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구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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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유래
3. 중국에서
4. 한국사에서
5. 원인
6. 피하는 법
7. 긍정적 측면
8. 여담
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고사성어




토끼
죽을

삶을
고사성어로 교토사양구팽(狡兎死良狗烹) 또는 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에서 유래되었다. 뜻은 '교활한(또는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토끼를 물고 온) 좋은 사냥개를 삶는다'이며, 이를 줄인 토사구팽은 '토끼가 죽으면 개를 삶는다'이다. 즉, 필요할 때 요긴하게 사용하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가차없이 바로 버린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배신과 유사한 맥락. 토사구팽의 처지에 이른 것을 '팽 당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2. 유래[편집]


范蠡遂去,自齊遺大夫種書曰 : 「蜚鳥盡 良弓藏狡兔死走狗烹.」

범려가 마침내 월왕을 떠나 제나라에서 대부 문종에게 서찰을 보냈다.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은 창고에 묻히게 되고, 날쌘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져 죽게 됩니다.」

사기》 〈월왕 구천 세가〉

춘추시대 월나라의 군사 범려의 말(《사기》 〈월왕 구천 세가〉)출전(出典)에서 유래한 것이다.

와신상담으로 유명한, 당시 오나라를 멸망시킨 월나라의 왕 구천은 고생할 때는 함께 고락을 나누지만 자신이 부귀해질 때면 교만해져 모든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성격이기 때문에, 구천이 범려 자신을 포함한 공신들을 죽일 것이라 미리 예측한 범려가 문종에게 관직에서 물러나자고 권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과연 그 말이 맞아서 문종은 자결해야 하는 위기에 몰렸지만 그 때 가서 깨달은들 소용없었다.

그렇지만 보통은 한고제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뒤 한신을 압송하자 한신이 한탄하는 말에서 유래한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과연 사람들의 말대로구나. 교활한 토끼가 죽으니 좋은 사냥개를 삶고, 높이 나는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도 광에 들어가며, 적국을 깨부수니 계책을 꾸미던 신하가 망하는구나. 천하가 이제 평정됐는데, 그런고로 나도 마땅히 삶아질 수 밖에 없음이로다.

사기》 〈회음후 열전〉


실은 위의 인용문에서 '사람들 말대로'라며 인용했던 말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던 말[1]로 위의 '교토사양구팽 비조진양궁장'에서 앞부분을 4자로 줄였는데, 뒷부분을 줄인 조진궁장(鳥盡弓藏, 새를 잡으면 활을 창고에 넣음)도 같은 뜻이지만 비극성이 더 강한 토사구팽에 밀려 잘 쓰이지는 않는데 활은 부러지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다시 꺼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신은 역이기가 갑작기 제나라에서 팽살을 당하는 것을 방관한 사건으로만 봐도, 스스로를 '충성스런 좋은 사냥개'로 칭할 자격은 없었다는 데서 처세에 관련해서는 한신의 백치적 면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예이기도 하다. 그 뿐만 아니라 토사구팽 운운하던 놈이 막상 예전에 자기한테 초나라 군대에서 탈영할 때의 은인이자 이제는 항우의 사후 의탁해왔던 종리매를 '야 너 죽여서 목 보내면 유방이 용서해줄지도 모른다는데 어떰?'하고 고대로 물어봐서 빡친 종리매가 자결하게 만들었다. 누가 누굴 탓한단 말인가?

이 말이 전해져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를 삶는다."라는 한국 속담도 만들어졌다.


3. 중국에서[편집]



3.1. 춘추시대[편집]



3.1.1. 제양공과 팽생의 예[편집]


제양공이 자신의 이복 여동생인 문강과의 정분이 외부로 대두되자, 팽생을 시켜서 이를 무마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대한 과실과 책임을 죄다 팽생에게 뒤집어 씌웠다.


3.1.2. 부차오자서의 예[편집]


위의 월나라 왕 구천이 토사구팽의 효시긴 하지만, 그의 라이벌이었던 오나라 왕 부차 또한 토사구팽의 예시 중 하나이다.

오왕 합려의 뒤를 이을 후계자들 사이에서 부차는 큰 세력이 없었지만, 오의 최고 실력자던 오자서의 지지 아래 오왕의 자리에 올랐다. 와신으로 알려진 부차의 복수에 오자서는 큰 힘을 보탰고 부차는 구천에게 복수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부차는 구천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구천의 계략에 넘어가 구천을 놓아주는 걸로 모자라 월나라로 돌려보내주게 된다. 이때부터 부차와 오자서는 사사건건 의견충돌을 일으켰고, 최후엔 중원의 패자가 되려는 부차의 목표에 오자서가 반대하는 것으로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나중에는 부차가 오자서에게 자살하라며 검을 보낸다.

부차의 뜻에 따라 오자서는 자결하기 직전 '내가 죽으면 무덤에다 가래나무를 심어 그 나무로 부차의 관짝을 짜도록 하라. 또 내 눈을 뽑아 동쪽 성문에 걸어두면 월이 오를 멸망시키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를 들은 부차는 분노해 오자서의 시체를 형체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매질한 뒤 장강에 던져버렸다.결국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은 부차는 원정으로 국력을 크게 낭비했으며, 이로 인해 상담의 세월을 거쳐 힘을 회복한 구천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패배해 오는 멸망한다. 부차는 구천의 자비로 목숨만은 건졌지만 저승에서 오자서의 얼굴을 볼 낯이 없다며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자결한다.

물론 부차의 원정이 그 자체로는 아주 의미없는 짓은 아니었다. 장강 이남의 이민족 국가인 오나라로서는 중원에 비해 여러가지로 부족하고 뒤처졌기에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고, 실제로도 오를 멸망시킨 월나라도 결국 말라죽어갔으니 오나라로서도 다른 길이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뒤처리를 엉망으로 해놓고 이런 짓을 벌였다는 점이다. 당연히 뒤치기를 당하지 전에 월나라를 멸망시켰어야 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부차는 구천을 죽이지도 월나라를 멸망시키지도 않고 중원 침략에 나섰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원래부터 앙숙이었던 월나라를 후방에 남겨두었으니 일이 터지지 않길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였다. 괜히 오자서가 먼저 구천을 죽이라고 계속 상소문을 올린 게 아니다. 오자서라고 다 늙어서 딱히 부차의 앞길을 막을 생각은 없었을 테지만 후방을 비워놓고 가면 어떻게 될 지는 안 봐도 비디오일 상황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다만 토사구팽이라고 하긴 뭐한 것이 원래 오자서를 등용한 사람은 부차의 아버지 합려고 합려는 오자서를 버리기는커녕 높은 벼슬을 주고 초나라 침공의 핵심 인재로 써먹었으며 그의 비원인 초나라에 대한 복수도 풀어준 윈윈관계다. 그리고 부차도 처음부터 오자서와 대립했던 것도 아니고 애초에 부차를 왕으로 추천해준 사람이 오자서다. 또, 이 시점에서 오자서는 나이도 많이 먹었기 때문에 반은 은퇴한 상태에서 간섭한 것이라 자존심 강한 부차의 반감을 산 것도 있다. 물론 부차가 잘못한 것이긴 하지만.


