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 처형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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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괄호 안의 연도는 북한의 주장에 근거한 연도이며,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체 및 사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연도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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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북한 국기.svg 북한사건·사고
장성택 처형 사건
張成澤 處刑 事件

The Execution of Jang Song-thaek


▲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 선고일
(2013년 12월 12일 /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
발생일자
2013년 11월 중순[1] ~ 2013년 12월 12일
- 2013년 12월 8일 (체포와 출당·제명)
- 2013년 12월 12일 (사형 선고 및 집행)

발생장소


당사자
장성택
(1946년생 / 조선로동당 행정부 부장)
주동자
김정은
(1984년생 / 조선로동당 제1비서)
김원홍
(1945년생 / 국가보위상)
조연준
(1937년생 / 조선로동당 검열위원장)
최룡해
(1950년생 /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혐의
국가전복음모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제60조)
[2]
북한 정권이 열거한 죄목}}} #
- 수령 권위에 도전
- 인사농단 및 분파주의
- 정변 획책
- 내각 무력화
- 수도 건설 방해
- 경제적 혼란 초래
- 사회 기강 해이
- 개인적 비리
영향
김정은의 독재 권력 공고화
북중관계의 악화
북한 경기 침체[3]
처형 3년 뒤 김정남 피살 사건 발생
1. 개요
2. 경과
2.1. 심복, 친인척들의 처형
2.2. 실각설 대두
2.2.1. 12월 3일
2.2.2. 12월 4일
2.2.3. 12월 5일
2.2.4. 12월 6일
2.2.5. 12월 7일
2.3. 출당 및 제명
2.4. 처형
2.5. 후속보도
3. 분석
3.1. 처형 이유에 대해서
3.2. 김정은 체제와의 연관성
3.3. 김여정 연관설
3.4. 군부 과격파의 득세설
3.5. 박근혜와의 연관설
3.6. 라종일 교수의 주장
3.7. 타 권력기관과의 알력다툼설
4. 장성택 생존설
5. 이후



1. 개요[편집]


2013년 12월 12일북한에서 발생한 초대 최고지도자 김일성의 사위이자 김경희의 전 남편, 3대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의 처형 사건.

2013년에 있었던 사건 중 단연 전세계적인 톱 뉴스 중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북한 역사상으로도 손꼽힐 만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거론된다. 무려 백두혈통에 속하는 인물을 공개처형한 것이었기 때문. 대한민국을 비롯한 동양권 국가에서는 '고모부마저도 잔혹하게 죽인 처조카의 패륜성'이 부각되어 언급된다.

장성택을 처형했는가에 대해선 다양한 썰이 존재하나, 핵심만 추리자면 '2대 최고지도자 김정일의 사망을 계기로 그의 매부 장성택이 3대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을 보좌했고 그 과정에 장성택의 위세가 김정은을 넘어서게 되자 위협감을 느낀 김정은이 제거를 나섰다는 것'만큼은 공통된 평가이다. 그 밖에 개별적인 설에 대해서는 '분석' 문단 내용 참조.


2. 경과[편집]



2.1. 심복, 친인척들의 처형[편집]


2013년 11월 27일, 장성택의 심복인 리룡하장수길강건명칭종합군관학교 사격장에서 공개처형되면서 본격적으로 장성택에 대한 신변 이상설이 돌기 시작했다. 이후 알려진 바에 따르면, '리룡하와 장수길은 고사총으로 가격당해 즉사'했으며 '그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던 장성택은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고 한다. 기사(월간조선) 기사(자유아시아방송)

공교롭게도 처형이 이루어지기 몇 달전인 7월에 또 다른 심복인 최영국은 간암으로 사망했다. 리룡하와 장수길의 운명을 생각하면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만약 살아남았다면 그 역시 비참하게 총살당했을 것이다.

장성택의 누이인 장계순과 매형인 전영진 쿠바 대사, 장성우의 사위인 최웅철과 장성택의 조카인 장용철 말레이시아 대사와 그의 아들인 20대 중반의 태령과 태웅은 12월 초 평양으로 소환돼 처형됐다. 장용철과 최웅철은 낌새를 눈치채고 도주하려고 시도했지만 도청으로 덜미가 잡혀버리는 바람에 숙청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들의 아들 딸과 손자 손녀들까지 전부 연좌제에 의해 처형당했다. 장성택의 사생아들 역시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나마 장성택과 사돈팔촌 관계의 친인척들은 김경희의 제지에 의해 대부분 단기적인 처벌만 받거나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해도 풀려나왔다고 한다.#

파일:20140117003655_0.jpg
2014년 초, 조선인민경비대 중장 출신이자 노동당 부부장을 역임한 박춘홍과 노동당 부부장 량청송의 기록 역시 삭제되면서 이들도 처형당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수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주연 배우 바꿔치기‥삭제된 원작 배우
- MBC 통일전망대/2023.04.15
최근 북한이 비공개처리하던 선전영화들을 재방영했는데 영화에서 기존 배우였던 최웅철의 모습이 송두리째 다른 배우로 대체된 것이 확인되었다. 최웅철은 장성택 집안의 사위로 들어갔다가 처형당한 인물이라 편집시킨 것으로 보인다.

2.2. 실각설 대두[편집]



2.2.1. 12월 3일[편집]


2013년 12월 3일, 대한민국 국가정보원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회에 '장성택의 심복 리룡하장수길이 공개처형됐으며, 장성택은 실각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 기사(연합뉴스)

김정남과 이메일 왕래, 전화 통화까지 하는 일본의 언론인 고미 요지 씨는 이들이 처형당할 때 북한 당국에서 장성택을 공개처형장으로 끌고 가서 측근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게 만들었다고 했다. 또 이로 인해 장성택이 실각한 것으로 보인다는 국가정보원발표가 있었다. 공개처형의 당사자는 장성택의 오른팔인 행정부 제1부부장 리룡하와 왼팔인 행정부 부부장 장수길이며 반당(反黨) 혐의로 처형되었다고 알려졌다. 리룡하 제1부부장은 국내 배급 일을 했고 장수길 부부장은 승리무역 사장으로 해외무역을 담당했다. 다만 장성택의 측근이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김경희 쪽 측근이라 장성택이 이때는 안심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아마도 최룡해 총정치국장과의 파워 게임에서 밀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실각직전 부인이자 고모인 김경희가 실각만큼은 막아달라고 김정은에게 부탁했으나 그대로 강행했다는 보고가 있었다.[4] 반대로 김경희가 앞장서서 장성택을 쳐냈다는 분석도 있었다 (주성하 기자의 분석). 한편 장성택 본인은 소재가 불분명했는데 11월 중순(정청래) 혹은 하순(조원진)에 측근들과 함께 처형되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12월 1일자 로동신문에서 "김정은 유일 영도체계를 철저히 세우며 세상 끝까지 김정은과 운명을 함께 할 것" 을 촉구하는 기사를 내보낸 것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국정원은 추정했다.


2.2.2. 12월 4일[편집]


2013년 12월 4일, 류길재 통일부장관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보고에서 '장성택과 김경희의 신변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고 보고 함으로써 그가 처형을 당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것은 아닌 걸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숙청이나 실각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신변 안전만 확인한 것이다.

북한 내에서 '비교적 온건파'인 장성택의 실각으로 북한 정세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최고 원로라서 오랜 세월 입지를 다져온 인물이 철저하게 숙청될 만큼 아직도 권력 암투가 극심하고 김정은 독재 체제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이번 사건으로 드러났다. 한편 국민의 정부 시절 대북밀사로 장성택을 포함한 북한 지도부와 많이 접해본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오히려 반대로 평가했다. 개혁, 개방에 유화적이지만 체제 유지를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아주 강경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장성택의 입지는 최룡해가 수행하는 모습이 비쳤던 내각 총리인 박봉주 로동당 정치국 위원이 차지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박봉주 경제관료 출신으로 2004년 당시 경제개혁정책(7.1 경제개선조치)을 진두지휘했던 인물. 2006년경 몰락하여 2007년 숙청(지방 좌천)되었으나 3년 4개월 만인 2010년 8월 로동당의 제1부부장으로 복귀했던 사람. 이 해석에 따르면 라선 시찰 당시의 장성택의 발언은 박봉주에 대한 견제 발언으로 여겨진다. 당시 장성택과 비슷한 시기 박봉주 역시 시찰을 했는데 박봉주와의 서열 관계가 정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각자 시찰에 나섰다는 것이다. 오른팔이었던 리룡하는 조명록 사망 당시의 장의의원 명단에서는 박봉주를 앞섰으나 결국 숙청되었다.# 이 해석에 따르면 북한의 개방 정책은 지속될 것이다. 물론 박봉주가 실권을 가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면 박봉주 역시 장성택의 최측근이며 함께 숙청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이 시각에 따르면 김정은의 사실상 친정과 함께 최룡해가 최실권자가 되며 북한의 개방정책은 일순간에 대대적으로 뒤집힐 것이다.#

장성택 입장에서는 키워줬더니 뒤통수 맞은 격이 된다. 결국 이 해석들은 박봉주 총리가 숙청 이후인 12월 14일 주석단에 등장하여 살아남고 최룡해가 김정은과 함께 숙청 이후 첫 방송 등장한 3인 가운데 한 명이 되면서 반반씩 맞는 셈이 되었다.

한편 이 사건을 통해 '장성택이 '실각'을 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 라는 주장도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애초에 핵심조직이 아닌 비선조직이었다는 것. 일종의 명예직이었던 체육지도위원장으로서 이노키를 만난 것이 오히려 실각의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중국과의 친분이 강하며 사실상의 서열 2위였던 인물의 숙청 자체가 이례적인 일임은 분명하다. 한편 국정원의 보고와 달리 정치범수용소에 가둬져 있다는 추정이나 실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었다.

여하간 김정은 권력 승계 초기에 '김정은은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고모부 장성택과 고모 김경희가 후견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을 정도로, 장성택은 북한 지도부 내에서 영향력이 매우 강했다. 이런 인물이 2인자 자리에서 쫓겨났음은 북한 내부의 권력 싸움이 심함을 보여주는 정황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김정은의 정치 파워가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재자에게 강력한 2인자란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존재이다. 설령 그것이 친인척이라 해도 말이다. 권력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것이 이미 역사에서 수없이 증명되지 않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장성택은 김정은이 손을 쓰기 전에 쿠데타를 일으키든지 스스로 물러났어야 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룡해가 장성택과의 권력 싸움에서 승리하고 결국 김정은의 자리마저 넘볼 것이라고 예측했던 어느 중국 역술인의 한자사주가 새삼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최룡해라고 다를 것도 없다. 김정은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김정일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은 인물이며 북한이라는 나라 구조 자체가 수령과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가 엄청난 나라이기 때문에 최룡해라고 해도 언제든지 실각할 위험성이 있다.


2.2.3. 12월 5일[편집]


2013년 12월 5일, 세종연구소에 따르면 장성택 본인은 육체적 처벌은 받지 않은 상태이며 가택연금 조치되어 계속 집에서만 지낸다는 기사가 떴다.


2.2.4. 12월 6일[편집]


2013년 12월 6일, 언론 보도에 의하면 장성택의 최측근 중 한 명이 중국으로 도피해 망명을 신청했다고 한다. 이 측근은 장성택의 자금을 관리한 인물이며 중국은 한국으로의 망명은 불허하고 있고 미국 측에서 미국 망명을 주도하려 한다는 것이다. 다른 보도에서는 이 측근이 한국 또는 제3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통일부와 국정원은 아는 바가 없다고 부인한 상황.


