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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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新羅

파일:신라기.png
군기[1]
德業日新 網羅四方
덕업일신 망라사방

6세기 중반 신라의 강역[2]
기원전 57년 6월 8일[3]
~ 서기 935년 12월 12일,(음력),[4] (약 991년)

시대 구분
진한 사로국
삼국시대
신라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신라

성립 이전
합병 이후
진한
고려
국호
[5]신라[6][7]
위치
경주 분지 계림 일대한반도 동남부[8] ㆍ부속도서[9]한반도 중부 · 남부 ㆍ부속도서[10]한반도 중부ㆍ북부ㆍ부속도서[11] / 요동 (670) [12]한반도 동남부ㆍ부속도서[13]
수도
서라벌(금성)[14]
행정구역
6부 5주 2(3)소경[15]9주 5소경
국조
(추정)[16]
종족
진한인(삼한), 예맥[17][18]신라인 (통일 이후)[19]
언어
신라어
문자
한자 (이두[20], 향찰, 구결)
종교
토속 신앙불교(교종[21]선종[22])
정치 체제
군주제전제군주제
국가원수[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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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
간지
거서간[1]
차차웅[2]
이사금[3]
마립간[4]
매금[5]
코니키시[6]
[7][8]
매금지존[9]
태왕
대왕
제왕
태왕
황왕[10]

주요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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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성
박(朴) · 석(昔) · 김(金)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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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파일:북한 국기.svg



1. 개요
5. 행정
5.1. 중앙 행정
6. 왕실
10.1.1. 신라의 국제 교류 활동을 보여주는 주요 유물 일람
13. 군사
15. 외국사서의 기록
16. 시기 구분
22.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22.1. 현대
22.1.1. 남한
22.1.2. 북한
22.2. 현대 이전
22.2.1. 고려
22.2.2. 조선
24. 기타
25. 같이보기
2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cineaste.co.kr/14010711162408_cd500eb86897c4e0324a540a3e6844cb.jpg
파일:/image/003/2007/07/18/NISI20070718_0004825592_web.jpg
통일신라시기 서라벌 상상도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의 궁궐터, 월성.
(사적 제16호)


신라(新羅)는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군주제 국가이다. 991년간[24] 56명의 국왕을 거치며 한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존속하여 '천년왕국'[25]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

삼국시대의 세 동남쪽에서 발원했다. 《삼국사기》의 서술에 따르면 고대 한반도에 존재한 삼국건국 시기가 가장 빠르다. 삼국통일전쟁 끝에 백제 전역과 고구려 남부를 병합했으며 이후 삼국통일 의식을 바탕으로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지배했다. 676년 이후의 남북국시대의 신라는 통일신라로 지칭된다. 신라정통론(新羅正統論)적 입장에서는 신라의 삼한일통사상을 이후 고려왕조가 계승한 것이 훗날 한민족 의식으로 발달하였다고 보아 삼한일통사상을 한민족의 의식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26]

현대 한국어고대 한국어의 동남지역 방언인 신라어를 기반으로 발달했다는 주장이 있다. 신라가 고구려백제를 병합한 이후 고구려어백제어는 거의 소멸되어 신라어로 통합되었으며 고려의 영토는 통일신라 시기의 영토와 거의 동일했기 때문에 사실상 현대에 이르는 한국어신라어에 기반을 두었다고 보는 가설이다. 다만 현대에는 신라와 고려의 향가에서 나타나는 차이[27] 등의 역사적인 기록 및 유화부인 숭배, 5층 석탑 건립 등 이전 삼국시대 문화를 계승해온 흔적이 드러나는 후삼국 호족 문화의 삼국문화로부터의 연속성, 현대 한국어의 방언연속체가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는 점 등에 근거해 고대 한국어의 동남방언보단 중부지역 방언[28]이 후의 표준어로 발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론 또한 제기되고 있다.

현대 한반도의 지명들은 신라 경덕왕 대에 행정을 개혁하면서 지은 한자식 명칭[29]을 토대로 한다. 다만 경덕왕의 한자식 지명은 신라 당대에는 행정개혁을 통한 왕권강화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진골귀족들의 반발로 제대로 쓰이지 못했고 후의 고려 왕조에 들어서 경덕왕이 만든 한자식 지명을 참조하여 새로 작성한 한자식 지명을 완전히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다. 당연히 이 또한 고려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한 행정개혁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30] 여기서 주의해야할 게 경덕왕의 지명 개혁을 마치 이전에는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작업인 것처럼 착각해 신라중심주의적인 입장에서는 한반도의 지명은 경덕왕이 완전히 새로 창조한 것이며 후대에도 계승했으니 신라문화만이 남았다!라 여기고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경덕왕은 삼국의 전통을 소멸시킨 사대주의자(이에 따르면 기존 신라의 전통 또한 말살된 것이 된다)에 불과하다!라 여기기도 하는데 일단 이런 한자식 지명은 삼국시대에도 한자문화가 완숙해지며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31] 경덕왕 또한 무작위로 새로 창조하여 작명을 한 게 아니라 이전 삼국시대 지명의 뜻과 전통을 계승하여 한자화한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이미 중국문화 도입을 통해 이런식의 중앙집권화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고 권력과 기존 전통을 유지하려 했던 기성귀족들의 반발 또한 시시각각 터졌다는 건 기록으로도 많이 남아있다. 게다가 이런 개혁 및 교류로 인해 후기 삼국의 문화는 이미 무덤양식까지 같아질 정도로 서로 유사한 형태로 수렴 중이었고 따라서 경덕왕의 개혁은 완전히 새로운 신라중심주의적인 혹은 기존 전통을 깡그리 소멸시킨 독자적인 작업이 아닌 삼국시대부터 이미 진행되어 오던 중앙집권적 개혁의 전통을 계승한 것에 해당하며 종합적으로 보면 고려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 일련의 작업이 완성된 형태를 띠고 있다.


2. 국호[편집]


신라 국호
한국어
신라(新羅)
나라 이름의 의미는 '덕업일사방: 德業日四方’에서 두 글자를 취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말 뜻은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지증왕) 4년 10월에 군신(羣臣)이 말하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創業) 이래로 나라 이름이 일정치 아니하여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라 하였으나, 신(臣)들은 생각건대 '신'(新)은 (德業)이 날마다 새로와져서, '라'(羅)[32]동·서·남·북의 것들을 널리 받아들여 모두 포함한다는 의미이므로, 그것으로 국호(國號)를 삼는 것이 좋을 듯하오며, 또 생각건대 자고로 국가를 가진 이가 다 제왕(帝王)이라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가 건국한 지 지금 제22대에 이르도록 단지 방언(邦言)으로 칭하여 존호(尊號)를 정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군신(羣臣)은 한뜻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올리옵니다"고 하니, 왕이 거기에 좇았다.
{{{#!wiki style="text-align:right"
金富軾, 《三國史記》 卷4 <新羅本記> 第1 智證麻立干
김부식, 《삼국사기》 4권 <신라본기> 제1 지증마립간
다만 '신라'라는 명칭 자체는 지증왕 때 뜻풀이하여 확정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고구려와 함께 '신라'가 전진 시기인 377년과 381년에 등장해 《자치통감》 등에 기록되어 있고, 당대 사료인 광개토왕릉비에도 신라가 이미 등장하고 있다. 이 의미 풀이는 원래 존재하던 고유어를 한자로 표기하려는 과정에서 음도 의미도 적절한 한자를 찾아서 유교적인 해석을 끼워 맞춘 것이며, 이전부터 사용되던 '신라'라는 이름을 유일한 공식 명칭으로 규정한 것으로 추정되며, 지증왕 대에 국호를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사로국, 사라 등 다른 표기를 혼용했다.

신라 이전에 불렸던 이름들은 시라(尸羅), 사라(斯羅), 사로(斯盧),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怪), 계림, 서야벌(徐耶伐), 서라벌(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으로 불렸는데, 이들 모두 가운데 일부가 누에치기와 관련된 이름들이라는 특이점이 있다.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에서도 유달리 뽕나무 재배 수량이 많아 신라가 전통적으로 누에치기와 관련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에 관한 이름도 많은데 실제로 신라 건국설화에는 계룡이 등장한다. 불교계 일부에서는 신라가 계(戒)를 나타내는 시라(Sila)에서, 서라벌을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의 수도였던 슈라바스티(Sravasti)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의 특성상 어느것이 맞다 아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신라에 불교가 전래, 공인되는 눌지왕, 법흥왕대 한참 이전부터 신라와 통하는 사로, 사라 등의 이름이 쓰이기도 했고, 이병도나 환빠들이 자주 넘겨짚는 성운의 유사성을 가지고 하는 주장은 딱히 근거랄 게 없으며 억지스러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근거라고 내미는 것이 도올 김용옥의 생각이다.
계림(鷄林)은 좁은 의미로는 경주시에 있는 작은 이름이자, 넓게는 신라국 전체를 이르는 이름인데 사서에서는 제3대 탈해 이사금부터 계림을 정식 나라 이름으로 쓰다가 제15대 기림 이사금이 다시 신라로 되돌렸다고 되어있고, 이후 공식적으로 신라라는 국명이 정해진 뒤에도 계림은 신라라는 나라의 일종의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별칭으로도 쓰였다.[33]
신라의 또 다른 이름으로 걸의식국(乞衣食國)이 있다는 정보도 인터넷상에서 많이 떠도는데 이는 중국의 기담집 《유양잡조》(酉陽雜俎]) <방이 설화>의 한 구절을 띄어쓰기가 없는 한문을 제대로 끊어 해석하지 않고 오역한 것이다. '(방이가) 옷과 음식을 빌어먹고 살았는데(乞衣食), 나라 사람들(國人) 중에 남는 땅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에서 걸의식과 바로 뒤에 나오는 국인의 국을 '걸의식국'이란 한 단어로 오역한 것이다.
중국어
신뤄(Xīnluó). 사로국은 쓰루(Sīlú). 현대 관화 기준이다.[34]
일본어
시라기(しらぎ) 혹은 신라(しんら)

초기부터 일본과 거리가 가깝고 서로 많이 얽혔던 관계라 백제를 쿠다라로 읽는 것과 같이 신라를 읽는 법이 따로 존재한다. 시라기는 《일본서기》의 훈을 따른 것이다. 때론 しんら, 즉 한국어 독음과 유사한 '신라'로 읽기도 하는데 이건 한자 新羅를 현대 일본어식으로 음독한 것으로 다만 한국어에서 신라를 읽을 때는 자음동화 현상으로 실제로는 저절로 '실라'라고 읽게 되지만 일본어로 しんら를 읽을 때는 실라가 아닌 '신'라 그대로 읽는다. 신라에 대해서는 新羅라 적고, "シラギ(< シラキ)"(시라기/시라키)로 읽는데, 이건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신라의 본래 이름인 斯羅를 그대로 일본식으로 읽은 シラ에 キ(城의 뜻)를 더한 것이다. 일본 동양학의 토대를 놓은 학자인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キ(고대 일본어 독음 *kuy)를 백제어 '기(己)'의 차용어로 추정했다. 마쿠라고토바에서는 "栲衾新羅(タクフスマシラキ)"(타쿠후스마시라키)라고도 하는데, 이는 특산물인 종이의 원료 "닥(タク(타쿠))"과 "シラ"에서 연상되는 백색의 이미지가 이불(フスマ(후스마))과 연상되어 이루어진 명칭이다.
아랍어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아랍어]
페르시아어
베실라(Beshilla), 바실라(Bashilla)

통일 신라 시기에는 아랍페르시아 사람들이 신라를 찾은 이후 아랍 문헌에선 신라의 국호가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페르시아 문헌에선 '베실라(Beshilla)' 등으로 표기됐다. 2010년 말 한국에 그 정체가 알려진, 신라에 관한 내용이 풍부한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 کوش نامه, Kush Nama)에선 신라의 국호가 '신라(Shilla)' 또는 '바실라'라고 나타난다.
라틴어
SELLA[35]
인도
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
고대 튀르크어
쵤글(čölgl)[36]


3. 연호[편집]





신라는 한반도에 존재한 나라들 중 독자적인 연호를 걸고 내린 기간이 가장 명확하게 확인된다.
신라의 연호
건원(建元)
법흥왕 ~ 진흥왕 (536년 ~ 551년)
개국(開國)
진흥왕 (551년 ~ 567년)
대창(大昌)
진흥왕 (568년 ~ 572년)
홍제(鴻濟)
진흥왕 ~ 진평왕 (572년 ~ 583년)
건복(建福)
진평왕 ~ 선덕여왕 (583년 ~ 634년)
인평(仁平)
선덕여왕 ~ 진덕여왕 (634년 ~ 647년)
태화(太和)
진덕여왕 (647년 ~ 650년)


4.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신라/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행정[편집]



5.1. 중앙 행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3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2. 지방 행정구역[편집]


한국 행정구역의 시대별 변천사

[ 펼치기 · 접기 ]
삼국시대 ~ 고려시대
수도 5부 지방 5부
3경
고구려

5부 5방
22담로
백제

6부 5주
2소경
신라

중앙집권체제 확고 - 삼국통일전쟁
5경 15부 62주
발해
9주 5소경
115군 201현
통일신라 - 고려 경종
10도
성종 - 현종
5도 양계
현종 - 공양왕
조선시대 - 남북분단
1부 8도
조선건국 ~ 고종

파일:조선 국기.svg
23부제
고종
파일:대한제국 국기.svg
1부 13도
고종 - 경술국치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13도
경술국치 - 남북분단

남북분단 ~ 1963년
파일:북한 국기.svg
1특별시 6도
1946년 - 1949년

파일:대한민국 국기(1945-1948).svg
1특별자유시 9도
1946년 - 1949년

파일:북한 국기.svg
1특별시 7도
(자강도 설치)
1949년 - 1951년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1특별시 9도
(서울특별시로 개칭)
1949년 - 1963년

파일:북한 국기.svg
1특별시 7도 1지구
(개성지구 설치)
1951년 - 1952년

파일:북한 국기.svg
1직할시 7도 1지구
(평양시를 직할시 승격)
1952년 - 1954년

파일:북한 국기.svg
1직할시 9도 1지구
(량강도 설치, 황해남도·황해북도 분도)
1954년 - 1957년

파일:북한 국기.svg
2직할시 9도
(개성시를 직할시 승격)
1957년 - 1960년

파일:북한 국기.svg
3직할시 9도
(함흥시를 직할시 승격)
1960년 - 1963년

1963년 ~ 1995년
파일:북한 국기.svg
4직할시 9도
(청진시를 직할시로 승격)
1963년 - 1970년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1특별시 1직할시 9도
(부산직할시로 승격)
1963년 - 1981년

파일:북한 국기.svg
2직할시 9도
(함흥시, 청진시를 일반시로 격하)
1970년 - 1977년

파일:북한 국기.svg
3직할시 9도
(청진시를 직할시 승격)
1977년 - 1979년

파일:북한 국기.svg
4직할시 9도
(남포시를 직할시로 승격)
1979년 - 1985년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1특별시 3직할시 9도
(인천직할시대구직할시로 승격)
1981년 - 1986년

파일:북한 국기.svg
3직할시 9도
(청진시로 격하)
1985년 - 2000년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1특별시 4직할시 9도
(광주직할시로 승격)
1986년 - 1989년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1특별시 5직할시 9도
(대전직할시로 승격)
1989년 - 1995년

1995년 ~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1특별시 5광역시 9도
(지방자치제 실시 및 행정구역 대개편)
1995년 - 1997년

파일:북한 국기.svg
4직할시 9도
(라선시가 직할시로 승격)
2000년 - 2003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특별시 6광역시 9도
(울산광역시로 승격)
1997년 - 2006년

파일:북한 국기.svg
3직할시 9도
(개성시가 특급시로 격하)
2003년 - 2004년

파일:북한 국기.svg
1직할시 9도
(남포시, 라선시가 특급시로 격하)
2004년 - 2010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특별시 6광역시 8도 1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로 승격)
2006년 - 2012년

파일:북한 국기.svg
1직할시 2특별시 9도
(남포시, 라선시가 특별시로 승격)
2010년 - 2019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특별시 6광역시 1특별자치시 8도 1특별자치도
(세종특별자치시로 승격)
2012년-

파일:북한 국기.svg
1직할시 3특별시 9도
(개성시가 특별시로 승격)
2019년-





통일 신라 이전 시대의 행정 구역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데, 아직 신라의 영토가 경상도 일대에 머물러 있던 514년(지증왕대)에 지금의 함안군에 아시촌소경을 설치하고, 진흥왕 대 557년에는 충주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한 기록이 있는 등 , 소경식의 행정구역 체계는 삼국 통일 이전에도 비슷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일:삼한위치비정통합수정본.jpg
1세기경의 추정 위치.
(11)이 신라의 모체인 사로국.


파일:saroguk_200ad_map.jpg
3세기경의 통치 영역

파일:신라의 지도 (진흥왕 시대).png
6세기경의 통치 영역

파일:통일 신라의 지방 행정 구역.jpg
9세기경의 통치 영역과 하위 행정구역
통일신라행정구역9주 5소경으로 대표된다. 9주 5소경 문서 참조.

파일:후삼국시대의 지도.png
10세기경(후삼국시대)의 통치 영역.
청록색이 신라이다.



6. 왕실[편집]


《삼국사기》에 의거한 신라 왕실의 성씨 변화
회차
성씨
재위기간
누적기간
-
박씨(제1대 박혁거세~제3대 유리왕)
114년
114년
1
석씨(제4대 탈해왕)
23년
137년
2
박씨(제5대 파사왕~제8대 아달라왕)
104년
241년
3
석씨(제9대 벌휴왕~제12대 첨해왕)
77년
318년
4
김씨(제13대 미추왕)
22년
340년
5
석씨(제14대 유례왕~제16대 흘해왕)
72년
412년
6
김씨(제17대 내물왕~제52대 효공왕)
556년
968년
7
박씨(제53대 신덕왕~제55대 경애왕)
15년
983년
8
김씨(제56대 경순왕)
8년
991년

신라는 박씨, 석씨, 김씨 세 성씨가 여러 번 번갈아가며 왕위를 이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방식은 한국사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서 찾아봐도 비슷한 경우가 거의 없는 특수한 방식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어떻게 박, 석, 김이라는 성씨가 다른 왕이 번갈아 왕위에 오르는게 가능한가. 또한, 왜 그 어떤 나라의 역사적 사료에서도 신라의 특이한 3성 정치 체제와 역성 혁명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는가.

