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로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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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정당
대한제국 ~ 미군정
(1897 ~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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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bgcolor=#dcdcdc,#222> ||<|8><-2> 공산정당 ||<-7> 조선의 붕당 ||<|10><bgcolor=#dcdcdc,#222> ||
||<-5><bgcolor=#6a1309> 황국협회 ||<-2><bgcolor=#87ceed> 독립협회 ||
||<-7><bgcolor=#ffC87C> 신민회 ||
||<-7><bgcolor=#005ba6> 대한민국 임시정부 ||
||<|7><bgcolor=#fffff0>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3><bgcolor=#f02815> 의열단 ||<|3><bgcolor=#fff8dc> 조선혁명당 ||<|2><bgcolor=#00008b> 한국독립당 ||<-2><bgcolor=#00008b> 한국독립당 ||<-2><bgcolor=#f5deb3> 대한인국민회 ||
||<bgcolor=#f0fff0> 한국혁명당 ||<|2><bgcolor=#00008b> 한국독립당 ||<bgcolor=#90ee90> 대한인동지회 ||<bgcolor=#007dc2> 흥사단 ||
||<-2><bgcolor=#722F37> 신한독립당 ||<-2><bgcolor=#ffb6c1> 신간회 ||
||<-4><bgcolor=#ff8200> 민족혁명당 ||<|2><bgcolor=#80ff00> 한국국민당 ||<|2><bgcolor=#00ffff> 흥업구락부 ||<|2><bgcolor=#fff000> 수양동우회 ||
||<bgcolor=#90253f> 경성 콤그룹 ||<bgcolor=#ffbb00> 조선건국동맹 ||<bgcolor=#dc143c> 조선민족혁명당 ||<bgcolor=#ffdb58> 조선혁명당 ||<-2><bgcolor=#4c516d> 한국독립당 ||
||<bgcolor=#d82018> 전국평의회 ||<bgcolor=#da251d> 건국준비위원회 ||<bgcolor=#c9062a> 조선독립동맹 ||<|2><-4><bgcolor=#4c516d> 한국독립당 ||<|2><bgcolor=#0000ff> 독립촉성중앙협의회 ||<bgcolor=#7cfc00> 조선민족당 ||
||<bgcolor=#cc0000> 조선공산당 ||<bgcolor=#da460d> 조선인민당 ||<bgcolor=#c70125> 남조선신민당 ||<|4><bgcolor=#008000> 한국민주당 ||<colbgcolor=#f00000> 조선민주당 ||
||<|3><bgcolor=#353839> 독립노농당 ||<-3><bgcolor=#cc0000> 남조선로동당 ||<|3><bgcolor=#27176f> 대동청년단 ||<|3><bgcolor=#4f7fd4> 조선민족청년단 ||<|3><bgcolor=#ffffe0> 청년조선총동맹 ||<|3><-2><bgcolor=#1271b5> 대한독립촉성국민회 ||<|3><bgcolor=#FF0000> 서북청년회 ||
||<|2><bgcolor=#cc0000> 남조선로동당 ||<-2><bgcolor=#e31910> 사회노동당 ||
||<-2><bgcolor=#e31910> 근로인민당 ||
|| 진보정당 || 조선로동당 (남로당파) || 진보정당 || 조선로동당 (연안파) ||<-7> 보수정당 / 민주당계 / 진보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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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남조선로동당 당기.svg
남조선로동당
명칭 표기
남조선노동당 (표준어)
南朝鮮勞動黨 (한자)
Workers' Party of South Korea (영어)
약칭
남로당
창당일
1946년 11월 23일
해산일
1949년 6월 24일 (조선로동당으로 신설 합당)
이념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목적
인민민주주의 정부 수립[1]
스펙트럼
극좌
위원장
허헌
부위원장
박헌영, 이기석
당원 수
약 377,000명
통합한 정당






(1946년 11월 23일 신설 합당)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기관지
노력인민
1. 개요
2. 결성
3. 사회노동당•근로인민당과의 관계
4. 남한
4.1. 활동
4.2. 와해
4.2.1. 김삼룡 이주하 사건
5. 북한
5.1. 활동
5.2. 숙청
5.2.1. 남로당원 미국 간첩설에 대한 미국 비밀문서
6. 대한민국 체제 형성과 남로당
7. 주요 인물 및 단체



1. 개요[편집]


1946년 11월 23일 서울특별시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등 3당 합당으로 결성되어 초창기에는 대중 정당을 지향했으나, 결국에는 공산주의 정당이 되었다. 3당 합당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조선공산당의 계보를 잇는 정당이다. 잘 알려진 약칭은 남로당.

대한민국과 북한에서 남로당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래 대한민국 국민 형성 시기의 '빨갱이'가 사실상 이 남로당이다. 북한도 이들의 지도부를 숙청하며 체제를 확립했다.

'빨갱이'란 단지 공산주의 이념의 소지자를 지칭하는 낱말이 아니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 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 죽음을 당하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국가에 대한 헌신의 증표로써 국민들의 땀만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땀'이 국민으로의 포섭과 충성의 증표라면, 배제된 쪽에는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의 '피'가 흘렀다. 대한민국 국민 형성의 역사는 장미빛 대로가 아니었으며, 그 길은 피로 물들여져 있었다.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2. 결성[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선공산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5년 8.15 광복 이후 항일투쟁 공로를 대중에게 인정받은 조선공산당은 합법정당이자 최대정당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으로 전국에 노동자 조직을 만들어놓았기에 금방 전평 등의 노동조합도 만들 수 있었다. 같은 시기 반파시즘 투쟁 공로로 프랑스 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이 잘 나간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좌익 정치세력은 여운형 중심의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까지 하였으나 미군정의 탄압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집결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공화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제시기에도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 대한 반공주의 선전이 있었지만 공산주의자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 통치하에서 국내외 사회주의자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반대하며 견결한 투쟁을 지속한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좌익 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사회주의 이론이 널리 확산되어서라기보다는 독립투쟁에서 보여준 사회주의 세력의 지속적 투쟁이 대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란 민족 독립투쟁의 전위에서 활동한 사람들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는 해방 후 좌익 활동의 튼튼한 밑거름이 되었다.

