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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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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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3. 전개
4. 한편 '남조선'에서는?
4.1. 의생활
4.2. 식생활
4.3. 주생활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실로 1964년은 우리 인민의 생활 향상에서 새로운 거대한 전환의 해로 될 것입니다. 1964년에 우리는 300만 톤의 와 20만 톤의 육류, 3억 메터의 직물을 생산하게 되며 그 해까지 도시농촌에 새로 건설되는 문화 주택은 60만 세대에 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인민은 모두가 다 기와집에서 이밥고기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사는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 근로자들이 오랜 옛날부터 꿈꾸어 오던 념원을 우리 시대에 와서 실현하는 무한히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1]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부의 당면 과업에 대하여"_1962년 10월 23일 최고 인민 회의 제3기 제1차 회의에서 한 김일성 수상의 연설[2]


김일성이 1962년 천리마 운동 당시 선언했던 구호이다. 흔히 이팝으로 알려졌지만 당시의 원문을 보면 이밥이라고 적고 있다. 실제로 그 때나 지금이나 북한 맞춤법상으로도 이밥이 맞는 표기다. 실제 1962년 당시의 원문이나 2009, 2015년 기사에서도 '이밥'이라고 적고 있다. 이팝이라는 표기는 방언이다.


2. 설명[편집]


이밥은 입쌀(멥쌀)로 지은 '흰 쌀밥'을 뜻하며, 고깃국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기가 들어간 국요리가 아니라 고기를 끓여 우려낸 국물만 말하는 것으로 고작 육수[3]를 말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쌀밥에 고깃국'으로도 알려졌다. 북한의 온 인민들이 쌀밥과 고깃국을 먹고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입고 떵떵거리고 살 수 있게 만들겠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실제로 저 발언을 했을 1960년대 시기의 북한은 당시 기준으로는 완전히 허황된 망상 같은 소리가 아니라 충분히 실현 가능한 목표로 보일 정도로 '객관적으로' 풍족하게 살았다. 이는 탈북반공 활동을 하고 있는 강명도도 인정하였으며, 조선일보 기사에서도 나온 바 있다. 실제로 그 시대에 쓰던 프로파간다로 '북한엔 자유는 없어도 빵은 있다'가 먹히던 시절이였다.[4]

다만 고난의 행군 문서에서도 보다시피 협동농장 체제로의 전환으로 식량 생산의 효율성은 떨어지고 있었으며, 천리마 운동 같은 노력 동원으로 국부는 늘었지만 절약을 강조했기에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크지 않았다.

강명도 씨도 평양 출신에 해방 전을 겪지 못한 세대라 나라가 계속 좋아지는 것으로 알 여지가 있었다. 주민들은 굶주리지 않을 정도로만 식량을 받았으며, 바깥과 소통을 단절한 북한이라 외부와 비교를 할 수 없어 자신이 잘 사는 줄 알았다. 식량은 배급을 일관되게 고집했다.[5]

김길선 기자 같은 경우 "지방에서는 1960년대에도 강냉이밥이라도 2끼나 먹지 3끼 챙겨먹는 집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1960년대생 탈북민과 일반 한국인 중에서 일반 한국인이 2.9cm 더 키가 크다는 주장이 나온다.#

함경도 문서를 보면 해방 전만 해도 탈북민의 주 출신지인 함경도는 휴전선 이남보다 평균 신체가 4cm는 큰 고장이었다. 오히려 2010년대가 식량에 대한 통제를 주민들이 무너트려 60년대보다는 절대적 기준으로는 잘 먹는다. 2019년에는 북한에서 3끼를 이었다던 탈북자가 90%가 된다는 조사도 있었다. 시골에서도 기름을 두른 밥을 먹는다는 증언도 이때 나온다.

오히려 그때는 한국이 더 가난했었다. 1960년대 한국의 쌀 생산량은 300~400만 톤 사이였는데, 대략 두 배 정도의 남북한 인구 차이를 감안하면 1960년대까지는 한국이 가난했다는 것이다.[6][7]

물론 21세기에는 에서 노숙자 무료급식소에서도 잔반을 많이 남기는 등 '거지도 배부른 나라'가 되었으니, 정작 북한이 꿈꾸던 지상락원이 그리 욕하던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실현된게 아이러니 한 것이다.[8]

이건 한국이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으로 경제가 성장한 점이 크다. 6.25 전쟁 직후만 해도 한국은 세계에서 낙후된 국가로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으며 맥아더마저 전후복구에 최소 100년은 걸릴 거라고 말할 정도였다.[9]

근데 이미 한국은 저 100년의 절반도 안 지난 시점에 전후복구는 물론 경제 성장선진국 진입도 성공하여 정말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객관적 수치로 보자면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수준에서 이탈리아, 스페인 수준까지 성장했으며 일본, 서유럽 국가들과의 격차도 줄이고 있다.

1945년 해방 직후 미군정의 무력함으로 인해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던 한국[10]과는 달리 일찍이 소련군정의 지도 하에 사실상의 정부 기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성립한 후 갖은 개혁과 개선을 실시하면서 국가의 정비가 비교적 잘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국민당이 이끄는 증국과 가까운 한반도 북부 지역에 빠르게 장비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들을 잔뜩 지어놓았고, 이것이 적산의 형태로 남아있었기에 비록 소련이 공장 비품을 약탈했어도 북한 지원을 위해 다시 제공해주면서 공업 활성화가 비교적 수월했다.

반면 같은 시기 한반도 남부의 경우에는 중국과 거리가 멀고 호남의 평야와 같이 농지가 많다는 특성 때문에 주로 식량을 생산하는 식량 기지로서 이용되었고, 공업은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물론 서울 영등포 등 경공업 지역은 있긴 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11]

하지만 김일성의 수탈이 심했으므로 평안북도 용천군 같은 곳에서는 김일성을 '죽장군'이라고 비난하였다. 해방 다음 해부터 이전엔 없던 기근이 있었다. 죽장군은 '풀죽만 먹이는 장군'이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가 '굶주리지는 않는' 상황이 도래하고 불만을 드러낼 수 없는 사회가 되니 상대적으로 잘 사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당시 북한은 당시 초강대국 소련, 인근 강국 중공의 지원과 경공업을 패스한 채 중공업 몰빵으로 중국, 소련과의 교역 덕에 진짜로 인민들이 굶주려 죽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시기 명절에는 비록 옥수수로 만든 빵이지만 [12]과 같은 것도 '두둑히' 무상으로 배급해줬다고 한다. 이밥에 고깃국까지는 아니라도 정부에서 공급할 식량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비록 김일성의 야욕으로 발생한 6.25 전쟁을 통해 한반도 전역이 폐허 되고,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이 깡그리 잿더미가 되어 남북 막론 최빈국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이후 그것을 극복하고 다시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소련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되어 북한은 한국보다 국부를 쌓기 쉬웠다.

하지만 1950년대 말~1970년대 들어서는 8월 종파 사건에서 보다시피 권력의 견제를 방지하기 위해 김일성이 친중파친소파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박쥐와 같은 행보로 독자 노선을 시도했고, 이러는 사이 중공과 동구권 맹주 소련충돌하던 상황이었다.

소련은 김일성의 박쥐 같은 행보와 북한보다 포섭할 가치가 높은 국가들로 인해 지원을 감소시켜 북한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자영농의 허용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은밀히 숙청시켰고, 1955년에도 중공업만 키우는 정책으로 보릿고개가 있었다고 한다.[13]

특히 김일성은 1977년에는 동독에리히 호네커와 만나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인민들은 사상적으로 나태해지고 행동은 더 산만해진다"라는 말을 했다고 할 정도로 진심으로 배불리 인민을 먹이는 것에는 무관심했다.#

김일성의 말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유명 과학자 칼 세이건의 저서 '악령의 출몰하는 세상'에서 아동빈곤 퇴치를 해야하는 근거로서도 나와있다. 칼 세이건 외에도 대다수 국가들이 아동빈곤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간주한다.

