백교가 마련한 본소에서 생활하다가 물의 심판 날에 금강산의 피수궁(避水宮)[5] 으로 옮겨가면 대원님(백백교 교주)이 불로장생하고자 하는 자는 동해 천리 밖의 신대륙 영주로 보내주고 부귀영화를 원하는 자는 계룡산으로 인도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교리를 설파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하지만 당시 일제강점기의 상황 속에서 사회가 혼란했고 평균적인 사람들의 교육 수준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백교는 홍보를 위해 폐광이 된 금광에 금을 숨긴 다음에 전용해의 힘으로 금광이 다시 터졌다고 속여 사람들을 모았다. 이는 홍경래의 난 당시에도 나왔던 고전적 수법으로, 조선시대 후기 각종 예언서들이 횡행할 때 유행한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6] 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백백교의 중심 교리는 '한 사람(교주)의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하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것으로, 이는 유불선 3교가 모두 성쇠를 거듭하며 3천년을 흐르는 동안 그 본질이 쇠퇴하고 거죽만 남았고 이제 '백백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나설 때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하고 백백교가 통치하게 되리라는 주장까지 했다.
2.2. 범죄[편집]
교주 전용해는 학식이 전혀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였다. 또 총참모 격인 이경득과 벽력사 문봉조(文鳳朝) 등 간부들을 각지로 보내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 뒤 그 딸을 전용해의 시녀로 바치게 하여 성폭행했는데 전용해는 이렇게 끌어들인 젊은 여자들을 항상 첩으로 거느리다가 싫증나면 죽이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심지어 여신도가 임신했을 경우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여신도와 태아까지 전부 살해했다.
배교자, 교단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도 함께 살해했다. 나중에는 이것이 더 심해져서 신자가 너무 많이 몰려서 먹여 살리기 힘들다고 죽이기도 하였고 경찰에게 들킬까봐 죽이기도 했다. 또한 내부 다툼으로 부교주를 살해하고 매장까지 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백백교에는 이른바 '부엉이 부대[7] '라고 불리는 첩보원들이 있어 신도들의 행동을 비밀리에 감시했는데 신도들의 이상행동을 포착하면 그 즉시 간부들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부엉이 부대'의 보고를 받은 간부들은 행동대원들을 시켜 신도들을 살해했다.
당시 체포된 간부 24명[8] 은 한 사람[9] 을 제외하면 소학교[10] 도 다니지 못해 무지해서인지[11] 모두들 교주인 전용해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를 '신의 아들'로 믿고 그의 말에 철저하게 복종했다. 그리고 가족인 신도들을 지역별 지부에 흩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도망치면 다른 가족들이 살해될까 봐 복종하는 경우도 있었다.[12]
훗날 조사받았던 이경득과 문봉조 등의 진술에 따르면 자신들도 이런 일에 회의감을 느껴 도망갈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전용해가 다 꿰뚫어보고 있으니 허튼 짓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경득은 전용해의 잔인함과 포악함을 알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한다. 심지어 나중에 전용해가 죽었다고 발표됐음에도 조사 과정에서 늘 대원님이라고 존칭을 붙였던 걸 보면 정말 전용해를 신으로 믿었을 수 있다.
