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군 (r19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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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유사 용어
3. 형성
4. 부류
5. 해악
6. 역사 속의 암군
7. 가상의 암군
7.1. 전략 게임에서의 암군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암군()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일컫는 단어다.


2. 유사 용어[편집]


혼군(), 암주()와 동의어고, 사전에선 암군과 암주의 뜻을 「=혼군」이라고만 적기도 한다. '혼군'으로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암군은 폭군의 부분집합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 폭군은 국가 정비 및 왕권 강화 등을 이유로 신하와 백성들을 폭압적으로 대한 경우지만, 그러면서도 정치 자체는 잘 하는 경우도 있다. 러시아이반 4세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암군은 절망적일만큼 정치에 대해 무능해서 국가 막장 테크를 초래하는 행동 자체가 필수 요건이다.

때로는 암군이 폭군보다 나을 수도 있는데, 아랫사람이 유능한 경우 그럭저럭 나라를 유지할 수는 있어서이다. 예를 들어 제갈량 시절의 유선이 있다.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군주 본인은 어리석지만 적어도 백성들에게는 온화하고 인자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유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솝 우화의 '왕을 원한 개구리들'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여기서 '암군'은 통나무, '폭군'은 천적인 두루미다.


3. 형성[편집]


세습제의 군주가 유능할지 무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투표로 가려 뽑은 대통령, 총리, 국회의원들도 무능한 자들이 있는 마당에, 가만히 있어도 핏줄 잘 타고난 대가로 거저 먹는 왕이란 게 한 나라의 역사에서 항상 유능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당연히 당대에도 이런 점을 감안해서 어린 시절부터 각종 정치, 역사, 인문학에 인성 교육까지 빡세게 시키면서 능력을 키웠다. 조선 왕조에선 '경연'이라고 해서 왕이 신하한테 꾸준히 재교육을 받았을 정도이다. 경연에서 오히려 신하들한테 재교육을 시킨 먼치킨들[1]도 있긴 하지만 그런 분들은 이 항목과는 거리가 머니 넘어가자. 이렇게 교육시켜서 최대한 왕의 능력을 키워서 능력에 책임감까지 갖추게 하려고 왕실과 신하들까지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해도 왕의 자질이란 것은 어떻게 보면 로또인 데다가[2] 교육으로 능력은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어도 인성이나 책임감은 어떻게 안된다. 궁전에서 차기 후계자로 태어나 곱게 자라난 왕조의 첫 번째 군주인 콤모두스연산군이 교과서적인 폭군이 되었다는 사실이 대표적이다.[3]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오냐오냐 해주면서 컸는데, 제아무리 세뇌에 가깝게 인성 교육을 시켜도 기본적으로 그냥 눈앞에 떡하니 있는 엄청난 권력을 자제시키면서 그에 따라오는 책임을 그냥 순순히 따르게 하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현대에서도 재벌 2세나 3세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조그마한 완장만 차도 거들먹거리고 일은 대충 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런데 하물며 국가 지존의 자리인 왕이 되면 어떻겠는가?

그렇기에 어느 국가라도 왕정을 거쳤다면 거의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암군이 나타난다. 이는 후계자의 능력을 담보할 수 없는 왕정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근친상간이 성행한 유럽 왕실의 경우에는 왕으로서의 능력 정도가 아니라 카를로스 2세사마덕종처럼 아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장애를 가진 국왕도 가끔 즉위했다.

암군의 원인에는 노쇠도 있다. 보통 명군이었던 이도 말년이 되면서 매너리즘레임덕 등으로 암군의 진가를 드러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로 루이 14세양귀비에게 빠져 그간의 업적을 다 말아먹은 당현종, 청나라건륭제 등이 있고 조선정조 역시 이 범주에 포함은 시킬 수 있다. 물론 시대적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명군에서 출발해 암군으로 끝을 맺은 대표적 사례들.

제대로 된 왕이 당대에는 암군으로 평가되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암군 또한 의외로 자질 자체는 명군 못지않은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비정상적인 왕권 강화로 일시적으로는 왕권이 강화되나, 제도 개혁을 제대로 이루지 않고 본인의 권력을 위해서만 움직인다는 점이다. 결국 그런 암군이 죽고 나면 구속력을 잃은 권력이 대체로 귀족이나 주변 왕족, 제후들에게로 넘어가버린다. 일본 헤이안 시대의 후반의 천황들은 조코(상황, 上皇)와 인세이 같은 비정상적 제도[4]로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권한만 후지와라 가문을 거쳐 무사들에게 넘어가 버려 명목상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나라의 능력을 생각하지 않은 무리한 왕권강화가 나중에 거대한 후폭풍으로 돌아와 나라를 뒤흔드는 사례는 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이 문제는 심지어 세도정치의 전횡에 부분적인 책임이 있는 조선 정조 등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일 것이다. 보통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는 왕권의 강화가 개혁으로 인식되기는 하지만 이전보다 강화시켜놓은 왕권을 물려받은 후계자가 혼군이어서 총신들, 친인척들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대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예상보다는 빨리 죽은 경우가 다수인지라 '암군'이라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어느정도는 후계자의 능력에 의해서도 선왕의 암군 여부가 결정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는, 암군이 사후적 평가에 의해서만 좌우된다는 뜻은 아니다. 후계자 교육 또한 중요한 정치가의 역량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권력을 소유하고, 선정을 펼 기회가 주어졌는가도 중요한 전제요소이다. 암군이라고 평가되는 인물들은 충분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으면서도 그 권력을 국가 발전을 위해 쓰지 않은 자들인데, 그래서 강한 신권이나 대리청정으로 인해 사실상 장식이나 꼭두각시에 가까운 인물[5]들은 보통 암군으로 여기진 않는다.

암군의 옆엔 항상 간신들이 붙어다니기 마련이다. 당 현종 말년의 이림보, 양국충, 안록산, 인조김자점 등이 있다. 다만 고려의 암군들은 간신보다는 자신의 이상이 좌절되는 스트레스로 인한 경우가 많았는데 거듭되는 반란으로 지친 인종, 문벌귀족에게 좌절한 이후 술독에 빠진 의종과 무너져가는 나라를 되살려보려 노력했지만 평생의 반려이자 강력한 후원자인 노국공주가 사망하면서 실의에 빠져 결국 신돈에게 정국을 맡긴 공민왕이 대표적인 예이다. 대체로 이러한 암군들의 경우는 초기에는 잘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사를 멀리해 변해버린 왕들이 다수. 대체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암군들은 생각보다 흔했으며, 결국 초심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암군이 되지 않는 방법 중 하나였다.

신라혜공왕 같이 단순히 실권이 없었던 군주를 암군이라고 단정짓긴 어렵다. 이런 논리대로면 고구려보장왕, 고려 후기의 임금들, 조선정종, 단종, 순조, 헌종, 철종, 순종 등도 죄다 암군이다. 물론 통념을 따르자면 그들에게서도 모든 책임이 없다라고 말할 순 없다. 어쨌든 그들은 왕정국가에서 국가의 톱인 왕이었지 않은가? 실권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게 면책되지는 않는다는 견해다. 단지, 여기서 정의한 타입의 '암군'이 아닐 뿐이다. 아비뇽 유수 시절의 교황들도 실권 없기로는 다 마찬가지다. 다만, 정종과 나이 어렸던 단종 이외의 조선 국왕들은 결코 실권이 없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애당초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 부터가 철저히 왕권에 기생한 것이었고 왕위의 향배에 따라서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것이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정권 교체라든지 고종 즉위 이후 안동 김씨가 별로 힘을 써보지 못하고 권력을 내놓은 것이 그 반증. 사실 그 시기 국왕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면 세도정치고 뭐고 바로 청산할 수도 있었을 만큼 조선의 왕권은 기본적으로 강력한 것이었다.

의외로 왕조의 마지막 군주가 암군이 아닌 경우도 꽤 된다. 오히려 왕조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자들도 있으며,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마지막 군주가 명군, 더 나아가 성군으로 평가받는 극단적인 케이스도 있다.[6] 예를 들어 후한헌제는 아예 실권이 없어 나라를 망치건 뭐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실권을 되찾기 위해 조조 암살을 계획하는 등 최후의 발악이나마 했다. 명나라숭정제원숭환 처형 같은 실책도 있으나 쇠퇴해가는 명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 황제였다. 그가 마지막 황제가 된 것도 후계 가운데 총명했기 때문이다. 신라경순왕 역시 주적 후백제에는 있는대로 저항했고 가장 적절한 시기에 고려에 항복해 신라 백성 및 귀족을 지켰다는 평을 받으며, 고려공양왕도 고려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분석이 많다. 심지어 선정을 펼친 성군이었던 페드루 2세는 노예 해방에 대한 대지주의 불만으로 퇴위당했고 이후 왕정이 폐지되었는데, 쿠데타를 벌인 지배층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좀 더 포괄적으로 보자면 정상적인 계승이 힘들어 구원투수 형식으로 방계의 비교적 유능한 인물들이 왕위에 올랐고, 가능한 한 최후의 발악이라도 했지만 이미 대세를 뒤엎을 수 없던 상태였다. 왕은 아니지만[7]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장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도 재능은 있는데 실권이 없어 막부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고생했다. 심지어 브라질의 마지막 황제인 페드루 2세는 퇴위하는 날까지 국민들 사이에서 성군으로 칭송받았고,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군주인 무함마드 자히르 샤는 아프간에서는 국부로 칭송 받는다. 다만 이러한 경우 거의 무조건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높은 확률로 전대나 전전대 임금이 암군이다.[8]

통념은 암군이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재평가 시도가 나타나는 암군들도 적지 않다. "실은 유능했는데 정치적 목적으로 왜곡이 가해졌다."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식 평가나 "결과는 안 좋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다."는 졌지만 잘 싸웠다식의 평가로 나뉘는데,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루이 16세, 일본도쿠가와 츠나요시 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역사학자들의 논쟁부터 시작해서 인터넷 역사 커뮤니티에서도, 이런 왕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키배가 벌어지는 현상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이마저도 실드가 안된다면 '그래도 성격은 좋다.'라는 동정론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능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심지어 송양공, 건문제처럼 도를 넘은 선함으로 적에게까지 자비를 베풀다가 망해버린 경우도 있으며, 이 경우에는 그 착한 인성도 무능함의 일부분으로 간주된다. 이는 현대의 재해석만이 아니라 전근대에도 제왕학을 연구하면서 지적하던 부분이며, 송양공의 행적을 가리켜 송양지인이란 말이 나오는게 그 때문이다. 해당 군주 입장에선 그저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없이 사치를 즐긴 군주' 정도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던[9] 과거에 비하면 '성격은 착했지만 무능한 게 문제였던 군주'라는 평가가 차라리 덜 억울할지도 모르겠지만.


4. 부류[편집]


크게 보자면 두가지 부류가 있다. 아예 나라를 운영하는 것에 관심이 없거나, 관심은 충분하고 의욕적인데 능력이 못 따라오는 경우. 전자의 암군들은 주로 노는 일이나 취미생활에 전념하면서 국정은 신하들에 떠넘기는 등 아예 국정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추구하려던 일이나 업적이랄 게 아예 없다. 반면 후자의 암군들은 무언가 의욕적으로 국정을 하려고는 하는데 군주 자신의 능력 부족, 혹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삽질이 되거나 망하는 결과가 나와 암군이라고 불리게 된다.

가끔 이 두가지 경우가 합쳐진 최악이 역사에 나타나기도 한다. 단순히 놀고먹는걸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황음무도하여 매우 열심히(?) 노느라 국력이 크게 소모되는데, 정작 통치 자체도 열심히 하기만 하지 실정의 연속인지라 국력이 더욱 소모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사태가 벌어지는 경우이다. 대표적으로 수양제를 들 수 있다.


5. 해악[편집]


암군은 보통 무능하거나 어리석거나 삽질을 저질러 막장을 초래한다. 군주의 의무를 이행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어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암군의 치세에는 나라가 망하거나, 망하기 직전이 된다. 반대로 능력은 부족하면서 쓸데없이 부지런하고 독선적이서 사단을 벌이는 왕도 암군에 속한다. 특히 왕조가 쇠퇴기에 접어드는 시기의 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 전임자가 잘나거나 나라가 튼튼하면 대충 버티므로 여기에 포함시키지는 않는 편. 중국의 사서나 역사소설에서 신하가 임금에게 "야, 이 혼군아!"라고 욕하기 시작하면 갈 데까지 간 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왕정시대에 왕에게 욕을 한 신하는 보통 끔살당한다.

그래서 "명군 같은 암군이 더 위험하다."[10]란 말도 있다. 암군 재위 기간동안 국가적 모순이나 위기가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엔 누적된 문제가 재위 말년이나, 사후가 되어서야 거대한 위협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며 막상 눈에 띄어 해결하려고 해도 어지간한 능력자조차 해결할수 없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게 된다.


6. 역사 속의 암군[편집]


  • 검증된 사람만 추가한다.
  • 실권이 없는 바지사장이거나 입헌군주제 하의 군주인 경우는 제외한다. 단 사실상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태국, 모로코, 리히텐슈타인 등의 군주는 예외로 간주한다.
  • 공화정 체제의 지도자들도 당연히 제외한다. 단, 군주에게 실권이 없는 나라의 실권자들(쇼군 등 일본 무사정권 지도자들이 대표적)이나 북한의 독재자들, 군주 없는 군주국의 섭정으로서 독재를 저지른 인물은 특별히 예외로 간주한다.
  • ★: 폭군으로도 평가를 받는 경우
  • ◆: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경우[A]
  • ◇: 육체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A]
  • ▲: 시해당한 경우
  • △: 폐위된 경우
  • ◎: 역사 왜곡, 관점 차이 등의 논란이 있어 평가가 극명하게 갈려 암군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경우. 논란이 있는 경우 관점에 따라 충분히 명군이라고 볼 수 있다.


6.1. 동양사[편집]



6.1.1. 한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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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1. 삼국시대[편집]

  • 고구려
    • 모본왕(48 ~ 53)★▲◎: 역사 왜곡일 가능성이 있다.
    • 차대왕(146 ~ 165)★▲
    • 봉상왕(292 ~ 300)★△
    • 고국원왕(331 ~ 371)▲: 고구려의 잃어버린 40년으로, 훌륭한 군주인 아버지 미천왕이 한사군을 정복하며 고구려를 만주, 한반도 내 최강의 고대 국가로 완성해 놓은 이점을 이 무능한 아들이 다 날려먹었다.[11] 고국원왕 치세 동안 고구려는 별의별 난리들을 다 겪었으며, 심지어 고국원왕 본인은 친정 중 전사했다. 물론 그 당시 적국이었던 백제는 근초고왕이 통치하는 최전성기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 해도 고국원왕의 치세는 연달아 고구려에 부담을 안겼다. 특히 고대국가로서의 정비가 신라, 백제보다는 훨씬 빨랐다는 이점을 가진 고구려가 이 무능력한 왕 치하에서 헤매는 틈을 타 백제는 빠른 체제 정비와 마한의 반복속을 완료했고, 신라 역시 진한 지역을 거의 통합하여 내실을 다졌기에 고구려로서는 한반도 남부의 권력 공백 지역을 비교적 적은 수고로 복속할 골든 찬스를 통으로 날린 꼴이 된다.
    • 문자명왕(491 ~ 519)◎: 선대의 전성기는 그럭저럭 유지했으나, 모순점을 많이 남겼다. 사실상 고구려 중후반기 침체기의 근원. 그러나 나라가 대놓고 기울지는 않았다는 점에서[12] ◎ 표시를 추가.
    • 안원왕(531 ~ 545)◎: 사실 기록상으로 실정을 벌인 것은 별로 없다. 오히려 도량이 넓었다는 긍정적인 뉘앙스의 평가가 있을 정도. 그런 것처럼 재위 중반까진 그냥 평범히 보냈다. 다만, 이 과정에서도 직접 친정했다가 백제에게 역관광을 허용, 말 그대로 개발살나기도 했고, 말년에는 추군과 세군 측의 왕위 계승 다툼에 휘말려 결국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막을 힘도 없었는지 궁궐 문을 잠군 채 수수방관하기만 했다고... 물론 상술했듯이 이미 부왕 문자명왕 때부터 고구려는 쇠퇴할 기미가 보였는지라 안원왕 한 명만의 잘못으로 몰빵해버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 양원왕(545 ~ 559)◎: 이 쪽도 할아버지 문자명왕으로부터 내려온 실책을 떠안은 것에 가깝다.
    • 영류왕(618~642)▲◎: 지나친 친당정책으로 내부의 불만을 초래하였으며, 결국 그 대가로 본인도 죽임을 당한다. 이후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독재 체제가 되고 연개소문의 후계자 선정 실책이 곧바로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명장이었고, 마냥 폭군은 아니었기에 ◎ 표를 추가한다.
  • 백제
    • 진사왕(385 ~ 392)▲
    • 아신왕(392 ~ 405): 적어도 진사왕에 비하면 나은 왕이며 보통 수준 그 이상 되는 임금이었지만, 너무나도 아집과 독선이 심했고, 더군다나 상대는 그 광개토대왕이었으니 더 큰 문제였다. 결국 고구려에게 매번 패배하였으며, 최후조차 전쟁에 휘말려 시해되었다고 추정될 정도이다.
    • 개로왕(455 ~ 475)◎: 도림과의 바둑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이야기와 도미 부부 설화로 암군이란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고, 그의 치세에 백제가 한성을 잃고 남쪽으로 패주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러 연구를 통해 나름대로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애썼다는 평가도 있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 치세라 상술한 아신왕처럼 상대가 너무 강했다는 쉴드도 한 몫 했다.
    • 말년의 동성왕(479 ~ 501)▲: 집권 중후반까지만 해도 나라를 잘 이끌어갔지만 꾸준히 벌여온 왕권 강화 정책으로 인해 웅진 토착세력의 반발을 샀으며, 말년에는 신하들의 구휼 요청도 무시하고 궁에 틀어박혀 향락만 즐기는 등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듯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 위사좌평에까지 임명하며 신임하던 신하 백가와 이 문제로 갈등하다가 그를 좌천시키는 바람에 분노한 백가가 일으킨 반란에 휘말려 시해된다.
    • 말년의 의자왕(641 ~ 660)◎△: 다만, 최종 승자인 신라 측의 조작이 아니냐는 의견도 꽤 있는 편. 하지만 부친 무왕 때까지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 것을 끊어낸 말년의 외교 판단으로 대당관계를 파탄내서 당과 신라의 양면 협공을 초래했다는 점은 명백히 비판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의자왕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앉히는 등의 무리한 왕권 강화 노력 때문에 백제 귀족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결국 예식진 같은 매국노에게 붙잡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을 강요당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 신라
    • 진지왕(576 ~ 579)△◎: 방탕한 짓을 일삼다가 폐위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라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는 귀족과의 갈등 끝에 폐위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 선덕여왕
  • 가야


6.1.1.2. 남북국/후삼국시대[편집]

