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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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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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1차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 과정
3. 2차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 과정
4. 3차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 과정
5. 결과 및 의의
5.1. 비관론
5.2. 반론
5.3. 낙관론
6.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이란 북한의 1차 5개년계획(1957 ~ 1961년) 과정에서 기계제작공업을 발전시켜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겨난 기존의 공작기계를 본래 업무에 추가해서 사용해 새로운 공작기계를 생산하자는 것을 핵심으로 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다.


2. 1차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 과정[편집]


1958년 9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제시된 것으로 김일성의 요구에 따라 주을아마공장에서 만능선반을 견본으로 잡으면서 1959년 한 해 동안에 50여대의 공작기계를 추가 생산하면서 이것이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는 식으로 전개가 되었다.
이들 산업에 배치할 공작기계를 확보하기 위해서 13,000여대의 공작기계를 평양과 해주, 신의주 등 중소형 공작기계 생산 공장과 농기계 생산 공장에 배치하면서 공업과 농업의 기계 수요를 보장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8m 수형선반과 3,000톤급 프레스, 400톤급 유압 프레스를 제작하면서 대형 굴착기와 양수기, 기중기, 불도저와 같은 중장비와 농기계도 생산하면서 트랙터는 설계 30일 만에 자동차는 설계 40일 만에 첫 시동에 성공하였다고 언급하게 되었다.
연구개발은 전기불꽃가공 등 정밀가공과 지그제작, 치차가공, 공구 창안 등 공작기계의 성능 개선과 생산력 제고 기술 그리고 기계설비의 조립생산기술력을 갖추면서 모든 중장비와 기계 설비를 역설계하면서 모방생산을 실현한 점이 기술 개발의 특징으로 교훈이 되었다.


3. 2차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 과정[편집]


특히 1960년대에는 희천공작기계공장은 유압모방선반과 밀링머신, 고속정밀만능선반 희천-1호와 유압변속선반인 희천-3호를 모방생산하게 되면서 상당한 기술을 축적하고 있으며 구성공작기계공장은 고성능만능선반 구성-3호를 생산하게 되었다.
평양베어링공장은 750형 평면 연마기를 개발하고 있으며 대안전기공장은 1,000톤 프레스와 80톤 편심프레스 그리고 1.5m 수형선반과 만능보링머신을 생산하는데 성공을 이룩하게 되었다.
기술개발과정을 보게 되면 공작기계의 요소기술과 생산성 증대 및 성능제고, 불연속반결합위치제어체계와 수자프로그램장치를 연구하고 최신프로그램선반과 프로그램 터릿밀링머신 모방기술을 습득하는데 성공을 이룩하게 되었다.
1963년 시운전 중으로 알려져 있는 자동선반인 프로그램 터릿밀링머신이 구성-1호로 1967년에 명명하는 이후에 분당 회전속도 700rpm에서 1,400rpm으로 성능이 우수한 구성-2호, 그리고 분당 3,000rpm으로 개량한 만능고속선반 구성-3호 등이 1년 이내에 개발하게 되었다.
특히 프로그램자동선반도 마찬가지로 1963년에 개발해서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에서 보도하고 있으며 적어도 천공테이프 혹은 천공카드로 제어가 가능하다고 김일성이 시찰한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과 구성공작기계종합공장을 방문하면서 직접 증언하게 되었다.
1975년에는 김책공업종합대학에서 수치제어밀링머신을 개발하게 되면서 김일성에게 칭찬을 받은 바가 존재하고 이후 김책공업종합대학 관계자들은 개발한 수치제어밀링머신을 발전시키면서 희천-5호와 구성-3호 등 실용화제품완성에 적극 기여하게 되었다.
공작기계공장의 대대적인 확장에 비해서 기계설비보급이 따라가지 못하게 되면서 김일성은 1971년에 2차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을 지시하고 또 다시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을 결정하게 되었다.
특히 1975년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은 20,000대의 공작기계를 생산하게 되었으며 구성공작기계종합공장은 선반 계열의 공작기계 생산을 완성하고 그리고 룡성기계연합총국도 참여하게 되면서 총 35,000대의 공작기계를 생산하는데 성공하게 되면서 성공적인 목표로 달성하게 되었다.
신개발한 공작기계는 다축함교체종합가공반, 유압모방선반, 광학자리표볼링, 임펄스프로그램자동선반, 프로그램 터릿밀링머신인 구성-1호 등 출시하는 데 성공을 이룩하면서 NC 공작기계의 시초인 1952년 이후에 개발한 천공카드로 제어하는 자동공작기계생산에 성공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만큼 상당한 과학기술로써 발전하게 되었으며 특히 김일성과 많은 총리들[1]이 많은 현지지도나 현지료해하는 과정에서 많은 조언을 하게 되었으며 특히 6개년 계획 이후로써 점차 경제개발계획이 침체하게 되는 과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4. 3차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 과정[편집]


