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닉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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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제36대 부통령을 역임했다."I'm not a crook!"[2]
-"난 사기꾼이 아닙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등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베트남전 철수, 중공과의 데탕트,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닉슨 쇼크), 오일쇼크 등의 공과를 남겼으며[3] , 재선 과정에서 발생한 워터게이트 사건 으로 인해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임기 중 스스로 하야했고, 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가 뒤를 이어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2. 약력[편집]
- 1947.1. 제80대 하원의원 (캘리포니아 제12선거구 / 공화당)
- 1949.1. 제81대 하원의원 (캘리포니아 제12선거구 / 공화당)
- 1951. 제81대 상원의원 (캘리포니아 제3부 / 공화당)
- 1951.1. 제82대 상원의원 (캘리포니아 제3부 / 공화당)
- 1952. 제36대 부통령 선거 후보 (공화당)
- 1953.1. 제36대 미국 부통령
- 1960. 제35대 미국 대통령 후보 (공화당 / 낙선, 2위)
- 1962. 제32대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 (공화당 / 낙선, 2위)
- 1969.1. 제37대 미국 대통령
3. 생애[편집]
3.1. 성장[편집]
캘리포니아의 별로 넉넉치 못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했다.[4]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은 수재였으나 돈이 없어 포기하고, 집 근처의 휘티어 칼리지(Whittier College)에 입학했다. 휘티어 칼리지에서도 발군의 성적을 보여 전액장학금을 받고 듀크 대학교 로스쿨로 갔다. 졸업 후 FBI에서 일하다가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변호사 시험을 보고 변호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미 해군 장교로 지원, 전투 병과인 항해 병과 장교로 임관했지만, 일명 솔로몬 제도의 햄버거 가게라는 항공대 소속 창고 등 비전투 부대에서만 복무했고, 소령으로 전역했다. 닉슨 스스로는 전투에만 참가하지 않았지 정당하게 군 복무를 마쳤지만, PT-109 격침 사건으로 인해서 전쟁 영웅으로 인식된 케네디에 비해 창고 근무를 했다는 점에서 이미지가 밀린 건 사실이었다. 오죽하면 "저도 군생활을 했습니다."가 닉슨의 선거 모토. 실제로 케네디가 은근히 "내가 어뢰정 타고 사선을 넘는 동안 쟤는 보급창에서 꿀 빨고 있었다."는 식의 언플을 했다. 그런데 케네디가 영웅이 된 것은 침몰 후에 보였다는 리더십 때문이다. 야간에 조는 바람에 일본 해군 구축함 아마기리함에게 들이받혀 어뢰정과 승조원 일부를 잃은 것 자체는 그의 빽과 선전효과를 노려 해군이 좋게 봐줘서 넘어간 것이다.
해군 소령 시절의 닉슨. 맡았던 직책 탓에 보급 병과 장교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수장 위의 항해 병과 휘장(Line Star)을 통해 그가 항해 장교임을 알 수 있다.
닉슨은 포커의 대가이기도 했다. 심지어 현역 장교였던 시절에 태평양의 그린 아일랜드라는 섬에 '닉스'라는 작은 맥주집을 차려놓고 주로 파일럿들을 상대로 판이 큰 포커 게임을 벌이기도 했다. 닉슨의 포커 실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1946년 닉슨의 하원의원 선거 운동 비용 중 대부분을 닉슨이 전쟁 중에 포커로 딴 돈으로 충당했을 정도다.
3.2. 정치 입문[편집]
1946년 공화당 하원의원[5] 당선되며 정치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950년엔 일약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는데 상대는 전직 브로드웨이 스타 배우이자 오페라 가수였으며, 최초의 여성 부통령 러닝메이트로까지 거론되었던 민주당 여성 후보 헬렌 더글러스였다. 그는 더글러스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매카시즘적인 정치선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6] 이렇게 반공 성향이 강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훗날 중공 등 공산권과의 화해를 표방하는 데탕트 정책을 추진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거운동으로 그는 더글러스로부터 "교활한 딕(Tricky Dick)"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후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후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에 동조해 공산주의자 사냥에 나섰다. 1952년, 고작 만 39세의 나이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후보와 같이 출마해 1961년까지 미국의 부통령을 맡는다.
3.3. 체커스 연설(checkers speech)[편집]
하지만 닉슨이 늘 승승장구만은 아니었다. 그를 당선 직전에서 좌절시킬 뻔한 것이 이른바 "체커스 사건"이었는데, 대선 러닝메이트가 되기 직전 18,000달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부통령 후보에서 교체될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그는 이례적인 전국 TV연설에서 "텍사스에서 온 남자에게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것은 내 딸들을 위한 체커스(Checkers)라는 코카 스파니엘 애완견 강아지뿐이다. 알다시피 아이들에게 강아지가 얼마나 귀엽나. 우리는 어쨌든 우리 가족인 체커스와 함께 살고 싶다."[7] 라고 말함으로서 인간미를 살리고 문제의 쟁점을 뒤집어버렸다. 뒤의 워터게이트 사건때의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발언 등 결정적인 실언들로 인해 곤란한 처지에서 빠졌던 상황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니까 부통령 후보 지명 전에 지지자로 부터 18,000 달러의 불법 정치 자금을 받은걸 대놓고 인정하면서 공화당의 적극적인 TV 중계로 전국민에게 논리와 감정을 적절히 섞어 연설한 것이 다른 의미로 현재도 명연설로 화자 되고 있다[8]
My Fellow Americans,
I come before you tonight as a candidate for the Vice Presidency and as a man whose honesty and -- and integrity has been questioned. Now, the usual political thing to do when charges are made against you is to either ignore them or to deny them without giving details.I believe we've had enough of that in the United States, particularly with the present Administration in Washington, D.C. To me the office of the Vice Presidency of the United States is a great office, and I feel that the people have got to have confidence in the integrity of the men who run for that office and who might obtain it.
I have a theory, too, that the best and only answer to a smear or to an honest misunderstanding of the facts is to tell the truth. And that's why I'm here tonight. I want to tell you my side of the case. I'm sure that you have read the charge, and you've heard it, that I, Senator Nixon, took 18,000 dollars from a group of my supporters.
Now, was that wrong? And let me say that it was wrong. I'm saying, incidentally, that it was wrong, not just illegal, because it isn't a question of whether it was legal or illegal, that isn't enough. The question is, was it morally wrong? I say that it was morally wrong -- if any of that 18,000 dollars went to Senator Nixon, for my personal use. I say that it was morally wrong if it was secretly given and secretly handled. And I say that it was morally wrong if any of the contributors got special favors for the contributions that they made.
국민 여러분, 저는 한명의 부통령 후보로서, 또 성실성과 정직성에 대해 의심을 받는 한 사람으로서 오늘밤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여러분이 혐의를 받고 있을때 보통 정치적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세세히 해명하지 않고 그저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 특히 현재 워싱턴 행정부에서는 다들 그렇게 해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에게 부통령이란 직책은 대단한 자리 입니다. 따라서 국민은 그 직책에 입후보하여 당선될지 모르는 사람들의 정직성에 대해서 신뢰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저는 진실에 대한 비방이나 완전한 오해를 풀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은 진실을 밝히는 것 뿐이라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밤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그것 입니다. 저는 그 문제에 대해 여러분에게 제 입장을 밝히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닉슨 상원 의원이 일단의 지지자들로 부터 18,000 달러를 받았다는 혐의에 대한 기사를 읽거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신 적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자 그것은 잘못된 일 이었겠지요? 그러면 잘못된 일 이었다고 칩시다.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우연히 잘못된 일 이었지 정말 불법적인 일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합법이었느냐 불법이었느냐에 그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돈을 비밀리에 받아 비밀리에 처리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고 말씀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기부한 사람들 중에서 그 기부 행위의 대가로 특별한 혜택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고 말씀 드릴 것입니다.