우리 몸은 배고프면 오직 먹어야하는 본능에 모든걸 쏟아붓기에 다른 것에 신경쓸 여력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기아 아동들을 보면 눈이 퀭하고 뭔가를 배울 여력이 없으나, 잘 먹은 아이들은 이것저것 호기심에 가득차고 배움의 열정으로 눈이 똘망똘망하다고 한다.

한국, 대만에서도 경제 성장 다음에 민주화가 이뤄졌는데, 반대로 김일성은 본인의 권력욕 때문에 그걸 두려워했고 이런 상황에서 이미 정상적인 국가 구조와는 반대 방향의 노선으로 가고 있었다.

민생 안정을 시도할 타이밍을 놓친 것인지 민생 안정에 관심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김일성 일가 독재 체제가 완성된 이후에는 북한 경제는 이미 그 누구도 손 쓸 도리가 없이 망가져 있었다.

애초에 북한이 한때 한국보다 잘 살았던 배경이 냉전 시기 소련과 중국의 지원이었는데, 현실 공산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소련이 붕괴되면서 후계국인 러시아 연방은 북한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구 소련 시기에 체결됐던 북한에 대한 방위 군사지원 조약까지 폐기해버렸다.[14]

붕괴된 소련과 달리 공산당이 권좌를 유지하고 있던 중국 역시 경제지원을 축소하고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완충지의 형태로 북한이 망하지 않고 존치되는 방향으로만 북한에 대한 지원 정책을 바꾸게 되면서 마침 그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거기에 김일성 일가들이 독재 체제를 만들겠답시고 경제에 투자할 자원을 군사력에만 투자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냉전 말기나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 폐쇄적 공산주의 노선에서 벗어나 개혁개방 정책을 펼쳤던 중국 덩샤오핑장쩌민, 후진타오나 구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베트남 보찌꽁, 쿠바 라울 카스트로미겔 디아스카넬 등 다른 구 공산권 국가들의 여러 지도자들과 달리, 김일성김정일, 김정은은 현실 공산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민주화와 개방의 바람이 부는 급변해가는 국제정세의 흐름 속에서도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전 지도자의 실책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전 지도자가 삽질을 하면 현 지도자도 소위 유훈이라는 이름으로 그 경로를 계속 밟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지도자의 정책을 바꾼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1960년대에 조국 해방의 주체를 소련에서 김일성으로 바꾼 것이나, 핵개발에 관한 시각도 많이 바뀌고는 하였다. 음력설 같은 명절에 관한 태도도 자주 바뀌었다. 김씨 가문은 정작 중요한 것들을 개혁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바꾸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시대가 달라지다보니 저 표현 자체도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이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그 북한에도 기와집과 비단옷보다 가성비 면에서 훨씬 나은 물건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단 지붕이나 나일론과 같은 것만 해도 그렇다. 그 언제 실현될지 알 길 없는 지상원이 오더라도 굳이 기와와 비단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앞의 '이밥에 고깃국'은 계속 써도 될 것이다.


3. 전개[편집]


과거에 했던 구호라든지 과거에 했던 농정 시책이 지금 30~40년 후에도 그대로 반복이 되고 있거든요.

이것은 그만큼 농업 생산성이라든지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죠.

김영훈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_MBC 통일전망대 인터뷰


김일성은 최초 발언 이후 심심하면 이 문장을 되풀이하며 "곧 있으면 진정한 지상락원이 올 것이다"라며 선전했고, 김정일 또한 김일성의 유훈을 잇는다며 "곧 있으면 진정한 강성대국이 되어, 이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기와집서 비단옷을 입고 살 수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현실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각종 정책 실패가 터지고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갈수록 나락으로 빠져들게 된다. 오히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퇴보하는 경제 체제를 갖게 되었다.

2010년 1월 16일, 김정일마치 북한 주민들이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는 것마냥 "인민들 보리밥 먹는 게 가슴아프다."고 했으며 "나는 이제 흰 쌀밥에 고깃국을 인민들에게 먹이겠다."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보리밥은 고사하고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였다.

말로는 미국, 서유럽, 한국 등을 부수겠다고 선전하면서 반미 선동에 앞장선 김정일은 오히려 프랑스산 헤네시 코냑 구입을 위해 65만 달러를 낭비했고, 유럽 각 나라의 고가 수입차들을 사는 등 사치 행각을 벌였다. 태영호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은스위스에 유학하면서 미국의 NBA를 즐기고, 김정철영국에릭 클랩튼 공연을 자주 봤다고 한다.# #

그리고 일본을 그렇게 싫어한다면서도 정작 본인의 전속 요리사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이고, 참치회, 스시, 모찌 등을 계속 먹었으며, 심지어 도요타일본제 자동차도 구입했다. 김정일북한 주민들의 돈을 갈취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정작 본인이 주장한 것과 정반대로 '산해진미에 양주, 주석궁에 서방제 명품'을 즐겨 이용했다.

특히 김정일은 맥도날드 마니아로 알려졌는데, 베이징 맥도날드에서 '빅맥'을 공수해와서 먹었다고 알려졌다. 원래 맥도날드가 저개발국개발도상국에서는 생일날 가는 고급식당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북한에서는 김정은이 즐기는 VIP급 음식이었다.#

북한에서 자랑한다고 올리는 평양 귀족들 영상에서 그들 나름대로 피자와 짝퉁 빅맥을 즐기는데, 피자스쿨이나 시장 햄버거보다도 못한 수준이었고, 김정일김정은만 오리지날 진퉁 맥도날드를 즐겼다.[15]

1990년 맥도날드가 모스크바 지점을 냈을 때 첫날에만 무려 3만명의 인파가 몰리면서 몇 시간씩 줄서서 기다리는 진풍경[16]이 펼쳐졌는데 김정일은 부러웠던지 "세계적으로 이름 난 고급 빵과 감자튀김을 우리식으로 생산해 공급하라"고 명령하면서 햄버거가 북한에 등장했다고 한다.

가격은 평균 1.7달러로 우리 돈 2000원이 채 안되지만, 북한의 일반 노동자 하루 수입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일반 서민들이 즐기기엔 너무 비싼 메뉴라고 한다. 물론 선진국 기준에서는 매우 저렴한 거지만 북한에서는 비싼 것이다.

하물며 북한에선 VIP들이 먹는 '특권'인데, 실제 2019년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베트남 하노이 주재 북한 대사관 관계자들이 인근 맥도날드에서 치즈버거를 대량 주문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또 2018 평창올림픽에서 북한 선수단이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가지고 가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

이러한 김정일의 사치 행각은 북한 내부는 물론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도 죄다 알려져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헛소리, 위선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했고, 북한에서도 쪽팔렸는지 완전히 흑역사화되었다. 당시 김정일이 이용한 사치품들 상당수가 중국에서 밀수한 것이라 대북제재의 대상이 된 반면, 대다수 주민들은 가난에 시달렸다.

