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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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 | 燕山君


파일:연산군20100529-6.jpg

연산군묘 전경
출생
1476년 12월 2일[1]
(음력 성종 7년 11월 7일)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2]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즉위
1495년 2월 3일[A] (18세)
(음력 1494년, 성종 25년 12월 29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506년 11월 30일[3] (향년 29세)
(음력 중종 1년 11월 6일)
경기도 강화군 교동현 화개산 인근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능묘
연산군묘(燕山君墓)[4]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483년 3월 23일[5] ~ 1495년 2월 3일[A]
(음력 성종 14년 2월 6일 ~ 1494년, 성종 25년 12월 29일)
제10대 국왕
1495년 2월 3일[A] ~ 1506년 9월 28일[6]
(음력 1494년, 연산군 즉위년 12월 29일 ~ 연산군 12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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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융(㦕)
부모
부왕 성종
생모 폐비 윤씨
양모 정현왕후
형제자매
16남 12녀 중 장남
왕비
거창군부인
후궁
20명 [ 펼치기 · 접기 ]
숙의 이씨, 숙의 윤씨, 숙의 곽씨, 숙의 권씨, 숙의 민씨, 숙용 장씨, 숙용 전씨, 숙용 조씨, 숙원 최씨, 숙원 장씨, 숙원 이씨, 숙원 김씨, 나인 최전향, 나인 수근비, 나인 정금, 나인 김숙화, 여완 월하매, 여원 안씨, 장씨, 의녀 강금

자녀
10남 9녀 (10남 10녀)
종교
유교 (성리학)
봉호
연산군(燕山君)[1]
존호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
(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1. 개요
2. 내용
4. 가계
5. 기타
6. 대중매체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임금(上)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서(史書)뿐이다.[7]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하는 자는 은휘(隱諱)한다.’ 하였으니, 사관(史官)은 시정(時政)만 기록해야지 임금의 일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근래 사관(史官)들은 임금의 일이라면 남김없이 기록하려 하면서 아랫사람의 일은 은휘하여 쓰지 않으니 죄가 또한 크다. 이제 이미 사관에게 임금의 일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나 아예 역사가 없는 것이 더욱 낫다. 임금의 행사는 역사에 구애될 수 없다.

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8월 14일 辛酉 5번째 기사

조선 제10대 국왕.

성종의 적장자이자 중종의 이복형으로, 5백 년 조선 왕조 역사에서 광해군과 함께 반정으로 폐위된 후 복위되지 못하여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를 영영 끝까지 받지 못한 둘뿐이었던 임금 중 1명이다. 는 '융(㦕)'. 폐위되었기에 묘호시호가 없지만 생전에 받은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라는 존호가 남아있다.[8] "조선왕조실록"에서 '연산군'보다는 '폐주(廢主)', '폐왕(廢王)', '폐조(廢朝)'이라고 많이 불린다[9].


2. 내용[편집]


본인에게 별다른 권력이 없던 공정왕[10]과 아무런 잘못없이 성인도 되기 전에 숙부에게 강제로 내몰린 노산군은 그래도 3백여 년 뒤 숙종 대에 가서 복권되어 각각 '정종(定宗)'과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었고, 본인과 함께 유일하게 복위 되지 못했던 광해군은 긍정적으로 보는 의견도 있는 반면[11] 연산군은 사망한 지 5백여 년이 넘게 지난 현재에도 그 어떠한 반론의 여지가 없고 긍정 평가가 사실상 전혀 없었던 유일한 막장 폭군의 평을 받고 있다. 연산군은 조선 왕조 역사상 중국 하나라걸왕상나라주왕에 버금가는 폭정을 행사했던 왕이었다.[12] 그의 공포정치로 인해 연산군 시기의 왕권은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견고해졌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신하들이 앞장서 왕을 갈아치우는 최초의 사태가 벌어졌다.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한국사의 대표적인 폭군이다. 성종중전 윤씨의 적장자로 태어나 원자로 책봉되었고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래도 즉위 초기에는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해 나갔다는 평가도 있었고, 무오사화의 피바람이 있기는 하였지만 이는 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삼사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으며, 연산군이 이 기회를 제대로 포착한 것이다.[13] 설령 연산군이 아닌 다른 국왕의 치세에 그런 사건이 일어났더라도 큰 옥사가 터질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기에 무오사화까진 연산군을 폐위해야 한다는 여론은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연산군이 재위 10년째의 갑자사화 기간에 보인 옥사의 잔혹성과 규모는 경악스러울 정도이고, 그 이후로 본격 막장 놀자판으로 막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후반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그렇지, 전체 재위 기간 중에는 오히려 정상적으로 집무하였던 시기가 더 길었다. 그리고 반대로 말하자면 2년 남짓한 사이에 벌인 폭정만으로 폐위될만큼 그 정도가 심했다는 것. 재위 중후반부터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폭정을 일삼은 탓에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교동도유배를 간 뒤에 향년 2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연산군/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가계[편집]



  • 왕비: 폐비 신씨[21]
    • 딸: 휘신공주 이수억(李壽億)[태지][14]
    • 딸: 왕녀[15]
    • 아들: 원손(元孫)[16]
    • 딸: 왕녀[17]
    • 아들: 폐세자 이고(廢世子 李𩔇)[태지2][18]
    • 아들: 창녕대군 이성(李誠)[태지3]
    • 아들: 왕자 이인수(李仁壽)[태지4][19]
    • 여덟째: [20]

  • 후궁: 폐숙의 이정이(李貞伊)
    • 아들: 양평군 이인(李仁)[태지5][22]
  • 후궁: 폐숙의 윤씨
  • 후궁: 폐숙의 곽씨
  • 후궁: 폐숙의 권씨
  • 후궁: 폐숙의 민씨

  • 후궁: 폐숙용 장녹수()[25]
    • 딸: 왕녀 이영수(李靈壽)[태지6][23] - 권한(權鷴)의 처[24]
  • 후궁: 폐숙용 전전비(田田非)
    • 딸: 왕녀[26][B]
  • 후궁: 폐숙용 조씨
  • 후궁: 폐숙원 최보비(崔寶非)
  • 후궁: 폐숙원 김귀비(金貴非)
  • 후궁: 폐숙원 장씨
  • 후궁: 폐숙원 이씨
  • 후궁: 폐숙원 정씨

  • 후궁: 궁인 정금(鄭今)
    • 딸: 왕녀 이함금(李咸今)[27][C]

  • 후궁: 궁인 최전향(崔田香)
  • 후궁: 궁인 수근비(水斤非)
  • 후궁: 궁인 김숙화(金淑華)
  • 후궁: 여완 월하매(月下梅)
  • 후궁: 여완 안씨
  • 후궁: 장씨
  • 후궁: 의녀 강금(姜今)

  • 생모미상의 왕자녀
    • 왕녀 이복억(李福億)[태지7]
    • 왕자 이돈수(李敦壽)[태지8]
    • 왕녀 이복합(李福合)[태지9]
    • 왕자 이총수(李聰壽)[29][D]
    • 왕자 이영수(李榮壽)[D]
    • 왕녀 이정수(李貞壽)[태지10][B]
    • 왕자 이태수(李泰壽)[태지11][30]
    • 왕녀 - 신거홍의 처[31][C][32]

연산군은 유일한 정실 부인이었던 거창군부인 신씨와의 사이에서 연년생으로 8명의 자식을 얻었다.[33] 반면 연산군이 후궁에게서 얻은 자식은 5남 7녀로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연산군이 신씨 1명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보다 고작 3명 많았다. 연산군의 후궁 숫자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역사 책마다 다른 편이라 단언을 내릴 순 없지만 가장 많은 경우를 가정하면 약 20명인데 그 20명의 후궁들 중 정작 연산군의 아이를 가진 후궁은 별로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자식들 중 거창군부인 신씨의 자식들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특히 장녀 휘신공주를 워낙 아끼고 챙겼다고...)[34]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 사이에서 두 번째로 태어난 아들이었으나 살아남은 아들 중 장남이었던 세자 이고의 성품은 아버지 연산군과 매우 정반대였다고 하는데[35] 세자 이고는 만 4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실록에 연산군의 언급에 따르면 "자질이 온화하고 도량이 원대하며 어릴 때부터 높게 빼어나서 이미 성인의 도량이 있었고 장성하여서는 훌륭한 덕망으로써 진실로 구가의 돌아감에 응할만하고 하다" 라고 기록되있다. 또한 총명하고 학구열이 높았다고 한다. 연산군이 내관에게 세자가 얼마나 성취하였나고 묻자 내관은 "세자의 기상이 꼭 성종을 닮았다"고 말하였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연산군은 내관을 향해 칼로 쳐서 내관은 거의 죽다 살아났다고 한다.[36] 이 외에도 반정이 일어나기 전 박원종 등이 중종을 임금으로 추대할 뜻을 품고 일찍이 거창군 신씨의 친오빠이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37] 중 어느 편이 더 중하냐고 묻자 신수근은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총명한 세자를 믿고 살겠다" 라고 말했는데 결국 중종반정 때 신수근은 역적에 몰려 제거당했다. 실록에 따르면 세자 이고가 만 7세 됐을 때에는 성품이 굳세며 침중하고 엄숙하였는데 어느 날 연산군이 경회루에서 잔치를 치르며 흥청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도중 세자 이고를 불러 흥청들을 가리키며 내가 죽은 뒤에도 이들을 잘 돌보겠냐고 물었는데 뜻밖에도 이고는 연산군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있어[38] 연산군은 이 일을 계기로 세자를 꺼렸다고 한다.(은근히 아버지와 기싸움을 하는 듯한...)

