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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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
薩水大捷
살수전투[1]


파일:살수대첩. 박각순. 1975년 작.jpg

<살수대첩>. 박각순. 1975년 작

파일:살수대첩 (대한제국 초등 대한역사, 1908년).png

대한제국 역사 교과서《초등 대한역사》수록 삽화, 1908년
시기
612년 7월음력
장소

고구려, 식성군 살수 유역[2]
원인
수양제의 고구려 2차 침공
교전 세력
고구려
(공격자)



(수비자)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구려 군기.svg 을지문덕 (대신)
지휘관

파일:sui_dynasty_textlogo.png 우중문 (대장군)
참가자}}}
파일:고구려 군기.svg 불명
병력
병력 규모 불명[3]
약 305,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원정군 몰살
사상자 : 302,300명
[4]
결과
고구려의 대승, 수나라 원정군 궤멸
영향
수나라의 민심 이반 및 제3, 제4차 침입의 실패, 그로 인한 국가 역량의 심각한 저하와 전국적인 반란으로 인한 통일제국 수나라의 멸망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5. 분석
5.1. 오해: 수공?
6. 영향과 의의
7. 북한의 관점
8. 대중매체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
612년(영양왕 23년)에 일어난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의 대표적인 전투이다.

살수[5]에서 고구려을지문덕의 주도 아래 이루어낸 대첩이자 한국 전쟁사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승전 중 하나이다. 흔히 강감찬귀주 대첩, 이순신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으로 불린다.[6]


2. 배경[편집]


612년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13만여 명에 달하는 수(隋)나라군은 음력 3월 15일, 요하에 도달했다. 수나라 침공군의 전 병력이 탁군[7]을 떠나는 데만 40일이 걸릴 정도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초대규모의 군대였음을 생각하면 대단히 진군 속도가 빨랐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수나라군은 요하를 건너는 데만 2개월이 걸렸다. 천신만고 끝에 요하를 건너 요동성 공성전을 시작했지만, 수나라군은 또 다시 1개월이 넘도록 요동성 함락은 커녕 큰 손실을 입고, 음력 6월을 맞이했다.

게다가 병력과 물자의 손실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시간이었다. 수양제는 지나치게 거대한 병력을 이끌고 와서 (설령 요동성을 바로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해도) 겨우내 보급을 받으며 요동에 계속 주둔하기는 힘들었기에, 곧 겨울이 다가오면 힘들여 함락한 성들을 모두 뱉어내고 도로 본토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요동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3개월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 당시로서는 더더욱 답이 없었다.

이에 수양제는 지지부진한 전황을 타개할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졌다. 전군에서 정예병을 추려 300,000명의 별동대를 조직하여 우중문우문술의 지휘하에 평양성으로 직행[8][9]시키는 한편, 황해를 건너는 내호아수(水)군과 합류하여 한 방에 평양성을 함락시키려는 대담무쌍한 작전이었다.


3. 전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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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병사

양제의 계획은 성공한다면 위협적이었겠지만, 문제는 보급이었다. 당시 수나라군은 300,000명에 달하는 별동대에게 100일 분의 식량과 피복, 병장기, 야전텐트 등을 분배하여 운반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렇게 군장을 분배한 결과 병사 1인당 군장의 무게가 무려 석 섬(약 50kg)이나 된 것이었다.[10] 그러다 보니 이 무식한 짐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한 수나라 병사들이 보급품을 길가에 버렸다.[11] 특히 수나라 장수들은 군수품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어버린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각자 작정하고 몰래 구덩이를 파 묻는 행위를 일일이 막을 방법은 없었다. 결국 별동대는 행군 중에 심각한 물자 부족을 겪게 되었다.

한편 수나라군이 압록강 근처에 다다랐을 때 고구려에서는 을지문덕항복을 구실로 홀로 적군의 본진에 다다랐다. 그리고 별동대가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있어 작전을 실행하는데 문제가 있음을 직접 확인했다. 일찍이 수양제는 우중문우문술에게 을지문덕을 만나거든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몰래 명령했으나, 참군(參軍) 유사룡사신을 함부로 해치면 안 된다며 을지문덕을 그냥 보내주자고 주장했고 이에 우중문도 할 수 없이 보내주었다. 물론 수나라 장수들이 마음을 바꾸어 을지문덕을 다시 불러오려고 했으나 을지문덕은 그대로 유유히 압록강을 건너가 버린 뒤였다.

