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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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북한의 80년대 3대 실정

1. 개요
2. 특성
3. 역사
3.1. 리승기의 개발
3.2. 염화비닐/비날론 논쟁과 양산화
3.3. 대 흑역사 -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3.4. 부활?
4. 이용
4.1. 반론
5. 남한의 비닐론
6. 비날론 남북합작?
7. 관련 자료


1. 개요[편집]


Vinalon/Vinylon

비날론, 혹은 비닐론(일본명)[1] 1939년 북한의 리승기 박사가 당시 일본제국 교토 제국대학(현 교토대) 다카츠키(高槻) 화학연구소에서 사쿠라다 이치로, 카와카미 히로시 등과 함께 만든 세계 두 번째 합성섬유다.

1935년에 개발되어서 1938년 발표한 나일론에 자극을 받아 나일론 발표 1년 만에 폴리비닐 알코올(polyvinyl alcohol; PVA)에서 개발했으며 가볍고 질기고 화학약품에 강하면서 천연섬유에 가까운 특성을 지녔다.

본래 비닐론이라고 했지만, 리승기가 북한으로 넘어간 후 김일성이 비날론으로 개명했다. 물론 북한 이외에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이름이다.

2. 특성[편집]


북한의 풍부한 석탄석회석[2]을 원료로 하고, 부산물로 각종 화학 원자재가 나오기 때문에 공업과 연계되고, 자체발명 & 자체생산이라는 점이 체제 선전에도 좋아서 김일성의 구미를 당겼다고 알려져 있다. 이른바 주체사상의 상징인 "주체섬유". 자매품으로 주체과 주체비료가 있다고 한다.

비날론 공업은 완전한 우리의 주체적 공업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비날론을 발명한 것도 조선 사람이고 그것을 생산하는 공장을 설계하고 건설한 것도 조선 사람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나라의 풍부한 원료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김일성

이 말 자체는 맞는 말이다. 북한에 석탄과 석회석이 풍부한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단점도 당연히 만만치 않았다. 일단 대규모 생산 시설을 지어야 하고, 제조단가도 너무 비싸고 제조 과정에서 원자재 못지 않게 많은 폐기물이 나왔다. 특히 생산 과정에서 전기를 막대하게 소모했는데, 수력발전만으로도 전기가 남던 1950년대 ~ 60년대에는 그야말로 전기를 물 쓰듯이 써도 괜찮았으니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전력 부족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1980년대부터는 보통 부담이 아니었다.

그리고 화학 약품에 강한 특성 때문에 염색이 잘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단순한 색으로밖에 만들 수 없었고 그나마 젖은 상태에서 다리미로 다리면 탈색되었다(...). 게다가 비날론 옷은 뻣뻣하여 착용감이 좋지 않으며 너무 번들거리고 쉽게 줄어든다. 아마도 마치 스타킹을 다리미로 다리듯 위에 모포를 덮은 뒤 그 모포를 다리는 식으로 다림질을 했을 것이다.

좀 더 화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디가 문제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비날론은 폴리비닐 알콜(PVA)을 베이스로 만든 섬유다. 여기서 문제는 PVA가 수용성이라는 것이다. 즉 처음 약품을 녹여두는 액체로 무기용매인 물을 쓴다는 것인데, 물은 산업용 용매들 중 건조 조건이 상당히 나쁜 편에 속한다. 당장 시너와 물 중 어느 쪽이 빨리 건조되는지만 생각해봐도...[3] 그리고 한국은 여름에 고온다습한 기후를 보인다. 습기가 가득한 환경에서는 물의 증발은 더욱 더뎌진다. 여러소리 필요 없이 물을 말리는 시간과 돈이 깨진다는 소리.

게다가 PVA는 수용성이라서 지용성의 화학 약품이나 유기용매에 반응하지 않는다. 이 특성을 이용해서 다른 용매에 저항성을 가지는 용도의 코팅이나 각종 공정에는 유용하게 사용되겠지만 이걸 범용수지로 쓴다는 건... 근데 이걸 섬유[4]로 만들었으니 실용성이 없다시피 하는 건 당연하다.