사실 신라 초창기에는 성씨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김알지의 후손이라 전하는 김(金)씨 진흥왕(540~576년) 때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본격적으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신라 내에 있던 3개의 다른 집단인 박혁거세 후손, 석탈해 집단, 김알지 집단이 이때부터 성씨를 소급하였기 때문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성씨가 3개가 있는 것처럼 뒤죽박죽 마치 성이 바뀌듯 나오게 된다.

다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의 초반부는 불완전한 고대 기록을 모으는 과정에서 신화적인 대목이 많고, 초기 왕들의 지나치게 긴 수명 등 연도에 오류가 너무 많아[37] 진흥왕 이전의 박씨, 석씨 왕의 통치기간에 대한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신라 왕실은 대부분의 기간을 김씨 왕들이 통치하였지만 그들 모두 시조인 박혁거세를 참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군주는 김알지의 후손인 김씨 집단이 991년의 대부분 기간인 586년을 지배했지만, 모시는 시조는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였다. 중국이나 외국 사료에서 박혁거세 시조를 참배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외부, 그리고 머나먼 후손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내막을 알지 못하고 그냥 왕의 성씨가 김(金)씨여서 김씨 왕조가 세운 왕조인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신라가 성씨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시점이 김씨가 왕으로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왕들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 말기에 신라가 기울면서 처남이었던 박씨 왕조가 728년 만에 잠깐 다시 부활하나 견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다시 김부가 왕으로 등극하나 얼마 안가 고려의 왕건에 항복하고 신라는 991년만에 멸망하게 된다.

앞서 서술한 대로 신라 왕실의 군주가 된 석탈해·김알지 혈통은 석탈해 신당이나 김알지 신당을 시조 사당으로 참배하지 않고 박혁거세를 자신들의 시조로 숭배하였다. 일례로, 제14대 유례왕은 석탈해 혈통이지만,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는 박혁거세 신당을 자기 시조의 사당으로 참배했다. 또 제18대 실성 이사금, 제19대 눌지 마립간, 제20대 자비 마립간, 제40대 애장왕,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 등은 김알지 혈통이지만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들 모두 박혁거세 신당을 자신들의 시조로 참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석탈해·김알지 혈통이 비록 성은 다르지만 자신들을 박씨 왕실의 일원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박·석·김의 세 혈통 모두 박혁거세를 자신의 시조로 같이 모셨다고 볼 수 있다. 김씨가 왕위를 500년 이상 독점할 때에도 박혁거세 시조 참배는 계속 되었으며, 이러한 시조 박혁거세에 대한 신성함이 후대에 박씨 왕조가 잠깐이나마 다시 부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커다란 가문 내에서 작은 가문들이 독자성을 유지하는 모습은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성씨 제도, 즉 성과 씨의 제도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원래 (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는 보다 위의 개념이었고, (氏)는 그 성(姓)의 계통을 표시하는 개념이었다. 즉, 신라에 적용을 해보면 성(姓)은 신라 왕실이 공동시조로 모셨던 박혁거세의 박(朴), 씨(氏)는 성(姓)의 하위 개념인 석(昔), 김(金)이 된다. 따라서 신라 왕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朴) 왕실이었고 역성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김씨가 통치했던 시기에도 박혁거세를 공동시조로 같이 받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姓)과 씨(氏)의 구분은 원래 중국에도 있었지만 진나라, 한나라 대에 이르러 없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통합된 성씨를 사용하고 있는 우리들이 신라시대를 보면 마치 박, 석, 김의 서로 다른 성씨가 왕위를 쟁탈하는 전쟁터, 역성혁명인 것처럼 비춰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성과 씨가 현재와 같이 통합되지 않은 다른 개념이었고[38] 다른 어떤 나라의 사료에서도 신라 왕실의 성이 바뀌는 것을 역성혁명처럼 보는 기록이 전무한 것을 고려해보면 신라가 건국된 박혁거세 때부터 멸망했던 경순왕 때까지 약 991년간 역성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 모두가 박혁거세를 공동시조로 모시면서 같이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약하면 박혁거세를 시조로 모시는 박(朴)이라는 성(姓)을 가진 왕실 안에 박(朴)씨 외에 석(昔)·김(金)의 분파가 용인됐던 것이었고, 이 3개의 분파 중에서 김(金)씨가 왕위를 가장 오랫동안 많이 차지해 후손들이 많이 번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39] 박씨 집단은 신라 초기에 알영·박혁거세 부부의 여성 후손을 왕비족으로 묶고, 이 왕비족과 결혼해야만 왕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다른 성씨 집단의 경우에도 박씨의 여성 후손과 결혼하면 왕위를 이을 수 있게 만들었다. 따라서 석·김 혈통의 남성이 왕이 된다 해도 박씨 왕실은 '이 왕실은 여전히 우리 것'이라는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비들의 혈통으로만 본다면, 박씨 왕실은 991년 동안 지속적으로 배출이 됐기 때문이다. 이랬기 때문에 석·김 혈통이 왕이 된 시절에도 박씨들은 계속해서 영향력을 지키고 왕족의 위상을 유지하며, 나중에는 728년 만에 왕권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7. 사회[편집]


신라는 같은 삼국시대고구려, 백제에 비해서 중국과 교류하기 어려운 한반도 동남쪽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대륙에서 전해지는 문물이 늦게 도착했고, 율령에 기반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 및 정착한 시기도 더 늦은 편이었지만 지증왕법흥왕의 내부 개혁과 진흥왕의 대외 정복전쟁을 거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나라를 세운 성씨 집안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위를 차지하는 등 왕실 세력이 일정했던 고구려백제, 발해고려, 조선과 달리[40] 신라는 건국 초기 박씨, 석씨, 김씨 등 서로 다른 성씨 집안 사람이 서로 내전없이 평화적으로 번갈아가며 왕위를 이었다, 이는 신라 주변 중국, 일본, 만주 지역뿐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보기 드문 신라의 독특한 제도이다. 삼국 시대 중기 내물 마립간 이후 김씨 왕조에서는 고구려의 문화가 전파되는 동시에 불교를 장려하여 중앙 집권 국가가 되는 것에 힘썼다.


7.1. 골품제[편집]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신분제인 골품제가 있었다. 이는 수직적 신분제도로, 물론 고구려백제도 엄연히 세습 귀족제 국가였기에 딱히 신라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신라 자체가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신분제에 가까웠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다만 신라도 이 폐쇄적인 신분제도내에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지방통치나 인재등용을 보여줬기 때문에 반드시 고구려백제에 비해서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신분제도를 운용했다 보기도 어렵다. 그렇지 않다면 세 나라가 번갈아 차지하던 국경지대의 지방민들이 신라에 협력하고 싶어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단양 신라 적성비의 내용이나 《삼국사기》 <열전>의 죽죽, 강수와 같이 신라를 지지하고 충성한 지방민들이 존재했다는 점은 신라의 골품제 내에서의 유동성이 어느 정도는 있었음을 보임과 동시에 폐쇄적인 신분제도이지만 그 때문에 신라 특유의 높은 중앙집권화(왕권)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입장도 있다.[41]

비록 다른 두 나라의 신분제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까지 남지는 않았지만 동시대 신라보다 압도적으로 훨씬 경쟁력 있는 체제라고 보기는 힘들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경쟁력이 있었다라는 입장이 나올 수 있긴 한 사례들이 존재하고 평민층에서 신흥세력의 존재들이 나오며 국가 위기상황에서 결속력이 두드러지긴 하는데 신라라고 딱히 고구려만 못하진 않았기 때문. 그리고 백제의 경우 대성팔족체제하에서 신분제 형태가 신라보다 폐쇄적이었다는 얘기는 근거가 없다. 애초에 대성팔족 자체가 한성백제 당시에는 아예 귀족 계층도 아니었던 계층들을 포함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구려도 집과 의관이 신분마다 차이가 있었다던지 중앙관리와 지방관리의 격이 있었다던지의 신분제의 유동성은 있으되 신라처럼 신분적 격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백제의 경우는 대성팔족을 기반으로 한 세력외에는 신흥세력이나 특별출세 인물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단, 신라의 골품제는 삼국통일, 나당전쟁 시기에 정복 사업의 성공과 전 국가적 위기로 신장된 왕권을 바탕으로 신라가 살아남는 데 큰 역할을 했으나, 이후 평화 시기엔 수도 경주와 귀족 세력에게만 이익이 편중되어 내전을 유발하고 지방 호족의 불만이 커지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진골과 왕족 간 혈연 거리가 멀어지고 아무래도 진골이 국정에 대한 책임감은 왕족 집단만 못했던데다 기득권은 결코 놓치려 하기 않았기에 신라 멸망의 으뜸가는 요소로 대두되고 만다. 이와 같은 현상은 벌써 이미 진흥왕 때부터 단초를 보였는데, 이런 문제점은 정복 사업의 성공과 국가 위기 극복으로 일단은 봉합되었으나 어려운 시기가 다가오고 개혁이 요구되는 시기가 오자 적어도 법흥왕 때부터 내려오는 기존 왕족 집단이 개혁을 원천 거부하는 진골 귀족 집단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해 끝내는 타도당하고 말게 되면서, 신라는 멸망의 길로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42]

한편, 나말 여초에 발달한 전기 소설 가운데 《김현감호》(金現感虎) 《조신》(調信) 《수삽석남》(首揷石枏) 등이 있는데 여기에 신분간의 대립이 보이는 중에도 상층의 사고 방식과 말이 하층의 사고 방식이나 말과 활발히 교류하거나 뒤섞이는 특징이 보인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7.2. 관직[편집]


신라 중앙 정치는 귀족들의 합의 기관인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과, 국왕 직속의 행정 기관인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간의 대립으로 특징된다. 귀족들의 세력이 강할 때는 귀족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상대등이 강한 권력을 지녔고, 왕권이 강할 때는 왕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시중의 권력이 막강했다. 일반적으로 신라 초기에는 상대등의 권력이 강했고, 중기에는 시중이, 후기에는 다시 상대등의 권력이 강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서열
관직명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중시(령)
도독
사신
시랑(경)
군 태수
현령
1
이벌찬











2
이찬











3
잡찬











4
파진찬











5
대아찬











6
아찬











7
일길찬











8
사찬











9
급찬











10
대나마











11
나마











12
대사











13
사지











14
길사











15
대오











16
소오











17
조위












신라의 관직골품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17등급으로 구성되어 있고 골품에 따라 골품당 최대한으로 승진할 수 있는 등급이 제한되어 있었다. 진골은 1등급인 이벌찬까지 오를 수 있으며, 6두품은 6등급 아찬, 5두품은 10등급인 대나마, 4두품은 12등급 대사까지만 승진이 가능했다. 각부의 장관급 인사라고 할 수 있는 령(令)은 5등급인 대아찬 이상부터 오를수 있었으니 사실상 진골만이 이 지위를 획득할수 있었고 각부의 차관격인 경(卿)은 11관등에서 6관등의 사람, 즉 진골과 6두품만이 오를 수 있었다. 17관등 위에 특별직인 대각간, 태대각간이 있었다. 1등급 각간(이벌찬의 다른 이름)에 대 자를 붙여서 높인 것인데 1천 년 역사 동안 몇 명 없을 정도로 큰 업적을 세운 사람만을 임명했다. 신라 땅에서 일어난 태봉후백제, 그리고 고려도 초기에 잠깐 동안 신라의 관등 체계를 가져다 쓰거나 조금 변형해서 쓰기도 했다. 물론 이쪽은 골품제는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았다.


7.3. 화랑[편집]


신라는 청소년들을 화랑도에 귀속시켜 국가적인 인재 양성을 꾀하였다. 대체적으로 고위급 자제들이 화랑이 되고 하위 골품의 인원들이 낭도가 되어 화랑을 따르는 방식이었으며, 이들은 전국의 유명한 과 큰 , 고유신앙의 성지를 찾아다니며 제천의식을 행하고 사냥무예를 닦으며, 유교불교, 도교 경전을 익히면서 문무를 겸비한 국가의 인재들로 성장했다. 신분에 관계없이 평민 낭도와 같이 생활하면서 유대감을 쌓았고[43] 수련 중에 눈에 띄는 뛰어난 인재는 추천해서 문무 관직에 추천했다. 이런 화랑제도는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여 삼국 통일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다만 통일 신라기엔 그 과정에서 옛 백제 및 고구려 지역까지 낭도 수십~수백 명을 데리고 쏘다디면서 화랑들이 지역 사회에 민폐를 끼치는 현상이 일어났고, 화랑들이 딱히 옛 백제 유민이나 고구려 유민 등을 괴롭히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지방민들은 결국 반(反) 신라 감정을 키우게 된다.


7.4. 원화[편집]


진흥왕 시대(576년)에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아름다운 두 여인을 일종의 아이돌로 삼아 수백명의 젊은이가 보좌하게 하여 인재를 등용하려 한 것이 원화의 시작이다. 그 뒤 준정이 남모의 미모를 질투한 나머지 남모를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먹여서 만취하게 만든 다음 익사시킨 게 발각되어서 준정도 결국 사형당했다. 이로써 원화 제도가 없어지고 용모가 뛰어난 꽃미남들을 모집했는데 그것이 화랑 제도의 시작이다. 준정이 남모를 따르던 무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물론 《화랑세기》는 그 진위가 매우 의심스러운 작품이지만 나중에 미실이 원화제도를 부활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시 시가지를 종단하는 도로 이름이 여기에서 따 온 원화로다.


8. 언어[편집]



현대 한국어의 뿌리는 고조선부터 시작해서 진국과 마한, 변한, 진한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와의 언어 교류 그리고 통일 신라에서의 융화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에 신라어가 하나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의 장수가 신라군에게 패하고 신라 장수와 맞닥뜨렸으나 그 왜장은 훌륭한 말을 타고 있어서 성의 해자를 뛰어넘어 도망칠 수 있었다. 신라 장수가 성의 해자에 이르러 탄식하면서 "구수니자리(久須尼自利, *kusuniziri)"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본문에도 '신라어를 그대로 적은 건데 뜻은 모른다'라고 부연되어 있다. 鬪將臨城洫而歎曰 久須尼自利 (此新羅語 未詳也)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久須尼自利” (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 라고 탄식하였다. 일본서기 562년 7월 아무래도 다 잡은 적장을 놓쳐서 탄식하며 한 말일 테니 뭔가 아쉬움의 표현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ziri 부분을 현대어에서 의지를 표현하는 -으리로 본다면 미래지향적인 다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8.1. 백제어, 고구려어신라어와의 관계[편집]


백제어, 고구려어신라어는 같은 계통의 언어라 생각된다. 다만 이 삼국의 언어들이 얼마나 가까웠는지, 상호의사소통성이 있었는지는 아직 정설이 없다. 중국 측 기록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말이 통했으며, 백제와 신라가 말이 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단 최근 언어학계에서 한국어 자체에 대해서는 고립어거나 한국어의 방언끼리 자체적으로 한국어족을 이룬다고 보는 추세라 삼국간 언어는 유사동종의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신라와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목간 해석에 따르면 신라어와 백제어는 서로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는 삼한 계통의 국가였고 고조선계 유민들이 남하해왔기 때문에 조선(고조선)과 부여가 기본적으로 같은 종속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백제, 고구려, 신라의 언어는 같았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나 《해동고승전》에 고구려와 신라 간의 기록을 보면 서로 간에 대화가 어렵지 않게 통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인명 자료에서도 고구려와 신라의 것이 같다는 이유로 고구려와 신라가 방언상 차이는 크지만 서로 언어가 통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고구려어의 각종 어휘가 현대 한국어와 중복되는 것이 많다.

백제어 같은 경우 이기문 박사가 백제어가 계층별로 달랐다고 주장하나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 등을 보면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일 가능성이 높다. 단지 건길지나 어라하 등의 칭호가 달랐다고 언어가 다르다고 할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때 신하들은 왕을 전하라고 부르고 일반 백성들은 임금님이라고 불렀다고 조선의 언어는 계층별로 달랐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순히 호칭상의 차이일 뿐 이런 게 언어가 달랐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9. 공업[편집]


신라에서는 매우 다양하고 세세한 분야의 공예 전담 관청을 설치해 관영 수공업을 운영했으며, 이들은 서로 긴밀한 분업 공정 관계로 얽혀 있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소전(䟽典) - 고치실을 켜는 작업을 담당.
  • 표전(漂典) - 뽑아낸 표백을 담당.
  • 염궁(染宮) - 염색 작업을 담당.
  • 홍전(紅典) - 염색 작업을 담당.
  • 폭전(曝典) - 염색 작업을 담당.
  • 금전(錦典) - 비단 제조를 담당.
  • 기전(綺典) - 비단 제조를 담당.
  • 마전(麻典) -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인 직방국(織紡局)으로 미루어보아 삼베 의류 제조를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 모전(毛典) - 모직물 제조를 담당.
  • 침방(針房) - 바느질을 담당. 여성 16명이 배속되었다.
  • 왜전(倭典) - 일본 수출용 물품 제작 담당.
  • 철유전(鐵鍮典) - 철기, 유기 제작 담당.
  • 칠전(漆典) - 옻칠 담당.
  • 타전(打典) - 가죽 무두질 담당.
  • 피전(皮典) -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인 포인방(鞄人房)으로 미루어보아 가죽 제품을 다루는 곳으로 추정된다.
  • 추전(鞦典) - 안장 등 마구 제작.
  • 피타전(皮打典) -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인 운공방(䩵工房)으로 미루어보아 가죽 을 제작하는 곳으로 추정된다.
  • 탑전(鞜典) - 가죽 신발 제조 담당.
  • 화전(靴典) - 가죽 장화 제조 담당.
  • 마리전(麻履典) - 짚신 제작 담당.
  • 마전(磨典) - 과녁, 악기 등 제조 담당.
  • 궤개전(机槪典) - 밥상, 탁자 제작 담당.
  • 와기전(瓦器典) - 기와 제작 담당.
  • 채전(彩典) - 건물의 단청 등 그림을 담당.
  • 남하소궁(南下所宮) -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인 잡공사(雜工司)로 미루어보아 이런저런 잡다한 공사를 주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몇몇 겹치는 것이 보이는데, 가령 염색 작업을 담당하는 관서가 동시에 여럿 있었다는 것은 생산하는 옷감의 종류에 따른 염색 방법이 세분화되어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처럼 궁중 수공업 관청을 매우 세분화해 둔 것은 후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며,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상당수는 소실되었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여러 문화재를 통해 그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민간 수공업도 성행했다. 상원사 동종에는 725년(성덕왕 24)에 조남택(照南宅) 집안에 소속된 장인 사▨(仕▨) 대사가 주문을 받아 이 종을 주조했다고 새겨져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황룡사 대종을 35대 금입택 중 하나인 이상택(里上宅) 집안의 장인이 주조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라의 주요 귀족 가문들은 저택의 이름을 내걸고 각자 장인을 보유해 수공업을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일본에 수출해 지금도 남아있는 정창원 신라 양탄자 중 하나에는 자초랑택(紫草娘宅)이란 제조업체명이 남아있어, 이 양탄자를 제조, 판매한 곳이 자초랑이란 신라 귀족 여성의 저택 소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물품들은 오로지 수출용 사치품은 아니라, 양탄자는 5두품의 수레용 깔개로 사용될 정도로 흔히 사용되는 소비재였다.##

국가 권력의 통제에 따라서 장인의 신분도 등급별로 나뉘어 골품을 하사받는 기술자가 있는가 하면, 부역에 동원되어 기술 노역만 제공하는 사람, 그외에 왕실 수공업을 위해 노비들이 대거 동원되기도 하였다.

