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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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全斗煥 | Chun Doo-hwan


파일:전두환전대통령.jpg

출생
1931년 1월 18일[1]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現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2길 14)[2]
사망
2021년 11월 23일 (향년 90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사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27나길 11-14[3]
묘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임시안치)[4]
재임기간
제11대 대통령
1980년 8월 27일 ~ 1981년 2월 24일
제12대 대통령
1981년 2월 25일 ~ 1987년 6월 28일
서명
파일:전두환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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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완산 전씨[1]
등록기준지
경상도 초계군 갑산면 안천동
(現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부모
아버지 전상우, 어머니 김점문
형제자매
전열환, 전규곤, 전기환
누나 전홍렬, 전명렬, 전선학
남동생 전석환, 전경환
여동생 전학렬, 전점학
배우자
이순자
자녀
아들 전재국, 전재용, 전재만
전효선
학력
삼신국민우급학교 (전학)[* 만주국 반석현 호란진에 있었던 학교로 1944년 가족들이 대구로 돌아오면서 희도소학교로 전학하였다. # [[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contentsId=GC05305047&localCode=krcn&nodeId=G3%2F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73640|#]]]
희도소학교[2] (졸업)
대구공립공업중학교[3] (졸업 / 24회)
육군대학 (졸업)
종교
천주교 (세례명: 베드로)불교[4][5]
신체
171cm, 66kg, O형
약칭
, DH

용성(勇星)

일해(日海)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11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5년 ~ 1980년
최종 계급
대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
제1공수특전여단
제1보병사단
국군보안사령관
병과
보병
참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파일:전두환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약력
7. 선거 이력
8. 소속 정당
9. 여담
10. 각종 타이틀
11. 어록
11.1. 제11대 대통령 취임사
11.2. 제12대 대통령 취임사
13. 대중매체에서
14. 관련 문서
15. 둘러보기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 취임 선서[5]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1, 12대 대통령.

2. 약력[편집]




3. 일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51년[10][11]육군사관학교에 11기[12][13]로 입교하였고, 1955년 육사 졸업과 동시에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1년 서울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육사 생도들을 동원하여 군부 지지 시가행진을 벌였고, 이 일로 인해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노태우 등 육사 동기들과 함께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군에서 승승장구하였다. 1979년 3월에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같은 해 10.26 사건이 터지자 계엄법에 의거하여 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수사본부장이라는 직책과 자신이 이끌고 있던 하나회를 통한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하였고, 이듬해 1980년엔 5.17 내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다. 이후 5.18 민주화운동유혈진압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함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치러진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올랐다.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통과시킨 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2대 대통령 선거(간접 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14] 임기 말이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더욱 거세졌고, 이를 불식시키고자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으나 오히려 역풍이 일어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 노태우6.29 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몰락하였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진행되었다.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에 의해 1995년 노태우와 함께 구속 기소되었으며, 이후 반란수괴죄살인, 뇌물수수 등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15][16] 하지만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 두 명에 대한 사면 여론이 생기면서 유력 후보 세 명(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모두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결국 대선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으로 인해 사면되었다.

쫓겨나다시피 퇴임한 후 상당 기간 동안 건강을 유지하였으나 2021년 8월 악성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았고,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0분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향년 9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17]

전두환의 사망을 끝으로 20세기에 집권한(임기 시작부터 퇴임까지)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몰락 후 생존한 기간은 34년 4개월 24일로 역대 대통령 중 최장 기록에 해당한다.[18]


3.1. 전두환 정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 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별명[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별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추징금 환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추징금 환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0
제11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무소속|
무소속
]]

2,524 (100%)
당선 (1위)
초선[간접선거]
1981
제12대 대통령 선거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4,745 (90.11%)
재선[간접선거]

역대 선거 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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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대, 12대 대통령 선거는 모두 간선제로 치러졌으므로 전두환은 윤보선, 최규하와 함께 국민의 직접선거 없이 대통령에 당선된 세 사람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갖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았을 때 전두환은 사실상 유일하게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하지 않고 대통령에 선출되어 임기를 마친 인물[19]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독재로 비판받는 이승만[20], 박정희 전 대통령[21]조차 국민의 직접선거로 치러진 대선에서 각각 2회, 3회 당선되었다는 것[22]과 대비되는 점이다.


8.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80 - 1981
정계 입문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981 - 1987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87 - 2021
백담사 은둔 시기에 탈당[23]
정계 은퇴
사망


9. 여담[편집]


파일:external/pds25.egloos.com/a0007296_52ab29e9174e8.jpg

  • 유명한 골초였다. 공식 석상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은 당시 사진이나 방송영상에서 꽤 많이 보여왔고, 심지어 본인의 퇴임식에서도 연단에서 줄담배를 피웠다. 당시 전매청(현 KT&G)에서 전두환이 피는 담배는 최고급 연초[24]만을 엄선해서 납품했다고 한다.[25] 청와대 정례회의 때 본인은 한두 가치 정도만 피우고 늘 놔두고 갔는데, 관료들이 서로 나눠 가지려 했었다고 한다. 1997년에 출소한 이후 나이도 많고 해서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었다.

  • 식성은 육회, 갈비찜, 수육, 편육육식을 즐기는 편이고, 도 매우 좋아한다고 알려졌다. 또한, 전반적으로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선호했다고 하며 중국 요리도 좋아한다.#[26] 건강이 빨리 망가지기 쉬운 식습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전두환은 구순이 넘은 2020년까지도 건강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친구인 노태우가 칠순이 갓 넘은 2002년부터 전립선암과 소뇌 위축증을 앓아 19년 넘게 투병하다 사망한 것과 후임자들인 김대중이명박이 당뇨병 및 고혈압으로 고생한 것과 비교된다.[27]

전두환은 육식주의자라서 비만에 각종 질병을 앓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28], 전두환은 그 어떠한 질병에도 시달린 적이 없으며, 비만은커녕 몸무게도 70kg대를 넘긴 적이 없고, 사망할 때까지 60kg대의 정상 체중을 유지했다.[29] 이는 전두환 본인이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인 것도 있고, 무엇보다 신체 활동을 많이 해야 되는 직업인 군인으로 25년 가까이 복무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 또한 전두환 본인이 매일 운동을 열심히 하는 스타일인만큼 건강 관리를 철저히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군시절 권력과 엄청난 인맥 아래 거침이 없었다. 대령 때 주요 지휘관 회의에 참모로서 참여하였는데 주요 장성들의 담화 발표 시 맨 앞줄에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상태로 듣는 등 당시 서슬퍼런 군부 사회에서도 아랑곳없이 행동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육사 11기생인데 그 위의 선배들은 전시 상황이라 약식으로 교육받았고, 자기 기수부터 정식 교육 과정을 이수하였으니 실질적인 육사 1기생은 자신들이다 하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육사 선배들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거기에다 군내에서 무시 못할 사조직의 수장으로 인망도 높았으니 상식의 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배들을 잡아먹을 수 있었다. 12·12 사건 주동자 가운데에는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도 전두환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장군으로 진급했을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친히 금일봉과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는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도 묘사한 바가 있다.

  • 대한민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대한민국이 설립한 교육기관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대통령이다. 이승만조선~대한제국 시절에,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는 모두 일제강점기 시절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미국 관료는 박정희 시기의 장군들 및 관료들이 미국에 대한 심한 열등감에 짓눌려 거의 말을 못하며 수줍어하는 분위기였는데, 전두환은 자신만만해한다며 다른 시대가 시작된 세대 교체가 진행되었다고 평가했다. 광복 이후 우리 손으로 설립된 교육기관에서 처음으로 교육받은 대통령은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한 박정희이다.

  • 전두환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축구선수로서 체육특기생이었으며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학창 시절엔 운동하는 건강한 소년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며, 여자 관계가 꽤 복잡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축구 외에 권투도 꽤 잘 했다고 한다. 때문에 박정희가 청와대에서 축구 경기 또는 권투 매치를 시청할 때 전두환을 불러 같이 보았다는데, 이는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그려지는 장면.[30] 축구와 권투를 잘 했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싸움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 전두환 정부 시절 외래어를 순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했는데, '골키퍼'는 끝내 바꾸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골키퍼'를 '문지기'로 쓰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전두환의 과거 경력이었던 육사 골키퍼가 육사 문지기가 되기 때문이다.

  • 공부는 잘 못했지만 리더십은 대단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31] 유학성처럼 계급이 높거나 노태우처럼 공부를 훨씬 더 잘 하는 사람들을 전두환이 손수 이끌었던 것을 보면... 떠벌이라고 할 정도로 말이 많았는데도 화술이 좋았다고 하며, 충고를 할 때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등 사람에게 다가가는 능력이 탁월했다는 증언이 많다. 또한 장인 이규동의 재력도 주변에 사람을 모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공부는 하위권을 멤돌았다고 하는데, 같이 일을 해본 샤람들의 증언으론 두뇌회전이 빠르고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은 뛰어났다고 한다.

  • 학창 시절의 전두환을 시기하는 학생이 대판 싸움을 걸어왔고 이 싸움에 승리한 덕에 학교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어찌됐든 입시에는 나름 노력한 덕분인지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갔는데, 사실 추가합격으로 들어갔다. 1차 합격자들이 육군사관학교 지원을 대거 포기하자[32] 보충 인원으로 들어갔는데 행운도 상당히 받쳐줬던 셈이다.[33]

  • 전두환이 박정희의 눈에 들어온 계기는 5.16 군사정변. 당시 전두환은 대위 계급으로 서울대학교 학군단 훈육장교였는데,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모교로 찾아가서 자신의 후배에 해당하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빼다가 예복을 입히고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벌였다.[34] 이후로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정계 진출을 권유받지만 전두환은 거절하고 군에 남는 쪽을 택했다. 이때 박정희는 차지철에게도 같은 권유를 했고, 차지철은 이에 응해 정계에 진출한다.