1984년까지 공작기계 생산을 연간 50,000대 수준으로 증가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침체하고 있는 경제를 저지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경제개발계획에 미달하자 결국 1985년 6월에 김일성은 다시 한번 3차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을 전개하게 되면서 대형공작기계, 특수공작기계, 유압모방선반 등 반자동 공작기계 생산 및 산업용 로봇의 생산이 가능한 1,000여 종의 근대적 공작기계를 개발하게 되었다.
특히 북한이 개발한 최초의 NC 모방선반인 구성-104호가 이 시기에 출현하게 되었으며 제2차 7개년 계획 기간 및 완충기 동안 공작기계의 양적 확보는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밀도 및 자동화 등 품질적 측면은 여전히 낙후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성-104호 NC 모방선반은 김정일은 1986년 10월 4일 기계공업의 수준을 선진국 단계로 향상시키기 위해서 현대적 NC 모방선반의 제작을 구상하면서 구성공작기계종합공장에서 시제품 제작을 명령하게 되었으며 당시에 공장의 기술자들은 김정일이 공작기계의 도면을 특별하게 입수해 전달하게 되면서 설계도면이 요구하는 정밀도의 증가와 자동화 수준을 보장하기 난감하는 수준이나 불과 4개월만인 1987년 1월에서 1987년 2월에 원종과 동일한 수준의 시제품을 생산하게 되었다.
그만큼 NC 공작기계의 최초로 진정한 NC 모방선반을 개발하게 되었으며 1988년에는 구성공작기계종합공장에 4월 3일 분공장을 건설하게 되면서 자동화한 NC 수자조종장치 등은 국가과학원 조종기계연구소에서 1988년 컴퓨터 제어반을 자체 개발하게 되면서 과학원 전시관에 출품하고 있다.
10월 5일 자동화종합공장과 6월 1일 청년전기종합공장도 수치제어장치 분공장을 설립하면서 공작기계와 제어장치의 일체화를 실현하기 위한 종합적노력을 강구하게 되면서 기존 공장에서 로봇새끼치기운동을 확대하며 로봇생산과 품종을 증대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등 기계공업의 품질적 수준의 향상과 자동화부문의 발전에 중점을 보유하게 되었다.
새롭게 생산하는 제품은 밀링머신과 8축 크랭크축종합가공반, 20m 대형선반, 18m 수형선반, 수치제어볼링, 수치제어방전가공기, 수치제어밀링머신, 수치제어자동선반, 수치제어평면연마반, 만능탁상밀링머신, 만능선반, 곡축 및 원통연마반, 16축 볼링머신, 신형볼반, 정면반, 무심연마반, 실린더종합가공반, 라이터로라자동가동반, 초완성가공반 등을 생산하게 되었다.
북한은 1988년 9월에 공화국 창건 40돌 기념 공작기계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으며 여기에는 수자조종선반과 유연생산체계, NC 종합가공반과 각종 연마반, 치차가공반, 프레스, 선반, 밀링머신 등이 출품하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김정일은 이 전시회를 시찰하면서 공작기계산업의 활성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1988년 11월에 공작기계공업과 전자, 자동화공업을 빨리 발전하는데에 대하여를 가지고 당중앙위원회 제6기 제14차 전원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1986년에 북한이 생산한 대형 및 특수공작기계 2,400여대와 120여 종의 일반공작기계인 18,500여대, 프레스와 형단조설비 2,000여대를 비롯해서 23,000여대의 공작기계를 생산하게 되면서 당초 계획하고 있는 목표치의 50%를 수행하는데 성공하였다.
김정일도 공화국 창건 40주년에 NC 모방선반의 출시를 지시하게 되면서 아울러 과학원 조종기계연구소와 자동화연구소,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과 구성공작기계종합공장의 과학기술자로 새로운 공작기계 개발생산연구집단을 조직하도록 명령하고 있었다.
과학원 조종기계연구소는 자체 개발한 컴퓨터 제어반을 출시하게 되면서 그동안 희천공작기계공장과 구성공작기계공장은 자동공작기계용 자동제어반을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으며 1992년부터 NC 볼링과 NC 면방전가공기, 만능가공반 그리고 자동공구교환장치가 탑재하고 있는 NC 수평가공중심반과 NC 수직종합가공반, NC 종합가공반, NC 5면종합가공반, NC 줄방전가공반, NC 모방선반 구성104-60형, 전기불꽃가공반(전불-500)이 개발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NC 제어장치을 계속 수입해야 하게 되면서 구성-104호는 유압추종의 모사본을 공작물에 따라 매번 변경하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주축매듭의 다목적, 종합최량설계를 실현하고 교류주축서보장치와 유압변을 자체 생산하며 3축 동시제어의 NC 체계로 변경하게 되었다.
기계공업부는 수치제어볼링과 수치제어방전가공기, 곡축 – 원통연마반, 초완성가공반과 같은 자동공작기계모델을 도입하고 있으며 희천공작기계공장과 구성공작기계공장은 1986년부터 개발을 시작하게 되면서 1988년에는 유압추종장치의 NC 모방선반으로 구성-104호를 출시하고 있다.
한편 조종기계연구소는 1988년 개발한 컴퓨터제어반을 기반으로 국내 조건에 적합한 새로운 수치제어장치인 조종-93을 1993년에 개발 및 완성하게 되면서 대량생산준비를 구비해 계열생산하고 있다.


