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마리아 참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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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31년 7월 31일 부산 초량정(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의 철도국 관사 15호 오하시 마사미(大橋正己)의 집에서 조선인 하녀 마리아(변흥례)가 처참하게 살해된 모습을 오하시 마사미의 부인 오하시 히사코(大橋久子)가 발견한 사건.
히사코와 이노우에라는 사람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심증은 있으나 당시 피의자, 사법부, 경찰 모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아 처벌받은 사람이 없어서 미제사건이 된 셈.
2. 상세[편집]
2.1. 마리아[편집]
본명은 변흥례였고 1912년에 태어난 충남 천안군 성환면 출신 빈농 집안의 딸로, 10살부터 남의 집 살이를 시작했다. 17세에 경성으로 가서 일본인 집의 하녀가 되었는데 일본인에게는 변흥례라는 이름이 매우 부르기 어려워서 마리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 마리아는 19세가 되던 해 전 주인으로부터 오하시 집에 소개를 받아 갔다. 당시 조선총독부 철도국 사무관으로 경성에 거주하다가 1931년 봄에 주인을 따라 부산으로 갔다. 월급 15원을 전부 부모에게 보내는 효녀이기도 하였다. 특히 마리아는 몸무게가 60kg였고 40kg나 되는 물건을 들고 2~3km는 예사로 가는 등 보통 남자들보다 힘이 센 편이었다.
2.2. 사건의 전말[편집]
사건이 일어나기 사흘 전 남편 마사미는 경남 진주군으로 일주일 간 출장을 떠났고 하녀 마리아와 안주인만 남았다. 부인 히사코는 사건 당일 유독 마리아와 사진을 찍어 주고 옷을 맞춰 주는 등 살갑게 대했으며 밤 9시경 마리아가 인사할 때 늦게 일어나도 좋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 날은 궂은 비가 많이 내렸지만 히사코는 산보를 다녀온 후 10시에 잠자리에 들었으며 마리아의 방 전깃불은 11시에 켜져 있었다.
8월 1일 아침 히사코는 10시가 다 되어 마리아를 깨우러 갔는데 현장에서 마리아가 몸에 비단 허리띠가 매어진 채 음부의 자상에 선혈이 흘러 숨졌음을 발견했다. 부검 결과 범인은 마리아를 목졸라 살해한 뒤 시체에 잔인하게 자상을 입혔다고 한다. 허리띠는 히사코의 것이었다.
2.3. 수사 과정[편집]
범행 장소가 철도국 관사이고 집 주인이 고등관이었기 때문에 수사는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지만 외부인의 침입은 있을 수 없었다는 추리를 내었다.
다만 해당 전구에 지문이 남아 있어서 해당 지문을 경성부에 있는 경기도 경찰국[2] 으로 옮겨 판독하였지만 판독조차 불가능하였다.
8월 3일 부산경찰서에 괴투서가 날아들었는데 내용을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9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모바일 열람 불가)
해당 괴투서를 확인하고 경찰이 실제로 수색했는데 부검 결과도 해당 투서와 일치하였기 때문에 투서자의 진술을 신빙했으며 투서자 자신을 범인으로 확정했고 열흘 후 동일한 필적으로 자신이 범인이라 주장하는 투서가 날아들었다. 사건 발생 40여 일 후 투서자 야마구치 추이치(山口忠一)를 범인으로 체포했다.
그리고 8월 29일 새벽 1시 모토하시 검사는 히사코를 체포하였다.
2.4. 히사코에 대한 첫 재판[편집]
히사코의 행동은 매우 의심스러웠다. 마리아의 사망 시각은 7월 31일 밤 11시~ 8월 1일 01시쯤이었고 비명소리가 매우 컸는데 마리아의 옆방에서 자면서도 밤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으며 경찰 도착 시점에 한가로이 복도 청소나 하고 있었고 노모를 부른 데다 일관된 진술을 하지 못했다. 9월 17일 예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1심 재판에서 무죄 방면되었고 2심에서 항고가 기각되기도 하였다. 심증상 가장 큰 범인이긴 하지만 속전속결로 무죄 판결을 받은 셈.
