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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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한국어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영어
Korean Air Lines Flight 007, KAL007, KE007 shootdown

기타 [ 펼치기 · 접기 ]
일본어
大韓航空機撃墜事件(だいかんこうくうきげきついじけん
러시아어
Катастрофа Boeing 747 над Сахалином
(Рейс 007 Korean Air Lines)


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발생일
1983년 9월 1일
유형
조종사 과실, 민항기 격추

발생 위치
[[소련|

소련
display: none; display: 소련"
행정구
]]
사할린, 모네론섬 부근 해상
탑승인원
승객: 246명
승무원: 23명[1]
사망자
탑승자 269명 전원 사망
기종
Boeing 747-230B[2]
운영사
대한항공
기체 등록번호
HL7442
출발지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경유지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앵커리지 국제공항
도착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김포국제공항

사고 4개월 전인 1983년 5월 5일,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에서 찍힌 사고기[3][4]
콘도르항공 소속 당시 기체 모습.[5] 등록기호는 D-ABYH[6] 였다.

1. 개요
2. 사건의 전개
2.1. 격추
3. 영공 침범 원인
4. 영향
4.1. 대한민국의 반응
4.2. 미국의 대응
4.3. 소련의 대응
4.4.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진 사례
5. 관련 자료
6. 의문점 및 음모론
7. 기타
8. 관련 문서
8.1. 유사 사건[7]
8.2. 기타
9.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당시 대한뉴스에서 특보로 내보낸 뉴스. 참사 이틀 후인 1983년 9월 3일자 뉴스이다.

사고기의 CVR(Cockpit Voice Recorder). HF[8]라서 잡음이 좀 있고 음질도 나쁘다.[9]

1983년 9월 1일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알래스카 앵커리지 국제공항[10] 거쳐 김포국제공항으로 비행하던 대한항공 007편(기종 747-230B, 기체 등록번호 HL7442)이 사할린 근처 모네론 섬 부근 상공에서 소련 방공군Su-15TM 요격기에 격추당해 추락한 사건으로 한국 국적기가 당한 사고 중 최악의 사고 규모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말레이시아 항공 17편 격추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팬 아메리칸 항공 103편 폭파 사건의 뒤를 이어 세계 민항기 항공사고 인명피해 순위 10위였다.[11][12]

과거에는 주로 'KAL기 피격 참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2. 사건의 전개[편집]


대한항공 007편의 실제 비행항로(실선)와 비행 예정항로(점선).
대한항공 007편에는 총 246명의 승객과 23명의 승무원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이 중에는 미국 하원 의원인 로런스 패튼 맥도널드(Lawrence Patton McDonald, 1935–1983)도 탑승하고 있었다.[13]

사고기는 1983년 8월 31일 오후 1시 5분(이후 서울 기준시) 뉴욕에서 이륙하였는데 당시 이미 3대의 관성 항법장치 중 한 대에 이상이 있었다는 말도 있었으나 이는 근거가 부족하며 본디 3대씩이나 탑재(triple redundancy)한 이유가 1대가 고장날 것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이후 사고기는 8월 31일 오후 8시 30분에 경유지 앵커리지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이후 오후 9시 50분에 예정보다 지연되어 출발하였고 오후 10시에 이륙하였다.[14]

오후 10시 02분에는 웨이포인트(이정표) 베젤(BETHEL)로 향하기 위해 방위 245도로 선회했고 이후 방위는 계속 고정되었다. 잠시 후 오후 10시 27분에는 카이룽산 전파국 부근을 통과하여 레이더 권외로 빠져나갔다. 이때 이미 예정 항로였던 J501 항로에서 북쪽으로 11km나 이탈한 상황이었지만 항공관제사의 경고는 없었다.

오후 10시 49분, 앵커리지 센터의 관제관에서 베젤 이정표의 통과를 알렸지만 007편은 실제 웨이포인트 '베젤'의 위치보다 22km 북쪽에 있었으며 이때 미합중국 공군 레이더 기지 King Salmon의 권역이었지만 민간 항공기에 대한 관제권이 없었기 때문에 경고는 없었다. 이후 가장 북쪽에 있는 북태평양 항로인 R20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2.1. 격추[편집]


1983년 9월 1일 0시 5분 무렵 007편은 소련 영토인 캄차카 반도 북동쪽 상공에 진입하였는데 이때 소련 방공군은 007편의 진입을 눈치챘고 미합중국 공군의 군용기라고 판단하였다. 오전 1시 30분에 007편은 소련의 영공에 진입하였지만 대응하기엔 007편이 캄차카 상공에 체공할 시간이 많지 않아 캄차카 반도에 배치되었던 소련 방공군 편대는 요격을 시도하지 않고 귀환했고 007편은 오전 2시 28분에 소련 영공을 통과하고 소련의 레이더에서 사라졌다.[15] 하지만 오전 2시 36분에 대한항공 007편이 오호츠크해를 지나 다시 소련 영토인 사할린 섬 상공에 접근하였고 이때 소련군은 경계태세에 돌입했다.[16]

오전 3시 5분에 007편은 뒤따라오던 로스앤젤레스발 대한항공 015편[17]과 교신했고 서로 바람 방향이 다른 것을 알았다. 015편은 정상적으로 소련 영공을 피해서 날고 있었으므로 그랬던 것이지만 007편 조종사는 비행계획서를 체크하고 오차 범위 안쪽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이 항로를 이탈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곧이어 오전 3시 8분에 겐나디 니콜라예비치 오시포비치(Геннадий Николаевич Осипович, 1944–2015)가 탑승한 사할린의 소련 방공군 소속 Su-15TM 요격기가 007편을 확인했다. 새벽 시간이라 아주 어두웠기 때문에 기종 식별은 불가능했고 항법등과 충돌방지등이 점멸하고 있는 것을 보고했다. 그러나 아예 형체만 보였던 것은 아니고 후일 오시포비치의 인터뷰에 따르면 꼬리의 민항기 마크 등을 식별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007편 격추과정에는 불운한 우연도 겹쳤다. 오시포비치의 Su-15가 007편을 추격하면서 경고사격을 했지만 야간이었던 데다 오시포비치가 탑승한 Su-15의 탄띠에 때마침 예광탄이 없어서 007편에서는 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KAL007: Korean Air 007 climb and maintain FL350 leaving FL330 at this time.
도쿄관제소: Tokyo Control Roger.
007편: FL330에서 FL350으로 상승한뒤 유지하겠습니다. 대한항공 007편.
도쿄관제소: 도쿄컨트롤, 알겠습니다.

위 무전을 007편과 도쿄관제소가 나눴을 때 오시포비치의 Su-15는 007편의 바로 뒤에 있었다. 그런데 이때 도쿄와 무전을 마친 007편이 고도를 35,000ft(10668m)로 올리기 시작했다.[18] 기수를 들면서 속도가 조금 떨어졌기 때문에 오시포비치의 Su-15는 007편을 앞질러가게 되었다. 이렇게 경고사격 이후에 고도를 올린 것은 경고사격을 알아차리고 반응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Su-15TM의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는 007편이 자신을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적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고도를 높이며 속도를 줄이는 것이 공격적 행동이 되는 이유는 첫 번째로 대다수의 전투기의 무장은 전면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뒤에 있는 비행기가 항상 유리하다. 그리고 서로 속도가 동일한 상황에서 앞에 있는 기체가 기수를 들어올리는 등의 방식으로 속도를 빠르게 줄이면 뒤에 있는 비행기가 앞 기체를 오버슛하여 앞지르게 되는데 이러면 역으로 뒤를 잡히게 되는 것이므로 공군 조종사 입장에서는 자신을 따돌리려는 리버설, 즉 공수를 바꾸는 기동인 것이란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두 번째로 전투기나 요격기는 그렇게 느려진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날기 어렵다. 전투기는 민항기에 비해 익면적도 작고 중, 고속 기동성을 중시하거나 아예 속도에 몰빵하는 설계라 민항기보다 실속속도가 훨씬 빠르다. 즉, 요격기의 조종사에게 이 행동은 전투기의 실속을 유도하는 지능적인 행동으로 비춰졌고 따라서 해당 항공기는 민항기 마크는 위장용으로 그려진 것이고 전투기의 특성을 꿰고 있는 군 관계자가 탑승한 모종의 군용기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우연이 없었다고 해도 007편이 오시포비치의 Su-15를 무시(실제로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지만)하고 도주를 계속하는 이상 격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극동지방 소련 방공망의 대응이 그다지 신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시포비치의 Su-15가 007편과 조우한 것은 이미 007편이 소련군 기지 주변을 지나서 공해로 빠져나가려는 시점이었다. 격추시키지 않으면 눈 뜨고 그대로 놓치는 수밖에 없는 데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당시 보잉 707을 개조한 미합중국 공군의 전자정찰기RC-135[19]가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 말았다 하면서 약올리는 비행 방식[20]에 소련 방공군이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잔뜩 벼르고 있던 것도 한 몫했다. 이런 점 때문에 5년 전 일어난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과 너무 유사해서 음모론이 힘을 얻었고 지금도 이 사건을 다룬 외국어 위키백과의 문서들에는 902편 격추 사건 때문에 대한항공이 미국의 비밀 작전에 동원되었고 소련은 낚인 것 아니냐는 음모론성 서술이 있다.

007편의 속도가 줄어들면서 고도를 상승하며 오버슛을 하게 되자 명백하게 자신을 따돌리려고 한다고 생각한 오시포비치는 다시 007편의 주위를 빙 돌아 007편의 8km 뒤편으로 날아가 오전 3시 25분 무렵에 R-98 공대공 미사일 두 발을 발사했다.

파일:kal007_hit.jpg

미사일 한 발은 다른 곳으로 날아갔지만 나머지 한 발이 기체 후방부에서 근접폭발했다. 007편은 R-98에 피격된 여파로 기체 후부에 구멍이 뚫리면서 급격한 감압이 일어났고 이 충격으로 최소 1개 이상의 유압장치가 완전히 파괴되었다.[21] 피격 직후 007편은 잠시 38,000ft(11582m)까지 급상승하였고 이후 약 11분간 추락하며 활공하다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이때 10여 분이나 남아 있었는데도 007편이 비상상황임을 알리고 MAYDAY를 하지 않았는지는 미스터리다.[22] 조종사들은 피격 직후 상승하던 불안정한 기체를 제어하기 위해 랜딩 기어를 내리는 시도도 했지만[23] 자동조종은 물론 정상적인 수동조종도 어려움을 느끼고 비상강하를 시작한다.

007편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사고처럼 꼬리부분이 손상[24]되어 유압을 상실한 채로 주변을 강하하며 비행하다가 추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ICAO 최종조사 보고서에서는 승객들이 추락 직전까지 살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으며 오시포비치는 모네론 섬 근처에서 007편이 나선선회를 하면서 추락하는 것을 확인하고 기지로 복귀했다. 007편이 최후의 순간 동안 급강하한 데다 바다는 땅에 비해 충격을 반사하므로 수면을 강타한 직후 생존자가 있었을 확률은 없다. 추락 직후로 추정되는 시점에 일본의 오징어잡이 어선 58치시마호가 폭발을 목격했다고 한다.

한편 007편과 무전이 되지 않자 015편과 도쿄관제소는 다급하게 007편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심지어 도쿄 관제소는 사할린에 있는 소련의 민간 항공관제소에도 연락을 했지만 007편이 마지막으로 보고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후 소련이 격추 사실을 시인하였고 부랴부랴 미합중국 해군해안경비대, 해상자위대, 그리고 민간 트롤어선까지 동원해 공해상에서 구조와 수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으며 소련 해군과 해안경비대가 미일 구조대가 소련 영해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유력 추락 지점인 모네론 섬 근해는 수색하지도 못했다.

