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봉 살인 사건

덤프버전 :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external/file1.bobaedream.co.kr/2033635346_83c62c93_1.jpg

범인 고재봉(高在奉)

1. 개요
2. 상세
3. 재판
4. 여담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뉴스 제443호-살인귀 '고재봉' 체포

1963년 10월 19일 강원도 인제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인 사건. 피해자와 범인이 모두 군 관련 인물이다.

2. 상세[편집]


흔히 상병 고재봉은 중령 박병희의 공관병으로 박병희의 가족들이 고재봉을 머슴처럼 부려먹었고 이에 앙심을 품은 고재봉이 범죄를 일으켰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 고재봉은 육군 1109 야전공병단 101대대 소속이고 박병희 중령은 301대대 소속으로, 애당초 같은 부대 소속도 아니었다. 즉, 기레기들의 오보 때문에 애꿎은 박병희 중령만 욕먹은 것이다.
  • 1962년 12월 29일, 당시 26세였던 고재봉은 옆 부대 박병희 중령의 관사에 침입해 명태와 구두 두 켤레를 훔쳤다. 박병희는 처음에 명태 한 마리만 훔친 것으로 알고 그냥 넘어가려 했으나 신발까지 훔쳐가는 바람에 제대로 출근까지 못하자 분노한다. 여기에 윗집에 사는 국민학교 교사의 옷가지도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부관을 시켜 신남지서에 신고했다. 고재봉은 어론리 마을에서 박병희의 부관과 순경을 보고 그대로 산속으로 도망갔으나 결국 체포되어 절도죄로 7개월 동안 복역했다.
  • 출소한 고재봉은 부대에 복귀하지 않고 탈영서울로 가 애인인 최기숙을 만났으나 그녀는 그가 범죄자라며 결별을 통보해 버렸다.
  • 1963년 10월 10일: 고재봉은 이 모든 게 박병희 중령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를 죽이기 위해 인제로 가 민가에서 훔친 도끼와 식칼을 낙엽 속에 숨겼다.
  • 10월 12일~10월 18일: 관사 뒷산에서 동태를 살폈다.
  • 10월 18일: 마을의 탈곡 작업장에서 술을 얻어 마신 후 술기운을 빌려 범행을 저지르기로 결심하며 밤 10시에 산에서 내려와 관사로 갔다. 마침 박 중령이 술에 만취해서 구토하고, 이 때문에 부부싸움을 한 뒤 혼자 잠을 잤음을 알게 되었다.
  • 19일 새벽 1시 30분: 관사 뒷 문으로 침입해, 만년필형 전지로 중령의 위치를 확인 후 도끼로 내리쳐 살해했다. 고재봉은 방 안의 불을 켠 후 주전자 속 술을 마시고 권총을 찾기 위해 옷장을 뒤졌다.[1] 뒤이어 중령의 방에 들어온 중령의 부인 역시 도끼로 살인하고 아랫방으로 가서 15세 식모와 중령의 9세 장녀, 5세 차녀, 3세 차남을 살해했다. 고재봉은 중령의 일가족 6명을 몰살하고 중령의 손목시계와 중령 부인의 백금다이아 반지, 현금 10원, 야전 점퍼, 작업바지, 군무복, 군화 등을 훔쳐 달아났다. 다만 방 안에 있던 금고는 금고 문을 열지 못해 포기했다. 그 후 먼저 사건 현장에서 40m 쯤 떨어진 어론교 밑에 중령의 옷과 구두를 숨겼고 다시 홍천군 두면산으로 가 범행 당시 입었던 옷과 중령의 신분증을 숨겼다.
  • 새벽 3시 30분: 불심검문을 받았는데 군인들은 고재봉에게서 시계와 반지, 현금 580원을 강탈하고 그대로 풀어줬다.
  • 이후 고재봉은 노숙 후 버스를 타고 서울특별시 마장동에 살고 있던 사촌 형의 집에서 3일을 묵고 다시 금호동의 다른 사촌 형의 집으로 가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이 날 신문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죽인 사람이 박병희 중령이 아니라 새로 부임해 온 이득주 중령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고재봉은 일주일간 관사의 동태를 지켜봤으며 범행 때는 전지로 상대를 확인했고 범행 후에는 이 중령의 신분증을 훔치기까지 했는데, 과연 자신이 죽인 사람이 박병희가 아니라 이득주인 것을 몰랐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고재봉이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단순한 원한이라기보다는 강도가 목적일 수 있다는 설도 있다.
  • 10월 25일: 박 중령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제로 가서 그가 6사단으로 전출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같은 날 군경합동수사대가 범인을 고재봉으로 확정하고 전국 지명수배를 내렸으며 육군 헌병감실과 제1군이 고재봉에 현상금 3만 원을 내걸었다.
  • 10월 26일: 고재봉은 마장동 사촌 형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박 중령을 죽이기 위해 동대문 시장으로 가서 60원을 주고 과도 3개를 샀다.
  • 고재봉은 군경의 추적을 피해 도보와 버스를 이용해 시흥, 안양, 수원을 거쳐 평택시 송탄면 서정리에 토굴을 파고 16일간 노숙하였다.
  • 11월 6일: 민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6일 동안 이동해 서울에 도착했다. 고재봉은 박 중령이 전출간 철원까지 갈 여비가 없자 종로 5가에서 행상을 하던 사촌 동생을 찾아가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대신 사촌 동생과 함께 사는 땅콩장수 김복수를 만났다. 김복수는 고재봉을 만난 적이 있었고 이 때문에 경찰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지명수배 중이던 것을 알고 있었다. 김복수는 고재봉에게 리어카 보관소에 가 보라고 말한 후 미행했다. 그리고 보관소 직원에게 경찰신고를 부탁했지만 신고되지 않았다. 고재봉은 보관소에서 사촌 동생을 만나지 못하자 청계천변을 따라 걸었고 김복수는 다른 행상인들에게 저자가 고재봉이니 같이 잡자고 부탁했지만 그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다. 이 때 양말 장수인 김성이 김복수의 말을 듣고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오후 6시 20분부터 청계천을 통제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재봉은 동대문시장 입구에서 경찰들에게 체포당했다.
  • 고재봉 체포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김복수와 경찰에 신고한 김성은 표창장과 현상금, 2박 3일 관광여행 상품을 받았다. 고재봉은 CID에서 수사받으면서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며 순순히 자백했다.