이것은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가른 선택이었다. 만약 차지철이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묵묵히 군인으로 남았으면 오히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지 못하고 대통령의 더 큰 신임을 받던 차지철이 일으켰을 수도 있다. 차지철은 정계에 진출하면서 박정희에게 엄청난 충성을 맹세했고 승승장구했으나, 그 원한의 결과는 차지철의 죽음이었다. 박정희, 차지철의 죽음과 김재규의 잘못된 육본행 판단으로 구속된 상황에서 그 누구도 수사권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을 막을 자가 없었다.[35][36]

  • 친구 노태우와 걸어온 인생(군인 → 대통령)이 거의 판박이다. 자세한 내용은 노태우 문서로...

  • 강력범죄에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직접 수사에 관여한 적도 있는데, 그것이 주영형 유괴 살인 사건이다. 1981년에 이윤상이라는 중학생이 모교 체육 교사인 주영형(30)에게 유괴당하자, 전두환이 직접 방송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기까지 했다. 81년도는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 선거로 집권한 후 민심 수습책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범인은 듣거라. 윤상이를 데리고 파출소로 와서 자수하면 최대한의 선처를 베풀겠다. 윤상이가 살면 네놈도 살 것이고, 윤상이가 죽으면 네놈도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이윤상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애초에 주영형은 이윤상을 납치하자마자 죽여버렸고, 사전에 녹음된 목소리를 들려주며 몸값을 요구했기에 전두환의 요구를 따를수가 없었던 것이다. 약속대로 전두환은 범인 주영형을 체포하자 직권으로 형법을 개정해버리고 주영형을 사형 판결 확정 후 단 열흘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주영형을 체포한 경찰관을 고속승진시킨 끝에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에 속하게 하였다. 이 사건이 해결된 후 전두환은 다시 방송에 출연해서 대국민선언을 했다.

국민 여러분, 아동유괴살인에 대해서는 앞으로 무조건 이렇게 조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저질렀던 잔혹하기 짝 없는 5.18 광주 사태 당시 유혈 진압, 박정희 유신 정권 시기인 1975년부터 운영되어 오던 형제 복지원 등을 생각하면 이는 내로남불이나 다름없다.

  • 전두환과 로널드 레이건미국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 당시, 전두환과의 4번째 만남이었음에도 레이건이 집권 말년 치매[37]로 인해 기억력이 떨어져 전두환에 대해 기억을 못 했다. 그러자 측근들이 전두환에 대해 설명했고, 처음에 알아듣지 못하다가 나중에 결국 알아들었는데 "아, '학생들은 전부 공산당'이라고 했던 그 친구"라며 기억해냈다고 한다. 한-미 정상회담 통역관이 말하는 '그때 그 대통령'

  • 레이건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전두환이 정말 부럽다"고 한 적이 있었다. 기자들이 그 이유를 묻자, "전두환은 국민들이 반대하면 어린 대학생이라도 자기 뜻대로 모조리 감옥에 처넣을 수 있는데, 미국은 그게 안 되지 않느냐"고 대답하여 기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 이규동 라인을 이용하려고, 이규동의 차녀 이순자와 결혼했다. 결혼한 이후에도 여자 관계가 정말 복잡했다는 등, 온갖 이야기가 다 있었다. '모 여배우가 전두환과 친밀한 관계를 맺자 이를 마음에 안들어하던 이순자가 드라마 촬영하고 있던 그녀를 납치해 자궁 적출수술을 받게 하고는[38], 알몸 상태로 5일 동안 남자 흉악범들이 들어가 있는 감방에 처넣었다'는 루머가 대표적이다.

  • 그와 8촌 이내의 친척 관계를 가진 사람 중 하나가 한화 이글스KIA 타이거즈에서 활동했었던 전직 야구선수인 전현태다. 명절에는 전두환의 연희동 자택에 세배하러 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선수가 활동했던 구단이 전두환에 대한 반감이 강한 호남 지역 팀이라는 것이다.

  • 국민들에게는 권위주의로 정치적 억압을 가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유머 감각과 재치, 언변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기사 전두환, 캐디에 1만원 주면서 '이제 전 재산은 26만원'이라 농담 등. 실제로 언론인 고종석은 이에 대해 '코믹함의 인두겁을 쓰고 있다'며 '내면의 잔인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타고난 복'이라고 디스하기도 했다.[39]

  • 전사모[40], 일베저장소 등의 극우 커뮤니티에서는 매우 좋아한다. 전두환 재임 시절이 경제 호황기였다면서 진정한 서민 대통령이라고 찬양한다. 엔두(엔젤두환), 전땅크, 프로야구의 아버지인 야버지라 부르면서 띄워준다. 이전에는 국내 야구 갤러리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진심으로 띄어주는건 아니고 반쯤 조롱조로 위의 별명을 부르는게 대다수이며 모두까기의 특성상 까이는 경우도 있다.

  • 사주와 현실의 불일치가 가장 심한 인물이다. 사주대로라면 대위로 제대한 후 구멍가게를 차려 운영하다가 1996년에 사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41]

  • 합성 갤러리에서 주로 "○○는 ○○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나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라는 대사가 합성 소스로 쓰이며 그의 전차와 함께 등장한다. 전차를 타고 나타나서 짜라빠빠를 진압하러 갔다가 패배하거나, 인간 관악기로 바뀌기도 하며 설날에 심영에게 세배를 받고 전차를 심영에게 주기도 한다. 그 덕분에 전차를 보면 전두환이 떠오르는 인터넷 밈이 생기기도. 보통 동시대의 M48을 타고 나왔지만 최근에는 장태완 장군과 겹쳐서인지 은근 K2 흑표 전차와 많이 얽히는 편이다. 그런데 흑표는 국방 정책으로 유명한 노무현이나 박근혜와 엮이기도 한다.

  •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가 워낙 심하게 되어 있고, 전두환의 악행이 널리 알려져 있는 탓에 박정희가 저지른 잘못도 전두환이 저지른 것처럼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 2010년 1월 SS501 멤버 김현중이 전두환 팔순잔치에 참석했다가 대중들에게 욕을 먹었다. 김현중 본인은 소속사인 DSP 이호연 사장 생일에 참석한 것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실제로 전두환과 이호연 사장 생일이 1월 18일로 같긴 하다. 이호연은 연예계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는데, 전두환과도 인연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42]

  • 1990년대 후반에 조훈현을 바둑으로 이긴 적이 있다. #

  • 전두환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주로 알려져 있는 꽉 막힌 이미지와 다르게 전두환 정권 때부터 사회의 자율화 및 다양한 문화컨텐츠가 성장했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시작된 것도 5공 시절이고 교복이 폐지되었으며,[43] 통금 해제에 현재의 포맷과 같은 가요 프로와 영화, 드라마, 예능 산업이 태동한 시기였다. 비록 국민들을 정치에서 관심을 떼고 우민화시키려는 의도라는 말이 많고, 검열을 다소 완화한 것과는 별개로 정치적인 검열은 몹시 엄격하기 짝이 없었기는 했지만. 자세한 것은 평가 문단으로...

  • 초대형 개신교회 중 하나인 김삼환 목사의 명성교회불자인 전두환을 초청한 적이 있다. 메인 예배인 3부 예배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맨 앞자리에 앉히고, 전두환이 왔다고 소개했다. 물론 1회성 방문으로, 김삼환 목사와의 개인적인 친분차 방문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정치인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자신이 믿는 종교와 다르거나 아예 무종교인인 사람조차도 교회성당, 을 방문하는 경우가 흔하디 흔하다.

  • 싸이월드가 한창 유행했을 때 전두환의 손녀 전수현[44]이 해외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을 사진첩에 올려 놓고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발전하려면 멀었다"라는 식의 글을 써서 구설수가 된 적이 있으며, 당시 네티즌들의 큰 공분을 샀다.

  •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중 장남인 전재국은 5공화국 시절부터 전두환의 참모 역할을 했으며 퇴임 이후에도 전두환 일가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전두환 퇴임 직후인 노태우 정권 시절부터 국내 네임드 출판사인 시공사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수완도 괜찮은 편인지 상속받은 재산 외에도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9년에 전두환 재산 환수조치 등의 이유로 시공사 지분은 전량 매각하였으나 과거 시공사 산하 계열사였던 여러 회사들의 지분을 상당부분 소유하고 있으며 시공사 매각 이후에는 '나르는 돼지'라는 무한리필 삼겹살 프렌차이즈를 런칭하기도 했다.[45]

  • 출판사인 시공사와 대형 서점인 리브로의 실질적인 소유주였었다. 1989년에 자신의 비자금을 털어서 아들인 전재국에게 출판사를 세워주는데, 이 회사가 바로 시공사이다. 지금은 전재국이 시공사를 매각해 전씨 일가와는 관계가 없다.

  • 전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대머리라 그런지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대머리'가 금지어였다. 아내인 이순자주걱턱이었기에 '주걱턱'도 금지어였다. 그래서 유머 1번지일요일밤의 대행진, 웃으면 복이 와요 같은 당대의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끝날 때까지 대머리와 주걱턱을 개그 소재로 삼는 것이 암묵적으로 금지되었으며, 당시 방송사 PD들이 대본에 혹시 대머리나 주걱턱 같은 개그나 정치 풍자 유머가 들어가서 전두환이나 이순자 그 외 방송사 임원진들을 자극하는 장면이 있을까봐 미리 대본을 검열했다.[46] 아기공룡 둘리로 유명한 김수정이나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김성환도 대머리를 그렸다는 이유로 만화연재가 짤리는 곤욕을 당해야 했다. 그나마 고바우 영감은 위낙 네임드급 만화였기 때문에 얼마 못가서 연재가 재개되었지만, 김수정의 만화는 그대로 연재가 짤리고 다른 작품을 연재해야 했다.