3. 역사[편집]



3.1. 리승기의 개발[편집]


1939년, 당시 리승기 박사는 '합성1호'라는 시제품의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는 엄청난 자랑거리였다. 과학잡지 '과학조선'은 조선인 과학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리승기를 지목했고, 종합잡지 '조광'(朝光)도 '세계의 학계에 파문을 던진 합성1호의 기염-리승기 박사의 고심 연구달성'(1939년 12월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해방 때까지 조선인 출신으로 이공학박사를 받은 인물은 우장춘, 리승기를 포함해 12명에 불과했으며, 일본에서 제국대학 박사를 딴 인물은 2명 뿐이었으니 정말 드문 일이긴 했다.

그러나 비날론은 상용화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가 이미 중일전쟁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의 전쟁통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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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승기 박사는 광복 이후 귀국하여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로 부임했으나, 1947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국대안) 파동으로 인해 교수직을 던지고 고향 담양군으로 내려와 있다가, 6.25 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31일, 북한 산업성 부상 리종옥의 설득으로 서울대학교 응용화학과 출신 제자들까지 전원 같이 데리고 월북 인생 최악의 오판 을 해 버렸다. 이때 월북한 박사 출신으로는 동경제국대학(현 도쿄대학교) 공업박사 최삼열, 동경제대 농예화학 학사, 화학과 박사였던 김량하 등 111명이었다. 당시 북한의 주요 과학자들 대부분이 월북 과학자였다.


3.2. 염화비닐/비날론 논쟁과 양산화[편집]


리승기는 흥남시 비료공장에서 근무한 적도 있으며, 이후 1960년 북한 과학원(평양)의 첫 번째 분원인 함흥분원을 설립해 함경남도를 산학협동, 비날론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활동했다.

1950년대부터 공업화가 시작되었다. 1951년 첫 공업화, 1958년 공장 건설이 결정되었으며, 1961년 5월 드디어 양산화(연간 2만톤)에 성공한다.[5]

당시 흥남 비날론 공장은 4월 1일에서 5월 6일까지 36일만에 건설되었다. 또 이 건설을 독려하기 위해 돌격대를 조직했는데 이른바 ‘8·28돌격대’, ‘4·1돌격대’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때 벌어진 "비날론 속도", 속도전 운동은 하루 계획 목표의 3,500%를 달성해야만 비로소 ‘비날론 속도’라고 불렀다(...). 거꾸로 대입하면 35*36 = 1260일, 3년 반 동안 지어야 했을 공장을 36일만에 날림으로 지었다는 뜻이다(...).

비날론 공업화의 반대는 1950년대부터 꾸준했다. 니트론(아크리라)이나 나일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폴리염화비닐(PVC)을 지지하며 비날론은 경제성이 없다며 반대한 려경구 박사[6]가 '귀족적인 섬유'를 지지했다며 사상검토를 받고 1977년 사망[7]함으로써 결국 비날론의 승리로 끝났다. “비날론은 면(棉)에 가까워 아이들의 옷으로부터 어른들의 의복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옷을 만들 수 있는 대중성 있는 섬유”라는 김일성의 논리였다.

황당한 점은, 비날론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의 목표는 주로 나일론과 나일론이 대체하고자 했던 실크(비단)나 양모를 대체하는 것이었지 면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결국 비날론이 원료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주체"적인 섬유(...)였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슷한 예로 비스코스(인견, 레이온의 일종)가 있다. 목재나 갈대 같은 셀룰로오스로 만드는 섬유이기에 역시 북한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역시 비스코스도 수분의 침투가 쉬워 자체 무게의 무려 13%나 흡수한다고 한다. [8] 실제로 한국에서 사상 최악의 산업재해 사건 중 하나인 원진레이온 사태를 일으킨 바로 그 비스코스 생산 설비[9]가 원진레이온 및 기타 레이온 업체들의 줄폐업 후 헐값에 중국에 넘어갔고, 거기서도 수많은 인명사고를 낸 끝에 결국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사용 중이라는 증언이 있다.