파일:attachment/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KAL007_3.jpg
당시 소련 측에서 회수한 유류품들
회수된 007편의 수직꼬리날개 잔해[25]

이후 사고 현장과 인접한 일본 홋카이도 근해에서 일부 유류품과 13명분의 시체 일부분을 찾았다. 한편 007편이 추락한 직후 소련은 모네론 섬 근해를 수색했는데 원래는 RC-135의 잔해와 블랙박스, 컴퓨터 그리고 영공침범의 증거로 미군의 시신을 인양하러 간 것이지만 자신들이 격추한 것이 RC-135가 아니고 그냥 민간인이 탄 어느 동아시아의 민간 항공사민항기였다는 것을 뒤늦게 안 뒤 경악했다. 이때 007편의 파편과 블랙박스, 유류품이 수거되었다. 원래 소련은 자기들이 민항기를 격추했다는 사실을 은폐할 생각이었으나 미국의 정보 공개로 무산되었고 미국과 일본의 압박 때문에 1983년 9월 26일 소련은 유류품 213점을 전달했다. 그러나 블랙박스와 잔해들은 냉전이 끝날 때까지 극비리에 관리되었으며 소련은 007편 블랙박스의 존재를 부인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몇 년이 흐른 후에 1988 서울 올림픽에 소련이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의 올림픽 참여로 한소관계가 크게 개선되자 노태우 정부는 한소수교를 추진하면서 더 이상 007편 격추 사건을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

한소정상회담 전날인 1990년 6월 3일 대한민국 정부는 "한소관계의 개선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보장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점에서 불행한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이 한소관계의 개선 노력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밝혔고 이 사건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이전에 일어났음을 지적하면서 "이번 한소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로 소련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건설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래도 1990년 한소수교 당시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비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하였고 1991년 한 차례의 추가 수색을 벌여서 007편의 잔해와 유류품 일부분을 더 찾아냈다. 소련 붕괴 이후인 1992년에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하고 국회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직접 블랙박스와 일부 유류품을 반환하였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된 후 1990년대 중후반 러시아가 극심한 경제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많은 귀금속, 유류품들이 러시아 내에서 도난당하거나 군 관계자들이 서방세계에 몰래 팔아치우면서[26] 그 뒤에도 희생자들의 귀금속 유품이 해외 인터넷 쇼핑몰에서 팔리는 문제가 남아 있다. 반면 사고 현장과 가장 가까운 일본 영토인 홋카이도 왓카나이시에서 수거된 유류품 371점은 시 당국이 한동안 보존했다가 참사 20주기를 맞은 2003년에 유족들의 동의 하에 해변에서 소각했다.


3. 영공 침범 원인[편집]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비로소 대한항공 007편의 블랙박스대한민국으로 전달되었다.[27] 이후 블랙박스는 ICAO에 제출됐고 남은 유품은 유가족들에게 전달되었다. ICAO는 사건이 외교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만큼 최대한 공정성과 중립을 지키기 위해 NTSB를 비롯한 미국의 수사당국, 러시아의 AIC 그리고 피해자인 한국의 KAIB까지 배제한 뒤 007편의 블랙박스를 제3국인 프랑스의 항공당국인 BEA에 제출하여 분석했고 그 결과를 기본으로 하여 ICAO 직권으로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다.[28] 007편의 블랙박스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현재와 같은 디지털 메모리가 아닌 오디오 테이프로 녹음되었는데 오디오 테이프에 소련이 테이프를 덧대 놓아 블랙박스를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했지만 추락 시 충격으로 인해 파손된 부분을 복구한 것뿐이었고 조작은 없었다.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007편 격추 사건의 단초가 된 가장 큰 원인은 조종사들의 과실이었다. 007편 조종사들은 이륙 이후부터 격추시까지 비행기의 항법 옵션을 INS 관성항법유도로 설정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나침방위 모드[29]로 유지했다. 즉 비행기가 통과해야 하는 지점(웨이포인트)을 사전에 입력하고 관성항법장치로 이를 찾아가며 비행하는 통상의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찰스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횡단할 때 사용했던 원시적인 수단 즉 나침반 방위만 보고 가는 방식 Dead reckoning & Pilotage으로 내내 비행했다는 것이다. 다만 보고서는 어째서 조종사들이 나침 방위각 모드를 INS로 변경하지 않았는지 알아내지는 못했는데, BEA와 ICAO가 미국과 러시아 양국의 눈치를 봐서 알아내고도 모른 척 한 것이 아니라 조종사들의 대화에 항법과 관련된 것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007편을 조종한 천병인(1938년생) 기장은 엘리트 중에서도 초엘리트 조종사였다. 관련 기사 대한민국 공군 조종 간부후보생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했고(관련 기사) 졸업 후 임관하자마자 공군 조종소위 계급으로 곡예 비행단인 블루세이버 팀원이 되었으며[30](관련 기사, 사진 자료) 공군 예편 후 대한항공에 입사하여 대통령 전용기 기장까지 했다.[31] 관련 기사

이러한 대한민국 최고의 조종사가 수없이 다닌 항로를 어이없이 이탈하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미스테리다. 비행 전 사전 체크에서 항법 모드를 'INS'(관성유도)로 설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기본 중 기본인데 007편은 이륙 때부터 격추 때까지 INS 모드를 아예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병인 기장이 왜 관성유도항법으로 가지 않고 칠흑같은 북태평양 밤하늘을 원시적인 나침 유도 방법으로 조종했는지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이며 다만 그 이유에 대해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대체로 '좌표 입력에 실수가 있었으며, 이를 재입력하려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므로 징계, 비행시간 지연에 따른 추후 있을 징계를 모면하기 위해 그냥 이륙해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가설이 유력히 제기되고 있다. 조종사들은 이륙 전에 관성유도항법을 위해 좌표를 입력하게 되는데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비행기를 정지시킨 다음 INS 스위치를 '스탠바이(대기)' 자리에 놓고 3대의 INS에 각각 출발지 위치를 입력한다. 보통은 부기장과 항공기관사가 입력하고 기장이 점검한다. 그 다음에 스위치를 '얼라인먼트(정렬)' 자리로 돌리고 통과 지점 위치를 입력한다. 그런 뒤 15~30분쯤 기다리면 표시등에 녹색불이 들어온다. 녹색불이 들어오면 INS 스위치를 '내비게이션(비행)' 자리로 돌리고 이륙할 수 있다. 녹색불이 들어오기 전에 비행기를 움직이거나 '내비게이션(비행)' 자리로 돌리면 입력된 자료가 흐트러져 INS는 작동되지 않는다. 만약 실수로 잘못 입력했을 경우 이륙을 하지 않았더라도 수십분에 걸친 항로 입력 및 정렬 작업을 다시 해야 하며 이륙했다면 회항하는 수밖에 없다. 회항의 경우 말은 쉬워 보여도 착륙 전에 반드시 정해진 구역에서 착륙 허용 중량에 맞게 연료를 버린 뒤 공항에 정지된 상태에서 좌표를 재입력하고 다시 연료를 급유한 뒤 이륙하는 아주 복잡하고 손실이 많이 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32] 만약 이러한 실수가 드러나면 징계를 피할 수 없을 뿐더러 대통령 전용기장 심사에서 탈락할 수도 있고 대한민국 최고의 파일럿이 이런 기본적인 실수를 한 것을 감추고 싶은 심리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관련 내용 또한 수도 없이 다녔던 항로이기 때문에 쿠릴 열도, 캄차카 반도, 셰미야 섬과 같은 랜드마크를 이용한 나침 방위 비행으로도 충분히 비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을 수 있다. 그러나 나침반 방위 비행은 방향만 잡아줄 뿐이지 관성유도항법처럼 잘못된 항로를 자동으로 수정해 주지는 못한다. 즉, 나침반 방위를 정확히 하더라도 해당 항로에는 편서풍으로 인하여 북쪽으로 계속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방위각이 가르키는 각도 수치는 일정하더라도 기장과 부기장은 지면에 마찰력으로 고정되지않는 한 북서풍 혹은 남동풍이 현재 10m/s로 미는지 20m/s으로 미는지 알 길이 없다. 나침반보다 정교한 자이로콤파스를 갖추더라도 추측항법의 한계를 한밤중의 비행에선 극복하지 못하는 셈이다.

정확히 좌표를 입력하더라도 녹색불(관성유도항법 준비완료)이 들어오기 전에 움직이거나 스위치를 '비행'으로 돌리면 입력된 좌표는 지워지는데 이를 재입력하면 이륙이 20분 정도 지연되고 도착하면 기장은 지연 사유서를 써야 하기 때문에 상술된 내용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지연을 피하기 위해 수동비행을 강행했을 수도 있다. 007편은 이륙 후 좌표의 잘못된 입력으로 인한 급격한 방향전환 등의 이상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이 있다.

15분 뒤 같은 항로를 뒤따르던 천병인 기장의 공군 선배인 015편 박용만 기장은 007편과의 교신에서도 뭔가 감추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고 증언했다. 관련 내용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설이고 추측일 뿐이며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다.[33]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확실한 것은 007편은 관성유도항법으로 가지 않고 자이로콤파스만을 보고 수동비행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박용만 기장은 천병인 기장이 수동비행중 소련 섬(코만도르스키예 제도)을 미국 섬(니어 제도의 셰미야 섬과 부근 섬들)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다고 아래와 같이 증언을 하였다.[34]

......중략....

007은 앵커리지 관제센터에 나비(NABIE)를 통과했다는 보고를 하면서 다음 보고점인 니바(NEEVA)의 통과예상 시간을 한국시간 새벽 0시 49분으로 통보했다가 9분 뒤 0시 53분으로 4분 수정, 통보했다. 그러나 007이 나중에 보고한 니바 통과시각은 0시 58분으로 다시 5분이나 늦어졌다. 이 보고를 듣고 놀란 박용만 기장은 부기장을 시켜 늦은 까닭을 물어보게 했던 것이다. "그때 007의 손부기장이 응답을 머뭇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 있다가 바람이 세다는 답이 나왔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손부기장이 천기장에게 뭐라고 대답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던 게 아닌가 추측되거든요." 약 10분뒤 박기장은 천기장을 직접 호출, "왜 늦었느냐"고 물었고, 천기장은 "바람이 많이 분다"고 답했다. "천기장의 대답은 짧고 급하게 끝났습니다. 무엇인가 숨기고 싶고 당황해하는 듯했습니다."

그런 대화가 오가던 바로 그 즈음 소련령 코만돌스키예 섬의 방공 레이다는 처음으로 007을 포착했다. 007의 위치는 R20항로상의 니바가 아니라 니바에서 북쪽으로 약 350km나 떨어진 소련 비행식별구역 안의 베링해 상공이었다. 이탈해도 너무나 벗어난 거리였다. 부산상공을 지나간다면서 실제로는 서울 위를 날고 있는 격이었다. 박용만씨는 말한다. "니바(NEEVA)는 이 항로에서 가장 중요한 체크포인트입니다. 베델(BETHEL)을 지나 캄캄한 망망대해상으로 들어서면 2시간 동안 섬 하나 볼 수 없는 암흑 속을 비행하게 됩니다. 제대로 가고 있는가를 체크할 만한 지표가 없어요. 그러다가 나비(NABIE)를 지나 한 시간쯤 가면 기상 레이다의 왼쪽 끝에 섬 두 개가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제(諸) 섬[35]

인데 보통 두 개만 잡혀요. 그것이 암흑 속의 등대와도 같은 시미어 섬이죠. 시미어 섬에는 DME-VOR 시설이 있는데 이 전파도 포착됩니다. 시미어가 기상레이다에서 9시 방향 135항공마일의 위치에 서게 되면 비행기는 정확히 니바를 통과중이란 얘기가 됩니다. DME-VOR, 그리고 레이다 포착, 이렇게 3중으로 비행기의 좌표를 체크하여 정상비행중임을 확인하면 그때부터는 안도합니다. 그런데 007은 북쪽으로 330km나 벗어나 날고 있었으니 시미어 섬이나 DME-VOR 전파가 잡힐리가 만무하지요. 조종실에선, 이제 레이다에 시미어가 나올 때가 됐는데, DME가 잡힐 때가 됐는데...하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10여분 늦게 007의 레이다에 왼쪽으로 섬 두 개가 나타났습니다. 야, 시미어가 저기 있구나, 이제 살았다,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007의 항적을 보면 정상 비행의 경우 시미어 섬이 레이다에 나타날 때와 엇비슷한 시각에 007의 기상레이다에서도 두 섬이 나타났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두 섬은 소련령 코만돌스키예였다. 그 섬의 방향과 거리는 R-20항로상에서 시미어 섬을 포착할 때와 흡사했다. 섬의 모습도 거의 같았다. 다 같이 두 개로 보이고 모양과 크기, 두 섬의 배열도 흡사했다. 레이다만 보면 누구나 코만돌스키예를 시미어로 오인하게 되어 있다는 게 박씨의 주장이다. "그러나 007 조종사들은 곧 다시 불안해졌을 겁니다. 틀림없이 시미어인데 가까이 다가가도 DME-VOR 전파가 안 잡힌단 말입니다. 이상한데, 이상한데, 라고 생각했겠지요. 수신장치가 고장인가, 아니면 시미어의 시설이 고장인가, 그렇게도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DME-VOR이 안 잡혀도 레이다상의 두 섬이 시미어란 믿음은 바꾸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이 코만돌스키예라고 생각하기는, 또 007이 북쪽으로 300km 이상 빗나가서 날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도저히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고 그렇게 믿고 싶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상황을 유리한 쪽으로, 즉 합리화 하는 쪽으로 해석해버렸을 겁니다. 저 두 섬은 시미어가 틀림없다. 다만 항법보조시설에 고장이 난 모양이구나..." 007이 그 두 섬을 소련령 코만돌스키예라고 판단했다면 항로를 급히 남쪽으로 꺾었을 것이다. 항적을 보면 007은 코만돌스키예를 레이다로 포착한 무렵부터 완만하게 좌선회를 한다. 그리하여 이 섬이 9시 방향으로 약 135 항공마일의 거리에 놓이도록 항로를 잡는다. 즉, 니바의 위치(실제로는 니바라고 착각한 위치)로 비행기를 갖다 놓은 것이다. 항적을 보면 천기장은 코만돌스키예를 시미어로 확신하고 그것을 기준점으로 하여 북쪽으로 기울어진 007의 항로를 남쪽으로 조정했다고 박용만씨는 풀이했다.