시장에 관한 기록은 지방에 있는 시장보다 수도 위주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으로 관영이나 사영 기술자들의 생산품은 주로 귀족들이나 왕족들의 사치품이나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우가 많았고, 각 지방 백성들의 생필품 등은 농촌의 가내 수공업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스스로 소비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주요 도시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체계적인 산업의 형태를 띄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신당서》 <신라전>이나 《삼국유사》 <왕력>편의 유시(油市) 등의 존재를 근거로 각 지방 향시의 존재를 추정하는 설도 있다.


10. 경제[편집]


구릉과 산지가 많은 한반도 북부와 달리 남부에는 비록 산지가 많았지만 농사에 적합한 기후에 산과 산 사이로는 평지가 많았고, 지금은 넓은 김해평야나 호남평야는 치수와 간척이 이루어지기 이전 고대에는 아직 얕은 바다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결정적으로 신라의 시작 거점이었던 경주에는 거대한 하천인[44] 형산강이 있어 울산에서 경주까지 형산강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농경지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성립 초기부터 안정적으로 농업에 의존하며 주변 진한 지역을 흡수해 세력을 형성하였고, 진흥왕 시기에는 한강 유역과 한반도 중부, 그리고 가야 땅 낙동강 전역을 차지하여 막대한 농경지를 얻어 삼국 통일 이전부터 삼국 중 가장 많은 주요 농경 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경기 지역과 경상도 지역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지만, 벼와 곡물 생산지로 유명했다.

신라가 차지한 한강과 낙동강, 형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하천과 평야 지대를 많이 접한 신라였기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고 관개 설비를 정비하며 논 농사가 수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전체 농토 중 논과 밭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통일 신라 시기를 다룬 행정 자료인 <신라 촌락 문서>에 기재된 촌락의 논과 밭의 비중은 논은 102결, 밭은 62결 정도로 밭보다 논이 더 많음이 확인된다. 물론 아직까지 전체적인 논과 밭을 다룬 토지 자료가 발굴된 적은 없기 때문에 전체 농토의 논 / 밭 비중이 어떠한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논 / 밭의 비중과 별개로 농토의 공 / 민유지는 전체논의 10% 미만 정도가 국유지 내지는 관유지이고 나머지 90%는 귀족들이나 중류층, 그리고 농민들의 사유지로 보인다.

농토의 크기는 결과 부, 속 등으로 그 규모를 표기하였는데, 이것이 조선 시대 결부의 개념처럼 농지의 생산력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절대 면적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이 기준에 따라 조세를 부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농토를 둘러싼 농민들의 소유 형태는 정전제를 볼 때 오늘날 사유 재산의 개념처럼 온전히 백성의 사유지라기 보다 땅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왕에게 있고 농민들은 그 땅의 경작권만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땅을 파는 매매나, 땅을 담보로 하여 자금이나 물자를 빌린다거나, 땅의 소유권 등을 등기하는 것 등이 이루어졌는지, 이루어졌으면 오늘날처럼 자유롭게 이루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정전제가 실시되었지만, 신라 말기에 호족 세력이 궐기한 점이나, 전체적으로 귀족의 경제력이 튼튼한 점 등 전체적으로 지방 유력가들이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주변국의 상황도 비슷하였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외부의 도움이나 간섭없이 자기 땅을 경작하는 자영 농민보다 서구 농노나 조선 시대 노비나 조선 초기 전호들처럼 자기 논밭이 있지만, 휴경 등의 이유로 자신의 논밭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귀족의 논밭을 경작해주는 대가로 식물의 종자나 대형 농기구를 빌리는 형태의 장원(농업) 경작이 이뤄졌다고 추정된다. 물론 통일 신라나 내외부적으로 전쟁이 줄어든 시기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외부로의 세력 확대나 주변국의 침입, 전쟁이 빈번하던 삼국 초기에는 휴경기에 귀족의 논밭을 경작하기보다 농민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는 일도 많았을 가능성도 있다.



▲ 민정문서의 자원 내용
▲ 민정문서의 인구 내용

그 밖에 <신라 촌락 문서>를 살펴보면, 토지와 주택, 주거지의 규모, 가축과 임목의 숫자와 종류까지 정확히 파악하여, 인구의 증감, 재산의 증감을 아주 정확하게 살펴보고 있다. 농업 용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후대에도 있었던 공통적인 사항이지만, 가축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특히 농업용 가축이 아닌 말의 숫자를 파악하여 전쟁이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상시 동원하고 관리할 체계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산림 지역을 무주 공산으로 방치해 전국에 민둥산을 양산했던 조선 시대와 달리[45] 산림의 나무가 몇 그루인지와 수종을 정확히 파악하고 변동을 정기적으로 기록하며 관리하는 것이 확인된다. 해당 문서나 다른 자료에서 신라의 수공업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하고 있는 것이 부족하여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수공업 자재의 일종으로 수천 그루의 나무를 집중적으로 육성한 것으로 보아 비단 생산이나 목공을 위한 대규모 공업 시설이나 수공업 체계의 존재 등이 추정되고, 전성기 신라의 수도 경주에 대한 기록에서 으로 요리를 하며 사치를 누렸다는 것이 등장하는데, 체계적인 임목 관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땔감이나 목재의 공급이 안정적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문서에서는 전체 임목 중 비단 생산에 필요한 뽕나무 재배 수량이 유달리 많은데, 촌락 문서에서 다루는 청주 인근 4개 촌이 뽕나무 육성에 특화된 마을인지 아니면 신라가 전체적으로 뽕나무 육성에 주력하였는지는 이 시기 행정 자료가 촌락 문서 하나 뿐이라 더 상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신라라는 나라 이름의 라(羅) 자체가 비단이라는 뜻이 있고, 이 촌락 문서가 작성되기 한참 이전인 삼국 통일 이전, 신라라는 국호가 지증왕 대에 확정되기 전부터도 유잠국(有蠶國) 같은 누에치기와 연관이 깊은 이름을 썼던 기록이 있어서 원래 신라가 뽕나무 및 누에치기에 국가적으로 관심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뽕나무는 보통 뽕잎이 누에의 먹이로써 비단 생산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었고, 뽕나무 자체가 활과 화살통을 만드는데 주요한 재료였다는 점, 나뭇잎이 넓은 활엽수는 비록 나무 전체의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목질이 단단하여 가구재로서 적합해 수공업이나 공업용 재료로서 적합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촌락 문서의 뽕나무 재배 수량이 많은 점은 상공업을 위해 육성한 것으로 보인다. 뽕나무 문서에서도 살펴볼 수 있지만, 열매 채집 시기가 모를 심는 농번기와 겹치고, 뽕나무를 심으면 그 주변에 뿌리를 내려 다른 작물의 식생을 방해하므로 보통 농지와 멀리 떨어진 늪지나 습지 혹은 외곽에 심는다. 그러므로 농업을 보조하거나, 도와주기에 적합한 수목은 결코 아니다.

그 밖에 국가의 인력 동원 체제 등을 문서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정남은 20세 이상의 장정으로서 국가로부터 구분전(口分田)을 받고 요역(徭役)에 참가하는 사람, 조자는 정남을 도울 15세 이상의 남자, 제공은 요역을 면제받은 60세 이상의 연령층, 노공은 70세 이상의 노인 등으로 보인다. 또 호(戶)의 기준은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로 나누었는데 그 구분은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에 따랐던 것 같다.

산지가 대부분인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육로개발 보다는 수로와 인력을 통한 물류 운반을 중시했던 후대 왕조 조선과는 달리 육지에서의 도로와 수레 사용에 좀 더 적극적이었다. 경주 계림로 수레모양 토기 등의 다양한 유물이나 신라 서라벌과 옥천을 잇는 도로 유적 등의 발견을 통해 이러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주 서봉총에서 4세기~5세기 경 신라인들이 먹었던 음식들이 출토되었는데, 안동 간고등어의 예에서 보듯 소금으로 짠지 수준의 염장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신선한 음식을 조달하기 힘들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갓잡은 듯한 신선한 해산물들이 잔뜩 들어가있어 당시 내륙 지방의 물류체계가 굉장히 원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YTN 뉴스

등을 기르는 목장도 전국적으로 운영되었다. <민정문서>에서는 청주시 주변 4개 마을에서 말 61마리를 사육하고 그 두수를 기록해 둔 것이 남아있고, 일본 승려의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전라남도 다도해의 여러 섬에서 귀족 소유의 목장운영되었으며, 지금의 부산광역시에 있는 절영도산 말은 명마로 이름이 높아 성덕왕이나 견훤이 구해서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이런 말들은 군마나 수레를 끄는 역마로 쓰였을 것이다.

어업도 발달해, 예를 들어 국립경주박물관 부지 우물에서는 붕어, 잉어, 연어, 민어, 복어, 가오리 등의 다양한 어종의 뼈가 출토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민어는 경주시가 위치한 동해 바다에서는 거의 잡히지 않고 서해에서 잡히는 생선으로, 당시 어류의 장거리 보존과 유통 체계의 일면을 보여준다. 경주보다 더 깊은 내륙 지역인 경산시 임당 유적에서도 고등어, 전갱이 등 바다 생선의 뼈가 다수 출토되었다.

어업 및 하술할 무역에 필요한 조선업 역시 발달하여, 특히 일본 측 기록에서는 신라 배의 우수함을 말하는 기록이 다수 발견된다. 신라가 왜에 파견한 배 만드는 장인이 훗날 야마토 조정의 목공기술 전문 집단 이나베(猪名部)의 시조가 되었고, 일반 배는 바람과 파도에 약해 신라 배를 나누어 달라는 기록##이나 신라식 배를 따로 만들도록 주문한 기록## 등이 있다. 먼 바다를 치고 나갈 수 있는 배는 해상 무역을 활성화시켜 8세기 경덕왕 무렵에 이미 해상에서 활동하는 상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며,## 9세기에 이르러서는 광범위한 신라방 사회 및 장보고, 장영(張詠), 김자백(金子白), 유상희(劉相晞), 유천궁, 왕건 가문 등 해상 세력가의 발달을 가속화시켰다.


10.1. 무역[편집]




초기에 신라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해 있었고, 북쪽은 고구려, 서쪽은 백제, 남동쪽은 왜가 있는데 가장 큰 시장인 중국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흐름이나 교류에 뒤쳐져있고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5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토우(흙 인형) 중에 코끼리, 원숭이의 모습을 본딴 것들이 출토되고 있으며[46] 다만 개미핥기와 비슷하게 생긴 은 동남아에도 서식한다.동유럽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신라 황금보검이나 로마 제국유리로 제작된 국보 제193호 유리병과 유리잔, 보물 제624호 유리잔을 비롯해 황남대총 등에서 서역산 공예품이 말 그대로 쏟아졌기에, 외부 세계와의 교역은 이미 삼국통일 이전에도 활발히 계속되고 있었다.

통일신라의 경우 8세기까지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공무역이 주축이 되었지만 9세기 이후 신라, 당, 일본 3국의 중앙 집권 체계가 약화되면서 민간 무역이 성행하였고 장보고등의 해상 세력은 당나라 산동 지역 등에 설치된 신라방 등을 통하여 활발한 민간 무역을 행하였다. 후에 무역으로 부력을 갖춘 호족들의 약진은 후일 호족들과 함께 후삼국 시대의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였다.

당과의 무역에서는 초기에는 원자재나 지역 특산품을 수출품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비단 공예품과 금속 수공업품의 비중이 늘어나 <신라 촌락 문서>에서 대규모 뽕나무 숲을 육성한 것 역시 비단 생산을 위한 목적이 큰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공무역으로는 주로 금, 은, 우황, 인삼 등을 수출하고 당에서 비단과 당삼채 도자기 등을 수입했다. 《삼국사기》 <잡지>에 기재된 각종 외래 사치품은 주로 사무역을 통해 들여온 것으로 보는데 목도리, 중앙 아시아산 에메랄드로 상감한 빗과 모자, 바다 거북 껍데기로 만든 빗, 페르시아산 카페트 등이 있었다. 매신라물해 등 일본 기록에 남아있는 일본으로 수출하는 물품으로는 신라금(琴, 악기), 신라도((新羅刀, ), 구리 그릇 등이 있었다.

다만, 중국과 달리 금속화폐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지 못하여 견포, 즉 옷감을 상품화폐로서 사용하였다.[47] 국가에서는 화폐로서 견포의 기준을 통일하기 위해 길이를 조정하고 정리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다만 일본의 아스카이타부키노미야(飛鳥板蓋宮), 카와라데라(川原寺) 등에서 신라의 은화로 추정되는 무늬 없는 은전이 출토되어 옷감보다 높은 교환가치가 필요한 경우 고액 현물화폐가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10.1.1. 신라의 국제 교류 활동을 보여주는 주요 유물 일람[편집]




인도네시아: 신라 인면유리구슬
동로마: 경주 계림로 보검


페르시아: 쿠쉬나메
이집트: 신라의 유리잔



11. 문화[편집]


(《북서》<열전>)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

풍속·형벌·정치·의복은 <고려>·<백제>와 같다.


(《북서》<열전>)婚嫁禮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婦之夕, 女先拜舅姑, 次卽拜大兄·夫./$《隋書》無[大兄]二字,《通志》卷一九四《新羅傳》作[次拜大兄, 次拜夫]./ 死有棺 ,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결혼의 예는 술과 음식으로 하고, 빈부로써 경중을 따른다. 신부는 저녁에 가서, 여자가 먼저 시아비와 시어미에게 절하고 다음으로 대형과 지아비에게 절한다. 죽은 자에게는 관이 있고, 장사 지냄에 봉분을 쌓는다. 왕에서부터 부모, 처자의 상까지 1년간 복을 입는다.



11.1. 문학[편집]


한자가 주 문자 생활에 사용되었고 설총, 강수, 최치원 등의 유학자들이 활동하였으나 이들의 문학이 현재까지 전해지는건 그리 많지가 않다. 또 한자가 어렵고 고대 한국어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에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 방점, 서기체 등 한자를 중국과 다르게 사용해 한국어를 좀 더 정확하게 표기하려는 시도가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한다. 또한 신라 하면 향가를 빼놓을 수 없다. 향가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한 향찰은 해석이 복잡하지만 고대 한국어의 성분을 완벽하게 표기할 수 있었다. 진성 여왕 때 편찬된 《삼대목》(三代目)에 향가를 모았으나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 등 몇몇 책에 향가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 통일 신라 대에는 중국한시도 유행하여, 중국 본토에서도 필력에 대한 평가가 높았던 최치원이 자신이 지은 시들을 고국에 소개하기 위해 요약 정리한 《계원필경》 등이 지금까지 전한다.


11.2. 미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고구려나 백제 고분 같은 횡혈식보단 도굴이 어려운 구조 덕에 다양한 고분 출토 유물이 남아있으며, 황금 왕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공예품들이 출토되고 있다. 일부 유물들로 미루어보아 기초적인 수준의 유리 공예를 통해 장식품을 제조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48] 한반도에서 나지 않는 코발트 유리를 재가공한 흔적으로 보아 페르시아동로마 제국 문명과 교역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경주 등 옛 신라 지역에는 봉황대, 금척리 고분군과 같은 미발굴 유적들이 매우 많고, 계속 발굴 중이므로 앞으로도 신라의 미술품은 더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신라 금관은 전반적으로는 스키타이 양식을 상당히 많이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과 같이 유리 제품이나 일부 금으로 만들어진 유물의 양식이 로마 제국, 레반트페르시아 지역의 것과 동일한 것도 있는데, 이는 무역을 통해 얻은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사례로 불가리아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경주 계림로 보검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식과 달리 무덤의 양식이 달라서, 고분 벽화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해지는 신라 회화의 수는 오히려 고구려나 백제보다 적은 편이다. 천마총에서 나왔던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신라 회화다. 천마총에서 나온 다른 두 그림(또 다른 천마도, 기마 인물상)이 발굴 이후 2014년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천마총 백화수피제 채화판, 백화수피제 천마도 말다래 문서 참조.






  • 서예 역시 발달해, 김생[49], 영업, 요극일, 최치원[50] 등이 신라 대의 대표적 명필이었다.

  • 공예로는 굽다리(고배)양식의 신라토기가 유명하며 토우 역시 예술성이 높다.

  • 신라의 불교미술은 한국사 불교예술의 정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말기의 83호 반가사유상이라던가[51] 통일신라대에 조성된 석굴암 본존불을 비롯한 작품들은 매우 정교하고 균형미가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한국 고대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11.3. 음악[편집]


신라 대의 작곡가로 우륵, 백결선생이 유명하다.

김부식은 가야금, 거문고, 비파신라삼현(新羅三絃)으로 소개했다. 가야금은 이름대로 원래 가야(대가야, 반파국) 지역의 악기인데, 가야를 정복한 진흥왕이 가야인 악사 우륵을 우대한 계기로 신라에 전해져 발달했다. 우륵은 고향 가야 지방의 지명들을 딴 12개 곡을 지었다.

파일:신라 가야금.jpg
사진의 출처는 histopia, 사진의 원출처는 일본 정창원 홈페이지

현대의 가야금의 원류가 되는 신라 시대의 가야금이 일본정창원에 한 기가 보존되어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악기를 신라금(新羅琴, 시라기고토)라고 부른다. 850년 11월에 이 시라기고토를 일본 궁중에서 연주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52]

거문고는 원래 고구려 지역의 악기였는데, 삼국 통일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에 들어오면서 도입되었다. 경덕왕 때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가 거문고를 위한 새로운 노래 30곡을 짓고 신라 땅에 거문고를 보급했고, 이후에도 속명득(續命得)과 귀금선생(貴金先生)이 거문고의 대가로 활동했다.