5. 결과 및 의의[편집]



5.1. 비관론[편집]


사실상 토법고로에서도 나타나는 것이지만 공산주의 하에서 전문 지식이 동반되지 않은 이상에 한대가 한대를 생산해서 양을 증가한다는 무식하게 짝이 없는 사고방식 하에서 주먹구구적인 민간 동원하에 대량 생산은 기본적인 기술, 자원적인 역량이 받치지 않는 이상 그 결과물이라는 것이 형편없다는 것이 기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특히나 품질보다 생산량을 우선시하고 속도전을 강조하는 풍조는 그것을 더더욱 악화시키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면서 더군다나 아무리 잘 포장해도 이 운동은 결국 수많은 위성국가 및 개발도상국에서 행해지던 해적판 장비의 복제와 내지는 역공학일 뿐으로 그것도 어떠하든 적당한 가격에 탄약만 발사되면 된다는 마인드인 총기와 다르게 이쪽은 정밀공작기계이면서 세번이나 망한 걸 본다면 그 한계는 명확하게 작용하고 있다.


5.2. 반론[편집]


그러나 북한도 교훈을 심하게 깨달은 사건이 1967년에서 1970년대 이후인 도서정리사업과 3대혁명소조운동이며 특히 이것조차도 상당부분 파장이 심하게 오면서 특히 김일성과 김정일이 정말로 동유럽의 발전을 보면서 1980년대부터 상당부분 문화개방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0년대에 미국 도서는 물론 디즈니 만화책이나 서방권 소설들을 북한 정부가 자체적으로 관리하고 배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군립도서관과 시립도서관, 도립도서관까지 대부분 유료로 대출하면서 구독하고 있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VCD를 발매하게 되면서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그리고 픽사 애니메이션을 바탕으로 문화개방을 하며 외국 영화들인 중국 영화, 인도 영화, 동구권 영화들을 개방해 많은 사람들이 VCD 녹화기나 혹은 DVD 녹화기를 바탕으로 많은 시청을 주민들이 여가를 보내고 있다.
물론 불법적으로 시청하는 분류들이 존재하기도 하나 그러한 것을 법제화하면서 시청만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 목란비데오라는 기관을 통해서 판매하는 외국 VCD 혹은 외국 DVD를 바탕으로 많은 문화개방을 하게 되었다.
역시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로 1983년에 동구권 시찰로 많은 충격을 받은 김일성과 김정일은 도서개방은 물론 정리되어 있었던 도서들을 다시 재출간하게 되면서 과학기술도서들을 접근할 수가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많은 전자공학에 관련된 도서나 NC 공작기계에 관련된 도서 그리고 국가과학원과 국방과학원에 보급하고 있는 중앙과학기술통보사 같은 곳에서도 대부분 설계도면을 확보하거나 그런 것을 대부분 활용할 수가 있도록 김일성과 김정일이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그만큼 공작기계의 개발 과정이나 군사장비의 개발 과정 역시 북한 국가과학원의 연구사나 혹은 국방과학원의 연구사들을 바탕으로 특별접근을 통해서 많은 도면을 확보하게 되며 개발하는 과정이 포함하고 있다.[2]
현재 북한이 개발하고 있는 생산설비들은 중앙과학기술통보사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개발한 많은 설비들이 존재하면서 특히 페수지로 생산한 대용연유 같은 자동차나 트랙터에 가동할 수가 있는 설비들이나 알루미늄이나 아연등을 제련할 수가 있는 열풍 용선로도 대부분 중앙과학기술통보사 혹은 제2중앙과학기술통보사에서 나온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공작기계들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는 공작기계이면서 특히 자동공작기계나 반자동공작기계 그리고 NC 공작기계, CNC 공작기계의 개발도 이러한 도면을 확보한 중앙과학기술통보사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광명망에서 대부분 다운로드하고 있기 때문이다.


5.3. 낙관론[편집]