2.2.5. 12월 7일[편집]


2013년 12월 7일, 조선중앙텔레비죤김정은의 기록영화에서 장성택의 모습을 삭제한 채 방영했다. 기사(연합뉴스) 기사(뉴시스) 이로써 장성택의 실각이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가 영상에서 삭제된 이후 다시는 복권되지 못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장성택 역시 앞으로의 복귀는 불가능해진 걸로 평가받았다. 또한 기록영화뿐만 아니라 출판물들에서도 조만간 장성택과 관련된 모든 기록이 삭제될 것으로 분석되었다.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인 주성하 기자에 따르면 북한 같은 사실상의 왕조 사회에서 이런 식의 기록말살형옛날로 치면 멸문지화를 당할 반역자급의 처벌 수위라고 한다. 사실 북한만 그런 것도 아니고 소련을 비롯한 여러 사회주의 국가에선 다 그랬다. 일가, 측근과 끌려가 총살당한 악질 반역자들이나 당하는 수준.


2.3. 출당 및 제명[편집]


2013년 12월 8일, 장성택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김정은으로부터 장시간동안 분노 섞인 질타를 들은 후 곧 국가안전보위부 보위원들에게 붙들려 회의장 밖으로 쫓겨났다고 전해진다. 당시 장성택은 평소와 다르게 주석단 좌석이 아니라 단상 아래 좌석에서 고개를 떨군 채 그 얘기를 듣고 있었다고 있다. 기사(연합뉴스) 기사(한겨레)

2013년 12월 9일. 조선중앙통신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 관한 보도'를 통해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모든 직무에서 해임하고 당으로부터 출당·제명키로 결정했다."라고 전했다. 기사(연합뉴스)

장성택 출당·제명 관련 보도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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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가 12월 8일 혁명의 수도 평양에서 진행되였다. 조선로동당 제1비서이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지도하시였다. 회의에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후보위원들이 참가하였다. 당중앙위원회, 도당위원회, 무력기관의 해당 책임일군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다. 오늘 우리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 전체 인민들은 민족의 대국상을 당한 후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 모든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당중앙의 두리에 굳게 뭉쳐 위대한 김정일동지의 유훈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가고 있다.
그런데 최근 당안에 배겨있던 우연분자, 이색분자들이 주체혁명위업계승의 중대한 력사적시기에 당의 유일적령도를 거세하려 들면서 분파책동으로 자기 세력을 확장하고 감히 당에 도전해나서는 위험천만한 반당반혁명적종파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이와 관련하여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장성택의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와 관련한 문제를 토의하였다.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먼저 장성택이 감행한 반당반혁명적종파행위와 그 해독성, 반동성이 낱낱이 폭로되였다. 하나의 사상, 하나의 령도중심에 기초한 통일단결을 확고히 보장하여야 당이 수령의 당으로서의 혁명적성격을 고수하고 력사적사명을 수행해나갈수 있다는 것은 근 70성상에 걸치는 우리 당의 력사가 보여주는 철리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전당, 전군, 전민이 김정은동지의 두리에 단결하고 단결하고 또 단결하여 백두에서 시작된 주체의 행군길을 꿋꿋이 이어나가야 합니다.》
전당, 전군, 전민이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령도따라 력사의 온갖 도전과 혁명의 원쑤들의 발악적인 책동을 단호히 짓부시며 강성국가건설의 최후승리를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김정은동지를 유일중심으로 하는 당과 혁명대오의 일심단결을 반석같이 다지고 전당과 온 사회에 당의 유일적령도체계를 더욱 철저히 확립해나갈 것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장성택일당은 당의 통일단결을 좀먹고 당의 유일적령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을 저해하는 반당반혁명적종파행위를 감행하고 강성국가건설과 인민생활향상을 위한 투쟁에 막대한 해독을 끼치는 반국가적, 반인민적범죄행위를 저질렀다. 장성택은 앞에서는 당과 수령을 받드는척하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동상이몽, 양봉음위하는 종파적행위를 일삼았다. 장성택은 당과 수령의 높은 정치적 신임에 의하여 당과 국가의 책임적인 위치에 등용되였지만 인간의 초보적인 도덕의리와 량심마저 줴버리고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천세만세 높이 받들어모시기 위한 사업을 외면하고 각방으로 방해하는 배신행위를 감행하였다.
장성택은 자기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고 자기 주위에 신념이 떨떨한자들, 아첨분자들을 끌어당기면서 당안에 분파를 형성하기 위하여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장성택은 정치적 야심으로부터 출발하여 지난 시기 엄중한 과오를 범하여 처벌을 받은자들을 당중앙위원회 부서와 산하단위 간부대렬에 박아넣으면서 세력을 넓히고 지반을 꾸리려고 획책하였다.
장성택과 그 추종자들은 우리 당의 조직적 의사인 당의 로선과 정책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집행을 의식적으로 태공하고 외곡집행하였으며 당의 방침을 공공연히 뒤집어엎던 나머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에 불복하는 반혁명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장성택일당은 사법검찰, 인민보안기관에 대한 당적지도를 약화시킴으로써 제도보위, 정책보위, 인민보위사업에 엄중한 해독적후과를 끼치였다. 이러한 행위는 적대세력들의 반공화국압살공세에 투항하여 계급투쟁을 포기하고 인민민주주의독재기능을 마비시킬 것을 노린 반혁명적, 반인민적범죄행위이다. 장성택은 당이 제시한 내각중심제, 내각책임제원칙을 위반하면서 나라의 경제사업과 인민생활향상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장성택일당은 교묘한 방법으로 나라의 경제발전과 인민생활향상에서 주요한 몫을 담당한 부문과 단위들을 걷어쥐고 내각을 비롯한 경제지도기관들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국가재정관리체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나라의 귀중한 자원을 헐값으로 팔아버리는 매국행위를 함으로써 주체철과 주체비료, 주체비날론공업을 발전시킬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과 어버이장군님의 유훈을 관철할 수 없게 하였다. 장성택은 자본주의생활양식에 물젖어 부정부패행위를 감행하고 부화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장성택은 권력을 람용하여 부정부패행위를 일삼고 여러 녀성들과 부당한 관계를 가지였으며 고급식당의 뒤골방들에서 술놀이와 먹자판을 벌렸다. 사상적으로 병들고 극도로 안일해이된 데로부터 마약을 쓰고 당의 배려로 다른 나라에 병치료를 가있는 기간에는 외화를 탕진하며 도박장까지 찾아다니였다.
장성택과 그 추종자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는 상상을 초월하며 우리 당과 혁명에 끼친 해독적후과는 대단히 크다. 우리 당의 영원한 총비서이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서거 3년상도 치르지 못한 때에 장성택일당이 감행한 배은망덕한 범죄행위는 우리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 인민들의 치솟는 격분을 자아내고 있다.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토론들이 진행되였다.
토론자들은 한결같이 장성택일당이 감행한 반당반혁명적종파행위를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며 당중앙을 정치사상적으로, 목숨으로 결사옹위해 나갈 굳은 결의를 표명하였다. 회의에서는 장성택을 모든 직무에서 해임하고 일체 칭호를 박탈하며 우리 당에서 출당, 제명시킬데 대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서가 채택되였다. 당에서는 장성택일당의 반당반혁명적종파행위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알고 주시해오면서 여러차례 경고도 하고 타격도 주었지만 응하지 않고 도수를 넘었기 때문에 더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어 장성택을 제거하고 그 일당을 숙청함으로써 당안에 새로 싹트는 위험천만한 분파적행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안기였다.
우리 당은 앞으로도 혁명의 원칙을 저버리고 당의 령도에 도전하며 당과 국가의 리익, 인민의 리익을 침해하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 직위와 공로에 관계없이 추호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한줌도 못되는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이 아무리 쏠라닥거려도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단결의 유일중심, 령도의 유일중심으로 받들어나가는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 인민들의 혁명적신념은 절대로 흔들어놓을 수 없다.
현대판종파이며 우리 당대렬에 우연히 끼여든 불순분자들인 장성택일당이 적발숙청됨으로써 우리 당과 혁명대오는 더욱더 순결해지고 우리의 일심단결은 더욱 백배해지게 되였으며 주체혁명위업은 승리의 한길을 따라 더욱 활력에 넘쳐 전진해나갈 수 있게 되였다.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기치를 높이 들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두리에 한마음한 뜻으로 굳게 뭉쳐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힘차게 전진해 나아가는 우리 당과 군대와 인민의 앞길을 가로막을 자는 이 세상에 없다.
주체102(2013)년 12월 8일 평 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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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목은 반당·반혁명·종파행위이다.[5] 당일 오후, 조선중앙TV는 12월 8일 열렸던 조선로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 해임안이 채택된 직후 장성택이 김정은 앞에서 인민보안원 2명에게 체포되어 끌려나가는 사진이 공개되었다. 대한민국에 비유하자면 일개 파출소 경찰관들이 국무총리를 영장없이 체포하는 것과 같다.

또한 "앞에서는 당과 수령을 받드는 척 하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동상이몽, 양봉음위(陽奉陰僞. 앞에선 받드나 뒤에서는 음모를 꾸밈)하는 종파적 행위를 일삼았다"라면서 "장성택은 당이 제시한 내각중심제, 내각책임제원칙을 위반하면서 나라의 경제사업과 인민생활향상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도 대목이 있다. 그리고 "국가재정관리체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나라의 귀중한 자원(중국에 수출하는 석탄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을 헐값으로 팔아버리는 매국행위를 함으로써 주체과 주체비료, 주체비날론공업을 발전시킨 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어버이 장군님의 유훈을 관철할 수 없게 하였다"라고 밝혔다.

또 2009년 박남기의 주도로 이루어진 북한의 화폐개혁에 대한 책임도 모두 장성택이 떠안게 되었다. 판결문에는 "2009년 만고역적 박남기놈을 부추겨 수천억 원의 우리 돈을 람발하면서 엄청난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게 하고 민심을 어지럽히도록 배후조종한 장본인도 바로 장성택이다."라고 하여 사실상 죽은 박남기와 장성택에게 떠넘겼다.

라브렌티 베리야가 당한 것처럼 장성택이 눈치채고 반격하지 못하게 공개회의 석상에서 기습적으로 체포한 것으로 보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장성택은 이때까지 무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되면 국정원이 주장했다는 11월 처형설은 사실이 아니게 되며 신변만은 안전하다는 통일부의 말이 사실이 된다. 심지어 미국의 정보관계자는 "국정원이 '장성택 실각'을 발표한 3일 이후 전 세계는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고 북한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5일 후 장성택을 전격 체포했다. 국정원이 북한에 빌미를 준 측면이 있다" 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북한이 국정원 발표만 갖고 멀쩡한 장성택을 '홧김에' 숙청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오히려 북한 입장에서는 장성택과 그의 측근들이 건재한 모습을 공개하여 국정원을 국내외적으로 망신시키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1986년의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 그리고 밑에 보면 알겠지만 김정은은 그 이전부터 이미 장성택을 내칠 생각이 있었다고 보는 게 더 명확할 것이다. 또한 저 기사에선 그 미국 정보당국 관계자가 누구인지는 안 나와있다.

혹은 장성택이 이미 실각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일종의 합의적 쇼, 최소한의 암묵적 인지가 있었던 체포 장면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 근거로는 그동안 장성택은 김정은, 최룡해 등과 함께 단상의 주석단에 항상 자리가 배정되었으므로 정말 모르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체포당한 것이라면 이날도 주석단에 앉아있어야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정치국원들과 함께, 그것도 맨 앞줄이 아닌 자리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이미 체포된 상황에서 언론에 내보내기 위해 체포 장면을 재연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하간 북한의 이러한 "외신의 가설에 대한 반사적 대응(확인)"은 확실히 유례 없이 빠르며 공개적이었다. 자유북한방송에서는 "인물들 시선·잘린 어깨 등이 어색하다"는 사진조작설이 나왔으나 통일부는 다시 일축했다.# 이 주장대로라면 장성택이 12월 9일 이전에 체포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예 공개석상에서 체포해서 재판으로 조리돌리는 것은 1955년 박헌영의 재판 이후로 사상 초유의 사태로, 장성택은 가히 박헌영급 역적으로 등극했다는 소리가 된다. 김일성의 영도권에 의문을 제기했던 1956년 8월 종파사건도 당내에서 처리되는 수준이었고 그 가담자들도 비밀재판으로 조용하게 죽였다.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주로 장성택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으며 장성택과 가까운 관계인 박봉주 내각 총리조차 울면서 장성택을 비판했다고 알려졌다.