비파당나라를 거쳐 들여온 악기이지만 현을 바이올린과 비슷하게 철현을 쓰는 중국 비파와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전시켰고 이후 시대에서도 한국의 대표적인 악기들 중 하나로 전승됐다. 비파라는 악기 자체는 원래 서역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악기이다.

수나라 궁중에서 신라 음악을 연주했는데 이를 신라기(新羅技)라 했다. 당나라진평왕이 여악(女樂) 두 명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서 당나라 궁중에서도 신라 음악 연주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신라 음악을 종종 공연했는데 453년에 80명이 연주한 것이 최초고 561년, 684년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대보율령》(大宝律令), 《일본후기》(日本後紀)에 따르면 통일신라 때도 신라 악사들이 소수 파견되어 악기 연주와 춤을 일본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음악들인 고려악(高麗樂, 코마가쿠)[53]에서 신라악 계통 음악을 재편한 것으로 보이는 헤이안 시대 말기 고악보를 복원하여 연주한 영상이다. 제목은 '탁목(啄木, 딱따구리)'이며 연주 중간중간 딱따구리를 표현한 듯한 퍼포먼스가 인상적이다.


11.4. 건축[편집]



파일:삼년산성1.jpg
파일:삼년산성2.jpg
서기 470년 경에 축조된 신라 삼년산성의 모습. 신라의 성문화

파일:불국사1.jpg
파일:불국사2.jpg
물이 흘렀던 중건 당시의 모습을 현재 불국사의 모습으로 고증한 사진. 다만 실제 신라시대의 불국사는 총 2,000여칸으로, 현재 불국사의 8배 크기였다. #

목조 건축 문화권이었던 한국에서 고대의 건축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나마 신라의 경우 안압지에서 온전한 건축 자재가 대량 발굴되기도 했고 문헌 기록도 그나마 더 많아서 알 수 있는 것이 많다. 국왕이 사는 궁전경주 월성이었으며, 문무왕삼국통일 이후 동쪽으로 궁전을 확장한 것이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이다. 이외에 일제강점기 이전 전근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황룡사 9층 목탑이 유명하다.

첨성대황룡사 금당 치미, 남한산성 행궁지 대형 숫기와, 경주 성건동 신라 창고 유적 등의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라시대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후대 왕조의 것에 비해서 상당히 컸다. 이러한 대형 유물들은 당시 신라의 건축 기법이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11.5. 여성[편집]





지금으로부터 1,500~2,000여년 전 고대인들의 여성관을 현대의 의식과 연결해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만 그것을 제하더라도 신라의 여성관은 동시기의 한반도 국가(고구려, 백제)나 후대 왕조(고려, 조선)와는 분명히 다른, 굉장히 특이한 점이 많았다.

일단 역대 한반도 왕조 중 유일하게 여왕이 나온 국가다. 그것도 셋이나. 수많은 세월 동안 무수한 왕조가 오고간 중국 대륙 내에서도 공식적으로 여왕 직위를 단 사람은 측천무후 단 한 명 뿐이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은 여자가 왕이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으로 보는 환경이 구축되어 있었다. 때문에 신라의 여왕 배출은 한국사에서 굉장히 특이하게 받아들여진다. 단순히 여왕만 나왔다고 특이하다는 것이 아니라 상단 카테고리에서도 설명되었듯이 박·석·김 혈통의 신라 왕실은 기본적으로 모계를 우선적으로 깔고 갔다.

왕실 뿐만 아니라 민간 집단 또한 모계 계승 의식을 보이는데 당장 경주 호장인 거천의 가계를 밝히면서 그 어머니는 아지녀(阿之女), 아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明珠女), 그 어머니는 적리녀(積利女)라고 하여 어머니쪽 가계로 거슬러올라가고 있다. 그 외에도 재매정댁, 자초랑댁 등 한 집안의 택호를 여성의 이름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신라는 건국 당시부터 박혁거세알영(閼英)의 탄생설화를 동등하게 두고 제사를 지내며 숭배했다. 건국 시조의 신성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들어지는 탄생 설화가 여성에게 부여된 유일한 사례다. 알영은 혁거세와 함께 신라 멸망 때까지 이성(二聖)으로 존숭되었는데, 이는 그저 남성 군주의 배우자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이성(二聖)의 한축을 담당하는 독자적인 정치적 의미를 가진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후 신라에서 최초로 시조 제사를 지낼 때 남해왕의 여동생인 아로(阿老)가 사제직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무녀들이 왕조 내내 신궁을 이어나갔고, 후대에 다양한 여성들이 성인으로 지정되어 정치력을 행사하였으며 사망한 뒤에는 국가의 제사로 모셔졌다. 선도산 성모를 시작으로 박제상의 아내인 치술성모, 석탈해가 성군이 될 것임을 알고 바닷가에서 끌어 올리는 노구(老軀) 등의 여성들이 신라인들에게 성인으로 추숭되었다. 화랑제도 또한 초창기 진흥왕의 원래 계획으로는 원화가 화랑들을 이끄는 형태였다. 온갖 병크가 생기며 취소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다른 왕조의 경우 가끔 가다 큰 힘을 취한 여성들이 나타난다 하더라도(ex. 인수대비) 어디까지나 비정상적인 기형적 형태의 권력을 얻었을 뿐 관작질서(官爵秩序) 시스템 하에서의 공적인 직책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던 것과는 달리 신라는 여성들이 공적인 분야에서도 진출이 가능했다. 먼저 신라에서는 남성 관리들이 임지로 부임할 때, 부인이 같이 임관하여 관직을 제수받고 임지로 나가는 규정이 있었는데, 수로부인이 강릉으로 가다가 노인으로부터 꽃을 받은 때가 바로 이 임지로 가는 도중이었고, 관련 유물로는 울주 천전리 각석에 당시 남편과 공동으로 부임받고 임지로 향하던 신라여성이 가던 도중 귀족들과 들놀이하고 자신의 이름을 남긴 모습을 볼 수 있다. 단양 신라 적성비에도 공을 세우고 죽은 여성과 그의 자식들에게 남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은전과 함께 관작을 내렸다는 기록 등이 남아있어 신라시대 여성이 남성과 동일하게 관작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으로 신라에서 최초로 선산 모례(毛禮)의 누이 사씨라는 여성이 불가에 귀의한 후 다양한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불교가 공인되자 공식 중앙관직으로 신라 전체의 불교 교단을 영도하는 국통과 함께 도유나랑(都唯那娘)이라고 하는 직책을 같이 두었는데, 이 도유나랑에는 오직 여성만이 임명되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여성 불상으로 추정되는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또한 신라시대의 작품이다.

경제적으로는 중국측 사료에서 ‘신라 시장에서는 모두 부녀자가 사고 판다’라고 하여 여성들의 활발한 경제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정창원 신라 양탄자, 황룡사 활석 남근석, 황남대총 남분 도기줄무늬 유병, 경주 황남동 1호분 금귀걸이, 쪽샘 44호 고분 비단벌레 금동 장식품 등의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이러한 신라 여성들의 경제권이 확인되고 있다.

신라의 이러한 요상한 여성관은 후대인들, 특히 유학자들에게는 실로 참혹한 일이었다. 당장 바로 다음 왕조인 고려에서 나온 《삼국사기》에서부터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인데 어찌하여 늙은 여인으로 하여금 규방에서 나와 국가 정사를 휘두르게 하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처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로다. "《서경》"에 이르되 암탉이 새벽을 알림이요, "주역"에 이른바 암퇘지가 껑충껑충 뜀과 같으니 이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닌가." 하며 극딜을 박았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네이버 삼국사기

하지만 이걸 토대로 신라를 현대의 남녀평등론에 입각해 바라보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어디까지나 여성의 활동이 훨씬 자유롭고 비교적 지위가 높았다는 뜻일 뿐, 신라인들이라고 꼭 남녀를 동등하게 바라본 것은 아니다. 당장 선덕여왕 즉위 전까지만 해도 공주보다 부마의 계승 순위가 더 높았고, 비담의 난 때 반정군이 내세운 명분도 "여주를 섬길 수 없다"는 지극히 전근대적인 내용이었다. 관작 질서에 편입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여성이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으며, 다만 남성중심적인 시스템에 편승해 제한적으로 권한을 허용받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고려 초에도 여성이 가계를 계승하고 집안을 대표하며 남성과 동일하게 가산을 물려받는 등 여권이 높았으나, 그렇다고 고려가 남녀평등사회는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11.6. 황금[편집]



KBS: 황금기사의 성, 천년전 세계지도에 등장한 신라의 정체는?



YTN 뉴스: 3cm 금박에 그린 통일신라 '초정밀 화조도'
JTBC: 머리카락보다 가는 '1300년 전 통일신라'의 세공기술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삼국의 문화적 특징을 이야기할 경우,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와 대규모 전쟁 등으로 묘사되는 숭무 문화, 백제는 유려하고 세련된 문화라는 특징을 떠올리는 한편, 신라는 금관으로 대표되는 황금 문화를 꼽는 경우가 많다.

중세 아랍의 사학자인 알 마크디시는 <창세와 역사서>(Kitabu'l Badi Wa'd Tarikh)에서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황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하고 묘사하였고, 아랍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알 이드리시는 <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Nuzhatu'l Mushtaq fi Ikhtiraqi'l Afaq, 일명 로제르의 서)에서 신라(Al-Silla)를 섬으로 그려놓은 후 “신라에서는 황금이 너무 흔해서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까지도 황금으로 만든다”라고 기록하였다. 그 외에도 페르시아의 지리학자인 알 카즈위니(Zakariya al-Qazwini)는 <제국유적과 인류소식>에서 "신라의 공기가 순수하고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하니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의 향기가 풍긴다. 전염병과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이 걸린 사람은 그곳에 가면 곧 완치된다. 신라는 살기 좋고 이점이 많으며, 무엇보다 금이 풍부하기 때문에 무슬림들이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정착해서 떠나지 않는다."라고 서술하는 등 아랍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표현했다. 일본서기 또한 '눈부신 금은채색이 신라에 넘쳐난다'라고 표현했다.[54]

나무위키에 항목이 생성된 신라시대 주요 금 관련 유물들은 아래와 같다. 이 외에도 수많은 금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지금도 출토되는 중이다.



11.7. 기록[편집]


한국의 전근대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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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실록(實錄)
제왕의 일대기를 다룬 편년체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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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실전(失傳)
고구려
유기
신집
신라
국사
제왕연대력
화랑세기
백제
백제본기
백제신찬
백제기
서기
고려
구삼국사
가락국기
편년통록
왕대종족기
성원록
금경록

위서(僞書)
환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
부도지
화랑세기
(필사본)

격암유록
†: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번외: 현대 역사서
한국사




545년 진흥왕거칠부를 시켜 《국사》(國史)라는 역사책을 편찬했다. 《삼국유사》에도 《신라》(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서 인용한 글들로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국사》는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나 백제를 포함해 주변 다양한 국가의 역사를 기록한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아 《삼국유사》가 작성된 고려 시대 후반 원 간섭기까지는 《국사》의 원본이 존재했으나 이후에 실전되어 현전하지는 않는다. 삼국통일 후에도 정사를 편찬했을 법 한데 관련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고, 8세기경 김대문이 《계림잡전》, 《고승전》, 《한산기》, 《악본》, 《화랑세기》 등을, 9세기에는 최치원이 《제왕연대력》이라는 역사서를 편찬했으며 이 책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55] 많은 내용이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쓰는 데 인용되었다.


11.8. 종교[편집]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 공예품으로 손 꼽히는 신라 석굴암성덕대왕신종, 반가사유상의 모습


11.8.1. 고유 토착신앙[편집]


신라의 조상 숭배신앙을 찾을 수 있는 자료는 '시조묘'에 대한 기록이다. 신라의 시조묘는 박혁거세의 묘로써 1년에 4시로 이를 제사했다. 지배자는 여러 신들 중에서 천신에 대한 제사의례를 통하여 지배권을 확립하려 하였다. 국가형성이 본격화하면서 지배자는 하늘의 아들 또는 손자라는 의식을 강조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시조묘를 세우고 제사를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제의를 통하여 내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서 활용하고 주변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배타적 지배이데올로기를 확립한 것이다.

삼국 및 남북국 시대의 지신 신앙은 땅과 하늘에 대한 신앙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땅과 산천에 대한 신앙으로 나타나며 신라는 특히 산악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산천에 제사를 지냈고 풍년이 들었을 때에도 행하였다. 지신에 대한 숭배는 하늘에 대한 신앙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것은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재래의 토착신앙이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잡고 천지신을 그 정점으로 하여 대중화되어 있는 가운데 외래신앙인 불교가 전래되었다. 따라서 재래신앙인 토착신앙과 외래신앙인 불교는 갈등을 벌이게 된다.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불교 전래가 늦은 것은 고구려나 백제는 이미 중국 문화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중국 문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적어 불교를 수용하는 데 많은 사상적 갈등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신라가 토착신앙에 의해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천지신을 모신 신궁을 설치하여 사상적 통일을 하였으므로 외래신앙인 불교에 대하여 대립과 갈등이 심하였던 것이다. 불교가 처음 전래되어 수용되는 단계에는 토착신앙과 불교가 대립과 갈등을 겪었으나 일단 그 과정을 거치면서 융화되어 가는 문화 접변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토착신앙과 불교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자료는 토착신앙의 성역과 불교 사찰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불교 도입 이전 신라 토착신앙의 성지로는 신성한 숲 천경림을 비롯해서 삼천기, 용궁남, 용궁북, 사천미, 신유림 및 서청전이라는 곳들이 있었다.

사원 건립 이전부터 토착신앙의 종교적 공간이었던 여기에 불교 공인 이후 중요 국가사찰을 만들었다. 토착신앙의 신성 지역에 불교사찰이 들어섰지만 불 보살에 대한 숭배와 의례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토착신에 대한 숭배와 의례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토착신앙의 성소는 산신각과 장승의 형태로 불사와 융화하거나 민간에서는 계속 신성 지역으로 숭배되어 산신당, 서낭당, 장승과 솟대의 형태로 남아 있다. 산신각과 장승은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신앙 성역의 구조 안에 불단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형태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신라는 불교의 원조 인도나 중간 경유지 중국에서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백제고구려에 비해 불교의 도입 시기는 비교적 늦은 편이었고, 그전에는 박혁거세알영부인, 김알지 설화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하늘의 신이 내려왔다는 천신 탄강을 골자로 하는 토착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특정 지역을 신성한 성지로 숭상하는 문화가 있었으며[56] 골품제의 근간이 되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어 외래 종교인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도 반대가 컸다.

신라의 자체적인 국가 신앙 시설로 신궁(神宮)이 있었다. 신라 김씨 왕조 조상들을 기리는 유교적 종묘 체계인 5묘와는 별개로 운영됐다. 신라 왕이 새로 즉위하면 즉위 초기에 신궁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신라의 관례였으며, 신궁에서 제사지낸 주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김씨 왕계 시조를 기리는 시설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신궁은 박혁거세설이 좀 더 일반적이다.


11.8.2. 불교[편집]


불교는 초기 미추 이사금, 눌지 마립간, 소지 마립간묵호자, 아도 등의 외국 승려를 통해 일단 전해졌으며, 이 때 불교를 법흥왕 공인 이전에 전래된 불교라는 뜻에서 초전불교(初傳佛敎)라고 한다.[57] 이 때 흥륜사 같은 절이 왕의 허가로 겨우 초가집 수준으로 지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외래 신앙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박해 속에 끝났고, 비로소 법흥왕이차돈순교와 불교의 공인 이후 급속도로 불교 국가화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은 개개인의 구제보다는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매우 강했고, 《인왕경》이나 《법화경》 같은 호국경을 중요시했다. 임전무퇴를 제시한 원광 법사 역시 승려였다. 이후에는 불교가 융성하여 국가의 주도하에 많은 사찰 건축물이 창건되고 불교 미술품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신라 중대 ~ 통일 신라 대에 들어서면서 불교는 이전의 정치 이념으로서의 귀족 불교, 왕즉불 사상을 벗어나 대안, 혜숙, 혜공, 그리고 원효의상 등 여러 승려의 노력에 힘입어 거리의 불교, 신분을 초월한 불교 대중화로 나아갔다. 신라 불교계의 대체적 흐름은 9세기경을 경계로 해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볼 수 있는데 전반기는 형식과 교리,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 후반기는 실천적 불교인 선종(불교)이 유행했다.[58]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 덕택에 신라 시기 사찰은 백제나 고구려에 비하면 그 명맥이 유지된 곳이 상당히 많다. 현재의 경주시 지역엔 신라에서 가장 중시되는 거대 사찰이었던 황룡사를 비롯해 사천왕사(四天王寺)·불국사(佛國寺)·분황사(芬皇寺)·흥륜사(興輪寺)·영흥사(永興寺)·봉덕사(奉德寺) 등 대사찰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는 부석사(浮石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범어사(梵魚寺)·법주사(法住寺) 등의 대사찰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지금도 신라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상도는 전국에서 상대적으로 타 종교들에 비하여 불교가 초강세이다. 그러나 사찰의 창건 연대가 그러하다는 것이지 역시 목조 건축물 자체가 남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대부분의 사찰들은 전부 고려 & 조선시대에 중건된 경우다. 현재까지 남은 신라의 건축물들은 석탑이거나 유허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석조 건축은 유명한 경주시의 석굴암, 그 외에 군위군 아미타 여래 삼존 석굴(소위 제2 석굴암) 등 신라 당대의 것이 남아있는 경우가 몇 있다.


11.8.3. 유교[편집]


유교의 경우 화랑 문화와 접목되어, 신라에서는 특히 신(信)과 충(忠)을 중요시하는 풍조가 강해서 세속오계임신서기석 등에서 이런 문화를 찾아볼 수 있다. 신문왕은 유교 교육 기관 국학을 설치하고, 거기서 《오경》을 가르치고 독서삼품과와 같은 제도를 실시해 유교를 보급했다. 내성에서는 대부전(大傅典)이란 전담 관청을 설치해 왕실 자녀에게 유교적 제왕학을 가르쳤다.

또한 고유 조상 숭배 사상이 아닌 유교식으로 체계화된 종묘를 한국 역사상 처음 도입한 것도 신라였으며, 이는 고려조선의 종묘로 이어진다. 신라의 종묘 체계에 관해서는 종묘 문서 참조.

