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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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구성
2.1. 비하나회 신군부
3. 결성 과정
3.1. 이설
4. 활동 과정
4.1. 박정희의 비호
4.2. 자리 물려주기
4.2.1. 빠른 진급
4.3. 소속원 실드
4.4. 야전군 지휘 경험 부족
4.4.1. 폐해
4.5. 7.6. 거사 사건
4.6. 하나회 주도권 잡기
5. 12.12 군사반란 당시 핵심 인물
5.1. 주동자
5.4. 육군본부
5.5. 사단
5.6. 공수특전여단
5.7. 청와대
6. 5공, 6공의 지배 세력
6.1.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간 암투
7. 문민정부숙군 작업
7.1.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
7.2. 12.12. 장성 축출
7.3. 군부의 반발과 최후
7.4. 해체의 의미
7.5. 해체의 부작용?
8. 그 후
9. 기타
10. 창작물에서
11. 관련 문서 및 자료


1. 개요[편집]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하나회 핵심 인물 전두환[1]

대한민국 군대, 나아가서 대한민국 국가 자체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던 비밀 사조직 하나회. 이들의 가입의식은 비밀리에 치러졌고, 서약을 위반할 때에는 인격말살까지도 감수한다는 배신방지 조항까지 만들어 조직폭력배와 다름없는 군부 내 패거리를 만들어냈다.

드라마 제5공화국 22회, '비밀 사조직 하나회' 편 내레이션 中에서


Q. 전두환과 그 무리의 모습을 보면 조직 폭력배가 연상된다. 이들이 진짜 군인보다는 폭력배 무리에 불과하다는 연출 의도가 있으셨는지 궁금하다.

그들이 조폭은 아니겠죠. 그 당시 엘리트들이고 훌륭한 나름대로 유능한 군인들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자기들 사리사욕을 위해 조직을 만든 다음 이득이 되는 행동을 하기 위해 무엇이든 서슴지 않으면 그건 조폭 아닐까요. (연출하면서) 조폭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쟁취하는 데 거침이 없으면 그게 그거 아닌가 싶어요.

영화 서울의 봄김성수 감독 인터뷰


대한민국 육군 내에 있었던 비밀 사조직으로 신군부는 바로 하나회를 일컫는다.[2][3][4] 전두환노태우가 중심이 되어 그들의 육군사관학교 11기(1951년 입학, 1955년 임관) 동기들과 후배들을 구성원으로 하여 비밀리에 결성되었고, 친목회로 출발한 이 조직은 제3공화국 시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은밀한 후원 속에 성장해 나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하나회 출신들을 위주로 진급을 시켜 주었고, 전두환이 준장에 진급할 땐, 최고급 세단까지 하사했다. 육사 11기 준장 1차 진급자 4명이 전원 하나회였고, 2차 진급자 4명 중 2명이 하나회였다. 1차~2차 장성 진급자 8명 중에 6명이 하나회였을 정도였다. 이처럼 주요 요직은 하나회가 접수하는 푸시를 받았고 제2공화국 시절부터 사실상 최고 권력 집회로 군림하며 요직을 회원끼리 세습해나가는 독차지까지 자행하며 군대뿐만 아니라 정계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뻗어나갔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정국 혼란을 틈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나회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킨 이듬해인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후 전두환이 정부와 국회를 장악,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렇듯 대통령까지 배출해내고 제5공화국으로 정치 체계를 뒤집었을 정도로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막강한 존재감을 과시한 조직으로 자리매김한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제6공화국이 출범한 이후에도 하나회의 2인자인 노태우김영삼김대중의 내분 속에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되어 하나회는 민주화 이후 노태우 정부까지도 정권의 주요 세력으로 존속했다.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내분으로 그 세력이 약화된다. 이후 3당 합당으로 철저히 속내를 감춘 채 하나회 숙청에 칼을 갈던 김영삼이 노태우의 뒤를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올라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도로 전격 숙청되어 완전하게 해체되었다.

현 대한민국 국군의 온갖 병폐와 출신 차별, 비리를 넘어서 대한민국 사회 내의 여러 병폐와 군대문화를 뿌리내리게 한 최악의 사익 단체 중 하나로 평가된다.

2. 구성[편집]



파일:attachment/hnh.jpg

남웅종

김호영
●●
신윤희
●●
최석립
●●
심재국
●●●
허삼수
●●●
김진영
●●●
허화평
●●●
이상연
●●●
이차군
●●●
백운택


박준병
★★
이필섭
●●●
권정달
●●●
고명승
●●●
정도영
●●●
장기오

우국일

최예섭

조홍
●●●
송응섭
●●●
장세동
●●●
김택수
●●
이상규

최세창

박희도

노태우
★★
전두환
★★
차규헌
★★★
유학성
★★★
황영시
★★★
김윤호
★★
정호용
★★
김기택


사진 속의 위치대로 이름을 기재함. ●: 영관급, ★: 장성급.

12.12. 군사반란이 성공하고 권력의 정상에 우뚝 선 군 수뇌부의 인사가 발표된 뒤인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파일:attachment/hnh3.jpg

육군사관학교 11기부터 36기까지의 하나회 회원 全 250명의 명단은 2005년 2월 동아일보의 자매지인 <신동아>에서 최초 공개되었다. 이 명단은 전술된 기존의 하나회 명단인 '백승도 명단(128명)'의 오류를 바로잡은 하나회 명단의 '완결판'이라 한다. 하나회 회원 연명부 및 관련 자료

앞서 유념할 점은 하나회는 공식적인 직함이 아닌 사조직 일원이기에 회원이 공식적인 증표를 달거나 활동 내역을 기록으로 보존하고 있을리가 만무하여[5] 아래 반론들처럼 회원들의 리스트를 확실하게 색출이 어렵다는 점이다. 하나회 명단이 살포된 내역을 토대로는 36기를 마지막으로 이름이 올라와있지만, 이후 기수들도 생도 혹은 초임 장교라는 한계상 눈에 띄지 못하는 활동으로 적발되지 못했을 뿐 조직이 지속적으로 젊은 피를 수혈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으며, 비슷한 시기 폭로된 만나회나 알자회 같은[6] 다른 사조직으로 개명 혹은 분화로 명맥을 이어나갔을 여지도 존재한다.

하나회 자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2005년도 명단이다 보니 이마저도 불확실한데 가장 핵심이 되는 11기부터 틀려서 7명의 이름만 보인다. 하나회의 전신인 일심회 자체가 칠성회+3명으로 '텐 멤버'를 만들고 이들 10명으로 하나회 11기를 구성했다.

일단 육사 1학년 때부터 함께한 '오인회(2학년부터 오성회)' 여성(黎星) 김복동이 빠졌고, '최정택'은 혜성(慧星) 최성택의 오타이다. 그 다음으로 장교 시절 결성된 칠성회 멤버이자 이 문서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손영길이 없다. 그리고 일심회 창설을 위한 텐 멤버 박갑용이 빠졌다. 여기에 추가로 텐 멤버가 아닌 안교덕, 남중수까지 11기 하나회원이다.

이렇게 가장 핵심이 되는 11기부터 틀렸는데 그 아랫기수 명단의 정확성은.... 김진선[7], 안병호[8], 이현부도 하나회 회원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은 인물들이다. 이게 다 워낙 점조직이라 서로가 하나회원인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김영삼 정부 당시 합수부의 하나회 색출 작전때 정치 장군들과 어울리며, 꽃보직만 받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추정했는데, 이건 하나회가 아닌 9-9라인도 같은 길을 걸어 구분하기 힘들었다.

2.1. 비하나회 신군부[편집]


첫번째 기념 사진속의 인물들 중엔 쿠데타와는 별개로 하나회 멤버가 아닌 인물들도 더러 있는데, 앞줄 가장 오른쪽에 있는 김기택 준장은 신군부 세력의 서울 통과를 사실상 방조했고 위의 사진에 나와 있듯 사진 촬영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반란군이라는 측면도, 또 반란 당시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에게 경복궁의 수경사 30경비단에 모여 있는 반란군 장교들의 명단을 적은 쪽지를 건넨 점, 반란 성공 직후 수훈명단에는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진압군의 성격도 갖고 있다. 김기택 준장은 전두환과 육사 동기로, 이후 1980년 소장 진급에 성공해 제25보병사단장과 국방대학원장을 지내고 1984년 소장 예편. 2010년 항년 80세로 사망했다.

둘째 줄 왼쪽에서 3번째의 권정달 대령 또한 하나회 출신은 아니지만, 12.12 군사 반란 이후 보안사령부 정보처장으로서 언론 통폐합과 검열을 주도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불러온 1980년 5월 17일의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 공로 민주정의당 초대 사무총장과 11대, 12대 국회의원으로 5공화국의 권력 핵심부에 진입했다. 그러나 장영자, 이철희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무총장을 사퇴했고,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에는 권력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이후 권정달은 민주당 계열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둘째 줄 왼쪽에서 7번째 인물인 우국일 준장도 하나회 소속은 아닌 사람인데 보안사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 촬영에 나왔다. 한편, 전두환은 자기 부대 참모장인 우국일에게도 반란 거사 계획을 일체 비밀로 했기 때문에, 우국일은 쿠데타 계획을 전혀 모른 채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었다. 나중에 우국일은 전두환 일파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데타가 끝나고 6일 후인 12월 18일 합동참모본부로 전출 명령을 받고 보안사를 떠난다.[9]

셋째 줄 오른쪽에서 3번째 인물인 이상연 대령도 하나회 소속은 아니었으나 10.26 사건12.12 군사반란 당시 보안사 감찰실장, 보안사령관 특별보좌관 등을 지내며 10.26 사건 때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박정희의 시신을 옮긴 후 대통령 주치의 김병수 공군 준장을 인질로 잡고 있던 궁정동 안가 요원 유성옥, 서영준을 체포했고, 전두환 정부에서 민주정의당 중앙정치연수원장, 정무장관 보좌관, 서울특별시 제1부시장, 대구직할시장,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 등을 역임했고 이후 노태우 정권에서도 국가보훈처장, 내무부장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사진에 나오지 않은 이기룡 당시 제1공수특전여단 참모장은 제5공화국에서 승승장구하여 육군 소장까지 올랐고 전역했다.


전두환 주축으로 결성 된 하나회

3. 결성 과정[편집]


각하, 군대 내부에도 각하를 추종하는 세력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두환(당시 대위)이 군대에 남아있길 원해 박정희의 국회의원 출마 권유(사실상의 국회의원직 하사)를 거절하며 한 말.[10]


전두환, 노태우가 포함된 육군사관학교 11기는 1951년 한국 전쟁경상남도 창원군 진해읍에 육사가 개교하며 입학했다. 당시 가입교한 228명의 생도 중 경상남도 41명, 경상북도 29명 등 육사 인근 쪽 사람들이 다수이고, 기타 지역은 전라북도 27명을 제외하곤 10명 미만으로 이전의 군사영어학교 ~ 육사 10기에선 이북 출신이 다수인 것과는 인적 구성부터 차이가 크다. 직업으로 보자면 전쟁상황이라 현역과 군속 113명, 학생 97명, 공무원 4명, 기타 14명이다. 이들은 1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200명이 1952년 1월 20일 정식으로 입학한다.

이들 11기는 가입교 시절부터 출신 지역별로 뭉쳤는데, 추워서 모포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조차도 같은 지역끼리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처음에 같은 경북출신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박병하, 박갑용, 남중수 등이 몰려 다니고, 이후 손영길, 최성택 등 경남 쪽 생도까지 가세했다.

이 중에서 전두환, 노태우(전두환과 대구공립공업중학교 동기), 김복동(노태우의 경북고 1년 후배), 최성택, 박병하가 처음부터 의기투합한 '오인회'이다. 1년 후 백운택 생도가 가세하여 '식스 멤버'가 되었고, 최성택의 회고에 의하면 박병하가 유급하여 그를 제외하고 오성회(五星會)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사관생도들은 군인의 꿈은 별이므로 '추성(雛星, 아기별)'이라고 불렀고 생도 문예활동을 정리하는 <추성>이라는 잡지를 매년 1~2회 발간했다. 이 때문에 졸업 후 총동창회 명칭도 '북극성'이 되었다.

최성택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이들 무리중 1명이 "모임의 이름을 붙이자"고 하였고, 누군가 오성(五星) 그룹이라고 하자고 하였다. 이어 별 성(星)자 돌림으로 이름을 짓자고 하여, 용성(勇星) 전두환, 관성(冠星) 노태우, 여성(黎星) 김복동, 혜성(慧星) 최성택, 웅성(雄星) 백운택 으로 정해졌다.[11]

반면 노태우의 회고에 의하면 오성회는 오성회인데 인원은 휘성(輝星) 박병하를 포함하여 6명이라고 한다.[12] 최성택과 노태우 둘 다 오성회의 당사자이다 보니 양쪽 다 기재하지만, <제 5공화국>를 집필한 김철민씨는 여러 의견을 종합하여 최성택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여기에 성(星) 앞에 붙는 호칭은 그들의 특징을 잘 살려 붙였는데 다음과 같았다.
  • 용성 전두환: 싸움을 엄청나게 잘해서 용맹하다 하여 용성. 실제로도 전두환은 타고난 파이터로 당시 싸움으로 대구 최강자였다.
  • 관성 노태우: 주어진 임무 수행을 칼같이 처리하여 관성.
  • 여성 김복동: 공부를 매우 잘해서 여성. 실제로 하나회 회원 중 임관성적이 가장 좋은 13등이었다.
  • 혜성 최성택: 지혜롭고 슬기롭다 하여 혜성.
  • 웅성 백운택: 남자다운 기질이 강하고 호방하여 웅성.

오성회는 일명 김태환회로도 불렸다. 복동, 노우, 전두해서 김태환회이다. 그만큼 이 3명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셋이 절친이기도 했으며[13] 특히 김복동과 전두환은 오성회 시절부터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 싸움에는 전두환이 승리하면서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 때문에 칠성회 혹은 일심회 초기 김복동이 잠깐 축출되었었다는 주장도 있다. 승진으로 보면 항상 손영길이 반발자국 앞섰고, 노태우는 한발자국씩 늦었다. 통상 손영길의 보직을 전두환에게 넘겨주고,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넘겨주는 방식이었다. 준장 승진 때까지 치열한 경쟁이었는데 11기중 4명이 먼저 승진에 성공했는데 바로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이었다. 즉 100% 하나회원들끼리 승진했고 그중에서도 '김태환' + 손영길이 앞서 나갔다.[14]

손영길의 경우 공적으로는 박정희의 비서이고, 사적으로는 육영수가 집안 사람처럼 대우할 정도로 심복 중의 심복이었는데, 1973년 1월 준장으로 승진하자 그해 2월 박정희는 손영길과 전두환을 따로 불러 '일심'이라는 휘호가 새겨진 지휘봉과 함게 크라운 6기통 고급 승용차와 금일봉을 하사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전두환-김복동-손영길의 3자 경쟁이 하도 치열해 군내 최대 실력자이자 하나회 후원자였던 윤필용은 "중장, 대장 올라갈 때 다투어도 되는데 왜 벌써부터 의리없게 싸우냐"고 호통을 칠 정도였다. 그들이 자주 다투던 이유는 전두환이 하나회 동기들까지 부하로 대했고, 이때문에 11기들은 좀 삐걱댔는데 특히 전두환과 김복동의 사이가 안 좋았다.

결국 전두환은 노태우와 짜고 최대 라이벌인 손영길을 준장 시절인 73년 윤필용 사건을 통해 제거하며 하나회 내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김복동은 12.12에 반기를 들었다가 1982년 육사 교장을 끝으로 예편하였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조직원들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이 시기 오성회는 훗날 범죄 조직으로서의 모습보다는 친목 단체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를 노태우는 오성회가 공개적으로 어울려 다니면서 다른 생도들이 우러러보는 집단이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공개 활동은 믿을 수 있어도 다른 생도들이 부러워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려운데, 오성회는 생도들이 동경할 만한 요소를 하나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사에서 꾸준히 앞선 성적을 거두던 김복동[15], 입학 당시 10위의 성적으로 영어가 유창하던 노태우 정도가 있지만[16] 전두환은 축구부 골키퍼로서 주장 정도만 했지 성적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고 전해진다.[17]

전두환은 국민학교를 4학년에야 시작했고 그것도 중간에 만주로 피신했다 오느라 2년 쉬는 바람에 공부가 부족하여 육사 입학시험부터 1차로 합격을 못하고 예비 후보로 겨우 입학했고[18], 우수 생도가 하는 소대장 생도를 한 번도 못 해본 것은 물론, 졸업 성적이 상당히 떨어져 성적순으로 부여되는 군번을 낮게 부여받았다. 심지어 다른 멤버 박병하는 아예 성적 미달로 유급당했다.

그렇다고 어디 잘나가는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그저 그런 친목 단체에 불과했다.[19][20] 이런 문제로 사관생도 1학년~2학년 당시 전두환은 성적이 발목을 잡아 퇴교 위기에 몰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참고로 육사 11기의 수석 졸업자인 김성진은 입학 시, 재학 중, 졸업 시에도 몽땅 수석을 한 수학 천재였다. 일리노이대와 플로리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육사 교수사관, 주미대사관 국방무관, ADD 책임연구원 등으로 복무했다. 비하나회이며 1980년 준장 예편한 뒤, 전두환 정부에서 안기부 기조실장과 1차장, 2차장, ADD 소장, 체신부와 과학기술처 장관,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장을 지냈다. 김성진은 대통령과 동기여서인지 전역 후에도 중용된 매우 특이한 케이스이고 그를 제외하면 이후 육사 수석 졸업자인 대통령상 수상자들은 소대장을 마치고 육사 전임직 교수가 되어 대령으로 예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육사 11기에서도 김성진에 버금가는 성적 우수자였던 서우인, 강재륜, 김영국은 소대장 마치고 육사 교수로만 근무한다.

이 오성그룹 혹은 칠성회 인간들은 근거없는 선민사상에 쩔어있었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육사 11기 기수 문제다. 이른바 '기칭 파동'.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육사의 역사를 조금 알 필요가 있는데, 육군사관학교는 1949년까지는(훗날 1~9기) 단기 교육만 실시하던 사관학교였다. 그러던 중 1949년에 2년간 교육 과정을 정해서 교육생(훗날 10기)을 받았고[21], 다음 해인 1950년 6월 1일 처음으로 정규 4년제 교육 과정을 받는 교육생(기수 없음)을 받아 교육을 실시한다. 그러나 1949년 입학생이 임관을 코앞에 둔 시점이자, 1950년 입학생들이 기초군사훈련을 받던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져서 육군사관학교는 폐교되고, 아직 교육생 신분인 49년 입학생과 50년 입학생은 채병덕의 명령으로 전쟁 극초반에 소총병으로 포천에 투입되었다.[22] 이후 7월 10일, 교육이 거의 끝난 상태였던 49년 입학생들 중 생존자들을 찾아 임관식을 치렀다. 또한 국방부는 '전쟁 중이라도 장교 육성은 필요하다'고 깨달았고, 이후 아직 살아있던 50년 입학생들을 다시 찾아 육군종합학교에서 단기교육을 받게[23] 하는 한편, 1951년 10월 31일 경상남도 진해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다시 개교하고 새로 4년 교육 과정의 교육생을 모집하는데, 이들이 바로 하나회 일당들이 입학한 11기 교육생들이다.

그러나 선민사상이 끝내준 것에 비하면, 역대 육군사관학교 졸업생 중 최악의 자질들이었다. 인성이나 행보는 둘째치더라도 다들 공부를 매우 못했으며, 웃기게도 캡틴인 전두환이 제일 못했다. 이 시기의 육사 생도들과 비견되는 기수래봤자 내신 놀이로 입학한 54 ~ 58기, 그러니까 실업계 출신인데 내신만 좋아서 입학한 기수[24] 정도에 불과했다. 이 당시 육군사관학교 11기는 현재와 달리 갑종간부후보생에게 입지가 밀려있었으며, 2020년 기준으로 따지자면 거의 학사장교급 위상을 갖고 있었다. 갑종간부후보생이 육군사관학교 11기보다 위상이 높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게, 이들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육사 11기가 생도이던 시절에 이미 현역 장교로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위상 차이가 넘사벽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 육사 11기는 자신들이 공부를 못 했던 것에 대한 콤플렉스로, 이후 육사 출신 후배 장교들 중 하나회의 회원을 고를 때 학업 성적을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리고 이 교육생들이 졸업할 때쯤인 1955년 4월 27일, 육군본부는 '참전용사들의 대우를 겸해서 과거에 입학했던 군인들에게 육사 1기~10기를 부여한다'는 명령을 했다. 그런데 전쟁 중에 후방에서 안전하게 교육을 받던 1951년 입학생들은 이 조치에 반발했고, 그중 최우수 생도 김성진과 웅성(雄星) 백운택이 대표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항의하려다 만나지도 못하고 헌병대에 끌려가는 일이 있었다. 반면 전두환은 육사교장 박병권 장군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여 그냥 넘어 갈 수 있었다.

노태우는 이 일을 두고 회고록에서 "어려움과 배고픔을 견디고 간신히 졸업했는데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얘네가 후방에서 시험 걱정할 때 육사 1기~10기는 목숨 걱정부터 해야 하는 참전 군인들이었고, 객관적으로 봐도 3년간 실전 경험을 갖춘 군인들이었다. 참고로 얘네는 전부 생존했지만 육사 1기~10기는 매우 많은 인원들이 북한군과 처절하게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그냥 안전한 곳에서 교육만 받던 이들과, 감히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겪고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나라를 위해 싸운 참전용사는 감히 비교하는 것 자체가, 육사 1기~10기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이 행동은 미국 같은 나라였으면 군인이기 이전에 사회에서 매장당할 발언이었지만, 1951년 입학생 중 유의진 1명만 퇴학 조치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25]

이런 소동 끝에 육사 11기가 된 이들은 1955년 9월 30일자로 156명이 졸업하였다. 동년 10월 4일 소위 계급장을 달았으며 초등군사반 과정을 마치고 다음해 3월 전방 소대장으로 일제히 나간다.[26]

한편 소대장 생활이 끝난 후 수석졸업자 김성진을 필두로 성적순 몇 명이 차출되어 미국 유학 또는 서울대 대학원 과정을 거쳐 1959년 2월 육사 교수요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이른바 '학구파'라고 불렸는데 전두환·노태우 등 '운동부'의 최대 라이벌이었다. 학구파들은 육사 교수생활을 하며 '청죽회(靑竹會)'(서울 또는 이북 출신)를 만들었고 운동부들은 '하나회'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매사에 부딪치게 되었으니 청죽회 vs. 하나회라고 할만하다.

1961년 4월에는 육사총동창회인 북극성회가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실력있고 육사후배들과 계속 관계를 맺는 위치였던 육사 교수 신분은 학구파가 중심이 되었다. 초대 회장도 육사 교수 강재륜.

그리고 5.16 군사정변이 터졌다. 육사 교수는 못되니 대신 ROTC를 장악할 야심에 서울대 교관으로 나가 있다가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전두환은 다음날인 17일에 육사에 나타나 생도들을 이끌고 지지 시위를 하자고 하였다. 강영훈 육사 교장이나 동기생인 강재륜 교수등은 반대를 했지만, 쿠데타에 반대하던 교수들이 한명씩 끌려가자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18일에 육사 18기~21기 재학생들의 지지 시위가 있었고 5.16. 쿠데타를 결정적으로 성공시킨 사건으로 꼽힌다. 덕분에 전두환은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27]

이후 박정희는 자신의 경호를 위해 충성스러운 젊은 장교들을 원했는데 박종규 소령과 차지철 대위가 각각 10명씩 선발한다. 이중 차지철(갑종장교 출신) 쪽은 별 볼일 없고[28], 박종규(육사 8기)는 정규 육사 11기생 10명을 차출했는데 이들이 바로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이상 오성회), 손영길, 권익현, 박갑용, 노정기(전원 경상도 출신. 훗날 하나회 창설 멤버) 등이다. 이들은 경호실 근무로 권력에 핵심에 있었으며 이때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하던 박종규와 차지철, 윤필용 비서실장 대리는 훗날 하나회의 최대 후원자가 된다.

이들 청년 장교는 경호실 근무가 끝난 이후[29] 한 계급씩 진급하여 끗발 있는 보직으로 갔는데, 손영길은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전속 비서, 전두환 소령은 중정 인사과장(김복동, 권익현도 중정), 노태우는 보안사 방첩 과장이 되었다.

그리고 1962년 말부터 오성회 중 김복동을 제외하고 전두환, 노태우, 최성택, 백운택 4명에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를 포함하여 칠성회로 개편되었다.[30] 이들 칠성회는 이후 하나회의 모태가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워낙 보안을 철저하게 지켜 1973년 윤필용 사건 때까지 하나회가 아닌 칠성회로만 알려졌다.

그러다 1963년 2월 18일 박정희 전 의장이 원대 복귀 및 민정이양을 발표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최고회의 앞마당에서 반대 데모를 하는데, 이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31]

육사 11기의 정치 군인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박정희 의장의 전속부관 손영길을 앞세워서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 박갑용 등 5인은 의장 공관에 찾아가 원대 복귀 불가론을 제기한다. 그러자 박정희는 "여러분 뜻은 잘 알아. 그러나 정치는 그렇게 하는 거야."라며 자신의 민정이양이 페이크임을 알리고, "앞으로 일을 하려면 정규 육사 출신들이 똘똘 뭉쳐 나를 도와줘야겠어."라며 육사 장악을 지시한다.

이에 칠성회를 중심으로 노정기[32], 박갑용[33]이 합류했고, 김복동이 복귀하였는데 이를 텐 멤버라고 부르며 이들 10명이 1963년 일심회 창설 멤버가 되었다.(이후 하나회로 개명) 즉 오인회(1951년) → 오성회(1952년) → 칠성회(1962년) → 텐 멤버(1963년) → 일심회(1963년) → 하나회(1963년) 순으로 확대 발전한 것이다.

한편 육사 출신들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11기생 중 생도 시절 성적이 좋았던 장교들이 모인 상술한 '청죽회'가 중심이었는데, 5.16. 군사정변 때 육사생도들의 지지 시위를 요구할 때 당시 육사교수부에 배속된 청죽회는 이를 거부했다.[34] 평시였으면 당연히 성적이 좋았던 청죽회가 군대의 요직을 차지할 것인데, 박정희 입장에서는 청죽회의 충성심(?)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전두환처럼 비청죽회 동문을 중용할 필요가 있었기에 이런 지시를 한 것이었다. 여기에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박 실장, 앞으로 이 친구들 일하는 데 적극 도와줘"라며 백업을 명한다.

이에 박정희를 만난 텐 멤버를 중심으로 육사 장악을 시도하는데 청죽회 등 육사 교관단은 학창 시절 공부도 더럽게 못한 전두환 소령이 나대는 것을 보고 "네가 뭔데 나서냐"라며 고깝게 여긴다. 또한 청죽회에는 이북파들이 많았고 이들이 육사 총동문회인 '북극성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에 전두환은 당장 북극성회를 장악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고 영남 중심의 소규모 비밀 조직을 만들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육사 내부 영남 파벌의 일심회이다. 이 일심회가 바로 하나회의 초기 형태로, 뜻은 '태양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 같은 마음'에서 나왔다.(윤필용 증언)

멤버 선정은 물론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이 했다. 이때 노태우의 조직력이 뛰어나 후배들에게 호평받았다. 그런데 동기생들은 운동부인 전두환 자체를 싫어하니 합류할 가능성이 없었고, 12기~13기 역시 육사 생활을 함께 하며 전두환이 어떤 놈인지 잘 알았기 때문에 껄끄러웠다. 이에 럭비부 출신의 14기 배명국[35]이 후배기수 포섭에 주력하였고 이로인해 12기~13기가 14기보다 늦게 가입했다.

