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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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에 발생한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에 대한 내용은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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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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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03년 2월 18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역대 최악의 지하철 사고로 손 꼽히는 대형 참사로, 전 세계 지하철 사고 사망자 수 2위를 기록한 철도 사고다.[7] 더불어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방화 사건이자 최악의 대량살인 사건이고 최악의 묻지마 테러 사건이다.
대한민국의 건축 안전을 성수대교 붕괴 사고(1994)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1995)가, 학교 안팎에서의 학생 안전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2014)가, 야외에서의 군중 안전을 이태원 압사 사고(2022)가 크게 바꾸었다면 대한민국의 철도 안전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크게 바뀌게 되었다.
# 사건 발생 24분 후 대구 지하철 참사를 보도한 연합뉴스의 유일한 1보 기사이다.[8]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라는 말만 봐서는 흔하디 흔한 단순 화재 같아 보이지만 이후 방화범이 검거되었다.
최종 사망자는 192명에 실종 6명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항공 사고를 제외한 사건들 중 6번째로 많은 대규모 인명 피해를 기록한 사고이다.[9]
2024년 2월 18일에 참사 21주기를 맞이하였다.
2. 사건 발생[편집]
뇌졸중으로 인한 반신불수와 심한 우울증을 앓던 김대한(당시 56세)이 자신의 신변을 비관하다 자살을 하기 위해 09시 30분경, 대구광역시 달서구 송현동에 있는 송현역에서 1079열차 지하철에 올라탔다. 김대한은 송현역 근처에 있는 주유소에서 휘발유 2L를 구입한 상태로 열차에 승차했다.[10]
한국어 위키백과, 당시 현장 검증 기사
다행히 당시 1079 열차는 중앙로역에 정차 중이었고 많은 승객들이 열려 있던 출입문을 통해 대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독가스가 워낙 심해 미처 대피하지 못한 승객도 많아 1079 열차에서도 전체 사망자 192명 중 49명이 사망했다.[11]
2.1. 사건 진행[편집]
당일 비번 근무로 비상 응소 후 인명사고가 일어난 1080호 열차 현장에 가장 먼저 진입했던 당시 대구서부소방서 김명배 소방위. 그는 너무나도 지친 나머지, 본인을 향한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12]
- 09시 30분: 방화범 김대한이 방화를 목적으로 송현역 인근 주유소에 방문하여 휘발유 7,500원(약 4L~5L) 상당을 구입한 뒤 1호선 송현역 안심 방면 승강장에서 안심행 1079열차에 탑승했다.[13]
- 09시 51분: 1079열차가 전 역인 반월당역을 출발하자 김대한은 휘발유가 담긴 통을 만지작거리고 라이터를 껐다 켰다 하기 시작했다. 그때 반대편에 앉아있던 승객 전융남 씨[14] 가 "보소! 당신 왜 자꾸 불을 켜는 거요!" 라고 큰 소리로 항의하자 김대한은 행동을 멈추려는 듯했다.
- 09시 52분~09시 53분: 안심행 1079열차가 중앙로역에 도착하였다. 김대한이 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는 순간 가방에 든 휘발유에 불을 붙이려 하자 승객 몇 명이 그를 제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대한은 휘발유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자신의 옷에 불이 붙자 놀란 김대한은 휘발유 통을 전동차의 바닥에 던졌고 수 초만에 전동차가 불길에 휩싸였다. 불이 삽시간에 전동차 의자와 바닥 천장에 옮겨붙어 결국 수 초만에 큰 불이 발생하였다. 당시 열차는 의자부터 바닥까지 전부 불에 타는 가연재 소질이었기 때문에 불이 번지는 데는 크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15]
방금 전 김대한을 제지했던 승객 전융남 씨는 중앙로역에서 내리면서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뒤를 돌아보니 펑펑거리는 소리와 함께 삽시간에 불이 번졌고 김대한도 몸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 열차 안에서 빙빙 돌면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전융남 씨는 "나오시오!"하면서 열차 안으로 들어가 김대한의 뒷덜미를 잡고 강제로 탈출시켰고 입고 있던 양복을 벗어 불을 꺼서 김대한을 승강장 구석에 놔두고 "범인을 잡았으니까 좀 도와주시오!"라면서 탈출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비규환인 상황에서 모두 듣지 못했다.
그 불에서 나온 검은 연기, 유독성 가스가 승강장과 지하 1~2층 대합실에 급속히 확산됐고 승객들이 주출입구 쪽의 계단을 통해 대피하기 시작하였다.[16] 1079열차 기관사는 소화기로 초기 화재 진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화재 발생 사실을 종합사령실에 보고하지 않은 채 대피했다. 종합사령실 기계설비사령 주컴퓨터에 중앙로역 화재 경보 문구가 뜨고 경보음이 울렸으나 종합사령실에서는 오류가 잦다는 이유로 이를 무시했다.
- 09시 53분~09시 54분: "1079열차에 타고 있던 40대 남성에 의해 전동차 안에서 화재가 발생되었다"는 내용을 최초로 대구소방안전본부 종합사령실에 신고하였고 이후 역사 밖으로 탈출한 일부 승객들, 전동차 안에 갇힌 승객들과 휴대전화 통화를 한 가족들 등에 의해 신고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소방본부 종합상황실에서는 8개 소방파출소[17] 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삼덕소방파출소 등 중부소방서 및 북부소방서 휘하의 8개 소방대가 출동했다.
- 09시 55분: 중앙로역 역무원이 종합사령실에 "중앙로역 실제 화재입니다. 전혀 앞이 분간이 안 됩니다. 신고 좀 부탁드립니다."라며 급히 보고했으나 종합사령실에서는 119에 신고하지 않았다. 이후 종합사령실에서 전체 열차에 "전 열차에 알립니다. 중앙로역 진입 시 조심히 운전하여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화재 발생했습니다."라고 열차 무선 전체 호출을 통하여 통보하였다.[18] 중앙로역 역무원이 초기 소화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부 직원이 승객 대피를 유도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사건을 대형 참사로 만들게 된 장본인인 안심발 대곡행 1080열차가 대구역을 발차하여 중앙로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종합사령실에서는 중앙로역으로 진입하는 1080호 전동차 기관사에게 열차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진입 금지 지시나 무정차 통과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19]
- 09시 56분: 대곡행 1080열차가 이미 검은 연기가 가득 차 있던 중앙로역 승강장에 도착하여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렸으며 승강장에 있던 연기가 전동차 안으로 밀려들자 기관사가 즉시 출입문을 닫았다. 이후 지하 1층 지하상가로 검은 연기가 계속해서 차오르기 시작하였고 여전히 대합실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로 가득하였으며 잠시 뒤 방화 셔터가 작동하여 지하상가와 대합실 사이 대피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미처 셔터가 내려가기 직전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끝내 지하 1층 대합실에 갇혀 버렸다.[20]
- 09시 57분: 전차선이 단전되면서 전동차의 전원이 끊어지며 이에 따라 전동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중앙로역 역무원이 화재 사실을 119에 신고하였고 곧 중부소방서 서문로소방파출소 소방대원이 현장에 도착해 인명구조를 시작하였다.
- 09시 58분: 1080열차 기관사가 종합사령실에 "엉망입니다. 답답하니까 빠른 조치 바랍니다. 대피 시킵니까? 어떻게 합니까?"라며 승객 대피여부를 결정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고 운전사령은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한 채 "단전돼서 차 못 움직이잖아 지금. 그럼 일단 방송하시고"라고 지시하여 1080열차 기관사는 "잠시 후 출발할 것이니 대기해 달라"고 방송하였다.[21] 이 때 1079열차에서 1080열차로 불이 옮겨 붙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사이 종합사령실과 1080열차간 열차무선 통화가 두절되었다.
- 09시 59분: 1080열차 기관사가 운전사령에게 열차 무선을 통해 "지금 전기가 공급되었다가 끊어졌다가 엉망입니다."라며 승객 대피 여부 및 후속 조치를 요구하였으나 운전사령은 "침착하게 하라"는 무책임한 말만 반복했다.
- 10시 02분: 종합사령실에서 1080열차에 전력이 공급되지 않고 중앙로역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고 1080열차 기관사에게 승객들을 승강장 위로 대피시키라고 지시하였으며 1080열차 기관사는 출입문을 개방하고 승객 대피 안내 방송을 실시하였으나 1~4호차 중 일부 객차 및 5, 6호차[22] 전체 출입문이 열리지 않았고[23] 승객들이 수동으로 출입문을 여는 방법을 몰라 전동차 안에 갇혀 있게 되었다. 결국 1080호에서는 1호차 1명, 2호차 8명, 3호차 2명, 4호차 13명, 5호차 55명, 6호차 63명으로 모두 142명이 사망했다. 이때 소방파출소 및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구조 활동을 시작하였다.
- 10시 04분: 소방본부 종합상황실에서 복현소방파출소 등 16개 소방파출소, 달서소방서, 동부소방서 등에 구급차와 물탱크차 출동을 요청하였으며[24] 지하 1층과 지하 2층 대합실에서 인명구조를 계속 실시하였다.
- 10시 10분: 1080열차 기관사는 운전사령의 "전동차 판 내리고 차 죽이고 가라"는 지시를 받고 승객들의 안전과 대피를 확인하지 않은 채 전동차의 주간제어기 키(마스터 키)[25] 를 뽑는 바람에 열차의 모든 칸의 출입문이 닫혀 버렸고[26] 1080호 기관사는 1호차 객실 출입문만 열어주고 대피하였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승객들은 그대로 전동차 안에 갇혀 질식해 사망하였다. 이후 1080호 기관사는 역사의 출입구를 통해 탈출하였다.[27] 이후 운전사령이 1079호와 1080호를 호출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 10시 12분: 소방본부 종합사령실에서 대구시내 병원 구급차 동원을 요청했다.
- 10시 17분: 종합사령실에서는 "전 열차에 알립니다. 역에 도착하는 열차는 사령지시받고 발차하시기 바랍니다"라며 전 열차에 운행중지 명령을 내리며 더 이상 다른 전동차가 중앙로역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고 승객들을 모두 하차시켰다. 그 시각 중앙로역 역무원들은 모두 탈출 후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중부소방서장이 자체 비상소집명령을 내렸다.
- 10시 25분: 소방본부장이 경북소방본부에 구조대 및 구급대 지원 요청을 하였다.
- 10시 28분: 종합사령실에서 전 열차의 운행 중지 및 승객 하차를 지시하였다.
- 10시 52분: 소방본부장이 소방 대응 단계 광역 3호를 발령하여 해당 본부의 전 직원을 비상 소집하도록 명령하였다.
- 11시 11분: 경북소방본부 6개 대의 구급차 12대가 지원 출동하였다.
- 13시 38분: 화재가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생존자들은 밖에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소방대원들은 지하 2층과 지하 3층 승강장으로 내려와 본격적인 시신 수습 작업을 실시하였다.
2.2. 지하철 공사 직원의 초동 대응[편집]
2.2.1. 기관사[편집]
1. 1079호 열차 기관사
안심행 1079호 열차 기관사는 09:52:32경 중앙로역에 도착하여 출입문 개방 상태에서 후사경과 CCTV로 승객 승하차 상태를 감시하던 중 하차 승객들의 동요와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운전실 밖으로 나가 1호차 객실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하였다.
화재를 진화하려고 운전실에 있는 소화기를 가지고 1호차 객실로 뛰어가 객실 안 불길을 향해 소화기를 분사하였으나 소화액을 전부 분출하여도 불길이 진화되지 않고 확산되어 더 이상 화재를 진압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마지막 칸까지 뛰어가서 열차의 출입문을 열고 승객들을 대피시킨 뒤 본인도 출구로 대피하여 의식을 잃고 구조되었다. 여러 모로 1080호 열차 기관사와 대비되는 부분. 그러나 당황한 나머지 운전사령에게 화재 위치, 규모 등에 대하여 보고하지 못하였다.
2. 1080호 열차 기관사
대곡행 1080호 열차 기관사는 09:55:30경 대구역을 출발할 무렵 운전사령으로부터 "중앙로역 진입 시 조심해 운전하여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을 열차 무선 전체 호출(ALL Call)을 통하여 통보받았으나 평상시처럼 S-ATO 모드[28] 로 대구역을 출발하여 중앙로역에 진입하였다.
중앙로역에 진입하기 전 이미 터널 내부의 비상등이 모두 꺼져 있었고 상당거리 전방에서 역 구내에 매연이 가득한 것을 발견하였으나 큰 화재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별다른 조치 없이 중앙로역 승강장으로 진입하면서 운전사령에 보고하기 위해 열차 무선 통화를 시도하였으나 통화가 되지 않고 09:56:45경 1080열차는 자동으로 중앙로역 상선 승강장에 정차한 후 출입문이 개방되었다.
승강장 상태를 확인하려고 운전실측 창문을 열어보니 유독가스가 극심하여 "출입문을 닫습니다. 곧 출발합니다."라고 안내 방송을 하고 곧바로 객실 출입문을 닫고 중앙로역을 출발하기 위해 FMC 모드[29] 로 전환하여 출발하려 하였으나 09:57:07경 전차선 단전이 발생되어 출발하지 못하였다.
곧바로 운전사령과 무선 통화로 전차선 급전 및 조치를 취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09:58경 다시 운전사령과 무선통화로 승객 대피에 대해 대화를 하던 중 급전이 이루어져 출발하려 하였으나 바로 단전이 되어 출발하지 못하였다.
09:59경 다시 운전사령과 무선통화에서 급전과 단전이 반복되어 전동차를 재 기동하겠다고 통화한 후 팬터그래프(전차선으로부터 전력을 받아들이는 장치) 하강 및 MC Key[30] 를 off한 후 잠시 대기하였다가 전동차를 기동하여 출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몇 차례 전동차 출발에 실패하자 승객들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는 안내 방송을 2~3회 실시하고 10:03경 자신의 휴대폰으로 운전사령실과 통화하면서 "연기가 많이 찼으면 문 열어놓고 안내 방송을 하여 승객들을 승강장 위로 대피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운전실 우측 측면 출입문 열림 스위치(DOOS3)로 출입문을 개방하고 2회 정도 승객 대피 안내 방송을 하고 운전용품함에 비치된 손전등을 꺼내어 객실로 이동 중 입구에서 3~4명이 대피시켜 줄 것을 요청하여 계단 입구까지 유도하고 다시 운전실로 돌아왔다.
