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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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1. 중국 인민지원군의 잔류
2.2. 중국 인민지원군의 역할
3. 전개
3.1. 북중관계의 악화
3.2. 철수문제의 제기
3.3. 완전철수
4. 논점
5. 결과
6. 참고문헌



1. 개요[편집]


1958년,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 인민지원군이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한 사건을 말한다.

2. 배경[편집]



2.1. 중국 인민지원군의 잔류[편집]


6.25 전쟁 중, 중국은 김일성 정권의 지원을 결정하고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 10월 19일부터 압록강을 도하하여 북한 지역에 파병하였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던 시점에서 당시 한반도 이북에 있던 중국 인민지원군의 규모는 무려 120만 명이었다.[1] 45만에 불과한 조선인민군의 숫자의 3배에 육박했다. 중국은 6.25 전쟁에서 수십만의 사상자를 발생했고[2]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계속되는 국부군의 폭격, 서방의 경제봉쇄로 박살난 중국의 사정 역시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종전 이후 많은 수의 군대를 철군하였다.

종전 직전 20군, 23군, 26군, 27군, 37군, 38군, 39군, 40군, 42군, 50군, 66군이 병력 교대를 위해 귀환했고, 1953년 8월에 64군단, 9월에 63군단, 포병 7사단, 10월에 60군단, 65군단, 포병 2사단, 포병 21사단, 고사포 61사단이 철수하였고 1954~1955년 사이에 3차례에 걸쳐 총 19개 사단이 철수하였다. 정전 관련 업무 역시 현안들이 마무리되면서 대부분 북한 측에 이관되었으며, 판문점에 주둔한 인민지원군 대표단도 7,800명에서 1954년 12월까지 100여명으로 감축되었다.

하지만 중국은 기본적으로 세력균형을 위해 어느 정도의 중국군을 북한에 잔류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총정치부는 인민지원군의 역할을 정전협정의 보장과 전후 북한 경제의 복구 건설 지원으로 규정하고 1955년 이후에도 15개 사단, 25만명 정도[3]를 남겨두어 북한의 재건 및 농사를 돕도록 하였다.

2.2. 중국 인민지원군의 역할[편집]


1953년 11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은 중국에 복구건설을 위한 원조를 부탁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이를 수락하여 북한이 중국에 지고 있던 빚 전액을 탕감하는 한편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기로 하고 <중조경제 및 문화합작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중국군은 노동력이 극심하게 부족해진 북한 농장에 투입되어서 농사를 도왔으며 각종 건설에 참여했다. 1954년 3월, 인민지원군 총사령부는 <조선인민을 도와 재건활동을 진행할 것에 대한 지시>를 하달, 북한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1957년까지 중국군의 8개의 저수지 및 1300여개의 저수지를 건설했고, 7곳의 물길과 각종 저수지 공사를 지원하였다. 그리고 1958년까지 881개소의 공공장소를 부설하고, 민가 4만 5,412칸, 다리 4,363곳, 제방 4,096개(42만 9,220리터), 수로 2,295개(1,128km)를 축조하였다. 이러한 점은 북한 당국도 인정하여 김일성은 1958년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기념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인민 지원군은 전투의 여가를 이용하여 우리 농민들의 밭갈이를 도와주었으며 파종과 수확을 도와주었으며 파괴된 저수지와 동둑을 수리하였으며 도로와 교량들을 복구하여 주었습니다. (중략) 정전 이후 조선 인민이 잿더미로 된 도시와 무참히 파괴된 농촌을 복구하는 어려운 투쟁에 궐기하였을 때에 중국 인민 지원군은 도처에서 우리의 복구 건설 사업을 적극적으로 방조하여 주었습니다. 지원군 용사들은 정전 이후 몇 해 동안에만 하여도 총연장 80만 6천 여 케터에 달하는 수로를 파서 농촌의 관개 공사를 방조하였습니다. 아름다운 학교들과 웅장한 도시 건물들과 교량들이 지원군 용사들의 손에 의하여 많이 건설되었습니다. 지원군은 수천 톤의 군량을 절약하여 전쟁 피해로 말미암아 식량이 부족한 우리 농민들에게 분배하여 주었습니다.