연산군의 아들 중에서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 반정 공신들에 의해 사약을 받아 사사되었다고 이름이 기록된 것은 4인이며 이들 이외의 연산군의 아들들도 추가로 사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사받은 4인의 아들 이외에는 대체로 영아 시절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반정 공신들의 조치 역시 당시에는 엄연한 불법인데 조선의 법도는 설령 역적의 자손이라 해도 16세 미만의 경우는 사형을 금하고 노비로 만드는 것이 최고형이었다. 딸들은 여자라 왕위에 위협되지 않아 손대지 않았다. 서인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어차피 딸들은 출가외인인지라 신분에 큰 변화는 없었고, 게다가 삼불거(三不去) 중 하나로 부인을 내쫓아도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 내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39]


5. 기타[편집]


  • 흔히 연산군을 조선 왕조 역사상 처음으로 쫓겨난 왕이자 군(君)으로 강등당한 왕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는 연산군이 처음은 아니었다. 진짜로 처음으로 쫓겨난 왕이자 군으로 강등당한 왕은 바로 6대 임금인 단종이었다. 단종의 경우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강제로 상왕으로 물러난 것으로도 모자라서 결국 조선 왕조 처음으로 군으로 강등되면서 '노산군(魯山君)'이 되었고 묘도 능이 아닌 '노산군묘(魯山君墓)'라고 불렸으며 실록 또한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로 격하되고 종묘 신위에도 모셔지지 않았다. 연산군의 경우 노산군에 이어서 두 번째로 이 사례를 가진 왕이지만 후에 19대 임금 숙종이 노산군의 지위를 격상하여, 노산대군에 이어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얻었고 노산군묘도 '장릉(莊陵)'으로 격상되었으며 실록 또한 일기에서 실록으로 격상되고 종묘 신위에도 뒤늦게 모셔지게 되었다. 이에 비해 연산군은 재위 기간동안 폭정을 일삼고 살육을 일삼았던 악행 때문에 왕위에서도 축출되고 단종에 이어서 두 번째로 군으로 강등되어서 묘도 당연히 '연산군묘(燕山君墓)'로 불리게 되었고 후에 15대 광해군이 이러한 사례를 이어가면서 조선 왕조에서 유이하게 광해군과 함께 군 지위를 받고 실록마저도 일기로 격하되었으며 종묘 신위에도 모셔지지 않은 왕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폐비의 묘를 '회릉(懷陵)'으로 격상시켰지만 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다시 왕비에서 폐비로, 능에서 묘로 환원되었다.

  • 당시의 군주 체제에 '폭군의 절대적 기준을 세운 왕'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연산군이 폭군으로 흑화한 이후, 그가 행한 패악질들은 '성군으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설령 그것이 해당 임금의 입장에서는 자잘하고 미미한 취미 생활의 하나였다고 해도, 반드시 금해야 할 금기로 치부되어 막았으니[40] 후대의 왕들에게 반면교사가 된 셈이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이는 왕권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일단 으로서의 권한으로 일을 해보려고 하면 연산군을 사례로 들어 신하들이 공격했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정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당했고 그럴수록 신하들은 자신의 권한을 강화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왕이 신권을 어떻게든 견제하려고 하면 이건 연산군이나 했던 일이라고 반항하는데 뭐라 반박하기도 까다롭기 때문이다. 연산군으로 인해 신하들이 후대 왕에게 압력을 가하는 빌미가 되었다.

  • 사림들은 연산군이 몰래 임사홍의 집을 찾아가 임사홍으로부터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형당해 죽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믿었는데 증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반정 공신들이 반정 명분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연산군에 관한 이야기 중 일부를 날조하거나 과장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도 흔히 설화에서 다루는 외할머니 신씨와의 접촉설도 정작 연산군은 즉위 직후부터 신씨에게 양곡을 후원하는 등 폐비와 그 가족들의 행방을 잘 알고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임사홍의 충동질도 정작 임사홍은 갑자사화 도중에 친분 문제로 같이 숙청당할 뻔한 사실을 생각해보면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41] 반정 공신 대부분이 연산군 체제에서 근무하던 관료였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박원종이 있다. <태종실록>에서 1차 왕자의 난정도전의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인 것처럼 서술했듯 연산군의 악행 또한 과장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 대하드라마에서 연산군이 임금이던 시절 자신을 연산군으로 부르는 것은 사실 고증오류이다. 연산군이란 이름은 중종반정으로 폐주가 되면서 왕자 신분으로 강등될 때 새로 붙여진 봉호이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부왕인 성종의 적장자 자격으로 원자에 책봉되었다가 이후 왕세자 신분을 거쳐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므로 세자 시절에 봉군된 적이 없다.[42] 장자로서 세자를 거쳐 왕위에 오른 조선시대 다른 임금들도 마찬가지로 봉호가 없다. 27명 중에서 이러한 사례에 포함되는 임금은 11명 뿐이다.[43]

  • 성종실록을 보면 연산군 즉위 전 성안에 요귀(妖鬼)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호조 좌랑 이두(李杜)의 집에서 여귀(女鬼)[44]가 말을 하며 음식을 먹고[45],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서는 귀신이 집안의 물건을 옮겼다는 폴터가이스트 기록이 있다.

  • 어린이용 위인전이나 역사 만화에서는 사치스러운 폭군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간혹 비만인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실제와 거리가 멀다. 연산군의 체형은 호리호리 하였으며 실록에서는 연산군이 허리와 몸이 가늘어 한 군사에게 웅장하지 못하고 위대하지 않다며 한마디로 임금의 위엄이 없다는 비판을 들었고 야사에서는 외모가 폐비 윤씨를 닮아 고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 여인네 같다고 뒷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연산군은 자신의 외모를 기피하고 컴플렉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에는 수염이 길고 육중하고 웅장한 떡대좋은 체형이 건강과 더불어 미의 상징으로 여겼다.[46] 성격은 선조들을 닮아서 무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키는 작은 키도 중키도 아닌[47] 전해내려온 기록에 따르면 실제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을 닮아 키가 컸다고 한다.

  •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의 키가 정확히 몇 척인지는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지만,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전해져온다.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성종이 내전에 있는 중전 윤씨를 찾아갔는데 마침 명주를 짜고 있던 중전이 베틀에서 내려와 성종을 맞이하면서 어찌 그리 키가 크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성종은 자기보다 더 큰 사람도 있다며 당시 조정 대신 중 장신 축에 들었던 허종이라는 신하를 내전에 불러들였다고 한다. 실록을 포함한 기록에는 허종이 기골이 장대하다라는 표현만 있고 구체적인 키는 묘사되지 않았는데 조선 후기 인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사고에 의하면 11척 2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당시 척으로 환산하면 키가 2미터가 족히 넘는다고 한다. 비교하면서 성종은 조정에서 허종 다음으로 자신이 제일 컸다고 하였는데 이를 볼 때 성종도 상당히 장신이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고 연산군도 아버지를 닮아 키가 컸다고 하므로 장신이었을 것이다.

  • 즉위 초에 치통을 앓았다고 한다. 근데 아버지 성종과 이복동생 중종도 치통을 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일종의 가족력. 중종은 무려 재위 25년까지 치통으로 고생했다고 하며, 연산군은 즉위 초에 치통을 계기로 최초로 칫솔을 사용한 인물로 남아있다. 나무로 만든 양치목으로 양치를 했다는 내용.
    • 그런데 이로 인해 연산군이 항상 치통으로 고생해 표정과 입매가 비틀어졌다 또는 돌아갔다는 떠도는 이상한 루머가 나돌고 있어 연산군 외모에 대해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은 즉위 초에만 치통을 앓았었고 가볍게 앓았는지 극심하게 않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나와있지 않고 실록에서는 그저 치통을 앓았다고만 표기되어 있다. 일생동안 앓지는 않았으며 치통으로 인해 표정과 입매가 비틀어졌다는 등 이에 대한 내용은 일절 실록이나 야사에 존재하지 않는 기록들이다. 연산군의 외모 묘사에도 이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외에도 온라인상에서 네티즌이 실록에 연산군이 손이나 빨고 있고 하도 화를 내 주름이 졌다고 주장한 적이 있으나 연산군은 손을 빨은 적도 없고 자주 화를 내지도 않았으며 얼굴에 주름이 있었다는 기록은 이 역시 마찬가지로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연산군 외모 기록에도 이에 대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산군이 폭군이라 폭군의 이미지만 보고 날조된 내용이 많이 퍼진 것 같다.