이후 김정은 통치 시대로 오면서 2010년 당시 "3년 내로 실현시키겠다"고 했다만, 결과는 볼 것도 없이 진짜로 3대째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김정은이 제 할아버지의 행세를 하면서 이 구호도 계속 쓰이는 모양이나, 과거 김일성 시절이었다면 몰라도 현재 이 문구를 곧이곧대로 믿는 북한 주민은 이제 없으며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고 봐도 될 정도다.#

'탈북자는 이제 2015년 이후 끼니는 잇는다', '40%가 굶는다는 말은 과장 같다.'라는 주장도 통일연구원, 서울대,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17] 등이 주장하기도 한다. 2010년대 중후반의 북한의 상황은 탈북민 대상의 설문을 바탕으로 하면 민간에서는 기근조차 흔한 것이 아니었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끼니는 이으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 #

하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것도 살기 위해 장마당을 국가의 탄압을 피하며 뇌물[18]을 바쳐가며 만들다보니 그나마 나아진 것이라는 거다. 배급을 기다리던 서민 중 충성파들은 진작에 고난의 행군 때 굶어죽었다는 것이다.

북한군북한 내에서도 취약계층이라는 말이 2017년에도 있는 것을 보면, 국가가 주민들의 영양 공급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곡창지대인 황해도는 2012년에 고난의 행군보다 심한 기근을 겪었다고 하는데, 평양으로 가는 수도미, 군대미의 수탈이 원인으로 꼽힌다고 경향신문이 보도하였다. # #

2016년 시점에서 북한 주민 1인당 식량배급량은 UN에서 권장하는 배급량의 60%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김씨 3부자와 그 친인척, 측근들은 둘째가라면 숙청할 정도로 국가의 부와 자원 자체를 독점하고 있다. 일례로 야간지도를 보면 북한에서 조명이 꺼지지 않는 지역이 평양 뿐이다. [19]

특권층의 충성을 유도하기 위해 평양에는 그나마 전기 공급이 이루어지며, 여기서도 각종 선전물의 조명만 밝다. 지방은 더욱 심각하여, 가난한 자강도 같은 경우 압록강에서 사진을 찍으면 밤에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이라는 글귀와 빨간 선전판만 보인다.

굳이 이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당장 김씨 3부자의 외제품 사랑을 열거하기만 하면, 이 구호가 얼마나 큰 기만인지 알기 싫어도 알게 될 것이다. 주민들이 한국에서 유입된 책을 보면 처벌하면서 본인들은 정작 외제품을 쓰고 있다는 것을, 주민들도 알고 있다.#

김일성의 첫 발언이 있은 지 무려 57년이나 지난 2019년에까지 또다시 김정은의 입에서 등장했다고 한다. 이것도 3월 초의 말로, 몇 주 있다가 이제는 노동신문이 “공기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강의한 정신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굶어죽고 얼어죽을지언정 버릴 수 없는 것이 민족자존”이라며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는 당정책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도 했다.# # #

이 주장이 얼마나 황당했는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돈 떨어진 북한… “물과 공기로만 사는” 나라는 없다', '이제 북한엔 '물과 공기만 마시며' 기다릴 주민은 없다'는 제목의 칼럼을 공개했으며 수도 인프라의 열악함도 같이 언급했다. #, #

한 술 더 떠 김정은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하여 백신 도입 거부, 전년동월대비 99% 이상의 무역 금지, 어로 금지 같은 기행을 일삼더니 급기야 2021년 청년절 축하문에서는 건국 이래 가장 준엄한 국면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나마 간만에 세끼를 잇게 해준 주민의 자발적 시장 활동을 막으니 2019년에 비해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고, 코로나보다 통제가 무섭다는 주장이 많이 나온다.

이 축하문에서 청년들이 탄광, 염전 등으로 '자원'했다는 것은 이들을 험지로 끌고 가선 네가 선택한 험지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티라는 것을 주문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북한 문서의 세뇌 문단에서 보다시피, 이런 것은 김일성 일가가 측근들을 길들여 권력을 유지하고자하기 위함이다. 주체사상은 창시자가 탈북할 정도로 허술한 점이 많은 사상이지만, 북한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 권력으로부터의 쾌락을 추구하는 상류층 때문이다.

처음부터 토지개혁 당시 사적 소유를 거부하는 사회주의의 뜻을 거스르고 오히려 권력을 갖추면 물욕을 충족시킬 수 있게 하였다. 아예 주민들을 배급에 길들였기 때문에 9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김일성이 신이었다.

그러나 경제성이 아닌 충성도에 따라 자원이 분배되기에 경제가 몰락하여, 고난의 행군 이후에는 거의 자연선택적으로 자발적으로 먹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2020년 기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북한에서 68%,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16%로 추정된다는 설문도 있었을 정도다. #[20]

이는 충성의 동기를 잃게 하는데, 김정은 스스로 청년 세대가 사회주의의 혜택을 모른다면서 발끈하여, 2020년 이후 이른바 계획경제를 복구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대표적인 예가 위의 탄광 등으로의 '자원'이다. 더불어 할머니 아나운서로 유명한 리춘히 같은 충성파에게 건국 이래 가장 준엄한 국면 속에서 경루동 2층 집을 선물해 주는 등 충성파의 욕구를 채워주는 일에 한창이다.

즉, 쿠데타 이후 미얀마와 비슷한 상황이라, 외부적으로 압력을 주지 않는 한 이런 일이 계속될 수 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도 끝없이 살아남고자 하지만, 상류층의 원초적인 탄압 의지를 막을 수단이 필요한 것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힘없는 약자들을 착취하는 염전 노예 등의 사건이 적잖게 발생하고 있는데, 북한에서는 아예 국가 차원에서 힘없는 인민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있어 세계 최악의 노예국가로 선정됐다.#


4. 한편 '남조선'에서는?[편집]


한국에서는 지상락원, 강성대국 등과 함께 북한의 실정을 비하하거나 희화화할 때 많이 사용한다. 은 남아돌고, 고기[21]도 의류도 풍족하기 그지없는 나라에 사니, 저런 선전 문구는 유머 소재도 안 되는 수준이다.

사실 1970년대 중후반[22]만 되어도 그 당시 사람들은 돈 좀 나갈 각오를 했겠지만 한국 대부분의 지역에선 지금의 북한보다 훨씬 더 많은 육류를 먹을 수 있었다. 저런 선전 문구가 그나마 통할 만한 곳은 정말 낙후된 시나 군의 변두리 지역밖에 없었으며, 그런 곳조차도 80년대 즈음이면 약발이 다 떨어지게 된다.

당연히 한국에도 빈민층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루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해 고생하는 사람도, 경제난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흙수저헬조선이니 하는 단어는 애초에 생길 일이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빈곤 문제는 국정에서 무조건 다루는 문제이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 빈민층'인데,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하류층 가족도 피자를 먹고 스마트폰도 가지고 있다. 북한에서는 평양 귀족들만의 차별화된 특권이 스마트폰이고 피자와 같은 '고급 양식'도 먹는데, 한국에선 빈민층도 평양 귀족층보다 더 좋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선 당연히 유튜브도 안되고 중국산보다 못한 수준이지만, 한국에선 대부분 갤럭시아이폰을 쓴다. 애초에 중국산 스마트폰[23]은 한국 시장에서 사실상 배제되고 있다. 왜냐하면 소비자들이 갤럭시아이폰만 찾는다. 적어도 이 정도 성능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숙자들조차 북한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을 보이며 노숙자들도 굶어죽을 걱정은 하지 않는다. 노숙자 무료급식소에서조차 잔반이 많이 남으며, 노숙자들도 조금 일하면 담배와 술, 커피 등 최소한의 '사치'를 즐길 수 있는 부류들도 많다.

