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진 유괴 살인 사건
덤프버전 : (♥ 0)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편집]
1984년 10월 27일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에서 홍석진 군(당시 6세)이 유괴된 후 살해된 사건.
2. 경과[편집]
▲홍석진 군.
1984년 10월 27일,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에 사는 당시 6세[1] 홍석진 군은 친구집에 놀러간다며 어머니에게 말을 한 뒤 나섰다가 강서구 신월국민학교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뒤 실종된다.
홍 군의 아버지인 홍기우(당시 42세)씨는 아들을 찾기 위해 오퍼레이터[2] 일도 퇴직하고 전국을 돌며 수만 장의 전단을 돌리고 미아보호소, 유아원을 방문해 비슷한 인상의 아이들을 확인했다. 86년에는 다른 실종아동 부모들과 함께 미아찾기 캠페인에 대대적으로 나서기도 하였다.
2.1. 협박 전화[편집]
그러나 실종 사건으로 처리되었던 이 사건이 한 통의 전화로 인해 한순간에 유괴사건으로 전환된다. 6개월 뒤인 1985년 3월 20일, 홍 군 부모의 집으로 "내가 아이를 데리고 있으니 그동안 양육비에 들어간 돈 32만원을 오늘까지 송금하면 아이를 되돌려 보내겠다"는 전화가 걸려왔고, 가족들은 그 말을 믿고 돈을 보냈으나 3월이 끝나도록 홍 군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장난이라고 판단한 가족들은 은행에 지불정지를 요청했는데, 3일 뒤인 4월 2일 국민은행 신림동 지점에서 한 젋은 여성이 이 돈을 출금하려고 시도한다. 지불정지가 걸려있는 돈을 찾아가려고 시도하자 수상함을 느낀 은행측은 경찰에 신고했고 그 자리에서 김 모양(당시 25세)은 경찰에 검거된다.
그러나 경찰이 유괴 사실을 추궁하자 김 모양이 한 말은 뜻밖이었다. 김 모양은 본인은 아이를 유괴한 사실이 없고, 자신은 술집 종업원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전날(4월 1일) 술집에 찾아온 20대 남성이 돈을 찾아달라고 해 대신 부탁을 들어준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실제로 김 양은 구로구 가리봉동의 한 술집에서 종업원으로 근무하는 게 확인되었으며 동료 종업원들의 증언으로 남자의 존재도 확인했지만, 이미 출금을 의뢰한 남자는 김 양의 검거 소식을 듣고 황급히 자리를 뜬 이후였다.
범인으로 보이는 남자를 검거하지 못한 경찰은 그렇게 홍 군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또 이 사건을 미궁 속에 빠트려야 했다.
2.2. 시신 발견[편집]
▲홍 군의 사체가 발견된 현장.[3]
이후 3년 5개월이 지난 1988년 4월 8일 오후 2시경, 정화조 안에 성별 불명 아동의 백골 사체가 있는것을 정화조를 청소하던 청소업체 직원 송금석(당시 46세)이 발견하고 신고하였다. 시체는 오직 뼈만 남아 사인도 사망 시점도 알 수 없었는데, 경찰은 4년전 이 부근에서 일어났던 홍석진 군 실종 사건을 떠올리고는 홍 군의 부모를 불러 시체를 보여주기로 결정하였다. 시체를 본 어머니 채 씨는 백골 사체의 착의[4] 를 살펴보고 자신의 아이 홍 군이 맞다며 신원을 확인한 뒤 눈물을 쏟았다.
홍 군의 백골 사체가 발견된 정화조는 다방, 음식점, 이발소 등 10여개의 점포가 입점해 있는 상가건물의 밑에 있던 것이었으며, 1983년 5월달 청소를 한 뒤 1988년 기준으로 5년동안 청소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정화조였다. 이를 토대로 추정해보면 시신 유기 시점은 유괴 직후인 1984년 10월부터 발견 시점인 1988년 4월까지로 범위가 너무 넓어 이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줄 단서는 되지 못하였다.
