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역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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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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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魏書
Book of Wei

저자
위수
시기
6세기 북제
언어
한문
권 수
114권
분량
220년 ~ 550년 (330년)
한헌제 31년 ~ 효정제 27년

1. 《위서(魏書)》
1.1. 개요
1.2. 특징
1.3. 구성
1.3.1. 제기(帝紀)
1.3.2. 열전
1.3.3. 지(志)
2. 《정사 삼국지》 〈위서〉


1. 《위서(魏書)》[편집]



1.1. 개요[편집]


魏書

중국의 24사 중 하나. 중국 남북조시대의 국가 중 하나인 북위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서.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 천보(天保) 10년(559년) 위수(魏收)가 저술한 사서로 114권(본기 12권, 지 10지, 열전 92편)으로 되어 있다.[1]

진수가 쓴 《삼국지》 〈위서〉[2]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1.2. 특징[편집]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다.

  • 본기 서두 서기라는 형식으로 북위 왕조 창건 이전의 탁발선비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북제 때 편찬되었기 때문에 북제의 전신인 동위정권과 후계 국가인 북제를 정통인 후계자로 하고 있다.
  • 열전에 5호의 여러 나라와 남조의 계승을 내세우고 있다.
  • 불교·도교 관련의 사건을 기록한 〈석로지〉가 있다.

북위 건국 이전부터 시작하여 북위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동위를 정통이라 했으나, 북제를 왜곡하고 열전(列傳)의 서술이 불공평하다. 특히 남조의 나라들에 대해서 극히 불평등하게 기록하는 등 공정성이 심히 낮다. 예를 들어 남조 유송의 무제(武帝) 유유, 남제의 고제(高帝) 소도성을 '도이'(島夷, 오랑캐)[3]라고 기록하고[4] 거기다 동진 원제 사마예가 사실은 사마근의 아들이 아니라 그의 부장 우금의 아들이라고 기록하는 등 괜히 더러운 역사서(穢史, 예서)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5]

북위서위와 동위로 분열된 계기인 효무제(孝武帝)의 도주[6] 때문에 그를 '도망친 황제'라고 조롱하는 의미로 '출제'(出帝)라고 기록했다. 그에 반해 당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북사》와 《북제서》에서는 '효무제'라고 제대로 기록했다.

《위서》는 당대에도 논란이 되어 신명나게 까였고[7] 북위 - 서위 - 북주 - - 을 정통으로 하는 위담의 《위서》(92권)이나 당나라 장태소의 《후위서》(100권) 등의 개정판이 만들어졌지만 모조리 소실되었다. 더구나 《위서》 자체도 난리통에 부분부분 소실되어서 《위서》를 포함해서 편집되었던 《북사》에서 역으로 내용을 가져와야 했다. 현재 전하는 《위서》는 잃어버린 부분을 북송 시대에 보완한 것이다.[8]

문제는 존속 기간의 문제도 있어서 《위서》가 남북조 가운데 북조를 다룬 《북사》의 저본이라는 것이다. 덕분에 《남사》와 《북사》가 서로 내용이 다르면 대부분 《남사》를 기준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 단적으로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남사》 계통에서는 긍정하는 기술을 하고, 정작 《북사》 계통에서는 기록하지 않는데, 남송 때 통사를 기록한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남사》의 기준을 따르고 있다.

이 항목과 상관은 없지만 제목은 같은 《위서》가 또 있다. 바로 삼국시대 조위의 역사서인 《위서》로 왕침이 썼다. 현존하지는 않고 진수의 《정사 삼국지》와 배송지의 주석에 인용되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가 이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1.3. 구성[편집]


<bgcolor=#DC143C><height=33px>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1.3.1. 제기(帝紀)[편집]


