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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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tablecolor=black,white><bgcolor=#AC0028><color=#fff><-4> 파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휘장.svg 위원장 ||
||<-4> 김정은 ||
||<bgcolor=#AC0028><color=#fff><width=50%><-2> 제1부위원장 ||<-2><color=#fff><bgcolor=#AC0028><width=50%> 부위원장 ||
||<-2>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2> 김덕훈
내각 총리 ||
||<-4><color=#fff><bgcolor=#AC0028> 위원 ||
||<width=25%> 조용원
당중앙
조직지도부장
||<width=25%> 리영길
총참모장 ||<width=25%> 정경택
총정치국장 ||<width=25%> 김여정
당중앙
선전선동부
부부장
||
||<width=25%> 리선권
당중앙
통일전선부장
|| 김성남
당중앙
국제부장
|| 오수용
당중앙
경제부장
|| 김영철
당중앙
통일전선부 고문
||
|| 박정천
당중앙
군정지도부장
|| 장정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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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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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최룡해
崔龍海 | Choe Ryong Hae


출생
1950년 1월 15일 (74세)
황해도 신천군
국적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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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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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버지 최현
형 최룡택
장남 최준
차남 최성
딸 1명
학력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 / 학사)
계급
차수
주요서훈
김일성훈장(1992)
공화국영웅(1993)
김정일훈장(2012)
정당

지역구
평양시 모란봉구역 전승선거구(제23호)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사로청 비서 시절과 숙청
2.3. 복권과 총정치국장 시절
2.4. 다시 당으로
2.5. 2차 숙청
2.6. 복권 후 권력의 정점으로
2.7. 명목상 2인자
3. 경력



1. 개요[편집]


북한정치인.

황해남도 신천군 출신이며, 만경대혁명학원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김일성의 최측근이었던 최현의 아들로 혁명 2세대인 혁명 유자녀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황해북도 책임비서, 당중앙위원회 근로비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당중앙위원회 조직담당 부위원장, 조직지도부장 등을 역임하며 김정은 정권의 2인자로 오랫동안 군림했으며, 2023년 2월 현재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2. 생애[편집]


파일:통일전망대 MBC 로고.png [[파일:김팀장의 북한 확대경.png


권력서열 2위 빨치산혈통 대표 최룡해의 눈물
(2023년 5월 18일 공개분)



2.1. 초기 이력[편집]


김일성의 최측근이었던 최현의 아들이다. 아버지 최현이 인민무력부장을 지냈지만 군대와는 인연이 없었다. 징병제를 실시하고 군에 다녀와야 입당도 하는 북한 특성상 의무복무 자체는 했는데 그걸로 끝이고 사로청에서 경력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최현이 김일성을 해방 이전부터 따랐고, 또한 김정일의 권력 승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신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 장진성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과 아주 친해서 김정일, 최룡해, 오극렬 셋이서 아예 의형제까지 맺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형 최룡택이 있는데, 최룡택은 찬밥인 것에 대해서 김정일의 동생 슈라가 죽을 때 옆에서 아무런 손도 못 써서 김일성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검증하기는 힘들다. 장진성은 최룡택이 최룡해가 친형인 자신보다 김정일을 더 따르자 몇번 김정일을 꾸짖곤 했는데 이 때문에 최룡택이 김정일에게 찍혀서 승진을 못하다가 90년대에 죽었다고 증언했다.

2.2. 사로청 비서 시절과 숙청[편집]


젊어서는 청년 문제를 전담하였는데, 1986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12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1980년대에는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현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비서직을 맡았으며, 청년동맹 비서 자격으로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에 선출되었다. 1989년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이 평양에서 열리면서 축전 조선준비위원회장을 맡아 개회사와 폐회사를 하기도 했다.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93년 1월, 리계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3년 4월 27일, 사로청을 잘 지도했다고 공화국영웅 칭호 및 금별메달, 국기훈장 제1급을 받기도 했다. 무려 최현의 아들이라는 빽을 믿고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비서로 일하던 1990년대 후반 대동강 주체사상탑 근처 청년중앙회관 가라오케장에서 산하 예술단 여성들과 부화방탕하게 놀면서 청년동맹을 자신의 소왕국으로 만들면서 세도를 부렸다.

