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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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67년 9월 15일 원양어업 전문 기업 삼양수산의 원양어선 선단 8척[1] 이 북태평양 알류샨 열도 북위 50도 동경 179도 지점 해상에서 조업 도중 심한 풍랑에 휘말려 자선 2척이 침몰하면서 선장을 포함한 선원 29명 전원이 사망한 대한민국 원양어업 사상 두 번째로 일어난 해난사고.[2]
2. 사건 경위[편집]
2.1. 1차 출어[편집]
1964년 3월 창업한 삼양수산은 애초에 북태평양 진출을 염두에 두고 선박을 사들이는 등 적극적인 투자를 펼쳤다. 당시 한국의 원양어업 선단은 대다수가 남태평양에서 참치를 잡았던 반면[3] 연어와 송어 등 고가의 어종이 주류이던 북태평양에는 한국 선단이 아무도 진출하지 않았던 것을 삼양수산의 정영준 사장은 기회로 생각하고 도전했다.
1966년 7월 30일, 삼양수산 선단은 야심차게 부산항을 출발하여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북태평양 출어를 나섰지만 모선(母船)도 없이 10척의 자선(子船)만으로 꾸려진 선단은 독자적으로 고기를 잡아들여 만선이 되는 배부터 먼저 부산항으로 돌아간다는 지금으로선 어업에 대한 약간의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계획을 갖고 조업을 개시했다. 사전 지식 부족에 기본적인 어장도(漁場圖)마저 없는 상황에서 일본 항구측의 입항 거부 등 방해[4] 까지 겹쳐 선단은 출항 한 달만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돌아와 버리는 수모를 겪었다.
2.2. 2차 출어, 사고 발생[편집]
그러나 삼양수산은 포기하지 않고 1967년 7월과 8월에 걸쳐 추가로 어선 7척과 냉동 및 통신시설을 갖춘 중고 모선을 구매하여 그해 8월 17일 2차로 북태평양을 향하여 출항하였지만 동해에 진입하면서 모선의 냉동시설이 고장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일본 하코다테 항에 입항하여 수리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일본 측에서는 선원들의 상륙을 허용하지 않는 몽니를 부렸다. 위기에 빠진 선단은 한국 본사에 급히 지원을 요청했고 다행히 삼양수산과 협력 관계인 일본 회사의 기술진이 선단을 방문하여 냉동시설을 수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15일을 허비한 후 삼양수산 선단은 하코다테 항을 떠나 다시 출어에 나섰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9월 15일 알류샨 열도의 암치트카 섬 남쪽으로 약 60마일 떨어진 조업장에 도착한 선단은 곧바로 흩어져 조업에 들어갔지만 날씨가 복병이었다. 이미 해상은 이틀 전인 9월 13일 부터 5m에 달하는 높은 파도가 일었고 14일은 무려 10m가 넘는 파고에 초속 40m의 폭풍우까지 불어닥치고 있었다.[5] 이런 상황에서 모선이 각 자선들에게 주의경보를 내리고 어찌해야 할지 지침을 알려줘야 했지만 갑작스런 풍랑에 배가 흔들리며 당황한 모선 선장은 이를 깡그리 망각했고 다른 자선 7척도 배가 상하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 통에 선원들은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거친 파도와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다음 날인 16일 아침 제7삼수호와 제8삼수호 두 척의 어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였다. 이 때 7삼수호는 15명, 8삼수호는 14명의 선장 및 선원이 타고 있었으며 부산수산대학 학생 8명이 실습 선원으로 8대의 어선에 한 명씩 탑승해 있었다.
출어를 앞두고 있던 삼양수산 원양어선 선단
당시 신문에 보도된 사고 상황 그림
나머지 6척의 배는 간신히 풍랑을 뚫고 아다크 항으로 긴급 대피하여 선원들은 더치 하버에 머물렀으며 이후 미국 현지 해안경비대에서 5일간의 수색 작업을 벌였지만 침몰한 선체는 물론 한 명의 시신도 거두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이로 인하여 총 29명[6] 의 생명이 허무하게 알류샨 열도 앞바다에 수장당하고 말았다.
사고 소식을 들은 삼양수산 정영준 사장은 피해자들의 위령제를 치루고 유족들과 보상 문제에 대하여 협의한 후 9월 26일 더치 하버에 도착하였는데 살아남은 선원들이 조업을 중단하고 돌아가겠다고 하자 이를 들어주기는커녕 다시 조업에 나서자고 설득하려 들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회사에 큰 손해가 가는 건 물론이고 이 사고에 대한 악평으로 차기 선단 구성에 애를 먹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정 사장은 호텔로 선단 간부들을 한두 명씩 불러 위스키를 권하면서 조심스럽게 설득했고 비교적 기상이 양호한 알래스카 만의 코디악 섬 인근에서 몇 차례 시험 조업 후 앵커리지 맞은 편의 케나이 반도에 상륙한 뒤 귀항하는 코스로 조업을 재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삼양수산 선단은 10월 2일 더치 하버를 떠나 알류샨 열도를 동북쪽으로 거슬러 코디악 어장으로 향했고 정 사장은 더치 하버에 남아 사건 수습 및 현지 어업담당관과의 미팅을 갖고 귀국하기로 하였다.
