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소(수나라)
덤프버전 :
수나라의 추존 황제에 대한 내용은 양소(수 추존) 문서 참고하십시오.
楊素
(544년 ~ 606년)
북주, 수나라의 인물로 자는 처도(處道)이다. 북주의 재상 양부의 아들로 양현감의 아버지이다. 일설에는 그가 후한 태위 양진의 후손이라고도 하는데 수나라의 황실인 양씨와는 먼 친척 관계이다.
홍농 화음 사람으로 어려서 재주, 예능이 많고 큰 뜻을 가지면서 조그만 것에 구애된 것이 없었다.
수나라 건국 이후 상서우복야가 되었다가 수양제 즉위 이후 상서좌복야로 승진하게 된다.
양부가 절개를 지키다가 북제의 공격으로 정양성을 잃자 시호를 추증받지 못하자 양소가 추증을 받도록 두세 차례 표문을 올렸다. 우문옹이 화가 나서 목을 베려고 하자 양소는 무도한 천자를 섬겨 그 분수를 다하다가 죽는다고 외쳤고 우문옹은 그 말을 장하게 여겨 양부를 대장군으로 추증하면서 양소는 의동삼사에 임명되어 예우받았다.
조서를 쓰도록 명령받으면 붓을 잡고 즉시 완성했고 문장, 뜻이 아름다워 우문옹이 이를 힘쓰면 부귀하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양소는 부귀한 것에 관심이 없다고 했으며, 575년에 우문옹이 북제를 공격하기 위해 6만 명을 이끌고 하음으로 향하자 선봉을 자청했다.
변주자사, 서주총관을 지내다가 580년에는 울지형이 반란을 일으키자 우문주를 공격했다. 이후 당시 북주의 재상이던 양견(훗날 수문제)에게 인정받았고 종국에 양견이 북주를 뒤엎고 수나라를 창시하는데 1등 공신이 된다. 참고로 양소는 문과 무를 겸비한 인물로서, 심지어 그림까지 잘 그렸다. 여기에 군사공학에도 탁월해서, 훗날 진을 정벌하여 수나라의 중국통일에 기여하는 선박의 제조에도 재능을 보인다.
581년에 수나라가 세워지자 상주국이 되었다가 584년에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양소는 587년에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영안에서 오아, 황룡, 평승, 책맹 등의 함선을 만들었고 588년에 청하공인 양소는 행군원수가 되어 영안에서 출발했으며, 진나라의 척흔을 유인은이 격파하자 수군을 이끌고 가서 양자강에 주둔했고 진나라의 군사들이 청하공이 바로 강의 신이라면서 두러워했고 유인은과 함께 진혜기, 여충숙 등과 40여 차례 싸워 격파했다. 수나라의 남진 정벌에서 수군의 역할은 실로 막대했는데, 아예 대규모 병력을 운송할 수 있는 배까지 제작한 양소의 공은 실로 으뜸이었다.
590년 7월 18일에 납언이던 양소가 내사령에 임명되었고 진나라였던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양소가 행군총관이 되어 경구에서 주막문을 격파하고 진릉의 고세흥, 무석의 섭략 등을 격파했으며, 심현증 등을 격파하고 내호아의 기습이 성공해 고지혜를 격파했다. 또한 심효철을 온주에서 격파하고 천태산으로 도망가자 추격해서 붙잡았으며, 조정에 돌아갔다가 남쪽으로 돌아와서 회계의 왕국경을 격파한 후에 고지혜를 죽이도록 설득해 항복시켜 강남을 평정했다.
592년 12월 14일에 상서우복야가 되어 고경과 함께 정사를 관장했으며 593년 2월 6일에 기주의 북쪽에 인수궁을 만들게 되자 이를 감독하면서 우문개를 검교장작대장, 봉덕이를 토목감으로 삼게 했으며, 595년에 인수궁이 완성되자 수문제가 행차했고 날씨가 더워 역부들 중에 죽은 사람이 많자 그 시체를 모두 불태웠다.