이때 일심회 11기는 텐 멤버 10명 + 안교덕[36], 남중수[37]로 구성된다. 이후 명칭이 하나회로 변경되는데, '국가도, 우정도, 충성도 하나'라는 뜻으로 11기가 정했다.[38]

가입 절차는 몇 년 동안 철저히 심사한 후, 약속한 시간에 11기 중 어느 집에 가면 11기 전체 회원이 일렬로 앉아 있는 곳에 혼자 가서 무릎을 꿇는다. 한 가운데에 전두환 회장이 앉아 있었고, 가입자는 무릎을 꿇은 채 오른손을 펴들고 다음 4개 항의 선서를 한 뒤, 11기 중 1명이 따라준 적포도주를 마시면 가입이 완료된다.

하나, 국가와 군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

하나, 선후배와 동료들에 의해 합의된 명령에 복종한다.

하나, 회원 상호간에 경쟁하지 않는다.

하나, 의리와 맹세를 저버리면 인간적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을 각오한다.


한 단어로 야쿠자 그 자체로, 특히 마지막 조항은 이들이 비밀 조직임을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정규 육사 출신을 매 기수별로 정원제를 유지하여 가입시키되, 기수당 2~300명 중 약 5% 수준인 10명. 최고 13명까지 하며 자격은 위관급 장교에서부터 주어진다.(통상 중위~소령 때 가입했지만 더 높은 계급에서 뒤늦게 합류하는 경우도 있었다.)
  • 가입에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동의가 필요하다. 일단 11기 중 1명이 한 기수에서 최초 1명을 추천하고, 그에 대한 철저한 뒷조사를 거쳐서 11기 전체의 동의를 받아서 선발했다. 그 최초의 1명이 자기 기수를 추천하고, 추천 받은 사람은 역시 11기와 해당 기수 동기 전체의 동의를 받아야 권유 명단에 포함된다.
  • 고위층으로부터 활동비를 지급받거나, 재벌로부터 자금을 수령한다.
  • 회원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진급 및 보직 상의 특혜라고 하는데, 당시 육군에서는 인사 정체가 심화되어 정규 육사 출신들은 의무 복무 기간 5년이 끝나고 장기 복무에 들어가게 되면 재기별로 현역 총원의 1/2씩만 상위 계급으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회 가입은 군 내에서의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39]

이러한 조건에 맞추어 일심회는 육사 졸업생 중에서 기수별로 10여 명을 선정하여 거의 스토킹에 가까운 설득과 강요로 가입시켰다. 선정 조건은 영남 지역 출신, 성적 우수, 정치색이었다. 대충 조건이 맞아 보이면 강제로 가입시키다시피 했다고 한다.

다만 처음부터 위 3가지 조건에 일치하는 사람만 골라 뽑기보다는, 한두 가지가 빠지더라도 다른 하나가 월등히 좋은 조건이면 가입시켰다. 예를 들면 영남 출신에 성향도 맞으면 성적이 평타만 되더라도 가입시켜준다거나, 혹은 성적 우수가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기 때문에 육사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이들은 영남 출신이 아니라도, 심지어 호남 출신이라도 뽑았다. 대표적인 예로 전라북도 부안군 출신 고명승이 있으며, 흔히 장세동도 호남 출신의 하나회원으로 꼽는데 사실 그는 전라남도 고흥군 출신이지만 국민학교 때 이사하여 계속 서울특별시에 거주하는 바람에 하나회 가입 전이든 후든 서울특별시 출신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가 하나회에 가입된 건 육사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모든 조건과 상관 없이 하나회의 빽이 되어 줄 수 있는 고위 장성의 친인척이나 부관들은 최우선으로 가입시켰다.

그러나 이북 출신은 절대적으로 배제되었다. 이는 박정희가 하나회를 만들라고 한 이유 자체가 백선엽, 이종찬 등 당시 군을 장악하고 있던 이북 출신을 견제하기 위함이고, 전두환 입장에서는 서울·이북 출신이 중심이었던 청죽회랑 라이벌 관계였기 때문에 이북 출신은 배제된 것이다. 이 때문에 '한수 이남 지역 출생자만 가입 가능' 이라는 말이 있었다.

가입 후에는 점조직으로 관리했기 때문에, 동기 회원들끼리도 누가 하나회 회원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초급 간부 시절에는 몰라도, 하나회가 요직을 독점한 탓에 나중에 가면 진급이나 직책으로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했다.

워낙 가입이 엄격하다 보니 육사 13기 최세창[40]의 경우에는 심지어 12.12. 사태 이후에나 가입이 가능하였다. 사전에 11기와 13기에게 엄격한 심사를 받아 왔고, 12.12. 와중에 보여준 충성심이 좋게 평가되어 가입이 된 것이다.

이렇게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결성했기에 작업에 착수한 지 1년 반이나 지난 후에야 이순자의 친척집에서 첫 모임을 하게 되었다. 이때 참석자는 서울 인근에서 근무하는 20명. 이후 연합 모임은 없었고, 1년에 한번 기별 정기 총회가 있을 뿐이었다. 이때 11기 중 1명이 반드시 참석해서 격려해주는 전통이 있다. 이 때문에 11기를 제외하고 같은 기수가 아니면 서로 하나회원인지 몰랐다고 한다.

위계질서가 생명인 군대에서 이들은 '형님', '아우'하고 호칭했으며 특히 11기의 경우 '큰형님'이라고 불렀다. 하나회의 후원자인 윤필용은 '대방동 큰형님'이라고 했으며, 박정희는 '태양'으로 칭하는데, 이들 사이에 일종의 암호 같은 역할을 하였다. 모르던 후임 장교가 와서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면 그제서야 하나회원인지 알게 되는 방식이다.

하나회를 영남 출신 위주로 꾸린 것은 5.16. 쿠데타 이후의 파벌 싸움과 관계가 있다. 5.16 쿠데타 이후 군사 정권 내에서 함경도 출신 정일권, 김동하, 박임항평안도 출신 장도영, 백선엽경상도 출신 박정희 간의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결국 박정희는 1961년 7월 3일 평안도 출신 장도영 장군을 쿠데타 음모 혐의로 구속하고, 11월에는 함경도 출신 김동하, 박창암도 쿠데타 혐의로 체포하면서 군부 내에서 이북 출신 세력을 완전 제거하고 일인독재를 확립한다. 이런 이북 출신에 대한 일련의 숙청을 당시 군부 내에선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고 불렀다. 1948년 남북이 각각의 정부를 수립하고, 1950년~1953년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이북에서 자유를 찾아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 중에서 적지 않은 수가 육사 5기와 군대에 입대하여 파벌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1945년~1950년에 이북은 '겉은 빨갛지만, 속은 하얀 사과'였고, 남쪽은 그의 반대였기에, 1953년 휴전 이후에 이북 출신들이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런데 비록 육사 2기였지만 박정희는 남로당 관련 논란으로 한때 사실상 군복을 벗고 있을 때도 있었기에 그 위치가 높지 못하였다. 이는 국가재건최고회의 활동 시기에 국정 주도권을 잡기 위한 권력 투쟁을 불러왔다.[41] 또한 위에서 나온 육사 '기수' 문제에서 정기 4년제 1기인 11기생들에 대한 장악은 김종필을 필두로 한 육사 8기에 대한 견제가 작용하였다. 전두환은 이 긴박하고 혼란했던 시기에 하나회를 만들어냈다. 함경도 출신 정일권, 평안도 출신 백선엽 등 몇몇 이북 출신들이 살아남았지만 이후 군내에서 세력화는 하지 못하고 박정희한테 절대 충성하는 부하로 전락한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군을 완전히 휘어잡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내 고향 후배들로 구성된 사조직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3.1. 이설[편집]


하나회 결성의 주동자와 시기에 대해 전혀 다른 설들이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창설 멤버인 육사 11기 권익현 전 민주정의당 대표는 2015년 월간조선을 통해, "1963년 김종필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4대 의혹 사건으로 여론이 들끓자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당시 박정희 전속 부관) 등과 함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비판 여론을 전달했다"라고 하였고, 이에 박정희는 "너희(육사 11기)가 뭘 좀 만들어봐라"라고 해서 박의장에게 힘을 주고 싶은 생각에 하나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위의 기사가 나가자 육사 11기이자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과 함께 7성회 멤버였던 손영길은 같은 연월 14일 신동아와 전화 통화에서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다. 전두환과 내가 함께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를 처음 만난 것은 1967년 내가 전두환을 30경비대대장 후임으로 추천하면서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하나회는 나라에 충성하는 능력 있는 군인 모임으로 내가 만들었고, 대통령을 경호하는 30대대장이 회장을 할 수 없으니 전두환에게 회장을, 이종구에게 총무를 맡겼던 것"이라고 하였다.[42]

2016년 1월 자 신동아김충립 전 수경사 보안반장[43]의 육필수기에 의하면 손영길이 1965년 30대대장이 되고 나서 이듬해에 '우수 장교 친목 모임'을 만든 것이 출발점이라고 한다. 이 조직이 1967년 전두환이 30대 대장이 되면서 군 내 비밀 사조직이 되었다는 것이다.[44]

또 다른 하나회 창설 멤버인 육사 11기 노정기 필리핀 대사는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등은 예전부터 경쟁 관계여서, 그들의 주장에 대해선 노코멘트하겠다. 확실한 것은 하나회라는 육사 11기 모임은 전두환이 주도한 '5성회', '7성회'에서 출발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모임 명칭을 들어본 적이 없다. 동기생 10여 명이 모여 친목 모임을 했는데, 이후 후배들을 모아 하나회를 조직한 것은 기억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노정기는 7성회 멤버가 아니었으며, 이른바 매 기수 별로 한두 명씩 상징적으로 가입시켰다는 비영남 출신의 대표적이 인물이다. 그 바람에 하나회의 속 사정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다. '7성회'란 모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어이없는 주장은, 어쩌면 그가 하나회 핵심에 전혀 접근하지 못했다는 방증일 수 있다.

"하나회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결단으로 해체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전에 스스로의 결정으로 해산했는데, 괜히 김영삼이 쇼한 것"이라는 하나회 회원들의 많은 인터뷰도 있다. 김영삼 해체 당시 육참총장, 보안사령관,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인사참모부장, 수방사 30, 33 경비단장이 모두 하나회원인건 우연입니다.

"전두환이 만들기는 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 용도 폐기했다"는 육사 20기 안병호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안병호는 아래 하나회 숙청 항목에서 당시 수방사령관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여기저기 줄 대고 있었다는 그 사람이다. 민병돈 또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군대 내에서 자유 비밀투표를 하다 좌천된 적이 있고 1987년 6월 위수령 또는 계엄 선포와 시위대 해체 계획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1980년 전두환은 참여하지 않았으나 박희도가 그의 명에 따라 자리를 주재하여 경복궁에서 공식적으로 해산 모임을 하였다고. #

이들의 주장만 보고 오해할까봐 첨언하자면 1987년 6월 항쟁에 따른 민주화 과정에서 고명승 보안사령관이 "세상이 어지러운데 유사시 우리 말을 잘 들을 젊은 놈들을 군내에 박아둬야 한다."라며 30기~36기(1980년 임관) 하나회를 한두 달 사이에 급조했다. 즉, 하나회는 전두환 말기까지도 계속 신규 회원을 가입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1980년대는 하나회의 시대'라는 말이 회자되었는데, 군내 최대 사조직으로 알려진 하나회가 한국을 경영했기 때문이다. 일단 1980년대 2명의 하나회원 대통령이 있었고(전두환, 노태우), 안기부장, 청와대 경호실장, 국방부장관, 기무사령관 등 권력의 핵심은 계속하여 하나회였다. 군을 전역해도 정부각료, 고위공직, 감사원 감사위원, 대사, 국회사무총장, 각 청장, 정부투자기관의 감사 및 이사, 안기부 고위간부, 민주정의당 역대 사무총장 상당수와 전국구 의원 10명도 하나회 출신이었다.

4. 활동 과정[편집]



4.1. 박정희의 비호[편집]


1961년 서울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 교관으로 근무 중이던 대위 전두환은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박정희의 친위세력을 자처하면서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조직하였고, 이 공로로 박정희[45]의 비서관으로 보임되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가 군 수뇌부와는 별도로 군 내 자신의 친위세력을 심어둔다는 의미에서 하나회를 방조 혹은 적극적으로 육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윤필용 사건 이전부터 박정희는 전두환, 손영길 등 육사 11기의 준장 진급식에 파티를 열어주고, 별도로 고급 승용차까지 하사하였다. 노태우, 김복동에게는 '하나회'의 최초 명칭인 일심회의 '일심()'이라고 새겨진 지휘봉을 내려주었다. 이는 다른 장성들에게는 하지 않은 대단한 특혜였다. 하나회의 존재가 박정희에게 공식적으로 보고된 이후에도 전두환을 최고 요직 중 하나인 보안사령관에 임명하는 등 계속해서 신임을 보였다.[46]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박정희가 하나회의 존재를 보고받자 격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와 다르다는 게 보편적인 평가다. 당시 박정희에게 충성을 경쟁하던 인간들은 널렸는데, 대통령이 조직의 존재 자체를 알고 격노할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면 실제 훗날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 이상의 강도로 하나회를 박살냈을 것이고, 핵심 구성원인 전두환과 노태우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슬퍼런 독재 권력을 가진 박정희의 노여움을 산 일개 사조직이 나중에 자신들의 보직을 이용하여 나라를 뒤엎었다는 게 말이 되는지 의문이다. 작중에서는 이를 박정희가 잠깐 격노하지만 전두환의 각하 친위대 드립[47]을 듣고 풀어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한편 박정희가 하나회를 적극 지원했다는 설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있다. 박정희가 취임할 당시 총애하던 차지철과 전두환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는데, 차지철은 이를 흔쾌히 응해서 전역하고 정치인이 되었다. 반면에 전두환은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면서 의원직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게 맞다면 애초에 전두환은 군 내부에서 박정희 친위세력을 만든다는 이유로 전역을 거부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전두환 총애, 이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것이, 군인이라면 당연히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충성해야 한다.[48]

4.2. 자리 물려주기[편집]


윤필용, 유학성, 서종철 등 군 상층부의 지원을 받은 하나회 회원들은 초급장교 시절부터 노골적인 인사특혜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국방부, 육군본부, 특전사, 보안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등 진급이 보장되는 요직들을 옮겨 다녔고, 특히 1960년대 말부터는 육군본부 진급과와 보안사 내사과[49] 실무자를 대물림하면서 자신들의 보직을 챙겼다. 가장 대표적인 대물림 사례가 바로 1공수여단장을 전두환 → 박희도 순서대로 보직한 것.

야전부대 지휘 경력이 필요하면 서울특별시 근교의 제9보병사단이나 제9공수특전여단 등에 잠시 다녀오는 식이었다. 특히 9사단의 경우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실전 부대로, 쿠데타나 대규모 시위 발생시 정치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부대이다. 박정희가 하나회 출신들을 9사단에 집중 배치한 건 단순히 서울특별시와 가까워서만은 아니었다. 이처럼 권력과 밀착된 위치인 대통령경호실, 중앙정보부 파견 근무도 이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정작 하나회 회원들의 진급 에스컬레이터마냥 이용되던 9공수가 12.12. 군사반란 당시 하나회의 가장 무서운 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다. 반란 당시 수도권 소재 4개 공수특전여단(1여단, 3여단, 5여단, 9여단) 중 9여단장 윤흥기[50] 준장갑종장교 출신으로 하나회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고, 나머지 1여단, 3여단, 5여단장은 전부 하나회 회원이었다. 그래서 9여단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지만 반란군 측에서 제안한 신사협정에 진압군 수뇌부가 속아 넘어가며 9여단 병력은 원대 복귀했고, 결국 반란을 진압할 최대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수도방위사령부는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자리라는 특성 때문에 한미연합군사령부의 지휘라인에 벗어나있다. 만약 쿠데타가 일어나 충정작전을 위해서는 수도 인근의 9사단을 지휘하는 중요한 자리. 평시에 수방사는 30경비단과 33경비단, 헌병단 밖에 없는데 사실상 이들이 근위대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30경비대대(30경비단의 전신) 초대 대대장이 바로 하나회원 손영길 중령. 그리고 손영길의 추천으로 67년에 전두환이 30 경비대대장에 임명된다. 그는 이 자리의 중요성을 충분히 깨닫고 있어 부대대장에 하나회원인 오한구 소령(13기)과 이종구 소령(14기. 하나회 총무)를 작전장교에 장세동 대위(16기)와 안현태 대위(17기), 정보장교에 김진영 대위(17기)를 임명했으며 중대장들 역시 이현우 대위(17기), 조남풍 대위(17기), 서완수 대위(19기), 전영진 대위(21기)등으로 아예 도배를 해버렸다.[51]

아무튼 단적으로 1980년부터 1993년까지의 하나회 멤버들이 맡은 주요 보직을 보자면,
  • 육군참모총장 6명 중 5명[52]

  • 보안사령관 10명 전원

  • 수방사령관 10명 중 8명

  • 수방사 직할 30경비단장 6명 전원, 33경비단장 7명 전원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을 역임한 15명 가운데 13명

  • 대통령 경호실장 5명 전원

  • 육군본부 주요 직책에서 일한 사람만 15명으로 11기에서 20기 중에서 한 번도 육본에 있어본 적이 없는 기수는 14기와 17기뿐이다.

전두환이 권력을 잡기 이전인 박정희 때도 마찬가지라 당시 영관급 요직이었던 수방사 경비단장, 보안사 실·처·지구대장, 수방사 대대장·작전참모, 특전사 작전참모, 수도권에 있는 9사단, 30사단 연대장·작전참모가 대부분 하나회원이었다.

4.2.1. 빠른 진급[편집]


하나회는 다른 장교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진급이 빨랐으며 하나회 내부에서조차도 전두환이 가장 빨랐다. 일단 전두환의 경우, 소령은 재직 기간이 1년 정도에 불과해 사실상 대위에서 바로 중령이 된 거나 다름 없었으며 1973년 고작 42살의 나이에 준장에 진급했다. 경력으로 따지자면 소위로 임관한 지 고작 23년 만에 장성급 장교가 된 것이며 이는 현직 준장보다 약 10년 정도 진급이 빠른 것이다. 게다가 1955년소위로 임관한 전두환1950년에 임관한 장태완과 비교했을 때 1978년에는 둘이 동일한 소장이었다. 문제는 장태완은 명백히 6.25 전쟁 참전용사인 것에 비해 전두환은 같은 기간 육군사관학교 생도로서 후방에서 학업에 전념했을 뿐이었는 점이다. 전두환 뿐만 아니라 노태우 역시 1년 남짓 정도의 차이를 두고 전두환과 거의 동일한 루트와 동일한 진급 속도로 군복무를 했다. 게다가 박희도, 최세창 등 하나회 장교들은 이런 식으로 진급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참고로 육사 10기 다음해에 전두환의 육사 11기가 있던 것이 아니라
6.25 이전 군영, 육사 1~9기, 갑종 1~2기가 있었고,
6.25 중에 육사 10기, 육종 1~32기, 갑종 3~50기쯤
6.25 이후 갑종 50기~111기쯤 그 다음 기수가 1955년 졸업한 육사 11기이다.

즉, 육사 10기와 11기 사이에는 까마득한 차이가 있었고 6.25때 맹활약한 수천명의 갑종, 육종 출신 선배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정책으로 11기는 선배들을 다 뛰어넘고 육사 10기 턱밑 까지 따라 왔다. 육사 10기가 1950년 7월 임관했으니 1955년 임관한 육사 11기는 말도 안되는 속도의 승진이었던 것. 절대 육사 10기 다음해가 11기가 아닌 것이다.

다만 전두환 등이 열받는 포인트는 자신들은 정규 4년제이고, 육사 9기는 1년제, 그 이전 기수는 몇 달, 육종과 갑종은 몇주 교육 밖에 안받았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군영부터 육사 8기까지 전체 교육을 다 합쳐봤자 3년이 안되어 육사 11기의 4년에 비교할 수 없이 적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르고, 하물며 몇주 교육 받고 임관한 갑종과 육종 선배들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리고 육사 선배들도 5년을 건너뛴 이들 후배만을 당겨주었다. 이는 12.12. 쿠데타를 이해 하는데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4.3. 소속원 실드[편집]


  • 전두환: 연대장으로 부임 직후 베트남 전쟁 참전 당시 무기밀수를 하다가 적발 당함.[53]
  • 이종구: 전방부대 대대장으로 부임 시, 소속부대원 10여 명이 사상하는 총기사고 발생.
  • 박희도: 1공수여단장 재임 시, 무장공비가 박희도 부대 근처를 마음껏 활개치고 다닌 뒤 복귀 성공.[54]
  • 박준병: 20사단장 시절, 훈련 중 6명 사망, 예하부대에서 월북 사건 발생
  • 최평욱: 사단장 재임 시, 예하부대에서 월북 사건 발생.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면 대개 진급은 커녕 아예 군복을 벗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런데 해당 인물들은 아무도 군복을 벗지 않았고, 진급에 있어서 아무런 피해도 보지 않았다.

4.4. 야전군 지휘 경험 부족[편집]


하나회의 리더 전두환의 군 경력들을 살펴보면, 1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적을 빼고는 제대로 된 전방부대에서의 근무 경력이 사실상 없다. 다른 하나회 핵심 멤버들도 비슷하다. 대부분 실전부대 근무는 서울 근교의 충정부대[55]에서의 근무 경력뿐이다.

대표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까지 노태우의 전체 군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955년 5사단 27연대 3대대 11중대 3소대장(소위) - 경기도 양평군[A]
  • 1955년 5사단 27연대 3대대 작전장교(소위 ~ 중위) - 경기도 양평군[A]
  • 1956년 육군보병학교 장교후보생 구대장(중위) - 전라남도 광주시
  • 1957년 육군정보학교 어학반 연수(중위) - 경상북도 대구시
  • 1957년 육군정보학교 어학반 교관(대위) - 경상북도 대구시
  • 1959년 미군 특수전학교 및 심리전학교 교육 이수(대위) - 미국
  • 1959년 공수특전단 정보참모(대위) - 서울특별시
  • 1960년 군사정보단 군사정보 해석관(대위) - 서울특별시
  •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ROTC 교관(대위) - 서울특별시
  • 1963년 육군방첩부대 보안처 보안과 보안계장(대위) - 서울특별시
  • 1966년 육군방첩부대 정보과장/방첩과장(소령) - 서울특별시
  • 1966년 육군대학 교육 이수(소령) - 경상남도 진해시
  • 1967년 20사단 60연대 1대대장(중령) - 강원도 철원군[A]
  • 1968년 수도사단 1연대 3대대장(중령) - 베트남
  • 1969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장교보직처 기획보좌관(대령) - 서울특별시
  • 1970년 육군본부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대령) - 서울특별시
  • 1971년 8사단 21연대장(대령) - 경기도 포천군
  • 1973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전투정보과장(대령) - 서울특별시
  • 1974년 25사단 부사단장(준장) - 경기도 양주군
  • 1974년 육군특수전사령부 9공수여단장(준장) - 경기도 인천시[56]
  • 1976년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행정차장보(준장 ~ 소장) - 서울특별시
  • 1979년 9사단장(소장) - 경기도 고양군

경력을 대충만 살펴봐도 대대장 시절, 그리고 8사단 21연대장 시절을 제외하면 격오지에서 근무한 적은 거의 없고 철저히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근교와 후방에서만 근무했음을 알 수 있다.[57] 승승장구했으며 특히 대위 시절에는 소령 진급의 필수 조건인 중대장 경력이 없다. 육군에서 소령으로 진급하려면 기본적으로 중대장 보직을 2회 맡아야 하고[58], 장성까지 진급하려면 저 두 번의 중대장 중에 한 번은 반드시 전방 사단에서 중대장을 해야 한다. 그런데 중대장 자체를 거치지 않았는데 장성까지 진급한 것은 뭔가 이상한 이력이다.

게다가 연수나 교관직, 구대장직 등의 교육 훈련 기관이나 철원 배치 및 해외 파병 이외에는 모조리 수도권을 벗어난 적이 없고, 보안사, 육군 본부, 청와대 등이 전체 경력에서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다만 학사 출신이 매우 드문 당시 한국군 사정상 정규 4년제 1기인 육사 11기부터는 군 내에서도 우대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4.4.1. 폐해[편집]


이러한 야전 경험의 부재는 당시 전투병과 장교라면 의무적이었던 베트남 전쟁 파병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전방부대에서 다양한 훈련과 여러가지 상황을 직접 겪어봐야 경험이 쌓일 텐데 하나회 장교들은 이런 게 전혀 없었다. 후방 사령부에서 펜대만 굴리면서 야전부대 지휘에 관해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실전에 투입되니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베트남 파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면 1계급 진급과 무공훈장 수여가 관례였기에, 하나회 장교들은 뒤에서만 일하면서 자기 승진용으로 전쟁을 써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9사단 29연대장으로 베트남에서 1년을 근무한 전두환이 귀국하자, 훈장 심사에서 상관들이 직을 걸 수준으로 결사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야전에서 전두환의 실전 지휘는 심각하게 엉망이었고, 온갖 볼썽 사나운 행동을 계속하더니, 일선에서 싸우는 장병의 사기를 끊임없이 떨어뜨렸다는 것. 몇 가지가 당시 현장에서 사유로 지적되는데, 자신의 전과를 조작하기 위하여 암시장에서 베트콩 무기를 구입하여 상부에 전리품으로 보고하다가 직속 상관인 조천성에게 발각되었고, 부대의 식수가 부족해 병사들이 물을 찾는 상황에서 혼자만 온수 샤워를 즐기고 한가롭게 테니스를 치다가 병사들이 폭주하는 등, 부적절한 처신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결국 진급과 훈장 수여는 무산되었다.

한마디로 야전 군인으로는 무능하고 정치적 감각만 발달한 군 내의 민폐 집단. 노태우 정부 시절 1992년 지만원[59]이 군부 내 사조직의 병폐를 적나라하게 비판한 칼럼한겨레신문에 기고되었다. 사실 지만원 본인이 육사 22기로 하나회의 위세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군 생활을 했기 때문에, 상당히 쌓인 게 많았을 것이다.

일례로 전두환이 1978년에 육군 소장으로서 제1보병사단장에 발령된 나이가 48세. 2013년 기준으로 육군 대령에 진급하는 나이가 46세이며, 소장에 진급하는 나이가 53세 전후임을 감안할 때 말도 안되는 나이에 이 위치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육사 10기는 강창성이 40세에 5사단장이 되는 것처럼 전두환보다 진급이 더 빠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육사 11기 이전의 장교들이 한국전쟁으로 갈려나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생존만 한다면 진급을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처지라서 진급이 빨랐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 때는 주요 한국군 수뇌부가 30대 정일권 장군이 33세에 소장 계급으로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을 맡고, 유재흥 장군은 29세에 준장 계급으로 7사단장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33세에 대장으로 진급할 정도였고, 이런 빠른 진급은 심각한 인사적체를 불러왔다 5.16 쿠데타의 원인 중 하나가 인사 적체로 인한 육사 8기의 반발이라는 주장도 있다.[60] 한국전쟁 이후 임관해서 어쩌면 현대 한국군보다 더 심한 인사 적체를 맞은 육사 11기는 당연히 진급 속도가 더 느려야 하는 게 정상인데, 하나회 일당들의 진급 속도는 현대 한국군과는 비교할 수 없고, 전쟁을 겪고 살아남았던 육사 10기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진급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이에 대한 변명이 하나 있는데 박정희는 하나회 일당들의 진급 속도가 빠른 사유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하나하나 돌려가면서 베트남 전쟁에 파병시켰다. 일례로 전두환 → 노태우 → 박희도 이런 식으로 베트남에서 조금씩만 복무시키면서 하나회 일당들을 최대한 베트남 전쟁에 파병시킨 것이며 전쟁을 겪고 살아남았던 육사 10기가 한국전쟁을 내세울 때 하나회 일당들은 베트남 전쟁을 내세우게 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게 비교 대상일 수가 없는 게 육사 10기는 진짜로 지옥을 뚫고 소위로 임관한 자질들인데 비해 하나회 일당들은 그럴 시간에 후방에서 꿀이나 빨면서 사고치고 있었으며 베트남에서조차 하는 일도 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었던 게 전부였다.