정말 굶어죽기 일보 직전이라면 하다못해 노숙자 센터에라도 연락하면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을 수 있다.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 종교 재단, 복지 재단이 있어서 노숙자 지원 센터는 흔하다. 그리고 일부는 다시 재교육을 통해 사회 복귀도 하고 가족과 재회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다만 노숙자들이 통제받는 것을 싫어해서 혹은 잘 모르기 때문에 노숙자 센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빈민층, 심지어 노숙자라도 한국에선 일단 그들을 위한 각종 제도적인 사회안전망이 활발히 작동하기도 하고, 게다가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대다수의 공공기관, 공기업들과 일부 대기업들에서 복지 사업을 하기도 하고 여러 자선단체에서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진짜 굶어죽을려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굶어죽는 일은 정말 거의 없다.[24]

게다가 몸이라도 건강하다면 급한대로 건설 노가다 같은 일용직이라도 구하거나 신체능력이 조금 떨어져도 편의점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굶어죽지는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노숙자 대상 교육기관이 있어서 이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김하종 신부 등 많은 사람들이 노숙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당장 편의점 알바를 해도 절대 굶어죽지는 않는데, 알바비는 제껴두더라도 유통기한이 지나서 거래가 불가능한 폐기음식을 마음껏 가져와서 먹을 수 있다. 심지어 그 폐기음식은 알바생들조차 몇번 집어먹다가 질려서, 그냥 버리고 자기 돈 주고 밖에서 사먹기도 한다.

맥도날드의 '짝퉁' 빅맥은 평양 귀족층들이 먹고, 오리지널 빅맥은 김정일이 베이징 맥도날드에서 공수해와 즐기던 걸로 알려졌는데, 한국의 최저임금을 받는 알바생들은 1시간만 일해도 맥도날드에 가서 최고존엄이 먹는 빅맥을 세트메뉴로 사먹고도 돈이 남는다. 맥도날드에서 일하면 가끔 그런 햄버거를 공짜로 먹을 수도 있다.

오히려 한국뿐만 아니라 선진국들은 멀쩡한데도 버려지는 음식이 너무 많아 이를 지적하는 기사까지 실릴 정도다. 특히 유통기한엔 원래 마진이 있어 선진국일수록 까다로워져 아직 멀쩡한데도 버려지는 음식이 많아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여왕의 교실에서 아쿠츠 마야[25]가 학생들 앞에서 음식물 쓰레기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공익 광고에서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이 서울월드컵경기장 7개를 짓고도 남는다고 할 정도이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뼈말라'족을 다루기도 했는데, 어떻게든 살빼기 위해 검증되지 않은 약을 사먹는 사례도 많고 이미 다이어트 산업은 거대해져서 TV든 인터넷이든 다이어트 광고 천지다. 심지어 현직 의사가 쓴 '1일 1식' 책이 나와 호평받기도 했고, 모 드라마에서는 서로 만난 남녀가 나도 1일 1식한다면서 화기애애해지는 장면도 나왔다.

이젠 건강을 위해서 1일 1식을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물론 한끼만 먹고 절대 먹지 말라는 것은 아니고, 풍족한 식사는 한끼만 하고 나머지는 간략하게 때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식도 아침은 간단하게 과일로 떼우고 점심이나 저녁을 많이 먹는 것을 의미한다.[26]

현대인들의 한끼가 과거 한끼에 비해 칼로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반면 농업시절에 비해 운동량이 적어졌기에, 잉여 칼로리로 인해 비만이 되고 각종 성인병을 초래하기에 하루 3끼는 많다는 것이다. 비만이 사회문제란 것은 뒤집어보면 그만큼 굶어죽기 힘든 나라라는 의미가 된다.[27]

실제로, 2016년 12월 KDI가 내놓은 연구자료에 따르면 북한 전체의 1인당 GDP(PPP 기준)는 최대 1,361달러 정도로 추측되는데, 이는 2017년 7월 현재 환율 기준으로 약 150만여 원 정도에 불과하다. 심지어 평양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들은 1,200달러대, 즉 140여만 원 정도에 머물고 있다.#

평양도 사정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게 평양의 1인당 GDP는 대략 2,715달러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는 같은 기간의 환율 기준으로 대략 300만 원 안팎에 불과한 수준이다. 한국에서 봉급 300만 원은 주로 월급 수준을 의미한다. 1년으로 환산하면 3,600만 원이 나오는데 달러 기준으로는 32000 달러이다.

한국의 2017년 시간당 법정 최저임금이 주휴수당 미포함 시 6,470원, 주휴수당 포함 시에는 시간당 7,764원이니 근로기준법 기준으로 1개월간 법정 근로시간인 209시간에 맞춘 임금[28]만 받아도, 약 162만 원을 받으니 한국의 1개월 최저임금이 북한의 평균 1인당 GDP(연소득)보다 더 높다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더구나 2018년에는 최저임금이 7,530원, 주휴수당 포함 최저임금은 9,036원이라 이 격차는 더 벌어지게 되고, 2023년에는 9620원으로 순수 최저임금만으로도 월 200만원을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명문대의대, 한의대 학생들이 학생 몇 명만 받아도 꽤 높은 수익을 얻는다.[29]

게다가 중견급 이상 기업에서 평양의 1인당 GDP에 해당하는 300~330만 원 정도를 세전 월급으로 받는 경우는 이미 허다하며 세후 월급으로 그 수준 혹은 그 이상을 받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수당까지 합치면 330만원 정도는 넘는다. 그래서 1인당 국가 총생산이 30000불 이상이 나오는 것이다.

GDP로 비교해 보면 2019년 IMF 통계 기준 한국의 1인당 GDP는 31,430달러, PPP 기준으로는 2017년 기준 39,446달러다. 같은 PPP 기준으로 비교하면 북한 전체와 무려 29배, 평양과 비교해도 무려 14.5배나 차이 나는 것이며 명목 기준 GDP조차도 한국의 1인당 명목 GDP가 이미 평양의 1인당 PPP 기준 GDP보다 10배 이상이나 크다.

여기에 의식주를 넘어 문화 생활 분야까지 비교해 보면 남북 간 차이는 처참할 정도로 벌어진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영화게임, 애니메이션, 음악, 문학 등의 국내, 해외 문물을 마음껏 즐길 수 있고 국내 여행은 물론 해외 여행도 다닐 수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극소수 상류층을 제외하면 문화 생활, 여가 생활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해외 문화의 경우는 오직 김씨 일족만 마음껏 누릴 수 있을 뿐, 어지간한 간부나 돈주들조차 해외 문화를 잘못 맛보기만 해도 반동으로 몰려 인생 끝장 날 수 있는 곳이 북한이다. 태영호 의원이 탈북을 한 이유는 자녀의 교육 문제도 있지만 문화 생활과도 큰 연관성이 높다.

어차피 한국에서도 하류층은 해외 여행을 못 다니지 않냐고 반박할 수도 있으나 구글 스트리트 뷰유튜브를 통해서 해외를 구경하는 것이 가능하며 라이브 영상에서는 외국인과 채팅도 가능하다. 레고랜드디즈니랜드가 각 나라마다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볼 수 있으며, 어트랙션을 1인칭으로 찍은 영상도 있으니 간접적으로라도 타볼 수 있다. 방구석에서도 간접 체험으로 견문을 넓히고 우물 안 개구리를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케이블 방송이나 위성방송을 신청하면 BBC 월드 서비스 + BBC World News, CNN 등 외국 방송을 제한없이 볼 수 있다. 신청을 안 해도 유튜브에서 호주 ABC News, Sky News, CNN, BBC News 등을 볼 수 있고, 돈만 더 내면 더 타임스,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등 외국 신문을 인터넷으로 구독할 수 있다.

