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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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주 체코 북한대사
김평일
金平一 | Kim Pyong-il


파일:김평일.png

출생
1954년 8월 10일 (69세)
평양시
본관
전주 김씨 (全州 金氏)
국적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가족
아버지 김일성, 어머니 김성애
이복 형 김정일, 이복 누나 김경희
누나 김경진, 남동생 김영일
아들 김인강, 딸 김은송
친척
조카아들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조카며느리 신정희, 리설주
조카딸 김여정
조카손자 김한솔, 김금솔
조카손녀 김솔희, 김주애
작은아버지 김철주, 김영주
사촌 김정현, 김영성
오촌당숙부 김창주, 김원주, 김봉주
학력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 / 학사)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파일:/image/022/2007/05/09/mb0510-1-2011.jpg
빵모자를 쓴 사람이 김평일이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김평일의 아들 김인강과 딸 김은송. 현재 김은송은 결혼하여 평양시에 살고 있다.

파일:attachment/김평일/KimP2.jpg
파일:attachment/김평일/KimP3.jpg
젊은 시절의 김평일. 출처는 KBS 대기획 '김정일'의 캡쳐본

1. 개요
2. 생애
2.1. 생애와 권력 싸움에서의 탈락
2.2. 해외 유랑생활
3. 외교관 경력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아들. 즉, 김정일이복동생이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는 누나 김경진과 남동생 김영일이다. 김영일은 독일 주재 대표부의 참사관으로 나가있다가 2000년에 간질환으로 죽었고 김경진은 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 김광섭의 아내로 에 살고 있다.


2. 생애[편집]



2.1. 생애와 권력 싸움에서의 탈락[편집]


김일성이 세 번째 부인인 김성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2남 2녀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1954년에 태어났다. 1942년생인 이복형 김정일과는 12살 차이이다. 김정일김일성이 연이은 전쟁과 권력 투쟁으로 한창 바쁜 때에 어린 시절을 보내는 바람에 부자간의 정을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다. 반면 김평일은 6.25 전쟁 휴전 이후 김일성이 비교적 여유가 있을 때 낳은 아들이기도 하고, 생김새도 아버지를 꼭 닮아 김일성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평양의 핵심계층 자녀들을 가르치는 평양남산고급중학교에서 공부했는데, 학교 후배였던 조명철 전 국회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체력과 예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김평일을 두고 '장군감'이라고 하면서 군인으로 키울 생각을 여러 차례 내비쳤다고 한다. 젊어서는 김정일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단 말이 있었으나 나중에 김정일이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하면서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된 후에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김정일의 경호원 이영국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자신의 관저에 김평일이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번번이 문전박대당하는 김평일이 열이 받아서 "얼마나 잘 사나 두고보자!" 라고 저주를 퍼붓고 돌아가는 일도 부기지수였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일 권력이 공고화된 후에는 당연히 그런 불경한 행동따윈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맏아들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공부도 게을리하고 성격도 포악했던 김정일과 여러모로 비교되었기 때문에, 1970년대에 들어서자 친모 김성애를 중심으로 김정일 대신 김평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김정일은 1970년대 내내 김평일을 집요하게 견제하며 암투를 벌였고, 결국 1970년대 말 김평일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권력 다툼에서 패한 김평일은 해외를 떠도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김정일김성애를 증오했던 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1949년에 사망했는데, 그녀가 천거한 비서 김성애김일성이 서로 바람이 나는 바람에 목숨을 구할 기회를 놓쳤다는 증언이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정일김성애를 생모를 죽인 원수로 여겼고 단 한번도 어머니라고 부른 적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계모 김성애와 김평일 등 이복 동생들을 평생 곁가지로 취급하여 형님이나 오빠라고도 부르지 못하게 했다. 다만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이 쓴 '대동강 로얄 패밀리'에 따르면 어렸을 적에는 그래도 어린 동생들을 꽤 귀여워했고 미워하게 된 것은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면서부터라고 한다. 또한 김정일은 늘 '수령님에게는 아들 하나, 딸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으며, 1991년 김경희가 중앙당 경공업부장이 되었을 때 '수령님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니 잘 도와주라' 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김정일에 비해 김일성을 매우 닮았으며 (얼굴, 목소리 등) 특히 관록 있는 이목구비와 180cm에 달하는 큰 키를 지니고 있었고 젊은 시절에도 그리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김정일에 비해 김평일은 독보적인 미남까지는 아닐지라도 꽤 잘생긴 축에 들었다. 또한, 성품도 원만한 편에다 대중들을 상대로 직접 연설하는 것을 꺼렸던 김정일과는 다르게 김평일은 후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서 인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한 다음에 인민군으로 자진 입대를 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들 앞에서 직접 나서는 것을 좋아했다. 김정일이 대중들에게 나서기보다는 막후에서 지휘, 조정하는 타입이었던데 반해 대중정치인으로써의 능력은 김평일이 더 뛰어났다는 얘기이다. 그리하여 숙부 김영주를 비롯해 혁명 1세대 원로들의 호감을 샀다. 김일성은 김평일이 태어났을 때 우리 집에 장군감이 나왔다고 무척 좋아했다고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혁명 1세대의 비호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유명한 오진우도 처음에는 김평일을 내심 더 선호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다음 후계자 자리는 김평일이 이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여기에 김평일이 김정일보다 후계자로서의 위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 중의 하나가 러시아 태생인 김정일과는 달리 김평일은 북한 출신이었다는 점이었다. 이 점에서는 김평일은 김정일보다 소위 말하는 백두혈통의 우위에 있었다.