김일성, “귀국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 환송대회에서 한 김일성 수상의 연설,” 조선중앙년감 1959(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59), p.10, 이상숙(2009), p.87에서 재인용.


3. 전개[편집]



3.1. 북중관계의 악화[편집]


정전 과정에서 공산 측은 기본적으로 6개월 이내에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을 철수시키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전에 주한미군 주둔을 민족 반역이니 어쩌니 맹비난하다가 김일성의 기습공격에 당한 적이 있던 남한에선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고 1954년에 열린 제네바 회담은 결렬되었다.

마오쩌둥은 북한이 42만명이나 되는 군대를 보유하는 것은 너무 많으니 군을 10만명으로 감축하고 중국이 휴전선을 수비해주겠다고 제안하면서 공군 강화, 기계화 부대 창설을 하지 말고 그 돈으로 인민생활 향상에 투자할 것을 조언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근본적으로 외국 군대가 대규모로 북한에 있는 것에 매우 불만스러워하면서 인민지원군이 중국이 북한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라고 여겼다. 여기에 6.25 전쟁 기간 동안 인민지원군과 북한의 관계는 썩 좋지만은 않았다. 조중연합사 구성 이후 중국 측에선 이미 박살난 북한 군대를 비하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마오쩌둥은 "악랄한 태도로 조선동지를 대하는 사람들은 엄격한 비판을 받아야 하며, 심한 자는 철직 처분을 해야 한다."고 이러한 분위기에 경고했다. 김일성 본인이 6.25 전쟁 중에 펑더화이의 사령부를 방문하였다가 수시간 동안 구금당한 사건이 있었으며, 그외에 남일, 박정애, 방학세 등 북한 고위 인사들도 중국군에 억류당하였다. 그리고 1954년부터 1956년 8월 사이에, 북한 정부인사 및 주민 구금, 모욕 사건이 355건 발생하였으며, 중국군의 대민범죄로 인해 417명의 사상자가 발생, 1954~1955년 강간 사건도 68건 발생했다. 중국군과 북한 여성 간의 간통은 그 열배에 달했다. 이로 인해 중국군과 북한 여성 사이의 사생아들이 많이 출생하여 중국군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여자들이 아이를 등에 업고 부대를 따라다니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중국군의 남벌, 밀수, 경작지와 농작물, 묘지 훼손도 심각하였다. 중국군이 병영 건설을 위해 차지한 농경지는 800만 평방미터에 달했으며, 북한의 허가 없이 5만 4천그루의 나무를 베어버렸다. 그리고 중국군의 군사훈련으로 11만평 550무의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부분은 박길룡의 증언에서도 보이고 있다. 박길룡은 인민지원군이 누구에게도 길을 양보하려 하지 않았으며, 늘 북한 군관들의 차가 중국군을 만나면 비켜줘야 했다고 회고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중국군의 사업은 조선의 풍토에 맞지 않는다며 불만을 터뜨렸고, 지방 정권기관에서도 중국군이 북한 주민들을 강제로 공사에 동원하고 멋대로 가축을 도살하며 지방정권기관 공무원들을 구금하는 행위를 고발해왔다. 김일성은 "대국놈 고집을 어떻게 꺾어야 할지 고민스럽다"라고 펑더화이의 실명을 거론하며 욕하기도 했다. 여기에 중국 어선들이 북한 영해에서 불법 어획을 하는 것도 문제였다. 북한 외무성의 항의를 중국은 묵살해버렸다. 박길룡은 이러한 상황이 중국군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를 반전시키진 않았다고 하였으나 션즈화는 중국군의 오만한 태도와 법률 및 풍속 위반 행위가 북한 인민들이 중국군을 점령군으로 여기게 하였으며 큰 굴욕감을 느끼게 했다고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김일성의 이러한 불만은 1955년 12월, 김일성이 대표적 친중파였던 조중연합사령부 부정치위원 출신인 체신상 박일우를 반당으로 몰아서 숙청한 사건[4]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북한의 이러한 막무가내 숙청에 대단히 불만이었으며 박헌영에 대해서도 죄도 충분치 않고 문인에 불과한 그를 절대로 죽여선 안된다고 북한에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소련의 박헌영 구명 요청도 씹은 김일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955년초부터 북한과 평북 회창에 있는 지원군 사령부와의 교류는 거의 끊어졌으며, 1956년과 1957년의 중국인민지원군 참전 행사는 너무나도 간소하게 치러졌고 행사에서도 조선인민군 위훈이 더 강조되었다. 그리고 중국인민지원군 기념비를 세웠으나 너무 초라해서 새로 세워야할 정도였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고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이 중국에 망명하는 등 북중관계는 긴장국면으로 치달아 인민지원군의 추가적 철수 논의 역시 중단되었다. 여기에 1956년 3월, 스탈린 격하와 이에 따른 폴란드, 헝가리 혁명 등의 국제적 엄중한 위기 역시 영향을 끼쳤다. 중국 측의 북한에 대한 불만 역시 커서 중국은 북한의 망명한 연안계 간부들의 송환 요구를 거절하는 한편, 1956년 9월, 최용건이 중국을 방문하자 마오쩌둥은 "나는 그에게 이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환기시켰다."라고 언급하며 김일성을 비판했으며 리커눙도 대체 조선전쟁은 누가 시작한거냐고 최용건을 윽박질렀다. 마오쩌둥은 9월 18일 회담에서 최용건에게 "당신들은 오늘 이 사람들을, 내일은 저 사람들을 숙청하여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다. 이렇게 되면 최후에는 자신도 숙청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것이다. (...) 과거의 황제, 비교적 개명한 황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라고 김일성의 숙청을 비판하며 박일우, 방호산, 김웅 등을 중국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1956년에 이미 군대를 철수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1956년도에 중국 인민지원군 막사에 대한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3.2. 철수문제의 제기[편집]