3.2. 전국시대[편집]



3.2.1. 진 소양왕백기의 예[편집]


진나라 소양왕은 범수의 모함에 그대로 동조하였다. 이에 대한 수순으로 백기를 파직시키고, 얼마 안 가서 유배까지 보냈다. 여기에 아예 한술 더 떠서 유배길을 가던 백기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3.3. 전한시대[편집]



3.3.1. 유방한신의 예[편집]


한고제 유방은 한신의 고사 때문에 토사구팽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유방은 지위를 깎은 적은 있어도 의외로 그냥 토사구팽을 목적으로 죽인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먼저 손을 댄 적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의심가는 사람도 알아서 빌면 대부분 용서해 줬다.

항우 휘하에 있던 자들을 수배했다가 다른 사람의 탄원을 듣고 수배령을 거둔 사례[2]도 있고 심지어 사위 장오의 신하 관고가 유방의 암살을 획책하다가 잡혔는데도, 심문 내내 장오와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는 데다 유방이 장오에게 막 대한 것 때문에 빡쳐서 그랬다기에 장오를 왕에서 강등하고 나중에 후로 봉하는 정도로 끝내고 관고를 그냥 풀어준다.

관고는 장오가 강등당한 게 자기 탓이고 결국 황제를 죽이려 한 것은 잘못이라며 자살하지만. 말이 토사구팽이지, 한고제가 직간접적으로 죽인 공신 대부분은 먼저 그쪽에서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서 유방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볼 수 있다. 이 관고의 암살 시도 정도가 몇 안되는 유방의 자업자득[3]이고 유방이 이후로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 외에는 어지간하면 용서를 빌면 봐주는 식으로 나간 것도 이 사건의 영향이 있을 수도 있다.

100년 후 개국공신 가문 중 남아난 게 없었다는 이야기 때문에 유방이 공신들을 핏대를 세우며 핍박했다는 이미지도 있는데, 실제로 사마천이 쓴 사기에서 공신으로 봉해진 이가 백여명인데 한무제 시기에 이르자 죄다 망해서 다섯 가문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 남은 이들도 다 몰락해버렸다고 한다만, 정작 이런 공신 탄압은 한문제~한무제 동안 일어난 일이라 유방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소위 토사구팽을 인용한 한신은 사실 진작부터 사망 플래그를 쌓으며 사방에 어그로를 끌고 있었다. 유방이 아니라 어떤 군주라도 "임금님 죽도록 고생하시는 건 알겠는데, 아무래도 저도 바빠서 병력은 못 보내드리겠네요. 그건 그렇고 저 이번에 제나라 땅 먹었습니다만 제가 왕 하지 않으면 아주 큰일이 날 것 같은데 괜찮죠?"(…) 따위의 소리나 하는 천재 전술가를 의심없이 놔둘 순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냥 외교적으로 항복시킬 수 있었던 제나라를 공명심 때문에 역이기를 희생시켜가며 괜한 전쟁을 벌였고, 이겼으니 망정이지 까딱하면 동맹이 거의 없던 항우에게 엄청난 동맹국을 하나 안겨줄 수도 있는 실책이었다. 거기다 유방은 한신에게 북벌을 시켜놓고 본인은 항우를 붙잡고 늘어졌는데, 자기가 목숨 걸고 강적이랑 싸우면서 시간을 끌어주고 있는 판에 북방에서 이런 삽질을 하면서 쓸데없이 피를 흘리고 있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제나라의 민심 운운하는 구절도 수틀리면 유방을 공격하겠다는 협박이나 다름 없어 장량과 진평은 이를 반란 의사로 해석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애시당초 이건 한신이 불러온 결과니 뻔뻔하기 그지없는 소리다. 거기다 이런 소리를 하면 자신을 추천한 소하가 무슨 말을 들을 지는 생각도 안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잖아도 소하는 일을 잘 해도 욕먹을 구실이 많은데, 아무리 일을 잘해도 남들은 전쟁터에서 뺑이치는 동안 혼자 후방에서 편하게 있었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래서 소하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기 가문 사람들을 전쟁터에 보내야 했을 정도인데 그런 자신의 은인의 뒤통수를 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유방은 결국 한신을 죽이지는 않고 제왕을 줬다가 나중에 초왕으로 전봉했는데, 고제 및 대부분 개국공신들의 고향인 풍읍과 패현이 초나라 영토에 있으므로 전봉이라고는 해도 결코 좌천이라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중요한 곳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도 문제를 일으켜도 회음후로 또 격하했는데, 그이외에는 딱히 벌을 주진 않고 견제하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다다익선 운운을 하며 성질을 돋우는 것을 참기도 하고. 그나마 이 때는 한신도 조금 눈치는 생겼는지 곧장 유방을 좀 띄워주기는 했다.

다만 이후에도 꾸준히 실언하며 인간관계를 조진 것을 볼때 그제서야 눈치가 생긴게 아니라 그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일수도 있다.(...) 사실 낙하산 인사에, 아군 살해 전적에다, 가장 중요한 때 딜을 시도하는 행동 등의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부하들이 이미 입을 모아 트집거리만 잡히면 바로 한신을 죽이자고 벼르는 마당인데, 오히려 가장 화를 내야 정상인 유방이 미적지근하게 굴며 그나마 목숨이라도 보호해주려는 형세였다.

결국 기회를 엿보던 여후가 유방이 자리를 비운 사이 소하와 모의해 한신을 멋대로 살해했고, 장량진평까지 이 결정에 동의해버리니 할 말이 없어진 유방은 우환거리가 사라진 것에 기뻐하는 한편으로 상당히 씁쓸해했다고 한다. 일단 반란을 일으킨 진회와 내통했다는 납득할 만한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처벌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고는 해도 마누라까지 껴있었으니... 여후야 숙청을 원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한나라의 일등공신이자 애초에 한신을 등용하길 건의했던 소하와 유방의 참모인 장량과 진평까지 한신을 죽이는 데 동조하거나 찬성할 만큼, 애초에 한신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유방 덕에 그때까지 목이 붙어있었던 것이다. 한신은 결국 유방의 토사구팽이 아니라, 과장 좀 해서 유방이 살려주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한 것에 가깝다.

사실 유방 본인은 한신 이상으로 전쟁터에서 굴러다녔고, 항우에 비하면 백성들로부터 인망도 높은 데다가, 군대나 기타 신하들의 지지도 확고해서 전략과 전술에는 능해도 정치와 처세에는 형편없는 한신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었지만, 유방 사후 한신을 억누를 군사적 역량이 없는 여후에게 천하의 명장 한신은 껄끄러울 수밖에 없어 억지로 죽였다고 볼 수도 있다. 당장 삼진을 정벌할 때도 심복 부하라고 할 만한 인간이 주위에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괴철이 심복 역할을 했지만 결국 바람만 넣고 가버렸고 기껏 발굴한 이좌거도 고제에게 뺏겼다.