MBC 제5공화국 드라마를 보면 알겠지만, 육군사관학교 10기인 소준열 장군이 소장 계급으로 한직인 육군종합행정학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반면, 후배들인 전두환 장군은 중장 계급으로 보안사령관, 노태우 장군은 소장 계급으로 수경사령관, 정호용 장군도 소장 계급으로 특전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또한 1947년에 이등병으로 입대하여 6.25 전쟁 중 장교로 현지임관최갑석 장군이 소령 계급으로 포병 대대장을 맡고 있을 때 육사 11기 졸업생들을 신임 소대장으로 받았는데, 최 장군과 육사 11기가 74년에 같이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게 어떤 거냐 하면 2023년 현재 소대장급인 소위대대장급인 중령의 짬밥 차이는 대대장급의 중령군단장급의 중장만큼 차이난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대대장과 군단장이 맞먹은 셈이다.

4.5. 7.6. 거사 사건[편집]


그러다 전두환, 노태우(당시 육사 총동창회 3대 회장)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와 1963년 7월 6일 거사를 모의한다. 명분은 4대 의혹 사건으로 인한 부패 척결과 육사 출신 장교의 진급의 불공정이다. 그래서 거사 날짜를 7월 6일로 잡고 자신들이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중정, 방첩부대와 함께 공화당과 자민당의 합작을 반대하는 최고위원 및 공화당 요인 40여 명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를 위해 손영길, 노태우는 중정부장 김재춘(육사 5기)을 찾아가 "부장님만 묵인하면 그런 부패한 인물(김종필 계열을 뜻함)들을 전부 퇴진 시키겠습니다."라고 의향을 비추기도 하였다. 그리고 7월 6일 아침 경찰이 먼저 알게 되어 비상이 걸리고, 이를 보고받은 김재춘이 즉시 박정희에게 알렸다. 이에 쿠데타 음모는 분쇄되었고 이들 육사 11기생들은 구속이 거론되었지만 결국 선처로 끝났고[61] 김재춘은 중정 부장에서 물러나고 후임으로 김형욱(육사 8기)이 임명되었다. 이것이 1963년 '7.6. 거사 모의' 사건으로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고 조사로만 끝났다.

거사 모의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은 5.16. 자체가 군을 동원한 육사 5기와 계획을 짠 8기라는 두가지 세력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쿠데타 후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김재춘등 육사 5기와 JP등 육사 8기는 계속 충돌하였는데 초대 중정부장에 이어 제3대 중정부장이 된[62] 김재춘은 중정내 차장, 과장, 지부장을 하던 육사 8기 31명을 잘라 버렸고, 그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육사 11기와 손을 잡은 것이다. 마침 전두환 소령과 노태우 대위 등은 쿠데타로 인해 육사 8기인 JP가 중정부장 등 요직은 다해먹는 사이에 나이[63]로 보나 기수로 보나 별 차이가 안나며, 게다가 4년제 정규 교육을 받은 자기들은 중정에서 말단으로 있는 상황에 열받은 것이다. 즉, 진급에 불만이 매우 강했다. 물론 이들 뒤에는 육사 8기와 JP를 견제 하고 싶은 박정희가 있긴 했는데, 어디까지나 견제 정도였지 친위 쿠데타까지 원한건 아니었다.

어쨌든 전두환과 노태우는 쿠데타는 쿠데타인데 박정희와 김재춘이 견제하던 JP와 육사 8기 40명만 목표로 하는 희한한 쿠데타였다. 이때 사건을 조사한 것이 정승화 방첩대장이라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정승화는 이때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처벌하려 하였으나 김재춘이 직을 내놓고 용서해달라고 했고, 박정희도 자신의 충복들이라 그냥저냥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무엇보다도 처벌을 하려면 쿠데타가 일어난지 2년밖에 안되었는데 또 다시 쿠데타가 발생할 뻔 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정권에 부담이 된 것이다. 그리고 부하들끼리 상호 견제가 정치 스타일인 박정희의 뜻대로 김재춘 중정 부장의 후임은 육사 8기 강경파인 김형욱이 되었다.

이것이 하나회의 첫번째 위기였다. 하나회의 싹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냥 이렇게 어영부영 지나가버린 것이다. 노태우 회고록에 의하면 4대 의혹 사건으로 인한 국민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충정 발언을 바친 것뿐이라며 간단히 지나간다. 2번째 위기는 10년 후 터지는데 바로 윤필용 사건이다.

4.6. 하나회 주도권 잡기[편집]


하나회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육사 시절 공부 대신 공 차기로 시간을 보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 등 칠성회가 주축이 된다.

이들 중에서 손영길은 박정희의 7사단장 시절 최우수 중대장이 되어 눈에 들기 시작하여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전속부관이 된다. 이후 손영길이 전두환 대위를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 민정비서로 꽂아주기도 했고, 1963년 쿠데타 음모 사건 때는 손영길 소령의 도움으로 훈방되었다. 1963년경 박정희를 찾아갔다가, 박정희에게 육사 내에 사조직을 만들라고 지시 받은 것도 이들 칠성회의 '손영길, 전두환, 권익현, 노태우' 였다.

손영길은 청와대 외곽을 경호하는 30대 대장으로 4년간 근무하다가 1967년 육군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후임으로 전두환을 꽂아 주게 된다. 여기에 전두환보다 한 해씩 승진이 늦으면서 전두환이 지나왔던 자리를 그대로 넙죽넙죽 받아 먹으면서 성장한 것이 노태우이다. 즉 1번주자 손영길, 2번주자 전두환, 3번 주자 노태우의 서열이 형성되어 있다.

이런 서열 관계는 부인들끼리도 유지되어, 전두환의 부인인 이순자는 노태우의 부인인 김옥숙을 대놓고 하급자 대우를 하였다. 몇십 년간 수모를 당하고 있던 김옥숙이 1988년 남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순자에게 "이제 나는 당신과 다르다. 당신은 체육관 출신 대통령 부인이고, 나는 전 국민이 뽑은 직선 대통령 부인이야! 옛날에는 많이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고 일갈한 것은 언론에서도 공개된 아주 유명한 일화다.[64]

사실은, 위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굳이 하나회가 아니더라도 직업군인의 부인들 사이에서는 남편의 계급대로 서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대한민국 국군의 오래된 병폐다. 하다못해 부인들이 다같이 모여서 김장을 하더라도 부대장 부인은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까딱까딱하고, 하급자 부인들은 서열대로 개처럼 구르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남편의 계급대로 서열이 정해지기 때문에, 높은 지휘관이 나이 차이가 좀 있는 여군 부사관과 결혼했고 휘하 장교들이 동기 여군 장교와 결혼을 했더라도 높은 지휘관의 부인인 여군 부사관이 부하장교 부인인 여군 장교들을 상대로 윗전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명하복이 필수인 군대에서 위아래가 없이 썩어버린 병폐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래도 1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역시 손영길, 전두환, 김복동, 최성택이었는데 이들 4명은 함께 대령으로 특진했고, 1973년 1월 1일자로 육사 11기 중 최초로 준장 승진하게 된다. 특히 전두환 vs 손영길 vs 김복동의 경우 육사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다. 최성택의 경우 포병 출신으로 덕을 본게 있어 앞서 3명에 비하면 파워가 떨어지는 편이다.

4.7. 윤필용 사건[편집]


하나회의 존재가 처음 불거진 것은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었다. 당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윤필용과 가까운 군 내 후배들을 조사하면서 하나회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 하나회의 존재에 대한 보고를 받고 박정희가 격노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는 실제 사실과 명백하게 다르다. 오히려 박정희에게 하나회 제거를 건의했던 강창성은 제3군관구사령부로 좌천되어 권력 핵심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렸다.

그런데 이들이 막 준장으로 승진한 1973년 3월 8일 윤필용 사건으로 수경사 사령관 윤필용이 구속되고, 사건 다음날 참모장 손영길 준장은 15사단 부사단장에 보임되었다가 1주일 후 보직해임되고, 보안부대원들에게 압송되어 서빙고에 구속되어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전역서를 쓰라"며 멧돼지 통구이 하듯 손발이 묶인 채 고문을 당했다.

윤필용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불경한 말을 했다는 혐의라도 있지, 손영길은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로 2015년 7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이 사건으로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윤필용 사건에 손영길을 엮어 넣은 것이 전두환 준장과 노태우 대령이라는 의혹이 있다.(손영길 장군의 증언)

사건 이전에 윤필용이 사석에서 1공수여단장 전두환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손영길을 참모총장으로 키우라'는 당부가 있었으니, 너는 더 분발해야겠어"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육사 11기 중 가장 먼저 참모총장이 되겠다는 포부와 자부심을 갖고 있던 전두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결국 박종규 경호실장 vs 윤필용 수경사령관 vs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라는 거물들의 파워 게임 속에, 박종규계인 전두환, 노태우가 그 틈을 타고 자신들의 라이벌인 손영길을 제거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손영길이 제거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윤필용과 이후락의 관계 회복을 위해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1:1:1 구도에서 1:2로 몰리게 된 박종규는 반전을 꾀하기 위해 윤필용과 그 오른팔인 손영길을 제거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회 소속 장교 중에 희생양으로 손영길 준장과 11기 안교덕, 14기 핵심 배명국 등 31명이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하나회의 핵심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는 박정희가 직접 나서 덮어 버렸고, 오히려 하나회 일망타진을 주장하던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좌천시켜버렸다. 이후에도 위에 서술된 것처럼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 장교들은 권력과 밀착된 핵심보직을 옮겨다니면서 승승장구했다.

하나회 제거를 건의했다가 오히려 박정희에게 내쳐졌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12.12 군사 반란으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무려 4회, 거의 7개월이나 삼청교육대를 들어갔다 나왔다 해야만 했고, 후유증으로 드라마 제5공화국이 방영되는 무렵에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6.25. 전쟁에서 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로 본래는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지만, '금고 2년 이상 선고받은 자'는 안장 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을 만들면서 1980년에 신군부에서 탄압받는 과정에서 4년형을 선고받은 그도 국립묘지 안장이 부결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자면 비록 사면은 받았어도 실형을 선고받은 신군부 인사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을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탄압받은 강창성까지 대상이 된 셈이다.

5. 12.12 군사반란 당시 핵심 인물[편집]


이하의 하나회 구성원은 어디까지나 정규 육사로 일컫는 11기 이후로만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당시 국방부 군수 차관보 유학성 중장, 1군단장 황영시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등 11기 이전 출신 인사들은 "신군부이자 하나회의 후원자"라고 하면 맞지만, 하나회 회원은 아니다.

1212 가담 하나회 주요 멤버 정리

5.1. 주동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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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1기. 하나회 회장이자 12.12 군사반란 주도자. 셀프로 중장, 대장 진급 후 예편하여 대한민국 제11, 12대 대통령[65] 셀프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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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1기. 12.12 군사반란이 끝나고 수도경비사령관국군보안사령관을 거쳤으며 대장 진급 후 예편하여[66] 내무부 장관 등을 거쳐 전두환 이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당선.[67]

5.2. 보안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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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7기. 전두환의 보안사 핵심참모 3인방 중 1인. 준장 진급 후 예편한 뒤, 청와대 보좌관으로서 막강한 파워를 누린 5공화국 초기 정권 최고 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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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7기. 전두환의 보안사 핵심참모 3인방 중 1인. 허화평과 마찬가지로 준장 진급 후 예편한 뒤, 청와대 보좌관으로서 막강한 파워를 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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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8기. 전두환의 보안사 핵심참모 3인방 중 1인. 준장 진급 후 예편한 뒤 민정수석, 안기부 차장 등으로 5공화국 내내 전두환의 측근으로 일함.

5.3. 수경사[편집]


  • 제30경비단장 대령 장세동[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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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6기. 전두환의 충복.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3공수여단장이 되었으나, 전두환이 장세동을 아껴 청와대로 데려갔다. 대통령경호실장[69]국가안전기획부장을 역임한 5공화국 최고 실세.

  • 제33경비단장 대령 김진영[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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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7기. 쿠데타 이후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 소장으로 진급 후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역임했으며 이후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소장)과 육군3사관학교장(소장), 수도방위사령관(중장), 육군교육사령관(중장),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대장),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이후 1993년 하나회 숙청 때 1번으로 숙청되었다.

  • 33헌병대장 중령 최석립[71]
육사 19기. 육군 헌병감(준장) 역임.

  • 헌병단 단장 대령 조홍(趙洪)[72]
육사 13기.[73] 육군 헌병감 역임. 준장 전역.

  • 헌병단 부단장 중령 신윤희
육사 21기. 육군 헌병감 역임. 예비역 소장. 수경사의 핵심 보병전력 헌병대장이었고 수경사 점거 후 조용하게 숨어 있다가 마지막에 전두환의 지시에 본부를 급습해 장태완 수경사 사령관을 체포하였다. 12.12 당시 서울에 위치한 주요 핵심 시설들의 요소 하나하나에 하나회의 입김이 있었고, 수경사 내부에 이미 반란군 세력이 있었기에 막는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74]했음을 알 수 있다. 신윤희는 후일 '12.12. 군사반란의 사건에 대한 진실'이라며 장태완 소장을 왜 체포해야했는지라며 자신의 행보[75]와 군사반란을 옹호하는 책이자 불쏘시개를 친히 출간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자신을 하나회 출신이 아니라며 거짓말 이력까지 달았다.

5.4. 육군본부[편집]


  • 범죄수사단장 대령 우경윤[76]
육사 13기.

  • 헌병감실 기획과장 대령 성환옥[77]
육사 18기.

5.5. 사단[편집]


  • 제50보병사단장 소장 정호용[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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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1기. 12.12. 군사반란 당시에 후방에 있어 어느 정도 참여했는지에는 이설이 있음. 쿠데타 이후 육군특수전사령관(중장)을 거쳐 대장으로 진급하여 제3야전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 국회의원을 역임한 하나회 정권 서열 3위. 하지만 노태우는 그를 상당히 껄끄럽게 여겨서 국회의원직을 사퇴시켰고 정치적으로 탄압했다. 그래서 김영삼에게 줄을 대서 다시 원내 복귀에는 성공했지만 12.12. 군사반란 심판 과정에서 다시 갈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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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2기. 쓰리박(박준병, 박희도, 박세직)의 일원. 육군본부 인사운영감[79], 인사참모부장을 거쳐 중장으로 진급해 국군보안사령관을 역임 후 대장으로 예편. 전 국회의원. 특이하게도 12.12. 당시 전두환의 병력지원요청을 거부해서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는다.

육사 11기. 쿠데타 덕분에 불가능해 보였던 소장 진급에 성공하여 제9보병사단장으로 영전했고 국군정보사령관을 거쳐 1982년 제1군단장이 되었으나 취임하고 5달만에 사망하였다. 덕분에 법의 심판을 피해갈 수 있었다.

5.6. 공수특전여단[편집]


  • 제1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박희도[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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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2기. 쓰리박. 쿠데타의 공로를 인정받아 소장으로 진급 후 제26보병사단장으로 갔고 이후 육군특수전사령관(중장), 제3야전군사령관(대장), 육군참모총장 역임.

  • 제3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최세창[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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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3기. 한동안 3공수여단장을 했으나 이후 소장진급하여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 수도방위사령관(중장), 제1군단장(중장), 육군참모차장(중장)을 거쳤다. 이후 제3야전군사령관(대장)과 합참의장을 거쳤고 이종구가 육군참모총장인 이진삼과의 갈등으로 경질되자 노태우 정부의 마지막 국방부 장관 역임.

  • 제5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장기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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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2기. 이후 중장으로 진급하여 육군교육사령관, 총무처 장관 역임 후 전역.[83]

5.7. 청와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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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3기. 대통령경호실장(소장), 제5군단장(중장)을 거쳐 육군참모차장으로 재직 중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에 연루되어 중장 계급으로 예편하고, 한국도로공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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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5기. 제9보병사단장(소장), 수도방위사령관(중장), 국군보안사령관(중장), 제3야전군사령관(대장) 역임하고 1989년에 전역하였다. 12대 성우회장을 역임하였다.

6. 5공, 6공의 지배 세력[편집]


하나회는 정권을 장악한 1980년부터 김영삼에 의해 숙청당한 1993년까지 사실상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 세력이었다. 12.12. 군사 반란이 터진 뒤부터 하나회 주요 인물들은 승승장구했다. 직책은 당시의 직책으로 기록한다.

  • 황영시
    • 육사 10기, 12.12 참여
    • 육군참모차장 - 제3야전군사령관 - 육군참모총장(최종계급: 대장) - 감사원장
    • 직접적인 하나회 멤버가 아니라 하나회를 후원한 인물이다. 하나회는 4년제 정규 육사 장교(전두환, 노태우의 육사 11기가 첫 기수)들의 사조직이기 때문이다.
    • 반란 당시 제1군단장, 쿠데타 직후 신군부 세력이 참모총장으로 추천했으나 최규하 대통령이 반대하여 일단 참모차장을 거친 뒤 참모총장이 되었다.

  • 유학성
    • 육사 정훈 1기, 12.12 참여
    • 제3야전군사령관(최종계급: 대장) - 중앙정보부장 - 국가안전기획부장 - 국회의원
    • 황영시와 마찬가지 이유로 하나회 멤버가 아닌 하나회 후원자다.
    • 한직인 군수차관보에 있었으나 반란에 참여하여 대장 계급장과 안기부장 자리까지 얻어낸다. 다만,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에 대한 대처가 미흡했다는 이유로 안기부장 자리에서 잘리고 권력 밖으로 밀려났으며, 1997년에 사망해서 법의 심판을 피했다.

  • 차규헌
    • 육사 8기, 12.12 참여
    • 황영시, 유학성과 마찬가지로 하나회의 후원자다.
    • 육군사관학교장 - 육군참모차장 - 제2야전군사령관(최종계급: 대장) - 교통부 장관
    • 반란 직후 신군부 세력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추천했으나 최규하 대통령이 반대했고, 다른 자리를 채워 넣은 후라 마땅히 영전할 자리가 없어 일단 한직인 육사 교장으로 영전했다.

  • 전두환
    • 육사 11기, 12.12 주모자
    • 하나회 회장, 국군보안사령관 - 중앙정보부장 겸임(최종계급: 대장) - 제11·12대 대통령

  • 노태우
    • 육사 11기, 12.12 병력동원
    • 수도경비사령관 - 국군보안사령관(최종계급: 대장) - 정무2장관 - 체육부장관 - 내무부장관 -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 - 국회의원 - 민주정의당 총재 - 제13대 대통령
    • 본인은 참모총장이 되고 싶어했으나, 2인자인 노태우가 참모총장이 될 경우 지나친 파워를 갖게 되는 것이 부담스러워한 전두환계에 의해 대장 계급장만 달고 예편한 뒤 입각했다.


  • 박희도
    • 육사 12기, 12.12 병력동원
    • 26사단장 - 1군단장 - 육군특수전사령관 - 제3야전군사령관 - 육군참모총장(최종계급: 대장)
    • 육사 12기 박세직, 박준병, 박희도는 하나회 내 '쓰리박'으로 불렸는데 박세직, 박준병과 달리 박희도는 1년 진급이 늦는 후발주자였다. 그러나 12.12 당시 전두환의 지시를 받고 1공수를 출동시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며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다른 둘을 제치고 육군 최고위 장성인 참모총장까지 올라갔다.

  • 박준병
    • 육사 12기, 12.12 당시 20사단장, 병력동원X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 국군보안사령관(최종계급: 대장) - 국회의원

  • 박세직
    • 육사 12기, 12.12 당시 전방 3사단장으로 사건과 관련X
    • 수도경비사령관 - 소장 전역(박세직 사건) -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 - 총무처·체육부 장관 - 서울아시안게임·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 - 국가안전기획부장 - 서울시장 - 국회의원 - 2002월드컵 조직위원장 - 재향군인회 회장
    • 육사 12기 쓰리박 중 박준병과 더불어 선두주자였으나 수방사령관 시절 권력 과시 및 2인자 자칭 혐의로 숙청당했다. 사실 혐의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전두환은 이 기회에 같은 하나회 멤버라도 해도 자신에게 도전하면 끝장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사실 엄청 큰 죄를 지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예편 된 후 전두환은 그를 1988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에 임명하는 등 정계에서 다시 중용하였다.

  • 장기오
    • 육사 12기, 12.12 병력동원
    •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 수도군단장 - 육군교육사령관(최종계급: 중장) - 총무처 장관
    • 12.12 당시 5공수 여단장으로 1공수 박희도, 3공수 최세창과 함께 실병력을 동원해 참여했으나 육본, 국방부를 점령한 박희도, 특전사를 점령한 최세창과 달리 예비부대로 대기만 해서 공을 세우지 못 한 탓인지 끝내 대장 계급을 달지 못했다.


  • 최세창
    • 육사 13기, 12.12 병력동원
    • 20사단장 - 수도방위사령관 - 1군단장 - 육군참모차장 - 제3야전군사령관 - 합참의장(최종계급: 대장) - 국방부 장관
    • 13기 선두 주자였으나 전두환의 막대한 신임을 받았던 선배 박희도의 임기가 1년 연장되어 총장이 되지 못하고 당시에는 명예직이었던 합참의장을 역임했다. 때문에 13기는 육참총장을 배출하지 못해 12기와 14기에 끼인 기수라는 평을 받는다. 전두환계였음에도 노태우에게 기용되어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였다는 것이 특이점.

  • 정동호
    • 육사 13기, 12.12 병력동원
    • 대통령경호실장(소장) - 5군단장 - 육군참모차장(최종계급: 중장) - 국회의원
    • 12.12 당시 경호실장 직무대리임에도 병력을 불법 동원해 최규하 대통령을 사실상 연금한 인물. 최세창과 더불어 차기 참모총장 후보였으나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의 책임을 지고 예편했다.

  • 정진태
    • 육사 13기, 한미연합사부사령관(최종계급: 대장)

  • 이종구
    • 육사 14기, 하나회 총무
    • 육군본부 작전처장 - (소장진급) - 20사단장 - 수도경비사령관(중장진급) - 보안사령관 - 제2야전군사령관(대장진급) -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최종계급: 대장) -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 하나회의 황태자로 불리며 한국 군 역사상 제일의 화려한 출세 가도를 자랑한다.[84]

  • 안무혁
    • 육사 14기
    • 준장 전역 - 국세청장 - 안기부장 - 국회의원
    • 5공화국 초기 정치권에 차출되었다.

  • 이춘구
    • 육사 14기
    • 준장 전역 -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대표 - 내무부 장관 - 신한국당 대표
    • 5공화국 초기 정치권에 차출되었다.

  • 배명국
    • 육사 14기
    • 중령 전역 -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 국회 상공위원회 위원장
    • 5공화국 초기 정치권에 차출되었다.

  • 이진삼
    • 육사 15기
    • 9공수여단장 - 21사단장 - 국군정보사령관 - 3군단장 - 육군참모차장 - 제1야전군사령관 - 육군참모총장(최종계급: 대장) - 체육청소년부 장관 - 국회의원
    • 6공화국에서 승승장구한 노태우계 9-9 군맥의 수장이다. 이 외에도 각종 사고로 유명하다. 별명이 하사이니 말 다했다.
    • 이진삼은, 장관직 퇴임 이후에 법의 심판을 받은 적이 없으며 2008년에는 충남 부여-청양 지역구에서 자유선진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에 나올 때 군번줄을 안 찬다고 쓸데없이 천안함 피격 사건 진상규명 때 어그로를 끌었으며, 워낙 인물에 대한 평가가 나빴기에 19대 총선을 앞두고 유일하게 선진당 공천심사에서 잘렸다.

  • 고명승
    • 육사 15기, 12.12 직접가담
    • 9사단장 - 수도방위사령관 - 보안사령관 - 제3야전군사령관(최종계급: 대장)
    • 장세동과 함께 몇 안 되는 호남 출신 하나회 멤버. 전두환의 직계로 5공화국에서 승승장구한 15기 선두주자였으나, 노태우 정권에서는 견제를 받아 참모총장이 되지 못하고 전역해야 했다. 이후 정치에 도전했으나 고향에서 이미지가 워낙 나빠서 결국 출마하는 족족 낙선했다.

  • 나중배
    • 육사 15기
    •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최종계급: 대장) - 주 사우디아라비아 대사

  • 민병돈
    • 육사 15기
    • 20사단장 - 육군본부 정보참모차장[85] -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 - 육군특수전사령관 - 육사교장(최종계급: 중장)
    • 하나회 소속임에도 6.10 민주 항쟁 때 전두환의 군 출동 명령에 항명하고 노태우에게는 육사 졸업식 때 그의 북방정책에 노골적으로 항의하여 전역당한 기이한 인물이다. 하나회 중에선 그나마 양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 장세동
    • 육사 16기, 12.12 직접가담
    • 3공수여단장 - 경호실장(최종계급: 중장) - 안기부장
    • 한때 노태우 대신에 후계자로도 거론되었던 전두환의 최고 심복으로 5공화국 최고 실세였다.
    • 16대 대선에 출마했지만 전두환이 "나이를 먹으니 장세동도 내 말을 안 듣는다."라는 말을 하고는 지원해주지 않아서 하루 전날에 후보 사퇴했다.


  • 이필섭
    • 육사 16기, 12.12 직접가담(9사단 29연대장)
    •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 - 9사단장 - 1군단장 - 육사교장 - 제2야전군사령관 - 합참의장(최종계급: 대장)

  • 송응섭
    • 육사 16기, 하나회 멤버는 아니지만 12.12 직접가담
    • 51사단장 - 7군단장 - 합참차장(최종계급: 대장)

  • 김진영
    • 육사 17기, 12.12 직접가담
    •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 - 경호실 작전차장보[86] -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 육군3사관학교장[87] - 수도방위사령관 - 육군교육사령관 - 한미연합사부사령관 - 육군참모총장(최종계급: 대장) - 하나회 숙청으로 전역
    • 육사 17기 대표화랑 출신으로 하나회 내 전두환 직계이며 12.12에서 공을 세워 기반이 두터운 데다가 실력도 있었기 때문에 자타가 공인하던 차기 참모총장이었다. 노태우 정권의 정책에 반발하여 교육사령관으로 좌천당했으나 끝내 부활하여 참모총장에 올랐다.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때 육군참모총장에서 경질되어 처음 군대에서 전역당했다. 같이 경질당한 기무사령관인 서완수는 하나회 후배다.

  • 허화평
    • 육사 17기, 12.12 직접가담
    • 준장 전역 - 대통령 보좌관, 정무수석 - 국회의원
    • 12.12 당시 전두환의 비서실장으로 12.12 쿠데타 당시 배후 공작을 진두 지휘해 진압군을 교란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5공화국 초기 허삼수, 허문도와 '3허'로 불리며 정권 최고 실세였다. 그러나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고 장영자 사건 당시 대통령 친인척 처벌을 주장하다가 전두환의 눈 밖에 나서 청와대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갔다. 이후 계속해서 15대 이후 총선에 출마했지만 16, 17대 모두 크게 져서 아예 정계은퇴했다.

  • 허삼수
    • 육사 17기, 12.12 직접가담
    • 준장 전역 - 사정수석 - 국회의원
    • 허화평, 이학봉과 함께 12.12 당시 전두환의 보안사 3인방 중 1명. 정권 초기 허화평, 허문도와 '3허'로 불린 정권 실세였다. 허화평과 마찬가지로 미국으로 쫓겨났다.

  • 안현태
    • 육사 17기
    • 소장 전역 - 경호실장 - 국가원로자문회의 사무총장 (장관급)
    • 장세동과 같이 전두환의 충복 중 하나로 꼽힌다.

  • 이현우
    • 육사 17기
    • 중장 전역 - 경호실장 - 안전기획부장
    • 동기인 안현태가 전두환의 경호실장을 맡았다면 이 쪽은 노태우의 경호실장.

  • 이문석
    • 육사 17기
    • 육군특수전사령관 - 육군참모차장 - 제1야전군사령관(최종계급: 대장) - 총무처 장관
    • 노태우가 상당히 예뻐하던 장성으로, 한 때는 김진영을 제치고 육군참모총장이 될 뻔 했으나, 후술할 하나회의 계파갈등 봉합차원 및 암 발병으로 인해 결국 김진영에게 밀리고 만다.