1945년 말부터 전개된 이른바 신탁통치 파동은 좌익의 이미지를 바꾸어 놓은 계기였다. 우익 세력은 소련이 주장한 신탁통치에 좌익이 찬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좌익 세력을 친소주의자=반민족주의자=매국노로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 소련은 신탁통치를 제안하지도 않았다. 장기간에 걸친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었다는 사실이 몇 달 뒤에 알려졌지만 극우 세력의 선전은 여전히 힘을 발휘했다.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미군정은 1945년 말까지 이승만, 김구 계열을 적극 지원했지만, 여론은 최악이었다. 우익세력은 민중들로부터 지지기반이 약했으나,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신탁통치 오보사건으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히 좌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만든 것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라고 추정되는데《'빨갱이'의 탄생》에서는 거의 안 다룬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6년 5월 미군정은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만들어 조선공산당을 사실상 불법화했고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사건으로 정치활동이 힘들어졌다. 다만 이때까지도 공산주의자를 비인간으로 보는 '빨갱이' 개념은 없었다.[2]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이며 정판사 사건 재판 진행중인 1946년 8월에 미군정이 실시한 국민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국민 중 약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저 시대 사람들이 경험한 자본주의는 일본 제국주의뿐이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아래 설문조사는 미군정이 통치한 지 2년이 되어가는 1947년 7월 6일 시행된 점, 이미 파괴된 인민위원회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점을 볼 때 단순히 국호를 묻는 투표가 아니라 조선인민공화국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신임투표이다. 즉 당대 대중은 김구이승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이미 미군정이 해체한 지 오래된 여운형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에 대한 선호를 보여준다.

(1) 국호는?
1위
조선인민공화국
1708표
70%
2위
대한민국
604표
24%
3위
기타
8표
1%
4위
기권
139표
4%
(2) 정권 형태?
1위
인민위원회
1757표
71%
2위
종래 제도
327표
14%
3위
기타
262표
10%
4위
기권
113표
5%
(3) 토지개혁 방식?
1위
무상몰수 무상분배
1673표
68%
2위
유상몰수 유상분배
427표
17%
3위
유상몰수 무상분배
260표
10%
4위
기권
99표
5%
1947년 7월 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조선신문기자회가 서울시내 중요지점 10개소에서 통행인 2495명에게 실시한 여론조사출처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선호도가 위와 같다면 아래는 미군정에 대한 선호도를 보여주는 여론조사이다.

(1) 군정에 대하여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1위
기권
4686명
98%
2위
위생 시설
96명
2%
(2)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1위
식량 정책
2534명
53%
2위
산업 운영과 주택 관리
1482명
31%
1946년 8월 11일 한국여론협회가 종로, 본정 입구, 노량진에서 통행인 478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출처

정판사 사건과 그 이후 이어진 탄압에 대해 공산당은 9월 총파업으로 항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미군정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대중에 의해 10.1 사건이 일어난다. 박헌영과 공산당 주요 간부는 1946년 9월 7일 체포령을 받자 월북한다.

이런 상황에서 3당 합당으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3당 합당을 원했다. 결과적으로 공산당 대회파(=반박헌영파)는 사회노동당을 결성하였고 같은 시기에 공산당 간부파(=박헌영파)는 남로당을 결성하였다.자세한 정보

여운형과 박헌영의 동기를 알기 위해서는 소련군정 문서를 봐야 한다. 로마넨꼬가 스티코프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여운형은 본래 3당 합당에 반대했으나, 김일성에게 설득당해 3당합당을 수락한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귀하와 박헌영, 백남운 및 기타 저명한 정치인들의 지도하에 좌익 정당들의 합당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만일 이 사업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중지해야 한다.”

김일성의 이 발언은 여운형의 아픈 곳을 건드렸습니다. 여운형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돌며 한참 만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합당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로동당으로 합당할 것이다. 남조선으로 돌아가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완수해 낼 것이다. 나는 로동당의 지도자가 될 것이고 우리 당은 남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당이 될 것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나를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체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9월 총파업의 지도자를 체포하려 한 결과를 보고 있다.”

로마넨꼬가 스티코프에게 보낸 편지 중#


김일성이 입법기관 참여에 대해 반대하자 여운형은 한 발짝 물러섰다. 그(여운형)는 "미국에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한편 그들을 치는 화전양면 전술을 당의 노선으로 채택해야 한다"며 북로당이 반대하면 입법기관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당신이 좌익들로 하여금 입법의원에 참가하지 않도록 충고한다면 나는 거기에 들어가지 않겠다. 서울로 돌아가서 남로당 창당을 위해 일하겠다. 만일 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남로당을 창립할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의 당명 아래서 그것을 만들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근로인민당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남과 북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전당대회에서 당의 이름을 정하면 될 것이다." 이후 두 사람(여운형과 김일성)은 소련의 세계정책과 조선문제 해결과정에서의 역할 등에 논의했다. 두 사람은 "조선은 소련의 원조 하에서만이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합의했다.

<로마넨코의 보고서> (인용은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197의 번역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번역)


여운형: 조선은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은 아직 해방되지 않아 여기에 비합법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넨꼬: 어떻게 해방이 안 됐습니까?

여운형: 해방이라고 되기는 했지만 미국인들로부터 다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로마넨꼬: 왜 그렇습니까?

여운형: 최근 남조선의 반동세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그들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여운형: 1945년 8월 15일 오전 7시에 전 정무총감인 엔도가 조선인민의 대표들을 불러 “4~5일 후면 서울에 붉은 군대 선발대가 도착할 것이며,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에 우리가 무장해제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8월 15일 오후 서울에는 붉은 군대가 서울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시민들은 붉은 군대를 조용히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실망했으며, 38선이 획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더욱 불만스러워 했습니다.