거기다 한신의 인간관계가 어지간히 안 좋은 것이 아니라서, 설령 반란을 일으켜봤자 동조할 사람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당장 한신을 따르는 인재는 거의 전무했을 뿐 아니라 해하전투 직후 고제가 한신을 포박했을 때도 휘하 병사들은 전혀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요컨대 한신의 군대는 전부 고제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한신 개인에게는 충성심이 별로 없었던 것. 거기다 이전에도 고제가 단신으로 와서 한신의 군권을 빼앗았을 때도 한신의 군대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진승상세가에선 한신이 '천하가 안정됐으니 날 삶는 것도 당연하구나!'라고 하자 유방이 "너는 억울하다고 하지 마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유능하긴 했지만 계속 주인을 물어뜯으려고 하던 미친개였으니 사실 삶겨도 억울해할 자격이 없긴 하다. 한신이 한 죽을 짓이 얼마나 많은지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구절.

그 밖의 인물로, 영포는 숙청이 두려웠다는 당위성이야 있었지만 어쨌든 그 쪽에서 먼저 반란을 일으켰으니 죽였다고 해도 이를 가지고 토사구팽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팽월 정도는 확실히 억울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팽월은 참소를 받아 죽은 거지 그 전까지는 왕노릇 하면서 잘 먹고 잘 살았다. 한신의 경우에는 진회의 반란에 동조한 혐의로 죽이긴 했지만, 여후가 한신을 죽이고 나서 댄 핑계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리고 한신과 마찬가지로 팽월의 죽음에도 여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팽월 본인의 잘못도 없지 않았다. 당장 고릉 전투에 오지 않아서 항우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오히려 유방을 죽을 뻔하게 만들었고, 왕자리를 약속하자 겨우 군사를 움직였던건 한신 뿐 아니라 팽월도 마찬가지였으니. 또한, 팽월은 제후의 의무인 중앙의 황제에게 세금과 공물을 거둬다 바치는 일을 매우 소홀히 했다. 팽월의 아랫사람들이 저 살자고 팽월에 대해 거짓 참소를 했고 마침 한신 못잖게 팽월이 꺼림칙했던 여후가 잡혀가던 팽월을 보고 얼씨구나 해서 고제에게 팽월을 죽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죽게 된 것이다.

그 외에, 유방 본인이 여후를 견제하려고 번쾌를 숙청하려 했으나, 번쾌는 '여후의 여동생'의 남편이기도하고 숙청 전에 유방이 세상을 떠난지라 번쾌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유방 사후 번쾌는 아내인 여수를 통제하지 못했고, 그 자신도 여후에게 아첨하기 위해 선을 넘는 등 예전같은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결국 여씨의 난때 여수와 그녀에게서 얻은 자식들은 전부 몰살당했다. 특히 여수는 아예 따로 구타당해서 죽었다고 한다.

계산적인 행위였지만 유방은 자신을 배반한 옹치에게도 상을 내려줬고, 옹치는 늙어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리고 소위 토사구팽으로 죽은 것은 전부 이성왕이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먼저 역심을 품었으며, 그게 아닌 소하, 조참, 주발, 번쾌, 하후영 등 한고제와 같이 거병한 고향 친구들은 고제의 의심을 받은 적은 있어도 대부분 자기 수명대로 살았고 장량, 진평 등 참모진이나 나중에 유방군에 합류한 관영, 장이, 역상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위험했던 건 여후 때거나 혹은 이후 문제나 경제 시절이다. 소하의 경우, 소하의 자리는 상국이라서 원래 의심을 받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이외에 노관이 연왕에 임명될 정도로 총애를 받았지만 정작 흉노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대응했다가 죄를 받을 것이 두려워서 흉노로 튀었다. 이후 고제한테 돌아가서 용서를 빌려고 했으나 그 전에 고제가 사망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다. 사실 튄 것도 고제보다는 여후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3.4. 삼국시대[편집]



3.4.1. 조조순욱의 예[편집]


조조순욱 또한 토사구팽의 예다. 조조는 둘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는 순욱을 나의 자방이라며 높이 평가하고, 정치뿐만 아니라 전투에 나가서도 큰 흐름을 모두 순욱과 의논했다. 희지재곽가는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을 본진의 순욱이 모두 알 수는 없기에 등용된 인물들이었으며, 정욱 등도 그가 추천하여 임관을 한 인물이다. 전략과 내정에서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가 추천하여 임관한 명사들이 조조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처럼 조조에게 충성하고 헌신한 바가 많은 그였으나......

그의 최후는 위씨춘추와 그를 따른 배송지 및 후한서에서의 기록과 진수의 삼국지 본전의 기록이 충돌하는데 위씨춘추의 기록에 따르면 명백한 토사구팽이고, 진수의 삼국지 본전에 따라도 읽기에 따라서 좌천(토사구팽)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남아 있다. 자세한 것은 순욱 문서의 토사구팽 부분을 참고하자. 이렇듯 두 개의 역사서의 내용이 충돌하는데 어느 쪽의 기록이 맞는지는 입증할 근거가 없기에 순욱의 죽음에 조조가 개입했다는 것은 사실상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유명하며 학계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내용은 위진남북조 시기에 쓰여진 역사서인 위씨춘추의 내용인데 이에 따르면 순욱은 위공의 지위를 욕심낸 조조와 대립하면서 끝내 토사구팽 선언을 듣고 자결 혹은 화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때 나오는 것이 그 유명한 빈 도시락, 공찬합 고사다.

순욱 사후 조조는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는데, 전형적인 보여주기용 악어의 눈물인지, 필요에 따라 내치기는 했어도 긴 세월을 같이 한 부하의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조가 무자비하고 냉혹한 성격으로 악명을 떨친 것도 사실이지만, 역으로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면모도 자주 드러내던 인물이었다. 그 감정적이란게 좋은 쪽으로만 나온 게 아니라서 문제지.


3.5. 기타[편집]


  • 명 태조 주원장은 말 그대로 피비린내나는 토사구팽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냥 실무자 말고는 말 그대로 싹쓸이를 했는데 심지어 1년에 3만 명의 권신들과 그 일가족까지 죽여버리기도 했다. 그 덕택에 넷째아들 주체가 쉽게 황위를 계승하여 전성기를 열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주원장은 장손인 주윤문를 위해 한 짓이었으나[4] 정작 혜택을 본 이는 사남 주체였다. 주원장이 공신들을 다 숙청해버리는 바람에 주체가 반란을 일으켰어도 이를 누를 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 그러니까 토사구팽의 원탑은 명 태조다.