(중략)
One other thing I probably should tell you, because if I don't they'll probably be saying this about me, too. We did get something, a gift, after the election. A man down in Texas heard Pat on the radio mention the fact that our two youngsters would like to have a dog. And believe it or not, the day before we left on this campaign trip we got a message from Union Station in Baltimore, saying they had a package for us. We went down to get it. You know what it was? It was a little cocker spaniel dog in a crate that he'd sent all the way from Texas, black and white, spotted. And our little girl Tricia, the six year old, named it "Checkers." And you know, the kids, like all kids, love the dog, and I just want to say this, right now, that regardless of what they say about it, we're gonna keep it.
It isn't easy to come before a nationwide audience and bare your life, as I've done. But I want to say some things before I conclude that I think most of you will agree on. Mr. Mitchell, the Chairman of the 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made this statement -- that if a man couldn't afford to be in the United States Senate, he shouldn't run for the Senate. And I just want to make my position clear. I don't agree with Mr. Mitchell when he says that only a rich man should serve his Government in the United States Senate or in the Congress. I don't believe that represents the thinking of the Democratic Party, and I know that it doesn't represent the thinking of the Republican Party.
아마 여러분들께 말씀 드려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저에 대해 이것도 이야기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선거 뒤에 저희는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남부 텍사스 주에 사는 어떤 남자분이 (제 아내) 페트리샤가 라디오에 출연하여 저희 어린 두 딸이 강아지를 한마리 갖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이번 유세 여행을 떠나기 바로 전날 저희는 볼티모어의 유니언 역에서 저희에게 온 물건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그 물건을 받기 위해 역으로 갔습니다. 그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흰색과 검정색이 섞인 코커스패니얼 강아지였습니다. 그분이 멀리 텍사스에서 상자에 담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6살 된 제 어린 딸 트리샤가 그 이름을 체커스라고 지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애들은 모든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강아지를 좋아합니다. 이제, 바로 이점은 꼭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저희는 그 강아지를 그대로 키울것이란 점 말입니다. [10]
제가 방금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전국의 시청자 앞에 서서 자신의 생활을 모두 털어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의 연설을) 마치기 전에 몇가지 점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여러분 대다수가 동의할 것입니다. 민주당 전국 위원회 의장이신 미첼 의원께서는, 미국 상원에 있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상원 의원에 입후보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제 견해를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미첼 의원께서 부자만이 미국의 상원과 의회에서 정부에 봉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그 말씀에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민주당의 견해를 대변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이 공화당의 견해를 대변하지도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선 뒤에는 확실한 승승장구, 갈수록 쇠약해지는 아이젠하워를 보좌해 8년이란 세월동안 그를 대신해 세계 각지를 누볐다. 1959년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주방 논쟁(부엌 논쟁)"# 등 쇼맨십에서도 인기를 끄는데 성공했다.
3.4.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편집]
대선 당시 닉슨의 후보 홍보 영상(1960년).[11]
현직 부통령이던 1960년 11월, 닉슨은 대통령 후보로 나서 전 공화당 상원의원이자 당시 미국의 주 유엔대사였던 헨리 캐벗 로지와 함께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후보와 선거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표차로는 고작 10 ~ 40만표(0.2 ~ 0.6%) 차이의 석패였다. 하지만 선거인단의 결과는 훨씬 차이가 컸다.
이는 남부 텍사스 출신이었던 케네디의 러닝메이트 린든 B. 존슨의 위력 탓도 있고, 닉슨이 50주를 모두 방문하겠다는 공약을 지키느라 전략적이지 못한 선거에 체력을 소모한 점이 크다. 또 닉슨은 일리노이에서는 고작 0.19%p, 텍사스에서도 2%p 차의 근소한 패배를 했는데, 이들 주들에서 선거조작이 이뤄졌다는 의혹이 있다. 즉 린든 존슨이 텍사스 내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텍사스에서 선거조작을 자행했고, 케네디 또한 자기 가문의 시카고 마피아와의 연결고리를 활용해 일리노이에서 선거조작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 만약 해당 의혹이 사실이고, 이러한 선거조작이 없어 닉슨이 텍사스와 일리노이에서 승리했다면, 닉슨은 27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여 대통령에 당선됐을 것이다.
참고로 TV 토론에서 케네디가 이겼고, 그렇기 때문에 케네디가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우선 토론을 라디오로 들은 시민들과 언론인들은 닉슨이 케네디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을 거뒀다고 여겼다.[12] 실제로 라디오로 토론을 청취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49%의 청취자들이 닉슨이 승리했고 응답한 반면, 케네디의 경우에는 21%에 불과했다.
해당 여론조사 기관은 텔레비전으로 시청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도 시행했는데, 여기서도 케네디 30% 닉슨 29%로 나와, 케네디가 거의 우위를 나타내지 못했다. 텔레비전으로 시청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당시 토론을 시청한 미국인들 사이에서 닉슨이 승리했다는 여론이 분명히 우세했을 것이다. # 오히려 케네디의 경우에는 토론을 시청하지 않은 정치적 무관심자들, 특히 그 중에서도 케네디의 잘생긴 외모에 반한 젊은 여성들의 몰표를 받아 당선됐을 확률이 높다.
1961년 케네디가 취임한 직후 케네디의 취임연설문 작성자이자 비서관이었던 테드 소런슨을 시카고에서 만났다. 닉슨은 대뜸 "그 취임 연설 중 일부는 제가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소런슨이 "어느 부분 말씀이신지요.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지 말고...' 그 부분 말씀이신가요?"하자 닉슨 왈, "아니오. '나는 엄숙히 선서합니다'로 시작하는 그 부분 있잖습니까?"
심지어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현직 주지사란 이점에다 현직 대통령의 지지까지 등에 업고 재선에 도전했던 펫 브라운[13] 에게 밀려 낙선하면서 그는 한방에 "황태자 부통령"에서 "한물간 정치인" 취급을 받았고 공식적으로 정계 은퇴선언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닉슨의 끝은 아니었다.
3.5. 리처드 닉슨 행정부[편집]
자세한 내용은 리처드 닉슨 행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이 당선되면서 구성된 행정부다.
3.6.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편집]
1964년 대선을 앞두고 배리 골드워터와 함께 한 모습.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바로 로널드 레이건. 이 때 레이건은 골드워터 지지 연설로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전국에 알렸고, 2년 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14]
그는 한동안 뉴욕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던 중 1964년 선거에서 린든 B. 존슨이 배리 골드워터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자 닉슨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권을 골드워터에게 이양받아 대대적인 공화당 혁신 사업을 벌였다. 절치부심한 그는 다시 8년만에 대선에 출마했고, 당시 린든 B. 존슨의 어설픈 베트남 전쟁 처리 덕분에 사회 안정과 종전을 원하는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를 등에 업고 1968년 대통령에 당선된다. 석패할 때와 비슷하게 0.42%의 간발의 차였다.
이 과정에서 닉슨은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극치를 보여준다. 대중 앞에 등장할 때는 에너지 넘치는 이미지를 위해 구보로 연단 위에 뛰어 오르지를 않나, 밀짚모자에 "NIXON"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이른바 "닉슨 소녀"들을 등장시켰다.
반면 민주당의 후보였던 휴버트 험프리[15] 는 "베트남전 폭격 중지"라는 훌륭한 정치적 수완으로 잠시 닉슨을 앞서갔지만 선거의 초점과 선거 구호를 자주 바꾸면서 일관성을 잃었다.
무엇보다도 네거티브에만 일관한 전략이 문제였다. 이런 선거광고는 tv광고에서 정점에 달했다. 일부 포지티브 광고도 있었지만 대개 닉슨의 말바꾸기(이리저리 도는 풍향계 광고), 닉슨이 당신에게 해준건 없다라는 광고(하단의 영상), 애그"뉴"(AgNew) 부-'통령'(New President의 말장난) 조롱, 거품이 터지면서 공약을 까는 광고 등등.. 개별 아이디어는 신선했을지 몰라도, 대체 자신이 뭘 하겠다라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험프리가 시종일관 닉슨만 강조하며 비난하는 광고도 있었다. 최종 슬로건 역시 "험프리, 다른 대안은 없다(There's No Altenative)"라는 네거티브한 표현이었다.
험프리의 대선 당시 광고(1968년).
