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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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0년 11월 13일, 당시 서울특별시 마포구 경서중학교[1] 1학년이었던 이윤상(사망 당시 13세)[2] 이 유괴되어 다음날 살해당한 사건. 그러나 돈을 뜯어내기 위한 협박은 이윤상이 살해된 뒤에도 그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미리 만든 녹음을 동원해 계속되었다. 당시 범인이 체포되기 전까지는 이윤상의 행방은 알 수 없었고, 따라서 일단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건으로부터 1년이 지난 1981년 11월 30일에 범인이 체포되었다. 범인은 다름 아닌 피해자가 다니던 학교의 체육교사였던 주영형[3] 이었다. 사건 초기에 주씨는 이윤상의 부모에게 “제가 괜히 윤상이와 면담을 하겠다고 해서 윤상이가 유괴된 것 같아 송구합니다.”라며 엎드려 사죄했고, 부모도 전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젠틀한 이미지의 체육교사였고, 이윤상의 부모들도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건 초기에 경찰이 조사는 했지만 기본조사만 했다고 한다.
나중에 수개월이 지나서 다시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건 당일에 주영형이 재학 중이던 대학원에서 출석만 하고 금방 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주영형을 추궁하자, 과거에 재직했던 창덕여자중학교에서 만난 제자(미성년자)와 당일 성관계를 맺기 위해 대학원 수업을 빠지고 금방 나갔음을 자백하여 유괴까지 의심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불륜 관계에 있던 여고생 2명이 종범(從犯)이었다. 따라서 ‘주영형 사건’ 혹은 ‘주 교사 사건’으로도 불린다. 범인과 종범이었던 여고생들이 사제 간에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국의 중학교들이 단축수업을 할 만큼 큰 충격을 준 사건이다.
또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살려 보내면 너도 살고, 죽여 보내면 너도 죽는다.”는 유명한 말을 한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며, 결국 이 경고는 실행되었다. 그리고 거짓말탐지기를 범죄 수사에 활용한 첫 사례다.
2. 사건 발생[편집]
피해자 이윤상은 3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가 불편했고, 당시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 거주하며 경서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1980년 11월 13일 오후 4시경, 학교 체육교사인 주영형과 상담하러 간다며 외출한 뒤 실종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8시~12시 사이에 이윤상의 집에 범인으로부터 4차례의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 걸려온 전화는 남자 목소리였는데 “당신의 아들을 수원에 감금했다. 우리는 전과자들로 4명이다. 일본으로 밀항하려는데 돈이 필요하다. 현금 4천만 원[4] 을 준비하라. 경찰에 신고하면 당신 아들을 죽이겠다.”는 내용이었다.
뒤이어 밤 11시경에는 이윤상의 아버지에게 “나는 당신 때문에 망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윤상이는 수원에 감금되어있다. 현금 4천만 원을 준비하라.”는 전화가 걸려왔고 이에 이윤상의 아버지는 “불경기[* 1979년에서 1980년 당시는 석유 파동 - 부마민주항쟁 - 10.26 사건 - 서울의 봄 - 12.12 군사반란 - 5.17 내란 -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사회의 혼란이 극심했다. 그로 인해 물가상승률 또한 무려 28.7%에 달했고,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40.3%), 아르헨티나(55.6%)에 비견될 정도였다. 3저 호황은 이보다 조금 뒤의 일이다.]에 4천만 원은 준비할 수 없고 2천만 원은 준비할 수 있다.”고 답했는데, 그러자 “내일 12시에 전화하겠으니 그때 시키는 대로 하라.”고 협박하였다.
3. 사건 경과[편집]
다음 날인 11월 14일, 이윤상의 아버지가 경찰에 유괴 사실을 신고하였다. 서울마포경찰서는 신고 접수 직후 이윤상의 집 전화에 녹음장치를 부착하고, 형사 2명을 잠복시켜 전화를 감청케 하였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윤상 군은 유괴 다음날인 이날 이미 살해당했다고 한다.