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일성은 헝가리 사태 때 소련군이 헝가리를 조지는 것과 8월 종파사건, 그 뒤를 이은 중국과 소련의 공동개입을 보고 소위 대국주의에 맞서야 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마오쩌둥은 북한 문제 개입 직전에 미코얀과의 대화에서 김일성은 자기가 간섭당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지원군 철병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정확히 그렇게 된 것이었다. 김동길과 한상준은 특히 헝가리 사태에 주목하는데, 1956년 11월, 중국 외교부는 북한, 북베트남, 몽골 대사를 초청하여 중국은 공식적으로 소련의 헝가리 무력개입을 옳은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고 표명하면서 이들을 안심시키려 했다.[5]

1956년 11월, 김일성은 중국에 인민지원군 철수를 요구했고[6] 마오쩌둥은 대화와 무력 사용을 고민하가다 결국, 대화로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11월 30일, 소련대사 파벨 유딘을 만나 "그가 우리에게 떠나라고 한다. 소련 군대는 바르샤바 조약에 따라 폴란드에 주둔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것이 없다. 그들이 지원군을 요청했다. 만약 그들이 다시 지원군 주둔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슨 이유로 나가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이종석은 북한이 중국보고 다짜고짜 나가라고 했다기보다는 이 문제를 논의해보자고 제기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소련은 중국의 철수에 반대하며 1957년 1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저우언라이에게 "소련정부는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에 주둔하는 것은 조선인민의 이익만이 아니라 전체 사회주의진영의 이익의 관점에서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라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이내 입장을 바꾸어 2차 중소회담에서 중국군 철수에 동의했다. 이는 당시 동유럽에서 소련군 철수에 중국이 지지하고 있다는 점, 중국이 아시아 국가들과 평화공존을 내세우며 관계개선을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분상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북한의 고무우카는 이미 죽었다면서 막무가내로 쳐들어가서 김일성을 다른 지도자로 바꾸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저우언라이도 "당연히 그는 이상적 인물은 아니지만, 조선의 상황에 근거해서 난쟁이 중에서 그나마 가장 키가 큰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불신임하면 중조 우호 단결에 불리하고, 중소 우호 단결에도 영향을 미친다. 현재 김일성은 조선인민 대중에게 여전히 신망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동시에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부통령이 되는 방식의 거래를 미국과 한 것이 아니냐면서 '너지 임레'식 배신을 의심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은 북한에 철군 결정을 통보하지 않았다.