무엇보다, 닉슨은 자신의 약점인 TV 공개 토론을 거부했다! 결국 험프리는 대세를 뒤집지 못했고, 닉슨은 대중선거전의 승자로 거듭났다. 제3당인 미국 독립당 후보로 나선 조지 월리스[16] 가 험프리의 표를 상당부분 갉아먹은 것 또한 닉슨의 당선에 한 몫 했다.
생각해보면, 1968년 경선에서 슈퍼 화요일을 캘리포니아에서 압도적으로 이겨버리며 승승장구하던 로버트 케네디가 다음날 암살당하지만 않았어도 닉슨은 또 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는 (보수성이 옅었던 아이젠하워를 포함하면) 오랜 민주당 정권을 종식하며 대통령이 되었다. 68혁명 등으로 뜨겁던 1968년이 프랑스 총선에서의 드골파 압승,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함께 기존 질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평이 있다.
이 선거는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정치참여의 계기가 되었다. 그가 미국에 첫발을 디딘 당시 벌어진 이 대선의 TV 토론을 입당 사유라고 회고했던게 문제. "나는 당시 자유시장과 자유기업, 그리고 작은정부를 주장했던 닉슨에 비해 험프리가 사회주의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라며 "나는 그때부터 주욱 공화당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앞 주석에서 보았듯이, TV 토론은 없었다. 이 사실이 드디어 2003년 드러났지만, 슈워제네거는 별말 없이 묻어버렸다.
한편, 리처드 닉슨은 이 시기 파리 평화회담으로 인기가 높아진 휴버트 험프리와 린든 존슨 정권에 타격을 주기위해 남베트남의 반 티에우 대통령이 비타협적으로 나오도록 조장했다. 여기에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이 후일 국무장관이 되는 헨리 키신저. 키신저는 회담에 참석해 진행상황을 닉슨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고, 여기에는 중국계 로비스트 천샤오메이, 영명 안나 체놀트의 역할이 매우 컸다. 미국에서는 이 사건을 그녀의 이름을 따 '체놀트 사건'이라고 부른다. 여하간 이는 이적행위를 금하는 로건 법(Logan Act)에 위배되는 사항이었지만, 아무도, 심지어 도청을 통해 사실을 안 존슨 대통령조차도 이를 폭로하지 못했다. 물론 닉슨의 행동이 남베트남의 비타협적 태도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논란의 사항이지만, 워터게이트로 귀결되는 그 성정이 미리 드러난 부분이라할 수 있겠다.
여하간 대통령에 취임한뒤 1971년, 닉슨은 키신저를 중국으로 파견하여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을 개최, 중국의 공식 초청을 받았으며 1972년 2월에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닉슨-마오쩌둥 회담을 가졌다.
당시 조지 소로스와 함께 퀀텀펀드를 공동창업하고 운영중이던 짐 로저스는 미국인으로써 당시 닉슨의 방중에 대해 당시 새로운 상황에 대해 대부분의 미국인들처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이후 닉슨의 결정으로 인해 세상이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짐 로저스는 불인 차이나라는 베스트셀러를 집필할 정도로 중국 투자에 앞장선 월가의 인물이 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닉슨의 방중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베트남 전쟁 관련 사항은 특히 닉슨의 정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항이었는데,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인기 없는 전쟁이 되어간다는 것을 직감한 닉슨은 아시아 국가들은 스스로 자국의 안보를 감당해야 한다면서 남베트남에서 미군들을 본격적으로 철수시킨 것에 이어서 한반도에서도 주한미군 7사단을 철군시켜 한국, 일본을 포함한 주요 아시아 동맹국들과 갈등이 벌여지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닉슨은 베트남 철수 공약을 지켰고, 그 결과 1972년, 소수의 미군 고문단을 제외한 파월미군 50만 여명이 철수하고 북베트남으로부터 미군 포로들을 송환받으면서 닉슨에 대한 지지도는 높아지게 된다. 닉슨은 미군 철수의 정당성을 어필하기 위해 남베트남군이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베트남화(Vietnamization) 정책을 추진했고, 이 때 기점으로 남베트남군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강경함을 어필하기 위해 협상을 깨고 부활절 공세로 북베트남이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에 도전장을 내밀자 라인배커 작전이라는 북폭작전을 감행하는데, 지난 롤링썬더 작전과는 달리 폭격 제한구역을 두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북베트남 주요 거점을 폭격했다. 그 덕에 북베트남-중국 국경지대의 교통로와 하노이 주위의 수도권이 미군의 폭격에 완전히 박살나고 북베트남군의 전쟁 수행능력도 급감해 남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소련 화물선들의 무기 공급을 중단시키기 위해 항구에다가도 무차별적으로 기뢰를 살포하는 이전과는 다른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닉슨의 이러한 강경조치에 미군과 보수층에선 열렬한 지지를 표했지만 언론에선 민간인 피해를 이유를 들어 닉슨 행정부를 두고 야만적이라고 비판했다.
3.7. 72년 재선과 워터게이트[편집]
대선 당시 광고(1972년).[17] 맥거번의 군비-군사력 감축 계획을 비판하며 닉슨은 안보 문제에서 전혀 타협하지 않겠다는 요지를 담고 있다.
당시 민주당 상원의원 맥거번은 베트남전으로 인해 높아지는 군사비로 인해 높아지는 여론의 우려를 근거로 군비경쟁의 위험성을 비판하며 재래식 군사력의 감축은 물론이고 주한미군의 전면철수 및 유럽 주둔 미군의 감축을 주장했다. 이는 미국이 더 이상 패권국으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보는 민주당 내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닉슨이 재선하면서 해외 주둔 미군의 추가적인 감축 및 철수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미국의 재래식 군사력 증강 기조도 지속되었다. 어찌보면 닉슨의 업적 중 하나라 볼 수 있는게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공군력을 비롯한 재래식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면서 미국은 소련과의 대규모 재래식 전쟁도 상정해야 했는데 닉슨이 재래식 군사력을 그대로 유지한 덕에 미국의 재래식 군사력 질적 우위는 계속될 수 있었다.
이후 닉슨은 1972년 선거에 재출마하며 1964년 존슨의 승리에 맞먹는, 아니 민주당 절대 텃밭인 워싱턴 D.C와 매사추세츠만을 내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서 맥거번을 제치고 연임에 성공한다. 닉슨은 49개주에서 승리하며 득표율 60.7%을 올렸다. # 더블스코어로 압승하는 개표영상 이로서 1932년 이후 근 40년을 지배한 남부 텃밭 + 북부 서민과 소수인종 + 서부의 농민과 지식인 + 중산층을 포괄하는 민주당의 뉴딜연합은 붕괴되고[18] , 남부의 백인 보수층 + 북부의 중상류층 + 발전하는 서부의 텃밭[19] 을 바탕으로 한 공화당의 "남부전략"의 시대가 또 40년간 (조지 W. 부시까지) 도래한다. 이에 닉슨은 헌법을 개정할 만큼 지지를 얻어 3선 이상이 점쳐지기도 했지만 초대형 사건인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다!
1972년 대선 당시 민주당의 선거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이를 은폐하려 한,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닉슨이 사전에 알고 있었음이 1974년 드러난 것이었다. 그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증거는 속속들이 나왔고, 1973년 6월 23일에 집무실에서 "워터게이트 침입은 국가 안보 문제이니 FBI는 이 문제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라고 한 그의 육성이 공개되었다. 닉슨은 대통령 권한을 이용해서 자신의 사무실에서 은밀히 녹음된 테이프의 공개를 막으려고 했지만, 연방대법원에선 만장일치로[20] "대통령이라도 그건 아니되지!"라고 해서 역관광.[21]
결국 탄핵 가결 직전에 조건부 자진 사임하게 된다. 자진 사임 대신 사건에 대한 면책 특권과 더불어 테이프 내용의 영구 비공개를 요구했고, 의회가 이를 받아들여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떠나게 됐다. 그리고 이후 포드가 아예 특별사면을 함으로써 그는 대통령 임기 수행 시절 벌인 모든 법률 위반 행위에 대해 완벽한 면책을 받게 되었다.[22]
하야 성명 후, 그가 퇴임하는 시각에 이르기 전 에어 포스 원을 타고 캘리포니아로 귀향길에 올랐는데, 비행중 워싱턴 DC에서 포드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리자, 규정에 따라 닉슨의 탑승기의 기장 랠프 앨버타치 미합중국 공군 대령은 비행하던 중 에어 포스 원에서 기체 고유 부호 SAM 27000으로 호출 부호를 변경했다.
