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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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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제 안에 악마가 있어요. 그 악마가 한 짓이에요.
-체포 후 "왜 그런 짓을 저질렀냐"는 기자의 질문에 정두영이 답한 말.
정두영은 1986년에 1명, 1999년 6월부터 2000년 4월까지 10개월 간 9명, 총 10명을 살해한 강도살인범 및 연쇄살인범이다.[1]
유영철은 정두영을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했다.[2] 그가 범행에 둔기를 사용한 걸 보고 유영철도 둔기를 사용했다.[3] 그리고 유례없는 잔혹성에서도 유영철의 선배격인 살인마다. 희생자들을 공격하는 방식이 너무 잔혹해 경찰이 초기에 원한살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것이 알고싶다 362회 (2001.5.12 방송)에서 정두영을 다룬 바 있다.
2019년 10월 27일 그것이 알고싶다 1188회에서 정두영의 가장 최근 얼굴이 공개되었다.
2. 과거[편집]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사진
정두영은 정부 직할 부산시(현 부산광역시)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그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암으로 투병하고 있었고 정두영이 2세가 되던 해 끝내 사망했다. 남편의 죽음으로 생계가 곤란해진 정두영의 어머니는 아기에게 충분한 관심을 주거나 영양을 공급해주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는 아이들을 삼촌 집에 맡기고 재혼했다. 하지만 정두영이 5살 되던 해 삼촌마저 요란스런 조카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 보렸다.
그리고 정두영이 7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고아원으로 찾아와 정두영을 새아버지 집으로 데려갔다. 그대로 양친과 성장했으면 좋았겠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경제적 부담과 이부형제들과의 갈등이 커져서 정두영은 도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고아원 안 남자 아이들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정글 같아서 세면 때리고 약하면 맞는 게 보통이었다. 선천적으로 작은 체구 때문에 놀림과 괴롭힘을 많이 당하던 정두영은 결국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살아남는 방법은 오로지 ‘폭력’ 뿐이라는 것을 체득하고 말았다. 무학인 정두영은 고아원에서 나온 뒤 범죄를 생계수단으로 삼아 살기 시작했다.
사실 나중에 보살펴줄 사람인 그의 형 정부영이 나타나긴 했다. 하지만 직업은 금은방 간판을 내건 장물아비였다. 그래서 자신이 돈이 될만한 걸 훔쳐오면 그 형이 팔아치우기로 했다고 한다. 즉 계속 범죄의 길을 걷게 된 것.
이 때 그는 그 형에 의해 한 여성을 소개받게 되었고 2000년 2월부터 동거에 들어갔다. 그가 살인마의 흉악성을 어찌나 철저하게 숨겼는지 동거녀 및 그녀의 부모는 정두영을 "술, 담배도 안 하고 말수가 적으며 점잖고 매너 있어 성실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게다가 정두영 본인도 얼마나 그 여성을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체포 이후 해당 여성이 공범이 아니었나 조사에 들어간다고 하자 극구 부인하고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고 한다.
그가 이 정도로 그 여성과 가정을 차리는 것에 집착한 건 어린 시절 2번이나 어머니에게서 버림받는 등 불우한 가정 환경을 겪어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한 강박적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걸 위해 절도로 얻은 돈을 차곡차곡 모아놔 검거 당시 통장에 1억 3천만원이 있었다. 최종 목표는 10억을 버는 것이었으며 그러고 나면 결혼한 뒤 이 돈으로 PC방 같은 것도[4] 차리고 아파트를 마련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평범하고 소박한 꿈을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이루려고 한 케이스.
하지만 설령 그런 돈을 모았다고 해도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미 10대 때부터 자기를 불심검문하는 방범대원을 칼로 찔러 죽였고 강도질하는 데 방해가 되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무참히 죽인 것만 봐도 타인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존중 따윈 없었음을 알 수 있다.