당시 수사의 한계로 백백교에 대해서 완전히 조사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광복 이전과 이후를 포함해도 전무후무한 살인 종교단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2.3. 최후[편집]
1935년 황해도 신천군에 살던 유곤룡(柳崑龍, 1906 ~ ?)[13] 은 조부의 임종을 앞두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부는 본래 약방을 운영해 천석꾼을 능가하는 재산을 모았는데 백백교를 믿는 바람에 이렇게 집안이 파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7년에는 마찬가지로 백백교에 빠졌던 아버지 유인호(柳寅鎬)가 자신의 여동생 유정전(柳貞全, 당시 18세)을 교주에게 첩으로 바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유정전은 전용해에게 제대로 세뇌를 당해 전용해를 열렬히 모시는 여신도가 돼버렸다. 그와 별개로 유인호는 전재산과 딸을 들어다 바쳤음에도 원로 대접만 받았을 뿐 낡은 단칸방에 궁색하게 살고 있었다. 이에 유곤룡은 분통을 참을 수 없었던 나머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들의 소굴 속에 들어가 한 번 맞부딪쳐 보겠다는 결심으로 경기도 양평군·양주군·연천군, 강원도 화천군·평강군·철원군·김화군, 함경남도 안변군 등 이른바 9개의 본소(本所)에 변장하고 탐방했다. 그리고 그동안 자기 집안에서 홀로 백백교를 믿지 않은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핑계로 해주군에서 약종상을 해서 번 3만원과 인삼, 녹용 등을 교주에게 선물로 바치겠노라 하고 당시 경기도 경성부 하왕십리정(現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에 있던 아버지의 집에서 1937년 2월 18일 밤 12시에 교주를 만나기로 했다. 그전에 유정전은 오빠 유곤룡에게 교주의 말을 끊거나 말대꾸하지 말 것, 무엄하게 거부나 반대 의사를 밝히지 말 것, 얼굴을 빤히 쳐다보지 말 것 등 금기사항을 간단히 일러 주었다.
약속 시간이 되자 전용해는 자신의 심복인 이경득과 문봉조 등을 대동하고 나타났고 방 안에는 아버지 유인호와 어머니, 여동생 유정전, 4촌 동생 유대열(柳大烈) 등이 먼저 와 있었다. 유곤룡은 4명의 가족과 전용해와 함께 방에 같이 있었다. 전용해는 "처남 매부 사이에 만남이 너무 늦었다"며 술상을 차려 오라고 시켰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유곤룡이 술에 어느 정도 취하자 "(네가 약종상을 해서) 10만 원을 번 것으로 안다"며 금전을 더 요구하는 뜻을 내비쳤다. 이에 유곤룡이 "4년 후면 10만 원이 될 것이다"라고 하며 그 뜻을 돌려 거절하자 전용해는 "내 분부를 좇지 않겠다는 거지."라고 혼잣말을 하며 곁에 앉아 있던 여동생 유정전에게 "네 오라비 심났다"고 말했고 유곤룡이 화를 내며 백백교를 엉터리 사이비 종교라 꾸짖자 전용해도 언성을 높이며 항상 휴대하던 독일제 오덕도(五德刀)를 빼어 여동생을 찌르려 했다.
유곤룡은 이를 틈타 몸을 날려 발길질로 전용해를 차 쓰러뜨렸고 전용해가 "사람 살려"를 연발하자 밖에서 망을 보던 심복들이 방에 난입해 한바탕 격투가 벌어지더니 곧 전용해를 둘러 업고 달아났다. 유곤룡은 몽둥이를 들고 전용해의 심복들을 뒤쫓아가 왕십리고등보통학교(現 서울무학초등학교) 앞에서 심복들 중 한 명인 이경득에게 몽둥이를 휘둘러 이마를 깨뜨리기도 했다. 이후 전용해의 심복들을 놓치자 왕십리파출소에 달려가 신고했고 이렇게 백백교의 마각이 드러나 일본 제국 경찰에 의해 대검거가 시작되었다.이에 대해 자세히 다룬 신동아 기사
1937년 당시 일본 제국 경찰은 8개월에 걸쳐 전용해의 아지트와 전국 각처의 백백교 비밀장소에서 시체 346구를 발굴했다. 물론 이들 외에도 희생자는 더 있을 것이다.
전용해는 이날 첩 장자봉(張子鳳, 당시 21세)과 시녀들을 데리고 경성부 앵정정에 있던 비밀 아지트를 탈출해 양평군 단월면 향소리 산 속에 있는 비밀 아지트로 도주해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아무나 보면 그 기운을 감당치 못해 죽게 된다면서 항상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 데다 자기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고 심지어 함께 잠자리까지 같이 한 여자들도 전용해의 얼굴을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해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가까운 측근이나 가족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거기다 가명 16개를 쓰는 등 매우 치밀했다.