  • 연산군을 정말 고생시켰던 질병은 피부병이다. 세자 시절부터 연산군은 창진이라는 피부병을 앓았으며 치료의 기록이 자주 나온다. 치료의 효과를 봐 성종이 의원과 내관에게 말과 목면을 내려주었다. 또한 창병이 아닌 면창이라는 피부병을 앓았었다. 창병을 앓은 기록은 없다. 세자 시절부터 즉위하고 나서도 면창을 앓아 이때 신하들은 면창의 원인을 추위로 보고 연산군에게 추위를 피하라고 하였다. 이후 연산군의 얼굴이 붉어지고 고름이 나며 소변이 잦은 증상이 있자 어의들은 면창의 원인을 추위로 인한 양기[48] 부족과 스트레스로 보았다. 그 이후에도 임금의 얼굴에 진물과 종기[49]로 성할 날이 없어 면창을 치료하기 위해 의관들이 명나라에 가서 웅황해독산과 선응고라는 귀한 치료제들을 구해왔다. 우선 일단 함부로 임금의 용안에 먼저 사용할 수 없기에 연산군과 같은 피부병 증상이 있는 노비에게 시험했다. 이후에 치료제들을 사용한 노비의 얼굴에 있는 종기가 서서히 완화되는 효과를 보이자 의관들은 다시 명나라에 가 치료제들을 많이 구해오고 제조법을 물어온 다음 임금에게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또한 찬바람을 피해 몸을 최대한 따뜻하게 하였고 양기에 좋은 음식과 약재로 기력을 보충하여 원기와 양기를 회복하였으며 소변이 잦는 증상도 멈추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면창 증상에 대한 언급이 딱 한번 있었으나 [50] 전과 비해 증상이 조금씩 완화되가고 있었다. 그 후 재위 중반 넘어가면서부터 재위 말기까지 증상이 어떠하다고 연산군 본인과 신하들이 피부질환에 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기에 치료하여 완치된 것으로 보인다.[51] 사관이 직접적으로 언급은 안했으나 뒤늦게 치료의 효과가 나타났거나 서서히 자연스럽게 가라앉은 것으로 추측. 연산군의 얼굴에 종기(부스럼)이 떠나지 않았다는 내용은 세자 때의 기록이며 치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병으로 인한 흉터나 자국이 생겼을 거라는 추측이 있지만 이에 대한 얘기는 실록이나 야사에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이덕형[52]이 기록한 수필집 죽창한화를 보면 연산군 피부병은 완전히 호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임진왜란이 터져 전라도에 머문 이덕형이 97세인 한 노인을 만나 그 노인한테서 연산군 외모 묘사를 듣고 자세하게 서술한 기록이다. 어린시절 노인은 당시 한양에서 재위 끝무렵 연산군의 얼굴을 직접 봤으며 그 해 가을에 반정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노인은 연산군이 키가 컸으며 빛은 희고 수염이 적으며 눈에는 붉은 기운이 있었다고만 묘사하였다. 이를 볼 때 연산군의 피부병 치료가 제대로 안됐다면 분명 노인은 빛은 희나 용안이 얽었다 또는 곰보 자국과 종기와 흉터(자국)이 있었다고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얘기는 일체 언급되지 않았기에 연산군의 피부병은 제대로 치료되었으며 만성적인 피부병도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53]

즉위 초 연산군은 잔병치레가 잦았다 재위 중반~ 후반에 들어서는 눈병 외에는 다른 병상은 없었고 사소하고 가벼운 증상들만 있었는데 금방 호전되었으며 재위 후반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스트레스도 하나의 원인으로 보았다고 앞서 언급했었는데 그동안 연산군은 대간들로 인한 스트레스 영향으로 금방 완쾌되지 않았고 완쾌 됐어도 다시 또 재발하는 등 이러한 과정을 반복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신하들을 억누르고 나서부터는 신하들의 족쇄로부터 자유를 찾았는지 몰라도 확실히 초기 때와 달리 활기차고 연산군의 몸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운평과 흥청들의 외모를 항상 중요시여겨 부스럼같은 피부질환이 있으면 곧 치료하게 하였다.

  • 영화 간신에 나오는 연산군은 실제 외모 고증과 상관 없이[54] 관자놀이에 붉은 반점을 그려넣었는데 이에 대해 배우 김강우는 인터뷰에서 연민을 넣고 이해를 시키고 싶어 붉은 반점을 그려넣었다고 하였다. 어머니로 인해 미쳐가는게 아닌 태생적으로 결핍이 많은 사람으로 설정하였으며 결핍을 디테일하게 표현하기에는 시간이 없으니 외적으로 이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산군 얼굴에 붉은 반점을 그려넣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 연산군의 어진은 실제로 전해내려 오는 것이 없다. 온라인상 연산군 상상화라고 알려져있는 그림은 화백이 그린 것이 아닌 한 네티즌이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그 그림이 연산군의 실제 모습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예술에도 재능이 있었다. 노래와 춤, 악기를 다루며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연산군은 춤 중에서도 처용무를 좋아하고 가장 즐겨췄다. 궁중에서 처용의 가면을 쓰면서 춤을 추었을 정도였다. 또한 많은 시를 남겼으며 실록에 수록되어 있는 연산군의 시는 총 141편이다. 자신의 시를 모아서 정리하기 위한 어제찬집청(御製撰集廳)을 특별히 설치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반정 이후 연산군이 남긴 한시의 흔적은 일소되었으며, 역대 조선 왕들의 시문을 종합한 열성어제(列聖御製)에도 당연히 수록될 수 없었다. 하지만, 연산군일기 안에는 그의 시 141수가 시기별로 창작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해당 한시들이 창작된 이유와 정황까지 기사에 설명되어 있거나 앞뒤의 기사 내용을 바탕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실록에 수록된 연산군의 시 141수 중 애민시(愛民詩)는 단 한 편도 없고, 군주로서 신하에 대한 애정과 배려를 담은 시들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시를 쓰고서는 군주가 신하에게 하사하는 술인 선온(宣醞)과 각종 화분을 함께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었다. 그리고, 종종 신하의 역심을 경계하며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협박을 내비치는 시를 쓰기도 했었다. 또, 평소 연회와 음주가무를 즐겼던 혼군인 만큼, 향락에 대한 탐욕과 희구의 마음이 가득한 시들을 창작하기도 했었다. 그런 반면에 간혹 성종의 계비인 자성대비 정현왕후에 대한 효심을 담은 시를 짓기도 했었으며, 때로는 시적 감수성이 흘러넘쳐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자기연민에 빠진 시를 읊조리기도 했었다고 한다.출처: 연산군 한시의 전개양상에 대한 고찰 연산군이 지은 시는 격조와 운율이 청고하다는 평이 있으며 현대 문학가들로부터 허무주의를 멋지게 살려 놓으며 풍류성이 뛰어나고 문장이 깔끔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 상당한 미식가였으며 귀하고 비싼 음식을 많이 먹었다. 전국 팔도를 쥐어짜서 귀한 식재료를 공수하는 걸로 모자라 중국에서 수입해 먹기도 했다. 실록을 보면 중국에 가는 사신에게 중국의 귀한 과일인 여지용안을 구해오게 한 기록이 있다.# 중국 수박을 먹고 싶어할 때 반대한 신하를 사형시켰다. 또한 얼음을 깔아놓은 쟁반에 청포도를 올려 시원하게 먹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하고 귤도 좋아해서 제주도에 가서 직접 귤나무를 베어오라고 명하였다. 연산군 때문에 후대 왕들은 비싸고 맛있는 것 좀 먹으려 하면 신하들에게 '연산군이 했던 짓입니다!' 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그가 즐겨먹은 음식 중에는 마늘을 넣고 백숙처럼 익혀먹은 장어 요리도 있었는데, 본의 아니지만 이 기록의 존재 덕분에 황교익의 장어 요리는 일본에서 유래했다고 떠드는 만물일본설을 버로우시켰다.[55] 또한 닭 중 오계를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천연기념물 연산 오계를 기르는 논산시의 동네 이름은 연산면이다.[56]

  • 연산군 집권 초중반기는 실존 인물인 홍길동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후 홍길동전 등 홍길동이 '의적'이란 이미지를 얻게 된 것에는 연산군의 이러한 폭정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도 작용했다는 추측이 있다. 다만, 역사 속 홍길동은 매우 해로운 도적이 맞았고, 활동하다가 잡혔을 때까지 연산군은 아직 안정적으로 정치를 잘 하고 있을 시기였다.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0년 5월 12일자 기사를 보면 코끼리 발을 사들이라고 연산군이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미식가 기질을 볼 때 정말 먹으려고 했는지, 아니면 약재로 사용하려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 연산군 시기에 연은분리법이 개발되었다. 이는 훗날 동아시아 생산량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치며 훗날 세계사조차 바꾼다. 조선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지 않았으나[57] 조선에 은이 별로 없어 잘 적용되지 않았다.

  • 연산군일기의 연산군 11년 12월 29일의 기사에서는 광대 공길이 늙은 신하 흉내를 내며,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라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연산군은 불경죄를 물어 공길을 곤장을 쳐서 멀리 유배보냈다는 사실이 나온다. 이 일화를 바탕으로 연극 이(爾)[58]와 영화 왕의 남자가 나왔다.

  • 한편 위의 왕의 남자를 감상한 가수 안예은은 연산군과 공길의 감정변화를 공길의 시점에서 풀어나간 노래 '홍연'이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했다. 이 노래로 K팝 스타 시즌5 예선에 참가한 안예은은 유희열에 의해 슈퍼패스로 합격한 것이 화제가 되었고, 후일 안예은이 데뷔한 이후, 이 노래는 연산군 시대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6화와 7화의 엔딩곡으로도 사용되었다.