파일:캄챠카반도지도.png

천기장은 정확하게 니바를 통과하고 있다고 판단한 직후 좌선회를 멈추고 다시 약 246도 방향으로 자신있게 직진한다. 007이 니바를 통과하고 있다고 보고한 시간이 예상 시간보다 9분이나 늦어진 것은 코만돌스키예를 시미어로 오인했다는 또 다른 증거라고 박용만 씨는 말한다. "천기장은 바람 때문에 늦어졌다고 했으나 그때 보고한 바람으로는 그렇게 늦어질 수가 없었어요. 천기장이 니바를 통과하고 있다고 판단한 시각은 실제론 10분이상 늦어진 시각이었을 겁니다. 거리관계로도 그렇고, 선회 때문에, 또는 시미어 섬을 찾는다고 비행 시간이 더 걸린 거지요. 그러나 10분 이상 늦어지면 비행계획 전체를 수정보고해야 하는 등 귀찮아지니까 9분 늦은 것으로 한 게 아닐까요. 어쨌든 코만돌스키예섬 부근에서의 007항로 변경을 보면 그땐 INS를 작동시키지 않았음이 더욱 명백해지고 조종사들이 그때까지 이상상태를 의식하면서 비행하고 있었음도 확실합니다." ......중략.......

007은 코만돌스키예 북쪽을 지나서는 주저없이, 군사시설이 집중된 캄챠카반도 위를 횡단했다. 기상 레이다에 캄챠카의 해안선이 나왔을 터인데 차마 그럴 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박용만씨는 "왜 캄챠카로 들어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면서 이런 생각을 피력했다. "코만돌스키예를 시미어로 믿어버린 다음에는 이와 배치된 증거가 나타나도 묵살해버린 것이 아닐까요. 또는 구름이 많이 끼였거나 레이다 상태가 좋지 않았을지도..." 소련측 자료에 따르면 그때 캄챠카 상공에는 권운과 안개가 여러겹 덮여 있었다고 한다. 운량은 하늘의 반을 덮을 정도였다. 이 정도에서 레이다에 나타난 육지와 구름을 혼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어느 고참 기장은 무르만스크 사고를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황하면 바다를 하늘로 착각, 소형기일 경우엔 뒤집힌 상태에서 비행하는 수도 있어요. 무르만스크에선 707기가 거의 U턴하여 거꾸로 날았어요. 왼쪽으로 보이던 태양이 오른쪽으로 보이는 데도 항법사는 제대로 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김창규 기장이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해도 항법사는 맞게 간다고 우겼다고 해요. 정상 항로에서 약간 이탈하면 눈에 익은 지표물을 근거로 쉽게 알아챌 수 있는데 터무니 없이 벗어나 전혀 생소한 곳을 날고 있을 때는 어떻게 벗어났는지 상황 파악이 안되고 그러니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공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헤엄치다가 쥐가 난 것처럼 말입니다."

대부분의 항공사고는 그 원인이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예컨데 지난 83년 12월 23일에 앵커리지 공항에서 일어났던 대한항공 DC-10기의 활주로 사고가 좋은 예다. 안개 속에서 DC-10 기장은 유도로를 따라 엉뚱한 활주로의 중간에 들어와 이륙을 위해 활주하다가 맞은 편에서 대기중이던 경비행기를 들이받았던 것이다. 320도 방향으로 달려야할 비행기가 240도 방향으로 달렸는데 세 승무원 중 어느 누구도 눈앞의 나침반이 240도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캄챠카 반도에 접어들 무렵 007은 '이륙후 3시간 22분'이란 반환점도 지나버렸다. 이 반환점 이전에 중대한 사고가 생기면 앵커리지로 돌아가고, 반환점을 지나서 중대사태가 발생하면 도쿄로 가게 되어 있다. 007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었다. 007의 천기장이 캄챠카 위를 지나는 것을 알았는지는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비행기가 육지 위로 날아가면 기상 레이다는 반사파로 부옇게 되어 지형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무르만스크 사고때도 707기는 레이다를 갖고 있었으나 육지 위를 날면서도 바다위로 날아가는 것으로 착각했었다. 정상상태에선 생길 수 없는 일이 공황상태에선 생길 수 있다. 더구나 레이다는 손바닥만한 크기다. 지도를 보듯 할 수는 없다...... 이하생략


소련이 넘겨준 블랙박스 기록된 007편과 015편과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앞에 일부 실제 음성 동영상 참조) 박용만 기장은 니바(NEEVA, 셰미야섬 부근) 지점에서의 대화가 마지막이라고 증언했으나, 실제로는 노카(NOKKA, 홋카이도 부근) 지점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에서 풍향과 풍속차이가 심한데 이는 동일 항로를 근접비행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니바(NEEVA)지점을 정확히 통과했다는 잘못된 확신으로 항로이탈이라는 사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KAL015: 007편.

KAL007: 말씀하세요.

KAL015: 뭐해?

KAL007: 뭐라고?

KAL015: 뭐하냐구..

KAL007: 뭘하긴뭘... 재밌는 얘기하고 있지. 김선생(김의동 항공기관사)께서 재미있는 이야기하기 때문에...

KAL015: 허허...글쎄...서울 도착 후 자네가 전부 공부하는게 낫겠네.

KAL007: 공부? 뭘? 다 그만둬..다 아는걸 가지구. 저 이제 가을인데 말이야, 하루 쉬어가지고 단풍구경이나 갔으면 좋겠어요.

KAL015: (계획을) 짜요. 짜요.

KAL007: 설악산 단풍구경이나 한번 가요.

KAL015: 우리보다 한 저 3분 이른가?

KAL007: 네? 아...아...예정된 노카(NOKKA) 도착 계산치를 말하는 건가? 182...25 (18시 25분). 듣고 있는가?

KAL015: 아. 25(분). 우린 1829이면 어때?(18시 29분 도착이면 어때?) 1829.

KAL007: 1,1분 이거든(1분 늦네) . 4분 빠르네요. 25(분)가 될꺼야. 그건 세관인데...(도착 후 승객들이 세관을 통과하기가) 어려울텐데... 빨리 올라가면 빨리 내려오고 늦게 올라려면 늦게 내려오게 마련이지.... 말하자면 복잡해진다니까... 자 이제 그만.

KAL015: 난...이거 갑자기 바람이 배풍이 많이 부는데...그쪽은 얼마나 왔어? 풍속과 방향은?

KAL007: 206, 몇 노트인지 물어 볼까?

KAL015: 35노트.

KAL007: 저기 방향이 어떻게 되었지? 저 몇 도 방향에...[36]

KAL015: 040, 040.

KAL007: 30도요? 30노트요?

KAL015: 한 30도에서 40도 방향에 아...아 35노트.

KAL007: 그래서?아! 많이 부는데. 그런데 우리는 여태까지...평소와 같이 정풍, 정풍이 아...방향215, 15노트.

KAL015: 그래서? 그런데 여기는 저 비행계획에 나온거 이렇게 본다면 어... 방향 360, 15노트가 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KAL007: 그런데.... 그렇게 되어 있네.

KAL007: (015편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KAL007: 우리보다 앞서 있나요?

KAL007: (015편이) 빨리 가게 해야겠어. 015편 노카(NOKKA)지점 통과가 우리와 똑같이 29분이야. 빨리 가게 해야겠어.

KAL007: (015편이) 왜 이리 서두르죠?

KAL007: 배풍이 분다고 하네.

KAL007: 뭐라고요?

KAL007: 배풍이 35노트라고 하네.

KAL007: 어, 어...(이상한데)[37]

KAL015: 007편.

KAL007: 말씀하세요.

KAL015: 올라갈 수 있어? 350으로.[38]

KAL007: 올라갈 수 있어..

KAL015: 오케이. 우리가 370을 요청할게.

KAL007: 오케이.



4. 영향[편집]



4.1. 대한민국의 반응[편집]


1983년 9월 2일 대한뉴스 제1452호 - 대한항공 여객기 피격 참사
1983년 9월 9일 대한뉴스 제1453호 - 대한항공 여객기 피격 참사 특보
비무장 민항기, 그것도 당시 초대형인 데다 매우 많은 승객을 태운 민항기가 전투기에 눈에 띄는 경고도 없이 요격당하고 모든 탑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자 전세계가 경악했다. 이 경악한 국가는 소련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미국 공군의 정찰기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잔해를 확인한 뒤 민항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 내용은 군과 정부만이 알고 있었고 유류품들과 잔해 블랙박스를 재빨리 수거해 소련 붕괴 이후 한국에 반환할 때까지 극비리에 관리했다.

9월 1일 오전까지는 사할린 강제착륙 뉴스 등이 흘러나와 1978년에 일어난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11시 55분에 소련 전투기로부터 미사일 공격을 받은 KAL기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면서 전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소련과 외교관계도 없었고 사건 발생 지역이 소련 영공, 미국과 일본의 비행정보구역인 관계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나 미국과 일본 등의 우방국에서 전달해 준 정보를 바탕으로 대한항공기가 격추됐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에 이진희 문공부장관이 '제3국'에 의해 대한항공기가 격추당한 것이 확실시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이어 슐츠 미국 국무장관이 특별 기자회견을 통해 소련 전투기가 대한항공기를 격추한 것을 확인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9월 2일에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83년 9월 1일, 대한항공 소속 보잉 747 여객기가 소련기의 공격을 받아 격추됨으로써 269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한 충격적인 참사에 접하고, 본인은 온 국민과 전세계 평화애호국민과 더불어 비통함과 분노를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민간항공의 안전은 어떠한 상황 아래에서도 보호되어야 함이 인도주의와 국제법의 대원칙이며, 소련은 우리 나라와 함께 세계민간항공기구의 회원국으로서 민간항공기의 안전운항을 위하여 모든 협조와 노력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등의 적대행위도 하지 않고 비무장한 민간항공기에 대하여 무력공격을 가해 269명의 고귀한 인명을 앗아간 것은 천인공노할 잔인무도한 만행으로서, 어떠한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전세계인의 규탄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세계항공사상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최악의 이번 사건은 무절제한 어떤 강대국이 가공할 최신무기인 미사일을,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나라의 민간여객기를 대상으로 실험을 한 것이 아니냐는 세계인의 준엄한 비판을 받더라도 소련은 그 비판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경악과 분노 속에서도 이 민간여객기가 만일 강대국 소속 여객기였다면 소련이 감히 이같은 만행을 저질렀을까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국력을 더욱 알차게 키워 나갈 결의를 굳게 다짐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39]

본인은 소련 당국이 이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여 전세계에 명백히 밝히고 사과하는 등 민항기에 대한 공격 격추에 따른 모든 책임을 다할 의무가 있음을 엄중하게 밝혀두는 바입니다.

우리 정부는 현재 이 사건에 따른 사후대책에 만전을 기하고 있으며 우방국과 국제기구를 통하여 필요한 모든 외교적 조치를 강구하고 있읍니다.

본인은 이번 사건으로 희생된 승객과 승무원들의 명복을 비는 동시에 그들의 유가족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며, 외국인에 대하여는 그 국민과 정부에 대해 깊은 유감의 뜻을 아울러 표하는 바입니다.

대한항공여객기 피격사건에 관한 특별담화


9월 7일에 합동위령제가 서울운동장 축구장[40]에서 진행되었다. 위령제에는 10만 인파가 운집했고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와 함께 각 부처 장관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날 희생자유가족대표로 연단에 섰던 007기 교대조 부기장 김희철 씨[41]의 장녀 김수지 양[42]이 고별사를 낭독한 것은 그날 언론 톱으로 다뤄졌다. 당시 김수지 양은 "소련놈들아 우리 아버지를 살려내라!"라며 격양된 어조로 고별사를 낭독했다. 합동위령제는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주요 외신들도 취재를 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사였다. 당시에도 대통령 특별담화가 있었다.