북한은 1차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에서는 상당부분 공작기계를 자체로 생산하게 되었으며 많은 만능선반과 만능밀링머신을 기계공장에 공급하면서 CNC 관련 기술로써 개발되는 1차 과학기술발전 10개년 전망 계획이 성공하였으나 2차 과학기술발전 10개년 전망 계획이 도서정리사업으로 퇴색되었으며 이때만 하더라도 상당부분 프로그램 터릿밀링머신 중에 하나인 구성-1호 프로그램 터릿밀링머신과 구성-3호 만능선반 등 사실상 천공테이프로 제어하는 것에 성공하게 되며 자동선반이나 터릿밀링머신을 개발하는데 성공을 이룩하게 되었다.
물론 역공학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때만 하더라도 상당부분 소프트웨어 기술이 낙후된 것은 엄연한 진실로써 이때를 계기로 전자계산기인 MSX 퍼스널 컴퓨터를 도입하게 되면서 이때를 계기로 천공테이프로 제어가 가능한 NC 공작기계를 자체로 생산하며 1978년에는 수치제어밀링머신을 개발하였으며 1985년에는 수치제어평면연마반을 개발 및 출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3년의 일로 인하여 결국 많은 중앙과학기술통보사와 인민대학습당에 존재하는 많은 도면과 과학전문도서들이 재출간하게 되면서 연구원이라는 직책만 있다면 어느정도 특별히 접근해서 산업용 로봇을 제조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가 있다고 밝혔다.[3]
그만큼 일반 도서는 물론 과학전문도서들까지 사실상 접근이 가능하게 되면서 상당부분 연구원들이라면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이나 로봇새끼치기운동 때 많은 도면을 획득하거나 김정일이 직접 당자금으로 공작기계 도면과 설계도를 구성공작기계종합공장과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에 전달하면서 NC 공작기계를 제조하라는 지시도 하달한 바가 존재하고 있다.
사실상 네달만인 실제 1987년 2월에 구성-104호 NC 모방선반을 제조하는 데 성공을 이룩하게 되면서 6월 1일 청년전기기구공장에서 수치제어분공장을 설립하고 10월 5일 자동화종합공장에서도 유연생산체계용 수치제어장치와 자동화 설비 등을 개발하는데 성공을 이룩하게 되었다.
1978년때는 사실상 2차 과학기술발전 10개년 전망 계획이 정상적으로 진행할 때이지만 사실상 도서정리사업과 3대혁명소조로 인해 파탄난 때임에도 사실상 수치제어장치와 수치제어밀링머신 개발에 성공하였다는 점을 볼 때에 상당한 기술을 확보한 것이 진실로써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1987년 이후로는 로봇새끼치기운동이 시작되면서 많은 로봇들이 출품되었고 문형직교좌표운반로봇, 기대봉사로봇, 관절형 조립로봇, 관절형 용접로봇 등을 제조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 규모와 구체적인 성능에 대해서 밝히지 않았다.
만경대공작기계공장의 제도로봇과 희천공작기계공장의 운반용 로봇, 3월 25일 공장의 무인조종운반차와 창고관리로봇,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의 플라즈마 절단 로봇, 원산철제일용품공장의 도금유연생산체계, 김책공업종합대학의 관절형 로봇, 영광철제일용품공장에서 열간압연봉사로봇을 출품하고 있다.