제기 구성
권1
제기제1
帝紀第1
서기
(序紀)
탁발부, 대나라
권2
제기제2
帝紀第2
도무제기
(道武帝紀)
탁발규(拓跋珪)
권3
제기제3
帝紀第3
명원제기
(明元帝紀)
탁발사(拓跋嗣)
권4
제기제4상
帝紀第4上
태무제기
(太武帝紀)
탁발도(拓跋燾), 탁발황(拓跋晃)
제기제4하
帝紀第4下
경목제기
(景穆帝紀)
권5
제기제5
帝紀第5
문성제기
(文成帝紀)
탁발준(拓跋浚)
권6
제기제6
帝紀第6
헌문제기
(獻文帝紀)
탁발홍(拓跋弘)
권7
제기제7상
帝紀第7上
효문제기
(孝文帝紀)
원굉(元宏)
제기제7하
帝紀第7下
권8
제기제8
帝紀第8
선무제기
(宣武帝紀)
원각(元恪)
권9
제기제9
帝紀第9
효명제기
(孝明帝紀)
원후(元詡)
권10
제기제9
帝紀第10
효장제기
(孝莊帝紀)
원자유(元子攸)
권11
제기제11
帝紀第11
폐출삼제기
(廢出三帝紀)
원공(元恪), 원랑(元朗), 원수(元脩)
권12
제기제12
帝紀第12
효정제기
(孝靜帝紀)
원선견(元善見)


1.3.2. 열전[편집]