  • 통일신라
    • 혜공왕(765∼780)▲◎: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그로 인한 왕권 약화로 인해 국정에 손을 놓은 조선 순조와 비슷한 임금이었다. 다만 한국 역사상 왕족들의 권한이 가장 컸던 나라가 바로 신라였고, 이후 왕족들이 계속해서 사직을 어지럽히는 반란을 수없이 일으켰으며, 왕족들의 사치가 극에 달했다는 비판이 삼국사기동국통감에 나왔다는 점에서 보면 왕족들도 혜공왕의 문제를 가볍게 뛰어넘었다는 관점과 문무왕의 정치를 본받아서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을 보면 완벽한 암군이라고 분류하기엔 좀 억울한 면이 있다. 참고로 혜공왕 사후부터 평생 태평성대만 누릴 것만 같던 신라도 점점 기울어 가기 시작한다. 통일 후 약 100년 후의 일이다.
    • 헌덕왕(809 ~ 826): 사실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답이 없는 통일 신라 최악의 암군이다. 가뜩이나 개혁을 실시하며 정치를 열심히하던 조카 애장왕을 시해한 후 찬탈하여 정통성도 없었는데, 세금으로 백성들을 못살게 굴거나 기근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감에도 본인은 궁녀들이랑 어울려 70대 관료랑 가야금 틀면서 춤이나 추는 등 가뜩이나 망가져 가던 나라를 본인의 향락과 실정으로 더 망가뜨리기만 하였다. 게다가 기근이 발생하고 도적 떼가 창궐하고 김헌창의 난과 같이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며, 이 틈을 타 발해 선왕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에 대해 복수하겠다는 핑계로 침략해 오는 등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재난이 있었지만, 왕 본인은 뭐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했고 하려는 노력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김헌창의 난을 재빨리 진압했다던지 뒷일을 염려하고 종축 중심의 방어 성곽을 구축해 암군으로 보기 어렵다는 측도 있으나, 문제는 그의 노력이 장보고의 난으로 일순간에 날아가버렸다는 점, 그리고 그것만으로 왕으로서의 여러 행각들이 옹호받기 어렵다는 점에서 모진 비판을 피할 순 없다는 게 중론. 결론은 논란이나 재평가의 여지라도 있는 다른 통일 신라의 암군 후보들과 달리 이 자는 빼도 박도 못할 암군이라는 것.
    • 진성여왕(887 ~ 897)◎: 흔히 매체에서의 언급 탓에 암군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기록만 가지고 마냥 암군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미묘한 게 사실이다. 오히려 그녀에게 실책을 일방적으로 다 떠넘겼다는 평가 역시 공존하는 중. 더군다나 이 무렵의 신라는 이미 그전의 왕들이 다 망쳤기에 진성여왕 즉위 전부터 답이 없어진 나라였는지라... 다만, 농민들이 각지에서 못 살겠다며 난을 일으키는 혼란기였음에도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해 혼란상을 나 몰라라 하고 방치만 한 점은 명백히 쉴드 여지가 적은 편이다.
    • 효공왕(897 ~ 912)◎: 효공왕도 따지고 보면 선대의 실책을 떠안은 것에 가깝다. 그리고 본인 역시 정통성 면에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데다 실권이 있었는지조차 심히 의심스러울 지경.
    • 경애왕(924 ~ 927)▲◎: 과거에는 한국사 대표 암군 중 한 명이라는 악평을 들어야 했지만, 제사 장소인 포석정에서 이나 마시며 놀고 먹다가 후백제군에게 잡혀 견훤에 의해 억지로 자살했다는 부분은 왜곡이라는 견해가 많으며, 실상은 계절 문제로 간절히 제사를 지내다가 정보 부족으로 습격에 당한 것이었으며, 고려와의 동맹관계를 강화하고 신라군을 원군으로 파견해 돕고 당시 만주와 요서 지방, 몽골 땅을 재패한 요나라와도 커넥션을 만드는 등, 후백제샌드백이나 마찬가지였던 전대 암군들에 비해 나름대로 능동적인 시도를 해 보려고 노력했다는 부분에서 비운의 왕 정도로 보는 재평가 의견도 꽤 많은 편.
  • 발해
    • 폐왕(793 ~ 793)△
    • 대현석(872 ~ 894?)◎: 사실 이 무렵의 발해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지 한참 지난 상태라서 마냥 암군으로 칭하기는 어렵다.
    • 대인선(906? ~ 926)◎: 이 쪽도 마찬가지. 단순히 망국의 군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암군 취급을 받고 있는 셈.
  • 후백제
    • 견신검(935 ~ 936)▲△: 다만, 이 쪽은 아버지 견훤의 무리한 후계자 선정에 대해 반발하는 입장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신검은 견금강이 왕위에 오르는 순간 목이 짤릴 것이 너무 명확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적국인 고려에 귀순하자니 딱 삼국지원담처럼 비참하게 죽을 확률이 100퍼이니 과장이 아니라 아버지와 동생을 몰아내는 패륜을 저지르는 것이 그나마 신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 후고구려
    • 말년의 궁예(901 ~ 918)★▲△: 무리한 철원군으로의 천도, 관심법 같은 조악하고 엽기적인 왕권 강화 방식 등등으로 인해 호족들의 거센 불만을 샀고, 결국 그나마 믿었던 왕건배신쿠테타로 인해 참혹하게 몰락하고 만다. 그렇지만 지금은 역사학계 내에서 재평가 논쟁이 있다. 대표적으로 승자 왕건을 위해서 기록 축소나 인물평이 깎아졌냐는 논란. 하지만 말년을 제외하면 암군이 아니었다는 증거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는 의자왕과는 달리, 궁예는 오히려 역사학자들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점점 불리한 쪽으로 향하고 있다.


6.1.1.3. 고려[편집]

  • 정종(3대)(945~949)◎: 처음부터 왕의 자리에 야심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북쪽 호족[13]들의 도움을 받아 왕규의 난을 계기로 사실상 왕규 세력을 몰아내고 집권하였다. 하지만 재위기간 내내 자신의 즉위를 도운 왕식렴 세력에게 휘둘리다시피 했으며 왕권강화를 위해 시도한 서경 천도와 광군 양성은[14] 온갖 무리수가 난무한 탓에 왕권 강화는 커녕 민심 이반만 불러오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15] 결국 제위 4년만에 동생에게 양위하여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며, 얼마 있지 않아 죽게 된다. 하지만 그가 죽는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기록이 있어 최종 승자인 동생 세력에 의해 기록이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16]

  • 말년의 성종(981 ~ 997)◎: 자신의 명군 시절 개혁을 말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으며, 무엇보다 그러한 말년의 실책(특히 노비환천법)이 후대의 문벌귀족들이 고려 사회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에 입각해 노비환천법 등 친공신 정책을 무조건 좋게 평가하였고 특히 조선의 공신 우대가 절정에 달했던 세조 치세에 고려 성종의 친공신 정책을 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고려 성종을 바라보는 시각은 결점 없는 명군에 가까웠으나, 현대에 고려 성종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명군이었으나 나중에는 폭군까지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암군에 가까운 모습으로 타락했다는 부정적 재평가가 나오고 있다.

  • 목종(997~1010)◆△◎: 초창기에는 적극적으로 통치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자신을 지지해주어야 할 모후 천추태후김치양과 불륜을 저지른 걸로도 모자라,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를 왕위에 올리려는 짓까지 벌였는데 유약한 성품으로 인해 어찌하지 못하다보니 멘탈이 나가버리면서 암군이 되었다. 게다가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 엉뚱하게도 남색에 빠져버리면서 결국 강조의 정변과 2차 여요전쟁을 일으키는데 일조하고 말았다.

  • 인종(1122 ~ 1146)◎: 물론 갑자기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는 점과 그 당시엔 문벌귀족들의 힘이 너무 막강해져서 제대로 된 실권을 휘두르기 힘들었다는 탓도 있었지만, 이자겸에게 휘둘리고 후계자 선정을 잘못한 나머지 고려의 멸망 당시까지 이어진 첫 쇠퇴기를 열었다는 점에서는 옹호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유신지교 15개조를 발표하는 등 능력은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인성은 훌륭하였고 국정을 돌보는데 최선을 다했기에 암군으로서 평가하겠냐는 등 논란이 있다.

  • 의종(1146 ~ 1170)▲△: 국정을 소홀히하고 향락에만 빠져들어서 무신정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암군이라는 평가를 벗어날 수 없는 임금. 그러나 의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더더욱 막장이었는지라, 의종 복위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는 게 아이러니.[17]

  • 최씨 정권: 그때 당시 고려왕은 허수아비고 권력은 최씨 무신들이 독점하고 4대 세습도 해서 특별히 추가하였다.


  • 말년의 공민왕(1351 ~ 1374)▲◎: 노국대장공주 사후 그녀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임금은 결국 정사에 소홀해졌고, 결국 홍륜에 손에 시해당하게 된다. 다만 공민왕 말엽의 난행이 기록되어있는 고려사가 조선 왕조에서 편찬되었기에 어느 정도 폄하되어 있을 여지가 크며 난행도 과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 우왕(1374 ~ 1388)▲△◎: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이인임에게 휘둘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온갖 기행들이 세세히 기록된 것을 보면 멀쩡한 임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건국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왜곡과 윤색이 가해지고 거기에 혈통 논란으로 폄하되었다는 것은 사실. 그렇다고 해도 동정은 가능할지언정 왕으로서 보인 행보에 대해서는 각종 실책을 저질러 모진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특히 요동 정벌 시도만큼은 빼도박도 못하는 병크다.


6.1.1.4. 조선 · 대한제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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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이 짧았거나(정종, 문종, 단종, 예종, 인종, 경종 등) 힘을 쓸 수 없던 임금(예종, 순종 등)은 제외.

  • 세조(1455 ~ 1468)★◎: 군사정권 시절에는 군사정권이 쿠데타로 들어선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조를 잔혹한 숙청만 빼면 어떤 결점도 없는 성군으로 미화하는 경향이 강했고, 심지어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조차 '어쩔 수 없는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식으로 해서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세조가 처음으로 부정적인 면으로 재평가를 받을 때도 계유정난이라는 비인륜적인 행위와는 별개로 왕으로서는 명군이었다는 긍정적인 평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세조의 각종 실정들이 재조명되면서 암군이라는 악평이 꽤 늘어났으며, 세조 따위를 명군이라고 평가하는 것부터가 조선시대의 진짜 명군들[18]에 대한 모욕이라는 평가도 은근 있다. 물론 세조는 군사정권 시절에 받은 명군이라는 평에 어울리게 긍정적인 업적도 꽤 남긴 게 사실이지만, 부작용이 너무 컸다는 게 제대로 발목을 잡고 있다. 아버지이 기껏 만들어 놓은 국정 시스템을 뒤바꾸는 동시에 생각 없는 공신 우대 정책을 펼쳐서 한명회를 비롯한 권신들을 스스로 만들어 냈고, 재위 말기에 그나마 구성군 등 신공신을 등용해 구공신에 대한 견제책으로 삼았지만, 구공신 견제를 제대로 못한 실책이 컸다. 조선 중기의 국방력 약화 또한 세조의 군사적 실책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군사정권 시절에 한창 미화될 때와 같은 찬양 수준의 호평은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그러나 일단 긍정적인 업적들도 많이 있다는 점에서 ◎표를 추가한다. 호불의 군주로서, 조선 선대 왕들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자칫하면 사라질 뻔했던 수많은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의 불교 문화유산을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준 점, 훈민정음이 널리 보급되게 한 점, 부민고소금지법을 폐지하여 일반 백성이 부패한 수령을 고소할 수 있게 한 점, 경국대전을 만들기 시작한 점들[19]은 치세와는 별도로 좋게 평가받는다.

  • 연산군(1494 ~ 1506)★△: 무오사화 이전까지만 해도 폭군은커녕 암군과도 동떨어진 군주였고, 무오사화 때 잠시 흔들리다가도 갑자사화 이전까지는 나름 진정되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사화 이후 2년간 저지른 패악이 그 원인과 그 이전 10년의 행적으로도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20] 갑자사화가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쉴드가 있지만, 이게 뭔가 말이 안 되는 것이 성종의 두 후궁은 윤씨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기록도 전혀 없으며[21], 조선시대의 율법으로는 부친의 후궁 역시 모친과 같은 수준으로 대우해야 하므로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명백한 패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록상으로도 이미 연산군은 즉위 혹은 그 이전부터 모친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갑자사화는 윤씨의 죽음을 빌미로 양신을 숙청하고 전제권력을 얻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연산군은 전제권력을 거머줬기는 했지만, 권력을 무분별하게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놀아재끼면서 권력남용을 했기에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 및 시스템을 망가뜨렸고,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 시대가 조선 시절 전체 중에 가장 왕권이 강한 시기였던 만큼, 이후에는 군약신강 기조가 이어지게 된다.[22] 아이러니하게도 연산군은 폐비의 소생인데다가 이후 중전이 된 정현왕후아들을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즉위할 때도 모자란 데 없이 즉위하였다.

  • 말년의 선조(1567 ~ 1608)◎◆[23]: 능력 자체는 인사능력을 포함해서 조선의 역대 임금들 통틀어서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나 인재를 보는 눈이 탁월[24]해서 대신들의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특진시키는 것을 밀어붙였다. 그야말로 임진왜란 이외에는 의외로 꽤 뛰어난 임금의 면모를 생각보다 많이 보였던 것. 동의보감 편찬 명과 훗날 대동법의 모태가 되는 대공수미법을 시행하여 민생을 살피기도 했고, 붕당을 적절히 이용해 취약한 정통성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등 준수한 내치를 이끌었다. 그리고 여진족이 강세해지자 노토부락을 정벌하는 등 임란 이외에는 외치에서도 평타 이상은 쳐 주고 있었다. 하지만 혼란의 포문을 연 기축옥사를 배후에서 조장한 측면이 컸으며, 결정적으로 임진왜란의 활동은 전형적인 암군 그 자체이자 의심병 말기 환자의 행보라고 봐도 무방하다.[25] 충무공을 내리고 원균을 앉히는 결단은 어떤 의미로 봐도 실로 대단하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아들이랑 이순신이 잘 나가는 게 두려워서 끊임없이 견제를 놓은 찌질이이자 소인배였다. 참고로 광해군은 어차피 자기 아들이자 후사를 이을 인물이고[26], 이순신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본인의 손으로 직접 등용해서 활약을 보였기 때문에 이들을 견제하는 것은 제 살 까먹기나 다름없는 한심한 짓이었다. 한 마디로 편협하고 옹졸한 인격을 가진 인물. 무엇보다도 임란이 터지자 바로 파천을 궁리했던 점도 크게 까이는 부분이다.[27] 물론 위에 나온 내용처럼 초/중/후반부의 업적이 탁월한 임금이라서 전쟁 이전(목릉성세, 인재발탁)이나 이후(중립외교, 국가재건)에나 선견지명에 가까울 정도로 각종 정책과 국가 비전을 쏟아낸 점에선 임진왜란의 찌질한 모습만 없었다면 성군에는 못 미쳐도 통치 한정 명군은 될만한 의외의 인물이다. 하나의 정답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헷갈릴만한 공과가 양쪽 모두 엄청난 인물이지만, 연산군의 10년의 태평성대가 2년의 폭정을 덮을 수 없었듯이 기축옥사와 임란 7년의 추태 때문에 실제의 업적과는 별도로 '교육적으로 본받아선 안 될 암군', '리더십이 없는 지도자의 병폐'라는 정도의 평이 어울린다.[28] 이외에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는 평도 있다.

  • 광해군(1608 ~ 1623)★△: 평가가 엇갈리는 왕들 중 한 명. 하지만 당대와 조선 멸망 이후까지는 연산군과 더불어 폭군으로 그려져 왔고, 사실은 연산군과 매우 유사한 암군이라는 평가가 가장 객관적이다. 세자 시절 광해군이 임진왜란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줌으로써 그야말로 왕위에 올라도 손색이 없었는데,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실무자들을 죽이면서 광해군이 본인만의 정치를 시작할 수 있게 되자 열심히 국가를 말아먹었다가 결국은 폐출된 인물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광해군의 재평가는 일본인 학자[29]를 시작으로 정치적 의도를 위한 여론에 가깝다. 하지만 역사의 행적을 본다면, 광해군은 어쨌든 무익하고 찌질한 암군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마냥 긍정적인 총평을 내리기에도 몹시 힘든 인물이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봐 주는 한명기 교수 같은 측에서도 외치 측면에서는 폐위된 군주임에도 꽤 괜찮은 평가를 받았지만, 내정 측면에서는 가혹한 궁궐 공사로 재정파탄을 초래했다는 혹평을 듣고 있다. 이 외에도 대동법 같은 산업 혹은 구휼정책에는 항상 시행 반대를 해왔으며, 뜻있는 신하들과 왕족들을 죽이는 옥사를 벌이고 또한 국가를 망가트리고, 이이첨 같은 간신배들의 똥물에 본인도 자멸한 것을 보면 좋은 왕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2000년대부터 교과서에서는 광해군이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현실성이 전혀 없는 황당한 명목으로 미화되기 시작하더니, 대중의 이미지는 완전무결한 영웅급으로 실제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까지 미화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비롯해 이순신 등을 주제로 한 영화드라마가 성행하면서 전술한 선조의 의심병 말기 환자짓이 대중들에게 제대로 각인되면서 마치 사도세자의 비극과 같은 류로 광해군도 저것에 악영향을 받은 바람에 미쳤을 것이라는 동정 여론도 많이 생겨났다. 물론 다음 임금으로 즉위하는 조카가 숙부의 실책까지 다 덮어써서 가장 이미지는 나쁘지만,[30] 광해군은 그저 말년에 연산군 같은 짓을 하다가 쫓겨난 전형적인 폭군에 불과하며, 현대인들의 정치적 여론과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부끄러움을 덮는 영웅으로 2000년대 대중 매체에서 완벽한 영웅왕 이미지로 역사 왜곡을 일삼고 있을 뿐, 실제로는 왕으로서의 인간성과 업적 모두 앞뒤 임금들보다 연산군과 같은 류에 더 가깝다.

  • 인조(1623 ~ 1649): 외정 측면에서 실책(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많이 저질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렇지만 병자호란 등의 전쟁의 책임이 그의 외교 정책이 아니라 청나라의 경제 상황의 악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오수창 교수와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가 '역사평설 병자호란'이라는 것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나 정묘호란은 누가 봐도 자신의 빼도 박도 못할 실책으로 일어난 일이고, 병자호란 때는 아예 선전포고문까지 먼저 보내는 초대형 실책까지 저질렀다. 여기에 청이 병자호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로는 정묘호란으로 청나라가 숨통이 트여서 일어난 일이기에 자신의 무능력으로 초래한 측면이 상당하다. 또 자신의 아버지를 무리하게 추숭했고 큰아들에 대한 지나친 적개심으로 후계 구도와 효종의 계승 명분을 개판으로 만들어버린 결과 증손자까지 피해를 보게 했다는 점에서도 꽤나 까인다. 하지만 암군 목록 중에서는 선조와 세조에는 한참 못 미치고, 광해군과 연산군보다는 하위권 정도의 정상적인 암군(?)이다. 현실적으로 자국 내에서는 무난하게 통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인조 자체가 광해군의 불필요한 삽질 때문에 탄생한 왕[31]이기 때문에, 광해군을 쫓아낸 것 하나만으로 17세기 조선의 회복에 영향을 주었다는 평도 있다. 거기다가 학계에서는 갈수록 '식민사관이 억지로 띄워준 것이지 실제 당시 조선인들이 암군으로 쳤던 것은 괜히 그랬던 것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는 광해군과는 달리 인조는 선조의 여민휴식 정책으로 대표되는 전후부흥을 꽤나 성공적으로 이어받은 왕으로 평가 받는다.[32] 실제로 2010년대 ~ 2020년대 연구에서 보면 인조의 통치 기간 동안 조선은 상당한 전후복구와 부흥을 이루었으며 명군인 아들 효종의 치세에 긍정적인 성과를 많이 남겨줬다는 평가가 상당히 많다. 학계 연구나 논문 같은 건 들여다 보지도 않고선 역사를 단편적으로 밖에 해석 못하는 소위 인터넷 역사 매니아의 가십거리로 이미지에 정말 손해 많이 본 왕이다. 애당초 선조 - 광해군 - 인조 이 조선 중기 세 명의 왕 자체 평가를 두고 봤을 때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인한 광해군의 신격화에 다른 두 명의 이미지가 이용당했다는 게 갈수록 명백해짐에도 도무지 교과서나 대중적 인식에 이런 학문적 성과가 제대로 반영되는 게 없으니 이런 한심한 작태가 계속 이어지는 황당한 사태가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만 말이다.

  • 고종(1863 ~ 1907)△◎[33]: 망국의 군주라고 까이거나 나름 조국의 독립에 애를 쓴 비운의 군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일단 그 당시 , 일본 제국, 러시아 제국의 주변 상황도 그렇고 애초에 조선왕조실록철종 이후 고종실록, 순종실록 등의 편찬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생각하면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다. 나름 자주권을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와 시대적으로 너무 불리했다는 점도 있지만, 아내를 비롯한 민씨 일가가 매관매직과 부정부패 등등을 자주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벌하지 않아 방관하였고, 무엇보다도 명성황후의 조언 하나만 듣고 임오군란과 동학 농민 운동에 청군을 끌어들인 결정은 빼도 박도 못할 실책이다.[34] 또한, 러시아에 의존하여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지만, 이는 러시아의 호응도 얻지 못하고 일본의 영향력도 전혀 줄이지 못한 결과만 초래하게 된다. 결국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일본에게 균형추가 쏠리면서 사실상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어가는 상황에서 최소한 국권 피탈을 막으려는 시도를 하려 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만 하나[35][36], 사실상 일본으로 국권이 넘어가는 상황인지라 무위에 그쳤다. 그래도 나라가 망한 뒤에는 나름 나라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자신의 아들 의친왕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1.1.5. 북한[편집]

이 아니므로 암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미 이 문서에는 쇼군 등의 다른 예도 있고, "군주"의 국어사전 뜻도 '세습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북한의 김씨 가문을 표현하기에 정확하니 특별히 추가하였다. 전제군주제 문서에도 북한의 예가 있다.