북한의 육군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김일성종합군사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군 지휘관으로 복무한 경력도 있다. 오진우가 김정일 보다 김평일을 더 선호했던 것도 이러한 군 경력으로 인해 군재가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평일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으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군 입대를 독려하는 연설을 한 뒤 자신부터 조선인민군에 자진입대했다는 사실은 꽤나 유명하다. 이런 점들 때문에 군 경력이 전무한 김정일이 이복동생에게 심한 컴플렉스와 질투심을 느꼈을 것이라는 추측도 많다. 김정일의 군 경력은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에 단기 군사훈련을 받은 것이 전부이다. 이 시절의 북한은 모병제였어서 법률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북에서 고위층으로 출세하려면 군 경력은 사실상 필수고 더군다나 수령의 장남이 군에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치적으로도 분명한 약점이었다. 때문에 김정일이 이복동생인 김평일에게 심한 컴플렉스와 질투심을 느꼈을 것이라는 추측도 많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일각에서는 김정일의 후계자 등극에 의문을 가졌는데 바로 김정일은 군 기반이 약해 북한 정권의 중심을 지탱하는 군부의 신임을 얻지 못 할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었다.[1]

그러나, 김일성의 환갑 때 항일 빨치산 1세대 원로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김일성이 "나의 아이들이 있는데 누가 나의 다음 자리를 이어야 하는게 좋겠소?" 넌지시 묻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 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확실히 후계자를 낙점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김평일이 되겠거니 생각하고 있던 대다수의 원로들이 침묵을 하고 있는 와중, 가장 김일성이 총애하고 아꼈던 최현[2]이 입을 연다. "당연히 다음 대에는 수령님 '장손이 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자가 있는데 다른 누가 한단 말입니까." 라고 아첨을 했다. 그 말을 들은 김일성이 고개를 한참 끄덕인 후 "그래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가장 친밀한 좌상인 최현이 김정일을 대놓고 지지하는데 어느 누가 감히 나서서 "아닙니다, 안돼요. 그만두고 김평일이 합시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후계자 문제 잘못 거론했다가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때부터 김정일로 권력 승계가 쏠리게 되었다고 한다. (KBS 김정일 사망 다큐 <김정일> 편에서.)