  • 조선 왕조 건국 이래 최초로 반정으로 축출되어 왕권을 상실했던 임금이었기 때문에 광해군과 함께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행적 기록을 담은 <조선왕조실록> 호칭도 실록이 아닌 일기인 《연산군일기》로 격하되었다. 그래서 연산군과 광해군의 행적 기록은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실록이 아닌 일기로 부른다.[59]


  • 충무공 이순신과 약간의 인연이 있다. 세자 시절 연산군을 교육한 세자 시강원의 관리 중 이거(李琚)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순신의 증조부이다. 이거는 연산군이 즉위한 뒤엔 순천부사 등의 자리를 역임했으며 연산 8년 무렵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6. 대중매체[편집]


잊을 만하면 재탕, 삼탕해주는 사극주인공.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다가 개인사 뿐만이 아니라 가족사를 비롯해 워낙 인생이 드라마틱해서 대중매체에서 유난히 많이 다뤄지는 것 같다. 진짜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최종 보스급으로 비중이 높은 경우도 많다. 1980년대 이전에도 미디어 믹스가 자주 이루어진 인물이었는데 연산군의 유난한 막장 행보가 군사 독재 정권의 잔혹한 행위를 좀 더 나아보이게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는 다소 견강부회적인 분석도 존재한다.

이대근, 정진영 등을 빼고는 20~30대 배우가 대부분 담당하였으나[60] 이상하게 연산군은 40대 배우가 많이 담당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이는 한국 영화 역대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인 <왕의 남자>의 정진영의 잔상인 듯하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로 주로 30대 중후반 배우들이 연산군을 많이 연기하게 된다. 그만큼 대사량이 많고 감정선도 오락가락하는 인물이라 연기력이 웬만큼 절륜하지 않는 이상 연기하기 굉장히 힘든 배역이기도 하다.[61] 드라마적으로 해석하면 출생의 비밀, 성격적 결함, 예술가적 기질,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과거사, 최후의 파멸 등을 겸비한 그리스 고전 비극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다.

한국 사극에서 연산군을 많이 다룬 작가 하면 드라마 작가 정하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정하연 작가는 《장녹수》, 《왕과 비》, 《인수대비》 등의 집필을 맡아서 연산군 시대를 다룬 드라마만 3개를 집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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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왕과 나》의 정태우, 아랫줄 왼쪽은 《왕의 남자》의 정진영, 오른쪽은 《왕과 비》의 안재모

  • 1962년 신정구정에 연달아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2부작 《연산군》과 《폭군 연산》에서는 배우 신영균이 연기했다. 이 2부작 영화는 당대에 보기 힘든 해석으로 유명하다. 포인트는 연산군이 모든 잘못을 깨닫고 정치를 원상태로 돌리려고 하는데 다음 날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한국 영화로서는 정말 이례적으로 상영 시간이 3시간을 넘긴다. 그러나 신상옥 본인은 《연산군》과 《폭군 연산》을 흑역사로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연산군》은 신정 프로에 맞춰서 서둘러 제작하느라 제작 기간이 불과 2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고 《폭군연산》 역시 흥행업자들의 독촉으로 서둘러 만드느라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 북한에 있을 때 신상옥 감독은 서울에 있던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 《연산군》과 《폭군 연산》의 오리지널 네가를 소각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오리지널 네가를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 신상옥 감독은 귀국한 후에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연산군》과 《폭군 연산》의 오리지널 네가를 반출해 가서는 각각 14분, 54분씩 삭제 재편집을 해서 가져다 놓았다. 심지어 《폭군 연산》은 반출해 간 네가가 유일본이었던지라 《폭군 연산》의 사라진 54분은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 1970년 개봉한 공포영화 《이조괴담》에서는 배우 이강조가 연기했다. 당시 신상옥 감독이 만든 공포 호러 영화로서 전형적인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설의 고향모티브의 원조격으로 내용은 발정난 연산군이 선비의 아내를 취하려고 하자 속이려 몸종을 들여보냈는데 이를 뒤늦게 알아챈 연산군이 화내어 몸종을 죽인다. 연산군은 선비 가족을 붙잡아 죽이려 군졸을 보냈는데 선비는 도피 안하는 대신 아내만 도피를 시키는데 도와준 선비는 연산군에 의해 붙잡아 죽임을 당한다. 선비의 아내는 같이 키우고 있는 고양이와 도피했지만 같이 키우고 있는 고양이가 없어지자 아내는 고양이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고양이가 있는 자기가 살고있는 으로 오게 된다. 이 때 남편이 죽었다는걸 알아채고 아내는 자결을 하게 되는데 고양이는 죽은 주인의 를 먹고 자신의 부탁으로 다른 여인인 장녹수의 몸을 빌려 처절하게 복수한다는 내용. 유치하지만 당시 파격적인 고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EBS에서 방영하기도 했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 설중매》에서는 배우 임영규[62]가 연기했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신봉승이 자주 다루는 시대가 세조 ~ 연산군까지이다. 인수대비의 일생의 마침표를 찍는 비극으로 그리고 있는데 실제로 최고의 인기작인 《설중매》의 후반부가 바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임영규 – 연산군, 이미숙장녹수, 고두심인수대비인데 원작 소설은 대단히 잔인하고 검열삭제가 난무하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검열삭제 묘사가 제대로 나오고 귀인 엄씨귀인 정씨를 처단하고 시체를 훼손하는 이야기 역시 아들들에게 직접 때려 죽이게 하고 완전히 나체로 만들어 현장에서 찢어버리게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에 비해 드라마판은 가급적 수위를 낮추었다.


  • 1988년 개봉한 영화 《연산일기》,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는 배우 유인촌이 연기했다. 특히 유인촌은 연극인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햄릿 연기[63]칼리굴라의 연기를 그대로 보여준다.[64]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배우 이민우[65]가 연기했다. 드라마 끝 부분에 잠깐 나와 비중은 적었지만 한명회가 죽은 후 갑자사화를 벌여 부관참시를 하는 장면이 아주 강렬했다. 특히 을 두들기며 "닥치시오!"하고 외치는 장면은 인터넷이 발달한 현재라면 플짤감이다. 이 때가 이민우가 막 성년이 된 무렵인데 연산군 연기로 그는 아역 배우에서 성인 배우로 성공적으로 전환했다. 링크된 영상에서 노사신이 앉아 있는건 노사신이 이미 무오사화가 끝난 뒤 얼마 안되어 죽었기 때문에 이는 고증오류다. 극중에서 홍귀달폐비 윤씨의 신원에 반대하다 유배간 걸로 묘사되었지만 홍귀달은 갑자사화 당시 경기도 관찰사 자리에 있었으며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명을 거역한 죄로 장형을 받고 유배되던 도중 교살되었기 때문에 이 역시 고증 오류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안재모[66][67]가 연기했다. 특히 폐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할머니 인수대비의 지독한 냉대로 인해 점차 사이코패스 반항아가 되어 항상 할머니한테 날릴 궁리를 주로 하며[68], 나중에 갑자사화 이후로는 서로 '나 죽고 너 죽자' 식으로 달려들며 대립한다. 마지막에 폐위되면서까지도 "할머니 소원대로 폐주가 되었습니다!"라고 광기를 부리면서 외쳐대는 것은 덤. 극 중 인수대비와 연산군의 치열한 대립은 살벌했던지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을 서늘게 만들 정도다. 덕분에 중반까지 부진하던 《왕과 비》가 연산군의 등장으로 시청률이 크게 상승하는 뒷심을 발휘하여 유종의 미를 거뒀다.

  •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도 배우 김양우가 연기하였으나 대사없이 첫 회 폐위장면, 회상신으로만 등장했다.

  • 2003년 레전드 사극 대장금 에서도 극 초반에 잠시 등장하며 배우는 정기성. 등장이 적은 만큼 다른 작품들에 비해 악행과 횡포들은 직접 나오지 않지만 후에 자신의 모친인 폐비를 모신 궁녀가 모친이 사약을 먹고 피를 토하며 묻혔던 손수건을 보여주자 극대노 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시행한다.

  • 2005년 개봉한 영화 《왕의 남자[69]에서는 배우 정진영이 연기했다. 현재까지 대중적인 연산군 연기의 최고봉으로 광기와 애정 갈구가 혼재된 연산군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해 냈다.