  • 김일성(1948 ~ 1994)★◎ : 미국의 개입 여부를 오판하고 6.25 전쟁을 벌여 수많은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만들었으며, 나아가 이산가족까지 만들어 낸 장본인. 8월 종파사건 등 인재풀의 씨를 말려버린 지독한 숙청을 통해 독재 3대 세습의 포석을 깔아둔 것 역시 전제군주 입장으로 본다면 업적이라면 업적. 당연히 언젠가 북한이 무너진다면 관점의 차이 따위 제쳐두고 철저히 암군 겸 폭군으로만 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러나 반론을 제기하면 사실상 많은 경제적으로 복구하려는 움직임도 존재하면서 8.3 인민소비품 생산 운동이나 문화개방 등 상당부분 계획경제 틀외에서 상당부분 사적생산단위와 생필직장을 허용하게 되었다. 특히 외화상점을 통한 구매가 허용하고 돈표를 보유하는 것도 사실상 용인하게 되면서 여가를 보내는 과정이나 외국영화 등을 감상이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사적생산단위를 통해서 가내작업반장을 하던 사람들이 돈주가 되면서 대부분 김정일과 김정은 때에 국영기업이나 무역회사를 경영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공업은 박살나게 되지만 개인이기주의가 발현하게 되면서 상당부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자립이 가능하게 된 것도 이때가 시초가 되었다. 그래서 장사나 환율시장의 수완이 있었던 사람들은 고난의 행군때도 악착같이 버티고 버티면서 돈주로써 발전하고 있는 사례들이다.

  • 김정일(1994 ~ 2011)★◎ : 북한 대기근 등 경제적 파탄과 고립으로 국가를 멸망하지 않는 게 이상한 수준으로 만들면서도 독재자로서의 카리스마와 정치력 하나는 상당하여 아버지 말년에는 아버지를 허수아비로 앉혀두고 권력을 차지하였으며 끝내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해 3대 세습을 해낸 전형적인 암군으로 확정하고 있다. 아버지 세대까지만 해도 적어도 현재의 베트남 수준까지는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던 북한이었으며 아니면 최소한 고난의 행군까지는 막을수 있었던 북한 사회를 완전히 세계 최악의 빈국으로 말아먹고 공사를 끊임없이 일으켜 국고를 바닥낸 인물로 아버지보다 더한 폭군이었다. 탈북자들 중에서도 그나마 김일성을 좋게 봐주는 사람들은 있어도 김정일은 무조건 악평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일본 만화 아카메가 벤다!의 슈라는 김정일이 모티브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김정일이 대부분의 산업을 거의 복구하고 CNC화하게 되면서 홍성남 총리나 박봉주 총리가 제시한 경제개혁안에 어느정도 동조하고 추진하고 있다. 특히 돈주들이 많이 발생하게 되면서 개인소유권 개혁 과정도 상당부분 추진하게 되면서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5.26 지침으로써 반개혁조치에 대한 여파로 인해서 불가역적인 경제개혁조치가 시행하는 것은 엄연한 진실로써 문화개방도 덩달아서 추진하게 되었다. 다만 최영림 총리와 박봉주 전 총리가 서로 협력해서 경제를 복구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이때를 계기로 축산법, 기업소법, 석탄법과 사회주의상업법 그리고 부동산관리법 등 상당한 법령들이 개정하였다. 특히 주민들의 사용권의 수반도 가져오게 되었으며 2010년 이후에는 목란광명회사를 통해서 외국만화영화나 외국영화를 내장한 DVD나 VCD의 발매를 허용하며 상당부분 경제와 문화개방이 복구된 측면도 존재하고 있다. 자동차나 살림집같은 상당한 재산권을 인정하며 도로교통법과 민법에 따라서 등록을 하면 자동차나 전자제품의 상속 또한 법제화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정 역시 김정일이 리타이어하게 되는 김일성때에 추진한 과학기술발전을 다시 복구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상당한 기반이 전부는 아니지만 복구가 이루어지면서 공업기반을 어느정도 복구하게 되었다. 돈주의 발전과정 역시 김정일이 추진하고 있는 과정이 존재하며 돈주들의 활동을 역시 용인해 그에 대한 상납을 요구하게 되었다. 38호실과 39호실이 절대로 바닥나지 않는 이유로써 작용하고 있으며 학살과 정치범수용소의 악행은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는 역사이다. 어찌보면 역사왜곡은 존재하나 절대로 성군이라는 위치는 아닌 셈이다.

  • 김정은(2011 ~ 현재)★◎ :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둘 다 극악무도한 독재자들이기는 했어도 국제사회, 특히 미국을 상대로 도발을 감행해 기어이 국가를 유지한 것에 비해, 적대국에게 손을 벌리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어 버렸다. 물론 이 지경이 된 것에 할아버지나 아버지 역시 책임이 막중하기는 하지만 사실 초반에는 독재자의 면모를 보이기는 했어도 크게 말아먹은 것은 없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 아버지가 더 이상 망할 것도 없게 만들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도 왜곡된 면이 존재하는데 실제로 2012년과 2013년, 2014년, 2016년, 2019년에 김정은이 직접 상당부분 경제개혁조치를 실현화하게 하면서 돈주의 발생을 인정하며 수익을 보장하라는 지시가 전국에 하달한 바가 있다. 특히 기업소법과 무역법, 양어법, 축산법, 농장법, 편의봉사법 등 상당부분을 김정일이 제정한 것을 보완하거나 그대로 유지해 개정하게 되면서 주민들의 양어장과 기업소 설립 그리고 돈주들의 부동산관리법 등 상당부분을 허용해 개인 소유권이 완벽히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인정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돈주들이 김일성 대에는 2,000 ~ 3,000여명에 불과하였지만 김정일 때에는 많아야 24만 명 정도로 추산하다가 김정은 때에 오게 되면서 200만 명대에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다. 특히 개인소유권의 확립 과정을 인정하게 되면서 기업소 이윤의 30%를 자체로 처분이 가능하게 되서 자동차, 부동산 그리고 그러한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사용권으로써 인정받게 되었다. 현재는 만방 망TV다매체열람기와 목란 수자식다매체열람기 등을 개방하게 되었으며 엑스트라넷을 인정하고 컴퓨터와 자금만 보유하게 된다면 광명망의 이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경제성장률도 미미하지만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연간 5.1%까지 성장하게 되면서 우리나라보다 훨씬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농장법으로 인해서 포전담당책임제와 부업생산단위를 인정해 사실상 북한판 UBPC 수준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물론 그래봐야 2015년 기준 274억 달러에서 2019년 기준 335억 달러 밖에 증가하지 않았다는 단점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상당한 경제가 발전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김일성과 김정일처럼 상당한 피를 손에 묻히면서 장성택, 현영철을 포함한 상당한 사람들을 숙청하거나 총살하면서 그만큼 암군의 위치는 돌이킬 수가 없다.


6.1.2. 중국[편집]


  • 하나라
    • 걸왕 : 다만 하나라의 실존 여부에 대해 논란이 많은지라 애매한 감이 있다.

  • 상나라
    • 제신◎ : 하걸상주라는 말이 나올 만큼 위의 걸왕과 함께 고대 중국의 폭군으로 지목되었으나, 현재는 명군과 거리가 먼 것과는 별개로 주나라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나치게 폄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 서주
    • 소왕 : 무리한 정복 전쟁으로 주나라의 하락세를 유발한 장본인.
    • 여왕
    • 유왕▲ : 서주에서 동주로 전환하면서 춘추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린 장본인이자 유명한 포사 이야기의 주인공.

  • 춘추시대
    • 위선공
    • 위영공 :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춘추논어에서 대놓고 깔 정도로 무능한 군주다. 특히 말년에 후계자선정에서 진짜 한국에서 방영하는 일일드라마 수준의 정치암투를 벌여놓는데 크게 기여했다. 시호가 영공(靈公)인데 靈이라는 한자가 정신적으로 혼탁해서 나라를 망치는 군주에게 주는 시호로 역시 후한의 영제의 영도 바로 이 靈이다. 그만큼 위나라에서도 나라를 망친 군주라고 판단한 것.
    • 제양공▲ : 난세에 막장 군신이 들끓었던 춘추전국시대 뿐만 아니라 중국사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개막장 패륜 군주였다.
    • 관이오 사후 제환공
    • 말년의 제경공◎ : 전성기에는 안영전양저를 중용하여 그럭저럭 나라를 꾸려가기는 했으나 후계자 선정에서 실책을 저지르고 망명 공족 전(田)씨의 세력 확장을 방조하여 여(呂)씨가 끊어지는 원인을 초래했다.

  • 전국시대
    • 위혜왕 : 인사면에서 실정을 저질러 손빈, 공손앙 등의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들이 타국에서 뜻을 이루게 된 원인이 되었으며 결국 하서지방을 진나라에게 내주고 대량으로 천도하게 된다. 옛 수도권인 하동 지역은 이후로 진나라에 계속 털리다가 결국 반세기 이후 진나라에 완전히 뺏기게 된다. 제위왕과의 회견에서 보물 에피소드는 덤.
    • 초회왕 : 진나라의 연횡책에 넘어가 친진파를 중용하여 타국의 신용을 잃었으며 이마저도 진나라의 유인에 넘어가 억류되어 객사라는 최후를 맞게 된다.
    • 연혜왕 : 제나라 정복으로 잘나가는 악의를 시기하여 반간계에 넘어가 이를 내쳐서 결국 거의다 먹기 직전이었던 제나라를 토해내었다.
    • 조도양왕 : 간신의 참언을 듣고 염파를 내쳤으며 멀쩡한 적장자인 조가를 폐하고 총첩출신의 아둔한 조천을 세우는 등의 실책을 저질렀다. 장평의 대패 이후에도 그나마 나름 버텨오던 국가의 역량은 본격적으로 도양왕 대에 이르러 기울어지게 된다.
    • 송강왕
    • 제민왕 :전국시대 진나라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제나라를 확실하게 말아먹은 암군이다. 초창기에는 그럭저럭 잘 다스렸지만 지속적으로 성과를 거두면서 점차 거만해지고 다른 국가들의 정치에 간섭하고 맹상군 등 명재상들을 내쫓으면서 제나라를 국제적 왕따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결국 악의가 이끄는 연나라 대군에 의해 제나라가 전국칠웅 중 가장 먼저 멸망할 뻔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부하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건 덤이다.
    • 제왕건 : 진나라와 가장 멀리 떨어진 지리적 이점을 누렸다지만 군왕후가 섭정하던 시절에는 그럭저럭 나라를 꾸려간 편이었다. 군왕후 사후 내부로는 후승의 전횡을 방조했고 외부로는 세객들의 말만 듣고 진나라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아 결국 망국의 군주로 전락했다.

    • 천하통일 이후의 말년의 시황제 : 최초의 중국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었으나 말년의 치세가 좋지 못하여 그의 사후 나라는 막장꼴이 되게 된다.
    • 이세황제▲ : 중국사 암군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막장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항우한테 관중이 함락되는데 까지 걸린 시간은 단 4년에 불과했다. 만약 그가 명군이었다면 오늘날 중국의 주류 민족을 가리키는 단어는 한족이 아니라 '진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초한쟁패기
    • 항우 : 용맹과 군사적 능력은 중국 역사상에서도 늘 거론될 만큼 막강했지만 정치 역량이 형편없었다.



  • 후한
    • 안제
    • 환제
    • 영제 : 관직을 채소 등 물건처럼 팔아치우고 환관에게 휘둘려 사실상 후한을 멸망시킨 장본인. 이러한 막장 통치로 소제헌제동탁에게 휘둘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삼국지의 시작

  • : 원술이 칭제하고 세운 비정통 국가.
    • 원술 : 변변한 능력도 없으면서 칭제하여 사방을 적으로 돌려 몰락했다. 꿀물황제.

  • 후한 말의 군벌들 : 당시 후한은 동탁에 의해 사실상 멸망했고, 군웅들이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면서 자사와 태수의 구분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각지의 군벌들은 자신의 자식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니 군주로 볼 수 있다.
    • 동탁 : 엄청난 폭정으로 사실상 후한을 붕괴시켰다.
    • 공손찬 : 폭정을 일삼아 몰락했다. 유우를 죽인 것은 원소에게 명분을 준 실책이었다.
    • 여포 : 항우와 같은 예시로 정치 능력은 형편없었고 결국 조조와 유비에 의해 죽게 된다.

  • 삼국시대
    • 조위
      • 조조◎ : 후한 말기에 여러 문제점을 개선하고 전임 권력자들의 폭정에서 후한 정권을 안정화 시킨 것은 공이나, 본인도 장기적인 전략보다 빠르게 힘을 키우는 정책을 선호해 후대의 폐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성격적으로는 지나치게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면이 있어 서주 대학살을 위시로 한 학살을 저지르거나[37], 여자 한 명 취하려다 아들조카, 부하를 잃는 참극의 원인을 제공하거나, 공신을 비롯해 눈 밖에난 인재들을 숙청하는 행보를 보였다. 게다가 한중 공방전 때에는 장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아 결국 하후연이 전사했음에도 오히려 하후연의 군재를 폄하하여 무마하려 했으며, 한중에서의 승기를 타고 관우가 북진해올 때에는 대오전선을 완전히 비우는 실책까지 저지른다. 결국 이런 실책들은 작게는 위의 통일을 막았고 크게는 정주민인 한족의 약화로 이후 5호 16국 시대가 열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조 본인은 실책을 저지르는 중에도 북방 이민족들을 약화시키기도 했고, 실책들도 그의 사후 유지를 이어받은 후대가 개선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에 조조 혼자만의 잘못이라고 평가 받지는 않고 있다.
      • 조비◎ : 인성에 문제가 많았고, 결정적으로 비상시 황실의 방패막이 될 수 있는 황족과 외척을 지나치게 배척했으며[38], 구품중정제[39] 실시로 귀족 세력이 대대손손 관직을 해먹게 만들어 위진남북조시대 내내 귀족들이 황권을 위협하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또 아버지 조조의 삽질인 적벽대전이나 유비의 삽질인 이릉대전급의 임팩트가 없어서 그렇지 재위기간 동안 총 3번의 남정을 시도했으나 전부 손권에게 막혀 실패했다. 게다가 정사를 돌보는 것보다도 수렵을 좋아하였고, 아첨하는 오질을 가까이 하고 간언하는 포훈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처형해버렸다. 다만 이러한 평가는 최근에 삼국지 팬덤 사이에서 형성된 것으로, 과거엔 암군으로까지 여겨지진 않았기에 조비가 정말로 암군이었는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암군으로 평가가 확정된 말년의 손권, 조예, 유선, 사마염과는 달리 조비 같은 경우는 사가들로부터 인성에 대한 평가가 나빴지 군주로서의 실정은 그냥 애초에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오히려 중서성의 설치 등 정치제도사에서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 말년의 조예 :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 위나라를 지키고, 내정도 여태껏 잘하더니 말년에 과한 사치와 향락을 부렸고, 계통이 불명확한 조방을 무리하게 후계로 지명하여 조상의 실정 및 이후의 고평릉 사변으로 이어지는 길을 닦아주었다. 또한 위서 양부전을 보면 조예는 일시적인 기쁨과 노함으로 신료들을 대하였으며, 자주 궁전을 짓느냐고 인부들을 대거 차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말년에 타락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씨앗이 있었던 셈이다.
    • 촉한
      • 말년의 유비◎ : 오와의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이릉 대전을 일으켰으나 그 전쟁에서 패배해 촉한의 인적 자원을 크게 상실했기에 암군이라는 의견이 있다. 다만 이릉 대전 문서에도 다루지만 무조건적인 유비의 실책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40] 이릉 대전의 원인을 관우의 복수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만일 정말로 관우의 복수가 원인이었다면 대업, 형주가 관우 하나보다 못하다는 말이 된다.
      • 말년의 유선◎ : 말년의 모습은 반박의 여지 없이 암군이다. 황호를 등용해 국정을 말아먹은 건 엄연히 실책이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위에 맞서기 위해 모이는 와중에 앞장서서 항복을 선언하였다. 다만 삼국지가 제갈량의 죽음 이후로 거의 생략이 되고 유선의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나지만, 유선의 치세는 장장 41년이나 되고 유선이 항복한 것도 제갈량 사후 무려 29년 이후의 일이다. 그래서 말년에 암군으로 전락하기 이전에는 재상의 도움을 받아 무난하게 통치했을 거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41]
    • 손오
      • 손책▲ : 원술의 밑에서 여강 태수 육강을 살해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이후에도 호족에 대한 강경책과 유화책을 균형 있게 사용하지 못하여 기반의 결집력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문제는 차기 지도자인 손권이 육손을 포섭하면서 해결하였다.
      • 말년손권 : 이궁의 변 이전에도 사섭 사후 교주에서 벌인 짓이나 여일 등 간신배를 신임하고 그의 말에 따라 충신들을 유폐하는 등 암군의 기질을 보였다. 그리고 외교에서도 실책을 저지르는데, 공손연을 끌어들여 대위전선을 형성하려 하였으나 사신들의 목만 날라가고 말았다.
      • 손휴◎ : 손침을 처단하기는 했지만 무능한 복양흥과 장포 등 가신들에게 휘둘려 새 정치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는 손호가 즉위하게 되는 나비효과로 이어지게 된다.
      • 손호★△
    • 요동 공손씨 정권[42]
      • 공손공 : 무능하여 조카에게 폐출당했다.
      • 공손연 : 대놓고 위에 반기를 들고, 반대하는 신하들을 처형했다. 그 결과는 요동이 완전히 복속되는 것이었다. 237년의 교전에서 강을 낀 방어를 통해 관구검을 패퇴시킨 걸 보면 군사적 역량이 형편없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므로 자충수가 맞다.

  • 서진
    • 사마소 : 아버지는 매우 유능했고, 역시 정치적 수완은 뛰어났으나 본인은 그저 포악하기만 하고 무능했다. 거기에 현위황제를 살해하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음에도 본인은 여기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가충을 죽이는 대신 실행자인 성쉬와 성제형제에게 책임을 떠남기는 행동을 저질렀다.[43] 자기 자신도 이렇게 막장인데 유선을 비웃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이 사람의 아들이 사마염이다.
    • 사마염 : 황제가 뇌물 수수를 일삼고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다. 오죽했으면 생전에 신하들로부터 환제와 영제만도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다만 재위 초반엔 태강의 치로 일컬어지며 호평받았다.
    • 사마충

  • 5호 16국
    • 유요 : 폭정을 벌였으며, 술에 취해 군대를 지휘할 정도였다.
    • 석호 : 후조를 멸망으로 몰고 갔다.
    • 말년의 부견▲◎ : 말년에 자만으로 판단을 그르친 탓에 나라를 말아먹었고, 그 덕에 선비족이 다시 활개치게 되어 후연북위가 탄생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결국 요장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 모용보 : 후연의 제 2대 황제. 아버지와 달리 무능하였고, 결국 난한의 반란으로 후연이 쇠퇴하는 계기를 만들어내었다.
    • 모용희★▲: 후연의 제 4대 황제. 수양제의 전생이 아닐까 정도로 폭군이자 암군이다. 게다가 상대는 광개토대왕과 북위의 탁발규 등이 활약하고 있었는지라, 상당수의 영토를 상실한 것은 덤이다.