3.3. 대 흑역사 -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편집]


그렇게 북한 높으신 분의 지시에 따라 기존 함흥에 있던 2.8 비날론연합기업소의 2배 규모나 되는 평안남도 순천시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를 1983년 4월부터 건설하면서 경제성 없는 양산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이 완공되면 400여 가지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해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으니 경제사정악화와 전력난, 자재부족문제로 이 공장은 결국 1989년 1단계 공사를 끝낸 뒤에 건설이 중단되면서 거대한 고철더미로 전락하였다.
김일성이 승인했다는 이유로 겨우 실험실 규모에서만 성공시킨 산소열법의 공법을 수많은 과학자의 반대를 묵살하면서까지 무리하게 대형 공업화한 것이 대실패의 원인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매몰비용만으로도 3대 흑역사 가운데 가장 큰 100억 달러를 소비하였으며 아무리 경제성보다 사상을 앞세우는 북한이라고 할지라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타격이었다.
노동집약적증산을 위해서 산을 무리하게 개간하면서 전력난과 연료난으로 역시 산을 무분별하게 벌목하는 바람에 1990년대 들어서는 민둥산에 대홍수가 끊이지 않게 되자 그나마 돌아가던 기존 비날론 생산도 연이은 대홍수로 석탄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1994년에 이르면 모두 중지되었을 정도이며 건설이 중단된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안의 설비들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기간부터 중국에 고철로 몰래 판매가 되었다.(…).
리승기 박사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1996년 2월 8일에 사망하였으며 향년 90세이다.[10]


3.4. 부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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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 허물

리승기가 사망하기 직전인 90년대 비날론은 북한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김일성의 경제 브레인으로 김정일의 눈엣가시였던 부총리이자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김달현의 운명은 비날론의 역사에서 상징성이 있다. 그는 이미 김일성 생전인 1993년 국가계획위원장에서 해임되고 김일성 사후엔 부총리에서까지 밀려나 2.8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되었다. 한동안은 복권설이 돌았으나, 죽기 전까지 함경남도 인민위원회 참사로 머물렀다. 그것도 모자라 자력갱생 정책의 추진자인 연형묵[11]을 검열단장으로 보냈는데, 김달현이 2000년에 죽은 것은 그를 두려워해 자살했다는 말 까지 있었다.[12] 비날론 공장의 최고 책임자가 이런 형편이니 비날론공장 역시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고, 김달현이 죽은 2000년에 공장은 가동을 중단한다.

2007년에는 김정일이 비날론 재건을 지시해 2010년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2000년 이후 10년 만에 재가동에 들어갔다. 선전에 따르면 김정일은 인민들 입을 걱정이 없어졌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새로운 원자탄을 쏜 것과 같은 특대형 사변[13]이고 사회주의의 대승리"(...)라고 한다. 2010년대인 지금도 "주체섬유"란 이름으로 CNC 등과 북한 공업의 핵심으로 주장되고 있다(...).

비날론은 김정일이 주도한 실패작이다. 결국 이런 지시는 실제로 경제 개발이나 인민의 삶에 생각이 있기보다는 "변화는 없다. 개방은 없다."라는 상징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이를 이어받은 김정은 역시 마찬가지.

물론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손도 못 대고, 결국 고철 상태로 방치 되다가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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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인공위성이 촬영한 '순천 비날론연합기업소'의 사진을 2004년에 촬영한 모습과 비교해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철거하는데만 20년 가깝게 걸렸다.

그런데 북한 정권은 여전히 비날론에 미련을 못버려서(...) 석탄가스화를 통해 에틸렌을 직접 수급 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고 우기고 있다. 기존의 연료먹는 하마였던 무연탄과 석회석에서 카바이드를 얻는 공정을 생략하고 에틸렌→아세트알데히드→아세트산→아세트산비닐→폴리아세트산비닐→폴리비닐알콜→비날론 의 과정을 거쳐 비날론을 합성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 매체는 이와 같은 에너지 절약형 공법으로 비날론 공업부문에서 사용되던 전력을 9만8천kW에서 1만3천kW로 끌어 내리는데 성공하여, 약 70%까지 절약하는데 성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14] 하지만 애당초 실용성이 없던 비날론을, 각종 제재로 위기에 놓인 북한에서 에너지 절약 공법으로 생산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4. 이용[편집]


