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산파 숙청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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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66년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갑산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사건.
북한에서는 '1967년 반당반혁명종파사건\'으로 불린다.
2. 전개[편집]
1953년에 남로당파 숙청과 1956년에 연안파, 소련파가 숙청된 '8월 종파사건'을 통해서 만주파는 정국에 대한 주도권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갑산파라는 강력한 견제세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만주파들은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갑산파는 량강도[5] 갑산군에 근거를 둔 계파로서, 김일성이 주도하는 만주파에게 있어서 최대의 숙적이었다. 김일성의 유력 후계자이자 그의 장남인 김정일 역시도 눈엣가시로 여겼다. 갑산파의 리더는 박금철이었는데, 그의 배우자인 서채순에 관한 선전 영화인 <일편단심>이 제작되자 당 조직지도부 중앙지도과 중앙기관담당 책임지도원이었던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에게 이 사실을 고자질했고, 김일성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하여 갑산파를 대거 들어내고 당내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기사(아시아투데이) 논문(통일연구원)[6] 박금철과 리효순 등 갑산파 핵심 인물들은 출당되고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는 등 고초를 겪다가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써 조선로동당에는 김일성을 추종하는 '만주파'밖에 남지 않았으며, '김일성 개인 정권 세습 투쟁의 종지부를 찍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1972년 12월 27일에 사회주의헌법의 공포와 주체사상을 국가 공식 이념화 하면서, 북한은 어떠한 견제세력도 존재하지 않는, 미증유의 독재 정권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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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 내에서 통용되는 명칭이다. 오피니언(자유아시아방송)[2]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가 진행된 기간이다. 이 회의를 통해서 김일성은 갑산파를 완전히 도려냈다. 논문(경희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3] 반대로 보자면, 갑산파는 김일성의 개인 우상화에는 거부감을 보이던 집단이다. 그야말로 '도긴개긴'.[4] 갑산파는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관심을 갖던 계파이다. 그걸 만주파에서는 "반동적인 봉건주의 사상을 퍼뜨린다."라고 비판하며 자신들의 통제 밖에서 사상적 흐름을 조직하려는 시도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며, 숙청의 구실로 삼았다.[5] 원래는 함경남도였다. 그런데 1952년 북한 정권에 의해서 '군면리 대폐합'이 단행되고 량강도가 생겨나게 되었다.[6] 통일연구원(2001), '김정일 연구: 리더쉽과 사상(Ⅰ)', 연구총서 01-32, 서울: 통일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