  • 배우 박상아가 전두환의 둘째 며느리다. 전재용과 불륜관계였지만, 결국 전재용이 이혼하고 결혼했다.

  • 추징금 약 1000억 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세금 고액체납자 명단 1위에 올라와 있다. 2020년 기준으로 5년 연속 체납하여 총 체납액은 약 10억 원이다. 연합뉴스 기사 결국 전씨가 사망하면서 이 미납추징금은 현행법상 집행중지로 전액 환수가 어렵게 됐다. 다만 검찰은 사망한 전씨의 추징금 환수에 대한 법률적 재검토에 들어감과 동시에 전씨가 제삼자의 명의로 놔둔 재산에 관해서도 추가집행이 가능한지 여부도 살펴볼 예정이라고 한다.

  • 현재 4선 국회의원인 윤상현이 전두환의 고명딸인 전효선과 결혼하였으나, 2005년에 이혼했다. 윤상현과 전효선 슬하에는 2녀가 있으며, 윤상현은 재혼 이후인 2010년, 늦둥이 딸을 하나 얻었다.

  • 유명 코미디언인 이주일은 전두환 정권 초기에 방송 출연 금지 연예인으로 찍혔다. 공식적으로는 시청자들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게 이유이지만, 실제로는 전두환 정권이 사회 분위기를 휘어 잡기 위해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연예인들을 탄압하였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막상 전두환 본인은 언론 탄압과는 별개로 이주일의 개그를 꽤 재미나게 보았다고 하며[47] 오히려 이후 박종환 감독의 주선으로 만나서 사적으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출연금지 조치가 풀린 건 덤. 이주일의 후배 코미디언인 최병서의 회고에 따르면, 이주일이 최병서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뜬금없이 한밤중에 전두환의 집에 찾아갔는데[48], 전두환은 내쫒기는커녕 오히려 반갑게 맞이하며 술상을 차려왔더라는 이야기도 있다.최병서 일화.



  • 퇴임 직후 백담사에서 생활한다고 이야기가 굳어지기 전, 퇴임일 오전에 청와대를 차를 타고 나오며 비우는 시간의 TV 생중계에서 차량 출발이 잠시 지체되는 중간에 헬기에서 찍은 청와대 시설을 하나씩 소개하면서 청와대에 엄청 규모가 큰 수영장을 두고 나온다며 공중에서 찍은 수영장이라는 큰 건물을 TV로 보여준 적이 있었다.

  • 일제강점기 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뜻이 잘 맞았던 박정희와 대조되는 대목.[49] 전두환의 부친이 일제 순사를 공격한 영향이 이에 한몫한 듯.

  • 한주호 준위의 영결식에 참석했었다. #

  • 광주 충장로에 전두환 동상과 함께 뿅망치를 같이 두었는데, 너무 세게 때려서 전두환 동상의 두개골이 갈라졌다.

  • 정적인 김영삼 부부와 함께, 아내 이순자와는 금슬이 좋은 애처가이다.[50] 전두환이 이순자의 친정아버지 이규동의 부관으로 근무할 시절부터 알게 되었는데,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이순자는 전두환을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전두환이 본격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기 전, 가난한 군인인 상태에서 병원에 입원중이던 이순자에게 선물(과일바구니)을 사주기 위해 경기도 북부에 주둔중인 지인의 부대로 돈을 꾸러갔다가 실패하고[51] 울면서 서울까지 걸어왔다는 사례가 있을 정도로 비록 이규동 라인을 이용하려고 이순자를 만났지만 연애시절부터 서로에게 나름 호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도 측근들에게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선 아내에게 잘 해주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으며, 이후에도 공식 석상에서는 나름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 같은 독재자이자 대통령 선배였던 필리핀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친했다. 집권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과 전두환 본인의 사교성 덕분에 전두환이 말라카냥궁에 방문했을 때 마르코스가 그를 극진히 대접해줬고, 전두환 또한 마르코스에게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했다.[52][53] 임기 말기에는 서울과 마닐라에 각각 6.10 민주 항쟁과 엣사 혁명이 터졌을 때 서로 동일한 방식으로 민주화 운동가들을 탄압했다.

  • 2021년 11월 23일 사망했는데, 친구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동년 10월 26일에 사망한 지 채 1개월이 안 되는 즉, 28일 만의 일이었다. 또한 사망 당일은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난 지 11년이 되는 날이며, 바로 전날인 22일이 본인과 노태우를 구속시켰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6주기였다.

  • 전두환 사망당일 5.18 유공자 이광영씨의 시신이 저수지에서 발견됐다. 생존해 있는 유공자들도 있지만 특히 조명받는 이유는 민주화운동당시 부상당한 시민군의 후송을 돕던중 척추에 총상을 입고 하반신이 마비되었으며 1989년 광주특위 청문회와 각종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였고[54] 전두환의 사망 몇시간 전 유서를 남긴채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유서내용중 "오로지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 내가 지고 떠나감이다" 라는 문구가 있었으며 시신이 발견된 날이 전두환 사망과 같기 때문이다.

  • 군인시절 군번은 17136[55]이었다.


  •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를 집필하여 전두환의 경제 업적을 정리하고 김재익을 조명한 이장규 전 중앙일보 기자는 회고록의 내용, 특히 최규하 대통령과의 관계 등이 사실과 너무 다르며 그의 가장 큰 실책이라 주장했다. 그럼에도 전두환 사후 그의 경제적 업적을 다시 한번 정리한 "그런 선거는 져도 좋다"를 집필했다.

  • 불시에 최전방부대나 관공서 등 공공기관 시찰을 가는 일이 잦았다. 새벽에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군 장성 출신답게 군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 전두환이 취임한 12대 대통령직부터는 2월 25일에 취임식을 가졌다. 이 기록은 민주화 후에도 계속되어 18대 박근혜까지 이어졌다.[56]


10. 각종 타이틀[편집]


  • 박정희에 이은 2번째 군인 출신 대통령[57]
  • 간선제로 당선된 마지막 대통령[58]
  • 국민의 직접 선거 없이 간선제로만 당선된 대통령[59]
  • 임기를 모두 끝마치고 만기 퇴임한 최초의 대통령[60]
  • 가장 높은 형량을 선고받은 대통령[61]
  • 박정희에 이어 2번째 경상도 출신 대통령
  • 최초의 경남 지역 출신 대통령
  • 최초의 사정기관장(중앙정보부장) 출신 대통령[62]
  •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전씨 대통령
  • 전임 대통령에 이어 두 가지를 다 가진 대통령
  • 예복 차림으로 취임식을 거행한 마지막 대통령[63]
  • 대한민국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물러난(56세) 대통령이자, 혁명으로 인하여 쫓겨난 대통령
  • 마지막으로 무궁화대훈장을 제외한 훈장을 대통령 본인에게 셀프 수여한 대통령.[64]
  • 유일무이한 대머리 대통령[65]
  •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낸 시간이 가장 길었던 대통령(33년 9개월)[66][67]
  • 두 번째로 장수한 대통령.[68]
  • 이승만, 윤보선 이후 국가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대통령.[69]
  • 역대 대통령 중 3번째로 화장된 대통령[70]
  • 대통령 임기 기준, 마지막으로 사망20세기 대통령.
  • 마지막으로 사망한 일제강점기 출신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났으나 일본제국 본토(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후 귀국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았다.
  • 퇴임 후 가장 많은 후임 대통령을 본 대통령[71][72]


11. 어록[편집]


"각하, 프로레슬링은 쇼인데 뭐하러 보십니까?"

보안사령관 시절, 프로레슬링 팬이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레슬링 중계를 보다가 박정희에게. 이때 분노한 박정희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종필은 흠이 많고 경솔하며, 김영삼이는 아직 어리고[73]

능력이 부족하고, 김대중이는 사상을 도무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1980년 1월 대통령 당선 전


"범인은 들어라. 윤상이를 데리고 파출소로 와서 자수하면 최대한의 선처를 베풀겠다. 윤상이가 살면 네놈도 살 것이고 윤상이가 죽으면 네놈도 죽을 것이다!"

-1981년 주영형 유괴 살인 사건 발생 후 방송에 출연해 범인에게 경고하면서


"국민 여러분, 아동유괴 살인에 대해서는 앞으로 무조건 이렇게 조치할 것입니다."

-1981년 이윤상을 살해한 범인 주영형의 사형판결 확정 후, 열흘 만에 그를 처형한 뒤 방송에 출연해 대국민선언을 하며


"우리 일본대사[74]

어디갔어? 일본대사 축배 안 들데?"

-1981년 1988 서울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고 중앙청에서 열린 환영만찬회 축사를 하며


"자기 자식도 제대로 교육 못 시킨 교직원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

-대통령 재임 중 과외 금지령을 내리며


"고향 합천에는 집 한칸 없는데 어디로 가란 말이냐. 나보고 들판에 나가 앉으란 말이냐?"

-1988년 재산 반납 후 낙향을 권유하는 민정당계 인사들에게[75]


"나도 인간인데 동네북처럼 두들기지 마라. 노태우가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 나를 도청하다니 내가 빨갱이냐?"

-1988년 대통령 퇴임 후 백담사로 가기 전


"밖에서는 재임기간 나쁜 짓만 한 사람이라고 저를 욕하고 있는데, 사람이 실수라도 잘한 일 하나는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소가 뒷걸음 치다가 쥐 잡는 식으로 말입니다..."

-1988년 백담사에 은둔하던 시절 찾아온 불교 신자들에게


"억울하다. 왜 나만 갖고 그래?"

-1995년 내란혐의로 재판 과정에서


"자네 구치소는 계란 후라이 주나?"

-1996년 내란혐의로 재판 과정에서 상봉한 노태우에게.[76]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내가 돈을 받지 않으니 기업인들이 되레 불안을 느꼈다. 기업인들은 내게 정치자금을 냄으로써 정치 안정에 기여하는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1996년 2월 비자금 사건 첫 공판에서


"노태우가 일을 그르쳤어. 그렇게 쉽게 검찰에 가는 것이 아닌데. 끝까지 버텼어야지."

