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금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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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처형 이후
4. 해석



1. 개요[편집]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로 신라 소지 마립간이 신비한 노인의 편지에 의해 목숨을 구한 이야기이다. '서출지 설화'라고도 하는데, 편지가 나온 연못이라는 뜻이다. 서출지는 지금도 경주시 외곽 지역에 호수로 남아있다. 이 설화는 오곡밥을 먹는 유래라고도 전해진다.

전우치(영화)에서 이 설화가 쓰였다.

2. 내용[편집]


488년(소지 마립간 10년)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서 중서함미[1]를 보아 이걸 이상하게 여기고 점을 쳤더니 까마귀를 따라가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점을 쳐서 그 뜻을 알아차린 이야기와 다르게 쥐가 직접 왕에게 "까마귀를 따라가라"고 전했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왕은 기사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갔더니 돼지 2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까마귀가 그새 사라진 것도 모르고 지켜보는데 웬 노인이 못에서 나와 글을 올렸다. 글의 겉봉에,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는 소지 마립간에게 가서 바쳤고 곧 이 일을 의논했는데, 왕은 "두 사람이 죽기보다야 한 사람이 죽는게 낫지 않냐"고 하며 열어보지 않을 것을 말하지만 일관(日官)이 "두 사람이란 서민(庶民)을 이르는 것이고, 한 사람이란 곧 왕을 이르는 것이다"고 아뢰어 왕이 이를 옳게 생각해 글을 열어보게 했다.

글 속에 쓰여져있는 것은 '금갑을 쏘라(射琴匣)'[2] 였고, 왕은 글속에 쓰인 대로 궁에 돌아가 거문고의 갑(匣)을 쐈다. 그 속에 웬 중이 궁주(宮主)[3]와 간통하고 있었고, 그는 왕의 자리를 탐내고 있었다. 이를 보고 격노한 왕이 왕비와 중을 처형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전설은 여러 판본이 있으니 왕이 쏜 화살에 맞은 거문고갑에 피가 흐르는 게 보이자 서둘러 병사들에게 확인을 시켜보니 왕을 죽이려고 매복한 자객 두 사람이 화살에 맞아 죽어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왕은 매년 첫 쥐, 돼지의 날에 까마귀를 위해 약밥을 만들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3. 처형 이후 [편집]


사금갑 사건 이후로 매년 정월 첫 돼지, 쥐, 말의 날에는 모든 일을 삼가며, 동작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고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또한 이날엔 까마귀에게 찰밥으로 공양하며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겼다고 하여 서출지(書出池)[4]설화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이후 주자에 의하여 생겨난 '흉조(凶鳥) 까마귀'의 인식과 달리,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까마귀는 《삼국유사》의 표현을 빌려 '영험하고 빛을 상징하는 짐승’이었기 때문이다.[5]


4. 해석[편집]


대체로 신라 내부 불교 세력과 토착 종교 세력간 갈등을 나타낸 설화로 풀이하는 경우가 많지만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에게 승려 도림을 보내 한 번 써먹은 방법으로 신라에게도 승려를 간첩으로 보냈다가 실패한 것이 설화로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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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견중서함미'(路見衆鼠含尾: 길에서 여러 쥐들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구절의 '중서함미'이다. 글자 그대로 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과거 문서 '중서함미'에 써진 것과는 달리 요괴가 아니다. 그저 쥐가 꼬리를 물고 있는 기이한 현상을 나타내는 말이었을 뿐이다. '중서함미' 문서가 '사금갑'으로 대체된 이유이기도 하다.[2] 이 말이 이 이야기의 제목이 되어, 사금갑 설화가 되었다.[3] 소지 마립간의 왕비가 습보 갈문왕의 딸이라고 서술한 《삼국유사》에서는 궁주, 잉숙의 딸 선혜부인이라고 서술한 《삼국사절요》에서는 왕비로 나와 있다. 따라서 이 궁주/왕비는 일반적으로 선혜부인으로 본다.[4] 편지가 나온 연못이라는 뜻이다.[5] 《삼국유사》 <기이>편(奇異篇)에 실린 까마귀에 대한 편찬자 일연 본인과 민간의 인식을 보면 알 수 있듯, 최소한 고려까지만 해도 까마귀가 흉조가 아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