대안중기계연합기업소의 경로 및 정류소 수감식 무인조종운반차, 구성공작기계종합공장의 선삭가공유연생산세포와 밀링머신 봉사용 로봇과 수자조종선반 봉사용 로봇, 원산철도차량연합기업소의 화차도장로봇, 룡성베어링공장의 화차베어링조립로봇과 베어링볼열처리로봇, 김책제철연합기업소의 용융아연도금로봇 등도 눈길을 받게 되었다.
김책공업종합대학에서 2002년에 도장로봇과 무인운반차를 개발하면서 구성공작기계종합공장에서는 FMS-630 함가공유연생산세포와 FMC-250 함유연생산세포를 조종기계연구소은 다관절 산업용 로봇과 무인운반차를 개발하면서 업그레이드한 전방향 주행식 무인운반차도 개발하였다.
1999년에는 김책공업종합대학에서 관절형용접로봇을 개발하였으며 2017년에 역시 관절형 로봇을 개발하면서 조종기계연구소에서는 열처리봉사로봇을 발명공보에 등록하며 2016년에는 소재공급용로봇과 1986년에는 전자자동화설계연구소에서 관절형 로봇을 개발하게 되면서 1990년에는 청진제강소에서 고합금강압연로봇을 전천탄광연합기업소에는 베어링생산로봇을 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 소설상의 정보로 봐서 상당부분 NC 장치를 기반으로 한 산업용 로봇으로 추정하면서 상당한 기술을 확보하는데 성공하며 1990년에 전국 3대혁명소조 로봇 전시회가 개관하게 되었다.
북한 경제 각 단위에 파견된 3대혁명소조원들이 기술자와 노동자들과 협력, 창안 및 제작한 1,480여대의 로봇과 600여종 1,700여개의 전자자동화부품 및 전자자동화기구가 출품되었다는 것이다.[4]
동독철강협회의 시멘트산업 제분구 생산기술과 ZTM 산업용 로봇 기술이전(1985년 7월)으로 북한은 동독의 로봇기술에 관해서 대단한 흥미를 갖고 있었으며 동독의 산업용 로봇 기술이전(1985년 10월)으로 중점은 산업용 로봇 생산 및 도입과 리딩카드 생산이었다.
북한은 더 나아가 동독에서 생산되고 있는 센서 기술, 주조로봇 생산 기술, 로봇 언어 등의 기술을 이전받게 되었으며 북한에서는 1987 ~ 1988년까지 승용차와 철도화물차량 도장로봇을 생산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평양철도대학에서는 약20명의 교수나 연구원이 도장로봇 개발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북한이 생산하고 있는 산업용 로봇은 1. FANUC 집게를 가진 장전로봇 2. IR60E(IRB-6) 관절식 아크용접로봇 3. 수력장전로봇 등이다.
이중에 전자 2가지는 모방생산이며 후자는 자체개발 및 생산하였다고 하나 많은 약점을 갖고 있으며 1986년 북한은 동독이 소장한 IRS-600, IRS-651, IRS-713 산업용 로봇 등의 기술이전을 요구하였으며 또한 북한은 동독으로부터 조속히 산업용 로봇 개발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수입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하였다.매일경제 기사
이미 수치제어장치는 물론 지금은 CAM과 CAD로 활용한 CNC 장치를 활용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유연생산체계와 무인화를 실현하고 있으며 그 기반을 구축된 과정이 바로 1988년과 1990년에 벌어진 3대혁명소조 로봇 전시회와 공작기계 전시관에서 소개한 산업용 로봇이나 유연생산체계 그리고 NC 공작기계를 바탕으로 CNC 공작기계를 어느정도 자체 개발할 수가 있었다.
그만큼 과학기술의 발전이 어느정도 경제에도 영향을 미쳐서 2000년을 기점으로 어느정도 북한 경제가 복구가 가능하였으며 더군다나 NC 공작기계를 넘어서 2001년부터 시작된 CNC 공작기계 정책에서 상당한 투자가 있었다는 점이다.[5][6]