10:10경 다시 운전사령실과 통화하던 중 "전동차 판 내리고 대피하라"는 지시를 받고 마스터키(MC key)를 뽑고 1호칸 출입문만 한두 개 열고 일부 승객과 대피하였다.
2.2.2. 중앙로역 역무원[편집]
중앙로역 역무실에는 승강장을 비롯한 역 구내를 감시하는 CCTV 5대가 설치되어 있고 승강장에는 상선과 하선에 각각 2대의 CCTV가 설치되어 있어 전동차가 승강장에 진입하여 승강장을 벗어날 때까지 역무실 CCTV 감시 모니터에 나타나 감시할 수 있다.
또 화재 수신반은 역 구내에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 경보가 울리면서 화재 발생 구역에 경보 등이 표시되며 LCP(현장 운전 취급 제어반)가 설치되어 있어 중앙로역 및 인접 역인 반월당역, 대구역을 운행 중인 열차 번호와 운행 상황을 파악할 수 있고 종합사령실 운전사령과의 직통 전화인 사령 전화가 설치되어 있다.
중앙로역에는 역무실 1개소, 매표소 2개소, 개집표소 4개소, 발매기실 3개소가 있고, 사고 당일인 2월 18일에는 조책임자 1명, 역무실 모니터 감시 및 수입금 관리 1명, 매표소 2명, 기기 관리 1명 등 총 5명이 근무 중이었다.
1. 조책임자
당일 근무 조책임자는 근무 직원들을 지휘감독하고 역사 시설물을 관리하는 등 역의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로 역무실 승차권 창고에서 수입금 계산을 하고 있는 모니터 감시 및 수입금 관리 담당자의 수입금 계산을 도와주고 있었다.
09:53경 1079열차의 방화로 인하여 화재경보기가 울리자 역무실의 화재수신방으로 하선(안심 방면) 승강장 화재 감지기가 동작됨을 확인하고 때마침 역무실로 들어오던 기기 관리 담당자에게 하선(안심 방면) 승강장으로 내려가서 실제로 화재가 발생되었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하였다.
역무실 승차권 창고에서 수입금 계산을 하던 직원에게도 소화할 것을 지시한 후 09:55경 운전사령에게 사령 전화로 "중앙로역 실제 화재입니다. 전혀 앞에 분간이 안 됩니다. 신고 좀 부탁합니다."라고 화재 발생을 보고하였으나 1079열차에서 화재가 발생되었다고 상세하게 보고하지 못하였다.
09:57경 119에 중앙로역 대합실에 실제 화재 상황을 신고하였고, 09:59경 다시 운전사령으로부터 중앙로역 신호 장애로 선로 전환기를 쇄정하라는 지시와 함께 전동차 안에서 화재가 났는지 물어 와 그 장소에 연기가 많아 어딘지 모르며 선로 전환기 쪽으로 내려 갈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10:04경 다시 운전사령으로부터 승객들이 올라가니 안내 방송을 하라는 지시를 받은 후 유독가스와 매연이 극심한 가운데 승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역무실로 들어와 살려 달라고 하여 방독면을 씌워주었고 매연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벽을 짚어가면서 지하 1층 대합실로 올라온 후 3번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와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2. 기기 관리 근무자
기기 관리 근무자는 09:30경 제2 매표소에서 근무하다가 업무를 교대하고 역무실로 들어오던 중 역무실에 근무하던 조책임자로부터 승강장에 실제 화재가 발생되었는지 확인해 보라는 지시를 받고 지하 3층 하선(안심 방면) 승강장으로 내려가 1079열차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연기가 자욱함을 확인하고 신속히 역무실로 돌아와 조책임자에게 실제 화재 사실을 보고하였다.
실제 화재 사실을 보고 받은 조책임자가 역무실에 있는 소화기를 주면서 발화 지점으로 가서 소화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안심 방면 승강장으로 달려가 1079열차 1호차 객실 안을 향하여 소화기를 분사하였으나 불길이 거세어 진화되지 않았다.
이후 매연과 유독가스가 급속히 번지며 주변이 암흑 상태가 되어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라 주위 사람들을 소리 등으로 안내하여 지하 2층 대합실로 대피시키고, 매연과 유독가스가 극심하여 견딜 수가 없어 매표실을 나와 미처 대피하지 못한 몇 명의 승객과 함께 손을 잡고 지하 1층으로 대피하던 중 실신하여 119에 구조되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3. 수입금 관리 및 모니터감시 근무자
수입금 관리자의 휴가로 수입금 관리 및 모니터 감시 업무를 맡은 역무원은 역무실 내 승차권 창고에서 전일 수입금을 은행에 입금하기 위해 승차권 발매기에서 동전을 수거하여 계수기로 금액을 세고 있었다.
이때 조책임자가 화재가 발생하였다고 하며 역무실에 있는 소화기를 주면서 화재 발생 현장으로 내려가 소화하라는 지시를 받고 불이 어디서 났는지 살피면서 하선(안심 방면) 승강장 쪽 계단을 내려가려 하였으나 계단으로 승객이 올라오면서 지하 3층 승강장에는 사람이 없으니 대피하라고 하며 자기가 화재 현장을 목격하고 119에 신고하였다는 승객과 함께 나오다가 지하 1층 대합실에 있는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밖으로 나와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4. 매표소 근무자
제1 매표소에서 근무하던 직원은 화재 경보가 울리고, 승객의 "불이야" 하는 고함 소리를 듣고 매표실 안에 있는 비상 버튼을 눌러 개집표기 및 게이트를 모두 개방시키고 매표실 방송 장치로 승객 대피 안내 방송을 2~3회 실시하고 중앙로역 중간 지점에 설치된 게이트 상태 확인과 매표 수입금을 정리하던 중 유독가스 및 매연으로 호흡이 곤란하여 고통을 참아가며 4번 출구로 대피하여 소방관에 의해 구조되었다.
한편 제2 매표소에서 근무하던 직원은 비상 게이트를 개방하여 승객 대피가 용이하도록 하고 매표실 내 방송 장치를 이용하여 승객 대피 안내 방송을 하고 하선(안심 방면) 승강장 계단 쪽으로 내려가려 하였으나 연기가 심하게 올라와 내려가지 못하고 매표소로 돌아와 상황을 파악하다가 매연과 유독가스로 아무것도 볼 수 없어 벽을 짚어가며 계단을 찾아 지하 1층 대합실 기둥 부근에서 의식을 잃기 직전 소방관에 구조되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2.2.3. 종합사령실[편집]
종합사령실에는 열차 운행 관리를 담당하는 운전사령, 전력 공급 관리를 담당하는 전력사령, 종합열차제어시스템 관리를 담당하는 신호사령, 역사공조방재 관리를 담당하는 기계설비사령, 열차 무선 통신 시스템 관리를 담당하는 통신사령 등이 있다.
근무자는 종합사령실 전체를 총괄하는 종합사령팀장 1명과 각 사령을 책임지고 있는 담당(과장) 각 1명이 통상 근무하고 있고, 이 사고 발생 당시 운전사령실에는 9명이 1조 3명씩(주사령 1명, 선사령 2명) 3조 2교대로 근무하였고, 전력사령실에도 9명이 1조 3명씩(주사령 1명, 선사령 2명) 3조 2교대로 근무를 하고 있었으며 설비사령실에는 6명이 1조 2명씩 (주사령 1명, 선사령 1명) 3조 2교대로 근무하고 있었다.
2.2.3.1. 운전사령[편집]
운전사령은 신호 및 선로전환기의 취급과 LDP(열차 운행 상황 표시판), CCTV 등에 의한 열차 운행 감시와 통제, 선로상의 열차 운행 정리, 운전사고 및 장애, 이례적 상황이 발생할 경우 긴급 조치 등을 담당하고 있으며 LDP에는 1호선 전 구간 열차 운행 정보가 표시되고 CCTV 22대가 설치되어 있어 각 역 승강장에 전동차 진입 시부터 벗어날 때까지 모습을 감시할 수 있다.
1. 주사령 근무자
열차 운행 관리 업무를 수행하던 주사령은 09:55경 대곡~중앙로역간 선사령의 "중앙로역 화재"라고 전파하는 소리를 듣고 중앙로역 화재 사실을 알았으나 화재 발생으로 인한 검은 연기 때문에 CCTV 모니터에 중앙로역 승강장 모습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아 화재 원인과 규모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못했고 09:58경 교대역~큰고개역의 궤도 단락으로 신호 제어가 되지 않아 선로 전환기 수동 취급 지시 및 지연 열차의 운행 통제를 하였다.
2. 대곡역~중앙로역간 선사령 근무자
대곡~중앙로역간 선사령 근무자는 09:55경 중앙로역의 조책임자로부터 "중앙로역 실제 화재입니다. 전혀 앞에 분간이 안 됩니다. 신고 좀 부탁합니다."라는 전화를 받고 운전사령실에 "중앙로역 화재"를 복창하여 운전사령실 근무자들에게 화재 사실을 전파하였다.
화재로 인하여 발생한 검은 연기 때문에 CCTV 모니터에 중앙로역 승강장 모습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아 화재 원인과 규모에 대하여 알기 어려웠으므로 일단 중앙로역 부근을 운행 중인 전동차를 정차시키고 화재 원인과 규모 등에 대하여 정확히 파악한 후에 그에 상응한 조치를 취하여야 함에도 큰 화재가 아닐 것으로 생각하고 열차 무선 전체 호출(ALL CALL)을 통하여 중앙로역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주의 운전하라고 지시하였다.
09:57경 중앙로역 상선(대곡 방면)에 도착한 1080열차 기관사로부터 전차선 단전과 승객 대피에 대한 조치 방법에 대해 요청 받고 무선통화로 승객 안내 방송을 지시하던 중 통화가 끊어졌다.
이후 단전 구간 운행 열차 기관사로부터 단전 내용을 보고 받고 안내 방송을 시행토록 지시하는 등 운전 정리를 하던 중 10:17경 전 구간의 열차 운행이 곤란하여 전 열차에 운행 대기를 지시하였다.
3. 대구역~안심역간 선사령 근무자
대구역~안심역간 선사령 근무자는 대곡~중앙로역간 선사령 근무자의 중앙로역 화재 발생 전파 내용을 듣고 09:55경 기계설비사령에게 사령 전화로 화재 사실 확인과 재연 설비를 가동할 것을 통보하였다.
09:57경 중앙로역 조책임자에게 사령 전화로 1079열차에 소화기를 가지고 내려갔는지 확인한 후 09:59경 중앙로역 선로 전환기 장애가 발생되어 사령 전화로 중앙로역 조책임자에게 쇄정하도록 지시하면서 전동차 안에서 화재가 났는지 확인하였으나 화재 장소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10:03경 1080열차 기관사에게 전화 통화로 연기가 많이 찼으면 전동차 출입문을 개방하고 승객 대피 안내 방송과 승강장 위로 대피시킬 것을 지시하였고, 10:06경 전 전동차에 열차 무선으로 반월당~신천간 하선 전차선 단전으로 하선(안심 방면) 전동차의 정상 운행이 안 되고 있으며 상선(대곡 방면) 전동차는 정상 운행할 것과 상선 전동차 중 단전 전동차 및 신호 현시 불능인 전동차는 사령에 통보하도록 지시하였다.
10:10경 1080열차 기관사로부터 걸려 온 일반 전화 통화에서 전동차와 현장 상황이 파악되지 않으면 팬터그래프를 내리고 전동차 기동을 끄고(MC Key 취거) 대합실로 대피할 것을 지시하였다.
10:17경 전 역에 열차 운행 중지 및 대기를 지시하였으며 10:28경 종합사령팀장으로부터 전동차 운행 중단 지시를 받고 모든 열차의 승객을 하차할 것을 지시하였다.
2.2.3.2. 기계설비사령[편집]
기계설비사령은 각 지하철역사에 설치된 기계, 방재 설비를 감시할 수 있는 컴퓨터를 통하여 기계 설비의 중앙 감시 및 제어 기능을 수행하며 기계, 방재 설비에 이상이 발생하였을 경우 응급 조치 및 관련 부서에 대한 통보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 주사령 근무자
09:00부터 1단계 구간 (대곡역~중앙로역) 설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09:30경에 신체 검사를 받기 위해 사내 2층 휴게실에서 대기하던 중 10:03경 기계설비 담당으로부터 화재 발생 사실을 휴대폰으로 연락을 받고 사령실로 돌아와 중앙로역 시종점 본선 배기 송풍기를 수동으로 가동하였다.
대합실 및 승강장 공조기의 환기팬을 가동하던 중 중앙로 신호 기계실에 직원 10여명이 고립되어 있다는 통보를 받고 중앙로역사 패키지 에어컨을 수동 가동하고 본선 급기 송풍기도 수동으로 가동하여 배기시키고 배연팬, 공조기 환기팬이 정상 가동되는지 감시하였다.
2. 선사령 근무자
09:00부터 2단계 구간(대구역~안심역) 설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09:30부터 주사령이 건강검진을 위해 2층 검사장으로 내려간 후 혼자 기계설비 사령 장치를 감시하던 중 09:53경 중앙로역 화재 경보가 주컴퓨터에 현시되고 그 내용이 프린터로 출력되었으나 이를 확인하지 못하고 09:55경 운전사령으로부터 중앙로역 화재 발생 확인 및 재연 설비를 가동할 것을 통보 받고서 주컴퓨터의 화재경보 사실을 확인하고 재연 설비를 가동하였다.
2.2.3.3. 전력사령[편집]
전력사령은 전동차 운행에 필요한 전차선 전력과 각 역사에 필요한 전력공급 계통을 감시할 수 있는 컴퓨터를 통하여 전력공급 계통을 감시 및 제어하며 이상이 발생하였을 경우 응급 조치 및 관계 부서에 통보 업무를 담당한다.
