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양조 여고생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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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
1978년 4월 8일 백화양조의 계열사 사장의 아들인 강 모군(당시 18세)[1]
1961년생. 2023년 기준 61세로, 경영자라면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다.
2. 사건의 전말[편집]
강 군은 김 양과 사귀는 사이였다. 김 양은 예쁜 외모로 유명했으며 4월 3일에는 어머니에게 "부잣집 아들과 가까워져서 이제 나도 잘 살 수 있게 됐다."고 말했고 사건이 발생하기 전날인 4월 7일에는 강 군이 김 양의 집에 전화해 다음 날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러다가 4월 8일에 강 군이 김 양을 그녀의 집 앞에서 만나 백화양조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경비원이 없는 틈을 타 실험실로 들어가 김 양의 남자 관계에 대해서 추궁하다가 김 양이 "나는 너 외에는 사귀는 남자가 없다."고 말하면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옷을 모두 벗은 후 경련을 일으키면서 실신하자 술통에 빠트려 익사시켜 버렸다.
3. 재판[편집]
4월 26일에 강 군은 살인 및 시체 유기 혐의로 구속되었다. 8월 26일에 전주지방검찰청 군산지청의 이명재 검사가 강 군에게 단기 5년, 장기 10년의 징역을 구형했다.# 10월 14일에는 선고공판[2]
재판장 서철모(1926~)#지원장
강 군은 1981년에 만기 출소하였고 근황조차 알려지지 않아 개명한 후 신분을 세탁해 경영자로 왕성히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4. 기타[편집]
- 양조장 발효통 안에 빠진 사람이라는 도시전설과 유사한 사건이다.
-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거짓말탐지기를 도입한 수사 기법을 사용한 사건이지만 당시에는 실용화 단계에 있었으며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2년 후 일어난 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부터다.
-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사건으로 인해 백화양조의 이미지가 상당히 추락했다. 이 회사에서 판매된 소주인 '백화소주'는 시체가 들어간 상태로 출시되었고 당시 주간경향에서 심층보도를 하고 백화양조 측에서 재판매했다는 내용을 번복하는 등 기사 내용을 두고 주간경향과 백화양조 간의 신경전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소주 부문은 이듬해 보배에 인수되었다.[3]다만 소주 부문을 인수했던 보배도 1997년에 조선맥주(현 하이트진로)에 인수되었고 2013년에 그 회사에 합병되었다.
- 백화양조는 이 사건으로 위기에 빠졌지만 이 사건과는 상관없이 양주 부문에서 강세를 보였는데 당시 판매되었던 브랜드는 '조지 드레이크', '베리나인', '알렉산더', '삼바25' 등이 있었으며 1982년에 회사명도 베리나인으로 바꿨다. 다만 당시 양주에 집중하면서 소주 쪽 설비를 줄이고 소홀히 했는데 이후 소주의 인기가 상승하면서 회사가 기울었고 1985년에 두산그룹이 인수했다가 2008년에 두산이 주류 사업을 롯데에 매각해 지금은 롯데주류 산하에 있다. 백화양조의 간판 브랜드였던 청주 '백화수복'은 브랜드명 교체 없이 지금까지 같은 이름으로 생산되고 있다.
- 이 사건이 일어났던 백화양조 공장은 군산시 월명동에 있었는데 사건 이후에는 그 자리에 현대오솔 아파트가 들어섰다. 원 부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군산일반산업단지에 롯데칠성음료의 공장이 있어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백화수복은 여전히 롯데주류 군산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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