이 때문에 미운 시선을 많이 받고 있던 찰나에 1997년에 청년동맹에 중앙당 검열이 들어왔음에도 청년동맹 간부들을 최룡해의 위세만 믿고 수사에 비협조적으로 굴면서 뻗대었고 가뜩이나 고난의 행군으로 체제가 위태로운 상태에서 안하무인으로 구는 최룡해의 태도에 대노한 김정일이 청년동맹을 죽탕쳐놓으라고 지시하면서 청년동맹의 주요 간부들이 몰살당하고 최룡해 본인도 2개월간 가택연금당한 후 출당 처분을 받고 1998년 1월, 리일환에게 비서 자리를 내놓고 혁명화를 당하게 된다. 중앙당에서 일했던 탈북자 노희창 씨의 증언에 의하면 자강도 랑림군으로 좌천됐다고 한다. 원래는 처형까지 당할 뻔했지만 성분도 워낙 좋았으며 친분이 있던 장성택의 간곡한 요청으로 간신히 처형을 면하고 지방 산골에서 온갖 모욕을 당하며 칼을 갈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후지모토 겐지의 <김정일의 요리사> 등의 문헌에서 이 때의 일로 처형을 당했다고 알려졌는데, 이후 정보가 수정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최룡해는 원래 고질적인 당뇨병으로 인해서 건강이 워낙 좋지 않았는데, 그런 와중에서 자강도 랑림군으로 떨어져 일반 노동자로 일하면서 콩밥만 먹고 노동을 하면서 이때 건강이 상당히 좋아졌다고 한다.(...) 최근 방영된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게스트 최정길 씨의 증언에 따르면, 혁명화 처분을 받게 된 이유는 김정일이 지시한 병원 3동을 짓는데에 쓰는 돈 일부분을 사적으로 횡령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2.3. 복권과 총정치국장 시절[편집]


6년간 혁명화를 하면서 굴렀던 최룡해는 <혁명체험기>를 쓰면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혁명체험기를 읽은 김정일이 최룡해가 혁명화를 잘 했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황순희, 김경희, 연형묵 등 김정일과 가까운 빨치산 일가들이 탄원하면서 2002년, 평양시 상하수도사업소 당비서에 임명되면서 중앙으로 복귀하였다.[2] 이후 당중앙위원회 총무부 부부장에 임명되어 3년간 일하였다. 이후 2006년 4월, 로배권의 뒤를 이어 황해북도 책임비서에 임명되면서 다시 중책을 맡기 시작했고 노무현 대통령2007 남북정상회담 당시 조선로동당 황해도당 비서로서 노 전 대통령을 영접한 바 있다. 일부 탈북자 증언에 따르면 최룡해가 김정일에게 자신이 직접 북한의 관문이며 가장 가난한 황해북도로 내려가겠다고 자청하였다고 한다. 황해북도 책임비서로 사업하면서 황해북도를 상당히 발전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가 2010년 9월 27일, 최고사령관 명령 제0051호에 따라서 대장 계급을 부여받았고, 다음날인 9월 28일, 3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 비서국 근로담당 비서에 임명되면서 중앙으로 올라와 김정은 후계체제를 보좌하게 되었다. 군 경력이 없는 최룡해가 갑자기 군계급을 받은 것은 김경희 등이 군계급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민간 출신인 이들의 입지를 급격히 강화하여 김정은의 군장악을 보좌하기 위한 포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3]

최룡해가 본격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시기는 2012년,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 시대부터이다.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에서 최룡해는 조명록 사망 이후 공석이었던 총정치국장에 임명,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2단계를 뛰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파격 승진하면서 그간 군부 최고 실력자로 거론되던 총참모장 리영호의 최대 라이벌 중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2012년 4월 7일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결정에 따라 현철해와 함께 차수로 진급하였다. 4월 13일, 최고인민회의 12기 5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더욱이 최룡해는 12월에는 차수까지 진급하여 리영호와 동급이 되었다. 리영호는 최룡해와는 달리 애초부터 조선인민군의 짬밥을 많이 먹은 인물이었는데, 정치인으로서 대장 칭호를 부여받은 최룡해와 달리 밑바닥부터 시작해 조선인민군 차수까지 진급한 정통 군인이었다.