1. 주사령 근무자
전력공급 계통을 감시하던 주사령은 09:57경에 영대병원~신천변전소 구간 전차선로 상하선이 영대병원변전소 반월당측(안심 방면)과 신천변전소 반월당측(대곡 방면)의 HSCB[31] 가 개방되고 반월당변전소 직류 급전 계통의 모든 차단기가 개방되며 단전됨을 확인하고 자동 급전이 정상적으로 실행되는지 감시하였다.
자동재폐로[32] 에 의한 급전이 실패함으로 선사령에게 신천변전소 반월당측의 차단기를 오버라이드[33] 로 절체하여 자동 재폐로를 실행한 결과 영대병원변전소 하선(안심 방면) 구간은 급전하였다.
그러나 신천변전소 반월당측 상선(대곡 방면)은 자동 재폐로가 실행되던 중 짧은 시간(17초, 33초) 동안 급전이 유지된 후 다시 단전이 되면서 자동 재폐로가 또 다시 이루어졌으나 실패하여 수동으로 HSCB를 투입할 것을 선사령에게 지시하였으나 급전에 실패하였다.
2. 선사령 근무자
전력 공급 계통을 감시하던 선사령은 09:57경 영대병원~신천변전소 구간 전차선로 상하선이 영대병원변전소 반월당측(안심 방면)과 신천변전소 반월당측(대곡 방면) HSCB가 개방되고 반월당변전소 직류 급전 계통의 모든 차단기가 개방되며 단전됨을 확인하고 자동 재폐로의 과정이 정상적으로 실행되는지 감시하였다.
자동 재폐로에 의한 급전이 실행되지 않아 주사령의 지시에 따라 신천변전소에 반월당측의 차단기를 오버라이드로 절체하였으나 신천변전소의 반월당측 하선(안심 방면) 차단기는 투입 즉시 개방되었고 상선(대곡 방면) 차단기는 짧은 시간(17초, 33초) 동안 급전을 유지하다가 개방되면서 자동재폐로가 실행되었으나 이후 다시 개방되어 수동 투입으로 또 다시 급전을 시도하였으나 급전이 되지 않았다.
2.3. 사건 규모 확대[편집]
1079열차 기관사는 화재 발생 이후 초기 진화에 실패하자 중앙사령실에 통보하지 않은 채 대피했고 결국 이로 인한 지하철 사령실의 오판으로 09시 55분에 원래 역을 무정차 통과해야 했던[34] 1080열차가 중앙로역 반대편 선로에 정차했다.
게다가 중앙사령실에서 119에 신고를 늦게 했고[35] 1080열차 기관사가 열차 출입문을 열어주었지만 이후 마스콘 키를 뽑고 탈출하는 바람에 다시 자동으로 닫혔다. 기관사가 일부러 마스터 키를 뽑고 탈출한 것이 아니고 사령실의 지시였다. #[36] 1080열차 기관사는 역사 내 연기로 인해 1079열차에 불이 붙은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지하철은 가연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배웠기에[37] 이렇게 심각한 화재였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고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였기에 1080열차 기관사는 사후 안전 관리 문제로 금고 5년을 선고받았다.[기사내용]
사건 확대의 원인으로는 다음 내용들이 꼽힌다.
- 당시에는 비상시 문을 수동으로 열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갇힌 사람들이 많았다. 지하철 문은 보통 문 옆 의자 아래나 벽면에 있는 뚜껑을 열고 그 안의 레버를 당기면 손으로 열 수 있는데 사고 전에 이 방법이 시민들에게 홍보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레버 위치와 사용법에 대해서 아주 조그맣게 써놨기 때문에 관계자나 지하철 타면서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 아니면 알기 힘들었다. 지금처럼 방송도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비상 레버 사용법이 지금처럼 전동차 문짝과 의자 옆면에 크게 적혀 있지 않았고 레버 주변에만 작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2003년 당시 대한민국에서 운용되던 전동차들은 인천 1호선을 제외하고 공압식 문으로 밸브 코크가 모두 의자 밑에 위치해 있어서 진짜로 방법을 아는 사람 아니면 문 여는 비상 코크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이 비상 코크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아서 공기가 모두 빠지기 전까지 몇 초 정도의 대피 지연이 불가피했다. 대피 지연으로 인해 열차 안에서 호흡곤란에 빠진 승객들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도 탈출 방법을 알고 있던 사람이 몇몇 객차에 타고 있었기에 그나마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예컨대 많은 인명피해가 난 1080열차의 경우 4호 객차에 타고 있던 승객 중에는 당시 철도청 공무원이었던 권춘섭(당시 금호역 역장)이 사태를 직감하고 비상 코크를 취급하여 출입문을 수동 개방하였다. # 바로 옆 객차인 5호 객차에서는 승객들이 수동으로 출입문을 여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승객 중 일부는 창문과 문을 부수고 탈출하였다고 한다.
참사 이후 이런 심각한 문제가 지적받으면서 개방 레버가 출입문 바로 옆 손이 쉽게 닿을 수 있는 위치로 옮겨지고[40] 전자식 도어의 보급이 확산됐다. 하도 홍보를 많이 해서 이제는 지하철 문과 스크린도어를 수동으로 열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참사 이후 이런 심각한 문제가 지적받으면서 개방 레버가 출입문 바로 옆 손이 쉽게 닿을 수 있는 위치로 옮겨지고[40] 전자식 도어의 보급이 확산됐다. 하도 홍보를 많이 해서 이제는 지하철 문과 스크린도어를 수동으로 열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 방화 셔터가 일찍 닫히면서 나오려던 사람들도 나오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화재가 난 1079열차에 비해 훨씬 많은 인명피해가 1080열차에서 발생하였다. 물론 방화 셔터에는 화재가 발생한 쪽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닫히는 경우를 대비해 문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자주 이용하는 역이든 아니든 평소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 아니라면 찾기 힘들다. 찾는다 해도 좁은 문으로 다수가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화재 당시 중앙로역은 연기가 발생하여 시야가 극도로 차단되어 있는 데다가 단전 상태였기 때문에 전등까지 모두 나가[41] 문 손잡이를 찾기 굉장히 힘들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 손전등 기능이 많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당시엔 그런 기능이 없었고 피처폰의 저열한 화면 밝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 대구지하철공사의 거듭된 인력 감축 때문에 안전요원이 없었고 역사 상주 직원이 4~5명뿐이었으며 안전 교육을 제대로 이수 받지 못했다. 때문에 신속한 대피 안내가 불가능했다.
- 중앙로역이 이용객에 비해 규모가 협소했고[42] 구조는 복잡했다. 역 위의 중앙대로가 당시 왕복 4차로, 대중교통전용지구로 정비된 현재 왕복 2차로로 협소해 개착식으로 시공한 1호선 중앙로역은 협소할 수밖에 없었고 지하상가가 역 중앙을 관통하여 다른 역들에 비해 구조가 복잡했다. 그런데 이용객은 참사 전 해인 2002년 기준 일 평균 5만 명이 넘었다. 안 그래도 혼잡한데 화재가 발생했으니 혼란은 더 컸고 이는 대피 지연을 불러왔다.
2.4. 결과[편집]
결국 사건이 일어난 지 약 3시간 이후인 오후 1시 38분경에 화재는 진압되었지만 사망 192명(신원 확인된 사망자 185명, 인정 사망[43] 1명, 신원 미상 사망자 6명), 부상 151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났다.
신원미상 사망자 6명 중 3명은 DNA가 완전히 파괴되어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사망자였고 나머지 3명은 DNA가 나왔으나 이를 대조할 유가족이 나타나지 않아 신원 확인이 어려운 사망자였다.
6명은 대구시립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다.
1. 2.18 대구지하철 참사 신원확인불능 A26-ca03, A24-ca08의 묘
2. 2.18 대구지하철 참사 신원확인불능 K42의 묘
3. 2.18 대구지하철 참사 신원확인불능 K14의 묘
4. 2.18 대구지하철 참사 DNA감정 확인 미신고 K35(여)의 묘
5. 2.18 대구지하철 참사 DNA감정 확인 미신고 K05(여)의 묘
6. 2.18 대구지하철 참사 DNA감정 확인 미신고 D08-ca01(남)의 묘
성별
1. 사망자 - 186명(신원미확인 사망자 6명 제외) - 남성: 61명, 여성: 125명
2. 부상자 - 151명(법적보상 제외자포함) - 남성: 80명, 여성: 71명
연령별
1. 사망자 186명 - 0~9세: 4명, 10~19세: 30명, 20~29세: 52명, 30~39세: 28명, 40~49세: 15명, 50~59세: 28명, 60세 이상: 29명
2. 부상자 151명 - 0~9세: 3명, 10~19세: 18명, 20~29세: 38명, 30~39세: 39명, 40~49세: 30명, 50~59세: 12명, 60세 이상: 11명
직업별
1. 사망자 186명 - 무직: 29명, 학생: 47명, 가사: 26명, 자영업: 11명, 일용직: 2명, 회사원: 15명, 공무원,교사: 5명, 기타: 51명
2. 부상자 151명 - 무직: 5명, 학생: 29명, 가사: 37명, 자영업: 10명, 일용직: 17명, 회사원: 32명, 공무원, 교사: 14명, 기타: 7명
지역별
1. 사망자 186명 - 중구: 1명, 동구: 92명, 남구: 4명, 북구: 8명, 수성구: 6명, 달서구: 8명, 달성군: 2명, 경북: 48명, 기타: 17명
2. 부상자 151명 - 중구: 2명, 동구: 78명, 서구: 5명, 남구: 11명, 북구: 10명, 수성구: 6명, 달서구: 13명, 달성군: 6명, 경북: 14명, 기타: 6명
지하철이 대중교통 수단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고 발생 시간이 9시 53분경으로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바쁜 시간이었기 때문에 인명피해의 규모가 컸다.
사상자 가운데 동구 주민이 가장 많았던 것은 안심역에서 출발한 1080열차에 탑승한 승객들의 인명피해가 컸고 달서구 대곡역에서 동구 안심역으로 가던 1079열차에 동구 지역 주민들이 많이 탑승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고가 발생한 뒤 중앙로역 일대는 실종된 가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플래카드를 붙이기도 하였으며, KTF와 LG텔레콤, SK텔레콤 등 통신사들은 중앙로역 기지국 데이터를 조회한 후 탑승객들의 마지막 휴대전화 신호 위치를 조회해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 청~장년층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시기적으로 봄방학 기간이었던 점과 사고 당일 계명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가족이 함께 탑승하였다가 사고를 당한 사례가 18가족이나 되어서 안타까움을 더하게 하였다.
이 사고에서는 부-모, 모-자, 처-자 등 1가구에 2명 이상의 가족이 동시에 참변을 당한 유가족이 12가구나 되었으며 특히 두 딸을 동시에 잃었던 모친 김모씨의 경우 보상합의 후 두 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제를 지내기 위해 경남에 있는 한 사찰을 찾았다가 9월 한반도 남부를 강타한 태풍 '매미'로 인해 사찰 내 요사체가 붕괴되면서 숨지는 안타까운 사례가 있었다.
동시 사망자 현황
1. 부-모: 2가구
2. 모-자: 1가구
3. 처-자: 6가구
자녀
1. 딸: 1가구
2. 아들: 1가구
3. 딸·아들: 1가구
이 참사의 여파로 약 8개월간 중앙로역뿐만 아니라 명덕역부터 신천역까지 6개 역의 영업이 중단되었으며 전 구간이 영업을 재개할 때까지 1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이 걸렸다. 이 때문에 약 1~2년 동안 대구 지하철의 이용객은 반 이상 감소했다. 또 중앙로역 구조물의 안전 문제가 제기되어, 중앙네거리 국채보상로 교차점을 제외한 중앙대로 대구역 - 반월당 구간[44] 이 전면 통제됐다. 이로 인해 시내버스들은 계산오거리 혹은 봉산육거리로 우회 운행했으며 402번의 경우는 아예 북성로 구간을 포기하고 한때 한일극장으로 다녔다.
또 이 사고로 전동차는 완전히 불에 타 고철만 남았고 중앙로역 천장과 벽에 설치된 환풍기, 철길 바깥쪽 지붕들도 모두 불에 녹아내려 역 구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사고 뒤 공개된 차량 내부는 시꺼먼 재와 고철만 남아 있어 사고 당시의 참상을 잘 대변한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직접적인 화상보다는 유독가스에 의한 기도 화상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불에 타 버리는 바람에 유해들은 형체도 못 알아볼 만큼 처참한 상태였다. 승객들이 유독가스 때문에 1차적으로 실신해 대피하지 못하는 동안 1080호 전동차로 불이 완전히 옮겨붙어 결국 시신 자체가 온전하게 남아 있지 못할 만큼 전소되어 버린 것이었다.[45] 설명하자면 목탄처럼 검게 타서 뼈가 보이는 건 기본이고 사망자의 대다수가 뼈만 빼고 전부 재가 되었다.[46] 뼈마저도 잘게 조각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뼛가루조차 못 찾아 들고 있던 불연성 지팡이 하나만으로 사망이 인정된 사례도 있다.