-1996년 안양교도소에 구속 수감 직후


"(현 정권이)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호 아래 과거 정권의 정통성을 심판하고 있으나 현실의 권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역사를 자의로 정리하고 재단할 수는 없다."

-1996년 8월 검찰의 사형 구형 후


"지금 대통령께서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신다고 하는데 대통령 본인의 역사부터 바로잡으시길 바란다."

-1997년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여러분들은 여기 들어가지 마시오."

-1997년 출소 직후 심경을 묻는 기자들에게


"경제도 모르는 인간이 대통령을 해서 나라가 절단났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청와대에서 주관한 전직 대통령 초청 만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향해 


"나 자신의 인권도 탄압받고 짓밟히면서 살아왔다. 내가 인내심이 있고 성질이 좋아 이렇게 살아 있지, 다른 사람이라면 속병이 나서 제풀에 죽었을 것이다."

-1999년 1월 자택을 방문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대통령 퇴임 후의 마음고생을 토로하며 


"국민이 믿을 수 있는 그런 정치를 해야지.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거짓말하고 그러면 안 되지."

-2000년 김대중 정부에게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달빛정책이라도 내놓으면서 비판해야 한다."

-2001년 한광옥 민주당 대표의 신임인사 방문을 받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 성과를 호평하며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그 하나의 폭동이야.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 2003년 2월 SBS와의 인터뷰에서


"5공화국은 역대 정권 중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이양을 통해 민주주의가 자랄 토양을 마련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한민국호의 승객들을 구해냈다.
5공화국은 국가 위기상황에서 마주치게 된 국가적 운명이었다.
"

-2008년 "평화적 정권이양 20년 기념" 오찬에서


"참 우리도 대단히 참 좋은 나라가 됐어요. 이제 누가 권력을 잡더라도, 헌법을 개정해서 장기집권하겠다 할 사람은, 그렇게 나오는 사람은 간덩이가 큰 사람이지...
카메라(사진기자)들 보면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비뚤어지게 (찍는다)...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내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2008년 4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를 마치고 취재진 앞에서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시겠는가."

-2014년 병상에 누워 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문병하며


"그때 어느 누가 국민에게 총을 쏘라고 하겠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광주에 내려가서 뭘 하라고요?"

-2016년 신동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광주에 내려갔다면 작전 지휘를 받아야 했을 현지 지휘관들만큼은 나를 만났거나 봤어야 했는데 그런 증언을 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2017년 ‘전두환 회고록’에서


"조비오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

-2017년 회고록에서


"광주하고 내하고 무슨 상관 있어? 광주 학살에 대해 모른다 나는.
니 군대 다녀왔나?
니가 대신 (추징금) 좀 내주라."

-2019년 11월 강원도 홍천군의 한 골프장에서 임한솔정의당 부대표에게[77]


"말조심해, 이놈아!"

-2020년 11월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1심 선고공판 출석 당일, 연희동 자택에 모인 시위대를 향해[78]


"내가 알고 있기로는 당시에 헬기에서 사격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헬기에서 사격했다면 많은 사람이 희생됐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아들인 헬기 사격수가 계급이 중위나 대위인데 이 사람들이 그런 무모한 짓을, 헬기 사격을 하지 않았음을 나는 믿고 있다."

-2020년 11월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벌어진 1심 선고공판에서 최후진술로.



11.1. 제11대 대통령 취임사[편집]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내외귀빈 여러분!

오늘 새 역사의 장을 여는 뜻깊은 식전에서 먼저 본인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해 주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국민 여러분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동시에 이 국가적 일대 전환기에 대통령의 책무를 맡게 된 데 대하여 무거운 사명감을 느낍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80년대는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대내외적으로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조국이 광복된 후, 한 세대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 사회의 중추세력이 바뀌었고 불의의 10·26 사태는 결과적으로 한 시대를 마무리짓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구시대의 그릇된 기풍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깨끗하고 서로 믿는 정의로운 새 사회와 부강한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눈을 밖으로 돌려 볼 때 80년대 역시 국제정치와 세계 경제질서에 격동과 격변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선 미소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세계 도처에서 분쟁과 군사적 충돌이 계속될 것이며, 특히 동북아지역에 있어서는 강대국간의 전략적 균형이 구조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강의 움직임은 한반도 주변환경에 긴장을 고조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또한 세계경제도 가중되는 자원난과 만성적인 경기침체로 계속 진통을 겪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는 북한공산집단의 침략위협에 항상 대비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마저 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생존권을 지키고 밝은 장래를 기약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결의와 단합이 요청됩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지난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갖가지 내외의 도전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경이적인 국가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발전 과정에서 많은 모순이 부산물로 생겨났습니다. 이른바 권력형 부정축재, 부의 편재현상, 황금만능주의, 도의의 타락, 정치적 이견의 극단화, 공직자들의 무사안일주의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수십억 또는 수백억원의 재산을 긁어모은 정치인이 있고 일부 부유층이 사치를 위해 낭비에 흐르는가 하면,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하였으며 정직, 성실, 근면한 사람이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대우받기는커녕 오히려 못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부조리와 부패를 그대로 놓아둔다면,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부의 분열과 갈등으로 나라의 존립마저 크게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백수의 왕인 사자도 다른 맹수의 공격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병균이나 기생충에 죽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나라는 우리 모두가 피로써 지켰고 땀흘려 이룩한 국민의 것입니다.

몇몇 특혜 받은 사람들을 위한 나라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80년대에는 이같은 구시대의 잔행을 추방하고 참다운 민주복지국가를 건설해야 겠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복지국가는

첫째, 우리 정치풍토에 맞는 민주주의를 이 땅에 토착화하고 둘째, 진정한 복지사회를 이룩하여 셋째,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 넷째, 교육혁신과 문화창달로 국민정신을 개조하려는 것입니다.

본인은 제11대 대통령으로서 이와 같은 국가지표를 달성하기 위한 그 기초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우선 참다운 민주역량의 축적은 우리의 당면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민주주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라 8·15해방과 함께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그 동안 우리 국민이 민주정치를 해 보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해 왔으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이 약해 값비싼 시행착오만을 되풀이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제도는 어렵고 정교한 정치제도이기 때문에 조건이 성숙되지 않으면 제대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정부는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일을 하나씩 해 나갈 것입니다.

우선 헌법개정문제에 있어서는 정치과열의 방지와 정치풍토 쇄신을 기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우리 현실에 맞는 능률적인 헌법안을 마련할 작정입니다. 이 헌법개정안은 늦어도 10월 중에는 국민투표에 붙일 생각입니다. 그리하여 정부가 누차 밝힌 대로 내년 상반기 중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며 신정부를 출범시킬 예정입니다. 정치활동은 새 헌법이 확정된 후, 빠른 시일내에 재개토록 하겠습니다.

계엄령은 정국이 안정도고 소요의 우려가 없다고 판단되면 어느 때라도 해제할 방침이며 새 헌법에 의한 선거는 계엄이 해제되고 자유분위기가 보장된 상황하에서 과열이 배제되고 질서와 법이 존중되는 가운데 공정한 자유경쟁을 통해 실시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치일정이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하는 바이며, 아울러 이와 같은 협조 분위기가 원만히 성숙된다면 이미 최규하 전직 대통령께서 밝혔던 정치일정이 앞당겨져 추진될 수도 있다는 점을 밝혀 두고자 합니다.

참다운 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는 정치풍토부터 개선되어야 하겠습니다. 과거처럼 선동, 비리, 파장, 권모, 사술, 부정부패 등이 판을 치던 풍토속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이같은 정치작태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상당수의 구정치인들을 정리하였으며, 그 외에도 이런 폐습에 물든 정치인들에게 앞으로의 정치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 본인의 소신입니다.

따라서 정세의 개편과 정치인의 세대교체는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개편과 교체를 통해 지난날 노출되어 온 정치적 이견의 극단화는 앞으로 점차 중화되고 조정되리라고 본인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착시켜야 할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의 생존과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하고 정치운영상의 비능률을 제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자유경쟁 원칙하에 고도의 경제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의 고유한 민족전통과 문화배경에 합치되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책임정치와 책임행정을 구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대통령 자신부터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일정기간 맡겨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본인은 민주주의를 이 나라에 토착화하기 위하여 헌법절차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반드시 확립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최규하 전직대통령께서 지난 8월 중순 평화적 정권이양의 모범을 보여 주신 데 대하여 본인은 깊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참다운 민주주의의 실현은 정부나 정치인의 힘만으로 될 수는 없으며,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일상생활을 통해, 작게는 공중도덕을 지키는 일에서부터 크게는 국가관에 이르기까지 건전한 민주시민으로서의 뚜렷한 윤리관을 정립하고 생활화하는 것이 민주사회 건설의 첩경이라고 믿습니다.

더욱이 전쟁의 참화를 경험하지 못한 전후세대에게 공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확고한 가치관과 투철한 안보의식을 심어 주는 것은 긴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 복지사회의 기반조성을 위해서는 자유경제체제에 바탕을 두고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해 나가는 것이 절대 필요합니다.

경제발전은 사회복지의 기본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앞으로 기업의 창의성을 존중하고 자유롭고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최대한 보장하는 동시에 지금까지의 기업에 대한 과잉보호를 지양하고 지원시책을 재검토 정비하여 기업체질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즉 경제운용방식을 민간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키며 기업은 대소를 막론하고 경영 결과에 대해 스스로가 책임을 지는 풍토를 조성할 것입니다.

한편 국제경제면에서는 개방체제를 유지하면서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과감히 도입하여 우리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아울러 외국인의 국내 경제활동을 적극 유치, 장려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장하겠습니다. 정부가 추구하는 사회복지정책은 고용기회의 확대에 중점을 두어 모든 국민이 각자 자기의 능력에 따라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으며, 풍요롭고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공공투자를 확대해 나가는 데 있습니다.