  • 남북조시대
    • 동진
    • : 창업 군주 유유, 그나마 내정을 제대로 하여 국가의 기틀을 잡은 유의륭,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던 마지막 군주 유준 제외하고는 무슨 저주라도 걸린양 암군과 폭군으로 도배가 된 최악의 막장 왕조였다. 유구한 중국사를 통틀어도 순위권 안에 들어갈 만큼 뛰어난 군재를 갖춘 위진남북조 시대 최고의 명장 창업군주 유유의 뛰어난 활약에 힘입어 황하 이남의 땅을 대부분 장악했고, 무엇보다 촉한 멸망 이후 오랫동안 대가 끊겼던 '한의 유씨 황실 복원'이라는 국가 이념까지 계승하게 돼, 한황실 400년의 치세를 겪어 '황제는 유씨만이 해야 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던 당시 중국의 민중들을 매혹할만한, 당대 기준으로 엄청나게 매력적인 대의명분까지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암군과 폭군들이 줄줄이 출몰한 끝에 60년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유의륭 이후 정말이지 명군까지는 아니더라도 걍 범군 정도만 두세명 정도 더 출현했더라면 우리가 아는 남북조 시대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유의부△▲ : 정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황음무도한 암군이라 결국 폐위당했다.
      • 유준 : 간언하는 자를 탄압하고 지나친 사치를 부려 국고를 바닥나게 하는 등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였다.
      • 유자업▲ : 사치향락과 근친겁탈에 빠져 온갖 기행을 저지르다 재위 1년만에 살해당했다.
      • 전폐제 유욱 : 이 사람도 사치향락과 음란행위에 빠져 살았다.
      • 후폐제 유욱★▲ : 살인이 일상이던 미치광이 소년.
      • 말년의 소연◎ : 본래 양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며 명군으로 평가받던 군주였으나 말년에 암군으로 타락하여 불교에 크게 심취하고 중앙의 귀족과 황족은 사치의 극한을 누리며 양나라를 말아먹었다. 이 때문에 양나라 중앙 군대는 무너져 내렸고 후에 후경의 난으로 감금되었다가 아사했다.
      • 후경 : 반란을 일으켜 양무제를 실각시키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 역량이 형편없었던 탓에 후경의 정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 반란으로 양나라는 사실상 망했다. 결국 이익을 본 것은 서위 뿐이었다.
    • 북위
      • 말년의 탁발규
      • 선무제 : 제위 초반부터 외척인 고조에게 국정을 맡겼고, 이들에게 휘둘리는 정치를 했다. 자귀모사[44]라는 악습을 폐지한다는 점은 좋았으나, 문제는 그 수혜자가 바로 북위 후기를 말아먹은 주범인 영태후라는 점에서 이것마저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정책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효문제가 실시한 한화정책의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고 황족고관들의 사치를 방관하였다. 결국 그의 사후 북위는 육진의 난의 혼란에 휩싸여 휘청거리다가 동위서위로 분열하며 멸망하게 된다.
    • 북주
      • 우문윤 : 엄청난 폭정으로 수나라 건국의 빌미를 제공했다. 우문옹의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다.
    • 북제

  • 수나라
    • 말년의 수문제▲◎ : 중국사에서 손에 꼽히는 명군이고 정치적 능력 또한 상당했으나, 말년에는 형벌을 남용하는 등 개황의 치를 스스로 퇴색되게 하였다. 덤으로 야심만만했던 아들 양광(수 양제)에게 살해되었다.
    • 수양제★▲ :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으나, 그 능력을 사치와 지나친 원정, 주색잡기에 사용하여 결국 나라를 말아먹었다. 그래서 중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암군이자 폭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심지어 부황인 수 문제를 부하 장형을 시켜 시해하고 즉위하였다. 명군인 아버지를 시해하고 암군인 아들이 즉위한 셈이다.

  • 당나라
    • 당고조(618~626)◎ : 무능력한 배적을 감싸고 돌면서 이를 위해 중신 유문정을 처형하였다. 게다가 당 건국 초에 설인과 등 유력 군벌들을 정리하는 데에는 나중에 태종으로 즉위하는 이세민의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3남 이원길의 좋지 않은 행실들을 그저 묵과하였다. 결국 이러한 불공정한 처사와 돌궐의 침입이라는 명분이 맞아떨어져 현무문의 변이 일어난다. 다만, 그 기록이 아들인 태종측의 주장으로 쓰여있는지라 역사왜곡이라는 시선도 있다.
    • 말년의 당태종◎ : 명군으로서 당나라의 첫번째 전성기를 열었지만, 말년에 무리한 고구려 침공으로 당나라의 국력을 깎아먹은 점만큼은 중화권 내에서조차 혹평을 듣는다. 사실 고구려에 패한 것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그렇지, 말년에 남긴 실책으로는 무리한 고구려 침공 뿐만 아니라 충신들의 간언을 귀담아듣지 않고 후계자 문제 등에서 일을 그르친 것도[45] 있다.
    • 당중종▲ : 흔히 위황후 일파에게 휘둘린 암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복위하자마자 돌궐의 흥기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708년에는 장인원으로 하여금 삼수항성을 쌓게 하고 또 튀르기시, 힐알사(키르기즈)와 동맹을 맺어 돌궐 포위망을 형성하였으나 돌궐 북벌이 실현되기도 전에 암살당해 뜻을 이루지 못한다.
    • 성신제◎ : 내준신 등 혹리들을 통한 공포정치로 많은 사람을 숙청으로 죽였지만 이 일은 불가피한 일이었고 몇가지 내치 관련 업적도 성공하였으며 그 때에 백성들은 살기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성신제를 악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유교 때문에 긍정적인 면은 없애고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표현한 데다가 아예 황제가 아닌 황후인 '측천무후'라고 주로 불리는 등 많은 폄하를 당했기 때문에 폭군이라고 하기는 애매하다. 하지만 외치면에서는 완벽히 실패한 인물로 이 점 때문에 그녀는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당나라의 대표적 외교정책인 기미정책이 이 시기부터 파탄을 맞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발해가 탄생하고 토번이 흥기하였으며, 돌궐이 다시 부활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기미정책의 파탄으로 인해 당 중기~말기의 국방은 기존의 제도인 부병제로는 도무지 지탱이 불가능한 수준이 되어 절도사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강해진 절도사들의 폐해로 인해 당나라는 끝내 멸망하였다. 어찌본다면 당나라가 절도사에 휘둘리는 데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래도 명재상 적인걸 등을 등용해서 당 현종 초기[46]에 당이 발전할 수 있게 기틀을 닦은 점도 있다. 굳이 말하자면 치세의 명군이자 난세의 암군, 혹은 내치의 명군이자 외치의 암군이라고 평가하는 게 좋을 것이다.
    • 천보 연간 이후의 당현종
    • 당숙종
    • 당목종 : 아버지 헌종이 원화중흥으로 살린 나라를 말아먹은 군주로, 제 2차 환관 시대를 연 군주이다.
    • 당경종 : 목종의 아들로, 똑같다.
    • 당무종 : 도교에 심취하여 환관에게 놀아나는 당 조정을 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으며, 단약 중독으로 사망할 정도였다.
    • 당의종 : 당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당나라 최악의 암군.
    • 당희종 : 황소의 난이 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상격구와 도박에 빠지고 국정을 손에서 놓은 군주.

  • 연 : 안록산이 칭제하고 수립한 나라.
    • 광렬제▲ : 범양에서 거병할 때만 해도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많은 관리들의 지지를 받아 하북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낙양을 함락시키는 등 굵직한 성과를 내었지만, 이 때 칭제한답시고 진군할 시기를 놓쳐 당나라에 숨돌릴 시간을 주었다.[47] 그리고 휘하 군대의 학살을 방조해 민심이 돌아섰고, 본인도 말년에 포악해졌으며, 자신이 총애하는 아들을 밀어주려다 안경서에게 시해되었다.
    • 안경서 : 아버지 안록산을 죽여 반군의 구심점을 와해시켜버렸다. 기어코 사사명에게 시해된다.

  • 오대십국시대
    • 후량
      • 주전충▲ : 기껏 당나라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했건만 주색은 기본이고 자식들과의 갈등도 심해 아들들에게 살해당한다.
    • 후당
      • 이존욱 : 초반에는 주전충을 관광보낸 뒤 후량을 멸망시키고 주변 번진을 전부 쓸어버림으로써 후당을 개창하고 심지어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거란군도 격퇴하는 등 명군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나름 안정기에 접어들자 해이해진 것인지 평소 즐기던 음주가무 및 연극으로 소일했고 내정에서도 막장 가도를 달린 끝에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 후진

  • 요나라
    • 요세종★▲ : 선대 왕들과 달리 외치 확장에 실패하였으며 알코올 중독자라서 폭정을 일삼았다. 결국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는데 기여해줬던 야율찰할에게 죽임을 당했다. 시호가 세종인데 왜 세종이라는 시호를 받았는지 모를 정도로 암군이자 폭군이다.
    • 요목종 : 야율찰할을 제거한 것과 시영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침입해오자 잘 막은 걸 말고는 업적이 전혀 없다. 요세종처럼 알코올 중독자인데다가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국사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 게으른 임금이라는 수왕이라고 할 정도니 말 다했다.
    • 요흥종
    • 요도종
    • 천조제


  • 송나라
    • 북송
      • 송휘종 :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뛰어났으나, 중요한 건 이 사람의 신분은 황제였다는 것이다. 금과 힘을 합쳐 요를 멸망시킨 뒤, 요의 패잔병을 끌어들여 금을 치려 했지만, 이를 듣고 화난 금 태조가 군을 몰아 쳐들어오자, 무책임하게 아들에게 제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물러났다. 그 결과는.......
    • 남송
      • 송고종◎ : 악비 문제로 많은 지탄을 받는 군주이나[48] 소흥화원이나 남송관요 등을 만들어 남송의 문화융성에 꽤 신경을 썼다는 점에서보면 꽤 나름의 업적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황 휘종의 적장자인 형 흠종의 귀환을 가로막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송이종
      • 송도종

  • 명나라
    • 정통제◎ : 토목의 변 이전, 난신 왕진에게 휘둘렸던 영종. 그래도 천순제로 복위하자 정신을 차리고 간신들을 처단하고 우겸의 일을 제외하곤 괜찮은 정치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말년의 성화제 : 초기에는 대인배의 면모도 보여주고 혼란도 수습하는 등 긍정적인 행보를 걸었으나, 말년에 방술에 빠지고 만귀비를 비호하는 등 실정을 많이 저질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 명 4대 암군
      • 정덕제◎ : 혼자놀기의 진수. 그러나 이 양반은 국정운영에서 나름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재위기간 내내 놀기만 한 게 아니기 때문에 평가가 갈리며, 심지어는 명나라 최후의 명군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밑의 3명의 황제와는 격을 달리하는 모습이 많았다.
      • 가정제 : 명나라의 명대신 해서가 이 양반 앞에서 대놓고 연호 '가정'의 의미를 다르게 불러서[49] 깠으니 말 다했다.
      • 만력제◇ : 중국사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받을 정도의 희대의 암군으로, 명나라를 무너뜨린 결정적 원인은 만력제가 30여년간 정무에 손을 놓아서라고 후대의 역사서인 명사에서도 언급하기도 한다. 중국사 최초로 파업을 한 황제다. 자국이 우선인데도 조선에 병력과 구휼미를 무리하게 보내 고려천자라는 멸칭을 얻은 일아 파업을 시작한 만력제가 유일하게 정무를 펼친 일이다.[50] 자식을 차별하여 후계자인 태창제천계제의 권력이 불안정해진 결과를 낳았다. 정무를 보기 힘들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아편중독, 우울증 등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는 추측도 있지만, 문화대혁명홍위병들이 그의 황릉과 유골을 작살내는 바람에 자세한 건 알 수 없게 되었다.
      • 천계제◎◆ : 마에스트로. 동생인 숭정제는 실책은 있었을지언정 망국이 확실한 명을 구하려고 고군분투 했지만 이 사람은 그런거 없이 정무를 때려치우고 나무를 깎기만 했고, 옛 금나라 황릉터를 마구잡이로 파헤쳐서 후금이 빡치는 실책을 만들었다. 다만 이 양반은 만력제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과거와 사연이 있다. 해당 문서로.
    • 숭정제 : 형인 천계제에 비하면 책임감이 있고 열심히 했지만 성격적인 결함이 심했고 정말 무능했다. 이러다보니 각종 실책을 저질러 나라를 망하게 하는 큰 원인이 되어서 암군일수밖에 없다. 특히 숭정제가 처한 상황은 좋지 않았으나 조금이라도 좋은 판단력을 가졌으면 잘할수도 있었는데 본인의 아집과 실책으로 말아먹었으니 암군이라고 비난받을수밖에 없다.

  • 청나라
    • 말년의 건륭제★ : 과거에는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나라 최전성기를 이끈 명군이자 중국 최후의 명군[51]으로 꼽혔으나, 부정적인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단지 선대의 유산을 잘 물려받았을 뿐인 암군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다. 무엇보다 말년은 척 암군. 추가로 백련교도의 난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도 건륭제다.
    • 가경제◎ : 강희제 시절부터의 성세가 워낙 임팩트 있어서 치하에 나라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한 가경제가 암군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가경제가 특별히 무능했다는 부분은 없고, 오히려 건륭제가 남긴 문제들을 그럭저럭 수습했다. 다만 화신에게서 몰수한 재산을 내탕금으로 축적한 일만은 옹호하기 어려운 편.
    • 도광제 : 검소하고 청렴했으며 아편 척결에 앞장섰지만 그 외에는 무능했다.
    • 함풍제 : 만장일치로 문종이라는 시호가 아까운 청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 선통제△◎ : 황제로 있을 때는 너무 어려서 허수아비라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으나, 만주국에서의 행적을 보면 암군이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애초에 만주국 자체가 일본의 괴뢰국이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자. 그런 의미에서 ◎표기도 추가한다.

  • 태평천국
    • 홍수전 : 이민족인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 왕조를 부활시킨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여러 한계로 인해 결국 청나라가 더욱 오랫동안 이어지게 만든 셈이 되었다. 궁예와 마찬가지로 그도 후반부에 흑화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 한족 국가가 다시 세워지는 것은 신해혁명 직후로 늦춰졌으며, 중국에 강력한 한족 통일국가가 다시 들어서는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로 늦춰졌다. 그 중화인민공화국도 문혁으로 깨지지만.


6.1.3. 몽골[편집]


  • 귀위크 칸 : 몽골 제국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리고 무리하게 남송 원정 시도를 하였다.
  • 몽케 칸 : 이쪽도 귀위크 칸처럼 무리한 남송 원정 시도를 하였다.
  • 말년의 쿠빌라이 칸 : 원나라를 세우고 몽골 제국의 최대 전성기를 이끈 대칸이라서 명군 이미지가 강하지만 의외로 말년에 저지른 실책이 원나라의 쇠퇴에 일조했다.
  • 원혜종 : 기황후의 남편. 원을 파국으로 끌고갔다.


6.1.4. 베트남[편집]








6.1.5. 일본[편집]


원칙적으로는 천황이 군주지만 가마쿠라 시대 이후 줄곧 공기였으므로 막부쇼군을 포함한 일본 무사정권 최고지도자도 군주로 인정한다.










6.1.6. 태국[편집]


  • 톤부리 왕조
    • 말년의 탁신 대왕★◎ : 태국판 이존욱이자 궁예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다. 정신병에 걸린 이후부터 암군이자 폭군이 되었고, 결국 암살당하고 말았다. 다만 그를 몰아내고 들어선 차크리 왕조가 그에 대해 역사왜곡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 차크리 왕조
    • 라마 9세◎: '태국 민주주의의 최후의 기둥이 되었던 명군' , '허울뿐인 입헌군주제일 뿐, 군부와 짜고치는 전제군주 독재자' 등의 평가가 갈리는 군주이다. 최근 태국의 민주주의가 점점 후퇴하는 경향과 후계자 선정을 매우 잘못하는 바람에 점점 평가가 나빠지고 있다.
    • 라마 10세: 무려 전근대적 전제 왕권이 사라진 21세기의 암군이다.[52] 왕세자 시절부터 암군과 폭군 기질을 모두 보여서 태국 국내외로부터 우려를 받았지만 결국 즉위하였다. 심지어 전근대였으면 폐세자로 찍힐 사고들을 쳤음에도 부왕 푸미폰이 계승권을 지켜 주었다. 이 때문에 2020년에는 태국에서 군부독재 종식 운동과 함께 왕정 개혁 운동이 벌어졌다.


6.2. ·남아시아[편집]


  • 인도
    • 무굴 제국
      • 말년의 샤 자한
      • 아우랑제브★◎ :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애매한 편이다. 인도 역사상 희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라는 점때문에 무굴 제국 해체에도 일조한 암군이자, 폭군이라는 지적도 많지만, 이걸 빼면 내정 면에서나 외치에서도 상당한 업적을 세워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뉜다. 일단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시크교 등의 많은 종교가 공존하는 인도에서 비(非) 무슬림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일삼은 면에서는 빼도박도 못할 폭군이다.[53]

  • 네팔
    • 네팔 왕국
      • 디펜드라★ : 네팔 왕실 참극을 일으켜 자기 가족들을 죽인 걸로 모자라 결과적으로 그 일 때문에 숙부인 갸넨드라의 즉위를 통해 네팔 왕국의 멸망 원인을 제공하게 된 것 때문에 현재까지도 네팔인들에게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있다.
      • 갸넨드라★ : 형인 비렌드라의 개혁을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고 전제 정치를 부활시키는 바람에 결국 조카의 만행으로 인한 혼란을 만회하지 못하고 네팔 왕국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 터키
    • 오스만 제국
      • 말년의 바예지트 2세 : 게인의 종교적 귀의 때문에 주적이던 사파비 제국에게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고, 결국 아들인 셀림 1세에 의해 폐위되고 만다.
      • 말년의 쉴레이만 1세 :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어낸 명군이지만, 자식 관리가 완전히 엉망이었다. 황후 휴렘 술탄 등의 음모에 빠져 제국 국민 대다수의 인망을 얻고 있던 장남 무스타파를 반역죄로 처형(근거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했으며, 막내인 바예지드 역시 반역을 의심하여 처형. 결국 바로 아래에 나오는 셀림 2세가 뒤를 이었지만, 그 정체는 오스만 제국 역사상 처음 보는 막장 황제. 자식 문제뿐만 아니라 말년에 갈수록 황후나 그녀에게 빌붙은 관료들의 말만 믿고 유능한 신하를 처형장으로 보낸다거나, 부패에 찌든 신하를 재상으로 임명하는 등의 실책도 저질렀다.[54]
      • 셀림 2세 : 재상에게 정권을 넘긴 최초의 황제였으며, 직접 군사 지휘를 한 적이 없는 최초의 황제이기도 했다.[55] 황제를 대신하여 정치를 맡은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재능이 일단 합격 수준이었지만, 지방 총독이나 부재상이 되려면 반드시 재상에게 '선물' 을 바쳐야 하는 상황을 두 눈 부릅뜨고 보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영락없는 호구 인증. 이후에 황제의 권위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고 황제의 애첩이나 모후가 정치에 끼어들고 예니체리가 황제를 갈아치우는 등의 사태가 다 셀림의 치세에 그 싹이 텄다.
      • 말년의 이브라힘◆▲△ : 실정으로 폐위 후 살해당했다.[56]
      • 메흐메트 4세 : 사냥에 골몰하여 국정을 소홀히 했다. 그러면서도 호전적인 성향을 억제하지 못하고 제2차 빈 공방전을 일으켰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 아흐메트 3세 : 이른바 튤립 시대라 불리는, 오스만 문화의 또 한 번의 중흥기를 이루어낸 군주였지만, 그 외의 능력은 형편없었다. 그의 시대에 오스만 제국은 매년 유럽 군대에게 털렸으며,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실정이었지만 그는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하렘의 후궁들과 놀거나 튤립 가꾸기에 여념이 없었다.(…)
      • 무스타파 4세 : 니잠 제디드 개혁을 꾀하던 셀림 3세를 유폐한 뒤 죽이고 부패한 예니체리의 후원으로 술탄이 되어 오스만 제국을 파탄냈다.
      • 마흐무트 2세◎ : 오스만 제국을 좀먹던 예니체리를 숙청하고 니잠 제디드의 부활을 이끌어 제국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더 붙여놓은 것은 업적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시대에 이미 이집트 총독과의 관계가 악화된 결과 아들인 압뒬메지트 1세 대에는 고문 대 몰트케의 조언을 무시해 이집트가 사실상 독립해버리는 등 제국 쇠퇴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게다가 마흐무트 2세의 치세 때부터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간섭을 조금씩 받기 시작했으며 이는 크림 전쟁으로 이어진다. 만일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돕지 않았다면 패전했을 것이고, 변수에 따라서는 오스만 제국의 멸망이 실제보다 더욱 앞당겨졌을 수도 있을 것이며,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가 오늘날 터키 영토 이스탄불이 아니라 그리스 영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되었을 수도 있다.
      • 말년의 압뒬하미트 2세 : 크레타 상실 후 암군의 모습을 보였다.

  • 이스라엘
    • 이스라엘 왕국
      • 사울▲ : 죽음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성경인 사무엘기열왕기를 보면 자살했다고 나오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전사했거나 아군[57]에게 살해당했거나, 혹은 진짜로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더 정확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사울 문서로.
      • 말년의 솔로몬: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말년의 실정은 중국의 당현종, 건륭제와 비견될만한 인물이다.
    • 유다 왕국

  • 쿠웨이트
    • 자베르 3세 : 걸프 전쟁 당시 쿠웨이트의 군주로서, 걸프 전쟁 때 보여준 처신에 대해 말이 있다.