그래도 초기 주민들의 반응은 괜찮았으며 그 전에는 조차 부족해서 갈대로 만든 조잡한 섬유로 만든 옷이 지급되었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남한 같으면 한 트럭 공급하여도 걸레로 사용할 데가 없어서 안 보유할 의복을 북한 주민들은 괜찮게 공급받을 정도면 북한 주민들의 의생활 환경이 얼마나 열악하였는지 알 수가 있어 북한의 총 섬유의 60%가 비날론이라고 밝혔다.
앞에서도 나왔지만 부산물과 폐기물이 너무 많이 부수적으로 생산되면서 친환경 공정 산업으로도 불합격이면서 사실상 석유가 부족하고 석탄과 석회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북한 같은 환경에서나 제조할 가치가 조금이나마 있는 섬유로써 발전한 듯 하다.
이제는 정작 그 북한에서조차 비날론을 걸레짝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농담이 아니고 수용성이라서 수분 흡수가 아주 훌륭해서 정말 좋은 걸레짝(...)이라고 한다.
한 번 세탁하면 줄어들면서 이물질이 묻으면 잘 떨어지지도 않으며 그런데 의복으로 제조하면 땀 흡수가 안 된다고 하니 거기에 보온성도 없다고 한다.[15]

2010년대에 탈북한 사람은

저도 북한에서 살면서 비날론으로 만든 옷을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다 셔츠나 동복이 나오는데 너무도 번들거리고 주름이 많이 가서 탄광이나 광산 같은 데서 노동자들이 작업복으로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산사업소들에서 배를 견인하는 밧줄로 많이 사용하였고 청소용 밀대를 만들 때 썼습니다.


라고 말하니 이미 버려진 것 같다.

한편 일본에서는 비옷, 앞치마밧줄을 만드는 데 사용되면서 일웹에서 비닐론(ビニロン)이라 검색하면 대부분 밧줄 사진이 나온다.
첨언하자면 일본에서 비닐론 밧줄은 대개 비닐론 단일 재료만으로 만들다 보면 여러 모로 불리한 점이 있기 때문에, 폴리에스터를 섞은 크레모나(クレモナ; 쿠라레이クラレー사의 상표명)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염색이 잘 되지 않는다는 특성이 사실인 것이 염색되어 있는 크레모나 밧줄도 풀어보면 겉만 염색이 되어있고 속은 흰색 그대로인 채로 발견되고 있어 촉감은 나일론보다 훨씬 부들부들한 편이긴 하다.


4.1. 반론[편집]


석사학위논문인 리승기의 북한에서의 비날론 연구와 공업화라는 논문을 보면 리승기 박사의 연구 성과들을 볼때 1942년 3월 그 일부가 조업하여 20 ~ 30kg의 섬유를 제조해서 방적, 직포, 편직 시험을 하였으며 또한 방적사, 천 등의 성질을 검토한 결과 이상의 시험 결과에 의하여 이 섬유 제품의 품질이 상당히 우수하면서 능히 공업화할 수가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북한에서 면생산이 부족해 갈대 추출 섬유로 만든 조악한 품질의 옷을 입던 북한 주민들에게 70년대부터 비날론 의복이 본격적으로 배급되기 시작하였으며 비날론은 면과 비슷해 보온성, 흡습성이 뛰어난데다 잘 헤지지 않아서 주민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던 것으로 전해졌다고 KBS 남북의 창에서 언급하게 되었다.기사
북한이 만든 합성 섬유는 하중 - 신장 곡선이 천연 견사와 아주 비슷하면서 나일론은 강도에 있어서 천연 견사보다 우수하나 양그율이 대단히 적기 때문에 견 대용으로 사용할 때에 이것이 결정적인 결함으로 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하중-신장 곡선을 비교해 보면 나일론과 견과는 큰 차이가 존재하면서 우리는 이 하중 - 신장 곡선만을 문제로할 때에 나일론보다 우리가 만든 합성 섬유가 견 대용으로 훨씬 적당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논평하게 되었다.
권축 섬유의 경우에는 방적용 섬유로서 하등의 불편을 느끼지 않을 것이 예상된다고 밝히면서 특히 양모 대용을 목적으로 할 때에 더욱 명백하다고 밝혔고 건습 강신도를 보면 방적사로서 훌륭하면서 양모보다 강하다는 등 양모 대용을 모색한 듯한 흔적도 찾아볼 수가 있다고 논평하였다.
실질적으로 스테이플 섬유로 비교해봐도 면보다 2배는 더 향상이 되면서 나일론보다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알수가 있어 특히 필라멘트로는 면보다도 훌륭하고 나일론보다는 조금 안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하였다고 언급하게 되었다.