어떠한 비극과 재난, 그리고 어떠한 폭력에서도 해방되는 최후의 비결은 튼튼한 힘을 기르는 국민 여러분. 평화로운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슬픔과 분로로 뒤덮여 있는 가운데 우리는 오늘 소련의 야만적 범죄행위로 유명을 달리한 열여섯 나라 269위의 영령 앞에 엄숙히 고개숙여 그 영혼을 위로하고 눈물로 애도하고 있읍니다. 특히 범죄자측의 음험한 방해로 인하여 시신을 거두기는커녕 한조각의 유품조차 없이, 고혼을 대해야 하는 우리의 통분과 단장의 비애는 필설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읍니다. 본인은 비탄과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애통해하는 국민 여러분과 더불어, 이제는 불러도 말이 없고, 찾아도 그 모습을 대할 길 없는 영령들 앞에 삼가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아무런 방비가 없는 민간여객기를 미사일로 공격하여 격추시킨 것은 문명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문명에 대한 반역이며, 야만적인 폭력인 것입니다.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그리고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읍니다. 그리고 국가간의 문제해결을 폭력적 수단에 의존하려는 전쟁에서도 선전포고라는 절차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최소한의 양심은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에 최신과학기술을 자랑하는 강대국이 비무장여객기를 아무런 경고도 없이 뒤에서 미사일로 격추한 반이성과 반문명의 극치를 보았읍니다. 우리는 6,25라는 선전포고 없는 전쟁에 이어 사전경고 없는 민간항공기 격추라는 참극을 다시 경험하면서 솟구치는 전율을 금할 수 없읍니다. 특히 우리를 더욱 격분하게 하는 것은 사태의 전적인 책임이 있는 소련당국이 전세계가 분노로 지켜보고 있는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전혀 해명을 함이 없이 오히려 허언과 궤변으로써 책임전가에 급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대한민국 전국민의 끓어오르는 분노의 절규와 전세계 평화애호국민들의 양심의 소리를 대변하여, 소련당국에 대해 진상해명을 비롯한 제반 책임을 전적으로 질 것을 엄중하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진실은 어떻게든 밝혀지기 마련이며, 그것의 해명을 천연시키거나 회피하는 것은 반도덕성을 배가시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소련당국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피격기의 항로에 관한 비행정보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관계국들의 자료는 소련기가 민항기 로 확인된 KAL기에 대하여 하등의 사전경고도 없이 미사일공격을 했음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읍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들은 우리의 민간항공기가 첩보활동을 하기 위해 영공을 침범했으며 영공침범에는 징벌을 할 수 있다는 억지를 쓰고 있읍니다. 70세의 노인과 4살난 어린 승객이 첩보활동을 위해 민간여객기를 타고 영공을 침범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소련당국자를 빼고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민간항공기의 안전은 어떤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제법의 대원칙인 것입니다. 그것은 법을 따지기 전에 각자가 하나의 목숨밖에 갖고 있지 않은 인간세계의 기본 양심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우리의 영공을 침범한 중공여객기를 무사히 유도착륙시켜 그 승객을 안전하게 보살펴준 사실을 기억하고 있읍니다. 본인은 다시 한번 소련당국에 대하여 요구합니다. 소련은 더 이상의 농간을 버리고 전세계 인류 앞에 진상을 명백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범죄적인 양민학살에 대하여 인류의 양심으로 돌아가 대한민국에 공개 사과하고 피해배상과 범인의 처단, 그리고 재발방지책을 보장하는 등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정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비롯한 국제기구에서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는 등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읍니다. 정부는 모든 평화애호국가와의 긴밀한 협조 아래 적절한 대책을 세워 나감으로써 이러한 노력을 줄기차게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인은 소련의 행위는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절대 합리화 될 수 없다고 밝힌 「레이건」 미국대통령의 6일자 연설에 동감하면서 이를 지지하는 바입니다. 이와 아울러 우선 당장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과 기타 관계 당사국의 유해 및 유품수색활동을 방해하지 말고 또 수색된 시신과 유품은 즉각 인수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부모가 사할린 근해 공해상에서 “아가야 얼마나 춥겠니,” 라면서 차가운 바다 위로 쉐터를 던지는 모습은 같은 인류라면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는 애절한 정경인 것입니다. 슬픔에 젖은 우리의 유가족들은 유해를 거두지 못해 장례도 치르지 못함으로써 그 슬픔을 더욱 절절하게 하고 있읍니다. 소련이 인간이 사는 나라이고 소련당국자가 또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면 우리의 이러한 요구를 외면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이 모든 요구를 다 이행한다고 해도 고인의 목숨이 되살아날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억울한 죽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함으로써 뒤늦게나마 한을 품고간 혼령의 눈을 감게 해 줄 수 있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읍니다. 전세계의 평화수호 국민 여러분. 우리는 반이성과 반문명의 폭력을 서슴없이 휘두르고도 조금도 회개하지 않는 부류가 우리와 함께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도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분명 서글픈 현상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임을 우리는 뼈를 깎는 아픔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따라서 세계인 모두는 재천의 영령들이 눈을 부릅뜨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겠읍니다. 그리고 그 경고에 부응하는 일에 뜻을 모으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그것은 인간성의 위기와 문명의 위기에 대한 경고이며, 평화와 안전에 대한 간절한 소망인 것입니다. 그들은 인류의 영원한 평화와 완전한 안전을 하늘에서 절규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중대한 도발을 저지른 위에 사실의 호도를 통하여 이중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소련당국에 대하여 평화애호 국민 모두는 힘을 합쳐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영령들이 남긴 뜻을 실현하는 데 어떤 세계인보다 앞장서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그들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깊이 새겨야 하겠읍니다. 폭력과 불의에 투쟁할 줄 모르는 민족은 생명이 없는 민족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지극한 슬픔과 분함을 한때만 터뜨리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를 망각해 버리는 것은 저력있는 현명한 국민의 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흘려 보내는 것은 인간의 미덕일 수는 있어도 역사와 민족의 미덕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비극을 비극으로 끝나게 하지 않고 그것을 채찍으로 삼아서 더욱 분발하는 것이야말로 비극을 종국적으로 이기는 슬기로운 자세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우리 자신의 모습과 우리의 위치를 직시하고 여기에서 우리의 할 바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불의를 응징하는 힘은 자탄과 패배의식이 아니라 불의와 맞부딪쳐서 이를 기어이 꺾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실천력에 의하여 길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을 길러 우리의 영공을 우리의 힘으로 지키고 우리 항공기의 안전을 우리 스스로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하겠읍니다. 어떠한 비극과 재난, 그리고 어떠한 폭력에서도 해방되는 최후의 비결은 튼튼한 힘을 기르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민족의 자존과 국민의 안녕이 보장되는 튼튼한 나라, 힘있는 나라를 기필코 건설하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은 지금의 위치에서 두배 세배의 땀을 흘리고, 우리의 청소년들은 배움을 더욱 익혀 민족사의 건강한 주역이 되어야 하겠읍니다. 이 일에는 지도층과 일반의 구별이나, 남녀노소의 구별이 있을 수 없읍니다. 오직 와신상담, 우리를 괴롭히는 그 어떤 세력도 끝까지 쫓아가 추월하는 대열에 국민 모두가 참여해야 하겠읍니다. 지금은 바로 그길로 올라서는 고비인 것입니다. 이 고비에서 온 겨레가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뭉쳐 일어선다면 우리는 반드시 「힘있는 나라」, 「힘있는 국민」의 영광된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본인은 오늘 우리 민족의 한이 서린 사할린 근해 어느 곳에서 또 다시 한을 품고 가신 영령들 앞에서 국민 모두와 함께 국운개척의 역사에 신명을 바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면서, 고인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고 유가족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심심한 위로와 애도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대한항공여객기 피격희생자 합동위령제 거행에 즈음한 특별담화


당시 소련과 대한민국은 외교관계가 없었지만 소련이 중국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비공식적인 접촉은 해 오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소 외교 접촉이 수개월간 중단되었으며 전두환 정부는 타슈켄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유네스코 회의와 키예프에서 열릴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를 보이콧하였다. 또 모스크바에서 세계유도선수권대회가 있었는데 대한민국은 이 대회에 불참했다. 하지만 소련 측이 희생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나오는 와중에 88 올림픽을 앞두고 동구권과 척을 질 수는 없었으므로 1984년 10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IPU 70차 총회에서 소련 대표단의 입국을 거절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1984년 8월 4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지질도편찬위원회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의 참석을 소련이 승인하면서 비공식적 접촉도 재개되었고 결정적으로 1985년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개혁파인 고르바초프가 임명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소련과 공산권의 올림픽 참여를 설득하기 위해 대소 유화정책으로 전환하면서 한소관계는 급격하게 개선되었다. 1985년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유도[43], 양궁 세계선수권대회와 복싱 월드컵에 소련이 참여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소련 비난을 중단했다.

소련도 1986년 4월에 소련 국가스포츠위원장 마라트 그라모프를 서울에서 열린 세계올림픽연합회 총회에 참석시켰으며 사할린 한인의 대한민국 귀환 문제도 검토해 보겠다고 유화적 태도를 취했다.

이 사건 이후 대한항공은 사고기의 편명인 007편을 영구결번했다. 대한항공의 뉴욕행 노선에서 007편이라는 편명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후속편명은 KE025/026편을 거쳐 1990년대 후반부터는 KE081/082로 변경되었다. 한편 뉴욕노선의 또 다른 편명도 이 사건 때문에 007대신 KE027/028을 사용했다가 KE081/082편으로 변경된 시기에 바뀐 편명이 KE085/086이다.

사고 이후 대한항공은 보잉사와 협력하여 새로운 태극 로고와 하늘색 도색을 개발하여 1984년 3월 1일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44][45] 이 당시 새로운 도색으로(현 대한항공 도색) 처음 도입된 747기는 대한항공이 1984년에 운용을 시작한 보잉 747-3B5 버전인 HL7468이었다. 하지만 이 항공기는 14년 후 대형참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같이 도입한 747-3B5가 2대 더 있는데 당연히 매각했다.[46] 1997년 사고 당시에도 이미 노후기체였고 항공기관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747-4B5가 1989년 도입되었다.

1984년에 이 사건으로 인해 시카고 협약이 개정되면서 민간 항공기 격추는 그 이유가 영공침범이나 항로이탈이라도 격추 자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격추시킨 당사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4.2. 미국의 대응[편집]


007편의 격추 사건이 벌어진 이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한참 8번째 NAVSTAR GPS 위성을 만들어 올릴려고 준비 중[47]이었던 미 국방부와 해군에선 (당시의 로드맵상으로도) 90년대 초반에 완성될 예정이었던 GPS를 민간에게도 고작 100m 정도의 측위오차만을 발생하게끔 에러를 섞어서 제공될 것임을 공표하였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서방 국가에서 민항기 항법용으로 널리 채용된 INS에 GPS 를 접목하는 방식으로 더욱 완성된 형태의 항법 체계를 가능하게 했으며 냉전이 종식된 후 서방제 장비는 러시아제 민항기에도 널리 채용된다. 각 항공전자장비 제조사들은 CIVA INS보다 편안하게 항로를 비행 중에도 실시간으로 작성, 수정, 관리할 수 있는 FMC를 개발해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건은 엉뚱하게도 레이건에게 엄청난 행운으로 작용했는데 레이건이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강조한 바 있는 국가 안보상의 위기가 현실로 입증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있었던 미국 국무부의 언론플레이와 진실의 시시비비를 가려보면 다음과 같다.
  1. 소련 전투기 조종사 오시포비치가 환한 달빛 아래 있었기 때문에 해당 비행기가 민항기임을 분명히 시인할 수 있었다.
거짓. 당시는 음력 7월 24일로 하현이었다.
달빛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시포비치는 007편을 보았기 때문에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과장이었다. 대한항공이 격추당한 시간은 대한항공의 착륙전 2차 기내식 서비스 시간이었다. 즉 불을 다 켰으며, 대한항공이 고도를 상승하면서 속도가 느려지자 전투기는 대한항공기 옆으로 왔고 훗날 인터뷰에서 오시포비치는 보잉 747 특유의 두 줄의 불빛[48]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두 열의 창문을 보았고 보잉기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민간 여객기였다는 것을 알았죠. 그러나 이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군사용을 민간 여객기로 바꾸기쉬운 일이니까요.

― 뉴욕타임즈 인터뷰, 1996년 9월 9일
  1. 소련 전투기가 KAL기 격추 전에 전혀 경고를 하지 않고 바로 격추했다.
불명. 조종사 오시포비치는 몇 차례의 경고사격을 행하고 반응이 없자(혹은 회피행동을 하자) 격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신기록에는 경고사격에 대한 언급이 전무한 채로 미사일 조준부터 했으며, 교신을 안 했을 뿐 실제로 경고사격을 했다고 하더라도 야간에 예광탄을 장전하지 않은 채로 경고사격을 해 봤자 민항기 조종사가 그걸 알아차릴 리는 전혀 없고, 경고사격 후 고도를 올리고 속도를 늦춘 것도 회피행동이 아니라 단순히 우연이 겹쳐 발생한 일이었다. 즉 경고가 전혀 상대방에게 인식되지 않았으므로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은 맞다.

사실대로 논리정연하게 말했다면 후일 고개 숙일 일은 없었겠지만 냉전 시대의 복잡한 배경사정이 국무부의 이런 언론플레이를 불러온 것일 것이다.