스마트폰 성능도 한국의 하류층이 북한의 귀족층보다 더 우월하지만, 북한의 스마트폰은 성능을 떠나서 기능 자체가 사실상 없다. 구글 플레이와 애플 앱스토어를 통해 셀 수 없이 다양한 앱이나 게임 등을 다운받을 수 있는 한국과는 달리, 북한에서 스마트폰으로 즐길 수 있는 게임이나 영상은 극히 제한적이다.

기껏해야 스마트폰으로 영상 본다는 것이 북한 드라마나 김정은 일가의 프로파간다 영상이고 그마저도 웹브라우저인터넷은 없으니 차라리 안 보는게 나을 수도 있다. 그나마도 스마트폰 보급률이 세계 최고인 한국과 달리 북한은 세계 최저이다.[30]

SBS에서 북한 스마트폰 리뷰를 했으니 참고해보자. '열람리력'에는 내가 지금껏 어떤 파일을 켰는지 어떤 화면을 봤는지가 모조리 기록되며 삭제는 불가능하다. 2년 동안 보험이 적용되는데, 제외조건 중에 사용자의 잘못이나 위법행위로 몰수당하는 경우가 있다.

메뉴가 한국어이긴 한데, 순화어라서 오히려 영어로 설정하는게 더 편하다는 것이 흥미롭다. 갤러리는 '화상서고', 메시지는 '통보문', 다운로드는 '내리적재'이다.[31]




한국전세 내지는 월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과반수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온수, 냉난방, 인터넷, 전기, 기본적인 인테리어[32] 등 달려 있을 건 전부 달려 있고, 북한처럼 정전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은 절대로 아니다. 물론 발전소, 변전소 사정으로 정전이 되기도 하지만 보통 한국전력공사에서 정전에 대해 미리 안내하고 몇 가구 이상이 정전된다면 뉴스에 나올 정도로 극히 드문 사례이다. 지역특성상 정전이 자주 되는 지역이라도 소득수준대비 싸고 편하게 발전기나 비상전원장치 등의 설비를 집에 자유롭게 설치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걸 제외하면 옷도 너무 넘쳐나서 북한 기준으로 보면 최고급 재질의 의류가 한국에서는 매우 흔해서 아무나 다 입고 다니고 헌옷수거함에는 그런 옷이 가득 쌓이며, 음식은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 할 온갖 산해진미들이 쌓이고 널렸다. 심지어는 사업에 실패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면 한다는 것부터가 치킨 집을 차린다고 할 정도이다.

결국 대한민국의 평범한 서민이 북한의 어지간한 고위급 간부보다도 훨씬 더 안정되고 넉넉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33]

심지어 경제력이 탄탄해진 탈북민들은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수준으로 발전했는데 "북한에 있을때는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었는데 남한으로 오니 이렇게 차까지 몰게 되었다. 그것도 내가 직접 사서 소유한 차를.."이라며 감격해 한다. 북한에서는 기름도 모자라서 그나마 굴릴 수 있는 차라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이 목탄자동차인데다 일반인들이 운전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며, 당연히 자가용이란 개념은 상상도 못한다. 일부 고위 당 간부들이 김씨 일가에 차를 '하사' 받는 일은 있으나 어디까지나 '하사'를 가장한 대여품이고 숙청시에는 몰수되어 간다.


4.1. 의생활[편집]


1960년대, 1970년대 산업 정책으로 인해 한국은 경공업 수출기지로서 기술을 쌓아올렸다. 이후 사회적 복리후생 및 생활환경의 상승으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가는 바람에 노동집약적 경공업은 쇠퇴한 것이 현실이나, 살아남은 기업들은 온갖 기술을 흡수하여 중견기업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노동집약적 경공업과 자본 및 기술집중적 경공업을 모두 경험한 한국의 섬유 및 섬유 소재, 의류 생산 관련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는 섬유 부분 기업들이 신소재나 탄소섬유, 화학소재 등에 진출하고 있다.

한국에서 시판되는 의류의 경우 품질은 우수하면서도 가격은 저렴하다. 명품이나 맞춤 의상은 비싸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비싼 것이 명품과 맞춤 의상이고, 최소한 서민이 일상생활에서 입을 옷을 구하지 못해 거적떼기를 입고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시장이나 옷가게, 백화점, 아울렛, 대형마트 자체매장, 인터넷 쇼핑몰등의 구매처도 널려있다.

패션 산업은 한국에서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꼽히는 산업 분야 중 하나인데, 이는 세계적인 한류 열풍을 등에 업고 함께 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북한은 아예 쳐다보는 것도 불가능한 정도다.[34]

그나마 한국 기준에서도 비단옷은 서민이 입기에 다소 비싼 것이 사실[35]이지만, 애초에 한국인들은 비단옷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다. 대부분 반들반들한 질감이 부담스러울 뿐더러 관리도 까다롭기 때문이다.[36]

한국인들은 한복, 넥타이, 스카프 외에는 천연 비단을 잘 쓰지 않고 오히려 실용성에 중점을 두어, 고어텍스 같은 비싸지만 기능성이 있고 비교적 관리도 쉬운 재질을 선호하고 비단옷을 만들 때도 좀 더 내구성이 높은 인조비단을 사용한다.


4.2. 식생활[편집]


이밥은 영양가가 별로 없다면서 오히려 잡곡밥, 현미[37]을 먹고 고기를 우린 국물 정도가 아니라 내장이나 고기가 있는 순대국이나 곰탕[38], 설렁탕, 감자탕, 뼈해장국, 고기와 약초가 푸짐하게 들어간 갈비탕, 닭 한 마리가 통으로 들어간데다 각종 약재를 넣은 삼계탕도 먹고 산다.[39]

김일성의 목표대로라면 1964년 300만톤의 쌀과 20만톤의 육류를 생산하여야 한다. 그무렵 북한 인구가 1,200만명 정도이니 1인당 약 250kg의 쌀과 약 16kg의 육류를 소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다른 식량자원은 몰라도 쌀은 자급이 가능한 작물로 1988년 6,053,482 톤을 생산한 것을 정점으로 국민들이 쌀 말고도 먹을 것이 더 많아 농민들이 다른 작물을 생산하면서 오히려 생산과 소비 모두 줄어들어 쌀값이 떨어져서 농민이 울상을 짓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육류 소비량 통계는 더욱 드라마틱한데, 1960년대 한국인의 1인당 육류 소비량은 5kg 미만이었으나, 대략 1980년대 후반쯤 김일성이 목표로 하던 정도의 육류 소비는 얼추 달성되었고, 2020년 1인당 육류 소비량은 52.5kg[40]으로,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은 김일성이 호언장담한 것보다 3.3배나 되는 고기를 먹고 있는 셈이다.

그것도 갈비니 삼겹살이니 목살이니 업진살이니 등심이니 안심이니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도 부위별로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고, 염소고기, 양고기, 오리고기 등도 돈만 어느 정도 있다면 먹을 수 있고, 생선 및 갑각류도 시장에서 사 오거나 횟집에 가서 회를 먹든 구이를 먹든 찜을 해먹든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41]

번화가는 물론이고 시골 읍내에 가도 넘치는 것이 슈퍼마켓, 고깃집치킨집, 국밥집이요, 식당은 막말로 어디를 가든 있다. 급식·학식·구내식당·편의점 도시락, 심지어는 노숙자 무료급식에도 쌀밥과 고기가 나오는 지경이다. 거기다 먹다 남은 음식물들을 버리는 부담이 없어 음식물 쓰레기가 사회 문제가 될 정도다. 그리고 양보다는 재료의 퀄리티[42]를 더 따진다.

