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소종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慕容紹宗
(501~549)
구 전연의 왕족이자 명재상 모용각의 후예로 양나라 소연의 침입, 후경의 반란, 서위 우문태의 침입을 모두 격퇴한 동위(東魏)의 명장.
2. 생애[편집]
2.1. 이주영 휘하에서[편집]
전연의 멸망 후, 증조부 대에 북위로 귀순하여, 조부 모용도(慕容都), 부친 모용원(慕容遠)은 각각 기주와 항주자사를 지냈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크고 말수가 적고, 담략이 두터웠다. 진양(晉陽)에서 이주영(爾朱榮)에게 귀부하여 몇 가지 계책을 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한직을 전전하다 병주자사가 되었다.
진양이 흘두릉보번(紇豆陵步番)의 공격을 받자 이주영의 조카 이주조(爾朱兆)가 고환을 중용하여 이를 막으려 하자, 그를 경계하라고 했다. 하지만, 모용소종의 말을 듣지 않은 이주조는 흘두릉보번을 토벌한 뒤, 거병한 고환에게 패하여 목숨을 잃고 만다. 이후, 가솔들을 이끌고 고환에게 투항한다.
2.2. 인재를 알아보다[편집]
고환은 모용소종의 능력을 알아보고 서위를 공략하는 동안, 그에게 후방을 맡기기로 한다. 업(業)으로 천도한 후, 모용소종은 조정 대사를 담당하며 군략을 주관한다. 이후, 고환의 휘하에서 이연손(李延孫)이 주도한 민란을 진압하였고, 서위의 독고여원(獨孤如願)[1] 이 낙양을 점거하여 혼란해진 틈을 타 도적이 날뛰자 이를 모두 격퇴하였다. 이후, 서주 방면으로 침입한 양나라의 장군 유오흑(劉烏黑)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를 잡아 죽였다.
2.3. 후경의 반란[편집]
후경은 군사적 능력이 출중하여, 고환은 그에게 10만의 군사를 주고 서위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547년 서위 공격에 실패한 고환이 화병으로 죽고 고징(高澄)이 뒤를 잇자, 후경은 동위를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일찍이 후경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알고 있던 고환은 죽기 직전, 아들 고징에게 모용소종은 지모와 용병이 몹시 뛰어나니 능히 후경을 상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고징은 의심을 품은 게, 정작 서위를 공격할 때는 모용소종을 크게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환이 그 의문에 답하길 모용소종은 자신이 그의 주군 이주조를 죽이고 그 세력을 멸망시켰을 때 주군의 가족을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투항했으므로, 자신은 진심으로 따르지 않겠지만 만일 고징이 그를 진심으로 대하고 발탁해서 쓴다면 그는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한다. 고징은 그제서야 부왕의 식견에 감탄하고 후경의 난의 진압을 맡기게 된다. 모용소종은 일종의 비밀병기였던 셈이다.
모용소종의 공격을 받자 당황한 후경은 서위의 우문태에게 자신이 가진 하남(河南)땅을 바치고 그의 군사적 지원을 받으려 하지만, 우문태는 장군 왕사정(王思政)[2] 을 파견하여 영천(英川) 땅만 먹고 빠진다. 그러자 후경은 이 제안을 다시 양무제 소연에게 제시하는데, 소연은 진경지의 사후 소원했던 북벌을 재개하고자 이에 호응하여 후경을 하남왕에 봉하고, 조카 소연명(蕭淵明)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이를 지원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과 대치한 모용소종은 대도독 고악(高嶽)과 함께 서주의 팽성을 공략하던 소연명을 토벌하여 사로잡고[3] 양나라 10만 군대를 궤멸시킨다. 이후, 후경을 와양(渦陽)에서 크게 이겨 양나라로 패주시키고, 그가 점거했던 하남 땅도 되돌려 받는다. 이제 남은 것은 서위의 왕사정이 점거한 영천만 남았으나...
2.4. 허무한 최후[편집]
왕사정은 영천으로 가면서 우문태에게 말하길, 동위가 수로로 진격할 경우 1년을 지킬 수 있다고 하고, 육로로 진격할 경우 3년을 지킬 수 있다 한다. 예상대로 모용소종은 수로로 진격하지만, 알고도 못 막았는지 결국 549년 4월, 모용소종에게 포위당하여 퇴로마저 끊긴 상황이 되고 만다. 모용소종은 유수(濡水)[4] 의 둑을 무너뜨려 영천을 공격하는데, 그 해 6월 영천이 막 함락되려고 할 즈음 연이어 악몽을 꾸게 된다. 이때 부하 장수들에게 남긴 말이 의미심장하다.