로마넨꼬: 당신은 우리의 활동이 군사적인 것이며, 우리는 명령받은 바로 그 지역까지만 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여운형: 나는 38선 이남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감옥에 있는 정치범들을 석방시키는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정치범들이 주축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당신은 북조선에서 인민위원회가 발전해 가는 것과 같이 미군이 진주한 남조선에서도 그러리라고 믿습니까? 그러나 실제 사실은 다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마넨코 소장과 여운형의 미소공위 재개문제 논의


위와 같이 좌익 정치를 분석하려면 여운형이 소련군정 지역에서 어떤 논의를 했는지를 봐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운형이 빨갱이가 아니라 양민임을 증명하기 위해 오직 여운형과 박헌영의 사상이 조금 덜 왼쪽인지 더 왼쪽인지만 관심있기 때문에 여운형은 오로지 절대선이라고 배우는 좌우합작 그 자체만을 위해 모든 행동을 하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사실 여운형은 좌우합작만이 아니라 위와 같이 미군정으로부터의 해방도 목적이었다.

좌익 정치 세력은 46년 11월에 3당 합당을 통해[3] 남조선로동당을 조직하게 되었다.[4] 초창기 남로당은 적어도 '대중 정당'을 지향하려고 했었다. 그 당시 기준으로 '노동당'이란 개념이 공산당의 개념이 아니었다[5]. 대중정당을 의미하는 것.

허헌이 남로당의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부위원장 박헌영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내 주도권 장악문제로 여운형과 박헌영은 지속적으로 갈등하였다. 여운형은 우익세력과 연대해서 좌우합작을 강조했지만, 박헌영은 좌우합작을 반대했다. 박헌영은 좌우합작은 자신을 고립화시키려는 미군정의 전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좌우합작이 공산당 계열을 고립시킨다는 건 박헌영만이 아니라 소련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서 위와 같이 김일성도 여운형에게 좌우합작보다 좌익 정당 합당을 설득한 것이다. 이전부터 박헌영과 여운형 등 좌익 고위 정치인은 수차례 방북하여 소련 인사와 김일성과 논의하였는데 소련은 좌우합작보다 좌익 통합을 원했다.[6]

미국의 전후조선처리방안인 과도입법기구안을 보면 좌우합작이 공산당 계열 고립화 정책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은 축소 내지 고립화되어야 함

공산당은 1/16~2/16의 역할을 갖게 하거나 고립화

과도입법기구안#


좌우합작은 비록 공산당의 고립화 전략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동시에 이승만•김구로 대표되는 이른바 극우세력을 정치의 중심에서 배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중략) 중간파가 주도한 합작운동은 좌우대립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한다는 점에서 극좌극우를 대체하는 대안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실주의 입장에서는 실현가능성이 낮았다. 무엇보다 좌우합작운동을 대리하고 있는 김규식•여운형의 힘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극우극좌세력에 지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중략)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사회주의세력이 배제된 중간파 집단의 대표성을 소련이 수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185~186


당권을 장악한 박헌영이 종래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을 비판했고, 여운형은 실의에 빠진 채 탈당과 함께 정계은퇴 선언을 했다. 그러나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공위가 개최되자, 여운형은 다시 좌우합작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3. 사회노동당•근로인민당과의 관계[편집]


사회노동당을 주도한 것은 김철수, 강진, 서중석, 이정윤, 김근, 문갑송 등 공산당 대회파이며, 여운형은 사회노동당에 이름은 올렸지만 박병엽 증언을 봐도 스티코프 일기를 봐도 사회노동당과는 선을 긋는다.

여운형이 김일성•김두봉에게 보낸 편지(1946.11.30)

내가 11월 16일에 보내 편지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하는 그 보고사항의 연속입니다.(중략) 나는 좌익진영의 통일이 중요한 문제이며 당내 파쟁을 중지시킬 최선의 방법은 사회노동당을 해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의 지도분자인 몇몇 은퇴한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당으로 복귀할 것입니다. (중략) 강진과 백남운은 합동에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끝까지 싸울 테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박병엽 구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215


백남운은 자신은 사회로동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사회로동당의 선언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여운형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티코프 일기#


여운형은 사로당을 해체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운형과 김일성의 의도와 달리 사로당 관계자들이 남로당과 갈등하자, 김일성과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근로인민당 창당으로 대응하였다. 즉 사로당의 공산당 대회파와 조선인민당 출신들이 남로당과 계속 갈등하여 좌익 통합이 안 되니까 여운형을 중심으로 뭉치는 근로인민당을 만들어 좌익 통합을 하라고 김일성이 여운형을 설득한 것이다.

김일성은 백남운에게 사로당에서 탈당한 뒤 남로당으로부터 배척당한 사람들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재집결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이미 했었다. 김일성은 여운형에게 백남운과 공산당 대회파 출신의 이영, 나아가 장건상같은 중도세력까지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로당 지도부는 여운형에게 사회노동당을 완전히 해체한 바탕 위에서 몽양이 나서서 보다 대중적인 정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했던 것이다. 북로당은 여운형에게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 가운데 종파분자들을 새 당의 중앙간부로 뽑아서는 안 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당 강령에 대해서는 이전의 인민당•신민당 강령의 수준이면 될 것 같다는 의견교환도 있었다. 북로당 지도부는 특히 몽양에게 사로당의 공식 해체과정을 밟는데 힘써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몽양도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약속을 하였다.

여운형은 사로당 출신들 가운데 남로당에 입당하지 않은 사람들을 결집시켜 2월 26일에 근로인민당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인민당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을 당에 끌어들이는 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북로당이 개입하게 됐던 것이다.

박병엽 구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226~236


스티코프 일기나 박병엽 증언록을 보면 박헌영 뿐 아니라 여운형의 의사결정에도 평양과의 의사교환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로인민당은 북로당이 개입해서 만든 정당이다.

한편 역사학자 김기협은 인민당[7]의 전술계획이라는 사료를 보고 다음과 같이 분석하기도 한다.

인민당의 전술 계획(1946년 7월)

1. 우리는 남조선에서 합작추진 우익을 반대하는 반동적 요소를 좌우익 합작과정에서 평화적 전투를 통해 저지해야 한다. 우리는 소극적인 반탁진영이 반동적 지도자와 미국의 영향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공산당에 대한 반동적 공격을 약화시켜야만 한다.