3. 피해가 컸던 원인[편집]
- 종합사령실과 1080호 기관사의 중대한 업무과실
피해가 커졌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 종합사령실과 기관사의 초동대처가 적절했다면 인명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겠지만, 이들의 부실한 초동대처로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화재가 발생하고 경보음이 울렸음에도 중앙로역의 종합사령실은 오작동이겠거니 한 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불이 치솟는 장면이 CCTV에 포착됐는데도 3분이 지나서야 화재 사실을 인지했다. 뒤늦게 사태 파악을 했을 때도 1080호가 중앙로의 전 역인 대구역에 막 진입할 때여서 사령실에서 당연히 열차에 연락해서 당장 긴급 정지하라고 지시를 했어야 했지만 화재가 발생했으니 조심히 들어가라는 지시를 하여 1080호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1080호 기관사는 중앙로역 진입 직후 연기가 엄청나게 뿜어져 나오는걸 봤음에도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여 승객들을 차내에 대기시켰고, 혼란 속에서 마스콘 키를 뽑고 탈출하는 바람에 전동차의 문이 닫혀 버려 미처 탈출하지 못한 승객들이 전동차 내에서 모두 사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만약 1080호 기관사가 유연하게 대처하여 중앙로역을 무정차 통과했거나 최소한 전동차의 문이라도 모두 열어 놓고 탈출했다면 인명피해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1080호 기관사는 중앙로역 진입 직후 연기가 엄청나게 뿜어져 나오는걸 봤음에도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여 승객들을 차내에 대기시켰고, 혼란 속에서 마스콘 키를 뽑고 탈출하는 바람에 전동차의 문이 닫혀 버려 미처 탈출하지 못한 승객들이 전동차 내에서 모두 사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만약 1080호 기관사가 유연하게 대처하여 중앙로역을 무정차 통과했거나 최소한 전동차의 문이라도 모두 열어 놓고 탈출했다면 인명피해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 부실한 사회 안전망
이 사건 5개월 전 어느 정신질환자가 서울특별시 광진구의 모 교회 부설 어린이선교원에 침입하여 점심 식사 중이던 어린이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10명에게 중경상을 입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정신질환자 관리는 5개월 동안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대구 지하철 참사가 터지고 말았다.
- 가연 재질의 전동차
대중교통 수단인 전철의 객차가 화재에 매우 취약한 가연성 재질인 폴리우레탄 폼 재질의 시트, FRP 소재로 구성된 내장재, 폴리염화비닐 재질로 된 내부 통로 자바레 및 바닥재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특히 시트가 빠른 속도로 불에 타면서 치명적인 유독가스를 발생시켰다. 거기다 당시 열차 차량에 대한 소방안전대책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고작 소화기 비치가 전부였고 객차의 경우 건축법, 소방법 및 전기사업법 등 각종 규제나 안전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었다. 이렇게 사각지대가 만들어진데는 의외로 어이없는 이유가 있었는데,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우연히도 화재로인한 열차사고가 발생한 사례가 단 한번도없었던 탓에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것이 치명적이었다.[47]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된 사건임에도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어 기관사와 종합사령실 관계자 몇 명 정도만 과실과 직무유기로 처벌되는 수준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또한 1993년 대구지하철공사에서 매입한 전동차량의 단가는 1량 당 5억 원 수준이었다.[48] 그나마도 낙찰 이후 예산 부족을 이유로 대금을 더 삭감하였다. 이는 전동차를 부실한 재질로 제작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열차 내장재 문제는 이 사고가 업계에 준 가장 크고 뼈아픈 교훈이었던 만큼 당시 개통을 목전에 두고 있던 광주 도시철도 1호선과 가장 먼저 내장재 개조에 착수한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을 필두로 전국의 모든 도시철도 및 광역철도들이 2003년 말부터 2006년까지 내장재를 불연재로 교체했다.[49]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된 사건임에도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어 기관사와 종합사령실 관계자 몇 명 정도만 과실과 직무유기로 처벌되는 수준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또한 1993년 대구지하철공사에서 매입한 전동차량의 단가는 1량 당 5억 원 수준이었다.[48] 그나마도 낙찰 이후 예산 부족을 이유로 대금을 더 삭감하였다. 이는 전동차를 부실한 재질로 제작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열차 내장재 문제는 이 사고가 업계에 준 가장 크고 뼈아픈 교훈이었던 만큼 당시 개통을 목전에 두고 있던 광주 도시철도 1호선과 가장 먼저 내장재 개조에 착수한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을 필두로 전국의 모든 도시철도 및 광역철도들이 2003년 말부터 2006년까지 내장재를 불연재로 교체했다.[49]
- 열차 내 안전 교육의 미비
지금 우리가 지하철을 탈 때 거의 필수요소급 BGM처럼 듣는 "전동차 상단에 출입문 비상 취급 장치가 설치되어 있습니다."라는 방송도 이 사고 이전에는 없었다. 참사 당시에 비상시 대응 매뉴얼이 홍보 및 숙지되어 있지 않았던 것은 참사의 규모를 키운 큰 원인으로 지적받았고 열차 내장재와 마찬가지로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쳐 지금의 철저한 차내 안전 교육에 이르게 되었다.
- 휘발유를 함부로 판매하는 안전불감증
사건이 발생하기 전 방화범 김대한은 방화를 목적으로 주유소를 방문하여 자동차 세척용 샴푸통 용량 4리터의 흰색 플라스틱 통에 휘발유를 구입해 갔다. 한편, 주유소 측에서는 구매자의 신분이나 정확한 사용 목적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인화성하고 폭발 위험이 높은 휘발유를 적절하지 않은 용기에 담아 판매함으로써 사건이 발생하는 데 한 몫을 한 꼴이었다. 석유관련법에 따르면 차량용 휘발유는 절대로 아무 용기에 함부로 판매해서는 안 되며, 구매자의 신분증(주민등록증, 여권, 운전면허증 등) 확인은 기본이다. 이를 무시할 경우 해당 주유소에 아주 강력한 행정 처분이 내려지게 된다. 그렇지만 기름 보관용 플라스틱 통에는 휘발유는 20리터까지, 경유는 30리터까지 구매&운반이 가능하다.
4. 사고 이후[편집]
4.1. 철도 안전 시스템 개선[편집]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건축 안전 시스템을 바꾸었던 것처럼 이 사건 이후 철도 안전 시스템 자체가 대수술을 거쳤다고 할 만큼 개선되었다.
사고 다음 날 조해녕 당시 대구광역시장과 대구지하철공사는 명덕역부터 신천역간 열차운행을 중단하였고 운행이 정지된 구간에는 셔틀버스를 운행시켰다. 정부는 대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고 당월 25일 대구광역시 당국은 윤진태 대구광역시지하철공사 사장을 해임시키면서도 그 다음날 시청 공무원, 지하철 종사자, 대민지원 온 육군 병력들을 동원해 현장 및 월배차량기지로 실려온 사고 열차들을 물청소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해 유족들과 주변인들을 기겁하게 만들고 분노케 하였다. 이에 실종자 가족들도 사건 현장을 인간 띠로 둘러싸기도 했고 안심 차량기지 쓰레기 더미까지 뒤져 유해 14구의 일부와 유류품 146개를 수거했다. 한편 대구시는 이 논란에 대해 "물청소 안 했다"든가 "청소는 유가족이 동의했다"고 둘러대듯 해명했지만 전부 거짓이었다.
이에 여론은 조해녕 시장의 퇴진을 요구했으나 그의 소속 정당이자 자성론을 내세우던 한나라당은 이를 '마타도어(흑색선전)'로 일축했고 지역 유력 일간지 매일신문도 칼럼 잃어버린 8년을 통해 대구 유니버시아드까지 들먹이며 참사 책임 소재 및 구조적 문제 규명을 '진보적 시각'이라고 보며 철 지난 색깔론을 주장했으며 매일신문 사장 정재완 신부(니꼴라오)까지 유가족 농성에 대해 "미국 같았으면 총 맞아 죽었다"고 비난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었다.
또 방화범 김대한 및 기관사, 종합사령실 직원 등 지하철 관련자 8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게다가 이 당시 비상시 매뉴얼은 장식밖에 안 되었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이에 대해 각자 책임 질 건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참사에 직접적인 이들만 처벌됐을 뿐[50] , 안전에 취약한 역사를 건축하고 인력을 감축시킨[51] 시 당국 및 대구지하철공사는 처벌을 비껴갔다. 참사 당시 중앙로역 검수, 통신근무자, 청소원 등 현장 근무자 7명이 숨졌음에도 말이다. 그나마 윤진태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이 시설 청소로 인한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2004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위와 같은 이유로 대구지하철노조는 지하철 시설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역사상 첫 파업을 벌여 안전요원 확충, 전동차 내장재 교체, 안전방재시설 확충 등 특별단체교섭을 달성해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의 반응은 부정적이었고 검찰은 해당 파업이 노조의 본래 목적과 무관했다며 이원준 노조위원장을 붙잡아 형사처벌했다. 2004~2005년에도 2호선 인력감축이 안전에 역행한다고 하여 2차례 파업을 전개했다가 이후 조합원 13명이 해고되었다. 다행히 2014~2015년에 8명이 복직됐지만 4명은 아직 복직되지 못하고 있고 나머지 1명은 2012년에 이미 폐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동시에 부산, 인천 지하철 노조도 지하철 안전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자 서울 지하철이고 부산 지하철이고 인천 지하철이고 할 것 없이 부랴부랴 차량과 시스템을 뜯어 고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당시 굴러다니던 차량들은 유독성 가스의 원인으로 지목된 가연재 시트를 전부 뜯어내고 알루미늄 시트로 바꾸었으며 그 이후로 제작하는 신형 차량들의 경우에는 난연재가 사용된 시트가 채택되었다. 서울도시철도공사의 경우 나중에 난연재 모켓 시트를 알루미늄 시트 위에 덧붙였다.[52] 참고로 이 당시는 이미 한국의 전동차 제작사가 불연재로 제작된 차량을 외국으로 수출하던 상황이었다. 한국 철도 회사들은 고작 원가 절감을 이유로 불에 잘 타는 내장재를 사용했던 것이다. 사실 객차 내장재는 불연재를 사용하는 것이 참사 이전부터 원칙이었으나 이걸 지키는 한국 철도 회사는 상술했듯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이는 불연재 교체 시에도 나타난 문제인데 푹신하고 앉기 편한 난연재/불연재 소재[53] 도 있는 반면 딱딱한 시트나 아예 쇠로 된 불편하지만 가격이 싼 소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전국 지하철 내의 '테마열차' 투입이 거의 없어졌다. 이전만 해도 지하철에서는 가끔 특수하게 책을 끼워서 이동하는 도서관 열차나 불교 연등 장식을 한 봉축열차를 운행한다거나 하여튼 별의별 신기한 한정 열차를 굴렸지만 이 사건 이후 이쪽도 불에 취약하다는 분석이 나온 탓인지 한동안 테마열차 운행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세월이 지나면서 경의중앙선의 도서관 열차와 같이 테마열차가 재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건 이전만큼은 못하다. 주로 외관이나 내부에 간단히 스티커만 붙이는 정도다. 대구 도시철도 3호선의 경우 연말연시마다 새 해 이벤트 열차를 운영하는데 여기에 헬륨 풍선과 천장 장식물 등 온통 불에 타면 유독가스를 내기 딱 좋은 것들로 꾸며 놨다가 공사 홈페이지 고객의 소리에 정신 못 차렸냐며 민원이 올라오는 바람에 2021년부터 랩핑만 하는 등 규모가 축소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광고 래핑 소재가 가연재인 경우가 있다. 개인 업체에서 광고 열차 계약을 맺는 경우 업체 주관에 따라 해당 열차에 대한 광고물 랩핑 소재부터 형태까지 결정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서울교통공사 등의 지하철 운영 주체의 확인이 없는 상태에서 원가 절감을 위해서 가연재 랩핑을 사용하는 것이다. 관련 영상 래핑 소재가 가연재라도 나머지 부분은 불연재기 때문에 불이 번지지는 않겠지만, 래핑 부분이 타면서 유독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에 시민들이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역사 내에 인공 암반 소재를 사용한 모든 도시철도역[54] 의 인공 암반을 철거, 리모델링하는 데 간접적인 영향이 컸다. 인공 암반이 화재 시 유해 물질을 발생 시킨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고 울퉁불퉁한 구조로 인해 연기 때문에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며 머리를 부딪혀 2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2번째 이유이다.
유사 상황을 가정한 대피 훈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객실 내, 역사 내 안내 방송과 안내 영상으로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매우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승객들의 인식 수준도 높아졌고 출입문 수동 개폐 요령이나 소화기 사용 방법 등에 대해서도 전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이전에 매우 작게 안내되어 있던 비상시 문 개방 방법도 크게 문이나 문 바로 옆 좌석 위에 붙게 되었다. 서울 지하철에서는 운행 시간 중 일부를 할애하여 특정 역에 지하철을 멈추고 타고 있던 승객들에게 수동 개방 방법을 시연하고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55] 이후 설치되는 스크린도어에도 비상 개방 레버를 크고 눈에 띄기 쉬운 색으로 만들고 비상시 사용할 수 있음을 알리는 문구를 붙였고 화재를 대비해 방독면과 산소통, 손전등이 다수 비치되었다. 화재 시 비상 탈출 경로 안내문도 추가로 역마다 부착되었다. 플랫폼의 영상 장비에는 역에 비상 정차했을 때나 터널에서 비상 정차했을 때 탈출하는 방법 영상을 주기적으로 상영해 주고 있다.
한편 참사가 발생한 대구 지하철은 역내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승객들이 승강장의 안전선 밖으로 넘어가거나 안전펜스에 손을 대는 행위를 엄금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 발생할 경우 승강장을 순찰 중이던 사회복무요원이 즉각 제지한다. 사회복무요원이 없을 경우 역무실에서 방송을 통해 제지한다. 그러나 작정하고 사고를 일으키는 사람[56] 은 즉시 제지할 수 없기 때문에 2017년 대구 도시철도의 전 역사에 모두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었다.[57]
지하역사의 스크린도어의 경우 대한민국의 역사들이 건설된 때가 스크린도어가 도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제연(除燃) 설비가 승강장 상부에서 공기를 공급하고 하단의 선로 쪽에 공기를 빨아들이고 외부로 배출하는 방식[58] 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스크린도어를 설치하게 되면 연기를 승강장과 선로로 분리, 격리는 가능하게 되지만 승강장에서는 외부 공기를 공급하기만 하고 발생하는 연기를 역사 외부로 배출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된다. 또 반대로 선로에서는 공기를 그냥 빨아들이기만 하는데 흔히 생각하기에는 공기를 외부로 빨아당기면 끝인거 아닌가 싶지만 그렇게 되면 공기의 압이 낮아져서 연기가 외부로 빨려가는 양이 적어지므로 비효율적이다. 정상적인 제연 설비는 효율성을 위해 외부 공기를 공급하고 연기를 배출하는 2개가 한 세트로 병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일부 역사의 스크린도어의 경우 상단부가 완전히 밀폐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59] 이 점이 사쿠라기초 사고를 겪은 일본이 스크린도어를 적극적으로 설치하지 않거나 설치하더라도 난간형 형태만 고집하는 이유라고들 한다. 대구 도시철도 3호선에 설치되어 있는 그런 형태.