16일 오후 6시 40분경, 범인들이 이윤상의 미리 녹음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이윤상은 “이분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나는 죽어요.”라고 말했다. 또 17일에는 수원 우체국 발인으로 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편지의 내용은 “딸을 시켜 20일 저녁 7시에 종로2가에 있는 제과점 고려당으로[5] 돈가방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약속된 날 이윤상의 누나가 약속 장소로 나갔는데, 제과점에 한 젊은 여성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종로에서 나와 남산 야외음악당으로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이윤상의 아버지가 “길을 잘 모른다”고 하자 “다음에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는 끊겼다. 범인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 후 범인들은 또 “윤상이가 책을 보고 싶어한다. 윤상이가 읽고 싶어하는 책을 검은 보자기에 싸서 마포우체국 공중전화 부스에 갖다 놓으라”고 전했다. “1981년 1월 15일 오후 4시 반에서 5시 사이에 검은 승용차에 윤상이를 태우고 마포우체국 앞을 통과할 테니 얼굴만 보라”는 내용의 편지도 보냈다. 그러나 모두 거짓말이었다. 마지막에는 피해자 부모에게 “죄송하다”는 내용이 담긴 사과의 편지까지 쓸 정도로 대담했다.
범인들은 5번째 편지(2월 2일)에서 “이윤상이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아직 살아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요약하면 “차를 후진하다가 윤상이를 치어서 친척 의사의 도움으로 치료하고 있다. 사고를 은폐할 시간을 벌기 위해 유괴극을 벌이고 있다. 나는 이제 사회적으로 내 신분이 노출돼 매장되느냐 하는 때늦은 내 양심과의 싸움에 처해 있다, 상태가 좋아지는 대로 곧 돌려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4월 6일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다. 이때까지 6차례의 협박 편지와 62회의 협박 전화가 왔다. 첫 번째를 제외하면 협박 전화는 모두 여자 목소리였으며, 편지의 필적은 1, 2, 5번째 편지는 또박또박 쓴 여자 필적이었으나 3~4번째는 거친 남자의 필적임으로 볼 때, 경찰에서는 여자가 낀 3~4인조의 계획적 범행으로 추정했다.
범인들의 연락이 끊기면서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져 버리자, 어머니는 “교통사고라도 상관없으니 목숨만 살려서 돌려보내 주세요. 2대 독자 내 아들을…”이라며 울부짖었고, 아버지는 오죽했으면 범인에게 “아들을 살려만 주면 의형제를 맺겠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 어머니는 생선구이를 누구를 위해 굽겠는가?”라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결말은 결국 비극이었다.
4. 공개수사[편집]
처음에는 경찰에 신고한 것을 범인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수사를 비공개로 진행하였으나, 협박이 장기화되면서 1981년 2월 26일 경찰은 이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하였다. 범인에게는 1,000만원의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다. 공개수사 전환 이후,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으며 특히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2월 27일 특별 대국민담화를 열어 "정부는 모든 수사기관을 동원하여 이른시일안에 윤상군이 부모님 품안에 돌아가게 되도록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라. 오는 3월 3일 대통령 취임식때까지 범인이 이군을 돌려보내면 이번만은 그 죄과에 대해 관대한 조치를 취하도록 약속하겠다. 유괴사건이 다시 일어나 마음이 아프다.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이군의 부모형제가 된 마음으로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이군이 무사히 귀가하도록 힘써주기 바란다. 앞으로 이런 유괴사건이 재발할 경우 법이 정하는 최고의 형으로 범인을 엄벌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하겠다."라고 말했고[6] , 3월 11일에는 수사본부를 방문해 수사요원들을 격려하고, 이윤상군의 집을 방문해 가족들을 위로하는 등 이 사건에 관심을 표했다.