이후 리영호와 최룡해가 갈등을 빚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내막은 불투명하다. 일부 소스에 따르면 리영호는 김정은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다닐 때 그의 졸업논문을 지도해주는 등 그의 후계구도를 도왔고, 김정일이 그를 갑자기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파격 기용한 점에서부터 김정은 지지파로 볼 공산이 다분했으며, 실제로 당시 나온 보고서들은 대부분 리영호를 김정은의 군부 후견인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는 2012년 7월에 갑작스럽게 숙청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리영호가 김정은이 초기에 보인 개혁성향에 반발했다는 말도 있고, 김정은이 군부가 장악한 외화벌이 사업을 내각에 집중하려 한 것에 대해서 반발하려 했다는 말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는 김정은의 조치에 불만을 드러냈고, 이 때문에 군에 대한 당적 통제를 상징하는 최룡해와 장성택의 손으로 숙청되었다. 이 과정에서 리영호가 강력하게 반발을 했고 이에 최룡해 측에서는 리영호를 밖으로 끌어내서 격리 시키려고 시도하다가 총격전이 일어났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 이 총격전으로 20여명이 사망했으며 리영호는 생사불명이라는 설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을 세웠음에도 김정은 초기 군에 대한 영도 체계 확립 및 김정은 권위 구축 과정에서 밉보였는지 12월 14일 은하 로켓 발사 성공 축하대회에서 김일성광장 앞 주석단에 섰을 때까지만 해도 차수였으나 이틀 뒤인 16일에 평양체육관에서 개최된 김정일 추모 대회에서는 일반 별 4개의 대장 계급장을 단 군복 차림으로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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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부침을 겪었으나 현지료해를 다닌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입지 자체는 계속 탄탄함을 과시하였다. 북한 문제 전문가들은 최룡해와 같은 차수 계급이었던 현영철 총참모장도 대장으로 강등된 것으로 볼 때, 김정일 집권기에 선군정치의 일환으로 너무 남발되었던 차수 계급을 점차 폐지하여 계급 인플레 현상을 억제하려는 김정은의 뜻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반대로 로켓 발사 성공으로 그 동안 당에 밀려 약해졌던 군부의 발언권이 다시 강화되면서, 당 출신인 최룡해의 힘이 약화되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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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13년 2월에 다시 차수 계급장을 달고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 이 재진급에 대해 북한 전문가들은 후원자인 장성택의 힘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리고 최룡해가 차수로 재진급한 뒤로는 2013년 12월 현재까지 총참모장과 인민무력부장이 계속 대장 계급으로만 채워지고 있어서, 총정치국이 총참모부와 인민무력부보다 우위에 있는 형세가 계속 되고 있다.

2013년 5월 22일에는 뜬금없이 중국에 특사 자격으로 파견되었다. 사실상 김정은이 그를 특사로 파견한 것으로 보이며, 근래 삐걱거리는 북중관계 개선을 모색하려는 시도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2013년 12월 2일, 국정원의 11월 장성택의 실각 발표에 그가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과 함께 개입했으며, 그가 군부라인으로 장성택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분석이 있었다. 다만 이것은 국정원의 자체 분석이 아닌 언론과 학자, 정치인들의 추정으로 여겨진다. 이후 최룡해는 12월 16일 충성맹세모임과 12월 17일 김정일 2주기 추모대회에서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연설을 하면서 실질적인 2인자의 자리를 굳히는 듯 보였다. 2013년 12월, 김국태 장의위원을 지냈다.

2.4. 다시 당으로[편집]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최룡해였지만, 2014년 2월 28일 자유북한방송은 '최룡해의 감금설'에 대한 정보가 입수되었다고 밝혔다. 장성택이 13년 말에 처형 된 지라, 6개월도 안되는 기간에 북한의 거물급을 두 명이나 숙청하는 사례로 주목 받았다. 극비리에 진행되는 사건이여서 소식통은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고 밝혔다. 北, 장성택 이어 총정치국장 최룡해도 감금