3. 범행 과정과 체포[편집]
당시 현장 검증 보도 영상 MBC
당시 현장 검증 보도 영상 KBS
18살이었던 1986년 5월 부산의 한 초등학교에 돈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마주친 교사를 흉기로 찌르고 달아났다. 그로부터 1달 뒤에는 자기를 검문하던 방범대원 김모 씨(43세)을 골목길로 유인해 가슴을 칼로 찔러 살해해 11년을 복역하고[5] 수감생활 동안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하기도 했으며 1998년 6월에 출소했지만 출소 직후 절도로 짧게 6개월 동안 다시 복역한 뒤 1999년 3월 2번째 출소 후 본격적으로 강도 살인을 시작했다. 당시 이미 전과 8범이었다. 주 영역이 부울경이었기에 그가 저지른 연쇄살인을 부산경남 연쇄살인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출소한 뒤에도 불과 2개월 만에 가정집을 털다가 잡혔다. 그러나 이번엔 불구속 처리돼 풀려나자 1개월만인 1999년 6월 2일 부산광역시 부민동의 부산고검장 관사 옆 저택에 침입해 20여만원을 훔쳐 달아나려다가 마주친 50대 여성 이모씨를 욕실로 끌고 들어가 망치로 머리를 수회 내리쳐 살해했다. 이씨는 해당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였다.[6] 이 때부터 10개월간 정두영이 저지른 범죄행각은 ‘불우한 환경과 사회적 소외감이 범죄를 불러왔다’는 식의 해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잔혹성을 보여주었다.
정두영은 불심검문에 대비해 빈손으로 다니다가 낮 시간에 부유층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쳤다. 그러다가 집에 사람이 있으면 그게 부녀자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고 죽여 버렸다. 위에서도 설명하듯 집 안에 둔기로 쓸만한 게 있으면 그걸 흉기로 사용했고, 없으면 맨손이랑 발로 죽을 때까지 구타하는 등 살해 수법도 잔혹했다. “왜 그렇게 잔혹하게 죽였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정두영은 “다급해서 그랬는데 어쩌면 내 안에 악마가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은 피해자를 둔기로 죽인 뒤 돈을 훔친 강도살인 같고 어떤 사건은 돈 될 만한 걸 약간 훔쳐 강도살인으로 위장하고 피해자를 잔인하게 죽인 원한살인 같기도 해서 경찰도 처음에는 몇 건의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돈이었기 때문에 금고를 열기 위해 시신 옆에서 무려 2시간 동안 아령으로 이웃집에 다 들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나게 두들기는 대담성도 보였다(4차 사건). 또 사건 현장에 크기가 다른 2개의 발자국을 남겨놓는 교활함도 보였다.
1999년 9월 15일에는 부산 서구 동대신동의 6층짜리 빌라의 지붕을 통해 집안에 침입하였다. 정두영은 먼저 들어간 집에서 900만원을 훔친 후 베란다를 통해 옆집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방안에서 나오던 가정부인 50대 여성 조모씨를 발견해 둔기로 내리쳐 살해하였다.
또 1999년 10월 2일에는 울산 남구 옥동의 한 2층 단독주택에 집 옆 놀이터의 담장을 통해 침입하여 집에 있던 50대 어머니 정씨와 20대 아들 안씨를 각각 안방과 작은 방에 가둔 후 둔기로 수차례 가격하여 살해하였다. 정씨는 현장에서 사망했으나 아들 안씨는 범행 직후까지는 살아 있었고 피범벅이 된 채 현관에 쓰러져 있는 안씨를 이웃 여성이 목격하고 신고해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안씨 역시 숨졌다. 안타까운 것은 20대 아들 안씨가 키는 180cm에 몸무게는 100kg 넘는 거구여서 정두영을 쫓아냈지만 이미 집을 침입할 때 현관 앞에 비치가 된 망치, 드라이버 등 공구함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정두영이 현관으로 도망가 망치를 들고 아들 안씨에게 비열한 반격을 가하여 쓰러뜨린 것이었다. 만약 그곳에 공구가방이 없었으면 정두영은 그대로 도망갔을 것이고 어머니 정씨와 아들 안씨가 생존했을 수 있었다.
