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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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배경
4. 불길한 징조
5. 복수의 시작
5.1. 논란?
6. 무자비한 숙청
7. 결과
8. 기타
9. 미디어에서



1. 개요[편집]


갑자사화()는 1504년(연산 10년) 연산군의 친어머니 폐비 윤씨와 관련되어 많은 선비가 숙청된 사건이다.


2. 내용[편집]


'사림이 화를 입었다'는 뜻의 사화라는 명칭처럼 사림의 피해야 당연히 있었지만, 훈구파도 무사하지는 못해서, 윤필상, 이세좌, 이극균, 성준 등 화를 당한 사람들이 많고, 부관참시를 당한 한명회, 한치형, 정창손, 심회 등도 역시 훈구파이다.

즉,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특유의 폭력성과 잔인성을 발휘하여 사림, 훈구 가릴 것 없이 신하들을 싹 쓸어버린 숙청으로, 연산군 기획, 연산군 각본, 연산군 주연으로 벌인 친위 쿠데타의 결정체라 할 법한 대사건이다.

아울러 갑자사화가 일어난 뒤로 연산군의 타락이 가속되었다. 무오사화 이후부터 갑자사화 이전까지는 연산군이 사치나 방탕함을 그리 크게 내보이진 않았으며, 소극적으로 나서긴 했지만, 신하들도 연산군이 비행을 저지른다 싶으면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무오사화로 삼사의 왕권 견제 기능이 약화된 상태에서 갑자사화까지 겹치자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사실상 사라졌고, 신하들은 연산군의 전제정치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연산군은 권력에 취해 더욱 폭주하였고, 급격히 타락했다. 결국 거침없이 사치, 방탕, 독재적인 행보를 이어갔던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인해 비참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갑자사화 때 숙청당한 훈구 대신들은 계유정난으로 인해 일어났던 단종의 폐위, 그리고 단종의 비참한 죽음에 일조했던 자들이기도 했다. 성공한 쿠데타를 했을 뿐, 왕실을 능멸한 이들이라 할 수 있는데, 연산군의 왕권 극대화 작업의 마무리였던 갑자사화에 휘말려 숙청을 당했으니 자업자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종 입장에선 사후에나마 한을 풀게 된 셈이라 할까. 만약 그 후에 연산군이 타락하지 않고 연산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면, 변수에 따라서는 훈구 대신 숙청으로 인한 훈구파 몰락이라는 상황에 힘입어 단종의 복권이 (연산군 사후의 일이라는 건 변함없지만)[1] 실제 역사보다 앞당겨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3. 배경[편집]


대다수 사람들은 이 사건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어머니가 어쩌다 죽게 됐는지 알게 된 연산군이 폭주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알고 있으며, 이는 왕과 비 같은 유명 사극의 영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미 재위 초반부터 폐비 윤씨가 어쩌다 죽게 됐는지 알고 있었으며, 이를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설도 있다.

연산군이 일단 아들로서 어머니의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무오사화로 대간들을 제압하는데 성공했고 성종과는 달리 강력한 왕권을 추구해왔던 연산군은 대간들이 약해져 이제 쓸모가 사라진 훈구 대신들을 슬슬 토사구팽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반면, 무오사화를 통해 '아니 되옵니다'를 앵무새처럼 반복했던 대간#臺諫을 억누르는데 성공한 연산군이 독선적인 행보로 일관하며 사치와 방탕 등을 일삼자, 처음에는 연산군과 함께 대간들을 손봐주는 일에 동참했던 훈구 대신들이 '이건 좀 심한데'라며[2] 대간들과 연합 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이에 연산군폐비 윤씨가 쫓겨나고 사사된 일을 명분으로 삼아 나머지 대간들과 훈구 대신들을 모두 숙청해버린 일이 바로 이 갑자사화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일단 연산군이 자신의 친모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갑자사화 한참 전인 즉위 직후다. 연산군은 명나라에 보내기 위해 아버지 성종의 행장[3]을 짓다가 폐비 윤씨의 아버지인 윤기견의 기록을 보고 "여기에 판봉상시사 윤기견(尹起畎)이란 자가 누구냐? 영돈녕 윤호(尹壕)[4]의 이름을 기견(起畎)이라 잘못 쓴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는데[5] 신하들이 "그 사람은 폐비 윤씨의 아버지입니다."라고 하자 연산군은 자세한 정황을 보고받게 되었고, 실록에서는 그날 연산군이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출처1-1]

임금의 건강을 그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왕조 사회에서 왕이 밥을 안 먹었다는 건 절대 가벼운 일이라 할 수 없다. 현대에도 대통령의 건강은 국가 기밀로 취급될 만큼 중요한데, 그보다도 넘사벽급으로 중요한 왕조 사회의 국왕이 끼니를 거른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아들로서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상세히 듣게 된 연산군 입장에서도 밥이 입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자기 어머니가 어쩌다 죽게 됐는지 알게 된 연산군은 일단 몇 년간은 폐비 윤씨와 관련한 시를 지어 바치게 하고[6] 묘지 이장이나 제사등 친아들이 할 만한 몇 가지 조치들만 취하고 반대자도 크게 책망하지 않고 설득하는 등 복수극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7] 다만 폐비 윤씨의 사약을 들고 간 이세좌를 시켜 폐비 윤씨의 묘 복구를 하게 하는 등 몇몇 조짐을 드러내긴 했다.