2.5. 제3의 인물[편집]
이에 조선인의 반발을 잠재우고자 제3의 인물 이노우에 슈이치로(井上修一郞)을 용의자로 체포하였다. 철도국 공제조합 용산배급소 근무 당시부터 다카하시 부부와 면식이 있었으나 이노우에가 부산으로 발령난 후 마사미가 부산으로 영전하자 히사코와 수시로 만나게 되어 히사코의 정부라는 소문도 돌았다. 사건 당일 오후 8시경 로이드 안경을 쓴 30대의 사나이가 있었는데 이노우에가 머리를 특별히 깎았고 불교로 개종했으며 이노우에는 추잡한 관계를 맺었으며 오오하시 부부가 철도국장의 장례에 참가하느라 자리를 비웠을 틈을 타 마리아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다만 살해 이유는 밝혀내지 못하였다
결국 이노우에의 우발적 범행으로 판명났고 필적 감정 및 사건 직후 개명, 행실 등으로 보아 이노우에의 범행이 의심되어 자백을 받아냈으나 히사코가 깨지 않았다는 점, 수법이 잔인했다는 점, 알리바이, 부검 결과 등이 맞지 않았다. 결국 진술까지 번복하였다. 번복한 진술에 따르면 이노우에가 다카하시 부인과 밀회를 즐기다 마리아에게 발각되었는데 마리아를 해고할 구실이 없자 살해하자고 했다. 결국 주범은 히사코, 종범은 이노우에인 셈이었는데 일사부재리의 원칙으로 인해 히사코는 기소되지 않았고 이노우에만 기소되었다.
1934년 1월 27일 결심공판에서 이노우에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을 내렸고 이노우에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히사코가 주범, 이노우에 류우를 공범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이 또한 2심 재판에서 뒤집혀 이노우에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3. 결론 및 여파[편집]
심증상 범인은 명확하지만 처벌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미제사건이 되어 버렸다.
또 해당 사건은 조선인이 일본인의 집에서 살해된 것이라 여러 조선인들의 관심이 매우 높았다. 여러 미제사건에 비해 알려진 정보는 매우 방대한 편. 당장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동아일보에서 '초량 마리아'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굉장히 많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4. 여담[편집]
<그때, 변홍례>라는 연극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5. 관련 자료[편집]
- 신동아 2006년 1월호의 관련 내용
- '중앙' 잡지 1934년 3월호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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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슷하게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의 본명도 유일형이었으나 현지인이 부르기 어려웠기 때문에 유일한으로 이름을 바꾼 사례가 있다.[2] 당시 경성부는 경기도 소속이었다.[3] 동아일보 기사 원문에는 ○○라고 서술되었지만 다른 자료에는 '사정'이라고 나와 있다.[4] 동아일보 기사 원문의 표현[5] 원문의 "운운"은 글이나 말을 인용하거나 생략할 때 전반적으로 "이러이러하다"고 말하기 위해 표현이다. 글 일부가 검열삭제된 것을 보면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수위상 신문사에서 일부를 발췌한 듯하다.[6] 나는 절도전과이범이오 항상만흔 교훈을바다그은헤의 만분의일이라도 갑기위하야"마리아교살"사건을 말슴합니다 범인은 꼭 집안사람이라고 밋습니다 나는 삼십일일오전 밤세시경 철도관사부근을 방황하든중 돌연히녀자의 부루지지는 소리가 들림으로 그곳에 가서보니(유리문안을보앗다)전긔불미테 년령삼십가량되는 녀자가 ○○을하고잇엇습니다 또그 겨테는 년령이십세되는녀자가 발가벗고누어잇섯습니다 중년여자는 한참동안 하다가 ○수를 그릇에다바다두고 한참 생각하다가 벽장을열고 칼을내어 누어잇는녀자의 음부를 찔으고난후에겨테두엇든○수를 부엇습니다(나는응부를칼로 찌를때에 누어잇는녀자가 죽어잇다는것을 그제야알앗소)"이년!이입으로서"하고 입을물고 "이년!이젓통으로서" 하고 젓통을물고한후 부억에가서 수도물을마시고 또와서 발로서 죽은녀자의 머리를두번차고 배를밟고하얏습니다나는너무나 무서워서 근근히그곳을 옴겨집으로 뛰어왓습니다오늘아츰에도 각신문에 무엇무엇이라고 보도하얏스나 그것은전부거짓말뿐이오 아츰다섯시경나는또그집아페가서 숨어보니 어제밤녀자가 무엇을가지고나와서 초량공원으로 가는것을보고 곳뒤를따라가니 공원한편에그물건을 버리고 돌아갓습니다나는 그것을 주어보니 목편세개에 철못이박어잇는것하고끈한낫이잇섯소 나는 이것을 초량파출소부근에다 두엇스니곳가서 차저보시오 운운.
부산경찰서서장친전
실견자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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