이종석의 지적대로 중국군의 철수는 자신들에게 이따위로 구는 북한을 중국이 더 이상 지켜주고 싶지 않았던 면이 큰 것으로 보인다. 중국군 철수를 준비하면서 마오쩌둥은 1956년 11월 16일, 제1차 5개년 계획을 위해 5천만 위안을 지원해달라는 김일성의 8월 21일자 요청을 거절해버렸다. 소련도 결국 지원을 해줬다는 점에서 마오쩌둥의 태도는 강경한 것이었고 분노한 김일성은 김일을 대표단장으로 한 중조 무역회담 대표단 파견을 취소하며 소련에 추가적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1956년 12월 전원회의에서 '자체의 내부 원천에 의존한' 1957년도 경제계획 수립을 결정했다. 이후 중국은 북한을 달래기 시작, 1957년 1월, 상품무역협정서를 체결하고 다시 원조를 제공했다. 김일성의 태도도 누그러져 1957년 5월 6일, 6월 초에 북한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하겠다고 제안했고 중국은 이를 수락하였다. 따라서 1957년 9월 13일부터 10월 6일까지 내각 부수상 김일을 단장으로 한 북한 대표단이 베이징을 방문, 1억 인민폐 상당의 원조를 받아왔다. 김일성도 박일우를 중국에 보내주겠다고 하였으나 결국 보내주진 않았다. 1957년 12월 15일, 문예보 36기는 최창익, 박창옥, 서휘, 리필규, 김승화, 리상조는 반동 음모가라고 비난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김일성이 북한의 임레 너지가 아니란 것을 확신한 마오쩌둥은 행동에 나섰다. 1957년 10월, 혁명 40주년을 기념하여 모스크바에서 만난 김일성과 마오쩌둥 사이에 회담이 벌어졌다. 11월 9일, 자신의 숙소에서 김일성, 남일, 김창만과 만난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백만명이 넘는 외국군이 주둔하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을 강조하고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가 매우 필요한 조치임을 역설하며 3단계에 걸쳐 단계별로 2개군을 철수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 이유는 중국이 북한에 사용하는 병참비용의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국군이 철수한다면 미군 역시 최소 2개 사단을 철수시킬 것이며 이승만도 국군을 감축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션즈화의 연구에 따르면 많은 남한 연구들과 달리 김일성은 이 회담에서 오히려 지원군 철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으나 2번째 회담에서 지원군 철수로 미국을 골탕먹일 수 있을 것이라고 입장을 선회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회담 결과에 만족을 표하며 저우언라이를 북한에 보낼 것이며 자신도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또한 이때 마오쩌둥은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펑더화이를 보내 간섭한 것에 대해 내정간섭으로 보일 수 있으니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펑더화이가 김일성을 만나 사과한 것에 대해서 잘한 일이라고 칭찬했으나 알려진 것과 달리 직접 사과는 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펑더화이 개인의 사과이며 중공중앙의 사과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7] 심지어 8월 종파사건으로 망명한 북한 간부들의 송환까지 제안했으나 이를 김일성이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길룡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숙소로 돌아와 "중공 오랑캐는 오랑캐다." 라고 욕을 하였고 중국이 태도를 바꾼 것에는 모종의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가 실질적으로 결정되었던 것은 1957년 11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마오쩌둥과 김일성이 만나 마오쩌둥의 철군 의견에 김일성이 동의하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8] 중국의 모택동은 회담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출군 이유와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 1. 중국인민지원군에 대한 후방보급 보장을 위한 국가의 예산부담이 크다.
* 2. 중국군의 철군은 남조선에 주둔 중인 미군 2개 사단의 철군을 촉진시킬 것이며, 동시에 이승만 군대의 감축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다.
* 3. 휴전선은 매우 안정되어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30만 군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민지원군 철군이 가능하다.
* 4. 미국과 이승만이 도발을 감행할 경우, 우리는 여전히 ‘지원군(志愿军)’으로 과거와 다름없이 조선인민을 원조할 것이다.[9]

북한으로 돌아간 김일성은 1957년 12월 16일과 12월 25일에 서한을 보내 2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 1. 북한 정부가 성명을 발표하여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주장하며 이에 중국 정부가 적극 호응한다.
  • 2. 최고인민회의가 유엔에 서한을 보내고 소련도 유엔에 제안을 하여 유엔이 행동에 나서게 한다.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중앙서기처는 논의 후 첫번째 방안을 수락하였다. 1958년 1월 24일,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동의를 표하면서 2가지 방안을 추가로 제시했다.