  • 오만
    • 사이드 빈 타이무르△ : 전근대적인 정책과 쇄국으로 국가를 후퇴시켜 공산주의 반군이 들끓게 되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아들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가 영국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다행히도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는 명군으로 오만의 르네상스를 가져왔으며, 오만은 정치적으로도 아주 안정된 국가에 속한다.


6.3. 서양[편집]



  • 로마 제국(서로마동로마 포함)
    • 칼리굴라▲◎ : 사후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고, 근친상간이나 국고 고갈 등은 후대 정적들과 호사가 수에토니우스의 조작으로 밝혀져 짧은 재위 대비 암군이라는 타이틀도 애매모호한 황제에 가깝다. 명군은 아니라도 로마사 전체에서 크게 문제있는 군주라 하기는 어려운 황제답게, 그가 취한 행정, 경제, 속주 정책 등은 당하는 원로원에게만 욕 먹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 전체로 봤을 때는 프린키파투스(원수정)에 도움이 된 결단이 되었기 때문에, 후임 클라우디우스나 이후의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도 이 황제의 정책들은 계속 유지됐다.
    • 네로★◎ : 흔히 폭군으로 평가를 받지만 사실 암군+폭군에 가깝다. 물론 파르티아 문제도 잘 해결했고, 화폐 개혁에서도 성과를 냈기 때문에 최근 들어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국고 고갈이나 기원전 27년 이후 로마 제국의 조정 헌법 위반 등 각종 실책과 직방계 친인척, 아내들을 연달아 죽인 행적이나 고모이자 누이에게 근친상간을 시도했던 일들은 재평가 여지가 없는 악행으로 비난받고 있다.[58] 이런 이유로 네로는 기독교 박해 등 임팩트 있는 사건이 아니더라도, 오늘날까지 암군이자 폭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현제 중 한명인 트라야누스의 발언으로 네로의 재위 초반이 고평가됐지만 이 역시 겉으로만 정치를 잘 했을 뿐, 모후와 주변 권신들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며 각종 음모 사건이 연이어 터져 실제 평은 생각보다 좋지 못하다.
    • 콤모두스★▲△ : 호부견자의 대명사로 당대 로마인들에게 일찌감치 네로 이상의 암군+폭군으로 공인돼 사후에도 안 좋은 사례로 매일같이 욕먹었다. 아버지 생전과 단독황제 등극 후 첫 2년간은 무난한 황제였지만, 맏누나 루킬라에게 콜로세움에서 암살당할 뻔한 이후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 엘라가발루스▲: 로마 제국의 77명 황제 중 최악의 인물 1위에 뽑힌 인물로 이 황제를 능가하는 사람은 동서고금 인류사에서 거의 없다고 평가받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알려진 칼리굴라의 이미지를 실제 그대로 한 암군. 대놓고 막장 행동을 하면서 놀고 먹기만 하고, 4년 내내 로마 사회 안에서 금기시된 모든 행동을 다했다. 따라서 시체는 테베레 강으로 통하는 하수구로 버려지고, 원로원과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 근위대 모두에게 사실상 기록말살형에 처해져 로마 사회 전체에서 금지어가 됐다. 즉위 당시부터 성행위를 벌이면서 퍼포먼스를 하고, 해괴한 레반트식 신상을 로마 시 한복판에 세웠다. 이후에도 여사제를 검열삭제까지 하는 등 온갖 기행을 벌였으며, 자신이 모시는 시리아 향토신 엘라가발 외의 모든 신들(심지어 유대교와 기독교까지)을 '엘라가발의 노예이자 종"으로 규정하고 이를 강요했다. 여기에 더해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할레를 한다거나, 제국 안의 원로원 의원이나 장군들을 성희롱 하면서 세베루스 왕조와 황제의 권위 자체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다. 참다 못한 외할머니가 아예 포기하고 대체자로 또 다른 외손자를 차기 황제로 일찌감치 낙점해버린다. 얼마 뒤,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제위경쟁자인 사촌동생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가, 대놓고 조롱받은 뒤 본인이 도리어 근위대장과 병사들 손에 살해됐다.
    • 고르디아누스 3세: 과거에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통해 훌륭하지만 운 나쁜 소년황제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실제 비문과 유적, 유물 등의 발굴과 연구 등으로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 호노리우스◎ : 비록 즉위 당시 서로마 제국이 망가진 상태이긴 했으나, 고쳐보려는 시도조차 안 한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오히려 서로마 제국의 영웅이었던 스틸리코를 죽이고 고트족들의 침입 당시 요구사항을 들어주든 남은 병력을 모아서 결사항전을 펼치든지 대책을 찾은 게 아니라 괜한 자존심 때문에 천 명도 안되는 병사로 대책 없이 뻗대다가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가 철저하게 약탈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혼자 힘으로 제국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어떻게든 쇠퇴를 늦춰보려고 노력하기는커녕 멸망을 가속화시켰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암군이다.
    • 발렌티니아누스 3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포카스★▲△ : 서양의 수양제
    • 유스티니아누스 2세 :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값을 가진만큼 능력은 뛰어나지만 그의 정신과 권력욕,지나친 복수심이 모든걸 말아먹었다.
    • 콘스탄티노스 8세 : 최근의 연구로 재평가가 되고 있다. 해당 문서로.
    • 니키포로스 2세 :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고 외정에서는 안티오키아를 수복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독불장군식 막장 외교와 내치로 민심을 잃었고 조카에게 암살당했다.
    • 미하일 7세 : "-1/4"이라는 특이한 별명이 붙었는데, 이는 그의 재위기간 동안 화폐 가치가 3/4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 안드로니코스 1세★▲△ : 사실상 로마 제국 멸망의 제일공신.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씨앗[59]도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 결국 시민들에게 폐위된 뒤 비참하게 죽었다.
    • 이사키오스 2세 : 안드로니코스 1세가 폐위되면서 시민들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군사적 능력은 좋았지만 관직을 시장의 채소처럼 판매하여 로마의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 알렉시오스 3세△◎ : 최근에는 오히려 실패한 중흥군주로 재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 대중에게는 종전의 이미지가 너무 짙게 자리잡아서 암군이라 불리는 억울한 케이스. 특히 알렉시오스 3세를 깎아내린 동로마를 다시 위대하게 같은 작품이 평가가 뒤집어진지 한참 된 2020년에도 나오는 현실을 보면 한국 대중 한정으로는 아직 갈길이 멀어 보인다. 그래도 이 소설의 작가 매드캣은 알렉시오스 3세 폄하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았고 결국 차기작을 통해 게임빙의물 작가로 전향하는 행보를 보였기에 알렉시오스 3세는 그나마 원한을 달랠 수 있게 되었다.
    • 알렉시오스 4세 : 진짜 암군은 3세가 아니라 4세 이 인간이었다. 이 인간의 뻘짓으로 4차 십자군이 일어났다.
    • 미하일 8세 : 니케아 공동 황제로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이라는 과업을 이룬 덕분에 명군처럼 보였지만, 동로마 황제로서의 재건 과정에서 과도한 증세로 많은 아나톨리아 로마인들의 불만을 샀고 권력 쟁탈을 위해 당시 11살이었던 황제 요안니스 4세의 눈을 뽑고 폐위시켜 큰 비판을 받으며 황가의 정통성을 추락시켰고 서방 세력과 외교에서 많은 실책을 저질러 제국이 고립되는 결과를 불러오는 등, 실상은 암군에 가깝다. 미하일 8세가 싸지른 X은 후임황제가 치워야 했고 그러고도 X은 많이 남아서 오스만한테 제국은 멸망당하고 만다. 차라리 요안니스 4세가 정상적으로 성장해서 제국을 다스렸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 환도는 좀 늦어질지언정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여러 폐단은 생겨나지 않고 제국은 수십 년 가량 더 존속했을 수 있다.
    • 요안니스 5세 : 상술한 미하일 8세가 제국 멸망의 문을 열었던 암군이라면 요안니스 5세는 그 문을 열린 채로 고정해버린 장본인이다. 비록 흑사병과 오스만의 흥기라는 불운도 있었지만 가만히 있던 요안니스 6세를 건드려 내전을 일으켰고 이것이 제위기 내내 이루어진 건 명백한 실책이다. 다음 군주인 마누일 2세가 유능하지 않았다면 제국은 반세기 빨리 멸망했을 것이라 여겨질 정도의 암군.


  • 영국
    • 잉글랜드 왕국
      • 플랜태저넷 왕조
        • 리처드 1세 (1189 ~ 1199)◎ : 암군으로 평가받았으나 군주로서의 능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오히려 훌륭한 모습을 보인 적도 많다. 그러나 무리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국내 상황이 많이 안 좋아졌다.
        • 존 왕(1199 ~ 1216) : 잉글랜드 국왕으로서도,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도 모두 답이 없는 막장 군주였다. 그나마 초기에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귀족들의 압력에 억지로나마 마그나 카르타라는 중요한 유산을 남기긴 했지만 그게 전부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영국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권 1순위인 인물은 '존' 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있다.
        • 헨리 3세
        • 에드워드 2세(1307 ~ 1327)▲△
        • 말년의 에드워드 3세(1327 ~ 1377)
        • 리처드 2세(1377 ~ 1399)△ : 정치 감각이 처참하게 결여되었다.
      • 랭커스터 왕조
      • 튜더 왕조
        • 메리 1세(1553~1558)★◎ : 그녀의 종교정책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녀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와 외교적인 부분에 대해서 문외한이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인 펠리페 2세가 결혼동맹을 근거로 영국군의 파병요청을 하였는데, 당시 신하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행하다가 영국 최후의 대륙이라고 불렸던 칼레 항구를 프랑스에게 영원히 빼앗기게 되었다. 칼레 항구는 지리적인 이점 외에도 양모 수출에 3분의 1을 담당할 정도로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라서 이후 재정 위기 상황까지 오게 만들었다. 그녀가 죽은 후에 즉위한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가 역대급 명군이라 칭찬받을만큼 뛰어난 정치능력을 보여준 덕분에 그녀의 암담한 정세능력이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결코 국가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당연히 이러한 점들로 인해 그녀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최악으로 치닫게 되었다.
      • 스튜어트 왕조
        • 찰스 1세(1625 ~ 1649)▲△◎ : 찰스 1세가 폭군이었다든가 무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입헌군주제를 반대하고 전제군주제를 선봉하고 있었던 것 때문에 평가가 그렇게 된 것이다. 당시 영국의 정치 상황은 무작정 국왕이 독단적으로 정무를 수행하기엔 무리가 따랐는데, 찰스 1세는 이를 유연하게 대응할 정치 감각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우직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왕정 자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게다가 헨리 8세의 실책으로 인해 재정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 제임스 2세(1685 ~ 1688)△☆◎ : 다만 현재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매우 유능하고 근면한 군인이요 행정가였으나 정치가로서는 한계가 있었던 인물 정도로 재평가받고 있다.
    • 스코틀랜드 왕국
    • 잉글랜드 연방
      • 크롬웰 정권 : 크롬웰 부자의 직위였던 호국경은 본래 전근대 영국에서 섭정을 맡은 귀족(방계 왕족 제외)이 받는 칭호였으므로, 크롬웰 정권은 왕 없는 잉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의 섭정 체제였다고도 볼 수 있다.
        • 올리버 크롬웰(1653 ~ 1658)★◎ : 올리버 크롬웰이 청교도 근본주의에 입각한 공포정치로 민심을 잃는 바람에 결국 크롬웰 정권이 2대만에 멸망하고 영국에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만 1290년에 잉글랜드 밖으로 추방당한 잉글랜드 유대인의 후손들이 잉글랜드로 돌아올 수 있게 하고, 기존의 전근대적 군대를 근현대적 군대로 발전시킨 군사적 업적을 남기는 등 긍정적인 면모도 없지는 않아서 ◎표가 붙었다.
        • 리처드 크롬웰(1658 ~ 1659)◎ : 아버지와 같은 폭군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에 비해 국가지도자 및 군사지도자로서의 역량이 부족했던 탓에 결국 크롬웰 정권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하노버 왕조
        • 조지 1세(1714 ~ 1727) : 암군이라는 건 영국 국왕으로서의 행적에 한정.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로서는 뛰어난 명군이었다. 영국 국왕으로서의 행적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영국의 의원내각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 위안이다. 어찌보면 영국 국왕은 그냥 맡아만 준 것에 가깝다. 조지 1세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은 하노버 선제후라는 정체성 속에서 평생을 살았던 인물이다.[60]
    • 대영제국
      • 윈저 왕조
        • 에드워드 8세(1936) :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망각하는 등[61] 무개념이었던데다 나치 부역 논란까지 남겼다.[62]

  • 프랑스
    • 프랑스 왕국
      • 발루아 왕조
        • 장 2세 : 왕으로서는 완전히 무가치했다는 평을 들었다.
        • 샤를 6세
        • 프랑수아 2세(1559 ~ 1560)
        • 샤를 9세(1560 ~ 1574)
        • 앙리 3세(1574 ~ 1589)▲◎ : 암군이라기보다는 명군의 업적이 더 많았다. 종교문제에 휘말리는 수모를 겪었지만, 나바라 국왕 앙리(앙리 4세)와 협력하여 기즈 공을 살해하였고, 종교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긴 했다. 다만 자식이 없어 앙리 4세가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앙리 3세가 앙리 4세에게 살해당한 거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다.
      • 부르봉 왕조
        • 앙리 4세(1589~1610)◎▲ : 세금 폭등과 매관매직 등이 그의 치세에 이루어졌다. 낭트 칙령을 반포하기는 했지만 후대의 혼란의 씨앗을 뿌린 셈이다. 다만 긍정적인 업적도 적지 않은 점에서 ◎표를 추가한다.[63]
        • 루이 14세(1643 ~ 1715)◎ : 스스로 태양왕이라고 칭하고 콜베르를 등용해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하지만 업적은 고작 이 뿐이다. 검소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이 외에도 자연국경설을 주장해 수많은 전쟁으로 재정을 파탄내는 상황에서 베르사유 궁전을 증축했다.[64] 게다가 낭트칙령을 폐지하여 위그노들이 해외로 망명하고, 이로인해 프랑스 내부의 상업이 위축되는 최악의 결과도 루이 14세가 만들었다.[65] 제 나라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를 스페인 군주로 앉혀 스페인을 위성국화하려 했지만 그 결과는..... 영국만 좋았다.. 결국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을 만든 셈이다. 물론 반대로 프랑스를 당대 유럽에서의 최강국으로 끌어올린 군주이기는 하다. 이렇듯 긍정적인 면모도 존재하는 점에서 ◎표가 붙었다.
        • 루이 15세(1715 ~ 1774) : 퐁파두르 부인에게 그저 휘둘리기만 했다. 그 사례로 3부인 동맹에서 촉발된 7년 전쟁을 들 수 있다.
        • 루이 16세(1774 ~ 1792)▲△◎ :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부정적 재평가가 나오면서 루이 16세의 성품과 능력이 긍정적 재평가를 받긴 하지만, 그래도 혁명을 촉발시킨 원인이 그에게도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루이 16세를 옹호하는 측에서도 바렌느 배신사건은 쉴드쳐주지 않으며 그의 능력으로 혁명을 막기란 불가능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 루이 18세(1815 ~ 1824)◎ : 정치를 잘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형이랑 동생보다는 나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샤를 10세는 관용 없이 절대왕정을 무조건 고수하려는 입장이어서 오죽하면 그가 후사가 없을 때 차라리 루이 18세가 최대한 장수해 샤를 10세가 왕위에 오르는 걸 늦추는 것을 바랐을 정도.
        • 샤를 10세(1824 ~ 1830)△ : 무모하게 전제군주제를 만들려다가 결국 폐위당하고 추방되어 외국에서 죽는 결말을 맞이한다.
      • 부르봉-오를레앙 왕조
        • 루이필리프 1세◎ : 개인적인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웠으며, 높은 신분의 귀족임에도 검소하게 지내는 등 긍정적인 면모가 있어 샤를 10세의 폐위 이후 입헌 군주정 체제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술트 내각과 기조 내각의 실책을 제어하지 못했으며, 이로인한 불만은 프랑스 2월 혁명과 제2제국의 도래를 불러왔다. 샤를 10세처럼 완전히 무능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무리인 측면도 있어 ◎표를 추가한다.(마리우스의 할아버지도 손주녀석에게 "왕의 잘못이 아니라 꼬붕이 패거리들 탓이다"라고 했다.[66])
    • 노르망디 공국
      • 노르망 왕조
        • 로베르 2세(1087 ~ 1106)△ : 만약 그가 잉글랜드 왕위를 노리지 않고 노르망디 본토에서의 내치도 잘했다면 노르망디는 잉글랜드와 완전히 별개의 나라가 되어 잉글랜드와의 동군연합이 아닌 독립국가로서 좀 더 오래 지속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플랑타주네 왕조
        • 리샤르 4세(1189 ~ 1199)◎ : 잉글랜드 국왕으로서의 평가와 마찬가지.
        • 장 1세(1199 ~ 1216) : 노르망디 공국의 육지 영토를 모조리 상실해버렸다. 그나마 채널 제도를 지켜내긴 했지만 이마저도 육지가 아니라 섬이라서 사실상 그의 치세에 노르망디 공국이 멸망한 거나 다름없다.
    • 프랑스 제1제국, 프랑스 제2제국
      • 보나파르트 왕조
        • 나폴레옹 1세(1804 ~ 1814, 1815)△◎ : 19세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거의 전 유럽에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전파하는 업적을 이루었으나,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대륙 봉쇄령을 반포해 역으로 고립을 자초한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나폴레옹 일파들과 군대는 폴란드나 독일 서부지역을 제외한 전 유럽 지역을 약탈하고 폭정을 저질렀으며, 이는 피지배민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여기저기서 나폴레옹 지배에 반발하는 봉기가 발생하게 된다.[67]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꽃피우기는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대륙봉쇄령을 어긴 러시아 제국을 응징하겠다고 원정을 단행했다가 대패했으며 이는 제1제국의 몰락의 계기로 작용한다,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이 이길 수 있었던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본인의 실책과 휘하 원수들의 불화 등으로 영국의 아서 웰즐리와 프로이센의 블뤼허 등 반불연합군의 명장들에게 패했다. 그래도 프랑스 내 민심은 잘 휘어잡았으며, 가족들이 사치스럽게 지내는 와중에도 본인은 검소했다. 말년에 여러 실책들을 저질렀으나, 거의 전 유럽을 제패하여 유럽의 모순을 깨뜨리고, 라틴아메리카 독립에도 영향을 주는 등[68]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당대 인물들의 평은 호불호가 모두 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에 대해 전쟁의 신 그 자체(Der kriegsgott selbst.)라고 극찬했고, 헤겔 역시 유럽의 낡은 체제를 부수는 그를 긍정하는 평을 남겼으나, 베토벤 등 그가 황제가 된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그의 행보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다. 장 란이나 루이 니콜라 다부같은 유능한 원수들을 발탁해 중용한 것도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나폴레옹 3세(1852 ~ 1870)△◎ : 내치에 있어서는 나름 업적을 남겼지만 크림 전쟁 개입 등으로 제국 쇠퇴의 빌미를 제공했고 프로이센 왕국과의 외교 문제에서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결국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자신도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여 포로가 됨으로써 비참하게 몰락했다.[69] 게다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인 막시밀리아노 1세를 멕시코의 괴뢰 황제로 두어 북아메리카에 영향력을 확보하려다 미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막시밀리아노 1세가 처형되면서 오히려 멕시코에서 프랑스의 평판이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전반적인 국정 운영 능력도 큰아버지[70]에 비해 부족한 편이었다.