2000년 3월 11일에는 부산 서구 서대신동 가정집[7] 에 침입하여 30대 여성 1명과 43세 여성 1명을 야구방망이로 때려 살해하였고 운동을 마친 후 나중에 집에 온 또 1명의 여성을 중상이 되도록 때리다가 "아기가 있다, 살려달라"고 호소하자 "아기 잘 키워, 신고하면 죽인다"는 말과 함께 이불을 덮어씌운 후 살려줬다.[8] 서대신동 가정집에서 금고를 깨고 6700만원의 금품을 강취하고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정두영은 금고를 깨기 위해 아령으로 3시간 가까이 금고를 내리쳤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이웃 할머니[9] 는 근처에서 공사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생존자를 살려준 이유에 대해서는 위에서도 설명하듯 그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것으로 인해 평범한 가정을 이루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엄마 없이 살 것이 불쌍해서 그랬다고 한다. 다행히 그녀는 부상이 심했지만 살 수 있었고 이 생존자의 증언 덕분에 정두영의 몽타주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2000년 4월 8일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서 일으킨 사건('철강회사 회장 부부 살인사건')은 피해자가 모 철강회사의 회장인 재력가라는 점과 피해자의 시신을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한 잔혹성으로 세간을 떠들석하게 했다.[10] 이 당시 그는 집에 있던 회장과 조선족 가정부 손모씨, 그리고 회장의 친척 할머니를 잔인하게 구타했는데 2명은 사망했지만 75세였던 할머니가 기절한 것을 정두영이 사망한 것으로 착각하고 현장에 두고 떠나 병원으로 옮겨져 겨우 살아났다. 그녀는 이후 천안에서 체포된 정두영을 보고 범인이라고 확신했으며 정두영이 자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참고로 당시 경찰은 해당 지역에 살던 전과자를 조사하면서 그 중 한 명인 정두영에게 전화를 걸어 알리바이 등을 물었으나 그가 당당한 목소리로 겨우 맘 잡고 사는데 이러지 마십쇼.라고 하자 더 할 말이 없어 끊었다고 한다.
2000년 4월 12일 그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원천동에 위치한 사업가 박모 씨(55세)의 자택에서 인질극을 벌이다가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 집에 들어온 그는 집을 뒤져봐도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영 나오지 않자 집에 온 여성을 협박해 남편에게 돈을 뽑아 오도록 전화하게 했는데 아내가 평소와는 다른 말투를 쓰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남편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 1명이 대신 돈을 들고 왔다. 그리고 형사들은 그가 나오자 가스총을 쐈다. 당연히 집 주위도 포위하고 있었지만 그가 쓰러지지 않고 담을 넘어 옆집으로 도망치는 예상 밖의 상황에 추격전이 펼쳐졌고 다행히 가까스로 체포했다고 한다.[11]
이때까지 충남천안경찰서는 해당 인질극의 범인으로 수사 중이었으나 그 날 밤 KBS 공개수배 사건 25시에서 1달 전의 부산 서대신동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범인의 신원을 알 수 없어서 몽타주로 공개수배되었지만 인상착의가 정두영과 매우 흡사했던 탓에 수사하던 형사들이 눈치채기 시작했고 서대신동 사건을 수사하던 부산서부경찰서에게 정두영의 인상착의를 보냈다.
인상착의를 확인한 부산서부경찰서 형사들은 서대신동 생존자와 같이 천안경찰서로 동행하여 정두영이 범인이라는것을 확인하였다. 정두영 본인 또한 TV를 똑바로 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결국 자신이 해당 사건의 범인임을 자백하였다.[12]
이후 부산서부경찰서의 주도하에 정두영의 기타 여죄까지 파악하였다.