  •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배우 정태우[70]가 연기했다.[71] 정태우는《왕과 나》의 연산군 역에 도전하여 당시 막장가도를 달리던 이 드라마를 연기력으로 살려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왕과 나》 후반부는 '왕과 나'가 아니고 '연산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처선이 죽은 후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다음 날부터 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72]하는데 그날 밤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반정군이 들이닥치자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며 몇몇 중신에게 "네가 왕좌에 앉으려 하느냐?"고 패기 넘치게 따진다. 그러나 반정군이 진성대군을 옹립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는 표정이 순식간에 누그러진다. 진성대군이라면 양위 받을 자격이 있다며 순순히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다.[73] 또한 정현왕후인수대비와의 관계도 다른 사극에서의 평면적인 적대 관계가 아니라 상당히 입체적으로 나온다. 작중 연산군의 반발감도 단순한 증오가 아니라 왜 자신을 좀 더 아껴주지 않았냐는 애정 갈구에 가깝다. 친아들이 아닌데도 따뜻하게 대해주는 정현왕후에 대한 연산군의 심정은 복잡미묘하다. 연산군이 인수대왕대비전에 난입하여 패륜을 저질렀을 때만은 정현왕후가 참다 못해 "대왕대비에게 사죄하라"며 "이를 듣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회초리를 들겠다"고 단호히 충고했는데 이 때 연산군이 심경을 털어놓는다. 을 퍼마시며 반항적이던 눈빛이 갑자기 울먹이는 눈빛으로 변하고 "대비마마, 어찌 진즉 소자에게 이리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어찌 소자가 잘못하였을 때 질책하고 회초리를 쳐주지 않으셨사옵니까? 소자, 대비마마께오서 귀하게 키워주셨사오나 친자식이 아니어서 회초리 한 번 맞아보지 못한 것이 더 한스러웠다는 것을 어찌 모르셨사옵니까? 소자는 진성대군이 참으로 부럽사옵니다." 이에 정현왕후도 차마 더 뭐라 하지는 못하고 연산군을 안쓰럽게 본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는 다르게 특이하게도 꼬꼬마 원자 시절부터 자신의 생모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자신의 생모가 사사되었다는 사실까지도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것.[74]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배우 진태현이 연기했다. 정하연 작가는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 대사를 그대로 복붙해버린다. 안타깝게도 극 중 진태현이 연기했던 연산군은 안재모가 연기했던 연산군의 어설픈 복제판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시청자들로부터 안재모의 연기와 비교당하면서 혹평을 얻기도 했다.

  • 2014년 개봉한 영화 《간신》에서는 배우 김강우가 연기했다. 작정하고 19금 성인영화로 나온 만큼 연산군 영상물 중에서 가장 포악하고 광기어린 연산군을 구현해냈다. 잔혹한 살육 행각과 섹스 중독적 엽색 행각[75], 격한 감수성과 합쳐진 광기, 한편으로는 치세 초반에는 왕으로서 제법 제대로 통치했었다는 것이 납득될 통찰력도 보여준다. 덕분에 폭군으로서는 가장 실제 역사 기록에 가까운 연산군 묘사로 꼽힌다. 이런 모습을 열연했던 덕분인지 극장가에서는 잔혹성과 선정성에 호불호가 갈려서 큰 재미는 못봤지만 2차 판권에서 대박을 쳤으며 김강우의 연산군 연기 자체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 2017년 MBC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는 배우 김지석[76]이 연기했다. 김지석이 연산군 역을 맡아 "양반이든 천민이든 여자남자든 다 똑같은 인간이다. 유일하게 다른 이가 있다면 하늘님의 자식인 왕 하나 뿐이다. 왕 외의 모든 이들은 왕의 종일 뿐이다."라며 전제 왕권이라는 미망을 좆아 광기에 휩싸이는 연산군 역을 잘 연기했다. 해당 문서 참조.

  • 2017년 KBS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는 배우 이동건이 연기했다. 그런데 팬층 사이에서는 '이 드라마는 이역단경왕후 신씨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가 아니라 연산군을 미화하려고 만든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진주인공은 연산군이다'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연산군의 비중이 크고 가장 서사가 탄탄한 캐릭터로 그려져 있다. 잘못된 성격을 타고난건 아니었지만 어머니 폐비 윤씨 때문에 연산군을 왕위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아버지 이혈이 죽기 직전 자신에게 "진성대군이 성인이 되거든 왕위를 양보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유언을 적은 비밀 유언장까지 만들어 어딘가에 감춰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어머니가 폐비라는 이유로 모든걸 진성에게 빼앗기고 살았는데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왕위까지 진성에게 양보하라는 말이냐!"는 이유로 진성대군을 호시탐탐 의심하고 괴롭히다 끝내 진성대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는 설정이 붙었다. 연산군이 광기 어릴 정도로 권력을 추구했던 이유도 아버지의 비밀 유언장 때문에 왕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하여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왕권을 갖고자 했기 때문으로 나온다. 나중에는 주인공인 신채경을 두고 진성대군과 연적 관계로까지 얽히게 되는데 드라마를 보면 신채경이 진성대군보다 연산군과 함께 있는 장면이 더 많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유배를 가던 도중 박원종 일파가 보낸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상처치료하지 못해 끝내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임종 직전 자신을 보러 온 진성대군에게 사죄하면서 눈을 감으려던 찰나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아버지의 환상을 보며 "드디어 아바마마께서 내게 손을 내미셨다"는 유언을 남기고 절명한다.

  • 《연산군을 위한 변명》(신동준 著, 지식산업사)에서 그에 대한 재조명을 추구했다지만 실은 극단적인 옹호로 일관하고 역사학계의 연구는 거의 무시했다.(그래서 불쏘시개 목록에도 올랐다.)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김범 著, 글항아리)이 연산군의 면모를 아는 데에는 훨씬 낫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얼굴에 거의 항상 반창고를 붙이고 다닌다. 연산군은 세자 시절부터 재위 중반까지 피부병을 앓아 얼굴에 종기가 났었는데 이걸 표현한 것이다. 나중에 8권(중종), 15권(경종, 영조), 18권(헌종, 철종), 20권(망국)에서 엑스트라로 나왔을 때도 빼먹지 않고 붙이고 나왔다. 이 책에서는 즉위 4년까지 군주로서 건실하게 나라 일을 한 모습을 재조명했지만 후에 왕권을 강화한답시고 연이은 사화를 일으켜 엄청나게 비대해진 대간과 훈구 대신들을 찍어 누르고 강해진 왕권으로 국가 업무에 대한 비전없이 그저 자기 마음대로 흥청망청 놀고먹고 백성들까지 괴롭힌 것을 비판하면서 그저 폭군에 지나지 않았음을 피력하며 "그 후 조선에서 연산 같은 왕은 더이상 나오지도, 나올 수도 없었다."는 총평을 내리고 있다. 그야말로 반면교사가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준 인물로 조선 왕조에서 유일하게 중국 황제급의 권력을 휘둘렀던 국왕이었다고 언급되는데 선조, 인조, 고종 등과 함께 가장 통렬한 비판을 받은 군주들 중 1명이다. 그래도 연산군 편의 부제가 "절대왕권을 향한 위험한 질주"인 데서 보이듯이 '위험한 질주'와 더불어 '절대왕권'의 배경이 무엇인지 나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대체역사물로는 <봉황의 비상>, <이순신의 나라>를 쓴 슈타인호프 작가가 주인공이 연산군에 빙의하여 조선을 발전시킨다는 <명군이 되어보세!>를 연재했다.[77]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 독자가 올린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무종만화에 이 작품 세계선에서 후손들이 본 무종(연산군)의 모습이 요약되어 있다.
외전에서 연산군의 원래 영혼은 즉위하고 몇 달만에 재석에게 몸과 왕좌를 탈취당했기에 태조에게 잡귀에게 몸이나 뺏기는 놈이라며 구박받고 있다. 그나마 원 역사와 같은 폭군이 되기 전에 재석에게 몸을 빼앗기고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 영혼이 극락으로 보내졌고, 공식적으로 몇 달이라도 임금 노릇을 해보기는 해서 성친왕과 달리 임금 모임에는 낄 수는 있지만, 제대로 임금 노릇도 못 해봤기에 업적이 없는지라 없을 무 자를 써서 무종(宗)이라는 별명으로 놀림받는다. 생전에 공식적으로 지은 죄만 없을 뿐이지 저승서도 성격은 그대로여서 그가 재석인 줄 알고 찾아온 왕비 신씨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어 쫓아내고, 후손들이 무종에게 올리는 제삿밥은 뻔뻔하게 받아먹고 있다.


  • 대체역사물 <대군으로 살어리랏다>에서도 진성대군빙의한 주인공의 형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라 하면서 정작 선비의 길을 따르지 않는 대신들의 모순에 대해 고뇌하는 등 입체적인 모습이 두드러지며 흑화 직전의 시점에서 주인공의 개입으로 폭군의 길에서 벗어나 이 시대에 만연한 유교탈레반을 쓸어버리고 오키나와를 정복하며 요동명나라로부터 넘겨받아 선정을 베푸는 등의 업적을 세우며 후세에 희대의 명군으로 평가받기까지 하는 제왕이 된다. 묘호는 무종
웹툰판에선 현대에 넘어와서 배우생활을 하기도 했다.


  • 2023년 개봉된 한국 영화 익스트림 페스티벌은 정종 축제가 연산군 축제로 바뀌면서 문화 스타트업에 의해 벌어지는 막장 축제 상황을 담았는데, 축제 구성이 사약 빨리 먹기 대회, 연산군 정신 스피치 경연대회, 각종 전통 고문체험, 갑자사화 공연으로 그야말로 개막장이다(...).