우문술은 군량 부족을 이유로 퇴각을 건의했지만 우중문은 아니었다. 수양제가 이미 우중문을 대장으로 삼아 지휘계통을 정리했기 때문에 그의 의견대로 수나라군은 평양을 향해 진격했고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의 피로를 가중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교전을 강요하면서도 수나라 군대가 발을 빼지 못하도록 짐짓 패배하는 척 더욱 깊숙이 끌어들였다. 어느 날은 우문술의 군대를 상대로 하루에 7전 7패, 즉 7번 싸우고 7번 도망가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고구려군은 게릴라전만 열심히 해대며, 수나라 군대의 체력을 빼놓았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고구려군의 계획대로였다. 결국 을지문덕은 지속적인 유인 끝에 수나라 군대를 평양성30리까지 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평양성은 견고하여 수나라군은 지친 상태에서 함락시킬 엄두를 내지 못했고, 바다를 통해 상륙하여 호응하기로 했던 내호아는 왕제인 고건무에게 철저하게 박살이 난 상태라서[12]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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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策究天文(신 책 구 천 문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천문)를 깨달았고

妙算窮地理(묘 산 궁 지 리 신묘한 셈은 땅의 형편(지리)을 다하였도다

戰勝功旣高(전 승 공 기 고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지 족 원 운 지 원컨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입조(入朝), 즉 항복을 약속하는 듯한 거짓 항복 문서를 보냈다. 이때 을지문덕은 한 편의 를 같이 보내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이다. 언뜻 보면 띄워주는 내용 같지만, 당시 수나라군의 절망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철저한 조롱이었다.

우중문은 답신을 보냈으며, 을지문덕은 이에 대해 다시 답신을 보내기를

'수나라가 군대를 물리면, 자신이 왕과 함께 항복하겠다.'

는 확인 서한을 보냈다. 물론 그만한 지위에 올라간 우중문이 정말로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 이게 거짓말이라는 건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퇴각밖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체면치레, 즉 수양제에게 변명할 거리 하나를 간신히 챙겼다고 생각한 우중문은 그제야 퇴각을 결심했다. 물론 이것 역시 수나라군을 조금이라도 더 철저하게 파멸시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준비 시간을 벌려는 을지문덕의 치밀한 계획일 뿐이었다.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이 퇴각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알고는 병력을 준비해 놓았다. 즉 이 시점에서 수나라군 별동대 300,000명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수나라군의 별동대는 힘겨운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평양성 코앞까지 유인하기 위해 거짓 후퇴만 거듭했던 그 때까지와는 반대로 본격적인 공세에 들어갔다. 사방에서 공격하여 수나라 군대를 쳐부수기를 반복했으며, 수나라군은 방진을 치며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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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군의 계속되는 공격속에 약화될 대로 약화된 수나라군 별동대는 지금의 청천강 일대인 살수에 간신히 도착했다. 수나라군이 도하를 시작하여 총병력의 절반쯤이 강을 건너는 순간, 고구려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 병력을 집중시켜 최후의 총공격을 개시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전에 이르기까지 지상군이 제일 취약한 순간 중 하나가 도하 중일 때[13]였으니 을지문덕의 전투 개시 시점이 절묘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수나라 후군이었다. 수나라의 후위대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고, 지휘관인 우둔위 장군 신세웅마저 전사할 정도로 철저하게 박살났다. 그리고 후군의 이런 참담한 붕괴로 인해 300,000명의 대군 전체에 극도의 공포가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패닉에 빠진 수나라군 장병들은 살기 위해 서로 도주하면서 연쇄적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군대는 최소한의 편제와 통제가 무너지면, 30만 대군이 아니라 300만 대군이라 할지라도 먹잇감에 불과하다.[14]

수나라군 전체가 와해되는 대혼란 가운데서도 몇몇 수나라군 부대는 감투 정신을 발휘하기도 했다. 별동대의 지휘관들 중 설세웅은 백석산에서 빗발치는 화살비와 포위망을 돌파하며 고구려군 일부를 격퇴하는 무용을 떨치기도 했고, 또 다른 지휘관 왕인공도 고구려군 일부를 물리치는 수훈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분전으로는 전황을 뒤집기에 턱없이 부족하여 거의 의미가 없었다. 305,000명 중 살수(청천강)에서 빠져나와 압록강에 도착한 장병은 겨우 2,700명에 불과했으니 말이다.[15]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그 2,700명도 하루 만에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450리(177 km)를 도망쳐 왔다고 한다. 병자호란때 지리를 알고도 기병으로의 진격속도가 하루 100km가 최대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수나라군 패잔병이 대형을 유지하기는커녕 장비도 다 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도망쳤다는 것을 과장법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유사룡은 패전 후 처형당했고, 우중문은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에 홧병으로 병보석을 받고 자택에서 죽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수나라 입장에서는 돈과 인력을 말 그대로 다 때려부었음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전쟁이었다.

4. 결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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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군 별동대 300,000명은 2,700여 명만 남고 모조리 증발했다. 이에 남은 수나라군 총병력은 즉시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대전으로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은 종결되었다.