  • 이병태
    • 육사 17기
    • 1군단장 - 합참작전본부장(최종계급: 중장) - 국방부장관
    • 특이하게도 하나회임에도 하나회를 박살낸 문민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는데, 이는 이병태가 하나회이면서도 김영삼경남고등학교 후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88]

  • 반준석
    • 육사 18기
    • 육사 생도대장 - 56사단장 - 육군본부 동원참모
    • 소장 전역

  • 이학봉
    • 육사 18기, 12.12 직접가담
    • 준장 전역 - 민정수석 - 안전기획부 2차장 - 국회의원
    • 허화평, 허삼수와 함께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시절 핵심 참모 3인방이었다. 주특기는 공작과 수사. 전두환의 심기를 거슬러 불화를 겪었던 허화평, 허삼수와 달리 계속 충복으로 남았다.

  • 구창회
    • 육사 18기, 12.12 직접가담
    • 수방사령관 - 기무사령관 - 제3야전군사령관(최종계급: 대장) - 하나회 숙청으로 강제 전역
    • 12.12 당시 9사단장 노태우의 참모장(대령)으로 노태우의 명령으로 최전방 병력을 서울로 출동시켰다. 반란 때문에 최전방 병력을 지휘관의 허락도 없이 빼내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경악한 제3야전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이 이를 확인하는 전화를 걸자 그런 일 절대 없다고 거짓말했다. 노태우 직계로서 6공화국에서 요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는데, 숙청당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가 차기 참모총장이 되었을 것이다.

  • 조남풍
    • 육사 18기
    • 국군보안사령관 - 교육사령관 - 제1야전군사령관(최종계급: 대장) -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방산비리 관련 소환 조사 후 강제 전역[89]
    • 박근혜 정부에서 재향군인회장을 맡았으나 또다시 비리로 구속로 실형을 살게 된다.

  • 김재창
    • 육사 18기
    • 합참차장 -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최종계급: 대장) - 하나회 숙청으로 강제 전역[90]

  • 김진선
    • 육사 19기
    • 수방사령관 - 육군참모차장 - 제2야전군사령관(최종계급: 대장) - 하나회 숙청으로 강제 전역. 위에서 언급했듯이 하나회였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 서완수
    • 육사 19기
    • 기무사령관(최종계급: 중장) -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고 얼마 못 돼서 하나회 숙청으로 강제 전역
주요 인물들의 커리어에서 보이듯이, 하나회 출신들은 군내 핵심 요직들을 독차지한 것은 물론이고, 군인들이 자주 기용되는 대통령경호실장안기부장을 독점했으며, 군에서 전역한 뒤에도 장관, 국회의원, 공기업 사장 등 고위직을 1자리씩은 꿰차는 등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은 그야말로 하나회의 시대였다.

하나회 인사들은 비하나회 인물들도 대장으로 진급했고 요직에 기용되었다는 반론도 하지만, 그것은 군 내 여론을 의식해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인물들을 요직 중에서도 비교적 힘이 없는 자리들에 기용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갑종 장교 출신으로 첫 대장이 되고 제2야전군사령관, 합참의장,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오자복은 얼핏 보면 탈계파적인 인사로 보이나 신군부의 정권 장악 과정 당시 국보위 위원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신군부에 협조한 인물이었다. 그가 역임한 제2야전군사령관[91]이나 합참의장[92]은 대장 계급 중에서도 가장 힘이 없는 자리들이었다. 11기 이후의 비하나회 출신 대장인 한철수(12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역임했고 예편 후 주 브라질 대사, 서경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했다.), 민경배(14기, 노태우 정부 때 국가보훈처장을 역임했다.), 김동진, 김연각(이상 17기, 김연각은 2군사령관으로 있다가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동기 김동진이 참모총장이 되자 전역했다.) 등은 요직에는 거의 기용되지 않았다.

실제 군사 정권하에서 정권의 안전장치이자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육군참모총장, 제3야전군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국군기무사령관, 대통령경호실장은 100% 하나회가 독점했다. 비하나회 인물은 1명도 기용되지 않았다. 비하나회는 당시에는 명예직이었던 합참의장이나,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수도권을 방위하는 3군사령관에 비해 힘이 적은 1군사령관이나 2군사령관에 하나회와 번갈아가며 기용되곤 했다. 비협조적인 비하나회 장교들은 유능하다 하더라도 좌천과 진급 실패 속에 군복을 벗어야 했다. 하나회 육사 11기 최고 엘리트로 전략통으로 꼽히던 김복동도 전두환과 노태우 눈 밖에 나서 전역해야 했는데, 하물며 비하나회 장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야전에서 묵묵히 길을 닦아온 유능한 엘리트 장교들은 하나회 정권에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6.1.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간 암투[편집]


1988년 2월 25일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하나회는 분열되어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간의 암투가 벌어졌다. 12.12 군사반란 이후부터 이미 하나회의 2인자로 여겨졌던 노태우는 오랜 기간 동안 2인자로서의 설움[93]을 견뎌야 했다. 권력의 특성상 2인자에게는 견제가 쏟아질 수밖에 없었지만 노태우는 이를 견디고 겉으로는 친구인 전두환에게 충성을 다했고, 전두환은 노태우의 충성과 우정을 확신하며 그에게 권력을 넘겼으나 노태우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 국민들의 5공 청산 요구를 등에 업고 전두환계를 가차없이 숙청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전두환계 중에서 전두환의 세자라고 불렸던 박희도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경질 및 불명예 전역시킨 일이다.

암투의 발단은 1987년 말 군 인사에서 시작되었다. 전두환은 결코 중임하지 않겠다고 지겹도록 선언해 왔지만, 퇴임 즈음에 헌법을 고치면서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만들었고 그 의장으로서 노태우 위에서 상왕처럼 군림하는 것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퇴임 직전인 1987년 12월, 전두환은 군 인사에서 군부 핵심 요직들에 자신의 직계 충복들을 깔아두었다. 정권을 이양하는 시기임에도 노골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다지는 군 인사를 행하며 향후 자신의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전두환은 자신의 충복 육군참모총장 박희도의 임기가 끝났음에도 1년 더 유임시킨 것을 시작으로 합참의장에 최세창, 3군 사령관에 고명승, 보안사령관에 최평욱, 수방사령관에 김진영 등 자신이 키워온 하나회 내 전두환 직계들을 군부 핵심 요직에 깔아두었다. 수도권 군사령관인 3군 사령관, 군을 감시하는 보안사령관, 수도를 지키는 수방사령관은 정권의 안전과 직결된 핵심 요직들이다. 다른 보직들은 비하나회도 기용했지만 전두환, 노태우 정부에서 이 세 보직만은 절대적으로 전원 하나회가 독점했다. 거기다가 쿠데타 시 병력 동원이 가장 유용한 특전사령관도 전두환계인 민병돈이었므로 쉽게 말해 마음만 먹으면 또 다시 군대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정권을 넘겨주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날려버리려는 의도였다.

'상왕'으로 군림하려는 전두환의 이런 의도에 노태우는 분노했지만 속으로 분을 삭히며 일단 참았다.[94] 노태우는 겉으로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잘 참았다가 원한을 잊지 않고 보복하는 스타일이라는 평이 있다. 그 평대로 노태우는 시간을 기다린 후 전두환계 숙청에 나서 자신이 겪은 설움과 분노를 갚아주었다. 2인자로서 전두환에게 숱하게 갈굼받고 늘 고개 숙여 처신해 온 노태우였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첫째로, 노태우는 대통령을 간선제 형식으로 물려받지 않았다. 비록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과 김종필의 출마까지 더해진 결과로 인한 당선이었고 전두환의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거나 체육관 대통령이 아닌 직선제로 당선된 대통령으로서 민주적 정당성이 있었다.[95] 둘째, 노태우는 전두환계를 숙청할 명분도 충분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의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한 단죄를 요구하는 국민 정서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듬해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이 패배하며 여소야대 국면으로 흐르게 되며 더욱 증폭된다.

1988년 6월, 노태우는 취임 후 첫 군 장성 인사에서 5공 청산에 대한 국민 여론을 구실로 박희도를 참모총장에서 경질하면서 전두환계 군맥 제거 작업을 시작했다.[96] 그리고 그 후 1년 안에 합참의장 최세창, 특전사령관 민병돈, 기무사령관 최평욱, 수방사령관 김진영, 참모차장 권병식, 5군단장 정만길 등이 차례차례 한직으로 좌천되거나 예편되었고, 노태우는 자리가 빈 요직들에 그동안 소외되었던 자신의 직계 하나회 장교들을 깔아두어 군을 장악했다. 군 밖에서도 국민 여론이 강해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전두환을 백담사귀양보냈고, 5공 청문회 등을 활용하여 장세동, 이학봉 등 전두환의 충복들을 구속했다. 전두환계는 반발했지만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은 노태우에게 사정없이 당했다. 17기 선두 주자이자 자타가 공인하던 차기 육군참모총장 김진영은 불만을 드러내다가 수방사령관이라는 실세 자리에서 예나 지금이나 중장 한직인 교육사령관으로 쫓겨났다. 특전사령관에서 쫓겨나 또 다른 중장 한직인 육사 교장으로 갔던 민병돈은 육사 졸업식에서 임석해 있던 노태우의 북방 정책을 강하게 비난하고 경례마저 하지 않으며 노태우를 엿먹였다가 예편당했으며, 15기 선두주자 고명승은 3군 사령관 임기가 끝나자마자 영전 없이[97] 전역해야 했다. 16기 선두주자 최평욱 역시 좌천 후 예편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빈자리는 노태우의 직계 군맥, 이른바 '9-9 인맥'[98]들이 차지했다. 이진삼[99] 같이 전두환 정권에서는 노태우를 견제하느라 전두환 직계들에게 밀려왔던 인물들은 급부상하여 승승장구했다. 9-9 인맥은 비하나회, 비육사[100] 출신들도 있었지만 역시 주류는 하나회 내 노태우계 장교들이었다. 대장 4차 진급자임에도 참모총장을 차지한 15기 이진삼, 합참의장 16기 이필섭, 특전사령관과 1군사령관을 역임한 17기 이문석, 수방/기무/3군 사령관을 모두 역임한 18기 구창회[101] 기무사령관을 거쳐 1군사령관이 된 18기 조남풍, 수방사령관을 역임한 19기 김진선과 20기 안병호가 대표적인 9-9 인맥 내 하나회 장교들로 이들은 선두에 섰던 전두환계를 제치고 승승장구했다. 자연스럽게 살아남은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사이에는 암투가 벌어졌고, 대표적으로 노태우 직계 김진선[102]은 지나치게 전두환계 하나회를 공격하다가 금족령까지 받았다. 또한 전두환계의 수장인 국방부장관 이종구와 노태우계의 수장인 참모총장 이진삼은 인사권 문제를 두고 서로를 비난하며 극렬하게 대립했다. 이렇듯 하나로 똘똘 뭉쳐 대한민국을 장악한 하나회도 권력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노태우는 임기 중반 정국 장악을 위해 김종필, 김영삼과 연합하는 3당 합당을 선택했다. 이는 단순한 정국 장악을 의도한 것이기도 했지만 노태우 입장에서 위협적이었던 김종필와 김영삼을 휘어잡으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결코 노태우의 똘마니로 머무르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당 내 야당'으로서 입지를 다져 정권의 인기가 바닥에 떨어진 노태우의 임기 말에는 민주자유당을 거의 휘어잡기에 이른다. 노태우와 민정계는 김대중에 대항할 만한 후보자를 찾지 못했고, 결국 김영삼이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노태우는 임기 말이 되자 본인도 뒷날이 걱정되었는지 전두환계에 대해 유화적인 스탠스를 취해 하나회를 단결시키려 했다. 우선 자신이 좌천시킨 전두환계의 핵심 김진영을 복권시켜 참모총장에 발탁했고, 기무사령관에도 전두환계인 서완수를 임명했다. 노태우는 전두환처럼 임기 말 군 인사로 수족들을 깔아두는 행위는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군 내 핵심 요직들을 하나회로 장악시켜 놓은 상태였다. 간단히 말해 당시 정권 안전과 직결된 3군/보안/수경 사령관은 모두 하나회였다. 또한 거기서 나아가 17기 김진영을 이어 차기 참모총장이 될 만한 18기 대장 자리를 구창회, 조남풍, 김재창의 하나회 18기 3인으로 구성해 놓아 당분간은 하나회가 지속되게 만들어 놓았다.[103] 이렇게 노태우는 하나회로 군부를 장악했으므로 쿠데타 가능성 때문에 김영삼이 설마 자신을 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고, 세간의 예상 역시 김영삼이 하나회와 불편한 동거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비에도 불구하고 노태우와 하나회의 예상을 비웃듯, 김영삼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전두환계와 노태우계를 가리지 않고 하나회를 해체하고 관련 인사를 숙청하기 위해 비밀리에 하나회 숙청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7. 문민정부숙군 작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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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인사
여당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정책 및 방향
금융실명제 · 역사바로세우기 (12.12 군사반란 · 5.18 민주화운동 재조사 ·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 하나회 해체
평가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 논란이 있는 평가
타임라인
1993년
역사바로세우기 운동 · 하나회 숙청 · 금융실명제 실시 · 1993 대전 엑스포 · 한총련 출범 · 정부 제3청사 착공 ·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 ·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 한강 영화촬영 헬기 추락 사고 ·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 제1회 대학수학능력시험 실시 ·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4년
1994년 재보궐선거 · 교육개혁위원회 구성 · 북미 제네바 합의 · 서울불바다 망언 · 1994년 주사파 파동 · 대한항공 2033편 활주로 이탈 사고 · 성수대교 붕괴 사고 ·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건 ·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 분당선 개통 · 환경부 개청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출범 ·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 1995년 한국통신 파업 사태 ·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 씨 프린스호 좌초사고 ·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 도로명주소 시범사업 · 금산분리 도입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2002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확정 · 일산선 개통 · 해양수산부 개청 · 중소기업청 설립 · 연세대 사태 ·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 전두환 사형, 노태우 무기징역 선고 · OECD 가입 · 노동법 날치기
1997년
1997년 재보궐선거 · 제15대 대통령 선거 · 외환 위기 발생 · IMF 구제 금융 신청 · 전두환, 노태우 특별사면 · 1997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 대구 도시철도 1호선 개통 · 황장엽 망명 사건 · 이한영 암살 사건 · 청소년보호법 제정 · 청소년보호법 파동 · 공덕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 청주국제공항 개항 · 이석 치사 사건 ·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 · 이태원 살인 사건 · 울산 광역시 승격 · 한일어업협정
1998년
노사정위원회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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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웃기지 마라, 내가 대통령 하면서 그렇게 더럽게 안 한다, 왜 (군부와) 동거를 하느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김영삼, 2009년 SBS '한국 현대사 증언' 방송에서 하나회 숙청을 회상하며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

군부에서 "고려시대 무신정변이 왜 일어났는 줄 아는가?"라며 반발하는 발언이 나오자 김영삼이 보인 반응







김영삼의 숙군(肅軍) 작업은 그야말로 '김영삼답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김영삼의 다른 업적들과 행보가 유사했다. 기존 행정조직이 아니라 측근들하고만 의논하며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다가, 결정적인 시점에서 깜짝쇼를 하듯이 터뜨리는 것이다.[104] 하나회가 반발하다가 극단적으로는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었으므로 하나회 숙청에서는 이러한 기습적인 방식이 더 알맞았다. 실제로 12.12. 군사반란 당시 정승화 제22대 육군참모총장이 하나회 세력을 조용히, 천천히 물갈이하려다가 정보 라인이 이미 장악된 끝에 역으로 전두환을 위시한 쿠데타 세력에 당한 전례도 있었다.

김영삼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 하나회를 두고 고민했고, 특히 국방부장관으로 생각하고 있던 예비역 소장 출신인 권영해 국방부차관으로부터 "하나회를 숙청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계속 들어왔다.[105] 그리하여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에서 공식적인 직책에 있는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철저히 비선 조직을 통해 하나회 숙청 계획을 짰다. 당시 김영삼의 비선 조직은 절친한 사이인 김윤도 변호사가 이끄는 조직과 제1야전군사령부 기무부대장 출신의 예비역 중령 A씨[106]를 비롯한 예편 장교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거사 이틀 전인 3월 6일 우선적인 제거 대상과 방법, 사후 조치 등을 최종 점검했다.

한편 김영삼의 최측근인 박관용대통령비서실장은 하나회의 수장 격인 김진영 제29대 육군참모총장과는 부산중학교 동기 동창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 때문에 박관용이 대통령직인수위원(1분과) 시절에 "많은 사람이 하나회 척결을 언급합니다"라고 하자 김영삼은 "그냥 입 다물고 있으라"라고만 했고, 여기에 하나회와 연결되어 일종의 청와대 빨대로 사용된 현역 장성 김희상 국방비서관과도 아무 상의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 둘은 김영삼이 하나회를 치려는 것으로 보지 못하고 '현 상태를 두려워한다'고 판단하는 등 상황에 대하여 아무런 정보를 듣지 못했고, 당연히 하나회 소속인 김진영 참모총장도 긴장을 놓고 있었다. 오히려 김진영은 김영삼과 같은 거제도 출신이고, 종교마저 개신교로 동일했기에 당연히 자신이 선배인 이필섭을 대신하여 합참의장이 될 것이라고 김칫국마저 마시고 있었다.[107]

참고로 노태우가 퇴임 1년 전인 1992년 2월 마지막으로 짜놓은 군부 진용은 이필섭 합참의장, 김진영 육참총장, 조남풍 1군 사령관(8월 임명), 김연각 2군사령관, 구창회 3군 사령관, 김동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김진선 육참차장, 서완수 기무사령관, 안병호 수방사령관, 김형선 특전사령관이다. 이 중에서 김진선은 하나회에서 배척받다가 뒤 늦게 들어간 쪽에 가깝고 김형선은 하나회 회원이 아니지만 노태우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최측근이었다.

김영삼은 취임하자마자 하나회 출신인 서완수 국군기무사령관에게 "앞으로는 대통령과 독대하지 말고 국방장관을 통해 보고하라."라고 말했고, 동년 3월 3일에는 육사 졸업식 때 '장성들의 얼굴을 모르면 안 된다'는 이유로 소집된 육해공 3군 중장 이상이 참석한 3월 보고 회의에서 군 지휘부의 노고를 치하하는 등 아낌없이 칭찬을 쏟아내 이들을 안심시켰다.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 주는 일에 앞장설 것을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

김영삼, 1993년 3월 5일 육군사관학교 49기 졸업/임관식 연설 중[108]

연설 전문 (출처: 대통령기록관)

3월 5일에는 육사 49기[109] 졸업식 연설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주는 일에 앞장서겠다"는 말을 통해 에둘러서 군을 엎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시기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국방부 청사 내부 주차장에 하나회 척결을 주장하는 전단이 살포되었다. 12.12. 군사반란 이후 맥이 이어진 군내 비(非)하나회파가 뿌린 듯한 이 전단을 두고서 권영해는 누가 살포한 건지 찾으라고 조사를 명령한 뒤 김영삼에게 보고를 했다. 이때의 전단은 몇 장 안 되어 금방 회수되었고 해프닝으로 끝났다.

김영삼이 본격적인 하나회 숙청에 들어간 때는 1993년 3월 8일, 취임 11일 만이었다. 이 순간까지 군 수뇌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진 중 단 한 명도 김영삼의 의도를 몰랐다. 김영삼은 철저히 비선 조직들과 일을 의논하다가 3월 6일 오후 늦은 시각 권영해 국방부장관[110] 에게 "3월 8일 오전 7시 30분까지 청와대로 오라"고 지시했다. 그날 권영해와 독대한 자리에서 김영삼은 "군인들은 그만둘 때 사표를 제출합니까?"라고 물었고, 권영해는 "군대에서는 사표 내는 일 없이, 인사명령에 따라 복종하는 각오가 언제나 되어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영삼은 "아, 그래요. 그라모 됐구마는." 하더니 대뜸 폭탄 선언을 한다.

내가 육참총장하고 기무사령관을 오늘 바꿀라캅니다.



장관은 극비리에 육군본부·기무사·수방사·특전사 등의 동향을 점검하도록 지시를 내렸고, 김영삼과 권영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수뇌부에 대한 인선에 들어갔고 하나회 출신이었던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를 군 통수권자 권한으로 전격 보직해임 처리했다. 육군본부와 기무사령부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회의를 하고 있던 김진영과 서완수는 전화로 방 빼라는 통보를 받아 갑작스레 옷을 벗어야 했다. 그렇게 공석이 된 자리에는 정확히 4시간 5분 만에 후임이 임명됐다. 非하나회 출신인 김동진 제9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육사 17기)과 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육사 22기)을 각각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에 임명한 것. 하나회 숙청의 시작이었다.

해임된 김진영과 서완수는 각각 육사 17기와 19기의 하나회 핵심 리더였다. 김진영의 경우 허화평, 허삼수와 함께 강경파로 불리며 1980년대 신군부의 막후 실세이다. 또한 그는 하나회에서 11기 전두환 - 14기 이종구의 뒤를 이어 군부 내에서 '전두환의 대리인'으로 인식되는 존재로서, 이 때문에 노태우도 자기 사람인 이문석을 제치고 그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할 정도였다.[111] 김진영은 취임 직후인 1992년 2월 중순(노태우 정부 말기) 지휘서신 1호로 "상하 계급으로 구성된 군 내부의 종적 사 조직을 단시일 내에 모두 해체하라"를 발표한 적 있다. 국민과 언론이야 군의 민주화와 정치중립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대대적으로 환영했지만, 그가 하나회의 핵심 멤버인 걸 아는 군부 내에서는 당시 급성장하고 있던 ROTC를 견제하는 발언으로 판단하였다.[112] 그리고 출신 지역까지 거제도로 일치했고 종교(개신교) 마저 동일했던 김영삼이 당선되자 정말로 같이 잘 지내보려 했다고 한다.[113]

서완수 기무사령관 역시 전두환계로, 1991년 12월 최고의 요직인 특전사령관에서 또 다른 요직 기무사령관으로 옮겨간 터라 군 내에서는 '역시 하나회'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런데 서완수는 과거 노태우에게 김영삼 불가론을 내세웠고, 김영삼이 여당 대선 후보로 결정되자 그의 친인척 비리 조사를 하는 바람에 완전히 찍힌 상태였다. 또한 김영삼의 취임을 전후해 언론에 김영삼의 통일·외교·안보 분야 장관과 청와대 수석에 대한 제보가 들어와 그들은 큰 타격을 받았는데, 이것이 서완수가 이끌던 기무사의 행위로 의심되었다. 게다가 서완수가 기무사령관으로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처음으로 독대를 시도할 때 권영해 전 장관의 비리 파일을 들고 가서 정보 보고를 시도했다고 한다.[114]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김영삼이 임명하려는 안보라인에 대한 군부의 비토로 해석되었다.

운명의 3월 8일, 김진영 전 육군참모총장은 계룡대 집무실에서 혼자 있다가 권영해 장관에게 통보를 받고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말했으며, 물러난 후에는 "이제 내가 나왔으니 쿠데타 위험은 없다."라고 했다 한다. 후임자인 김동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이발소에 있다가 장관에게 들어오라는 통보를 받고 "6공 때 대장 달았다고 이제 물러나라는구나"라며 경질 통보로 생각했지만, 막상 만나보니 권영해는 그에게 "자 이제부터 육군은 당신이 맡아주는 거야"라며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음을 알렸다.

서완수는 기무사에서 전국 40명의 기무부대장들을 모아 하는 월례회의를 평소보다 앞당겨 하고 있었다. 먼저 당연히 이 자리에 동석한 참모장 김도윤 소장이 전화가 왔다는 부관의 말을 듣고 나갔다 왔고, 이어 서완수가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가 권영해에게 해임 통보를 받고 돌아왔다. 회의장으로 돌아온 서완수는 자신의 해임 사실을 기무부대장들에게 알렸고, 신임 사령관 임명 통보를 받은 김도윤은 고개만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의 "힘이 센 자리는 계급도 높으면 안 됩니다."라며 그의 철학을 권영해에게 말했다고 한다. 서슬 퍼런 기무사령관 자리가 대장 진급까지 노려볼 수 있던 중장 2차 보직에서 소장 보직으로 격하(환원)된 것이다. 대통령과 독대 중단은 물론 국방부 회의 때도 자리가 말석으로 바뀌었다.[115][116] 이때 경질된 서완수는 한직인 제1야전군부사령관으로 이동했고 후술하듯이 거기서도 해임되자 연구관을 잠깐 하다가 전역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 소식조차 전해지고 있지 않다.

그렇게 3월 8일 1차 숙청에서 7개의 별이 떨어졌다.[117] 여기에 이르러서도 이 일이 군 수뇌부 교체 정도가 아닌 하나회 숙청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김영삼 자신과 몇몇 측근에 불과했다.

다음날(3월 9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김영삼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 유명한 "놀랬제." 발언을 하여 뒷날 화제가 되었고, 이후에 개그 작가 장덕균이 자신의 김영삼 개그집 ≪YS는 못말려≫에서 이 말투를 인용해 일종의 드립으로 승화시켰다. 이어 김영삼은 "저짝 사람들(하나회) 깜짝 놀랬을 기야."라고 했고, 한 수석비서관은 "각하, 저희들도 그렇지만 국민 모두 얼떨떨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하는 등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동아일보의 취재에 의하면 군부에서는 '대단하군, 역시 대단해.'하며 충격을 넘어 경악하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특히 1993년 초의 하나회는 김진영-서완수 같은 전두환계가 아니라 노태우계 하나회가 주류인 상태였으므로, 당시 하나회 주류인 노태우계 인사들은 당시 김진영-서완수의 해임을 "전두환계를 날리는 쇼를 하는구나" 정도로 판단했다고 한다. 심지어 ROTC(학군단) 그룹을 정리하기 위한[118] 일종의 명분쌓기 용으로 판단하기도 했다. 당장 자기네부터가 노태우 정부 시절 전두환계 하나회를 날려버렸던 전적이 있으니 김영삼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적절한 명분을 쥐려는 행보겠거니 하고 마음을 놔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김영삼의 의도는 명분 쌓기가 아니었다.

한 달이 못 지난 4월 2일. 국방부 회의 때 중장급 이상이 모여 있었는데, 육사 19기 김형선 특전사령관과 육사 20기 안병호 수방사령관이 불참했다. 회의가 시작되고 1시간이 지나서야 권영해 장관이 통수권 차원에서 그들을 경질하였다고 참석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전두환계였던 김진영이나 서완수와 달리 김형선과 안병호는 확실한 노태우계였고 9-9라인으로 유명한 인사들이었다. 이에 회의장에 참석했던 장군들은 충격을 받았다. 특전사와 수방사는 수도 서울 인근에 주둔한 충정부대로 12.12. 반란의 주역들이다. 김형선은 하나회 소속은 아니었으나, 과거 노태우가 9공수여단장일 때 작전 참모 및 대대장으로 근무했으며, 김진영이 물러난 뒤 대장 진급 떡밥이 돌 정도로 떠오른 노태우의 최측근이었다. 그리고 수방사는 12.12. 이후 그 자리에 노태우가 앉은 뒤로 계속 9-9 라인만 임명되던 요직으로, 안병호는 12.12. 때 9사단의 노태우 사단장 휘하 작전참모였던 인연으로 그가 대통령이 된 후 5년 간 군의 실세였다.