5. 남한의 비닐론[편집]


지금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지만 남한에서도 한때 비날론이 생산되었으며 석회석이 풍부한 건 남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면서 다만 반공국가인 대한민국의 특성상 북한에서 만든 명칭인 비날론은 사용하지 않고 비닐론이나 미구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1959년 8월 미진화학섬유공업사가 미국의 원조자금 47만달러를 자본금으로 하여 부산에 비닐론 제조공장을 설립하면서 북한처럼 의복용이 아닌 처음부터 산업용이나 이불솜 대용으로 용도를 정한 것이 특징이면서 초창기에는 원료를 일본에서 수입하였으며 북한과 달리 석유를 이용해 석회석에서 원료를 생산할 계획이었다. 관련기사
물론 대한민국은 북한처럼 비닐론에 올인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합성 섬유 기술을 도입하면서 생산하였기에 북한같은 문제는 벌어지지 않으며 이후 미진화학은 한국비닐론으로 회사 이름을 바꾸고 대한민국 유일의 비닐론 제조 업체가 되고 있어 1969년에는 생산시절을 확충하면서 비닐론 파이버를 생산하는 등 꽤 잘 성장하였다. 관련기사. 그러나 1970년에 수입제품에 밀려 비닐론 파이버의 판로에 차질이 생기고, 종업원들의 월급도 3개월 밀리고, 공장 가동이 중지되는 등 한바탕 난리를 치뤘다. 결국 다음해인 1971년 산업은행의 관리하에 공장 가동이 재개되었다.

이후 1973년 당시 한국철강 회장이었던 신영술이 한국비닐론을 인수, 동양비닐론을 세운다. 그러나 1975년 신영술은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려고 하다가 적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재산해외도피를 적발한 사례라고 하며 이런 상황에서 비닐론 제조업이 제대로 진행되었을 리 없어 공장은 계속 파행으로 운영되다가 1978년 11월 25일 폐업하였다.
한편 1976년 남양자재가 일본과의 합작으로 이리(현 익산)에 비닐론 실 생산공장을 세웠으나 1994년에 폐업했다. 따라서 1994년 이후로 대한민국에서 비닐론은 생산되는 곳이 없다.


6. 비날론 남북합작?[편집]


그 이후에도 여기에 가치가 있다고 투자하는 남쪽 사업자들이 있었으며 2001년 코리아 비날론의 경우인데, "비날론은 폴리비닐알코올 합성섬유 중에서 유일하게 물에 녹는데다 인체에 무해해, 인공 장기·건축자재·치료 등에 이용될 수 있는 미래형 소재로 "완제품과정을 거쳐 액정표시장치(LCD)나 석면 대체용 고강력사 등의 소재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으며 인공뼈 항암제 등 생명공학제품용으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북한에 우호적인 언론들에서도 후속 기사는 없었고 당시 37살의 나이의 사장은 6년 뒤 고양시의원이 되었으며 "남북한 간의 협력사업은 상당히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역시 북한과 사업을 하면서 우리와 다른 시스템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고 회사 자금도 상당히 지출하였습니다."라는 대목을 보아 사업에 성공하지 않은 것 같다.

2001년 당시에는 "북의 기술 수준은 일본과 함께 세계 최고입니다."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북한의 박사급 인력이 많아봤자 산업적으로는 쓸모가 없다.

불순물이 문젠데... 그러나 북에서 보낸 비날론 샘플을 검사해 봤는데 불순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자체적으로 불순물 제거 기술을 개발한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실제로 폴리 비닐알코올 사업 규모가 2000년 당시 1994년의 1.75조억원에서 1995년 4조, 10조로 성장하긴 했다.

