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양조 여고생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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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의 전말
3. 재판
4. 기타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

1978년 4월 8일에 백화양조의 계열사 사장의 아들인 강 모군(당시 18세)[1]이 김 모양(당시 18세)을 백화양조 실험실에서 살해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회사의 이미지가 상당히 추락했다.


2. 사건의 전말[편집]


강 군은 김 양과 사귀는 사이였다. 4월 3일에는 김 양이 어머니에게 "부잣집 아들과 가까워져서 이제 나도 잘 살 수 있게 됐다." 고 말했고 사건이 발생하기 전날인 4월 7일에는 강 군이 김 양의 집에 전화해 다음 날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러다가 4월 8일에 강 군이 김 양을 그녀의 집 앞에서 만나 백화양조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경비원이 없는 틈을 타 실험실로 들어가 김 양의 남자 관계에 대해서 추궁하다가 김 양이 "나는 너 외에는 사귀는 남자가 없다." 고 말하면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옷을 모두 벗은 후 경련을 일으키며 실신하자 술통에 빠트려 익사시켜 버렸다.

3. 재판[편집]


4월 26일에 강 군이 살인 및 시체 유기 혐의로 구속되었다. 8월 26일에 전주지방검찰청 군산지청의 이명재 검사가 강 군에게 단기 5년, 장기 10년의 징역을 구형했다.# 10월 14일에는 선고공판(재판장 서철모 지원장)에서 살인죄와 주거침입죄가 적용되어 단기 2년 6개월, 장기 3년의 징역이 선고되었다.#

이후 강 군은 1981년에 만기 출소하였고 근황조차 알려지지 않아 개명후 신분을 세탁한 것으로 보인다.

4. 기타[편집]



  •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거짓말탐지기를 도입한 수사 기법을 사용한 사건이다. 다만 당시에는 실용화 단계에 있었으며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2년 후 일어난 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부터다.

  •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사건으로 인해 백화양조의 이미지가 상당히 추락했다. 이 회사에서 판매된 소주인 '백화소주'는 시체가 들어간 상태로 출시되었고 당시 주간경향에서 심층보도를 하고 백화양조 측에서 재판매했다는 내용을 번복하는 등 기사 내용을 두고 주간경향과 백화양조 간의 신경전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 백화양조는 이 사건으로 위기에 빠졌지만 이 사건과는 상관없이 양주 부문에서 강세를 보였는데 당시 판매되었던 브랜드는 '조지 드레이크', '베리나인', '알렉산더', '삼바25' 등이 있었으며 1982년에 회사명도 베리나인으로 독립하였다. 다만 당시 양주에 집중하면서 소주 쪽 설비를 줄이고 소홀히 했는데 이후 소주의 인기가 상승하면서 회사가 기울었고 두산그룹이 인수하게 되었다.

  • 해당 사건이 일어났던 공장은 사건 이후에는 롯데칠성음료의 공장으로 존재하고 있다.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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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1년생. 2023년 기준 61세로, 경영자라면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