닉슨 사임 10일 전 탄핵을 앞둔 닉슨 대통령의 불안한 정신상태를 우려한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이 국방부와 군에 대통령과 백악관의 군사명령, 특히 핵전쟁 관련 명령을 수행하지 말라는 비밀지시를 내린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 후 뉴욕과 뉴저지 근교에서 저술활동을 하며 조용히 살았는데, 이 때 낸 책이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는 1977년 데이비드 프로스트와의 인터뷰에서 " 대통령이 한다면,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Well, when the president does it, that means that it is not illegal".
전설이 된 이 인터뷰는 당시 한 달에 걸쳐 12번 시행되었으며 5파트에 걸쳐서 방송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론 하워드가 감독한 Frost/Nixon이란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이 영화는 해당 인터뷰의 중요도를 너무 과장했다는 비판을 받은적이 있다. 닉슨의 전기 작가 중 하나인 조나단 앳킨은 해당 멘트가 프로스트가 뽑아낸 닉슨의 고백이 아니고 사실은 미리 계산된 발언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허핑턴 포스트의 엘리자베스 드류는 영화에 나오는 발언 자체가 틀렸다고 지적했는데, 영화에서 닉슨은 "(진실) 은폐와 관련이 됐었다"고 고백하고 미국인들을 실망시켰다고 체념한 듯 인정하지만, 실제 인터뷰에서는 "당신(프로스트)은 내가 불법적인 은폐 작업에 관련됐다고 고백하길 바라는거요? 그렇겐 안 되지!"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이 인터뷰는 닉슨 본인이 자기를 포장하려고 언론에 팔아넘긴 것에 가깝다는 의견이 많고 실제로 닉슨이 매우 영리한 전략가였다는 걸 생각하면, 기자 질문에 말려서 얼떨결에 본심을 드러냈다기보단 이게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문제는 대중들은 닉슨이 생각하는 것과 아주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런 멘트들이 심한 역효과를 냈다는 것. 당시 인터뷰의 영어 전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 1977년 인터뷰
해당 부분을 간단히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략)...프로스트: 그러니까 말씀하시는게 어떤 상황에서는, 그리고 휴흐턴 계획이나 그런 부분이 그런 상황이었고, 대통령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어떤 걸 하겠다고 결정하고 불법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건가요?
닉슨: 글쎄, 대통령이 뭔가를 하면, 그건 그 (행위가) 불법이 아니란 말이겠죠.
프로스트: 그 정의 그대로 말이죠.(By definition)
닉슨: 맞습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위해 뭔가를 승인하거나, 이 경우처럼 국내의 평화와 질서에 중대한 위험 때문에 (뭔가를 승인할때), 그러면 그 상황에서 대통령의 결정은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이들이 법을 어기지 않을 수 있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명령을 수행하는 이들은)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중략) 프로스트: 그렇다면 그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이 어딘지 판단하는건 대통령의 결정이란 말인가요?
닉슨: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결정하는 건 대통령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선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과 다릅니다. 대통령이 선거인단 앞에 서야 한다는 걸 잊으면 안 돼요. 그리고 대통령이 의회 앞에 서야 한다는 것도 잊으면 안됩니다.[23]
종합하자면 닉슨의 마인드는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게 뭔지 애매할때 이를 결정하는 건 결국 대통령의 몫이라는 사고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극단적인 생각인 것은 맞다. 하지만 애매한 상황에서 합법과 불법을 결정하는 것이 대통령의 몫인 만큼 그 선택에 의해 낙선이나 탄핵 같은 결과가 오는 것 또한 대통령의 몫이라는 단서 또한 분명히 달고 있으므로, "대통령은 맘대로 해도 불법이 아니다"라는 독재스러운 생각까지는 아니다. 오히려 "애매한 상황이라면 대통령이 총대를 매고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 가깝다[24] . 또한 이를 보면 닉슨은 질문자에 말려 얼떨결에 고백을 하고 만 게 아니라 자신의 평상시 지론을 침착하게 설명한 것이다. 어차피 정치판은 법에 대놓고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온갖 난장판이 행해지는 지옥도고 미국도 예외는 아니므로, 진짜 불법만 아니라면 대통령이 정치적 책임을 지고 뭔가를 밀어붙여야 할 때도 있으며 임기 기간에는 대통령이 사실상 왕이라는 게[25] 닉슨의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닉슨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은 건 당연한 것이다.
3.8. 이후[편집]
1978년 1월 지미 카터 대통령은 닉슨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였다. 그 자리에서 닉슨은 함께 초대된 제럴드 포드와 넬슨 록펠러, 존슨 대통령의 부인과 담소를 나누었다. 그 직후 닉슨은 회고록을 출판했는데, 반성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다는 비난과 더불어 대중적 호기심의 결합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라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났다. 그 뒤로도 16년 동안 8권의 정치분석서를 썼고 평론가와 일반 독자들에게 좋은 책이란 평가를 받았다.
1994년 1월 사망 3달전 모습
그 후 소련의 해체 당시 미국에서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고, 1994년 3월 81세의 나이로 다시 한번 모스크바를 밟았다. 1992년 미국 대선에서 웬일로 빌 클린턴이 조지 H. W. 부시는 물론 로스 페로에게도 패배할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주장하다가 보기좋게 빗나가는 꼴을 보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닉슨은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도중에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결국 그 클린턴이 재임하던 1994년에 닉슨은 딸들이 지켜보는 병원의 침대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도와줘(Help)"였다고 한다. 클린턴 대통령은 닉슨의 죽음을 애도하며 국장을 지시했고, 그의 시신은 고향 캘리포니아 주로 옮겨져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무덤 곁에 안장되었다.
4. 평가[편집]
4.1. 개관[편집]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한 것으로 많이 각인되었지만 재임기 외교, 경제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베트남전 개입 중지와 냉전 완화와 데탕트 등 한국전쟁 후 가장 괄목할만 한 치적을 남긴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로서 권력을 남용하고 거짓말을 하다가 불명예스럽게 사임을 했기에 닉슨은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도 낮은 평가를 받는 대통령이었다.[26] 그래도 1990년대 들어서는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고 중국과의 수교 등으로 냉전에 해빙기를 가져오게 한 외교적 성과 덕분에 평가가 올라가고 있는 추세다.
경제사적 측면에서는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경제의 근간이었던 브레튼우즈 체제를 닉슨 쇼크로 중단시킨 장본인이 되버렸다. 즉 1971년 8월 15일을 기해 미국 달러의 금태환을 거부하고 USD 자체를 본위화폐(기축통화)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인 1960년대 중반부터, 린든 B. 존슨의 대표적인 사회복지정책인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를 포함한 각종 복지 프로그램들과 베트남 전쟁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이미 금본위제를 무시하고 달러를 찍어내고 있었다. 그러자 이를 감지한 서유럽에서 국채 변제를 달러 대신 금괴로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를 상환할 능력이 없던 미국은 결국 금본위제를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즉 브레튼우즈 체제를 중단하는 것은 불가피한 결정으로, 이를 닉슨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억울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1972년 2월 중국 방문에서 마오쩌둥과 접견하는 모습. 이 사진은 1970년대 데탕트 시대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남았다. 이 때문에 워터게이트 사건과 별개로 냉전시대사에서 닉슨과 그를 뒷받침했던 키신저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당시 닉슨의 중국 방문은 골수 반공주의자로 유명했던 그가 공산진영 지도자와 회동, 관계개선을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닉슨 중국에 가다"(Nixon goes to China)라는 말은 특정 정치지도자가 그동안의 이념적 선호도와 상반되는 뜻밖의 정책적 선택을 하는 경우, 특히 오랜 적대세력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려는 것을 비유하는 관용 문구가 되었다.[27]
닉슨의 중국과의 접선은 전통적으로 기민한 외교 정책이자 소련에 빅엿을 먹인 전환적 발상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비록 소련이 이미 망한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닉슨의 대중국외교가 박한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건 중국의 경제력이 신장된 21세기 기준에서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비판이고,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이었을 때에는 전혀 상황이 달랐다. 당시 소련이 소비재 공급이 부실하다는 평이 있었을지언정 엄연히 세계 2위 군사강국에 경제대국이었고, 1인당 국민소득도 서방선진국 만큼은 아니라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반면 중국은 경제적인 잠재력이 높다는 평가는 있을지언정,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대에 그쳤던 낙후된 후진국이었다. 막말로 당시 소련에서 주말이나 휴가철에 자기 소유 별장에서 여가를 보내는것이 일상적이었던데 반해 중국은 라디오와 자전거가 사회인의 상징이었던 시절로, 당연히 당시 시점에서는 소련 견제가 우선인게 당연할수밖에 없었다.
