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연쇄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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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00년 10월 25일부터 2000년 12월 19일까지 당시 31세 남성이었던 김해선이 일으킨 (이제 곧 후술하게 될 미수 사건들을 제외한) 2건의 미성년자 강간 살인 사건.
2. 1차:십자가 형태의 시신 [편집]
2000년 10월 25일 저녁쯤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에서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첫 번째 피해자 정 모(11) 양은 학교 가까이 살던 친구들과는 달리 걸어서 2시간 이상 걸리는 먼 곳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 전화해서 엄마나 아빠에게 데리러 오라고 해야 했으며 사건이 일어난 그날도 그랬다.
오후 3시 30분쯤 수업이 끝난 뒤 오후 5시 10분까지 친구들과 놀던 정양은 시간이 늦었다며 친구들과 헤어졌고 단짝 친구와 함께 집을 향해 걸었다가 인근 중학교 정문 앞에서 공중전화를 통해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중학생 오빠가 엄마한테 데리러 가시라고 전해 주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으며 이후 단짝 친구와 문구점에서 강아지 인형을 산 뒤 헤어졌는데 그때가 6시 10분쯤이었다.
한편 정양의 엄마는 저녁 7시까지 계속해서 딸을 찾다가 결국 인근에 있는 해리 파출소로 달려가 실종신고를 했고 경찰과 인근 지역 주민들은 밤샘 찾기에 나섰지만 정 양을 찾지 못했다.
다음날 오전 9시 30분 정 양은 해리면 평지리 야산의 양지바른 무덤 위에 알몸 상태로 십자가 모양으로 반듯하게 눕혀져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담양-해리 간 국도변에서 샛길을 따라 올라온 지점이었는데 정 양이 살던 마을까지는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곳으로 평소 사람들의 통행이 드문 장소였다.
정양의 셔츠와 점퍼는 둘둘 말린 채 베개처럼 목을 받치고 있었고 바지는 접힌 채 방석처럼 엉덩이 밑에 놓여 있었다. 흉기로 찢어낸 정양의 옷과 잘린 바지 조각, 운동화 등은 모두 책가방 속에 가지런히 담긴 채 사체의 발 옆에 놓여 있었다.
어린 소녀의 음부, 팬티는 쓸린 상처와 핏자국으로 엉망이었다. 며칠 뒤 피해자가 범인의 손이나 사물로 성추행을 당한 뒤 목 졸려 숨진 것이라는 국과수의 부검 결과가 발표됐다. 조용한 시골 마을이 살인 사건 현장으로 둔갑한 순간이었다.
시신 발견 직후 현장을 철저히 봉쇄한 채 현미경을 들고 바닥을 훑던 현장 감식반은 가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족적과 모발, 체모 몇 점의 귀중한 소득을 얻었다.
경찰은 일단 시신 발견 현장 부근과 피해자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탐문 수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정양의 실종 당시 모습을 재현한 그래픽을 출력해 배포하면서 목격자를 찾기 시작했다.
범행 후 시신을 유기하는 통상적인 수법과 달리 시신을 보란 듯이 십자가 형태로 눕혀 놓은 것은 범인이 마치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당시 경찰 내부와 언론에서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 소속됐거나 정신병력을 지닌 인물의 소행일 가능성도 제기되면서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 전문 범죄 분석이 도입되지 않은 고창경찰서는 현장 수사와 탐문수사를 진행한 끝에 피해자를 봤다는 목격자와 용의자로 추정되는 이를 봤다는 목격자들이 나오면서 용의자의 몽타주가 나왔고 수사는 활로를 띄는 듯했다.
이후 경찰은 동네 근방에 거주하던 범인으로 의심될 만한 용의자들을 추려 탐문수사를 벌여 나갔지만 대부분 알리바이가 있고 뚜렷한 혐의점이 없었기 때문에 지지부진한 수사로 인해 결국 첫 범행 이후 몇 건(미수 포함)의 범행이 더 일어났다.
3. 2차:살해된 남매[편집]
같은 해 12월 19일 저녁 정 양이 피살된 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고창군 무장면 만화 마을 비포장 도로에서 함께 귀가하던 18세 여고생과 13세 남중생 박 모 남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매의 실종 전 행적은 이렇다. 3시 40분경 수업을 마친 박 양은 인근 중학교에 다니던 남동생을 만나 함께 귀가를 하던 중 친구의 집에 들러 시간을 보냈다. 남매는 5시경 친구의 집을 나섰고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수색 끝에 다음날인 12월 20일 오전 8시 20분경 떨어진 정수장 인근 풀밭에서 박 군(13)의 시신이 발견됐다. 박 군은 양손이 운동화 끈으로 결박되고 목도리로 눈이 가려진 상태로 논두렁에 엎어져 있었는데 옷은 다 입은 상태였으며 박군의 시신에서 불과 5m 떨어진 곳에서 여성의 브래지어와 팬티가 발견됐다.