이후 전용해의 심복 이경득의 자백에 따라 양평군 단월면 향소리 인근 용문산 밀림지대를 속속들이 수사한 끝에 1937년 4월 7일 향소리 마을에서 약 393m 거리에 있는 도일봉(道一峰) 아래 솔밭에서 동쪽을 향해 누운 채 칼로 목을 찌른 사체로 발견되었으나 얼굴을 산짐승이 먹어치운 탓에 신원확인이 어려웠다. 양복 주머니에서는 전용해가 평소 차고 다니던 시계와 현금 80여원이 나왔다. 이 탓에 세간에는 신출귀몰한 전용해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잡아서 자기 옷을 입히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여 도망쳤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전용해의 자식 전종기(全鍾基, 당시 15세)가 직접 보고 아버지라고 울부짖었다는 기록이 있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15]
이 사건은 당시 영어권 언론에도 기사로 보도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잡힌 사람만 해도 100여 명이 넘고 확인된 살인만 해도 300여 건이 넘었기 때문에 수사와 예심을 준비하는 데만 3년이 걸려 1940년에 첫 공판이 열렸다.
재개한 공판에서는 무수히 많은 방청객들이 몰려들었고 연일 언론에서 백백교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살인 행각보다는 교주 전용해의 무수히 많았던 첩들과 음란 행위와 관련한 가십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긴 첩이 60여 명이었으니. 1941년 1월에 마무리된 백백교 사건의 선고 공판 결과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金西珍),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나머지 십수 명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백백교 사건은 종결되었고 교단도 해체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위의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진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재판 직후 일본 제국에 더 중대한 일인 태평양 전쟁과 8.15 광복이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은 이들에 대해 크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광복 이후에는 당연히 관여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16] 사형 선고를 받은 간부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불명이고 징역형을 선고받은 다른 간부들은 8.15 광복과 함께 1945년에 모두 출옥하여 아래에서 언급할 잔존 세력을 만들거나 다른 사이비 종교에 관여한 듯하다.
이후 백백교는 한국 사이비 종교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사건으로 자리잡아 사이비 종교 관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상당히 자주 언급되고 다시 조명받게 되었다.
총독부는 이 사건이 전국에 충격적인 화제로 떠오르자 신종교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면서 특히 민족의식이 있는 종교단체를 해체시키는 구실로 삼았다.#
2.4. 전용해에 대한 이야기[편집]
백백교 사건 종결 이후 일제는 범죄형 두상에 대한 연구 목적으로 교주인 전용해의 머리를 잘라내 포르말린으로 절여 범죄형 두상 표본으로 만들었다. 전용해의 머리는 해방 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보관하였다. 1992년작 영화 《백백교》의 끝부분에서도 전용해의 머리를 보관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잘 알려진 사실이기는 했으나 흐르는 세월 속에서 전용해 수급 표본이란 존재는 점차 잊혀지면서 도시전설 비슷한 형태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로부터 세월이 제법 흐른 2004년 SBS 프로그램인 백만불 미스터리의 42회 '국과수 X파일-일제시대 사이비 종교 백백교의 비밀'을 통하여 그 존재가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당시 국과수에 백백교의 신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교주님(전용해)의 머리를 돌려달라.'고 수시로 전화를 걸어서 직접 확인해 본 것. 이 프로그램에서 최초로 전용해의 수급으로 만든 액침표본의 모습이 전파를 타고 공개되기까지 하였다.[17]
그러다가 2010년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인 승려 혜문이 인체표본 보관 중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한 차례 이슈가 되었다.[18]
이와 관련해서 국과수에서는 이 머리가 전용해의 것이 맞는지, 왜 이 머리가 보관되는지는 모르고 단지 '역사적인 이유'[19] 때문에 아직까지 보관했다고 설명했으며 조만간 적법한 절차를 거쳐 처리하겠다고 공언하였다.#
2011년 10월 25일 수급 표본은 화장되었고 이틀 후 봉선사에서 위령제도 지내 줌으로써 마무리되었다.#
2.5. 잔당?[편집]
당시 처형되지 않은 간부가 일제가 패망하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유야무야 물러난 후 백백교를 재건했는데 워낙 커다란 사건이었던 데다 당시에도 사람들에게 살인종교로 몰려 별다른 성장을 하지 못했고 이 자가 1978년에 죽으면서 흐지부지되었지만 잔존 세력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앞서 말한 교주 머리를 돌려 달라고 했던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워낙 국내외적으로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설령 잔존 세력들이 있었다고 해도 재건될 리도 없고 재건되었다고 해도 같은 이름을 내세울 리가 없다.