사실 북한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는 숙청당했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정권이 교체될 때에도 6.25 전쟁 당시의 행적을 문제삼아 서관히를 비롯한 수백 명의 관료들이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이번에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으로 정권이 바뀌자 타겟은 장성택이 되었다는 분석.

노컷뉴스의 단독보도에 의하면 이번 장성택의 실각에는 먼저 처형당했다고 알려진 리룡하, 장수길 두 사람을 비롯한 일부 장성택 측근들의 과잉충성이 원인이라 하며 이후 국가안전보위부와 당 중앙위원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11월 30일 삼지연시 시찰 때 이른바 '백두산대책회의'를 열고 장성택의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번 장성택 실각은 군부와의 갈등에 기인했다기보다는 김정은으로의 유일지도체제 확립에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실현된 것으로 풀이된다.

자유북한방송에 따르면 장성택은 이미 12월 5일 처형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다만 리룡하 등도 함께 처형되었다는 주장이라 신빙성은 적다. 뒤에 보듯 북한의 공식 기록상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한편 장성택이 김정남을 김정은 대신 옹립하려는 쿠데타 모의를 하다 걸려 먼저 당했다는 도 있다. 헤럴드일보의 '대북소식통' 역시 장성택의 실각 이유가 김정남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12월 10일 저녁, SBS의 단독보도로 숙청된 북한 장성택의 핵심 측근이 북한의 핵개발 관련 핵심 자료를 빼돌려 중국으로 탈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정부당국이 신병을 확보하고 있지만 미국, 중국이 관심을 보이고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장성택의 측근은 중국의 한국공관에서 심문을 받고 북한의 핵 기밀 등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12월 17일에 김관진 국방부장관이 "2014년 1월부터 3월 초 사이에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높다"라고 밝힌 것은 이 측근이 털어놓은 기밀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 이로 미루어보면 북한의 4차 핵실험 기도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이 사람을 통해 남한으로 흘러갔을 개연성도 있어보인다.


2.4. 처형[편집]


2013년 12월 13일, 조선중앙통신조선중앙텔레비죤은 '전날인 12월 12일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에서 장성택형법 제60조 국가전복음모죄 규정에 따라 사형을 선고 받았으며 형은 즉시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기사(연합뉴스) 기사(부산뉴스) 보도문은 조선중앙텔레비죤최정훈 방송원이 낭독했다. 기사(머니투데이)



장성택 처형 보도
(2013년 12월 13일 방송분 / 파일:조선중앙텔레비죤 로고.svg[[파일:조선중앙텔레비죤 워드마크.svg)


장성택 처형 관련 보도문 전문

[ 펼치기 · 접기 ]
- 천만군민의 치솟는 분노의 폭발.만고역적 단호히 처단 -
천하의 만고역적 장성택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 진행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 관한 보도에 접하여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에게 혁명의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한다는 우리 군대와 인민의 분노의 웨침이 온 나라를 진감하고있는 속에 천하의 만고역적 장성택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이 12월 12일에 진행되였다.
특별군사재판은 현대판종파의 두목으로서 장기간에 걸쳐 불순세력을 규합하고 분파를 형성하여 우리 당과 국가의 최고권력을 찬탈할 야망밑에 갖은 모략과 비렬한 수법으로 국가전복음모의 극악한 범죄를 감행한 피소자 장성택의 죄행에 대한 심리를 진행하였다.
특별군사재판에 기소된 장성택의 일체 범행은 심리과정에 100% 립증되고 피소자에 의하여 전적으로 시인되였다.
공판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 판결문이 랑독되였다.
판결문의 구절구절은 반당반혁명종파분자이며 흉악한 정치적야심가,음모가인 장성택의 머리우에 내려진 증오와 격분에 찬 우리 군대와 인민의 준엄한 철추와도 같았다.
피소자 장성택은 우리 당과 국가의 지도부와 사회주의제도를 전복할 목적밑에 반당반혁명적종파행위를 감행하고 조국을 반역한 천하의 만고역적이다.
장성택은 일찍부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높은 정치적신임에 의하여 당과 국가의 책임적인 직위에 등용되고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은덕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받아안았다.
장성택은 특히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로부터 이전시기보다 더 높은 직무와 더 큰믿음을 받았다.
장성택이 백두산절세위인들로부터 받아안은 정치적믿음과 은혜는 너무도 분에 넘치는것이였다.
믿음에는 의리로 보답하고 은혜는 충정으로 갚는것이 인간의 초보적인 도리이다.
그러나 개만도 못한 추악한 인간쓰레기 장성택은 당과 수령으로부터 받아안은 하늘같은 믿음과 뜨거운 육친적사랑을 배신하고 천인공노할 반역행위를 감행하였다.
놈은 오래전부터 더러운 정치적야심을 가지고있었으나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생존해계실 때에는 감히 머리를 쳐들지 못하고 눈치를 보면서 동상이몽,양봉음위하다가 혁명의 대가 바뀌는 력사적전환의 시기에 와서 드디여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장성택은 전당,전군,전민의 일치한 념원과 의사에 따라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위대한 장군님의 유일한 후계자로 높이 추대할데 대한 중대한 문제가 토의되는 시기에 왼새끼를 꼬면서 령도의 계승문제를 음으로 양으로 방해하는 천추에 용납 못할 대역죄를 지었다.
놈은 자기의 교묘한 책동이 통할수 없게 되고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3차 대표자회[1]에서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인민들의 총의에 따라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높이 모시였다는 결정이 선포되여 온 장내가 열광적인 환호로 끓어번질 때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서서 건성건성 박수를 치면서 오만불손하게 행동하여 우리 군대와 인민의 치솟는 분노를 자아냈다.
놈은 그때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한것이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군령도지반과 령군체계가 공고해지면 앞으로 제놈이 당과 국가의 권력을 탈취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조성될것이라고 생각하였기때문이라고 자인하였다.
장성택은 그후 위대한 장군님께서 너무도 갑자기,너무도 일찌기,너무도 애석하게 우리곁을 떠나시게 되자 오래전부터 품고있던 정권야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책동하기 시작하였다.
장성택은 경애하는 원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현지지도를 자주 수행하게 된 것을 악용하여 제놈이 늘 원수님 가까이에 있으면서 혁명의 수뇌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특별한 존재라는것을 대내외에 보여주어 제놈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려고 꾀하였다.
장성택은 제놈이 당과 국가지도부를 뒤집어엎는데 써먹을 반동무리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위대한 장군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제놈에게 아부아첨하고 추종하다가 된 타격을 받고 철직,해임된자들을 비롯한 불순이색분자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당중앙위원회 부서와 산하기관들에 끌어들이였다.
장성택은 청년사업부문에 배겨있으면서 적들에게 매수되여 변절한자들,배신자들과 한동아리가 되여 우리 나라 청년운동에 엄중한 해독을 끼치였을뿐아니라 그자들이 당의 단호한 조치에 의하여 적발숙청된 이후에도 그 끄나불들을 계속 끌고다니면서 당과 국가의 중요직책에 박아넣었다.
놈은 1980년대부터 아첨군인 리룡하놈을 제놈이 다른 직무에 조동될 때마다 끌고다니였으며 당의 유일적령도를 거부하는 종파적행동을 하여 쫓겨났던 그자를 체계적으로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자리에까지 올려놓아 제놈의 심복졸개로 만들어놓았다.
장성택은 당의 유일적령도를 거부하는 중대사건을 발생시켜 쫓겨갔던 측근들과 아첨군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몇년사이에 제놈이 있는 부서와 산하단위들에 끌어올리고 전과자,경력에 문제가 있는자,불평불만을 가진자들을 체계적으로 자기 주위에 규합하고는 그우에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군림하였다.
놈은 부서와 산하단위의 기구를 대대적으로 늘이면서 나라의 전반사업을 걷어쥐고 성,중앙기관들에 깊숙이 손을 뻗치려고 책동하였으며 제놈이 있던 부서를 그 누구도 다치지 못하는 《소왕국》으로 만들어놓았다.
놈은 무엄하게도 대동강타일공장에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모자이크영상작품과 현지지도사적비를 모시는 사업을 가로막았을뿐아니라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조선인민내무군 군부대에 보내주신 친필서한을 천연화강석에 새겨 부대 지휘부청사앞에 정중히 모시자는 장병들의 일치한 의견을 묵살하던 끝에 마지못해 그늘진 한쪽구석에 건립하게 내리먹이는 망동을 부렸다.
장성택이 지난 기간 우리 당의 조직적의사인 당의 로선과 정책을 체계적으로 거역하는 반당적행위를 감행한것은 제놈을 당에서 결론한 문제도,당의 방침도 뒤집을 수 있는 특수한 존재처럼 보이게 하여 제놈에 대한 극도의 환상과 우상화를 조장시키려는 고의적이고 불순한 기도의 발로였다.
장성택은 제놈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기 위하여 당과 수령에 대한 우리 군대와 인민의 깨끗한 충정과 뜨거운 지성이 깃들어있는 물자들까지도 중도에서 가로채 심복졸개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제놈의 낯내기를 하는 무엄한짓을 하였다.
장성택이 제놈에 대한 환상과 우상화를 조장시키려고 끈질기게 책동한 결과 놈이 있던 부서와 산하기관의 아첨분자,추종분자들은 장성택을 《1번동지》라고 춰주며 어떻게 하나 잘 보이기 위해 당의 지시도 거역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장성택은 부서와 대상기관에 당의 방침보다도 제놈의 말을 더 중시하고 받아무는 이질적인 사업체계를 세워놓음으로써 심복졸개들과 추종자들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에 불복하는 반혁명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하게 하였다.
최고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는것들은 그가 누구이든 혁명의 총대는 절대로 용서치 않을것이며 그런자들은 죽어서도 이 땅에 묻힐 자리가 없다.
장성택은 당과 국가의 최고권력을 가로채기 위한 첫 단계로 내각총리자리에 올라앉을 개꿈을 꾸면서 제놈이 있던 부서가 나라의 중요경제부문들을 다 걷어쥐여 내각을 무력화시킴으로써 나라의 경제와 인민생활을 수습할수 없는 파국에로 몰아가려고 획책하였다.
놈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회의[2]에서 세워주신 새로운 국가기구체계를 무시하고 내각소속 검열감독기관들을 제놈밑에 소속시키였으며 위원회,성,중앙기관과 도,시,군급기관을 내오거나 없애는 문제,무역 및 외화벌이단위와 재외기구를 조직하는 문제,생활비적용문제를 비롯하여 내각에서 맡아하던 일체 기구사업과 관련한 모든 문제를 손안에 걷어쥐고 제 마음대로 좌지우지함으로써 내각이 경제사령부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할수 없게 하였다.
놈은 국가건설감독기구와 관련한 문제를 내각과 해당 성과 합의도 하지 않고 당에 거짓보고를 드리려고 시도하다가 해당 일군들이 위대한 대원수님들께서 작성해주신 건설법과 어긋난다는 정당한 의견을 제기하자 《그러면 건설법을 뜯어고치면 되지 않는가.》고 망발하였다.
장성택은 직권을 악용하여 위대한 대원수님들께서 세워주신 수도건설과 관련한 사업체계를 헝클어놓아 몇년사이에 건설건재기지들을 페허로 만들다싶이 하고 교활한 수법으로 수도건설단위 기술자,기능공대렬을 약화시키였으며 중요건설단위들을 심복들에게 넘겨주어 돈벌이를 하게 만들어놓음으로써 평양시건설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였다.
장성택은 석탄을 비롯한 귀중한 지하자원을 망탕 팔아먹도록 하여 심복들이 거간군들에게 속아 많은 빚을 지게 만들고 지난 5월 그 빚을 갚는다고 하면서 라선시의 토지를 50년 기한으로 외국에 팔아먹는 매국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2009년 만고역적 박남기[3]놈을 부추겨 수천억원의 우리 돈을 람발하면서 엄청난 경제적혼란이 일어나게 하고 민심을 어지럽히도록 배후조종한 장본인도 바로 장성택이다.
장성택은 정치적야망실현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각종 명목으로 돈벌이를 장려하고 부정부패행위를 일삼으면서 우리 사회에 안일해이하고 무규률적인 독소를 퍼뜨리는데 앞장섰다.
1980년대 광복거리 건설 때부터 귀금속을 걷어모아온 장성택은 수중에 비밀기관을 만들어놓고는 국가의 법은 안중에도 없이 은행에서 거액의 자금을 빼내여 귀금속을 사들임으로써 국가의 재정관리체계에 커다란 혼란을 조성하는 반국가범죄행위를 감행하였다.
장성택은 2009년부터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사진자료들을 심복졸개들에게 류포시켜 자본주의날라리풍이 우리 내부에 들어오도록 선도하였으며 가는 곳마다에서 돈을 망탕 뿌리면서 부화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장성택이 2009년 한해에만도 제놈의 비밀돈창고에서 460여만 유로를 꺼내 탕진한 사실과 외국도박장출입까지 한 사실 하나만 놓고보아도 놈이 얼마나 타락,변질되였는가를 잘 알수 있다.
장성택은 정권야욕에 미쳐 분별을 잃고 날뛰던 나머지 군대를 동원하면 정변을 성사시킬수 있을것이라고 어리석게 타산하면서 인민군대에까지 마수를 뻗치려고 집요하게 책동하였다.
장성택놈은 심리과정에 《나는 군대와 인민이 현재 나라의 경제실태와 인민생활이 파국적으로 번져지는데도 불구하고 현 정권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한다는 불만을 품게 하려고 시도하였다.》고 하면서 정변의 대상이 바로 《최고령도자동지이다.》고 만고역적의 추악한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놓았다.
놈은 정변의 수단과 방법에 대하여 《인맥관계에 있는 군대간부들을 리용하거나 측근들을 내몰아 수하에 장악된 무력으로 하려고 하였다. 최근에 임명된 군대간부들은 잘 몰라도 이전시기 임명된 군대간부들과는 면목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인민들과 군인들의 생활이 더 악화되면 군대도 정변에 동조할수 있지 않겠는가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내가 있던 부서의 리룡하,장수길을 비롯한 심복들은 얼마든지 나를 따를것이라고 보았으며 정변에 인민보안기관을 담당한 사람도 나의 측근으로 리용해보려고 하였다. 이밖에 몇명도 내가 리용할수 있다고 보았다.》고 꺼리낌없이 뇌까리였다.
장성택놈은 정변을 일으킬 시점과 정변이후에는 어떻게 하려고 하였는가에 대하여 《정변시기는 딱히 정한것이 없었다. 그러나 일정한 시기에 가서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고 국가가 붕괴직전에 이르면 내가 있던 부서와 모든 경제기관들을 내각에 집중시키고 내가 총리를 하려고 하였다. 내가 총리가 된 다음에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명목으로 확보한 막대한 자금으로 일정하게 생활문제를 풀어주면 인민들과 군대는 나의 만세를 부를것이며 정변은 순조롭게 성사될것으로 타산하였다.》고 토설하였다.
장성택은 비렬한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후 외부세계에 《개혁가》로 인식된 제놈의 추악한 몰골을 리용하여 짧은 기간에 《신정권》이 외국의 《인정》을 받을수 있을것이라고 어리석게 망상하였다.
모든 사실은 장성택이 미국괴뢰역적패당의 《전략적인내》정책과 《기다리는 전략》에 편승하여 우리 공화국을 내부로부터 와해붕괴시키고 당과 국가의 최고권력을 장악하려고 오래전부터 가장 교활하고 음흉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면서 악랄하게 책동하여온 천하에 둘도 없는 만고역적,매국노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장성택의 반당적,반국가적,반인민적인 죄악은 공화국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 심리과정에 그 가증스럽고 추악한 전모가 낱낱이 밝혀지게 되였다.
시대와 력사는 당과 혁명의 원쑤,인민의 원쑤이며 극악한 조국반역자인 장성택의 치떨리는 죄상을 영원히 기록하고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세대가 열백번 바뀌여도 변할수도 바뀔수도 없는것이 백두의 혈통이다.
우리 당과 국가,군대와 인민은 오직 김일성,김정일,김정은동지밖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
이 하늘아래서 감히 김정은동지의 유일적령도를 거부하고 원수님의 절대적권위에 도전하며 백두의 혈통과 일개인을 대치시키는자들을 우리 군대와 인민은 절대로 용서치 않고 그가 누구이든,그 어디에 숨어있든 모조리 쓸어모아 력사의 준엄한 심판대우에 올려세우고 당과 혁명,조국과 인민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징벌할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는 피소자 장성택이 적들과 사상적으로 동조하여 우리 공화국의 인민주권을 뒤집을 목적으로 감행한 국가전복음모행위가 공화국형법 제60조에 해당하는 범죄를 구성한다는것을 확증하였으며 흉악한 정치적야심가,음모가이며 만고역적인 장성택을 혁명의 이름으로,인민의 이름으로 준렬히 단죄규탄하면서 공화국형법 제60조에 따라 사형에 처하기로 판결하였다.
판결은 즉시에 집행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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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원들에게 이끌려 재판장에 끌려나오는 장성택의 사진. 한때 북한 정권의 실세였는지 의심케 할 정도로 양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사병에 의해 목덜미가 붙잡힌 처참한 모습이다. 목덜미를 붙잡고 있다는건 "민족의 반역자가 조국의 푸른 하늘을 볼 자격이 없다."라는 의미이며 게다가 북한 모든 기관에는 흔히 배치된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도 없다. 이건 북한 체제하에선 사람 취급도 안한다는 소리이다.[6][7]