이 점을 감안했는지 대구 지하철의 스크린도어 내부(열차측) 비상개폐 레버는 어두워진 상태에서도 식별이 쉽도록 형광색으로 되어 있고 비상 개방 방법에 대한 표지가 A4 반절 수준으로 일반 종이 형태로 손잡이 옆에 작게 붙어있는 서울교통공사 등지와 달리 상당히 눈에 잘 띄고 형광색으로 비교적 크게 붙어있다.
그리고 화재 발생 시 역사 내에서 정전으로 앞이 안 보인 점을 감안하여 출구 계단마다 축광(야광) 유도 표지판[60] 을 붙여 놓아서 화재와 같은 비상시 정전으로 모든 등이 소등 된 상태에서도 쉽게 탈출할 수 있게 하였다.
4.2. 지하철 참사 책임자들의 재판과 처벌[편집]
방화범 김대한과 1080호, 1079호의 기관사, 종합사령실 직원 등 8명의 지하철 공사 직원이 구속, 기소되었다.
2003년 7월 3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대구지하철 방화사건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계획적인 범행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죽음에 빠뜨리고 유족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피고인은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마땅하다." 밝히며 김대한 피고인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하였다. 추가로 지하철공사 1080호와 1079호 기관사, 운전사령실 직원 등 8명의 피고인에 대해서도 "불이 난 후 피고인들이 승객 안전을 위한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 대형 참사를 막지 못했다." 밝히며 업무상 과실치사상죄의 최고형인 금고 5년을 각각 구형하었다.
2003년 8월 6일 열린 대구지하철 방화사건 결심공판에서 검찰이 사형을 구형했던 대구지하철 참사 방화범 김대한 피고인에게 재판부는 "피고인의 심신상태가 온전하지 않고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 밝히며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함께 기소된 지하철 공사 직원 8명에 대하여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화재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고하지 않았고 승객대피를 위한 적절한 조치도 취하지 않아 피해가 확대된 책임이 있다." 밝히며 1080호 전동차 기관사는 금고 5년, 1079호 전동차 기관사와 운전사령실 등 두명은 금고 3년, 이밖에 종합사령실 직원, 역무원 등 나머지 지하철공사 직원은 금고 3년에서 금고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날 법정에 나온 지하철 참사 유가족 30여 명은 방화범 김대한의 선고 형량에 대해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요구하며 재판부에 거세게 항의하였다고, 검찰은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2004년 12월 4일 대구고등법원 제 1형사부는 "피고인들의 잘못으로 인해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고통속에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원심에서 판결한 형량이 적정한 것으로 본다"며 방화범 김대한씨 등 9명에 대한 항소를 기각하고 1심 형량을 유지하였다. 방화범 김대한은 상고를 포기하여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2004년 4월 20일 대법원 형사1부는 대구지하철 참사와 관련, 업무상과실치사 등의 혐의로 기소된 1080호 기관사 등 지하철공사 관련자 8명에 대한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지난이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유죄를 최종 확정했다. 1080호 전동차 기관사는 금고 5년, 1079호 전동차 기관사와 운전사령실 등 두명은 금고 3년, 이밖에 종합사령실 직원, 역무원 등 나머지 지하철공사 직원들에서는 금고 3년에서 금고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되었다.
4.3.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편집]
부상자 및 부상자들의 가족들은 대구광역시와 대구도시철도공사를 피고로 하여 일실 수입, 기왕 치료비, 향후 치료비, 위자료 등을 청구하는 민사 소송을 제기하였다. 일부 유족들은 영남손해사정사무소와 합의한 금액이 있어 부제소특약으로 인해 각하되었고, 그렇지 않은 유족들은 일부 인용을 받았다. (대구지방법원 2006. 2. 14. 선고 2004가합7716 판결)
5. 관련 이야기[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구 지하철 참사/관련 이야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사고의 후유증[편집]
살아남은 사람들도 가스 노출에 의한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며 살게 되었다. 가스 자체의 유독 성분도 문제지만 고열의 가스로 인해 피부와 호흡기에 상당한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전신화상은 살아남아도 고생이다. 그리고 설사 몸에 아무런 이상 없이 무사히 빠져나온 사람들이라고 해도 후일담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목숨이 왔다갔다 했던 당시의 충격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생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고 희생자들과 그에 관계된 유족들은 현재까지도 이 사고를 잊지 못하고 있으며 생존자들은 대부분 사고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충격으로 자살하거나 정신 이상이 발생한 사람, 우울증으로 사망에 이른 사람 등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당사자들이 아닌 대구 시민들 중에도 지금도 특히 중앙로역을 포함해서[61] 지하철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다.
7. 여담[편집]
- 희생자들의 합동영결식은 사고 131일만인 2003년 6월 29일 대구시민회관 광장에서 거행되었고, 사고 지점인 중앙로역 지상에서 노제를 열었다.#
- 이 사고 이후 대구광역시에서는 사고일인 매년 2월 18일에 추모 행사를 하고 있는데 2024년 현재는 21년이 되었다. 9년째인 2012년에는 한겨레21에서 특집으로 생존자들의 증언과 이후의 삶을 기사화했다("우리는 생존자가 아니다"). 반면 추모 사업은 국민성금으로 조성된 특별위로금 운영과 유족회 출연기금 등을 두고 유족들이 갈등하는 등 한동안 난항을 겪다가 2016년 '218안전문화재단'이 세워졌다.
- 사건 이후 전 국민이 발 벗고 나서서 참사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수없이 보냈으며 인터넷에서는 전년도에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를 계기로 만들어진 ▶◀ 마크를 이 사건에서도 추모의 의미로 많이 사용했다.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의 노란 리본처럼 그 당시에도 추모의 의미로 많은 시민들이 '근조(謹弔)'라고 새겨진 검은 리본을 달았다.
- 대구 지하철 사고 유족 중 한 명은 2017년 다음 스토리펀딩 <재난참사 없는 대한민국을 꿈꿉니다>(이후 책 <재난을 묻다>로 출판)에서 해당 사고에 대해 '인간 사회는 서로간 신뢰가 중요하다'고 전제하며 국민들을 속게 하는 행정 및 정치가 계속되는 한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뼈 아픈 교훈을 전했다.
- 사건 당시 대구를 연고로 하고 있던 대구 동양 오리온스 농구단은 19일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홈 경기가 있었다. 사건 이후 대구광역시는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고 5일 동안 시민 애도 기간을 정한 상태였다. 이에 동양은 몰수패를 각오하고 경기를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팬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경기를 진행했으며 대신 치어리더 등의 응원 없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경기를 치렀다. 결과는 74:82로 LG의 승리. 이리하여 동양은 정규 리그 1위를 차지했지만 챔피언 결정전에서 잃어버린 15초 사건으로 인해 통합 우승은 놓치게 된다.
- 이후 K리그의 안양 LG 치타스 서포터들이 대구 FC와의 경기를 앞두고 게시판에 '불전동차'라는 지역 비하 발언을 하면서 네티즌의 항의가 폭주해 안양 레드 치타스 홈페이지가 마비되자 한국프로축구연맹 홈페이지와 대구·안양시청 홈페이지, 안양LG 축구 치타스홈페이지 등 인터넷 게시판까지 항의와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서포터즈 측이 사과문을 올렸다.
- 사고 발생 3년 후인 2006년에는 반월당역에서 서문시장역으로 운행 중이던 대구 지하철 2호선 열차에서 화재 경보기가 오작동되는가 하면# 반고개역을 출발한 전동차가 터널 안에서 멈춘 뒤 갑자기 전동차 내의 조명이 모두 꺼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고# 동대구역을 폭파해 버리겠다는 신고가 접수돼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며# 수성구청역 지하 2층의 환기실에서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연기가 발생해 승객들이 대피하고 소방차까지 출동하는 일이 빚어지는 등# 대구 지하철 참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대구 시민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사고들이 유난히 많이 발생했다. 대구 이외의 지역에서도 2006년 상반기에 총 3건의 화재 사고가 발생하였으며 이 중 부산 지하철 경성대·부경대역과 서울 지하철 인덕원역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는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하기도 했다. #, #
- 당시 뉴스를 보면 사고가 난 후 다른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지하철 창문을 깨고 나가거나 선로를 따라 대구역 등 인근 역으로 걸어가서 대피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다행히 거의 모두 부상 하나도 없이 무사히 탈출했다.[62] 사고가 일어난 이후 시간이 흐른 지금은 화재 흔적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진 상태지만[63] 사고 당시부터 2년 6개월을 넘는 시간 동안 해당 역 근방의 지하도 전체에 굉장한 어떻다고 표현하기 힘든 냄새가 흘러 넘쳤으며 그와 함께 통행인의 수는 매우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일들이 있다고 추정된다. 귀신을 봤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당연하고 지하도는 상당한 시간 동안 스산한 분위기에 유동 인구마저 상당히 줄어드는 등 여러 가지로 참사의 흔적이 이어졌다.
- 피의자 김대한은 당시 화상을 입어 달아나던 중 북구 노원동3가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범죄 사실이 드러나 검거, 구속되었다. 그는 마치 정신 이상처럼 굴려는 듯 진술이 뒤죽박죽이었으며 정신이상자가 저지른 사고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편견을 부채질하는 거 아닌가 우려도 나왔지만[64] 정신과 의사들의 판단에 의하면 정신이상은 아니라고 했다. 또한 심신장애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1심에서 현존전차방화치사죄 등으로 1심과 2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 이후 상고를 포기하고 교도소 안에서도 횡설수설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주교도소로 이감됐다가 2004년 8월 30일 지병인 호흡곤란과 뇌졸중으로 급사했다.
- 김대한은 2001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른쪽 상반신, 하반신 모두 장애가 와서 지적장애 2급[65] 판정을 받았다. 김대한의 방화 사유는 심한 우울증 후 정신질환이 심해진 데 따른 판단력 상실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한의 아들은 대구중부경찰서에 출두하여 "아버지가 심한 우울증을 앓았으며 남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등 정신적으로 심한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병인 뇌졸중으로 인한 울분을 방화로 토한 사건이라는 분석도 있어 방화 사유에 대한 의견은 아직도 분분하다. 김대한의 직계 가족은 사건 이후 곧 경북 지역을 떠났다. 친척들도 이쪽 집안은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한다고 한다.
- 대구 지역 일간지 매일신문에선 사고 10주년 즈음 3편의 특집 기사를 실었다. <상> 아물지 않는 유가족 고통, <중> 후유증 시달리는 부상자들, <하> 부상자 처우 및 향후 대책
- 2013년 2월 15일, 김범일 前 대구광역시장은 참사 10주년을 앞두고 대시민 담화문을 발표하여 위로의 말을 전한 뒤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안전한 도시를 만들 것을 약속했다. #
- 참사 12주년인 2015년, 추모벽이 중앙로역 지하 2층에 마련되었다고 한다. 국민성금 5억 2,000만원을 들여 길이 27m, 폭 3m, 340m2 넓이로 조성되었으며 추모 공간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추모벽과 사건 당시 불에 그을린 벽과 그리고 화재의 열기에 수화기가 녹아내린 공중전화, 당시에 있었던 매점, 혈압 측정기, 물품 보관함, ATM기와 희생자의 유류품 등도 전시하고 있다.
- 이 사고로 인해 PTSD라는 질병이 양지에서 공론화되었다. 이전에도 5.18 민주화운동이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처럼 PTSD 환자가 많이 발생한 사건사고는 많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당시 신경정신과) 상담 자체가 터부시되고 의지드립이 난무하던 분위기상 피해자는 상처를 숨겨야 했다. 하지만 이 사고로 인해 PTSD에 대한 관심도가 급증하여 후대의 참사 처리에 있어 PTSD 치료는 외적 부상 치료 이후에 반드시 행해지는 치료로 자리 잡았다.
- 2014년 8월에 대구광역시의 한 취객이 문재인 당시 의원을 죽이러 간다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가 검거되는 사건이 있었다. 문재인 의원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위해선 열심히 뛰면서 정작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을 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사실 문재인 대통령은 대구 지하철 참사가 벌어졌을 당시에도 유족들을 비밀리에 도왔음이 유족 중 한 명인 박성찬 씨에 의해 알려졌다. 기사 1, 기사 2.
- 이 사건 이후 강화된 지하철 역사내 인화물질 반입 통제가 시행됐다. 이 때문에 2018년 2월 3일 이런 사건도 있었다. TBC 뉴스 장면.
- 불에 타 전소된 전동차 12량 중 9량은 고철로 판매하였으며 1량은 2007년에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 안전 교육용으로 조성되었고 나머지 2량은 활용방안을 찾지 못해 현재까지 대구 안심 차량기지에 천막에 씌워진 채 방치되어 있다. 원래 1818호만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 기증하고 나머지 11량은 파주에 고철 매각하려고 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1130호, 1730호는 사실상 안심 기지에 방치 중이다.
지난 18일 대구시 지하철도에서 뜻밖의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난데 대해 동족으로서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우리는 피해자와 유가족들, 대구시민들이 하루빨리 슬픔과 재난을 가시고 정상적인 생활을 찾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조선중앙텔레비죤과 로동신문은 KBS를 인용하여 13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논평 없이 사실만 보도하였다. 이를 인연 삼은 대구 지하철 참사 유족회는 1년 후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가 발생하자 모금 운동을 벌여 성금 500만원을 기탁했다.