1.열전 제1 - 황후
2.열전 제2 - 황제의 자손
3.열전 제3 - 소성자손 (昭成子孫)
4.열전 제4 - 도무7왕 (道武)
5.열전 제5 - 명원6왕 (明元)
6.열전 제6 - 태무5왕 (太武)
7.열전 제7 경목12왕 상 (景穆)
8.열전 제7 경목12왕 중
9.열전 제7 경목12왕 하
10.열전 제8 문성5왕 (文成)
11.열전 제9 헌문6왕 상 (献文)
12.열전 제9 헌문6왕 하
13.열전 제10 효문5왕 (孝文)
14.열전 제11 - 위조・막함・유고인
15.열전 제12 - 연봉・허겸・장곤・최현백・등연
16.열전 제13 - 장손숭・장손도생
17.열전 제14 - 장손파・위고진
18.열전 제15 - 목숭
19.열전 제16 - 화발・해목・막제・유업연・하적간・이율・유결 고필・장려
20.열전 제17 - 해근・숙손건
21.열전 제18 - 왕건・안동・누복련・구퇴・아청・유니・해권・차이락・숙석・내대천・주기・두대전・주관・여대비・위발・육진・여락발
22.열전 제19 - 우율제
23.열전 제20 - 고호・최령・봉의
24.열전 제21 - 송은・왕헌・굴준・장포・곡혼・공손표・장제・이선・가이・설제
25.열전 제22 - 왕락아・차로두・노로원・진건・만안국
26.열전 제23 - 최호
27.열전 제24 - 이순
28.열전 제25 - 사마휴지・사마초지・사마경지・사마숙번・사마천조
29.열전 제26 - 조옹・왕혜룡・한연지・원식
30.열전 제27 - 이보
31.열전 제28 - 육사
32.열전 제29 - 원하
33.열전 제30 - 薛辯・寇讃・酈範・韓秀・堯暄
34.열전 제31 - 嚴稜・毛脩之・唐和・劉休賓・房法寿
35.열전 제32 - 羅結・伊馛・乙瓌・和其奴・苟頽・薛野・宇文福・費于・孟威
36.열전 제33 - 韋閬・杜銓・裴駿・辛紹先・柳崇
37.열전 제34 - 竇瑾・許彦・李訢
38.열전 제35 - 盧玄
39.열전 제36 - 高允
40.열전 제37 - 李霊・崔鑒
41.열전 제38 - 尉元・慕容白曜
42.열전 제39 - 韓茂・皮豹子・封敕文・呂羅漢・孔伯恭
43.열전 제40 - 趙逸・胡方回・胡叟・宋繇・張湛・宋欽・段承根・闞駰・劉昞・趙柔・索敞・陰仲達
44.열전 제41 - 李孝伯・李沖
45.열전 제42 - 游雅・高閭
46.열전 제43 - 游明根・劉芳
47.열전 제44 - 鄭羲・崔辯
48.열전 제45 - 高祐・崔挺
49.열전 제46 - 楊播
50.열전 제47 - 劉昶・蕭宝寅・蕭正表
51.열전 제48 - 韓麒麟・程駿
52.열전 제49 - 薛安都・畢衆敬・沈文秀・張讜・田益宗・孟表
53.열전 제50 - 李彪・高道悦
54.열전 제51 - 王肅・宋弁
55.열전 제52 - 郭祚・張彝
56.열전 제53 - 邢巒・李平
57.열전 제54 - 李崇・崔亮
58.열전 제55 - 崔光
59.열전 제56 - 甄琛・高聡
60.열전 제57 - 崔休・裴延儁・袁翻
61.열전 제58 - 劉藻・傅永・傅豎眼・李神
62.열전 제59 - 裴叔業・夏侯道遷・李元護・席法友・王世弼・江悦之・淳于誕・李苗
63.열전 제60 - 陽尼・賈思伯・李叔虎・路恃慶・房亮・曹世表・潘永基・朱元旭
64.열전 제61 - 奚康生・楊大眼・崔延伯
65.열전 제62 - 爾朱栄
66.열전 제63 - 爾朱兆・爾朱彦伯・爾朱度律・爾朱天光
67.열전 제64 - 盧同・張烈
68.열전 제65 - 宋翻・辛雄・羊深・楊機・高崇
69.열전 제66 - 孫紹・張普恵
70.열전 제67 - 成淹・范紹・劉桃符・劉道斌・董紹・馮元興・鹿悆・張熠
71.열전 제68 - 朱瑞・叱列延慶・斛斯椿・賈顕度・樊子鵠・賀抜勝・侯莫陳悦・侯淵
72.열전 제69 - 綦儁・山偉・劉仁之・宇文忠之
73.열전 제70 - 李琰之・祖瑩・常景
74.열전 제71 외척 상 - 賀訥・劉羅辰・姚黄眉・杜超・賀迷・閭毗・馮熙・李峻・李恵
75.열전 제71 외척 하 - 高肇・于勁・胡国珍・李延寔
76.열전 제72 유림 - 梁越・盧醜・張偉・梁祚・平恒・陳奇・常爽・劉献之・張吾貴・劉蘭・孫恵蔚・徐遵明・董徴・刁沖・盧景裕・李同軌・李業興
77.열전 제73 문원 (文苑) - 袁躍・裴敬憲・盧観・封肅・邢臧・裴伯茂・邢昕・温子昇
78.열전 제74 효감 (孝感) -
79.열전 제75 절의 (節義) -
80.열전 제76 양사 (良吏) -
81.열전 제77 혹리 (酷吏) -
82.열전 제78 일사 (逸士) -
83.열전 제79 술운 (術芸) -
84.열전 제80 열녀 -
85.열전 제81 은행 (恩倖) -
86.열전 제82 환관 -
87.열전 제83 - 匈奴劉聡・羯胡石勒・鉄弗劉虎・徒何慕容廆・臨渭氐苻健・羌姚萇・略陽氐呂光
88.열전 제84 - 僭晉司馬叡・賨李雄
89.열전 제85 - 島夷桓玄・海夷馮跋・島夷劉裕
90.열전 제86 - 島夷蕭道成・島夷蕭衍
91.열전 제87 - 私署涼州牧張寔・鮮卑乞伏国仁・鮮卑禿髪烏孤・私署涼王李暠・盧水胡沮渠蒙遜
92.열전 제88 -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물길(勿吉)・실위(失韋)・두막루(豆莫婁)・지두우(地豆于)・고막해(庫莫奚)・거란(契丹)・오락후(烏洛侯)
93.열전 제89 - 氐・토욕혼 吐谷渾・宕昌羌・가오창 高昌・鄧至・蛮・獠
94.열전 제90 西域 - 선선 鄯善・于闐・차사 車師・焉耆・쿠차 亀茲・烏孫・疏勒・悦般・波斯・대월씨 大月氏・安息・大秦国
95.열전 제91 - 蠕蠕・匈奴宇文莫槐・徒何段就六眷・高車
96.열전 제92 - 自序


