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초등학생 유괴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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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94년 10월 10일 부산광역시(당시 부산직할시) 중구에서 발생한 유괴 및 살인사건.
2. 범행[편집]
공소장에 적시된 사실관계에 따르면, 1994년 10월 9일 피해자의 부모에게 돈을 갈취할 목적으로 피해자를 유인하기로 10월 9일에 공모하였고, 다음날인 10월 10일 북구 덕천1동 치킨집 앞으로 유인하여 프라이드 승용차에 태워 납치하였다.
그리고 공중전화에서 부모에게 협박 전화를 걸어 돈 200만원을 요구하였고, 그 이후 피해자를 살해하게 되었다.
사건 자체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이 사건에서 범인으로 지목된 피의자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경찰의 강압수사 의혹까지 불거지며 사회적 논란이 벌어졌다.
사건은 1994년 10월 학교에 간 초등학생 강 모 양이 돌아오지 않은채 협박전화가 걸려오면서 시작됐다. 경찰은 탐문수사 끝에 범인이 이종사촌 언니 이 모 씨(당시 19세)인 사실을 밝혀내고 사체를 발견했다.[1] 이 씨는 진술 과정에서 남자친구 원 모 씨[2] 를 포함한 3명과 공모했다고 진술, 이들도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고 경찰은 이 4명을 범인으로 구속하면서 이 사건을 신세대들이 지존파를 모방해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검찰은 이 씨를 비롯한 네 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미성년자유인)[3] , 업무방해, 사체은닉 혐의로 기소했다. 심지어 친구들과 공모해 영문타자 답안지를 대신 써서 다니던 전문대학에 제출했다는 혐의도 찾아내어 업무방해로 기소했다.
3. 재판[편집]
3.1. 제1심[편집]
- 부산지방법원 1995.2.24 선고 94고합1306, 95고합9
그러나 위의 3명은 검찰에 넘겨진 뒤에도 줄곧 범행 일체를 부인하며 “경찰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였고 이들의 변호인측은 이들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는 통화기록 및 증인 등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며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및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 변호인과 검찰은 무려 98명의 증인을 내세우며 치열한 공방에 들어갔다. 심지어 부장판사가 직접 참석해 현장검증을 다시 하기도 했다. 이때 이씨는 강양을 살해한 현장을 지목하지 못했는데, 보다 못한 관계자가 "이 장소가 살해장소인지 아닌지 그것도 모른다는 얘기죠?"라고 묻자 "네, 현재는요"라는 애매한 답변을 했다.[4]
1995년 2월 24일 진행된 이 사건의 1심 재판은 검찰의 패배로 끝났다. 재판부는 무죄를 주장하는 3명이 제기한 알리바이와 가혹행위 주장을 모두 인정, 이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미성년자였던 이 씨에게는 이례적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검찰이 '주범' 원 모(이씨의 남자친구)에게 사형, 나머지 세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던 형량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그러나 판결 전 재판장이었던 박태범 부장판사는 옷을 벗을 각오로[5] “이번 선고는 재판부 3인의 일치된 견해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라고 발표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3명의 판사 중 1명[6] 은 피고인 전원이 유죄라는 의견을 일관되게 밝혔고, 결국 표결을 해 2대 1로 결정했다는 설명이었다. 이 사건 자체가 얼마나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는지를 판결에서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사건 재판은 갖가지 진기록을 남겼다. 13차 공판도중 98명의 증인이 소환됐고[7] 수사 및 공판기록도 4천여쪽이 넘는다. 재판부 직권으로 현장검증도 재실시됐다. 검찰 구형이후 변론재개 신청이 받아들여져 한 사건에서 구형과 피고인 최후진술이 2차례 반복되기도 했다. 재판부는 미국의 O.J.심슨 재판처럼 이례적으로 TV카메라와 사진기자들에게 선고 공판정을 공개해 40여명이 카메라를 들고 취재경쟁을 벌였고, 선고공판이 열린 부산지방법원 법정에는 5백 여명의 방청객과 취재진이 몰려 좌석 240개를 꽉 채우고도 법정주변을 발디딜 틈 없이 가득 메웠다.
3.2. 항소심[편집]
- 부산고등법원 1995. 8.3. 선고 95노353 판결
3.3. 상고심[편집]
- 대법원 1995. 12. 8. 선고 95도2043 판결
그리고 무죄를 받은 3명은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보상 받을 수 없었다.
4. 의혹[편집]
가장 큰 의혹은 이 모 씨에게 있다. 이 모 씨는 실화극장 죄와 벌의 제작진과 가진 면회 인터뷰에서 내가 입을 열면 사람들이 다친다라고 말한바도 있으며 여러 사건의 정황으로 미루어볼때 이 모 씨의 단독범행일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어떤 추측으로는 이 모 씨는 종범이고 실제 주범이 따로 있지만 이 모 씨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다른 사람들을 범인으로 몰고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前 프로파일러 배상훈 교수는 본인의 팟캐스트 '크라임'에서 본 사건이 어쩌면 유괴범죄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씨 외에 나머지 셋은 알리바이가 인정돼 무죄로 판명났고, 이씨 또한 검찰의 공소내용으로 본다면 유괴범죄에서 딱히 큰 역할을 한 게 없기 때문. 그런데 이씨는 본인의 죄를 인정했고 시신 또한 이씨 집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강양의 죽음에 관련된 건 분명하나, 이를 유괴범죄로 둔갑시키고 거기에 경찰이 판을 키운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며 이 사건은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는 미제사건이라 정의하기도 했다.
5. 여담[편집]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에서 구성한 진상조사위원회에서는 수사관들의 고문 사실을 밝혀내고 14명의 수사관들을 검찰에 고발했었는데, 이중 조사 과정에서 피고인들을 고문한 것으로 확인된 허모 경장은 구속 되었고, 그 외 손모 경장 등 3명이 불구속 기소 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구속 기소된 허모라는 자는 징역 1년에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고, 불구속 기소된 자들은 징역 8개월에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 때 본 사건의 진상조사위원장으로서 고문 사실을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 바로 당시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이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당시 변호사로 활동하던 문재인은 고문 사실을 밝혀냈을 뿐 아니라, 재판 전반에도 관여하며 피고인들이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여러모로 조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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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 양의 사체는 이 씨의 집 안방 책상 밑에서 보자기로 싸여있다 발견됐다.[2] 수사과정에서 원 모 씨는 언론에 의하여 처음부터 실명이 거론되었고 이 씨와 다른 2명은 성씨만 보도되었다.[3] 당시 법령상 '2. 약취 또는 유인한 미성년자를 살해한 때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라고 특가법 제5조의2 제2항 제2호에 규정되어 있었다.[4] 이에 대해 前 프로파일러 배상훈 교수는 애초에 경찰의 현장검증이 짜맞추기식으로 대충 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현장검증에서는 이씨가 당황했을 거라 추정했다. 막상 현장에 와보니 유동인구가 매우 많아 몰래 아이를 죽일 장소도 아니었고 이씨 본인이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장소인데, 경찰의 개입 없이 본인이 직접 모든 것을 대답해야 하니 저런 애매한 답변 밖에 할 수 없었을 거라고...[5] 합의부 사건에서 합의 내용을 공개해서는 안된다는 내부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6] 주심판사였다.[7] 국내 법의학계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이정빈 서울대 교수와 황적준 고려대 교수가 각각 검찰측 증인과 변호인측 증인으로 출석하였고 특히 검찰측 증인인 이정빈 교수는 그 당시 척추 수술을 받아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 들것에 실린 채 출두하여 불편한 상태로 장시간 증언을 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