하여튼 연산군이 어머니가 죽게 된 경위 등을 듣자마자 폭주해서 급작스럽게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이는 윤씨를 폐비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움직였던 사람이 연산의 아버지 성종이라는 사실과 폐비와 관련된 성종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성종은 윤씨를 폐비해야 하는 사유로 '곶감과 비상을 같이 두더라, 사람 해치는 법을 적은 책을 소중히 간직하더라,[8], 날 보면 인상이 험악한 것은 물론이고 내 발자취를 찾아서 없애버린다고 하더라.' 같은 자신의 체험담을 근거로 삼았다.[9]

막장까지 치달은 상황에서도 연산군이 딱히 성종에게 반감을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연산군과 성종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이 즉위하자마자 성종이 아끼던 사슴을 쏴죽였다는 것은 실록에 기록된 사실이 아니라 야사일 뿐이다.[10]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어머니가 죽은 것은 분명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 사유가 아버지를 해하려 들었던데다, 수가 틀리면 연산군 본인도 세자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는 역적행위이고, 심지어 그것을 아버지가 직접 인증했다면 기분은 더러울지 몰라도 마구잡이식 보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어려웠을 것이다.

3.1. 피 묻은 적삼 야사[편집]


연산군일기에서 갑자사화의 배경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피묻은 적삼이다. 보통 연산군이 등장하는 사극을 보면, 연산군이 자신의 외할머니 신씨를 통해 받은 폐비 윤씨의 피 묻은 적삼을 보고 분노해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월탄 박종화의 장편 역사소설 <금삼의 피>에 등장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현재까지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대중 매체에서 그리는 연산군의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형성된 것이다.[11]

사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연산군일기에 없는 내용으로 민간에 떠돌던 야사다. 좀 더 정확히는 연려실기술에서 기묘록을 인용한 내용으로 더 자세히 서술하면 '폐비 윤씨가 사사되면서 흘린 피가 묻은 적삼을 자신의 어머니인 신씨에게 맡기면서 자신의 원통함을 알려달라고 했고, 인수대비가 죽자 신씨는 궁궐 나인들을 통해서 폐비 윤씨의 죽음과 적삼을 알렸으며 자순 대비를 친어머니로 알던 연산군은 슬퍼한 뒤 시정기를 찾아서 대신들과 관련자를 죽였다'고 쓰여져 있다.

여기서 보면 알겠지만 실록과는 모순된 기록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당장 폐비 윤씨의 죽음으로 인하여 일어난 갑자사화 때 인수대비는 살아 있었고, 실록에는 연산군이 즉위한지 몇 달만에 폐비 윤씨의 일을 알았다고 서술하고 있으며,[출처1-1] 실제로 갑자사화 이전에도 폐비 윤씨의 제사나 무덤 이장을 여러번 시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산군 일기에는 연산군이 외할머니를 만난 기록이 없다. 임사홍만 만났을 뿐이다. 그리고 이 임사홍 접촉 자체가 신빙성이 부족한 게 임사홍은 후술하겠지만 갑자사화때 이극균과의 친분이 걸려서 죽을 뻔한 사람이다.

야사에 불과한 피 묻은 적삼은 이렇듯 신뢰할 수는 없는 이야기지만, 그 극적인 효과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널리 퍼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엇보다도 이 설이 히트를 친 데에는, 박종화의 역사 소설 《금삼의 피》에 등장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묘사가 상당히 임팩트가 있는지, 드라마 《장녹수》, 《왕과 나》 등 현재까지 사극에서 써먹고 있다. 그 외에도 《왕의 남자》 등에서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혹은, 실록이랑 맞지 않는 점이 걸리기 때문에 '폐비 윤씨가 죽은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피 묻은 적삼과 함께 진상이 훨씬 더 끔찍했음을 알고 폭발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4. 불길한 징조[편집]


이렇듯 극적인 야사와는 별개로 연산군에게 뭔가 응어리진 것이 수 년간 묵혀져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다 연산 9년(1503년) 음력 9월 11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양로연이 열렸고, 연산군은 연회에 참석해서 신하들에게 술을 받고 답례 술을 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조판서 이세좌연산군의 답례 술을 마시다 실수로 반을 흘려 연산군의 옷을 적셔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궁으로[12] 돌아간 연산군은 즉시 승지들을 불러서 이 사실을 말하고는 이세좌를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이세좌는 자신이 실수로 술을 흘린 거라고 해명했지만 연산군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4일 뒤인 15일에 이세좌를 파직시켜 버렸다. 이 파직에 윤필상 등 대신들이 그날 이세좌가 "내가 술을 못하는데 오늘 연산군의 답술은 다 마셨다"고 자랑한 증언을 들어가며 단순한 실수였다고 이세좌를 변호했지만, 연산군은 18일에는 정승들에게, 19일에는 대간들에게 이세좌 건을 질책하더니 다음날인 20일에는 이세좌를 유배형에 처했는데, 처음에는 전라남도 무안이었다가 이틀 뒤에 함경도 온성으로 보냈다. 현대처럼 도로가 정비된 것도 아니고 빠른 교통 수단은 더더욱 없었던 시대에 이세좌로 하여금 한반도의 최남단과 최북단을 오고 가게 했던 것이다. 이에 대신들은 당혹해하며 불안감에 휩싸였는데, 이세좌는 20여 년 전 폐비 윤씨가 마실 사약을 들고 갔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달 뒤인 음력 11월 20일에 창경궁에서 인수대비자순대비연산군에게 잔치를 베풀어줬는데, 이 자리에서 연산군이 자기가 입던 옷과 신발을 신하들에게 나눠주는 술주정을 부리다가 성준의 외손자이던 참의 한형윤을 이조참판으로 승진시켜주는 깜짝 인사를 단행했다.