사실 이 1970년대 초반 시점, 이미 김정일은 선전선동부 문화예술과장을 거쳐 마오쩌둥의 홍위병과 같은 3대혁명소조를 구성,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친위 조직을 통해북한 각급기관의 정보를 손에 쥐었으며 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고 본격적으로 중앙정치에 뛰어드는 30대 초반의 야심가였다. 반면 김평일은 혁명 원로들의 지지를 받았다고는 하나, 10살 넘게 차이나는 이제 대학에 갈 학생에 불과했다. 애초에 게임이 성립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이 환갑잔치에서는 딸 김경희도 김성애-김평일 모자를 곁가지로 만드는 데에 한 몫 했다는 에피소드도 존재하는데, 환갑을 맞은 아버지 김일성에게 문안 인사를 올린 후 어머니 김정숙을 찾으며 통곡하자, 과거에 함께 혁명을 치룬 원로들이 그 시절 여성 동지이기도 했던 김정숙을 떠올리며 모두 정숙아! 정숙아! 를 외치며 회한에 젖었다고 한다. 이로써 건국에 기여했던 본처와 그 자식 라인의 입지를 강화한 것. 김경희는 오빠 김정일보다도 더 더욱 의붓어머니 김성애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김평일이 후계자의 위치에서 밀려난 일의 원인이 단순히 그게 전부일 리가 없다. 여기에는 김평일의 어머니인 김성애가 김일성과의 사이가 점차 틀어졌던 점도 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에 김일성이 우리의 국립중앙도서관 격인 인민대학습당의 건축을 위해 선정해둔 부지가 있었다. 1963년도에 건물을 이전하면서 규모를 키웠지만 이마저도 장서량이 많아지면서 포화 상태에 놓였던 모양이다. 남한에서는 김일성이 정보 통제의 대명사로 유명하지만 사실 김일성은 도서관 건설과 도서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남한이 도서관 납본 제도를 1965년이 되어서야 시행한 것에 반해 북한은 이미 1948년도에 시행했고 전후 복구 과정에서도 도서관 건축에 많은 열을 올렸을 정도였다. 그래서 북한의 도서관 인프라가 남한보다 더 일찍 갖춰질 수 있었다. 반면에 김일성이 한창 통치를 했을 당시(이승만-장면-박정희 통치기 당시) 남한의 도서관 인프라는 딱히 좋지 않았는데 국가적인 수준에서 도서관을 건설하는 작업에 대해서 소홀했었기 때문이었고 그 때문에 당대 도서관 인프라는 한숨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여하튼 경제 성장 과정에서 북한의 도서관 인프라를 남한이 서서히 따라잡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남한이 민주화로 정보 통제가 풀리고 고난의 행군 등으로 북한의 경제가 쇠퇴하면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도서관 인프라 격차가 커졌지만 아무튼 당대에는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김일성이 선정해뒀던 인민대학습당 부지에 김성애의 남동생이었던 김성갑이 집을 짓고 말았다. 이 땅은 김일성이 나중에 활용하려고 평양이 대대적으로 개발되고 있을 때도 놔두라고 지시했었던 금싸라기 중의 금싸라기 땅. 1973년 여름, 김일성이 이 근방을 지나가다 호화로운 저택이 지어진 것을 보고 입구의 보초에게 누구 집이냐고 물어봤고, 보초는 "해군사령부 정치위원이자 당 비서인 김성갑 동지의 집이다"라고 답변해 그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참고로 이 지역이 어디냐면 바로 매년 북한이 열병식을 진행하는 김일성광장 바로 앞이다. 김정은이 고위 관료들과 나와 행사를 참관할 때 오르는 김일성광장 대주석단이 이 인민대학습당 바로 앞에 있다. 여기에 집을 지어놨으니 김일성이 대노한 것은 당연지사.

이에 화가 잔뜩 난 김일성이 김성갑을 불러내어 크게 꾸짖었다. 이것이 곧 '인민대학습당 사저 신축 사건'으로 번졌다. 김일성은 이것을 보면서 대노했고 "뭐이야? 김성갑이가 여기 살아? 언제부터?"라고 외치고는 사무실에 김성갑을 불러서 간부들 앞에서 매우 혹독하게 비판하고 질책을 했다고 한다.