우익의 분열에서 바라는 효과를 “공산당에 대한 반동적 공격을 약화”시키는 데 있다고 했다. 그(여운형)는 공산당이 좌익의 ‘본산(本山)’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믿었다. 인민당의 역할을 공산당에 대해 보조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남로당이 세워진 뒤 그가 남로당에 대항하던 사로당을 해체시키고 근민당을 창당한 것도 이 관점을 지킨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남로당이 이남 좌익을 위한 첫 배라 보고, 그 배를 놓친 사람들을 위해 두 번째 배로 근민당을 만든 것이었다.

김기협, 해방일기


4. 남한[편집]



4.1. 활동[편집]


남로당 결성 초기 여론조사에서 정당 지지율 1위가 남로당, 2위가 근로인민당이었다.(출처: 김상숙, 10월 항쟁) 지지는 여순사건 이후부터 지속된 반공 선전, 정부 주도 학살에 대한 공포, 토지개혁, 빨치산들의 약탈에 대한 반감 등 복합적 이유로 조금씩 잃게 된다.

남로당 결성 초기에 크게 폭력투쟁을 벌인 일은 없었다. 다만 위의 여운형의 행보만 봐도 남로당에 2020년대 대한민국 정당에 바라듯 북한과 연관이 아예 없기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이 집회 허가를 내주지 않아 계획한 집회 장소에서 삐라만 뿌리는 일이 많았다.

남로당 결성 초기 집회 시위로는 전평이 1947년 2월 18~19일 제2차 전국대회를 개최했는데 경찰이 이를 불법집회로 간주하여 전평 간부 51명을 체포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항의로 3월 22일 24시간 동안 파업을 벌인 정도 충돌이 있었다. 그런데 1947년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는 분위기가 보이자 미군정은 '815 폭동 음모사건'을 막는다는 구실로 좌익 인사를 대규모 검거했다. '815 폭동 음모사건'은 2차 미소공위 결렬 때라 정판사 사건이 제1차 미소공위 결렬 때 일어난 것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정판사 사건 변호사인 김용암, 조평재, 윤학기 변호사가 연루되고 검사는 조재천으로 정판사 사건과 똑같았다. 즉 조작 의혹이 있는데 연구가 더 필요하다. 정판사 사건처럼 대한민국 국적으로 죽은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가 엮인 사건도 외면받다가 최근에야 연구됐는데 저게 연구됐을리가. 만약 조작이라면 좌익은 그다지 폭력투쟁을 안 했는데 미군정의 탄압은 계속된 것이다.

그러나 단독정부수립이 본격적으로 전개 및 가시화되자, 남로당은 단독정부수립운동 노선에 반발하여 급진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목표로 했던 좌우합작 세력등 중도파 세력들은 여운형 암살 이후 구심점을 잃었기 때문에 사실상 명망 있는 이승만이 주창하던대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기정 사실로 되었다. 그러자 남로당은 기존의 파업활동을 넘어서 각종 테러나 무장폭동, 게릴라전, 노동자 총파업 등을 주도하면서 남한 정부를 흔들어 놓았다. 대표적으로는 1948년 2.7 총파업 사건이나 제주 4.3 사건,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이 발생했다. 다만 4.3 사건여수·순천 10.19 사건은 남로당 중앙은 몰랐던 일이라는 것이 다수설이다. 14연대 반란군 가운데 주력은 이현상과 합류해 지리산으로 들어가 남부군(조선인민유격대, 즉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조선인민유격대는 전쟁 전 거의 토벌되었다. 다만 전쟁 때 퇴로가 막힌 조선인민군이 합류해서 다시 세력이 살아난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공산주의자는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 비인간, 악마로 간주되었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 공산주의자는 이제 '빨갱이'로 불리어졌다. 그들은 같은 민족이 아니고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동정조차 필요 없었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빨갱이'는 인간의 기본적 위엄과 권리를 박탈당한 '죽여도 되는' 존재, '죽여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에는 '빨갱이'를 죽이는 것 자체가 애국하는 일이고 민족을 위하는 일이며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일로 생각되었다.

이제 공산주의냐 반공이냐 라는 이데올로기적 기준이 민족의 구성원을 규정하는 1차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반공 민족'의 발견은 이승만 정권이 직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교두보였다.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다른 남로당원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형무소에 갇혔다가 전쟁이 터지자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로 죽는다. 대부분 1948년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삐라나 포스터를 붙이다가 검거되었다.# 물론 포스터만 붙인 건 아니고 5.10 선거(제헌의회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전화선을 끊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인단을 뽑고 각종 여론조사를 했다. 해방정국 시기는 수많은 백색테러의 배후로 의심받는 강경우익 김구도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주장하며 김일성과 남북연석회의를 하며 5.10 총선거를 보이콧하던 시대인데, 남로당원은 당연히 2020년대 한국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국가보안법 위반을 했다. 전국 형무소 수감자 70%가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는 자료, 80%가 좌익사범이었다는 자료도 있다. 대전형무소의 경우만 보면 정치범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7~8명이 들어갈 감방에 15명 정도를 구겨넣고, 수용가능인원이 원래 1200명인데 1950년이 되면 약 4000명이 수감되었다고 한다.#

숙군을 추진한 조직과 인물들이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등 한국전쟁 전후 시기의 민간인 학살을 직접 주도하고 시행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숙군은 단지 군 조직을 정화하는 데 머물지 않았으며, 숙군 과정에서 사용된 조직과 인적 자원들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에서 그대로 전용되었다. 1948년 제주도와 여순 지역에서도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지만,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에 군 정보기관과 헌병대 등이 직접 관여하면서 민간인 학살은 매우 조직적인 성격을 띠어갔다.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그리고 국가보안법 위반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니 다수는 남로당이 탄압받자 바로 전향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죽는다. 보도연맹의 주요 활동이 남로당원 자수운동이다. 남로당이 불법화되자, 자수에 동의한 남로당원은 신문에 광고 형태로 탈당 성명서를 연달아 발표하기 시작하여 중앙•지방 일간지 하단 광고란은 탈당 성명서로 뒤덮였다. 1949년 12월 기준 전 남한 일대의 전향자 수는 52182명이었다.[8]