장성택은 김정일 사후 대장 계급을 받아 군인 신분인데 그래서 재판은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는 군사재판으로 실시되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북한 형법에서도 군인, 군부대에서 일하는 민간인(군무원)이 범죄를 저지르면 군사재판으로 넘어가도록 규정되어 있다. 사형 선고 후 바로 집행하여 공포심을 극대화했다. 민간인 신분이라면 북한의 법제상 3심까지 어찌어찌 갈 수도 있지만 애초에 거기까지 간다 해도 형량 감형이라고 해봤자 무기징역 뿐인데 그래봤자 무기징역으로 선심 쓰는 척하며 정치범수용소에 처박아놓고 서서히 피를 쥐어짜서 죽일 뿐이다. 직접적인 방법이냐 간접적인 방법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사형에 처하는 것은 다를 게 없다. 더욱이 북한전제군주제이기 때문에 어차피 김정은은 장성택이 일반 민간인 신분이었다고 해도 즉결처분했을 것이다.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즉결처분을 당하게 되면 어떻게 죽든 고통스럽게 죽긴 마찬가지이고 총살을 하나 패서 죽이나 그 차이 뿐이지 북한이라는 나라에서 편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조차 없다.

다만 박격포로 사형을 집행하다는 설은 의문의 여지가 많다. 이건 공개 방식의 기관총 총살과는 달리 처참한 광경을 대중에 공개함으로써 공포를 일으키는 전시효과를 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라크 후세인 정권하에서는 폭발물사형 집행을 해도 군중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형수의 가슴에 소형 폭발물을 붙이고 작은 언덕 너머에서 폭발시킨 뒤 구경꾼들을 접근시켜 그 시신을 관람하게 했는데 박격포 처형은 안전거리 확보 및 화력으로 인해 구경이 어렵다. 당연히 고통을 덜어주려고 포격으로 처형했을 리도 만무하다. 게다가 공개처형은 공포를 얻는 전시효과 말고도 중요인물을 어디 빼돌리고 시체만 놔뒀다는 소문을 원천봉쇄하려는 의도도 있기 때문에 박격포 처형은 공개처형으로써는 너무나 비효율적이다. 다만 이라크처럼 폭발물로 처형한 사실이 와전되어 박격포 처형이 됐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태영호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는 비밀리에 총살되었다고 한다.

사진을 보면 말랐던 과거 모습과 달리 왼쪽 눈두덩이가 부어오르고 이 든 흔적이 있고 에도 구타 흔적 같은 것이 있다. 거기다가 장성택의 자세도 영 엉거주춤하고 측면만을 보여주고 있다. 체포를 당한 뒤에 고문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


2.5. 후속보도[편집]


2013년 12월 19일, 세계일보 단독 보도에 따르면 장성택의 숙청을 전후해 북한 로동당과 군부 인사, 그들의 가족 등 70여 명이 중국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일부는 국내 정보당국과 접촉, 남한으로의 망명을 저울질하며 중국 내 안가 등에서 은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소식통은 "최근 장성택 처형을 전후해 김정은 정권의 숙청 대상에 오를 것을 우려한 장성택의 측근은 물론 김정은 체제의 '공포정치'에 겁먹은 일부 인사들까지 중국으로 탈출하고 있다"면서 "현재 정보당국이 파악한 인원만도 70여 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정보당국이 파악한 70여 명은 대부분 북한 로동당과 군부 인사, 외교관들로 일반 주민은 제외된 숫자"라면서 "유럽 지역 국가에서 북한 대사를 지낸 고위층 인사와 북한의 도발 징후를 담은 기밀 문서를 정보당국에 넘긴 인사도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북한 정보에 밝은 군 소식통은 "탈출한 북한 측 인사 가운데는 북한 로열 패밀리의 비자금 내역에 정통한 인물과 남파간첩 명단 및 핵무기 관련 자료를 갖고 국정원과 협상 중인 거물급도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면서 "이들은 대부분 한국 망명을 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장성택 측근 중 망명을 한다면 장성택의 돈을 관리하던 자금줄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장성택 처형 근거로 부패 문제가 거론된 이상 장성택 밑에서 돈과 관련된 일을 했던 인사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했다.#

2014년 1월 26일 연합뉴스의 보도에 의하면 장성택의 누나인 장계순과 그의 남편인 쿠바 대사 전영진을 포함한 일가인 장용철 전 말레이시아 대사와 그들의 아들인 20대 중반의 태령, 태웅을 포함한 장성택 일가에 대한 전격적인 처형 소식이 보도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장성택 일가에 대한 사형은 그야말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정말 무자비하게 집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는 월간중앙 - 중앙시사매거진에 올라온 글 중 일부이다.

장성택의 최후는 처참했을 뿐만 아니라 측근들이 눈앞에서 참혹하게 사라지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라종일 한양대 국제학부 석좌교수에 따르면 김정은은 장성택의 최측근인 리룡하 행정부 제1 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 체포 명령을 내렸다. 두 사람은 10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장성택 관련 혐의를 모두 토해냈다. 보고서를 접한 김정은은 반혁명 분자들을 장성택 면전에서 총살하라고 명한다. 라 교수는 증언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오전 10시경 군용차 한 대가 연병장 무대 옆에 와서 섰다. 그곳에서 온몸이 결박된 리룡하와 장수길이 나왔다. 국가안전보위부 특별 재판관이 판결문을 읽었다. ‘개인적 간부(장성택을 뜻함)를 맹종맹동하며 반당, 반혁명, 종파행위를 한 전 행정부 제1 부부장 리룡하와 장수길에게 사형을 언도하며 사형은 즉시 집행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을 겨누고 있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두 사람의 처형에 사용된 무기는 4신 고사기관총(대공포)이었다. 북한의 처형 무기로 최근에 자주 보도되는 4신 기관총은 구경 14.5㎜ 소련제 ZSU 방공용 고사 기관총을 복사한 것이다. 보통은 중요한 시설에 대항공용으로 비치해 놓는데 이즈음 이 무기를 사형 집행용으로 쓴다.