그런데 이 일로 수문제는 양소가 백성의 힘을 쓴 것으로 궁을 만들어 천하 사람들에게 원망을 맺도록 했다고 하자 양소는 이를 듣고 두려워했는데, 봉덕이가 황후께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면 특별히 은정을 내리는 조서가 있을 것이라 하자 그 말대로 독고 황후가 이 궁을 보고 칭찬하면서 각종 물품을 내리자 귀한 신분이나 재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던 양소는 봉덕이만큼은 칭찬하고 귀중하게 여기게 되어 그를 내사사인으로 추천했다. 양소는 이후로도 계속 승승장구하면서, 최고의 관직인 상서우복야까지 오르고 월국공의 작위까지 받는다. 여기에 598년에는 서돌궐을 상대로도 승리를 거두는 등, 육상전 지휘능력까지 입증한다.
599년에 양소는 월공으로 있으면서 힐가시다나도람가한이 대동성을 공격한다고 해 영주도로 파견되었고 도람가한과 동맹을 맺은 달두가한과 싸워 기병으로 싸우는 전법을 만들었다가 주라후의 진언으로 달두가한을 공격해 격파했으며, 600년에는 달두가한이 요새를 침범하면서 양광과 함께 영무도로 나아가 마읍도에 있던 양량, 사만세 등과 합류해 공격했다.
우문술이 양광을 태자로 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양약에게 접근했는데, 양약이 양광은 태자로 삼아야 한다고 하자 양약의 말을 듣고 양광을 태자로 지지하게 되었다. 601년에 좌복야가 되었고 운주도 행군원수가 되어 의리진두계민가한과 함께 보가가한을 공격했으며, 602년에 이 공으로 아들 양현감의 작위가 주국으로 올라가고 양현종의 작위가 회남공이 되었다. 독고 황후가 죽고 장례의 일을 처리해 상서로운 땅을 찾았다고 해서 다른 한 명의 아들이 의강공으로 책봉되면서 채읍 1만호를 포함해 다양한 물품을 받았다. 양소는 양광의 모사로서 활약하며 양광이 아버지 수문제를 참살하는 쿠데타를 성공시키는데 결정적 공훈을 세운다.
또한 교주의 이족 사람인 이불자가 봉기하면서 유방을 추천했으며, 그가 추천한 유방이 이불자를 진압하는 것에 성공했다.
수양제가 즉위하고 604년에 양량이 반란을 일으키자 병부도행군총관, 하북도안무대사가 되어 무리 수 만을 인솔해 양량을 진압했고, 이 공로로 상서우복야에서 상서좌복야가 된다. 606년 6월 29일에는 사도가 되었다. 그러나 수양제는 양소가 공이 많아 시기를 했고 겉으로는 특별한 대우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박대를 했는데, 양소는 초공으로 옮겨졌다가 병이 들어 침상에 누웠다.
명성과 지위가 극에 달한 것을 걱정해 약을 먹으려고 하다가, 606년 7월 23일에 사망했으며 태위공, 홍농등십군, 태수로 추증되고 장사지내는 것을 성대하게 했고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다.
楊素
(544년 ~ 606년)
1. 개요[편집]
북주, 수나라의 인물로 자는 처도(處道)이다. 북주의 재상 양부의 아들로 양현감의 아버지이다. 일설에는 그가 후한 태위 양진의 후손이라고도 하는데 수나라의 황실인 양씨와는 먼 친척 관계이다.
홍농 화음 사람으로 어려서 재주, 예능이 많고 큰 뜻을 가지면서 조그만 것에 구애된 것이 없었다.
수나라 건국 이후 상서우복야가 되었다가 수양제 즉위 이후 상서좌복야로 승진하게 된다.
2. 생애[편집]
2.1. 북주 시절[편집]
양부가 절개를 지키다가 북제의 공격으로 정양성을 잃자 시호를 추증받지 못하자 양소가 추증을 받도록 두세 차례 표문을 올렸다. 우문옹이 화가 나서 목을 베려고 하자 양소는 무도한 천자를 섬겨 그 분수를 다하다가 죽는다고 외쳤고 우문옹은 그 말을 장하게 여겨 양부를 대장군으로 추증하면서 양소는 의동삼사에 임명되어 예우받았다.