지방 교육기관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없지만, 통일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토산군최응, 광해주(춘천시)의 박유, 영암군최지몽 등 지방 출신 지식인이 증가하고, 5대 소경 중 하나인 서원경(청주시)에는 학교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 하대는 이렇게 유교적 교육이 전국에 보편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11.9. 과학[편집]


자연 과학 분야, 특히 농업천문학 분야에서도 통일 신라 시기에 발전하여 7세기에는 첨성대(瞻星臺)가 축조되고[59], 수학이 발달하였다. 통일 신라 대에는 당나라와의 기술 교류가 활발해, 덕복(德福)은 당나라에서 가져온 기술을 이용해 역법을 만들었고, 김암(金巖) 등이 당나라에 유학해 천문학을 배워 신라에 보급하고, 그리고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전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는 718년(성덕왕 17년)에 물시계를 만들고 이것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이 만든 최초의 물시계가 671년 백제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삼국사기》에 기록된 718년 훨씬 이전부터 물시계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학도 크게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석굴암의 평면 구성이나 천장의 돔,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등 여러 건축물의 균형 잡힌 비례 구성에는 모두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고 학부인 국학에서는 수학 교육도 이뤄졌고, 717년에는 산박사(算博士) 제도를 시행했다.

또 기포가 거의 없이 완성도가 높은 성덕대왕신종을 제조하는 등 금속 공학 등의 측면에도 발전된 부분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쇄 제지술이 발달해, 신라산 한지인 저지(楮紙, 닥나무 종이)는 색이 희고 질겨 중국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보존성이 뛰어나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며, 전란이 적었던 일본 땅에서 <민정문서> 등 신라 당대의 인쇄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의학 관련으로는 공봉의사(供奉醫師), 약전(藥典) 등의 관청을 설치해 의술과 제약을 관리했음이 확인된다. 한편 의과대학격인 의학(醫學)이란 관청을 설치해 《본초경》, 《갑을경》, 《소문경》, 《침경》, 《맥경》, 《명당경》, 《난경》 등의 한의학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1.10. 명절[편집]



11.10.1. 정월 대보름[편집]


한국의 정월 대보름의 기원과 관련된 전설 중에 <사금갑(射琴匣)>이 있다. 원전은 《삼국유사》 <기이> 제1편 소지왕 이야기다.

소지왕이 정월 대보름에 천천정으로 행차하기 위해 궁을 나섰는데 갑자기 까마귀가 시끄럽게 울었다. 그리고는 쥐가 사람의 말로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옵소서."


그러자 임금은 신하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다. 신하가 까마귀를 어느 정도 따라가다가 어느 연못에 다다랐을 때, 돼지 두 마리가 싸움을 하고 있었다. 신하는 돼지 싸움을 보다가 그만 까마귀를 놓쳐 버렸다. 잠시 후에 연못에서 노인이 나와서 신하에게 편지 봉투를 주고는 "그 봉투 안의 글을 읽으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읽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신하는 궁에 돌아와 임금에게 편지 봉투를 주면서 연못의 노인이 한 말을 전했다.

임금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단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 편지를 읽지 않으려 했는데 옆에 있던 일관이 말하였다.

"전하, 두 사람이라 함은 보통 사람을 말하고, 한 사람이라 함은 전하를 말하는 것이니, 편지의 글을 읽으시옵소서."


일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임금은 편지를 꺼내서 읽어 보았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射琴匣(사금갑: 거문고 갑을 쏘시오)'


임금은 곧 거문고 갑을 활로 쏜 다음 열어 보니 두 사람이 활에 맞아 숨져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왕비와 어떤 중이었는데, 중이 왕비와 한통속이 되어[60] 임금을 해치려 했던 것이다. 그 뒤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해서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이후 이 찰밥이 발전해 약밥이 되었다. 왜 소지왕을 도와준 동물 중 까마귀만 챙겨주냐면 쥐, 돼지는 십이지신에 들어가서 따로 기리는 일이 있었으나 까마귀는 그렇지 않기 때문.


11.10.2. 행사 및 풍속[편집]


其官有十七等: 一曰伊罰干, 貴如相國, 次伊尺干, 次迎干, 次破彌干, 次大阿尺干, 次阿尺干, 次乙吉干, 次沙 干, 次及伏干, 次大奈摩干,《通典》[干] 作[于], 未知孰是. 又《梁書》云:[其官名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目旱支.] 與此不同. 次奈摩, 次大舍, 次小舍, 次吉士, 次大烏, 次小烏, 次造位. 外有郡縣. 其文字·甲兵, 同於中國. 選人壯健者悉入軍, 烽·戌·邏俱有屯營部伍.諸本及《隋書》[營]作[管].《通典》作[營], 是, 今據改. 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 每月旦相賀, 王設宴會, 班賚 官. 其日, 拜日月神主. 八月十五日設樂, 令官人射, 賞以馬·布.《隋書》[每]下有[正]字, [主]字作[至]. 按《隋書》是說正月元旦相賀, 拜日月神; 至八月十五日, 又設樂競射.《北史》疑是脫訛. 其有大事, 則聚官詳議定之. 服色尙 素.《隋書》無[ ]字. 按 則不素, 疑是衍文. 婦人 髮繞頸,《隋書》[頸]作[頭], 是. 此形似致誤. 以雜綵及珠爲飾. 婚嫁禮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婦之夕, 女先拜舅姑, 次卽拜大兄·夫.《隋書》無[大兄]二字,《通志》卷一九四《新羅傳》作[次拜大兄, 次拜夫] 死有棺 ,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田甚良沃, 水陸兼種. 其五穀·果菜·鳥獸·物産, 略與華同.

관직은 17품으로, 일은 이벌간으로 중국의 귀와 같고, 다음은 이척간 다음은 영간, 다음은 파미간, 대아척간, 아척간, 을길간, 사돌간, 급복간, 대나마간, 나마, 대사, 소사, 길사, 대오, 소오, 조위 순이다. 밖으로 군현이 있고, 문자와 갑병은 중국과 같다. 건장한 사람을 가리고 군사로 뽑는데, 봉, 술, 라로 함께 영, 부, 오로 진을 친다. 풍속과 형벌, 정치, 의복은 '고려', '백제'와 같다. 매달 아침마다 하례하며 왕이 연회를 배풀면서 무리에 관직을 하사한다. 그날에 태양과 달의 신에게 절한다. 8월 15일은 풍류를 베푸는데, 관인이 활을 쏘아 상으로 말과 포를 내린다. 큰 일이 있으면, 벼슬아치들이 모여 의논하여 정한다. 옷색깔로 흰색을 숭상하고, 부인들은 머리를 땋아 목에 두르며, 비단과 구슬을 섞어 꾸민다. 결혼의 예는 술과 음식으로 하고, 빈부로써 경중을 따른다. 신부는 저녁에 가서, 여자가 먼저 시아비와 시어미에게 절하고 다음으로 대형과 지아비에게 절한다. 죽은 자에게는 관이 있고, 장사 지냄에 봉분을 쌓는다. 왕에서부터 부모, 처자의 상까지 1년간 복을 입는다. 밭은 물대기가 좋아서 물과 육지의 씨를 겸할수 있다. 오곡과 과채, 조수과 물산은 중국과 같다.



11.10.3. 추석[편집]


《삼국사기》 <유리 이사금> 조에서는 왕이 나라 사람들을 두 팀으로 갈라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6부 각각의 여자를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게 했다.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큰 부(部)의 뜰에 모여 길쌈하고 밤 10시에 파했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가려서 패배한 편이 이긴 편에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이 길쌈놀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조선시대까지 지속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으니 이를 가배(嘉俳)라 불렀는데 이 가배가 한가위의 '가위'의 기원이라고 한다.

절에서 박탁(餺飩, 밀떡 종류의 음식)과 병식(餠食, 쌀, 보리, 떡 종류의 음식) 등을 마련하여 8월 15일 명절을 지냈다. 이 명절은 여러 다른 나라에는 없고 오직 신라국에만 유독 이 명절이 있다. 노승 등이 말하기를 "신라국이 발해국과 서로 싸웠을 때 이날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 날을 명절로 삼아서 음악과 춤을 추며 즐겼다. 이 행사는 오래도록 이어져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온갖 음식을 마련하고 가무와 음악을 연주하며 밤낮으로 이어져 3일 만에 끝이 난다. 지금 이 산원에서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오늘 명절을 지냈다. 그 발해는 신라에 토벌되어 겨우 1,000명이 북쪽으로 도망갔다가 후에 되돌아와 옛날대로 나라를 세웠다. 지금 발해국이라 부르는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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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구법순례행기》 2권 개성 4년 8월 15일


한편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도 신라인의 추석 풍습을 전하고 있다. 현대처럼 3일간 놀았다고 한다.

한편 저 말대로면 음력 8월 15일이 신라의 전승기념일이 되기도 하는데, 원문은 당시 시대상 발해로 돼있지만 발해와 신라가 8월 15일에 싸워 신라가 이긴 사건을 특정하기 어렵고[61] 말미에 멸망 이후 발해국으로 부활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발해의 전신인 고구려와의 어떤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2. 외교[편집]





백제 와는 상쟁하면서 나제동맹을 맺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많은 전투가 있었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은 적도 있었다. 때론 국가의 이득을 위해 혈연이 맺어지기도 했다[62]. 하지만 국가의 이익에 따라 나제 동맹도 결렬된다.(관산성 전투) 이후에는 백제 멸망 시기까지 양국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하고 백제 영역과 인구는 고스란히 신라에 귀속된다.

고구려와의 관계도 국가의 이득에 따라 동맹하거나 싸웠다. 광개토대왕 시절,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 의하면 왜의 공격에 5만의 군사로 신라를 구원하였고(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신라가 조공하였다고 한다(寐錦家僕句請朝貢) 장수왕 대에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후 진흥왕이 반격에 나서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대거 빼앗기도 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고구려군에게 잦은 공격을 받기도 하는 등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삼국시대 말기까지도 무열왕은 고구려로 가서 연개소문을 찾아가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는 하지만 나당전쟁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63] 이후 고구려인의 일부[64]는 신라인에 포함되었다.[65]

발해와는 초반에 고왕이 신라 대아찬 벼슬을 받으면서 외교관계를 형성했고[66] 당나라에 의해 한때 상호 대립하기도 했지만 선왕 시기 남경 남해부를 통해 신라도가 연결된 이후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발해가 거란에 압박받을 때에는 신라와의 동맹을 추구하기도 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두 나라는 사이좋게 9의 시차를 두고 멸망했다.

가야와는 초기부터 경쟁하는 관계였으나, 금관국을 멸망시킨 후 구형왕 가문을 진골로 편입시켰다. 이후 중심을 잃은 가야의 소국들은 신라에 각개격파당하면서 흡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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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관계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조공이라는 교류를 하였으나 초기에는 한반도 동남부라는 지리적 위치상 한반도 서해의 중국과 직접 교역은 불가능해 많은 교류는 어려웠던 걸로 보인다. 그러다 진흥왕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서해안에 영토가 닿게 되면서 항구 도시 당항성을 통해 직접 교류가 가능해졌고, 고구려와 백제에게 남북으로 협공당하게 되자 수나라, 당나라와의 교류가 수월해졌다. 한때 나당전쟁으로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이후 회복되었고, 통일신라 시대에도 신라의 인재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고 신라방, 신라원 등이 생기면서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숙위 학생단이라는 유학생단을 만들어 10년 정도의 기간씩 교대로 유학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한때 그 숫자가 105명에 이르기도 했으며 일부는 빈공과라는 당나라의 과거 시험에 응시해 당나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귀국해 신라에서 관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에서 5대 10국 시대가 개막하며, 한반도에서는 태봉과 후백제가 신라에서 갈라져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어 한강 유역과 서해안을 상실한 이후에도 신라는 후당 등 중국의 5대 10국 국가들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멸망 직전에도 중국과 교류했다.

일본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 영남 지역에 위치한 신라였지만 왜국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왜국은 신라보다는 백제, 가야와의 친밀한 관계를 삼국시대 거의 내내 유지했으며, 때로는 백제-가야-왜가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고, 심지어 신라와 백제가 손 잡은 나제동맹 때도 왜는 '친구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신라를 공격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초기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만도 박혁거세 시대부터 수십 번 쳐들어오고, 신라도 말기의 신라구를 제외하면 직접 왜를 침략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527년 큐슈 북부의 유력자 이와이(磐井)에게 왜군의 신라 침공을 저지하도록 포섭한 일이나, 신라 원정군을 꾸리던 일본 왕자에 대한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 유례 이사금 시기에 신라가 왜국의 오사카까지 침공했다는 일본측 기록 등 기타 일본측 사서에서 신라가 일본을 침공했다는 기록들도 많이 나오는 등 신라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더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고.)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는 백제를 하나의 번국으로 보았고[67](반면에 백제는 왜를 자신들의 번국으로 보았다.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칠지도 명문)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도 신라를 공격하고, 후속 공격을 준비하기도 했으나(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참고)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와도 교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통일신라 때도 신라와 일본은 아주 사이가 나쁜 시기와 그나마 괜찮던 시기가 있었는데, 양국 모두 자존심이 무척 강해서 대체로 서로 상대방이 오만하며 무례하다고 비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신라와 일본의 사이가 단순히 좋지 않았다는 편견과 달리, 이전 백제 때 만큼은 아니지만 이후 시대인 고려시대조선시대에 비해서는 양국간 교류량은 훨씬 많은 편이었다.

특히 일본의 우방이던 백제가 사라진 통일신라로 들어서는 상황이 변하게 된다. 나당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선 후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일본 역시 백제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며 다음에는 나당연합군이 일본에 쳐들어올 것을 염려해 얼마 전까지 싸웠던 신라와 전격 화친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왜전(倭典)이라는 일본 외교사신 접객을 담당하는 관청을 따로 두어 체계적으로 대일관계를 관리했다. 훗날의 조선 통신사 파견이 조선 후기 200여 년간 고작 9회에 불과했지만,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신라 때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도 신라를 25차례나 방문했다. 사신단의 규모에 있어서도 성덕왕 2년(703년)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00~500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8세기 중후반으로 가면서 일본의 자존 의식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자국을 상국으로 모실 것을 신라에 요구하는 형식적 외교 관례에 집착했고, 이러면 신라도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내고 개무시하면서 차츰 정부간 교류가 줄어들게 되는데 그래도 장보고로 대표되는 사무역이나 민간 교류는 9세기에도 꽤 많았다. 다만 활발한 교역량과는 별개로 왕실과 백성들은 서로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갖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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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대에는 중동 지역과도 교류가 있어서, 아라비아페르시아의 기록에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베실라'(Beshilla) 등의 이름으로 중동과 유럽 지역에 소개되었다. 위 지도는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인데,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조의 루지에로 2세의 지원하에 제작했다. 한국이 포함된 최초의 세계지도로, 참고로 원본은 남쪽이 위로 가게 만들어서 신라가 좌측 끝에 있다. 다만 신라가 섬나라로 묘사된 오류가 있는데, 멀리서 한국에 오는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해 동중국해에서 올라와 한국에 상륙했기 때문에 한국의 북쪽으로 가 볼 일이 없어 섬나라로 오해한 것이다. 수백 년 뒤 조선을 표시한 유럽 세계지도에서도 조선을 섬나라로 잘못 그린 지도가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1636년작인 테세이라의 <일본전도>에서도 한반도가 섬나라로 잘못 그려져 있다.

중동인들의 기록에서는 대체로 신라가 이상향마냥 살기 좋은 곳으로 기록했고, 이라크 지역 사람들 몇십명이 신라에 정착해 있었다고 기록했다.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 소장 중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의 기록에 따르면 752년에는 아랍 상인단이 신라 사신단을 따라서 일본까지 갔다오기도 했다. 일부 중동인들은 신라에 정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68]

후삼국시대의 경우, 태봉은 신라와는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았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칭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적개심을 드러냈다.[69] 후백제는 태봉에 비하면 신라 눈치를 보는 시늉은 했지만[70] 역시 후백제의 창업자인 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그렇게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후백제도 신라를 침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하기까지 했다. 반면 태봉국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고려는 궁예와는 상반되는 친신라 정책을 펼쳤으며, 동시기에 존재한 후백제보다는 고려 쪽에 신라가 의탁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중국과 조공을 하였는데 5대 10국후당과 주로 조공을 하였다.


13. 군사[편집]








신라는 초기에 6부(部)의 장정을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六部兵) 제도로 운용되었다. 기록을 봐도 무슨 일이 있으면 총사령관인 국왕이라도 6부병 부하 지휘관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못했는데 이는 신라왕이 다른 부 수장들의 대표였지 그들 모두의 위에 초월적으로 서는 위상은 아니었던 게 이유다. 하지만 나물 마립간 때부터 슬슬 신라왕이 다른 부 수장들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찍어눌러서 씹어버리고 독자적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승리를 거두는 사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나물 ~ 소지 마립간 때까지 신라 임금들이 걸핏하면 딴지를 걸어대는 진골들에게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늘날 경북 서남부, 충북 남부 추풍령 일대를 왕실 직할령으로 키우면서 그 일대에서 진골들과는 무관한 정예 부대를 육성한 게 이유다. 이후로 지증왕 때부터 등장하는 습보계 왕가는 눌지계 왕실에게서 승계한 추풍령에 더해 고구려에게서 수복한 '고구려 고지'인 경북 북동부 조령 일대을 또 하나의 직할지 비슷한 영역으로 확보하고, 이를 통해 옛 6부병 체제의 유산을 청산해낸다.

국력이 급속도로 팽창하는 시점인 진흥왕 때부터 늘어난 영토의 방위 목적 등으로 군사 편제가 큰 변화를 겪게 되며, 초기 6부 체제는 6정의 6개 군단 편제로 바뀌게 된다. 나중에 이 지방군 체제는 더 증편되어 진평왕 때에는 10정(停)으로 바뀐다. 지방 체제의 군단 편제 외에도 중앙군도 개편에 맞추어서 서당(誓幢: 583년), 낭당(郞幢: 625년)이란 부대로 개편되었고 왕궁 수비대인 시위부(侍衛府: 624년)도 창설되게 된다.관련 정보 이러한 개편은 결국 신라가 그간 수천 단위로 동원되던 수준의 원정 능력에서 10,000 단위 이상의 동원 능력을 보이는 계기가 되며 삼국 전쟁 말기 고구려 원정, 그리고 이후 달벌대전 때에는 10만 단위의 대군을 동원하기도 한다.