7. 관련 문서[편집]




8. 둘러보기[편집]






진승총(震乘總)
[ 본기(本紀) ]
권1기
,제1대 「태조기(太祖紀)」,
,제2대 「정종기(定宗紀)」,
,제3대 「태종기(太宗紀)」,
,제4대 「세종기(世宗紀)」,
이단
이경
이방원
이도
권2기
,제5대 「문종기(定宗紀)」,
,제6대 「단종기(端宗紀)」,
,제7대 「세조기(世祖紀)」,
,제8대 「예종기(睿宗紀)」,
이향
이홍위
이유
이황
권3기
,제10대 「연산기(燕山紀)」,
,제11대 「중종기(中宗紀)」,
이융
이역
권4기
,제12대 「인종기(仁宗紀)」,
,제13대 「명종기(成宗紀)」,
이호
이환
권5기
권6기
권7기
,제14대 「선조기(宣祖紀)」,
,제14대 수정기,
,제15대(중초본, 정초본) 「광해기(光海紀)」,
이연
이혼
권8~9기
,제16대 「인조기(仁祖紀)」,
이종
권10기
,제17대 「효종기(孝宗紀)」,
,제18대(개수록) 「현종기(顯祖紀)」,
이호
이현
권11~12기
권13기
,제19대(보궐정오) 「숙종기(肅宗紀)」,
,제20대(수정록) 「경종기(景宗紀)」,
이순
이윤
부록
금상(今上)
[ 평전(評傳) ]
평전
이용 · 김종서 · 황보인
,「부록 사육신(死六臣)」,
,「부록 생육신(生六臣)」,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김시습 · 원호 · 이맹전 · 조려 · 성담수 · 남효온
[ 부록(評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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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익조