조서를 쓰도록 명령받으면 붓을 잡고 즉시 완성했고 문장, 뜻이 아름다워 우문옹이 이를 힘쓰면 부귀하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양소는 부귀한 것에 관심이 없다고 했으며, 575년에 우문옹이 북제를 공격하기 위해 6만 명을 이끌고 하음으로 향하자 선봉을 자청했다.
변주자사, 서주총관을 지내다가 580년에는 울지형이 반란을 일으키자 우문주를 공격했다. 이후 당시 북주의 재상이던 양견(훗날 수문제)에게 인정받았고 종국에 양견이 북주를 뒤엎고 수나라를 창시하는데 1등 공신이 된다. 참고로 양소는 문과 무를 겸비한 인물로서, 심지어 그림까지 잘 그렸다. 여기에 군사공학에도 탁월해서, 훗날 진을 정벌하여 수나라의 중국통일에 기여하는 선박의 제조에도 재능을 보인다.
此堂存古制 城上俯江郊(차당존고제 성상부강교)
이 월공당은 옛 제도대로 있나니, 성 위에서 강가의 들판을 굽어보게 되네.
-두보, 배제공상백제성루연월공당지작(陪諸公上白帝城樓宴越公堂之作)-
豈但祁岳與鄭虔 筆跡遠過楊契丹(기단기악여정건 필적원과양글안)
어찌 그림의 명인(名人)이 비단 기악과 정건뿐이리, 이 필적은 양소에서 멀리 지나쳐 뛰어나도다.
-두보, 봉선유소부신화산수장가(奉先劉少府新畫山水障歌)-
起樓五層 高百餘尺 士八百人(기루오층 고백여척 사팔백인)
배 안에 5층의 누각을 세우니 높이가 100여 척이요 군사는 8백여 명이 탈 수 있었습니다.
-이첨(李詹), 상정상국서(上鄭相國書)-
2.2. 수나라 건국/진나라 평정[편집]
581년에 수나라가 세워지자 상주국이 되었다가 584년에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양소는 587년에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영안에서 오아, 황룡, 평승, 책맹 등의 함선을 만들었고 588년에 청하공인 양소는 행군원수가 되어 영안에서 출발했으며, 진나라의 척흔을 유인은이 격파하자 수군을 이끌고 가서 양자강에 주둔했고 진나라의 군사들이 청하공이 바로 강의 신이라면서 두러워했고 유인은과 함께 진혜기, 여충숙 등과 40여 차례 싸워 격파했다. 수나라의 남진 정벌에서 수군의 역할은 실로 막대했는데, 아예 대규모 병력을 운송할 수 있는 배까지 제작한 양소의 공은 실로 으뜸이었다.
590년 7월 18일에 납언이던 양소가 내사령에 임명되었고 진나라였던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양소가 행군총관이 되어 경구에서 주막문을 격파하고 진릉의 고세흥, 무석의 섭략 등을 격파했으며, 심현증 등을 격파하고 내호아의 기습이 성공해 고지혜를 격파했다. 또한 심효철을 온주에서 격파하고 천태산으로 도망가자 추격해서 붙잡았으며, 조정에 돌아갔다가 남쪽으로 돌아와서 회계의 왕국경을 격파한 후에 고지혜를 죽이도록 설득해 항복시켜 강남을 평정했다.
2.3. 천하통일 이후[편집]
592년 12월 14일에 상서우복야가 되어 고경과 함께 정사를 관장했으며 593년 2월 6일에 기주의 북쪽에 인수궁을 만들게 되자 이를 감독하면서 우문개를 검교장작대장, 봉덕이를 토목감으로 삼게 했으며, 595년에 인수궁이 완성되자 수문제가 행차했고 날씨가 더워 역부들 중에 죽은 사람이 많자 그 시체를 모두 불태웠다.