개인화기나 소화기로 총살이 가능함에도 파괴력이 큰 무기를 사용하는 이유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감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총살형에 자주 노출되면 죽음에 둔감해진다. 총살의 강도를 높여야 공개 처형의 효과도 비례해서 커진다. “두 사람의 사형수는 시신을 알아볼 수 없이 찢겨 나갔다. 그리고는 이미 찟겨져 남은 잔해는 화염방사기로 불태워 없어졌다. 가깝게 지내던 측근 두 명이 그렇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장성택은 앉은 채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출처


태영호 공사도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장성택 측근을 처형한 것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장수길과 리룡하를 총살하던 날, 북한 고위급은 아연실색했다. 이날 당과 군부의 중간 간부들은 평양 교외 강건 군관학교 사격훈련장에 모였다. 고위급을 총살하는 처형장이었다. 간부들은 대단히 놀랐다. 사격장에는 평소 총살할 때 사용하던 자동보총(소총) AK-47 대신 처음 보는 4신 고사 기관총 8정이 설치돼 있었다. 정면에는 흰 천이 둘려 있었고 그 뒤에 누군가가 있는 듯 보였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해 중앙당 비서, 부장, 부부장들이 내렸다. 뜻밖에도 장성택은 다른 버스에서 내렸다. 중앙당 비서 등 고위 간부를 태운 버스에 타야 할 장성택이 일반 직원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 이미 이때 장성택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연단에서 ‘반당반혁분자’ 장수길과 리룡하의 죄행이 낭독되었고 총살이 선고됐다. 흰 천이 벗겨졌다. 장수길과 리룡하가 말뚝에 묶여 있었다. 8정의 4신 고사 기관총이 두 명을 향해 불을 뿜었고 고위 간부들은 얼이 나갔다. 며칠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간부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도 이와 비슷하다. #

"리룡하, 장수길이 이미 심한 구타를 당해 처참한 모습으로 단상으로 끌려나왔다. 천여발이 장전된 고사총에서 4초 동안 총탄이 발사됐다. 사람의 형체는 아예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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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무력성 출신 탈북자 이 모씨의 증언


"장수길 부부장의 시신은 처형 후에도 전차로 짓뭉게버려 시신 형체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이런 현장을 보고 나면은 누구라도 공포 때문에 김정은에 대항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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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당 간부 출신 탈북자 김 모씨의 증언


“(전해 듣기로) 리룡하·장수길에게 비행기 떨구는 고사총을 쏘니 시체가 하나도 없이 사라지고 발목만 남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장성택은 물론 상당수 간부가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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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식당 종업원 집단탈북을 주도한 허강일 씨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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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만에 베일 벗는 장성택 처형의 비밀
- 채널A 쾌도난마 756회

이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형이 집행되었지는 불명이지만 기관총, 기관포 또는 고사포로 사살하고 화염방사기로 시체를 불태우는 방식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알려다. 북한에서는 사형을 집행했다고만 말했고 처형 방법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밝힌 바 없다. 또한 북한군의 14.5mm 4신 기관총(총알 하나가 보드마카 크기이다)으로 처형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런 중기관총으로 사람을 수십 발 갈기면 사람은 그대로 으깨진다. 그러니까 사람 형체도 남아있지 않는 살덩어리+피투성이만 남는다. 이를 치우는 방법은 그냥 화염방사기로 소각하는 게 제일 간편하고 위생적(?)이다. 참관인에게 겁을 줄 뿐만 아니라 시신이 남을 경우 추종세력에게 상징물이 될 수 있다는 이유도 있다.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 사살 후 시신을 콘크리트 관에 넣어 바다 한가운데에 버린 것과 마찬가지.

조선일보에서 보도된 바로는 실제로 북에서 장성택의 공개처형 모습을 보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증언하기를 무려 총탄을 90발이나 쏘았다고 한다. 14.5×114mm 탄환을 사용하는 중기관총에 사람이 난사 당하면 몸이 그냥 터진다. 90발은 커녕 5발만 맞아도 이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다. 또한 폭행과 고문의 영향탓인지 사형식 거행시점부터 이미 의식이 끊어진 듯한 모양새로 추정된다는 의견도 있다. 이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던지 결국 그 자리에서 직접 공개처형을 보던 관중들 중 한 명이 졸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 그러나 태영호가 장성택 본인이 처형되는 건 북한에서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증언하면서 공개처형을 했다는 것조차 거짓으로 드러났다.

한편 한반도 사정에 밝지 않은 몇몇 서양 언론에서는 장성택이 측근 5명과 함께 알몸으로 굶주린 사냥개 120마리에게 물어뜯기는 식으로 처형당하고 김정은이 당 간부 300명과 함께 1시간 동안 이를 참관했다는 식으로 잘못 보도하기도 했다.#[8] 영국주재 북한대사였던 태영호는 장성택은 총살당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후에 과장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사실 진실은 가십거리 위주로 기존에 알려졌던 것보다 더 끔찍했다. 과거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한 언론인 밥 우드워드가 트럼프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2020년 9월 출판한 "격노(Rage)"에 따르면, 김정은은 장성택을 참수[9]한 후 그 머리를 시신의 가슴 위에 얹어 북 고위 간부들이 이용하는 건물 계단에 전시했다고 한다. 일종의 경고 효과를 노린 듯한데, 그 잔인성이 연산군 못지않다. 트럼프는 자신이 김정은과 이런 얘기조차 나눌 정도로 친밀하다는 걸 나타내려고 이 얘길 전한 것으로 보인다. #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당시에 김정은이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고 한다. 의미심장하게도 조금이라도 '최고존엄'의 '권위'를 훼손하는 사람들에게 오만 막말을 가해온 조선의 오늘우리민족끼리 같은 북한의 대외 선전 매체들이 정작 세계적으로 그 '최고존엄'이 야만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완전히 각인시킨 이 폭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남기지 않았다.


3. 분석[편집]


장성택 사형 판결에 대한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전문을 보면 역시 숙청의 결정적인 원인은 김정은에게 반역을 꾀한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보도 전문의 전반부는 장황하게 장성택의 비리혐의를 나열하고 있지만 사실 북한에선 부정부패 사건이야 너무 흔해서 이런 식으로 일벌백계할 리 없고 단순히 김정은의 권한 확대를 위해서는 가택 연금이나 수용소행 등의 다른 방법도 많은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심각한 일이 있었다는 방증이 된다.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전문을 보면 장성택이 당정군의 인맥으로 무엇인가 꾀한 것 같은데 이것이 쿠데타 음모이거나 꼭 그렇지 않더라도 김정은을 밀어내고 수양대군처럼 등극하려는 것으로 비쳤고 이에 장성택을 전광석화처럼 체포 후 거의 즉결 처분에 가까운 운명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보도 전문 중 일부 인용. 숙청에 대한 독재 국가 언론의 보도 내용이 늘 그렇듯이 답정너에 가깝지만 무언가 그 당시 북한에 심상찮은 일이 있었음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장성택놈은 심리과정에 《나는 군대와 인민이 현재 나라의 경제실태와 인민생활이 파국적으로 번져지는데도 불구하고 현 정권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한다는 불만을 품게 하려고 시도하였다.》고 하면서 정변의 대상이 바로 《최고령도자동지이다.》고 만고역적의 추악한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놓았다.

놈은 정변의 수단과 방법에 대하여 《인맥관계에 있는 군대간부들을 리용하거나 측근들을 내몰아 수하에 장악된 무력으로 하려고 하였다. 최근에 임명된 군대간부들은 잘 몰라도 이전시기 임명된 군대간부들과는 면목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인민들과 군인들의 생활이 더 악화되면 군대도 정변에 동조할수 있지 않겠는가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내가 있던 부서의 리룡하, 장수길을 비롯한 심복들은 얼마든지 나를 따를 것이라고 보았으며 정변에 인민보안기관을 담당한 사람도 나의 측근으로 리용해보려고 하였다. 이밖에 몇명도 내가 리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꺼리낌없이 뇌까리였다.

장성택놈은 정변을 일으킬 시점과 정변 이후에는 어떻게 하려고 하였는가에 대하여 《정변시기는 딱히 정한것이 없었다. 그러나 일정한 시기에 가서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고 국가가 붕괴직전에 이르면 내가 있던 부서와 모든 경제기관들을 내각에 집중시키고 내가 총리를 하려고 하였다. 내가 총리가 된 다음에는 지금까지 여러가지 명목으로 확보한 막대한 자금으로 일정하게 생활문제를 풀어주면 인민들과 군대는 나의 만세를 부를것이며 정변은 순조롭게 성사될것으로 타산하였다.》고 토설하였다.

장성택은 비렬한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후 외부세계에 《개혁가》로 인식된 제놈의 추악한 몰골을 리용하여 짧은 기간에 《신정권》이 외국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어리석게 망상하였다.


위의 발표문대로라면 장성택은 구체적인 거사 계획은 없었지만 경제난이 심화되고 김정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 당정군 내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김정은을 몰아내고 집권을 하려는 어렴풋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집권 후에는 대대적인 개혁개방과 경제 상황 개선을 통해 민심을 얻고 국제 사회의 지지 획득을 꾀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해 덩샤오핑이 광범위한 인맥으로 당정군을 장악하여 마오쩌둥이 지명한 후계자이자 문화대혁명 노선을 이어가려던 풋내기 화궈펑을 몰아내고 대권을 장악해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것을 따라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은 마오쩌둥 집권 시기 문화대혁명으로 나라 사정이 엉망이었으나 그래도 최소한의 합리성은 남아있었던 반면, 북한은 이미 정통성이 혈연으로 결정되는 왕조국가가 되어버렸던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 같다. 국민의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제1차장,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라종일 교수에 따르면, 장성택이 김정일 사후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채 지나친 안전감을 지녔기에 숙청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장성택을 '체제의 특권을 누리고도 그 중심에 온전히 빠져들어갈 수 없는 경계인'으로 규정하였던 바, 스스로가 사실상의 신정(神政) 집단 북한에서 일종의 데릴사위였음을 잘 인지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

하지만 박헌영을 처형할 때도 뜬금없는 미제 스파이라는 죄목을 덮어씌운 게 북한이기때문에, 장성택이 진짜로 저런 계획을 기획했는지 여부는 북한과 통일이 되기 전엔 알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아래는 그가 김정은 세습에 마뜩잖아했다고 주장하는 조선중앙통신 보도의 내용. 어째 태종원경왕후 외척인 민씨들을 숙청할 때의 죄상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때도 민씨들이 남들 기뻐할 때 슬퍼하고 슬퍼할 때 기뻐했다는 죄목이 적용되었다.

놈은 오래전부터 더러운 정치적야심을 가지고있었으나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생존해계실 때에는 감히 머리를 쳐들지 못하고 눈치를 보면서 동상이몽,양봉음위하다가 혁명의 대가 바뀌는 력사적전환의 시기에 와서 드디여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장성택은 전당,전군,전민의 일치한 념원과 의사에 따라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위대한 장군님의 유일한 후계자로 높이 추대할데 대한 중대한 문제가 토의되는 시기에 왼새끼를 꼬면서 령도의 계승문제를 음으로 양으로 방해하는 천추에 용납 못할 대역죄를 지었다.

놈은 자기의 교묘한 책동이 통할 수 없게 되고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3차 대표자회[10]

에서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 인민들의 총의에 따라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높이 모시였다는 결정이 선포되여 온 장내가 열광적인 환호로 끓어번질 때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서서 건성건성 박수를 치면서 오만불손하게 행동하여 우리 군대와 인민의 치솟는 분노를 자아냈다.

놈은 그때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한 것이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군령도지반과 령군체계가 공고해지면 앞으로 제놈이 당과 국가의 권력을 탈취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조성될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자인하였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장성택은 충성을 다하지 않아 처형 당했다고 한다.)

당시 자유아시아방송 보도에서는 식량과 자원에 대한 권한을 쥔 장성택과 군부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 무력 충돌이 벌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둔전병을 운용할 정도로 북한군은 식량 사정이 시궁창이라서 예전부터 어업권을 되찾기를 원했고 수산부업기지에 150명을 동원해 공격했으나 수비측인 장성택의 군대가 공격하는 측의 3분의 1 정도밖에 안되는 숫자에도 불구하고 더 잘 먹어서 체격도 좋아 큰 피해 없이 격퇴를 하자 군부와 김정은이 위협을 느껴 숙청했다고 한다.