1929년 시작되어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5년 본격 도입한 노인의료보험(메디케어), 주정부의 빈민부조(메디케이드) 의료보험 제도를 완전 폐지했다는 오해를 사고 있는데[28] , 이는 사실과 다르다. 두 보험은 멀쩡히 잘 남아있으며, 도리어 닉슨은 "1973년 12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만들어낸 HMO(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 Act of 1973)를 서명을 함으로써 양당통합을 이끌어낸 성과가 있다." # 링크 닉슨은 "모두 3억 7천만 달러에 이르는 기금을 HMO 가입 확대를 위한 기금으로 조성하고 선불정액제 보험을 금지하는 주들의 법률들을 무효화하였으며, 25명 이상 노동자를 고요하고 있는 기업 중 의료보험 급여를 하고자 하는 기업은 반드시 HMO를 선택사항 중 하나로 포함하도록 하였다." # 출처 이런 오해의 주된 이유가 마이클 무어의 식코에서 닉슨이 해당 발언을 하는것처럼 나오기 때문이다.
HMO의 특징은 일반의 네트워크 내에서 저렴한 보험을 쓸 수 있게 한 것으로, 대신 전문의를 사용할 경우 비용이 증가하게 된다.[29] 이는 개인이 가입을 선택하는 보험으로, 뒤를 이은 지미 카터는 1976년 포괄적 의료보험제도를 주장했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닉슨은 레이건 이후의 공화당과는 정책노선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30] 예를들어, 닉슨은 환경주의자로, '환경보호', '환경의식', '생태학'이란 단어를 미국 정치계에 들여놓은 초기 인물 중 하나가 닉슨이었다. 1969년 국가환경정책법(National Environmental Policy Act)을 제정, 1970년에 환경보호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과 환경개선위원회(Council of Environmental Quality)를 창설했으며, 같은 해 대기정화법(Clean Air Act)을 확장했고, 1972년에는 수질오염방지법(Federal Water Pollution Act)을 대폭 개정했다.
다만 닉슨이 이러한 환경주의적 정책을 편 것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분석이 있다. 버지니아 대학교 산하의 싱크 탱크로, 대통령 리더십과 공공정책, 그리고 미국 정치사를 연구하는 기관인 밀러 센터에 따르면, 닉슨은 사석에서 만약 내가 이러한 조치를 하지 않았더라면,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에서 더욱 진보적인 입법을 강행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닉슨은 케인즈주의적인 임금과 가격 통제정책들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정책 프로그램들 또한 자신의 정치철학과 상반되는 것이고 또 장기적으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당해년의 일시적인 효과를 위해 실행했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닉슨은 루스벨트가 구축한 뉴딜동맹을 극복할 우파 진영의 정치적 동맹을 구축하고자 했다고 한다. 닉슨은 이를 통해 미국을 우측으로 이동시키고자 했고, 결국 그걸 해냈다는 것이다. #
닉슨과 레이건을 비교했을 때, 오늘날 미국인들의 평가는 물론 역사학자들도 닉슨보다 레이건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하는데, 그것은 레이건 스스로가 닉슨의 지나친 권력남용과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측면에 있어서 철저한 단절과 극복을 꾀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자회견과 언론인 간담회를 기피했던 닉슨과 달리, 레이건은 유창한 언변을 앞세워서 대국민소통에 매우 능했다는 점이 성패를 갈랐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둘은 닉슨이 대통령이고 레이건이 주지사일 시절 통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이 통화에서 닉슨은 아프리카인들을 원숭이라고 부르는 레이건의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세계적인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닉슨과 보수당 소속의 전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이 상당히 유사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
마약과의 전쟁을 시작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이 정책의 폐해는 항목 참조.
4.2. 베트남 전쟁[편집]
북베트남은 개전 내내 유리한 전략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미국과의 평화협상에 소극적이었다.[31] 당시 미국의 국력은 더이상 베트남전을 지속할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그냥 발빼면 패배를 자인하는 셈이 되니 자신의 재선도 위험. 그리하여 닉슨은 전략폭격기부대를 24시간 내내 소련 영공 근처에서 비행시키고 ICBM을 상시 발사 대기시키는 등의 소련을 위협하는 미치광이 전략을 사용하여 소련이 북베트남을 설득하여 협상장으로 나오게 했다.
하지만 이렇게 미국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껐지만 그가 워터게이트로 물러난 후 미국의 리더십에 공백이 일어나자 북베트남은 휴전협정을 파기하고[32] 바로 공세를 펴 남베트남을 흡수 통일하여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캄보디아가 무너지면서 생긴 폴 포트의 킬링필드도 그렇고 아래의 문단에 나온 것처럼 사회주의 확산을 막는다며 살바도르 아옌데를 쫓아내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지원했다는 큰 흑역사도 있다.
4.3. 1973년 칠레 쿠데타 지원[편집]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미국의 이미지를 박살낸 사건이며, 단지 살바도르 아옌데가 좌파 성향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민주주의와 상극인 골수 사회주의자로 몰아 끌어내리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집권을 도와 결과적으로 수많은 칠레 국민들을 희생시킨 점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외교적 실책이다. 현재의 미국이 냉전 시절만큼 적극적으로 우파독재를 옹호하지 않게 된 이유들 중 하나로 닉슨의 이런 외교적 실책이 있다.
4.4. 북한과의 일화[편집]
의도치 않게 북한에게 굴욕을 겪었는데, 전임 대통령 존슨 시절에 일어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의 해결을 위해 북한에 대한 사과 성명을 냈다. 정찰선 푸에블로호는 몇 차례 북한의 영해를 침범하였고, 이를 벼르던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나포하였다. 닉슨은 강경하게 대처하고 싶어했지만 그 자신이 공산권과의 공존을 강조한 닉슨 독트린의 구호를 외치고 당선된 대통령이었기에 결국 북한에 사과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기고만장해진 북한은 1969년에 또다시 자신의 영공을 침범한 미국 정찰기를 격추시켜버린다. 또 다시 닉슨은 엔터프라이즈호를 이끌고 원산 앞바다에서 시위를 했으나 결국 흐지부지되어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표면적으로는 북한이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승리한 것 같았지만 북한의 내상은 심각했다. 이 이후 북한은 적대국의 군사력을 경계하여 군비를 GDP의 절반 가까이나 올려버렸다. 물론 단순히 미국 때문에 그랬다기 보다는 군수공업 투자를 지양하고 경공업 중심의 성장을 중시한 갑산파와의 정치 투쟁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미국과의 마찰도 원인 중 하나로 봐야 할 것이다.
5. 존 F. 케네디와의 비교[편집]
재밌는건 닉슨과 케네디의 정치 입문 시기는 1946년으로 같았고, 나이 차는 고작 네 살에 불과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특권층 자녀로 자란 케네디는 진보적인 정책을 펼친 데 반해서 서민층 자녀로 자란 닉슨은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 출생부터 시작해서 대학입학이나 정계이력까지 모든 면에서 대조적인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1960년 대선에서 양당 후보로 출마했다.