또한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봐도 참으로 특이한 편제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진흥왕 이래로 서라벌 방어 부대 편제와 서라벌 왕궁 방어 체제를 완전 분리한 것이었다. 서라벌 방어 정예 부대는 당연히 서라벌 거주 왕경인들을 위주로 편성되었는데, 기이하게도 서라벌 왕궁 근위대는 지휘관이든 병사든 서라벌인들은 아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 근위대는 앞서 신라 왕실이 진골들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척한 추풍령과 조령 등에서 자원 입대를 받았으며, 왕궁 근위대장 자리는 아예 진골은 임명되지 못하게 하여 왕궁 내 무력 집단에 서라벌 거주 진골이나 6두품 등이 진입하는 건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이는 이미 진흥왕 때부터 진골 집단이 골품제의 한계를 벗어나 광범위한 개혁을 추구하는 왕실에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71]

신라는 삼국통일 후 전국을 옛 고구려 지역 3주, 옛 백제 지역 3주, 원래 신라였던 지역 3주인 9주 5소경으로 편제하고 국왕 직속으로 수도에 출신별로 아홉 개 서당(誓幢) 부대, 그리고 지방 각 주에 하나씩 정(停) 부대를, 단 전방지역인 한주만 2개 부대씩 해서 9서당 10정 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각 주마다 만보당 2개 부대를 각각 배치해 지방을 방어하였다. 이들은 현대의 부대마크처럼, 부대별로 옷깃(衿) 색깔을 다르게 해서 구분했다.

  • 신라 중앙군
부대명칭
출신지
창설 시기
녹금서당(綠衿誓幢)
신라
583(서당)
자금서당(紫衿誓幢)
625(낭당)
비금서당(緋衿誓幢)
672(장창당)
백금서당(白衿誓幢)
백제
청금서당(靑衿誓幢)
황금서당(黃衿誓幢)
고구려
벽금서당(碧衿誓幢)
보덕국(고구려계)
적금서당(赤衿誓幢)
흑금서당(黑衿誓幢)
말갈(예맥위말갈)

  • 신라 지방군
주둔한 주[72]
10정 부대명[73]
부대 주둔지의 현재 지명

남천정(南川停)
경기도 이천시
골내근정(骨乃斤停)
경기도 여주시

벌력천정(伐力川停)
강원도 홍천군

이화혜정(伊火兮停)
경상북도 청송군

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
충청남도 청양군
전주
거사물정(居斯勿停)
전라북도 임실군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전라남도 나주시

음리화정(音里火停)
경상북도 상주시

소삼정(召參停)
경상남도 함안군

삼량화정(三良火停)
대구광역시 달성군

신라군은 보병 위주의 군대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말을 목축화하는데 어려운 지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백제와 유사하게 보병 중심이었으나, 이후 나당전쟁 때 당나라의 유목민 출신 기병대를 상대하기 위해, 말 그대로 장창을 주 무기로 하는 장창당(長槍幢) 부대를 따로 구성해 운용하기도 했다.


기병의 전체적 비중은 적었지만 소수의 정예 기마병을 육성했고, 경주시와 인근 가야 지역인 함안군에서 상태가 좋은 마갑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탑승자와 말 전체를 갑옷으로 감싸는 중장기병을 운용했음이 유물로 밝혀졌다. 갑옷은 고구려의 영향 전에는 판갑(板甲)을 주력으로 운용했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구원 이후 고구려의 영향으로 찰갑(札甲) 운용이 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구진천천보노라는 우수한 쇠뇌, 그리고 거점 수비에 쇠뇌를 사용하는 노사(弩士)를 몇천명씩 배치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조선시대부터는 쇠뇌보다는 국궁[74] 주력으로 사용했던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화랑 / 낭도 제도를 운용한 것도 특징. 대체적으로 고급 장교 - 하급 장교 / 부사관 급 인사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보는 편이다.

신라의 군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의 휘직은 띠를 푸르거나 붉거나 하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계(罽) 또한 옷에 다는 것인데 그 길이의 길고 짦음에 대한 제도는 분명하지 않다.” 링크 참조.

이러한 신라의 군제는 통일기에 격변을 거쳤고, 통일한 이후 경덕왕에 의해 한차례 더욱 정밀한 군제 개편을 거치게 된다. 경덕왕의 군제 개편으로 구서당은 완전 해체되었고[75] 서라벌 방어 부대는 육기정 부대로 제개편되어 서라벌로 향하는 여섯 경로를 방어하도록 구체적인 임무를 받았으며, 일본이 침공해올 가능성에 대비해 부산으로부터 경주 방어선을 구축했다. 위에서 상술한 정예 쇠뇌부대들도 물론 그 방면에 배치되었다. 또한 발해나 여진을 대비해 동북방 국경 부대도 대폭 확충되었고 전면적인 요새 정비 사업도 행해졌다. 태봉과 고려가 생각보다 여진족이 북쪽으로부터 내리누르는 압력에 고생한 편인데, 경덕왕의 이런 군제 개편에 아주 덕을 많이 보았음은 물론이다. 자세한 부분은 경덕왕 참조.

이후 김헌창의 난을 거치면서 신라의 지방군 동원 체제가 생각보다 취약하고, 옛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게 확인되자 이번에는 헌덕왕 때부터 종심 방어선 체제 구축이 시작되어 헌강왕 때 끝을 본다.

통일신라의 중후기에 행해진 신라 임금들의 주도면밀한 군제 개편 작업 및 축성 작업 등은 후삼국시대 때도 후삼국의 쟁패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경덕왕, 헌강왕 참조.

신라 수군의 활약상은 우산국 정벌, 기벌포 전투 등 다방면에서 전하지만 수군의 편제에 대해서는 육군에 비해서도 기록이 훨씬 부족하다. 삼국사기의 본기와 직관지를 참조하면, 신라 초기에는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부(兵部)가 선박에 관한 일을 맡았는데 문무왕 18년(678) 선박 업무를 전담하는 선부(船府)를 설치했다.

660년 백제 침공 당시 기록을 토대로 당항성에 소속된 신라 황해 함대가 100척에 6,500여명 규모일 것으로 이상훈 교수는 추산했다. 이들은 병선(兵船), 대선(大舩), 거함(巨艦)으로 표현되고 있어 당시 동아시아 기준으로도 규모가 큰 전투함으로 볼 수 있으며,[76] 황산벌 전투에 참여한 신라 육군과 별개로 당나라 수군과 오늘날의 경기도 앞바다에서 합류해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금강 하구에서 백제 수비군을 물리친 후 백제 수도 사비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라에서도 시기별로 수군의 규모나 편제가 달랐을테고, 신라 국토 구조를 보면 신라 수군의 주력은 남해동해에 배치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 황해 함대 기록만으로 신라 수군을 완전히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4.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신라/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 외국사서의 기록[편집]


《북서》<열전>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辰韓>亦曰<秦韓>. 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 <馬韓>割其東界居之, 以<秦>人, 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 有似中國人,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不與<馬韓>同. 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傳, <辰韓>不得自立王, 明其流移之人故也. 恒爲<馬韓>所制. <辰韓>之始, 有六國, 稍分爲十二, <新羅>則其一也. 或稱魏將毋校勘 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其人雜校勘 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諸本 「雜」 訛作 「辯」, 據隋書卷八一新羅傳改. 兼有沃沮註 ·不耐註 ·韓註 ·濊註 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校勘 ,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焉. 傳世三十, 至<眞平>.《隋書》作[傳祚至<金眞平>]. 按《通典》卷一八五《新羅傳》云[其王姓<金>名<眞平>],  引《隋東蕃風俗記》云:[<金>姓相承, 三十餘葉.] 這裏[眞平]上當脫[金]字. 以<隋><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신라'는 근본이 '진한'의 종자이다. 땅은 '고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때의 '낙랑'땅에 거한다. '진한'의 역시 '진한'이라고도 한다. 전하는 말로 '진'나라때에 사역을 피하여 온 사람이라고 하니,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나누어 거하게 하였다. '진'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고로 '진한'이라고 하였다.그 말로 물건의 이름이 중국인과 유사하니 나라의 이름을 나라 하고, 궁을 호라 하고, 적을 구라하고 주를 상이라고 상을 도라고 하니 '마한'과 같지 않다. 또한 '진한'의 왕은 항시 '마한'사람이 하는데, 대대로 전하여 '진한'은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어, 밝혀 유이민이기 때문이다. 항상 '마한'의 제도를 따랐다. '진한'의 처음에 육국이 있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십이국이 되고, '신라'는 그중의 하나였다. 혹 칭하길 '위'의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쳐서 이를 깨뜨렸는데, '옥저'로 도망해서, 나중에 옛날의 나라로 돌아 왔다. 남는 자가 있어서 '신라'를 이루었다 하니, 역시 '사로'라 불리었다. 그 사람들은 '중국'과 '고려', '백제'와 섞여있는데,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에도 겸하여 있다. 그 왕은 본래 '백제'사람으로 바다로 도망하여 '신라'로 들어가 그나라에서 왕을 하였다. 처음 '백제'에 의지해 있었는데, '백제'가 '고려'를 정벌할 때, 혹독한 사역을 견디지 못하여, 후에 돌아와 강성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백제'를 엄습하고, '가야국'에 의지하였다. 삼십세를 전하여 '진평'에 이르렀는데, '수' '개황'십사년이다.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문제'가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하였다.


其官有十七等: 一曰伊罰干, 貴如相國, 次伊尺干, 次迎干, 次破彌干, 次大阿尺干, 次阿尺干, 次乙吉干, 次沙 干, 次及伏干, 次大奈摩干,《通典》[干] 作[于], 未知孰是. 又《梁書》云:[其官名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目旱支.] 與此不同. 次奈摩, 次大舍, 次小舍, 次吉士, 次大烏, 次小烏, 次造位. 外有郡縣. 其文字·甲兵, 同於中國. 選人壯健者悉入軍, 烽·戌·邏俱有屯營部伍.諸本及《隋書》[營]作[管].《通典》作[營], 是, 今據改. 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 每月旦相賀, 王設宴會, 班賚 官. 其日, 拜日月神主. 八月十五日設樂, 令官人射, 賞以馬·布.《隋書》[每]下有[正]字, [主]字作[至]. 按《隋書》是說正月元旦相賀, 拜日月神; 至八月十五日, 又設樂競射.《北史》疑是脫訛. 其有大事, 則聚官詳議定之. 服色尙 素.《隋書》無[ ]字. 按 則不素, 疑是衍文. 婦人 髮繞頸,《隋書》[頸]作[頭], 是. 此形似致誤. 以雜綵及珠爲飾. 婚嫁禮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婦之夕, 女先拜舅姑, 次卽拜大兄·夫.《隋書》無[大兄]二字,《通志》卷一九四《新羅傳》作[次拜大兄, 次拜夫]. 死有棺 ,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田甚良沃, 水陸兼種. 其五穀·果菜·鳥獸·物産, 略與華同.

관직은 17품으로, 일은 이벌간으로 중국의 귀와 같고, 다음은 이척간 다음은 영간, 다음은 파미간, 대아척간, 아척간, 을길간, 사돌간, 급복간, 대나마간, 나마, 대사, 소사, 길사, 대오, 소오, 조위 순이다. 밖으로 군현이 있고, 문자와 갑병은 중국과 같다. 건장한 사람을 가리고 군사로 뽑는데, 봉, 술, 라로 함께 영, 부, 오로 진을 친다. 풍속과 형벌, 정치, 의복은 '고려', '백제'와 같다. 매달 아침마다 하례하며 왕이 연회를 배풀면서 무리에 관직을 하사한다. 그날에 태양과 달의 신에게 절한다. 8월 15일은 풍류를 베푸는데, 관인이 활을 쏘아 상으로 말과 포를 내린다. 큰 일이 있으면, 벼슬아치들이 모여 의논하여 정한다. 옷색깔로 흰색을 숭상하고, 부인들은 머리를 땋아 목에 두르며, 비단과 구슬을 섞어 꾸민다. 결혼의 예는 술과 음식으로 하고, 빈부로써 경중을 따른다. 신부는 저녁에 가서, 여자가 먼저 시아비와 시어미에게 절하고 다음으로 대형과 지아비에게 절한다. 죽은 자에게는 관이 있고, 장사 지냄에 봉분을 쌓는다. 왕에서부터 부모, 처자의 상까지 1년간 복을 입는다. 밭은 물대기가 좋아서 물과 육지의 씨를 겸할수 있다. 오곡과 과채, 조수과 물산은 중국과 같다.


<大業>以來, 歲遣朝貢. <新羅>地多山險, 雖與<百濟>構隙, <百濟>亦不能圖之也.

대업'때에 왔는데, 해마다 조공하였다. '신라'의 땅은 산이 많고 험하고, '백제'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백제'도 능히 제도할 수 없었다.



16. 시기 구분[편집]


한국사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특히 신라는 국가 존속 기간이 1,000여 년이나 되기 때문에, 시기별로 나라 체제의 차이가 커서 여러가지 시기 구분이 있어 왔다. 옛날부터 사용되던 구분 방식으로는 《삼국사기》의 구분대로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하는 방법과 《삼국유사》의 구분대로 상고, 중고, 하고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유학자 김부식이 주도해 집필한 책인만큼 왕의 혈통을 기준(성골태종 무열왕진골내물왕계 진골)으로 했는데, 상대는 혁거세 거서간 ~ 진덕여왕, 중대는 태종 무열왕 ~ 혜공왕, 하대는 선덕왕 ~ 경순왕이다. 상대는 통일 이전, 중대는 왕권이 강했던 전성기, 하대는 쇠퇴기와 대강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지금도 많이 사용되는 구분이다.[77] 후자는 승려 일연의 구분답게 불교와 연관됐는데, 불교 수용 이전(고유어 왕호) → 불교식 왕호 사용 → 중국식(유교식) 왕호 사용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상고는 혁거세 거서간 ~ 지증왕, 중고는 법흥왕 ~ 진덕여왕, 하고는 태종 무열왕 ~ 경순왕이다.

현대에는 좀 더 세분화해 여섯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실 신화 시절을 포함하여 사로국으로 존속한 기간이 불분명하기는 하고 국가로 인정하기에는 미흡한 점들이 있기 때문에 신라의 역사를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78]

676년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로 부르는 문제에 있어서도 논란이 있다. '통일 신라시대'라는 용어는 발해까지 아울러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는 쪽으로 현대에는 대체가 된 편인데, 그럼 남북국 두 나라 중 남국인 신라를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하면 이 쪽은 지금도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도 부적절한 호칭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딱히 자리잡은 대체 용어는 없고 학자에 따라 대 신라, 후기 신라 등의 이름으로 676년 이전(삼국 중 1개국으로서의 신라)과 구분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고려의 존속 기간인 474년과 조선의 존속 기간인 518년을 더하면 992가 나오는데 이는 고려조선의 전신인 신라의 존속 기간인 991년보다 불과 1년 더 긴 기간이다. 고려와 조선이 당대 중국 왕조들보다 2배 가량 더 존속한 장수 왕조들임을 감안하면 신라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나라를 영위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17. 왕사[편집]




17.1. 왕비[편집]



18. 왕릉[편집]


신라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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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5~6세기 신라의 고총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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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신라의 인물들[편집]




20. 신라/문화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신라/문화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 신라부흥운동[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신라부흥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 역사귀속과 계승인식[편집]



22.1. 현대[편집]



22.1.1. 남한[편집]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를 명명하여 신라가 적통이고 한국사가 통일 신라에서 이어짐을 명시하였다.[79] 지역적으로는 경상도가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다.[80] 다만 여전히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신라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당시 삼국 사이에서는 지금만큼의 민족 의식이 없었다는 사실도 많이 알려지면서[81] 이러한 비판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박정희 정부 때에는 북한과 한창 체제경쟁을 벌일 때였기 때문에 북한 지역에 위치했던 고구려와 달리 남한 지역에 위치했던 신라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화랑이나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루어낸 김춘추, 김유신, 문무왕 등을 부각시켰었다. 현재에는 이미 북한에 국력이 크게 앞섰기 때문에 굳이 신라를 통해 정통성을 주장할 이유가 없어서 이러한 의식도 거의 없어졌지만 조갑제 등의 일부 보수 인사는 현재에도 신라정통론을 주장하며 신라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22.1.2. 북한[편집]


북한은 신라를 한국 고대사의 한 국가로서 인식하기는 하나 지리적 위치상 거리가 멀고 남한이 백제, 신라의 강역과 조선왕조의 수도인 서울을 점유하고 있는 역사적 정통성에 대비되어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과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점유하고 있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을 잇는 계보를 강조한다. 심지어 통일신라시대 역시 인정하지 않으며 그 시기를 발해 중심으로 서술한다. 또한 강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외세를 끌어 들인 점과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대적이었던 점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22.2. 현대 이전[편집]



22.2.1. 고려[편집]


  • 고려는 귀부한 경순왕을 크게 우대했고, 왕가와 혈연을 맺었는데 고려 왕실의 중시조현종부터 마지막 공양왕까지 모두 그의 자손으로 고려 왕실에는 신라 왕실의 피가 흘렀다.

  • 고려는 경주를 동경으로 명명하고, 3경으로 삼았다. 또한 만월대 내 별궁들의 이름을 한국 고대국가들의 이름으로 삼았는데 그 중에 하나를 계림궁(鷄林宮)이라 명명하여 신라에 대한 계승의식을 나타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신라본기를 가장 먼저 배치하였고 신라의 삼한일통 사상을 이어받았다.

  • 제후를 봉작할 때 고려 전대의 한국사 국가들의 이름을 제후명으로 삼았는데 그 중 왕족인 계림공(鷄林公)도 있었다.[82] 계림공은 후에 왕위에 오르는데 바로 숙종이다. 남자에게 공후백자남을 봉작했다면 여자에게는 부인(夫人)이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고려 중기 문벌귀족의 대부 이자연의 부인 김씨가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에 봉해졌다.

  • 또한 경주 인근에서는 신라부흥운동이 여러 차례 일어나 고려를 무너뜨리고 신라를 부활시키려는 계승 움직임이 있었다.


22.2.2. 조선[편집]


우리 나라의 일로 말하면 신라 초기에 양산(陽山) 기슭에 말이 있어 꿇어 울므로 사람이 가서 보니 말은 홀연히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大卵]이 있었습니다. 깨뜨리니 어린 아이가 껍질 속에서 나왔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니 대단히 숙성하였습니다. 6부(六部) 사람들이 신이(神異) 하게 여기어 추존하여 세워서 임금을 삼았으니, 곧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입니다. 북부여(北扶餘)의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우겠으니 너는 피하라.’ 하였으니, 이것은 동명왕이 장차 일어날 조짐입니다.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하백(河伯)의 딸을 압록강 강변의 실중(室中)에서 사통하였습니다. 왕이 실중에 가두어 두었는데, 해가 비추므로 몸을 이끌고 피하니 해의 그림자가 또 좇아서 비추었습니다. 인하여 잉태하여 큰 알 하나를 낳으니 왕이 버려서 개와 돼지를 주니 먹지 않고, 길 가운데에 두니 소와 말이 피하고 들새들이 날개로 덮어 주었습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는데 이가 고구려 시조 고주몽(高朱蒙) 곧 동명왕입니다.