레이건은 KAL기가 격추당한 몇 시간 뒤 조지 슐츠 국무장관 등 레이건의 각료와 보좌관들은 이 사건을 퍼싱 미사일(MGM-31)의 유럽 배치에 대한 국내외의 반대를 누를 수 있는 정치선전용으로 거론했다.

레이건은 이 사건을 '소련의 대량학살'이라고 규정하고 그런 야만적 행위는 미국이나 한국에 대한 공격일 뿐더러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전세계에 대한 공격이라고 선언했다.


미국 언론들은 소련의 행위를 규탄했다. 특히 <올랜도 센티널>은 '소련의 편집광적 행위', <뉴욕 포스트>는 '모스크바의 피 묻은 손'이란 기사 제목을 달았으며 <시카고 트리뷴>에서는 KAL기 격추를 '미리 계획된 살인행위', 뉴욕 타임즈는 '냉혈한적 학살행위' 등의 제하를 달아 보도했다. 우주 유영 중이던 우주비행사들도 TV를 통해 소련 비난성명에 가담했고 전미에 반소감정이 확산되었는데 뉴욕의 UN 본부에선 소련기가 불에 타고 소련제 보드카 불매운동과 판금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소련의 안드로포프를 사살하자는 전자오락까지 등장했다.[49]

KAL기 격추사건은 대소 선전전에서 레이건에게 '열광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KAL기 격추 이전 MX 미사일과 '빅 아이'라고 불린 독가스 무기 생산에 대해서 미 의회는 아주 부정적으로 대했지만 해당 사건은 미국 의회의 반대를 무력화시킬 뿐더러 핵무기 감축에도 제동이 걸렸다.

레이건은 KAL기 격추사건을 이용해 미 의회로부터 거의 모든 것을 다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미 의회는 MX 미사일 48억 달러, 퍼싱-2 미사일 4억 3,000만 달러, 레이저 무기 연구개발 자금 3억 4,000만 달러, 화학무기 1억 4,460만 달러를 포함한 총 1,875억 달러의 국방예산 자금을 통과시켰고 반군 게릴라 지원에 골몰했던 CIA 국장 윌리엄 케이시는 KAL기 격추사건을 이용해 2천 4백만 달러의 콘트라 지원금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레이건은 이 사건을 이용해 미국 해병대 1,600여 명의 레바논 파견도 의회로부터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고 미국의 소리, 라디오 프리 유럽, 라디오 리버티 등 대소선전방송을 강화하기 위해 애쓰던 레이건은 1983년 9월 의회 연설에서 "진실만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인류 최대의 희망"임을 강조해 소련인에게 진실을 알릴 명분으로 미국의 대소방송예산을 대폭 늘리도록 요청하여 의회도 순순히 대소방송의 설비확장을 위해 13억 달러를 확충시켰다.

미국 언론도 KAL기 격추 사건이 레이건에게 커다란 정치적 승리를 안겨 주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 역시 KAL기 격추 사건이 레이건 행정부의 니카라과 정책에 대한 반대를 무력화해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에 미국 핵무기 배치를 용이하게 해 주었다고 보도했다. <시카고 트리뷴>도 KAL기 격추 사건이 레이건에게 정치적 보너스이자 정치 선전의 승리라고 평했고, 레이건의 한 보좌관은 뉴욕타임즈 기자에게 "소련의 KAL기 격추가 우리를 도와주었다"고 시인했고 <월스트리트 저널>도 KAL기 격추로 정치적 이득을 보았으며 미국의 핵미사일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잠재웠다고 평했다.

반면 해당 사건이 일어난 지 5주만인 1983년 10월 7일 뉴욕 타임즈에서는 1면에 미국 정보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소련이 KAL기 격추 당시 민간 항공기인지 몰랐다고 처음으로 대서특필했으나 레이건의 정보통제 정책으로 미국의 유력 언론들도 그 이상의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워싱턴 포스트 10월 21일자에선 "KAL기 격추사건에 대해 양심적으로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레이건 행정부 안에는 없다는 말인가?"라는 기사가 실렸을 정도.

한편, 007편의 유족들은 1993년 ICAO의 최종조사보고서가 나온 뒤 조종사 과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서울지방법원에 대한항공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을 냈지만 헤이그 협약에 따라 정해진 손해배상채권 시효 2년이 지나 소송에 패소했으며 007편 사고 직후 아직 조종사 과실여부가 불분명한 시점에서 대한항공과 유족간 인당 10만 달러를 보상하는 대신 이후 발생하는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 패소에 큰 영향을 줬다. 1992년 LA연방법원에 제기한 소송에서는 007편의 사고 원인이 승무원의 조종 실수라는 판결을 해 한 유가족이 1,00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받는 등 11명의 희생자 가족이 모두 2,100만 달러를 배상받았다.


4.3. 소련의 대응[편집]


당시 소련의 중앙정계는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사후 유리 안드로포프 서기장이 승계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하필 안드로포프의 건강이 매우 나빴기 때문이다. 안드로포프는 자택에서 아침 일찍 미국 군용기가 사할린 남부에서 격추됐다는 1차 보고를 받았다. KGB 의장으로 오래 근무하면서 첩보기 격추는 시인하지도 않고 그저 조용하게 시체만 돌려보내는 것이 관행임을 매우 잘 알고 있었던 안드로포프는 사안의 심각성을 크게 오판, 평소 정찰기를 격추시켰을 때 하던 대로 대응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소련은 미국과 일본에서 사건에 대해 질의하자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아는 바가 없다고 발뺌하였다. 프라우다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기가 캄차카 반도에 들어오자 소련 방공군들이 비행기를 착륙을 유도했으나 비행기가 무시했다는 짤막한 기사만을 송고하고 비행기가 격추되었다는 것과 수많은 사망자들이 발생했다는 것은 보도하지 않았다.

9월 1일, 안드로포프가 생애 마지막으로 주재한 정치국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그날 제기된 안건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소집, 최고회의 회기 결정, 컬러 텔레비전 모델 선정, 노동 생산성 제고 문제, 이집트와의 무역, 아프가니스탄 무역 등등이었으며 안드로포프는 첩보기를 격추했다는 잘못된 보고만을 받은 상태였다. 안드로포프가 막 회의를 시작하려는 순간 국방장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가 남한 여객기가 추락했다고 보고하였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크림반도로 가서 요양을 계획이었던 안드로포프는 우스티노프에게 조사할 것을 지시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다. 냉전 시대에 있었던 흔한 정찰기 추락 사건 정도로 여겼으며 그러다 말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건은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는데 국제사회가 들끓었고 미국이 증거를 제시했다. 미국 측은 KE007편이 소련에 의해 격추되었다는 것을 소련군 교신을 감청하여 알고 있었음에도 처음에는 침묵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이 감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함이었는데 결국 소련이 계속 격추 사실을 부인하자 감청된 녹음을 공개하였다. 소련 측은 이를 통해 자국의 군사 통신망이 미국에 의해 감청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사건이 일단락된 후 군 교신용 주파수를 모조리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미국은 감청을 통한 소련군의 정보수집에 난항을 겪었다.

홋카이도에 있는 일본 항공자위대 왓카나이 감청기지에서도 소련 전투기와 지상 관제사 간의 대화를 듣고 있었으며 소련이 계속 변명을 하자 결국 일본 측이 감청사실을 폭로해[50] UN에 자료를 자세히 제시해 준 덕분에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일본의 폭로 이후 소련은 왓카나이 기지가 감청하던 군기지들의 무선교신 주파수들을 전부 다 바꿔 버려 한동안 일본 역시 캄차카 지역에 대한 도감청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었다.

안드로포프는 크림반도에서 요양하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보고받았다. 사건의 여파는 심각했는데 서방뿐만 아니라 동유럽에서조차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안드로포프는 국방부, KGB, 외무부로부터 사건의 실상을 보고받았다. 안드로포프는 먼저 체르넨코에게 정치국에서 절대 양보하지 않고 현재의 태도를 유지하며 어떻게 소련에 대한 제재에 대처할 지 준비하라는 노선을 결정지으라고 지시했다. 체르넨코는 여기에 대해 절대적인 동의를 표하며 9월 2일 자신의 주재 하에 긴급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였다.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들은 모두 철두철미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답게 비행기 격추는 정당했으며 미국의 반발은 대 소련 적대시 정책이라고 폄하하였다. 그 어떠한 유감이나 애도도 없었고 오로지 어떻게 격추를 정당화할 것인지만이 논의되었다. 심지어 농업서기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조차 비행기 격추는 적법했으며 공세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오르가코프 원수는 미국의 계획된 도발행위를 의심했다. 다만 외무장관으로 오래 재임했던 안드레이 그로미코만이 약간의 국제 감각을 발휘하였다.

사회주의 형제국들과 그 밖의 몇몇 정부에는 통보를 해야 합니다. 미국인들에 대해서는 고식적이고 확고한 대응을 해야 합니다. 타스통신이 희생자들이 발생한 데 대해서 유감을 표시한 것은 적절한 행동이었습니다.


체르넨코는 의견 일치에 대한 만족을 표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정치국 결의를 통과시켰다.

  • 1. 남한 비행기가 8월 31일 소련 영공을 침범한 것과 관련한 문제의 해결책을 승인한다. 침범행위는 제국주의 세력의 고의적 첩보활동에 의해서 유발된 것이다. 이것은 소련의 평화적 주도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음모이다.
  • 2. 중앙위원회 각과들에 대해 선전, 선동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공격적인 노선을 취하도록 위임할 것이다.

이에 따라 9월 2일부터 소련 언론은 일제히 소련 정치국의 결의에 따라 정신승리성 보도를 시전하기 시작했고 9월 7일에야 소련 정부는 특별성명을 발표하고 첩보 임무를 수행하던 비행기가 격추되었다고 밝혔다. 그로미코의 쿠바와 뉴욕 방문 일정도 전격 취소되었다. 블랙박스는 신속하게 인양되었지만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형식적인 수색작업이 계속되었다.

대한항공 007기를 격추시킨 Su-15의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 방공군 대령은 007기가 민항기인 줄 몰랐으며 창문 사이로 어떠한 인적도 발견할 수 없었고 기체에 대한항공 마크가 없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1996년에 민항기임을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다.

007편을 격추한 전투기 조종사인 오시포비치와의 인터뷰 내용 중에 '민항기인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르는데 아무 죄책감도 없었나?'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런데 오시포비치는 당시 007편 꼬리날개에서 민항기 항법 등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찰기인 줄 알고 과감하게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에선 일반 여객기에 여러가지 장비들을 달아 군용 정찰기로 써먹기도 했고 정찰기들을 민항기로 위장시키는 페이크를 자꾸 쳐 온 터라 격추 당시에는 민항기인 걸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나마나 또 민항기로 위장한 미군 정찰기겠지'라는 생각에 과감하게 발사 버튼을 눌렀다고 한다. 때마침 소련 정보부로부터 '해당 지역에 미군 정찰기들이 자꾸 싸돌아다닌다는 첩보를 입수했으니 그 지역 방공부대들은 제대로 정신줄 잡고, 걸리는 놈들은 전부 격추시켜버려.'라고 지시를 받은 터라 확신을 가지고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한다. 이후 사건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본인이 격추시킨 비행기가 알고 보니 민항기로 위장한 군용기가 아니라 진짜 민항기였음이 밝혀지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4.4.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진 사례[편집]


고바우 영감은 사건 직후부터 참사를 다룬 연작 만화를 연재했는데 9월 2일자 8884호에는 불곰이 KAL기를 뜯어먹는 장면을 그렸으며 9월 3일자 8885호에는 사할린섬이 한국을 향한 칼날로 변하는 만화를 그렸다. 9월 4일자 8886호에는 안드로포프의 초상화를 축구공에 새겨 걷어차는 만화를 그렸으며, 9월 6일자 8887호에는 자꾸 책임을 회피하는 크렘린의 반응에 분격해하던 군중 사이에서 복권 당첨됐다고 웃던 행인이 넌씨눈 취급받고 몰매맞는 만화를 그렸다. 9월 7일자 8888호에는 소련 국기 화형식을 그렸고 9월 8일자 8889호에는 소련 국기의 낫과 망치가 전투기로 변화하여 평화의 상징 비둘기를 격추하는 내용을 그렸다. 9월 9일자 8890호에는 유리 안드로포프 문서에도 소개된 유명한 에피소드인 전 세계로부터 왜 말이 없느냐고 비판을 받던 안드로포프를 고바우 영감이 찾아가서 마스크를 벗겨 보니 입이 없는 인간이라서 고바우 영감이 "앗! 입이 없어졌구나"라고 경악하는 내용이 나온다. 9월 10일자 8891호에서는 안드로포프가 왜 침묵하는지 의문을 표하는 고바우 영감에게 부인이 "이름부터 안들어포프"인데 들을 리가 있겠냐고 대답한다. 8892호에서 뇌물 사건을 다뤘다가 9월 13일자 8893호에서 다시 칼기 피격 참사를 다뤘는데 항공기 탔다가 미사일 맞을까 봐 떠는 고바우 영감에게 스튜어디스가 이 비행기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서 여객기인 줄 몰랐다는 거짓말을 못 할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내용을 그렸다. 9월 14일자 8894호에서는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한 소련 대표들이 희희낙락하면서 식당에 가자 고바우 영감이 웨이터로 대기하고 있다가 소련인 메뉴를 따로 주는데 상어 지느러미, KAL 꼬리, 원숭이골, KAL 날개만 적혀 있다.