정황상 박 모 양(18)의 것이 분명했다. 현장 주변을 면밀히 살펴보던 수사팀은 바닥에 새겨진 두 쌍의 족적을 확보했다. 크고 작은 발자국이 나란히 이어진 모습으로 보아 범인이 피해자를 끌고 간 것이 아니라 흉기 같은 것으로 위협해서 으슥한 곳으로 데려간 것으로 추정됐다.
이날 오전 9시 30분경 발자국을 따라 야산을 수색하던 수사팀은 한 장소에서 일제히 얼굴이 굳어졌다. 박군이 살해된 곳에서 500m 떨어진 야산의 외진 무덤가였다. 박 양은 소나무 밑동에 사지가 묶여 있었고 상의는 단추가 풀어진 채 헤쳐져 있었으며 체크무늬 치마는 뒤집힌 채 가슴 윗부분까지 올려져 얼굴을 덮고 있었고 브래지어가 노출되었다.
두 손과 양 발목은 노끈과 스타킹으로 결박돼 제각기 소나무 밑동에 묶여 있었는데 입에는 장갑이 물려 있었다. 목과 다리, 가슴, 복부, 음부 등 여러 곳에 칼로 찔리거나 벤 상처가 있는 등 처참한 모습과 함께 강간의 흔적이 역력했으며 오른쪽 허벅지는 가로 15cm, 세로 20cm 정도를 도려내 사라지고 없었다.
수사 결과 현장에 남겨진 족적은 첫 번째 사건과 일치했으며 탐문 도중 결정적인 목격자들이 나타났다. 첫번째 목격자는 (앞에서 언급하다시피 정황상으로 범인의 인상을 제공한) 당시 18세 여고생이었던 이모양으로, 그녀는 1차 사건이 터진 뒤 며칠 후 뒤에서 누군가 계속 따라오자 이상한 낌새를 느껴 도망쳤다고 한다. 그 밖에도 당시 19세 여고생이었던 김모양(사건 하루 전)은 앞선 이 양과 비슷하게 누군가 계속 따라오자 불안한 마음에 길을 뛰어 도망쳤고 마침 밭일을 하고 돌아가던 할머니들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는 사이 범인이 사라져 구사일생으로 범행에서 벗어났다고 하며 강모양(당시 17세,여고생)도 사건 30분 전인 4시 30분 쯤 집으로 귀가하기 위해 비포장길로 들어섰다가 범인에게 200m 가량을 쫓겼다고 한다.[1] 결국 (정황상 이양을 제외한) 이 목격자들이 진술한 범인의 인상착의는 정 양 살인사건의 용의자와 거의 일치했고 이들은 정말 간발의 차이로 살아난 셈이다.
4. 용의자 검거[편집]
12월 20일 경찰과 현장 감식반은 범인이 동일 인물이라고 확신하고 도주 시 남긴 족적의 방향에 있는 집들을 모두 방문하여 차례로 탐문수사를 펼치면서 몽타주와 비슷한 인물과 족적에 맞는 운동화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야산 반대편 집에서 범행 장소의 족적과 동일한 발자국이 찍힌 마당이 있는 집을 찾았다.
집안에는 노부부만 있었다. 이윽고 노부부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경찰은 아들의 행방을 묻자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는 말을 들었고 그 사이 경찰들은 집 내부와 주변을 뒤지며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노부부의 아들 방 장롱 위에서 범행시에 사용한 노끈과 피 묻은 낚시용 칼과 칼집, 그리고 혈흔이 묻은 옷가지를 보자 범인임이 확실시되었다.