다음날 신하들이 감사와 그날 있었던 신하들의 술주정을 사과드리러 왔을 때 연산군은 이세좌의 경우와 달리, 오히려 자신이 술자리에서 만취한 일을 부끄러워하며, 자신이 잔치에서 약속했던 선물과 신하들의 승진을 번복하지 않음으로서 신하들을 달랬다.[13]

그리고 넉 달 뒤인 연산 10년(1504년) 음력 1월 11일 연산군은 이세좌도 풀어주었고 다시 두 달 뒤인 음력 3월 3일 이세좌가 한양으로 올라와서 감사를 표시하자 연산군은 이세좌에게 술을 올려주며 "이것은 네가 전일 기울여 쏟은 것이다."라는 농담까지 건네며 화가 다 풀린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에 대신들은 연산이 단순히 홧김에 심술을 부린 것으로 해석하여 안심했지만...

5. 복수의 시작[편집]


연산 10년 음력 3월 11일, 간택령이 떨어졌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홍귀달에게도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홍귀달은 이를 거부하면서 들여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해명하는 글을 올렸는데 이걸 본 연산군이 분노한다. 그런데 연산군은 갑자기 "이것들이 오냐오냐하니까 감히 내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네? 이게 다 그때 이세좌에게 제대로 벌을 안 줬기 때문이야!!"라고 하면서 뜬금없이 이세좌를 물고 늘어져 이세좌를 유배 보내고 그 아들과 사위들까지 모조리 곤장을 쳐서 유배 보냈다.

그리고 연산 10년 갑자년(1504년) 음력 3월 20일연산군은 자신의 친어머니 폐비 윤씨를 모함했다는 이유로 아버지 성종후궁귀인 정씨귀인 엄씨를 끌고 와서, 창경궁에서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 이것도 모자라서 귀인 정씨의 아들이며 자신의 이복 남동생인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을 잡아오게 시키는데, 연산군은 이항과 이봉이 창경궁으로 오자 주변인들을 모조리 내보냈다.

그리고 이항 이봉 형제에게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가리키며 "죄가 매우 큰 여자들이니 몽둥이로 때리라"고 시켰다. 즉 자식들더러 자기 어머니를 때리라 시킨 것이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이 두 형제에게 지금 연산이 때리라고 시킨 여자가 누군지 알려줄까봐 미리 자리를 옮기게 한 듯 하다. 이항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때렸으나 이봉은 상황을 눈치채고 끝내 몽둥이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본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계속 몽둥이질을 하도록 지시해서 결국 두 귀인 모두 그날 사망하고 말았다.

사실 이 내용이 상당히 뒤죽박죽인데, 당시 실록 내용을 보면 연산군은 이봉과 이항을 옥에 가두었다가, 다음에는 장 80대를 치고 유배하라고 전교했다가, 다시 둘을 창경궁으로 잡아 오게 했다. 그리고 이봉과 이항은 삼경(밤 11시 ~ 새벽 1시)이 되어서야 궁 밖으로 나온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을 모두 물리쳤다라고 나온다. 그리고 이후에 연산군의 관련 행동이 시간을 무시하고 이어지는데[14] 이것은 실록 편찬 시기에 정리되어서 추가되었단 이야기이다. 하지만 후술할 연산군의 행적으로 보아, 당시 연산군이 절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고, 때문에 실제로 연산군이 명령 자체를 감정적으로 뒤죽박죽 지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록청에서 정리하고 정리해서 저 정도로 맥락을 맞춘 것일 정도로 그날 밤 연산군은 정상이 아니었다.

하여튼 그렇게 둘을 죽인 연산군은 계모 자순대비의 침소를 찾아가 침소 앞에서 검을 뽑아들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쳤다. 이런 공포 분위기에 시녀들은 모두 도망치고, 자순대비는 겁에 질려 나올 생각을 못했다. 왕비 신씨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연산군을 붙잡고 울며 말렸고 연산군은 결국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후 연산군은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대왕대비전으로 끌고 간 후 이항을 시켜 할머니 인수대비에게 억지로 술을 올리게 했고, 인수대비는 병중이었는데도 억지로 술을 받았다. 연산군은 다시 술을 마신 인수대비에게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라고 협박하자 인수대비는 경황이 없어, 베 두 필을 줬다. 이어 연산군은 인수대비에게 "어째서 내 어머니를 죽였냐"는 등의 매우 불경한 언사를 내뱉으며 할머니를 위협했다고 한다.

당시에 인수대비는 장례를 미리 준비할 정도로[15] 위독한 상태였는데, 손자의 폭력적인 행동과 폭언의 충격 때문인지 인수대비는 불과 한 달 후인 음력 4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이때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서 인수대비가 충격을 받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이건 실록 어디에도 없는 야사다. 연려실기술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실록에서는 단지 '불손한 말이 많았다'라고만 표현하고 있다.