보도연맹원은 국민/비국민의 경계선에 매달려 있는 존재였다. 1949년에 보도연맹원은 포섭된 채 배제된 자들이었고 배제된 채 포섭된 자들이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돌아온 탕아'가 대한민국에 충성을 바칠 기회조차 박탈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예정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보도연맹원이라는 존재는 경계선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위는 매우 유동적이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국가가 생명을 좌우하는 생사여탈권을 국민에게 행사함으로써 국가의 살벌한 권능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보도연맹원의 운명은 국민이 된다는 것, 그 길이 얼마나 멀고 위험한 것인지를 가르져 주었다.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4.2. 와해[편집]



4.2.1. 김삼룡 이주하 사건[편집]


파일:김삼룡이주하.jpg
남로당은 1950년 3월 남한 내 남로당 핵심 간부였던 김삼룡이주하가 검거되면서 완전 붕괴되었다.

김삼룡과 이주하 검거 과정은 여러 목격자의 증언이 엇갈린다. 검사는 김삼룡을 쫓는 과정에서 이주하를 발견하여 이주하 먼저 체포했다고 한다. 그런데 체포현장 목격자 중 하나인 박헌영 아들 원경은 김삼룡 먼저 체포되고 이주하가 김삼룡을 구할 방법을 고민하며 경찰서 근처에 있다가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태식은 또 이들을 구하려다 체포되었다.

김삼룡과 이주하는 1950년 6월 북한에 의해 역시 북한에 수감되어 있는 조만식과의 상호교환이 제안되었으나 이는 남침 이전에 벌인 평화공작이자 북한의 기만 전술이었고, 결국 교환합의가 오가는 와중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국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총살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반대되는 의견도 있다. 북한에서는 박헌영이 김삼룡과 이주하를 받아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교환 공세를 하였는데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자신의 라이벌이 될 만한 사람이자 북한의 영향력 있는 민족주의조만식을 부담스러워하여 소극적이어서 결국 부결되었다는 것이다. 상황적인 논리로만 보면 박헌영이 전쟁나기 전에 얼른 남로당 핵심인물을 받아 오기 위해 적극적이었을 가능성은 높다. 문제는 이승만의 적극성 여부인데 조선 민족주의자 여운형, 임시정부 실력자 김구 등에게 어떻게 대접했는지 생각해보면 그럴 듯한 논리이기는 하다. 이승만2인자를 인정하지도 않고 주요 독립운동가 중 실력자들과는 전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주로 경찰공무원, 청년들을 장악하여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조만식을 부담스러워했을 개연성 자체는 충분하다. 그러나 검거 시점인 1950년 3월이면 이미 전쟁 개시 시점이 확정된 상황이었고 굳이 3개월씩이나 시간을 끈 다음 전쟁이 임박한 6월에 가서야 맞교환을 제의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한 국가급 협상이 불과 며칠 만에 끝날 사항도 아니다.

대한민국 검사 수기에 따르면 수사 과정에서 이주하는 남로당 조직 정보를 다 말하고 전향 의사를 표시했다.

재판에서 이주하는 자식에게 절대 정치를 하지 말라고 전해달라는 최후진술을 남겼고, 김삼룡은 더 이상 욕보이지 말고 죽여달라는 최후진술을 남겼는데 이것이 이들의 유언이 되었다. 그리고 정태식은 남은 생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살고 싶다고 최후진술했는데, 정태식은 살아남아 월북했다.

이주하의 이 발언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의 최후진술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데 안재성이 쓴 실화 기반 박갑동 소설에 따르면(박갑동 말을 녹음하고 대체로 그대로 글로 쓴 것 같은데 형식이 소설이라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음) 위장전향이었다고 한다. 김삼룡이 위장전향을 명령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검사가 수기에서 이주하가 전향의사를 밝혔다는데 이 검사의 수기도 진실일 것이다.해당 안재성이 쓴 박갑동 소설

위 실화 기반 소설에 따르면 정태식을 포함한 지도부가 검거되자 박갑동이 임시로 남로당 총책을 맡게 되었는데 박갑동은 전쟁 발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소장파 국회의원들에게 남로당을 합법화해달라고 요구할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전쟁이 터젔다고 한다.

5. 북한[편집]



5.1. 활동[편집]


1949년 6월에는 북조선로동당과 통합, 하나의 조선로동당이 되었다. 동시에 북한 정부의 '무력 적화통일' 노선을 지지하는 단체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남한에서만 신경을 쓰는 사이 북한에서의 주도권은 상당 부분 잃어버린 상황.[9] 실제로 남북조선로동당이 합당하여 탄생한 조선로동당의 창립기념일은 합당일이 아니라 북조선로동당(정확히는 조선로동당 북조선 분국)의 창립일로 지정되어 있다. 남로계를 완벽히 무시한 처사라 할 수 있다. 박헌영은 그래도 명목상 북한의 부수상이었다. 월북한 남로당계 인물들이 수천에서 만까지 이르게 있었고 이들에게는 박헌영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월북 남로당계는 박헌영을 그야말로 우상숭배하듯 받드는 인물들이 많았으며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는 박헌영 헌시나 박헌영 선집이 자발적으로 발간되는 등 인기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기반이 남한에 있었고 김일성이 북한을 장악하고 있는 이상, 박헌영은 북한에 넘어오는 순간, 이미 정치생명은 거의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름뿐인 부수상 겸 외무상 자리를 가졌을 뿐 박헌영은 실질적으로 김일성 눈치 보면서 정치 활동을 했었다.