그렇게 대통령이 직접 제5공화국 출범일[7] 까지 자수할 경우, 최대한 선처하겠다고까지 했으나, 끝내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8] 사건이 장기화되자 경찰에서는 최면술사까지 동원하기도 했다.
일부 우익성향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미제 사건을 시원하게 해결한 전두환의 활극처럼 묘사되기도 하는데#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수사 과정에서 애먼 사람만 잡아들여 고문하는 권위주의 정부의 병크만 여실히 드러났다. 이윤상 군의 옆집에 살던 정육점 주인 이상출 씨를 경찰들이 고문하여 ‘이윤상을 가축 도살용 트럭으로 납치하여 살해했다’는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이씨는 당시 극한의 고문 후유증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이후에도 밤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2022년에 전해졌다. # 24년 2월 21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찰이 구속영장 발부 등 법적 근거 없이 이씨를 불법 구금하고 가혹행위를 한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경찰의 별건 구속·수사 또한 헌법상 적법절차의 원칙을 명백히 위배한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진실화해위는 이씨에 대한 사과와 명예·피해 회복 조처를 경찰청에 권고했다.#
주영형이 검거된 것은 전두환의 담화로부터도 9개월 이상 경과한 1981년 11월 27일이었다. 이후 전두환이 직권으로 형법을 개정하여 주영형을 속전속결로 처형했다는 이야기도 나돌지만, 이 또한 거짓이다. 아무리 권위주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대통령이 직권으로 형법을 개정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고[9] , 주영형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것은 1983년 7월 9일로, 대법원 상고기각으로 형이 확정된지 7개월여 만이다. 나아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나도는 전두환의 활극은, 전두환이 이윤상 군의 누나 대학등록금을 자신의 월급으로 내줬다는 훈훈한(?) 미담으로 마무리되지만, 당시의 언론보도에서 이러한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10]
5. 범인들의 체포와 사건의 진상[편집]
주범 주영형(가운데)과 공범 여고생 2명(양 옆)의 사진.[11]
본 사건의 범인인 주영형(朱永炯)은 1953년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ROTC 출신(학군 14기)[12] 의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보병 중위[13]#였던 데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대단한 엘리트였다. 차분한 인상과 호감형 외모를 가졌고, 유부남에 아이가 2명이 있었다. 이런 배경과 당시의 강력했던 교권을 이용하여, 확인된 바로만 주영형에게 성폭행당한 여학생이 22명에 달했다고 한다.# 경찰이 수사 초반 그에게 의심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용의선상에서 제외한 것은, 그의 교사라는 신분뿐만 아니라 학벌과 외모에 현혹당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당초 경찰은 이윤상을 사건 당일 불러낸 주영형에게 당연히 혐의를 두었으나, 흉악범죄에 익숙하지 않았던 당시 사회 분위기상 학교 선생님이 그런 악질 범죄를 벌일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던 데다, 대학원까지 나온 고학력자인 그가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 리가 만무하다고 가정했다. 또한 주영형은 사전에 치밀한 범행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경찰은 그가 제시한 알리바이를 믿게 되었다. 여기에 주 씨는 뉴스 인터뷰에도 응하고 가족들을 위로하며 직접 수사본부에 찾아가기도 했다.
영구미제로 끝날 위기에 놓였던 사건은, 1981년 11월 주영형이 여자중학교 재직 시절 교외지도를 빌미삼아 여학생 22명을 성폭행한 사실을 경찰이 밝혀내면서 수사가 활기를 띠었다. 또 사건 당일 이윤상이 “선생님이 어머니에게는 얘기하지 말고 나오라고 했다.”고 말했다는 모친의 진술이 실마리가 되었다. 한편 주영형을 거짓말탐지기로 조사한 결과,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반응이 나왔다.[14] 마침내 11월 29일 경찰은 주영형의 자백을 받아냈다.