정부는 근로자의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고 임금격차의 완화와 근로자의 재산형성을 촉진하며, 기업과 근로자가 공존공영할 수 있도록 노사협력체제를 계속 확립해 나가겠습니다. 농가소득의 증대와 농촌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한편, 도시와 공장에도 새마을운동을 지속적으로 확산, 정착시켜 나가겠습니다.

중화학공업의 국제경쟁력 제고로 수출진흥에 주력하고 금융질서의 쇄신, 공정거래질서의 확립 등을 추진할 것입니다.

당면시책으로는 물가를 안정시키고 생활필수품을 원활하게 공급하는 등 민생안정에 역점을 두겠습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발전이야말로 복지국가 건설의 밑거름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추구해야 할 튼튼한 자주국방의 초석이 된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막강한 군사력 유지는 아직도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외면하고 있는 북한공산 집단의 무력적화야욕을 분쇄하는데 있어 필요불가결한 전제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본인은 자주국방태세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서 군의 정예화, 그리고 사기앙양을 촉진하고 방위산업의 착실한 발전을 계속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자주국방없이 민주복지사회를 구현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사상누각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서로 믿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국민간의 불신도 문제이지만 국민이 정부를 불신하는 것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본인은 그 일차적인 책임이 정부와 공직자에게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는 나 자신과 내 주변의 부정과 부패를 스스로 용납치 않을 것이며, 모든 공직자의 부정부패도 계속 척결해 나감으로써 국민의 불신소지를 가능한 한 간소히 없애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정직한 정부로서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본인은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개혁 주도세력이 처음에는 대단한 열의와 정의감을 가지고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이 부패하고 사명감을 상실하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새 시대에는 결단코 이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새 시대를 여는 데 있어서는 국민 개개인의 의식구조가 바뀌어야 하고 가치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새 가치관이라고 결코 고답적인 개념이나 거창한 내용이 아닙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고, 약속을 어기고, 남을 헐뜯고, 거짓말을 하고, 불로소득을 꾀하고,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돈으로 매사를 해결하려 하고, 압력으로 이권을 청탁하는 등의 폐습을 우리 일상생활 주변에서부터 하나씩 고쳐 가려는 마음가짐, 이것이 바로 새 가치관인 것입니다.

정부는 이러한 새 가치관이 우리 국민의식 속에 뿌리를 내려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될 수 있도록 새마을운동과 연계시켜 범국민적 사회정화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사회정화운동이 다만 부정적 요소를 물리적 힘으로 제거하는 데에 그쳤으나, 앞으로는 긍정적 요소를 고취하는 방향으로 계속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운동이 성공하려면 가정과 학교교육을 통해 어릴 때부터 정직, 질서, 창조의 정신을 생활화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기풍은 단시일 내에 정착될 수 없고 몇 세대가 걸릴 것으로 보지만 우선 그 기틀을 마련하자는 것이 본인의 확고한 신념입니다.

이상과 같은 민주, 복지, 정의사회는 획기적인 교육혁신과 민족문화의 창달을 통해서만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단순히 지식의 주입에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향상, 인격의 함양, 확고한 안보의식의 정립, 창의력 개발에 역점을 둔 전인교육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선 의무교육의 내실화를 기하고, 과외의 폐풍을 근절하여 학교교육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야 하겠습니다.

특히 대학은 앞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할 인재를 길러내는 배움의 터전입니다.

따라서 정부는 대학에서 연구하고 공부하는 자유는 최대한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나 대학인들이 현실정치에 뛰어들거나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나올 때 이것은 안보적 차원에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혀 두고자 합니다.

문화발전을 위해서는 우리의 전통적 문화유산을 보존, 계승, 발전시키는 데 힘쓰는 한편, 문화예술인들의 자주적이며 창의적인 활동을 적극 뒷받침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복지국가를 건설하려는 우리의 의지는 궁극적으로 조국의 평화통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정부는 이 민족적 지상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앞으로도 남북대화를 끈기있게 추진할 것이며, 쉬운 문제부터 점진적으로 풀어 나가는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남북한문제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만, 한반도에서 전쟁은 방지되어야 하고 민족과 국토의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 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소신입니다.

한편, 민주복지국가 건설은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지위를 더욱 높이는 길이기도 합니다. 정부는 한·미상호방위협력체제를 더욱 공고히 다지는 동시에, 교육국가로서 우리나라의 비중이 국제사회에서 증대되는 추세에 맞추어 특히 우리의 주요 우방인 미국·일본을 비롯하여 모든 우방들과 긴밀한 우호협력 관계를 계속 유지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에 대하여도 상호주의원칙에 입각하여 문호개방정책을 유지할 것이며 비동맹국과의 실질적인 협력관계도 계속 증진해 나가겠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오늘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지금 밝힌 국정운영의 포부와 계획을 성실히 실천할 것을 국민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

새 역사·새 시대를 창조하려는 우리의 국민적 의지와 민족사의 진운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결단과 참여와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국가 속에 내가 있고 나와 함께 국가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겸허한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우리 국민 모두가 다함께 손을 마주잡고 새로운 광명의 시대를 향하여 힘찬 전진을 계속합시다.

이 국민적 결의야말로 바로 오늘과 내일의 새 민족사의 장을 여는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국내외에 계시는 국민 여러분의 가정마다 고루 행복과 번영, 그리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1980년 9월 1일 대한민국 대통령 전두환



11.2. 제12대 대통령 취임사[편집]



친애하는 국내외 동포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를 빛내 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

우리는 오늘 시련으로 얼룩졌던 구시대를 청산하고 창조와 개혁과 발전의 기치 아래 새 시대를 꽃피우는 제 5공화국의 영광스러운 관문 앞에 모였습니다.

본인은 민족의 역사에서 참으로 중대하고 획기적인 이 전환의 시기에 본인에게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소임을 맡겨 주신 국민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와 경의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번 제12대 대통령선거를 통하여 국민 여러분이 본인에게 압도적인 성원을 보내주신 것은 본인에게 있어 무한한 영광일 뿐 아니라 본인의 책임을 더욱 무겁게 하는 채찍질이 되고 있습니다.

본인은 나에게 맡겨진 역사적 대임을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나라와 겨레에 바침으로써 여러분들의 기대에 보답할 것을 5천만 동포에게 엄숙하게 서약하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조국은 현재를 사는 우리 세대의 것만이 아니며, 우리의 조상들이 피땀흘려 우리에게 물려 준 최고의 가치일 뿐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영원히 살아갈 역사의 보금자리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우리 민족은 이 땅 위에 반만년 면면히 역사를 영위하면서 외침 등 숱한 도전과 시련을 극복하고 독창적 문화를 꽃피워 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시아대륙의 숱한 강대한 민족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으며, 수많은 민족이 이미 그 역사와 문화를 소멸하고 말았으나 우리 민족은 빛나는 문화전통과 동질성을 지키고 발전시켜 찬란한 동아시아 문화의 창조에 크게 공헌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얼마나 약소의 비애와 망국의 한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본인은 나라를 잃은 시대에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본인은 나와 같은 세대의 우리 국민들이 겪었던 것처럼 혹독한 식민통치의 경험 속에 성장하였습니다.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기고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겼습니다. 그것을 순전히 우리의 숙명으로만 돌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지난날의 치욕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조국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살아 있어야 하며, 국민의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치욕의 역사로 우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다시 조국이 침몰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체의 만심과 안일에서 깨어나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지난번 국정지표로 민주주의의 토착화, 복지사회의 건설, 정의사회의 구현, 교육혁신과 문화창달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4대 지표가 앞으로 본인의 재임기간동안에 기초를 더욱 굳게 다져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본인은 있는 힘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이 자리에서 한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말해두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표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굳건한 국민안보가 토대로 되어 있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오늘의 주변정세와 80년대의 예측하기 어려운 국제기류, 그리고 지정학적인 여건을 고려할 때 우리는 정신을 더욱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국가안보는 다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생존의 필수요건이며 따라서 우리는 국가안보 최우선의 태세를 우리의 체질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일본의 식민통치 36년에서 광복된 지 또 다시 36년만에 우리는 오늘 제 5 공화국을 출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환기를 사는 오늘 우리의 결의를 한층 더 새롭게 해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 통치하의 고난과 역경이 36년 만에 종지부가 찍혔듯이 광복 이후 독립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 겪었던 방황과 혼돈, 그리고 시행착오도 36년 만인 이 시점에서 종지부를 찍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근대사는 한마디로 자주민주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소망으로 일관되어 왔습니다. 우리 민족과 국토가 아직도 분단되어 있고, 부강하고 온 국민이 골고루 잘사는 복지산업국가를 아직도 이룩하지 못한 단계에서 우리 민족사의 이 과업은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80년대에 또 한번의 일대 도약을 통하여 풍요한 복지국가의 굳건한 바탕을 이룩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80년대는 모든 분야에서 안정과 화합의 바탕 위에 일대 국민적 전진을 이룩하는 연대이며, 자손대대 물려줄 풍요와 복지의 바탕을 위해 우리 모두가 창조하는 연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는 새 시대는 우리의 역사가 소망하는 부강하고 복된 나라를 건설하는 위대한 창조의 시대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그토록 갈구하여 마지않았던 새 시대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제 5 공화국 헌법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오늘 취임식을 가짐으로써 새 공화국이 명실상부하게 출범하였습니다. 체제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구헌법은 이제 우리의 헌정에서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 헌법이 실시되고 새 정부가 출범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새 시대라고 자만할 수는 없습니다. 새 헌법 새 정부와 함께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어야만 우리는 진정한 새 시대를 꽃피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펼쳐야 할 새로운 상황은 구헌법 구정부 등의 구시대적 논리,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일체의 진통과 애증으로부터 결별할 것을 우리들에게 엄숙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터전 위에서 새로운 가치를 정열적으로 추구해 나가는 창조의 의지, 비생산적 비능률적 독소를 제거하고 국가사회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하려는 개혁의 의지, 훌륭한 전통과 민족적 정통성을 살찌워가는 발전의 의지를 함께 모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전환기를 맞는 우리의 공고한 시대정신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욱한 세월에 걸친 시련과 고뇌의 시대를 넘어서서 이제야말로 [성장과 성숙]을 통해 자기완성의 시대를 형성하여야 할 80년대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80년대는 보다 성숙한 독립국으로서의 산업민주국가의 완성이란 벅찬 임무를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 5 공화국의 출범을 통해 성장과 성숙의 시대에 들어서는 찰나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성스러운 새시대의 서장에서 대통령이란 막중한 책무를 맡게 된 본인은 국가의 성장과 성숙이 본인에게 부과된 역사적 과제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지난 36년 간에 있었던 혼란과 전쟁과 갈등이 대단히 어렵고 괴로운 시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 모두는 스스로 겪은 체험과 역사적 교훈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줄기차게 갈망하였습니다.