  •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토사구팽을 보여준 인물은 북송 태조 조광윤과 후한 세조 광무제다.
    • 조광윤은 후주로부터 선양 받을 때 술에 취해 진중에서 자고 있는 동안 자기 동생인 조광의가 장군들을 선동해서 황제의 옷을 걸치게 하고 바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송을 세웠다...고 기록은 전한다. 아무도 안 믿지만 아무튼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황제의 위에 오른 후 개국공신들을 불러서 술판을 벌이던 도중 술 한잔 하다가 갑자기 한숨을 쉬면서 나는 술먹고 뻗어있는거 너희들이 황제옷을 입혀줘서 이렇게 황제도 됐다만, 너희들은 또 너희 부하한테 어디서 용포 하나 구해서 걸칠 수도 있겠구나. 너희들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네 부하들까지 사고 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 않냐.란 드립을 쳤다. 공신들이 술이 확깨서 '아니 폐하 어째서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까.' 라며 바싹 엎드리니까 조광윤은 계속 술을 빨면서 인생 뭐 있어? 어차피 황제 할 생각 없으면 고향 내려가서 명예직이나 하며 부유하게 살다가 애들이나 키우면서 편안하게 죽으면 되는거지. 니들도 그렇게 할래?라고 결정타를 날렸다. 그 자리에서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물론 문서상 약속은 아니었지만 다음 날, 조광윤 앞에 나온 공신들은 자발적으로 모든 실권을 내놓고 고향 내려가서 명예직이나 하며 부유하게 살다가 애들이나 키우면서 편안하게 살다가 갔다(…). 말기부터 오대십국시대 내내 중국대륙을 혼돈으로 몰아넣은 절도사들의 병권을 너무나 간단하게 수거한 사건이라서 과장이 섞인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어쨌든 북송의 개국공신들을 살해하지 않고, 아무 조건도 없이 조용히 집에 보내준 것은 분명 사실이다. 숙청은 맞지만 피를 보지 않은 숙청이라고 할까? 물론 그 과정에서 당연히 보상을 해야 하므로 공신들에게 막대한 부를 나눠줘 초반에 경제가 좀 흔들리긴 했지만, 반란을 일으켜서 진압하려 할 때 쓸 군자금과 비교해보면 싸게 먹힌거다. 이 조광윤의 일화를 가리켜 명예퇴직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라고 한다. '술자리에서 병권을 놓게 하다'는 뜻. 사실 토사구팽과 정반대의 의미로 쓰이지만, 배주석병권 문서가 없으니 여기서 서술.
    • 광무제의 경우에는 광무제는 공손술을 토벌한 뒤 왕망이 망쳐놓은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의 일부 전쟁을 제외하면 거의 전쟁을 벌이지 않으려 했고, 군비도 꽤 줄였다. 이 과정에서 광무제 휘하의 명장들인 운태 28장들은 문관으로서의 능력도 출중하던 등우 등을 비롯한 몇 명만 빼고는 다들 자진해서 은퇴했고, 광무제도 이들에게 국가 원로로서의 대우는 해줬지만 조광윤처럼 크게 파격적인 대우는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시기에는 광무제의 숙부뻘 되는 이까지 왕에서 공으로 대우가 낮춰졌는데, 대단한 건 아무도 반항하지 않았다는 것. 물론 통일 전에 일부 반항하던 자들은 다 죽었지만.(…) 후한 2대 황제인 한명제 때에는 간접적인 토사구팽이 있었는데, 개국공신을 기리는 영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장인을 일부러 빼버렸다. 공을 세운 정도에서 절대 꿀리지 않을만큼 큰 공신이었으며 황제의 장인이었음에도 마황후 본인이 스스로 앞장서 외척을 막고자 일부러 빼버린 것. 황제의 장인까지 찬밥신세가 되어버리니 다른 공신들도 알아서 길 수밖에 없었고 남은 자들 중에서도 낙향한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광무제 때 별 다른 일 없이 자진 사퇴한 자들이 많았던 것은 광무제 본인의 재능이 너무 출중해서라고 한다. 실제로 곤양대전에서 단 1만명의 병력으로 43만의 신나라 대군을 격파한 바 있다.

  • 현대 중국에서도 토사구팽으로 여겨지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군사적으로 제일 유능했던 린뱌오펑더화이마오쩌둥에 의해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린뱌오는 권력문제로 마오쩌둥과 반목하여 앙심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여 비행기를 타고 도망가던 중 비행기가 추락해서 일가와 함께 몰살당했고,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을 비판했다가 그의 분노를 사 권력을 모두 빼앗긴 뒤 홍위병에게 구타당하고 차디찬 감방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옥사했다. 하지만 마오는 자신의 아내를 비롯한 4인방은 린뱌오나 펑더화이처럼 스스로는 자립할 능력이 없어서 철저히 마오의 위상과 권력만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었고, 결국 4인방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권력을 쥐게 되면서 중국을 말아먹었다. 다만 단순 숙청이 아니라 조리돌림까지 당하는 굴욕을 받은 평더화이(팽덕회)의 경우엔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마오쩌둥의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고전소설 수호전에서는 양산박의 호걸들이 조정에 귀순하자, 조정에서는 그들을 역적들의 토벌에 투입하고는 반란이 모두 진압되자 조정에 복귀한 양산박 호걸들을 죽여버린다. 하지만 정말로 양산박의 호걸들을 몰살하거나 한 건 아니고 두목인 송강과 노준의 등 핵심인물만 죽였고 그때까지 전사하지 않았던 나머지들은 대부분 낙향하거나 몇몇은 군문에 들어갔고 자연사 또는 병사하였다. 이규는 특이하게도 장래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한 송강이 자신이 죽기 전에 직접 죽였다.


4. 한국사에서[편집]


한국사에서도 난세 끝에 혼란을 정리하고 평화기를 이룩한 경우, 으레 그 직후에는 공신들을 잔혹하게 숙청하는 사례가 여럿 있었다.

삼국통일전쟁 끝에 삼국시대를 종식시킨 문무왕 사후 신문왕 김정명은 교과서적인 숙청왕으로, 즉위 원년부터 백전노장 공신들에게 잔혹한 피바람이 불었고 그리 길다고 보기 힘든 12년의 집권기간 동안 귀족 세력의 약화와 왕권 강화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비록 녹읍 부활 등으로 먼 훗날 신문왕의 정책은 다시 뒤집혀버리긴 하지만, 난세 종결 이후 신문왕이 판을 깔아둔 덕에 통일신라가 몇백년은 갈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의 경우 이례적으로 왕건은 공신 정리를 하지 않았고 상당히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결국 2대 혜종부터 4대 광종에 이르기까지 호족 파벌별로 피터지는 내분을 겪었다. 2대 혜종 왕무는 왕건의 장남으로 수많은 전투에 종군한 무골이었으나 외가인 나주 오씨 집안은 다른 형제들의 외가에 비해 다소 한미한 편이었다. 왕건이 후원자랍시고 붙여준 박술희 역시 개국공신일지언정 탄탄한 기반이 있는 호족세력은 아니었다. 혜종은 즉위한 지 불과 2년 만에 병사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혜종 사후 친자인 흥화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는 이복동생인 정종 왕요에게 돌아갔으며 이후 4대 광종대에 흥화군이 처형된 것을 보아 병사가 아니라 독살 내지는 암살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4대 광종이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 의심하는 공포 정치를 시행하면서 무자비한 숙청을 했는데 이때 개국 초 수백명에 이르던 호족들이 불과 수십여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얼마만큼의 호족이 죽었는지는 기록의 부실로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지만,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태조를 모시던 구신이 4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발언을 한 대목을 보면(자연사한 이들도 있을 테지만) 많은 호족들이 광종에게 처형당했고 숙청 과정에서 호족들이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뭐 시기가 좀 늦은 만큼 이걸 '토사구팽'으로 봐야 할지는 조금 미묘하긴 하지만. 그냥 팽 비록 이후에 경종과 성종을 거치며 도로아미타불이 되지만 이미 호족은 타격을 입은 뒤였고, 이후로는 중앙의 귀족인 문벌귀족으로 대체된다.