도조













환조













초대
태조 고황제













제2대
정종

제3대
태종













제4대
세종











제5대
문종

제7대
세조











제6대
단종

덕종

제8대
예종











제9대
성종











제10대
연산군

제11대
중종











폐세자 이고

제12대
인종

제13대
명종

덕흥대원군













제14대
선조









제15대
광해군

원종

흥안군









폐세자 이지

제16대
인조













제17대
효종









경안군



제18대
현종

복녕군







임창군



제19대
숙종

의원군







밀풍군

제20대
경종

제21대
영조

안흥군









진종 소황제

장조 의황제

이진익









제22대
정조 선황제

은언군

이병원









제23대
순조 숙황제

전계대원군

남연군









문조 익황제

제25대
철종 장황제

흥선대원왕









제24대
헌종 성황제



제26대
고종 태황제











제27대
순종 효황제


[범례] 실제 혈통 기준 · 세로선(│): 부자 관계 · 가로선(─): 형제 관계



[1] 율리우스력 11월 23일.[2] 조선 역사상 최초로 중궁인 교태전에서 태어난 왕이다. 연산군 이전에도 궁궐에서 태어난 왕이 둘(단종, 성종) 있으나 이들은 세자빈의 거처, 동궁인 자선당에서 태어났다.[A] A B C 율리우스력 1월 25일.[3] 율리우스력 11월 20일.[4] 중종반정으로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폐위되었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묘'로 불린다.[5] 율리우스력 3월 14일.[6] 율리우스력 9월 18일.[7] 그러나 연산군은 자신이 두려워하던 역사에 영원히 폭군으로 남게 되었다.[8] 물론 이마저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면서 삭탈되었다.[9]버려진 군주, 혹은 버려진 왕, 또는 버림받은 왕이란 의미이다. 조선 왕사에서 연산군이 지닌 위치를 보여주는 호칭이다.[10] 다만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아버지 태조 휘하의 군세를 통솔하는 2인자이자 실질적 장남으로서 입지가 든든했다. 만약 처음부터 막내 이방석(의안대군)이 아닌 영안군(공정왕)을 왕세자로 세웠다면 정안군무인정사를 일으킬 명분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일 태종이 되는 정안군이 본격적으로 야심을 드러내고 실세가 되면서 왕으로서는 큰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다.[11] 임진왜란 때 빈민구제와 행정조치를 취하는 등 세자시절 광해군의 공이 컸고 외치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는다.[12] 그마저도 중국사에서 걸왕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인 주왕은 갑골문이 드러나며 그 행적이 파헤쳐짐에 따라 폭군이라는 이미지는 실제가 아니라 주나라에서 만든 프로파간다라는 얘기가 있으니,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주왕에게는 연산군과의 비교가 억울할지도 모른다.[13]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던 조의제문이나 김일손의 사초 기록 시도는, 당시 국왕이었던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에 대해 허위사실까지 가미해가면서 정통성에 심각한 훼손을 시도한 행위이기 때문에 비단 연산군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다른 왕이라도 묵과하기가 힘들 정도의 내용이었다. 왕의 가까운 직계조상의 정통성을 부정하는건 현 국왕의 정통성도 부정하는 것이다.[태지] 명 홍치 4년(1491년) 9월 2일 해시에 태어난(皇明弘治肆年玖月貳日亥時生)/세자빈의 딸 수억아기씨의 태를(世子嬪女壽億阿只氏胎)/홍치 6년(1493년) 7월 5일 유시에 묻음(弘治陸年柒月伍日酉時藏)[14] 큰딸 휘신공주는 구문경에게 시집가서 아들 구엄을 낳았는데, 구엄이 연산군을 시봉(侍奉)했고, 지금도 구엄의 후손들이 연산군의 묘를 돌보고 있다.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 봉사를 하면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오래도록 왕실의 외척으로 예우를 받았고, 범죄를 저질러도 연산군의 제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구엄에게도 아들이 없었고, 구엄이 사망한 후 외손인 이안눌이 연산군의 제사를 계승했다. 이안눌은 구엄의 친외손자는 아니었는데, 이동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뻘 되는 이필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그 이필의 부인이 바로 구엄의 딸이었다.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씨가 시작하여 외손자인 구엄에게 이어졌고, 다시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과 그의 후예들에게로 이어졌다.[15] (중력) 금상 전하(今上殿下)가 우의정(右議政) 신승선(愼承善)의 따님을 맞이하여 비(妃)로 삼아서 2녀를 탄생하였는데, 모두 어리다." - 《성종대왕 묘지문》[16] 왕세자빈(王世子嬪)이 원손(元孫)을 탄생(誕生)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25년 2월 23일 임오 5번째기사》. 국기일(國忌日)이었는데, 원손(元孫)이 졸(卒)하였다. (후략) - 《성종실록, 성종 25년 3월 29일 무오 1번째기사》[17] 다만 중궁(中宮)의 산실(産室)이 동궁(東宮)에 있는데, 다음 달은 바로 중궁의 산월이라 <후략>-《연산 1년 2월 11일 을축 1번째기사》[태지2] 명 홍치 10년(1497년) 12월 19일 자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年十二月十九日子時生)/원자 금돌이 아기씨의 태를(元子金石乙伊阿只氏胎)/홍치 14년(1501년) 7월 초2일 미시에 묻음(弘治十四年七月初二日未時藏)[18] 반정 당시 세자 이고는 8살이었는데, 학구열이 높아서 마치 할아버지 성종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야사에 따르면 중전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박원종으로부터 반정에 참여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임금은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까 기대를 걸어보자”며 참여하지 않아 결국 역적으로 몰려 제거되었다고 한다.[태지3] 명 홍치 13년(1500년) 5월 20일 미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三年五月二十日未時生)/대군 인수아기씨의 태를(大君麟壽阿只氏胎)/홍치 17년(1504년) 정월 29일 인시에 묻음(弘治十七年正月二十九日寅時藏)[태지4] 명 홍치 14년(1501년) 5월 14일 오시에 태어난 대군 인수(仁壽) 아기씨의 태를 홍치 14년(1501년) 9월 12일 축시에 묻다. - 《대군인수(仁壽)아기씨태지》[19] 전교하기를, "둘째 대군(이인수)이 졸하였으니, 임사홍을 불러 지리관(地理官)들을 데리고 산소 자리를 가보게 하라. 또 이총수(李聰壽) 아기의 산소 자리 본 관원을 가두고 국문하라. 대저 산소 자리를 보는 것은 동생에게도 모두 길하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 이영수(李榮壽)·총수 두 아이가 잇따라 죽으니, 이는 지리 보는데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연산군일기, 연산 9년 10월 18일 신해 6번째기사》[20]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중략) 1. 왕비(王妃)의 해산(解産)이 임박했는데, 만약 해산한다면 상사(喪事)와 소선(素膳)에 관한 일을 예관(禮官)을 불러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5월 29일 경자 3번째기사》. 《연산군부인 신씨의 묘지명》에 신씨가 아기 때 죽은 자식들도 포함하여 4남 3녀를 낳았다고 적혀있고 아버지 신승선이 사망할 당시, 신씨는 만삭이었는데 연산군이 이를 걱정하여 신씨에게 곡애를 못하게한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부친상의 충격으로 여덟번째 왕손은 유산 된 것으로 보인다.[21] 신수근의 동생으로 성격이 후덕하고 엄정하기로 유명하였다. 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신씨를 아낀 대목이 부분부분 등장하는데 '신씨가 왕대비와 선릉에 친히 제사를 하러 갔다고 연산군이 교외나 제천정에 나가 직접 맞이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신씨가 친잠례를 했다는 이유로 교서를 반포한 적도 있으며 그녀의 후덕함을 황금에 새겨 치하하기도 했다. 서슬퍼런 갑자사화 때 연산군을 거스르고도 뒤탈이 없었던 거의 유일무이한 인물인데 연산군이 손에 검을 들고 자순대비에게로 찾아가 얼른 밖으로 나오라며 협박을 하자 신씨가 막아 자순대비를 구원하였다. 중종반정 후 연산군과 신씨는 유배될 때 각각 다른 곳에서 보내졌는데 신씨는 "연산군과 함께 가게 해달라"고 울며 매달렸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이 죽자 교동수직장 김양필, 군관 구세장은 이 사실을 중종에게 보고하면서 "죽을 때 다른 특별한 말은 없었고 그냥 중전이 보고 싶다는 말만 남겼습니다"라고 말했다. 연산군이 죽고 난 뒤 그의 신주는 신씨가 직접 모셨고 원래 연산군의 무덤은 처음에 강화도에 있었지만 신씨가 간청하여 몇 년 뒤 오늘의 위치로 이장했는데 신씨 역시 사망한 후 연산군의 옆에 묻히게 되었으니 결국 유언은 이루어진 셈.[태지5] 명 홍치11년(1498년) 11월 27일 진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一年十一月二十七日辰時生)/왕자 강수아기씨의 태를(王子康壽阿只氏胎)/홍치 12년(1499년) 3월 17일 자시에 묻음(弘治十二年三月十七日子時藏)[22] 양평군 이인의 이름은 중종 8년에 다시 등장하는데 '만손'이라는 이름의 10대 소년이 스스로 양평군을 자처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남학동에서 성장하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자신의 종인 '보동'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아이를 대신 내어 놓고 자신을 보자기로 덮어 다른 곳으로 빼돌린 후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양평군을 어릴 적부터 키웠던 '이손'이라는 인물이 증인으로 나타나면서 만손의 사건은 자작극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양평군의 신체적인 특징과 만손의 특징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만손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만손은 처형되었다.[태지6] 왕녀 영수의 태를(王女靈壽胎)/홍치 15년(1502년) 11월 12일 양주군 봉접면에 묻고(弘治十五年十一月十二日藏于楊州郡棒接面)/소화 4년에 옮겨 묻음(昭和四年月日移藏)[23] (전략) 왕이 녹수(綠水)를 총애해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을 영수()라고 했다. 왕이 이를 매우 사랑했는데,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12월 8일 병오 1번째 기사[24] (전략) "권한은 서자(庶子)로서 분수를 모르고 장 숙원(張淑媛)의 딸 【폐주(廢主)의 숙원 녹주(綠珠)가 폐주에게 굄을 받아 낳은 딸이다.】 에게 은밀히 장가들었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로, 본사(本司)가 추문하다가 형장 추문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후략)- 《중종 24년(1529년) 6월 1일 갑자 2번째 기사》[25] 장녹수는 성관계를 안 하기로 유명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의 사노비 여종 출신으로서, 당시 30대였고 유부녀였으나 엄청난 동안과 애교로 연산군의 마음을 녹여서 가지고 놀았다고 전해진다. 연산군의 후궁 노릇을 하면서 권세를 누리다가 중종반정 이후 처형되었다. 그런데 총애를 받았다면서도 의외로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딸인 이영수 한 명뿐이었다.[26] (전략) 이것은 전 숙원(田淑媛)의 딸이 몽선의 집에 피접해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대내에 아뢰게 되어 이런 명이 있었다. (후략) -《연산군일기, 연산 11년 10월 12일 계해 1번째기사》[B] A B 숙용 전씨의 딸 = 이정수(李貞壽)일 가능성이 높다. 이정수(李貞壽)가 연산 11년(1505년) 3월 11일에 태어나고 약 한달 뒤인 4월 18일에 숙원이었던 전씨가 이유없이 숙용으로 진급하였는데 딸을 낳고 품계가 올라간 것으로 추측된다.[27] "폐주(廢主) 가 괴던 장녹수(張綠水)에게서 태어난 이영수(李靈壽)와 정금(鄭今)에게서 태어난 이함금(李咸今)에게 가사(家舍) 1좌(坐)와 노비(奴婢) 각각 15구(口)와 전(田) 각각 5결(結)을 내리고, 모두 선원록(璿源錄)에 올리소서." -《중종실록, 중종 12년 9월 1일 갑술 2번째기사》[C] A B 이함금(李咸今) = 신거홍의 처일 가능성이 높다. 연산군의 왕녀들 중 중종시대에도 생존기록이 있는 사람은 휘신공주, 이영수, 이함금 뿐인데 휘신공주는 이미 중종반정 전에 혼인을 하였고 이영수(李靈壽)는 권한의 처가 되었기 때문이다.[태지7] 홍치 12년(1499년) 기미에 태어난(弘治十二年己未生)/옹주 복억의 태를(翁主福億胎)/홍치 12년 기미 5월 9일 삼천군 삼척면에 묻고(弘治十二年己未五月九日藏于三陟郡三陟面)/소화 4년에 옮겨 묻음(昭和四年月日移藏)[28] 양력 9월 18일[태지8] 명 홍치 14년(1501년) 2월 초 4일 미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四年二月初四日未時生)/왕자 돈수아기씨의 태를(王子敦壽阿己氏)/홍치 19년(1506년)음력 9월 2일[28] 해시에 묻음(弘治十八年二月十九日亥時藏)[태지9] ‘홍치(弘治) 14년(1501, 신유) 출생. 