그런데 이 일로 수문제는 양소가 백성의 힘을 쓴 것으로 궁을 만들어 천하 사람들에게 원망을 맺도록 했다고 하자 양소는 이를 듣고 두려워했는데, 봉덕이가 황후께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면 특별히 은정을 내리는 조서가 있을 것이라 하자 그 말대로 독고 황후가 이 궁을 보고 칭찬하면서 각종 물품을 내리자 귀한 신분이나 재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던 양소는 봉덕이만큼은 칭찬하고 귀중하게 여기게 되어 그를 내사사인으로 추천했다. 양소는 이후로도 계속 승승장구하면서, 최고의 관직인 상서우복야까지 오르고 월국공의 작위까지 받는다. 여기에 598년에는 서돌궐을 상대로도 승리를 거두는 등, 육상전 지휘능력까지 입증한다.
599년에 양소는 월공으로 있으면서 힐가시다나도람가한이 대동성을 공격한다고 해 영주도로 파견되었고 도람가한과 동맹을 맺은 달두가한과 싸워 기병으로 싸우는 전법을 만들었다가 주라후의 진언으로 달두가한을 공격해 격파했으며, 600년에는 달두가한이 요새를 침범하면서 양광과 함께 영무도로 나아가 마읍도에 있던 양량, 사만세 등과 합류해 공격했다.
우문술이 양광을 태자로 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양약에게 접근했는데, 양약이 양광은 태자로 삼아야 한다고 하자 양약의 말을 듣고 양광을 태자로 지지하게 되었다. 601년에 좌복야가 되었고 운주도 행군원수가 되어 의리진두계민가한과 함께 보가가한을 공격했으며, 602년에 이 공으로 아들 양현감의 작위가 주국으로 올라가고 양현종의 작위가 회남공이 되었다. 독고 황후가 죽고 장례의 일을 처리해 상서로운 땅을 찾았다고 해서 다른 한 명의 아들이 의강공으로 책봉되면서 채읍 1만호를 포함해 다양한 물품을 받았다. 양소는 양광의 모사로서 활약하며 양광이 아버지 수문제를 참살하는 쿠데타를 성공시키는데 결정적 공훈을 세운다.
또한 교주의 이족 사람인 이불자가 봉기하면서 유방을 추천했으며, 그가 추천한 유방이 이불자를 진압하는 것에 성공했다.
2.4. 수양제 시절[편집]
수양제가 즉위하고 604년에 양량이 반란을 일으키자 병부도행군총관, 하북도안무대사가 되어 무리 수 만을 인솔해 양량을 진압했고, 이 공로로 상서우복야에서 상서좌복야가 된다. 606년 6월 29일에는 사도가 되었다. 그러나 수양제는 양소가 공이 많아 시기를 했고 겉으로는 특별한 대우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박대를 했는데, 양소는 초공으로 옮겨졌다가 병이 들어 침상에 누웠다.
명성과 지위가 극에 달한 것을 걱정해 약을 먹으려고 하다가, 606년 7월 23일에 사망했으며 태위공, 홍농등십군, 태수로 추증되고 장사지내는 것을 성대하게 했고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다.
3. 여담[편집]
- 야사의 일화를 첨부하자면, 한왕 양량 토벌 이후 수양제가 연회를 열었는데 연회가 무르익자 일부러 술에 취한 척해서 수양제에게 폐하께서는 선제께서 하신 실수를 반복하지 마시옵소서. 제위를 물러주실 때에는 시원시원하게 물러주시옵소서. 선제께서 제위를 물러주는 것을 계속 주저해서 이 노신이 이 고생을 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우문술을 비롯한 신하들이 '좌복야 어르신 농담이 너무 지나치십니다'라고 하자, 수양제가 '아니다. 좌복야 말이 맞도다. 이 나라에서 짐을 훈계할 수 있는 자가 좌복야 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라고 하고 퇴장했다고 한다. 이후 양소가 우문술과 함께 귀가하는데 우문술이 왜 그랬냐고 까닭을 묻자 양소 왈 폐하께서는 그 기운이 너무 성하셔서 그 기운을 눌러주지 않는다면 그 기운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그 기운을 꾹 눌러줘야 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수양제가 저지른 폭정을 보면 양소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닌 셈. 하지만 양광이 그런 성품인 것을 알면서도 황제로 올린 것 자체가 양소의 잘못이었다.