세세히 파고 든다면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둘의 악연은 길다. 닉슨과 케네디는 같은 1946년 중간선거에서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1947년 초선 의원끼리의 친목회에서 초선 의원들이 가벼운 정책 토론을 가질 기회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케네디의 상대로 맞붙은 사람이 닉슨이었다. 게다가 하원 의원 시절 닉슨의 의원 사무실은 361호실이었는데, 바로 옆방인 362호실은 케네디의 방이었다.
이 때문에 닉슨과 케네디는 처음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1953년 케네디의 결혼식에 닉슨이 하객으로 참석했을 정도. 둘은 점심까지 같이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고, 1959년에는 케네디가 만약 자신이 대선 후보로 나서지 않는다면 닉슨에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각별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경선에서 승리해 본선에 나서 닉슨과 붙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면에서 반대인 두 대통령이었건만, 둘 다 임기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는 게 미국 현대사의 비극이자 아이러니다.
6. 한국과의 관계[편집]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이승만의 용기와 뛰어난 지성에 감명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나도 역시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예측 불가능한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승만의 통찰력을 많이 되새겨 보았으며, 이 노(老) 정치가가 얼마나 지혜로웠는가를 더욱 새롭게 인정하게 됐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닉슨의 회고록 中
당시 박정희 정부가 전임 대통령인 린든 B. 존슨 행정부와는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냉랭한 편이었다. 닉슨이 주지사 선거까지 낙선하고 야인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닐 때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박정희는 그를 '끝난 사람' 취급하고 오찬 대신 커피 한 잔 대접하고 쫓아내 버렸는데[34] , 1969년 닉슨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이 되자 상황은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렸고 68년 한때 30만에 달했던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한국의 외화수익이 닉슨의 베트남 철수로 인해 직격탄을 맞았고, 68혁명에도 기술된 남북관계 급냉각으로 인한 박정희 정권의 위기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한국 정부와 협의 없이 주한미군 7사단을 그냥 철수시켜버리는 등[35] 제대로 역풍을 맞는다. 이 때문에 다급해진 박정희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백악관이 아닌 샌프란시스코 호텔에서 만나야 했고, 저녁 식사 때에는 자기 고향 친구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했다. 국가 정상끼리의 저녁이 아니라 친구들과의 모임에 끼워준 모양새의 굴욕인 셈이다.[36] 애초에 일국의 부통령이었던 사람을 정치적으로 사망했다고 해도 푸대접하는 건 엄연한 외교적 결례였고 앞날까지는 볼 수 없다 치더라도 조심스럽지 못한 처사였다. 이때 급속도로 냉각된 박정희와 닉슨간의 관계때문에 박정희가 자주국방을 외치며 핵개발 카드까지 만지작거리면서 당시 수출경제의 호황과는 별개로 한미관계는 극도로 심각하게 악화되고 그 여파가 지미 카터시대까지 이어진다.
그래도 닉슨 본인은 한국에 애정이 있었는지 한국을 꽤 여러번 방문했다.[37] 1953년 부통령 시절을 최초로 해서 1993년까지 무려 40년에 걸쳐 꾸준히 방한하였다.[38] 어떻게 보면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기도 한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을 직접 만나 본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거기에 순정효황후까지 만난 적이 있었다. 1993년 방한했을 때 "내가 한국을 여러번 방문했는데 문민 대통령은 참 오랜만이다.", "경제 기적과 정치 개혁을 모두 이룬 한국을 보니 자랑스럽다."며 뼈 있는 농담과 덕담까지 해줬다.
7. 선거 이력[편집]
8. 매체에서[편집]
8.1. 영화[편집]
로버트 올트먼 감독이 제작, 연출한 은밀한 영광(Secret Honor, 1984)에 등장한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매그놀리아로 잘 알려진 필립 베이커 홀이 닉슨을 연기하며, 영화는 1인극이다. 시작부터 픽션임을 강조하며 심상치않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약 90분 동안 혼자서 닉슨의 살아왔던 삶과 여러 정치적 행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변명들을 마치 광인같은 모습으로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끊임없이 이어나간다. 홀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인 영화이며, 국내에는 잘 알려지진 않았다.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나온 DVD가 있다.
1994년작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중국과의 친선 탁구시합을 한 검프를 초대했다. 검프에게 어디에 묵냐고 묻자 검프는 "에봇인지 뭔지 하는 호텔이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닉슨은 자기가 더 시설 좋은 호텔을 안다며 그 호텔에 검프를 묵게 했다. 그런데 그 호텔이 워터게이트 호텔. 그날 밤 검프가 묵고 있던 호텔 건너편에서 플래시 불빛이 비치는 바람에 잠을 못 자던 검프가 관리인실에 전화해서 "건너편 건물에서 두꺼비집을 찾는지 잠을 못 자겠어요. 그 방에 관리인 좀 보내주세요."라고 전화해버린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닉슨은 사임. 닉슨 딴에는 검프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자신을 대통령직에서 쫓아버린 셈이다.[40] 비슷한 예로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에서는 궁전 욕탕이 고장나 "배관공[41] 을 보내달라"라는 팬윅 공국의 요청으로 호의를 베풀었다.
닉슨에 대한 영상물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작품이 올리버 스톤의 1995년작 닉슨(영화)이다. 영국배우 안소니 홉킨스 경이 닉슨으로 분하였다. 자그만치 3시간 12분의 대작이지만, 그만큼 볼 만한 영화. 여기서 그는 그리스식 비극 연극의 주인공처럼, 한 명의 나약하고 모순적인 인간으로서 그려진다. 예컨대 주립대의 캄보디아 폭격 반대 시위에서 4명의 학생이 총에 맞아 숨지자 "철 모르는 애새끼들! 뭣도 모르고 까불더니 꼴 좋다!"라고 측근들 앞에서는 큰소리 뻥뻥 쳐놓고는, 혼자 있을 때는 "내 형이 죽을 때 그 애들하고 나이가 같았는데..."하면서 매우 울적해하는 식이다. 그렇게 한 인간으로서의 닉슨을 강조한 영화이기에, 그의 약점을 숨기지 않음에도 (스톤 자체가 닉슨에게 호의적일 건덕지가 없다.) 그 자체로 지나치게 우호적이란 시각도 있다. 안소니 홉킨스의 사실적인 연기가 돋보이며 이로 인해 제6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42] 평은 # 여기 참조.
론 하워드의 2008년작 작품 프로스트 vs 닉슨 역시 닉슨을 다루는 중요한 영화 중 하나다. 미국배우 프랭크 란젤라가 닉슨으로 분하였다. 사임 후에도 자신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지시했다는 말을 끝내 하지 않고 오히려 정치적 재기를 노리는 닉슨에게 1977년 tv 인터뷰로 도전장을 던진 데이빗 프로스트란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본래 연극으로 제작된 적도 있었다.[43]
영화는 언론인 프로스트가 노회한 정치인 닉슨과 닉슨에게 면죄부를 주게 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의 압박 속에 처음엔 인터뷰를 망치지만 결국 닉슨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게 만든다는 내용. 이 작품은 높은 평을 얻었고 인터뷰 자체도 매우 중요하긴 했지만, 역사적 사실은 다르니 위의 내용을 보자. 미국 정치를 다룬 작품이고, 말초적인 재미를 주는 영화는 아니라서 한국에선 그렇게 흥행하진 못했다. 그래도 이듬해인 2009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등 5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는 등 나름대로 좋은 영화이다.
2009년작 왓치맨에서는 닥터 맨하탄 덕분에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헌법을 개정하면서 무려 5선[44] 을 성공한 1985년을 그리고 있다. 작품 속의 미국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고 있는지[45] 를 보여주는 좋은 장치. 영화 백투더퓨처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사진 참조). 배우는 로버트 위스든으로 싱크로율이 매우 높으며 여러 영화에서 묘사된 닉슨 중에 가장 노회하면서도 음험한 닉슨을 연기하고 있다.