조선의 3대 임금 이방원은 피도 눈물도 없는 토사구팽으로 유명하다. 다만, 주원장처럼 공신이라고 모조리 죽인 건 아니며 최측근이었던 이숙번도 안하무인으로 횡포를 부리기까지 했지만 귀양 수준으로 끝냈다. 특히나 연좌하지 않고 끝냈다. 반대로 명나라에서는 공신 숙청에 연좌제까지 끼얹었다. 태종 이방원의 토사구팽이 유명한 이유는, 자기가 왕이 되고 나니깐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였던 마누라마저 내치다시피 하면서 잠저 시절부터 오랫동안 자신의 정치적 활동과 집권을 도와온 처남들을 자기 손으로 직접 작살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방원의 축첩 때문에 부부관계가 나빴던 것도 있다. 다만 이 축첩 역시 처가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어느 정도 있다. 게다가 이 숙청은 최소한 1차 왕자의 난 때부터 이미 예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더 무서운 점이다. 이미 욕심있고 목소리 큰 여자(신덕왕후)와 그 여자를 등에 업은 권신(정도전) 및 외척(심효생)을 혐오하고 있었을텐데도, 정작 자기 마누라(욕심있고 목소리 큰 여자)와 처남(차기 외척)들을 자기 야망을 달성하는데 이용해먹은 후 통수를 갈겨버린 격이니까. 어찌보면 대단히 반인륜적인 행보로 보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후계자인 세종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통치 여건이 마련되었고 그 세종이 엄청난 명군이 되었다. 참고로 태종은 그러고도 안심하지 못했는지 세종이 즉위하자 세종의 처가까지 박살낸다. 태종은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었지만 한동안 실권은 본인이 쥐고 있었다. 다만 이쪽은 당시 좌의정이자 심온과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였던 박은이 많이 주도했다. 명확하게 밝혀진 사건이 아니다 보니 박은이 심온을 무고했다는 추측도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정계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이승만 같은 경우에는 김성수, 조병옥, 장면 등과 이범석 같은 족청계 정치인들을 토사구팽한 적이 있다. 또한 자유당의 이기붕이정재를 토사구팽시킨 일이 가장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경우라면 역시 박정희. 집권 후에 중앙정보부장을 하면서 무소부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김종필, 김형욱, 이후락 등을 내쳤다.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자 박정희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은 사실상 유배를 당하며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래도 김종필이후락대한민국 국회의원도 지내면서 은퇴 후에 그럭저럭 살았고, 특히 김종필은 3김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비록 대통령은 못 해봤지만 실세 총리직까지 역임했고, 은퇴 후에도 정치계의 원로로 여생을 살았다. 반면 김형욱은 배신감을 느끼고 해외로 도피하여 코리아 게이트에서 반정권적 활동을 하다가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되었다. 국정원 진실위의 조사에 따르면 중앙정보부가 살해했다고 추정된다고. 나중에 김재규박정희를 배신하고 살해한 이유 중에도 전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최후를 보고 회의를 느껴서 그랬다는 추측이 있다.

전두환 또한 통칭 '3許'라 불리며 세를 떨치던 허문도, 허삼수, 허화평 가운데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었던 허문도는 곁에 두었지만, 같은 육사 출신인 허삼수와 허화평은 내쳤다. 이는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과 두 사람이 갈등을 빚자 김재익의 손을 들어준 것.

김영삼도 토사구팽으로 유명했다. 김영삼이 대통령하던 시절에 국회의장까지 역임한 7선 의원인 김재순이 그 대상. 김재순 의원은 3공화국 시절 유정회 출신으로 이후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도 민정당 소속으로 정치 경력을 이어왔으나, 특유의 친화력으로 김영삼을 비롯한 많은 야당 인사들과도 교분이 있었고 이후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들어온 김영삼을 지원하여 그가 대통령이 되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이후 김영삼이 자신을 비롯한 구 민정계를 숙청하자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기고 정계 은퇴 후 하와이로 이민했다. 김재순 덕분에 토사구팽은 한 시대를 풍미하는 경구가 되었다. 김재순은 월간지 <샘터>의 창립자이며 타계 직전까지 샘터 맨 뒤페이지에 칼럼을 썼다. 군대에서는 <좋은 생각>과 함께 비치된 월간지이므로 적어도 군필자들은 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대통령 당선 직전까지는 하나회, 민정계의 손을 빌렸다가 대통령 당선 이후 하나회를 숙청한 것도 토사구팽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김영삼은 자신의 당선을 도와줬던 김종필과 일부 민정계, 공화계 인사들도 토사구팽 시켰다.

그 외에도 노무현정대철, 추미애 등을 토사구팽 시켰고, 이명박 역시 정두언, 남경필 등을 토사구팽 시킨 적이 있으며 박근혜김영한, 유승민, 진영, 노태강 등을 토사구팽 시켰다. 문재인도 마찬가지로 황수경, 김광두, 신현수, 조남관 등을 토사구팽 시켰다, 윤석열도 마찬가지로 이준석을 토사구팽 시켰다.

2018년 시행된 삼성그룹 GSAT에서 토사구팽이 출제되었다. 덕분에 시험 직후 실시간 인기검색어에 등장했다. 뜻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수험생들이 토끼와 뱀(...)인 것으로 혼동하기도 했다.#


5. 원인[편집]


언급된 사례들을 보면 대충 감이 오겠지만, 역사상 존재했던 군주들의 토사구팽은 대다수가 전제군주제였던 당대 국가들의 특성상 왕권을 위협하고 나라를 뒤흔들 권신의 등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전제군주제라고 해서 언제나 왕이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의 상당수를 명망 높은 신하들이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이들은 좋게 보면 나라를 위해 많은 업적과 공을 남긴 사람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군주의 권력에 잠재적인 위험 요소이기도 하며, 심하면 군주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아예 실세로 들어앉을 위험성까지 있다. 창업군주 본인이야 워낙 쌓아놓은 카리스마와 권력이 막강해서 본인 대에서 바지사장이 될 가능성은 낮지만, 후대에서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당장 한고제가 죽자 여후에 의해 왕조가 여씨로 바뀔 뻔했고, 조위는 카리스마와 정치력을 갖춘 선대 군주들이 요절하고 능력 없는 후세대가 자리에 앉자 곧바로 실권을 빼앗기고 왕조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그랬기 때문에 정치적 안목이 있는 군주들은 공이 있는 신하들을 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끝없이 경계했으며, 여러 방법을 통해 이들을 견제하고 조정에서의 권력 균형을 끊임없이 맞추려 시도하였다.

