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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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제7대 황제
고조 효문제 | 高祖 孝文帝


파일:external/www.tgljw.com/201110130832170078562.jpg

출생
467년 10월 13일
북위 대군 평성 황궁 자궁
(現 산시성 다퉁시)
즉위
471년 9월 20일
북위 대군 평성 황궁
(現 산시성 다퉁시)
사망
499년 4월 26일 (향년 32세)
북위 하남군 낙양 곡당원 행궁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장릉(長陵)
재위기간
북위 황태자
469년 6월 27일 ~ 471년 9월 20일
제7대 황제
471년 9월 20일 ~ 499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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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탁발(拓跋)하남 원씨[1]

굉(宏)
부모
부황 현조
모후 문사황후
형제자매
7남 5녀 중 장남
배우자
문정황후, 폐후 풍씨, 문유황후, 문소황후
자녀
7남 9녀
종교
불교
묘호
고조(高祖)
시호
효문황제(孝文皇帝)
연호
연흥(延興, 471년 ~ 476년)
승명(承明, 476년)
태화(太和, 477년 ~ 499년)

1. 개요
2. 생애
2.1. 친정 이전
2.2. 친정 이후
2.2.1. 한화정책
2.2.2. 낙양 천도
2.2.3. 정책 목록
2.2.4. 토지 개혁
2.2.5. 한화정책의 결과
3. 평가
4. 황후
5. 여담
6. 미디어에서의 등장
7. 둘러보기(계보)



1. 개요[편집]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제7대 황제.

묘호는 고조(高祖)였으며, 시호는 효문황제(孝文皇帝)였다. 휘는 굉(宏)이었고, 제6대 황제인 현조 헌문제의 장남이었다.

2. 생애[편집]



2.1. 친정 이전[편집]


헌문제(獻文帝)의 장남으로 황흥(皇興) 원년(467) 8월 29일(양력 10월 13일)에 태어났다. 효문제의 생모인 부인 이씨(李氏)는 황흥 3년(469)에 자결을 강요당했는데, 당시 북위는 외척의 전횡을 피하기 위해 황태자가 세워지는 경우 그 생모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자귀모사).

황흥 5년(471) 부황 헌문제가 적모(嫡母)인 문성문명황후 풍씨, 즉 풍태후(馮太后)와 대립하다가 패하고, 풍태후의 압박에 의해 8월 20일(양력 9월 20일) 반강제로 탁발굉에게 양위하게 되었다. 당시 효문제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즉위한 뒤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연흥(延興)이라 고쳤다.

태황태후 풍씨는 헌문제의 치세때부터 실권을 장악하고 수렴청정을 펼치고 있었는데, 헌문제를 퇴위시키고 효문제를 즉위시켰을 때는 겨우 다섯 살이었기에, 그녀는 다시금 어린 황제를 내세워 수렴청정을 행했다. 이는 태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풍태후는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났기에 반란을 진압하고 반록제(班祿制)나 삼장제(三長制), 균전제(均田制) 등의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중앙재정[1]과 지방재정[2]을 분리하는 등 북위의 중앙집권화에 힘써 많은 치적을 쌓았다. 풍태후는 태화(太和) 14년(490)에 사망했는데, 당시 효문제는 풍태후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5일 동안이나 식사를 들지 않고, 4개월 동안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들어 풍태후가 효문제의 실제 생모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2.2. 친정 이후[편집]


490년, 풍태후가 죽자 친정을 시작했다.

2.2.1. 한화정책[편집]


위진남북조시대
북조의 민족ㆍ문화정책

북위
북주
효문제

한화정책
(漢化)
문제, 무제

호화정책
(胡化)



위진남북조시대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정책 중 하나이다. 역사상 고조 효문제를 가장 잘 나타내는 업적이다.

효문제는 한화(漢化)정책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대개혁을 시작했다. 이는 선비족이 적극적으로 한문화를 배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을 펼친 이유는, 선비족이 포함된 5호(선비, 흉노, , , )는 관료제에 입각한 국가를 경영한 적이 없어서 나라를 세워도 금방 분열되고, 붕괴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서진의 약화를 틈타 북중국을 정복할 수는 있었지만, 문맹인 유목민 정복자들이 이전의 한족 왕조들처럼 정교한 관료제를 유지하기는 힘들었고, 결국 이들이 세운 왕조는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다가 단명하고 말았다.