길창덕 화백의 명랑만화 <고집세>에는 이 사건 때문에 소련을 이기자는 뜻으로 우량아 선발대회를 하는 에피소드가 삽입되었다.

KBS2에서 방영했던 SF 인형극에서는 갑툭튀한 외계인 집단이 지구의 여객기를 격추시키고 항의하는 지구인들에게 그 여객기는 우리를 정찰하려는 지구방위군의 스파이였다고 오리발 내미는 에피소드가 긴급 편성되기도 했다.

김수정 화백의 명랑만화 <아기공룡 둘리>에는 둘리가 우리 여객기를 격추한 소련 조종사를 잡겠다며 온갖 말썽을 부리다 얼떨결에 한강에 잠수정을 타고 침투한 간첩을 잡는다는 에피소드가 실려 있었다. 계속된 말썽에 고길동에게 크게 혼난 둘리는 벌을 받고 울면서 "코나 깨져라."라고 말하고 둘리의 초능력에 의해 소련 파일럿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미끄러져 코가 깨지는 엔딩. TV판 애니메이션에서는 에피소드의 제목을 '둘리의 분노'로 내보냈고 1987년에 일어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바꾸면서 소련이 아닌 북한 관련 에피소드로 각색되었다.

신문수 화백의 <신통방통이>에서는 외계인들이 지구로 와서 소련군 전함을 날려버리고 바다에 가라앉음에도 무사한(?) 007편 여객기(당시에는 칼(KAL)기라고 불렀는데 이 만화에선 카알 기라고 부른다.)를 구해준다. 그러나 알고 보니 방통이의 아시발꿈.

이 사건 이후 관련 반공 동화들이 양산되었는데 대부분은 소련을 비난하는 어린이들의 분노를 담아낸 세미 다큐멘터리 동화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통령 할아버지[51]에게 소련에 대한 복수를 해 달라는 편지와 레이건 할아버지, 낸시 할머니에게 사건 처리를 감사한다는 어린이들의 편지 모음집도 있었다. 사건 한 달 후 터진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과 엮어 북한과 소련을 동시에 비난하는 어린이들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 나오기도 했다.

록 뮤지션 게리 무어는 이 사건을 소재로 Murder in the Skies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은 1984년 발표된 앨범 Victims of the Future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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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미국 NBC에서 TV 영화로 '돌아오지 않는 KAL 007'(비디오 제목/원제는 Shootdown)이 방영되었다. 이 영화는 1991년에 KBS에서 토요명화로 <007기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방영하고자 더빙까지 다 했지만 방영 금지된 바가 있다.

줄거리는 이 사고로 아들을 잃은 과부 안젤라 랜스버리[52]가 사건 관련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음모를 밝힌다는 내용인데 처음 설정으로는 부기장이 CIA의 에이전트로서 실수를 가장한 소련 영공 침투 시험을 했다는 것인데, 당연히 비난을 받았고 약간 바꾸어 한국인 비행사들이 뚜렷한 이유 없이 소련으로 넘어가려는 듯한 설정이 나와서 기장의 유족들이 반발했다.

당시 로드쇼 기사에 의하면 방송위에서는 고인(조종사) 명예훼손 및 한국에 대하여 부정적인 면이 커서 방송불가 결정을 내렸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당시의 통제된 기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는 방영하려던 1991년은 한소관계가 개선되던 시점이었고 당시 대통령 노태우가 이 사건을 꺼내는 것은 건설적이지 못하다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높으신 분들의 외압에 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영화적 완성도는 범작 수준이다. TV 방영은 당연히 금지되었지만 이미 1989년 대우전자가 '대우비디오클럽' 브랜드로 VHS 비디오테이프를 출시했고 2000년대까지 케이블에서도 가끔 틀어줬다. 다만 사고 재현 부분은 꽤 긴박감이 있어서 한국 TV 뉴스시간에 소개될 정도였다. 극중 미국 뉴스 화면으로 당시 한국에서 일어난 소련을 규탄하는 시위의 실제 현장을 잠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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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모형 메이커 트럼페터에서 발매한 1/48 스케일의 Su-15TM 키트의 박스 아트가 이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실제 오시포비치의 기체 번호는 17번이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동료기였다거나 일부러 번호를 바꿨다는 등의 의견이 난무했다. 사실 해당 킷 모델인 Su-15만 그려도 되는데 저 멀리 민항기로 보이는 기체를 그려넣을 필요가 없지 않냐는 게 가장 큰 의문이다.

영국 BBC의 TV 시리즈 셜록의 시즌2 에피소드1 벨그레이비아 스캔들에서 추락 예정이던 민항기는 007편이었다. 대한항공 사건에서 미국이 소련군 교신의 감청을 통해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감청 사실을 숨기기위해 처음에는 이 사실을 숨겼다는 음모론 또한 드라마와의 유사점. 다만 셜록은 대한항공 사건이 아닌 코번트리 음모론을 언급한다.

1993년 발매된 '삶 사람 사랑'[53] 1집 수록곡 중 '할머니와 비행기'라는 곡이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곡이다. 노래의 내용은 미국에 계신 할머니가 손자의 선물로 줄 야구장갑과 모자를 사서 미국을 출발하여 한국으로 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시신을 못 찾아 결국 간신히 수습된 할머니의 옷을 묻고 묘를 꾸몄고 '(내가 기다리던) 야구장갑과 모자는 이제는 잠기어 저 바다속 어디에 있겠지 할머니가 사주신 나의 것 보고싶어'라고 생각하며 할머니와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하는 내용. 가사가 가사다 보니 노래 자체도 암울하고 어둡다.

김진명의 소설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다. 데뷔작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도 사건 조사를 위해 전 세계를 누비던 권순범 기자가 문득 자기가 타고 있는 비행기의 운행 항로가 그 옛날 대한항공 007기가 그대로 운항하다 피격된 항로임을 자각하면서 혹시 여기에 무슨 국제적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상상하는 대목이 나온 이후 차기작인 《한반도》(훗날 《1026》으로 개작)에서는 좀 더 음모론적으로 강화되어서 주인공이 근무했던 에이펙스 로펌의 대표 케렌스키가 정보원을 통해 수집한 CIA의 기밀문서 중 하나로 이 사건 관련 문서가 소개되기까지 하였다. 그 내용은 미국이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영공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항공기가 어떻게 되나 지켜보고 있었으며[54] 소련 측의 (정당한) 요격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이용해 소련을 악의 축으로 규정짓는 정보공작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결국 2017년에 이 음모론을 거의 정설로 채택하다시피 한 소설 "예언"을 쓰고 말았다.

미국 선댄스TV에서 방영된 도이칠란트 83(Deutschland 83) 시즌 1 에피소드 6 브랜디 스테이션(Brandy Station)에서 냉전 상황이 악화되는 계기로 등장한다. 드라마에서는 소련이 항공기 내에 미국 스파이가 승객으로 탑승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격추한 것으로 언급된다. 서독에 파견된 동독 스파이인 주인공 모리츠 슈탐(Moritz Stamm)이 서독으로 다시 파견되는 것을 거부할 때 상관이 NATO의 선제타격 가능성에 대한 첩보와 이 사건을 함께 언급하여 주인공을 설득해 다시 서독으로 파견시킨다.

존 J. 낸스가 집필한 소설 '판도라의 시계'에서는 아크바르라는 이슬람 테러단체의 파일럿이 소련 출신으로, 소련 공군에 있을 시절 KAL기를 격추시켰다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작중 전투기가 민항기를 공격하는 장면이나 공격당한 민항기에 미국의 대사가 탑승하고 있다는 설정, 민항기 공격 사건의 배후에 정치적 이득을 꾀하는 미국 정부가 있다는 음모론적인 설정 등이 여러모로 이 사건을 연상시킨다.

사실과 완전히 동일하게가 아니라 다소 유사하게 묘사된 사례로는 장 끌로드 반담이 주연한 서극 감독의 헐리우드 데뷔 작품인 《더블 팀》에서 묘사되는 공식적으론 사망처리된 각국 정보요원들을 실제로는 피아 구분 없이 살려 쓰는 국제비밀첩보기관 '콜로니'의 정보력을 보여주는 한 예시로 나온 바 있다. 다만 영화상에서는 소련 영공에서 소련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 북한 영공에서 북한이, 그리고 민항기를 군용/첩보기로 오인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북한 방공시스템의 테스트를 위해 미국이 민항기 근처에 전투기를 바싹 붙여서 비행시키다 그것을 감지한 북한이 미사일을 쏜 순간 전투기는 그 즉시 도피하고 애꿎은 민항기만 미사일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설정되었다.

애플TV+의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달에 착륙해서 우주 경쟁이 지속되는 대체역사드라마 포 올 맨카인드 2시즌 7화에서 이 사건을 다룬다. NASA의 국장인 톰이 동아시아 우주 동맹 협상을 위해 JFK 국제공항에서 한국으로 가는 KAL 007편이 소련의 전투기에 의해 격추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극중에서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고조되어 달에서 소련과의 냉전을 고조시킨다. 레이건 대통령의 이전 연설문들이 다수 등장한다. 중간중간 미국이 대한항공을 소련 상공을 지나는 스파이로 심었다는 내용이 등장하지만 미국 국방성은 이를 말도 안된다며 부인하는 내용 또한 등장한다.볼 수 있는 곳 결국 달에서 미국 우주비행사가 소련 우주비행사를 오해로 인해 사살하고 이 보복으로 소련 우주비행사들이 미국 달기지를 공격해 미국측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어 전쟁으로 치닫는다. 이 드라마 속 대사에서도 일관되게 Sea of Japan이라고 하는데, 한국어 자막은 전부 동해로 번역해 놓았다.


5. 관련 자료[편집]


파일:KAL007.svg
파일:attachment/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KAL007_2.jpg
대한항공 007편의 실제 비행항로와 비행 예정항로, 일본 상공을 통과해 서울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 점선이 비행 예정항로였고 007 뒤에 이륙했던 015편의 항로이기도 했다.
미사일 피격 144초후의 비행 데이터


6. 의문점 및 음모론[편집]


사건 당시 이 사건을 둘러싼 의문점은 여러 가지로 요약된다.

  • KAL기는 왜 3백 마일 가량 항로를 이탈했는가?[55]

  • 소련은 왜 아직도 CIA 첩보작전으로 믿고 있는가?

  • RC-135 미국 첩보기는 왜 비슷하게 정찰했나?

  • 코브라 볼 비밀작전의 정체

  • 미국 정보기관들의 의회 내 비밀 보고회의 내용

  • 레이건 대통령과 슐츠 국무장관이 자료조사 완결 전부터 신랄하게 대소공격을 서두른 이유

  • 국제민간항공기구 조사보고서의 골자는 무엇이었나?

  • 소련은 왜 캄차카 반도에서 격추하지 않고 사할린 섬을 지날 때까지 그 많은 시간을 기다렸는가?

  • 자동항로 추정기란 어떤 컴퓨터이며, 기장 천병인, 부기장 손동휘, 항공기관사 김의동의 실수라면 어떤 순서로 이루어졌을까?

냉전 와중에 벌어진 사건이고 적국 영공에서 벌어진 일인지라 당연히 음모론이 따라오게 되었다. 일단 고의 정찰설, 미국 방조설[56] 등이 주요 음모론이다. 5년 전인 1978년 일어난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과 너무 유사해서 대한항공이 미국의 비밀 작전에 동원되었고 소련은 낚인 것 아니냐는 음모론은 지금도 이 사건을 다룬 외국어 위키백과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항로 및 침범 영공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음모론이 말하는 것처럼 거의 완전히 똑같은 사건은 결코 아니다. 902편 때와 007편이 침공한 영공은 전략적 가치가 완전히 다른 영공이다.

사망한 탑승객 중 미국의 래리 맥도널드 하원 의원이 있던 것도 음모론의 근원인데 1983년은 6.25 전쟁 휴전 30주년이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30주년이었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미국 상원 의원 대표단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 비행기에 탑승한 유일한 의원이 맥도널드 하원 의원인 것도 미국이 방조했다는 음모론의 불씨이다. 다행히 대표단은 10분 뒤 출발하는 다음편 항공기에 탑승한 덕에 주요 의원 몰살이라는 비극은 피했지만 하필이면 맥도널드 의원이 문제의 항공기에 탑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높으신 분들[57]의 암살 작전이라는 게 음모론의 요지이다. 음모론 총정리 하지만 맥도널드가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레이건 행정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소련에 대한 강경노선을 펼쳤고 미국의 극보수 단체의 회장까지도 역임했다. 심지어 대선 출마까지도 고려했다고 한다.

