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양궁선수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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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96년 12월 8일 대구광역시 중구청 소속 양궁 선수였던 주진우(사건 당시 22세)가 유부녀였던 유정숙(당시 28세)과 불륜 관계를 가진 후 유 씨의 남편[1] 을(당시 34세) 교살한 사건을 말한다. 2011년 공소시효 15년이 지나버려 영구 미제사건이 될 뻔했는데 2015년에 범인들의 자수로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범인들은 외국으로 도주해 있는 동안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직접 자수해 붙잡혔다.[2]
2. 경과[편집]
당시 대구 중구청 소속 양궁선수 주진우는 달서구에서 선수생활을 하며 합숙소에서 지내다 외로움을 느끼던 중에 집 근처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6살 연상의 주인 유정숙과 알게 되었다. 유 씨는 그 동네에서 미인으로도 유명했고 주진우는 그 슈퍼를 자주 드나들며 처음엔 손님과 주인 사이로 알고 지냈다가 끝내 눈이 맞아 불륜 관계로 악화됐다.
유 씨의 남편 몰래 끈질긴 애정 행각을 벌였던 그들은 결국 꼬리가 밟혔으나 유 씨는 남편보다 열한 살이나 어린 내연남 주진우에 완전히 꽂혀 버렸고 주진우 또한 유 씨와 헤어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연히 매일같이 부부싸움이 벌어졌고 유 씨의 남편은 바람난 아내를 거의 매일같이 구타하며 주진우와 헤어지라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유씨가 남편에게 큰소리치며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이사까지 가는 강수를 두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큰 화를 불렀다.
유 씨가 구타와 학대를 당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주진우는 유 씨의 남편과 만나서 이 일에 대해 담판을 짓기로 하고 포장마차에서 같이 술을 마시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주 씨는 '나는 유 씨랑 서로 사랑하는 관계며, 우리 둘은 이제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됐으니, 당신이 유 씨와 이혼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 유 씨의 남편이 요구를 거부하자 그에 격분한 주 씨는 포장마차 인근 공영 주차장에서 유 씨 남편과 엎치락뒤치락 싸우다가 그만 유 씨의 남편을 목 졸라 살해했다. 그때가 1996년 12월 8일 밤이었다.
이렇게 살인을 저지른 주진우는 트럭에다가 유 씨 남편의 시신을 실은 뒤에 대구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구마고속도로(현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의 배수로에 유씨 남편의 시신을 유기하고 불을 질렀다. 고속도로는 많은 차들이 오가는 곳이었지만 배수로는 잘 들여다보지 않았기에 어느 누구도 그곳에 사람의 시신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그렇게 6개월 동안이나 유 씨 남편의 시신은 그 배수로 안에 불에 탄 채로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범행 다음 날 주진우는 당시 경상남도 창원시 일대의 파출소에서 근무하고 있던 누나에게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실토했지만 누나는 동생이 돈이 필요해서 거짓말을 하는 거구나 싶어서 용돈과 주씨 명의로 된 통장을 건네주었다고 하는데 정작 통장을 건네주고 나서부터 연락이 두절되자 그때부터 동생의 행동에 의심을 품고 경남도경 창원중부경찰서에 동생의 행적에 대해 보고했다. 한편 유씨 남편의 아버지도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가 보이지 않으며 혹시 돈 문제에 얽혀 살해당한 것이 아닌가 해서 가출 신고를 하고 진정서까지 냈다.