하지만 3월 5일 북한 조선중앙방송 TV 보도에서 최룡해는 김정은 곁을 수행하는 등 아직 건재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리를 심하게 저는 모습으로 나타나 최근 모습이 뜸했던 것은 감금이 아니라 병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보기관의 말로는 당뇨가 있다고 한다. 피죽도 못 먹는 인민들은 절대 걸릴 수 없는 병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2014년 5월 1일 인민군 총정치국장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를 황병서가 꿰찬 것으로 드러났다. # 이를 두고 건강문제로 일시 사임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지만 북한 언론 보도에서 차수계급장을 달고있는 최룡해의 모습이 포착된 것이나 이전의 북한의 행태로 미뤄보면 최룡해가 실각했거나 좌천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있다. 일단은 두고볼 일이지만 실각이 사실이라면 김정은이 1인자를 위협할 정도로 2인자가 크는걸 두고보지 않고 더 크기 전에 최룡해를 누른게 아닌가라는 추정이 나올 수 있다. 일단 조선로동당 비서로 강등됐다. 김정은 체제의 안정화의 상징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5월 2일 원산의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 재건축 완공 기념식을 비롯한 일련의 행사를 취재한 북한 보도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직함을 달고 등장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기념사를 낭독한 것 외에는 유소년 축구 관람 때를 제외하면 김정은 바로 옆자리를 배정받지도 못했고, 공식 호명 순서도 김정은, 황병서, 김기남, 최태복 다음 순서로 밀렸다. 총정치국장 임명 후 항상 입던 군복 대신 사복 정장 차림이어서, 조선인민군 차수 계급 등 군적을 반납 혹은 박탈당하고 예편되어 원래의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최룡해의 좌천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김정은 권력 내의 역할 변화라는 평가가 높다. 즉 최룡해를 통해 군대를 다 잡았던 김정은이 군에 좀 더 오래 있었던 황병서를 총정치국장으로 임명해서 최룡해의 역할을 대신하게 만들고 건강도 별로 좋지 못한 최룡해를 다시금 자신의 주 전공이자 약간 편한 당쪽으로 옮겨오게 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김정은 입장에서 아직은 최룡해가 이용가치가 남았을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룡해의 아버지가 충신의 표본이라는걸 감안한다면 써먹을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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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9일 열린 북한판 탑건 대회인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비행지휘관들의 전투비행술경기대회-2014'에 여전히 사복 차림이긴 하나 김정은 바로 왼쪽 자리를 배정받은 것이 북한 보도를 통해 확인되었다. 김정은 부부 바로 오른쪽은 새 총정치국장 황병서가 앉았다. 이로써 처벌이나 강등보다는 건강 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군무에서 물러난 것이라는 추정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전투준비태세가 김정은 집권이 2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허술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임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2014년 7월, 전병호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에 2015년 7월에 탈북한 북한의 한 고위인사는 이 시기에 최룡해가 처형될뻔 했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2014년 4월 15일 김정은이 군인 축구경기를 관람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행사 시간이 2시 였는데 김정은은 5시가 넘어서야 행사장에 나타났고, 행사에 동원된 군인들은 12시부터 경기장에 입장해 꼼짝 없이 5시 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김정은은 행사 조직을 잘못해 많은 군인이 대기하느라 큰 고생을 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를 트집 잡아 크게 화를 내었고, 총정치국 행사과장은 다음 날인 4월 16일 바로 고사기관총으로 공개총살 되었다. 이는 김정은이 최룡해를 제거하기 위해 공연히 생트집을 잡은 것으로, 행사과장이 처형된 날 열린 비공개 사상투쟁회의에서 최룡해는 울면서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나중에는 장성택 처럼 군인들에게 끌려 나갔고, 이후 약 한달을 구금 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이유인지는 몰라도 김정은은 최룡해를 처형하지 않았고, 총정치국장에서 해임하는 걸로 그쳤다고 한다.

2014년 9월 24일 국가체육 지도위원장에 임명됐다. 9월 15일, 최고인민회의 13기 2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서 소환, 황병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전만큼은 못한 직책을 가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직책과 함께 근로단체 핵심인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을 담당하는 근로담당 비서직 그리고 김정은이 중시하는 체육을 총 담당하는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을 맡고 있는 것만 봐도 당 내 입지는 여전히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래에 나오다시피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참석대표로 방남하는 것만 봐도 2인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권력서열은 여전히 높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2014년 10월 4일에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황병서, 김양건과 함께 참석했다. 일단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이라는 직책상 그의 참석은 명분이 있긴 하다. 최룡해 개인적으로는 공식적인[4] 최초의 방남이다. 이 날 폐막식 현장에서는 임수경과 만나기도 했는데 둘은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각각 북한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위원장 자격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자격으로 만난 적이 있다.