  • 1. 1958년 2월 중순, 저우언라이가 북한을 방문하여 북중 양국 정부가 1958년 말 이전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완전 철수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을 공동성명을 통해 발표하며 유엔군도 이에 호응하여 철수할 것을 요구한다. 이와 동시에 중국인민지원군은 성명을 통해서 자신의 철수가 북중 양국 인민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고, 만약 미국과 남한이 전쟁을 일으켜 군사분계선을 넘게 되어 북한이 출병을 요청하면 주저없이 참전한다는 점을 밝힌다.
  • 2.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는 3단계에 걸쳐 진행한다.

1958년 2월 18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인민지원군 철수는 중국이 먼저 주도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김일성이 매우 뜻밖이라고 여겼으나 찬성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2월 28일, 유딘 대사를 만난 마오쩌둥은 중국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오키나와, 필리핀, 미드웨이의 미군기지이며 대만과 남한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 지역에 배치된 강력한 군사기술장비도 비교적 적다면서 미국이 대만이나 남한을 구실로 중국과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보였다. 이종석 역시 이러한 점을 근거로 중국 역시 인민지원군 철수에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지적한다.

3.3. 완전철수[편집]


파일:1958년 2월 14일 주은래의 북한 방문.png
1958년 2월 14일, 평양에 도착한 저우언라이

위에서 합의된 사안에 따라 1958년 2월 5일, 북한은 한반도에서 미군과 중국군을 비롯한 모든 외국군을 철수시키고 남북한 자유선거와 남북한 군비축소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월 7일, 중국이 호응하여 중국군 철수를 밝혔다. 2월 19일, 마오쩌둥이 약속한대로 저우언라이가 북한을 방문, 김일성과의 연합성명을 발표해 1958년 연말까지 중국군을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당연히 미국은 2월 19일, 성명을 통해서 중국군이 나가던 말건 미군은 남는다고 발표하였다. 공식적인 중국인민지원군 철수 성명은 1958년 2월 5일 북한 정부가 한반도의 평화통일문제에 관해 발표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아래 북한 정부의 성명을 보자.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성명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는 조선에서 일체 외국군대의 철거 문제와 조선의 평화적 통일 문제는 이미 성숙되었으며 지체 없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책들이 시급히 강구되어야 한다고 성명한다.

첫째, 조선에서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조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미군과 또한 중국인민지원군을 포함한 기타 일체 외국 군대가 남북 조선으로부터 동시에 철거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조선에 자기 군대를 파견하고 있는 국가들은 조선으로부터 자기의 군대를 즉시 철거시키기 위한 해당 조치를 조속히 취해야 할 것이다. 미군의 남조선 강점은 어떠한 구실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또한 미군이 남조선에 계속 남아 있을 하등의 근거도 없다.

둘째, 남북 조선으로부터 일체 외국 군대가 완전히 철거한 후 일정한 기간 내 전 조선 자유선거가 실시되어야 한다. 이 선거는 중립국 기구의 감시하에 실시될 수 있다.

1958년 2월 6일자 로동신문

1958년 2월 21일, 저우언라이와 천이는 귀국길에 심양을 방문해 북중관계가 순망치한의 관계임을 강조하고 "과거 조선에 대한 수많은 우리 동지들의 시각은 단편적이고 주관적이었으며, 조선인들은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여기고 그들의 어두운 면만 보았다."라고 중국의 기존의 태도를 비판하였으며 서휘, 리필규 등은 "매우 나쁘고, 가는 곳마다 근거 없이 함부로 말하며, 조선로동당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소련 공산당과 중국공산당에도 반대한다."라고 비판했다. 2월 24일, 공산 측 요구로 열린 88차 군사정전위 회담에서도 유엔사는 중국의 철수는 전략적 철수에 불과하다면서 공산 측의 외국군 철수 요구를 묵살했다. 1958년 5월, 중국은 북한의 위임을 받아 영국에 이 문제를 유엔에서 논의하자고 했으나 이 역시 거절당했다.

하지만 미국, 남한, 유엔사 측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의 철수는 1958년 3월부터 진행되었다. 철군에 앞서 2월 13일, 지원군 총사령부는 중국군과 북한 인민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를 하달하였다.