-

- 황해도 지역에 창궐하는 전염병에 대한 경창부 윤 이선제의 상서문


경주부(慶州府)

부윤(府尹) 1인, 판관(判官) 1인,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바로 신라의 옛 서울이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원년(元年)[83]

갑자에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가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세워서 이름을 서야벌(徐耶伐)이라 하였다. 【혹은 사라(斯羅), 혹은 사로(斯盧), 혹은 신라(新羅)라고 이른다. 】 탈해왕(脫解王) 9년 을축에 【바로 한나라 명제(明帝) 영년(永年) 8년. 】 시림(始林)에서 닭의 괴이한 일이 있어서,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인하여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가, 기림왕(基臨王) 10년 정묘에 【바로 서진(西晉) 회제(懷帝) 영가(永嘉) 원년. 】 다시 이름을 신라(新羅)로 하였다.

-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조선은 본류를 신라로 여기는 경향이 일부 있기는 했지만[84] 그래도 고구려백제를 포함한 삼국 모두의 계승의식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기사가 있다.

정사를 보았다. 예조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고해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도읍한 데에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각기 그 나라에 세운다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조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

- 《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 3월 13일


실제로 조선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시조들에게 모두 똑같이 제사를 지냈었다.

사직 박필정(朴弼正)·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그 여러 일족들을 인솔하고 상서(上書)하기를,

"숭덕전(崇德殿)[85]

의 위판(位版)에 단지 신라 시조(新羅始祖)라고만 쓰고 왕자(王字)를 쓰지 않았으니, 청컨대 위판 및 비(碑)에 ‘신라 시조왕(新羅始祖王)’이라 쓰고 비문(碑文)도 또한 숭인전(崇仁殿)[86]·숭의전(崇義殿)[87]의 준례에 따라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

- 사직 박필정 등이 일족을 인솔하고 상서하여 신라 시조의 위판 및 비에 대해 아뢰다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이 의리를 중히 여겨 승국(勝國)[88]

을 위하여 숭의전(崇義殿)[89]을 두고 신라를 위하여 숭덕전(崇德殿)[S]을 두고 관원을 두어 수호하고 비를 세워 업적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숭덕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동천묘(東川廟)가 있는데 곧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사당입니다. 국가에서 숭의전·숭덕전과 마찬가지로 관원을 두어 수호하고 예(禮)로 제사하니, 신 등은 경순왕의 후손으로서 흠앙(欽仰)하고 감축(感祝)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대저 경순왕은 임금 자리에 있다가 갑자기 물러나서 신기(神器)를 가지고 덕 있는 이에게 귀순하였습니다.

-

- 부사직 김효대가 동천묘에 비문을 세울 것을 청하니 윤허하다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사당을 수리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경순왕의 사당에 지내는 제사는 입춘일과 입추일을 쓰고 있으므로 숭덕전(崇德殿)[S]

에서 2월과 8월의 상순(上旬) 가운데 좋은 날을 받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숭덕전에는 8변(八籩)·8두(八豆)를 쓰고 있고 이 사당에는 7변(七籩)·7두(七豆)를 쓰고 있으며, 숭덕전에는 복호(復戶)한 것이 22결(結)이고 이 사당에는 5결뿐이며, 참봉(參奉)을 임명하는 첩문(帖文)도 이조를 거치지 않고 예조에서 만들어 보내고 있으니, 이는 대체로 사면(事面)의 존중되는 정도가 신라 시조의 사당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당초부터 등급을 낮추었던 것이므로 지금 갑자기 등급을 격상시키는 일을 논의할 수 없으니, 모두 그전대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옛날 우리 선조(先朝) 때에 조경묘(肇慶廟)를 창건하고 완경과(完慶科)를 베풀었었다. 그후로는 사면의 존중되는 정도가 자별해졌으니, 참봉의 직첩은 이조에서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

- 신라 경순왕의 사당을 수리하다


【고구려 시조 고주몽에 대한 제사 】

이윽고 승지에게 명하기를, ‘특별히 승지를 보내는 것은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니, 경(卿)은 부디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거행하고, 묘우(廟宇)나 무덤에 만일 무너진 곳이 있으면 낱낱이 서계(書啓)하여 수즙(修葺)하는 바탕으로 삼게 할 것이며, 자손(子孫) 가운데 녹용(錄用)에 적합한 자 또한 방문(訪問)토록 하라.’ 하였다. 승지가 아뢰기를, ‘단군(檀君)·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또한 그곳에 있어 세종조(世宗朝) 때부터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렸으니, 마땅히 똑같이 제사를 거행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먼저 기자(箕子)의 사당에 제사지낸 뒤 또한 택일(擇日)하여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

- 숙종 대왕 행장(行狀)


정유악이 아뢰기를,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기자의 사당 옆에 있어, 세종(世宗) 때부터 봄, 가을에 중뢰(中牢)[1]

로써 제사를 올렸습니다. 여기에도 전부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정유악이 이어 따라갈 사람을 선발하여 서로(西路)의 형승(形勝)을 두루 살펴볼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것도 윤허하였다.

-

- 기자의 사당에 제사를 올리도록 명하다


예조에 명하여 관원을 보내어 중화(中和)의 동명왕묘(東明王墓)에 치제하게 하였는데, 지경연사 김취로(金取魯)이 말을 따른 것이었으며, 묘를 새로 수축하였기 때문이었다.

-

- 관원을 보내 새로 수축한 중화의 동명왕묘에 치제하게 하다


이어서 동명왕묘(東明王廟)의 제문(祭文)을 몸소 짓고, 향축(香祝)을 보내며, 삼성묘의 토판(土版)을 나무 독(櫝)으로 만들어 덮으라 하고는 독제(櫝制)를 몸소 그려서 예조참의 홍낙인(洪樂仁)을 특별히 보내어 덮도록 하였다.

-

- 예조판서 심수가 황해도 구월산 삼성묘의 위판을 개조할 것을 청하다



【백제 시조 온조에 대한 제사 】

승지를 보내어 남한(南漢)에 있는 온조왕(溫祚王)의 묘(廟)를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

- 온조왕의 묘를 봉심하게 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광주 부윤 김응순(金應淳)에게 온조왕(溫祚王)의 묘(廟)를 중수(重修)하라고 명하였다.

-

-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다. 온조왕의 묘를 중수하라고 명하다


단군(檀君)·기자(箕子)와 삼국(三國)·고려(高麗) 시조들의 왕릉(王陵)을 개수하였다. 왕은 지난 시대 왕조들에 대해 덕 있는 이를 숭배하고 어진 이를 본받는 일이면 더욱 그를 못잊어하여 수로왕(首露王)의 능을 비롯해서 신라 여러 왕의 능에다 잔을 올리고, 삼성사(三聖祠) 제례 의식을 다시 정했으며, 온조왕(溫祚王) 사당을 숭렬전(崇烈殿)이라 이름하고, 고려 4태사(四太師)[1]

사우(祠宇)에는 사액(賜額)을 하였다.

-

- 정조 대왕 행장(行狀)


또 전교하기를,

"온조왕묘(溫祚王廟)와 현절사(顯節祠)에도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고(故) 영의정(領議政) 상진(尙震)의 묘(墓)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며,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의 묘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고 고(故) 좌의정(左議政) 정유길(鄭惟吉), 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묘에 광주 판관(廣州判官)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

-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등의 묘에 종신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실 계보를 정리하면서 시조인 이한신라태종 무열왕의 10대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혼인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왕조실록》 <총서>와 왕실 족보인 《선원록》의 내용이다. 이는 태종 무열왕의 계보와 연결함으로써 단일국가의 정통성, 즉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고려를 이어서 전주 이씨가 세운 조선이 통일 삼한을 잇는다는 상징적 의미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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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신라를 소재로 한 작품[편집]




24. 기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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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청동 도장의 인장참고


25. 같이보기[편집]




25.1. 통일신라[편집]




26. 둘러보기[편집]


양서(梁書)

[ 본기(本紀) ]
1·2·3권 「무제기(武帝紀)」
4권 「간문제기(簡文帝紀)」
5권 「원제기(元帝紀)」
6권 「경제기(敬帝紀)」
소연
소강
소역
소방지
7권 「황후기(皇后紀)」
장상유 · 취휘 · 왕영빈 · 정영광 · 완영영 · 서소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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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기(本紀) ]
1·2·3권 「무제기(武帝紀)」
4권 「간문제기(簡文帝紀)」
5권 「원제기(元帝紀)」
6권 「경제기(敬帝紀)」
소연
소강
소역
소방지
7권 「황후기(皇后紀)」
장상유 · 취휘 · 왕영빈 · 정영광 · 완영영 · 서소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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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8권 「소명태자등전(昭明太子等傳)」
9권 「왕무등전(王茂等傳)」
10권 「소영달등전(蕭穎達等傳)」
소통 · 소대기 · 소방구
왕무 · 조경종 · 유경원
소영달 · 하후상 · 채도공 · 양공칙 · 등원기
11권 「장홍책등전(張弘策等傳)」
12권 「유담등전(柳惔等傳)」
13권 「범운등전(范雲等傳)」
장홍책 · 유역 · 정소숙 · 여승진
유담 · 석천문 · 위예
범운 · 심약
14권 「강엄등전(江淹等傳)」
15권 「사비전(謝朏傳)」
16권 「왕량등전(王亮等傳)」
강엄 · 임방
사비 ,사람,
왕량 · 장직 · 왕영
17권 「왕진국등전(王珍國等傳)」
18권 「장혜소등전(張惠紹等傳)」
19권 「종쾌등전(宗夬等傳)」
왕진국 · 마선병 · 장제
장혜소 · 풍도근 · 강순 · 창의지
종쾌 · 유탄 · 악애
20권 「유계련등전(劉季連等傳)」
21권 「왕첨등전(王瞻等傳)」
유계련 · 진백지
왕첨 · 왕지 · 왕준 · 왕간 ,왕훈, · 왕태· 왕빈· 장충· 유운 · 채준· 강천
22권 「태조오왕전(太祖五王傳)」
23권 「소업등전(蕭業等傳)」
24권 「소경전(蕭景傳)」
소굉 · 소수 · 소위 · 소회 · 소담
소업 · 소백유 · 소원간 · 소상
소경 ,소창 소앙 소욱,
25권 「주사등전(周捨等傳)」
26권 「범수등전(范岫等傳)」
27권 「육수등전(王瞻等傳)」
주사 · 서면
범수 · 부소 · 소침 · 육고
육수 · 도흡 · 명산빈· 은균· 육양
28권 「배수등전(裴邃等傳)」
29권 「고조삼왕전(高祖三王傳)」
30권 「배자야등전(裴子野等傳)」
배수 · 하후단 · 위방
소적 · 소속 · 소윤
배자야 · 고협 · 서리 · 포천
31권 「원앙전(袁昂傳)」
32권 「진경지등전(陳慶之等傳)」
33권 「왕승유등전(王僧孺等傳)」
원앙
진경지 · 난흠
왕승유 · 장솔 · 유효작 · 왕균
34권 「장면전(張緬傳)」
35권 「소자각전(蕭子恪傳)」
36권 「공휴원등전(孔休源等傳)」
장면 ,장찬 장관,
소자각 ,소자범 소자현 소자운,
공휴원 · 강혁
37권 「사거등전(謝擧等傳)」
38권 「주이등전(朱異等傳)」
사거 · 하경용
주이 · 하침
39권 「원법승등전(元法僧等傳)」
40권 「사마경등전(司馬褧等傳)」
원법승 ,원수 원원달, · 왕신념 · 양간 · 양아인
사마경 · 도개 · 유현 · 유지린 · 허무
41권 「왕규등전(王規等傳)」
왕규 · 왕승 · 저상 · 소개 · 저구 · 유유 · 유잠 · 은예 · 소기(幾)
42권 「장순등전(臧盾等傳)」
43권 「위찬등전(韋粲等傳)」
장순 · 부기
위찬 · 강자일 · 장승 · 심준(浚) · 유경례
44권 「태종십일왕・세조이자전(太宗十一王・世祖二子傳)」
소대련 · 소대심 · 소대림 · 소대춘 · 소대아 · 소대장 · 소대균 · 소대위 · 소대구 · 소대흔 · 소대지 · 소방등 · 소방제
45권 「왕승변전(王僧辯傳)」
46권 「호승우등전(胡僧祐等傳)」
왕승변
호승우 · 서문성 · 두즉 · 음자춘
47권 「효행전(孝行傳)」
등담공 · 심숭소 · 순장 · 유검루 · 길분 · 견염 · 한회명 · 유담정 · 하형 · 유사미 · 강부 · 유제 · 저수 · 사린
48권 「유림전(儒林傳)」
복만용 · 하동지 · 범진 · 엄식지· 하창 · 사마균 · 변화 · 최령은 · 공첨 · 노광 · 심준(峻) · 태사숙명 · 공자거· 황간
49·50권 「문학전(文學傳)」
도항 · 구지 · 유포 · 원준 · 유어릉 · 유소(昭) · 하손 · 종영 · 주흥사 · 오균 · 유어릉 · 유준 · 유소(沼) · 사기경 · 유협 · 왕적 · 하사징 · 유묘 · 사징 · 장엄 · 복정 · 유중용 · 육운공 · 임효공 · 안협
51권 「처사전(處士傳)」
하점 · 완효서 · 도홍경 · 제갈거 · 심의 · 유혜비 · 범원염 · 유우 · 유효 · 유선 · 장효수 · 유승선
52권 「지족전(止足傳)」
53권 「양리전(良吏傳)」
고헌지 · 도계직 · 소시소
유필 · 심우 · 범술증 · 구중부 · 손겸 · 복환 · 하원
54권 「제이전(諸夷傳)」
임읍 · 부남· 반반국 · 단단국 · 간타리국 · 낭아수국· 파리국 · 중천축국 · 사자국 · 고구려· 백제 · 신라 · · 문신국· 대한국 · 부상국 · 하남왕국 · 고창· 활국 · 주고가국 · 아발단국 · 호밀단국· 백제 · 쿠처 · 우전국· 갈반타국 · 저말국 · 파사국 · 탕창국· 등지 · 무흥국 · 예예국
55권 「소종등전(蕭綜等傳)」
소종 · 소기(紀) · 소정덕 · 소예
56권 「후경전(侯景傳)」
후경 ,왕위,






