그 날 밤 지친 김일성이 관저로 돌아가서 밥을 먹고 있는데, 한 성격했던 김성애는 김일성을 미안하다고 구슬려도 모자랄 판에 딸 김경진과 아들 김평일을 데리고 김일성과 한바탕 싸우기 위해 나타났다. 처남을 조진 것이 약간 미안했던 김일성이 아내 대신에 딸 김경진에게 말을 걸며 모른척 하자 분노한 김성애가 "밥이 뭐요? 낮에 자기 처남을 그렇게 핀잔주고 비판하고 남들 앞에서 그렇게 깎아내리고, 밥이 넘어가갔소?"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일은 강성산이 했는데 왜 욕은 김성갑이 먹어야 하냐면서 마구 자기 혼자 잘살자고 그랬나, 당신 가시어머니(장모의 북한어) 잘 모시려고 그런 것인데 가시어머니가 번듯한 집에 살면 당신 위신이 떨어지나?" 라고 마구 바가지를 긁어댔다. 이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났던 김일성이 숟가락으로 밥상을 내려쳐서 접시를 깨버렸지만 김성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폭언을 퍼부어댔다.

"당신 부모 묘는 요란하게 꾸며놓더니, 우리 엄마는 좋은 집에 살면 안됩니까? 우리 엄마가 잘 살면 당신 배가 아파요?"


그리고 김일성이 먹던 밥상을 걷어차는 바람에 뒤집어 엎어버렸다고 한다. 난데없이 뜨거운 국과 밥을 다 뒤집어 쓴 김일성은 당연히 폭발했고, 김성애를 구타하려 했지만 김평일이 김일성의 주먹을 쥐고 말리고 김성애에겐 자기 대학 졸업할 때까진 제발 좀 참으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식당에서 끌어내었다고 한다. 이는 김정일의 러시아어 교사를 했던 김현식 교수의 증언인데, 나중에 김현식은 김성갑의 자녀들 과외교사도 하면서 김성애와 자주 만났는데, 그녀로부터 들은 것으로 보인다.

이 일로 김일성의 기분이 크게 상해있던 틈에 약삭빠른 김정일이 이를 노리고 김성애 일가의 비리를 낱낱이 조사해서 김일성에게 보고해버렸다. 이로 인해 김일성이 김성애는 물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김평일도 멀리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물론 이 이후에 바로 김성애가 실각한 것은 아니었으며, 또 김평일도 곧바로 후계 경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상술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대학생들을 선동해 입대 원서를 낸 게 이 이후인 1976년이며, 김정일이 신년 사진촬영 행사에서 김일성과 함께 놓인 김성애의 황금의자를 보고 격노하면서도 정작 김성애가 오자 내색 없이 고개를 숙였던 사건도 1974년 1월이었다.

물밑 정치공작과 투쟁 속에 1974년 2월 13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 5기 제 8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공식 선출되었고 '유일한 후계자'임이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1979년, 유고슬라비아로 나가게 되면서 김평일은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탈락하고 만다.

2.2. 해외 유랑생활[편집]


후계자로 공인되고 권력을 잡은 김정일은 김평일의 존재를 두려워했으며 차후 그의 후손 및 세력이 북한에서 권력다툼의 씨앗이 될 것을 우려하여 김평일이 정치권에서 세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외교관으로 내보냈다. 사실상 권력 중심에서 숙청당한 것이다.

1979년 주 유고슬라비아 주재 무관으로 발령난 이후 한번도 정착하지 못하고 가족들과 함께 40년째 유럽을 떠돌았다. 1988년 8월, 헝가리와 남한의 수교가 논의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8월 17일, 특별기를 타고 급히 헝가리에 입국, 8월 23일에 안민수의 뒤를 이어 신임 헝가리 대사로 신임장을 봉정했다. 그의 임명은 북한에서 보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헝가리가 아랑곳하지 않고 남한과 수교를 확정하자 격노한 김일성은 11월 5일, 김평일을 다시 북한으로 소환하고 후임 대사를 임명하지 않았다. 이후 김평일은 마침 전임 하동윤 대사가 귀국하여 공석이었던 불가리아로 가기로 결정, 12월 11일에 불가리아 대사로 이임하였다. 이번에는 임명이 평양방송으로 보도되긴 했으나 로동신문에서는 보도되지 않았다.