덤으로 한국 노동자가 최저임금만으로 불과 두세 시간 일해서 받는 돈으로 갈 수 있는 고기 뷔페에선, 고기를 무한정 먹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많이 먹는 걸 선호하는 것도 아니고, 고기뷔페 고기는 질기고 냄새나고 더부룩하다고 선호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평범한 북한 주민의 입장으로는 기절초풍하고 "고기를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는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거 아니냐"라고 할 일이다. 당장 북한 지역에서는 고기가 없다보니 고기의 질을 따질 여유가 없고 고난의 행군[43] 당시 지나가는 철새를 잡고 물고기를 잡는 건 물론이고, 땅에 파묻은 썩은 고기와 폐사한 동물의 고기까지 뜯어먹을 정도였으며, 드물게 인육을 먹었다는 섬뜩한 이야기도 나올 지경이다.

그나마 안정된 현재도 드물게나마 고기를 보면 질 따윈 따지지도 않고 먹기 바쁘다. 일단 고기 자체가 부족하다보니 질을 따질 여유가 없는 게 북한의 현실이다. 고기를 무한정 먹을 수 있는데 냄새나고 질겨서 안 먹는다는 말은 북한 사람에게는 배부른 사람의 투정일 뿐이다.

지역이나 매장에 따라 다르지만 최저임금 3~5시간치 정도의 돈을 쓴다면 소형 레스토랑에 가서 한우 스테이크, 로스트 비프도 썰어볼 수 있다. 게다가 널려 있는 게 김밥이라서 쌀밥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데다, 고깃국 따위는 쳐다도 안 보고 삼겹살이 언제든 먹다보니 질려서 채소 요리나 대체육 등 건강식을 먹는 형국이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북한에선 쌀밥에 고깃국이 부자여야 간신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인 것에 반해, 한국은 그건 이미 오래전 이야기가 됐다. 물론 한국의 물가가 비싸진 것은 있어도 노동을 할 수 있다면 고기를 못 먹는 수준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밥의 경우도 백미밥만 먹는 것은 당뇨비만의 원인이 되어 일부러 식이섬유가 풍부한 잡곡밥을 먹으라고 권장하고 있고, 오히려 흰 쌀밥만 먹는 것이 가난해 보일 지경[44]이다. 당장 오늘 나기 위한 쌀 한 톨도 보기 힘든 북한과는 정반대로, 기름지고 맛난 음식을 너무 잘 먹어 오히려 건강에 해가 되는 것 때문에 소식이 권장되기까지 한다.

한국군의 경우에는 전투력 유지를 위한 식사가 의무[45]이고, 그 식사의 식단에는 신체 단련에 필요한 육류가 반드시 포함된다. 즉, 한국군에게는 고기 섭취가 의무이다. 저가에 단가를 맞추다 보니 맛없고 부실해서 '짬밥'으로 유명한 한국군 병영식도 북한에서는 좌관급(남한의 영관급) 군관 정도는 되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한다.

한국은 너무 잘 먹어서 과식 혹은 영양불균형으로 인해 비만이 되어 당뇨병 같은 성인병이나 등으로 고생하고, 반대로 북한은 너무 못 먹어서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것이 남북의 차이이다.[46]

조선시대의 연간 소 도축 두수를 분석해 오히려 조선시대에 쇠고기를 더 많이 섭취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학계 정설은 아니다. 19세기까지 전세계 극빈 인구가 94%였다는 통계가 있다. 조선인들만이 특별히 예외로서 부유했다는 근거는 없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의 고조부도 아일랜드대기근이 닥친 1850년에 아일랜드를 떠나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했다. 학계 정설은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보릿고개를 탈출한 것은 한강의 기적 시기이며, 북한은 반만년 동안 여전히 빈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백두혈통은 잘먹고 잘살듯 조선시대도 그러했을 순 있다.


4.3. 주생활[편집]


한국에는 평양 아파트 붕괴사고로 대표되는 북한의 부실 공사와는 비교가 불가능하게 좋은 주거시설이 많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부실공사 붕괴사고가 있긴 했으나, 2000년대 전후로 건설사고에 경각심을 가지고 아예 기준을 넘지 못하는 건물들은 싹 헐어버리도록 정책으로 유도하고 있다.

한국은 못 사는 사람에게도 최소한 국민임대주택이나 행복주택같이 북한 기준으로는 호화주택급의 주거시설을 제공한다.[47]