잔존 병력들이 간신히 본진에 도착하자 수양제 양광은 큰 충격을 받았고 대노하여 패장인 우중문과 우문술을 쇠사슬로 포박하여 서도인 장안까지 끌고 갔다. 이후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을 서인(庶人)으로 전락시키고 감옥에 가두었다. 다만 우문술은 제3차 고구려-수 전쟁 때 복권되어 참전했다. 특히 유사룡은 을지문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패전의 원흉으로 규정되어 참수되었고, 머리가 효수되었다. 사실 패전에 가장 큰 책임이 있었던 내호아는 정작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우중문과 우문술도 죽음은 면했으니 괜히 애꿎은 유사룡만 패전의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한편 별동대의 지휘관들 중 한 명이었던 설세웅은,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맞아 종횡무진 활약한 공으로 포상을 받아 승진하기도 했다.

수양제는 이후 제3차, 제4차 침공을 계속 이어나갔으나 끝내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렇게 무리한 원정 탓에 그 끝을 모르던 수나라의 국력은 어느새 고갈되었고, 온 나라가 도탄에 빠지며 대규모 반란이 거듭 일어나 수양제는 강남의 강도에서 근위병들에 의해 교살당하고, 수나라는 멸망했으며 양씨 황족들은 돌궐(쾩튀르크)로 도망친 어린 황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멸당했다. 이로 인해 살수 대전 한 번으로 대제국을 말아먹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고구려-수 전쟁 문서로.


5. 분석[편집]


교과서위인전에서는 살수 대첩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넘어가느라 수나라군을 무력하고 가벼운 오합지졸로 묘사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보급 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많은 대병력을 동원했다는 것 외에는 실제 수나라 측에서 큰 전술적 오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사람들 모두 중국 대륙통일 과정 중 벌어진 수많은 전투들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역전의 지휘관들이었다.

특히 1,130,000명이라는 역사상 초유의 대군 앞에, 고구려가 요하 일대에 주력을 집중시킬 수 밖에 없었던 상황속에서 정예병 305,000명으로 수도 평양성을 번개처럼 직공하고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수군(水軍)이 이들을 지원한다는 것은 압도적인 병력수의 이점을 활용한 꽤 훌륭한 구상이었다. 내호아의 수군이 고건무에게 궤멸되는 등의 리스크를 극복하지 못하여 최악의 결과가 나왔지만 훗날 불세출의 명장이세민과 그 휘하의 당나라 장수들이 요하 인근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이정과 함께 수나라군의 전략으로 회귀한 것을 생각한다면 구상 자체가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수나라 군대의 기동 또한 매우 훌륭했다. 이 대전략을 위해, 별동대 305,000명은 가려 뽑은 최정예병답게 요하 서쪽에서, 요동 천산산맥, 압록강, 청천강 등이 놓여진 수백 km를 1개월 만에 주파하여 평양에 도달했다.[16] 고구려측 입장에서도 실로 최악의 국가적 위기였던 건 분명하며, 자칫하면 별동대 305,000명에게 평양이 참수작전을 당하여 그대로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괴력을 발휘한 우중문 휘하 별동대의 활약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지친 상태에서 험준한 평양성을 함락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내호아의 수군(水軍) 역시 미리 상륙했으나 고건무에게 이미 박살난 상태이다 보니 호응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우중문우문술에게는 또 다른 기회도 있었다.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으로 정탐하러 왔을 때, 예의고 나발이고 팽개치며 그를 잡았더라면 수나라군의 입장에서는 유리한 양상이 되었겠지만 참군 유사룡이 만류하는 바람에 우중문과 우문술은 그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다만, 이건 을지문덕이 독단으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파견나간 상황에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채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17] 사실 이건 접대 관습의 영향이 가장 큰데, 적국의 사람이라도 일단 손님으로 찾아오면 쌍방이 서로 해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며, 이 덕분에 사신이 적국에 비무장으로 가더라도 신변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유사룡이 말린 것도 사신으로 찾아온 을지문덕을 죽였다간 당장에는 이득이 될지 몰라도 이후에는 국제적으로 접대의 관습을 어긴 나라로 찍혀 타 국가들이 빈번하게 쳐들어올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수나라 군대는 후대에 비해서도 고구려군의 맹점에 대해 의외로 높은 이해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을지문덕을 비롯한 고구려군 수뇌부는 수•륙 양면으로 뻗쳐오는 수나라군의 양 팔을 최대한 끌어들여 절묘한 시간차를 두고 잘라냈으며, 살수대첩은 이를 갈무리하여 섬멸하는 통쾌한 일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5.1. 오해: 수공?[편집]