2.3. 정영준 사장의 변사(變死)[편집]
정영준 사장(1936년생, 당시 31세)
10월 3일 아침 6시 50분 경 더치 하버 소재 호텔 객실에서 정영준 사장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과로에 의한 심장마비가 원인일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부검 결과 사인은 어처구니 없게도 메틸알코올 중독이었다.[7] 평소 선원들은 술을 쉽게 구하지 못하여 대신 메틸알코올을 오렌지 주스 등에 섞어 마시면 몸에 해롭지 않다는
정영준 사장의 시신은 서울로 운구되어 10월 9일 수산인장이 엄수되었고 정부는 그에게 산업훈장을 추서하였다.
3. 사건 이후[편집]
선장과 선원, 사장까지 한꺼번에 잃는 횡액을 당한 삼양수산은 상황을 수습한 뒤 이듬해인 1968년 4월 25일 모선 한 척과 어선 6척으로 선단을 구성해 3차 출어에 나섰는데 목표는 채산성이 좋은 청어였지만 청어는 거의 잡지 못하고 명태 등 당시로서는 값싼 어종 796톤만 잡는 데 그쳤다. 당초 삼양수산은 청어 2,700톤이란 어획고를 목표로 잡았지만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삼양수산은 연이은 출어 실패로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1969년 한국수산개발공사에 매각당하는 비운을 맛보았다.
4. 평가[편집]
당시로선 거액인 약 3억 7천만원이란 정부 지원금까지 받아놓고 북태평양에 진출한 삼양수산이었지만 주먹구구식 조업 계획에 심지어 연어나 송어 등 어종별 조업 시즌[8] 도 미리 파악하지 않고 출어했다가 형편없는 어획량만 거두어들인 데다 알래스카 앞바다의 변화무쌍한 날씨까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조업에 나섰다가 막대한 인명피해만 일으키면서
한편으로 그때까지 남태평양에 집중되어 있던 한국의 원양어업은 비록 큰 피해는 있었을지언정 삼양수산이 토대를 닦아 놓았기 때문에 북태평양까지 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기는 하다.
5. 둘러보기[편집]
6. 출처[편집]
- 동아일보 1967년 9월 16일 자 "북양어선 두 척 조난"
- 조선일보 1967년 9월 21일 자 "전원사망 보고, 북양어선단 구조작업 중단"
- 동아일보 1967년 10월 3일 자 "삼양수산 정사장 변사"
- 동아일보 1967년 10월 6일 자 "메틸알콜의 과음"
- 부산일보 [기억해야 할 역사, 원양어업 60년] 1부 흔적찾기 12. 북양 개척 선두주자 '삼양수산'
- 현대해양 <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⑧
[1] 모선 1척, 자선 7척.[2] 최초의 원양어선 침몰 사고는 1963년 12월 30일 참치잡이 어선인 제2지남호가 사모아 동북방 300마일 해상에서 돌풍에 휘말려 가라앉은 사건으로, 선장을 포함해 21명의 선원이 실종되었다.[3] 남태평양 참치 원양어업은 한국 최초로 원양어업에 뛰어든 제동산업과 후발주자였지만 5.16 군사정변을 지원한 것으로 유명한 광명인쇄소의 이학수 사장이 창업한 고려원양어업 등이 주도하였으며 당시 고려원양은 나중에 동원산업을 창업하는 김재철이 선장이자 수산부장으로 선단을 이끌고 있었다.[4] 이 당시 북태평양 어장을 둘러싸고 4대 연안국, 즉 미국, 일본, 캐나다, 소련은 각종 어업협정을 통해 이 4개국 이외의 국가에 대한 북태평양 진출을 철저히 견제하고 있었다. 공해상의 연어와 청어 등의 자원보호라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4개 국가가 북태평양의 조업권을 배타적으로 나눠 먹겠다는 심산이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삼양수산은 과감하게 북태평양 진출을 시도했다.[5] 사고 소식을 접한 한국 수산청이 침몰 경위를 조사코자 어업담당관을 일본으로 보냈는데 현지 기상청 직원이 사고 당시의 기상 기록을 보고 "세상에! 이런 상황에서 조업을 했단 말인가?!" 라며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당시 상황은 태풍 25호, 중심기압 964헥토파스칼, 풍속 25m/s, 파고 25미터였고 더 경악스러운 것은 바로 인근에 후속 태풍 26호가 불과 수백 마일 거리로 접근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직원은 "그런데도 8척 중 2척만 화를 당했다니 이건 오히려 기적이다"라며 고개를 저었고 수산청 어업담당관은 창피함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고 한다.[6] 선장 2명, 선원 25명, 부산수산대 실습생 2명.[7] 이때 선단 소속의 선의(船醫) 조수도 메틸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 후송되었다.[8] 연어의 경우 1년에 30일 전후만 조업이 가능하여 당시 소련 선단은 이 때에 맞춰 집중적으로 조업 계획을 세우거나 연어 외에 가자미, 청어, 대구 등을 함께 잡아들이는 어종 다변화로 채산성을 맞추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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