셋이 비슷한 시기에 행방이 묘연해졌고 그 이전부터 주진우와 유 씨와의 내연관계로 유 씨와 유 씨 남편 간의 가정불화가 있었으며 사건 당일 포장마차에서 유 씨 남편과 주 씨가 말다툼을 벌이다가 근처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했다는 주변 인물과 목격자들의 증언까지 더해졌기 때문에 사건이 어떤 경위로 일어났는지 어림짐작이 가능한 상태였지만 핵심 물증인 유 씨 남편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고 사건 주모자인 주 씨와 유 씨는 가족과 일절 연락을 끊은 채 잠적하여 행적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수사 진행에 난항을 겪었다. 그러다가 그 다음 해 6월에 비가 오면서 문제의 배수로에 있는 유 씨 남편의 유해가 바깥으로 드러났는데 때마침 배수로 옆에 있는 산을 오르던 등산객이 남편의 변사체를 발견하고 이를 신고하면서 비로소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유 씨 남편의 변사체가 발견됨으로써 사건의 실마리를 찾게 된 경찰은 유전자 감식 결과를 통해 유 씨와 주 씨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확정짓고 그들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어디로 종적을 감췄는지 도무지 잡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현상금을 내걸고 주 씨와 유 씨를 1997년 8월 5일 자 경찰청 사람들[3] 을 통해 공개 수배하고[4] 가족들을 통해 이 둘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이미 연락이 두절된 데다 어디서 사는지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아 그야말로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이 두 사람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살인죄의 공소시효였던 만 15년 동안 아무런 보람이 없었고 그렇게 사건은 2011년 12월 8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영구 미제사건이 되는 듯했다.
3. 체포[편집]
2015년 연말 들어 상황이 급반전되었다. 2015년 11월, 중국 상하이시 공안국에 두 남녀가 자신들이 한국에서 밀항해 중국에 입국했다고 자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두 남녀는 19년째 행방이 묘연했던 이 사건의 주범 주 씨와 공범 유 씨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고 굳게 믿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일부러 상하이 공안국에 자신들이 밀항해 들어왔다고 자수했던 것이다.
밀항해 들어온 자는 무조건 강제추방되는 게 중국의 법이었기에 두 사람은 2016년 1월에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건 다름 아닌 19년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대구광역시경의 경찰들이었으며 그들은 그렇게 살인죄, 사체유기 및 훼손죄, 밀항죄로 체포되었다. 분명히 사건이 일어났던 1996년 당시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만 15년이었는데 이들은 19년 전에 살인을 저질렀으므로 이미 시효는 성립될 수 있었으나 형사소송법 제253조에 따르면 범인이 처벌을 면피할 목적으로 해외로 도피할 경우 공소시효는 정지되므로 공소시효가 만료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면, 근무하는 회사에서 해외출장을 보냈다거나 단기 해외여행을 갔다 오는 등 도피 목적으로 볼 수 없는 경우에는 해외체류 기간에도 공소시효가 정지되지 않는다.
사실, 이 조항은 사실 대한민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흔하지 않은 조항이다. 범인들은 공소시효 완성 직후 중국에서 조선족 변호사를 만나서 상담까지 받았는데 중국에는 형법에 따른 처벌을 면할 목적으로 해외로 도피할 경우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조항이 없다 보니 그 변호사는 이들의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된 상태라고 잘못된 자문을 해 주었고 이들은 쾌재를 부르며 귀국을 서두른 것이다.
차라리 한국 어딘가에서 숨죽여 지냈거나 아예 중국에서 뼈를 묻어 버렸다면 체포가 불가능했겠지만 그들은 살인죄의 공소시효 15년만 어떻게 버티면 처벌을 안 받는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외국으로 도망가면 그 기간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영구 미제가 될 뻔했던 이 사건은 범인들의 착각으로 인해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한편, 범인 주 씨는 체포되었을 당시 너무도 당당하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라 나를 처벌할 수 없다." 라고 경찰들에게 자랑이라도 되는 듯이 떠들었다고 한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가 중국에 체류하고 있었던 기간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되었기에 그의 계산법은 잘못된 계산법이다. 그러자 주 씨와 유 씨는 갑자기 말을 바꾸어 중국에 밀항한 것은 맞는데 1997년에 밀항했던 게 아니라 2014년에 밀항했다고 우기면서 어떻게든 처벌을 안 받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2014년에는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기에 한국에 체류 중이었다면 구태여 밀항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탐문 수사 결과 두 사람은 1997년 1월 이후로 한국에서의 행적이 전혀 없었으며 특히 유 씨의 경우 1997년 이후로 장기 실종 상태가 되어 이미 법적으로는 사망한 상태였음이 밝혀졌다. 또 1997년 이후 이들의 생활반응이 전무함을, 즉 한국에서 금융 거래를 한 흔적이나 각종 세금을 납부한 기록, 전기, 가스, 상수도 등 공과금을 납부한 기록이 전혀 없음을 확인했다. 결국 공소시효 만료는 약 2030년까지로 계산되어 처벌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일반 장기 실종의 경우 사건 당일로부터 만 5년이 경과하면 법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고 자연재해 등의 특수 실종의 경우는 만 1년이 지나면 법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처리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종자가 사망이라고 처리되는 건 오직 민법에 한해서며 형법에서는 그 사람의 시신이 발견되어 사체검안서가 존재하거나 제대로 된 사망진단서가 있어야만 공식적으로 사망이라고 인정한다. 