2015년 1월. 김정은의 여동생이자 로동당 부부장 김여정이 최룡해의 둘째아들과 결혼했다는 설이 나왔다.기사 하지만 북한을 방문한 후지모토 겐지는 낭설이라고 이를 부정했다. 2015년 9월 3일에 실시한 중국의 열병식에 구석에 박혀있다가 바로 귀국했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바로 옆에 서는 서열 2위의 대우를 받았다기사 2015년 2월 정치국 회의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강등당했고, 총정치국장을 꿰찬 황병서가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하였다.

2.5. 2차 숙청[편집]


이렇게 로동당 내에서 활발한 대외활동까지 하던 그가 돌연 2015년 11월 사망한 북한의 원로이자 인민군 원수 리을설의 국장을 주관할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서 빠져버렸다. 로동당의 높은 관료이기 이전에 혁명 2세대에 해당되는 최룡해가 혁명 1세대의 장의위원에 빠진 것에 대해서 김정은에 의한 실각설, 숙청설이 나돌았다.[5] 로동당 창건일 기념식 전후의 중국과의 외교에서 성과가 없어 근신 중이라는 설도 있다. 이로 보아 북한의 권력 제3인자라고하나 입지가 확고한 건 아닌 듯. 실제로 위에 상술 되었듯이 2014년 4월에도 김정은은 사소한 트집을 잡아 최룡해를 구금하였고, 최룡해는 울면서 자아비판을 했었다고 한다.

결국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 건설 책임을 맡았다가 발전소 가동 과정에서 발생한 누수 사고[6]에 책임을 지고, 업무 소홀과 김정은에 대한 불경죄로 함경도 소재의 협동농장으로 쫓겨나 혁명화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기사 기사에 언급된 내용에 따르면 혁명화 교육의 사유가 단순한 업무 소홀이라면 금방 복권될 수 있겠지만, 김정은에 대한 불경죄라면 복권이 힘들 것이라고 한다.

그러던 중 12월 30일 김양건 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의 장례위원회에 서열 6위 당 비서로 이름을 올려놓음에 따라 복권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협동농장으로 쫓겨난게 아니라 평양 인근에서 자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기사


2.6. 복권 후 권력의 정점으로[편집]


2016년 1월 20일 김정은을 수행하면서 완전 복권되었음을 알렸으며, 2월 2~3일 열린 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인민군위원회 연합 확대회의에서 김정은 왼쪽자리에 바로 앉으면서 서열이 곧바로 3위로 상승, 권력의 정점에도 다시 올라섰음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게 되었다. 기사

2015년 11월에 있었던 실각에 대해서도 자신의 장남이 한국드라마를 본 것이 보위부에 걸리자 직접 자신이 김정은에게 보고하고 스스로 혁명화를 자처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한마디로 장남도 살리고, 자신도 살리는 처세의 달인 급 행보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기사

2016년 5월에 열린 제7차 로동당 대회에서 서열 5위에 오른 모습이 포착되었다. 앞에 위치한 사람이 김영남, 황병서, 박봉주 이런 식이기 때문에 사실상 서열 2위나 다름 없는 위치다. 이전 서열 5위였던 김기남을 밀어낸 모습에서 확실히 김정은 체제에서 견고한 위치를 자랑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5월 9일, 7기 1중전회에서 내각 총리 박봉주와 함께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뽑히면서 다시 정치국 상무위원에 복귀하였으며 비서국 비서가 개편된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도 선출되었다. 무엇보다도 당 내 인사 중 유일한 정치국 상무위원이기 때문에 당 중심으로 이끌어나갈 김정은 체제에서 명실상부한 제2인자로 위치를 상당히 공고히 했다는 평가가 높다.기사 5월 21일 강석주 전 비서의 장례위원장을 맡으면서 확실히 2인자의 위치에 다시금 올라섰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 6월 29일,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8월, 브라질에서 열린 리우올림픽을 구경하러 갔다. 기사