  • 러시아
    • 루스 차르국
      • 고두노프 왕조
        • 보리스 고두노프(1551 ~ 1605) : 옛 류리크 왕조의 혈통이 없어서 정통성 측면에서 문제가 되었다는 걸 감안해도 차르로서 무능했으며, 결과적으로 혼란 시대의 씨앗을 뿌린 셈이 되었다. 만약 그가 명군이었다면 류리크 왕조를 대신하여 오랫동안 이어지는 러시아 왕조는 로마노프 왕조가 아니라 고두노프 왕조였을 것이다.
    • 러시아 제국

  • 독일
    • 신성 로마 제국
      • 루돌프 2세(1576 ~ 1612)
      • 페르디난트 2세 : 그의 아집과 광신, 불관용으로 끝낼수 있었던 30년 전쟁을 장기화시켰다. 이로 인해 나라가 피폐해졌고 결국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이 몰락하는 계기가 된다.
    • 바이에른
      • 루트비히 2세△ : 인간성은 소탈했지만 군주로서는 정치에 무관심했으며, 거기에 성 만들기에 대한 지나친 집착까지 더해지면서 결국 루트비히 2세 본인이 폐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 프로이센, 독일 제국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 난봉꾼. 이 때의 국력 저하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때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에게 패한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말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 낭만주의적인 인물로 프로이센 예술의 발흥을 촉진하였으나, 말년에는 정신병에 걸려 동생인 빌헬름 1세가 섭정했다.
      • 빌헬름 2세(1888 ~ 1918)△ : 즉위하자마자 비스마르크를 내치고 제국주의 정책을 강화했다.[71] 이로 인해 영국이 독일을 견제하기 시작했으며 독일은 고립되어 갔다.[72] 더군다나 고립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식민지를 지배하겠다고 칭다오를 공격해서 청나라로부터 99년 동안 조차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고,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일어난 헤레로족의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1914년에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정세를 오판해서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데 일조하였으며[73], 제1차 세계 대전 중반부터는 실권을 루덴도르프에게 내주고 꼭두각시가 되었다. 결국 킬 군항의 반란과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인해 제정이 폐지되고 퇴위된 후에는 네덜란드로 망명했으나 호시탐탐 독일 제국의 복원을 노렸다. 또한, 히틀러가 베네룩스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전위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나치를 극찬하는 모습을 보여 호엔촐레른 가의 명예에 먹칠했다. 이외에도 창녀와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독일 황실의 권위를 내핵까지 근접하게 만들었다. 다만 내치에 한정하면 때때로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독일 제국의 경제력을 대영제국에 준하는 수준까지 향상시키는 등의 모습도 있었지만, 무리하게 세계정치를 추진하다가 다 말아먹었다.
      • 에리히 루덴도르프★ : 독일 제국 말기의 사실상의 최고 통수권자이자 독일 파시즘의 선구자이다. 베르됭 전투 이후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해임되자 상관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함께 전권을 휘두르기 시작했으며, 머지않아 카이저를 무력화시키고 독일 제국의 독재자가 되어 강력한 국가사회주의 정책과 총력전을 벌인다. 결국 루덴도르프의 쥐어짜기로 인해 독일 제국은 경제적 과부하를 맞아 패전하였다. 게다가 전후에도 배후중상설을 퍼뜨리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해 뮌헨 폭동에 참여하는 등 히틀러를 지지하기도 했다.

  • 스페인
    • 압스부르고 왕조[74]
      • 펠리페 2세(1556~1598)◎ : 원주민 노예제 폐지, 콩키스타도르 개혁, 레판토 해전 승리, 포르투갈 합병 후 동군연합 체제 형성 등 많은 업적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실책도 커서 알짜배기 땅인 네덜란드를 상실하였다. 게다가 무적함대가 드레이크 경에게 대파되었고, 이로 인해 사실상 스페인은 열강에서 탈락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표를 추가한다.
      • 펠리페 3세(1598 ~ 1621) : 압스부르고 왕조 최악의 암군.
      • 카를로스 2세(1665 ~ 1700)◆◇
    • 보르본 왕조[77]
      • 카를로스 4세
      • 페르난도 7세
      • 이사벨 2세
      • 알폰소 13세 : 국내의 여러 불안과 소요를 해결하는 데 무관심하고 오히려 모로코 식민지화 등 팽창주의에만 몰두했다. 게다가 리프 전쟁 초반의 패배에 대한 책임 회피용으로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75] 장군의 군사독재를 허용하면서 완전히 국민들의 신뢰를 잃고 만다. 결국 폐위당하고 스페인 제2공화국이 들어섰으니, 스페인 내전의 씨앗을 제대로 뿌린 셈이다.
      • 프란시스코 프랑코 : 왕 없는 왕국의 섭정 신분으로 스페인국을 이끌었다. 하지만 무자비한 철권 독재 정치를 폈을 뿐만 아니라 정적들을 나치에게 무너진 프랑스로 보내고 이들을 나치가 학살하는 것을 도왔다.
      • 말년의 후안 카를로스 1세 : 명암이 크게 갈리는 왕. 스페인 군부의 꼭두각시로 내세워질 운명이었으나, 프랑코의 후계자인 블랑코 제독이 암살당하는 등의 행운을 틈타 실권을 장악한 뒤 프랑코 체제를 해체하고, 이에 반발하는 쿠데타를 진압하는 등 명군의 명모를 보여 스페인 민주주의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으나 재위 말년에 보츠나와에서 벌인 사치와 향락이 발각되면서 사실상 반강제로 퇴위했고, 퇴위 뒤에도 발각된 스캔들 때문에 기록말살형에 준하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공화정 복귀여론까지 돌 지경. 아들이자 후임자인 펠리페 6세가 개념인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스페인 제3공화국이 들어섰을 거라는 의견이 많다.[76]

  • 이탈리아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즉위 직후 국내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문제 해결은커녕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등 팽창에만 골몰하였다.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은 졸전을 거듭했지만 오스만군의 더 큰 졸전으로 겨우 이겼음에도 군사력을 증강시키려는 노력은 일체 없었고, 오히려 제 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어 졸전만 치르고 영토는 조금밖에 얻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내었다. 이에 대한 책임을 피하고자 베니토 무솔리니검은 셔츠단을 진압하지 않고 사실상 무혈 입성시켰기에 추축국의 전쟁 범죄에 커다란 책임이 있다. 심지어 이탈리아가 다시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때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막상 이탈리아는 2차대전 기간 졸전만을 거듭하여 오히려 민폐만 끼쳤다. 에마누엘레 본인은 결국 패전이 가까워지자 무솔리니를 실각시키지만 이미 이탈리아는 세계대전 패전국이자 전범국가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결과적으로 2차대전 패전 후 분노한 국민에 의해 왕정이 폐지당하고 자신은 물론 왕세자였던 아들까지도 살아있을 때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이탈리아 사보이아 왕조 왕위 요구자들도 파시즘 신봉 및 선조인 에마누엘레의 무사안일한 행보 때문에 자국민들한테도 좋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78]


  • 덴마크
    • 에리크 7세 : 이 양반의 삽질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의 칼마르 연합의 결속력에 진동을 초래하였다.
    • 크리스티안 7세(1766 ~ 1808)
    • 크리스티안 8세(1839 ~ 1848)◎ : 이쪽도 폭군이었다든가 무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입헌군주제를 반대하고 전제군주제를 선봉하고 있었던 것 때문에 평가가 그렇게 된 것이다.
    • 크리스티안 10세◎ : 동시기 폴란드마냥 주민투표의 결과에 불복하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역의 합병을 지시하고, 이에 반대한 수상을 해임하고 내각을 해체시키는 등 부활절 위기를 야기하는 한편, 독일과 덴마크 간의 관계를 해칠 뻔했다. 이를 계기로 덴마크 왕국도 입헌 군주국이 되었다.

  • 벨기에
    • 레오폴드 2세(1865 ~ 1909)★ : 콩고 자유국 군주로서의 행적은 말할 것도 없이 폭군의 행보였으며, 벨기에 본토에서는 명군이었다는 주장이 많지만 사실 벨기에 국왕으로서의 평가도 마냥 좋지만은 않다. 자신의 정부를 위해 도가 지나친 수준의 사치를 부린 탓에 검소한 성향의 벨기에인들에게는 평가가 좋지 않았으며, 복지에 있어서도 매우 소홀했다. 무엇보다 플란데런(플랑드르)의 네덜란드계 벨기에인들을 무시하고 소외시킨 점 때문에 벨기에에서 프랑스계와 네덜란드계의 마찰이 더욱 심각해지는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되었다.

  • 오스트리아
    • 합스부르크 제국[90]
      • 카를 5세 : 합스부르크 역사 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지만 실정을 거듭하여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를 분열시켰다.
      • 카를 6세(1711 ~ 1740) : 이 시기에 아버지인 레오폴트 1세의 업적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또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씨앗을 남긴 것도 명백한 실책이다.
      • 마리아 테레지아(1740 ~ 1780)◎ : 느슨한 연합체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을 강력한 개혁 정책을 통해 하나로 묶은 것은 분명 그녀의 업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가 암군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그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거나 일으킨 차례의 큰 전쟁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79], 오히려 막대한 전비만 소모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부담을 안겨주었다.[80] 또한, 여성 군주임에도 여성을 억압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자신의 통치철학인 금욕주의, 도덕주의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81],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죽고난 후에는 통치의욕을 잃는 모습을 보여 기껏 강화시켜 놓은 황권을 깎아먹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식농사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공동 통치자인 첫째 아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82], 특정 자식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 어머니로써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그녀는 느슨한 연합체인 합스부르크 제국을 하나의 국가로 묶은 업적이 있으며, 이를 통해 그녀는 당대에 국모라고 평가받았으므로 ◎표를 추가한다.
      • 페르디난트 1세(1835 ~ 1848)◆ : 합스부르크 가문판 사마충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실제로 그의 치세대에 통치는 메테르니히와 그의 일가친척들이 도맡아했다. 결국 1848년 혁명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자 조카인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양위하고 제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 프란츠 요제프 1세(1848 ~ 1916) : 1848년 혁명 이후 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전제적 통치로 일관했으며, 1848년의 혁명을 계기로 드러난 자국의 허약한 군사력을 다시 강화시키는 데 무관심했다.[83] 그 결과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대패하게 되고, 제국의 주요 영토인 헝가리에서 소요사태까지 발생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헝가리 귀족들과 대타협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경에 이르고도 전제적 통치를 고수하면서 제국의 위기를 가속화시켰다. 또한, 그는 제국역량 강화에 매우 소홀히 하였는데, 동시대 프로이센과 그 후신인 독일제국이 산업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룬 반면[84], 프란츠 요제프 1세 시대에 제국 내의 산업 지역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이스트리아 반도 정도였고 나머지 지역은 낙후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고 하지도 않았다.[85] 게다가 그는 보스니아 합병 문제로 삼제 동맹을 깨뜨려버리는 우를 범한다. 또한, 독일에 과잉 의존했으며, 독일 제국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카이저에게 빈번한 조언조차 하지 않았다.[86] 그는 오로지 자기권력 지키기에만 집중했으며[87],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던 조카를 멀리하는 모습을 보여 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짓들만 벌였다.[88] 또한, 1914년에 사라예보에서 조카가 살해당하자, 이를 핑계로 세르비아 왕국몬테네그로 왕국을 병합하기 위해 군사력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전쟁을 도발했다. 결국 이기지도 못할 전쟁을 벌여[89] 국가를 파탄냈으며, 그의 사후 즉위한 황제인 카를 1세는 대단히 유능하였으나, 그의 치세대에 제국이 살아날 가능성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 헝가리
    • 헝가리 왕국
      • 호르티 미클로시 :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자 바다 없는 내륙국의 제독인 이 사람은 명목상으로 왕정을 유지하지만, 카를 1세나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의 군주가 되는 것을 가로막고 이를 이용해 독재를 했다. 트리아농 조약 이후의 상황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고[91][92], 2차 대전 때에는 추축국으로 가담한다.[93] 그래도 후임이 워낙 막장 전범이기에 평가가 마냥 박하지만은 않기도 하다.


  • 루마니아 왕국
    • 카롤 2세△(1930 ~ 1940) : 자신의 정부를 위해 국가의 1년치 예산에서 20%에 가까운 보충 예산을 편성하고 사치를 부리는 행각을 자행했다.[94] 이러한 막장 통치로 결국 총리 안토네스쿠의 압력으로 퇴위하였다. 한편, 안토네스쿠는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협력한 파시스트들을 숙청해버리는 등 능력은 있는 인물이었으나, 이 인간은 줄을 잘못 서서 루마니아를 파탄냈다.

  • 불가리아 차르국
    • 페르디난트 1세(1908~1918) : 무리한 욕심으로 발칸 전쟁에서 영토를 잃고, 1차 대전에서 불가리아군의 세르비아에서의 학살을 야기한 장본인이다.
    • 보리스 3세(1918~1943) :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로 뇌이 조약으로 인해 파탄난 불가리아 차르국을 떠안았다. 그러나 무능하면서도 전제적인 통치로 일관했고, 2차 대전에 추축국으로 가담한다. 결국 1943년에 암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 후 불가리아는 국민군단연합이라는 나치의 괴뢰국이 된다.



6.4. 아프리카[편집]


  • 이집트 왕국
    • 파루크 1세(1936 ~ 1952) : 사실상 영국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실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국민들을 마구 억압한 건 아니지만 각종 기행을 일삼은 탓에 암군 취급을 받는다.

  • 에티오피아 제국
    • 이야수 5세 :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에서 친이슬람 정책을 펼치고 친독정책을 펼치는 등 정치감각이 결여돼 기어코 폐위되었다. 다만 에티오피아 내 무슬림들에게는 평가가 나쁘지 않은 편이며, 이들은 오히려 이야수 5세가 폐위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경향이 강하다.
    • 말년의 하일레 셀라시에△ : 말년에 사치에 빠진 탓에 결국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을 제공한 꼴이 되었다.

  • 줄루 제국
    • 말년의 샤카★◆ : 남아프리카의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들소 전략'이라는 전술을 창안한 뛰어난 지략가였던 샤카는 줄루 제국을 건국하고 매우 빠르게 그 세를 넓혔으나, 홀어머니를 여의고 정신병에 걸려 폭군이 된 뒤 백성들이 농사짓지 못하게 만들어 기근에 시달리게 하거나, 임산부들과 임신한 소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잔혹한 기행을 벌이는 암군이 되었다. 이 때문에 샤카의 두 이복동생이 그를 암살하게 된다.

  • 중앙아프리카 제국
    • 보카사 1세(1976 ~ 1979)★△ : 대통령이었다가 친위 쿠데타를 통해 군주가 된 것은 위의 나폴레옹 3세와 비슷하지만, 나폴레옹 3세와 달리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도 쿠데타에 의한 것이었으며 군주로서의 역량 또한 나폴레옹 3세에 비하면 0에 수렴했다. 심지어 황제가 반정부 인사들을 직접 때려 죽이던 판이었으니 폭정은 폭정대로 휘두르면서 나라를 위한 긍정적인 업적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결국 황제 즉위 3년 만에 프랑스가 지원한 쿠데타가 발생하며 제국은 1대 3년이라는 매우 짧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7. 가상의 암군[편집]


여기선 인품은 좋으나 능력이 나쁜 군주, 능력은 좋은데 인품이 나쁜 군주, 히어로, 악인, 안티 히어로 등이 죄다 섞여 있으므로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 가담항설 - 선대 왕, [95]
  • 감수성 - 감수왕
  • 갓 오브 하이스쿨 - The King[96]
  • 괴도 조커 - 알라딘 국왕[97]
  • 눈물을 마시는 새 - 권능왕
  • 더 위쳐 시리즈 - 데마벤드 국왕
  • 던전앤파이터 - 팔메리어 4세
  • 록맨 제로 시리즈 - 엑스
  • 리그 오브 레전드 - 비에고[98]
  • 리멤버 - 아들의 전쟁 - 남규만
  • 리어왕 - 리어왕
  • 롤랑롤랑 - 윌리엄
  • 롤링스타즈 - 바키
  • 마기 - 아부마드[99]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 오딘[100], 트차카
  • 마하바라타 - 유디슈티라
  • 마법천자문 - 암흑상제[101]
  • 말레피센트(영화) - 스테판 왕
원작이 아닌 실사영화에 나온다.
  • 마탄의 왕과 바나디스 - 브륀 왕국의 팔롱 왕[102], 피그넬리아 아르샤빈[103], 발렌티나 그링카 에스테스[104]
  • 무적코털 보보보 - 반들반들리나 4세
  • 무한도전 - 대왕[105]
  • 메이플스토리 - 선대 신왕, 헤카톤, 샤렌 3세
  • 메카드 시리즈
  • 베르세르크 - 미들랜드 국왕
  • 성전사 단바인 - 프라온 엘프
  • 소피루비 - 멀구나 왕국 국왕
  •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 미성숙한 초월체[106]
  • 스타크래프트 2 - 아크튜러스 멩스크[107], 말라쉬[108]
  • 신격의 바하무트 GENESIS - 샤리오스 13세, 샤리오스 17세
  • 신비아파트 시리즈 - 이안[109]
  • 신비한 별의 쌍둥이 공주 1기 - 해님나라, 달나라(문마리아 여왕은 혼수상태라서 정황을 파악할수 없었다.), 이 외의 5개국 국왕들. 브라이트:흑화 이후 한정.
  • 쓸쓸하고 찬란하神 - 도깨비 - 왕여[110]
  • 아르슬란 전기 - 이노켄티스 7세[111], 고타르제스 2세[112], 오스로에스 5세, 안드라고라스 3세, 키리카라 2세[113]
  • 아카메가 벤다! - 황제[114]
  • 아바타 - 오자이[115]
  • 악역 영애물 - 원래 공략대상자들 정확히는 A라는 왕자가 B라는 히로인에게 연애를 하며 C라는 약혼이 되어있는 영애에게 파혼을 날리는 클리셰인데 대부분 암군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악역 영애물 작품들중 공작영애의 소양에드거 르 타스메리아는 연애결혼을 한답시고 정실을 직위가 낮은 백작가의 샬리아와 결혼. 하지만 정략결혼으로 들인 후처가 샬리아를 독으로 암살하고 이후 무기력증에 빠져 왕국에 지대한 혼란을 초래시킨다. 아들 중 차남에드워드 톤 타스메리아가 이 후처의 자식인데. 게임상 이야기로는 여주인공 유리와 같이 잘먹고 잘살았습니다. 로 끝나는 이야기지만 일본 현대인이 악역 영애로 전생된 공작영애의 소양에서 보여준 모습은 이놈이 왕이 되면 암군 그 자체가 100%라고 확신되는 무능의 끝판왕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타국과 분쟁중인 와중에도 무료급식을 내어주면서 군대를 없애자는 미친짓거리를 하려고 한다. 그러고서 사치를 하는건 덤. 더 심각한건 공작가가 힘이 커졌다고 제대로 된 명분도 없이 영지를 부수면 그대로 전부 자신 손에 다 들어오는 줄 아는 정치감각따위는 눈씻고도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준다. 이에 파생된 악역 영애물 대부분 원 공략대상자(왕자)들이 이런 케이스다.
  • 앵그리버드 시리즈 - 킹 피그
  • 야인들의 마피아게임 3편 - 알파고
  • 얼음과 불의 노래 - 로버트 바라테온, 아에곤 4세, 아에니스 1세, 바엘로르 1세, 아에리스 1세, 아에리스 2세, 조프리 바라테온, 발론 그레이조이, 메리아 마르텔
  • 엘릭 사가 - 엘릭[116]
  • 워르테니아 전기 - 루피스 여왕[117]
  • 워크래프트 시리즈 - 오스마르 가리토스, 가로쉬 헬스크림, 실바나스 윈드러너
  • 워해머 판타지 - 루드뷔크 2세, 보리스 골드게더, 디터 4세, 칼레도르 2세[118]
  • 원신 - 훌리야, 라이덴 쇼군[119]
  • 원피스 - 루브니르 국왕
  • 은하영웅전설 - 은하제국프리드리히 4세[120]
  • 은혼 - 도쿠가와 사다사다
  • 이계진입 리로디드 - 젝센가드 라텐베르크
  • 작약만가: 서리꽃 - 황봉림
  • 진격의 거인 - 칼 프리츠[121], 프리츠[122]
  • 조이드 제네시스 - 지인
  • 제로의 사역마 - 올리버 크롬웰[123], 필립 3세[118], 죠세프[124], 빅토리오 세레발레[125]
  • 파이널 판타지 XV 유니버스 - 레기스 루시스 카일룸[126]
  • 프린세스 - 비욘 카칸 표르도바[127]
  •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 - 버블검 공주
  • 트로이 - 프리아모스
  • 드래곤 퀘스트 다이의 대모험 - 아르키드 국왕[128]
  • 태조 왕건 - 궁예[129]
  • 해적전대 고카이저 - 총사령관 왈즈 길
  • 해피니스 프리큐어! - 블루[130]
  • 황후가, 돌아왔다 - 리오넬
  • 황후의 품격 - 이혁
  • 히어로메이커 - 뭉클리아[131], 골드 수저[132], 베르미누 3세[133]
  • 히노와가 간다! - 창해국 왕[134], 천랑국 왕 즈노우[135]
  • UFO로보 그렌다이저 - 베가 대왕
  • 은하전국군웅전 라이 - 라코우
  • 버림받은 황비 - 미르칸, 회귀전의 루블리스
  • Fate/Grand Order - 이문대의 왕들, 리처드 1세
  • 포켓몬스터 XY - 아리 공주


7.1. 전략 게임에서의 암군[편집]


군주제의 국가를 운영하는 많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보통 군주 각각이 몇 가지 능력치를 가지며 이것이 게임 진행에 영향을 미친다. 군주라는 것이 그냥 약간의 버프, 디버프 정도만 주는 경우라면 별 상관이 없지만 군주의 능력치가 게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 플레이중인 국가에 암군이 들어선다면 게임 진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기도 한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시리즈 - 게임 내 대부분의 국가가 군주제이기에 랜덤한 확률로 랜덤한 능력치의 후계자가 등장하여 왕위를 잇게 된다. 그런데 군주 능력치에 따라 받는 포인트가 게임 내 거의 모든 행동에 대량으로 소모되어 사실상 돈보다도 중요한 메인 자원이기에 암군이 등장하면 참 골치아프다. 보통 능력치 총합이 6(가령 2/2/2) 미만일 경우에는 심각한 암군으로 취급한다. 다른 변수를 제외하고 비교한다면 능력치 최하의 군주(0/0/0)와 최고의 군주(6/6/6)를 둔 나라는 기술개발만 할 경우 속도가 3배나 차이난다.