홍 군의 사체와 함께 발견된 것은 홍 군이 착의하던 옷가지 외에도 역시나 홍 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고 깁스[5] 또한 있었는데, 부모와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는 홍 군이 집을 나가기 전에는 착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 범인이 홍 군에게 착용시켰을 것으로 추정했다. 상식적으로 범인이 유괴를 한 후에 애초에 죽일 목적이었다면 굳이 병원까지 데려가 깁스를 해 준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데, 경찰은 아마도 범인이 처음부터 홍 군에게 유괴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홍 군에게 교통사고나 기타 상해를 입힌 후 법적 처벌이 두려워 계획에 없던 유괴극을 벌였을 가능성을 추론했다.
하지만 용의자를 특정할 만한 더 이상의 유의미한 정보는 없었고, 시체가 발견된 당시에는 이미 유괴 시점으로부터 수 년이 지나 마지막 수단인 탐문수사 또한 무용지물인 상황이라 경찰도 손을 놓아버렸으며 1999년[6] 끝내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3. 여담[편집]
지금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만은, 이 당시에도 실종아동을 찾는다는 수배전단을 보고 부모에게 장난전화를 해 돈을 요구하거나 헛소리를 늘어놓는 몹쓸 일이 있었다. 1982년 3월 수배 전단을 본 시민들이 자신이 아들을 유괴했다며 몇 통이고 전화를 걸어왔으나 결국 시체가 발견된 뒤 실족익사로 종결된 김인환 군의 사례가 그 예시. 그래서 이 사건 또한 그런 케이스가 아니었냐고 할 수 있지만, 이 사건은 시신 유기 장소가 단순 실족이라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7] , 무엇보다 마지막 목격 시점의 착의와는 또다른 물건인 깁스가 시신에서 발견됬다는 점으로 누군가에 의한 살해된 후 유기된 사건일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다.
게다가 이 당시에는 아동 유괴 사건 범인의 경우 거의 무조건 사형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깡다구가 없는 이상 장난전화 선에서 끝내지 실제로 이를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는 시도는 꿈도 못 꿨다. 자칫하면 당시 경찰들의 가혹적인 수사와 맞물려 내가 하지 않았는데 진범으로 처리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국민 거의 모두가 인지하고 있을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면 자신이 홍 군을 데리고 있다고 밝히고 현금 인출까지 시도한 술집의 20대 남성이 적어도 홍 군의 실종과 연관은 있을 가능성이 유력했다. 안타깝게 경찰은 그 용의자를 놓쳤고, 아직 살아있다는 전제를 놓고 본다면 현재 그 남성은 60대의 나이일 것이다.
4. 둘러보기[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3-15 04:18:36에 나무위키 홍석진 유괴 살인 사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978년생, 세는 나이로 7세[2] 공장에서 기계를 조작하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3] 뚜껑 위에 보이는 네모난 것은 보도블럭인데 사체 발견 후 경찰이 올려놓은 것이다.[4] 붉은색과 휜색의 무늬가 있는 회색 바지, 붉은 점이 있는 운동화[5] 하나만 있었던게 아니라 어린이용으로 두 팔과 두 다리에 씌우는 것이 다 있었다. 이걸 착용했을 정도의 상태였다면 그 어린이는 사실상 사지불구 수준.[6] 만약 살인이 유괴된 다음해에 이뤄졌다면 2000년.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로 죽은 것이라면 공소시효는 더욱 더 짧다.[7] 애들이 정화조 탱크 위에서 놀다 빠져 익사하는 사례는 종종 있었으나 홍 군이 발견된 정화조는 PVC재질 뚜껑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 뚜껑이 6세 남아가 들어올리기에는 꽤나 직경이 컸다. 양팔과 양손에 깁스를 차고있었다면 더더욱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