노부부의 아들은 김해선(31)이었다. 김해선을 유력한 용의자로 확신한 수사팀은 집안에 잠복하였고 오후에 귀가한 그를 검거하였다. 수사팀은 살인 사건 현장에서 채취한 음모와 모발을 분석한 결과 털의 주인의 혈액형이 AB형으로, 이는 김해선의 혈액형과 일치했으며 그의 인상착의가 사건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과 일치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박양의 살덩이는 김해선의 집 앞 도랑에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긴 채 버려져 있었다. 자포자기한 듯 김해선은 경찰에 살해 경위를 털어놓기 전 "자백을 할 테니 언론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말고 현장 검증을 할 때 자신에게 수갑을 채우지 말 것"과 "가족들에게는 범행 사실을 알리지 말고, 소주를 좀 달라"고 요청하였다.
실제로 경찰이 제공한 소주를 먹은 그는 생각을 바꾸어 일체의 범행 사실을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취조가 이루어지던 가운데 드러누워 자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그가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5. 사건의 전말[편집]
5.1. 1차 사건[편집]
외지를 떠돌다가 3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김해선은 딱히 하는 일 없이 매일을 살고 있었다. 10월 25일 아침부터 복분자주를 마신 그는 만취한 상태로 야산을 쏘다니다가 해질 무렵에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후 6시 고창군 해리면 평지리 청룡산 부근 도로에서 김해선은 앞에서 홀로 걸어오던 정 양을 발견하였는데 순간적으로 그는 몹쓸 마음을 먹고 정 양에게 다가가자 정 양은 소리를 질렀고 이를 제압해 끌고 올라간 그는 얼른 정 양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졸랐으며 실신한 정 양의 옷을 벗겨내고 정 양의 가방에서 꺼낸 커터칼로 옷가지들을 잘라 정양의 신체를 결박했다.
김 씨는 실신한 정 양을 성추행하다가 비명을 막기 위해 재갈까지 물렸지만 정양의 호흡이 끊어지자 정양을 다시 30m 가량 떨어진 무덤 위에 올려 놓았다. 인공호흡을 해도 정양의 의식이 되살아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 쪽에서 누군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아이를 무덤에 반듯하게 뉘인 뒤 옷가지를 가방에 가지런히 넣어 놓고 산을 내려왔다.[2]
5.2. 2차 사건[편집]
김해선은 12월 19일 오후 1시 죄책감과 구차한 인생에 대한 비관 등으로 우울해진 기분을 달래기 위해 복분자주를 6컵이나 마시고 만취 상태에서 칼과 노끈, 장갑이 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는데 경찰 조사에서 자살하기 위해 들고 다녔다고 말했으나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변명이었다.
무장면 면소재지에 있는 중, 고등학교의 하교 시간에 맞춰 국도변에 숨어 범행 대상을 물색하던 김해선은 오후 4시 30분 강 모(17) 양이 만화리로 통하는 비포장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200m 가량 뒤따라가다가 이 여학생이 이상한 낌새를 채고 뛰기 시작하자 쫓아가려고 했으나 마침 오토바이 한 대가 오면서 놓치고 말았다.
아쉬운 기분이 든 김해선은 날이 어둑어둑해질 동안 다른 범행 대상을 찾아 인근의 정수장 부근을 배회하다가 박 양 남매와 마주쳤는데 이들을 도로 옆 2m 아래 논바닥으로 밀쳐 넘어뜨린 후 비명을 지르며 반항하는 동생을 먼저 목 졸라 실신시킨 뒤 운동화를 벗겨내 끈을 풀어 양손을 묶었고 노끈으로 재차 목을 졸라 살해했다. 그 사이 여학생은 겁에 질렸는지 엎드린 채로 벌벌 떨며 가만히 있었다.
동생을 살해한 김해선은 몸을 돌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박양을 바라보곤 칼을 꺼내 들이대며 조용히 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고 양손을 노끈으로 결박했다. 이후 속옷들을 칼로 잘라내고 강간을 하려고 했으나 여학생이 자꾸 반항하고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들킬지 모른단 불안감에 칼로 위협해서 울며 애원하는 여학생을 끌고 이동전화 기지국이 있는 야산까지 데려갔다.
무덤가 소나무 숲으로 가 박양을 바닥에 뉘고 결박된 두 손을 소나무 밑동에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준비해 간 노끈이 부족하자 한쪽 스타킹을 벗겨내 노끈과 함께 두 다리를 나무에 묶는 데 사용했다.
스웨터를 잘라내 여학생의 등 뒤에 깔고 상의 단추를 모두 끌러 치마를 들쳐 올리고 강간했지만 욕구가 해소되지 않자 칼로 여학생의 몸 곳곳을 찌르고 베며 고문하다가 마지막에 심장을 찔러 살해했다.