이 둘에 지난번 교체된 육참총장, 기무사령관까지 합쳐 전두환계와 노태우계의 수장들이 전부 제거되었다. 권영해 장관조차 전날 식사 때 통보받았을 정도로 전격적이었다. 극도의 보안 속에 오직 김영삼의 비선라인으로 하나회 청산 작업을 하고 있는 예비역 그룹의 머릿속에서만 작전이 진행된 것이다. 이는 특수전 병력과 수도권 인근의 사단 병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임 수도방위사령관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119]도일규 소장(육사 20기).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하나회가 발각되었을 때, 하나회 색출 작업을 하던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역공을 받고 3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는데, 당시 비서실장이 도일규였다. 이 때문에 도일규는 하나회의 견제를 받으며 갖은 고초를 겪었다는 스토리가 있어, 하나회와는 완벽하게 깨끗한 신분이다. 실제로 동기들은 중장 1차 보직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소장으로 막다른 골목 보직이었다. 게다가 숙부가 영부인 손명순 여사와 인척이라는 혈연관계까지 더해져 결국 수도방위사령관을 찍고 바로 2차 보직도 안 하고 핵심 요직인 3군 사령관으로 갔으며 아예 1996년에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하며 장관만 못 했을 뿐 문민정부에서 새로운 군부의 실세로 떠올랐다.

특수전사령관은 육군본부 동원참모부장 장창규 소장(육사 21기)이 진급과 동시에 내정되었다.[120] 강단 있는 장성으로 8사단장 시절 김동진 5군단장 아래 있었는데[121] 이 관계가 다시 참모총장과 특전사령관이 되어 재현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계속 한직만 돌다가 2차, 3차 진급 때야 겨우겨우 승진하던 무명용사들이었다. 또한 둘 다 사령관 임명과 동시에 중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드디어 비하나회·비9-9라인도 기무사령관,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같은 요직을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 교체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원래 군부 내에 줄을 대어 새 정권에서도 살아남으려고 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김형선 특전사령관은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이 목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다음은 자기 차례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짐을 빼서 본가로 보내버린 후 아예 포기하고 "퇴역하면 운전병이 없어질 거야"라며 사령부 헬기장에서 운전 연습을 하고 있었고, 안병호 수방사령관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김영삼의 상도동계에 줄을 대고 있었다고 한다.[122] 물론 결과는 사이좋게 모가지.

그나마 김형선은 노태우 줄을 탄 사람, 즉 9-9 인맥이기는 했지만 하나회 인사는 아니었기에, 특전사령관에서 물러난 지 2주 만에 김진선 육참차장이 진급과 동시에 2군 사령관으로 진급하자 그 자리로 이동한다. 그러나 2차 진급자[123]였기에 동기들이 대장 진급을 해버리면서[124] 그게 마지막 보직이 되었으며, 육군참모차장은 휘하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명예직에 가까웠다.[125] 안병호는 제2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고, 이후 12.12. 군사반란 참여자[126]들을 5월에 숙청하면서 2달 만에 전역했다.

이렇게 2차 숙청에서 총 13개의 별이 떨어졌다. 육참총장(☆☆☆☆), 기무사령관(☆☆☆), 특전사령관(☆☆☆), 수방사령관(☆☆☆) 4명을 먼저 교체한 것은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핵심 보직이기 때문이다. 12.12 사건을 초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기무사령관인 전두환이 육참총장인 정승화를 체포하며 발생한 일이다. 이런 사태를 견제하기 위해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으로 특전사와 수방사가 있었으나 예하 공수여단장[127]과 경비단장[128]들이 죄다 하나회였다. 결국 12.12는 기무사령관(전두환)이 육참총장(정승화)를 체포하며 시작하여 특전사령관(정병주), 수방사령관(장태완)을 그 부하들이 체포하며 끝났다. 그만큼 이 4자리가 쿠데타 실행 및 방지의 핵심이었는데, 전 정부에서 이 자리들을 전부 하나회 혹은 9-9인맥으로 채워뒀기 때문에 김영삼은 이들을 모조리 교체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야전의 실병력 지휘관들을 교체할 차례였다.(3차 숙청) 4월 8일 국무회의에서는 중장 3명을 대장으로 승진시키며 2군사령관에 김진선 육군참모차장, 3군사령관에 윤용남 합참 전략기획본부장(19기), 합참차장에 편장원 육군교육사령관을 새롭게 내정한다. 이들 세 자리는 노태우가 임명한지 1년 되었기 때문에 정기 인사라고 할 수 있으며, 조남풍[129] 1군 사령관만은 임명된 지 6개월 밖에 안 돼서 그런지 유임되었지만 3달 후에 경질되었다. 그 외 공석이 된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에는 합동참모차장인 김재창 대장이 임명되었다.[130]

다만 하나회도 9·9라인도 아니었지만 김연각은 정통 TK여서 그런지, 동기인 김동진 신임 참모총장과 함께 17기 2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1위 그룹은 김진영 전임 참모총장.[131] 똑같이 비하나회였지만 김영삼 정부에서 자신은 출세하고, 김연각은 배제된 것에 대해 김동진은 "그는 TK였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132] 참고로 하나회는 17기부터 전두환계와 노태우계로 분리되었다.

구창회 3군 사령관은 조남풍 1군 사령관과 함께 18기 9·9인맥 핵심이었다. 12.12당시 노태우의 9사단 참모장을 한 공으로 이후 수방사령관과 기무사령관을 둘 다 한 초특급 경력을 갖고 있다. 비하나회가 하나회에게 이를 가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자기들끼리 요직을 다 해먹기 때문이다. 구창회는 여기에 김영삼의 경남고 후배라 김진영 다음은 자신이라고 믿고 있었고 차기 참모총장 후보로 꼽혔지만, 그런 거 없고 대신 전역을 명받았다.

그런데 이들의 후임자 중에서 이질분자가 하나 끼어 있었다. 바로 김진선 신임 2군 사령관으로, 충북 출신의 육사 19기인데 이 사람은 9·9인맥인데도 승진한 것이다. 이것도 따져보면 다 이유가 있는데, 김진선은 노태우가 21연대장, 9공수여단장, 수경사령관일 때 계속 참모로 일한 확실한 노태우 사람이었지만 하나회 가입을 거부당한 과거가 있다. 이에 개인적인 분노를 갖고 있었고, 그가 수방사령관이 되자 당시 육본 인사참모부장 안병호[133]에게 하나회 명단을 받은 후 이를 바탕으로 하나회 배제를 했다. 일단 수방사 참모직에서 하나회를 전부 배제시켰고 진급도 막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두환계 하나회를 친다는 명목이 있었으나, 이쯤 하면 됐다는 윗선의 신호에도 계속 밀어붙이다 노태우의 눈 밖에 나 2개월 근신 처분을 당했었다.[134]

그리고 이런 전적이 새 정부의 공적으로 인정받아 9·9 핵심 인맥임에도 김영삼 아래에서 승진한 것이다.[135] 사실 여부야 어떻든 김진선은 하나회를 때려잡는데 앞장서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 당시 수경사 상황실장으로 있으며 장태완 사령관을 방해한 역사적인 과오가 있는 것은 도저히 지울 수 없었기 때문에, 2군 사령관 임명 후 2달 만인 5월 말, 12.12 관련자 숙청 때 경질되어 군복을 벗었다.

윤용남 신임 3군 사령관은 경남-부산고 출신의 육사 19기인데, 평소 하나회에 치여 산 덕분에 새 정부에서 승진했다. 일설에 의하면 사단장 승진할 차례였을 때 인사담당자가 "당신도 누가 먼저 나가야 하는지 알잖아. 이번에 쉬고 다음 차례에 나가라"고 했다 한다. 본인은 알겠다고 말했지만 생각할수록 분해 밤새 통음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윤용남의 하나회에 사무친 감정은 보통이 아니어서, 대장 달자마자 공식 석상에서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 시점에도 군 요직을 독점하며 군을 파행으로 몰고 갔던 하나회 출신들이 건재하고 있다. 이들을 당장 군에서 내보내야 한다."라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고, 이에 측근들이 하나회는 아직 살아 있어 표적이 될 수 있다며 자제 시킬 정도였다. 그리고 하나회 척결 강경론자 이미지 + PK 출신이라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합참의장으로 영전한 김동진 대장의 후임이 되어 1994년 12월에는 아예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랐다.

편장원 신임 합참차장은 육사 18기에 충남-휘문고 출신 순수 야전군인이다. 비하나회 출신으로 동기 내 가장 늦게 사단장을 달았고 중장 진급은 3차, 대장 진급은 4차에 했다. 하지만 고향이 김영삼과 불편한 관계를 맺던 김종필과 같은 충청권인 것이 걸려 육군참모총장에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이 보직만 수행하고 1995년 상반기 인사에서 전역한다.

이 4.8 인사로 인해 2군사령관 김연각(17기) 대장과 3군 사령관 구창회(18기) 대장이 군인사법에 의해 즉각 전역 처리되며 별 8개가 떨어졌다. 이제까지 떨어진 별이 총합 21개.

일주일 후인 4월 15일에는 군단장·사단장급 인사까지 벌여서 하나회 출신 장군들을 몰아냈다. 이른바 'YS장군'은 군단장 4명[136], 사단장 8명이었다. 또한 하나회들을 요직에 배치시키던 국방부 인사국장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역시 교체되었다. 후임자는 갑종 157기의 정연우 소장(당시 육군보병학교장)과 육사 22기인 임종섭 소장(당시 제7보병사단장)이 내정되었다. 정연우 - 임종섭 두 장군은 순서대로 7사단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 중에 정연우 소장은 이듬해 육군대학 총장으로 이동한 후 1996년에 전역했으며 1998년에 사망했다. 임종섭 소장은 인사참모부장으로서 하나회 청산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하나회의 역공으로 의심되는 투서를 받고 사단장 시절의 당시 관행으로 여겨지던 지역 업체로 부터의 장병 위로금 수수에 관한 수사가 진행 되었고, 이후 공병대대장과 사단 참모장이 수수한 장병 위로금 전부가 부대 운영에 쓰였다는 수사 결과가 발표 되며 기소 유예 처리 되었다. 하지만, 군 개혁기에 하나회 청산의 첨병에 있는 인사참모부장 자리를 계속 유지 한다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한 임종섭 장군은 지휘 책임을 지고 스스로 인사참모부장 자리를 사임했고 군 당국은 임종섭 소장을 9군단 부군단장으로 임명하고, 후임으로 육사 22기 곽동도 소장을 인사참모부장에 임명한 후 하나회 청산 작업을 이어갔다. 이후 임종섭 소장은 9군단 부군단장, 군 개혁추진위원장을 거쳐 국방정신교육원장을 역임하며 1998년 만기 전역하였다. [137] https://plus.hankyung.com/apps/newsinside.view?aid=1993110801971&sns=y


이중 핵심은 육본 인사참모부장 최승우의 좌천이다. 인사참모부장은 18기 구창회 3군 사령관 → 19기 김진선 2군 사령관 → 20기 안병호 수방사령관 → 21기 최승우 순서로 하나회끼리 물려받아 온 핵심 요직이다. 똑같은 요직이었음에도 작전참모부장은 양보해도 인사권에 영향을 미치는 인사참모부장은 남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한 것이 자신들끼리 관례이다. 역대 인사참모부장들은 모두 수도권 사단장 → 육본 인사참모부장 → 수방/특전/기무 사령관 → 중장 또는 대장으로 전역하였고, 이후 장관 또는 정부투자 기관장으로 나갔지만 이 4명은 시대가 바뀌어 모두 나가리.[138]

새로 임명된 사람들 중에서 문제 있는 사람들이 좀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하나회나 9-9라인 중에서 쓸만한 사람은 남겨두자는 인식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육군참모차장에서 대장 진급한 김진선 신임 2군 사령관이 9-9라인이었고, 특전사령관에서 경질되고 새 육군참모차장으로 이동한 김형선 특전사령관(9-9 라인) 역시 9-9라인이었다. 또한 19기 하나회 이택형 중장이 합참 전략기획본부장으로 나갔고, 21기 하나회인 표순배는 3사관학교장을 하다가 진급하여 군단장이 되었는데 권영해 장관 내외와 절친이어서 뒷말이 많았다. 다만 표순배 중장은 후방 군단장인 제9군단장으로 이동했는데 9군단은 향토, 동원사단들로 구성된 탓에 실제로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의 숫자가 적었다.[139]

하지만 이번 인사를 끝으로 하나회가 완전히 뿌리 뽑히기 전까지[140] 하나회원이 실병력 지휘관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141]

준장급 중에서는 육사 26기인 이상학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 24기인 권중원 국방장관 군사보좌관이 조용히 보직을 내려놓았다. 비서실장의 경우 무조건 하나회끼리 주고받는 자리이며, 권중원은 전두환 밑에서 영남군맥 엘리트로 승진했던 인물이다.

4.15. 인사(4차 숙청)의 특징은 그동안 승승장구해오던 1차 진급자들의 영전에 제동을 걸며, 2,3차 진급자들과 비육사(ROTC, 갑종)들을 중용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1차 진급자들은 상당수가 하나회 출신 또는 9-9 라인이었다.

이렇게 기습적인 4번의 교체(3.8. 인사 육참총장-기무사령관, 4.2. 인사 특전-수방사령관, 4.8. 인사 군사령관, 4.15. 인사 군단장-사단장급)로 군 주요 보직에서 하나회 인사들은 순식간에 밀려나 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7.1.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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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도(白承道) 준장(육사 31기. 당시 대령. 2005년 1월 31일 전역.)

시간은 2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김형선 특전사령관과 안병호 수방사령관이 전격 교체된 것과 같은 날인 4월 2일. 당시 교육사령부 지원처장을 맡고 있던 대령이던 백승도가 육사 20기(중장급)~36기(중령급) 하나회 125명의 명단을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 아파트[142]에 뿌리는 일을 벌였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하나회의 깊은 뿌리가 제대로 알려졌다. 문서의 제목은 <육사 하나회 회원>이었으며 16절지 크기[143]에, 앞서 김영삼 초 국방부 주차장에 뿌려진 명단과 같은 것이었다. 이후 언론에서 나온 각종 하나회 명단은 이른바 '백승도 명단'에서 일부 이름과 기수 오류 같은 오타를 수정한 버전이다.

이날 아침 기무사를 통해 보고받은 장관과 총장은 항상 있는 음해성 투서 정도로 생각하고 청와대에 전달하지 않고 넘어가려 했지만 관사에 입주하고 있던 非하나회 장교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윤필용 사건(1973년) 이후 26기 정도에서 명맥이 끊어진 줄로만 알았던 전설적인 하나회가 중령급에 30대 중반에 불과한 36기까지 시퍼렇게 살아있던 것을 문서로 보았기 때문이다. 국방부나 합참에서 근무하고 있던 非하나회 장교들은 이 유인물을 들고 동료들에게 갔다. 그리고 복사기가 바쁘게 돌아갔으며, 팩시밀리를 통해 지방으로 문서가 넘어간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사건이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이에 범수단에 조사를 시키려 했으나 단장인 육사 24기 채문기 준장이 하나회 소속이었고, 결국 23기 육사 이문도 준장이 있는 법무감실로 넘겼다. 그리고 11일이 지난 4월 13일 드디어 언론에 이 명단이 떴다. 이제 모든 장교들이 다 알게 된 것이다. 동기 중에서 잘나가는 사람은 하나같이 그 명단에 있었다는 점에서 어이가 없었다. 특히 진급이 정체되어 있던 장교와 장군들은 배신감에 피가 거꾸로 솟구쳤고 "하나회를 군에서 즉각 추방하라!"는 여론이 순식간에 형성 되었다. 이제 장관과 총장도 이런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윤용남 신임 3군 사령관의 하나회 척결 강성 발언도 이 시기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나왔다. 4월 24일에는 육군범죄수사단장인 채문기 준장(육사 24기)과 수도방위사령부 헌병단장[144]이 교체되는 일이 벌어졌다. 둘 다 백승도의 하나회 명단에 포함되어 원활한 조사가 이뤄질 수 없다는 명목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정책연구관으로 내쫓기고 전역했다.

이제 백승도 대령에 대해 살펴 보자면 육사 31기의 육군교육사령부 지원처장이었고, 소령 시절 육군대학에서 국무총리 상을 받은 전도유망한 군인이었으며, 대령 1차 진급자에 31기 동기회장이었다. 그는 좋게 보자면 사람이 좋아 대인 관계가 뛰어났고 나쁘게 보자면 주로 부관 생활을[145]하면서 어느 정도 정치색을 보이는 인물이었다. 예전에 모셨던 사단장이 서울특별시로 올라온다면 밤새 주차장에 기다려서라도 반드시 만나 인사를 드렸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부관 생활을 하며 얻은 고급 정보와 동향을 전해주니 장군들의 예쁨을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정치질을 했는데 불구하고 자기 보다 앞서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예외 없이 특정 사조직임을 뒤늦게 알았을 때 그가 받은 큰 충격은 이루 말할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백승도 대령은 하나회 죽이기에 나서게 된다.

앞서 설명한대로 4월 2일 백승도 대령이 동빙고 군인 아파트에 문서를 뿌렸고, 수사망이 좁혀오자 언론에 제보하러 갔다가, 우연히 같은 카페를 방문한 도일규 신임 수방사령관을 만나게 되었다. 먼저 도일규 사령관이 그를 알아보고 왜 여기에 사복을 입고 왔냐고 묻는 과정에서 백 대령은 괴유인물 살포는 자기가 하였으며 기자회견 하러 왔다고 이실직고 하였다. 이에 도일규 사령관은 '당장 총장님을 뵙고 사과 드리라!'고 하였고, 이에 김동진 총장 공관에 갔다가 '여긴 왜 왔냐며 범수단에 가서 자수하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승도 대령을 잘 아는 사람들은 원래 그가 호기심이 많고 의협심이 강하면서도 돌출 행동을 하는 성격이어서 하나회 명단을 뿌렸다는 소식에 그럴법 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하나회측에서는 전혀 다르게 판단한다. 6공당시 9-9라인 핵심 장성[146]의 주도아래 파워그룹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새 정부에 대비하고 있다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미리 계획한 명단 살포를 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 가지 단서로 어떻게 일개 대령이 갑자기 총장 공관에 가서 만날 수 있냐고 의문을 표하며 두 사람은 무려 4시간 동안이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147] 공식 수사 결과는 백승도 단독 범행이지만, 이후 사석에서 명단 살포는 자기 말고 다른 한 명과 함께 했다고 하거나, 자기는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대신 책임을 뒤집어 썼다는 말도 하였다.

명단을 살포한 백승도 대령(31기)은 자수 후 헌병대[148]에 끌려가 호텔 사우나(...)에서 조사를 받은 후 귀가 조치 되었으며, 내부 일을 편법적으로 고자질 했다는 원죄 때문에 근신 처분 받았지만 이후 동기 중 가장 먼저 연대장(25사단)으로 진출했다.[149] 이후 육군대학 방어학처장,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산하 국방비서관실 행정관 근무를 거쳐 1999년에 준장 1차 진급에 성공했고 66동원사단장까지 올랐으나 계속해서 소장 진급에 실패하고[150] 전투지휘훈련단장으로 보임되자 이에 반발하여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으며[151], 결국 전역 지원서를 제출하여 2005년 1월 동기생인 최광준 준장과 같이 준장 예편한다.

이제 범수단 수사의 초점은 누가 살포했냐가 아니라 문서의 진위 여부였다. 이상도 준장이 이끄는 범무감실은 장성들을 조사하고, 손태진이 이끄는 헌병단은 장교들을 담당했다. 장군들은 쉽게 자신이 하나회임을 인정했으나 장교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장군 승진을 눈앞에 둔 27기와 대령 진급을 앞둔 32기는 필사적으로 부인 한 것이다. 그럼으로 동기생들을 불러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방식을 거쳤다. 이에 등급을 나누었는데 A는 본인이 하나회원임을 인정한 경우, B는 본인은 부인 동기생들이 인정, C는 본인 부인 동기생은 일부만 인정, D는 확실히 아닌 경우였다.

확인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이 하나회인지 아닌지 잘 모르는 경우와 9-9라인이었다. 30기 이후에는 선배의 일방적인 선택에 자기도 모르게 회원이 된 경우도 많았으며 이 무렵 '하나회'라는 조직명이 잘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아무개 선배 장군과 수방사 앞에서 밥을 먹었는가?', '그런 모임이 1년에 몇 번이나 있었나.' 그리고 보직경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했는데 이렇게 하나회원들과 어울리며 잘 나가는 것은 노태우의 총애를 받던 9-9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그렇다면 나도 하나회인 것 같다.'라며 잘못 자수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그러다 기무사에서 최종적으로 하나회원 여부를 판별해 주었다. 기무사에는 절대 치트키인 존안카드[152]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하나회 명부 자체는 없었지만 하나회로 의심 받은 개개인이 하나회원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주는 건 가능했다. 여기에는 하나회원이 非하나회원인척 하여 숙청을 피해가거나, 非하나회원이 오해를 받아 불이익 받으면 안 된다는 논리에 납득한 기무사 내부의 하나회원들의 도움이 컸다.

이 과정을 거쳐 1993년 말에 가서는 하나회 명단 최종본(105명)이 완성되었다. 백승도 대령 버전은 90%는 맞았는데 특히 장성은 3명 빼고는 다 옳았다. 이 조사 과정에서 뒤늦게 알려진 것인데 12.12. 이전인 26기까지는 자발적으로 가입했으며 전두환 정부 말기인 1987년에 고명승 보안사령관이 "세상이 어지러운데 유사시 우리 말을 잘 들을 젊은 놈들을 군내에 박아둬야 한다."라며 30기~36기(1980년 임관) 하나회를 한두 달 사이에 급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기수 장교들은 선배장군이 불러서 회식에 가서 몇 마디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하나회 모임이고 자신이 가입된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럼으로 이들이 이후 진급에서 계속 누락된 것은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하나회 명단 확인 결과는 非하나회원들에게 충격을 넘어 헛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5~6공 당시 육참총장 6명중 5명[153], 보안사령관 10명 전원, 수방사령관 10명 중 8명, 청와대 경호실장 5명 전원, 육본 인사참모부장 15명 중 13명, 수방사 30 경비단장 6명 전원, 33 경비단장 7명 전원이 하나회원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때로 올라가도 당시 영관급 요직이었던 수방사 경비단장, 보안사 실·처·지구대장, 수방사 대대장·작전참모, 특전사 작전참모, 수도권에 있는 9사단, 30사단 연대장·작전참모가 대부분 하나회원이었다.

이제 명단은 드러났으니 이들을 어떻게 처분하는지만 남았다. 대장과 중장은 보직을 안주면 자동 전역이나, 소장 이하는 군 인사법에 의해 신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에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진급 대상자는 한 차례 진급에 불이익'을 주며 진급 대상자가 아닌 경우는 '주요 보직에서 좌천[154]'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회 측에서는 말이 1차례 불이익이지 한번 한직으로 가면 보직 관리가 안되어 더 이상 진급이 안된다며 사형 선고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 들어갔다.

7.2. 12.12. 장성 축출[편집]


같은 해 5월 8일 국회에서 야당의 박계동 전 의원은 황인성(육사 4기, 호남 출신) 전 국무총리에게 '12.12는 쿠데타냐 아니냐?'라고 물으며 OX로 답 하라고 했고, 이에 황 총리는 '하나의 군사적 행동으로 위법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민주당 이해찬 전 의원은 '부대를 이탈해 서울특별시까지 탱크를 몰고 온 것이 합법적인 행동이냐?'고 재차 질의하자, 황인성 전 총리는 다시 한 번 위법사항은 아니라고 하였다.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식의 정치적이고 흐리멍텅한 대답이 아니라, '위법사항이 아니다'라는 딱 부러진 답변을 한 것이다. 당장 국회에서 민주당의 반발과, 하나회 출신 여당 의원[155]간에 고성이 이어졌다. 결국 다음 날 황 총리는 사과하였고, 그래도 반발이 이어지자 13일에는 "12.12. 사태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 사건이었다."라는 청와대 공식 답변이 나왔다. 그렇다면 그 쿠데타를 일으킨 12.12. 주역들을 처벌해야 할 것이 아닌가?

12.12. 당시 쿠데타의 주역은 보안사(전두환)와 병력을 출동시킨 특전사, 수방사, 9사단(노태우)이다. 이 중 앞서 3개 부대의 지휘관들은 군내에서 출세할 만큼 다 출세한 후 이미 정치권에 진출하였다. 반면 중앙청에 탱크를 몰고 쳐들어간 9사단 출신 등 일부는 아직 군문에 남아 있었는데, 당시 사단장 노태우 이하로 구창회 참모장[156], 이필섭 29연대장(현 합참의장, 16기), 안병호 작전참모(현 2군 부사령관, 20기)가 바로 그들이다.[157] 또한 수방사에서 2중 플레이를 했던 김진선 상황실장(현 2군 사령관, 19기)이 현직에 있으며, 무엇보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고 참군인 김오랑 소령을 사살한 당시 3공수 15대대장 박종규(현 56 보병사단장, 23기)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당사자들이야 12.12 당시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고 항변한다. 실제로 12.12 당시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여 반란 모의를 한 다른 장수들과 달리 이들 4명(이필섭 합참의장, 김진선 2군사령관, 안병호 2군 부사령관, 박종규 56사단장)은 사전에 아무 말도 못 듣고 일선에서 근무하다가 상관들의 지시를 받고 따르긴 했다. 특히 당시 29연대장으로 중앙청에 군대를 출동시킨 이필섭 합참의장은 "그때는 정말 사단장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라며 자신은 지시를 따른 죄밖에 없다고 했지만, 이후 9사단장까지 역임하며 9-9 인맥의 성골로 온갖 꿀을 빨아 온 것이 사실이다.[158] 안병호 당시 작전참모는 어떻게 한번 좌천 시킨 사람을 또 자르냐며 기자회견까지 하려고 했지만 측근들이 말렸다. 김진선은 개혁 성향의 인물로 전두환 시절에 이미 하나회를 공격한 공적으로 새정부에서 2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12.12 당시 수방사 상황실장으로 허위보고를 하면서 장태완 장군을 헷갈리게 만들었는데, 김진선의 변명은 '아군끼리 피 흘리게 만들 수 없었다'는 것.

이번 12.12. 장성 전역 조치에 하나회 측에서는 같은 12.12. 가담자라도 하나회만 자른다고 불만을 가졌다. 실제로 당시 중앙청까지 군을 밀고 들어간 대대장 출신 장성 3명은 非하나회여서 그런지 아무 처벌이 없었다. 하지만 박종규 소장만은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다. 박종규 본인은 정병주 당시 특전사령관 체포 명령을 최세창 3여단장에게 받았을 때 '사령관을 체포 명령을 거부하고 여단장을 잡아야 한단 말인가?'라며 정황상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한쪽 팔에 총을 맞고 박종규에게 개처럼 질질 끌려갔던 것을 가장 수치스러워하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참군인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 씨는 충격에 눈이 멀었다는 비극적인 스토리는 박종규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이필섭 함참의장 등 12.12. 가담 장성 4명의 예편이 발표된 5월 23일, 박세환 교육사령관이 대장으로 승진 후 김진선의 후임으로 2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박세환 사령관은 고려대 ROTC 1기로 학군 출신 첫 대장이었다. 드디어 非하나회, 非육사도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ROTC는 1965년에 시작하여 1993년 당시 현역 장교의 절반, 초급 장교의 70%(육사의 7배)를 차지하고 있었다. 의무 복무 후 90%가 전역하지만 남은 10%의 단결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새로운 엘리트 파워집단으로 노태우 정부 말 김진영 전 육군참모총장의 취임 일성이 '군 내 사조직을 해체하라'였는데 이는 ROTC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박세환 사령관 이후 ROTC 3기인 임재문 준장이 기무사령관에 임명되는 등 문민정부 내에서 이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이렇게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3달 만에 장군 18명이 옷을 벗고 떨어진 별이 40개[159]가 넘었는데, 이는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상급 장성들의 목을 다 날리고 하나회로 군을 장악한 이후 처음 있었던 대규모 군 내 숙청 작업이었다. 이때 새로 임명된 중장 이상의 인사가 너무 많은 탓에 대통령이 달아줄 계급장이 모자라서 현역인 국방부 국장급 인사들에게 계급장을 빌려서 달아줬다는 일화도 있다. 평소 인사가 6, 12월에 있으니 이를 예상치 못하고 별들을 준비 안 해놔서 생긴 후문. 그 정도로 급박하게 인사이동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여기까지를 1차 하나회 숙청 작업으로 볼 수 있는데, 김영삼의 최초 의도는 여기까지였다. 하나회 완전 숙청이 아니라 김영삼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세력만 도려내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하나회의 수장들만 날렸고 일부 장성들과 영관급 이하는 건드리지 않았다. 당시 중앙일보 특종 보도제목인 <3성 장군 이상 하나회 예편 조치> 등이 말해주듯이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수뇌부만 숙청하는 것이었다.[160]

그러나 그동안 나름 우직하게 군 생활을 하면서 하나회에게 당한 게 많았던 권영해 장관과 김동진 육군참모총장은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권영해의 경우 소장 출신인 것을 두고 군부 쪽에서 여태까지 국방부장관은 예비역 대장이 하던 관례를 들먹이며 일개 소장 출신이 장관에 올라서 어쩌구저쩌구 하는 비난 첩보를 듣던 상황이었고, 김동진은 육사 17기 수석졸업자로 엘리트 중 엘리트지만 비영남권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수의 대구 및 영남권 기반으로 구성된 사조직인 하나회에게 온갖 수모와 박해를 받아왔다. 일례로 육참총장 이전 김동진의 보직이었던 한미연합사 부사령관21세기에는 근 20년간 가장 많은 육군참모총장을 배출한 요직 중의 요직이 되었지만[161], 당시에는 육군참모총장 경쟁에서 패한 퇴물 대장이 가는 자리였다.[162] 그래서 권영해와 김동진 모두 하나회에 대해 이를 갈고 있었는데, 일례로 박관용 전 비서실장의 증언에 따르면 유능한 초급장교 보호 차원에서 일정 선까지는 살려보자고[163] 대통령의 동의를 얻은 후 박관용이 직접 H호텔 일식당에서 이들을 만나 여기서 그만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권영해는 그런대로 납득을 하는 눈치였지만 김동진은 정색했는데, "실장님은 군 내부 사정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여론을 따질 계제가 아닙니다. 우리한테 맡겨주시면 됩니다."라고 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이 와중에 일이 터진다.