2017년 들어서는 다시 2인자로 복귀한 모습이다. 이미 전해 12월에 쿠바 카스트로 의장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고 기사, 1월에는 현지 시찰에 나섰는데 북한에서 경제관련된 시찰에서 박봉주 총리 이외의 인물이 시찰한 사례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2013년 시찰이 최근일정도로 이례적이다. 기사

이후에도 꾸준히 본인의 존재를 과시하다 2017년 10월 7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 당집행부로 선출, 회의 결과 조직지도부장에 임명,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도 보선되면서 김정일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임명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조직지도부를 책임지게 되었다. 국정원 첩보에 의하면 2017년 11월 그의 주도하에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김원홍 총정치국 제1부국장을 처벌했다고 한다. 기사 2017년 12월, 최휘에게 국가체육지도위원장 직책을 물려준 것으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그가 좀 더 당의 업무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리고 조직지도부장 임명설이 나온지 1년여만인 2018년 1월, 통일부는 최룡해가 조직지도부장으로 임명된 것을 공식 확인했다. 이어 3월 방중에서도 중국 관영매체인 신화통신이 최룡해를 조직지도부장이라고 소개하여 교차 검증이 되었다.[7] 2018년 1월, 송도원종합식료공장과 신의주화장품공장과 신의주시 석하협동농장 현지료해를 다녀왔다.

이후에는 김정은이 해외로 나가면 대부분 북한에 남아 있는 2인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제1차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에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다만 2018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바로 뒷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 부부를 맞이했으며, 백화원초대소에서 가진 기념식수현장에서는 김정은을 대신해 문재인 대통령과 기념식수를 갖기도 하였다. 2018년 4월 2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 집행부로 선출, 첫째 의정 토론을 맡았다. 2018년 8월, 김영춘 장의위원, 2018년 12월, 김철만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리고 2019년 4월 1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조직지도부장을 리만건에게 물려주었다. 이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서도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김영남이 오랜 기간 자리를 지켜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새로 임명되었다. 또한 북한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에도 오르며 확실한 2인자가 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조동된 것에 대해서 고위 탈북자들은 대부분 올것이 왔다는 반응이었으며, 최룡해의 고질적인 당뇨병이 악화되면서 격무에 시달리는 조직지도부장 대신에 좀 더 한가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로 옮긴 것 같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실제로 김정일 시기부터 북한의 수령들은 측근들의 건강이 악화되면 이를 배려하여 업무가 적은 외교관이나 지방직 자리를 주면서 요양시키는 간부정책을 보인 바가 있다. 2019년 6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추대 3주년 중앙보고대회에 참가했으며 2020년 1월, 황순희 장의위원장을 맡았다.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재선되었으며, 부침 없이 빨치산 2세대 및 입법기구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대표하는 얼굴 마담으로 잘 지내고 있다. 2021년 7월 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14기 15차 전원회의에 참가했다. 2022년 5월, 현철해 장의위원을 지냈다. 2022년 6월, 8기 5중 확대회의에 참여했으며 여기서 결론적으로 조용원과 김덕훈에게 밀린다는게 확인되었으며 2022년 7월 25일, 박정천, 리일환, 김재룡, 박태성, 정경택, 리선권, 박수일과 함께 8차 로병대회 참가를 위해 평양으로 온 참전노병들을 방문했다. 2022년 8월 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14기 21차 전원회의에 참석하였다. 9월 7일, 최고인민회의 14기 7차 회의 주석단에 당연히 포함되어 회의를 사회하였다. 최고인민회의 14기 22차 전원회의를 사회하였으며, 10월 10일, 다른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함께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 2022년 10월 15일, 만경대혁명학원 75주년 기념행사 참가자들의 맹세문채택모임에 참가했다.


2.7. 명목상 2인자[편집]


한편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공식 서열이 2위인 것은 맞지만,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라고 한다. 백두혈통의 상징성을 부각하기 위한 인물이란 것. 주성하 기자의 말에 따르면 북한에서 2인자의 자리에 오르려면 인사권, 군사권, 비밀경찰운영권 이 세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최룡해에게는 이 중 아무것도 없으며, 김정은 일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최룡해는 권력을 잡을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전임자 김영남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북한 간부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다.27분 14초부터

다만 최룡해는 전임자 김영남과는 달리 여전히 김정은 체제의 주요 직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기보다는 나이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권력의 2인자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라 보는게 맞을 듯 싶다. 북한에서 중요한 직책인 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여전히 맡고 있고, 북한 정부의 주체인 국무위원회의 제1부위원장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에 이전의 상임위원장 권한과는 다른 상황이라 봐야 할 듯 보인다.[8] 어찌 되었든 그도 나이가 있기 때문에 권력의 일선에서는 물려나야 할 상황이며, 대신 그 2인자 조용원김덕훈이 차지하게 됐다.