고구려군이 보(댐)을 이용하여 수공(水攻)을 펼쳤다는 이야기는 한때 역사적인 정설로 알려졌다. 그래서 지금도 살수대첩이 수공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살수대첩이 수공이라는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이자 날조이다. 역사상 막았던 물길을 터뜨려 적의 진군을 방해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무장한 300,000명의 대병력을 일거에 쓸어버리는 인위적인 수공은 현대의 기술력으로도 거의 불가능하다.[18]

삼국사기》, 《수서》, 《당서》 등 1차 사료 어디에도 살수대첩이 수공이라는 기록이 없다.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1948년 책으로 출간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최초로 살수대첩이 수공이라는 서술이 등장한다. 《조선상고사》를 보면 을지문덕의 지시로 고구려군이 모래주머니로 상류를 막아 놓았고, 수나라 군사들이 살수로 뛰어들었을 때 이를 터뜨렸다고 되어 있다. 이후 우리나라에는 살수대첩이 수공이라는 것이 정설로 알려지게 되었고, 을지문덕 위인전이나 여러 역사 서적에 을지문덕 장군이 모래주머니로 상류를 막았다가 터뜨린 이야기가 거의 빠짐없이 등장했다. 하지만 살수대첩이 수공이라는 이야기는 어떠한 역사적 근거도 없이 신채호 개인이 지어낸 허구이자 날조였다.

고대의 토목기술로는 전쟁 중의 짧은 기간 내에 엄청난 격류를 만들어낼 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대에도 댐공사는 외딴 산골에 시멘트나 콘크리트 등 물량과 공사 인원, 그리고 건설장비들을 대량으로 투입해야 하는 난공사로 악명이 높다.[19] 현재 국내 최대 규모의 댐인 소양강댐의 용수 조절량은 약 5억톤인데, 전근대의 저수지는 그 규모가 커 봐야 100만톤 정도가 한계였다. 하물며 소양강보다 규모가 큰 청천강의 하계 유량을 견뎌낼 만한 댐을 서기 7세기의 기술력으로 단기간에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거기다가 만약 대규모 댐을 어찌어찌 만들었다고 해도, 타이밍을 맞춰 물을 흘려보내는 것 역시 쉽지 않다.

훗날 제3차 여요전쟁 초반에 일어난 제4차 흥화진 전투[20]에서 강감찬이 수공을 썼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도 얼어 붙은 강물 위에 잠시 동안 물을 흘려 거란군 기병의 대열을 흐트러 뜨리고 진군 속도를 늦추려는 정도였을 뿐, 무장한 인마(人馬)들을 무더기로 멀리 쓸고 갈 정도의 대규모 수공은 결코 아니었다.[21]

즉, 고구려군이 수나라군을 수공으로 물리쳤다는 통설이 성립하려면, 고구려가 최소 억톤 단위의 댐을 건설할 수 있는 오버 테크놀로지를 갖추어야 하고, 수나라군의 도하 지점을 의도한 방향으로 한치의 오차없이 몰아넣어야 하며, 물이 흘러가는 시간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수나라군의 종심을 타격해야 하는데 이런 식의 절묘한 수공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리가 없다.

이후 고구려군이 살수에서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수공 덕분이 아니라 보급 문제로 곤죽이 되고, 진격보다 어렵다는 후퇴 상황이었으며, 《손자병법》에서도 강조할 정도로 가장 위험한 상황인 도하 중 대규모 결전이 벌어지는 등 수나라군으로써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들이 모두 겹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요소들은 거의 모두 을지문덕고건무에 의해 통제된 것이었다. 역사상 수많은 명장들이 그러했듯, 이미 싸우기 전에 이길 판을 완벽하게 깔아놓고 시작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6. 영향과 의의[편집]


살수대첩은 한국사의 모든 전투 중 가장 큰 대승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적군에게 입힌 전투였다. 또한 단순히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중화 문명의 팽창 한계선이 확인된 상징적인 의미로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기원전인 전국시대의 연나라때부터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꾸준히 요동-서북한 일대에 세력을 투사하며 예맥계 정치체제에 영향을 미쳐 왔었다. 비록 이민족의 침입과 분열로 한동안 이 지역에 세력을 확장시키지는 못했으나, 다시 통일된 이후 수나라는 만주와 한반도에 세력을 투사하기 위해 이전 중국 왕조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압도적인 국력으로 물량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살수대첩으로 인해 수나라의 최정예 병력이 증발해 버렸고, 이는 수나라의 멸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단순히 수나라의 멸망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이후의 중국인들이 한국계 국가들의 군사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근거가 되어, 후대 한국 왕조들의 외교적인 입지에도 커다랗게 기여했다.