7.1. 대중매체에서[편집]
- 윤인완이 스토리를 쓰고 김지혁, 유현, 변병준, 최경아, 서문다미, NANO, 요요 등이 작화를 맡은 단편집 문화 컨텐츠의 이해 (2010) 2부 "동화" (작화: 변병준) 편은 최면 치료를 받고 당시의 기억을 지워 버린 대구 지하철 참사 피해자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작품을 통해 실제 사건을 컨텐츠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대구 지하철 탈출이라는 스타크래프트 유즈맵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학교 탈출 같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뒤에서 방화범(파이어뱃) 역할의 플레이어가 쫓아오고 나머지 사람들은 건물과 미네랄을 뚫고 도착 지점까지 가는 것으로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제작 의도가 고인드립이 아닌 본 사건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여 굳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맵에 따라서 마지막에 방화범(김대한)과 방화범 어머니까지 죽일 수 있게 되어 있다.[66]
- 보컬로이드 시유의 노래 'Falling Rain'에 맞추어 이 사고와 관련된 팬 PV가 제작된 적이 있었다.
- SCP 재단의 한국어 위키의 SCP-222-KO가 이 사건을 다루는 SCP이다.
- 2016년작 영화 로봇, 소리에서 나온다.
- 영화 힘을 내요, 미스터 리에도 나온다.[67]
- 이 사고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지만, 가사가 이 사고를 연상케 해[68] 한때 대구 지하철 참사 추모식 행사에도 추모곡 용도로 쓰여서 유명해진 노래가 지금도 가끔 추모곡 용도로도 들리곤 하는 M.C The Max의 1집 음반의 후속곡인 <마지막 내 숨소리>라는 곡이다.
- 2020년 11월 4일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당시 화재 감식 및 신원 확인을 했던 법과학자가 출연했다. 영상 바로 다음주인 2020년 11월 11일 당시 가장 먼저 현장에 진입했던 소방대원이 출연했다. 영상
- 2022년 5월 5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 3에서 '전하지 못한 목소리 - 지화(火)철 1080호의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뤘다. 영상
7.2. 희생자들의 마지막 메시지[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구 지하철 참사/최후의 메세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3. 사건 이후[편집]
팔공산에 위치한 대구광역시 시민안전테마파크에는 당시 불에 탄 1079열차 전동차 몇 량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건을 가정해서 인체에 무해한 짙은 연기를 뿌려 놓고 당시의 사건을 체험할 수 있다. 사족으로 대구경북지방병무청 소속의 사회복무요원이 소양교육을 받을 때 두 반 중 한 반이 이 곳으로 견학을 갔고 나머지 반은 포스코로 견학을 갔으나 2016년 3월에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에 위치한 사회복무연수센터에서 4박 5일(3박 4일) 합숙 교육으로 변경되어 더 이상 견학은 가지 않는다.
2013년 2월 7일에는 대구도시철도공사 임직원들이 참사 10주년을 앞두고 대구광역시 시민안전테마파크에 방문했다. 대구도시철도공사가 지난 10년간 중앙로역 화재 참사와 관련된 공식적인 활동을 자제한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이다. 대구 도시철도 3호선 개통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을 중시해야 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관련 기사
7.4. 기타[편집]
- 대구 지하철 참사로 인해 지하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커졌다. 대구지하철공사는 대구 지하철 참사의 오명을 벗기 위해 아예 대구도시철도공사로 이름을 바꿨으며 이후 대구교통공사로 개편되었다. 이는 지하철을 도시철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하는 계기가 되었다.[69]
- 이전에 벌어졌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달리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는 휴대전화가 도입된 이후였기 때문에 휴대전화를 통한 위치 추적 시스템으로 실종자, 사망자를 판단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이 시기에는 휴대전화 보급률이 현재처럼 높지 않았기 때문에 휴대전화가 없던 노년층이나 학생 등 상당수 승객들의 유족들은 CCTV로 해당 열차에 탑승했음을 증명하는 등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70] 때문에 당시 중앙로역에는 실종자들의 인적 사항과 당일 행적들을 적은 실종 포스터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이후 휴대전화 보급률이 100%를 넘어가고 모바일이 발달된 스마트폰 대중화 이후 발생한 세월호 참사에서는 실종자들의 탑승 여부와 위치 확인이 즉각 가능해져 이러한 광경은 보기 어렵게 되었다.
- 대중교통 유튜버인 대중교통 영상 공작소는 2020년 2월 16일 대구 지하철 참사 추모 영상을 올리면서 중앙로역에서 화재가 난 날짜인 2003년 2월 18일에 맞춘 금액인 218,000원을 2.18안전문화재단에 기부하였다. 이후 2021년, 2022년에도 동일 금액을 기부하였다. 다만 2023년은 5년에 1번 있는 지정기부금 단체 재지정 심사로 정식 후원을 안 받고 있다. 따라서 공작소는 계좌이체로 동일 금액을 기부했다.
7.4.1. 고인 비하[편집]
- 디시인사이드[72] 에서는 대구를 비하할 의도로 불에 탄 희생자들을 통구이로 빗대거나 범인인 김대한을 통구이 요리사인 머한셰프라 지칭하는 고인 모독 발언과 지역 비하 발언을 했다. 이는 리그베다 위키에도 영향을 미쳐 패드립 관련 내용 추가를 두고 위키 게시판 내에서 토론과 편집 분쟁이 격하게 일어나 최종적으로 영구 동결 처리까지 갔고 패드립 관련 내용은 독립 문서로 작성금지됐다.
- 래퍼 창모는 2013년 공개한 믹스테입 '돈 벌 시 간'의 수록곡 'Dopeman'의 가사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를 이용해 비하하여 구설에 올랐다.
【내용 보기】
타요전철의 의미는 '전철이 (불에) 타요'라는 의미고 사진 속 셰프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대구 지하철 참사의 범인 김대한이고 통칭 김머한 셰프라고 부르며 김대한을 요리사라고 희화화하며 희생된 대구 시민들을 통구이라고 모욕하는 고인 비하적 조롱을 하고 있다.
- 스트리머 괴물쥐가 과거 일베 경력과 함께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들을 조롱한 것으로 밝혀져 큰 논란이 되었다. 워낙 막나가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현재는 다른 논란들과 함께 묻혔다.
8. 유사 사례[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구 지하철 참사/유사 사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관련 문서[편집]
- 중앙로역
- 화재
- 사건 사고 관련 정보
- 묻지마 테러
- 안전불감증
- 서울 지하철 7호선 방화 사건
- 도곡역 열차 방화 사건
- 대구 달성터널 폭발사고
- 대구 대명동 가스 폭발 사고
-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역시 1호선인 상인역에서 발생했으며 특히 등교 시간에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학생들이 많이 사망했다. 원인은 대구백화점 상인점(現 롯데백화점 상인점) 공사.
-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 광진구 어린이선교원 흉기난동 사건: 이 사건 5개월 전 다른 정신질환자가 교회 선교원에서 영유아들을 상대로 저지른 묻지마 테러 사건이다.
10. 관련 매체[편집]
- 기타맨(웹툰)
- 로봇, 소리
- 아이템
- 더 코마 2: 비셔스 시스터즈: 제작진 중 한 명이 대구에 거주했었을 때 참사가 일어나서 지하철 역인 송릉역 스테이지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다고 했다. 만약 이 게임의 배경이 2018년이라고 가정했을 때 15년 전이면 정확히 참사가 일어났던 해인 2003년이 된다.
- 힘을 내요, 미스터 리
11. 관련 문헌[편집]
- 대구지하철 중앙로역 화재참사 (2005, 대구광역시): 해당 백서는 민간 측에서 보고서가 먼저 나오자 졸속으로 나왔고, '시정 홍보용'이라는 지적도 있다.
12.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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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대 지하철 화재사고 사망자 2위. 1위는 바쿠 지하철 화재[2] 이 중 186명(인정사망 1명 포함)은 신원이 확인되어 유가족에게 유해를 전해줄 수 있었지만 시신이 완전히 소실된 3명 및 DNA는 확보했으나 연고자를 찾지 못한 3명은 미신고자로 남아 있다. #[3] 상술했듯 사망자는 시신이 없더라도 사망이 인정되었지만 이때는 사망이 인정되지 않은 경우다. 시체를 찾지 못하는 사망자인 셈이다. 그리고 시신은 있는데 훼손 상태가 심하여 신원 확인은 물론이고 더욱 심한 경우에는 성별, DNA마저 판별이 불가능한 시신도 존재했던 모양이다. 이들은 신원 확인이 안 되어서 코드명으로 있다.[4] 10월 21일 이후에는 중앙로역은 패널로 막은 상태로 무정차 통과하는 식으로 운행을 재개했으며, 중앙로역 복구는 동년 12월 31일에 완료되었다.[5] 118편성.[A] A B 따로 결번 처리는 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같은 번호를 설화명곡발 안심행/안심발 설화명곡행 열번으로 사용 중이다.[6] 130편성.[7] 역대 지하철 사망자 수 1위를 기록한 사고는 바쿠 지하철 화재. 두 사건 모두 화재로 인한 사고라는 점이 공통점이다.[8] 검색되는 기사 중 가장 빠르게 사건을 보도한 기사이자 유일한 1보 기사이다.[9] 1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502명 사망, 2위 창경호 침몰 사고 330명, 3위 남영호 침몰사고 326명 사망, 4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304명 사망, 5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292명 사망.[10] 현재는 철도안전법 상 화재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 물질을 열차에 소지하고 탑승하는 것이 제한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그런 법이 없었기 때문에 김대한은 아무런 제지 없이 열차에 승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법이 있었다고 해도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수사 기관이나 사법 기관이 아닌 대구광역시지하철공사(現 대구교통공사)가 단지 승객의 소지품 내용물이 의심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지품을 검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작정하고 숨기고 탑승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텐데, 공항도 아닌 역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주머니나 가방 속까지 뒤져가며 소지품을 일일이 확인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학교에서조차 학생들을 상대로 소지품 검사를 하면 과거와는 달리 청소년 인권단체들과 학부모들이 난리를 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걸 다 떠나서 방화살인을 계획할 정도로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이 순순히 수색에 응해줄 리는 없다. [11] 1079호 객차에서 발견된 사망자는 0명이지만 1079호에서 빠져나온 승객들 중 대합실이나 승강장에서 질식해 사망한 승객 수가 49명이다. 나머지 143명은 모두 1080호 승객들이다. 물론 당일에 참사를 막을 기회가 있었던 1080호와는 달리 1079호는 사건 이전이면 몰라도 사건 당일에는 막을 수가 없었기에 이 정도만 해도 1079호는 대처를 잘한 편이다. [12] 이후 김 소방위는 참사 이후 대구중부소방서 진압대에서 근무하다가 2022년 대구북부소방서에서 정년퇴직했다.[13] 이는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사면 기록하는 제도가 시작된 원인이 되었다. 휘발유를 구입한 사람이 방화를 저지르면 판매한 사람은 도움을 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14] 당시 66세. 당시 교대역에서 승차해 대구우체국에서 열리는 컴퓨터 강의를 들으러 중앙로역에서 내릴 예정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살아남아 여러 매체에 출연하여 당시 상황을 증언하였다. #[15] 당시 CCTV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최초 발생 이후 불이 플랫폼까지 번져 CCTV가 합선으로 나가 버리는 데 걸린 시간은 1분도 채 안 되었다.[16] CCTV를 통해 드러난 사실에 따르면 이 상황에서도 전동차 선두부에 있던 사람들만 긴급히 대피하고 전동차 후부에 있는 사람들은 화재를 전혀 짐작하지 못해 계속 전동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방화범이 탈출을 시도하고 시민들이 초기 화재 진압을 시작하려던 시각이 53분 12초고 전동차 선두부의 화재로 중앙로역의 1번 CCTV가 작동을 멈춘 시각이 53분 30초다. 하지만 전동차 후미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53분 35초부터 대피를 시작했다. 나중에 이 문제는 큰 지적을 받고 전동차의 객차간 연결 통로를 완전 개방형으로 설계해 다른 객차의 상황을 최대한 빨리 알 수 있도록 만들 것을 권고해 이후 전동차 설계가 완전 개방형 연결 통로를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게 되었다.[17] 현재는 개칭된 119안전센터의 과거 명칭.[18] 하지만 이 조치는 화재 현장에 그냥 들어가라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이러한 종합사령실의 초기 대응 실패로 인해 다른 열차가 중앙로역 승강장으로 들어왔고 결국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잃게 하는 원흉이 되었다. 이미 역에 들어설 수밖에 없게 된 열차에게는 가능한 신속한 무정차 통과를, 다른 모든 열차들에게는 긴급 정지를 명령했어야 했다.[19] 지하철에서 화재가 발생하면(특히 지하/고가역) 후속열차 진입을 무조건 막아야 큰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다. 이는 일반 철도도 마찬가지이다.[20] 셔터가 내려와도 미처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을 대피시킬 수 있는 비상문이 설치되어 있지만 당시 검은 연기와 유독성 가스가 발생해 앞을 분간하기 힘들어 찾기 더 힘들었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사람들은 아비규환 속에 탈출구를 찾지 못하였다.[21] 이때 대피만 했으면 더 큰 참사로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22] 5호차와 6호차는 맨 처음 불이 난 1079호 1호차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고 기계 설비 오작동으로 인해 5호차 승객들이 옆 객차인 4호차로 넘어갈 수도 없는 상태였다. 4호차와 5호차 사이 주요 배선이 화재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고 결국 주요 기계 설비가 작동하지 않아 기관사의 어떤 조치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5, 6호차에서는 1080호에서 가장 많은 118명이 사망했다.[23] 4호차 또한 화원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기에 출입문이 거의 대부분 열리지 않았으나 당시 4호차 객차에 철도청 소속 권춘섭 금호역장이 함께 탑승해 있었고 미리 상황을 인지한 권춘섭 역장이 미리 비상탈출개폐장치를 개방하였기에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24] 사실상 광역 2호 발령.[25] 자동차로 치면 시동 키다. 차 키를 뽑으면 출입문이 닫히고 엔진이 꺼지며 라이트, 오디오, 에어컨 등등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과 같다.[26] 화재 진압 후 1080호 열차가 발견되었을 때는 기관사가 문을 열고 대피한 1호차와 권춘섭 역장이 탑승했던 4호차 출입문만 열려 있었다고 한다.[27] 원칙상 타인이 운전실에 들어가 운전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기관사는 비상 상황 발생 시 마스터키와 제동 핸들을 가지고 나가게 되어 있다.[28] 반자동 열차운전. 열차의 운행, 정위치 정차, 출입문 개방은 자동으로 이루어지고 출입문 폐쇄, 출발은 기관사의 수동 취급으로 이루어지는 운전 방식.[29] 비상운전. 장치 고장으로 정상 운행이 불가능한 경우 열차 운전, 정지, 출입문 등 모든 제어를 기관사의 주의력 의존과 수동 취급으로 이루어지는 운전 방식.[30] Master Control Key. 자동차 열쇠와 같이 받아들이는 장치.[31] 직류 고속도 차단기: 전차선 양단에 설치되어 전력 공급과 과부하 등 회로 이상 시 신속히 차단하여 관련 장치를 보호하는 차단기[32] 전차선 급전 중 과부하 등 회로 이상으로 차단기가 차단되면 컴퓨터 프로그램에 따라 자동으로 차단기를 3회까지 투입하여 급전을 시도하는 기능[33] 전차선 급전 구간의 전력 공급은 인접한 변전소 양단에서 공급하고 있으며, 과부하 등 회로 이상으로 한 변전소 차단기가 차단되면 같은 급전 구간의 인접 변전소 차단기를 연계 차단시키는 기능이 있으며, 연계 차단이 되지 않도록 설정함[34] 당시 대구역과 중앙로역 간 거리는 700m였고 열차가 아무리 대구역을 천천히 출발했다고 해도 2분 남짓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운전사령이 판단을 달리 했다면 1080열차의 피해는 없었을지도 모른다.[35] 중앙로역 역무원이 신고한 시각이 사고 4분 후인 9시 57분이었다.[36] 사실 위의 경과 항목에도 나와 있다시피 비상 상황 종료 이후 열차 탈취를 막기 위해 기관사는 탈출 전 마스콘 키와 제동 핸들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37] 불량 내장재로 인해 화재가 커진 것이다.[기사내용] 해당 기관사 최상열 씨는 2008년 만기출소 후, 설령 그 때로 돌아간들 다시는 전동차에 오르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원문 기사 링크 소실로 각주 발췌)
"2008년에 출소한 뒤 희생자들의 유골이 묻힌 곳(안전테마파크)에 다녀왔습니다. (희생자들에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동차에 대해선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막상 화재가 나니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 지금도 대구지하철 화재 얘기만 나오면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사고 이후 가족들과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평생 그날 일을 입에 올리지 않을 겁니다."