2022년 6월, 8기 5중 확대회의에서 그동안 꾸준히 1순위로 불리던 호명순위가 김덕훈 총리, 조용원 조직비서에 비해 뒤로 밀림에 따라 당 핵심권력에서는 확연히 내려오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여전히 당 대회에 주요 인사로 참여하기 때문에 권력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과거의 화려했던 2인자의 권력에서는 내려왔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사실 김영남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자리는 실권은 없더라도 명목상 의전 서열 2위급의 자리이기도 하고 실권이 없는 만큼 숙청당할 염려도 거의 없는 자리이기에 고령으로 은퇴를 앞둔 최룡해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 된 셈이다.

그리고 2022년 12월에도 비록 2인자는 아닐지언정 여전히 권력의 최정점에 위치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특히 북한에서 중시하는 사회주의헌법 50주년 기념식에서 대표로 보고를 하고 여전히 주석단 앞쪽에 위치한다는게 그 모습이다. 2023년 2월 8일 열병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얼마 후 광명성절을 기념하여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함으로 잘 지내고 있음이 확인됐다. 이후 한동안 조용하다가 3월 10일, 전인대 상무위원장에 선출된 자오러지에게 축전을 보냈다. 3월 14일, 식수절을 기념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일군들과 함께 식수를 하였다. 3월 16일 즈음 평안남도 숙천군을 현지료해했다. 3월 28일, 7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쿠바대사와의 작별담화에 대외경제상 윤정호, 대외문화련락위원장 서호원, 조선꾸바단결위원회 서기장 고명훈을 거느리고 참석했다. 4월 6일, 임명 후 거의 2년만에 부임한 중국대사 왕야쥔의 신임장 봉정식에 외무성 부상 박명호와 함께 참석하였다.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14기 25차 전원회의에 참석했다. 5월 19일, 김덕훈과 함께 신미리 애국렬사릉의 현철해 묘소를 참배했으며, 현철해 서거 1돐 추모대회에 참석했다. 5월 25일, 중국대사 왕야쥔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북한 매체에는 따로 보도가 없었고 중국대사관 홈페이지에만 소식이 업데이트되었다. 6월 16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8차 전원회의 확대회의 집행부에 선거되었으며 6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5차 정치국회의에 참석했다. 6월 28일, 주창일, 전승국, 임경재와 함께 우의탑 내부개작공사 완공식에 참석했다. 7월 25일, 리영길, 박정근. 김형식. 리태섭과 함께 대성산혁명렬사릉을 참배했다. 7월 26일, 김성남, 강윤석과 함께 방북한 리훙중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환영하는 연회에 참석했다. 또한 김정은과 쇼이구의《무장장비전시회-2023》관람에 동행했고, 조국해방전쟁승리 70돐경축 대공연에 참석했다. 8월 15일, 김덕훈, 리일환, 정경택, 박정근, 리태섭, 김수길 등과 함께 대성산혁명렬사릉을 참배하고 화환을 진정했다. 9월 8일, 공화국창건 75주년 중앙보고대회와 공화국 창건 75주년 열병식에 참석하였다. 몸이 별로 안좋아서 그런지 주철규처럼 마스크를 낀 모습이었다. 또한 김정은이 러시아를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 역에서 영접하였다 9월 2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6차 정치국회의에 참석했다. 9월 27일, 최고인민회의 14기 9차 회의에 참석, 첫번째 의정인 헌법 수정보충에 대해 보고했다. 10월 9일, 조선로동당창건 78돐 경축공연을 관람했으며 10월 10일,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 김정일 동상에 화환을 진정했다. 또한, 조선로동당창건 78돐경축 남자배구경기를 관람했다. 11월 26일, 지방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12월 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7차 정치국회의에 참석했다. 12월 16일, 김정일 사망 12주기를 맞이하여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