1993년 12월까지 불가리아 대사로 재임하다가 귀국, 1994년 2월에 핀란드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994년 3월, 핀란드 외교부가 이를 확인해주었다. 하지만 부임하고 몇 달 동안 신임장 제정도 못하는 소동을 겪다가 1996년 5월에 귀국, 1997년 12월에 폴란드 대사로 임명되었다. 여기서도 수난은 끝나지 않아 1998년 11월에야 신임장을 겨우 제정하면서 건강이상설이 도는 해프닝을 겪었다. 폴란드에서 장장 16년간 대사로 재임하다가 2015년 1월 체코 대사로 전보됐다. 십수 년간 멀쩡히 있던 폴란드에서 갑자기 체코 대사로 옮겨간 이유는 폴란드 주재 외국 외교관 중에서 김평일의 부임 기간이 제일 길어 자연스레 외교단장이 돼 폴란드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자 김정은이 이를 불쾌하게 여긴 것. 그래서 김정은은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던 김영남[3]에게 교체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언급했듯이 해외(주로 동유럽) 주재 대사 자리를 계속 돌았으며 유배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정일은 김평일에 대해 느끼는 적대감이 강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김평일과 어린 시절 같이 사진을 찍었던 인물들을 하나하나 다 찾아내서 모조리 숙청시켰다고 하며 누가 김평일과 한 마디라도 수상한 대화를 한 일이 김정일의 귀에 들어가는 경우 북한에서는 곧바로 그 사람을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탈북한 한 북한 관료는 "파티에서는 항상 김평일 주위에 1m의 공백이 있었다. 아무도 그와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말 그대로 왕따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외교관으로 파견가기 전에는 소련과 동독에서 유학 생활을 한 적도 있고 동유럽 국가 대사였기 때문에 영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불가리아어, 세르비아어를 할 줄 안다. #1#2

고영환도 자신의 외교관 생활 때 해외에서 만났던 김평일은 북한 내에 그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으며 오로지 북한 노동신문을 통해서만 북한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김평일이 하루동안 무엇을 하는지를 그에 곁에 붙어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감시자들은 시간별로 김평일의 행적을 기록해 당에 보고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9시에 기상. 10시에 아침식사. 12시에 화장실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한번은 자신이 당 회의에 회의 시간보다 늦게 들어갔지만 뒤에 자리가 많이 남아 있어 이상해서 확인해 보니 그 빈자리들 중 한 가운데에 김평일이 있었다고 말하며 김평일 자리 양쪽으로 6자리씩 그리고 앞뒤로 3자리씩 비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원형 탈모 같은 느낌이였다고 한다. 김정일은 곁가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하얀색 벤츠를 줬는데 그 벤츠는 북한 내에서 곁가지들에게만 지급되기 때문에 김평일이 탄 하얀색 벤츠가 오면 북한 주민들이 "여기 곁가지가 왔다갔습니다."라고 당에 보고했을 정도로 일거수일투족이 철저히 통제된 삶을 살았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김평일은 그와 얼굴도 보고 싶지 않은 대사관 직원들에게 자꾸 다가와서 말을 걸거나 내부 행사 때 싫은 티를 내도 모른 척 끼어드는 경우가 많아 대사관 직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와 얼굴만 마주쳐도 몇 분 몇 초 단위로 무엇을 했는가 철저하게 보고해야 하는 데다 이상한 오해라도 생기면 바로 큰일이 나기 때문인데 그래서 김평일은 직원들에게 천치 취급까지 받는다고 한다. 그나마 숙부 김영주[4]가 김정일을 진정시켜서 그렇지 김평일은 물론 그의 형제들과 친모 김성애까지 어떤 비참한 일을 당했을지 모른다고 한다.