장성택은 석탄을 비롯한 귀중한 지하자원을 망탕 팔아먹도록 하여 심복들이 거간군들에게 속아 많은 빚을 지게 만들고 지난 (2012년) 5월 그 빚을 갚는다고 하면서 라선경제무역지대의 토지를 50년 기한으로 외국에 팔아먹는 매국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2009년 만고역적 박남기놈을 부추겨 수 천억 원의 우리 돈을 람발하면서 엄청난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게 하고 민심을 어지럽히도록 배후조종한 장본인도 바로 장성택이다.

장성택은 정치적야망실현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각종 명목으로 돈벌이를 장려하고 부정부패행위를 일삼으면서 우리 사회에 안일해이하고 무규률적인 독소를 퍼뜨리는데 앞장섰다.

1980년대 광복거리(평양시 만경대지구) 건설 때부터 귀금속을 걷어모아온 장성택은 수중에 비밀기관을 만들어놓고는 국가의 법은 안중에도 없이 은행에서 거액의 자금을 빼내여 귀금속을 사들임으로써 국가의 재정관리체계에 커다란 혼란을 조성하는 반국가범죄행위를 감행하였다.

장성택은 2009년부터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사진자료들을 심복졸개들에게 류포시켜 자본주의날라리풍이 우리 내부에 들어오도록 선도하였으며 가는 곳마다에서 돈을 망탕 뿌리면서 부화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장성택이 2009년 한해에만도 제놈의 비밀돈창고에서 460여 만 € 꺼내 탕진한 사실과 외국도박장출입까지 한 사실 하나만 놓고보아도 놈이 얼마나 타락, 변질되였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사형 판결문 일부 인용.

국가재정관리체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나라의 귀중한 자원을 헐값으로 팔아버리는 매국행위를 함으로써 주체과 주체비료, 주체비날론 공업을 발전시키는 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과 어버이장군님의 유훈을 관철할 수 없게 하였다.

장성택이 실각한 직후 보도문 일부 인용(출처)

이 언급은 화폐개혁 실패로 처형된 박남기의 죄를 장성택에게도 떠넘기는 한편, 주로 북한이 중국에 수출하는 석탄 혹은 대규모 개발을 추진하던 철광석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분석에 따르면 장성택은 중국에 지하자원을 수출하여 외화를 확보하려 했으며, 이 이권을 노리고 군부와의 다툼이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언뜻 보면 이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애초에 "헐값으로 팔아버리는 매국행위"라는 북한의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북한은 경제 제재를 심각하게 당해서 석탄을 수출할 곳이 중국밖에 없는데, 북한은 외화가 필요해서 몸이 달았고 중국도 석탄 자원은 여유로운 상황이므로 제 값(국제 시세)을 받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즉, 장성택은 북한의 외교, 통상 상황이 최악이라 어쩔 수 없이 헐값에 팔 수밖에 없었는데 반대파에서는 국제 시세를 조사해오곤 "장성택이 판 값과 시세와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 헐값으로 판 거다"라는 누명을 덮어씌웠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일은 북한과의 경제 협력에서는 흔히 일어난다. 값을 이미 합의해놓고 갑자기 시세가 어떻다면서 웃돈을 더 받으려 하는 용팔이나 하는 양아치 짓이다. 애초에 자기들이 시세대로 받을 처지가 아니라는 걸 모른다.

석탄과 철, 비료, 비날론 언급이 함께 나오는 것은, 석탄을 이용하여 발전을 하거나 원료로 사용(북에서는 코크스 대용으로도 씀)하여 생산량을 올릴 수 있었는데 장성택이 수출해서 외화로 바꾸는 바람에 석탄 재고가 줄어서 그렇게 못하게 되었다는 주장으로 보인다. 이는 상식을 아는 사람에게는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다. 북한의 생산 시설은 기계가 낙후되고 기술이 부족하여 석탄을 철, 비료, 비날론 생산에 투입해봤자 그 효율이 떨어지며 품질도 나쁘다. 특히 주체철이나 비날론은 숫제 쓰레기를 원료와 전력을 들여서 만드는 꼴이니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북한의 철도 환경을 보면 석탄을 캐봤자 공장으로 일일이 운송하는 것도 힘들다. 이런 상황이면 차라리 석탄을 바로 중국에 팔아버리고 그 외화로 "중국산" 철, 비료, 섬유를 구입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을 내세우는 놈들에게는 꼬투리 잡힐 거리였을 것이 분명하다. 즉, 판결문에서 이 언급은 장성택이 그나마 중국을 들락날락거리면서 석탄 수출길을 터서 외화를 좀 벌어왔는데 그 반대파 측에서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고 누명을 씌워서 죽였다고 실토하는 꼴이다.

하지만 북한의 외교적 고립을 이용해 지하자원을 국제시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헐값에 사들이려던 중국에 장성택이 동조해, 거래 성사 뒷주머니를 챙기려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장성택은 북한내 친중파의 대표격이었고 대중 무역을 김정일 시절부터 직접 챙기고 있었으며 역시 친중파인 김정남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핵 완성과 함께 중국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을 강력히 밀어붙이던 김정은의 입장에선, 자신보다 경험이 풍부하고 복잡한 인맥을 짜놓은데다 후계 문제까지 간섭할 수 있는 장성택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거래"와 횡령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들, 그게 사람을 죽일 이유는 되지못한다.

물론 이 부분에도 반박은 있는 것이, '북한의 석탄은 헐값이다'='장성택의 석탄 거래는 정상적인 것이었으나 김정은이 그것을 꼬투리로 잡은 것이다'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석탄이 국제시세에 비해 헐값이더라도, 북한의 주장대로 장성택이 그 이하의 가격으로 석탄을 몰래 팔아치우고 그 차액을 자기가 빼돌려서 배를 불렸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애초에 썩은 사회에서 높으신 분들나라의 재화를 몰래 빼돌려 헐값에 팔아치우고 그 이익을 빼먹는 것은 원래부터 독재 국가에선 흔한 패턴이며, 장성택 역시 썩어빠진 고위관리가 분명하기에 저런 짓을 실제로 저지르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즉, 진짜로 말이 안되는 것은 자기들도 실컷 인민들 등골 빼쳐먹고 실컷 더러운 짓 했으면서 장성택에게만 죄를 묻는 북한의 태도지, 장성택이 저 문제에서 정말 아무 잘못없는데 누명을 썼다는 결론은 너무 성급한 것이다.

여담으로, 일본에서는 국회의원 안토니오 이노키가 방북하여 장성택을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숙청이 터져서 곤혹스러운 반응이었다고 한다. 이노키는 방북하기 전에 "납치 피해자 문제는 내가 해결한다. 나는 장성택과 친교가 있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북한에 파이프가 있는 건 나 정도다"라고 장담했다고 한다.


3.1. 처형 이유에 대해서[편집]


  • 반역설: 북한이 주장한 대로 장성택이 김정은에 대해서 일종의 반역을 실제로 시도하고 있었다는 주장이지만 그다지 믿을만하진 않다. 만약 이게 사실일 경우 김정남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정철은 이미 여러 차례 능력도 의지도 없음을 드러냈고 김정은의 자식들은 전부 어려서 당시 김정은의 자녀는 첫째 아들(2010년생)과 둘째 딸 김주애(2013년생) 두 명이었다. 이후 셋째 딸(2017년생)이 태어난다. 때문에 김정은을 숙청할 경우 그 자리에 앉힐 수 있는 사람은 같은 백두혈통인 김정남밖에 없었다. 참고로 김정남은 몇년 뒤 암살당했다.

  • 반역 및 김정남 연결설: 장성택이 김정남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 죽음의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주장. 반역설과 연관하면 새로운 정권의 지도자로서 김정남을 옹립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가설이 제시된다. 게다가 장성택이 김정남에게 700만 달러를 송금한 사실도 드러났다.#

  • 김정남 피살 사건 사전작업설: 가장 유력한 가설. 이 설은 김정남이 사망한 이후 대두되는 설이다. 김정은은 김정남이 자신의 정권을 위협하든 안하든의 여부를 떠나서 자신과 어머니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 계속 성가셨다. 김정남은 형이라서 죽었다. 동생이었으면 일단 정통성도 떨어지거니와 굽실거리기만 잘하면 적어도 목숨 보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김정일의 동생인 김평일이 그 예다 김정은의 형 중에는 김정철도 있었지만 이미 동생에게 복속된 상태인 데다가 부모 모두가 동일인물인 친형인지라 어느 정도 신뢰가 갔지만 김정남은 이복형제라서 그게 아니었다. 게다가 김정철은 김정은이 항상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신경이 안 쓰이지만 김정남은 해외를 떠돌기 때문에 항상 신경쓰였다. 게다가 김정남이 돈이 많아서 용병을 고용할 여지도 있었기에 김정은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불안했다. 김정은은 어떻게든 김정남을 죽여야겠는데 장성택이 가로막아 못 죽이고 있었다. 실제로도 김정남을 살해하려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때 김정은은 중국 정부로부터 엄중경고를 먹었다. 또한 장성택은 김정남에게 700만 달러를 생활비로 쓰라고 송금해주기도 하는 등 김정남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그러니 장성택이 살아있는 한 김정남을 어떻게 하지 못하겠다고 판단해 김정남 살해에 대한 사전작업 차원에서 장성택을 먼저 죽이고 그렇게 해서 김정남을 죽이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을 계속 제거해나갔고 결국 김정남을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김정남도 이 사실을 알고있었기에 수 차례에 걸쳐 자신에게 내려진 암살 명령을 철회해 줄것을 요청했다. 형이 동생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김정남은 제거당했고 이를 종합해보면 한 마디로 김정남을 죽이려고 장성택을 죽였다는 것이다.

  • 무고설: 장성택은 전혀 반역을 할 뜻이 없었고 단지 김정은의 포악함과 주변의 모함 때문에 숙청되었을 뿐 실제로는 무고하다는 주장. 만약, 장성택이 모함을 당해 죽었다면 장성택을 모함한 건 최룡해오극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예정설: 장성택은 지나치게 막대한 부와 강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죽음은 그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김정일 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북한 정권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줬다가 나중에 제거하고 회수하기를 반복하곤 했다. 사실 장성택의 숙청에 대하여 '고모부까지 죽인 패륜'이라 충공깽하다는 반응이 많기는 한데 사실 혈통이 정통성의 담보가 되는 왕조국가에 있어서 왕의 친족은 최대의 경계대상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장성택이 김씨는 아니지만 왕의 직계가 단절되었을 때 여계 계승이 일어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드물지 않았고 이 때문에 권력을 가진 외척이나 이성(異姓) 친척은 언제나 경계 대상이었다. 물론 장성택과 김경희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인 장금송이 장성택보다 먼저 사망했기에 혈통적으로 왕조 창시자의 계승을 주장할 수 없고 한국의 왕조사 전통에서 이성족의 여계 계승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한계는 있으나 부부로써 김경희의 정통성을 공유할 수 있는 장성택에게 일정한 왕위계승권의 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북한이 왕조국가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했다면 오히려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할 만하다는 것.

  • 중국 음모설: 장성택이 중국과 연계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었거나 중국과 관련이 깊은 장성택의 움직임을 김정은이 껄끄럽게 보았다는 설이다. 실제 장성택은 막나가는 김정은 정권에 대해 불만이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최룡해와의 반목설: 사실 장성택의 사형을 주도한 것은 김정은이 아니라 최룡해라는 의견도 있다. 최룡해는 북한 정권의 2인자가 되기 위한 야심을 품고 있으며 김정은의 친인척인 장성택은 그러한 최룡해의 출세에 걸림돌이 될 것이 자명하여 최룡해가 김정은을 꼬드겨서 장성택을 사형에 처했다는 설이다. 이 설은 2015년 7월 탈북에 성공한 북한의 한 고위인사의 증언으로 부정 되었다. 이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최룡해와 장성택은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최룡해가 장성택의 제거에 관여하거나 찬성할 리가 절대로 없었고, 오히려 이후 최룡해는 김정은에게 사소한 트집을 잡혀 처형될 뻔 하였다가 겨우 살아 남았다고 한다.