왕녀 복합의 태를 홍치 14년(1501, 신유) 6월 17일에 황주군 인교면에 묻음. 소화 4년(1929)에 옮겨 묻음(弘治十四年辛酉生 王女福合胎 弘治十四年辛酉六月十七日 藏于黃州郡仁橋面 昭和四年 月 日移藏).’ - 《연산군의 딸 왕녀 복합(王女 福合, 1501~?)의 태지석》[29] 전교하기를, "둘째 대군이 졸하였으니, 임사홍을 불러 지리관(地理官)들을 데리고 산소 자리를 가보게 하라. 또 이총수(李聰壽) 아기의 산소 자리 본 관원을 가두고 국문하라. 대저 산소 자리를 보는 것은 동생에게도 모두 길하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 이영수(李榮壽)·총수 두 아이가 잇따라 죽으니, 이는 지리 보는데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였다. - 《연산군일기, 연산 9년 10월 18일 신해 6번째기사》[D] A B 1. 대군 이인수가 죽었을 때, 산소 자리를 보는 것은 동생에게도 모두 길하게 하려는 것인데 이총수 아기의 산소 자리를 잘 알아보지 못해 두 아이가 연달아 죽었다는 점 2. 대군 이인수에게는 대군이라 칭하지만 이 둘에겐 그러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궁 소생으로 보인다.[태지10] 명 홍치 18년(1505년) 3월 11일 유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八年三月十一日酉時生)/왕녀 정수 아기씨의 태를(王女貞壽阿只氏胎)/홍치 18년 5월(弘治十八年五月十)/7일 묘시에 묻음(七日卯時藏)[태지11] 명 정덕원년(1506년) 3월 17일 인시에 태어난(皇明正德元年三月十七日寅時生)/왕자 태수아기씨 태를(王子泰壽阿只氏胎)/정덕원년 6월 18일 자시에 묻음(正德元年六月十八日子時藏)[30] 1506년 연산군의 아들들이 모두 사사 당했을 당시, 이태수는 포함되어있지 않았는데 이를 보아 중종반정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31] 서녀는 신거홍(愼居弘)에게 시집갔다. 벼슬은 판관이다. 후취로 시집갔다.-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32] 생모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서녀는 신거홍에게 시집가서 4남 4녀를 낳았다.[33] 거창군부인 신씨가 친상을 입을 당시에 8번째 자식의 해산이 잘못된 것으로 추정되어 정상적인 통계는 7명이다.[34] 아들중에서는 창녕대군 이성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35] 사실 연산군도 세자시절~즉위 초중반까지는 매우 정상적이였으며 재능이 뛰어나다고 언급되있으며 영특하다고 기록되있다. 다만 학문을 배우는 것을 몹시 싫어했으며 학문에는 재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시절 연산군은 학문을 배우는 것을 몹시 싫어해 자주 빼먹기 일수여서 성종에게 잦은 꾸중을 들었으며 또한 문리를 통하지 못하여 학문의 진도를 한 단계씩 늦추면서 배워나갔다고 한다.[36] 어릴 때부터 연산군은 워낙 성종에게 증오와 반감을 가졌기에 내관의 발언에 잠시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는 추측이있다.[37] 단경왕후 [38] 이고는 아비의 물음에 대답할 가치가 없고 한마디로 개무시한 것으로 보인다.[39] 사실 조선시대 아내가 실질적으로 쫓겨날 수 있는 사유는 직접적인 간통, 시부모에 대한 악질적인 불효, 치료 불가능한 전염병 등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40] 왕들이 이런 것을 취미로 즐기려고 시도하면 신하들이 득달같이 "전하도 연산군이 되시려고 그러세요?"라고 반발하고 나서기 때문에 불가능했다.[41] 이를 다루는 도서로 《연산군을 위한 변명》,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 등의 책이 있다.[42] 이는 복권 전까지 왕자로 취급되어 노산군으로 불렸던 단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단, 광해군은 폐위되면서 봉호를 받은 게 아니라 세자 책봉 전에 받은 봉호가 광해군이다. 그는 본디 부왕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 소생인 데다 장남도 아니었으니 처음부터 세자가 될 수 없었던 신분이었기에 세자 시절뿐만 아니라 왕으로 있는 동안에도 내내 정통성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43] 문종(세종의 적장자), 단종(문종의 적장자), 연산군(성종의 적장자), 인종(중종의 적장자), 현종(효종의 적장자), 숙종(현종의 적장자), 경종(숙종의 서장자), 정조(장조의 적장자), 순조(정조의 서장자), 헌종(문조의 적장자), 순종(고종의 적장자)[44] 성종실록 17년 11월 25일의 기록에 따르면, 이두의 집의 귀신은 상반신이 없었다고 한다.[45] 상반신이 없어 음식이 허공에서 없어지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46] 당시 기준으로는 못생겨서 연산군이 잘생겼다고 쓰라는 명을 내렸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 무근이다.[47] 연산군과 중종이 키가 작았다거나 중키였다는 얘기도 있는데 실제로는 둘 다 키가 컸다는 기록 뿐이며 키가 작거나 중키였다는 묘사는 야사나 실록에 전혀 언급이 없으며 온라인상에서 잘못 알려진 정보이다.[48] 본문에서 뜻하는 양기는 심신의 기력을 뜻한다.[49] 부스럼[50] 아직 치료를 진행하고 있는 시기일 수도 있다.[51] 초기때는 면창 증상 언급이 잦았다.[52] 한음 이덕형이 아닌 동명이인이다.[53] 보통 미디어에서 연산군의 피부병 얘기가 나올 때 피부병을 치료한 이에 대한 얘기는 언급이 없고 일생동안 피부병을 앓았다~ 여드름이 많았다 식으로만 알려져있다. 또한 연산군 뿐만 아니라 이복동생인 중종은 얼굴과 몸에 아토피 피부 질환이 있었으며 세조 또한 극심한 피부병을 앓았었다 이 외에도 태종, 세종, 문종, 성종, 광해군, 정조는 종기 질환을 숙종, 현종, 헌종은 천연두를 앓은 적이 있다. 이렇듯 수많은 조선 임금들은 유전처럼 피부병을 앓았었다.[54] 실제 연산군 얼굴에는 반점이 있었다는 기록이 일체 없다.[55] 황교익은 한국은 장어를 약재로만 쓰였고 식용으로 안 쓰다가 일본의 영향으로 식재료 활용을 했다고 우겼는데 연산군이 장어백숙을 즐겨 먹었다는 기록으로 인해 단번에 반박이 가능했다. 다만 연산군이 장어백숙을 먹었다는 기록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기록으로 제시되는 <식요찬요>는 세종 대에 쓰여진 책이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연산군에 대한 얘기가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그리고 <식요찬요>에서 등장하는 장어요리는 죽과 된장구이 정도이고 백숙은 언급되지 않았다. 여러 모로 진위 여부가 의심되는 대목.# 다만 어찌 되었건 간에 황교익의 궤변은 한방에 논파된다. 세종 대에 장어를 요리로 먹었다는 사실 자체는 확고부동하니까.[56] 이 품종은 천연기념물265로 지정되어 있다.[57] 이 시기의 세계관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순조나폴레옹을 알 정도. 허나 겉으로만 알 뿐이고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 자체가 없었다.[58] 현대 중국어의 니(你). '너'.[59] 폭군은 아니지만 계유정난으로 축출된 단종 역시 이전에는 실록이 아닌 《노산군일기》로 격하되어 불렸다가 숙종이 추존(追尊)을 승인하게 되면서 《노산군일기》에서 《단종실록》으로 승격되었다. 사실상 실록이 아닌 일기라는 호칭을 가진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 뿐이다.[60] 본래 연산군은 19살에 즉위해서 3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물인 만큼 20대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연령 고증에 부합하는 편이다.[61] 무엇보다 외워야하는 대사의 양이 장난 아니게 많은 배역으로 악명이 높다. 왕과 나에서 연산군을 연기했던 정태우는 예능 놀러와에서 보통 왕들은 근엄한 이미지때문에 대사의 양이 많지 않아 연기하기 그렇게 어렵지 않으나 연산군은 왕 치고는 말이 많은 인물이라 그만큼 대사가 많아 연기하기 힘들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고, 왕과 비안재모는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연산군이라는 배역때문에 하루하루가 대사와의 전쟁이라고 그 고충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엄청난 양의 대사때문에 타 출연진보다 미리 대본을 먼저받아 대본외우는 연습을 해야하는가 하면, 심지어 SBS 시트콤 행진 촬영현장에서도 왕과 비의 대본외우기를 해야할 정도였다고 한다.[62] 임영규의 경우에는 현실에서도 약간 그런 성격이라는 말이 있다.[63] 연극에서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비밀을 안 이후에 햄릿의 아버지 유령과 같은 폐비의 유령 때문에 고뇌한다. 완전히 햄릿 짝퉁 연산군.[64] 이 작품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이 김진아와 공연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연산일기》로 유인촌 최고의 걸작이다.[65] 역대 최연소 성인 연산군이었지만 고증에 가장 부합하는 나이였으며 연기력도 손색없이 해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출연해 성인 역을 수행해 1994년 KBS 연기대상에서 아역상을 수상한다.[66] 당시 연산군에 캐스팅될 때만 하더라도 전작 《용의 눈물》의 반듯하고 어진 충녕대군 이미지가 남아있던터라 미스 캐스팅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폭군 역을 절륜하게 소화하여 큰 호평을 얻었다.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과 최악의 폭군을 그것도 20대 초반의 나이에 모두 연기한 셈.[67] 안재모가 연기한 연산군의 경우 자기 복제가 심한 정하연 작가 특성상 전작이었던 <장녹수>의 배우 유동근이 연기했던 연산군과 겹치는 대사와 장면이 많았다. 자칫 어설프게 연기했다가는 '유동근 복제판'이 되었을 수도 있었지만 안재모의 절륜한 연기 덕분에 이 둘의 연산군은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고 덕분에 전혀 복제판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훗날 안재모는 정도전에서 선배 유동근의 뒤를 이어 태종 이방원(정도전)역을 맡아, 선배의 연기와 겹치지 않는 자신만의 재해석을 보여주며 호평을 받았다.[68] 오죽하면 최측근인 임사홍김자원마저도 인수대비는 오래 살지 못할테니 조금만 기다리자고 말릴 정도. 하지만 연산군 본인은 할머니가 죽기 전에 모든 복수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인수대비는 죽기 전에 정말 못볼 꼴을 다보면서 죽게 된다. 심지어 죽고 나서도 빈전에 올리는 술에다가 가래침까지 내뱉는 건 덤.[69] 《왕의 남자》의 원작인 연극 《이》에서는 공길에 의해 남색사디즘에 눈을 뜨는 것으로 그려진다. 폭정보다는 장녹수와 공길 사이에서의 삼각 관계가 부각되는게 특징.[70] 과거에 단종을 3번이나 맡았던 정태우는 MBC 예능 공감토크쇼 놀러와에 출연해서 "본래 사극 속 왕은 말 수가 없고 근엄해서 대사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인데 연산군은 자신이 맡았던 배역 중 '가장 말 수가 많았던 왕'이라 그만큼 대사량이 많아 연기하기 많이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본인은 이 연산군 연기를 통해 그동안 남아있던 단종 이미지를 벗을 수 있게 되어 연산군 배역에 애착이 많이 가는 듯.[71] 참고로 정태우는 1995년 KBS 역사다큐 "역사의 라이벌"에서도 어린 시절의 연산군을 연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라이벌은 일종의 역사 다큐 형식이고 대사도 없어서 실질적으로는《왕과 나》가 첫 연산군 연기 도전이다.[72] 장녹수는 그 결심이 오래 가지는 못할 거라고 봤다.[73] 작중에서 연산군의 폭정을 부추기는 간신배 김자원의 협잡으로 '폭군을 몰아내고 안양군을 옹립하자'는 벽보가 나돌자 "진성대군도 아니고 안양군 따위를 옹립한다고?"라며 연산군이 분노했던 장면이 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진성대군을 내심 인정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다. 사실 "아래가 위를 능멸하는 짓거리"를 누구보다 혐오했던 군주권 지상론자 연산군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엄연히 왕의 정실인 중전 소생의 '적자'인 진성대군과 후궁 소생의 '서출'인 안양군은 애초부터 신분상의 차이가 넘사벽일 수밖에 없다. "진성대군도 아니고 안양군 따위를"이라는 발언은 다르게 생각하면 "고작해야 천한 후궁 소생의 서자를 엄연한 정실 소생에 적통인 나와 비교해? 그것도 모자라서 그따위 천한 서출을 만인지상의 군주에 앉히겠다고? 이것들이 임금 알기를 뭘로 아는 거야?"라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진성대군을 인정한 게 아니라 그냥 윗전은 윗전, 아랫것은 아랫것 이런 뿌리박힌 신분주의에서 기원한 오만.[74] 실제로 폐비 윤씨가 사사당하고 나서 성종은 폐비의 폐자도 꺼내지 말도록 함구령을 내리며 그 때문에 연산군은 한동안 계모인 정현왕후를 자신의 친모로 알고 있었다. 갓 태어났을 때도 오랫동안 피접을 나가 봉보부인에 의해 길러졌기 때문에 아예 생모의 얼굴조차 모르고 있었다.[75] 영화 결말부에서 중종반정 때 도망가던 중 임숭재의 함정으로 돼지 우리에 빠졌는데 임숭재마저 자신을 배신했다는 절망과 광기가 뒤섞인채로 기어코 암퇘지와 수간을 해버린다. 이 모습을 본 유자광은 "마지막 성은은 돼지가 입었구만?"하고 질색한다.[76] 김지석은 이 연기로 2017년 제10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와 MBC 연기대상에서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77] 연산군의 시대는 1부 한정, 2부는 선조의 재위기였던 16세기 후반, 3부는 17세기 후반의 시대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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