2011년 7월 1일 가택연금 상태라는 뉴스가 떴다. 5월에 입북해서 현재까지 가택연금 중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이건 오보였다. 2013년 초엔 폴란드 대부업체한테 돈 빌린 거 갚으라고 북한 대사관이 소송까지 걸렸다. 법원에서 기각하기는 했다. 2015년 2월 3일 체코대사로 임명되었고 체코대사로 재직하던 2015년 7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대사회의'(외국공관장 회의)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36년 만의 첫 평양 입국이었다고 한다관련 기사

2019년 11월에 사실상 완전히 유배를 끝내고 평양으로 귀국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같은 해 12월 국가정보원에서 김평일이 북한으로 귀국했음을 공식 확인했다. 고영환은 김평일이 북한으로 송환된 이유를 사실상 김정은이 시한폭탄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고영환은 김정은이 김평일을 경계한 이유가 김평일의 모습이 김일성과 매우 닮았기 때문에 김정은은 자신에게 신변상의 문제가 생겼을 때 김평일이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위험 요소로 보았던 것이 그 이유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김평일은 이후 자신의 에서 좋은 음식은 제공을 받겠지만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서 쓸쓸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2020년 4월 중순 김정은의 신변 이상설이 확산되는 가운데, 북한 외교관 출신의 탈북자 국회의원 태영호는 김정은의 유고시 그가 북한의 차기 최고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후처 소생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뭐래도 김일성의 아들인 데다가 나이도 아직 60대 중후반이라서 지도자로서 활동할 여력이 충분하기 때문.[5] 이에 비해 김정철은 정치와 거리가 멀고, 김여정은 여성인 탓에 참모 역할로는 몰라도 보수적인 북한 체제에서 최고지도자로 전면에 나서기는 불리하다는 논리다. 반면 유력 연구기관, 명문대학의 북한학 박사, 교수들은 김평일의 권력 복귀 가능성에 회의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이미 40년간 유배나 다름없는 외교관 생활을 하는 동안 평양 권력계에서 소외되어 자기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고, 북한 주민들에게도 존재감이 없거나 한물 간 과거의 인물로만 인식되어 있는 탓에 차기 권력자로는 불리한 위치라는 것. 백두혈통으로 분류되지도 않은만큼 단순히 선대 수령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가진 정통성만 내세우기는 애매하다. 앞으로도 북한 내부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주목 받을 가능성이 높다.

3. 외교관 경력[편집]


  • 1979~1988 유고슬라비아 국방무관
  • 1988 헝가리 대사
  • 1988~1993 불가리아 대사
  • 1994~1996 핀란드 대사
  • 1997~2015 폴란드 대사
  • 2015~2019 체코 대사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0년작 KBS-TV 100분 드라마 《붉은 왕조》에서 배우 백윤식이 연기했다.
  • 1982년작 KBS1 반공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 배우 김천만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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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때문에 김정일이 집권 후 오히려 군을 내세우는 선군정치를 표방했을 가능성이 있다.[2] 현재 김정은 체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룡해의 아버지 되는 인물이다. 민간인 출신의 최룡해가 갑자기 대장 계급을 달고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김일성의 첫째 심복인 최현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최현은 교육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은 빨치산 세대들 중에서도 특히 무식한 것으로 중평이 높았는데 그런 이유로 같은 원로들에게도 다소 따돌림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김일성과 아주 친밀한 관계에 김일성보다 연상이라서 김일성에게 사적으로 친하게 반말을 해도 될 정도였다고.[3] 당시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북한의 명목상 대외 수반으로 대사 인사권을 가졌다.[4] 조카인 김정일보다 약 10년이나 더 살아 2021년 무려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 북한이 세습통치를 하기 때문에 권력자들의 나이가 유독 젊은 것이지 사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한창 '대권주자'로 나서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