그것은 첫째, 전쟁의 위협으로부터의 해방이요 둘째,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셋째는 정치적 탄압과 권력남용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본인은 주어진 임기동안에 국민 모두가 오랫동안 갈구하고 희망하고 요청해온 이 세가지의 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 본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과 애정을 다 바쳐 일할 것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 두는 바입니다.

첫째, 전쟁으로부터의 해방은 전쟁 그 자체를 방지해야 하는 것과 함께 전쟁의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민족전체의 삶의 조건을 정상화하며 궁극적으로는 평화통일로 가는 길을 뜻하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안착과 평화통일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그동안 수차 강조한 바 있으므로 오늘은 생활의 질문제에 관해 언급을 해볼까 합니다.

북한주민은 지난 36년간 내부의 종적인 비교만 할 수 있었을 뿐 외부세계와의 횡적인 비교는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자유도 맛볼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자유를 갈구조차도 못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능성이 완전히 박탈된 비극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즉 정치·경제·사회·문화·인도적인 측면에서 북한주민의 생활의 질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참담한 것으로써 동족인 우리들로서는 이에 대한 무한한 동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북한당국은 그들의 인간성 회복과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반성해야 함은 물론 세계 인류적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본인은 이 기회를 빌어 북한주민의 생활의 기본조건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하여 북한이 절대적인 폐쇄성을 지양하고, 밖으로 꽉 닫힌 북한사회의 창문을 활짝 열어 놓을 것을 민족의 이름으로 강력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본인의 1·12 제의도 통일에 접근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물론 북한주민의 인간성과 생활의 질이 향상되도록 북한의 개방을 촉구하고자 그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전쟁의 두려움에서 해방이 되어야만 민족전체의 생활의 질도 개선 향상될 수 있다고 볼 때 남북상호간의 신뢰조성은 매우 긴요한 문제이며 따라서 본인은 이 자리에 1·12제의 수락을 다시 한번 북한당국에 대하여 촉구하는 바입니다.

북한측이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나는 그것을 정식거부로는 보지 않으며, 어느 땐가는 우리의 제의를 수락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둘째,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은 우리 민족 대대의 숙원이자 염원입니다.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빈곤을 숙명처럼 체험하여 왔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년간 국민의 피땀어린 노고로 큰 성과를 쌓아올려 우리는 개발도상국 중에서 성장과 분배면의 모범국가가 되다시피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국민들 속에는 절대빈곤의 어려움을 탈피하지 못한 계층이 적지 않게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도 모든 국민이 똑같게 잘 살 수는 없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만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이 나라에서 문명인으로서의 기본생활을 걱정하는 국민은 없어야 하며, 물질적 빈곤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에 도사리고 있는 빈곤의 그늘을 없애고 국민생활의 질을 드높이는 기반을 쌓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근면하고 협동해야 하겠습니다.

기업인은 기업인의 윤리를 지켜야 하고, 근로자와 농민, 그리고 소비자도 성장과 성숙의 80년대가 요구하는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정부는 이 사회의 그늘에 드리워 있는 절대빈곤을 퇴치하고 국민전체의 기본수요를 충족시키는데 최우선 순위를 둘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의 이해와 호응이 없는 정책은 공론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셋째, 정치적 탄압과 권력남용이 이 땅에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본인은 법으로 국정을 집행하고 법으로 정부를 이끌어 나갈 것을 분명하게 밝혀 두는 바입니다.

헌법에 충실하고 모든 법령을 지키는 것은 바로 정치적인 탄압과 권력남용으로부터 해방을 촉진하는 첩경이 될 것입니다.

특정인을 위한 법의 개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있어서는 아니 되며, 특정이익단체를 위한 권력남용도 철저히 배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국법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정부의 모범과 더불어 또 한편으로 국민 모두가 법을 지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 두고자 합니다.

법을 어기고도 정부의 관용만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권력을 법 위에 올려놓는 위험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개인의 주관에 맞지 않는다고 법을 어긴다거나, 또 법을 어기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경우 진정한 법치국가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법은 어디까지나 지켜져야 하며 정부 고위관리나 정치인이라고 해서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잘못된 법이 있다면 토론과 건설적인 대화를 통하여 시정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입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이와 같은 3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확고한 우리의 것으로 함으로써 비로소 근대적인 산업민주국가의 기틀을 굳건히 하고 그 위에서 국민의 복지를 기약할 수 있는 유산을 후손에게 넘겨 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성장과 성숙은 대통령 한 사람의 힘이나 한 정부의 노력만으로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통령은 항상 오고 가는 것이지만 겨레는 영원한 것이며 정부는 바뀌어도 국가는 영속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특정인이나 소수의 지도층만으로 국사를 창조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위대한 역사는 위대한 국민들이 총참여하는 속에서만 올바로 창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염원인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달성하기 위한 기초이기도 합니다.

한 개인이나 소수집단만으로 국가 민족을 책임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지속적인 창조와 개혁, 그리고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해야 할 것입니다.

본인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성실·정직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나라의 지속적인 전진을 바라는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우리의 숙원인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꼭 확립하고야 말 것임을 분명하게 밝혀 두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생명력이 넘치는 개방사회이며,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와 능력을 존중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최대로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의견을 대화로 조정하고 종합함으로써 그것을 민족의 저력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갈등과 파쟁보다는 화해와 토론을 통해 총의를 창출해 내야 하며 그것은 새 역사의 조류를 굵게 하고 힘차게 하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총의의 형성이 아니라 그것을 방해하려 하거나 그 외곽에서 방관하려는 자세는 민족사의 전진을 위해서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이제 새 역사의 첫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표에 와 닿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지금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국가적 난관을 극복한 단계이며 모든 것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많고 목표는 원대합니다. 7년이란 본인의 임기동안에 그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겠다고 나는 장담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나는 상기하고자 합니다. 시작을 튼튼하게 해 놓으면 성공은 시간문제인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와 결의로 새 시대의 초석을 확실하게 다지는 데 나의 온 힘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중대한 시기에 국정의 최고책임을 맡으면서 스스로의 제한된 능력에 비추어 두려움과 불안감이 앞서는 것이 본인의 솔직한 심경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우리 국민이 보여 준 성숙도와 협동심,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보고 큰 힘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의 성원은 나의 능력을 부각시켜 주고 나의 결의를 더욱 고무시켜 주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이 뜻깊은 성단에 서서 본인은 굳은 다짐을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본인은 나에게 절대적인 기대를 보내 준 국민 여러분의 명령에 충실할 것이며 여러분과 본인의 삶의 터전인 이 나라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본인은 본인이 공약한 새 시대를 기필코 열어놓을 것이며, 본인이 발의하고 공시한 헌법을 준수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을 생활의 신조로 삼아온 하나의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신조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본인은 이와 같은 다짐이 실현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께서도 전폭적인 협조를 다짐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될 때 1981년 3월 3일 오늘의 이 자리는 [위대한 조국 건설을 다짐하는 날]로서 오래오래 기록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1981년 3월 3일 대한민국 대통령 전두환


12. 다른 대통령과의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다른 정치인 및 대통령과의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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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식이 연기한 전두환 (드라마 제4공화국)
장광이 연기한 전두환 (26년, 응답하라 시리즈[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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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화가 연기한 전두환 (드라마 제5공화국)