2010년의 전용해 두개골 보관 중지를 요구하는 소송과 관련하여 '백백교의 신도들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며 교주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역시 사실무근이다. 몇몇 사람들은 전용해의 머리를 돌려 달란 신도의 전화가 혹시 교주급 노년의 간부는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는 말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상식적으로 그때까지 살아 있을 사람은 많지 않다. 일부 간부나 신도들이 사건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고 해도 명맥을 이어나갈 정도의 의미는 없을 것이며 대부분 이미 사망했을 것이다.
3. 기타[편집]
2006년에 출간한 전봉관 교수의 『경성기담』 중 '살인마교 백백교 사건' 파트를 보면 당시 살인 용의자의 재판 내용 등을 알 수 있다.
경기도 가평군 북면의 석룡산 부근에 백백교 터가 있다. 전용해가 이곳에서 처음 백백교를 세웠으며 접근하기도 어려운 곳이라 딱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백백교 잔당이 머물렀던 奧地 겨울의 끝자락도 좋은 산[20]
한편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덕수 사거리에는 교주 전용해가 마지막까지 머물렸고 백백교 신도들이 생활했던 신앙촌이 있었다. 백만불 미스터리에도 나왔던 곳으로 이 자리에 교회 수양관이 위치해 있다.
한편 백백교 사건은 사실 일제의 소행이었다거나 일제가 방조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나 민족이나 문화를 가리지 않고 혹세무민 살인종교를 용인하는 통치세력은 없다.[21]
일단 일제가 체포 전에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었음은 사실인 듯하다. 전용해를 신고한 유곤룡은 밀정 이력이 있다고 한다. 즉, 유곤룡은 배우였을 뿐이고 극적인 과정을 만들기 위해서 지어내거나 과장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렇게 해야 겨우 소탕할 만큼 세력이 의외로 강했을 가능성이 높다.
백백교 간부들이 지역의 일본 경찰에게 뇌물을 먹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미 백백교는 한 차례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소멸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던 만큼 한 지역에서 신도가 늘어나자 경찰에게 안 들키려고 늘어난 신도를 살해한 선례도 있었다. 때문에 그렇게 신빙성이 높은 설은 아니다. 무엇보다 전용해는 신도들 앞에서 언젠가 자신이 신통력으로 일제를 몰아낸다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에[22]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후 일본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걸 고려해서라도 도리어 뿌리 뽑아야 할 반사회단체로 간주하여 더욱 철처하게 수사를 진행했다. 물론 앞서 말했듯 태평양 전쟁과 광복 이후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2014년 유병언의 시신이 발견된 후 백백교 교주 전용해가 잠깐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둘의 시신이 발견된 경위가 유사했기 때문에 닮은 꼴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4. 매체[편집]
당시는 물론이고 현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충격스러운 사건이기에 영화나 소설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 이 사건을 처음으로 다룬 작품은 구보 박태원의 장편소설 『금은탑』이다. 1938~39년 조선일보에 『우맹』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으며 단행본은 1949년『금은탑』으로 출간되었다.[23] 백백교의 재산 갈취, 여신도 농락, 살인 행각과 한 청년에 의해서 무너지는 과정을 세세히 그렸다.
- 1980년대 말 『백백교』라는 소설이 출간되었으나 극단적인 19금 묘사로 서사성이 부족하다.
- 2014년 도진기의 추리소설 『유다의 별』도 백백교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백백교의 후예로 추정되는 인물이 일으킨 연쇄강도 사건을 단서로 전용해가 죽기 전 숨겨둔 백백교의 재산을 찾는 내용이다.