특히 유명한 것은 새 왕조를 개창한 창업군주들의 공신 숙청 사례인데, 당연하지만 새 왕조를 개창하는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다양한 동지들의 보조하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니만큼, 새 왕조의 공신들은 여느 때의 권신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위상을 지니게 된다. 특히 한고제나 명태조 주원장처럼 출신이 비천하여 신하들에게 얕보이기 쉬운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군주라면 더더욱 위협적일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역사상 어느 군주와 비교해도 출신이 비천했던 주원장의 경우 토사구팽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반면 한국사에서는 중국과 달리 창업군주에 의해 공신 숙청이 이루어진 사례는 의외로 없다. 고려 태조 왕건도, 조선 태조 이성계도 스스로 공신 숙청을 감행한 사례는 없으며, 후대의 광종이나 태종 대에서야 공신 숙청이 이루어졌다. 신라 역시 사실상의 통일신라 건국자인 태종 무열왕이나 문무왕이 아닌 신문왕에 의해 숙청이 이루어졌다.


6. 피하는 법[편집]


공훈을 많이 세운 사람이 겸손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토사구팽을 반드시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행동하면 그건 그거대로 의심을 받는다. 반란 전의 기초공사 차원에서 민심을 얻기 위해 미리 이미지 관리에 신경 쓰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소하 같은 경우는 일부러 진상짓을 하고 소인배 코스프레를 해서 의심을 풀기도 했다. 아니면 범려처럼 싹 정리하고 은둔하는 방법도 있지만, 위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주원장의 경우,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선비들조차 불충이라는 이유로 색출해서 죽여버렸기 때문에 은둔이라는 최후의 방법조차 불가능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진나라명장 왕전초나라를 공격하면서 일부러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면 넓은 논밭과 화려한 저택을 달라고 계속 졸라댔는데, 의심이 많은 진시황의 성격을 간파하여 "그저 재물과 노후의 편안한 생활에만 욕심을 부리고 정치에 큰 뜻은 없는 늙은이"로 보이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당시 왕전의 작전은 장기전이었는데, 소모하는 시간도 길고 요구되는 병력도 많은 터라 위화도 회군 마냥 쿠데타가 일어날까봐 정작 자기 군주인 진시황이 견제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으로, 실제로 성공하여 작전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었고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또한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창립한 일등공신 소하도 승상이 직위임에도 청렴결백하게 사치를 부리지 않는 생활을 했으나, 유방은 거대한 권한을 가졌던 소하를 수시로 의심하면서도 비위를 살살 맞춰주려 노력했다. 유방은 오히려 한신은 은근히 만만하게 본 반면 소하의 변절은 죽기 직전까지 두려워했다. 소하는 4년동안 소년병을 동원하고 노인에게까지 수레를 끌게 시키면서 후유증이 3대에 이를 정도로 자원을 뽑아냈는데, 아무리 항우의 만행이 있더라도 이쯤 되면 소하에게 불만이 향할만한데도 오히려 인망이 하늘을 찔렀다. 모르긴 몰라도 유방이 기겁할 만큼 선동술에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 소하가 의심받았던 것은 결국 소하가 한나라의 행정 총책임자였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소하가 기침 한번만 해도 행정이 올스톱이 되고 반대로 소하가 맘만 먹으면 쥐어짜서라도 유방에게 필요한 것을 보급할 수 있었다. 괜히 유방이 고집을 부려서라도 공신 1순위로 소하를 꼽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안해진 소하는 주위사람들의 충고로 가족 중 젊은 남자를 죄다 전쟁터에 보내는 등 온갖 노력 끝에 유방을 안심시킬 수 있었고, 통일 후에도 어느 정도는 사치를 부려야 유방의 의심을 안 산다고 하자 그 말에 따른다. 나중에 유방이 죽기 직전에 소하를 의심하여 감옥에 잠깐 가두는데, 주변 사람이 소하의 결백을 간언하자 유방은 소하를 가둔 걸 후회하고 풀어준다.

반대로 한신은 천하통일 후 찌질이 시절에 인상적이었던 사람들을 불러 자신을 모욕한 사람은 꾸짖은 뒤 풀어주고, 밥을 나누어준 노파에겐 보답을 내렸는데, 유방과 여후가 '저놈이 갑자기 멋진 짓으로 인기를 끌려 하는 게 수상하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저러는 거 아냐?'하고 의심했다는 말이 있다. 보다시피 소하와 한신은 어그로도, 처신도 급수가 다르다. 소하는 유방이 전쟁터에서 항우와 맞서 싸우느라 밖에 나가 있는 동안 유방이 필요한 것을 전부 보내줬고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어떤 처신도 잘 해낸 덕에 제국의 충신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한신은 그렇잖아도 온갖 어그로를 다 끈데다가 의심받을 짓만 골라서 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저서 '로마사 논고' 1권 제 29장과 30장에서 토사구팽의 구체적 사례와 원인, 대상자가 이를 피하는 방법을 다뤄 일종의 '토사구팽 가이드'를 썼다. 군주정의 경우 군주의 시기심과 역모에 대한 불안감, 공화정의 경우 쿠데타에 대한 우려가 토사구팽의 원인이라고 보았고 이런 토사구팽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정쩡하게 굴지 말고 공을 세우자마자 권력을 내려놓고 군주에게 엎드리거나, 아니면 아예 군주가 손대지 못하도록 권신이 되는 것이 좋다고 권하고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재물욕을 보이는 게 오히려 꼬투리 잡힐 수도 있다. 어설프게 왕전을 흉내내려 한 난릉왕이 좋은 예시. 다만 이는 단순히 재물욕만 보이려는 게 아니고, 계속된 전투에 병사들 사기도 떨어지고 비축된 물량도 떨어져 그걸 확보하기 위함도 있었다. 다만 문제는 난릉왕의 혈통이 황족이라는 것까지 포함하다보니 당시 황제였던 고위가 위협을 느꼈던 것.

결론은, 정답은 없다... 주군의 성격에 따라 처리법은 그때그때 다른 것이며, 필요할 땐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아예 군주의 소원대로(?) 반란을 일으켜주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 성공하는 경우는 더 말할 것 없고, 실패하더라도 반역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니, 토사구팽은 아니다.