[1]삼국사기신라 무관 3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신라 사람들의 휘직은 띠를 푸르거나 붉거나 하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깃발은 주로 반달곰 가죽으로 만들었다. 이외에도 신라에선 왕궁 이름도 에 비유해 월성으로 짓고, 신라를 초승달에 비유한 기록도 있어# 여러모로 달을 신라의 상징으로 여기는 기록이 많이 등장한다. 다만 위의 이미지는 텍스트를 근거로 상상해 그린 것으로 정확히 저런 모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에는 반달 혹은 초승달이라고 했는데 위 이미지는 그믐달로 잘못 그려졌다.[2] 북동단은 오늘날의 함경남도 리원군으로 마운령비가 세워진 곳이다. 다른 시기의 영역은 '영토 및 행정구역' 문단 참조. 단, 진흥왕 시기 전성기 때는 남원, 무주, 진안, 장수를 비롯한, 순천-광양 축선 제외한 전남북 동부 또한 신라 강역이었는데 그 부분이 반영되어 있지 않음은 주의.[3] 갑자년(기원전 57년) 음력 4월 병진일 또는 1월 15일.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건국을 기원전 57년으로 전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역시 동일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4] 을미년 (서력기원 935년) 12월 12일. 신라의 합병 연도를 일반적으로 935년이라고 하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사실 왕건이 공식적으로 신라 합병을 결정하고 경순왕과 신라 왕족이 제후왕 신분을 완전히 잃는 날은 음력 935년 12월 12일, 양력으로 환산하면 936년 1월 8일이다. 즉 신라가 공식 귀부된 날은 따지자면 양력으로는 936년이다. 그러나 실제 항복과 경순왕의 개성 입조는 935년 11월에 이뤄졌고 이게 936년 1월까지 미뤄진 건 경순왕이 귀부를 요청하고 왕건이 거절하기를 반복하는, 예의상 인사치레를 한 달 동안했기 때문이다.[5] '신라'에 해당하는 고유어 음을 한자를 빌려 나타냈기 때문에 '사로(사로국)', '신라', '사라' 등 여러 표기가 혼용되었다. 따라서 진한 12소국 시기의 사로국을 '신라국'이라고 해도 완전히 같은 말이다.[6] 503년 국호 통일[7] 이 밖에 일종의 별칭으로, 건국 신화의 발원지이자 신라인의 정신적 구심점인 '계림'이 곧 신라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계림대도독부 등). 계림은 심지어 신라가 고려에 합병한 뒤에 조선 시대까지 한반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문서 참조.[8] 골벌국과 같이 신라에 우호적인 국가가 많았다. 이후 영천의 토착신이 신라에서 행하던 대사(大祀)에서 모시는 3선(仙)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로 골벌국은 신라 사회에서 나름대로 대접을 받았다.[9] 신라-우산국 전투로 울릉도(우산국) 복속[10] 탐라국, 우산도.탐라국은 672년 통일신라에 자진 복속한다.[11] 676년 나당전쟁 승리(임진강선) → 694년(효소왕3) 송악성 축성(예성강선) → 748년(경덕왕7) 대곡성(오늘날 평산군) 등 축성 → 선덕왕대 패강진(황해도 일대) 개척 → 헌덕왕대 취성군(오늘날 황주군) 신라 말기 진성여왕 시대에 전국에서 호족과 도적떼가 들고 일어나 난세가 시작될 때 금용은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이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가 평양을 통치권으로 차지했는지 아닌지는 논란이 있어서, 금용을 발해의 변방 지배자나, 신라나 발해 어디의 간섭도 받지 않던 토착세력 정도로 보기도 한다. 사실 신라도 나당전쟁 끝나고 얻은 영토에서 계속 가만 있었던 건 아니고 주민들 이주시키고 개척하면서 조금씩 북상했기 때문에, 황주에서 평양이 멀지 않으니 아마도 9세기 후반쯤 가면 평양도 통치권에 들어갈랑 말랑 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은 가능한 수준. 대체로 남북국시대 지도에는 발해가 평양을 먹은 것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발해 중심지는 매우 먼 상경 용천부였고, 발해가 평양을 지배했다는 근거도 딱히 없고 9세기 후반쯤 가면 발해도 끝물인 건 신라와 비슷했기에 뭐라고 확언하기 어렵다.[12] 고구려 멸망 후 신라의 장군 설오유가 고구려 유민과 합세해 요동에 주둔한 당나라를 선제공격해 몇 달간 점령했다. (석문 전투)이 사건이 본격적인 나당전쟁의 시작.[13] 후삼국시대(나말여초) 우산국탐라국은 신라에 복속이 되어있는 상태였다가 930년대 우산국의 백길과 토두는 고려에 복속요청, 탐라국은 독자활동을 하기 시작한다.[14] 고구려, 백제와 비교해도 수도의 변동이 없었다. 다만 수도 이전 시도는 신문왕대(통일신라대)에 달구벌(대구)로 천도 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귀족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는 고려도 마찬가지.[15] 小京. 수도인 서라벌이 동남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거리가 먼 지역의 주요 도시에 설치한 행정구역. 요즘으로 치면 광역시쯤 된다. 558년의 국원소경(충주시) 설치 과정 기록을 보면 서라벌 인근의 부유한 백성을 옮겨서 도시를 키웠다고 한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514년에 설치한 함안군의 아시촌소경, 충주시의 국원소경, 강릉시의 북소경 3경이 있었으며, 통일 이후에는 옛 고구려 지역이 둘, 옛 백제 지역에 둘, 옛 가야 지역에 하나씩 5소경을 뒀다. 9주 5소경 문서 참조.[16] 신라 건국 신화에 계룡이나 백마, 김알지 설화와 신라의 국호(계림,계괴, 유괴 등)에서 닭이 많이 등장한다.[17] 고조선 유민이 남하해 내려온 민족.[18] , 북명, 동예 등 다수 종족. 말갈은 대다수가 고구려 멸망 이후에 집중적으로 유입되었다.[19] 8~9세기 신라, 고구려, 백제를 아우르는 일통삼한(一統三韓)의 관념이 확산. 하지만 후삼국의 분열에서 보듯이 통일된 종족 정체성을 완성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20] 설총대에 이두문이 재정립된다. 특히 향가에서는 향찰이라는 형식으로 특화되었다.[21] 신라에서 원효와 의상으로 대표되는 교종불교가 발달했으나, 하대가 되면서 중국에 유학한 구법승려가 개인주의적, 사회개혁적, 민중지향적인 선종을 수입전파하고 호족들이 선종을 후원, 후삼국시대가 되면서 왕건의 고려는 선종 세력으로부터 사상적 후원을 많이 입었다. 그러나 고려도 국가 성립 이후에는 지배층은 교종과 밀교를 많이 신앙하였다. 고려 시대 불교 통합운동을 위해 노력한 의천도 교종 승려였다. 고려시대때는 의천이 불교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 천태종을 개창하고 수행 방법으로 교관겸수를 제시했다.[22] 신라 때 원효의상으로 대표되는 교종불교가 발달했으나 신라 하대 선종의 출현으로 신라 말의 혼란은 더더욱 가중되었는데, 신라계 중앙귀족들은 왕실의 지원을 받는 교종(5교)을 신봉했다면 삼한계 지방 호족들은 신라의 원신라계 우대정책에 반발하여 중앙에 대한 악감정으로 누구나 부처가 될수있다는 교리를 지닌 선종(9산)을 추종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석가모니 부처가 아닌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증득한 자를 말한다. 하지만 궁예는 선종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를 악용하여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던 궁예가 타락하고 멸망하게 되자, 왕건고려는 초반에 선종 세력의 후원을 많이 받았음에도 정작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호국불교 교종을 국가이념으로 삼아 선종을 박해하였는데, 귀족 지배층 입장에서는 전통을 중시하는 교종 쪽이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 고종 시기 대각국사 의천은 선종을 매우 증오하여 선종을 사문난적이라 표현하며 조선 연산군의 파불에 가까울 정도로 박해를 가한다. 하지만 아무리 위에서 박해를 해도 대중의 지지는 선종쪽이 더 높았기 때문에 선종의 씨를 말리는것은 불가능했다. 이 교종과 선종의 대립은 12세기 후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숭유억불 방향으로 나가면서 왕실의 불교 지원이 크게 줄어들게 되고 이로 인하여 정통 교종이 몰락하면서 오히려 선종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한국사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도의선사(9산중 가지산파)에 의해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종 전체로 봤을 때 제일 먼저 들어온 시기는 서기 8세기 후반에 신행대사가 단계적 깨달음을 중시하는 북종선을 들여온 것이 최초다. (도의선사는 우리가 잘 아는 돈오=즉각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남종선을 들여왔다.) 선종이 들어오던 서기 820년대, 이 시기는 한국사의 3대 반란으로 칭해질 만큼 기세가 무시무시했던 그 유명한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고 그 규모는 신라 9주 중 4주를 점령할 만큼 막강했으나 상당히 빨리 진압된다. 거기다가 일부 주에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공로로 7년간 면세, 이 단어를 강조하는 이유는 890년 이후에 일개 지방의 독립선언도 못 막는 안습한 상황과 너무 대비되기 때문이다.의 혜택을 주었을 정도다. 그 정도로 이 시기까지만 해도 신라 정부의 여력이 충분하고 권위도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 입장에서도 권위에 의지하지 말라는 선종의 가르침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북종선은 말할 필요도 없이 더 주목받지 못했다. 때문에 도입되던 당시에는 선종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라 말기인 서기 890년대 이후, 흔히 말하는 국가 막장 테크 시기에 9산 선문이 소율희 등 몇몇 호족들의 지원을 받고 성장하면서 보편화되었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신라 정부는 선종과의 제휴를 시도했다. 이유는 선종을 통해서 떨어지는 권위를 다시 세우려고. 물론 호족의 지원이 더 커서 선종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일본에는 남송을 통해 12세기경 유입되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간단하게 말해 원효대사의 정토종(법성종)보다도 파격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그 때문인지 '무식한' 호족과 무신정권기의 무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이 표현은 조금 비약이긴 하다. 교종은 본래 문벌귀족 사회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무신정권으로 문벌귀족 사회가 무너지자 이들을 지원했으며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때문에 최충헌 시기 지눌과 같은 승려가 무신정권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고 한다. [23] 역대 한국 왕조 국가들 중에서 가장 많은 독자적인 군호를 가지고 있다.[24]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음력 기원전 57년 6월 8일에서 음력 기원후 935년 12월 12일까지 약 991년. 서기 0년은 존재하지 않는다.[25] 기독교 교리에 동음이의어 '천년왕국'(千年王國, millennialism)이라는 말이 있으나 관계 없다.[26] 고려왕조는 국가 공인 관찬사서인 《삼국사기》나 그에 준하는 《삼국유사》에서 신라가 과거 통일을 했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신라의 삼국통일은 불완전, 고려의 후삼국통일을 진정한 통일로 봤기 때문에 신라의 통일을 정통으로 봤다면 삼국사기 이후에 등장했어야 할 신라사를 따로 저술하진 않았다. 중국사의 관찬사서인 24서와 비교해보면 중국 삼국시대 및 이후에 대한 관찬사서는 삼국지-진서로 이어지는 구조인데 조위만을 정통으로 보아 본기로 넣고 촉한과 동오는 세가로 넣었으며 통일왕조로서의 서진사를 따로 저술하였다. 이에 비해 고려는 삼국 모두를 정통으로 보아 본기로 저술했고 직후 고려 왕조로 이어지게 서술하여 고려야말로 중국의 서진 왕조처럼 그 모두를 완전히 싹 다 통합한 진정한 정통 왕조라는 입장이었다.[27] 고려시대에 기록된 서동요는 대격표지로 乙(을, ur)을 사용하는데 비해 이전 신라에서 기록된 향가에서는 肹(힐, gur)을 사용하고 있다.[28] 황해 방언, 경기 방언. 충청 방언은 모두 방언연속체에 해당한다.[29] 조선의 수도인 ‘한양’이나(이 경우는 정식명칭은 한성이었다) 고려의 수도인 ‘송악/개성시’, 그리고 동래, 대구광역시, 전주시 등 여러 지역 중심도시들이 대표적인 예이다.[30] 즉 중앙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지명을 통일함으로서 호족들에게 질서를 강요하고 행정을 통일하는 작업의 일환.[31] 고마나라(固麻那羅)->웅진, 소부리->사비, 벌나->평양, 국내, 요동, 한성(황해도 재령군), 국원 등의 수많은 한자식 명칭.[32] 어두에서는 두음 법칙에 따라 '나'이지만 둘째 음절 이하부터는 '라'로 발음.[33] 이순신은 계림 최고의 장수라는 식.[34] 신라 초기의 한나라에서 사용한 상고한어로는 s.tsʰi(n)rˤaj, 신라 후기의 당나라에서 사용한 중고한어로는 sinla로 발음했다. 한글로 비슷하게 표기하자면 각각 "ㅆ-씬라이" 및 "신-라" 정도. 공교롭게도 중고한어 발음은 자음동화가 없는 점만 빼면 현대 한국어 발음과 거의 일치한다.[아랍어] 정관사 ال(al)+سيلى(silla)의 합성일 경우, 아랍어의 음운변화에 따라 앗실라로 읽는게 맞다. 아랍어로 중국을 지칭하는 الصين (앗씬)같이 정관사+단어로 구성된 국명이 많은데, 신라도 이와 같은 가능성이 높다.[35] 라틴어로 의자라는 뜻도 있다.[36] 퀼 테긴 비, 빌게 카간 비. 한국을 뜻하는 몽골어 '솔롱고스'나 만주어 '솔고/솔호'와 연관이 있으리라 보는 의견도 있다.[37] 《삼국사기》 기록상 초기 왕들의 수명이 인간의 평균수명을 감안할 때 지나치게 긴 것은 고구려백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다.[38] 姓이 氏보다 더 위의 개념[39] 가야가 멸망한 후 김해 김씨 왕족들은 모두 신라로 흡수, 합병, 통합되었는데 이때부터 김씨들의 장기집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40] 단, 해씨 고구려설, 비류백제왕 설과 같이 사실은 고구려나 백제도 주몽온조에서 이어지는 세력이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41] 그렇지 않고서야 통일신라 시점에 와서 골품제 개편 논의나 특히 신분이 평민이었던 장보고에게 군사 징발권과 청해진 대사라는 벼슬을 주었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42] 고대 로마 기준으로 따지면 모든 개혁을 거부하던 옵티마테스가 끝내 카이사르를 비롯한 포풀라레스 집단에게 타도당하고 만 것과 비슷하다. 그나마 개혁을 거부하던 신라 진골 집단은 서라벌 함락 당시 후백제 수도 전주로 끌려가서 일반 후백제 백성으로 살든지 아니면 고려의 향리로 강등당할망정 몰살당하진 않았지만, 옵티마테스 집단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아예 물리적으로 말살된 게 차이다.[43] 향가 모죽지랑가는 귀족인 화랑 죽지가 자기 휘하인 평민 낭도 득오를 아끼고, 득오가 죽지를 존경해 지은 노래다. 찬기파랑가 역시 모범이 되는 화랑 기파랑을 아랫사람이 찬양하는 노래다.[44] 현재의 경주 시내 형산강은 보문관광단지의 인공 호수를 지으면서 수량이 줄어들어 쪼그라든 상태다. 원래는 지금보다는 넓은 강이었다.[45] 물론 조선은 인구 밀도가 커지면서 국가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지만.[46] 개미핥기 토우가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개미핥기가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안 닮았을 뿐더러 개미핥기처럼 꼬리가 수평인 게 아니라 개처럼 꼬리가 엉덩이위까지 올라가 있다. http://blog.naver.com/gesekideska 애초에 개미핥기는 아메리카에 사는 동물인데 그 시절엔 개미핥기의 존재 자체를 알 방법이 없다.[47] 이는 고려와 조선시대 까지도 이어진다.[48] 당시에 유리 구슬은 일종의 보석 취급을 받았다.[49] 낭공대사비, 전유암산가서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다.[50]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대표적.[51] 다만 신라의 작품으로 의견이 거의 모아진 83호와 달리 78호의 경우 여전히 국적 논란이 많다.[52] 일본 《몬토쿠 덴노 실록》 권2[53] 일본 궁중 음악인 '아악(雅楽, 가가쿠)' 중에서 한반도 계통 음악들을 가리킨다. 명칭 자체는 고(구)려악이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에서 전해진 음악들을 통합한 분류이다.[54] 日本書紀』卷八 「仲哀紀」[55]화랑세기》와 《제왕연대력》은 필사본이라 주장하는 책이 지금도 존재하지만 위서로 추정되고 있다. 진위논란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56] 화백회의를 개최하는 장소이기도 했던 사령지, 그리고 천경림과 문잉림처럼 신성 구역으로 정해놓았던 등. 사실 신라의 성지순례 문화는 불교 공인 이후에도 화랑의 풍습으로 계승되기도 했으며 화랑 순례의 흔적이 남은 곳으로는 울주 천전리 암각화, 울진 성류굴 동굴, 제천 점말동굴 등이 그 예시다.[57] 아도가 숨어서 불교 전파 활동을 한 지금의 구미시에 있는 모례의 집에는 현재 신라 불교 초전지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58] 하지만 선종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는 신라 말의 혼란기에 여러 지방 호족에 의해 악용되었고, 특히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궁예가 타락하고 멸망하게 되자 고려 초기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호국 불교 교종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선종을 박해했다.[59] 하지만 첨성대가 정말 천문대인지는 논란이 있다. 일단 형태적으로도 별을 관측하기 불편하고 관련 기록도 많지 않기 때문.[60] 혹은 중과 왕비가 간통을 하고 있었다고도 한다.[61] 발해와 신라는 싸운 적이 거의 없다.[62] 장수왕 즉위 이후 최전성기를 맞은 고구려라는 공통의 적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맺은 120년간의 나제동맹 기간 참고[63] 고구려 유민들 입장에서는 신라보다 당에 대한 적대감이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라와 손을 잡은 것이다. 물론 신라에 대한 반감도 상당히 컸을 것은 분명하다.[64] 주로 황해도, 강원도 지역민들과 여러 사유로 남하한 고구려인들[65] 다만 백제인은 거의 대부분이 신라인이 된 반면 고구려인은 일부만이 신라인이 되었다는 차이가 있다.[66] 단 대조영이 신라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은 신라인인 최치원이 발해를 비하하는 글에만 나오는 내용이고 다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아 교차검증이 안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67] 일본서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과장되고 왜곡된 내용이 많다.[68] 처용을 이 예로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69] 어떤 국내 모 포털 사이트의 네티즌은 후백제의 견훤이 아니라 태봉의 궁예가 왕건의 쿠데타로 몰락하지 않고 신라를 침략했으면 신라 침공 후 경순왕만 세워놓고 괴뢰국화하는 선에서 그친 견훤과 달리 무력으로 멸망시킨 다음 태봉 영토로 강제 병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70] 892년에 사실상 왕이 되었지만 신라 서면 도통 지휘 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 전주 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 개국 공식 읍 이천호라는 형식상 신라의 신하로 깔고 들어가는 칭호를 자처했다. 백제 왕 칭호는 8년 뒤엔 900년부터다.[71] 세계사적으로 볼 때는 비슷한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고대 원수정 로마의 최측근 왕궁 경비대원은 전원 게르만인이었고, 중세 로마도 최측근 경비대원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치역학과 무관한 노르만인 바랑기였다. 하지만 신라 왕실이 뿌리가 같고 평소에는 왕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던 진골을 왕궁 경비에서 제외한 것이 특이해보인다는 것이다. 신라 왕실이 전성기 때부터 진골의 위험성을 인지한 것이다.[72] 색상은 전주를 제외한 해당 주의 만보당 부대의 상징색이다.[73] 색상은 해당 부대의 옷깃 상징색이다.[74] 총기가 들어오는 이후에는 화승총[75] 다만 이는 구서당을 통해 흡수했던 고구려, 백제, 말갈인들을 더욱 차별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시기가 되면 적어도 서라벌에 살았던 이들은 왕경인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아서인지 조상이 고구려인이든 백제인이든 말갈인이든 완전히 신라인으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구서당 부대를 유지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76] 이 100척을 당 수군에 대한 보급선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삼국사기에서 비전투함은 조선(漕船, 수송선) 등으로 불러 전투함과 구분해 기록했기 때문에 이상훈 교수는 전투함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77] 물론 세세하게 따지면 중대에도 너무 어린 왕이 즉위해 정국을 주도하지 못했고, 반대로 하대 초기의 원성왕 ~ 헌덕왕처럼 개혁 정치를 통해 강한 전제 왕권을 추구했기에 도식화가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78] 고구려보다 국가 체제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더 먼저 건국 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는 한국 고대 사학계의 쟁점 중 하나인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79] 한국사의 흐름에 있어서 통일신라가 한국사의 적통이고 발해는 방계 국가에 불과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80] 다만 여기서 얘기하는 현대의 계승의식은 어디까지나 향토사의 관점에서 고향에 위치한 옛 고대 국가에 애착을 갖는다 정도이지 그 나라만을 계승한다는 편협한 사고방식이 아니다. 일례로 경주시부여군에 사는 한국인이 각각 신라나 백제만 신경쓰고 나머지 2국에 대해서는 소홀하거나 증오하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81] 삼국이 각각 압록강 유역, 한강 유역, 경주 일대에서 시작해서 주변에 성읍국가들을 정복해가며 5, 6세기에 서로 국경을 맞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82] 계림후(鷄林侯)에서 승작된 작위이다.[83] 원년(元年) : BC 57.[84] 반대로 고구려를 신라보다 더 고평가하는 경향도 분명있었는데 이중에는 소중화 사상을 깊게 가진 유학자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종휘의 서적인 《동사》에서는 고구려야말로 중화문명의 기치인 유교 사상이 발달했으며 신라는 도리어 유교보다 불교의 영향이 깊었다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고구려를 더 고평가했다.[85]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모신 사당.[86] 평양에 있는 기자(箕子) 사당.[87] 고려 태조 이하 8왕을 모신 사당.[88] 고려를 가리킴.[89] 조선 시대에 고려 태조와 7왕을 제사지내던 사당.[S] A B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모신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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