  •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 국가를 플레이한다기보다는 중세 영주 개개인을 플레이하는 것에 가까운 게임 특성상 캐릭터 능력치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며 능력치가 쓰레기인 캐릭터가 계승받는다면 난이도가 급증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상속법과 각종 음모를 통해 능력치 구린 자식을 죽이거나 투옥하거나 하는 등 플레이어들은 온갖 수단을 써서 암군의 등장을 막기 위해 노력하게 되며 하다보면 이것이 게임의 메인 컨텐츠 중 하나인 것 같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 토탈 워 시리즈 - 전반적으로 군주 능력치가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그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특히 시기상 현대에 가까운 배경을 가진 작품일수록 군주보다는 개별 장군들의 영향이 크며 원하지 않는 군주를 갈아치우기도 어렵지 않다. 물론 영향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고 꽤 큰 패널티를 가진 왕도 가끔 나온다. 작게는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의 수입및 민심 감소부터, 크게는 모든 영토에 디버프를 걸어버리거나 외교에 페널티를 주는 경우가 있다.


8. 관련 문서[편집]



[1] 세종, 정조[2] 똑똑한 것과 리더의 자질은 일단 별개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을 다루는 정치력이라는 건 아무리 공부로 능력을 채워넣는다고 한들 결국은 재능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대표적인 예시로 고구려 미천왕이 있는데, 어린 시절 이후로 평생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소금장수로 살아오다가 혈통 하나만으로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낙랑군을 축출하고 후대에 이어지는 고구려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명군으로 분류된다.[3] 심지어 이 두 명은 성군으로 칭송받는 선왕을 아버지로 두었고, 초반에는 본인의 능력도 결코 무능하지 않았고 심지어 각각 12년의 재위기간 전반기에는 국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했으나 후반에는 그 정치력을 대규모 숙청에 활용하고는 군왕의 책임감을 망각하고 제멋대로 살기 시작하면서 비가역적인 폐해를 남기고 물러나게 된다. 이들은 '숙청과 황음으로 국가의 전성기를 끊어놓은, 궁궐에서 태어난 첫 후계자'라는 점에서 평행이론 수준으로 전형적인 사례이다.[4] 퇴위한 상황이 금상 천황의 후계자 결정에 개입하여 천황의 사망 이후 마음에 드는 또 다른 자기 아들을 차차기 천황으로 삼으면서도 기존 천황의 후손들이 그대로 계승권을 갖는 등의 복잡하고 비정상적인 천황직 계승이 반복되면서 나중에는 누가 천황으로 즉위하든지 정통성에 컴플렉스가 생기는 정말 개나소나 권신 등 외부 세력의 지지를 받으면 왕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남북조시대의 싹이 이미 그 이전 시대에 자라고 있었던 것. 심지어 나중에 남북조로 나눠지는 두 계통이 10년씩 번갈아가면서 천황직을 계승하는 등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한다.[5] 고려고종, 조선 철종 등이 있다.[6] 대표적인 케이스가 후술할 페드루 2세와 무함마드 자히르 샤다.[7] 일본의 왕은 엄연히 천황이었다. 하지만 천황이 워낙 허수아비라서 실질적인 일본의 왕은 막부의 장군(쇼군)이나 다름없었다.[8] 예를 들자면 후한 환제, 영제. 고려의 우왕, 명나라의 만력제. 다만 자히르 샤의 경우는 딱히 전대의 실책 때문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쿠데타로 쫓겨났고, 이후 나지불라의 독재 및 탈레반의 만행으로 나라가 왕정복고도 못할 정도로 망가진 것이다.[9] 암군을 무조건 만악의 근원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어서 인성 같은 것은 재발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10] 이 표현은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에서 사마휘방덕공유표를 평하면서 한 말이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당나라당현종이나 청나라건륭제 역시 명군 같은 암군이라 할 수 있다.[A] A B 당연하지만 이런 군주는 어쩔 수가 없다. 장애에 의한 실수 또는 무능을 일방적으로 탓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11] 반면 알렉산더 대왕이나 진시황과 같이 다른 국가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한 조상의 업적을 잘 이어받은 훌륭한 후손 군주들도 존재하는데, 고국원왕은 이와 대비된다.[12] 실제로도 문자명왕 다음왕인 장남 안장왕은 문자명왕 시기의 침체를 극복하고 전성기를 유지했다.[13] 패강진 일대 호족들과 서경총관이었던 왕식렴 세력을 일컫는다.[14] 물론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거란의 침략을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거란은 송나라를 치기 전 배후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15] 오죽하면 그가 죽자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를 정도였다.[16] 그의 사후 자식이었던 경춘원군이 광종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다.[17] 그 예가 김보당의 난. 주도자인 김보당의 경우 평소 의종의 실정에 비판적인 인물이라서 무신정변 당시에는 무사했었던 것이다.[18] 태종, 세종, 문종, 성종,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이들 중 숙종은 무려 단종을 복권시킨 군주이기도 하며, 아들 영조는 김종서를 복권시켰다.[19] 헌데 이 네 가지 업적 중 훈민정음이 널리 보급되게 한 것과 경국대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두 업적들은 모두 손자 성종 대에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린 감이 있다. 부민고소금지법은 세종 시절 만들어진 법이고, 세조가 쿠데타로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이를 폐지한 것이다. 이 법이 부활한 것은 성종 시절로, 이에 애민정신이 상당했던 세종이 이런 법을 만들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부민고소금지법이 사실상 성종 시절에 만들어진 법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20] 전근대 국가에서 국왕 및 최고 권력자의 횡포로 2년만에 나라가 쑥대밭이 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유명한 동탁이나 망나니 손침도 그러잖아도 붕괴돼 가는 나라에 쐐기를 박은 것에 가깝지만, 어쨌든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기간은 단 2년으로 길지 않았다.[21] 게다가 애초에 성리학 군주 끝판왕인 성종이 엄연히 왕위에 앉아 있는 마당에 후궁 주제에 중전인 윤씨한테 감히 대들었다가는 그 즉시 끔살 당했을 것이다. 당장 후궁은 자신의 친자한테도 무조건 존칭을 써야 했다.[22] 왕이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면 신하들은 "그건 연산이나 하는 짓입니다." 하고 주장하게 된다.[23] 임진왜란 이전부터 심질(心疾) 즉, 조현병이 있다고 스스로 고백했고, 날이 갈 수록 증세가 점점 심해졌다. #[24] 인재풀로는 가히 조선의 올스타급 능력자들이 많이 모인 세종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세종의 경우 신하들이 능력이 있어도 뭔가 성격이 무지막지하게 드세다던가 뇌물, 친인척 비리 은폐같은 부정부패를 저지르기도 하며 기껏 세종 본인이 최선을 다해 만든 문자를 대놓고 반대하는 등, 온갖 사건사고를 시도때도없이 치고 말도 안 들어먹어서 임금 입장에서는 참 컨트롤하기 힘든 사람들이었던 반면, 선조는 또 그렇지도 않아서 휘하 신하들이 전쟁통에 휘말려도 끝까지 국가와 임금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점을 보면 인재 보는 눈 하나만큼은 정말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도 수위로 꼽을만 하다. 당장 선조의 최고의 인사 업적인 이순신만 해도 전쟁 중 선조의 끝없는 의심과 견제에 시달리면서도 죽을 때까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분골쇄신했다.[25] 실제로 조현병 증세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피해망상이 더욱 심했다.[26] 어차피 즉위할 왕자인데 왜 굳이 견제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임란 발발의 책임으로 신하들이 선조가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야 한다는 상소가 많았기 때문이다.[27] 세간의 평대로 선조의 파천이 결과적으로는 일본군을 당황시켜 시간을 끄는 등 긍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항전 한번 시도해보려 하지도 않고 일단 도망가려는 자세는 군주로 실격이며, 무엇보다 언제고 요동으로 어가를 옮겨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입조하려 했던 점은 도저히 커버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차라리 선조를 적극적으로 실드칠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머리는 좋다 혹은 결과는 좋았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28] 사실 선조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순수한 인물의 현실을 후세대 사람들이 선악에 비추어 판단하려고 하기에 벌어지는 왜곡 현상이다. 선조는 전쟁 도중에도 지능 하나는 비상했으나 그게 스스로 국가를 파탄내며 이득을 취하는 행동이라서 찌질이로 욕을 먹는 것이고, 무려 40여 년이나 통치하면서 지능적인 분야한정으론 항상 우수한 능력을 보인 2개의 얼굴을 가진 임금이다. 하지만 교육적으론 워낙에 본보기가 되기 어려운 국가 지도자인지라, 그냥 무능한 바보라고 가르치는 케이스가 많은 편.[29] 최근에는 민족주의 진영에서 광해군을 옹호하고 있지만, 초창기의 광해군 재평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조선과 중국의 심리적 거리감을 떼어놓기 위한 명목이었다. 즉,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조선과 중국을 서로 분리하는 역사적 거리감을 만드는 시발점으로 이용하기 위한 관점에서 일본 측이 광해군을 이용했다.[30] 사실은 인조가 복수귀가 되어 반정을 일으킨 것도 광해군이 굳이 방계 왕족이었던 인조의 동생을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밖에도 광해군의 찌질하고 어처구니 없는 숙청 때문에 반란을 준비하는 당파와 왕족이 계속 생겨나고 있었다.[31] 인조는 본래는 왕위와는 연관이 없는 평범한 방계 왕족(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의 장남)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한참 왕권 강화에 미쳐서 왕족과 신하들을 죽일 때, 인조의 어린 동생을 잡아서 죽어버렸다. 당연히 광해군에 대한 인조의 복수심은 폭발했고, 마침 쿠데타 세력이 복수에 미친 인조를 얼굴마담으로 사용했다.[32] 인조를 굴복시킨 숭덕제 또한 광해군의 경우와 비슷하게 '식민사관에 의해 억지로 미화된 것이지 실제 당시 조선인들이 오랑캐 임금이라고 비하했던 것은 괜히 그랬던 것이 아니다'라는 평가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숭덕제 또한 철저한 반조선 성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에 식민사관에 의해 마치 조선에 대해 매우 관대한 군주였던 것처럼 미화되었다.[33] 이외에 퇴위당한 후 시해당했다(▲)고도 하는 주장이 있다. 이는 민간에서가 아닌 학계에서 나온 주장이다.[34] 고종이 임오군란에 청군을 왜 끌어들였는지는 애매하지만, 동학농민혁명에 청군을 끌어들인 결정은 교차검증까지 되는 사실이다. 이게 왜 문제인가 하면, 제물포 조약에 의거해 일본이 조선을 본격적으로 잡아먹을 수 있는 건덕지를 줬기 때문이다.[35] 국권 피탈을 막으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독립운동가 수준의 활동에 그쳤고, 황제로서의 직위와 영향력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고종이 더욱 영리하게 나섰다면 아내처럼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36] 황제로서의 직위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에는 을사조약에 힘이 크다.[37] 서주 대학살 말고도 관도대전 후 원소군 병사 생매장, 왕필이 살해당한 후 관리들에게 OX 퀴즈를 내어 O를 택한 관리들을 학살하기도 했다.[38] 이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소외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조창, 조식, 하후상이다. 자신의 동생인 조창조식을 죽이거나 소외시킨 것은 그나마 황권 강화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핑계라도 댈 소지가 있으나, 하후상을 죽게 만든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다. 가뜩이나 황실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외척과 황족들을 배제하고 방계친척 위주로 그것을 대체한 상황에서 하후상이 죽자, 유사시 황실을 보호할 수 있는 방패막 역할을 할 인물은 조진, 조휴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며, 이는 두 인물이 죽을 경우 그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 전무하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진, 조휴가 연달아 죽은 후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조상자신의 아버지숙부에 비하면 함량미달의 인물이었고, 결국 조상 일파가 사마의 일파에 의해 숙청당하자 위나라는 바로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39] 제안한 사람은 진군이지만, 실행을 명한 건 조비다.[40] 실제로 손권은 형주를 온전히 손을 넣은 뒤에도 형주의 지방 행정력을 장악하기 위해 공안으로 천도까지 하기도 했다. 또한 유비가 오를 공격할 때 그에게 호응한 반란이 제법 된 것을 감안하면 오의 형주 지배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이 시점이 형주 탈환의 적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육손이 등장하기 이전 전쟁 초반까지만 해도 유비군이 우세했다. 그저 육손이 매우 뛰어났을 뿐.[41] 그런데 유선은 비의가 암살된 후 새로 재상이 된 동윤의 간언을 못마땅해하며 진지와 황호를 가까이하였다. 아무래도 황권 강화를 꾀하려다 역으로 환관에게 잠식당한 모양이다.[42] 요동의 공손씨 세력은 표면상으로 위에 복종했으나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43] 황제 살해는 아버지나 형도 명분을 위해 하지 않았던 일이다. 심지어 황제가 자신을 암살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폐위하는 선에서 끝냈다. 결국 이로 인해 진나라 황실은 정통성 결여라는 치명적 약점을 안게 되었으며, 사마염 사후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군약신강 상황에 처하게 된다.[44] 태자의 생모를 죽이는 제도[45] 장남이 문제를 일으켜 폐태자되자 4남을 밀어주다가 종국에는 9남인 당 고종을 밀어주었다.[46] 어디까지나 초기 한정이다.[47] 그런데도 홍농, 장안동관까지 함락되었느니 당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48] 사실 악비 자체가 너무 과대평가되었다는 평도 많다. 악비라는 인물의 평가에 따라 송고종명군으로 보느냐, 암군으로 보느냐가 갈린다.[49] 원래 의미는 도타울 가(嘉), 아름다울 정(靖)인데, 같은 발음의 다른 의미로 집 가(家), 깨끗할 정(淨)이라고 바꿔 불렀다. '집이 깨끗하다' 라는 의미인데, 청소를 해서 깔끔한 게 아니라 가난해서 집안에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미다.[50] 조선이 망하게 두었으면 본토가 전란에 휩싸일 것이 뻔했으므로 그의 판단이 옳긴 했다. 본국을 전혀 돌보지 않아서 다 말아먹은 것.[51] 현재는 후술할 내용대로 건륭제에 대한 평가가 박해지면서 아버지인 옹정제가 실질적인 중국 최후의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족 왕조에 국한하면 명나라의 융경제가 마지막 명군이다.[52] 사실 태국은 명목상 입헌군주제지 사실상 전제군주제에 가깝다. 왕가와 군부가 한통속이기 때문.[53] 아우랑제브의 이 탄압이 나중에 마라타 동맹의 난을 불러오고 이는 영프 등 서구 열강의 침투를 가속화했다.[54] 쉴레이만 대제 사후 오스만 제국의 명군은 무라트 4세가 유일하다. 대제 말년의 실책이 나라를 기울게 한 셈이다.[55] 오스만 제국은 유목민 전사 집단에서 출발한 나라이며, 이러한 전통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에 따라 오스만의 황제는 전사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수틀리면 직접 전장으로 향할 것이 요구되었으며, 실제로도 창건자 오스만 1세로부터 쉴레이만 1세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사를 직접 지휘해 본 경험이 최소 한 번 씩은 있었다.[56] 은 명군인데, 본인은 아니었다. 다만 형이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을 모조리 숙청했기에 정신병을 얻은 것은 감안해야 한다.[57] 앞에 나온 성경을 보면, 아말렉 출신 병사가 다윗에게 내가 당신의 원수인 사울을 죽였다라고 입을 털다 다윗의 명에 의해 죽었다는 내용이 나온다.[58] 네 황제의 해를 수습한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가 구멍 낸 국고를 회복하기 위해 오줌세 같은 자잘한 간접세까지 만들어 징수해야만 했고, 네로가 방치한 로마군 입영 문제 등도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개선됐다.[59] 라틴(서방)인 대학살[60] 이 사람이 영국 내에서 암군 소리를 듣게 된 이유는 순전히 말이 안 통해서였다. 모어로 독일어를 썼고, 프랑스어, 라틴어에 능통했으나, 문제는 늘그막에 덜커덕 왕위를 이어받은 나라의 언어인 영어는 단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의원들과는 프랑스어라틴어로 대화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고, 결국 이에 지친 나머지 모국인 하노버 선제후령의 통치에 집중하고, 영국 문제는 의회에 맡기고 신경을 끈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독일하노버 지방에서는 성군으로 칭송받지만, 영국에서는 그 물에다 물탄 것 같은 싱거운 사람 취급받는다. 비슷하게 자신이 왕이 된 나라주류 언어를 못했던 칼 14세 요한은 반대로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이쪽은 자신의 모국을 사실상 배신한 덕분에(부르봉 왕정복고를 지지했기 때문에 부르봉 가문의 입장에서는 은인이었던 면도 있지만) 자신이 왕이 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지 1세가 프랑스어가 모어가 아닌 제2언어라서 영국 귀족들과 프랑스어로 대화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 것과 달리 칼 14세 요한은 프랑스어가 모어라서 스웨덴 귀족들 및 노르웨이 귀족들과 프랑스어로 대화하는 것이 매우 편했던 점도 크다.[61] 미국인 이혼녀인 심프슨 부인과 결혼해 그녀를 왕비로 세울려 했지만 당연히 의회와 영국 국민들의 극심한 반대에 시달려 끝내 왕위를 동생 조지 6세에게 넘기고 퇴위했다.[62] 당시 영국은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제2차 세계 대전연합국으로 참전해 수많은 군인들을 잃고,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 전체가 쑥대밭이 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문자 그대로 나치라면 치를 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때 왕이었던 사람이 나치를 옹호하고 있으니 그 반응은 가히... 정작 동생 조지 6세는 버킹엄에 있다가 폭격에 죽을 뻔한 적도 있을 정도로 필사적으로 전쟁을 수습하고 영국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잦은 스트레스와 폭연으로 결국 폐암에 걸려 형보다도 먼저 죽었다.[63] 사실 그래서 앙리 4세는 암군인지 명군인지 정의내리기 어렵기도 하다.[64] 궁전 증축 자체는 그리 큰 재정낭비는 아니었지만 여러 악재 속에서 궁전을 지은 것은 실책이 맞다.[65] 제임스 2세가 이를 비판하며 종교의 관용을 추구했다가 기득권 눈밖에 나서 명예혁명으로 폐위당했다는 건 종교 억압이 비단 프랑스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66] 그런데 사실 이런 반응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다. 왕이 문제고 왕정 자체를 몰아내야한다라고 명분을 세우면 국가 전복 시도로 찍혀 목이 짤리기 딱 좋다. 그래서 왕을 직접 비난하지는 못하고 그 신하들이 무능하니 왕에게 국민의 현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을 봉기의 목적으로 내세운다. 당장 동학농민혁명도 이를 봉기의 목적으로 내세워서 전근대적이라는 한계가 있었다는 평도 듣고 있으니..[67] 대표적으로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있다. 이 전쟁 덕에 나폴레옹 군대는 항상 전쟁을 치를 때 이중전선을 형성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68]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위성국으로 삼은 틈을 이용해 라틴아메리카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69] 본인의 실책과 비스마르크의 노련한 외교술, 용병술의 결과였다.