7.3. 군부의 반발과 최후[편집]


하나회 1차 숙청이 진정 국면으로 들어간 1993년 7월 9일, 이양호 합참의장 취임 한달 기념으로 합참 장성들이 모인 회식 자리[164]에서 하나회 소속인 합참 작전부장[165] 이충석 소장(육사 21기)[166]이 물컵으로 탁자를 몇 차례 내려치면서[167] "군을 이런 식으로 막 해도 돼? 선배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뭐냔 말이야. 소신도 없고, 다 죽었어! 정부가 장군들을 함부로 대하니까 외부에서도 제멋대로 군을 매도하잖아! 이래도 되느냐 말이야!"라는 불만 섞인 발언을 했고 회식 자리가 서둘러 마무리된 일이 있었다. 이른바 '사파리가든 회식 사건'이라고 한다. 당시 이양호 합참의장은 일어나 나갔으며, 합참1차장 편장원 대장은 직접 말렸고, 하나회 19기 선배인 김상준 작전본부장과 이택형 전략기획본부장은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충석 소장은 술 취해 업혀 갔다.당시 사건을 보도한 KBS뉴스

김영삼과 非하나회로 구성된 군 수뇌부는 이를 전해듣고는 이 사건을 하나회가 청산을 받아들이지 않고 군 통수권자에게 저항하려 한다고 판단했고[168], 새 합참의장인 이양호 대장은 분노했다. 결국 하나회의 군사 반란을 우려해 일부러 내버려뒀던 일부 장성과 영관급 회원까지 모조리 쓸어내는 것으로 방침을 바꾼다. 먼저 문제의 발언을 한 이충석을 16일에 보직 해임[169]함과 동시에 강제 전역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나머지 하나회 장성들을 모조리 강제 전역시켰다. 장성급을 정리한 이후에는 영관급을 숙청했다. 하나회 출신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진급과 직위에서 철저하게 배척당했으며, 그렇게 하나회는 이전의 권력을 완전히 잃고 말 그대로 완전히 개박살났다.

이충석은 전두환의 대리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존재로 하나회 계보를 보자면 12기 박희도 - 14기 이종구 - 17기 김진영의 뒤를 잊는 21기의 전통 전두환맨이다. 전두환이 1사단장일 때 예하 대대장이었고 이후 수경사 30경비단장, 1공수여단장, 1사단장을 역임했다. 그야말로 진퉁 1-1 라인.

게다가 며칠이 지나고 육본 인사참모부장에서 교육사령부 참모장으로 내쫓긴 최승우 소장(21기 하나회)이 김진영 전 육군참모총장, 2군단장 김길부 중장(20기)과 모의해서 군사반란을 일으킨다는 문건이 기무사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더 커졌으나[170] 무혐의로 결론났다. 그럼에도 최승우 소장은 육본 정책위원이라는 집에서 노는 자리로 옮겼다가 8개월 후 예편되었고, 김진영 전 육참총장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 유학길에 떠난다.

뒤이어 제1야전군사령부에 피바람이 불게 되는데, 하나회 인사인 조남풍 1군 사령관(육사 18기)이 율곡사업 비리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군 장성들 상당수가 하나회 인사였는데 부사령관 서완수(육사 19기)[171], 참모장 유회국(육사 22기), 작전처장 윤영정(육사 24기), 2군단장 김길부(육사 20기), 3군단장 김종배(육사 20기) 등 하나회 회원들이 1군사령부에 포진해 있었고 이들은 순차적으로 교체되었다. 후임은 이준(육사 19기) 국방부 군수본부장으로, 군단장을 지내지 않은 채 대장으로 진급한 이례적 케이스였다.

그리고 1993년 10월 인사에서 하나회원인 김정헌(육사 18기) 육사 교장[172], 이택형(육사 19기) 합참 작전기획본부장, 안광렬(육사 20기) 국방부 시설국장, 최기홍(육사 22기) 국방부 정책기획관, 함덕선(육사 20기) 11군단장, 김종배(육사 20기) 3군단장, 최승우(육사 21기) 교육사 참모장이 모두 육군본부 정책연구관으로 발령받았고 이후 다른 한직으로 다시 내쫓긴 최승우 소장을 빼고 전부 전역했다. 6개월 뒤인 1994년 4월에는 김재창(육사 18기) 연합사 부사령관, 장석린(육사 18기) 국방대학원장, 박광영(육사 19기) 육군교육사령관, 최권영(육사 19기) 777사령관, 김길부(육사 20기) 2군단장, 표순배(육사 21기) 9군단장, 김현수(육사 23기) 22사단장, 길영철(육사 23기) 11사단장이 교체되었다. 모두 하나회원이었고, 이로써 중장급 이상에 하나회원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다만 하나회라고 모두 숙청된 것은 아니었다. 권영해가 동생의 율곡사업 비리 문제로 경질되자 후임 장관으로 적합한 사람을 물색했는데, 이때 김영삼은 "5.16 또는 12.12에 가담하지 않았어야 하고, 하나회 출신이거나 부정부패자는 안 된다"는 기준을 내세웠지만, 워낙에 하나회가 득실거린 터라 김영삼이 내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사람이 군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하나회 출신이지만 김영삼의 경남고등학교 라인인 국가보훈처장 이병태(육사 17기, 예비역 중장)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나회 출신이라며 말렸지만 김영삼은 "진짜 하나회라면 왜 중장만 하고 예편했겠나."[173]라는 논리로 김영삼은 임명을 강행했다. 이후 이병태가 일산신도시의 군사전략적 측면 발언[174]으로 설화를 일으키며 둘의 관계는 최악이 되었고,[175] 결국 이병태는 4개월 만에 경질된다.[176]

심지어 하나회 중 최초로 목을 날린 전 육군참모총장 김진영마저 1996년 여소야대 형국이 되자 부산에 출마시킨다며 신한국당으로 영입하라는 황당한 지시를 박관용 정치특보[177]에게 시켰다. 그런데 마침 며칠 전 방영된 MBC의 12.12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김진영이 험악하게 나오게 되는데, 이를 들은 김영삼은 김진영이 있다는 한 기도원에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던 중이던 박관용에게 "그냥 (영입은 그만두고) 돌아오라"고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 외에도 방산비리로 처벌받은 노태우계인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과 하나회 인사였던 박세직 전 수도방위사령관에게 신한국당 공천을 주기도 했을 정도. 이러한 일화들로 짐작하건대, 김영삼의 목적은 하나회의 완전 척결이 아니라 자신에게 반기를 들 만한 세력의 축출이 목적이었다고 보인다. 하나회 자체를 뿌리 뽑으려던 것은, 하나회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비영남권 출신 非하나회 군인들이었다.

숙청이 마무리돼 가던 1994년 10월 25일에 3사관학교장인 오형근 소장[178]이 1군 부사령관(사실상 전역대기 명령)으로 발령받자 "일부 정치권도 군의 자존심을 짓밟고 사기를 저하시키며 분열을 조장하였다."이임사를 하였다. 이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후 본인은 부인하였는데, 하나회의 마지막 저항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김영삼의 초기 전격적인 숙청과 93년 10월 정기 인사, 연말 전격 인사, 94년 4월과 10월 정기 인사까지 계속해서 하나회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반하나회로 바뀐 군부에서는 하나회 출신 장성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역시키길 원했지만, 이병태 장관을 거쳐 청와대에서는 중장, 대장까지만 쓸어 버리는 것으로 결론 냈다. 대장은 김재창 한미연합사령관을 마지막으로 모두 전역, 중장급은 김길부, 김종배, 표순배까지 모두 전역하였다. 이 기간 중 하나회 장성 진급자는 한명도 없으며 대령 진급자는 3명뿐이었다.

그래도 22기 이하 36기까지 하나회원 약 100여 명이 군부에 남아 있었다. 명령에 의한 강제전역은 중장과 대장만 가능하고, 소장 이하는 계급 정년까지 임기를 보장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한직에 처박아두는 것이 한계였다. 이 시점에 22기 2명(육본 정책위원 유회국 소장, 최기홍 소장), 23기 4명(김영철 국방대학원 부원장, 박영일 교육사령부 부사령관, 손수태 3사관학교장, 정정택 합참군수 차장)이 있고 24기는 전원 준장 계급 정년에 걸려 전역. 25~26기는 준장으로 한직인 동원사단장. 27~31기는 대령에서 승진이 안 되고 있으며, 32~36기는 중령이었다.

반면 오랜 세월 모진 핍박에 시달려 오던 非하나회 장성들은 '가만히 있어도 사단장, 군단장까지는 자동'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대령~중령급에는 정치장교인 선배 기수들과 달리 육사시절 엘리트였던 군인들이 많이 포섭되어 있었는데, 승진철만 되면 '하나회는 안된다'라는 온갖 압력에 의해 계속 배제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승진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지만, 과거와 같은 특권은 더이상 누릴 수 없었다.

하나회 출신 영관급 장교들은 이전과 반대로 하나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급에서 지속적으로 불이익을 받으며, 차례차례 밀려나게 되었다. 대령들은 요직에서 잘려 행정부사단장으로 좌천, 중령들은 전부 부연대장 같은 한직으로 내쳐진 것이다. 심지어 전방지역 대대장을 마치고 참모로 근무하던 중령을 후방 지역으로 보내 향토, 동원사단이나 경비연대 대대장에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26기까지는 어찌저찌 진급을 했지만[179] 27, 28기는 모두 대령에서 군 생활이 끝났으며, 29, 30, 31기는 각각 1, 2, 3명이 준장으로 진급했고 32, 33기는 그나마 대령까지는 갔지만 34기부터는 2명 빼면 중령 예편, 35기는 4명 빼고 중령 예편했고[180] 36기는 10명 중 5명이 대령으로 진급했다.[181] 한 마디로 26기 이후로는 오히려 진급에 페널티를 크게 받아 오히려 올라가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후문.

7.4. 해체의 의미[편집]


1995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내란죄 및 횡령, 살인죄로 구속기소되고 법정 최고형인 사형까지 구형받았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반란 수괴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 선고.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김영삼 임기 말에 특별사면되었다.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김대중의 요청에 의한 사면이라는 게 대체적인 정론[182]이기는 하지만 김영삼의 회고록에서는 김영삼 자신이 오래 전부터 이 두 사람을 사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다음 정권에 넘길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김대중은 소극적으로 동의했다고 나온다. 9분 43초부터 그런데 전반적으로 회고록의 성격이 "잘한 건 다 내가 하고, 못한 건 다 김대중이 했다"는 식이기 때문에 판단은 개인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다만 김대중 역시 특별사면된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해 본인이 집권하고 있던 시절에 정치 보복을 하지않고 오히려 청와대에 초청해서 잘해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굳이 김영삼이 특별사면을 안했다고 해도 김대중 정부 시절에 특별사면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도 DJ 시절이 전직 대통령들이 살기가 가장 좋았다는 발언을 한적이 있었다.

김영삼은 훗날 인터뷰에서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사실 하나회 자체가 군을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장성들의 사조직이었던 만큼, 그들이 해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군 김대중 비토(veto)설'이다. 이 주장은 전두환 정부 때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해서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나설 때마다 흘러나왔다. 심지어 하나회가 완전히 숙청된 이후인 제15대 대통령 선거까지도 흘러나왔다. 그만큼 하나회 해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애써 이루어낸 민주화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하나회 출신 군 수뇌부를 제거할 때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 지도부가 쿠데타 상황까지 경계하며 보름 동안 밤샘 대비를 하기도 했고,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숙청 과정에서 쿠데타설이 돌기도 했다. 아무튼 "김영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평가가 대세이다. 김영삼은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민주정의당 측이 대통령 후보를 물색하다가 내세울 만한 사람을 못 찾고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끌어들인 사람이기 때문에[183] 대통령 취임 이후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전부 휘어잡을 명분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생각보다 쉽게 하나회를 해체시킬 수 있었다. 만약 김영삼이 다른 당 소속이었거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상태에서 하나회 해체를 시도했다면 12.12. 군사반란 시즌 2를 찍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나회를 숙청하고 빈 자리에 주요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비밀 유지를 위해 김영삼은 국방부나 군 관련 인물을 배제한 채 최측근들과만 일을 논의했는데, 이런 인선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했던 김동진 육군참모총장(경복고등학교), 김희상 국방비서관(경복고)[184],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경복고) 등 이른바 경복고 라인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 김현철은 권력 실세로 우뚝 섰다. 그러나 이렇게 권력 실세가 된 김현철은 이후 부패 권력의 상징이 되어 몰락하고 만다.

김현철이 하나회 숙청의 브레인이라는 말도 있지만, 김현철은 스스로 부인했다. 자기도 몰랐다는 것이다. 조언자는 김희상 당시 국방비서관이었는데, 김현철은 "김희상도 정확한 날짜는 몰랐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185] 흥미롭게도 "김영삼이 평소에 맺힌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한 방에 날려버린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도 김현철이다. 이런 김현철의 언급에서 보면, 과거의 원한은 반드시 푸는 것과 절대적인 보안을 유지하면서 과감하게 일을 저지르는 김영삼 특유의 정책 시행이 잘 드러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현철 본인에게 가장 큰 업적이 될 수 있는 일을 부인한 것을 보면, 정말 몰랐던 것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숙청 과정에서는 김현철이 개입하지 않았고 숙청 이후 인선 과정에서 경복고등학교 라인으로 일부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회 숙청 브레인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영삼의 절친인 김윤도 변호사가 이끄는 조직과 제1야전군사령부 기무부대장 출신의 예비역 중령 A씨를 비롯한 예편 장교 그룹이 한 것이었다.

7.5. 해체의 부작용?[편집]


요약하자면 그런거 없다

하나회는 사관학교 우등생들을 권력에 빌붙는 정치군인으로 타락시켰다. 이들은 선후배 간 ‘끈끈한 정’으로 국방부, 육본, 특전사, 수방사, 기무사 등 서울에서 근무하는 요직을 독차지하며 공정한 진급 경쟁을 차단시켰다.[186] 그 과정에서 출세를 위해 뇌물과 아부를 동원하며 군 기강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비리를 등에 업은 군대는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 한다. 윗 문단에서 하나회를 옹호한 노태우 역시 이런 썩어빠진 하나회의 풍습에 기여한 인물이다.[187] 독일 1차대전 에이스들이 모여서 후학을 양성한 항공클럽[188]처럼 군사적인 능력이 출중한 사조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회에도 유능한 인물은 꽤 있었다. 하나회의 후기 구성원 중에는 사관학교 성적 우수자가 많았기에[189], 하나회는 자연스럽게 국군의 요직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김영삼의 숙청으로 1990년대 육군의 허리에 해당하는 영관급 장교에 상당한 인적자원 공백이 생겨버렸다는 것. 노태우의 2011년 발간한 회고록도 궤를 같이한다. 하나회 숙청을 "김영삼이 군을 잘 몰라서 한 일"이라면서, 하나회 숙청으로 전투력 약화와 3류급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등을 거론했다. 몇몇 군사전문가들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에서 국군의 대응이 이런 문제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히려 하나회의 존재로 유능한 장교가 조기 전역하기도 했다. 하나회 가입을 거부한 장교나, 전방에서 복무하면서 군사적 능력을 쌓은 非하나회 군인들은 이 하나회 때문에 대부분 영관, 심하면 대위에서 끝나버리는 판국이었다. 하나회의 해체 과정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때 당시 장성 임명은 대대로 하나회에서 하고 이걸 하나회의 두목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승인하는 게 관행이었다. 요직과 진급을 철저하게 장악했기에 하나회 소속이 아닌 장성은 하나회 소속 대령의 눈치를 보는 사태에 이른다. 이게 얼마나 심각했느냐 하면, 비하나회 군단장이 자기 휘하에 있는 하나회 연대장의 눈치를 봤다! 조천성 사단장이 자기 휘하인 전두환 연대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행동했다가 중장 진급에 실패하고 10년 넘는 기간 동안 어디서 뭐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가 겨우 나타난 사례만 보더라도, 하나회의 계급 무시는 엄청났다. “국군의 허리인 하나회를 들어낸 것이 잘못되었다”라는 비판은 오류다. ‘하나회가 국군의 허리를 편법적으로 장악했기에’ 도려낸 것이다.

일각에서는 강릉시 무장공비 침투 사건 대응에 하나회 해산이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지만, 진실은 강릉시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에서 국군의 대응에 문제가 생긴 진짜 이유는 '지나친 보병 위주의 군사작전'이다. 죄다 소총수밖에 없으니 고도의 훈련을 받은 무장공비들에게 화력으로 계속 밀리기 일쑤였고, 그나마 제대로 활약한 부대가 특전사였음을 생각해보자면, 되려 하나회 회원들의 망상 속에 존재하는 '보병 만세'가 원인이다. 그래서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육군 보병 편제에 유탄발사기 사수가 추가된 것이다. 또한 이때 활약한 특전사 장선용 상사가 하나회원이라서 강릉시 무장공비 침투 사건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게 아니다. 장선용은 애초에 부사관으로, 오직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이 경상도인 장교들만 받아들였던 하나회와는 거리가 멀다.

노태우가 주장하는 강릉 무장공비 사건도, 자세히 살펴보면 박정희가 유신에 반대하는 채명신[190] 등을 내치고 노재현 같은 정치군인을 기용하면서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얻은 게릴라전 대처 능력을 상실해 버렸고, 이것이 곪아 터진 것이 강릉 무장공비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위장용 식수(飾樹)를 여유 있게 가져가지 않는 점과, 인식되기 쉬운 흰색(장교용) 및 노란색(병 및 하사관용)을 계급장으로 사용한 점 등이다.[191]

또한 노태우는 12.12. 군사반란 당시 9사단장으로 있으면서 휴전선에 배치된 9사단의 29연대, 30연대를 반란에 동원했다. 당시는 박정희 암살로 인해 2급 비상사태[192]가 선포돼 있었는데 전방 사단의 병력 반 이상을 빼간 것이다. 만에 하나 김일성이 이것을 알아채고 대남 공격을 시도했다면 한국군은 대혼란에 빠졌을 것이다.[193] 결국 노태우가 말하는 전투력 약화, 3류급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하극상은 모두 노태우가 소속된 하나회의 악영향이고, 결국 노태우는 셀프 디스를 해버린 셈이다.

게다가 위의 결성 과정 문단에서 서술했듯, 하나회의 수뇌부인 육사 11기~12기 회원들은 대체로 무능했다. 말단이 아무리 유능해봤자 수뇌부가 무능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일례로 박희도의 경우 무장공비를 놓친 일로 인해 이세호 전 육군참모총장에 의해 하마터면 현역부적합전역을 당할 뻔했다. 하나회의 숙청이 아니라 하나회의 존재로 인해 군이 약화되었던 것이다.[194]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은 대한민국을 혼란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던 반란 세력이다. 불법 조직을 해체하고 그 조직원을 처치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군인에게 능력만큼,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명령 복종이다. 명령 불복종을 넘어 군인으로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민 순간부터 이들은 능력이 있든 없든 무조건 해체해야 할 조직이다. 하나회 해체는 필연이었고, 파생되는 부작용 역시 ‘그래서 하나회를 해체하지 말았어야지!’보다 ‘그러니까 하나회 따위 안 만들었으면 이런 일 없잖아!’라고 반응하는 것이 상식적일 것이다.

훗날, 2021년 미얀마 쿠데타로 인해 한 나라가 군부에 의해 휘둘리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하나회 해체는 김영삼 정권의 큰 업적으로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평가가 더욱 높아졌다. 다만, 미얀마 군부는 1962년 ~ 2015년, 2021년부터 사실상 나라를 통치하는 정치 집단에 가깝고 정부에서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미얀마 정치판에 깊게 뿌리를 박았단 점, 군인과 일반 시민간의 교류는 커녕 군인 끼리만 교류를 하는 사실상 신분제에 준하는 상황 등 대한민국 정치판보다 내정이 훨씬 어지럽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8. 그 후[편집]


위 일련의 숙청 칼질을 받은 하나회는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후일 정권들도 군대가 사조직을 만들어 정권을 탈취할 것을 염려해 미국처럼 통제하기 위해 군대 사조직은 철저하게 색출되어 대한민국 내 군부의 시대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회에 참여 및 12.12. 군사반란에 하나회에 줄 섰던 핵심 군인들과 예비역들은 형사처벌을 받으면서 군인연금을 비롯한 모든 대우가 박탈되었고 이중 김오랑 소령을 죽였던 박종규 전 소장처럼 재산을 못 모은 이들은 생계고에 시달리는 등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도 했다.

하나회를 계기로 군대내 사조직을 향한 국민적인 경각심은 고취되었고 여러 대중매체에서도 군부독재의 어두운 면을 집중조명하고 젊은 세대들은 교육을 받으면서 스스로 판단이 가능한데다가 검열, 통제를 싫어하는 자유가 몸에 익혀서 이러한 동력으로 만나회, 알자회, 나눔회 등 사조직들도 후일 적발되어 하나회와 함께 철퇴를 맞아 사이좋게 군복을 벗고 해체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특히 이 모임들 회원 리스트엔 하나회의 34~36기 최후반기 기수들이 겸임하는 이름들도 더러 발견되어 하나회의 후신이 도래할지도 모를 판국이었지만, 발각 당시 기준으로선 20대~30대에 불과한 신인 장교였기에 규모도 크진 못했고 행동 반경은 넓지 않아 대부분은 근신 징계에 그쳤다고 한다. #

허나 이렇게 사라진 줄로 알았던 사조직들도 2000년 이후에도 나눔회 인맥이 조직적으로 군인사에 개입한다는 폭로성 언론 기사가 몇 차례 나왔다. 2016년에는 알자회에 대한 언론 기사가 많이 나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청문회 과정에서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거라 믿었던 군대 내 사조직이 아직도 건재하며,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이 폭로되었다. 관련 뉴스 1, 관련 뉴스 2. 2014년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육사 34기부터 43기까지 기수 별 10명씩 총 120명이 가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름의 유래는 "알고 지내자"는 모임이란 뜻에서 알자회라고 한다. 육군 내에서는 알짜 보직을 주고받아 '알짜회'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알자회 출신 인사가 기무사 사령관, 국정원 국장에 # 임명되는 등 아직 건재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또한 다음 인사이동 시 알자회 출신 인사들로 수도권 일대를 채우려 했다는 내용도 청문회를 통해 나왔다. 하나회의 전례를 볼 때 매우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하나회 본체의 남겨진 잔당들은 국민적 관심속에서 단체로서 활동으론 제약이 많아 각자도생으로 몸을 사리면서 군대 윗선에서 활동중에 있었다. 청와대 출신 인사로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위기관리실장을 역임한 안광찬(육사 25기. 예비역 소장)[195]이 있다. 강창희 전 의장과 황진하 전 의원, 권경석 전 의원, 안광찬 전 실장은 12.12. 사태 때 쿠데타군을 막고자 했던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지키다가 반란군의 흉탄에 전사한 특전사 비서실장 김오랑 중령과 동기다. 심지어 강창희 의장과 김오랑 중령은 1978년 소령때 육군대학에서 교육을 받던 중 같이 찍은 기념사진도 존재한다. 기사.

정부가 2011년 4월 21일자로 단행한 '상반기 장성 진급 및 보직 인사'에서 중장으로 진급한 육사 35기인 류제승 제8군단장, 그리고 같은 해 11월 10일 단행한 '하반기 장성 진급 및 보직 인사' 가운데 중장으로 진급시킨 육군 소장 5명 중 2명인 최익봉 소장, 김현집 소장은 하나회 출신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심지어 이 2명만 육사 36기에서 중장 1차 진급에 성공했다. 기사. 그러나 2012년 3월 9일 특수전사령관에 취임한 지 4개월이 된 최익봉 중장이 과거 23사단장 시절 여군 부사관을 성추행 한 것이 밝혀져 보직 해임되었다.[196] 기사. 최익봉 전 중장은 지금 모 기업 임원으로 들어가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어쨌든 류제승은 2014년, 최후의 하나회 일원이었던 김현집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보직을 마지막으로 2016년 9월자로 전역함에 따라 군대내 현역 하나회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하지만 하나회 숙청이 끝나고 십수년이 지났음에도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여전히 여의도 정치 바닥 이곳저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19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강창희(육사 25기. 예비역 중령.)가 있으며, 황진하(육사 25기. 예비역 중장.)[197], 권경석(육사 25기.)[198] 등이 있었다.

한나라당 - 새누리당 외에도 2010년 4월 30일 국회 국방위에서 있었던 천안함 피격사건 원인 규명 회의당시 '군번줄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자유선진당이진삼(육사 15기. 예비역 대장.)도 있다. 이진삼은 하나회에 9-9인맥, 즉 노태우 라인이었고 하나회 숙청이 끝나자 15대 총선을 앞두고 YS에 의해서 신한국당에 영입된 케이스다. 또한 이회창계인 최승우 전 예산군수(육사 21기, 예비역 소장)는 제17보병사단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을 지냈으나 갈려나간 하나회 인사였다.

그래도 정계나 군대 현역 종사자들이 아닌 은퇴 모임들인 성우회, 재향군인회, 육사 동문회를 비롯한 국내 주요 예비역 장성모임 등에서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아직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세직 같은 하나회 출신들이 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니 2012년 터진 전두환 육사 사열 논란 등의 배후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관련 기사. 거기에 이들 단체가 군 원로라는 이름으로 국내 군에 아직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만큼, 군 내 하나회의 영향이 아직 완전히 제거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전역 후에 사조직 만드는 것을 뭐라 할 수 없고, 그러면서도 선배란 이름으로 조언까지 하니. 또한 하나회 멤버들은 나중에 이명박박근혜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 중에서 이종구는 14기 동기인 이상득의 동생인 이명박을 뒤에서 지원했다.