손실률[22]은 그야말로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기록에 따르자면 305,000명 중 2,700명만 살아 돌아왔으니 99.11%가 손실된 것이었으며, 이는 앙가우르 전투, 토이토부르크 전투 등과 함께 세계 전쟁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철저한 궤멸이었다. 참고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총병력은 197,700여 명, 정유재란 때는 141,400여 명이었다. 이순신, 권율, 곽재우 등 여러 명장들의 6년 동안의 전과를 다 합쳐도 살수대첩 단 한 번에 못 미치는 수치인 셈이다. 물론 두 전쟁의 배경과 전투의 성격이 너무도 다를 뿐더러 애초에 전쟁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긴 하지만, 숫자만 놓고 보면 살수대첩의 규모가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압록강을 건너 동쪽으로 옴이여,

현도(玄菟)ㆍ낙랑(樂浪) 향하도다.

신세웅(辛世雄)[23]

살수(薩水)에 조상함이여,

기자(箕子)를 평양에서 뵈옵도다.

-

기순(祁順)[24]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 중에서.


후한 이후 지속된 위진남북조시대의 난세를 종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대제국 수나라 앞에서 고구려는 (제 아무리 전성기라 할지라도) 일개 지역 강국들 중 하나 정도에 불과했는데 압도적인 국력 차이를 극복하고 끝내 중화 대제국을 멸망에 이르게까지 했으니, 직후 당태종당고종의 고구려 멸망에 대한 무서울 정도의 집착, 그리고 훗날 귀주 대첩으로 얻어낸 고려--북송의 100여 년 동안의 국제정치적인 균형 시기를 거쳐, 더욱 훗날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시대나[25] 명나라 초기[26], 명나라 중후기[27]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한반도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 및 예민한 반응을 오래도록 이어나갔다.[28]

살수대첩은 당시에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중화인들에게 강렬한 기억이자,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낸 트라우마요, 흑역사 취급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살수대첩으로부터 20여 년 후 당태종고구려를 침공하기 이전에도 고구려의 대수 전쟁 전승탑인 경관(京觀)을 철거하라고 주구장창 요구하여 끝내 이를 관철시키기도 했다.[29] 그후 요동으로의 침공길에서는 요택에 무더기로 버려진 수나라 장병들의 유골을 추려 모아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당시 당나라 장병들이 다함께 크게 울었다는 기록도 있다. 앞선 수양제와 마찬가지로 당태종 또한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하는 매우 촉박한 일정이었음에도, 굳이 이런 추모행사를 가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한국사에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는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안주에 있었던 칠불사(七佛寺)라는 사찰에 대해[30] 수나라 병사가 청천강 강가에 늘어서서 강을 건너려고 했으나 배가 없었는데, 문득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7명의 승려가 옷을 걷어올리고 건너는 것을 본 후, 물이 얕은 줄 알고 군사를 지휘하여 다투어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내에 가득하여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이후 이곳에 절을 짓고 칠불사라 했으며 그 7명의 승려를 기려 7개의 돌을 세워 놓았다고 한다. 또한 일제 시대의 문인인 현진건1935년에 쓴 《단군성적순례》라는 기행문을 보면 안주 현지에 수나라 군사들의 수몰(水歿)과 관련된 오도탄(誤渡灘)[31]이니 골적도(骨積島)[32]니 하는 지명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평안도_살수대첩이 있었던 곳에 자리잡은 안주읍성(펜저의 국방여행). 또한 조선시대에는 을지문덕의 석상이 안주에 세워지기도 했는데, 현진건이 《단군성적순례》에서 언급하기도 했으며, 아직도 북한에 남아있기는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단군성적순례》에 따르면 만들어진 시기는 '숭정기원(崇禎紀元) 220년 을미'로 조선 헌종 13년(1847년)으로 보이며, 원래는 을지문덕 사당에 모셔져 있었는데 사당이 없어지고 땅에 파묻혔다가 다시 파내 백상루 밑에 갖다 두었다고 한다.# 단, 백상루는 미군의 폭격으로 없어졌고, 북한이 다시 세운지라 을지문덕 석상의 보존 상태는 알 수가 없다.

살수대첩으로부터 800년 가까이 지난 후, 여말선초 시대의 대신인 조준이 수많은 중원 젊은이가 고구려에서 물고기밥으로 사라졌다며 살수대첩을 얘기하는 칠언절구 를 남기기도 했다. 명나라 사신과의 연회 자리에서 즉석시를 지어 양국 간의 자존심 싸움에서 이겼다는 설화도 있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명나라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며, 정도전, 정몽주에 비견될 정도로 똑똑했던 조준이 굳이 그런 어리석은 어그로를 끌 리 없다는 주장도 있다. 1391년 경, 조준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薩水湯湯漾碧虛(살 수 상 상 양 벽 허 살수 강물 파도치며 허공에 출렁이니,

隋兵百萬化爲魚(수 병 백 만 화 위 어 수나라 100만 군사 고기밥이 되었것다.