사체검안서와 사망진단서는 같은 서류인데 사망 원인[5] 에 따라 자연사+병사이면 사망진단서, 그 이외 경우면 사체검안서에 의사가 체크표시를 한다. 즉, 시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비록 그가 사망 처리된 상태라고 하더라도 사망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증거들을 제시하자 결국 그 두 남녀는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주 씨가 대구에서 유 씨 남편을 살해한 이후 유 씨와 함께 경주시, 군산시, 인천광역시 등지를 돌며 은신했다고 한다. 이후 1998년 4월에 여권을 위조해 일본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일본에서 4년 동안 파칭코 브로커 일을 하며 나름 큰돈을 모았지만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검문검색이 강화되자 불안감에 2002년 6월에 국적 불명의 화물선을 타고 중국으로 은신처를 옮겼다. 그리하여 10년 정도 중국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흘러 2012년이 되자 이제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고 굳게 믿고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먼저 중국에서 모았던 재산들을 한국에 몰래 반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쓸 위조 여권을 구하는 게 여의치 않아 약 3년 정도 귀국 시기를 지체했다. 그런 그들이 선택한 것은 무모하게도 강제 출국이었다.
그래서 2015년 11월에 상하이 공안국에 자신들이 밀항해서 중국에 들어왔다고 자수해 강제 출국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중국 공안들은 이들을 2개월 동안 구류하며 밀항에 대해 조사를 마친 뒤 2016년 1월 주 씨와 유 씨를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때 빨리 강제출국당하기 위해 단식투쟁까지 벌었다고 한다. 한편 이미 중국 공안에서 온 연락을 통해 밀항자의 신원을 알아보고 재조사한 결과 이들이 19년 전에 대구광역시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고속도로 배수로에 시신을 유기한 사건의 범인이라는 걸 알아차린 한국 경찰들은 그들이 한국에 돌아올 때를 기다려 공항에서 그들을 체포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4. 선고[편집]
범인 주진우와 유정숙 모두 1심과 항소심에서 각각 징역 22년, 2년을 선고받았다. 사법당국은 이들이 범행 뒤 외국으로 도주하면 해당 기간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수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유정숙의 남편 살해는 주진우의 단독 범행으로 드러났기에 유정숙에게는 밀항단속법 위반 관련 형량만을 선고했다.[6]
항소심 재판부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범행 방법이 잔인하고 시신을 유기하기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또 "장기간 도피생활로 고초를 겪어 일부 죗값을 치렀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떳떳하게 법에 따라 처벌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신문 기사
5. 후일담[편집]
참으로 극적으로 해결된 미제사건이라 한때 한국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사건이다. 아직 한국에는 많은 미제사건들이 있는데 그 사건의 범인들이 이들과 같이 해외에 장기간 동안 도피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상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서 영구 미제가 된 사건이라 해도 해결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사건이다. 물론 이것은 범인이 알아서 제 발로 수사망에 들어와 준 실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야말로 작은 것을 탐내다 큰 것을 잃는다는 소탐대실의 진수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에도 대중들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이고 가해자가 장기 실종으로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어 사실상 경찰 수사망에서도 아웃 오브 안중 상태나 다름없었다. 10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용케 일본과 중국에서도 별 탈 없이 생활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중국에서 살거나 한국에서 일본, 중국으로 밀항했듯 다시 역으로 밀항해 왔다면 여생을 조용히 살 수도 있었다.[7] 하지만 위조 여권 등 밀항에는 돈이 들고 귀찮은데 공소시효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고 스스로 추방되어 한국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가 노인이 될 때까지 감방에서 보내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이 만약 대한민국의 법에 공소시효가 없었다면 범인을 못 잡았을 사건이었다. 공소시효가 없었다면 아예 중국에서 눌러살거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철저하게 밀항을 통해서 들어오지 저런 식의 방법을 택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한국에서 도피 생활을 해왔다면 실제 공소시효가 지나 경찰이 범인을 보고도 체포를 할 수 없고 범인 역시 강력범죄를 저질러 놓고 처벌을 받지 않고도 적반하장식으로 떳떳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기에 뒤늦게나마 공소시효를 폐지한 것은 잘했다고도 볼 수 있다. 살인 등 강력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10년 이상을 도망다녔다고 해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떳떳하게 사는 것은 사회적으로 공분을 사기 마련이다.