유능한 모습을 최대한 숨기고 공이 있어도 주군의 덕분이라며 위상을 살려주는 것도 토사구팽 자체를 피하는 좋은 방법이라 하겠지만 군주가 강직한 성품이라면 그게 오히려 거슬릴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무능한 신하, 아첨꾼, 간신 등으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처세한 신하들은 당대 군주들 생전에는 무사했지만 차기 군주들의 눈에 나서 뒷끝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후한의 등통, 청나라의 화신 등이 그 예시.

다만 토사구팽을 할 확률이 낮은 때가 있긴 하다. 세조처럼 탈법적으로 집권한 경우엔 그 기반이 불안정하다. 탈법적인 방식으로 집권했어도 태종처럼 나름의 명분과 기반이 있다면 모를까 세조같은 경우면 또 다르다. 태종은 조선 건국에도 지대한 공이 있었고 또, 세자가 아무 공도 없는 막내라 정통성 면에서 매우 떨어졌던 데다가 세자를 보좌하던 정도전은 나이많은 왕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병 혁파를 내세웠지만 이게 지나쳐서 정씨가 이씨를 내몰려고 든다는 말을 듣게 되고 결국 왕족들이 태조가 아니라 태종의 편을 들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세조의 경우 단종은 문종과 더불어 정통성 면에서는 매우 탄탄했고 보좌하는 신하들도 세종과 문종을 거쳤고 직접 선왕으로부터 단종을 부탁받은 고명대신이므로 명분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이 경우에는 얼마나 튀는 행동을 하지 않느냐에 달렸다고 보면 된다. 단 이것도 그 지도자가 자신을 지도자로 만들어준 공신들을 대체할 수 있는 기반이 없을 때를 전제한다. 그 세조도 한명회, 신숙주 등의 구공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이, 구성군, 강순 등의 신공신을 키워 견제하려고 한 바 있다.


7. 긍정적 측면[편집]


토사구팽은 비정하고 권력욕에 찌든 군주가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의심하고 무자비하게 제거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긍정적이고 바른 결과를 맞이하기도 한다. 한신을 예시로, 해당 문서에서도 적혀있듯이, 한신은 따지고 보면 한고제에게 어그로를 대놓고 여러 번이나 끌었던 적이 있는지라 한고제 입장에선 한신은 충신이 아닌, 언젠가 반란을 일으킬 위험분자일 뿐이었으며,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을 움켜쥔 개국공신이 나라를 도로 갈아엎은 경우도 많았다. 특히 세조는 공신들을 많이 봐줬는데, 수령의 부패와 백성들의 고통을 막는데 정말 신경썼던 세조지만 정작 공신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당연히 가장 큰 부패를 저지른 건 공신들이었고 결과적으로 전부 도로아미타불.

하지만, 다르게 보면 세조 자신부터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인물이니, 그 밑에 모인 이들도 야망이 큰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자신의 장악력만 과신하여 후대를 살피지 않은 세조의 과오이며, 비슷한 과정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은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결국 세조의 능력 부족도 한몫했다. 위에도 잘 설명되어 있듯이 비슷한 과정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은 조선의 왕 그 누구보다도 토사구팽에 제일 열심이었던 사람이었다.[5] 그러니 당연히 자기 치세때도 세조같은 꼴 안보고 후대에도 아들인 세종, 손자 문종이 원로 공신들이나 외척의 영향없이 자기 뜻대로 정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한고제나 당태종, 명태조(주원장) 같은 경우 혼란기를 수습하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인물들을 그대로 두기는 힘들었다.

한신의 행적을 보면 야망이 없어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후세의 시각에서나 그런 거다. 공적 하나만 믿고 내가 죄가 없는데 뭐 어쩌겠어? 하는 마인드로 몸 안사리고 지 꼴리는대로 하니 당사자들에게서 안 사도 될 의심을 사서 위험한 놈으로 찍히고 죽었던 것이다. 반대로 소하는 열심히 꼬리 흔들면서 '안 물어요 주인님' 하면서 어필해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한신은 미친 개마냥 동네방네 다 물어뜯고 다녔으니 팽 당하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왕이 사자를 보낸 상황에서 뒤통수를 치거나 왕한테 딜을 거는 등, 사실상 왕의 명령을 씹고 권위를 무시해대면서 어그로를 잔뜩 끌었는데도 내가 뭐 반란 일으킬 것도 아니고 세운 공이 얼만데 이 정도는 괜찮지? 같은 생각이라도 있었는지 눈새짓만 골라서 했다. 그나마 유방이 봐줘서 제 명보다 오래 살았지[6] 어지간해서는 훨씬 빨리 죽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숙청은 자주 있었지만 실제 이들 모두가 토사구팽에 해당된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 달리 보면 오히려 토사구팽에 해당되지 않는다.

일단 토사구팽이란 성어 자체를 보면 토사구팽은 이용가치 상실에 있다. 일단 토사구팽의 유래가 되는 일화를 봐도 문종은 병권도 없는 일개 책사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용가치 상실이 맞다. 그런데 이를 다른 경우에 적용시키려면 의문점이 생긴다.

1. 대부분의 경우, 왕조들은 천하를 얻었음에도 당분간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북방 유목민족들과의 전쟁도 있고 내부의 반란 같은 것도 비일비재. 즉 무장들이 이용가치를 잃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숙청 작업은 나름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용가치 상실"이라는 전제가 객관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2. 군주들이 과연 "얘는 이용가치가 없으니 버리자"란 생각으로 진행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는 것. 크게 두 가지 경우인데, 공을 세운 부하들이 교만해져서 불법을 행사했거나, 또는 군주들이 부하들에게 위협을 느껴서이다. 즉 개가 집에서 기르는 닭을 물거나, 아니면 주인보고 으르렁거리며 심지어 덤비기까지 한 경우이다. 이건 사냥감이 없어서 개를 버린 것과는 분명 다른 경우다. 이를 제일 잘 설명하는 일례가 한신. 해당 문서 보면 이 놈이 무슨 짓으로 유방의 어그로를 끌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충성심도 별로 없이 자기 이익만 챙기는 놈이 분봉왕으로 있으니.
군주들이 위협을 느끼는 대상은 대부분이 강력한 권력을, 특히 병권을 손에 쥐고 있어 위험한 존재가 맞다. 자꾸 반란을 일으키라고 한신을 꼬드겼던 괴철을 유방이 굳이 죽이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상대는 병권도 없는 책사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유방 시기에 경포 등 반란을 일으킨 왕들도 많았다.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란 얘기. 설사 당대에서 황제에게 충성한다 해도 2, 3대까지 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중앙집권이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을 파악하면 분봉왕같은 불안정한 위치는 피해가는 게 현명한 처사다. 쉽게 설명하자면, 제 아무리 군신 관계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인 이상 온전히 사냥꾼과 사냥개의 위치를 지킬 수 없으며 자신이 세운 나라에 위험이 된다면 일단 제거하는 것이 적어도 고대, 전근대 시절 군주로서는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이다. 특히 한은 춘추전국시대 말기의 혼란을 간신히 잠재우고 안정된 국가를 세우고 있는데 한신, 팽월, 영포같은 강력한 분봉왕들이 권력을 휘두른다면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될 가능성도 있는 만큼, 꼭 한고제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적절한 교통정리는 반드시 필요했다. 이는 이후 혼란의 시대를 정리한 자들의 공통점이기도 하고. 개는 아무리 그 항목에 "한번 아드레날린 돌면 주인이고 뭐고 없다"는 식으로 써있어도 사육자가 주인으로서의 필요사항을 지키는 한 개 역시 사역당하는 가축으로서의 필요 사항을 지킨다. 그렇지 않은 개체는 가축으로 알맞지 못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강제 도태된다.