추락이 아니고 사실은 캄차카에 착륙했고 탑승객들이 전원 살았으며 맥도날드 의원은 루뱐카에, 나머지 승객들은 시베리아에 위치한 굴라크에 수용되어서[58] 사망했다는 음모론도 미국에는 꽤 퍼져 있다. 이에 따르면 해상에서 발견된 파편은 소련이 비슷한 기체를 고의로 폭파시켰고 블랙박스는 소련이 당연히 입수해서 처리했다는 논지인데, 위에 서술한 대로 보리스 옐친이 블랙박스를 한국 정부에 넘겨주었고 그것에 따른 분석자료가 나온 후에는 거의 폐기된 음모론이다.


7. 기타[편집]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망향로 국립망향의동산에 1984년 1주기 당시 세워진 위령탑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훼손되어 2012년에 보수공사가 실시되었으나 2013년에 마감도 못 한 채 방치된 적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관리는 타 시설물과 달리 보건복지부 국립망향의동산관리원이 아닌 대한항공이 맡는다.[59]

파일:KAL007.jpg
KE007 격추 사건 위령비(祈りの塔)

  • 일본 홋카이도 왓카나이시의 최북단 소야곶(宗谷岬)에 위치한 소야곶공원(宗谷岬公園)에 이 사고로 인한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인 추도의 탑(祈りの塔)이 서 있다.[60]
  • 사고 희생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앞에서 언급된 래리 맥도널드 하원 의원이다. 그는 한미상호방위조약 30주년 행사 참석을 위해 지역구가 있는 애틀란타에서 한국으로 갔으면 좋았겠지만 당시에는 직항이 없었기 때문에 뉴욕 JFK 공항에서 대한항공 007편 일등석을 타게 되었다. 사실 그는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서울로 가는 팬암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다시피 007편을 탑승하여 결국 희생당했다. 사고 이후 보궐 선거가 열렸는데, 맥도널드 하원 의원의 아내 캐시가 뒤이어 출마하려 했지만 당 내 경선에서 조지 다든에게 밀렸다.[61]
  • 사고 희생자들 중에는 가족 단위 승객들이 많았다. 특히 힘든 동료를 위해 대신 비행기에 탑승하였다가 희생된 승무원, 병상에 있는 노모의 소원에 따라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마지막 근무를 위해 이 비행기를 탔다가 희생된 승무원, 두 달 전 부부가 나란히 박사학위를 받고 시어머니의 생신잔치 참석을 위해 4년 만에 귀국하다 희생된 가족, 멕시코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남편의 임기가 끝났으나 짐정리가 늦어져 남편을 1주일 전 먼저 한국으로 보내고 뒤늦게 오다 희생된 가족,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동생의 연락을 받고 장례식에 참석하러 귀국하다가 희생된 형제, 손녀의 출산을 지켜보고 딸의 산후조리를 하기 위해 미국에 갔다 시어머니가 편찮다는 소식에 귀국하던 길에 희생된 어머니, 한국으로 배치되어 한 달 전 미리 떠난 미군 남편을 따라 귀국하다 희생된 가족들 등 안타까운 사연이 많았다.
  • 사고 당시 007편은 비행기의 크기나 인명 피해 규모에 비해 의외로 승객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당시 대한항공의 보잉 747-200의 좌석 수는 1등석 12명, 비즈니스석 24명, 일반석 367명으로, 총 403명이었다고 하는데[62] 이에 반해 당시 007편에 탑승한 항공권을 제대로 구매하고 탑승한 승객은 245명, 승객으로 탑승한 전체 인원 수는 246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245명 탑승도 공기수송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보통 항공편을 띄울 때의 손익분기점이 좌석점유율이 70% 정도인데 사고편은 61% 정도로서 사고일이 비수기에 해당함을 감안할 때 승객 동원은 그래도 그다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좋다. 그래도 이익이 되는 비행 일정과는 거리가 멀긴 했다. 요약해 보자면 좌석 동원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주 공기수송도 아닌 애매한 정도라고 보면 될 듯하다. 1960~70년대에 대한항공의 상황이 어려웠던 이유도 자국민이 비행기를 탈 수가 없어서이던 것이 크다. 저 시점에는 그나마 나아졌지만. 게다가 1983년 저 시절비행기 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지 생각해 보자. 1989년에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졌고 그 이전은 해외여행 규제가 엄격하던 시절이었다.[63]
  • 승객으로 탄 사람 중 한 명은 비행 스케줄을 끝내고 귀국하던 대한항공 소속 기장 안인수 씨였다고 한다. 사실 앞의 링크에 나오듯이 안씨는 격추당하지 않은 015편의 기장 박용만 씨로부터 "내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겠느냐."라는 제안을 받았는데 안씨는 "가족 생각이 나서 빨리 가야겠다."라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 박씨가 한 번만 더 붙들었거나 안씨가 그 제안을 수락했다면 참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아천미술관 설립자 류수택의 동생이자 승마선수인 류춘택도 이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했다.[64]
  • 당시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던 권정달도 이 사고로 중앙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딸을 잃었다.
  • 2, 4, 5대 국회의원을 지낸 오위영의 딸도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65]
  • 당시 KBS 제2라디오에서 이 사고의 7시간 추모 방송을 했던 성우 정경애는 1997년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로 남편인 성우 장세준과 장남 장성민, 차남 장재민과 함께 사망했으며 # 그리고 또 이 사고로 희생된 한 승무원의 부인은 14년 후에 발생한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때 조카와 여동생이 희생되어 대한항공과 원치 않는 악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 1991년 3월 24일자 동아일보에 당시 도쿄 특파원이던 이낙연 기자가 이 사고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는데 이 기사에 따르면 니혼 테레비의 시사 프로그램 <더 스쿠프>를 통해 희생자의 유해 일부로 보이는 것들이 공개됐다. 그런데 현장 수색에 참여했던 선장과 잠수부들은 이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유체는 완전한 게 발견이 안 됐으며 우리도 사진 500여장을 찍었지만 당국에 압수됐다"고 했고 몇몇 잠수부들은 "누군가가 먼저 와서 유체를 치운 듯하다"거나 "수색현장에 온 냉동선은 유체를 운반하러 온 듯하다"고도 했다. 오시포비치도 KAL기가 민간기라는 것을 알고 격추했다고 하는데 1997년 동아일보 전화 인터뷰와 2003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는 몰랐다고 말을 바꿨다. 그리고 항공 사고 수사대 인터뷰에서는 아예 나는 아직도 007기가 스파이기였다고 믿는다는 뉘앙스의 말을 남겼다. 일단 항공 사고 수사대에서 나온 전문가들은 자신이 수백 명의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어서 자기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월간조선이 이 사건에 대해서 기사를 여러 번 냈다.[66] 그리고 2003년에는 비행기를 격추시켰던 오시포비치와 인터뷰까지 했었다. 요지는 나는 잘못 없고 미국 정찰기를 잡은 것이고 여객기는 결코 추락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시포비치는 소련 해체 이후 형편없는 대우를 받다가 결국 2015년 9월 23일에 향년 70세로 생을 마감했다.
  • 동년 1월 8일 007편은 폭탄 테러 미수를 겪은 적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기장이 나리타 국제공항에 긴급 착륙했으며, 샅샅이 수색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폭탄은 없었고, 범인은 정신이상 중국인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67]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규탄 결의안에 중국이 기권하고 폴란드가 반대한 사실이 일본 정부가 공개한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당시 결의안은 안보리 이사회 통과 직전에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결국 채택되지 못했다.
  • 아일랜드 출신의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가 자신의 1983년도 앨범 의 수록곡 를 통해 이 사건을 비판하였다.[68]
  • 어이없게도 007편이 격추되어 긴급하게 사건이 보도되어야 했던 그날 9시 뉴스에서 다룬 첫 기사는 전두환이 청진동에 가서 청소를 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에는 보도지침에 따라 전두환 소식을 먼저 다루는 것이 보도국 간부들과 양대 방송사 임원진에게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지고 9시 뉴스 톱에 올리지 못했다면서 기자에게 징계를 내린 시대이기 때문에 007편 격추 사건이 그만큼 긴급 뉴스였음에도 전두환 소식을 먼저 다룬 것이다.[69]
  • 북한 역시 KAL007기가 미국이 운용하는 정탐용 항공기이며 인공위성과 우주왕복선과 연계하여 소련 영공을 침범하다 격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 박용만 기장은 유가족이나 언론에 한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는데 그 때 증언했다면 원치 않는 거짓말을 해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정권 시기이기도 하고 민간인 한 명이 코렁탕을 먹는 것은 그리 어려운 시대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55세로 퇴직 후 인터뷰와 증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 이 사건이 발생하면서 서방에서는 소련제 항공기 착륙을 금지시키고 국제조종사협회는 보복으로 60일간 모스크바 취항을 중단하기로 하는 등 소련에 대한 분노가 격앙되었다. 또한 앵커리지와 동북아 지역을 횡단하는 R-60항로가 한동안 폐쇄되었다.
  • 2021년 3월 20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방영되었는데 예고영상에서 위의 음모론이 잠깐 언급되었다. 다만 결론은 탑승자들의 생존 확률은 매우 희박했으며 이 사건은 그저 각국 높으신 분들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며 적대적 공생 비슷한 구도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사건 한 달 뒤 아웅산 사건이 터지며 한국 정부조차 이 사건에 제대로 관심을 두지 못했고[70] 약소국이었던지라 이후 처리에 있어서도 외교적으로 적극적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냉전 종식 이후에는 공산권에 대한 유화 정책, 이른바 북방정책으로 인해 소련에 다시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사후 대책이 흐지부지되어 가는 도중에 한국인 희생자들의 유품들은 제대로 환수된 것이 거의 없었고 돈이 급한 러시아인들과 호사가들에 의해 거래의 대상이 될 정도로 방치되었다고 한다. 음모론자들은 이런 유품들의 사진을 제멋대로 자신들의 주장 맥락에 꿰맞추어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 방송 내용의 요지였다.[71]

  • 이 사건 이후로 1984년 6월 대한항공 항공기가 밝은 파란색 바탕의 신도색으로 바뀌었다.[72]


8. 관련 문서[편집]



8.1. 유사 사건[73][편집]




8.2. 기타[편집]




9. 외부 링크[편집]