3. 경력[편집]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86년 8월?
1996년 1월 17일
사로청 대표자회에서 직함 개편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제1비서
1996년 1월 17일
1998년 1월 23일
사로청 대표자회에서 유임
사로청 14중전회에서 해임
조선로동당 황해북도 책임비서
2006년 4월?
2010년 9월 28일
3차 당대표자회에서 비서로 조동
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후보위원
2010년 9월 28일
2012년 4월 11일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
4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
조선로동당 6기 비서국 비서
2010년 9월 28일
2016년 5월 9일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
7차 당대회에서 직함 개편
조선로동당 6,7,8기 정치국 위원
2012년 4월 11일
재임 중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
7차 당대회에서 재선
8차 당대회에서 재선
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상무위원
2012년 4월 11일
2015년 2월 18일
4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
정치국 회의에서 강등
조선로동당 6기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2012년 4월 11일
?
4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2012년 4월 11일
2014년 4월?
4차 당대표자회에서 임명
황병서에게 이임
12,13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
2012년 4월 13일
2014년 9월 25일
최고인민회의 12기 5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3기 2차 회의에서 소환
13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2014년 4월 9일
2014년 9월 25일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3기 2차 회의에서 소환
조선로동당 7기 정무국 부위원장
2016년 5월 9일
2019년 4월 10일?
7차 당대회에서 선출
7기 4중전회에서 소환?
조선로동당 7,8기 정치국 상무위원
2016년 5월 9일
재임 중
7차 당대회에서 선출
8차 당대회에서 재선
13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2016년 6월 29일
2019년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제1부위원장으로 승진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
2017년 10월 7일
2019년 4월 10일
7기 2중전회에서 임명
7기 4중전회에서 해임
14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2019년 4월 11일
재임 중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선출
14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2019년 4월 11일
재임 중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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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세한 내용은 김정일 항목 참고.[2] 나중에 후지모토 겐지는 TV에서 살아있는 최룡해를 보고 굉장히 놀랐다고 증언했다.[3] 어차피 북한군은 북한의 국군이 아니라 조선로동당의 당군 (실제로는 김씨 일가의 사병)이고, 공산주의 국가의 정치장교는 대체로 군사적인 재능보다는 당에 대한 충성심과 정치력으로 결판나는 자리라 갑자기 민간인 당료가 군복입고 별 4개를 단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 소련에서도 강철의 대원수독소전쟁이 터지자 스스로 원수 계급을 달고 행정을 총괄했다. 전쟁 초기에는 군사 작전에도 개입했지만, 예전 정치위원 시절 클래스가 어디 안 가서 몇 번 말아먹더니 그만 뒀다고 한다. 흐루쇼프 또한 중장 정치장교 계급을 달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 당장 2013년 현재 러시아 국방장관인 세르게이 쇼이구 장관도 관료 출신이다가 비상대책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당연직인 비상대책군 사령관직을 겸직하게 되자 하루아침에 육군 대장 계급을 받고 그 뒤 국방장관에 임명되면서 대장 계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4] 극비리에 제주도에 방문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5] 거기에 최룡해처럼 혁명 2세대에 해당되는 고위 간부들도 이을설 장의명단에서 대규모로 빠진 게 확인되어 일각에서는 뿌리 깊게 박혀있던 빨치산 세력들을 다른 파들을 다 쳐낸 지금에서야 쳐내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6] 해당 공사에 특수 시멘트가 아니라 일반 건축용 시멘트를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공사 전반에서 인력으로 하다보니 품질이 균일하지 않는 등 북한식 건설 특유의 모든 문제들이 그대로 접목되었기에 주변 주민들이 해당 댐의 안정성을 의심하기도 한다고...실제로 조선중앙TV에 방송된 발전소 모습을 보면 물이 새는 모양인지 댐 곳곳에서 젖은 자국이 포착되기도 했었다.[7] 이때쯤 김정은에게 김정일이 타던 벤츠 W140 리무진 한대를 물려받은 듯 하다.[8] 이때문에 권력이 약화되기는 커녕 오히려 전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보다 권력이 더 강화되었다고 봐야 할것이다. 또한 국무위원회 위원장인 김정은만큼은 아니더라도 국가, 정부에 대한 권력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