이 때문에 박헌영은 1950년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쪽 동지들이 호응하면 남조선 괴뢰는 무너집니다. 스탈린 동지만 도와주면 미국 애들 오기 전에 적화통일이 완료될 것입니다." 라며 자신감을 표출했지만, 정작 김일성은 그 주장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의도적으로 미제간첩 박헌영의 의도적 공화국 전복 기도로 포장하고 있으나, 김일성은 박헌영의 '남조선 20만 남로당원 봉기설'을 믿은 것이 아니라 모택동과 스탈린의 지원을 믿었을 뿐이다.[10] 또한 박헌영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계속해서 김일성과 미군에 휴전 내지 종전을 제안하였으나 김일성은 그것을 무시했다. 그러나 북한은 '박헌영의 간첩질과 거짓말 때문에 조국통일전쟁이 실패했다' 라며 일방적으로 박헌영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

사실 한국전쟁, 6.25가 벌어지기 전부터 대한민국에는 위에 언급한 바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제정, 국군과 경찰까지 동원해서 무고한 사람들까지 마구잡이로 쓸어버리는 잔혹한 토벌 작전을 강행했고, 결국 전쟁 발발하기 몇 달 전의 남로당 세력은 거의 전멸해 버렸다. 그러나 박헌영은 김일성의 지속적인 정치적 공격으로 위기로 몰렸고, 이러한 상황에서 최후의 도박으로 '남로당 봉기설'을 주장한 것이다. 결국 전후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서 "미제의 간첩"이라며 숙청당한다.

5.2. 숙청[편집]


전쟁은 초반에는 파죽지세로 흘러갔으나, 국군과 UN군의 맹렬한 반격과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박헌영이 의도하던 빨치산의 봉기는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1951년을 기점으로 전선은 고착화 되었다. 전쟁을 지속해서 미군의 전비를 고갈시키고, 그 사이에 유럽 전체를 집어삼키겠다면서 휴전을 끝까지 거부한 스탈린이 1953년에 사망했다. 유럽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은 마셜 플랜으로 역공당했다. 막대한 전비에 학을 뗀 소련 공산당은 승산없는 전쟁을 매듭짓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UN측에 정전협정을 제안한다. 이를 계기로 정전협정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자연히 미국의 전면 개입이 있기도 전에 적화통일을 한다는 북한의 지도부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었고 남한 내에 잠복한 20만 당원 총궐기를 주장하다가 입지가 극도로 좁아진 남로당계에게 덤터기를 씌우게 되는 계기였다.

남로당 숙청과정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게 남로당 2인자 리승엽이 '미제와 내통했다'는 혐의가 시초였다. 리승엽이 숙청당하고, '리승엽 간첩사건'으로 구실잡은 김일성은 이어 남로당 지도자인 박헌영을 숙청할 빌미를 마련했다. 1953년 3월에 박헌영은 부수상직을 상실하고 구속당했다. 그리고 남로당 간부들도 연이어 구속당하게 된다. 휴전 협정 후 1953년에 김남천과 임화 등의 문학가들이 남로당 숙청이 시작되면서 총살당했다. 1953년~1955년까지 2년간 박헌영은 모진 고문을 받고 1955년 12월 북한 재판정에서 '미제의 간첩' 선고받았고, 재판끝난 즉시 남로당 간부들은 즉결처형당했다. 그러나 박헌영만은 즉시처형을 못했는데, '증거불충분'이었다. 박헌영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게 그를 급히 처형했다가는 소련중국의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56년에 8월 종파사건이 터지면서, 김일성이 즉결처형을 지시해, 1956년 7월 19일[11] 처형당했다. 이렇게 북한에서는 남로당이 완전 숙청당했다.[12]

또한 현재 북한에서 찍은 드라마인 <한 검찰일군의 수기>에서는 완전히 권력에 눈이 먼 종자나 미국의 간첩으로 나오게 됨으로서 북한에서의 남로당은 완전히 미제반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됨으로서 북한 역사에서 완전히 숙청되었다.

5.2.1. 남로당원 미국 간첩설에 대한 미국 비밀문서[편집]


남로당원 미국 간첩설은 100% 김일성 일당의 날조라고 쉽게 말하지만 문제는 생각보다 이해관계가 복잡하다. 김수임이 남로당 스파이라고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김수임의 유족들이 이것이 고문조작 사건이라는 결정적 증거로 미국 비밀문서를 드는데, 미국 비밀문서에 리강국이 CIA 비밀조직 요원이라고 적혀 있다. 다른 비밀문서는 임화가 CIC 요원이라고 한다. 당연히 김수임의 유족은 미국 비밀 문서는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즉 김수임의 유족들은 리강국이 미국 첩자가 맞기를 바란다.

AP는 비밀자료 기록에 따르면 당시 베어드 대령이 민감한 정보에 접근권이 없어 김수임이 북측에 넘겨줄 기밀도 없었으며, 나중에 북한에서 처형된 김수임의 애인 이강국도 사실상 미 CIA(중앙정보국) 요원이었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지난 1956년 미 육군 정보국 비밀자료에 따르면 이강국은 CIA의 비밀조직인 `JACK(한국공동활동위원회.Joint Activities Commission, Korea)'에 의해 고용됐던 것으로 나와 있으며, 지난 1953년 정전 후 북한당국은 이강국을 `미국 간첩'으로 규정, 처형했다고 AP는 덧붙였다.

김수임과 베어드 대령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김원일씨(캘리포니아 라시에라대학 신학교수)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1천페이지 분량의 비밀해제된 미 기밀문서를 발견, 진실규명 활동을 벌여왔다고 AP는 전했다.

연합뉴스


이승엽·조일명·임화·박승원·이강국·배철·윤순달·이원조·백형복·조용복·맹종호·설정식, 그리고 박헌영의 13명이 간첩 혐의에 연루되었다.

그런데 북한은 독재국가니까 숙청은 13명뿐만이 아니라 남로당계가 광범위하게 당했다. 권오직 등 다른 남로당계는 간첩혐의가 아니라 종파분자 등의 말도 안 되는 용어로 이루어진 이유로 숙청당했다.

어쨌든 적어도 리강국은 그가 고문조작 사건에 얽힌 것인지 김수임이 고문조작 사건에 얽힌 것인지가 충돌하기 때문에 쉽게 말할 문제가 아니고 미국 비밀문서가 리강국과 임화가 간첩이었다고 한다.

리강국이 첩자인데 김수임이 보호받지 못한 건 일반적인 일이다. 원래 간첩은 존재가 비밀이기 때문에 연인이나 자식 같은 주위 사람이 보호받지 못한다.