1992년 작은 이대근 주연[24] 이고 나름 제대로 보여준다. 단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일부 내용이 검열삭제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신흥종교문제 연구소장이었던 탁명환의 자료 제공 및 자문을 통해 만들어졌다. 특히 주색잡기에 몰두하는 불한당 전용해와 얼굴을 가리고 눈빛과 목소리만으로도 광기 넘치는 사이비 교주를 동시에 보여준 이대근의 연기가 일품이다. 그러나 사실과 다른 내용도 많고 당시의 영화 수준답게 영화의 초점이 전용해와 그 일당들의 엽색행각 위주로 흘러가는 게 아쉽다. 영화는 전용해가 자살을 빙자해 사실은 아직도 살아 있지 않았을까라는 찜찜한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다만 영화적 허용으로 고증 오류도 많다. 영화는 유곤룡이라는 청년이 백백교에 입교를 빙자한 실체를 밝히고 누이동생을 구하기 위해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환심을 사는 내용이며 동시에 전용해의 사이비 행각, 그 부하들의 각종 일탈, 범죄 행위 등이 교차된다. 하지만 유곤룡이 백백교의 실체를 밝힌 것은 맞지만 영화에서 감금당한 누이 유정전은 이미 전용해의 애첩으로 백백교에 크게 심취한 인물이었다. 또 유곤룡과 유정전의 아버지도 초반에 살해당하지만 실제로는 젊은 시절부터 재산과 딸을 열심히 바쳐 뒷방 늙은이나마 멀쩡히 살아 있었고 훗날 법정에서 백백교의 역사를 진술했다. 여담으로 엔딩으로 나오는 노래는 탱고 노래의 근본이라 불리는 La Cumparsita다.
백백교(영화) 문서 참고.
이 외에도 한혜연의 미스터리 오컬트 만화 『애총』 속 배경 도시인 Y시가 백백교 사건이 벌어졌던 곳으로 설정되었으며 프롤로그에서도 백백교 사건이 나온다.
백백교(영화) 문서 참고.
이 외에도 한혜연의 미스터리 오컬트 만화 『애총』 속 배경 도시인 Y시가 백백교 사건이 벌어졌던 곳으로 설정되었으며 프롤로그에서도 백백교 사건이 나온다.
- 천일야사의 어사 박문수 코너에서도 백백교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이는 '새하늘교'라는 사이비 종교가 등장한다.
기도할 때 괴상한 주문을 외우는 점, 순결한 처녀를 교주를 위한 제물로 바친다(=살해한다)는 점도 백백교와 같다.[25] 다만 이름인 새하늘교 자체는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新天地耶蘇敎 證據帳幕聖殿)의 직역으로 보인다.[26]
- 차트를 달리는 남자 사이비 종교편에서 3위에 꼽히는 기염을 토했다. 참고로 2위는 옴진리교, 1위는 인민사원이다.
- 컬트영화 차우에서 잠깐 언급된다. 장항선이 맡은 베테랑 엽사 천일만이 산장에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일제강점기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가 신도를 2,000명이나 죽인 후 경찰에 쫓기며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결국 이 산돼지가 사는 산자락 어딘가에서 자살했는데 나중에 찾았을 때는 시체의 머리만 남아 있었으며 몸뚱아리는 산돼지에게 죄다 뜯어먹혔다고 한다.[27]
- 군산에 있는 자영업 방탈출 모던타임즈에 백백교라는 이름으로 만든 테마가 있다. 해당 방탈출 카페가 근현대사를 메인 테마로 다루고 있는 만큼 본문에서 설명하는 백백교와 관련한 내용을 토대로 다룬 테마라고 볼 수 있다. 일부 잔인한 요소가 있으니 체험할 때 주의해야 한다.
- 소설 <경성 탐정 이상>에서 '백색교'라는 이름의 사이비 종교가 등장하는데 작중 시대 배경이 1930년대라는 점이나 종교의 명칭, 작중에서 언급된 이 종교의 행각을 볼 때 백백교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설정상 주인공 이상과[28] 악연으로 엮여 있는 종교로, 경성의 지하에서 암약하는 거대한 흑막으로 묘사된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022년 8월 11일 방영분에서 '죽음의 동굴 -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제하에 소개되었다. 해당 방영분에서는 당시 백백교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일본 경찰이 3년에 걸쳐 수사했다는 점에 대해 일본이 조선에 대한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하려 했던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했다.[29]
- 검은방 시리즈에는 백백교를 모티브로 한 백선교가 나온다.