  • 1. 적의 상황과 군대 사무를 인민군에게 상세하게 인계하고, 모든 부대 병영과 도구들을 무상으로 인도한다.
  • 2. 일체의 사고를 방지하고, 기강검사를 철저히 하며 배상과 사과 등 후처리를 잘하도록 한다.
  • 3. 부대 철군 시기 지방정부와 인민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도록 하며, 환송식이 있을 경우 반드시 성의를 다해 답례한다.

2월 20일,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가 성명을 발표, 1958년 말 이전에 모든 중국군을 철수시키며, 만약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중국은 주저없이 참전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소련 역시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북한도 2월 20일자 성명을 통해 4월 30일까지로 계획된 1단계 철수작전을 발표했다. 저우언라이는 철군작업에서 절대 태만하고 교만하지 말고 처음과 마무리를 잘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교호(交好), 주호(走好), 도호(到好) 3원칙을 하달하였다.

  • 1. 교호: 무기, 장비, 개인이 휴대하는 물품 이외에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민군에게 넘겨준다.
  • 2. 주호: 원만하고 완전하게 철군한다.
  • 3. 도호: 조국에 돌아간 다음 공을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조국에 복종한다.

2월 21일, 지원군 총정치부는 철군공작 31개조를 제정하여 철수하는 중국군이 북중우호를 위해 노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1958년 3월 15일부터 4월 25일까지 23, 16군 산하 6개 사단 8만명이 철수했으며 7월 11일부터 8월 14일 사이, 23군, 21군 산하 10만명이 철수하였다. 최종적으로 9월 25일부터 10월 26일 사이, 1군 산하 3개 사단과 포병 지휘소, 후방공급부대 7만명이 북한을 떠나면서 8년 만에 중국 인민지원군은 북한에서 모두 철수하였다. 북한은 9월 9일까지 철군을 완료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대만해협 위기의 발생으로 인해 이는 이루어져지지 않았다. 철군과정에서 중국은 대대적인 선전을 하였으며, 인민일보, 대공보, 광명일보 등은 모두 신화사가 발표한 지원군 철군공보 및 양융 장군의 담화 보도를 게재하고, 관련한 사설, 평론 등을 발표하며 "미 제국주의가 발동한 조선 침략의 죄행을 단호하게 규탄하고, 침략에 반대한 조선인민의 영웅적 기개와 큰 공헌을 열렬히 찬양"하였다. 10월 25일 최후의 부대가 평양에서 철수, 10월 27일 단동과 10월 28일 철수기념 대중집회를 개최하였다. 물자 인수인계 작업(1억 5,700만 위안 상당) 역시 1958년 10월 16일에 마무리되었다. 이후 중국에 보내진 전쟁고아 2만명도 허정숙의 주도로 귀국했다. 다만 판문점 대표부의 중국군 일부는 잔류하여 북한이 유엔군 정전사를 보이콧하고 중국의 철수까지 요구하는 1994년까지 남아있었다.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로 인해 북한은 심각한 안보공백에 직면했으나 1961년 7월, 중국 및 소련과 군사동맹 조약을 체결함으로 어느 정도 이를 해소하였다.

4. 논점[편집]


위의 내용을 요약해서 기존에 알려진 내용과 실제 사실 관계를 대조해보면 다음과 같다.

  • 1. 중국은 나가기 싫었는데 김일성이 억지로 몰아낸 것이다?: 중국 측 자료를 보면 중국이 철수에 오히려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칫 사회주의 형제국을 방기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는 민감한 결정에서 김일성이 적극적으로 주장했다고 하면 중국의 철수의 명분이 더 정당화됨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오히려 김일성이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까지 하면서 자신들의 주동을 재확인해주었다.