단순히 건물을 튼튼하게 잘 짓는 것을 넘어, 21세기에 들어서부터는 건축물의 디자인이나 거주자의 건강 같은 요소에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은 물론, 건설 자재들의 성분을 꼼꼼히 분석해서 관련 업체를 규제하는 등 돈이 더 들더라도 인체에 안전한 소재들을 사용하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석면의 전면 금지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친환경 소재는 고사하고 철근 콘크리트에 넣을 철근이 없어서 저급 각목 따위를 대신 집어넣어 주택을 부실하게 짓는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 삼성물산이 세계 최고층 건물들인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타이페이 101, 부르즈 할리파를 시공할 정도로 건설 기술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기와집 같은 건 시골에서 가끔 보이는 폐가, 전통문화 보존을 위한 한옥 마을, 문화재, 일부 개인의 선호를 충족하기 위해 일부러 개량형 한옥으로 짓는 경우를 빼면 보기 힘든 수준이 되었고 일반적인 한국 사람들은 서양식 주택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 한옥들도 대부분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있거나 편의 시설이 있어서 전기수도를 못 쓰는 일은 없다. 아니 전기수도는 기본이다. 하회마을에서도 위성방송, 기가비트 인터넷 다 된다. 그리고 하회마을 등 문화재나 종로구의 고급 한옥들은 부촌 아파트와 가격이 비슷하거나 더 비싸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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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에는 문화어가 제정되기 전이라 띄어쓰기 등 표기법이 지금의 문화어와는 달랐다. 의존 명사도 붙여 쓰는 지금의 문화어와는 달리 당시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조선 로동당 중앙 위원회, 최고 인민 회의, 조선 중앙 통신사, 김 일성 수상처럼 과도할 정도로 띄어쓰기를 많이 했다. 다만 당시에도 사이시옷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발음은 동일하게 [이:바베 고기(ㄷ)꾹\]으로 한다.[2] "조선 중앙 년감 (1963년 판)", 조선중앙통신사, p. 29. 위의 인용문은 모두 1962년 당시의 북한 맞춤법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3] 북한 말로는 집집마다 고기를 끓여내 만든 육수를 각각의 집에서 언제든 먹을 수 있다! 를 표방하였지만 실상은 운 좋으면 소강탕이었고, 보통은 무청을 넣은 된장국이나 소금국이다. 남한에서도 1960년대 초반에서는 군대에서 소강탕이나 돈강탕이 더러 나왔다고하나, 어디까지나 이쪽은 그나마 둥둥 떠다니는 비계조각은 있을 정도였다. 물론 현재는 없다고 봐야한다.고깃국이 없는게 아니라 소강탕 돈강탕이.[4] 일제 강점기에 조선을 근대화하면서 북한 지역은 공업화를, 남한 지역은 농업화를 목표로 근대화를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이유가 일제가 중국 대륙을 정복하려고 하는데 북한 지역이 중국이랑 접해 있어 물자조달이 쉬웠기 때문이다.[5] 사실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 식량 배급을 지금까지 고집하는 국가는 북한이 거의 유일하다. 소련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60년대부터는 아예 배급제를 폐지했고 40년대에도 소련 루블을 쓰고 인민이 이용 가능한 백화점이 있었으며,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동유럽의 사회주의권 국가들도 늦게는 1960, 70년대부터 극빈층과 장애인들을 제외하면 배급제를 사실상 없앴다. 베트남도 1980년대 말에 배급제를 폐지했으며 중국도 국공내전 전후 및 문화대혁명 시기를 제외하면 배급제를 운영한 적이 없다. 이런 공산주의권 국가들의 경제 체제도 자본주의와 거의 다를 바 없이, 인민들에게 같은 월급을 지급한 이후 그 돈으로 자신들이 사고 싶은 것을 사게 했다.[6] 2020년대 한국의 인구는 1960년대에 비해 두배 이상 증가했는데, 쌀 생산량은 한동안 늘어나다가 이제는 다시 1960년대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이는 쌀 말고도 다른 먹을거리가 지천에 널렸기 때문이지, 한국인이 식량부족에 시달리기 때문은 아니다.[7] 경제성장함에 따라 기존 전통 요리 역시 밀, 육류, 해물이나 과일 비중이 높아지고, 서구권 요리가 유입되면서 한국인들의 쌀 소비량이 줄고 밀이나 육류 소비량이 늘었다. 서유럽,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외에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동유럽 등에서 외국인 노동자, 이민자들이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이들의 식문화도 같이 들어왔으며 여행으로 인해 현지 요리에 맛을 들이기도 한다.[8] 물론 인간의 욕망은 원초적이기 때문에 노숙자들도 당연히 소득을 얻고 한국 기준 그럭저럭 먹고 사는 서민이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서민들은 중산층이 되고 싶어하고 중산층들도 상류층이 되고 싶어한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비만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다 보니 다이어트를 하려고 하고 이게 지나쳐서 거식증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9] 당시 선진국 후보로 적도기니가 뽑혔지 한국은 아예 후보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이 언제 멸망하냐가 1950년대 토픽이었다. 그런데 적도기니는 여전히 개발도상국으로 남아있고 지지리도 못 살던 한국은 선진국이 되었다. 그 때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같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었다. 이 중 대만국부천대 시기 중화민국 중앙은행에서 확보한 , 등 귀금속,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챙겨온 문화재, 고서, 예술품, 국내외 화교 자본가들이 챙긴 자본이 있었고, 홍콩싱가포르의 경우, 영국, 미국의 지원, 미국, 영국계 기업의 자금, 화교 자금이 있었지만 한국은 진짜 아무 것도 없었다. 중화권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달리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에서 한국은 유일하게 비중화권 국가이다.[10] 애초에 미군정을 맡은 인물들이 전부 군인 출신인데다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행정 경험이 없어, 가뜩이나 상황이 좋지 못하던 한국의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11] 물론 이는 6.25 전쟁 이전까지의 일이다. 이후에는 전쟁으로 인해 남북 모두 '박살'의 정도를 넘어, 아예 한반도 내부 기반시설 대다수가 초기화되었다.[12]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파리바게트 빵 같은 퀄리티는 전혀 아니고, 단순히 옥수수가루를 반죽하여 굽거나 쪄낸, 가끔 길가다 보이는 옥수수술빵의 하위호환 같은 느낌의 퍼석퍼석한 빵이었다. 중국 대륙이니 농민공이 먹는 만터우와 같다고 보면 된다.[13] 여기서 한강의 기적과 비슷하지 않냐고 하는데 전혀 아니다. 한강의 기적에는 중공업만 키운 것이 아니다. 당시 화마를 피한 서울, 부산, 대구전쟁 이후 재개발된 서울에 섬유, 식품, 담배경공업을 먼저 육성시켜 축적한 자본으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한 것이다. 당장 한국 굴지의 대기업삼성LG 역시 그 출발은 경공업이었고 오뚜기동양제과 역시 경공업이다.[14] 시베리아 임업 쪽에 북한 노동자들이 러시아로 와서 일하고 있고 현재 신냉전 사태에서 북한이 러시아의 입장을 두둔하는 성명을 내고 있지만 예전 구 소련 시절처럼 그냥 무턱대고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건 거의 없다.[15] 물론 맥도날드가 가난한 사람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빌 클린턴이나 도널드 트럼프와 같이 정계 거물들도 맥도날드를 좋아한다. 빌 클린턴은 원래 하층민 출신이라서 그렇다고 할 수 있어도 트럼프는 엄연히 3대 금수저 집안 출신임에도 맥도날드 햄버거를 좋아한다.[16] 한국에서는 뉴욕 여행 시 들러볼만한 맛집 느낌으로 알음알음 알려져 있던 쉑쉑버거가 2016년 입점했을 때 줄섰던 적이 있으며, 일본 여행시 들러볼만한 맛집 느낌으로 알음알음 알려져 있던 모스버거가 2012년 상륙했을 때도 줄을 섰던 적이 있다. 물론 사람들이 입점 초기엔 호기심에 가보긴 했어도, 여전히 맥도날드가 인지도나 접근성, 가성비면에서 압도적인지라 쉑쉑버거와 모스버거는 초기 화제였던 것에 비해 생각만큼 그리 매장이 확장되지는 않았다.#[17] 이 기자는 아예 국제기구가 식량난을 과장하여 후원금을 가져간다고 생각한다. 