- 벌거벗은 한국사 55회에서 백백교를 다뤘다.
- 네이버 웹툰 사변괴담에 등장하는 의문의 단체가 백백교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자의 입으로 '피수궁'이 언급되고 白자 앞에서 기도를 올리며 작중 등장한 동자보살의 입으로 '왜정때 토벌된 사특한 놈들의 잔당'이라고 언급된다. 상술했듯이 간부급들이 일제 당국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기록은 없는데 해방 후의 혼란기에 탈출해서 조직을 재건했다는 설정일 듯. 다만 진짜로 시체들을 부활시켜서 '생시'라는 좀비 같은 존재로 부활시키는 힘이 있고 6.25 전쟁 중인 작중 배경에서 에피소드들마다 시체들을 모으고 부활시켜서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
- 수사반장 1958 5회에 백백교를 모티브로 한 흑백교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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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주 전용해의 얼굴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아래의 2.3 문단 '최후' 참고.[2] 全庭云이라고도 한다. 그 밖에 전정예(全廷藝), 전정훈(全正薰), 전백백(全百白), 전여실(全如實), 적화정운(的化廷云), 김해실(金海實) 등의 이명이 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친척으로 자칭했지만 전정운은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전꼽새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전꼽새의 고향이 평안북도 영변군 연산면 화현동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전라북도 정읍시 출신인 전봉준과 가까운 친척일 가능성은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다.[3] 전정운은 생전 자신이 영생불망한다고 주장해왔는데 그가 갑작스레 죽자 아들 전용해와 부교주이자 전정운의 장인 우광현(禹光鉉)은 그의 죽음을 비밀리에 숨기고 교단을 수습했다. 전용해는 처음부터 교주는 아니었고 차병간(車秉幹), 김공희(金公熙), 우광현 등 바지사장들을 교주로 내세운 뒤 교단의 실권을 잡았다. 이후 주도권 싸움으로 사이가 틀어져 우광현을 살해하여 암매장했다.[4] 다만 영화에서는 실제와 달리 남자 주문과 여자 쪽 주문인 '백의부인선선감감응'을 모두 '백백백의의의적적적'으로만 간략화하였다.[5] '물(水)을 피하는(避) 궁전'이란 뜻이다.[6] 세상을 평화롭게 할 정도령, 진인(眞人)이 세속(조선왕조)의 압제를 피해 바다 멀리 어느 섬에 은거하며 힘을 키우다가 때가 되면 뭍으로 돌아와 이상세계를 만든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바다섬(海島)의 진인(眞人)'이라고 하였다.[7] 주로 밤에 행동한다고 해서 붙은 명칭으로, 구성원 대부분이 10대 소년소녀들이었다고 한다.[8] 24명중에서 공판에 이름이 알려진것은 10명으로써 이경득, 문봉조, 이순문, 장서오, 박달준, 김서진, 길군옥, 이한종, 이창문, 이자성으로 나왔다.[9] 고등 보통학교를 나온 이자성으로 알려졌다.[10] 오늘날의 초등학교다. 일본과 북한에서는 현재도 초등학교를 소학교라고 부른다. 중국이나 대만 같은 중화권에서는 소학.[11] 사실 당시 조선은 가난해서 문맹률이 70~80%대에 달했고 학비가 비쌌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초졸만 해도 잘 다닌 축에 속했고 고졸이면 엘리트로 취급받았다.[12] 나중에 가면 살인을 즐기고 무덤덤해졌는지 문봉조는 자신의 형까지 죽였고(다만 형의 어린 혈육은 불쌍하다고 하여 살려주었다.) 사람을 죽인 후 그 시체를 자전거에 숨기고 백주대낮에 경성부 한복판을 질주했다.[13] 1925년에 약관이었다고 하니 1906년생이다. 1949년 6월 26일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유곤룡은 1937년 일본 제국 경찰에 백백교의 실체를 폭로해 일망타진할 수 있게 한 공로로 8.15 광복 이전까지 계속 일본 제국 경찰의 밀정을 비롯해 나중에는 일본 제국 육군의 밀정 노릇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광복 직후에는 타니구치(谷口)라는 성씨를 가진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장에게 자신의 한복을 입혀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게 편의를 봐 주었다고 하며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동에 거주하면서 남산동 민보단 공안부장 및 남산동회장 등을 역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9년 6월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 물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결말을 안다면은 풀려 났겠지만 그 이후의 행적을 불명이다.