6. 대한민국 체제 형성과 남로당[편집]


앞서 언급했듯 신탁통치 파동과 정판사 위폐사건을 거치며 공산주의자에 부정적 낙인이 찍혔다. 여순 사건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득중은 여순사건이 공산주의자에 대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전환점이었다고 주장한다. 김득중은 《빨갱이의 탄생》에서 공산주의자를 타자로 설정하며 대한민국 국민이 형성되었다고 분석하는데, 이 시기 공산주의자란 사실상 남로당이니, 남로당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잘 보여준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3년 만에 남북 단독정권이 세워져 국토와 민족이 분단되었다는 사실은 국민 형성에 새로운 난제를 던졌다. 대한민국 국민 형성의 어려움은 민족과 국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부터 시작되었다. 보통의 국민국가에서 민족=국민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기 때문에 국민은 역사적 민족을 밑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지만 민족과 일치하지 않는 국민을 만들어야 했던 대한민국에서는 이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았다.

남한의 경우 정부 수립 두 달 만에 발생한 여순사건에서 민족과 국민이 합치되지 않는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돌파구를 찾았다. 정부는 여순사건 진압과정에서 공산주의자를 동족에 대한 살인을 일삼는 비인간으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 악, 죄악의 근원이라는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켰다. 집단적인 국민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했던 적과 타자의 이미지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대한민국 국민의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내부와 외부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경계선이 요구되었는데, 이때 경계선 너머에서 타자로 구성된 것은 공산주의자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타도할 수 있다는 두려움, 이에 동조하고 있는 대중들에 대한 공포 그리고 저항의 가능성을 봉쇄해야한다는 압박은 봉기 지역 주민 전체를 적으로 상정하게 하였다. 폭력의 대상은 공식적으로 설정된 외부의 적(북한 공산주의 집단)이 아니라 내부의 대중이었다.

반공주의는 공산주의자를 비인간으로, 국민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는 이단으로, 불구대천의 원수와 악마로 취급하였다. 그리고 비인간화, 악마화 과정은 대량 학살로 발전하였다. 남한의 셀 수도 없는 육체와 영혼은 공허한 반공주의를 위해 숨져갔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적대적 인식과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은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이다. '적'을 보면서 '우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국민 만들기'는 비인간, 악의 근원으로 구성된 적의 이미지를 매스컴과 교육, 문화, 종교 등을 통해 전파하고 이를 통해 공산주의자에 대한 적대감을 통해 동질적인 '국민'을 상상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은 역사적으로 탄생했다.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부역자 색출 작업이 벌어진 학교 운동장은 양민과 빨갱이, 인간과 비인간, 국민과 비국민을 준별하는 공간이었던 겁니다. 여전히 양민과 빨갱이,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는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순사건은 아직도 진행형인 셈입니다.

김득중, ‘빨갱이’는 국민-비국민 가르는 이분법에서 태어났다


7. 주요 인물 및 단체[편집]