  • 국정원공작설: <신동아> 2014년 11월호 기사를 통해 제기된 의견.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정원장 남재준이 북한 지도부를 분열 및 이간시키고 혼란에 빠뜨려 흡수통일을 앞당긴다는 구상 아래 2인자인 장성택의 비리를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에 전달한 결과 장성택이 숙청되었다는 것이 주요 내용. 하지만 장성택의 숙청 이후 북한이 이전보다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회수를 늘리고 서해와 휴전선 인근에서 병력의 활동 및 대응 수위를 상향시키는 등 오히려 군사적 긴장 조성을 강화시키는 추세로 나타났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국정원은 북한 내에서 그나마 김정은의 폭주를 견제할 수 있었던 거물이 제거되어 북한에 의한 한반도 불안정성의 위험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즉, 국정원은 북한 수뇌부의 역학관계도 모르고 주요 인물들의 성향조차도 프로파일링 못하는, 흔한 대북전문가보다도 못한 무능집단이라는 얘기가 되어버린다.

  • 기쁨조 관련설: 장성택이 기쁨조 여성들을 건드리는 여성편력을 저질러 처형되었다는 설이다. 후지모토 겐지가 주장했다. 인터뷰 기사. 리설주 관련설과는 선을 그었지만 역시 딱히 근거는 없다. 하지만 탈북자 태영호는 자기 책에서 장성택이 기쁨조로 뽑힌 젊은 여성들을 자기가 데려가 가학적 성행위를 하고, 죽으면 화장해버리는 짓을 하다가 들통나 처형되었다고 주장했다.#

  • 김경희 관련설: 이전에는 농담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숙청설 후 김경희 건강 악화설이 어떤 형태로든 사실임이 확실시 되고 있다. 치매, 중풍, 뇌종양 수술 등 병명은 여러 가지가 나오고 있지만 와상생활 중인 것은 거의 분명한 듯. 자세한 것은 김경희 항목 참고. 또 김경희가 직접 장성택의 숙청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음도 밝혀지고 있어 농담이 아니게 되었다. 주된 분석은 건강이 악화된 김경희가 직접 김정은이 장성택을 치워버리도록 도와준 것 아니냐는 분석. 장성택은 김일성, 김정일 둘 다에게 구박받은 천덕꾸러기 기질이 있을 뿐 아니라 개방에도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 주색잡기도 좋아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김경희가 별다른 조치 없이 사망할 경우 김정은으로서는 고모부라 함부로 처리할 수도 없고 그냥 두자니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되버린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경희의 치매가 심하게 악화되어 사람을 못 알아볼 지경이라 (장성택을 밀어내려는 세력이 부추김과 동시에)김정은이 마음 놓고 장성택을 숙청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 리설주관련설 : MBN에서 제기한 것. 기사. 장성택이 처조카며느리 리설주와 바람이 나서 분노한 김정은한테 죽었다는 것. MC가 계속 이 설을 거론하면서 이야기를 그쪽으로 유도하려고 하자 당시 패널로 참석한 전 통일부 관련 인물인 현 대학교수가 그냥 듣고만 있다 결국 아니다 싶었는지 "북한 관련 문제를 다루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려면 통일 이후에 있을 일도 생각하고 장성택 실각이라는 이 사안에 어울리는 더 진지한 내용을 다뤄야지, MBN의 품위를 생각해야 할 거 아니냐"고 지적을 했다. 그러자 MC는 움찔하면서 이후로도 계속 리설주를 언급해보려다 결국 그만뒀는데 문제는 다음날 같은 프로에서 그 MC 말고도 방송국측 패널이 두 명 더 나왔는데 전날 하던 리설주, 장성택 내연설만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요즘 종편간 경쟁이 치열해지자 시청률을 노리고 어떻게든 말초적인 내용을 넣으면서 남북 관계를 흥미위주로만 다루는 황색언론적 행동이다.
장성택의 숙청은 북한 내부의 권력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온 중대한 정치적 사건인데, 이런 사건을 정치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감정의 수준에서 분석하려는 태도는 몹시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하다고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애초에 리설주 관련설 자체가 MBN을 비롯한 언론사에서 하도 떠들어대서 유명해 진 주장이지만, '장성택 숙청 전후 리설주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다리타기 당첨설이나 이발소 관련설, 술자리 게임설 등의 농담과 다를 것도 없는 별 무가치한 분석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남한에서 관련 삐라를 뿌린 적이 있는데, 그것이 역으로 타고 남한 측 첩보에 들었던 것이라고 추측했다. 자기 거짓말에 자기가 속은 셈(…).

그외에 개드립성 추측으로는 [11] 이발소관련설 메신저관련설등이 있다.


3.2. 김정은 체제와의 연관성[편집]


어떤 이유에서인진 몰라도 장성택을 이렇게 속전속결로 보내버린 것은 분명히 어떠한 목적 달성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는 논평에서 북한이 장성택의 속전속결식 처형을 통해 '극단적 잔학성(extreme brutality)'의 민낯을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결국 공포가 김씨 왕조 체제를 지탱하는 기제임을 만천하에 확인시킨 것이다.

장성택의 충격적인 처형은 김정은 1인 지배 체제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김정은 체제의 취약성을 방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백두 혈통에 대한 도전은 추호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확실한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김정은 유일 영도 체제가 아직은 불안정한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공개한 판결문에서도 장성택이 내각 총리에 오른 뒤 군대를 동원해 정변을 일으켜 최고 권력을 탈취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본인도 이를 시인했다고 밝혔다. 이는 김정은 체제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당과 군, 내각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위기 상황을 자인한 꼴이 됐다. 판결문에 따르면 장성택은 "나라의 경제 실태와 인민 생활이 파국적으로 번지는데도 현 정권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한다는 불만을 군대와 인민이 품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자백했다. 또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고 국가가 붕괴 직전에 이르면 내가 있던 부서와 모든 경제기관들을 내각에 집중시키고 내가 총리를 하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정은 체제의 실질적 2인자이며 북한의 핵심 경제 관료였던 장성택조차 북한 체제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품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장성택이 체포될 때만 해도, 아버지 김정일이 예전에 극형까지는 내리지 않았고 장성택을 숙청, 처벌할 때 죽이지는 않았기에 아들인 김정은 '설마 지 애비도 안한 고모부를 처형하겠느냐?'라는 반응이 대다수였고 장성택이 그저 정치적으로 실각하는 수준에서 끝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런 반응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오히려 숙청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인사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라며 조롱하거나 패륜이라며 욕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한다. 그리고 김정은은 자멸질을 지금도 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친인척이 아니라 자신의 직계존속까지도 죽인 사례는 많다. 당나라만 보더라도 태종 이세민은 자기 형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 그리고 친조카들을(이건성과 이원길의 자식들) 모두 죽였다. 조선 또한 왕자의 난 등 권력을 위해서라면 부모, 형제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권력 기반 안정을 위해서 친인척, 직계 가족을 처형하거나 귀양 보낸 사례는 역사에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물론 앞의 것들은 끽해봐야 중세니 이것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북한의 정치 제도가 얼마나 막장인지 알 수 있지만.

태영호 전 공사의 "3층 서기실의 암호"라는 책에는 김정은은 어린 시절부터 고모부에게 뿌리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는 정철·정은 형제 중의 하나가 후계자가 되지 않으면 결국 온 가족이 숙청당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김일성 생전에 자신의 아이들을 인사시키고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이것을 가로막은 사람이 바로 김경희와 장성택이었다. 실제로 김정일 생전에 김경희와 장성택이 고용희의 존재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는 말이 북한 내부에서 상당히 퍼져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고용희의 남겨진 사진에는 김일성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으며 김정은 또한 할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는 손자 신세가 된 것에 분노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김일성과 찍은 사진 한 장만 있었다면 스스로 ‘백두혈통’이라고 백 번 외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김정은은 아마도 아이 때부터 장성택을 미워했으며 장성택 부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을 것이라 태영호는 추측했다.

한편 다른 시각에 의하면 김정은은 국가의 모든 돈을 핵과 미사일 개발에 쏟아붓고 싶어했지만 북한의 경제적 이권 대부분은 장성택이 쥐고 있었다. 그러나 장성택은 김정은의 생각과는 달리 돈을 핵과 미사일 개발에 쓰는 것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김정은이 장성택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장성택이 핵과 미사일에 돈을 투자하는 것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3.3. 김여정 연관설[편집]


김여정은 장성택이 살아있을 때보다 장성택이 사망한 이후에 운신의 폭이 몰라볼 정도로 넓어졌다. 장성택이 살아있을 적에는 김정은을 항상 고모인 김경희가 수행했는데 이 때 김여정은 기둥 뒤에 숨어서 김정은을 몰래 엿보는 신세였다. 하지만 장성택이 사망하자 김경희는 알아서 은퇴했으며 그 자리에 김여정이 들어와서 김여정이 김경희 대신 김정은을 최측근으로서 보좌하고 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김정은은 자기 여동생의 길을 터주기 위해서 고모부를 사형에 처한 것이 된다. 고모부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고모라는 커다란 장벽으로 인해 여동생의 운신의 폭이 좁은 상태라서 여동생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 고모가 은퇴해야 하는데 고모가 은퇴하지 않아서 고모부를 없애서 고모 바로 옆에다가 총알을 발사해 고모가 공포에 질려 알아서 은퇴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고모부를 숙청했다는 의견도 있다.


3.4. 군부 과격파의 득세설[편집]


청와대는 장성택 처형 후 북한의 권력 구도의 변화와 강경파 득세에 따른 도발 위협 가능성 등 국가 안보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해서 13일 집중 논의하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장성택 일당 제거는 곧 북한 권력 구도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서 "장성택을 대신할 새로운 세력이 누구인지에도 주목하고 있다" 고 밝혔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전략가였던 장성택의 실각으로 북한의 권력 지형은 군부 내 강경파가 득세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며 북한은 장성택 숙청을 계기로 김정은 제1위원장은 강경파를 중심으로 '1인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것으로 예상된다. 청와대는 북한 군부 내 강경파의 득세가 국가 안보와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한편 토마스 셰퍼 북한 주재 독일 대사는 장성택이 숙청당한 것은 김정은 조선로동당 제1비서가 북한 군부 내 강경파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평가했으며 강경파의 압력에 밀려 장성택의 숙청을 결정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장성택 숙청으로 김정은의 1인 지배 체제가 강화된 것도 아니라고 분석했다. 이는 김정은이 공포 정치를 통해 본인의 입지를 단단히 하기 위해 장성택을 제거했다는 분석과 명백히 대비된다.