至今留得漁樵話(지 금 류 득 어 초 화 지금까지 어초들의 얘깃거리로 남아,

不滿征夫一笑餘(불 만 정 부 일 소 여 지나는 나그네의 한바탕 웃음거리 되고도 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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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이 지은 시는 안주백상루(百祥樓)라는 정자에 걸려 있었고, 수십 년 후 태종 시기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 축맹헌이 이 시를 보고 답시를 남겼다. 수십년 후 당나라가 끝내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들어 수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면 성공했을 것이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축맹헌의 호기어린 장담과는 달리 수양제는 이후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2번이나 더 군사를 일으켰으며, 결국 그것조차 다 말아먹고 수나라는 멸망했다는 게 함정이지만. 축맹헌은 청천강을 내려다보는 정자에 이런 시가 대놓고 걸려 있으니 굴욕으로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도 사대의 예 운운하며 노발대발 안 한 거 보면 타국에 와서 어느 정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33]


7. 북한의 관점[편집]


파일:북한 살수대첩.jpg }}}
북한의 관점도 남한과 대체로 일치하지만[34], 살수대첩이 요동 일대에서 일어났다고 본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는 북한판 국사 교과서인 《조선력사》의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적들은 겨우 대오를 수습해가지고 살수(소자하)를 건너 봉황성 30리 지점까지 다다랐다…수나라 침략군이 살수를 건느기 시작하자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일제히 떨쳐나서 전후좌우에서 적들을 무리로 족치는 통쾌한 섬멸전을 벌리였다. 그리하여 이 전투에서 고구려 군대는 침략군을 거의다 섬멸해버렸다. 살수 전투에서 살아돌아간 적들은 겨우 2,700명뿐이었다. 이것을 우리 나라 력사에서는 살수대첩(薩水大捷)이라고 자자손손 긍지 높이 불렀으며 그것을 고구려의 강대성과 민족적 기개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조선력사

때문에 이와 관련해서 조선시대 이래의 칠불사 역시

"봉건사가들이 청천강에 날조된 역사 이야기를 갖다 붙이면서 칠불사 전설도 꾸며 놓은 것"

이라고 격하했고, 이름도 김일성이 '칠렬사'(七烈士)로 고치게 했다고 한다. #


8. 대중매체[편집]


이 당시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 있다.



사극 <연개소문>에서는 46화에 묘사된다.[35] 기존의 수공설을 쓴 문제도 있지만, 드라마 연출 자체도 총체적 난국이다. 드라마의 하이라이트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전투씬(북한산성 전투)을 재활용하는 바람에 분명 강가에서 벌어지는 야전임에도 성이 등장한다. 심지어 잘못된 편집 때문에 신라군이 잠시나마 등장하기까지 했다. 살수대첩의 수공 묘사는 이후 고구려-당나라 전쟁때의 사수 전투 파트에서 또 재활용되었다.