2021년 7월 14일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따르면 육군 3사단 포병대대의 초임 소위가 조부가 하나회 출신 군단장이었다고 평소 자랑하며 각종 비행을 저질러도 대대장의 비호를 받았다고 한다. 아직도 군사 반란 세력이었던 하나회의 잔당이 대한민국 육군 내에서 암약하고 있거나, 적어도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정말이지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민주주의가 이렇게 성숙해질 수 있었을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군대 사조직의 출현은 아직까지도 안심할 수 없다는걸 역설하는듯 2021년 5월에는 여군 집단이기주의 사조직 다룸회의 존재가 세간에 드러났다. 육군 여성 장교 사조직 구성 논란 참고. 그러나 이 조직은 불법 사조직이 아닌 단순 친목단체로 결론이 내려졌다.

하나회 쌍두마차였던 노태우2021년 10월 26일자로 사망, 얼마안가 전두환2021년 11월 23일자로 사망함에 따라 하나회의 수뇌부들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9. 기타[편집]


이원조가 유일한 하나회의 민간인 회원이었다. 그는 사관학교는 커녕 장교 및 부사관 코스 이력도 없던 경북대학교 출신 민간인이었음에도 노태우와 경북고등학교 동기로서 하나회 수뇌부들과 고등학생 시절부터 어울려 다녀 친목회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런 연줄로 전두환 정부 시절 여러 보직을 거치며 정경유착을 주도하는 핵심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박종규 중령은 군사정권 시절에 소장(제56보병사단장)까지 진급하긴 했지만 하나회는 아니었다. 또한 안병호 전 수방사령관은 자신이 하나회가 아니었다고 부정하고 있다. 그래봐야 노태우의 9-9인맥이기 때문에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나회 선후배로 맺어진 군 인사들이 5·6공 시절 정치 테러를 사주했다는 말도 있다. 보안사가 정보를 제공하고 정보사령부북파공작원들을 동원해 테러를 가했으며, 이 두 조직의 수뇌부는 하나회 선후배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 이들이 관련된 사건으로 6공 시절 크게 불거진 일이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부장에게 정보사 소속 요원들이 벌인 테러 사건이다. 오홍근 테러사건 문서로. 이 당시 이를 주도한 정보사령관은 이진삼, 이진백이다.[199]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을 김영삼이 자신의 대통령 선거 자금 관련 비리를 덮으려고 벌인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만, 앞선 내용에 있듯이 하나회 숙청은 1993년에 벌어진 일이고 김영삼의 대통령 선거 자금 문제가 불거진 건 1995년이다. 12.12. 사태와 5.18. 관련자들을 잡아들인 일이 김영삼의 대통령 선거 자금 비리를 덮으려고 벌인 일일 가능성이야 있지만, 1993년에 일어난 하나회 숙청 건을 1995년의 일과 연계시키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하나회 숙청은 오히려 김영삼 전 대통령 본인의 하나회에 대한 혐오에 의한 것에 가깝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명실상부한 민주화 운동의 대표격 인물이며, 김대중에 뒤지지 않는 수난사를 겪은 인물이다. 1970년대에는 하나회의 후원자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질산 테러와 조폭 테러, 국회 제명, 1980년대에는 강제 정계 은퇴와 가택연금까지 당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군부, 정확히는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했다. 하나회 숙청이 벌어진 지 10년이 훨씬 넘게 지나고 기자들조차 당시 상황에 대한 정확한 확인 없이 기억만 가지고 기사를 쓰다 보니,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건이 백승도가 하나회 명단을 뿌린 일이 계기라거나, 하나회 소속 장군이던 이충석이 술자리 난동 부린 게 계기라거나 하는 식의 말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하나회 숙청 란에 있듯이 하나회에 대한 숙청은 김영삼이 취임 직후부터 명단 살포나 술자리 난동 건이 있기 이전에 시작한 일이다. 명단 살포와 술자리 난동 건은 하나회 숙청의 확대와 심화를 부른 계기이지 하나회 숙청 자체의 계기가 아니다.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의 경우 사건의 원인과 배경에 대해 말이 많다. 백승도 스스로는 의기에 의해 벌인 일이라 하나, 하나회를 제거하려는 군내 세력이 백승도를 하수인으로 쓴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백승도는 명단 살포 사건을 일으킨 몇 년 후 "내 의도는 하나회 소속 영관급 장교들마저 계속 진급에서 누락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회에도 건전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별적으로 구제돼야 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청죽회라는 대항 조직 성격의 사조직도 있었다. 하나회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영남 중심 인맥이라면, 청죽회는 이북과 경기도 출신 인맥으로 유명한 사람은 김종호 전 내무부장관, 이종찬 전 국정원장, 임동원통일부장관 등이 있다. 하나회와는 경쟁관계였던터라 견제도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이종찬 같이 중용된 사람들도 있었다.

하나회는 육군 장교, 그것도 정규 육사 출신들만의 클럽이었으므로, 안 그래도 세력이 미약했던 대한민국 해군대한민국 공군, 같은 육군이라도 갑종간부후보생 장교[200], 육군3사관학교학사장교, ROTC, 장교들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시기에 더욱 심한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학사장교는 전두환이 직접 만들어 준 제도인데도 이랬다.[201] 이렇게 육군사관학교 출신들만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는 현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하나회의 흔적을 청산하기는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

가끔 생각 없는 노인들이 "그래도 하나회는 의리 하나만은 끝내준다"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이들이 아버지와 같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배신하고 하극상을 일으킨 자들을 보고도 그들이 과연 의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병주 소장이 특전사령관으로 있던 시절 여단장과 참모 목록을 보면 하나회의 주요 수뇌부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이 중 박희도는 지휘를 똑바로 못 해서 무장공비 1명에게 부대 전체가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자신의 지휘과실로 예편당하게 생겼을 때 상관이던 정병주 사령관이 몇 번이나 비호해주고 준장 진급에도 도움을 주었지만 배신한다. 애초에 하나회에서 의리를 지킨 사람은 김복동 한 사람 뿐이다. 당연한 거지만 조폭 집단 보고 "조폭이 범죄는 일으켜도 의리 있는 집단"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10. 창작물에서[편집]



  • 창천항로의 스토리 작가 이학인이 스토리를 쓴 남북한 현대사물 '봉황의 성골'에서 주인공이 이 조직에 입문을 강요받는다. 주인공 대신 악역 포스의 주인공 친구가 가입해서 대립각을 세우는 스토리로 진행되었다. 정치군인의 길을 거부한 주인공과 그를 고깝게 보는 친구, 그리고 우연하게 고등학교 때 판문점 견학에서 북한 측 관람 탑에서 우연하게 눈이 마주쳐서 인사하는 것으로 알게 된 북한 공작원과 함께 묘한 분위기를 그리며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결국 연중되었다.

  • 기동전사 Z건담에 등장하는 군벌 조직 티탄즈의 모티브가 하나회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 있었다. 그러나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애초에 그 존재를 몰랐기에 그렇지 않다고 밝혔고, 시기적으로도 하나회는 1993년에 대중들에게 알려졌는데 1985년에 만든 Z건담에서 모티브로 삼을수가 없다. 이런 엉뚱한 질문에 듣고 나서 토미노도 놀랐고, 상호 무관한데도 두 조직의 유사성에 놀라는 팬도 많다.

  • 더 킹에서 한강식 검사(정우성 분)가 '김영삼 때 하나회 숙청을 주도한 유능한 검사'라고 나오는데, 당연히 고증오류.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회 숙청은 검찰을 동원하지 않고 김영삼과 최측근들만으로 은밀히 진행한 것이다. 검찰 등 외부기관을 동원했다간, 군부에 숙청작업이 새어나가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군대는 상명하복 조직이므로,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인사명령만 내리면 끝이다. 거기에 하나회 숙청이라 불리는 1993년 숙군작업에는 검사가 관여하는 형사처벌이 아닌 좌천이나 경질 같은 인사조치나 심해야 파면 등 검사와 전혀 무관한 행정조치만 이루어졌고, 형사처벌이 시작된 1995년에도 처벌은 12.12. 반란에 가담한 반란군이나 비리와 관련된 비리 범죄자만 해당되었지 범죄와 무관했던 하나회 인사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 중권작가가 집필한 쿠데타라는 소설에 나오는 비숑이라는 사조직이 하나회랑 매우 유사하다.

  • 2023년 11월에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에서도 등장하며 마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하이드라를 연상케하는 비밀 조직처럼 묘사되었다. 작중에서 보여준 이들의 행적에 분노한 일부 관람객들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주역으로 나와 하나회 숙청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을 모티브로 한 후속작을 만들어주길 바라고 있다.

11. 관련 문서 및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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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숙청 2~3년 후에 경향신문에 연재된 실록! 하나회는 당시의 시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김재홍이 쓴 관련 시리즈 칼럼도 읽어볼 만하다. , , , , , ,

  • <5공화국>, 김철민 지음, 시아출판사, 2005년, 전3권
  • <264일의 쿠데타>, 노가원 지음, 시아출판사, 2017년, 전2권

오히려 노태우 회고록(2011년), 전두환 회고록(2017년)에는 관련 내용이 아예 없다시피 하다. 육사 초기 오성회가 만들어 졌다는 간단한 문장만 있고, '하나회'라는 단어는 금기어.