범행 동기는 여느 유괴가 그렇듯 지극히 1차원적인 목적인 금전이었다. 주영형은 대학 동기와 재미삼아 시작했던 도박으로 빚 1천만 원을 졌다. 이 돈은 21세기에도 죽어라 일하고 생활비를 아껴야 겨우 모이는 돈이지만, 당시는 서울 평균 아파트 1.5~2채 가격의 거액이었다. 당시는 은마아파트의 분양가와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이 2,000만 원이던 시절이었고[15] , 승용차인 현대 포니 가격이 300만 원 정도 되었다.[16] 2021년 기준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48,890,000원이다.
빚 독촉을 받게 되자, 주영형은 학생들의 가정환경조사서를 통해 비교적 유복한 집안의 자녀를 물색한다. 그의 표적이 된 아이는 이윤상이었고, 주씨는 아이를 유괴하여 금품을 뜯어내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주 씨는 자신이 과거 여자중학교 재직 시절부터 불륜 관계에 있었던 당시 고1이었던 이숙경 양과 고2였던 고진미 양을 가담시켰다. 참고로 주영형은 여중에서 제자들을 약취 유인하여 성폭행하다가 발각되었으나 “나를 연모하는 학생들의 치기 어린 거짓말”이라며 무마한 뒤 경서중학교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처음에는 여자아이가 훨씬 더 몸값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해 이윤상의 누나 이연수를 유괴하려고 했다. 이연수가 다니던 여중 교문 앞에 차를 대기시킨 뒤 유인하여 유괴하려고 했고, 이 양을 통해 이연수에게 접근하였다. 그러나 밖으로 유인하려는 것을 수상히 여긴 이연수가 거절하여 실패, 대신 이윤상을 유괴한 것이었다.
진술한 바에 따르면, 주영형은 이윤상을 택시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유괴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월 14일 오후 6시경, 범행 아지트인 영등포구의 모 아파트에서 이윤상이 “누나를 유괴하려 한 것도 선생님이에요?”라며 고함치자, 명주실 노끈으로 이윤상의 손발을 결박하고 반창고로 입을 틀어막은 뒤 이불을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곧바로 아파트를 빠져나왔다가 다음 날 아침에 확인해 보니 이윤상은 그동안 이미 질식사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법원에서 인정한 사실에 따르면, 15일 아침 7시 30분까지 이윤상 군은 살아 있었다. 이때 주영형은 이 군을 병원으로 옮기고 자수할지, 그대로 두어 이 군이 죽으면 시체를 처리하고 범행을 계속할지 등을 고민하다가 그대로 학교에 가 버렸고, 결국 당일 오후 2시경 주영형이 돌아왔을 때는 이 군은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재판에서 주영형의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어 부작위에 의한 살인으로 인정되었다.
11월 30일경, 주영형은 이숙경 양의 협조를 얻어서 시체를 커다란 여행용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을 PVC 물통에 옮기고 번호 미상의 용달 트럭을 부른 뒤,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17] 대성1리 북한강변에 암매장했다. 발견되었을 때는 사망으로부터 1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피해자의 시신은 이미 백골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진술하는 과정에서 주영형은 자신이 이윤상을 직접 교살했다고 자백했지만, 곧 번복했다. 그는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이었다”라고 주장했으나, 죽이기 전에 협박에 이용할 목소리 등을 녹음하는 등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고, 알리바이 또한 만들어 놓았던 계획범이다. 애당초 비닐봉투 등 살해 목적의 도구가 준비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납치범이 면식범인 경우 자신의 범죄 은폐를 위해 피해자를 죽이는 일이 일반적이다. 어쨌거나 이후 진술한 자백에서도 살인 혐의는 인정되었다.