그 어떤 전투와 비교해도 역대급이지만 창작물에선 정작 거의 다뤄지지 않는데, 이는 고구려 시기에 있었던 전쟁의 스케일이 너무 커서 제대로 묘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KBS 대하 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전쟁신을 영상으로 송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살수 대첩도 빠른 시일내에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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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2년판 중학교 제4학년판 《조선력사》라는 국사 교과서 40쪽에서 등장하는 북한측 명칭이다. '살수대첩' 또한 후술하다시피 북한에서도 통용되며 이 교과서에서도 '우리 인민은 이 전투를 살수대첩(살수에서의 큰 승리)이라고 부르며 대대손손 자랑스럽게 전해오고 있다.'라는 구절이 존재한다. 참고로 북한말에 대해 무조건 고유어를 많이 쓸 것이라는 식의 과장된 인식이 있어 '살수싸움' 같은 것으로 부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있지만 그런 말은 아동용 교재에나 등장하는 표현이다. 북한의 한자어 사용은 남한에 준하는 수준이며, 말 다듬기가 한창 진행된 시기에도 "정치 용어는 사상 교육에 활용하기 위해 한자어라 할지라도 수정을 금한다."라고 했다. # '이신작칙'(以身作則, 몸소 모범을 보여 법칙을 만듦.) 같은 남한에서 잘 모르는 한자어도 잘 쓰이고, '자음'을 '닿소리'라고 부르면 무슨 말인지 모른다. 문화어 문서 참조.[2] 대한민국 학계는 현 북한청천강을, 북한은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자하를 살수로 주장하고 있다.[3] 약 30,000명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근거가 없어 교과서나 학술 자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4] 약 2,700명 생환[5] 남한은 청천강, 북한은 중국의 소자하(현 라오허 강의 지류)로 본다. 다만 살수는 현재의 청천강이 아닌 다른 강이라는 설도 있다.[6] 여기에 권율행주 대첩이 포함되어 4대 대첩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살수, 귀주, 한산도 대첩이 각각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전투들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행주 대첩은 조선의 대표적인 전투인 한산도 대첩에 밀려 주로 3대 대첩으로 많이 언급된다. 또한 세 전투 모두 상대국의 침략 의지를 꺾어버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7] 현재의 베이징시.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인 열조 소열제 유비의 출생지였던 그 탁군이 맞다.[8] 즉 요동성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으니 따로 병력을 편성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으로 곧바로 초고속으로 진격하면서(직도 전략) 요동성을 비롯해 주위에 있는 고구려의 성들은 함락시키지 않고 지나치는 것인데, 이렇게 된다면 고구려의 성들에 주둔하고 있는 수만 명의 고구려군을 후방에 두고 요동을 지나쳐 평안도와 황해도를 넘어 고구려 영토에 깊숙히 들어가는 꼴이라 뒤따라오는 보급부대가 이들에게 수시로 공격받아 보급선이 끊기기 쉬워 후방으로부터의 원활한 보급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중문 휘하 300,000명의 수나라군이 보급부대를 두지 않고 전투병 개개인에게 군량 수송을 맡긴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9] 수나라군 지휘부도 병사들 개개인에게 적재하게 하는 군량만으로는, 엄청난 거리를 보급부대 없이 진격하여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중문의 별동대 300,000명에게는 어떻게든 평양까지만 진군하게 하고, 따로 수나라 본토에서 내호아 휘하의 수만 명의 병력과 보급품을 실은 수군을 평양으로 보내 대기하고 있다가 300,000명의 별동대가 평양에 도착하면 그들과 합류하여 보급품을 공급하고, 평양성을 협공하는 작전을 수립했다.[10] 이 정도면 현대의 보병 기준으로도 꽤 무거운 수준이다. 참고로 한국군 기준의 완전군장이 최소 25kg, 무거우면 40kg+@ 정도다. 이쯤이면 신체능력을 열심히 단련한 전투원이 아니면 감당하기 힘들다. 거기에 당시의 영양 상태를 감안한 평균 신장과 체력을 생각한다면, 징집된 수나라 병사들 입장에서는 지고 가다가 당장 죽는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11] 나중에 인근의 주민들이 주워서 잘 써먹었다는 얘기가 있다.[12] 내호아는 무려 40,000명의 병력을 잃었다.[13] 무엇보다 도하 중에 뒤를 치면 답이 없다. 앞은 막혀 있고 도하 중인 군대는 돌아와서 치기에 매우 부적합한 상황이며, 도하하지 않은 군대는 강을 건너려고 옹기종기 모여서 앞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14] 도하중이었으니 다리가 있었다면 다리 위에서 대혼란이 빚어졌을것이고, 살고자 물에 뛰어들어 강을 건너려했을것이다. 다리가 없었다면 바로 물에 뛰어들었을텐데 잘 알다시피 강이 도하가 가능한 얕은 깊이였다해도 흘러내려오는 물을 이겨내며 걸어가는것은 보통 힘든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분명 속도가 느려졌을텐데 30만이나되는 군대가 질서가 붕괴되어 강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해보자. 앞에 가던 사람들의 속도는 빠를 수 없는데 뒤쪽에서는 공포에 질려 무작정 밀어대는꼴이다. 누구한명 넘어지면 곧바로 밟혀 죽었을것이다. 만약 물이 깊어 수영으로 넘어가야했다면 더 심할텐데, 이는 수나라군이 진을 갖추고 후퇴중이었음을 감안하면 전부 갑옷을 입고있었을것이기때문이다. 