이 '불손한 말'이 말 그대로 욕을 쏟아내며 모독한 것인지, 아니면 기본적인 예의 지킨 채 폐비 사건을 언급하며 인수대비를 공격한 것인지는 조금 불분명하다. 그러나 전자는 물론 후자라고 해도, 임금이 대왕대비의 침전에 쳐들어가서 깽판을 친 것 자체만으로도 당시 조선 왕실에선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그 뒤에 3경(23시)에 이항과 이봉을 창덕궁에서 내보냈고, 연산군은 내수사(내관)들을 시켜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젓을 담가서해병젓갈 산과 들에 뿌려버리게 하고 일주일 뒤인 3월 27일에 폐서인시켜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연산군의 협박에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때린 이항에게 '명령대로' 제 어머니를 잘 때렸다는 이유로 말을 선물한다. 그리고 이날부터 연산군의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 이항과 이봉은 1주일 뒤인 3월 27일 어머니가 폐서인 될 때 연좌되어서 이항은 제천, 이봉은 이천으로 귀양을 갔고, 1년 뒤인 연산 11년 음력 4월 25일에 외딴 섬으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결국 두 달 만인 연산 11년(1505년) 음력 6월 15일 어머니의 투기한 죄에 연좌해 두 사람 다 사사되었다.[16]


5.1. 논란?[편집]


  • 죽었다는 2명은 이후에 다시 서인으로 내려지는 장면이 실록에 등장한다?
연산군 옹호파들은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때려죽인 건 야사라고 하거나, 혹은 이런 차이 때문에 "사실 둘은 자살했고 살해된 것은 조작"이라는 설을 주장하는데, 사실 살해 장면도 생생하게 실록에 나온다.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 신분과 명예를 박탈하는 건 조선시대에 자주 있는 일이었다. 이 케이스는 사형을 내린 것도 아니고 고문치사에 가까운 일이니까 사망 후 신분 박탈이 일어나는 건 모순은 아닌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영조 때의 조태구, 유봉휘 등은 경종 때 죽은 사람들인데 영조 31년이 되어서야 역적으로 몰려 추죄되었고 이광좌도 죽은 지 20년 가까이 돼서야 직첩이 거둬졌다. 선조 때 죽은 정개청의 사당은 숙종 때까지 허물어졌다가 세워졌다가를 반복했고 윤선도, 윤증고종 시기까지 역적으로 몰렸다가 유현 자격이 박탈되었다 말았다 등을 반복했다.

다만 이런 경우는 정치적 입장의 문제로, 이런 사례의 절대 다수는 죽은 다음에 세월이 흐르면서 생전의 평가가 달라지고, 평가하는 세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생긴다. 일주일 정도 차이를 두고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에 논란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연산군의 의사가 바뀌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서 문제의 두 사람이 죽은 것은 3월 20일이고, 서인으로 직첩이 떨어진 것은 3월 26일이다. 고문치사가 되었건 뭐가 되었건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이 처리는 반역죄 수준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그 사망한 사람이 후궁 직첩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 이상하다. 그냥 어쩌다가 일주일 정도 늦어진거 아닌가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조선 왕실의 시스템을 고려하면 택도 없는 소리다.

무엇보다 이 시기 연산군의 행적을 보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이 시기의 연산군은 그야말로 미쳐 날뛰었다. 이세좌과 홍귀달을 처벌하라고 하지 않은 사람들을 다 잡아오게 했고, 대간들이 이세좌와 홍귀달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치죄했다.[17] 그리고 이봉과 이항은 이미 곤장 맞고 유배를 떠난 뒤였다. 이런 상황에서 후궁의 직첩을 거두라는 이야기는 연산군이 하지 않아도 당시 관료들이 했어야 했다. 연산군이 나중에 이걸 빌미로 "왜 직첩을 거두라 하지 않았느냐"며 죽이려고 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때문이 이 사건에 의문이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실록을 자세히 보면, 3월 23일 회묘의 묘호를 고치는 것을 논하는 기사에 이미 연산군이 "그때의 일(폐비 윤씨 폐위 및 사사)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일찍이 듣건대 그렇게 한(윤씨를 모함한) 자들이 있다고 하니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백년안에 처치 못하면 내가 뼈를 가루로 내도 못잊을거다. 그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선왕의 후궁으로 상을 지내야 하는가? 그 소생들이 상복을 입게 해야하는가? 강등해야하는가?"라고 묻고, 다음 기사에서 승지들이 "죄가 있으면 살았어도 내쳐서 후궁 지위를 유지할 수 없는데, 죽었다고 후궁의 예로 장사지낼 수 없고, 아들들도 서인에 해당하는 상복을 입어야 합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3월 25일에는 연산군이 "아버지는 어머니를 폐비해서 죽일생각이 없었는데 옆에서 이간질해서 그런거라니까? 윤씨 추숭 교서에 참소한 놈들이 나쁜거라고 다시 지어올려"라고 지시하고, 같은날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숭하는 교서를 내리는 기사에서도 "그 일을 얽어만든 사람이 아직 선왕의 후궁 반열에 있으니 곧 죄주고,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서인으로 삼을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어서 꾸준히 폐서인 절차가 진행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후궁이 죽고 6일이 지나서 서인으로 폐한 것은 일이 처리된 결과가 그렇게 소요된 것이고, (20일 밤에 사태가 벌어졌고 23일에 강등을 논했으니) 실질적으로는 2일만에 이미 연산군은 두 사람의 상제와 폐비 윤씨의 추숭 교서를 통해 두 후궁을 폐서인하라고 꾸준히 압박을 가했고 대신들도 눈치껏 따른 것이다.

6. 무자비한 숙청[편집]


폐비 윤씨의 추숭을 시작으로 연산은 당시 윤씨의 폐출에 동의한 신하들을 모두 찾아내라는 어명을 내리고 그들을 모두 사사시켰다. 먼저 사약을 전달한 이세좌에게 자살하라는 명을 내렸고[18] 폐비에 동의한 윤필상[19]에게도 자살을 명했다.[20] 윤필상은 임금의 명을 듣고,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라는 뉘앙스의 말을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더더욱 빡쳐서 윤필상을 단순히 죽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래의 글 참조.