공범인 이숙경 양[18] 은 주영형의 요구에 따라 협박전화와 협박편지, 금품요구, 사체유기에 협조했다. 협박편지에서 지문이 나와서, 경찰들은 일일이 수작업으로[19] 무려 2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과 지문 대조를 했으나 찾지 못했다. 지문의 주인인 이숙경 양이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이다. 이 양은 당초 4월 5일 협박편지를 부친 뒤 신고하려 했으나, 주영형과의 관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해 결국 하지 못했다. 또 다른 공범인 고진미 양[20] 은 가짜 제보 편지 작성에 가담하였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주영형은 “경찰의 수사가 너무 괴로워 자살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써 수사에 혼선을 주었다. 아울러 범행에 가담한 이숙경 양과 고진미 양과의 동반자살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숙경 양에겐 가장 먼저 자살하라고 꼬드겨 증거를 없애려 시도한 것으로도 드러났다. 이숙경 양은 수면제 40알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또한 고진미 양에게도 청산가리를 쥐어주면서 “나를 사랑하면 나를 위해 죽어라.”라고 자살을 종용했다. 고 양은 정말로 죽기 위해 자살할 날짜를 잡아 놓고 기다렸지만, 그 날짜가 되기 전 같은 해 11월 30일에 전부 검거되면서 실행하지 못했다.
6. 재판[편집]
-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은 “주영형이 살인의 고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감금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사망한 것, 즉 유괴살인이 아닌 감금치사”라고 주장하였다. 검사가 기소한 죄목인 당시 특가법 제5조의2 제2항 제2호[21] 에서는 약취 또는 유인한 미성년자를 살해한 때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도록 정하고 있었던 반면, 당시 형법상 감금치사상은 상해죄와 비교하여 중한 형으로 처단하도록 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금치사로 인정되면 적어도 사형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22] 그래서 주영형의 행위를 감금치사로 볼지, 유괴살인으로 볼지가 쟁점이 되었으나, 1심 법원부터 대법원까지 모든 법원에서 유괴살인으로 인정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14년 후인 1995년 강태민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전용재가 비슷한 주장을 해 극형을 면하려 했으나, 주영형 사건의 판례 덕에 전용재도 살인죄가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23]
가. 피고인이 미성년자를 유인하여 포박 감금한 후 단지 그 상태를 유지하였을 뿐인데도 피감금자가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라면 피고인의 죄책은 감금치 사죄에 해당한다 하겠으나, 나아가서 그 감금상태가 계속된 어느 시점에서 피고인에게 살해의 범의가 생계 피감금자에 대한 위험발생을 방지함이 없이 포박감금상태에 있던 피감금자를 그대로 방치함으로써 사망케 하였다면 피고인의 부작위는 살인죄의 구성요건적 행위를 충족하는 것이라고 평가하기에 충분하므로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구성한다.
나. 피해자를 아파트에 유인하여 양 손목과 발목을 노끈으로 묶고 입에 반창고를 두 겹으로 붙인 다음 양 손목을 묶은 노끈은 창틀에 박힌 시멘트 못에, 양 발목을 묶은 노끈은 방문손잡이에 각각 잡아매고 얼굴에 모포를 씌워 감금한 후 수차 아파트를 출입하다가 마지막 들어갔을 때 피해자가 이미 탈진 상태에 이르러 박카스를 마시지 못하고 그냥 흘려버릴 정도였고 피고인이 피해자의 얼굴에 모포를 덮어씌워 놓고 그냥 나오면서 피해자를 그대로 두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피고인이 위와 같은 결과발생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피해자를 병원에 옮기지 않고 사경에 이른 피해자를 그대로 방치한 소위는 피해자가 사망하는 결과에 이르더라도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내심의 의사 즉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 주범 주영형의 범행을 도왔던 공범 이숙경 양의 귀책범위를 보통 가담 이후 범행에 대해서만 공동정범을 인정했던 것과는 달리 당시 대법원이 범행 전체의 종범으로 판단하면서 “승계적 공동정범에서 후행자의 귀책범위”에 대한 주요 사례로써 자주 언급되는 판례다. 보통의 경우처럼 공동정범으로 처벌받았다면 “공갈미수죄의 공동정범”의 죄책을 지었겠지만 대법원이 공동정범이 아닌 종범으로 판단하면서, “특가법의 종범”으로 더 중한 형이 선고되었다.[24] 문제는 이숙경 양은 납치 행위에는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자신이 저지른 범행(죄책)에 대해서만 처벌받는다는 형법의 기본 원칙을 훼손했다는 비판도 많이 받는다.