그는 2008년 초 만기 출소한 뒤 외부와 일절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취재진은 지난 13일 밤 대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최씨를 만났다. 그는 "화재 사고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다시는 전동차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건너편 전동차(1079호)에 불이 붙은 걸 전혀 못 봤습니다. 연기가 자욱하기에 승강장 쓰레기통 같은 데서 불이 났나 보다 했습니다." 최씨는 "지하철 전동차는 불연재를 사용해 절대로 불이 붙지 않는다고 배웠기 때문에 전동차에 화재가 났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링크가 소실된 중앙일보 원문 기사에 있던 내용으로 참사 관계자들 중 유일한 인터뷰 기사다. 이후 최상열의 근황은 불명이다.[38]
전동차의 경우에는 대체로 이렇게 생겼다. 마스콘 키가 뽑히면 비상 제동/브레이크 등 일부 기능을 제외하곤 열차의 모든 기능이 그 즉시 정지된다. TGV의 경우 마스콘 키가 감지되지 않으면 즉시 제동이 체결된다. 물론 기관사는 기관차 탈취를 막기 위해 운전실을 떠날 경우 무조건 마스콘 키와 제동 손잡이를 뽑고 탈출해야 하지만 그 당시 기관사가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조치를 취했거나 운전사령의 정확한 지령을 통해 마스콘 키를 제거하지 않고 출입문 개방 시도를 하거나 직접 수동으로 열어주었다면 더 큰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당시 마스콘 키 구조상 제거하면 출입문이 자동으로 닫히기에 빨리 대피시키려고 기관사가 마스콘 키를 안 뽑으며 기다린다면 기관사는 승객 대피에 전념하다 열차와 운명을 함께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39] 하지만, 앞선 각주의 정황을 일부 감안을 할 수는 있어도 운영사 및 관제와 기관사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애시당초 그렇게 화재에 취약하게 설계했음에도 안전장치(수동개폐장치)의 위치를 제대로 표기하지 않은 것부터가 잘못이며, 두번째로 매뉴얼대로라면 진입 및 정차하면 안 되는 상황에서 제대로 지령을 내리지 않았음으로 관제에도 문제가 있었음이 명백하며, 세 번째로, 사고상황시에 기관사는 원래 모든 승객이 탈출하거나 상황이 종료되기 전까지 열차와 운명을 함께하는게 맞다. 그렇게 의무를 다 하다 순직하는 게 정말로 싫었다면 애시당초 그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설령 키를 뽑았어도 6호차까지 적어도 한 칸당 한 개의 문은 수동으로 열어주었어야 한다. 그렇기에 법원에서 무죄가 나오지 못한 것이다. 또한, 그 당시 매뉴얼이 그랬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했겠지만, 현실적으로 해당 구간 및 주변 구간이 단전조치 및 재급전 불가 상황에서 전동차가 탈취된다 한들 자력운전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그 시점에서는 관제센터에서도 전 열차를 운행중단시키고 모든 승객을 내린 상황이었기에, 과연 열차 탈취 방지 조치가 승객 탈출을 방해하고 희생자를 늘리면서까지 우선적으로 실시되었어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당시 전동차 설계와 비상개폐장치에대한 인식수준이 그랬다면 기관사와 관제센터는 키를 뽑는 순간 문이 다 닫힐 것이며, 수동 개폐 후 탈출이 어려울 거라는 점은 이미 알았을 것임으로.) 어차피 이 정도의 사고에 전 열차 중지 명령이 내려진 상황이었기에 그날 운행은 글러먹은 상황이고, 그렇다면 마스터키를 꼽은 채로 기관사가 자리를 떠나더라도, 중앙로역 소화를 마치고 관련자가 열차 상태를 확인한 다음에 재급전하면 탈취의 우려는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유독가스에 면역인 어떤 슈퍼맨이 관련직원을 다 때려눕히고 전기는 어쩌다 들어갔다고 가정하고, 그렇게 무자격자에 의한 탈취 및 운행까지 되었다 하더라도 전 열차를 역에 세우고 모든 승객들이 하차한 상황이었기에 예상할 수 있는 최대 피해 규모는, 그대로 진행하여 전속력으로 앞차를 들이받는 정도이고, 그런 일이 생긴다 하여도 전동차 두 대를 폐기처분하고 탈취범이 사망하고 시설이 좀 파손되는 정도가 전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백억 이상의 금전적 손실이 발생하긴 하겠지만 이미 중앙로역은 난장판이 된 상황이고, 과연 1080호에서 희생당한 150명의 목숨 값어치가 전동차 두 편성에 철도시설 일부 값어치보다 저렴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한마디로 선박이랑 비슷하게 돌아간다고 봐야된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해당 기관사가 의무를 다하다가 열차와 운명을 함께했다면 저 당시 기준으로 최소 융숭하게 장례를 치뤘을 것이며, 상황에 따라 여러 보훈혜택이 유족들에게 돌아갔을 수도 있었다는 게 중론이다.[40] 인천 1호선처럼. 현재는 모든 신형 전동차에 적용된다.[41] 비상등이 화재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내리면서 피해를 키웠다.[42] 서울 지하철로 따지면 서울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을 생각하면 된다. 서울 3호선 종로3가역과 대구 중앙로역 모두 각 도시의 도심지에 있고, 승강장이 협소하고, 이용객이 상당히 많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서울 3호선 종로3가역은 섬식 승강장이고 대구 중앙로역은 상대식 승강장이다.[43] 認定死亡: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제87조의 규정에 의거 사망의 확증(시체 확인 등)은 없지만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수난, 화재, 사변 등)에는 그것을 조사한 관공서의 사망 보고에 기하여 가족관계등록부에 사망의 기재를 하게 됨으로써 사망한 것으로 인정하는 제도이다.[44] 지금의 대중교통 전용지구.[45] 당시 전동차 특유의 형상과 재질로 인해 불이 크게 붙을 경우 화장터에서 시체를 소각하는 화덕과 비슷한 형태가 되어 일반 화재보다 시체 훼손이 훨씬 심하다.[46] 이는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화재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사망자뿐만 아니라 중상자라도 사지에 한해서 4도 화상을 입는다면 마찬가지다. 물론 생존률은 무지 낮지만.[47] 실제로 대구 지하철 참사 이전까지 한국철도계가 겪었던 대부분의 사고는 탈선과 충돌, 시공중인 공사장의 폭발, 운반하던 화물의 폭발뿐이었다. 모산 수학여행 참사가 발생한 사례는 있었으나, 이 경우는 열차와 충돌을 당한 '버스'의 화재사고로 발생한 참사였지, 열차'에' 화재가 발생한것이 원인이 아니었다.[48] 1년 전 충돌 사고로 3량이 대파되어 폐차되고 4량이 크게 손상된 서울지하철공사 전동차를 신조할 때 완전 신조가 아니었음에도 철도청이 물어준 금액이 67억이었다. 이마저도 일부 신차가 섞이긴 했지만 구형 객차가 섞인 전동차였는데도 말이다. 1량당 거의 10억에 가까운 금액을 변상한 철도청과 비교했을 때 반 값밖에 안 되는 가격으로 열차가 제작되었으니 당연히 화재 사고가 아니어도 충돌사고 등에도 위험했을 가능성이 크다.[49] 2010년 이내까지 퇴역할 열차들은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이유로 좌석 모켓만 없애 버리고 좌석 재질만 불연재로 교체함. 철도청 소속 1000호대 초저항과 개조저항, 1977~8년산 1호선 초저항, 1980~1984년산 2호선 저항, 초퍼 제어 열차, 1984~5년산 3호선 초퍼 열차가 이에 해당.[50] 그마저도 방화범은 무기징역, 기관사는 금고 5년이 선고되는 등 그야말로 솜방망이 처벌로 끝내서 비판받았다. 그러나 당시 법 체계상 금고 5년은 최대 형량이었다.[51] 1998년 1호선 개통 후 외환위기 등의 여파로 적자만 계속되어 2002년 기준 부채가 1조 3,316억 원에 달했으며, 공사측은 재정 적자를 해소시키기 위해 인력을 줄였다.[52] 겨울에는 이 알루미늄 시트를 열로 데워서 지나치게 차가워지는 걸 막는다. 이게 또 과민성 대장 증후군 환자들한테는 엉덩이 난방으로 불리며 또 다른 민폐로 취급받는 모양이다.[53] 서울의 경우 2007~2008년에 도입된 2호선 전동차와 2009~2010년에 도입된 3호선 전동차에 난연재 모켓 시트를 장착했다.[54] 예) 3호선 충무로역, 5호선 영등포시장역과 신금호역, 마천역,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55] 승객이 적은 시간대에 행해졌고 워낙 이 사건의 여파가 컸기 때문에 지하철이 늦어진다고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56] 예를 들면 선로에 뛰어 드는 사람.[57] 먼저 1호선 반월당, 중앙로, 동대구역, 2호선 문양, 반월당, 정평~영대역에 설치했고 이후 2단계에 나눠서 설치되었다. 2호선 다사, 대실역은 처음부터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었고 3호선은 처음부터 전 역사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었다. 다만 3호선의 스크린도어는 난간형이고 높이도 사람의 키 높이 이하라서 작정하고 뛰어넘는 것까지는 막지 못해서 완전히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58] 평상시에는 선로에서 차량이 역에 정차하며 발생하는 마찰열로 인한 더운 열기를 빨아들여 외부로 보냄으로써 승강장에 그 열기가 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겸한다.[59] 단, 이 경우 열차풍과 미세먼지, 소음을 감소시키는 기능은 하지 못하게 된다.[60] 이후에는 역사 바닥의 점자 블록에도 ıIı 형태의 야광 유도 표지가 추가되었다.[61] 참사 이전 중앙로역은 일평균 이용객이 5만 명에 달했으나 참사의 여파와 대구역 민자역사의 롯데백화점 대구점 개점 이후 지하철 대구역에서 대구역 지하상가를 잇는 통로가 개설되고 2호선 개통 후 달구벌대로 북측에도 반월당역 출입구가 개설되며 주변 역들로 이용객이 분산되어 다시는 5만 명대를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62] 이것은 연기가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이 강하기 때문으로, 화재가 나면서 생기는 열 때문에 공기가 데워지면서 대류 현상이 일어나 연기도 그 바람을 타고 위로 올라가게 된다. 화재 사고 매뉴얼에서 불이 났을 때 몸을 아래로 최대한 숙이고 저지대로 가라고 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실제 사고 사례를 보면 연기가 많은 화재 사고 현장에서는 저지대 쪽으로 피한 사람이 고지대 쪽으로 피한 사람들보다 생존률이 높다.[63] 역에 '통곡의 벽'이라는 벽 너머엔 아직 일부가 남아 있다.[64] 상술한 대로 불과 5개월 전에 광진구 어린이선교원 흉기난동 사건이 있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65] 등급제가 철폐된 2019년 7월 기준으로 중증 지적장애에 해당함.[66] 하지만 당시 피해자 측이 몰라서 고소하지 않았을 뿐이지, 추모의 의미가 담겨 있더라도 피해자 측이 불쾌하게 여기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아무리 범인을 죽인다는 내용이 담겼더라도 자신의 트라우마를 게임 소재로 쓰는 것이 불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김대한이야 참사를 일으킨 범죄자지만 김대한 어머니를 죽인다는 건 문제가 될 소지가 크다.[67] 주요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연관되어 있으며, 철수가 쓰러진 샛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장면 다음에 잠깐 나온다. 그런데 영화를 광고할 때 실제 사고와 관련이 있고 그 사고의 기억으로부터 서로를 치유해 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이야기를 담아야 하는데 차승원 원톱의 개그 영화, 전형적인 진부한 신파 영화처럼 광고하는 바람에 영화를 직접 본 사람들에게 도대체 왜 광고를 그렇게 만들었냐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68] 원래 가사는 한 남자가 큰 사고를 당해서 곧 죽음을 앞두는 상황에서 자신의 애인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해주는 분위기인데 이게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들의 당시 상황과 미묘하게 매치되어 많은 이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노래는 참사 이전인 2002년에 발매되었다.[69] 서울지하철공사도 이 사건 이후인 2005년 10월에 사명을 서울메트로로 변경했다. 이후 2017년 5월 31일 서울도시철도공사와 통합하여 서울교통공사가 되었다.[70] 당시 실종자의 가족들이 자신의 가족이 해당 열차에 탑승하는 CCTV가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일일이 각 역에서 구해 제출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가족이 열차에 승차하는 모습을 보고 오열, 실신하는 가족들도 많았다.[71] 실제로 정신질환자들이 길거리에서 시비를 털리거나 욕설을 듣는 등 대구경북 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뇌졸중과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박살났다.[72] 특히 국내야구 갤러리
"2008년에 출소한 뒤 희생자들의 유골이 묻힌 곳(안전테마파크)에 다녀왔습니다. (희생자들에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동차에 대해선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막상 화재가 나니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 지금도 대구지하철 화재 얘기만 나오면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사고 이후 가족들과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평생 그날 일을 입에 올리지 않을 겁니다."