2013년작 버틀러에선 존 쿠삭이 연기하는데 딱 세번 등장한다. 케네디를 그 벼락출세한 부잣집 애새끼라고 욕하면서 주인공에게 "날 찍으면 당신네 흑인들 삶도 훨씬 나아질 거요"라고 뱃지를 나눠주면서 투표를 권유하는 장면과 대통령이 된 후에 블랙 팬더 당을 개발살낼 것을 지시하는 장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완전히 궁지에 몰려서 괴로워하는 장면을 끝으로 퇴장한다. 거기서 절대로 사임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46] 이 영화에 등장한 다른 대통령들은 모두 크든 작든 흑인 인권 개선에 한 발자국씩 나가는 일을 했으나 닉슨만은 그런 게 없다. 처음 나올 때 흑인 직원도 백인과 동일합 급여를 주겠다는 약속도 그가 아닌 레이건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니, 위선으로 묘사된 셈이다. 한국판 성우는 장민혁. 장민혁의 중년 연기를 들을 수 있는 부분이다.
2014년작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는 캐나다 배우 마크 카마초가 분했다. 매그니토와 레이븐의 깽판을 저지른 소식을 듣고 뮤턴트에 위협을 느끼고는 센티널 프로그램의 예산지원을 승인한다. 그리고 센티널 시범식때 참석했다가 매그니토에게 조종당하는 센티널에게 죽다가 살아나서 백악관 벙커로 피신했으나 매그니토는 벙커를 통채로 뜯어서 앞마당에 내놓는다. 그리고 매그니토가 경호원들의 권총을 빼앗아서 대통령을 비롯한 요인들을 겨누자 닉슨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와서 자신을 죽이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살려달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나 사실 나온 사람은 닉슨으로 변신한 레이븐이었고 진짜 닉슨은 이 상황에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2016년작 영화 <엘비스와 대통령>에선 케빈 스페이시가 맡았다. 여기서의 모습은 꼰대 그 자체.
2017년작 미국 영화 더 포스트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뉴욕 타임스,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를 탄압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커즌 도벨이 분했는데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고 실제 육성만 인용하여 참모진에게 전화하는 뒷모습이 주로 비춰진다.
2018년작 바이스(영화)에서는 배우 대신에 실제 모습이 비춰진다.[47]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연설을 발표할 때의 모습이 주로 인용된다.
8.2. 애니메이션[편집]
유리병 안의 대가리로 등장해서 온갖 악행을 다 펼친다. 필립 J. 프라이의 팔을 물어뜯고[48] , 플래닛 익스프레스 앞에서 경찰을 불러 레이저 쑈도 해주시고 하다가 벤더의 몸통을 사서 대통령 선거에 나간적이 있다. 벤더는 몸통을 찾기 위해 워터게이트 호텔에 묵고 있는 닉슨에게 가고, 닉슨은 그들에게 망언을 해버린다. 망언 테이프와 몸통을 교환하는 협정이 체결되었고, 몸통빨로 가던 닉슨이 떨어질줄 알았는데, 울트라슈퍼 로봇몸통을 얻어 1표차이로 선거에서 이겨 지구 대통령이 되었다. 여담으로 그렇게 투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릴라와 함께 벤더, 프라이는 투표를 하지 않았다. 다만 벤더는 범죄자여서 투표권이 없다. 울트라슈퍼 로봇몸통을 가지고 있으나, 그 이후 에피소드에선 보이지 않는다. 부통령으로 스피로 에그뉴의 몸통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후 릴라일행에게 끔살당해 이후 애그뉴 몸통의 클론을 데리고 다닌다.
3000년도에 지구 대통령 자리에 오른후 3012년까지 대통령 직을 먹었으며,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돈까지 뿌린 정황까지 있다. Dicision 3012에선 투표에서 이기기 위해 벤더를 고용하고, 외계인 배척을 위해 다이슨 펜스를 설치하여 모 로봇이 주도한 로봇의 지구 지배를 확실하게 하였으며, 이걸 막기 위해 인류는 구원자를 보내 리처드 닉슨을 내쫓으려고 지원자 한 명을 과거로 보내게 되었다.
이외에도 지구를 저항도 없이 오미크로니안에게 바친다든지, 아무런 쓸모도 없는 별을 정벅해버리는 등 여러가지 뻘짓들을 하고 있다. 직속 부하론 잽 브래니건이 있다.
밀하우스의 이름은 닉슨의 미들 네임에서 따왔다. 제작자 맷 그로닝이 초등학생한테 생길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 닉슨하고 이름이 같은거라고 생각해 작명했다.
8.3. 드라마[편집]
찰스 로건은 닉슨으로부터 공화당적과 외모, 윤리관 등에서 모티브를 딴 캐릭터다. 다만 음모와 정치력 둘다 뛰어난 닉슨과 달리 로건은 평상시엔 무능한 주제에 음모를 꾸밀때만 유능해진다.[49]
영국의 SF 드라마(영드) 닥터후에서는 11대 닥터, 에이미 폰드, 로리 윌리엄스, 리버송 일행의 도움을 받아 사일런스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 때 아폴로 계획이 사일런스 퇴치에 활용되었는데, 타디스를 타고 닥터와 함께 51구역, 나사에 동행해 닥터가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극중에선 닥터에게 협력을 아끼지않으며 타디스에 같이 타기까지하며 꽤 좋은 이미지로 내내 나왔는데 나중에 헤어질떄 닥터에게 자기는 역사에 기억될것인지를 물어본다.
8.4. 소설/만화[편집]
해리 터틀도브의 여러 대체역사소설에서 카메오로 출연한다. 대부분 정직한 딕이나 정직한 리처드로 나온 사람이 이 사람의 패러디.
슈퍼맨: 레드 선에서는 직접 나오진 않지만 1963년에 대통령으로 있다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가 암살당한 후 미국이 이전 같지 않다고 한다.
갓 오브 하이스쿨 195화에 등장.여기서는 달에 남아있던 석가여래의 시신과 재천대성의 여의봉에 남아있던 DNA로 신의 군대를 만드는 프로젝트 갓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비밀로 부치기 위해 닉슨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는것으로 나온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미국의 대통령으로 등장해 CIA의 요원이 된 알란 엠마누엘 칼손과 대화를 나눈다. 거기서 칼손은 자신이 인도네시아에서 머물렀을 당시 자신의 친구인 니 위얀 락스미가 벌인 정치적 공작과 성공에 대해서 자세히 말했는데, 닉슨은 그 이야기를 매우 흥미깊게 듣는다. 훗날 닉슨은 그 공작들을 그대로 따라했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신문에서 본 칼손은 "당신은 미국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에서 정치를 했어야 했어. 그러면 확실히 성공했을텐데 말이야"란 평을 남긴다.
8.5. 게임[편집]
본격 독재 시뮬레이션 트로피코 4에서는 닉 리처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모습도 기자회견에게 질문하는. 본 항목 맨 위에서부터 두 번째 사진의 캐리커처 판이며, 그가 시도때도없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바로 'I'm not a crook!'. 처음에는 네브래스카 주의 주 의원으로 등장하며 플레이어에게 이것저것 지원을 해주다가 부통령이 되더니, 마침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자마자 자기가 대통령이 되고는 엘 프레지덴테를 케네디 대통령의 살해범으로 지목한다. 이 양반과 더불어 몇몇 국제 인사들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가카는 결국 세계를 뒤엎을 계획을 세워 끝에는 이 양반이 케네디의 살인범이라는 증거를 소련에게서 입수해 전 세계에 방송하고 성난 FBI 요원들이 그를 체포하지만 누군가의 공작으로 암살된다. CIA의 음모로 추정하고만 있을 뿐 진범이 누군지 알 수 없다고. 물론 엘 프레지덴테를 내내 괴롭히고 방해하며, 심지어는 핵 미사일을 트로피코에 떨구기까지 한다. 여기에 대한 트로피코 측의 대책이라는 게 참 대단한데, 풍력발전기 10개를 세워 그 동력으로 트로피코의 위치를 바꾸는 방법으로 핵 미사일을 피한다!'''