뒤이어 이미 사망한 남효온,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어세겸, 심회, 이파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지고 한치형은 무려 부관능지당했다. 또한 폐비에게 사약을 들고간 이세좌가 광주 이씨라는 이유로 이극균 등 광주 이씨들도 상당수 쓸려나갔다.[21]

이 중 이극균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사이의 기간에서 좌의정을 한 3인방[22] 중 하나로, 역시 폐비론에 힘을 쓰지 못한 것과 좌의정을 하면서 자기에게 맞섰다는 이유로 연산군에게 개발살이 났다. 그런데 죽으면서 "신은 젊었을 때부터 변방에서 일했으며, 나라의 크고 작은 일에도 전심전력을 다하여 섬겨왔습니다. 그러기에, 신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죽을 죄는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를 보고받은 연산군이 분노한 건 당연지사.

연산군은 이극균의 8촌 이내와 그를 찾아뵈었던 무사들을 모조리 변방으로 내쳐버렸고 그들이 변방으로 내쳐진 후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이었다. 연산군 특유의 잔혹한 성정 때문에 후환을 남길 수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대신 성준도 폐비와 관련된 익명서를 바쳤다는 게 발각되어 목이 잘렸고 집안이 박살났다. 당시 성준의 나이는 68세에다가 병이 있어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기에 대궐 문밖까지 업고 왔는데 이를 보고받은 연산군이 "대궐 안에서까지 업고 올 수 없다"라고 명령했으나, 그 전에 내린 명령 탓에[23] 옥졸 5명이서 끌고 와야 했다.

이후로도 피의 숙청은 계속되어 연산군에게 밉보였던 이들이 모두 별별 이유로 목이 달아나고 사사당했으며, 이미 죽은 대신들의 재산은 몰수되고 남은 가족들도 대부분 사사당하는 피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더불어 죽은 대신들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도 처벌받아 이장곤, 이윤검 등이 처벌받았고 이극균과의 친분이 있다하여 유자광임사홍(?!)'도 참수해야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둘은 연산군의 명으로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 귀양길을 정말로 떠날 뻔 했지만[24] 그냥 연산군이 명령을 거두고 넘어갔다.

궁중에서는 국문받는 이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여기에 이세좌 등 이미 벌을 받고 자진하거나 사사된 이들의 무덤도 다시 파헤쳐 능지하거나, 아예 뼛가루로 갈아버린 다음 바람에 날려버렸다(碎骨瓢風, 쇄골표풍)고 한다. 특히 연산군이 '갑자 6간신'이라 명한 이세좌, 윤필상, 성준, 이극균, 한치형, 남효온의 집은 모두 철거한 다음 그 자리에 물을 채워 연못으로 만들었다(破家瀦宅, 파가저택).

7. 결과[편집]


'역사저널 그날'과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이라는 책에 따르면 무오사화 때 처벌받은 사람은 약 51명이었고 그 중 6명만 처형됐지만, 갑자사화 때 처벌받은 사람은 무오사화 때보다 약 4배가 넘는 239명이었으며 이 중에서 122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관참시, 부관능지를 당했다고 한다. 갑자사화 때 처벌받은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죽거나 사후 처형을 당한 것이다.

다만 여기서 이야기한 머릿수는 어디까지나 역사상 기록에 남은 사람들을 기준으로 센 숫자이다. 기록에 남지 않은, 말하자면 연좌제에 따라 싸그리 엮여서 처벌을 받은 사람들까지 일일이 기록에 남진 않았기에 그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처벌 받은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의 숫자는 아마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최대 추정치로는 무려 3,000명(!)이 넘어간다는 설도 있다.

이 갑자사화 때는 사림파보다 훈구파들이 더욱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죽은 사람의 머릿수로만 따지면 삼사를 주도한 사림파가 더 많긴 한데 질적인 피해로 따지면 훈구파들이 입은 타격이 더 컸다.

갑자사화 후반기에 무오사화의 생존자들을 죄다 죽이라고 해서 사림의 희생이 커졌고 훈구 대신들이 전부 연산군에 의해 사사당하고 가문도 멸문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정말 사육신 사건 때보다 더 처참했으며 농담이 아니고 8촌까지 싸그리 말살당한 집안도 있다.

이렇게 유례가 없는 피바람에 그동안 줄기차게 '아니 되옵니다'만 외쳐왔던 삼사는 물론이고 소극적으로나마 연산군에게 자기 절제를 당부했던 훈구 대신들도 연산군에게 완전히 제압을 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연산군이 무슨 일을 하던 감히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냥 '지당하옵니다' 이외의 말은 꺼내지 못하는 앵무새가 되어버렸고, 마침내 연산군사림파와 훈구파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전무후무한 절대 권력을 거머쥐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연산군이 그 절대 권력을 쥐게 되자 해야할 업무는 하지 않고 사치와 향락만 일삼았다는 것이다. 결국 그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하라는 나랏일은 안 하고 그냥 놀아제끼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내정은 피폐해지기 시작했으며 연산군 본인도 중종반정이라는 파멸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앞서 내용에 말했듯이 지나치게 잔혹한 처벌들이 시행되면서 사건의 참혹성을 증가시켰으며, 갑자사화를 통해 성종의 재위 기간에 형성되었던 신진 사림들이 수난을 당하면서 이들의 정치ㆍ학문적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갑자사화를 거치면서 자연현상을 토대로 임금에게 간언하는 재이론이 큰 타격을 받았다. 조선에서 재이 현상은 임금이 자신의 정치를 되돌아보게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 중 하나로 작동했는데, 갑자사화를 거치면서 연산군은 자신과 재이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했고, 신하들이 자신에게 재이의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처벌했다. 그 결과 연산군 대에는 각종 자연현상의 보고가 급격히 줄었고 정치적 책임에 대한 논의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를 둘러싼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8. 기타[편집]


갑자사화 후 폐비론에 반대한 임사홍이 중용되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임사홍을 갑자사화의 실질적 주동자라고 여기기도 했으나.. 이극균하고 친분으로 처벌위기까치 처하는 등 여러가지 정황을 보았을 때 갑자사화의 주동자는 연산군이며 임사홍은 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이극균과 연좌되어 죽을 뻔한 사람중 하나였다. 여하튼 그는 그렇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이 찍혀 결국 중종반정 때 살해당했다.