또한 토사구팽이 너무 강조되다보니 이것을 일종의 클리셰나 필연적인 결과 등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건 황제의 성정에 따라 다르다. 확실히 원조격인 구천, 그리고 끝판왕인 홍무제에는 해당될 수도 있지만, 모든 군주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 한나라만 봐도, 한신에 맞먹는 군공을 세운 조참, 관영은 숙청당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조참은 아예 무관은 그만두고 소하 뒤를 이어 승상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고, 관영은 거의 죽을 때까지 대장군 자리를 꿰차고 병권의 일부도 계속 쥐고 있었을 정도로 한이 통일을 한 이후에도 군사적인 일은 고제가 친정한 경우를 제외하면 도맡아 했다. 관영에몽 한신, 팽월처럼 숙청 당한 공신들의 최후가 비극적인 것처럼 부각되어서 그렇지, 전한을 세운 대부분 공신들은 오히려 무난하게 보냈다. 사실 한신과 팽월은 원래 한고제가 거병했을 때부터 함께 했던 창업공신도 아닌 데다가 분봉왕 자리까지 차지했으니 숙청 1순위가 될 게 뻔했다. 그나마 한신은 미운 정이라도 있어서 회음후 자리는 보전했지만 고제와 별로 친하지도 않았으면서 의심받을 구석은 많았던 팽월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반면 관영같은 이는 창업공신은 아니었지만 분봉왕도 아니었고 철저하게 고제의 신하로서 분수를 지켰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군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아무 탈이 없었다. 이는 명을 제외한 다른 왕조들에도 거의 해당되는 케이스로, 당사자의 처신은 생각 안하고 군주들을 '공을 많이 세운 신하들을 꺼리고(이른바 공고진주) 무조건 숙청하는 냉혈한'으로 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인 것이다.

역사에서도 토사구팽을 안했다가 망한 나라도 있다. 가령 진나라의 경우 진문공 사후 그의 즉위를 도왔던 공신들을 제어하는데 실패해 결국 그 공신들이 나중에 나라를 셋으로 갈라먹었다. 다만 이쪽은 왕위에 오른지 몇 년 안돼서 죽은 경우라 어쩔 수 없었고 또, 원래 진나라가 다수의 주요 가문들의 연합정권적 성향도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8. 여담[편집]



  • 더 지니어스:룰 브레이커에서는 조유영이 이은결을, 임윤선이 임요환을 상대로 토사구팽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이은결의 결정적인 도움을 폄하하며 대찬 배신을 때린 조유영은 당당히 혐라인의 수장이 되었고, 자기가 반강제로 끌어들여 놓고 끝까지 부려먹은 임요환을 데스매치 상대로 지명하는 임윤선의 행태는 많은 시청자들의 반감을 샀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 게임 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케이스로는 한때 부사장까지 갔던 코지마 히데오코나미에게 토사구팽을 당한 사건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들을 참고.

  • 영어권에서 토사구팽과 가장 비슷한 단어는 'Plutoed'. 행성 직위를 박탈당한 비운의 왜행성인 명왕성에서 따온 단어다. 미국 학계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억지로 행성 직위를 주었다가 결국 퇴출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만 이 쪽은 배신 뿐 아니라 명성을 갑작스레 잃은 경우까지 포함하는 좀 더 광범위한 단어다. 더 일반적인 관용어로는 'squeezed orange'가 있다. 시큼달콤한 즙을 다 짜내고 난 오렌지는 쓸모가 없으니 버리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 보신탕의 야만성에 대한 논쟁이 뜨거운 감자였던 90년도에 나온 어린이 교육용 서적중에는 개를 '삶는다'라는 표현을 넣는 게 껄끄러웠는지, 개를 팔아버린다는 표현으로 순화시킨 책도 있었다.

  • 이솝 우화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말을 타고 싸우던 병사가 전쟁이 끝나니 말을 군마처럼 키우지 않고 밭을 갈게 하고 나귀가 먹는 먹이만 주면서 나귀처럼 키우다가, 다시 전쟁이 생겨 그 말을 타고 가다 나귀처럼 변해버린 말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다는 내용.


  • 제주어로는 토소구팽이라고 한다.

  • 2013년 캐나다에서 반려견과 함께 여행하다 오지에 조난된 한 탐험가가 야생곰과 싸워 자신을 구해준 개를 죽여 잡아먹는 '서양판 토사구팽' 사건이 일어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


9. 사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토사구팽/사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관련 문서[편집]


[1]초한지》에서 마침내 한신과 동맹을 맺으려고 항우가 그나마 초에 남아있던 몇 안된 재사 무섭을 한신에게 보냈을 때 그가 한신에게 한 말이라는 일화가 있는 걸 감안하면 확실히 오래 전에 있었던 우화이다.[2] 계포일락이라는 말로 유명한 계포는 이렇게 수배령에서 해제된 뒤 한나라에 출사해서 고관대작까지 오르기도 하였다.[3] 사실 관고의 주인인 장오는 유방의 사위이기도 했고 원래 유방은 선비를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아서 생긴 문제였다. 즉, 고제는 장오를 구박하듯이(물론 진심은 아니었겠지만) 대하였고 이를 유교식 충성심을 가진 관고의 눈에 매우 티껍게 보였다는 것. 또한 장오에게 있어서 고제는 목숨을 위협받아 도망친 장씨 일가를 받아주고 딸과 결혼까지 시켜준 장인이자 은인이기도 해서 조금 구박받아도 크게 나설 수는 없었지만 공적인 것을 우선시하게 되면 신하에게 모욕을 주는 장면이 결코 보기좋을 리가 없었다.[4] 물론 원래는 장남이자 태자였던 주표를 위한 것이었으나 주표는 일찍 죽었다.[5] 다만 의외로 죽인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삭탈관직 후 귀양 정도로 끝났다. 태종은 실제로 정치적 살인을 적게 한 편이다. 다만 정치적 살인을 한 대상들이 대개 형제나 사돈이라 킬방원의 이미지가 박혔을 뿐.[6] 사기적인 유방의 용인술을 생각해보면 야망이 있어서 저러는 게 아니라 그냥 눈새라는 걸 알아봐서 봐줬을지도. 사실 그게 아니면 누가 봐도 반란분자인 한신의 눈새짓을 적당히 봐준 이유가 설명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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