현장검증 당시의 정두영
4. 체포 이후[편집]
2001년 1, 2심에서 강도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상고를 포기하면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1997년 이후 더 이상의 사형 집행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미집행 사형수로 복역 중이며 부산구치소에서 복역하다가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다.[13] 그리고 장물 처리를 해 준 공범인 전당포 주인 김종준과 금은방 주인 형 정부영도 검거되어 둘 다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고 이듬해 만기 출소하였다.[14]
SBS 그것이 알고싶다와 MBC 히스토리 후에서 방영되기도 하였다. 희한하게도 사건 당시와 검거, 판결 시에도 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주목받지 못했다가 후일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을 계기로 다시 주목받았다.[15]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2001년에 방영한 정두영 편 외에도 18년 후인 2019년 10월에 방영된 "악의 정원에서" 편에서 연쇄살인범 4명 중 정두영이 언급되었는데 이때 표창원 의원이 정두영을 전형적인 한국형 연쇄살인범이라고 규정했다. 단순한 살인 자체에서 쾌락을 느끼는 쾌락형 범죄자가 아닌 정두영은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에서 시작되어 살인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과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이렇게 규정하였다. 즉 한국인이라면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출산하여 부모와 주변인들에게 떳떳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회적 심리가 내면에 존재하는 편인데[16] 정두영은 이런 심리가 너무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기본적인 사회적 통념까지도 짓밟으면서까지 잔혹한 범죄행각을 이어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규정한 것이다.[17] 실제로 강도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집안의 여아와 엄마를 살려주기도 했는데 여아가 앞으로 엄마를 잃고 나면 고아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를 자신이 여태껏 고아로 암울하게 살아 왔던 것과 동일시하는 심리적 자극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정두영이 그 정도로 남들처럼 행복하게 사는 가정의 울타리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지 절대로 정두영의 인성이 좋아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표창원 의원이 경찰대학 교수 재직 당시 진행했던 케이블 TV 재연 프로그램 <범죄인간>[18] 과 tvN의 재연 드라마 범죄의 재구성에서도 다루어졌다.[19]
5. 탈옥 시도[편집]
거의 잊힌 사람처럼 보였던 정두영이 십수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화제가 되었으니…
2016년 8월 6일 대전교도소에서 탈옥을 시도하다 성공할 뻔했지만 다시 붙잡혔다. 기사 8월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보도는 9월에 이루어졌다. 판결문 결국 정두영은 도주미수죄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대전교도소에는 담이 3중으로 설치되어 있다. 정두영은 이 3개의 담중 2개를 넘는 데 성공했고 마지막 담을 넘으려던 순간 사다리가 부러져 교도관들에게 잡혔다. 탈옥 수법이 놀라운데 출역[20] 갈 때마다 납품용 전선을 만드는 출역을 했는데 그때마다 파이프와 전선을 조금씩 모아서 그걸 이어붙여서 만든 사다리를 타고 탈옥을 시도했다.