무오사화 이전까지는 후한 평도 들으며, 나름 괜찮은 정치 활동을 하였던 연산군은 이후 완전 폭군으로 돌변해서 매우 난잡한 정치를 펼쳤다.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절대 권력을 손에 넣고 비뚤어졌다'는 평이 대세이나 일부 동정론 및 재해석도 잔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산군의 폭정을 절대로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그런 동정론을 펼치기엔 연산군이 너무 막나간 것도 사실이다.

갑자사화와 이후의 숙청 때 화를 면한 인물 중 허종과 허침 형제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인 윤씨의 폐비 논의가 있을 때, 두 형제는 누이의 충고를 듣고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서 논의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후 갑자사화 때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는 야사이다. 다만 실제로는 두 형제는 참석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아예 폐비 자체에 반대했었다. 다만 폐비를 최종 결정할 때는 운좋게(?) 두 형제의 할머니의 장례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다. 청계천에는 두 형제가 말에서 떨어진 장소라는 종침교가 있었다고 한다. 이름은 형제의 이름에서 따온 것. 형제 중 형 허종은 갑자사화가 일어나기 전인 1494년에 이미 사망했다. 허침은 사화에 휘말리지 않고 벼슬살이를 계속 하다가 1505년에 사망했다. 실록에 있는 허침의 졸기에는 '늘 임금의 음황(淫荒)하고 정사가 문란하되 바로잡아 간하지 못함을 근심하더니, 드디어 고질이 되어 병이 위독해졌으되 약을 들지 않고 ‘빨리 죽고 싶을 뿐이다.’ 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상황에 대해 허침이 심적으로 상당히 괴로워하고, 사관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이 이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 것을 표현한 듯하다.

명나라의 강남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온 뒤 표해록을 집필한 최부도 이 때 목숨을 잃었다. 최부는 김종직에게 사사하였고 이 때문에 김종직 일파로 몰려서 무오사화 때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유배를 갔다가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잔여 세력을 제거하라는 연산군의 명령에 참형을 당했다.

무오사화때와 달리 뒷처리가 꽤 무난하게 끝난다. 사림들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세조의 정통성 논란때문에 사안이 복잡해진 무오사화와 달리 갑자사화는 조선의 훈구 공신세력들까지도 폐비 윤씨 사사에 연관되어 있어서 함께 피해를 본 사건이기 때문.

그 원인이야 통설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연산군이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한 발단이 된 사건이라 한국사 강사들 사이에서는 갑자기 일어났다고 하여 갑자사화라는 식으로 암기하게 하기도 한다.

9. 미디어에서[편집]


앞의 무오사화에 비해 규모가 더 크고 출생의 비밀, 고부간의 갈등 등 막장 드라마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연산군 시절을 다루는 드라마에서는 무오사화가 종종 짤리거나 비중이 축소되는 일이 벌어져도 갑자사화는 무조건 중요하고 비중 있게 다룬다. 게다가 갑자사화 이후 연산이 본격적인 폭군이 되기 때문에 연산군 시대 사극에서 가장 중요한 엑기스를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9.1. 한명회[편집]


병석에 누워있던 인수대비가 술상을 들고 처들어온 연산군을 진정시키려고 해명하자 연산군의 패드립에 결국 분노해 쉬지 않고 나무라다 연산군의 포효와 동시에 소반 킬 당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9.2. 왕과 비[편집]



상당히 잔인하게 나온다. 일단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의 가체를 직접 잡고 고문장으로 끌고 간다.[25] 그 다음 혹독하게 고문을 하는데 주리틀기와 단근질은 기본. 귀인 엄씨는 그래도 무서워서 떨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정씨는 오히려 연산군을 도발하는 바람에 빡친 연산군이 휘두른 갈퀴에 얼굴을 맞아 그 얼굴이 찢겨 살점이 너덜너덜해졌다. 잔혹한 모습에 이를 지켜보던 내관들도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려 하자 연산군은 '어느놈이 고개를 돌리느냐? 두 눈을 부릅뜨고 똑똑히 보아두어라. 내 어머니가 당하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뒤늦게 입궐해서 알게 된 대신들은 '폐비의 망령이 되살아났소이다.'라는 유자광의 말까지 들으며 불안해한다. 상황을 보다 못한 임사홍이 '차라리 곱게 죽이시든가, 아니면 그만 침소로 드시고 날이 밝으면 다시 국문을 하십시오.'라고 조언해도 오히려 연산군은 '불쌍합니까?'라고 말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다음 두 귀인들의 얼굴에 자루를 씌워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게 한 다음에 봉안군과 안양군을 불러다가 역적들이라고 때려죽이라고 하자 안양군은 시키는대로 귀인 정씨를 때려죽였고, 봉안군은 상황을 파악한 다음 때리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그 뒤에 안양군과 봉안군을 끌고 가 대비전에서 역사대로 깽판을 부렸다. 인수대비가 상당히 위엄있게 나와서 앉아서 연산군을 엄하게 나무라고 이에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태도를 비꼬면서 거친 말을 퍼부으면서 패륜적인 말을 내뱉던 중 시녀들이 울어대자 시녀들을 죽이겠다고 칼을 뽑았고 이에 인수대비가 일어나서 나부터 죽이라고 외치며 맞장섰다. 그러자 차마 할머니라서 죽이지는 못하고 심하게 손으로 밀쳐 넘어뜨렸다. 그리고 내레이션으로 야사에서는 '발로 차고, 머리로 받은 거로 적혀 있다'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깽판치고 나온 뒤에 아직 숨이 붙어있는 엄씨를 보고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 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을 만든 뒤에 까마귀밥으로 던져줄 겁니다.'라고 외친 뒤 그 자리에서 엄씨를 베었다.