그는 2008년 초 만기 출소한 뒤 외부와 일절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취재진은 지난 13일 밤 대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최씨를 만났다. 그는 "화재 사고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다시는 전동차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건너편 전동차(1079호)에 불이 붙은 걸 전혀 못 봤습니다. 연기가 자욱하기에 승강장 쓰레기통 같은 데서 불이 났나 보다 했습니다." 최씨는 "지하철 전동차는 불연재를 사용해 절대로 불이 붙지 않는다고 배웠기 때문에 전동차에 화재가 났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링크가 소실된 중앙일보 원문 기사에 있던 내용으로 참사 관계자들 중 유일한 인터뷰 기사다. 이후 최상열의 근황은 불명이다.[38]
전동차의 경우에는 대체로 이렇게 생겼다. 마스콘 키가 뽑히면 비상 제동/브레이크 등 일부 기능을 제외하곤 열차의 모든 기능이 그 즉시 정지된다. TGV의 경우 마스콘 키가 감지되지 않으면 즉시 제동이 체결된다. 물론 기관사는 기관차 탈취를 막기 위해 운전실을 떠날 경우 무조건 마스콘 키와 제동 손잡이를 뽑고 탈출해야 하지만 그 당시 기관사가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조치를 취했거나 운전사령의 정확한 지령을 통해 마스콘 키를 제거하지 않고 출입문 개방 시도를 하거나 직접 수동으로 열어주었다면 더 큰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당시 마스콘 키 구조상 제거하면 출입문이 자동으로 닫히기에 빨리 대피시키려고 기관사가 마스콘 키를 안 뽑으며 기다린다면 기관사는 승객 대피에 전념하다 열차와 운명을 함께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39] 하지만, 앞선 각주의 정황을 일부 감안을 할 수는 있어도 운영사 및 관제와 기관사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애시당초 그렇게 화재에 취약하게 설계했음에도 안전장치(수동개폐장치)의 위치를 제대로 표기하지 않은 것부터가 잘못이며, 두번째로 매뉴얼대로라면 진입 및 정차하면 안 되는 상황에서 제대로 지령을 내리지 않았음으로 관제에도 문제가 있었음이 명백하며, 세 번째로, 사고상황시에 기관사는 원래 모든 승객이 탈출하거나 상황이 종료되기 전까지 열차와 운명을 함께하는게 맞다. 그렇게 의무를 다 하다 순직하는 게 정말로 싫었다면 애시당초 그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설령 키를 뽑았어도 6호차까지 적어도 한 칸당 한 개의 문은 수동으로 열어주었어야 한다. 그렇기에 법원에서 무죄가 나오지 못한 것이다. 또한, 그 당시 매뉴얼이 그랬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했겠지만, 현실적으로 해당 구간 및 주변 구간이 단전조치 및 재급전 불가 상황에서 전동차가 탈취된다 한들 자력운전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그 시점에서는 관제센터에서도 전 열차를 운행중단시키고 모든 승객을 내린 상황이었기에, 과연 열차 탈취 방지 조치가 승객 탈출을 방해하고 희생자를 늘리면서까지 우선적으로 실시되었어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당시 전동차 설계와 비상개폐장치에대한 인식수준이 그랬다면 기관사와 관제센터는 키를 뽑는 순간 문이 다 닫힐 것이며, 수동 개폐 후 탈출이 어려울 거라는 점은 이미 알았을 것임으로.) 어차피 이 정도의 사고에 전 열차 중지 명령이 내려진 상황이었기에 그날 운행은 글러먹은 상황이고, 그렇다면 마스터키를 꼽은 채로 기관사가 자리를 떠나더라도, 중앙로역 소화를 마치고 관련자가 열차 상태를 확인한 다음에 재급전하면 탈취의 우려는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유독가스에 면역인 어떤 슈퍼맨이 관련직원을 다 때려눕히고 전기는 어쩌다 들어갔다고 가정하고, 그렇게 무자격자에 의한 탈취 및 운행까지 되었다 하더라도 전 열차를 역에 세우고 모든 승객들이 하차한 상황이었기에 예상할 수 있는 최대 피해 규모는, 그대로 진행하여 전속력으로 앞차를 들이받는 정도이고, 그런 일이 생긴다 하여도 전동차 두 대를 폐기처분하고 탈취범이 사망하고 시설이 좀 파손되는 정도가 전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백억 이상의 금전적 손실이 발생하긴 하겠지만 이미 중앙로역은 난장판이 된 상황이고, 과연 1080호에서 희생당한 150명의 목숨 값어치가 전동차 두 편성에 철도시설 일부 값어치보다 저렴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한마디로 선박이랑 비슷하게 돌아간다고 봐야된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해당 기관사가 의무를 다하다가 열차와 운명을 함께했다면 저 당시 기준으로 최소 융숭하게 장례를 치뤘을 것이며, 상황에 따라 여러 보훈혜택이 유족들에게 돌아갔을 수도 있었다는 게 중론이다.[40] 인천 1호선처럼. 현재는 모든 신형 전동차에 적용된다.[41] 비상등이 화재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내리면서 피해를 키웠다.[42] 서울 지하철로 따지면 서울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을 생각하면 된다. 서울 3호선 종로3가역과 대구 중앙로역 모두 각 도시의 도심지에 있고, 승강장이 협소하고, 이용객이 상당히 많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서울 3호선 종로3가역은 섬식 승강장이고 대구 중앙로역은 상대식 승강장이다.[43] 認定死亡: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제87조의 규정에 의거 사망의 확증(시체 확인 등)은 없지만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수난, 화재, 사변 등)에는 그것을 조사한 관공서의 사망 보고에 기하여 가족관계등록부에 사망의 기재를 하게 됨으로써 사망한 것으로 인정하는 제도이다.[44] 지금의 대중교통 전용지구.[45] 당시 전동차 특유의 형상과 재질로 인해 불이 크게 붙을 경우 화장터에서 시체를 소각하는 화덕과 비슷한 형태가 되어 일반 화재보다 시체 훼손이 훨씬 심하다.[46] 이는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화재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사망자뿐만 아니라 중상자라도 사지에 한해서 4도 화상을 입는다면 마찬가지다. 물론 생존률은 무지 낮지만.[47] 실제로 대구 지하철 참사 이전까지 한국철도계가 겪었던 대부분의 사고는 탈선과 충돌, 시공중인 공사장의 폭발, 운반하던 화물의 폭발뿐이었다. 모산 수학여행 참사가 발생한 사례는 있었으나, 이 경우는 열차와 충돌을 당한 '버스'의 화재사고로 발생한 참사였지, 열차'에' 화재가 발생한것이 원인이 아니었다.[48] 1년 전 충돌 사고로 3량이 대파되어 폐차되고 4량이 크게 손상된 서울지하철공사 전동차를 신조할 때 완전 신조가 아니었음에도 철도청이 물어준 금액이 67억이었다. 이마저도 일부 신차가 섞이긴 했지만 구형 객차가 섞인 전동차였는데도 말이다. 1량당 거의 10억에 가까운 금액을 변상한 철도청과 비교했을 때 반 값밖에 안 되는 가격으로 열차가 제작되었으니 당연히 화재 사고가 아니어도 충돌사고 등에도 위험했을 가능성이 크다.[49] 2010년 이내까지 퇴역할 열차들은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이유로 좌석 모켓만 없애 버리고 좌석 재질만 불연재로 교체함. 철도청 소속 1000호대 초저항과 개조저항, 1977~8년산 1호선 초저항, 1980~1984년산 2호선 저항, 초퍼 제어 열차, 1984~5년산 3호선 초퍼 열차가 이에 해당.[50] 그마저도 방화범은 무기징역, 기관사는 금고 5년이 선고되는 등 그야말로 솜방망이 처벌로 끝내서 비판받았다. 그러나 당시 법 체계상 금고 5년은 최대 형량이었다.[51] 1998년 1호선 개통 후 외환위기 등의 여파로 적자만 계속되어 2002년 기준 부채가 1조 3,316억 원에 달했으며, 공사측은 재정 적자를 해소시키기 위해 인력을 줄였다.[52] 겨울에는 이 알루미늄 시트를 열로 데워서 지나치게 차가워지는 걸 막는다. 이게 또 과민성 대장 증후군 환자들한테는 엉덩이 난방으로 불리며 또 다른 민폐로 취급받는 모양이다.[53] 서울의 경우 2007~2008년에 도입된 2호선 전동차와 2009~2010년에 도입된 3호선 전동차에 난연재 모켓 시트를 장착했다.[54] 예) 3호선 충무로역, 5호선 영등포시장역과 신금호역, 마천역,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55] 승객이 적은 시간대에 행해졌고 워낙 이 사건의 여파가 컸기 때문에 지하철이 늦어진다고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56] 예를 들면 선로에 뛰어 드는 사람.[57] 먼저 1호선 반월당, 중앙로, 동대구역, 2호선 문양, 반월당, 정평~영대역에 설치했고 이후 2단계에 나눠서 설치되었다. 2호선 다사, 대실역은 처음부터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었고 3호선은 처음부터 전 역사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었다. 다만 3호선의 스크린도어는 난간형이고 높이도 사람의 키 높이 이하라서 작정하고 뛰어넘는 것까지는 막지 못해서 완전히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58] 평상시에는 선로에서 차량이 역에 정차하며 발생하는 마찰열로 인한 더운 열기를 빨아들여 외부로 보냄으로써 승강장에 그 열기가 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겸한다.[59] 단, 이 경우 열차풍과 미세먼지, 소음을 감소시키는 기능은 하지 못하게 된다.[60] 이후에는 역사 바닥의 점자 블록에도 ıIı 형태의 야광 유도 표지가 추가되었다.[61] 참사 이전 중앙로역은 일평균 이용객이 5만 명에 달했으나 참사의 여파와 대구역 민자역사의 롯데백화점 대구점 개점 이후 지하철 대구역에서 대구역 지하상가를 잇는 통로가 개설되고 2호선 개통 후 달구벌대로 북측에도 반월당역 출입구가 개설되며 주변 역들로 이용객이 분산되어 다시는 5만 명대를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62] 이것은 연기가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이 강하기 때문으로, 화재가 나면서 생기는 열 때문에 공기가 데워지면서 대류 현상이 일어나 연기도 그 바람을 타고 위로 올라가게 된다. 화재 사고 매뉴얼에서 불이 났을 때 몸을 아래로 최대한 숙이고 저지대로 가라고 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실제 사고 사례를 보면 연기가 많은 화재 사고 현장에서는 저지대 쪽으로 피한 사람이 고지대 쪽으로 피한 사람들보다 생존률이 높다.[63] 역에 '통곡의 벽'이라는 벽 너머엔 아직 일부가 남아 있다.[64] 상술한 대로 불과 5개월 전에 광진구 어린이선교원 흉기난동 사건이 있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65] 등급제가 철폐된 2019년 7월 기준으로 중증 지적장애에 해당함.[66] 하지만 당시 피해자 측이 몰라서 고소하지 않았을 뿐이지, 추모의 의미가 담겨 있더라도 피해자 측이 불쾌하게 여기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아무리 범인을 죽인다는 내용이 담겼더라도 자신의 트라우마를 게임 소재로 쓰는 것이 불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김대한이야 참사를 일으킨 범죄자지만 김대한 어머니를 죽인다는 건 문제가 될 소지가 크다.[67] 주요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연관되어 있으며, 철수가 쓰러진 샛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장면 다음에 잠깐 나온다. 그런데 영화를 광고할 때 실제 사고와 관련이 있고 그 사고의 기억으로부터 서로를 치유해 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이야기를 담아야 하는데 차승원 원톱의 개그 영화, 전형적인 진부한 신파 영화처럼 광고하는 바람에 영화를 직접 본 사람들에게 도대체 왜 광고를 그렇게 만들었냐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68] 원래 가사는 한 남자가 큰 사고를 당해서 곧 죽음을 앞두는 상황에서 자신의 애인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해주는 분위기인데 이게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들의 당시 상황과 미묘하게 매치되어 많은 이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노래는 참사 이전인 2002년에 발매되었다.[69] 서울지하철공사도 이 사건 이후인 2005년 10월에 사명을 서울메트로로 변경했다. 이후 2017년 5월 31일 서울도시철도공사와 통합하여 서울교통공사가 되었다.[70] 당시 실종자의 가족들이 자신의 가족이 해당 열차에 탑승하는 CCTV가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일일이 각 역에서 구해 제출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가족이 열차에 승차하는 모습을 보고 오열, 실신하는 가족들도 많았다.[71] 실제로 정신질환자들이 길거리에서 시비를 털리거나 욕설을 듣는 등 대구경북 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뇌졸중과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박살났다.[72] 특히 국내야구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