이튿날, 전장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그가 타고 있던 누선이 단번에 성벽이 있는 쪽으로 밀려갔다. 그러자 서위의 병사들이 긴 갈고리를 이용해 배를 끌어당기면서 화살을 마구 쏘아댔는데 모용소종은 급한 나머지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향년 49세.[6]吾自年二十已還, 恒有蒜髮, 昨來蒜髮忽然自盡. 以理推之 蒜者算也 吾算將盡乎?
내가 마흔을 넘을 때까지 항상 산발이었는데, 어제(꿈에) 머리카락이 홀연 다 빠져버렸다.[5]
산(蒜, 산발)과 산(算, 계산)은 같은 말인데, 내 수명은 여기서 다 한다는 뜻인가?
3. 사후[편집]
고징은 모용소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11만 대군을 이끌고 나서서 영천을 함락시켰다. 왕사정은 분전했지만, 힘이 다하여 성을 내주었고 고징에게 항복한다. 이후 고징이 암살당하고 고양(高洋)이 북제를 세우자 왕사정은 도관상서, 의동삼사를 역임하는데, 우문태는 땅도 얻지 못한데다 유능한 장군까지 넘어가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한편, 모용소종이 죽자, 슬프고 한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고징 또한 이를 크게 슬퍼하여 그에게 사지절(使持節) 이청이연제제광칠주군사(二靑二兗齊濟光七州軍事) 상서령(尙書令) 태위(太尉) 청주자사(靑主刺史)를 추증하고, 시호를 경혜(景惠)라고 하였다.
4. 여담[편집]
북제 시절에 그의 맏아들 모용사숙(慕容士肅)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부친의 공으로 인해 연좌되지 않고, 차남 모용건중(慕容建中)이 작위를 잇게 배려한다. 이후 모용건중은 북제가 멸망한 후, 수문제 연간에 대장군의 직위까지 오른다.
만일 그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이후 북제의 명장들인 곡률광, 고장공, 단소의 좌장격으로 활동하며 그들의 중심을 잡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북제의 실질적 창건자인 고징의 총애를 받았고, 동위에서는 누구도 할 수 없을 거라는 후경의 난을 진압하여 그 위상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중원을 거점으로 삼아 훨씬 국력이 앞서던 동위가 관중을 거점으로 하는 서위에 허무하게 밀리지는 않았을 거라는데 많은 이들이 의견을 같이한다. [7]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8 04:59:48에 나무위키 모용소종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503~557, 북위, 서위의 장군. 또다른 이름은 독고신(獨孤信). 자신보다는 딸들이 더 유명한데, 첫째 딸은 북주의 황제 우문육, 넷째 딸은 당국공 이병, 일곱 번째 딸은 수문제 양견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독고천하라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2] ?~550, 서위의 장군으로 동탁을 죽인 왕윤의 후예. 옥벽의 진지를 진수하고, 위효관(韋孝寬)을 천거했는데, 이후 동위는 위효관에게 옥벽에서 패퇴하여 국력이 크게 꺾이고 만다. 이후, 북주의 대장군이 된 위효관은 북제가 멸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괴롭힌다.[3] 이때의 양상이 마속의 가정 전투와 유사하다. 소연명에게는 양간이라는 원래는 북위의 장수였다가 양나라로 투항한 장수가 있었는데, 동위의 군대가 오기 전 수공으로 팽성을 빨리 공략해야 한다고 제안하지만, 소연명은 이를 듣지않고, 성을 포위하여 시간만 죽인다. 결국, 양나라의 10만 군대는 모용소종에게 궤멸당하고, 양간의 부대만이 살아서 돌아간다. 이후 소연명은 고징에게 등용되어 양나라 방면을 공략한다.[4] 삼국지의 유수구가 있는 그곳 맞다.[5] 머리카락이나 이 등 신체의 일부가 빠지는 꿈은 흉몽이다.[6] 출중한 군사적 능력에도 불구, 어이없이 익사하였다는 점에서 이 사람과 최후가 비슷하다.[7] 이 부분은 검증이 필요한 게 당시 서위, 북주의 관롱집단(關隴集團)은 남북조를 통틀어 최고의 인재풀이었다. 그러나 북제에서도 유능한 장군들이 쏟아지던 시기이므로, 중원의 신흥무장세력과 관중의 문무겸비세력의 한판승부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유능한 북주의 황제 우문옹과 무능한 북제의 황제 고위의 차이로 인해 결국 북제는 멸망했을 거란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