다.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2 제2항 제1호 소정의 죄는 형법 제287조의 미성년자 약취·유인행위와 약취 또는 유인한 미성년자의 부모 기타 그 미성년자의 안전을 염려하는 자의 우려를 이용하여 재물이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이를 요구하는 행위가 결합된 단순일죄의 범죄라고 봄이 상당하므로 비록 타인이 미성년자를 약취·유인한 행위에는 가담한 바 없다 하더라도 사후에 그 사실을 알면서 약취·유인한 미성년자를 부모 기타 그 미성년자의 안전을 염려하는 자의 우려를 이용하여 재물이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요구하는 타인의 행위에 가담하여 이를 방조한 때에는 단순히 재물 등 요구행위의 종범이 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합범인 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2 제2항 제1호 위반죄의 종범에 해당한다.
7. 결말[편집]
재판 결과 주영형은 유괴 살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나머지 두 여학생에게는 협박편지 작성 가담 등의 범행 일부 동조 혐의만 적용되었다. 이후 주범 주영형은 1982년 2월 16일 1심 판결과[25] 동년 7월 9일 2심 판결에서도 사형이 선고됐다.
주영형의 사형은 사건 발생 후 2년 10일, 체포 후 358일 만인 1982년 11월 23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함에 따라 확정되었으며[26] , 2심 사형 선고일로부터 정확히 1년 뒤인 1983년 7월 9일 서울구치소 내 사형장[27] 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공범 이숙경 양에게는 1심에서는 징역 10년, 2심에서는 징역 단기 3년, 장기 5년이 선고되었고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또 다른 공범 고진미 양은 1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이후 항소를 포기하여 역시 형이 확정되었다. 그 후 이숙경 양은 1985년 12월 25일을 기해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으며 고진미 양은 1984년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당시에도 “아무리 미성년자라고 해도 유괴 행위 협조, 사체 유기, 협박, 경찰 수사 방해, 사실 은폐 등을 저질렀는데 너무 낮은 형량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고,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주영형의 최후 진술
두 여학생은 형량을 받아들였으나, 주영형은 사형을 면하려고 재심을 여러 번 청구했다. 당시 현장 형사반장의 증언에 의하면 현장 검증을 하러 갈 때 “형사님, 나 (출소해서) 88 올림픽은 볼 수 있을까요?”라는 어이없는 망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아이가 죽어 있었다”고 변명했고, 재판장에서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며 자신을 선처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기각되었다.
그나마 수감 중에는 종교에 귀의해서 변한 모습을 보였고,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도 했다. 1983년 부활절(4월 3일)에는 문장식 목사에게 세례도 받았으며, 세례식 중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동년 7월 9일을 기해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으며[28] 사형 집행 전 장기기증을 했는데, 눈과 콩팥을 기증했다. 그의 장기는 4명에게 기증되었다. 콩팥은 당시 46세 회사원과 30세 여성, 안구는 오른쪽 눈을 실명한 50대에게 이식되었다고. 콩팥 수혜자 중 전자의 아내는 기증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우리 가정의 은인인 셈이니 평생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겠다”고 말했으며, 이 사실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고 한다.