- 성격이 꼼꼼하지 못하고 간략하면서 말을 잘 했고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높이거나 내렸다. 꾀가 많았으며 재능이나 능력은 고경보다 뛰어났지만 사람을 성실하게 대하면서 나라를 자기 몸처럼 느끼면서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재상의 식견이나 도량은 고경보다 못했다.
- 양소는 100명, 200명이 적에게 달려가도록 해 진지를 함락하지 못하면 돌아오는 사람의 목을 베어 200명, 300명에게 다시 나아가도록 해서 그 방법을 똑같이 했으며 흐르는 피가 많아도 태연하게 웃늘정도로 성품이 잔인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수와 병사들이 무서워해 필사적으로 싸워 이겼기에 명장으로 불렸으며, 양소가 말하면 허락받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작은 공로라도 반드시 기록했기에 양소가 비록 성품은 잔인했지만 장수들과 병사들은 양소를 따르기를 원했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김창봉이 연기했다. 고경과 함께 수나라의 대표적인 관료로 나오며 권신으로 묘사된다. 조정에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 놓고 육성한다거나 친척들을 고루 요직에 임명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자신의 주선으로 군부의 고위직에 오른 우문술을 회유하려다가 거부당하기도 한다. 작중에서는 수 양제가 진왕 시절이었을 때부터 철저히 그의 편으로 태자 양용을 모함하는 일은 물론 그와 가까웠던 관료들을 국문하여 억지 자백을 받아내는 일을 주도하기도 했다. 한편 그러면서도 수 양제가 인간 말종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황자들 가운데 가장 나은 사람이 진왕이니[1] 일단 그를 앉히고 나라를 바로잡고자 했던 것. 수 양제가 즉위한 뒤 축하연 자리에서 한왕 양량이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자 직접 병주로 출병하여 진압했고 그 공로로 좌복야에 임명되고 초공에 봉해졌다. 그러나 수나라 최고의 권신이었던 그를 두려워한 수 양제에게 토사구팽될 처지에 놓인다. 수 양제는 운하 공사를 시찰하러 나온 김에 연 연회에서 양소에게 "좋은 술이 있다"고 권하는데 양소는 술병을 보고서는 거부한다.[2] 그러나 수 양제가 계속 권하자 "좋은 술은 윗사람부터 마시는 것"이라고 하며 태자에게 권해서 죽게 만든다. 수 양제가 "태자에게 평소에 병이 있어서 죽은 것"이라고 공표한 덕에 일단 목숨을 건지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양소는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면서 친족들을 불러 각자의 길을 모색할 것을 당부한다. 결국 수 양제가 보낸 약(을 가장한 독약)을 먹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약을 가져온 장형에게 "오늘은 내가 가지만 다음은 자네 차례일세."라며 그의 몰락을 예언하였고 작중에서 수 양제가 말했던 "인생이 곧 연극 아닌가?가 참으로 맞는 말"이라는 말을 끝으로 목숨을 잃는다. 이후에 이 소식을 듣게 된 수 양제는 양소의 집으로 문상을 간 후 그 곳에서 잔치를 준비하도록 하여 죽은 양소를 조롱한다.
그리고 613년에 고구려 침공 중에 장남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 때문에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것에 크게 분노한 나머지[3] 양광은 죽은 양소의 무덤을 파헤쳐 그 목을 베라고 명한다.
[1] 이것은 작중 묘사 상으로나 실제 역사 상으로나 절대로 그른 판단이 아니였다. 중국사 역대급의 명군인 수문제와 역대급의 명황후인 문헌황후가 고작 연기 좀 했다고 수양제에게 완전히 넘어간 건 그만큼 다른 아들 중에 인물이 없어서였던 것도 있다. 작중에서도 충신으로 나오는 장형 역시 같은 판단으로 양광을 지지하게 된다.[2] 집에서 꿈을 꾸고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서 풍수사를 불러 해몽을 시켰는데 "붉은 색을 극히 경계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술병이 붉은 색. 게다가 대신 마셨던 태자도 그 이름이 자기랑 같았다.[3] 당시 양현감은 본국에서 병참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병참 담당자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식량이며 무기며 각종 보급품을 조달받을 수 없으니 수나라 군대는 그 즉시 공세종말점이 와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8 16:27:01에 나무위키 양소(수나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