그 난리통에 차분하게 갑옷을 벗어놓고 물에 차례대로 들어갈리는 없으니 무거운 갑옷을 입고 무작정 강물로 뛰어들었을것이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사람들과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강물과 강둑에서 뒤엉켜있었을테니 압사와 익사로 죽은 사람도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많았을것이다. 고구려군은 그들을 그저 밀어붙이기만하면 되었을것이다. 수나라군은 스스로 죽었을테니[15] 비율로 따지면 생환률이 고작 0.89%에 불과하다.[16] 언급했듯이 당태종 이세민은 아예 요하에서 벗어나질 못하여 압록강에는 접근도 못했다.[17]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임기환 교수, <역사저널 그날> 95화 - '살수대첩- 수나라 100만 대군 고구려를 침공하다' 편에서.[18] 가능성이 있는 댐이 없지는 않은데, 수십 만명의 인력을 일거에 휩쓸어갈려면 중국의 산샤댐이나 미국의 후버댐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 정도 규모의 댐이면 적군도 자기들이 해당 댐을 장악하기 이전까지는 근처도 안가겠지만.[19] 거기다가 시간도 年 단위로 들어간다.[20] 귀주 대첩이라고 가끔 오인되는 전투이다.[21] 귀주 대첩 문서로.[22] '사상자'의 개념처럼 부상자를 포함하지 않은, 말 그대로 죽거나 실종되어 영영 돌아오지 않은 병력의 비율을 일컫는다.[23] 살수대첩 당시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으로 그가 지휘하는 수나라 제8군이 후방 엄호를 맡아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멸했다.[24] 명나라의 호부낭중으로 1460년 진사에 합격했으며, 성종 7년(1476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오면서 과거 한사군 시절의 현도군낙랑군을 기억하고, 살수대첩이 벌어진 살수를 조상하면서, (현대 한국 사학계에선 부정되지만) 기자가 건국했다는 기자조선의 수도 평양을 둘러본 것으로 보인다.[25] 이때 고려의 세자가 쿠빌라이 칸에게 항복의 의사를 전하러 찾아갔는데, 이 자리에서 쿠빌라이 칸은 이것을 살수대첩의 그 고구려가 항복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했을 정도였다.[26] 명태조 주원장은 중국 역사상 역대급의 국력과 군사력을 가졌음에도, 태조 이성계정도전이 언젠가는 요동에 쳐들어올 것이라는 경계심에 많은 대비를 하며, 온갖 압박을 가했다. 다만 이 의심은 다른 오해나 착각들에 비해 타당했던 것이, 태조 이성계부터가 고려 공민왕 시절의 요동정벌에 종군하며 군공을 쌓은 인물이었고, 정도전도 요동정벌을 대외적인 정치사안으로 밀던 인물이었다. 애초에 이성계와 정도전이 조선을 세운 계기 또한 위화도 회군이라는, 요동 정벌군의 출정이었으니 명태조 주원장이 조선의 요동 진출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해당 문서들로.[27]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자, 처음에는 명나라의 대신들이 하나같이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토록 강력했던 고구려의 후예가 어째서 왜구 하나 상대를 못 해 구원까지 청하냐.'는 식으로 면박을 준 것이다(출처 필요). 뿐만 아니라 "조선 이것들이 사실은 요동을 수복하려고 일본군을 끌어들여서 합동으로 쳐들어오는 거 아냐?"라는 의심까지 했다고 한다.[28] 고구려 시기의 인상이 이어졌다는 건 과대평가로, 명나라 초기에 태조 주원장을 비롯하여 명나라 측에서 한반도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한 건 당시 한반도의 지옥같은 여말선초의 상황을 극복해낸 한반도의 강력한 군사력 때문이었다. 보통의 양면전쟁은 이겨내는 사례가 드물고, 이겨내더라도 영토의 일부라도 상실하기 마련인데, 여말 시기에 북로남왜라는 양면전쟁 상황속에서 남쪽으론 왜구를(왜구라곤 해도 당시 일본의 남조측 정규군이었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수준의 세력으로 병력의 규모만 수천 명에서 10,000단위로 움직이는 규모였다), 북쪽으론 홍건적(엄연히 군벌 세력으로 14세기 기준으론 정규군 수준이었다. 병력 규모도 기본이 10,000단위였다.)과 여진족 및 몽골계 군벌이라는 세력들을 물리치고, 도리어 함경도 방면으로 영토까지 넓혔으며 요동 원정까지 시도하는, 당대 사람들의 기준으론 상식을 초월한 수준의 저력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29] 그리고 이것을 굴욕으로 받아들인 연개소문 세력의 반 영류왕 쿠데타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30]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31] 칠불사 전승과 관련해 수나라 군사들이 강을 건넜다고 하는 지점. 이름부터가 '잘못 알고 건넌 여울'이란 뜻이다.[32] 당시 몰살을 당한 수나라 군사들의 뼈가 쌓여서 이루어졌다는 섬. 청천강하중도이기도 하다. 현진건은 이곳을 당시 이역만리에서 몰살당한 수나라 군사들을 딱하게 여긴 당시 고구려인들이 그 시신을 수습해 무덤을 만들어주었던 것으로 해석했다.[33] 여담으로 축맹헌에 대한 당시 조선의 평가를 보면, 기생에 빠져 음란한(...) 다른 명나라 사신들과는 달리 제법 순수하고 검소하여 지킴이 있었다고 호평했다. 이런 걸 보면 나름 선비 정신은 있었던 사람으로 추정된다.[34] 그냥 을지문덕이 일방적으로 털어먹었다고 몇 줄 쓰며 끝나는 한국 교과서와 달리 고구려의 비중이 많은 북한에서는 교과서에서 살수 대첩에 관해 소단원까지 할애해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한다.[35] 여담으로 위에 있는 해당 회차의 요약본 영상은 연개소문 수나라 파트 요약 영상 중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는데, 8분 33초부터 시작되는 (수양제 역의) 김갑수의 과장된 분노 연기 덕분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