3.5. 박근혜와의 연관설[편집]


박근혜 편지 사태에서 김정은에게 편지를 전달 한 인물로 장성택이 지목 되면서 장성택 처형의 원인 중 하나로 박근혜, 김정남과의 비밀접촉이 떠올랐다. 기사에 따르면 박근혜-김정남-장성택-김정일로 이어지는 불법 비선 대북접촉라인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박근혜가 불법 대북접촉, 북한 고무 및 찬양 등 국보법을 위반했다는 정황을 잡은 것이다. 박근혜가 국보법 위반 소지가 다분한 행위를 한 것은 팩트이며, 통일부 등 국가기관의 협조 없이 박근혜가 '어떻게 사적으로 불법접촉을 할 수 있었나'에 대한 의문을 푸는 정황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뒤늦게나마 이 라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면 한국과 불법내통한 장성택이 살아남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장성택이 김정은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감안하면, 김정은 입장에서는 당시까지도 장성택이 박근혜나, 더 넓게는 대한민국, 김정남과 내통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 2017년 2월 14일 김정남이 암살 당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박근혜 유럽코리아재단 대북 비선은 김정남이었다


3.6. 라종일 교수의 주장[편집]


라종일 교수는 자신의 저서 '장성택의 길'에서 자신은 거의 20년 동안 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후계구도에 관한 정보를 추적, 수집했고, 그 과정에서 북한의 내부 사정에 정통한 중국과 일본, 한국의 전문가 40여 명의 증언을 확보했다고 '장성택의 길'에 서술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공적 사적 인프라를 통해 북한 군부의 기밀을 접할 수 있는 인물들로 북한 내 궁중암투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자료를 얻었다고 말하며 장성택의 처형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장성택은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고자 국가 안전보위부, 군부와 같은 권력기관을 견제하는 한편으로 로동당 개혁 성향의 인사들을 포진시켰다. 또 권력 행사와 유지에 필수적인 자금을 확보하는 방편으로 외화벌이 사업에 관여했지만 이 과정에서 군부 등과 갈등을 빚으면서 끝내 김정은의 심기를 건드리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13년 후반기 김정은이 서해안 군부대를 시찰할 때 같이 동행했던 군의 수뇌부들은 군이 자금난으로 매우 어렵다고 말하며 그 원인은 서해의 외화벌이 양식장을 당의 행정부가 관할하기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이런 보고를 접한 김정은은 그 시설을 군에게 돌려주도록 지시를 했지만 잘 이행되지 않았다. 장성택이 이 지시를 바로 이행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측근이 체포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김정일 시대에 조성된 기존의 비자금을 39호실로부터 당 행정부 산하의 54국으로 모아 행정부가 관리하는 승리무역회사의 연유사업소에 지원되도록 했던 것이 처형의 시발점이 되었다.

2013년 어느 날 회계장부를 들여다보던 김정은은 금액이 너무 작다고 여겨 서기실 부부장을 불러 “어째서 비용이 이렇게 빈약한가? 선대에서는 어떻게 관리했었는가?”라며 경위를 추궁했다. 그러자 서기실에서는 “장군님은 39호실에 자금을 모아 장군님의 혁명사업에 쓰게 하셨는데, 지금은 당 행정부에서 자금을 관리하고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안 그래도 장성택에 불만이 있었던 김정은의 심경에 불을 붙였다.

당시 김정은은 상세한 내막을 알 수 있는 상황은 아니였지만 장성택에 이미 언짢은 감정을 가진 김정은은 모든 자금을 다시 39호실로 돌려놓으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지시를 받고 현장에 도착한 병력들이 승리무역회사 연유사업소로 진입하려다 무장 경비원의 제지를 받아 김정은의 지시가 통하지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들어가려면 1호동지의 승인을 받아 오라.”

“1호동지란 누구인가?”

“장 부장 동지다. 그분의 지시를 받고 와야 들어갈 수 있다.”


북한에서의 1호는 당연히 김씨왕조 직계 지도자 밖에 없으므로 불경죄로 볼 여지가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이 보고를 받은 김정은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당장 호위사령부에 무력을 동원해서 현장을 진압하고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중무장한 호위사령부 병력이 사업소를 점령하고 이 사실을 보고했다.

거기에 더해 김정은은 조직지도부의 조연준 제1부부장에게 연락해 장성택을 검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행정부와 오랫동안 반목해오던 조직지도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장성택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 유일영도체제에 걸림돌이 되는 요인을 제거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하는 조직지도부는 장성택의 비리와 월권, 종파행위 등 각종 비위 사실이 기록된 보고서를 작성했고, 여기에는 국가안전보위부도 참여했다.

이후 장성택은 몰락 수순을 밟게 되었으며 리룡하 행정부 제1 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체포되어 자신의 눈 앞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온갖 고문을 받은 뒤 끔찍하게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3.7. 타 권력기관과의 알력다툼설[편집]


신범철 등 대북전문가들과 간부 출신 탈북자들이 주장하는 설로 장성택 측과 보위부,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측의 알력다툼 때문에 결국 장성택이 사형당했다는 관측도 존재한다.

장성택은 당 행정부와 사회안전성, 중앙검찰소를 장악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두 개의 권력기관들은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고 장성택 측을 끊임없이 견제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2010년,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2012년, 우동측 보위상이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 간부 출신 탈북자들은 장성택이 우동측 보위상에 관한 불미스러운 자료를 수집해 김정은에 제출했다고 한다. 결국 우동측 보위상은 끝내 자살하거나 해임당했다고 한다. 즉, 장성택을 견제해야 할 두 개의 권력기관들이 약화된 것. 장성택은 자신을 견제하는 주요 정적들을 제거하고 북한의 최고 실세로 군림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김정은 입장에선 막강해진 장성택의 권력은 위협이 되었고 자신의 절대권력을 구축하기 위해선 장성택을 제거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 보위부, 조직지도부 측이 동조하면서 끝내 장성택이 사형당하게 되었다는 관측이다. 실제로 장성택 사형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참한 기관이 조직지도부와 보위부이기도 하다.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절대권력을 거머쥐어야 하는 북한 체제 특성상 2인자들은 대개 견제할 다른 권력기관이 붙어야 하는 법이다. 당연히 장성택이 자신을 견제할 권력기관들을 약화 및 제거하려는 행보는 북한 체제상에선 결코 용납못할 일이기도 하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도 장성택 처형이 와크(무역허가권)를 둘러싼 투쟁의 결과물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의 독재자들은 간부들의 충성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와크를 발급해주는데 장성택이 너무 많이 가진 덕에 다른 간부들의 미움을 사서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

4. 장성택 생존설[편집]


"북한의 여자 친구와 고모부를 처형했다고 말했으나 지난번 방북했을 때 (장성택이) 내 바로 뒤에 있었다."

데니스 로드먼

데니스 로드먼이 지난 2014년 1월 방북했을 때 장성택을 봤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서는 모란봉악단단장 현송월도 사형당했다는 설이 거의 확실시되었으나, 건재한 것이 확인되었으므로 장성택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냐는 주장이 있으나, 장성택은 현송월과 달리 대놓고 북한 정부가 범죄자로 낙인찍고 숙청했다고 발표했는지라 설사 장성택이 죽지 않았더라도 외국 방문객이 장성택을 봤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따라서 로드먼의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비슷하게 생긴 다른 사람을 장성택으로 잘못 봤다는 것이 그나마 설득력 있는 가능성이다.

물론, 장성택이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김정은의 고모부라는 위치의 특성상 김정은이 장성택을 공식적으로는 '반역을 도모하여 처형된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실제로는 목숨만 붙여 어딘가에 유폐시켜놨을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애초에 장성택을 처형하는 장면을 찍은 영상이나, 또는 그의 시신을 찍은 사진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장성택에 대한 존재감만큼은 완전 인멸된 상태에서 단순히 방문객인 데니스 로드맨이, 살아 있다면 북한 최악의 정치범이 되었을 장성택을 만났다는 주장 자체는 믿기 어렵다 할 것이다.

태영호 전 북한 주영국공사는 2013년 평양에 잠시 돌아간 적이 있을 때 평양에서는 장성택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자택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장성택 라인의 핵심 간부 11명은 모두 공개처형되고 그 밑의 중간간부들과 당원들 및 그 가족들 수천 명이 평양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건 확인 가능하지만, 정작 장성택 본인이 처형되는 건 북한에서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다만 태영호 공사도 장성택이 현 시점에서 죽은 것은 확실하며 다만 그 사망시점이 처형보도가 난 2013년이 아니라 장성택 숙청작업이 완료된 2016년일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5. 이후[편집]


처형 이후에도 장성택이 건설을 주도한 곳은 전부 김정은에 의해 개명되거나 폐쇄되어 철저한 기록말살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주요 웹사이트와 인트라넷에 등장했던 과거 장성택의 기사들 역시 전부 삭제되었으며, 물론 기록영화에 나왔던 장성택의 모습들도 전부 지워졌다. 예시

김정은 집권 10년 차를 맞이하는 2020년대 들어서는 장성택 처형을 김정은의 최대 치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주체혁명 위업 계승의 중대한 시기, 당 안에 나타난 현대판 종파분자들을 혁명대오에서 단호히 제거해버리신 정치적 결단은 역사적 공적입니다.

北 기록영화 ‘위대한 년대, 불멸의 려정’


종파분자가 누구인지 언급되지는 않지만 화면에서 장성택이 실각당해 끌려나가는 2013년 12월 9일의 로동신문 1면이 등장하면서 장성택을 지칭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고모부를 처형한 패륜행위를 '치적'으로 언급한다는 것부터가 북한이 외부 입장에서는 '미친 독재 국가'라는 것과 김정은이 나라의 발전에 기여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만 여실히 드러낸 꼴이다.

그리고, 장성택의 최측근 인사였다가 대한민국으로 탈북한 노희창 씨는 자신의 소식통에 의하면 "김정은이 장성택을 숙청하고 난 뒤 나중에 후회를 했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결국, 아무리 최측근 부하들이 듣기 좋은 소리를 김정은한테 해줘도 본인이 믿지 못하고 죄다 숙청해버리기에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고, 김정은이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고 생각할 때 진심으로 걱정해주면서 브레이크를 걸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가족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성택은 원래 성격상 아버지였던 김정일에게도 잘못한다고 생각하면 여러 차례 직언을 했었던 사람이었고, 김정은에게 권위도 잘 살려주고 집안이 잘 되어야 한다고 쓴소리도 해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김정은이 장성택을 죽여버리는 바람에 자신에게 항상 좋은 말만 해주는 부하들의 진심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라고 예측을 하였다. 실제로 좋든 싫든 김정은이 엇나가고 잘못하고 있을 때 방향을 바로 잡아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장성택이었을 것이다. 사실, 장성택은 김정일을 오랫동안 보좌해온 경력으로 노련한 정치 커리어를 쌓아놓은 참모 역할을 해준 것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장성택도 김씨 일가 가족이니까 조카에게 잘 되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 김정은 본인한테도 도움이 되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결국 장성택 처형을 주도했던 측근들도 그 끝은 좋지 못했다. 김원홍 국가보위상은 토사구팽을 당하면서 숙청을 당했고[12] 조연준 검열위원장은 고령의 나이로 결국 은퇴했다. 최룡해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까지 역임하고 있지만 인사권과 감찰권과 같은 실질적 권한은 없는 얼굴마담에 불과하다. 북한과 같은 독재 국가에서는 ‘영원한 2인자는 없다.’ 가 다시 한 번 증명된 셈이다.

[1] 장성택의 심복인 리룡하, 장수길이 체포되고 처형되는 시점이다. 즉, 장성택에 대한 숙청이 공식화된 시점이다.[2] 현재는 법의 개정으로 61조이다.[3] 신범철의 주장에 의하면 장성택 덕에 대북제재와중에도 북한 경제가 높은 성장을 이루었지만 장성택 처형 이후부터 북한 경제가 침체일로에 접어들었다고 한다.[4] 민주당 정보위 정청래 간사의 의견, 새누리당 조원진 간사는 부정함.[5] 종파행위란 박헌영이나 김일성 반대파들을 숙청하면서 이후 김일성의 명령하에 붙은 죄명인데, 이 죄목은 북한 내에서 이렇게 판결 받을시에는 일단, 약하면 철직 내지 출당이며 심하면 바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하는 죄목이다.[6] 비슷하게 완전통제구역 내에도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가 없다.[7] 좀 더 생각해 보면 장성택이 김일성의 사위이자 김정일의 매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무서운 사건이다.[8] 이 링크에서 장성택 사냥개 처형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보면 알 수 있듯 1976년 해주폭동설과 기독교도 쇳물 처형설 같은 날조들도 애교로 만드는 수준이다.[9] 태영호의 증언과 박남기를 총살한 후 그 시신을 용광로에 넣으라고 김정은이 직접 지시했다는 고위급 탈북자(국정원 요청으로 김정은 보고서를 100페이지 이상 작성할 정도로 기밀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고 한다)의 증언을 조합해보면, 비밀리에 총살한 후 시신의 목을 잘랐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10] 2010년 9월 28일 개최.[11] 다만 탈북 기자 주성하는 링크 속 김정은의 뚱한 표정과 헝클어진 머리는 그냥 숙취 때문일 거라고 간단명료히 분석한 바 있다.[12] 처형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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