  • 탤런트 박용식이 전두환과 용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갖은 고초를 겪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 박용식은 1991년 MBC 대하드라마 《땅》과 1993년 MBC 《제3공화국》 및 KBS1 《다큐멘터리극장》, 1995년 MBC 특별기획 《제4공화국》, 1998년 《성공시대》 등지에서 전두환 역을 맡아 혼신의 열연을 보여주었다. 박용식 문서에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 2005년 MBC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이덕화가 전두환 역할을 이어받으며 절륜한 연기를 펼쳤다. 비록 외모적인 유사성은 박용식에 미치진 못했지만 주인공으로서의 묵직한 포스를 내며, 유의 말투까지 음성을 전두환 본인과 비교해도 거의 판박이로 재현해낸대다 특유의 대머리와 날카로운 용모 덕에 박용식에 못 미칠 뿐 전두환의 외모에도 상당한 싱크로율을 선보였다. 본인도 연기에 상당히 만족했다는 것이 후문이다. 이를 위해 집안 친척인 최병서에게 특훈을 받았다는 후문도 전해지기도. 그리고 이덕화 본인이 악역 전문 배우로 명성을 날린 적이 있는 사람인데 조선왕조오백년장희재, 사랑의 종말의 남현필, 사랑과 야망의 태수 등 완벽한 인간말종 연기를 달인 수준으로 실감나게 잘했던 과거가 있어서 여기에서도 전두환의 냉혹한 면모를 잘 살려서 연기한 덕에 외모는 박용식에 비해 미치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되려 박용식을 압도했고, 박용식이 타계한 지금은 전두환 담당 배우 중 전두환과 제일 외모와 음성이 제일 흡사하다고 평가받는다. 확실히 장군 시절의 전두환의 모습은 웃음기 없는 냉철한 분위기로 연기했지만 대통령이 된 후의 모습은 그보다는 다소 희화화된 모습도 보여준다.
  • 1998년 SBS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와 2012년 영화 26년에서는 장광이 전두환 역을 맡았다.[80] 해당 작품은 전두환의 퇴임 후 현재의 모습을 담아낸 이미지였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와 작은 운동장 급의 광활한 그의 사택에서 쓸쓸히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영화 후반부에는 곽진배에게 붙들려 힘없이 표적에 잡히는 등 안습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김갑세 회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선물을 주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데, 악역으로서 보이는 악랄한 연기가 일품이다.
  • MBC 라디오의 다큐멘터리 드라마 격동 50년에서는 성우 신성호가 맡았다.
  • 이외에도 1995년 SBS 창사 5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정종준이, MBN 다큐 드라마 대한민국 정치비사에서는 윤동환이 전두환 역할을 맡았다. 두 작품에서 모두 1979~80년 사이, 아직 대통령이 되기 전인 40대 후반의 전두환 장군으로 나온다.
  • 2010년 SBS 창사 20주년 대하드라마 자이언트에서는 56화에 잠시 출연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뒷통수만 나와 배우가 누군지는 추정할 수 없다.[81]
  • 2011년 MBC 월화 드라마 빛과 그림자 '정장군' (염동헌) 전두환을 모티브로 한 배역.
  • 2006년작 영화 홀리데이에선 성우 겸 배우 이의선이 전두환을 본뜬 '전직 대통령' 역으로 나왔는데, 점퍼에 마스크 차림으로 나왔다.
  • 2020년작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전두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배우 서현우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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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 주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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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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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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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5.17 내란 · 배경 및 전개 · 계엄군의 학살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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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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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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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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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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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
5.18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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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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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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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0년생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이 시절에는 영아 사망률이 높아 출생신고를 실제보다 늦게 하고 애초에 학교 교육이 의무교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 다만 1931년 1월 18일을 음력으로 변환 시 1930년 11월 30일이 된다.[2] 내천리 263[3] 노태우와 이웃 사촌으로, 연희궁이라는 논란이 있었다. 실제로 집 근처에 연희궁로라는 도로 표지가 있었다가 논란이 일자 지워졌다. [4] 장지를 정하지 못해 자택에 임시안치되었다. 전두환 본인이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고 싶다"라고 유언을 남겼고, 이를 위해서는 대한민국 국방부의 협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5] 이때는 아직 유신 헌법 시절이라 박정희, 최규하와 같은 내용을 읽었고 8차 개헌 이후 12대 취임 선서에서는 "국헌"을 "헌법"으로 고치고 "민족 문화의 발전"을 추가해서 읽었다.[6] 후에 11기로 변경.[7] 소령에서 중령 진급까지 불과 1년 2개월밖에 안 걸렸다. 이는 박정희의 대단한 신뢰가 있어서 가능했다.[8] 1972년 9월부로 제1공수특전'단'이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증편되어서 부대장도 대령에서 준장 보직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에, 당시 대령이었던 전두환은 정식 여단장은 될 수 없어서 일단 '여단장 직무대리'의 형식으로 부대장직을 유지하다가 1973년 1월 임시제 준장이 됨과 동시에 정식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된던 것이다.[9] 7년 단임제를 약속하였으나, 6월 항쟁6.29 선언으로 인하여 제5공화국이 막을 내리면서 쫓겨나게 되었다.[10] 1931년 1월 출생이라 1930년생과 같은 취급인 걸 생각하면 1949년 입학을 했어야 맞으나, 학교를 늦게 진학하였다.[11] 이로 인하여 전두환은 노태우보다 나이가 많았다.[12] 이 때 시점으로 육사 기수 세는 게 맞다.[13] 노태우와 동기다. 그러나 전두환은 1931년 1월 출생, 노태우는 1932년 12월 출생으로 거의 2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14] 제11대 대통령 때는 유신헌법에 따라 선출되었기에 제4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15]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최종적으로 인정된 죄명은 “반란수괴,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살인, 살인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이다(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이 판결이 확정되어 경호·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되었다.[16] 게다가 전두환은 이 때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도주하는 짓까지 저질렀고, 급기야 경찰에 붙잡혀서 끌려 올라왔다.[17] 오랜 친구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 후 딱 4주가 된 시점이었으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진행되었다.[18]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임기 시작은 20세기지만 퇴임은 21세기이다.[간접선거] A B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 선거.[19] 윤보선은 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의원내각제 의회에서 선출하는 명목상의 국가원수였으며, 최규하는 10.26 사건 이후 보궐선거로 선출되어 박정희의 잔여임기만을 재임하고 빠른 시간 내에 개헌하여 유신 정권을 민주 정부에 정상적으로 이양한다는 약속을 하고 선출된 대통령이었다. 더구나 윤보선, 최규하 모두 각각 5.16 군사정변,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했다.[20] 1958년~1960년 4.19 혁명 시기 독재를 행하였다.[21] 8, 9대 대통령을 하던 시절 1973년~1979년 독재를 행하였다.[22] 간접선거까지 포함하면 이승만은 3회(3.15 부정선거 제외), 박정희는 5회 당선되었다.[23] 1988년 11월 23일. 그날로부터 정확하게 33년 후 사망했다.[24] 시가 포함[25] 1980년 이진희와의 대담에서는 태양을 피웠고, 1982년 이후로는 장미를 피운 것으로 보인다.[26] 한국 중식당에서 파는 메뉴들은 기름진 것이 많아 대부분 노인들이 소화가 불편해서 꺼리는 경우도 많다. 위장도 건강한 듯하다.[27] 비슷하게 골초에 주당이었던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90 넘게 장수했고, 콜라를 하루에 1.5리터씩 마시고 1Kg이 넘는 스테이크를 즐기는 등 건강식과는 거리가 아주 먼 식습관을 지닌 워렌 버핏이 현재 91살로 아주 팔팔하게 살아있다.[28] 최근 연구 경향은 고기를 많이 섭취하는 것은 건강에 해가 안 되며, 탄수화물을 많이 포함한 가공식품이 더 안 좋다고 한다.[29] 전두환이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틀렸다. 키는 성장기가 종료된 20대에 진입하면 나이가 듦에 따라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변화가 없지만, 몸무게는 젊을 때나 늙을 때나 각종 질병으로 인해 언제든지 변수가 생긴다. 당장 김대중의 예를 들면 국회의원 시절 때까지만 해도 후덕한 체형이었으나,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온갖 격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당뇨병을 앓고 나서부터 살이 쭉 빠졌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아니지만 북한김정일도 마찬가지. 실제로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은 최규하(182cm)이며,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사람은 윤석열(90kg)이다.[30] 헌데 박정희는 프로레슬링을 좋아했지만 전두환은 반대로 프로레슬링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는 프로레슬링을 관람하고 있던 박정희에게 전두환이 "각하, 프로레슬링은 쇼인데 뭐하러 보십니까?"라고 했다가 분노한 박정희에게 한 대 맞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박정희가 팬이어서 그런지 박정희 정권 때는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이 가장 인기 스포츠였다.[31] 즉, 흔히 오늘날 용어로 말하자면 전두환은 인싸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막 엄청나게 못한 것은 아니다. 육사 입학 이전엔 항상 성적이 우수했으며, 비록 추가 합격이긴 하지만 어쨌든 육사에 합격하기도 했고, 1980년대 초반에 김재익과 경제 공부를 할 당시 이해를 상당히 잘했다고 하니, 오히려 머리도 뛰어나다고 봐야 한다.[32] 입학년도가 1951년도였다. 