사실 이 사건의 범인은 굉장히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운 좋게 시체를 눈에 띄지 않게 유기해서 시간을 벌고 일본, 중국으로 밀항하는 등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을 벌이며 유유히 경찰의 수사망을 따돌리며 생활해 왔다. 설사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해도 추방 형식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은 어지간한 범죄자는 생각하지도 못할 대담한 발상은 절대 아니다. 그렇기에 언론에서 보도된 사건이었음에도 완벽하게 경찰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자만하여 편하게 고국으로 돌아가려다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추방 형식으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꽤 위험성이 크기에 공소시효에 대해 인터넷으로만 잠깐 시간 내어 꼼꼼하게 검색해 봤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8]
그리고 6년 뒤 아예 영구미제 사건이었음에도 진범이 방송에 나와 자신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목격자인 척 인터뷰하다가 진범이 확실해졌고 거기다가 공소시효 8개월 남기고 13개월간 해외도피한 사실도 드러나 태완이법을 소급 적용받아 공소시효가 없어져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9]
그리고 이 사건이 발생하기 2년 전 발생한 뉴월드 호텔 앞 살인사건의 주범 역시 공소시효가 남아있던 2003년에 중국 대사관에 밀항했다가 2022년 중국 대사관에 자신의 밀항했다고 자수하는 바람에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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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찰청 사람들 시즌1에서는 가명 김영준으로 처리되었다.[2] 범행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1997년에 도주했으니 체포되었던 2015년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무려 2030년까지 연장되어 있었다.[3] 199회 납량특집. 여기서 사진모델 살인사건(죽음의 미학)과 내연녀 폭행치사 사건(13년의 악몽)을 다뤘는데 공교롭게도 내연녀 폭행치사 사건은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처벌받지 않았다. 이 편 마지막 즈음에 살인(15년) 및 폭행치사(7년) 공소시효가 언급되었다.[4] 단, 방송 분량이 5분 내외로 짧기 때문인지 앞 뒤 상황은 적당히 생략한 채 주 씨와 유 씨가 유 씨 남편을 유인한 다음 같이 대낮에 패 죽이고 밤중에 둘이 같이 시신에 불을 지른 것으로 묘사되었다. 당시 공개수배를 담당한 경찰서가 경남도경 창원중부경찰서(당시 창원경찰서)다.[5] 자연사+병사, 비자연사 또는 발견 당시 무연고자[6] 특별사면, 가석방이 없는 한 주진우는 2038년 1월에 출소할 예정이고 유정숙은 2018년 1월에 출소했을 것이다.[7] 물론 신분이 불법이기에 정상적인 생활은 누리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해외에서 도피하며 살다가 한계를 느껴 귀국해서 자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8] 심지어 이들이 추방 형식으로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때(2015년)에도 나무위키의 '공소시효' 문서(r103 판, 2015년 8월 11일 수정)에는 '해외도피 중인 기간은 공소시효에서 배제한다.'고 1문단에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다.[9] 다만 해당 사건은 대단히 뒷맛이 안 좋게 끝나 버렸는데 상고심-파기환송심에서 사실상 무죄 판결이 나오면서 다시금 미제사건으로 변하다시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