30분 동안 시신 옆에서 본인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담배를 태우다 칼로 피해자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 봉투에 담아 두고 가방에 담아 8시쯤에 하산했다. 그는 허벅지 살점 일부를 먹기도 했다고 답했지만 왜 그렇게 가학적으로 나왔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박 양은 사건으로부터 수년 전 아버지를 여의고 취로사업에 나가던 어머니를 대신해 궂은 집안일을 도맡아 해 오던 소문난 효녀로 전해져 주변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6. 반성 없는 흉악범[편집]
1차 범행 후 산에서 내려온 김해선은 시장통 성인 오락실에 들어가 동전을 바꾼 후 빠찡코와 유사한 오락(일명 과일 게임)을 20분 정도 했으며 집에 돌아와 복분자주를 마시던 중 TV 뉴스를 보며 자신이 살해한 아이가 누구였고 수사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지 등등 세세한 정보를 얻었다.
가끔씩은 죄책감이 들어 자살해 버릴까 싶기도 했는데 술을 마시면 모든 걸 잊어버렸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범행할 때 "당황해서 다 못 채웠던 욕망을 상상 속에서 대신 채우기도 했다"는 파렴치한 발언을 했던 것을 보면 정말 반성을 했을까 의문이다.
범행 후 집에 들어가서 본 것은 드라마 '사랑은 아무나 하나'와 토크쇼 '서세원쇼'였으며 그 내용까지 뚜렷이 기억한다고 진술해 그 태연함을 보여주었다. 표창원의 저서 '한국의 연쇄살인'에 따르면 그는 혈액형 확인을 위해 혈액 채취 동의 여부를 묻는 경찰의 질문에 "주사기는 싫으니 머리카락을 뽑아가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애가 심했다.
더불어 그가 박 양을 잔혹하게 살해한 이유를 밝혔는데 박 양이 처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둥, 예전 여자가 떠올랐다는 둥 허랑방탕한 이야기를 횡설수설 늘어놓았으나 이는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다.
7. 기타[편집]
김해선은 2001년 12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현재까지도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라고 한다.
수 차례에 걸쳐 어린 생명을 잔혹하게 유린하였던 흉악범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몸에 주삿바늘을 꽂는 일조차 매우 두려워했던 그는 이후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대한민국은 실질적으로는 사형이 폐지된 나라이기 때문에 김해선은 실질적으로 가석방되지 못하는 무기금고수로서 현재까지 수감되어 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5년이 흐른 후 현장기록 형사 에피소드 22화에서 김해선의 편지가 나왔는데 범행을 후회한다고 전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끔찍한 사건의 원인을 여전히 다른 곳에서 찾고 있었다.[3]
사건 당시 범인의 인상을 제공 여고생은 사건 이후에도 그 후유증으로 인해 밖에 잘 나가지 못하며 한 피해자 유족은 사건으로부터 한 달 뒤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으며 영혼결혼식을 치렀다고 한다. 표창원[4] 은 초동대응만 빨랐다면 남매가 시신으로 발견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MBC의 현장기록 형사 22회[5] 와 tvN의 범죄의 재구성에서 다루었다. 또 그것이 알고싶다의 관덕정 살인사건을 다룬 회차에서 고창 연쇄 살인사건을 잠시 언급하였다.
2022년에 방영된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구성환이 연기한 범죄자 황대선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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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 양은 범인이 따라온다는 것을 눈치채고 뛰기 시작했고 마침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 간신히 귀가했다고 한다.[2] 유년 시절 그는 부친에게 학대를 받은 후 옷을 벗긴 채 쫓겨나곤 했는데 그 모습이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되었고 그로 인해 반팔, 반바지를 입지 않는 등 노출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범행 당시 자신의 범행을 끝마치지는 못한 상황에 정 양이 숨을 거두자 그로 인한 분노로 인하여 자신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인 '노출'을 이용해 정 양을 전시하여 자신만의 처벌을 내린 것이다. 범인의 트라우마가 범죄 행각에 표출된 특이한 범죄 유형이다.[3] 인생은 메피스토펠레스의 미소가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그 말뜻이 무엇인지 몰라 물어보았더니 인생은 유혹의 악마, 유혹의 악마의 미소가 아닌가라는 뜻이라고...[4] 참고로 김해선은 표창원의 저서 한국의 연쇄살인에서 자신의 얼굴을 공개했다며 고소까지 했다.[5] 여담으로 이 방송분에서는 배우 박서준이 데뷔 전 단역으로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