그러니까 4년 후 소대장으로 전선에 투입된다는 소리인데 그래서 포기율이 높았다. 당시에는 그놈의 전쟁이 3년 만에 끝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33] 운동을 통해 군인으로서 출세한 다른 유명인은 박정희의 경호실장이자 10.26 사건 때 같이 피살된 차지철이 있다. 이쪽은 태권도를 잘 했다고 하는데, 실력이 정말 좋았는지 미국에서 연수하던 시절 덩치 차이가 2배 정도 나는 거구의 미군 생도가 인종차별을 하자 때려눕혔다고 한다. 얼마나 심하게 때렸으면 "무기로 때린 게 아니냐"라는 반응이 있었을 정도였다. 전두환의 주장에 따르면, 연수 당시 차지철을 외국인들의 불만을 대표해서 때린 거라고 두둔한 게 전두환이었다고 한다.[34] 그 당시의 장교는 정의로운 이미지가 강했고, 육군사관학교 출신은 군에서나 사회에서나 엘리트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육사 생도들의 퍼레이드는 5.16 군사정변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효과적이었다.[35] 다만 이 선택 덕분에 전두환보다 3살이나 어렸던 차지철의 승진이 더 빨랐던 것 역시 사실이다. 전두환이 육사 11기였는데, 차지철이 육사 12기를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광주포병학교를 졸업한 것은 유명한 일화. 그런 미묘한 열등감으로 차지철은 육사 출신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전두환 역시 육사 12기 지원 건을 언급하면서 '차지철은 원래 자기 밑에 있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 실제로 전두환이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이 계엄 시에 차지철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보안사가 중심이 되어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게 되면 다른 정보·수사기관까지 지휘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자마자 전두환은 매우 흡족해 했는데, 차지철은 10.26에 죽어버렸지만 이 합동수사본부로 정권을 장악하는 아이디어는 12.12에서 현실화된다.[36] 재미있는 건 윤필용 사건으로 전두환, 노태우와 하나회 인맥이 위기에 빠졌을 때 이를 모면하게 해준 것이 차지철이란 점이다. 1976년 6월부터 전두환이 차지철의 발탁으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임명되고 노태우가 청와대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되면서 중앙에 복귀한 것. 전두환을 발탁한 이유는 입이 무거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지철와 전두환의 이런 역기수 관계는 전두환이 1978년 1월 육군 1사단장으로 전출되면서 1년 6개월 만에 끝나게 되지만, 후임 작전차장보는 노태우가 역임했다.[37] 당시 역대 미국 대통령들중 최고령이였다.[38] 모 여성 잡지의 표현에 따르자면, 구봉합수술(즉 여성할례)을 했다고 한다.[39] 한국일보 칼럼과 단행본 <정치의 무늬>에 실렸음.[40] 드라마 제5공화국의 방영 후 유명해진 팬클럽이다.[41] 실제로 대위 시절까지는 다른 동기들에 비해 진급이 느렸다. 5.16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사주대로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42] 이건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게 당시 언론이나 방송계가 정권과 친하지 않고는 먹고살기 힘든 구조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획사 대표나 실장 정도 되는 사람들이 방송 출연을 위해 정권과 언론사에 줄을 대는 경우가 많았고 이호연 사장도 이 케이스일 가능성이 높다.[43] 상기했듯이 재정적인 문제를 비롯 여러 문제가 있어 얼마 안 가 다시 부활했지만서도.[44] 전수현은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의 딸로, 1985년 12월 19일 생(현재 38살)이다. 2012년 서울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홀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여담으로, 여기서 결혼식을 하려면 최소 1억 원이 든다고 한다. 이때 KBS 윤인구 아나운서가 사회를 맡았다.[45] 여담으로 일산에 1호점을 오픈했을 당시 일대에서 꽤나 맛집이였다고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전재국의 소유라는게 알려져 논란이 되었을 때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전두환 일가 소유라는 유명세로 인해 찾아가는 사람도 많았었고 뉴스보고 갔다가 맛있어서 단골이 된 사람도 있었다고. 전재국의 자금력 덕분인지 무한리필임에도 상당한 고퀄리티를 자랑했으나 현재는 전주에 위치한 지점을 제외하면 폐업한 모양.[46] 최양락상상플러스에 출연했을 때 당시의 검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유머러스하게 설명했다.[47] 박정희도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 전유성이 《윤형주의 0시의 다이얼》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싸움을 하면 육박전이다"라는 식의 개그를 쳤다. 하지만 방송사 내 간부진들이 그 유머를 듣고 식겁해서 PD들을 혼내고 전유성에게 3개월 출연 정지령이라는 징계를 내렸는데, 막상 해당 유머를 들은 박정희는 박장대소하면서 껄껄 웃었다는 후문. 라디오로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스튜어디스를 통해서 전해들었다.[48] 정확하게는 사기를 당해 금전적인 손해 때문에 실의에 빠져 포장마차에서 과음을 해 취중이었다. 최병서가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중 "병서야, 누군가에게 위로를 좀 받고 싶다"라고 하고는 느닷없이 "혹시 너 전두환 대통령 댁이 어딘지 아냐?" 하기에 찾아가게 된 것이라고 한다.[49] 하지만 박정희도 만주군에 입대하기 전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는 일본인 교장의 감시를 피해 한국어로 수업을 진행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에 대하여 가르쳤다고 한다.링크 당시 창씨개명을 끝까지 안했다는건 최종적으로 각종 행정적 불이익을 감수하는 일이었다.[50] 죽기전까지도 항상 이순자 여사와 손을 잡고 같이 다녔다.[51] 이미 지인은 타부대로 전출을 간지가 오래였다.[52] 필리핀인 최초로 무궁화대훈장 수여받았고 옆에서 이순자를 영접한 이멜다 마르코스도 같이 수여받았다.[53] 마르코스는 전두환과는 친했던 반면에 박정희와는 사이가 상당히 나빴다.[54]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직접 목격하고 증언했다.[55] 당시 육사 출신 장교들은 1번부터 순차적으로 군번이 부여되었고 갑종장교도 원래는 육사와 군번을 공유했었으나 박정희의 "갑종장교 군번에는 앞에 1을 한 개 더 추가하라"라는 명령으로 인해 갑종장교 군번은 1로 시작하는 6자리가 되고 말았다. 학군사관은 년도에 군번이 부여되는 형식이었으며 3사는 현재의 부사관처럼 6자리였다. 당시의 부사관은 군번을 병과 공유했다. 이 체계는 1991년부터 바뀌었다..[56] 하지만, 퇴임식을 2월 24일 가진 건 후임 노태우부터였고, 이명박까지 이어졌지만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19대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10일 취임하면서부터 5월 9일 퇴임식을 가지기 시작하였다.[57] 이후에도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문재인 등이 있었지만 노태우만 직업군인 출신이고, 김영삼은 6.25 전쟁으로 인한 학도병이었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각각 예비역 상병과 병장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병역의무에 따른 병역 수행일 뿐이었다.[58] 초임인 이승만, 임기가 짧았던 윤보선, 개헌으로 간선제를 만들어 집권했던 박정희, 그 뒤를 이은 최규하에 이어 마지막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제헌국회에서 간선제로 선출된 초대 선거를 빼고는 2회, 3회 모두 국민의 직접투표로 당선되었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였던 박정희제5대 대통령 선거 부터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까지는 3회간 국민 투표로 당선되었다.[59] 전두환은 11대, 12대 대선 모두 간선제를 통해서 당선됐다. 국민의 직접 선거로 단 한번도 대통령 당선이 된 적이 없는 것이다. 전두환처럼 간선제로만 대통령이 된 사례로는 윤보선, 최규하가 더 있지만 이 두 명은 특수 케이스인 걸 감안하면 사실상 전두환이 유일하게 간선제로만 대통령이 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60] 그 이전 대통령들은 모두 임기를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였다. 이승만3.15 부정선거로 인해 촉발된 4.19혁명으로 하야하였고, 윤보선5.16 쿠데타의 압박으로 사임했고, 박정희유신체제와 18년 장기 집권으로 비판을 받다가 결국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총에 맞아 재임 중에 사망하였으며, 최규하12.12 군사반란으로 압박을 받다가 취임 8개월만에 사임했다.[61]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재판 1심은 사형, 2심과 3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62] 이후 윤석열이 검찰총장으로서 역대 2번째로 사정기관장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63] 굳이 말하자면 11대 취임식에서는 수트에 무궁화대훈장을 패용했는데 이것도 공식 석상에서 대통령이 패용한 모습으로는 마지막이었으며 12대 취임식에서는 훈장 패용 없이 모닝코트 차림이었다. 19대 문재인 대통령5월 10일에 취임하여 일반적인 양복 차림으로 취임했으며, 20대 대통령 역시 유권해석에 따라 5월 9일 또는 10일에 취임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문재인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친다면 모닝코트 조차도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다.[64] 다만 그 훈장들은 2006년 노태우와 함께 전부 취소되었다.[65] 탈모를 앓는 대통령은 있었지만(1970년대박정희, 최규하, 이명박, 문재인) 대머리인 대통령은 전두환이 유일하다.[66] 그 다음으로 긴 순서는 노태우(28년 8개월), 윤보선(28년 4개월), 최규하(26년 2개월) 순이다. 다만 전두환과 노태우는 예우가 박탈돼서 예우가 박탈된 대통령을 제외하면 윤보선이 가장 길다. 참고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7년 9개월이고 현재 살아있는 대통령중 가장 오래 지내고 있는 대통령은 이명박(9년 3개월)이다.[67] 반면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낸 기간이 가장 짧은 대통령은 노무현(1년 3개월, 자살)이며, 자연사한 대통령들 중에서는 이승만(5년 3개월), 김대중(6년 6개월) 순이다. 박정희임기 도중 암살당했으니 제외.[68] 첫번째는 윤보선[69]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승만에 이은 두번째로 국가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루는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다. 윤보선도 가족장으로 치뤘으나 당시 2공화국은 대통령이 국가원수였을 뿐 정부수반이 아니었다.[70] 최초는 노무현, 2번째는 바로 후임인 노태우.[71] 19대인 문재인까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사망했다.[72] 미국의 8대 대통령인 마틴 밴 뷰런과 매우 비슷한데, 그는 퇴임 후 후임 대통령 8명을 보았으며, 전두환과 같이 바로 뒤의 후임자 4명이 사망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전두환이 사망한 시점은 20대 대선을 석달 반 정도 앞둔 시기였기 때문에, 전두환이 조금만 더 건강해서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는 것까지 봤더라면 밴뷰런과 같은 기록을 갱신했을지도 모른다.[73] 그러나 오히려 1927년생 김영삼이 1931년생 전두환보다 연상이다. [74] 당시 주일대사최경록이었다.[75] 전두환의 뒤를 이어 취임한 대통령 노태우는 전두환의 동조자라는 핸디캡 무마를 위해 전두환과의 거리를 두고자 하고 있었다.[76] 노태우는 "안 줘"라고 대답했고, 이에 전두환은 "우리도 안 줘"라고 말했다.[77] 그간 상대적으로 이슈가 없다가 이 일로 간만에 얼굴을 비췄는데, 이전보다 급속도로 노화되고 야윈 모습을 보여 놀란 이들이 많았다.[78] 당시 시위대는 전두환을 향해 "5.18 발포 대국민 사과하라!"고 소리쳤다.[79]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는 카메오로 나왔다.[80] 이분 이전에 전두환 전담 배우로 유명했던 박용식 씨가 자신의 후배 성우인 박지윤의 친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게다가 둘 다 KBS 성우극회 소속이다.[81] 황태섭 역을 이덕화가 맡았는데, 제5공화국에서 이덕화가 전두환 역을 맡아서 배우개그가 성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