사건 이후 1991년 3월 경향신문 근황기사 등을 종합한 바에 의하면, 이윤상 군의 어머니 김해경 씨(1941년생)는 남편과 함께 1982년에 ‘윤상장학회’를 만들어 지체장애 학생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한편, 수기집 <비정이어라>를 냈다. 그러다 췌장암에 걸려 투병하면서 1985년 2월 14일 천주교로 귀의했고, 3월 12일에 아들 곁으로 갔다. 향년 44세. 아버지 이정식 씨(1939년생)는 이듬해 재혼하여 1986년과 1988년에 두 아들[29] 을 얻었으나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윤상 군의 누나 이연수 씨[30] 는 중앙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수학과에 진학해 수학교사가 되었다.
한편 주영형의 부인[31] 은 사건이 터진 후 주영형과의 인연을 끊고 아들들을 주영형의 부모(자신의 시부모)에게 맡겨 둔 뒤 잠적했다. 주영형의 작은아들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고, 큰아들은 조부모 손에서 성장했다고 하는데 이후의 근황은 알려진 바가 없다.
8. ROTC 인맥?[편집]
주영형은 ROTC 출신이었고, 그의 ROTC 선배 중 하나가 현역 군인으로 남아 있었다. 때문에 그가 후배인 주영형을 위해 전두환에게 힘을 써 줄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으나, 정작 당사자는 “영형이가 정치범이라면 모르겠는데 형사범, 그것도 유괴살인범인데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는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들킨 정도나 사람을 때린 잡범 정도야 얼마든지 도와주겠지만, 유괴살인은 도와준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도움을 거절했고, 그렇게 주영형의 사형은 집행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전두환 본인이 대놓고 공개 석상에서 “범인이 윤상 군을 죽이면 범인을 죽여 버리겠다”고 공개 선언했으니, 전두환 친척이어도 죽을 판국인데, 대단한 연줄도 아니고 고작 ROTC 연줄 하나 가지고 쉴드칠 수 있는 상황이 도저히 안 됐다.
게다가 전두환이 어떤 인물인지 생각해보면 ROTC 인맥은 너무도 초라해진다.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 11기를 필두로 하나회를 조직하여 군사반란 끝에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다. 이 시절에는 하나회 출신 군인들이 내각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수장이 바로 전두환이다. 전두환이 분노한 와중에 ROTC 장교가 찾아와서 “저 누구누구 선배 아무개인데 좋게 좋게 넘어가 주십사”하며 찾아 와 봤자 씨알도 안 먹히고 쫒겨나기만 할 것이다.
9. 주영형의 외모와 성격[편집]
주영형의 친구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주영형은 키 178cm, 몸무게 78kg의 체격으로 당대에는 상당히 단정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구속 직후 사진을 보면 30살도 안 된 나이에도 탈모 초기가 확인되는 머리와 면도하지 않은 얼굴의 수염 등 지저분한 인상 때문에, 그리 빼어나 보이지 않는다. 1년간 용의선상에 오르면서 1980년대 특성상, 또한 ‘전두환이 직접 찍은 사건’이라는 더 특수한 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직간접적 고문도 많이 당했을 테고, 결국 체포 및 구속과 취조라는 게 사람을 피곤하고 초췌하게 만드는 상황이다.[32] 그런 상태에서 찍힌 사진이니 초췌해졌을 것이다. 즉 면도도 못한 데다, 상황 상 영상을 촬영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표정이 찌그러지고 안색도 나빠질 일들은 꽤 많이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980년대에 28세 정도면, 오늘날로 치면 40살 정도로 보이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참고로 키는 21세기 20살(1982년생 이후)로 치면 180cm가 넘는 정도다.