그런데 확장팩 모던 타임즈에서는 다시 살아나서 플레이어와 협력하자고 50,000$라는 거금을 달라고 한다. 이것을 던져주면 사라지는데 나중에 플레이어의 조력자가 나타나서 그는 원래 죽은 거 맞다라고 확인사살을 해준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에서 나오는 미국 대통령 마이클 듀건이 이 사람을 모델로 했다. 다만 시기를 잘 만나서 워터게이트까진 안 일어났고 임기는 무사히 마쳤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에서는 나치 좀비 맵인 'FIVE'[50] 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상당히 겁많고 찌질한 모습을 보여준다.
제이슨 매튜스(Jason Matthews)가 크리스천 레너드(Christian Leonhard)와 함께 제작한 보드게임인 1960: 대통령 만들기에서는 잘만 하면 존 F. 케네디에게 승리하고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
심슨 가족: 스프링필드에도 캐릭터로 나온다. 근데 여러 대통령 캐릭터들이 있는데 닉슨만 유일하게 악당 항목에도 포함된다.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창작 모드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1960년 대선 에서 승리하여 제35대 대통령이 된다.[51][52] 그후 민권법 문제와 미국-독일-일본과 3파전 냉전을 겪는다. 그러다 1963년~1964년 초반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퇴한다. 그후 부통령인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8.6. 기타[편집]
닉슨이 나오는 오페라도 있다. 현대음악 작곡가 존 쿨리지 애덤스의 1987년 오페라 데뷔작인 <중국에 간 닉슨>(Nixon in China)에 주연으로 등장한다. 1972년 닉슨의 중화인민공화국 방문을 소재로 했으며, 당연히 영부인 팻 닉슨, 헨리 키신저, 마오쩌둥, 장칭, 저우언라이도 함께 등장한다. 정치적인 사건을 주제로 했지만 분위기는 가벼운 편이다. 여기에 사용된 곡중에 The Chairman Dances 곡은 문명4과 루카 구아다니노의 아이앰러브에서도 쓰인다.
크리피파스타 위키인 SCP 재단에서는 SCP-2736으로 등록되었는데, 이 SCP는 그가 상원의원 당선 후인 1951년, 보헤미안 그로브[53] 에서 어떤 비밀의식을 통해 정치적 욕망은 사라지고 인간성만 남은 평범한 인간 닉슨과 정치적 욕망으로 똘똘 뭉친 권력의 화신 닉슨으로 나뉘어버렸다는 고인드립스러운 SCP이다. 즉 우리가 아는 대통령 닉슨 자체가 케테르급 SCP였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떡밥으로 냉전기 막바지 4명의 대통령[54] 들을 암시하는 것은 덤이다.
워치맨이나 퓨쳐라마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파시스트", "독재자" 등등의 비판을 많이 듣던 인물이다.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기자이자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의 원작 소설가로 유명한 헌터 S. 톰슨은 닉슨이 죽자 추모기사를 썼는데, 말이 추모기사지... 제목부터가 He Was a Crook (그는 사기꾼이었다). 다시는 미국 땅을 밟지 못하게 시체를 바다 저 멀리에 수장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9. 일화[편집]
중국 방문 중 저우언라이와 함께. 만찬을 위해 영부인, 키신저와 함께 젓가락질을 연습했다. 이때 건배주가 마오타이주였는데 마시고 눈물을 찔끔짰다고 알려진다. 사진에는 잘렸지만 옆에는 4인방의 일원인 부총리 장춘차오가 앉아 있었다.
당은 다르지만 28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을 대단히 존경해서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윌슨이 사용한 책상을 백악관으로 가져왔는데 이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을 어찌나 좋아했는지 항상 닉슨의 팔꿈치에는 책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외국을 방문하는 동안 너무 낡은 책상이라서 그랬는지 백악관 직원이 마호가니로 새롭게 꾸몄는데 돌아오자마자 오히려 그 직원을 갈궜다.
"빌어먹을. 시키지도 않은 짓을 왜 했나? 난 다른 대통령들처럼 바로 이 자리에 나의 흔적이 남기를 원한단 말일세!"
음모론 쪽에서는 케네디의 암살 배후로 지목하기도 한다.[55] 근데 텍사스 석유회사 출신이라 그런지 린든 B. 존슨도 지목된다.
캐나다의 피에르 트뤼도 수상에 시비를 걸었다가 나이아가라 폭포의 발전소를 끊기면서 미국판 잠가라 밸브에 굴욕을 당했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그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인 1965년의 일이다. 항목 참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손자가 이 사람의 사위다.[56][57]
많은 사람들은 모르지만 1974년 그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다. 그것도 백악관에 비행기를 충돌시키려는 계획으로. 무직자였던 새뮤얼 빅(Samuel Byck)은 닉슨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58] 여객기를 납치하려 했지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미국 대통령 암살(기도)범들 중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뮤지컬 어쌔신에서는 꽤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1953년 11월 13일, 부통령 시절 한국을 방문해 당시 정릉의 인수재에서 지내던 순정효황후와 20분 간 회견한 적이 있다.[59]
미국의 대통령들은 천주교도인 케네디와 조 바이든 두 사람을 빼면 모두 개신교도다. 그래서 이들도 일요일이면 예배에 참석해야하는데, 대부분 백악관에서 가장 가까운 라파예트 광장에 위치한 세인트 존 교회를 이용한다. 그래서 이곳은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 예배가 열리기도 한다. 여기서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얹고 다시 한번 선서를 하는 것.
그런데,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와 바이든 외에는 유일하게 여기서 취임식 예배 자체를 거절한 대통령이 있는데 바로 닉슨이다. 72년 선거 승리 후 세인트 존에서 예배를 거부한 것. 이 조짐은 이미 1969년부터 보였는데, 닉슨은 '68년 선거 승리 후 대통령으로써 당연히 일요일 예배에 세인트 존 교회로 출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백악관 내부에 목사를 초청해 예배를 보는 것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보수 기독교 우파의 본진급이었던 공화당원이었음에도 기독교 목사들을 비롯한 주류 기독교와 매우 사이가 나빴다.[60] 참고로, 재임기에 이런 식으로 세인트 존 교회 출석을 거부한 미국 대통령은 닉슨 외에도 1명 더 있는데, First Presbyterian church(일리노이 스프링필드 소재)에서 예배를 봤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있다. 그런데, 세인트 존 취임 예배를 거부한 4명 중 현직 바이든을 제외한 누구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으며 그 방식도 암살, 암살, 하야라는 방식이었다.
10. 여담[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대통령들 중 대선에서 한 번 패했다가 재도전해서 당선된 유일한 대통령이다.
- KBS의 前 기상 캐스터인 이익선은 1968년에 태어났을 적에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시간에 태어났다고 해서 닉슨의 "슨"을 본따서 "선"으로 이름 끝글자를 정했다고 한다.
- 닉슨이 실크 해트를 쓴 것은 부통령 시절로, 당시 대통령인 아이젠하워가 실크 해트를 착용했기 때문에 같이 착용했던 측면이 있다. 케네디도 실크 해트를 썼고, 린든 B. 존슨이 그 전통을 끝장냈다.
- 아내인 팻 닉슨과는 동갑. 1938년에 만나 1940년 6월에 결혼했다. 둘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연애편지가 공개되었다. # 아내와의 금슬이 좋아서 항상 아내와 다닐 정도로 각별했다. 특히 아내 팻이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닉슨은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흐느끼며 울 정도로 크게 슬퍼했다. 나중에 아내가 사망한지 10개월 뒤에 닉슨도 사망한다.
- 국내에서 중도~중도우파기에 고전적 자유주의자나 보수자유주의자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도 있지만 이념과 정치적 스펙트럼은 완전히 별개이다. 위에 보면 알 수 있듯이 전형적인 케인스주의적 경제정책을 폈기 때문에 고전적 자유주의자는 말도 안되며, 보수자유주의도 학술적으로 명시된 래퍼런스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남부전략이나 과거 매카시즘 시대의 커리어 등을 보면 사회자유주의자라 보기도 어렵다. 즉 미국식 표현 그댜로 그저 온건 보수주의자(moderate conservative)일 뿐이지 절대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 율리시스 S. 그랜트와 같이 임기 도중 전직 대통령의 장례를 가장 많이 경험한 대통령이다.[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