1.3.3. 지(志)[편집]


1.전상십지계 (前上十志啓)
2.지 제1 - 천상지1 天象志1
3.지 제2 - 천상지 天象志2
4.지 제3 - 천상지 天象志3
5.지 제4 - 천상지 天象志4
6.지 제5 - 지형지 地形志 상
7.지 제6 - 지형지 地形志 중
8.지 제7 - 지형지 地形志 하
9.지 제8 - 율력지 律暦志 상
10.지 제9 - 율력지 律暦志 하
11.지 제10 - 예지 禮志1
12.지 제11 - 예지 禮志2
13.지 제12 - 예지 禮志3
14.지 제13 - 예지 禮志4
15.지 제14 - 악지 樂志
16.지 제15 - 식화지 食貨志
17.지 제16 - 형벌지 刑罰志
18.지 제17 - 영징지 霊徴志 상
19.지 제18 - 영징지 霊徴志 하
20.지 제19 - 관씨지 官氏志
21.지 제20 - 석로지 釈老志


2. 《정사 삼국지》 〈위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삼국지(정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三國志 魏書

〈촉서(蜀書)〉, 〈오서(吳書)〉와 함께 《삼국지》를 구성하는 〈위서(魏書)〉.

이 문서 첫 번째 각주에도 나와있듯이 이 〈위서〉는 딸랑 〈위서〉라고 쓰이는 경우는 잘 없고, 《삼국지》 〈위서〉~ 또는 《삼국지》 〈위지〉~ 라는 식으로 《삼국지》와 함께 붙여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삼국지》와 관련된 내용 때문에도 많이 거론되지만, 특히 문헌자료가 부족한 한국 삼국시대 초기의 여러 국가와 민족에 대한 서술이 기록되어 있어 자주 거론되는 주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사와 관련되어 인용될 때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라는 서술로 표현,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
[1] 본기와 열전의 부분은 554년(천보 5년), 지는 559년(천보 10년)에 완성했다.[2] 이 책의 경우 〈위지〉라고도 불린다.[3] 이것을 전후사정도 모르는 환빠들이 유유=소도성=한반도인 또는 유송=남제=한반도 역사라고 날조하는 명목이 되기도 했다.[4] 이에 맞서 남조에서는 북조를 '위로(魏虜, 위나라 오랑캐)'라고 기록했다.[5] 물론 자국을 높여주고 타국을 낮추는 경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사서에서 보이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타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기를 쓰고 깎아내리는 경향은 찾아보기 힘들다.[6] 효무제는 원래 실권자 고환(...)이 꼭두각시로 황제로 세웠는데 효무제가 고환을 죽일려다가 발각되자 효무제가 을 타고 수도 성을 떠나 장안으로 도주했다. 효무제는 장안에 도착한 후 관중대도독 우문태에게 의지해 실권을 넘겼는데 고환은 효무제에게 돌아오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고환은 따로 효무제의 일족 효정제를 세우면서 북위는 우문태가 실권을 잡은 서위와 고환이 실권을 잡은 동위로 분열되었다. 이후 서위는 북주, 동위는 북제로 왕조가 바뀐다.[7] 북제가 멸망한 이후 《위서》를 편찬했던 위수가 사후 《위서》 때문에 '굴묘편시'를 당한 기록이 실제로 존재한다. 게다가 북주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는 서위와 북주로부터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였기 때문에 《위서》는 당대의 지식인들의 눈에 들 리가 없었다.[8] 북송 때 30권 정도 소실본이 발견되어 《북사》를 인용해 보충했다는 기록이 있고, 군데군데 보충 부분이 명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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