실제로 일본은 1950년대부터 쿠라시키 레이온, 닛신방적 등의 기업을 통해 유사한 섬유를 생산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의 쿠라레(Kuray, クラレ)사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북한과 달리 일본의 비닐론은 석탄이 아닌 석유로 만든다. 그게 에너지 소비가 훨씬 덜 들기 때문이다.[16]

다만 북한은 석탄 생산량이 높은 데다가 석유를 수입할 여건이 되어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여전히 효율성 최악인 석탄으로 비날론을 만드는 것이면서 요즘 세상에 반응공식을 몰라 거의 한 세기 전에 발명된 섬유를 못 만드는 곳은 없다.
공정이 관건인데 그 공정이 거의 한세기 전 것에서 발전이 없다면... 물론, 북한도 그 공정을 개선하겠답시고 삽질하다 날려먹은 게 순천화학연합기업소이지만 어쨌든 아직도 북한의 비날론 기술이 거래대상이 될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런 공상적인 사람과는 동업하지 않는 게 자금을 지키는 길이 될 수가 있다.


7. 관련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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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날론'이란 이름은 북한과 한국에서 겨우 쓰이고 일본이나 서양권 등에선 비닐론이라고 한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항목명도 비닐론.[2] 석회석과 무연탄에서 얻은 카바이드.[3] 화학지식이 없는 위키러라면 알코올과 물을 비교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주사를 놓기 전에 알콜솜으로 바른 알코올은 금방 증발되기 때문에 우리가 시원함을 느낀다. 하지만 같은 양의 물이 그렇게 금방 쉽게 없어지는가?[4] 별거 아닌 듯 보여서 그렇지 화학섬유를 뽑는 건 상당한 양의 수지가 가공되는 작업이다.[5] 같은 해 리승기는 1961년에는 사회주의권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레닌상까지 수상했으며, 1967년 부터는 영변 핵개발 연구소로 북핵 개발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화공과 출신이었으니 충분히 가능했을만한 일이었다. 물론 소장이니 직접적인 일은 안했겠지만. (여담으로 핵개발은 공학적 요소가 매우 중요하며, 핵개발 낭설이 도는 이휘소 박사의 핵물리학 분야와는 오히려 관련이 적다. 항목 참조.)[6] 여운형의 5촌조카. 역시 와세다 대학교 화학과 박사로, 광복 직후에 경성대학(서울대) 교수로 있었으나, 여운형의 딸 려연구 씨의 증언에 따르면 여운형의 권유에 따라 1946년에서 1947년 사이 월북했다. 다만 이 증언의 신빙성이 적다는 의견도 있다. 려경구 역시 리승기의 월북을 몇차례 설득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리승기의 과학원 원사 바로 다음 급인 과학원 후보원사를 지냈다.[7] 자살설이 있다. 여담으로 나일론의 발명자 월리스 캐러더스(Wallace H. Carothers, 1896 - 1937)도 자살했다.[8] 그래서 비스코스는 때수건 원단으로 쓰인다(...).[9] 본래는 멀쩡한 설비였지만, 일본 등 외국에서 오랫동안 쓰다 노후화된 것을 원진레이온에서 헐값에 사들인 것이었다.[10] 정말 비참한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이었던 비날론이 북한을 대차게 말아먹는 것(...)에 크게 일조한 것과 자신이 등진 남한이 북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한 것까지 전부 보고 죽은 것이다. 게다가 리승기 본인은 비날론 공장의 대규모 건설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는 탈북 과학자의 증언도 있으며 더욱 안습이다. 또한 리승기는 석탄화학뿐만 아니라 석유화학의 중요성도 제기하였지만 주체과학 때문에 묻히게 되었다.[11] 사실 연형묵 역시 권력이 김정일에게로 넘어간 1993년 총리에서 해임되어 자강도당 책임비서로 격하되었으나 선군정치와 군수공장으로 부활해 90년대 후반에는 노력영웅으로 복권했다.[12] 국정원까지 파악한 원인은 지병인 심장병이었다.[13] 사변이란 부정적 의미의 단어지만 북한에서는 60년대 이후로 긍정적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사변 참조.[14] 출처: 탄소하나화학공업과 인민생활[15]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반응은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 리승기 박사가 비날론으로 제조한 속옷과 티셔츠 등 상당부분을 착용하면서 강의하면서 많은 이점들을 설명하고 이것의 반응으로 북한에서 있었던 학부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제자들이 월북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16] 이는 2차 대전 이전 유럽-일본의 석탄 중심 전력 고소비형 화공업에서 미국의 석유 중심 화공업으로 산업구조가 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방 당시 남았던 노구치의 흥남비료공업의 설비는 물론이고, 리승기 박사도 2차 대전 이후로 새로운 산업기술 업데이트가 안 되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