  • 2. 김일성은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를 원했는가?: 김일성이 중국에 불만이 대단히 많았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위의 각주에 언급이 되어 있듯이 김일성이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를 직접적으로 요구했다는 문서적 증거가 발굴되지 않았으며 중국이 소련과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에 합의되었다는 문서가 먼저 확인된다. 마오쩌둥이 말했듯이 김일성은 중국군이 나간다니까 오히려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이종석은 둘다 철군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가 관계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5. 결과[편집]


중국군의 철수로 인하여 김일성은 더 이상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1956년 9월 수준의 간섭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었다. 션즈화도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의 최대 수혜자는 김일성이었다고 지적한다. 북한은 1958년 내내 고려인, 연안계 군인들에 대한 대숙청을 감행하였고, 화교에 대한 탄압도 자행하여 1959년 4월까지 428명의 '반혁명분자' 화교를 적발, 52명은 체포하고 12명을 투옥했으며 5명을 사형에 처했다. 북한의 정통성은 김일성의 항일 유격대 투쟁으로 유일화되었고, 동시에 북한의 군비 부담을 크게 늘려 북한 사회를 더욱 군사화, 유격대화하게 만들었다.

약간의 이점도 있었는데 북한과 중국은 중국군의 철수를 빌미로 미군의 철수를 더욱 줄기차게 요구하고 이를 유엔으로 끌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중국, 남한을 패싱하고 단독적인 북미대화에 나서는 전략 역시 추동이 가능해졌다.[10]

6. 참고문헌[편집]


  • 김동길, 한상준(2014), 제2의 해방: 북한자주화와 1956-57년의 중국-북한관계. 국가전략 20(2)
  • 박영실(2006), 정전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북한 지원과 철수. 정신문화연구, 29(4)
  • 션즈화, 최후의 천조: 모택동 김일성 시대의 중국과 북한(서울: 도서출판선인, 2017).
  • 이상숙(2009), 1958년 북한주둔 중국인민지원군 철수의 원인과 영향: 북한의 대중국 협력 확대와 대중동원 경제노선 강화를 중심으로. 북한연구학회보 13(1).
  • 이종석, 북한 주둔 중국인민지원군 철수에 관한 연구(성남: 세종연구소, 2014)
  • 한상준 (2012). 중국인민지원군 철군의 원인과 중 북 관계. 아태연구, 19(2).
  • 한상준(2018), 중국인민지원군 단독철군 문제 재론. 동양사학연구, 142.
  •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과 북조선 건국의 숨겨진 이야기들 상권(서울: 중앙일보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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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사과학원(중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중국군의 한국전쟁사』 3, 2005, 788쪽.[2] 사상자의 규모는 논쟁이 많다. 연합군측 통계에 따르면 중국군은 90만 명(이 중 전사자는 15만 2,000명에서 18만 3,0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중국 측 공식통계는 전사자 11만 6천명을 포함하여 36만 6천명이지만 정작 이종석 교수가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을 방문해서 확인한 수치는 전사자만 17만 1,669명이었다.[3] 1, 16, 21, 23, 54군, 포병, 고사포병, 장갑병, 공정병, 후방 병참부대 등.[4] 박일우는 1955년 북한 대기근을 마오쩌둥에게 알려주었고 이 때문에 김일성은 대노하여 박일우를 마오쩌둥의 조선인 서기라고 맹비난하였고 그에게 국가기밀 누설 혐의를 적용하였다.[5] 사실 내부적으로는 이해하는 입장을 보였다.[6] 하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가 발굴되지 않았으며 뒤에서 서술된 11월 30일자 마오쩌둥의 발언에서 언급될 뿐이다. 이 때문에 션즈화는 북한이 요구한 적이 없으며 철군은 중국이 주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7] 마오쩌둥이 사과했다는 것은 전형적인 김일성 허풍으로 보인다.[8] 다만 1956년까지만 해도 소련은 중공군의 철수를 반대한 것으로 보이며, 소련 지도부는 중국군 철수 논의를 자본주의 진영과 대치하고 있는 첨예한 한반도 정세를 고려하지 않은 위험한 행동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철수로 인한 북한 지역의 안보 공백을 우려했을 것이다. 소련 지도부는 1957년 1월초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소련정부는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에 주둔하는 것은 조선인민의 이익만이 아니라 전체 사회주의진영의 이익의 관점에서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히려고 했으나, 종국에는 중국의 입장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이종석, 『북한 주둔 중국인민지원군 철수에 관한 연구』, 세종연구소, 2014, 21~22쪽.)[9] 참고자료는 김동길‧한상준, 「제2의 해방: 북한 자주화와 1956-57년의 중국-북한관계」, 『국가전략』 20, 2014, 98쪽.[10] 생전의 김정일과 김정은도 한국과 중국을 배제하고 오로지 북미대화에 고집을 해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