[70] 사실 유전학적으론 큰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자세한 것은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 문서로.[71] 대표적인 사례로 모로코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마찰을 두 차례 빚은 것이 있다.[72] 다만 삼제동맹은 비스마르크의 역량 덕에 성사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73] 어느 정도로 오판했나면, 분명히 정황상 세계대전급으로 커질 조짐이 보이는데도 황제라는 사람이 개인요트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74]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75] 이 사람의 아들이 스페인의 파시스트인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이다.[76] 물론 펠리페 6세도 카탈루냐 독립파에 대해 지나치게 강경한 발언을 했다는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적어도 흑화한 후의 아버지에 비하면 개념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77]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78] 어찌 보면 대한제국 고종하고 비슷한데, 고종 및 조선의 왕족이 합방 이후 이왕 직위를 받는 데에 만족한 결과 독립운동가들한테 외면당했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왕족들의 입국을 불허했다.[79] 물론 전쟁의 근본 원인은 프로이센의 도발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이 선전포고도 없이 슐레지엔을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80] 그 전비가 오스트리아의 11년치 예산이었으며, 만약 남편인 프란츠 1세의 재력이 아니었다면 오스트리아는 이때 망국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8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와중에 쇤브룬 궁전을 건축하는 모습, 100여년 전 자국을 멸망위기에서 구해준 국가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멸망시키는 모습이 그 사례라고 볼 수 있다.[82] 이러한 일이 생긴 이유는 바로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살리카 법에 의거하여 남성만이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제국도 원래는 살리카법에 따라 남성만이 제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던 카를 6세가 국사조칙을 통해 이를 폐지함으로써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위·헝가리 왕위·보헤미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83]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헝가리의 반란은 결코 진압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크림 전쟁 때 영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 러시아의 통수를 친다.[84] 심지어 1880 ~ 90년대에 이르게 되면 독일의 산업역량은 이미 산업혁명의 종주국인 영국과 강대국인 프랑스를 추월할 정도였다.[85] 특히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제국 내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손꼽혔으며, 지역민들조차 굶주림이 가득한 땅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 지역에 대한 착취는 실로 엄청났다. 이 사실을 반영해서인지 하츠오브아이언4의 the great war redux모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는 갈라치아 지역 착취라는 나쁜 국민정신이 붙어있다.[86] 독일 제국이 무너지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87] 본인의 존재가 제국의 구심점이었는데도 전제적인 권력 수호에만 급급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88] 심지어 본인의 존재만이 제국을 그나마 결속시킬 수 있는 요인이었음에도 자신의 사후 제국이 운영될 수 있게 할 체제를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고 퇴보에 불과한 대타협에 만족한 것은 최대최악의 실책이었다.[89] 대전쟁 확대는 빌헬름 2세의 책임이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를 등용해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더욱 파탄낸다.[90]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황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이므로 이에 포함시켜 서술[91] 헝가리는 1925년에 초인플레이션으로 기존 화폐를 갈아엎고 헝가리 펭괴를 발행해 화폐로 사용했다. 그 펭괴화 역시 대전 말의 초인플레이션으로 폐지되어 새로운 화폐가 발행되어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92] 부르겐란트가 오스트리아에 할양되고, 트란실바니아 전역을 루마니아에 넘겨주어 영토가 많이 축소되었고, 수복 운동이 일어난 상황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93] 뮌헨 협정과 빈 중재 등으로 남부슬로바키아와 북트란실바니아, 카르파테니아-루테니아 등을 챙겼지만 전후에 다시 상실한다.[94] 이 보충된 예산은 국왕의 정부가 별장을 사는 데 사용되었다.[95] 아버지가 저지른 추악한 만행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암군이 되었다.[96] 5부에서는 전형적인 악당인 이미지이지만 6부에서 밝혀진 사실은 나름 사정이 있어서 차악을 선택했던 것이다. 해당 문서로.[97] 34화 요술램프 편에서 등장.[98] 비록 자신이 원해서 왕이 된 건 아니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연애에 빠져 업무를 지나치게 소홀히 했고, 연인이 죽자 그녀를 부활시키겠다는 그릇된 욕망으로 타락하여 평화롭게 지내던 섬과 자신의 왕국을 멸망으로 이끌었다.[99] 황제국 은행가의 입발림에 넘어가 자국 경제를 황제국에게 의존시키게 되었고 국가의 모든 통상권이나 외교권 제공권 각종 이권을 팔아 사치를 부렸다. 이로인해 왕족 귀족을 제외한 바그다드의 국민들은 굶주리게 되고 더이상 팔아먹을 국가의 권리가 없어지자 국민을 노예로 수출한다는 미친 짓거리를(한 국가의 수장으로서 미친 짓거리 맞다. 전쟁포로나 외국인도 아니고 자국민을 노예로 파는것이니....)하려다가 친동생 사부마드와 이복동생 알리바바의 혁명으로 폐위된다.(이 둘이 아니었으면 반란으로 피의 축제가 벌어질 뻔했다...) 그후 추방되어 트란 섬에서 트란 문화를 연구하는데 이놈이 한 짓중 국민 노예수출이 라는건 독자들 입장에선 꽤 비판받는 일이라 후일담이라도 존재하길 바랬지만 완결이 날때까지 후일담은 없었다. 만화 마기가 비판받는 이유중 하나.[100] 이래저래 평가가 갈리는 편이긴 하나, 결국은 어디까지나 아스가르드를 통치하고 자식들을 사랑하려는 의도, 딱 그것 하나만 진심이었을 뿐, 그 수단은 여러가지로 잘못되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101] 마음이 없는 자로 절대악 그 자체이다.[102] 원래부터 막장이던 브륀 왕국을 분열시킨 경이로운 암군이다. 특히 후계자 문제를 아주 막장으로 해두었는데 지딴에는 왕비랑 딸을 지킨답시고(단 브륀 왕국에서는 딸 밖에 못낳는 왕비는 경시되고 왕녀는 계승권이 아예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공주로 태어난 자식을 남장시켰다. 자기 대에서 일어난 내란은 변경귀족의 활약으로 종식되었으나 결국 그 문제로 인해 사후에는 여왕의 정통성 가지고 내란이 일어나게 된다. 사실 냉정히 보면 왕국을 위해서 딸이 찬밥 먹는다 해도 왕비 이외의 측실을 두어서 후계자 문제를 제대로 해두었어야 했는데 딸 핑계를 대면서 넘어가 버렸다. 사후에는 그 딸이 여왕이 되어서 팔롱이 싼 X을 치우는데 고생하게 된다. 간혹 독자들 중에서는 그 딸 레긴도 암군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레긴은 암군이 아니라 전대 왕 팔롱이 왕국을 막장으로 만들어서 지지하는 세력이 아주아주 약했다...[103] 왕은 아니지만 왕 다음 권력을 가진 공녀로 일단은 독립되어 자치권을 행사할수 있는 공국의 수장이다. 무력은 가지고 있지만 정치적 식견이나 외교파악하는 능력은 거의 0에 가깝다. 참고로 전쟁에서 한번 졌다고 무책임하게 자살해버린다.[104] 팔롱이나 피그넬리아에 비하면 양반이고 자신의 공국의 통치는 그럭저럭 한 공녀이나 최종목표가 지스터스 7국 지배와 같은 음모를 꾸며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트린다. 이 때문에 소피야 오베르타스와의 관계는 매우 나빠지고 만다.[105] 무한도전 춘향전 특집 때 설정 상 이몽룡 포지션으로서 과거 시험에 응시한 멤버들에게 문제를 출제하는데, 문제는 시험장에서 과거 응시자들을 앞에 두고 먹방을 찍는다거나, 용안이 뭔지를 몰라서 무식쟁이 인증을 제대로 하는 등, 왕으로서 영 아니올시다스런 모습만 보여줬고, 그러면서도 답을 틀린 멤버들의 얼굴에 먹칠을 해대는는 심술을 부렸다. 결국 시험의 말미에 전원 정답을 맞춘 멤버들에게 역관광당하여 온 얼굴에 먹으로 낙서칠당하는 보복을 당했다.[106] 애초에 지배력 자체가 형편없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생존한 기간도 몇 달도 안 된다.[107] 지략과 정치술, 전투력, 지휘력, 행정력 등의 능력 하나는 세계관에서 손에 꼽는 탑클래스이다. 기술력, 경제력에서 훨씬 떨어지는 켈모리안 연합 하나 제대로 제압 못하는 테란 연합의 무능한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냉혹한 성격 때문에 주변에 적을 너무나 많이 만들었고, 덕분에 폭압적이고 가혹한 정치를 펼치는 것은 기본에, 심지어 황태자(후계자)인 아들마저 정적으로 몰아 죽이려 든 것은 크디큰 패착. 결국, 아들을 포함한 자신이 만들어 낸 적들 때문에 자치령은 끊임없는 외부 침공에 시달렸고, 그 중 최악의 적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게다가 최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멩스크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치령과 신민들을 자신을 위한 소모품으로 생각했고, 후계자인 아들까지 죽이려 하는 등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라를 팔아먹었을 위인이었다.[108] 능력도, 무력도 출중하지만 자신이 섬기는 이 탈다림을 장기말로 쓰고 버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섬기는 광신도였고, 백성들을 파멸로 이끌려고 했다. 결국 보다못한 알라라크댈람을 끌어들여 라크쉬르 대결을 벌여 폐위와 동시에 살해당한다.[109] 성격 자체는 상냥하고 선량하며 아직은 14~15세 정도 밖에 안 된 어린 소년이지만 1기 19화까지는 뱀파이어 왕으로써의 책무를 버리고 방랑하고, 왕가의 보물인 루비 반지도 멋대로 훔쳐 인간인 가은이에게 선물로 주는 등 완벽한 암군이었다. 거기에 인간의 피를 빨아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의 왕인데도 흡혈하기 싫다고 왕의 책무를 버린 걸로 추정되어서 뱀파이어 입장에서 보면 정말 답이 없는 왕이다. 다행히 현재는 정신을 차리고 인간과 뱀파이어의 공존을 위해 왕으로써 노력하고 있고 성과도 꽤 거두었지만... 6년 뒤인 고스트 시그널에서는 자신을 해치려 하는 카뮬라와 브리지트의 계략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옆에 붙여 놓는 등 다시 암군끼가 도진다.[110] 이 사람이 황제로서 한 일은 간신인 박중헌에게 놀아나면서 충신이자 명장군이던 김신을 자기보다 인기가 많단 이유로 질투심에 눈이 멀어 반역자로 몰아 자결하게 하고, 그의 누이이자 자신의 황후였던 김선을 비롯한 김신의 일가친척들을 몰살시킨 후 정사는 돌보지 않고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일 밖에 없다.[111] 이 사람은 그야말로 세계관 최악의 암군이다. 무능한 주제에 괜히 툭하면 끼어들기만 해 잘 될일 다 망쳐 동생 기스카르한테 걸림돌만 되었다. 특히 악당 보댕이 이 사람의 멍청함을 이용해 각종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나라일을 얼마나 개판으로 했는지 그가 죽은 뒤 나라는 개막장이 된다.[112] 다만 맨처음부터 암군은 아니었고 나라를 발전시킨 최고의 명군이었다. 그러나 왕실의 혈통이 끊길것이라는 예언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편집증이 생겨 미신을 신봉하고 며느리를 겁탈하는 패륜을 저지르며 이를 만류하는 신하들을 파면하면서 암군이 되었다.[113] 다만 끝에는 후계자 결정을 잘한편이었다. 특히 장남이 워낙 막장이어서 정식 후계자로 임명하지 않아 그가 병이 들어도 장남이 함부로 권좌를 차지하지 못했고 나중엔 정상인 차남을 후계자로 임명하여 나라를 보존할수 있었다.[114] 나이도 10대 초중반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어리고, 심성도 착하지만 어떤 돼지에 의해 암군이 되어버린다. 다행히 사형을 당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115] 비록 초반에는 승승장구 했지만 결국 무리한 전쟁과 패전으로 불의 제국을 거하게 말아먹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의 아들인 주코가 수습을 잘하여 100년이나 세상을 유린한 전범국가임에도 여전히 불의 제국을 강대국으로써 존중받는 국가로써 유지하였다. 즉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성군인샘.[116] 마검 스톰브링거의 영향도 있지만 황제로서 한 처신을 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암군이다. 이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라까지 말아먹었고 본인도 평생 마검 스톰브링거한테 이용당하는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된다.[117] 라이트 노벨로 나오는 여성 군주중에서 암군 오브 암군으로서 선왕 사후 즉위 때는 오르트메아 제국의 계략으로 게르하르트 공작이 사생아 제 2왕녀를 지지하게되어 내전이 일어났는데 불리한 전세에서 주인공 미코시바가 크게 활약하여 역전시키지만 측근인 미하일이 호승심에 닥돌하다 게르하르트 공작파에 붙잡히는 일이 벌어진다. 내전의 주범인 게르하르트 공작은 미하일을 거래로 2왕녀를 인정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루피스는 그 거래를 수락한다.....측근 하나 때문에 내전의 원흉을 제거하지도 못하고 즉위 했는데 내전에서 활약한 미코시바는 믿을수 없고 그렇다고 약속 지켜서 왕국 밖으로 보내버려 타국에 등용되면 잠재적 위협이 되어버린다는 논리로 내전에서 활약한 영웅에게 남작 작위를 주고 미개발 오지에 보내버린다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다.(근데 이건 타인이 제안한 방법을 그냥 그대로 따라한거다..몰랐다 해도 내전의 원흉에게!) 덤으로 내전에서 삽질해서 근신받던 미하일은 측근이라고 2달만에 복직시켜 버린다. 내전에서 미코시바의 활약으로 끌여들인 중립파는 당연히 이같은 여왕의 행보에 제대로 된 충성을 줄수 없었고 더구나 측근이라는 놈들이 죄다 무인출신이라 명령만 내리고 닥달하는 식이라 내란 이후에도 로제리아 왕국은 피폐해져 버렸다.[118] A B 앙리에타의 할아버지. 전쟁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명장이지만 내정은 엉망이었다. 때문에 본편 시점에서 트리스테인은 패권 국가에서 지역 강국으로 위상이 하락했다. 마자리니가 없었으면 아예 약소국까지 추락했을 것이다.[119] 마신임무 2장 3막 이전 한정. 마신 임무 2장 이후로는 군주로서 점차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120] 정무에 큰 관심이 없고 유흥에 몰두하는 등 공식적으로는 암군이 맞다. 하지만 이따금 날카로운 뜻이 담긴 발언을 하는 등, 평면적인 암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2차 창작 등에서는 실제로는 유능하지만 제국의 막장 상황에 회의를 가지고 차라리 멸망하길 원했다는 해석도 나온다.[121] 이쪽은 타국의 백성들이 불쌍하답시고 자국민을 버렸다.... 그 자국민이 쌓은 업보가 심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부전의 맹세로 후계자들을 세뇌 하면서 타국의 보복을 막을 정도의 정당방위도 못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타국의 백성들을 위한 행동들이 결국은 타국의 백성들과 세상의 파멸을 불러왔고 동시에 계속되는 혼란만을 가져오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고야 말았다. [122] 진격거 세계관의 만악의 근원 사실상 능력이라곤 쥐뿔도 없는데 우연히 (자기딴엔) 죄 지은 노예가 거인의 힘을 얻고 자신에게 복수하지 않고 순종하자 그 능력을 썼을뿐이다. 그 노예의 사후 능력이 후계자들에게 계승되지 못했다면 그가 세운 왕국은 주변국의 보복에 100% 망했다.[123] 그냥 꼭두각시. 셰필드가 없을때 트리스테인 게르마니아 연합에 겁을 먹었다.[124] 허무의 마법사라서 왕태자 시절때는 4대계통 마법을 못썼고 이를 모르는 주변은 마력이 없다고 평가해 모친마저 없는 자식 취급하였다. 훗날 비교하던 동생을 암살하게 되고 그 허무함에 무기력하게 지내다가 사망한다. 능력적으로는 암군이 아닌데 결과는 자신의 왕국 갈리아의 초토화[125] 교황인데 재앙(대륙이 하늘로 떠버리는 현상)을 막겠답시고 세계 이주라고 하여 태평하게 살고있는 주인공측 세계(지구)를 정복하려고 했다! 공중전 최강이라는 알비온 용부대가 고작 구식유물에 가까웠던 제로센 1기에게 털리고 수많은 군대조차 어쩌지 못하는 요르문간트를 티거 하나로 상대가 되는 수준으로 말이다! 앙리에타가 지구세계와 대화를 할 생각 없냐고 물었을때는 대화로는 평화를 이룩할수 없고 기습공격 운운했다. 앞에 있는 죠세프는 최소 자국 하나만 망쳤는데 이놈은 최소 다섯 국가를 지옥으로 만들 뻔했다... 지구 침공을 제외해도 왕인 타바사를 납치하는 등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였다.[126] 인품은 훌륭하나, 왕도 인섬니아의 시민들과 킹스글레이브 단원들 입장에서는 암군으로 불려도 할 말이 없다. 자신이 어리석은 왕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본인도 인정한 부분.[127] 작중에서는 끊임없이 성군으로 미화되지만 실상은 수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비는 커녕, 후궁도 될 수 없는 미천한 신분의 여자를 정비로 삼아 나라 전체를 내전으로 몰아넣은 명백한 암군이다.[128] 딸과 사위, 외손자에게 저지른 악행 때문에 본인은 물론 백성들이 몰살되고 왕국까지 파멸했다. 또한 그동안 인간을 수호하는것을 사명으로 여긴 사위 바란이 이로 인해 배신감을 크게 느끼고, 제대로 타락하여 마왕군에 들어가게 되어 다른 인간 국가들까지 피해를 입게 된다.[129] 드라마상에서는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북벌만 추구하는 암군의 모습이 추가되었다. 현실의 궁예도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드라마상의 모습은 작가의 창작이 꽤 들어갔다.[130] 비록 왕은 아니지만 지구의 신인 위치에서 블루의 작중 무능함과 뻔뻔해 보일 태도 덕분에 러블리를 포함한 프리큐어들이 아니였다면 자신이 연관된 왕국과 지구는 끝장 났었을 수준이었다.[131] 성국의 성황으로(성국은 투표로 뽑는다.) 성품은 좋은 편이나 타인을 의심할줄 몰라서 개혁으로 나라가 잘 되어가고 있다는 상소에 곧이대로 믿어 성국을 더욱 피폐하게 되었다. 그렇게 신하들의 계략에 의해 이용당하던 중 현자의 충고에 성국의 상황을 아주 뒤늦게 알게 되고 자진 퇴위하여 투표를 통해 다음 성황은 제대로 된 성황을 뽑을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무산되고 만다. 변호하자면 성국의 부패가 쌓이고 쌓인게 너무 커서 뭉클리아는 커녕 평타치는 군주라고 해도 커버가 불가능했던 상황.[132] 성국의 뭉클리아 다음의 성황이자(허수아비인 제로경은 퇴위되었다.) 최강의 검 성국의 초대 성왕이다. 출신은 상급기사 출신으로 이름 그대로 금수저다. 히어로 메이커 세계관의 이어 후술할 베르미누 3세와 맞먹는 암군이며 결과로 따지면 성국을 아예 아작내 버리고 신이 인류에게서 성법을 거두는 설령 성국이 막장이 아니어도 커버가 불가능한 암군이다.[133] 제국의 황제로 골드수저와 다르게 멀쩡하게 돌아가는 제국을 즉위 2년만에 내란 상태로 만들었던걸 보면 질이 더 나쁘다. 즉위 초기 공물 안바친다고 세날에 쳐들어갔는데 세날은 이길수 없다는 군경험자인 힐리스의 직언에도 쳐들어갔다가 대패해 겨우 살아돌아왔다. 그 상황에서 당시 왕세자였던 폐륜왕의 이간질에 넘어가 자신을 지키는 힐리스를 죽이려고 했다!(힐리스는 원정으로 대패한 베르미누를 지키다가 오른팔을 잃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힐리스 휘하의 기사 귀족들이 다스리는 영지민들을 학살하였고 지왕의 혼을 풀려는 대형 사고를 칠 뻔했다. 결국 이번에는 제대로 빡친 힐리스가 근위대 100명을 1초컷으로 날려버리고 베르미누에게 마지막 직언을 올린 뒤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봉인된 지왕의 혼을 홀로 지킨다. 이후 힐리스와 인연이 깊었던 이복형제 후안이 제국의 충신 힐리스를 죽였다며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힐리스가 없어 후안에게 대패하고 만다. 그후 외척인 숙부 머튼경에게 의지하다 장식뿐인 자리에 올라 명분으로만 이용당하면서 약을 먹고 폐인이 된다. 덧붙여 베르미누 전대 황제는 평민인 힐리스를 제대로 기용해 왕권을 강화했다. 사후 베르미누 3세가 아닌 제국의 미친 황제로 불린다.[134] 약소국인 자국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해상 패권을 추구하다가 천랑국을 자극해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패전으로 나라가 멸망하자 포로가 되어 참수된다.[135] 간음이 일상인데다 매우 잔혹하여 점령지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포로를 팽살하는 것을 즐긴다. 본작의 최종 보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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