  • 박헌영 - 김일성이 전쟁을 주장하자 박헌영은 처음에는 평화통일론 주장, 이게 호응이 없자 전면전 없이도 남로당계 빨치산만으로 남한 체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리다가 빨치산이 공적을 못 내자 입장을 바꿔 전쟁이 발발하면 남로당원 20만 명 봉기 정도는 한다고 허세를 부린다. 굳이 '남로당'을 강조하며 허세를 부리는 것을 보면 이념만이 아니라 남로당 수장인 자신이 권력을 잡겠다는 권력욕으로 한 망언이다. 남로당 숙청의 빌미를 준 발언으로, 남로당 수장이면서 남로당원의 미래 같은 건 전혀 깊게 생각 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복 후 박헌영 개인숭배가 심했는데 그 개인숭배가 박헌영 지시였다는 말도 있다.
  • 여운형
  • 허헌 - 남로당 당수. 합법적으로 정치활동 가능했던 시절, '얼굴 간판'용으로 자주 활동했다. 당시 허헌은 변호사 출신으로 김병로, 이인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시기 대표적인 인권변호사 3인 중 한 명으로 대중들로부터 명망 있던 인물이었다. 1951년에 사고사해서 숙청되지 않았다.
  • 권오석 - 영부인 권양숙 여사의 부친. 즉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인이다.
  • 김달삼 - 4.3 사건 주동자. 일본군 출신.
  • 이덕구 - 4.3 사건 주동자. 일본군 출신.
  • 김삼룡 - 일제강점기에는 이재유와 경성트로이카를, 이관술과 경성콤그룹을 만든 독립운동가였다. 광복 후에는 박헌영, 이주하, 이현상과 함께 가장 많이 욕먹던 인물. 남로당 남한 총책임자로서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 검거되어 이주하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처형되었다. 숙청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김삼룡을 애국자로 부른다.
  • 이주하 - 남로당에서 김일성에게 가장 비판적이었던 인물. 김일성을 잡아 가둔 적도 있고 소련에 대든 적도 있다. 그래서 김일성은 김삼룡은 애국열사릉에 안장했으면서 이주하는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실제로 기록을 말살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공식 숙청된 것도 아닌데 애국열사릉에도 없고 우익인 김구도 받는 조국통일상도 못받고 아예 언급을 안한다. 이주하는 원래 김삼룡보다 조선공산당 서열이 높았다. 그런데 이주하가 소련과 김일성에게 밉보여서 김삼룡이 남로당 총책이 된 것.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였다. 이주하가 이끄는 '원산공산주의자그룹'은 김태준이 “남조선에 박헌영, 이관술 두 동무와 북조선에 이주하 동무는 조선 지하운동의 레코드를 깨뜨리고 있던 것”이라 평할 만큼 조선 남부의 “경성콤그룹”과 더불어 일제 말기 국내조직 운동의 양대산맥이었다.(출처: 김태준, 「李舟河論(이주하론)」, 심지연, 『이주하 연구』, 2007, 백산서당, 228쪽.) 따라서 이현상이나 김삼룡과 달리 실제로 불행한 사람이나 한편으로는 김삼룡, 이현상과 함께 반대파에게 악평을 듣던 인물이다. 조선공산당 시절 미군정이 이주하에게 박헌영의 행방을 묻기 위해 자백제를 투여한 적이 있다. 정판사 사건 관련 자료를 보면 이관술이 이주하 자백제 투여에 항의하는 내용이 나온다. 대한민국 정부에 체포당한 후 수사 과정에서 이주하는 남로당 조직 정보를 다 말하고 전향 의사를 표시했지만 사형당했다.
  • 리강국 - 박헌영과 함께 숙청당한 사람 중 임화와 함께 제일 잘생겨서 그런지 운동권들이 수십년째 좋아하는 사람이다. 남로당계 숙청 과정에서 1955년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듬해 사형이 집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혐의는 스파이라는 것인데, 훗날 정말로 리강국이 미국의 스파이가 맞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애당초 숙청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김일성이 알고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 임화
  • 리승엽
  • 박갑동 - 해방일보 기자. 전향해서 여러 역사적 가치 있는 증언을 남긴 사람이지만 독재정권 시절 증언은 중앙정보부가 고쳐 내놓은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다 믿으면 안 된다.
  • 지창수 - 여수·순천 10.19 사건 14연대 반란사건 당시 주모자. 계급 상사. 일본군 출신.
  • 박상희 - 박정희의 형이자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장인. 김종필의 아내 박영옥이 박상희의 장녀이다. 그러나 박상희는 남로당이 결성되기 이전에, 대구 10.1 사건 때 경찰의 무력 진압 과정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정확히 보자면, 조선공산당 및 민전에서 활동했다고 보는게 맞다.
  • 박정희 - 대한민국의 5~9대 대통령.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총책으로써 국군 내 공산주의자들을 침투시킨 혐의로 체포되었다.
  • 신불출
  • 심영 - 내가 고자라니로 유명한 그 사람 맞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 조선인민유격대
  • 남부군
  • 이재복 -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하는데 한 몫했다.
  • 이현상 - 남부군 사령관. 북한에서도 그를 애국자로 추대하고 한국 운동권들도 좋아했다.
  • 남도부
  • 허성택 -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위원장. 박헌영의 심복 중 한명으로 그와 같이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걸려서 감옥에 갔다. 이후 박헌영을 따라 월복했으나 1958년, 1차 당대표자회 때 오기섭, 류축운등 살아남은 국내파들과 함께 처벌당했다. 야인시대에서는 허성탁으로 나온다.
  • 황철
  • 김순남 - 당대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작곡가. 1948년 월북
  • 김태준 - 국문학자. 경성콤그룹 활동가. 훈민정음 해례본과의 인연이 유명. 이현상 빨치산 부대 사상교육하다 잡혀서 처형되었다.
  • 설정식 - 시인,소설가,영문학자. 미국 유학통 출신 지식인으로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맹원으로 활동했고, 미군정청 공보처에서 관료로 일한 적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후 월북, 휴전회담 때 북한측 대표 통역관 하다가 1953년 남로당 숙청 사건때 얽혀서 숙청.
  • 권오직 - 권오직은 남로당이 생기기 전 월북해서 남한에서 남로당 활동을 한 적은 없고 북한에서 남로당파였다. 조선공산당 시절 해방일보 사장이었는데 남한에서 고문조작 사건으로 판명된 정판사 사건 때문에 월북했더니 북한에서도 숙청.
  • 이응렬
  • 신표성
  • 이순금
  • 박진홍
  • 이원조 - 이육사 동생
  • 박치우 - 윤동주 친구
  • 신남철
  • 양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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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공산당 시절의 부르주아민주주의 추구에서 입장을 변경한 것이다. 출처: 김상숙, 10월 항쟁[2] 후술하듯 공산주의자를 비인간으로 보게 된 시발점은 김득중의 연구에 따르면 여순사건이다.[3]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4] 46년 6월 22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북조선공산당'으로 바뀌면서 사실상 분리되었고, 8월 29일 연안파의 조선독립동맹계열이 세운 조선신민당(남조선신민당은 이 조선신민당의 남쪽분국쯤 된다.)과 통합해서 북조선로동당<일명 북로당>이 되면서 기존의 조선공산당의 위치가 약화된 것도 영향을 받았다.[5] 당시 기준으로 '공산당' 이란 소련 공산당스탈린주의노선을 명확히 지지하는 이념 정당을 뜻하는 정당명이었고, '노동당'은 이보다는 좀 넓은, 즉 스탈린주의 이외에 범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좌파 그룹을 모두 포괄할 수 있고 이념적 선명성보다는 노동자 계급의 입장 대변을 우선시하는 대중정당을 의미하는 정당명이었다.[6] 출처: 스티코프 일기.[7] 근로인민당이 아니라 조선인민당을 말한다.[8] 출처: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9] 45년 해방정국에서 한반도의 주요 정치단체들은 대부분 한반도의 중심지인 서울로 몰려 들었는데,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역시 통일정부가 세워진다면 당연히 서울이 수도가 될 거라는 생각이였는지 주요 인물들이 서울에 모였다. 물론 평남은 기독교와 조만식으로 대표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인사들이 세력을 형성하여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지만, 함경도는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이 제법 강했던 지역이였는데, 이들은 조선공산당 중앙부와 단절되면서 김일성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다.[10] "이 자식아, 전쟁지면 너도 책임있어" 김일성, 박헌영에 잉크병 집어 던져[11] 1955년 12월에 처형당했다고 하지만, 당시 여러 정황 상 보면 7월 19일이 유력하다.#[12] 살아남은 사람으로는 박갑동이 있는데, 이 사람은 사형선고까지 언도 받았으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석방되어 북한을 기적적으로 탈출해 중국,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여 현재 일본 도쿄에서 살며 반북운동을 지휘중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남로당 중요간부 출신이라고 스스로 자칭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해방정국 시기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기자이자 남로당 하급간부 출신이다. 남로당 어떤 간부 명단을 봐도 안 나오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쓴 회고록과 주장들은 자신이 직접 겪은 회고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사실관계 부분에 잘못된 정보들이 많으므로 걸러 들을 필요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