이후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어 복역 중이다.#
6. 관련 영상[편집]
김복준 김윤희 배상훈의 사건의뢰 대한민국 살인사건 제1화 정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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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대두 혹은 정두영을 대한민국 최초 연쇄살인범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은 그 목적이 살인 자체가 아니라 절도/강도였고 살인은 단지 목격자를 없애기 위해 벌인 것이었다. 즉 연쇄살인범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강도살인을 저지른 강도살인범이고 처음부터 순수하게 살인을 목표로 범죄를 저지르다가 검거된 쾌락성 연쇄살인범은 유영철이다. 다만 어쨌든 범죄유형이 연쇄살인인 건 맞다. 사실 가장 유명해서 그렇지 유영철이 최초의 (쾌락성) 연쇄살인범인 건 아니다. 이관규, 지춘길, 이춘재 같은 이들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2] 하지만 상술되어 있듯이 정두영의 본래 목적은 강도였고 유영철은 살인 자체가 목적이었다.[3] 다만 정두영은 미리 둔기를 준비한 게 아니라 불심검문에 대비해 맨손으로 다니다가 침입한 집에 있던 둔기로 쓸만한 물건을 아무거나 집어서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맨손의 살인마'.[4] 혹은 성인오락실이었다고도 한다.[5] 즉 정두영은 살면서 총 10번의 살인을 벌인 것이다.[6] 먼저 침입한 건 그 고검장의 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사를 간 다음날이어서 집 안에 물건을 거의 다 빼서 비워 놓았기 때문에 훔칠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 옆집으로 간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이 우연이 없었더라면 검사, 그것도 고검장의 집에 도둑/강도가 든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7] 사건 이후 철거되어 임대건물이 들어섰다.[8] 당시 그 집에는 갓난아기가 있었고 먼저 죽은 2명의 여성은 아이 어머니의 언니와 가정부, 살려준 여성은 그 아이의 어머니였다.[9] 그것이 알고싶다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증언하였다.[10] 특히 정 회장은 정말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형사들이 해당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치를 떨 정도.[11] 여담으로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가 체포당한 이 집은 과거에도 그가 붙잡혔던 그 집이었다. 당시엔 집에 있던 가정부가 그와 마주치자 놀라서 안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버텨서 그냥 도망쳤다고 한다.[12] 당시 수사를 맡았던 형사의 말에 의하면 TV에서 범행 장면이 나올 때마다 정두영이 연신 고개를 푹 숙였다고. 그리고 이후 온천동 생존자도 그가 범인이 맞다고 증언했다.[13] 보육원에서 도망쳐 나와 소년원과 교도소에서 복역해 왔던 그의 인생을 보면 그가 사회에서 살았던 인생보다 교도소에서 살고 있는 인생이 압도적으로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형수이므로 앞으로 나갈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며 그의 나이가 55세인데 만약 한국인의 평균수명까지 산다고 보면 사회에서 살았던 인생보다 앞으로 계속 교도소에서 살게 될 인생이 대략 4배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14] 이 2명은 "장물 처리는 하였지만, 단순히 도둑질만 하고 다닌 줄 알았지 강도살인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15] 물론 정두영은 비정한 살인마였지만 아기 엄마를 살려주는 등 최소한의 인간성이 있다고 볼 소지가 있었고, 본 목적은 엄연히 강도, 더 정확히는 절도였다. 그런 점에서 살인 행위 자체가 목적이었고 양심 자체가 없었던 유영철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프로파일러들은 아이 엄마를 살려준 것이 인간성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부모 없이 큰 성장 과정 혹은 그런 성장 과정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됐다는 생각. 더 자세한 분석은 최상단의 '사건의뢰' 영상 참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유영철도 어린이를 죽이지 않은 사례는 있었다. 결국 둘 다 냉혹한 살인마일 뿐이다.[16] 정두영이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던 1999년~2000년만 해도 이러한 사회적 인식이 훨씬 강했다. 물론 2020년대 기준으로 한국에서는 세대가 지날수록 가치관의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결혼, 출산을 못 하는 것을 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17] 반대로 정남규, 유영철, 강호순은 오직 살인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범행을 실행했기 때문에 정두영과는 다른 시각으로 봤다.[18] Q채널(지금의 JTBC2)에서 방영했던 <살인자는 말한다>의 시즌 2격인 범죄 재연 프로그램. 전작인 <살인자는 말한다>도 표창원이 진행했다.[19] <범죄인간>에서는 본명 대신 박상두라는 가명으로 처리되었다.[20]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이 이런저런 일을 하는 것. 원래 사형수는 출역을 못 했는데 법무부가 2000년대 후반에 30명의 사형수들의 신청을 받아 교도소로 이감해 작업을 포함한 교정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대전교도소(12명), 대구교도소(11명), 광주교도소(7명)의 사형수들이 옷감을 만드는 복지작업이나 수건 생산과 형광등 안정기 제조 등의 작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