주영형은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해서 필기시험과 체력검정, 면접, 신체검사까지 합격했지만 실제 입학은 하지 않았다. 당시 육사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을 정도의 학력과 대단한 신체조건이 갖춰진 극소수의 타고난 엘리트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ROTC 4학년 후보생 시절 주영형은, 후배들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ROTC는 1963년도 학군 1기 임관 이래 2010년 이전까지 똥군기의 대명사였으며, 1981년에 학사장교가 창설되었을 때 ROTC가 학사장교에게 저지른 구타 등 가혹행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안 그래도 살벌한 ROTC에서조차 공포의 대상이었으면, 이 인간의 성격은 안 봐도 비디오인 셈이다. 이후 제대하고 체육교사로 재직하면서도 그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이 근무했던 중학교에서 평소 학생들을 엄격하게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보면, 본래부터 제 밑의 사람들에게 알량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관련 기사
10. 주영형의 최후[편집]
사형수 교화위원이자 사형집행 참관 종교위원인 문장식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사형장에 들어오던 순간 주영형은 다소 창백해 보였으나 죽음을 초월한 듯 여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한다. 사형수로 보이지 않고, 마지막까지 평안하고 밝은 인상을 안겨준 모범수처럼 보였다고. 유언을 남길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실수로 주사위를 한 번 잘못 던졌을 때, 그때 끝냈어야 할 것을 잘못을 숨기기 위해 계속 던지다 보니 이렇게 큰 죄를 범하게 되었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또한 부모님께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저에게 2명의 자녀가 있는데 끝까지 믿음으로 자라게 길러 주었으면 합니다.
이 장면을 직접 본 문장식 목사는 “그는 철저하게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 자세였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어떻게 지식인이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안 잡힐 줄 알았을까? 최후의 순간에도 자기 자식을 걱정할 정도로 자기 자식 귀중한 줄 알면서, 왜 남의 자식이 중한 줄을 몰랐는가. 아!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순간의 잘못된 생각이 이렇게 인생을 망치는구나 싶었다.”고도 평했다.
주영형이 유언을 남긴 후, 문장식 목사가 종교의식을 집전했다. 먼저 요한복음 14장 1~3절을 읽어주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런 다음 설교에 이어 찬송가 460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를 부르고, 축도를 했다. 주영형은 “여러분, 주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하면서 마지막까지 전도했고, 사형이 집행되었다. 목이 매달리고 떨어지는 순간 주영형이 생전 정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주여!”였다. (출처: <아! 죽었구나 아! 살았구나>)
11. 기타[편집]
- 한국에서 거짓말탐지기가 범죄 수사에 활용되기 시작한 계기가 된 사건들 중 하나다. 당시 검사를 맡았던 담당자에 따르면,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형사들도 확실하게 꼬리를 잡게 되자 거짓말탐지기를 신뢰하기 시작했다고. #
- 피해자와 동명이인이었던 가수 윤상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그로부터 10년 후 가수 데뷔를 할 때 자신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이 이 사건이 생각날까봐 성씨인 이를 빼고 ‘윤상’이라는 예명으로 데뷔했다고 밝혔다. 다만 윤상은 1968년생이며, 사건이 일어난 곳과는 달리 서대문구 출신이다. 그리고 ‘윤상’이라는 예명을 선택한 계기는 어머니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 범인이 학교 교사였던 관계로 교원의 윤리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크게 대두되었고, 다음해 대한교육연합회(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실추된 교권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교육자 스스로의 윤리적 자각을 바탕으로 한 교원윤리헌장을 제정하기로 했다. 이에 수정과 논의를 거쳐 가며 교원윤리헌장을 완성했고, 그것이 현재의 사도헌장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 피해자 이윤상 군은 장애인이었지만 뛰어난 우등생이라 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당시 학교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이윤상 군은 장애로 다리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체육시간에 절대 빠지지 않고 수업에 참여했으며, 심지어 단체기합을 받을 때도 다른 비장애 학생들과 똑같이 받았다고 한다.
- 이계진 저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에 따르면, 당시 아나운서들은 속보로 이 사건 소식을 전할 때를 대비해 여러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모든 상황을 미리 준비했다고 한다. 결국 결과는 피해자가 이미 살해됐다는 최악의 경우였지만.
- 경찰은 이 사건 수사 도중에 엉뚱한 사람을 용의자로 지목해서 허위 자백을 받아내려고 고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