정부도 이런 기관의 주장에 동조하지 말고, 대북 지원도 일방적으로 베푸는 식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8] 장마당을 통해 한류 컨텐츠 등 민감한 정보가 유통되고, 거기다 '서비차'라는 것이 등장하여 이들이 바치는 뇌물려행증 제도가 무력화되기도 한다. 사실 주민들은 '배급을 기다리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장사에 몰두하고 북한은 경제난이 심각하여 공무원들에게 급여도 제대로 못주니 공무원들이 살기 위해 뇌물을 받아들여서 못 막는 것이다. 북한 당국은 이미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나 이걸 건드리는 순간 이번엔 진짜로 체제가 위험해진다는걸 잘 알기에 결국 보여주기성 견제만 찔끔찔끔 때리는게 고작이다.[19] 그런데 사실 북한에서도 현재 배급 먹고 사는 사람은 거의 남아있지 않기는 하다.[20] 마거릿 대처 총리하원 대정부질의에서 언급했듯이 사회주의를 겪은 동유럽 주민들이 냉전이 끝나자마자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강해진 것과 같다.[21] 이 "고기가 풍족한가?"에 한해선 조금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다. 한국은 인구대비 육류 생산량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서, 대체로 육류의 시중 가격대가 다른 식료품군에 비해 높은 편이기 때문에, 2022년 현재에도 저소득층으로선 그리 쉽게 먹을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 쉽게 말해, "라면 스프 분말이나 소고기 다시다를 물에 탄 것을 고깃국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된다. 물론 북한에 비하면 절대적으로 풍족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며, 남한엔 3~4등급 정도의 저등급 고기 정도는 저소득층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아니, 한국엔 이미 1,000원짜리 고기가 들어간 음식도 편의점에 판다. 삼각김밥으로 부족하면 4,000원 내로 스팸이나 리챔 같은 프레스햄 통조림이나 오케이쿡 같은 소시지 가공육도 구할 수 있고, 정육점이나 마트에 가서 만 몇천원 정도 주면 고기 한근 정도도 사올 수 있다.[22]선진국 단계에로 갈 필요 없이 최빈국에서 개발도상국 단계로만 넘어가도 의식주와 같은 기초적인 생활 문제는 획기적으로 개선된다. 70년대 중후반 대한민국은 이미 최빈국 단계를 뛰어넘어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는 신흥공업국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먹는 문제는 경제력보다는 유통정책과 농업환경, 물가정책의 문제가 더 크고, 이러한 문제들은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여서 경제가 조금만 성장해도 가장 먼저 커버할 수 있다. 당장 동남아시아도 단백질 섭취는 충분히 하고 있으며, 그 외에 한국보다 1인당 GDP가 많이 낮음에도 고기 섭취량은 한국보다 훨씬 많은 나라들도 존재한다.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몽골이 해당되며, 주로 동유럽, 남아메리카 국가들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 국가의 대부분은 농목축업 생산량이 많고 식재료 물가를 의도적으로 낮추는 정책이 시행되어 그렇다.[23] 백도어보안 문제도 있고, 화웨이 등 중국산의 품질 자체가 낮다는 점이 존재한다. 괜히 한국인들이 화웨이 제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24]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인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통장에 돈을 다 쓰고 정말 한 푼 없이 2~3일 먹지도 못한 채로 동사무소나 읍사무소, 면사무소를 가보자. 민원업무 담당하던 공무원들이 호다닥 달려와서 밥주고 담요 덮어주고 긴급생활지원금을 얻을 수 있는 방법과 각종 사회복지시설 연계 및 자립을 위한 취업지원까지 알선해 줄 것이다.[25] 한국판 마여진[26] 방송에서 하루 한끼 먹는데 100kg라는 여자가 나와 관찰카메라를 설치해봤더니 간식을 입에 달고 살았다. 간식이라고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이 초코파이 2개가 밥 한공기 칼로리이기도 하며 고칼로리 간식이 많으니 습관적으로 집어먹다간 당연히 비만이 된다. 이렇게 간식을 먹으면 하루 0끼 먹어도 비만이 될 수 있으니, 간식도 적절히 먹어야 한다.[27] 고깃집 뷔페에 가서 배터지게 먹었다면 말이 한끼지, 푸성귀 먹는 북한인들이 며칠간 식사를 통해 섭취한 칼로리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씨름 선수들이나 스모 선수들도 하루 두끼 먹는데, 대신 그 두끼에 완전히 폭발시켜서 대폭식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28] 법정 근로시간인 209시간을 기준으로 임금을 지급할 시에는 주휴수당을 제외하고 임금을 지급하면 불법이다.[29] 아니 서울대학교, 사관학교, 교원대, 교대, 지거국 등 등록금이 1학기 기준 300만원 내외인 곳에서는 과외 수입으로 학비를 충당할 수 있다. 더 글로리문동은이 가족 없이 대학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교대 재학 중이었기 때문이다.[30] 세계적인 스마트폰5G 네트워크 서비스 제조 기업이 삼성전자이다.[31] 한국에서 '로드'는 불러오기로 흔히 번역되지만, 원래 의미는 '적재하다' 즉 메모리에 채워넣는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도 '홈페이지'를 일부 언론에선 '누리집'으로 밀어붙이기에 홈페이지와 누리집 혼용되어 쓰이다보니 더 헷갈린다는 주장도 있는데, 북한에선 훨씬 더 심하게 순화어를 쓴다.[32] 벽지, 장판, 전등[33] 실제로도 북한이탈주민들 역시 한국에서 누리는 모든 생활양식이 " 간부들이 누리는 것보다 더 좋다"라고 할 정도다. 아니, 더 나아가 당간부조차 상상 못한다란 말까지 나오는 수준이다.[34] 북한 장마당에서 은밀하게 팔리는 한국산 의류는 고가로 거래되며, 특히 한국산 속옷의 인기가 높다고 한다. 북한 상류층이 혼수를 준비할 때 필히 마련해야 하는 것들 중 하나가 한국산 한복이다.[35] 하지만 예전 신분제 시절에는 아예 입지도 못한 것에 비하면 훨 낫다. 그리고 시장 등에서 천연비단 원단을 구입하여 직접 한복만들어 입는다면 10만 원도 채 안 든다.[36]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비단은 단백질 덩어리인 만큼 알칼리와 자외선 등에 취약하다.[37] 2020년대 들어서는 가격도 그 취향 따라 이밥보다 잡곡과 현미가 비싸졌다고 말이 많다. 심지어 범죄자에게 주는 식단이 콩밥이었는데, 이마저 값이 올라서 잡곡 없는 100% 백미밥으로 바뀐 지경이다.[38] 김씨네 편의점에서 한국 요리로 소개한 것이 순두부찌개, 꼬리곰탕, 불고기, 김치, 잡채, 약밥 등이다. 여기서 약밥김치 외의 음식에는 고기는 기본으로 들어가 있다. 심지어 김장할 때도 생선 육수를 쓴다.[39] 실제로 혼식을 하지 않고 100% 쌀밥만 섭취하면 당연하게도 각기병이 온다. 이는 구 일제 해군 및 산업화 시기 일본 샐러리맨들을 통해 증명됐다. 그러나 현대 한국에서 쌀밥만 먹는다 한들 각기병이 오지 않는 이유는, 부족한 티아민은 , 감자, 돼지고기로 충분히 섭취가 된다. 심지어는 도정쌀과 라면에도 비타민이 첨가되어 나온다. 사실상 한국에서는 삼시 세끼는 커녕 한끼만 제대로 먹어도 허기 질지언정 영양실조는 걸리지 않는다.[40] 전체 289만톤[41] 탈북자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고기 구경조차 힘들다 보니 고기 부위를 지칭하는 말은 거의 모른다고 한다.[42] 비싼 한돈, 한우가 괜히 1++등급, 프리미엄 붙어 높은 가격에 팔리는게 아니다. 이제는 미국산 쇠고기호주산 쇠고기든 수입산 쇠고기와규 등 품종을 따진다.[43] 당시에는 고기의 품질은 커녕 출처조차 따지는 것이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소든, 돼지든, 설령 그게 사람이든[44] 잡곡밥을 하려면 대량으로 생산되어 싸게 구할 수 있는 쌀 말고도 비교적 소량으로 생산되기 때문에 쌀보다 비싼 여러 곡물을 구해야 해서 재료비가 비싸져 잡곡밥이 오히려 비싸다는 가까운 인식이다.[45] 할랄/하람, 코셔 푸드, 힌두교 기준 음식 규범이나 라마단 같은 종교적 이유, MRI 촬영이나 내시경 검사 예정이 있는 등의 이유로 꼭 금식이 필요한 것이 아닌 이상 식사를 해야 한다. 종교 문제와 개인 체질상 알레르기가 나타나는 식품은 당연히 안 먹는 게 맞고, 실제로도 종교 문제와 알레르기가 있는 병사에겐 다 빼 준다.[46]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식습관 문제로 고생하는 것인데 남한은 "먹는 걸 좀 조절할걸." 하고 후회하는 일이 생길지언정 아무튼 '먹는 즐거움'이라도 있고, 시간과 금전적 여유가 있다면 운동기구를 사서 쓰거나 운동시설에 등록을 하거나 의료서비스를 받으면서 건강 유지에 신경쓸 수 있지만, 북한의 경우에는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어 영양실조로 고생하고 운이 좋다면 옆 사람이 아사하고 운이 없다면 본인이 아사할 지경이니 억울하고 원통해서 고통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후회할 건덕지조차 없는, 후회할 권리조차 못 누리는 곳"이 북한이라는 뜻이다.[47] 사실 어지간한 원룸만 해도 북한 대부분의 주택보다 튼튼하고 쾌적할 가능성이 높다. 기와집 별장도 시골에 있는 것을 장만하면 2~3억 정도의 가격에도 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