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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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시대 북위의 관료로 자는 신구(神駒), 아명은 피(皮).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을 본관으로 하는 하동 배씨 출신이다.
배준은 어린 나이에 총명해서 친척들이 기이하게 여겨서 준마라는 뜻의 신구(神駒)라고 불렀으며, 배준은 자를 신구로 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경전과 사서를 섭렵했고 글을 잘 지었으며, 품행이 단정했고 예의와 법도가 있어서 고향 사람들이 배준을 매우 공경했다.
445년, 개오(蓋吳)가 관중(關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분음현(汾陰縣) 출신의 설안도와 설영종(薛永宗)이 개오의 반란에 호응하고 여러 현을 함락시키다가 문희현을 침공하였다. 문희현에는 이를 막아낼 병사들이 없어서 인심이 동요했고 현령 또한 이를 우려해서 아무런 계책도 생각하지 못했다. 집에 있었던 배준은 이 소식을 듣고 고향의 호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준의 말을 들은 호족들은 서로 분발하여 배준과 함께 갈 것을 청했고, 배준은 이에 100명의 인원을 선발했다. 반군은 구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어 물러났으며, 자사는 이를 칭찬하여 조정에 상주문을 올렸다. 이후 태무제가 직접 개오를 토벌할 때 배준을 소견했는데, 배준의 의견이 태무제의 뜻과 들어맞아서 태무제는 이에 기뻐하고 최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준은 이후 중서박사(中書博士)가 되었다. 최호 또한 배준을 매우 중시해서 배준을 삼하(三河)의 영축(領袖)으로 평가하였다. 이후 배준은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전임되었다. 유송의 효무제가 명승호(明僧暠)를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하자, 배준은 재능과 학식을 인정받아 임시로 급사중(給事中),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어 명승호를 맞이하였다.
이후 468년에 죽어서 평남장군(平南將軍), 진주자사(秦州刺史), 문희현후(聞喜縣侯)로 추증되고 강(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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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강후(文喜康侯) 裴駿 | 배준 | |
시호 | 강(康) |
작위 | 문희현후(聞喜縣侯) |
성 | 배(裴) |
이름 | 준(駿) |
자 | 신구(神具) |
생몰 | ? ~ 468년 |
부친 | 배쌍석(裴雙碩) |
출신 |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 |
1. 개요[편집]
남북조시대 북위의 관료로 자는 신구(神駒), 아명은 피(皮).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을 본관으로 하는 하동 배씨 출신이다.
2. 생애[편집]
배준은 어린 나이에 총명해서 친척들이 기이하게 여겨서 준마라는 뜻의 신구(神駒)라고 불렀으며, 배준은 자를 신구로 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경전과 사서를 섭렵했고 글을 잘 지었으며, 품행이 단정했고 예의와 법도가 있어서 고향 사람들이 배준을 매우 공경했다.
445년, 개오(蓋吳)가 관중(關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분음현(汾陰縣) 출신의 설안도와 설영종(薛永宗)이 개오의 반란에 호응하고 여러 현을 함락시키다가 문희현을 침공하였다. 문희현에는 이를 막아낼 병사들이 없어서 인심이 동요했고 현령 또한 이를 우려해서 아무런 계책도 생각하지 못했다. 집에 있었던 배준은 이 소식을 듣고 고향의 호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법에 의하면 임금이 위험해지면 신하가 마땅히 목숨을 바쳐야 하오. 우리의 현이 지금 역적의 핍박을 받고 있으니 지금이 우리가 절개를 다하여 죽을 때요. 여러분이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습니까!
배준의 말을 들은 호족들은 서로 분발하여 배준과 함께 갈 것을 청했고, 배준은 이에 100명의 인원을 선발했다. 반군은 구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어 물러났으며, 자사는 이를 칭찬하여 조정에 상주문을 올렸다. 이후 태무제가 직접 개오를 토벌할 때 배준을 소견했는데, 배준의 의견이 태무제의 뜻과 들어맞아서 태무제는 이에 기뻐하고 최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준은 당대의 재능을 지녔고 그의 충의도 칭찬할 만하다.
배준은 이후 중서박사(中書博士)가 되었다. 최호 또한 배준을 매우 중시해서 배준을 삼하(三河)의 영축(領袖)으로 평가하였다. 이후 배준은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전임되었다. 유송의 효무제가 명승호(明僧暠)를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하자, 배준은 재능과 학식을 인정받아 임시로 급사중(給事中),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어 명승호를 맞이하였다.
이후 468년에 죽어서 평남장군(平南將軍), 진주자사(秦州刺史), 문희현후(聞喜縣侯)로 추증되고 강(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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