3. 재판[편집]


1963년 12월 12일 고재봉은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죄수번호 5000번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고재봉은 강도살인, 상관살해, 예비강도 등 8개 혐의로 기소됐으나 재판 도중 자신은 강도살인이 아니라 살인강도라고 주장했다. 즉, 자신은 강도질을 하기 위해 관사에 침입해 이득주 중령을 살해한 게 아니라 이득주 중령을 살해하기 위해 관사에 침입했고 살인을 저지른 김에 강도질도 했다는 궤변이었다. 방송 카메라가 고재봉의 가족들을 비추자 고재봉은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 12월 19일 사형 판결을 받았고 고재봉은 항소를 포기하면서 확정되었다. 사형수로 복역하던 중 목사 안국선의 전도로 옥중에서 회심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자신이 좀 더 일찍 예수를 알았더라면 사람을 죽이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형 선고 다음 해인 1964년 3월 10일 경기도 부천에서 고재봉의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찬송가를 부르며 죽었다고 한다.[2][3]


4. 여담[편집]


  • 당시 유명한 사건이라 언론에 많이 보도되어서인지 30년 가까이 지난 후 어느 중학교 교감 선생이 퇴임식 때 "도끼 그만둡니다." 라고 말한 사례가 있다. 하필 이름이 고재봉이라 이 사건의 도끼와 얽혀 학교에서 별명이 도끼 선생이었다고.
  • 고재봉에 대하여 다룬 박삼중 스님의 책 《가난이 죄는 아닐진대 나에겐 죄가 되어 죽습니다》에서 이 사건을 자세히 다뤘다. 책에는 고재봉은 1960년대 당시 후진국이던 시절 가난하게 자라 와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가정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 희생자인 이득주 중령의 아내 김재옥은 6.25 전쟁 초기 동락리 전투에서 열세였던 국군에게 북한군의 동향을 알려주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무려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이는 민간인 최초 수훈 사례다. (당시 소위였던) 이득주와 결혼한 것도 이 때의 인연이었다.
  • 이득주 중령의 장남인 이훈은 사건 당일 친척집에 있어서 피해를 면했다.


5. 둘러보기[편집]



<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width:300px; min-height:calc(1.5em + 5px);"
[ 펼치기 · 접기 ]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2 22:00:22에 나무위키 고재봉 살인 사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하지만 군인이 자신의 권총을 옷장에 보관할 리가 만무하기에 실제로는 금품을 훔치기 위해 뒤진 것으로 보인다.[2] 이때 부른 찬송가는 493장 〈하늘 가는 밝은 길이〉.[3] 이후 안국선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간증집으로 엮어 책 《전도하는 사람들》로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