[14] 각각 1939년 4월 1일 동아일보 기사, 1937년 4월 13일 조선일보 기사[15] 과거 방송에서 나온 전용해의 머리를 보면 얼굴 전체가 없는 게 아니라 얼굴의 입 부분을 포함한 얼굴 아래쪽만 없고 윗부분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이를 미루어 보아 아마도 눈 부분을 보고 아버지, 즉 전용해임을 알아본 것으로 보인다.[16] 다만 조선총독부는 8.15 광복 당시 흉악불량수를 빼고 모두 출옥하라고 했으니 이후 처분은 미군정 측에서 관여했을 것이다.[17]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조회하다 보면 사진이 있는데 화질이 좋지는 않으나 혐짤이므로 보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 허나 화질이 좋은 캡처본은 찾기 어렵다. 이는 백만불 미스터리가 아날로그/SD용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며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에서도 39회 이후 회차는 미공개 상태.[18] 일제 잔재 청산과 관련해서 벌인 소송으로, 교주 수급뿐만 아니라 기생 명월이 생식기 표본 등을 모두 폐기할 것을 주장했다. 연구용으로 보관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반문명적이고 반인륜적이라는 것. 이들은 결코 백백교가 저지른 일들을 일제가 조작했다고 주장하진 않았다.[19] 상술하였듯 일제가 만든 표본을 해방 이후 그대로 넘겨받아 국과수 창설 때부터 보존하고 있었다.[20] 백백교 지부는 비밀리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잘 접근하기 힘든 곳에 있었으며 대부분 현재 북한 지역이다. 또 전용해의 집은 경성부 앵정정일정목 49(京城府 櫻井町一丁目 49, 게이조후 사쿠라이마치 잇쵸메), 지금의 인현동 1가(을지로 16길 매일온천 자리로 추정) 지역에 있었지만 그냥 평범한 주택가다. [21] 당시 일본은 국내에서조차 천율교 등 국수주의적인 종교도 사이비라면 철저하게 단속했다. 애초에 일제와 같은 전체주의적인 체제에서는 종교를 허용하는 경우가 드물다.[22] 전용해가 강렬한 민족의식이 있어서 그랬다기 보다는 민중의 일제에 대한 증오심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물론 그 역시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이 없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저지른 악행들을 보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한세대 넘게 이어졌음에도 민중들이 일제를 증오해서 사이비교주 조차도 이를 이용해야 할 정도였다, 정도의 의미 밖에 없다.[23] 박태원은 당시 남한에 있었으며 6.25 전쟁 중 월북했다.[24] 잘 보면 김형자나 문회원, 김영인(심영 배우와 동명이인), 이춘식(정도전의 노비 똘복 역), 조형기 등 은근히 중견 탤런트들도 많이 나온다.[25] 그리고 이 에피소드에서 박문수의 조수인 이기자가 제물로 바쳐지면서 목숨을 잃는다.[26] 교주의 이름인 희만도 신천지 교주 이만희의 이름을 뒤집은 것이다.[27] 다만 위에서도 나왔듯 실제로는 얼굴은 일부 뜯어먹혔지만 적어도 몸뚱이는 남아 있었다. 작중에서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몸은 다 뜯어먹혔더라' 식으로 와전되어 엽사들 사이에 전해졌다.[28] 정확히는 이상뿐만 아니라 구보도 함께[29] 즉 일본 입장에서는 백백교 사건을 빌미로 '이런 사이비 종교를 믿는 조선인은 역시 미개한 민족이니 대일본제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려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30] 다만 이 부분은 사이비 종교 전반을 모티브로 한 보인다. 예를 들어 신도들이 맞는 장면은 은혜로교회를, 교주의 헤어스타일은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 순백동산이라는 이름은 아가동산 등을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