9.3. 대장금[편집]


폐비 윤씨를 사사하기 위해 사약을 들고 가는 무리들 중에서 속해 있던 장금이 아버지 서천수는 20년 후 장금이와 마실 가다가 갑자사화에 연관이 된 군관 출신이라는게 밝혀지고 사람들에게 끌려가고 장금이 어머니까지 비참한 최후를 맡게 된다. 이후 장금이는 강덕구 집에 신세를 지다가 궁에 들어가 생각시가 되고 궁녀가 된다


9.4. 왕의 남자[편집]


위의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 사건이 약간 각색되어 등장했다. 경극을 공연하는 과정에서 공길이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고 숨지는 황후, 즉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와 매우 비슷한 역을 실감나게 연기하자, 감정에 북받친 연산군이 분에 못이겨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직접 칼로 살해했으며 인수대비는 그 충격으로 쇼크사했다.


9.5. 왕과 나[편집]


두 귀인을 죽일 때의 묘사가 실록과 다르다. 이 작품에서는 엄씨는 자식이 없고, 봉안군과 안양군은 모두 정씨의 아들로 나온다. 먼저 연산군이 익명서를 빌미로 봉안군과 안양군을 고문하고 그 이후 삭탈관직하여 유배를 보낸다. 봉안군과 안양군 두 사람은 실제로는 갑자사화 기준으로 20세가 넘은 성인이었지만 작품에서는 어린 소년으로 등장한다.

정씨가 연회장에 평복 차림으로 나타나서 차라리 자신을 죽이고 두 왕자를 풀어달라고 하자 정말로 사약을 강제로 먹여서 살해한다. 이후 처소에 있던 엄씨에게 쳐들어가 직접 철퇴로 때려죽인다. 이 일로 화가 단단히 난 인수대비가 장 숙원의 문안 인사를 거절하는 모욕을 주고, 앙심을 품은 장 숙원은 인수대비의 측근 상궁들이 폐비 윤씨와 연관되었다고 말해서 연산군이 직접 상궁들을 잡으러 대비전에 뛰쳐 들어간다.

이를 막는 인수대비를 연산군이 밀쳐내자 그러고도 용상을 오래 지킬 수 있겠냐고 꾸짖고, 연산군은 '소손은 용상을 오래 지킬 것이니 대비 마마께서도 오래 장수하셔야 소손이 원수를 갚는 모습을 보시지요.'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이 모습을 보고 빡친 정현왕후가 당장 인수대비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혼내겠다고 말하자 연산군은 화를 내는 대신 눈물을 흘리면서 '대비 마마가 저를 귀하게 키워주셨으나,왜 진작에 회초리로 때리며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저는 진성대군이 참으로 부럽습니다.'라고 말하고, 정현왕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연산군 역의 정태우한명회왕과 비에서 단종 역을 맡았기 때문에, 단종이 연산군으로 환생하여 갑자사화로 정난공신들에게 복수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9.6. JTBC 인수대비[편집]


연산군이 이복동생들을 끌고 인수대비의 거처로 와서 행패를 부리자, 대비를 모시던 궁녀들이 차라리 자신들을 먼저 죽여달라며 울부짖는다. 그러자 더 화가 난 연산군은 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이렇게 울긴 했냐며 호위 무사의 칼을 뺏어다가 궁녀들을 죽이려 하고, 이를 인수대비가 나부터 죽이라며 직접 막아 선다. 결국 연산군은 강제로 인수대비를 밀쳐내고, 자리에 있던 월산대군 부인이 정말 불효자가 되려 하냐며 울부짖자 간신히 진정하고, 뛰쳐 나가서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엄씨를 죽인다. 위의 왕과 비의 묘사와 유사하다.[26]

9.7. 간신[편집]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킨 뒤부터 중종반정으로 쫓겨나기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로, 첫 도입부에 판소리 형식으로 잠깐 언급을 하고 영화를 시작한다. 이때 엄씨와 정씨를 철퇴로 후려치는 장면과 노년의 인수대비를 거의 걷어차는 수준으로 들이받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면이 나와 상당히 을씨년스럽다. 폐비 윤씨의 어머니 신씨로부터 임사홍, 임숭재 부자가 폐비 윤씨의 피묻은 적삼을 받은 연산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고 한다.

영화 중반에 한 가지 반전이 드러났는데, 임사홍이 받은 피묻은 적삼은 사실 폐비 윤씨의 것이 아니었다. 폐비 윤씨는 자신이 죽고 난 후, 궁궐에 엄청난 피바람이 일 것을 걱정하여 자신의 어머니에게 부탁해 유품들을 모두 태워버리게 했다.