[1] 기장 천병인, 부기장 손동휘, 항공기관사 김의동, 사무장 윤양로.[2] 루프트한자의 자회사인 콘도르 항공에서 1972년 3월 17일에 첫 운항을 하다가(콘도르 항공 시절 기체 등록번호는 D-ABYH) 조기 퇴역한 기체를 1979년 2월 3일에 대한항공에서 중고로 들여온 기체이므로 콘도르 항공도 루프트한자의 고객 코드(BCC)를 따른다. 루프트한자 역시 BCC가 30번이다.[3] 해당 기체는 I New York 특별 도색을 적용한 기체였다.[4] 약간의 명암 조정이 되어 있는 사진이다.[5] 사고기는 1972년에 콘도르 항공에 인도되었다가 1979년 2월 3일에 대한항공이 중고로 사들인 기체이다.[6] 해당 등록기호는 현재 루프트한자보잉 747-8 한 대의 등록기호로 사용 중이다.[7] 무기에 의한 민항기 격추사건.[8] High Frequency, 장거리 통신 장치로 태평양 한가운데서도 통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통신 거리가 길지만 송수신 감도가 좋지 않다.[9] 바로 뒤에 날아오던 KE015와 한국어로 설악산 단풍 구경하기 좋은 때라는 등 잡담을 나눈 내용도 있다. 당시 교신 내용을 들어 보면 KAL007편 조종사가 같이 단풍 구경 가자고 했는데 소련에 의해 격추된 탓에 같이 못 가게 되었고 나중에 교신 내용이 세상에 공개될 때 이 내용이 녹취되어 있어서 그 내용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10] 당시 한국에서 미국 동부 지역으로 가는 여객기는 제2세계 국가인 소련의 영공을 통과할 수 없었을 뿐더러 당시 여객기의 부족한 항속거리 때문에 그나마 거리 손실이 낮은 알래스카의 앵커리지 국제공항을 중간 기착지로 삼아 연료 보급, 승무원 교대가 이루어졌다. 냉전 이후에는 앵커리지 국제공항에는 화물기들이 주로 중간 기착한다.[11] 9.11 테러, 군용기 사고 제외[12] 현재는 12위이다.[13] 통칭 '래리 맥도널드(Larry McDonald)'로 알려져 있다. 이 의원은 민주당 소속이기는 한데 남부 조지아 주의 의원으로 웬만한 공화당 의원들보다도 강경한 보수 성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14] 이때 뒤이어서 로스엔젤레스발 대한항공 015편도 이륙했다.[15] 이때 007편이 빠져나간 오호츠크해는 소련 영토로 둘러싸여 있긴 하지만 엄연히 공해로 소련의 주권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소련은 이곳 상공의 기체를 요격할 권한이 없다.[16] 이 때부터 대한항공 007편의 조종석 녹음 장치의 기록이 남아 있다. 조종사들은 잡담 중이었다.[17] 3년 전에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 015편 착륙 사고를 냈던 비행기와 동일 편명이다.[18] 위 CVR 영상의 28초 부분[19] 정확히는 실험기인 보잉 367-80에서 C-135와 707로 가지가 나뉜 것이다.[20] 이러한 방식으로 영공 근처를 지나가거나 살짝 침범하는 도발은 현재도 미국, 중국, 러시아가 서로 자주 행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도발하면 정찰기에 집중되는 레이더 전파의 주파수와 패턴을 수집(ELINT)할 수 있고 상대국 방공망의 대응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 러시아, 일본이 한국 방공식별구역을 통보없이 들락날락거리는 것도 이런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21] B747에 장착된 4개의 유압 시스템 중 승강타를 조작할 때 쓰이는 3번 유압은 비상 강하를 하던 007편이 다시 상승하지 못한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파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22] 피격 직후 급격한 기내 감압으로 인해 저고도로 하강하겠다는 교신을 도쿄 컨트롤에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 무전은 잡음이 심해 도쿄 컨트롤에서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관제사는 주파수를 확인한 뒤 다시 교신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007편과의 교신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23] 이때 엔진은 정상이라고 하는 녹음이 들린다.[24] 미사일 폭발의 여파로 추락 과정에서 공중분해됐을 가능성도 있다.[25] 꼬리날개에 있는 기체 등록번호 HL7442의 HL7 부분이다.[26] 이때는 전직 대통령인 고르바초프가 연금 액수를 달러화로 환산하니 불과 몇십센트였다고 개탄하고 이후에도 각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임금체불이 일상화되어 몇 달씩 월급이 밀리거나 받는다고 해도 핫도그, 브래지어, 벽돌, 면도기 같은 물건 따위를 월급이라며 받고 학교에서도 월급 줄 돈이 없다며 보드카를 월급이라며 내주던 시절이었으며 체르노빌 메달도 미화로 몇달러, 몇십달러 헐값에 내다 팔렸다. 이러니 유류품이 성할 리가 없었다.[27] 당시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노태우 대통령에게 국회에서 직접 전달했다.[28] ICAO가 직권으로 조사하는 경우는 지금까지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그 정도로 007편 사건이 외교적으로 복잡하게 엮여 있다는 뜻.[29] 통칭 HDG(헤딩) 모드.[30] 블루세이버는 블랙이글스의 전신이며 역사상 통틀어 소위 계급으로 팀원이 된 경우는 천병인 씨가 유일하다. 이것은 조종 실력이 매우 탁월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편 당시 동료 팀원이었던 서동렬 대위는 공군에 계속 남아 1987년 18대 공군참모총장이 되었고 1989년 공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31] 대통령 전용기 조종사들 중 가장 나이가 적어서 직급은 부기장이었으나 실제로는 주도적으로 조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32] 연료비용에 대한 손실뿐 아니라 지연에 따른 연결편 환승 문제 등이 발생하며 당시 대한항공 사내 규정으로는 조종사가 징계를 받게 되어 있었다.[33] 박용만 기장은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당시 복편으로 앵커리지에서 파리까지 902편을 조종하고 김창규 기장에게 파리에서 조종간을 넘긴 조종사다.[34] 아래의 조갑제 기자의 추적 기사에서 "시미어 섬"이라고 표기된 섬이 바로 "셰미야 섬"이다. 해당 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류샨 열도 항목 참조.[35] 여러(諸)섬, 즉 제도(諸島)를 의미한다. 해당 위치는 니어 제도(Near islands)로, 애투섬(Attu island), 아가투섬(Agattu island), 알레이드섬(Alaid island), 니즈키섬(Niziki island), 셰미야섬(Shemya island)등으로 구성된다.[36] 실제 음성에서는 마치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었어?"처럼 들린다. "진행방위가", "저기 방위가" 등으로 추측된다.[37] 대참사를 피할 수도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38] 당시 요격을 담당했던 조종사 오시포비치는 이 행동이 기관포 회피 행동으로 인식되어 미사일을 발사하였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이전에 이미 발사 명령은 내려온 상태였다.[39] 다만 이 문단은 오류가 있는 것이, 소련이 007편을 격추한 근본적인 이유는 전술했듯 미국의 정찰기로 오인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약소국 항공기라는 이유로 격추시킨 건 아니다. 당시 정황상 정말로 미 공군 정찰기였더라도 똑같이 미사일을 날렸을 것이다. 실제로 소련은 1960년에 소련 영공을 침범한 U-2 정찰기를 격추한 사례가 있다. 오히려 미 공군의 정찰기였으면 더욱 적극적으로 격추시켰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대상 항공기가 소련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약소국의 민항기였다는 점을 사전이 미리 알았더라면 소련의 입장으로서는 이에 무력으로 대응할 아무런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고 봄이 상당하다. 물론, 당시 언론들의 상당수가 독재정권의 입김과 반공주의적 맥락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만큼 선전용 목적의 영상이라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없지만 말이다.[40] 동대문운동장, 지금 DDP 자리다.[41] 운행 당시의 부기장은 위에 나온 대로 손동휘 부기장이다.[42] 당시 중학교 2학년.[43] 직전 대회였던 1983년 유도 세계선수권대회는 소련에서 개최되었으나 대한민국은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에 대해 항의하며 불참했었다.[44] 다만 이 도색에는 조금씩 세부적인 변경은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대한항공'이라는 파란 글씨가 기울임체에서 정체로 바뀌었고 파란색의 톤도 조금씩 바뀌었으며 동체의 로고의 크기도 키웠다.[45] 대형 여객기 사고 이후 이미지 쇄신을 위해 로고를 변경한 항공사는 대한항공 외에도 에어 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 후의 에어 프랑스도 있다.[46] HL7469는 오리엔트 타이 항공으로 팔려 2016년 퇴역했고, HL7470은 화물기로 개조해서 운항하다 카고 360으로 매각되어 운항하다가 2010년 즈음 퇴역하였다.[47] 널리 퍼진 통설과는 달리 70년대 후반에 첫 GPS 위성이 쏘아올려질 때부터 군사용과 민수용으로 쓰이게끔 설계되었다. 1978년 당시 미국 전파항법 업계 엔지니어가 추산해 본 바로는 민수용 GPS 리시버 장비의 개별 가격은 대략 $3620 정도로 내다보았다. 신속하고 널리 GPS가 확산될 수 있도록 기국 FAA에서 국방부로 하여금 가급적 덜 노이즈를 넣게끔 압력을 가하라고 조언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몇 년 후엔 결국 그렇게 격추 사건까지 발생했다.[48] 어퍼덱과 1층, 이렇게 2줄의 객실등 불빛을 의미한다.[49] 원 출처: <KAL 007: The Cover-Up>. David E. Pearson. 1987.[50] 적국의 무전 감청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엄청난 기밀이다. 암묵적으로는 서로 감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 테지만 아예 주파수를 꿰고 있다는 사실이 핵심이기 때문이다.[51] 21세기에는 53살이면 '아저씨' 소리 들을 나이지만 저 시대만 해도 50대에 손주를 둔 할머니/할아버지들이 흔했다.[52] 1925년생 배우로 제시카의 추리극장에서 주인공 제시카라든지, 미녀와 야수미세스 팟 목소리 역으로 유명한 배우.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배우로 데뷔했다가 1944년에 미국으로 귀화했다.[53] 015B의 베이시스트 조형곤과 그의 형 조형민이 만든 그룹. 이 앨범은 희귀판이며 국립중앙도서관에서도 음원 단위로 보존돼 있으나 관내 공개라서 돈과 시간을 들여 국중도 디지털도서관 컴퓨터로 열람해야 한다.[54] 후술할 음모론에서 소개되는 미국 방조설이다.[55] 현재로서는 이륙 직후 INS모드를 설정하지 않은 채 HDG모드를 사용해 계속 비행했을 가능성, INS데이터를 잘못 입력해 이탈했을 가능성만이 추정되고 있다. 박용만 기장의 경우 1. 기장과 항공사의 신뢰도가 저하된다. 2. 권위를 잃는다. 3. 체면이 손상된다. 4. 오점 만회가 불가능하다. 즉 연료를 버리고 회항했을 경우 틀림없이 징계를 받았을 것이라고 증언했다.[56]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영공침범을 알았는데도 소련 방공 시스템의 정확도나 신속성을 테스트하고자 고의로 놔두었다는 이야기. 설마 격추까지는 안 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고 한다.[57] 대부분은 소련이라고 하지만 일부 음모론에서는 미국을 지칭하기도 한다.[58] 냉전 종식 후 냉전 시대에 자유진영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굴라그에 수용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공개되었다. 특히 1970~1980년대 소련 영공에서 격추된 미 정찰기 관련 인사들의 이야기는 유족들이 소련의 매장지에 방문할 정도인데, 굴라그 관련 서적에도 KAL기 생존자 관련 증언은 없다. 물론 음모론자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이야기를 듣고 어린이를 포함한 '생존자'의 이야기를 싣기도 한다.[59] 접근하기가 그리 쉬운 편이 아닌데, 경부고속도로 옆에 있고 천안 지역에서 좀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시내버스로 방문하려면 천안 버스 200, 천안 버스 201을 타야 한다.[60] 실제로 사고기에 탑승한 일본인도 한국인과 미국인 다음으로 많았다. 이는 당시 대한항공이 일본 항공사들에 비해 운임이 저렴하여 이 항로를 타고 김포국제공항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61] 그 후 조지 다든은 5선을 하다 점점 더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미국 남부 상황에서 결국 공화당에게 내주고 말았다. 2018년 이후 로펌에서 변호사를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지역구는 3명의 공화당 의원을 거치다 2021년 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 때문이다.[62] 당시 대한항공은 1등석이 어퍼덱에 있고 비즈니스석이 기수 쪽에 있는 독특한(?) 좌석 배치를 택했다고 한다.[63] 정확하게는 5공화국 출범 이후 순차적으로 자유화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나이 제한이 있었고 완전히 해제된 것이 89년이다.[64] 당시 LA에서 열렸던 프레올림픽 승마대회를 참관하러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직원 두 사람과 함께 갔다가 돌아오는 중이었다.[65] 그러나 오위영 전 의원은 이 사고가 일어나기 5년 전인 1978년 숙환으로 이미 별세한 상황이었다.[66] 그 기사들 중에서는 훗날 월간조선 편집장을 지낸 조갑제 기자가 쓴 기사도 있었다.[67] 다만 뉴욕을 출발한 것은 비슷했지만 경유지가 앵커리지가 아닌 토론토였고 이 사건에 연루된 기체가 해당 문서의 주인공인 HL7442인지는 불명이다.[68] "러시아인들이 한국으로 향하던 비행기를 격추시켰습니다(The Russians have shot down a plane on its way to Korea.)"라는 가사가 있다.[69] 다만 조중동과 경향신문 등 종이 신문들은 사건 당일 모두 대한항공 격추 소식을 헤드라인으로 내보냈다. 여담으로 사건 이틀 후인 9월 3일에는 TV 뉴스에서도 이 사건이 헤드라인으로 보도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날 전두환이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참배하고 청와대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기 때문이다.[70] 그래도 당시에는 상술했듯 관제 데모였을지언정 규탄식도 벌였고 취학 아동 대상의 반공서적에서도 소련을 비난할 때마다 나온 단골 레퍼토리였다. 정작 유가족들의 입장에선 실질적인 대응이 미흡하다고 느껴졌겠지만 말이다.[71] 음모론가들 중 하나인 한 프랑스 작가가 조금만 살펴도 신원을 알아낼 수 있는 한 한국인 희생자 남성에 대해 "그가 스파이 활동과 유관한 게 아니라면 이토록 베일에 싸여 있을 리가 없다."며 "그의 지갑에서 한국인 딸의 사진이 확인된 것을 보아 그는 한국인이며, 미국의 첩보 활동에 이용되었을 것이다. 미국은 첩보 활동에 필요한 현지 언어 전문가를 동원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가정에 가정을 멋대로 이어간 내용이 방송에 나왔다. 정작 2021년 방송에서 생존이 확인된 그 사진 속 딸은 이 내용을 접하고선 평범한 가장이던 자신의 아버지가 졸지에 스파이가 되었다며 황망해했다.[72] 기업의 아이덴티티 변화의 목적도 있었지만 구도색이 해당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73] 무기에 의한 민항기 격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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