하나회 이후 나타난 사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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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박정희, ?, 전두환, 차지철.[2] 그에 대비되는 '구'군부는 5.16 군사정변의 주도세력을 뜻한다. 5.16과 12.12에 모두 참여한 차규헌은 구군부와 신군부에 모두 해당한 인물이다.[3] 다만 신군부=하나회는 아니다. 신군부에 소속되어 전두환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한 인물들 중 하나회가 아닌 인물도 있기 때문. 일단 하나회 자체가 전두환/노태우의 동기, 후배들로 이뤄졌으니 선배 장성인 차규헌, 황영시, 유학성은 하나회가 아니며, 보안사 특별보좌관 출신으로 전두환 밑에서 요직을 역임한 이상연(12.12 사건 당시 대령)도 있고, 또한 수경사 헌병대장으로 군사반란 당시 장태완을 직접 체포한 신윤희도 반란의 조력자였지만 하나회 멤버가 아니었다. 신윤희가 하나회 소속이란 오해가 많이 있는데, 신윤희 본인이 쓴 "12.12는 군사반란인가?"란 책 소개에서 "하나회 멤버도 아니었던 그가 장태완을 체포한 것은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대한민국 헌병으로서 현명하고 용기있는 결단이었다"는 개소리가 적혀있는 걸 하나회가 아니었다고 봐야한다. 그 외에도 하나회가 아니면서도 신군부에서 승승장구한 인물들은 소수 있다. 다만 전두환의 선배 기수들은 정식 멤버만 아닐 뿐 이들과 행동을 함께 하는 후원자들이며, 신윤희 같은 경우에도 반란 당시 조용히 숨어있다가 전두환의 말 한마디에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멤버였건 아니건 한통속은 맞다.[4] '하나'라는 말이 순우리말이기에 한자어 변환을 할 때는 일회(壹會)나 일심회(一心會), 또는 구 명칭인 오성회(五星會)로 표기한다.[5] 비밀 사조직이다보니 민병돈 전 육군특수전사령관처럼 하나회 소속이면서도 하나회의 정체에 대해서 모르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참고로 민병돈 본인은 하나회에 대해서 그냥 곱창 회식모임인줄 알았다고 한다. 본인은 영양식이라 먹기 힘든건데 선배들이 사준다니까 갔다고. 본인의 회고 참조. 한우회. 회식자리에서 곱창을 많이 먹었나보다.[6] 해당 사조직에서 리스트에 거론된 인물들 중엔 하나회 후반기 기수와 중복 소속된 이름들도 상당수 존재했고 이들은 지속적으로 신인 멤버들을 모집했음은 문건을 통해 드러나던 바 있었다.[7] 19기의 대표 9-9라인이지만 일부 회원들의 반대로 하나회 가입이 안되어 원한을 갖고 있었다. 노태우 시절 전두환계 하나회 청산 작전에서 폭주하여 근신처분을 받았다. 이 공로로 김영삼 정부 당시 9-9라인임에도 2군 사령관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막판에 결국 가입은 했다는 설도 있다.[8] 20기의 대표 9-9라인이지만 하나회는 가입 안한 것 같다. 김진선과 함께 전두환계 회나회 청산 작전에서 활약. 그러나 적당한 선에서 바로 빠지며 노태우의 이쁨을 받고 수방사령관 까지 승진했다.[9] 우국일 준장은 통역장교로 임관하여 커리어 내내 보안부대에서 보내다가 말년에 합참으로 갔고 이듬해인 1980년에 준장 계급으로 군 생활을 끝냈다. 2009년 사망.[10] 이 인용문의 저 한 마디에 의해 만들어진 사조직이 하나회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군인이라면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게 당연한 이치임에도, 이 당연한 도리조차 돌아가질 못하던 당시 국군과 정계의 불안정성을 내포하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단 박정희 본인부터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에게 대항하는 하극상으로 정권을 잡았으니 말이다. 또한 조직적인 대통령 직위를 향한 충성이 아닌 아닌 박정희 개인에게 충성하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11] 12·12때 기준으로 전두환 소장은 보안사령관, 노태우 소장은 9사단장, 김복동 소장은 제3야전군 부사령관(경호실 작전차장보에서 10·26사건으로 인해 좌천됨), 최성택 소장은 육본 정보참모부 차장, 백운택 준장은 71방위사단장이된다.[12] 출처: 노태우 회고록, 1권 68페이지(2011년판). 이전 버전에는 "노태우 회고록 2장에 의하면 '웅성은 박병하"라고 작성되었는데 판본에 따라 다른 듯.[13] 훗날 노태우는 김복동의 여동생인 김옥숙과 결혼하여 처남 매제지간이 되었다.[14] 노태우는 다음해 준장 승진.[15] 육사 졸업 이후 각종 교육 기관에서 항상 우등의 성적을 유지하였으며, 작전통으로도 뛰어났다.[16] 이것도 입학당시의 성적이었지 나중에 가면 노태우의 성적은 점점 떨어져 졸업때는 150여명중 67등의 그냥 중간권에 불과했다.[17] 이때 김복동은 송구부(핸드볼) 주장, 노태우는 럭비부.[18] 200명 정원이었지만 가입교에서 쳐낼 예정이라 228명을 합격시켰다. 전두환 자서전에 의하면 끝에서 2등.[19] 육사 11기 졸업생 156명 중 김복동만 13등으로 우수하고, 권익현 55등, 노태우 67등, 손영길 81등, 정호용 86등으로 전반적으로 성적이 안 좋았으며, 전두환의 경우 126등으로 유독 뒤떨어졌다.[20] 그나마 저 126등조차 전두환치고는 많이 올라간 성적이다. 밤에는 연등을 하고, 아침 기상 점호 두 시간 전부터 변소에서 판초우의를 깔고 공부하고, 영어와 수학을 잘하는 생도(수학은 민석원 생도)를 찾아가 개인 지도를 받는 등 나름 열심히 성적을 올린 결과다.[21] 그러나 이들의 교육 과정은 입교 후 1년으로 변경되었다. 전두환 기수가 입학했을 때 구대장들이 이들 10기.[22] 김재홍, 軍(군) 어제와 오늘 30화, 『동아일보』, 1993년 7월 29일 p5.[23] 따라서 이들은 육사 11기가 아닌 종합학교의 기수를 부여받았다. 육사 재개교 이후 이들을 복교시키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미 임관한 장교를 다시 사관생도 신분으로 내리는 것이 맞지 않다 하여 없었던 일이 되었다.[24] 육군사관학교는 이 시기에 성적 미달 퇴교자가 독보적으로 많았는데, 이것 때문에 골치를 썩은 육군사관학교 당국에서는 결국 내신의 비중을 1차 전형에서 동점자 당락 기준 수준까지 매우 크게 줄였고, 국어, 영어, 수학 딱 3과목으로만 구성된 자체 고사를 1차 전형으로 바꾸게 된다. 그 결과 양주희(69기) 같은 매우 우수한 자질이 유입되었다. 참고로 양주희는 내신이 너무 개판이다 보니 추가 합격으로 겨우 입학했지만, 공부를 엄청나게 잘 했다. 소위 임관 성적이 수석인 사람이다.[25] 출처: 노태우 회고록, 2장, p74~75.[26] 전두환은 21사단 66연대 1중대 소대장.[27] 지지 시위는 전두환 혼자 했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는 박정희의 기획이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하루 전날 11기 이동남에게 생도 지지 시위를 지시하였고, 이동남은 동기생인 강재륜 교수, 서우인 교수, 그리고 당시 서울대 ROTC 교관이었던 전두환 등을 만나 지원 요청을 하였다. 그리고 5월 17일 있던 육사 설득 과정은 당시 육본에 있던 박창암 대령(육사 생도대장 출신)이 전화로 지휘 하였는데, 그는 반대하는 강영훈 육사 교장을 쏴 죽이라며 강하게 푸시하였다. 그리고 현장에서는 육사 11기 손운익이 주역이었으며 강영훈 교장에게 "반대도 말고 찬성도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라고 설득하여 희생없이 생도 지지 시위를 이끌었다고 한다.[28] 공수단 출신 위관 장교 10명으로 구성 되었는데 이른바 'GD'팀이라고 부른다.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자 그쪽으로 들어가 주먹부대로 활약하였다. 결국 지들끼리 청와대에서 주먹질 하다가 자폭한다.[29] 이런저런 일로 실제로 경호실에 근무하지는 않았다. 전두환은 의장실 민정비서관, 최성택은 총무비서관으로, 노태우는 방첩대 정보과(최고회의 담당 요원), 기타 다른 육사 11기들은 방첩대로 빠진다.[30] 전두환에 회고록에 의하면 오성 장군이 되자는 뜻에서 '5성회'였기 때문에, 일곱 명이 모였다고 7성회라고 하진 않았다고 한다.[31] 박종규의 지시로 수경사 장교와 하사관들 벌인 시위를 했다.[32] 소장 예편.[33] 박정희의 당번병 출신, 월남전 때 중상을 입어 대령 예편.[34] 다만 이상훈의 경우 육사 동기인 전두환과 친분이 매우 깊어 지지 시위 주도를 같이했고 이 공로로 대장까지 진급하는데 성공함은 물론, 국방부 장관까지 지냈다.[35] 중령 예편. 청와대 민정비서실에서 근무중 윤필용 사건 때 워낙 하나회의 핵심이라 구속되었다. 훗날 3선 국회의원으로 보상받음.[36] 대령 전역 후 국회로 진출. 훗날 노태우 때 민정수석.[37] 경북 청송 출신에 대령 예편. TK 출신으로 오성회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전두환-노태우와 어울렸다. 에너지관리공단 감사 역임.[38] 전두환 자서전에 의하면 '민주도 하나, 나라도 하나, 충정을 바칠 곳도 하나'라는 의미이다.[39] 출처 <한국의 군부정치> 한용원, 321쪽.[40] 전두환과 미국 특전부대 유학 동기다.[41] 장도영은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박정희에 반대되는 세력을 지지하였기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었다가 이후 쫓겨나 해외를 유랑해야 했다.[42] 사실 손영길은 이미 박정희 부관이었고 전두환은 1959년에 장인인 이규동을 통해 박정희를 개인적으로 만난 바까지 있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박정희를 새로 만나기 전부터 박정희와 육사 11기 간에 개인적인 인연은 많았다. 손영길도 1963년 7.6. 거사 사건 당시 전두환을 열렬히 비호해놓고 새삼 1967년도에 하나회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한 것이다.[43] 김충환 전 의원의 친형. 아마 2000년대에는 기독자유민주당 대표로 서울특별시장 출마도 했던 김충립 목사로 더 유명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 시기 때는 한반도 프로세스 포럼 회장이자 전두환 측근으로 다시 뉴스에 많이 등장했다. 2016년 5월 경에는 전두환에게 5.18. 묘소 참배하러 가자고 제안하여 언론에 크게 탔다.[44] 하나회에 대해 꽤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하나회는 영남계 사조직이 아니며 호남의 장세동 등 비영남 출신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라는 등 황당한 소리가 꽤 많긴 한데, 그래도 김충립은 이미 노태우 정부 말기인 1991년 신동아 9월, 10월호에 '하나회 파워게임'이라는 기사를 통해 하나회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45] 당시 박정희의 계급은 대장. 보직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46] 애초에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의 부관이 바로 위에 있는 손영길이었고, 전두환의 장인 이규동과는 같은 만주군관학교-만주군 출신에 안면까지 있었다. 즉 전부는 아니더라도 하나회 구성원 다수와 5.16. 이전부터 개인적인 친분이 이미 있었다는 말이다.[47] 항목 가장 위에 있는 "군대 내부에도 각하를 추종하는 세력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대사가 활용되었다.[48] 군인이 충성해야 하는 대상은 군 통수권자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대통령'이어야 하고, 당연히 대통령이 어떤 사람이든 군은 통수권자와 나아가 군 통수권을 위임한 국민에게 충성하여야 하나 전두환이 말한 충성의 대상은 대통령이 아니고 '박정희' 개인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49] 진급에 필요한 인사자료를 검증하는 부서.[50]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라남도 지역 계엄사령관이던 윤흥정 장군의 동생이다.[51] 여담으로 이때 전두환은 각종신고시에 부동자세를 취해 눈물을 흘릴 때 까지 눈도 깜빡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른마 '눈물 신고'라고 한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군생활 때 전두환의 1공수 여단에 있었는데 이때 일화중에서도 '눈물 신고'이야기가 나온다. 1공수에 전입했는데 2주간 전입교육을 받는다. 그런데 전입교육이라는게 부동자세로 눈도 깜빡이지 못하게 하는 것. 매우 고통스럽지만 전투력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의문시 되는 교육.[52] 전두환 초대 참모총장은 함께 12.12를 일으킨 육사 10기 황영시였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회 최대 후원자라 전두환과 함께 12.12까지 참가하게 되었다.[53] 부분적인 실드이며, 준장 진급을 1번만 누락시키는 겉으로 보기에만 징계인 것처럼 처리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령을 달고 준장 보직인 제1공수특전여단장으로 보직시켜 사실상 진급에 성공한 것으로 만든 뒤 조용해지자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에도 소장으로 1차에 진급 성공해 제1보병사단장으로 영전하기까지 했다.[54] 이는 하나회 구성원으로서의 특혜보다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적극적인 옹호로 무사히 넘어갔다. 그러나 박희도는 전두환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55] 경찰로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대규모 시위발생시 공세적인 시위 진압을 위해 준비된 수도권 지역 군부대. 하나회 장교들은 충정부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5.18. 민주화 운동도 광주광역시에 투입된 충정부대들이 잔인한 유혈 진압을 하면서 촉발된 것이다.[A] A B C 당시에 5사단의 주둔지는 철원이 아닌 양평이었고, 20사단은 반대로 철원에 있었다.[56] 현재는 부대 주둔지가 부천에 있다.[57] 현재에도 육군본부, 국방부 합참 보직은 육사 출신이 거의 독점하기 때문에 대한 타 출신들이 고까워하는 경우가 많다.[58] 그 외 참모 보직을 1회 맡아야 하지만 어차피 중대장 보직의 특성 상 참모 보직을 환영하니 별 의미 없는 조항이다.[59] 사실 지만원은 김대중 집권 후 한겨레의 월남 파병 장병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보도를 기점으로 태세전환하기 전까지는, 매체를 가리지 않는 군사 전문가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60] 출처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61] 이때 손영길이 구명하였으나 후에 윤필용 사건때 배신한다. 또한 이때 정승화와 악연이 생긴다.[62] 중간에 김용순이라고 45일 한 2대 부장이 있다. 육사 5기와 8기의 갈등 사이에 새우등 터짐. 정확히는 차지철의 GD팀(중정 6국 소속)이 자기들끼리 총 꺼내고 싸우는 와중에, 무려 박정희 전 의장 공관을 포위하는 일까지 있었는데(박정희는 지방에 내려가 있었음) 이 사건으로 책임지고 김용순만 물러 났다. 물론 김재춘이 자기가 중정 부장 하려고 애꾿은 김용순에게만 책임을 지운 것이다. 실제로는 차지철 잘못인데도 불구하고.[63] 김종필 1926년생, 김재춘 1927년생, 박종규 1930년생, 전두환 1931년생, 노태우 1932년생, 권익현 1934년생, 차지철 1934년생.[64] 그런데 이순자는 이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는데, "어떻게 자신보다 나이가 4살이나 더 많은 사람을 하대를 하는가?" 라면서 서로 경어를 썼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남편들이 친구였던 것처럼 배우자들 간에도 우애가 돈독했으며 10년 동안 영어공부도 같이 하고 집안일과 자녀 문제 등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면서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본인 인터뷰[65] 11대 대통령으로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마지막 제4공화국 대통령으로, 12대 대통령으로는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선출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66] 하지만 대장 진급 및 예편은 노태우의 의사가 아니라 전두환에 의한 강제적 진급 및 예편이었다.[67] 전두환과는 달리 대통령 직선제로 뽑힌 대통령이다.[68] 편제상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통제를 받지만, 사실은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의 직속 부대로 경복궁에 위치하였다. 그런데 10.26.으로 통제를 할 청와대 경호실이 차지철의 사망과 이재전 차장, 김복동 차장보의 문책성 경질로 인해 사실상 와해되어 상황실장인 정동호 대령이 경호실장 직무대리를 맡는 수준까지 와버리면서 12.12 군사반란때에는 사실상 누구의 통제도 받고 있지 않았다.[69] 중간에 전두환은 장세동을 쓰리허 견제차원에서 소장으로 진급시켰고, 명예전역시에는 중장으로 진급시켰다.[70] 여기도 편제상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 직속 부하이지만, 청와대 경호실의 통제를 받는다.[71] 33 헌병대는 청와대 경호실 배속 부대이나 10.26 직후 전두환이 본부장으로 취임하게 된 합동수사본부에 임시로 배속됨. 이후 12.12때에는 정승화 총장 연행과 공관 점거에서 중요한 역할 담당.[72] 12.12. 당시 쿠데타를 저지할 수 있는 주요부대 지휘관들인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진기 육군헌병감을 전두환의 명령을 받아서 서울특별시 마포구 연희동의 모 요정에 유인, 1시간여 동안 잡아두었으며, 부단장 신윤희에게 수경사로 이전한 육본 지휘부와 장태완 사령관을 무장해제 시키도록 명령하였다.[73] 1979년 12월 14일 사진에서 2째줄 왼쪽에서 3번째에 있다.조홍 문서에는 육사 13기라고 되어있는데, 밑에 명단에는 없다.[74] 사실 전두환 반란세력측과 국방부측이 신사협정을 맺었는데 국방부측이 이를 믿지 않고 하나회 입김이 없던 9공수여단이 회군을 안 했다면 12.12 사태는 진압군측이 더 유리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존재한다.[75] 심지어 녹음본까지 나온 상황에서 책 내용 자체가 거짓말로 도배되어있는데 첫번째로 정승화가 김재규랑 짜고친 반란이라고 기정사실화 한 것도 모자라서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정승화의 충성스러운 부하였고 술에 취한 상태로 지휘 무모한 명령을 하는 것도 모자라 정승화의 사병이었다고 거짓말로 점철되었다. 12.12. 당시 장태완은 동료 장군과 함께 전두환에게 속아 술자리에 있긴 했지만 술을 얼마 안 했는지 녹취록에서도 군사적 판단력이 정상이었고 말도 차분하였다. 장태완을 정승화의 사병이었다고 폄하하는 주제에 정작 신윤희 본인이 소속된 하나회 자체가 전두환측의 사병에 가까운 집단이었으니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76] 육본 헌병감 김진기 준장 직속 부하로 직속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정승화 육참총장 불법 연행에 직접 관여. 정승화 총장 연행 도중 오인사격으로 인해 반신불구가 되었다.[77] 육본 헌병감 김진기 준장 직속 부하 우경윤과 마찬가지로 직속상관 김진기 헌병감에 대한 하극상을 감행했다.[78] 사진은 특전사령관 시절.[79] 사실 이 자리는 부관병과장이자 부관병과의 몫이었다. 그러나 하나회였던 박준병이 빼앗은 것.[80]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부하.[81]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부하.[82]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부하.[83] 소장시절의 보직은 알려진 것이 없다.[84] 대장 진급때에는 최소 1년 이상 간격을 두는 것이 기본으로, 실제로 당시 11기 선두주자인 정호용과 12기 선두주자 박희도의 간격이 2년, 박희도와 13기 선두주자인 최세창의 간격이 2년이는데, 14기인 이종구는 최세창과 불과 6개월차였다. 여기에 14기 2번째 대장 민경배가 대장으로 진급한 것이 이종구 진급 2년 후였다. 그리고 이미 중장 진급 때부터 13기 선두주자를 1년차로 추격하고 있었다.[85] 1985년 12대 총선에서 여당에 반강제투표 기시 거부로 좌천[86] 전두환과 노태우도 맡았던 직[87] 85년 12대 총선에서 여당에 반강제투표 기시 거부로 좌천[88] 물론 이병태는 일산신도시 실언 이후로 김영삼에게 볼 때마다 "XX" 소리 듣고 결국 경질되었다.[89] 의외로 김영삼 정부가 막 출범했을 때 단행했던 하나회 숙청 때는 칼날에서 비껴났다.[90] 조남풍과 마찬가지로 김영삼 정부 출범 당시에는 살아남았으나 뒤에 교체되었다.[91] 2군사령부 위수지역이 상당히 넓기는 하나 후방지역 특성상 전방인 1, 3 야전군에 비해 중요도도 낮았고 전시가 아닌 이상 공을 세울 길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여긴 군단에 비해 급이 낮은 관구사령부가 있었으며 1982년 관구사령부 해체부터 1987년 9, 11군단 설치 전까지 군단도 없었다.[92] 노태우 정부 말기인 1992년 군제개혁 이전의 합참의장은 실전부대에 대한 명령권이 없는 명예직에 불과했다. 군령권군정권을 모두 육군참모총장이 가지고 있었고 육군참모차장육군참모총장으로 가는 코스였다.[93] 설에 의하면 전두환에게 갈굼당하고 한강에 가서 펑펑 울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94]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 사실이 묘사되었는데,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전두환을 만난 노태우는 해당 군 인사를 통보받은 후 자택에 돌아와서 심복인 박철언에게 "내는 허수아비가 될 생각이 없어. 사람들이 물태우라고 내가 진짜 물이가?"라고 말하며 격노하는 장면이 나온다.[95] 노태우의 아내 김옥숙과 전두환의 아내 이순자도 원래는 서로를 '재국이 엄마', '소영이 엄마'로 부르며 허물없이 지냈으나,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 후 김옥숙은 태도를 바꾸어 "우린 (누구처럼) 체육관 대통령이 아니예요~"라며 이순자를 은근히 비웃었다는 일화에서도 노태우의 속마음이 잘 드러난다. '형님'이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고 알려진 건 사실이 아니다.[96] 신임 육군참모총장인 '하나회의 황태자' 이종구도 계파로 따지면 전두환계에 속했으나, 노태우의 경북고등학교 후배인 그는 제6공화국에서는 노태우에게 충성했고 후일 국방장관까지 오른다.[97] 황영시, 정호용, 박희도, 최세창 등 전임 3군사령관들은 모두 2차 보직으로 영전했다.[98] 노태우의 9사단장 및 9공수여단장 시절 부하들로 노태우의 직계 군맥들을 부르는 말이다. 참고로 전두환의 1사단장 및 1공수여단장 시절 부하들로 이루어진 전두환의 직계 군맥은 1-1 인맥이라 불린다. 각각 9땡 인맥, 1땡 인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99] 육사 15기로 5공화국에서는 전두환계 동기들에게 밀려 찬밥 신세였다. 15기 선두 주자는 전두환 직계로 3군사령관에 오른 고명승이었으나 영전하지 못하고 전역했고, 고명승보다 1년 반이나 진급이 늦은 이진삼이 참모총장을 차지했다.[100] 대표적인 인물로 엄삼탁이 있다.[101] 노태우의 9사단 시절 참모장으로, 12.12. 군사반란 때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대놓고 구라를 친 후 노태우의 명령으로 전방 병력을 서울로 불법 출동시켰다. 하나회의 황태자 이종구 못지않게 이쪽도 화려한 진급 코스를 달렸는데, 인사참모부장-수방사령관-기무사령관-3군사령관으로 최고 실세 보직들을 모두 역임했으나 참모총장 진급을 눈앞에 두고 김영삼에게 철퇴를 맞는다.[102] 본래 하나회의 라이벌 조직인 청죽회 소속이었지만 12.12. 군사반란 이후 하나회에 들어왔다. 이때 기존 하나회 멤버들의 반대가 있었고, 이때 겪은 설움까지 갚아주려고 했던지 지나치게 전두환계를 공격하다가 하나회 내부의 극심한 반발이 이어지자 노태우가 자제 명령과 금족령을 내렸다. 김영삼발 하나회 척결 작업이 시작되자 자신은 하나회가 아니라며 살아남으려고 했고, 한 번은 살아남았는데 계속해서 말이 나와서 얄짤없이 예편당했다.[103] 이렇듯 임기 말 군 인사로 노골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낸 전두환보다 좀 더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수족들을 깔아둔 노태우가 한 수 높았다고 볼 수 있지만, 김영삼은 이들을 싹 다 예편시켜버리고 군 인사 관행(차기 참모총장은 후임 기수로 이어지는 것)을 뒤엎어 관례상 한미연합사부사령관을 끝으로 예편해야 할 17기 김동진을 총장으로 임명했다. 그 때문에 육사 18기는 참모총장 혹은 합참의장을 배출하지 못한 정규 육사 기수로 남았다.[104] 김영삼의 이런 전략은 이후 금융실명제 실시에서도 나타난다.[105] 권영해는 육군사관학교 15기 출신으로, 현역 시절 하나회의 견제와 외면을 받다 한직인 올림픽지원사령관을 끝으로 예편했던 설움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하나회 청산을 밀어붙였다.[106] 현재 군단과 군 사령부 기무대장은 대령 보직이다.[107] 노태우 정부 당시 검찰총장법무부장관을 지내며 잘 나가던 김기춘경남고등학교 학맥 + 거제도 출신이어서 독재 정권에 협력했음에도 KBO 총재신한국당 거제 지역구 공천까지 받으며 문민정부에서도 잘 나갔었다.[108] 이 연설을 했을 때 김영삼은 문민정부 최초로 군사 행사에 참석한 상황이었다.[109] 참고로 2019년에 처음으로 준장으로 진급하고, 2021년에는 소장에 진급하여 선두 주자들이 사단장으로 진출해 있는 기수이다.[110] 문민정부 출범 때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111] 다만 이문석이 참모총장에 오를 수 없던 것은 그가 초기 암 환자였다는 점도 한몫했다.[112] 당시 최고 선임자가 소령 언저리에 불과했지만 초급장교들이 속해있던 알자회를 해체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는 의견도 있다.[113] 때문에 김진영은 친구였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박관용을 만난 자리에서 "며칠 전까지도 내게 신임을 보낸 대통령인데 그 며칠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거냐."고 물었고 박관용은 "정치인의 속뜻을 군인인 네가 어떻게 알겠냐."며 위로했다고 한다.[114] 권영해가 서울특별시 송파구 가락동에 100평대 빌라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매입 자금 중 일부가 방산업체에서 나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결과적으로 권영해의 동생이 율곡사업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는 어느 정도 사실로 밝혀지고 만다.[115] 7개월 뒤 김도윤 기무사령관의 후임은 ROTC 3기인 임재문 참모장으로 당시 준장이었다. 그러나 2달 후 소장, 1년 10개월 후 중장으로 고속 승진했다. 심지어 대통령과의 독대도 임재문 때 부활 하였다. 즉 김영삼은 힘이 센 자리의 계급도 낮추고 독대도 없앴으나 군부 물갈이가 끝나자 몇 달 만에 전부 자기 손으로 환원시켜 버린 것이다. 즉 내로남불이었다.[116] 참여정부에서 다시 한 번 소장 직위로 격하를 시도했으나 흐지부지되었고 박근혜 정부 초기에 임명된 장경욱 전 기무사령관(36기) 역시 소장으로 직무를 수행한 경우도 있다. 다만 장 사령관은 중장 진급을 앞두고 김관진 국방부 장관, 박흥렬 대통령경호실장,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등의 인사 관련 보고서를 제출한 것 때문에 괘씸죄로 취임 6개월 만에 예편당하고 만다. 결국 이재수 중장부터는 다시 기무사령관은 중장 보직이 되었고, 안보지원 - 방첩사령관으로 바뀐 이후에도 계속 중장 보직으로 유지되고 있다.[117] 김진영 4개, 서완수 3개.[118] 이 학군단 그룹의 선두주자는 하나회는 아니었지만 하나회의 수장이었던 전두환과 친밀한 관계를 갖추고 있던 박세환 전 육군교육사령관이었다.[119] 이 시절 연합사 부참모장 자리는 소장으로서 더 이상 진급이 안되는 일명 '막다른 골목' 보직이었다. 위에서 설명했듯 직속상급자인 한미연합군부사령관이 바로 새 육군참모총장인 김동진 대장. 둘 다 한직에서 물 먹던 사람들이 진급에 성공하는 역전극이 일어난 것이다.[120] 다만 이쪽은 다음 보직이 육사 교장이었고 그대로 전역했다. 그의 소장 진급은 1차가 아니었지만 21기 선두주자들이 전부 하나회였던지라 중장은 1차 진급했다.[121] 또한 12.12. 군사반란 당시에 특전사령부에서 작전처 교육훈련과장을 맡고 있었다.[122] 안병호 수방사령관은 권영해 장관의 "나를 좀 도와서 잘 해보자."란 말만 믿고 안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 무렵 육본 정훈실에서 수방사령관의 업적을 묻는 전화가 왔다가 석연치 않은 반응과 함께 끊기는 등의 일이 있어, 경질인지 승진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다.[123] 전임 특전사령관이었던 서완수는 그의 육사 동기였으며, 위에서 서술했듯이 2차 보직인 기무사령관을 하고 있었다. 한술 더 떠서 전임 육군참모차장인 김진선은 아예 대장 1차 진급자였다.[124] 심지어 군단장을 안 해본 이준 중장이 진급하여 1군 사령관에 올랐다.[125] 물론 군사정권 시절에 참모차장 자리는 대장 진급과 가장 가까웠지만, 이미 동기들이 대장 TO를 다 잡아먹은 상황이니 명예직이라고 볼 수 있다.[126] 안병호는 12.12 당시 9사단 작전참모였다.[127] 정확히는 서울과 근교에 있던 1·3·5·9공수여단. 단 9공수여단장은 12.12 당시 하나회와 연관이 없었기에 12.12를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허무하게 날려먹었다.[128] 30경비단, 33경비단. 이 시절에 수방사 예하에 있던 핵심전력은 당연히 경비단들이었고 향토, 동원사단의 전신 격인 훈련단들은 경비단에 비해 규모도 영세했고 예비군 훈련 부대였기 때문에 정예병력도 아니었다. 물론 71훈련단장이 여기에 가담해서 결국 중장까지 달았다.[129] 18기 9-9라인의 핵심. 보안사령관으로 근무 중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하는 윤석양 사건이 터져서 해임되고 보안사도 기무사로 바뀌는 수모를 당했다. 그럼에도 9-9라인인지라 대장으로 승진하여 군 사령관까지 오른 것이다.[130] 다만 김재창 한미연합군부사령관은 하나회원인 것이 뒤늦게 알려져 1년 만에 경질된다. 김현철에 따르면 처음에는 김재창이 하나회 인사인지 잘 몰랐다고 한다. 실제로 하나회 인사 중에는 활동을 잘 하지 않아 핵심 멤버가 아니면 헷갈리는 사람이 꽤 있었다.[131] 사실 17기의 최고 핵심인 허화평, 허삼수(12.12. 당시 보안사 처장급)는 이미 정치권에 들어섰다. [132]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가 같은 경상도라도 고향 사람인 TK를 중용한 것처럼 김영삼은 PK 출신들을 중용했다.[133] 역시 9·9인맥으로 이문석, 김진선과 함께 전두환계 하나회를 쳐나갔지만 적당한 시기에 빠지며 이후로도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수방사령관까지 갔다가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때문에 이미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134] 이때 하나회 명단은 하나밖에 없다고 알려 졌는데 불구하고, 백승도 대령의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이 일어난 점을 보아 배후가 김진선 육군참모차장이었다는 설도 있다.[135] 그러나 김진선이 하나회 명단에 있는 것을 보면 뒤늦게나마 가입했다는 설이 존재하기는 한다. 아니면 9-9로 잘나가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회원으로 의심받은 걸 수도 있고.[136] 표순배, 김정신, 배문한, 이재관. 단, 이 중에서 표순배 중장이 하나회 인사였다.[137] 각각 육사 21기 전영진 소장(전두환계 하나회), 육사 21기 최승우(전두환계 하나회. 21기에는 9-9라인 없음.) 소장이며, 이들은 국군의 날 제병지휘관과 교육사령부 참모장으로 좌천되었다.[138] 이 과정에서 경질된 최승우 소장은 한직을 떠돌다가 1995년 6월에 전역했으며 2000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 이후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예산군수에 당선되고 내리 재선했다.[139] 결국 뒷말이 나왔던지라 1994년 상반기 인사에서 전역조치되었다.[140] 하나회가 완전히 박살나고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하나회 말단이던 류제승은 8군단장, 김현집은 5군단장, 최익봉은 특전사령관을 지냈고, 한 술 더 떠서 김현집은 3군 사령관까지 지냈다.[141] 냉정하게 말해서 군에 하나회가 너무 많기도 했고, 한번에 다 잘라 버리면 후속 인사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회를 남기되 진급 가능성이 없는 보직(소장급은 교육사령부 OO부장, 병과학교장, 국방무관, 부군단장 등)으로 보내서 근무시켰다.[142]이태원동 남산 대림아파트. 남산2호터널, 남산3호터널 인근에 위치해 있다. 남측 입구 근처에 있었고, 이 사건 직후에 철거되고 민간 아파트로 재건축되었다.[143] A4보다 더 작은 노트 수준의 크기이다. 삐라를 생각하면 쉽다.[144] 지금도 헌병 병과에는 상당한 요직이다.[145] 하나회 + 9-9인맥의 핵심이었던 15기 이진삼 육군참모총장의 비서실장 및 전속부관을 3번이나 역임했다.[146] 일단은 김진선 당시 육참차장으로 추정. 하나회 명단은 육본 인사참모부장에게 딱 1부 밖에 없었는데 김진선이 전임 인사참모부장인 안병호에게 물려받았고 이후 없어졌다. 김진선은 이 명단을 바탕으로 보안사령관 시절 보안사 내 하나회 참모 제거 작업을 하다가 노태우의 눈밖에 난 적이 있다.[147] 김동진 총장은 별다른 대화 없이 호통을 쳐서 백승도 대령을 바로 범수단으로 보냈다고 밝혔다.[148] 범수단에 자수했으나 중간에 헌병대가 낚아 챘다.[149] 사실 2010년대 이전까지 연대장은 대령 2~3차 보직이었다. 요즘은 연대장 - 참모 보직 - 한직/준장 순서지만 이 시절에는 참모 보직 - 연대장 - 한직/준장 순이었다.[150] 동기인 한민구는 2003년 상반기에 1차로 소장 진급에 성공한 후 53사단장으로 진출했는데 백승도는 2003년 상반기는 물론, 2003 하반기, 2004 상반기, 2004 하반기 모두 소장 진급에서 밀려났다. 그런 상태에서 준장 한직 발령을 받은 것.[151] 2004년 하반기 장성급 장교 인사는 청와대 개입이라던가 각종 논란이 있었고 결국 이듬해 초에 2년의 임기를 마친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은 장성 진급 비리 사건으로 참여정부와의 갈등 속에서 그대로 전역하게 되었다.[152] 존안카드(존안자료)란 사정.공안기관 등이 공직인사에 대비해 비치해 놓은 대외비 인사파일을 통칭하는 것이다. '없애지 않고 보관해둔다'는 존안이라는 단어 뜻처럼 대상인물의 행적.근무평점.신상.업적.경험을 오랫동안 관찰, 정리해둔다.[153] 전두환 정부 초대 총장인 황영시 장군은 육사 10기이며 하나회의 후원자이자 12.12.의 주역이었다.[154] 국군의 날 제병지휘관, 부군단장, 군단급 기능사령부 부사령관, 교육사 참모부장 등등.[155] 이춘구(제천), 박준병(보은, 옥천, 영동), 강창희(대전 중), 김복동(대구 동 갑), 정호용(대구 서구 갑), 허화평(포항), 박세직(구미), 김상구(상주시, 군), 허삼수(부산 동), 정동호(의령, 함안), 배명국(진해, 창원군), 신재기(창녕), 권익현, 안무혁(전국구) 등 하나회 출신 국회의원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들은 당연히 군사정권 시절에 여당의 거수기 노릇을 하던 인물들이었다.[156] 18기. 3군 사령관까지 올랐지만 하나회 숙청으로 이미 날라감.[157] 김봉규 30연대장은 12.12때 병력을 출동시켰지만, 이건영 군사령관에게 보고를 했다는 죄로 별을 못 달고 군문을 떠났다.[158] 당시 출동한 대대장 3명은 전부 장성이 되었고, 다른 작전 관계로 출동 못한 29연대 2대대장은 전역했다. 대신 예하 대대장을 출동시킨 후 이건영 군사령관에게 상황 보고한 김봉규 30연대장도 역시 장성이 되지 못한 채 군복을 벗었다.[159] 12.12 군사반란 당시 하나회에 참가한 의 합계가 22개였다.[160] 장성급이야 정치색으로 찌들 대로 찌들었지만, 원래 영관급 이하들은 기수별로 영남 출신의 성적 최상위권자들을 수뇌부가 미리 찍어놓고 집요하게 스토킹하여 꾸역꾸역 가입시킨 이들이 꽤 많았고 최소한 공부는 잘했던 자들이다.[161] 중국의 군사적 위협과 북한의 핵개발및 미사일 도발등으로 인해 한미동맹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특별히 북한의 핵무장이 가시화 되는 시점에서 더더욱 필수불가결한 위치로 올랐다.[162] 2010년대 후반 들어서는 연합사 부사령관이 한 - 미 군사외교관 정도로 역할이 축소되어 선택받은 일부만 2차 보직으로 합참의장을 받고 그 외에는 임기가 끝나면 전역한다. 국방개혁 및 자주국방 등을 이유로 야전 지휘관들에게 참모총장이 될 기회를 많이 주기 때문이다. 김승겸 장군만 영전하고 김병주 장군 등 그 외에는 전역해야 했다.[163] 이때도 초급 장교를 갈아버렸다가 고생한 소련의 예시 등이 내려오고 있었다.[164]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475. 사파리가든(舊사파리클럽), 폐업, 언제 재건축 되었는지는 모르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현재 그 자리에는 한남 더 리버라는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다.[165] 지금도 작전직능 소장에게는 상당한 요직이다.[166] 당시 제1보병사단장을 마치고 소장 2차 보직을 수행 중이었다.[167] 먼저 불만 섞인 발언 후 얼마 지나 흥분에 못 이겨 중국식 찻잔을 던져 깨트렸고 이후 추가로 맥주컵을 던졌다는 설도 있다.[168] 저항 수준이 아니라 이미 쿠데타를 벌이기 전 단계였다는 주장도 있다. 아래 문단에서 후술.[169] 그 후임은 육사 동기인 이규환 합참 작전기획부장이 임명되었다. 이규환 장군은 현 수도방위사령관인 이진우 중장의 아버지다.[170] 하나회 측에선 안기부의 이 모 소장이 작성했다고 주장. 본인은 부인함.[171] 형식상으로는 자진전역. 이미 핵심 요직이던 기무사령관에서 잘렸을 때부터 전역준비를 하고 있었다.[172] 다만 이 쪽은 이미 동기와 후배들이 대장으로 진급한지라 대장 진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후속 중장급 인사에 따라 전역했다는 것이 정설. 7군단장에 이어 육사 교장도 2년간 한 상황이었다. 이후 2004년 6월에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자 이를 비관하여 모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73] 각종 요직을 거쳐 합참 작전본부장이 되었으나 전두환계인 김진영과 노태우계인 이문석, 비하나회인 김동진, 김연각에게 밀려서 대장을 못 달았다. 이병태는 김영삼의 경남고 후배이기도 하며, 특히 김영삼이 민자당 대표시절 전방 순시때 수행역을 맞아 친분을 쌓았다. 당시 이경식경제부총리의 5촌 조카였던 점도 등용에 도움이 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심지어 이병태가 국가보훈처장이 된 것도 운빨이 있었는데,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여러 자리를 인선하는 도중 정부에서 국가보훈처장 임명을 빼먹고 이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옮겨심기 식으로 임명된 것이었다고 한다.[174] 유사시 아파트를 무너뜨려 북한군의 남침을 막는 장애물로 활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175] 야당에서 이병태 장관 해임 건의안을 제출했으나 때마침 김일성이 사망해서 묻히고 만다.[176] 김영삼이 이 망언에 화가 단단히 났는지, 박관용의 말에 따르면 이병태는 장관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김영삼에게 '새끼' 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한다.[177] 김진영 숙청 당시에는 비서실장.[178] 하나회 21기로 전두환 아래 공수1여단에서 근무 했고, 1사단 연대장을 거친 1-1인맥.[179] 특히 1차 진급자까지는 진급 막차를 잘 타서 준장을 달았지만, 1차 진급에 실패한 인원들은 3명만 구제되고, 나머지는 모두 대령에서 군 생활을 끝냈다.[180] 이 중에서 류제승 혼자 살아남아 중장까지 진급하여 8군단장과 교육사령관을 하고 전역한다.[181] 이 중에서 김현집최익봉이 살아남아 중장으로 1차 진급했으나 최익봉은 성추문으로 잘렸고, 김현집은 끝까지 살아남아 3군사령관한미연합사 부사령관까지 하고 대장으로 전역했다. 김현집은 20년 만에 하나회가 배출한 3군 사령관이었다.[182] 사실 사면은 임기 막바지에 당선인과 함께 논의해서 정하는데, 임기가 얼마 안 남은 대통령은 끈 떨어진 갓 신세고 가장 힘이 셀 때가 당선인 때다. 김영삼도 당선인 신분 때 장세동을 날렸으니… 기사. 이런 정치적 관행(?)이 꼬여서 훗날 문제가 된 사례가 바로 2022년 정권 교체기인데, 후임 정부는 자기들 의견이 반영되는 걸 너무 당연하게 주장해서 전임 정부를 물먹였고 그걸 또 전임 정부는 너무 대놓고 거부해서 후임 정부를 물먹인 것이다.[183] 물론 여기에는 김영삼의 계산도 작용했다.[184] 이후 핵심 요직인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을 거쳤으나, 정권이 바뀌고 좌천되어 중장 한직인 1군 부사령관과 국방대 총장을 지내고 전역했다. 이후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비서실 국방보좌관과 국가비상기획위원장을 지냈다.[185] 김희상도 전혀 몰랐다는 말도 있다.[186] 이는 야전을 착실히 거쳐야 할 초급 장교들을 전방이나 베트남 전쟁 같은 실전에서 복무하는 대신,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었다. 기껏 파견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경기도 등지로 간 것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파병 나가서도 현지에서 일부가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187] 애초에 하나회의 가입 조건이 꼭 능력주의인 것도 아니었다. 당장 하나회의 수괴인 전두환부터가 육사 추가 합격자로, 육사에서는 상당히 무식한 인물이었다. 농담이지만 자기 스스로 “공부를 못했다”라며 자조하는 영상도 유튜브에 돌아다닌다.[188]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군이 전투기를 가질 수 없자 파일럿 육성을 위해 꼼수로 만든 집단이다.[189] 한국논단 등 보수 단체의 주장이기는 하나, 육사 수석과 차석 등에 하나회가 열렬히 구애한 것을 보면 빈말은 아니다. 하나회는 마치 꿀벌이 꿀을 찾듯, 권력에 집착하는 특유의 성질을 지녔다. 군인의 출세는 사관학교 시절의 성적에서 시작하기에 하나회가 이들에 집착한 것도 같은 연유다.[190] 채명신의 회고록을 보면, 박정희의 정권 연장에 반대하고 명예로운 퇴임을 요구하였다는 이유로 쓸쓸하게 전역하였다. 1972년 5월 30일 오후 5시 유재흥국방부장관에게서 "국방부로 와달라"는 명령을 받고 국방부로 갔는데, 국방부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여 삭막했고, 유 장관은 어두운 표정으로 책상에서 전역 명령서를 꺼내주었다고 한다.[191] 다만 계급장은 꼭 하나회의 탓이라 보기 어렵다. 당장 위 문단에서 거론된 채명신 역시 흰색 계급장을 옹호하며, 검은색 계급장은 ‘죽음을 연상’시킨다며 반대했다.[192] 전투 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전투 상태에 들어가는 작전 명령.[193] 거기다가 9사단과 함께 서부전선 방어의 중핵을 책임지는 제2기갑여단제1군단 예하 병력까지 반란에 동참하고 있었으니 서부전선 특히 파주시 방면에서의 방어 공백은 심각했다고 볼 수 있다.[194]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하나회가 아니면 사단장이 연대장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되었는데 군대의 규율이 바로 설까? 하나회 소속이 아니면 실력이 있어도 핵심 보직에 가지못하는 상황인데, 상식적으로 이것은 군의 약화를 불러온다고 봐야 한다.[195] 안광찬 소장은 제65보병사단장, 한미연합사 부참모장과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지냈으며, 2002년 예편 이후 참여정부에서 국방부 정책실장과 국가비상기획위원장을 지냈다. 좌우 양쪽에서 능력하나는 인정받았다는 소리.[196] 이 사건의 나비효과로 육본 정보작전참모부장이었던 장준규 소장이 중장 진급 후 특전사령관에 보임되었다가 제1야전군부사령관, 제1야전군사령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된다.[197] 다만 이 쪽은 예비역 중장임에도 주미대사관 국방무관 직을 수행하며 소장 진급을 임기제 진급 비스무리하게 하며 사단장직을 하지 못 했고 유엔군 키프로스 사령관을 중장 계급으로 지내긴 했으나 이 역시도 우리 군 소속이 아니라 유엔군에 파견을 간 것인데다가 임기제 진급과 다를 바 없는 진급이었다.[198] 창원시 갑 17~18대 국회의원. 광주 북구 갑 국회의원이던 강기정과 18대 국회 전반기 행안위 간사를 맡았었는데, 이 시기에 강기정 의원이 웃으면서 권경석 의원 입을 틀어막아 소위원회의 진행을 방해하는 기행을 벌였다. 이후 강기정이 정무수석과 광주광역시장을 맡으면서 다시 회자되고 있다. 사실 권경석도 하나회 출신이긴 한데, 박정희 대통령 재임 중인 1977년에 일찌감치 소령으로 예편하고 바로 유신사무관에 특채되어 부산직할시 5급 공무원으로 입직하고 오랫동안 공무원 생활을 했기에 하나회와의 연결고리는 작은 편이다.[199] 이진삼은 육사 15기로 전두환 정부 시절에는 민병돈, 고명승 등에게 밀리며 정보과 21사단장 같은 요직이 아닌 곳에서만 일했지만 노태우가 집권하자, 1군 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 같은 요직에서 일했다. 이진백은 갑종장교 출신인 그의 동생이었는데, 형의 빽으로 8사단장, 정보사령관을 지내며 잘 나갔다.[200]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사병출신에서 장교로 임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과거에는 3사, 학군, 학사장교들보다 기수도 훨씬 높고 비중이 높았었다. 대체로 하나회보다는 선배들이었고 한국전 직후 1954년에 임관한 육사 11기에게는 최대의 경쟁자였다. 한국전으로 임관한 갑종 장교는 학군, 학사가 생기기도 전에 임관한 사람들이다.[201] 여기에는 상당히 우스운 상황이 있다. 원래 전두환은 자기 아들들의 병역을 얼렁뚱땅 넘기기 위해서 석사장교라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것 때문에 생기는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훈련은 거의 비슷하게 하되, 현역으로 제대로 복무시키는 학사장교 제도를 같이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