그리고 폐비 윤씨의 어머니도 임사홍에게 폐비 윤씨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임사홍은 자신 때문에 음독 자살한 자신의 아내가 남긴 피묻은 적삼을 폐비 윤씨의 것으로 속여 연산군에게 건네 갑자사화의 불을 당겼고 그 덕에 권력의 중심부로 돌아왔다. 여기서 또다시 반전이 있는데 연산군은 피묻은 적삼이 어머니의 것이 아닌 임사홍의 아내가 남긴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그냥 넘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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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산군 본인은 무오사화 문서의 내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단종을 복권시키는 것 자체를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2] 갑자사화 이후만큼은 아니지만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은 점점 씀씀이가 많아졌다.[3]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4] 중종의 모친이자 연산군의 계모인 정현왕후의 아버지.[5] 만약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가 다른 집안이었으면 더 이상하게 생각했을텐데 하필 같은 집안이었고,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은 계유정난 때부터 활약한 정치인이라 맨 처음엔 오기라고 생각했다.[출처1-1] A B 연산군일기, 연산 1년 3월 16일.[6]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주제가 '첩이 정실부인을 모함하여 죽게 하였을 때 목숨을 아깝게 여겨 방관하는게 옳은가 아니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것에서 폐비 윤씨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7]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대신들도 최대한 맞춰주며 연산군이 추숭을 하는데 반대하지 않았으나 대간들은 성종이 생전에 폐비 윤씨의 무덤을 윤씨지묘라 부르게 하며 그 이상 높이지 말라고 했던 걸 들어 반대했다.[8] '대비께서 이를 취하여 지금까지도 있다.'로 언급하며 물증이 있다는 것을 밝힌다.[9]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5일 경인 4번째기사 중궁을 폐출한 연유를 대신들에게 알리다.' 출처.[10] 이는 추정상 연산군일기 마지막에 연산군을 폐위하는 부분에서 성종이 죽은 후 슬퍼하는 기색없이 순록을 잡아먹었다고 나오는데 이것이 와전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11] 월탄은 이와 함께 인간백정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증오하는 성인 양녕대군의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등 현대인들의 조선왕조사 인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공교롭게도 월탄이 창조한 이 두 캐릭터를 전부 연기한 배우가 바로 이민우이다.[12] 이 때는 경복궁이 정궁(본채)이었고, 창덕궁은 이궁(별채)의 역할을 했다.[13] 이때 이 자리에 있던 성준, 이극균은 감동하여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일로 눈물을 흘렸을까 하며 이런 모습으로 인해 연산군이 이세좌를 벌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그저 심기를 거슬러 잠시 화가 났던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으로 평가했다.[14] 젓을 만들어서 산야에 뿌렸다는 말까지 이 기사 하나에 다 나온다.[15] 연산 10년 1월 14일 기사.[16] 즉 앞서 말을 선물한 것도 실상은 (강제로) 생모를 때려죽여 패륜을 저질러야 했던 이항에 대한 연산군의 패륜적 조롱인 셈이다.[17] 오죽하면 이세좌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빌미로 잡아들인 관리 중에서 알고보니 그때 병으로 누워 있었던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져서 풀어주는 대목이 있을 정도다.[18] 이세좌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연산군은 그가 평상시처럼 평안한 모습으로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태도가 건방지다며 분노했다고 한다.[19] 사실 윤필상은 폐비 때도 사사 때도 한명회정창손과 다르게 성종에게 "대의를 좇아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라고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폐비 윤씨의 계집종 삼월이를 추국해서 각종 비행들을 밝혀낸 것도 윤필상이다. 왕명을 따라 사약을 들고 갔을 뿐인 이세좌와는 다른 경우.[20] 윤필상은 이날을 대비해 비상을 소지하고 다녔으나 정작 자살할 때는 효과가 없어서 결국 목을 매야 했다. 사실 윤필상이 아주 희귀한 케이스는 아니었고, 비상이란 것이 원래 약재로 쓰이기도 할 정도로 체질 따라 효능이 다른 약이라서 은근히 먹고도 사는 사람이 많았다.[21] 실제로 이세좌의 아들들이 모두 사형당한다. 이준경은 그 중 하나인 이수정의 아들. 같은 광주 이씨인 이극돈은 갑자사화가 일어나기 전 해에 사망해서 화를 피할 수 있었으나 중종반정 이후엔 오히려 무오사화의 주범이라며 시호를 박탈당했다.[22] 나머지 둘은 한치형과 성준. 한치형과 성준은 영의정의 자리에도 올랐다.[23] 이는 그 전에 조지서(趙之瑞)란 사람이 국문을 받다가 죽은 일 때문인데, 몸이 비대해서 결박당하자 숨이 찼고 그 상태에서 형장 3대를 맞았는데 그대로 죽어버렸다. 그렇다보니 연산군은 이렇게 되는 걸 막기 위해 살려서 끌고오라고 한 것.[24] 갑자사화 때 귀양을 간 권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대개 죽음 뿐이었다. 대부분 얼마 뒤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25] 정씨와 엄씨도 사전에 이를 대비해 대왕대비전에 머물고 있던 중전 신씨와 왕대비인 정현왕후를 방패로 삼아 숨어있었다. 문제는 정작 연산군은 그조차 개의치 않고 신씨와 정현왕후를 무시한채 힘으로 뒤에있던 정씨와 엄씨를 끌고갔다.[26] 이 작품의 작가는 왕과 비의 작가와 동일한 정하연이고, 인수대비 역 배우도 왕과 비와 똑같은 채시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