6. 참고 자료[편집]


  • 북한의 주요 분야별 과학기술현황 조사 - 홍성범 | 과학기술정책연구원 | 2002.01
  • 북한의 과학기술의 수준 분석 및 전략적 활용 방안 도출 연구 - 나승혁 |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 2015. 12
  • 북한 산업혁신체제 연구 : 철강 및 공작기계산업 중심으로 - 강영실 | 북한대학원대학교 | 2015.06
  • 북한의 개인수공업에 관한 연구 - 최인제 | 북한대학원대학교 | 2017.12
  • 북한의 IT 산업의 개발 역사와 시사점 - 김종선 | 과학기술정책연구원 | 2015.08
  • 발명공보 | 발명총국 | 2012.01.19 ~ 2019.06.05
  • 발명공보 | 발명총국 | 1991.07 ~ 2014.05
  • 발명공보 | 발명총국 | 1987.01 ~ 2000.12
  • 조선일보 | 1987.08.15
  • 매일경제 | 1988.09.06
  • 동아일보 | 1990.07.02
  • 경향신문 | 198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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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 김일 총리와 박성철 총리 등 상당부분 방문하면서 많은 현장시찰을 하게 되었다.[2] 그러하지만 현재는 국가과학원의 중앙과학기술통보사에서는 광명망에는 대부분 유료로 구매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이것마저도 특별 접근이 없어지고는 있다. 물론 국방과학원 같은 경우는 아직도 접근이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말이다.[3] 실제로 탈북자 김주원이 밝힌 3대혁명소조 로봇 전시회의 일화중에서 밝힌 일에도 인민대학습당의 과학전문도서를 접근해서 도면과 제작일을 대행해서 당원이 될 수가 있다고 밝혔다.[4] 이때 만경대공작기계공장의 제도 로봇과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의 운반용 로봇, 3월 25일 공장의 무인조종운반차와 창고관리로봇을 서평양기관차대에서는 관절형 아크용접로봇을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에서는 플라즈마 절단 로봇을 개발하게 되었다.[5] 물론 어느정도 당자금으로 인민경제를 먼저 복구시켜야 그런 과정이 존재하지 않냐고 하겠지만 북한 주민들은 애초부터 국가에 기대하지 않았으며 자체로 농민시장에 판매하면서 어느정도 여건을 만들어 돈주가 되거나 혹은 먹고살만하면서 사실상 이때부터 외국풍이 찾아오게 되었다.[6] 북한도 불법외국영화 통제를 담당하는 109상무의 활약도 있었지만 결국 어느정도 VCD를 도입해 목란광명회사에서 외국영화와 외국스포츠경기 그리고 외국만화영화 및 아동영화를 발매하며 주민들에게 외화로 판매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