특히 북조에서는 한족에 의한 농민반란이 계속 일어났는데, 이는 유목민 출신인 지배층이 농업경제에 대한 몰이해로 의도했든지, 의도치 않았든지 간에 지나친 착취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선비족 출신의 효문제는 이런 문제점을 깨닫고 정권을 안정화하기 위해 한문을 배우고 유교 및 불교의 소양을 익히게 하는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펼쳤다. 이렇게 해서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북위는 유목민족인 5호가 세운 나라 중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었고, 한화된 선비족이자 지역 군벌집단인 소위 관롱집단은 전 중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시절까지 지배층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로써 500년간 선비족은 중국의 지배층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선비족은 당(唐)나라 시대에 이르면 그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스스로 한인을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2.2.2. 낙양 천도[편집]


동호계인 탁발선비가 세운 대나라평성(현재의 산시성 다퉁)에 도읍을 두었으나 티베트계의 저족이 세운 전진의 명군 부견에 의해 멸망했다. 천하통일의 야망을 실현하려고 했던 이상주의자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한족 왕조인 동진에게 대패하고 추락하자, 태조 도무제 탁발규가 이끄는 선비족이 평성에서 일어나 북위를 건국했을 정도로 평성은 선비족의 기반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문화 수준이 낮은 곳인 데다가, 당시 5호의 이동을 야기한 전 지구적인 한냉기후 때문에 농업이 불가능한 곳이어서 생산력이 미흡하고 교통이 불편해 각종 물자를 내지에서 운반해와야 한다는 단점이 있어서, 화북지방 전체를 다스리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그리하여 효문제는 정통 중화 왕조들이 낙양에 도읍을 정한 것을 본따서 천도를 단행했다.

사실 낙양 천도는 반대가 엄청나게 많았으나[3], 효문제는 숙부인 임성왕 탁발징과 한족 관료인 이충의 협력을 받아[4] 천도 계획을 세우면서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꾀를 내었다. 남조를 정벌하러 간다는 핑계를 댄 후, 장마철에 군대를 이끌고 남진하다가 비 때문에 행군이 어렵자 낙양에 잠시 주둔시키면서, 선비족 장수들을 낙양의 화려한 문화생활에 잔뜩 홀리게 만들었다.[5] 효문제는 짐짓 다시 남조 원정을 재개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낙양 생활의 달콤함에 취해버린 선비족 장수들은 떠나기 싫어서 그대로 낙양에 머무르자고 청원했고, 효문제는 이런 꾀로 결국 낙양 천도를 이루었다.

낙양은 지형 특성상 방어에 대단히 취약했다.[6] 따라서 천도 당시 수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한 이유는 통일전쟁을 위해서였다. 남조의 물산은 북위에 대단히 탐나는 것이었고, 또한 이때쯤 되면 북위도 중원을 계승했다는 의식을 갖게 되어 통일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후한의 수도이기도 했던 낙양을 수도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한화정책의 성격을 부여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2.2.3. 정책 목록[편집]


  • 호한(胡漢) 간 결혼 장려 - 효문제 본인 자신도 혼혈이었다. 모계인 풍태후가 한족이었다.

  • 호성(胡姓)을 한성(漢姓)으로 개변 - 북위 황실도 씨족명을 탁발(拓跋)에서 한성인 (元)으로 고쳤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은 극심했으며, 결국 북주 제3대 고조 무제 우문옹의 치세때 이르러 한성으로 개변하던 것을 다시 호성으로 되돌리는 정책을 실시했다.(호화정책)

  • 호속(胡俗)과 호어(胡語) 금지 - 선비족의 고유어와 고유 풍속을 금지하고, 한어와 한족의 풍속을 따르게 했다. 다만 이는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다.

  • 성족분정(姓族分定) - 씨족이 다르면 다르게 살게 했다. 이는 씨족연맹을 형성하여 황권에 도전하려는 것을 방지하려는 중앙집권화정책이기도 했다.

  • 서교 제천 금지 - 서교 제천은 선비족 고유의 제천의식이었다. 선비족은 한족과는 다른 고유의 민족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효문제는 이런 고유 신앙을 금지했다. 또한 공자묘를 대대적으로 보수했으며, 이는 국교를 유교로 바꾼 것이었다.[7]

  • 관제 개혁 - 원래 선비족을 비롯한 유목민들은 부족국가체제이기 때문에 부족장의 대표에 불과했던 황제는 권한이 미약했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중국(한족)은 전통적으로 황권이 엄청나게 강했고, 투입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은 확연히 달랐다. 그러므로 선비족이 한족을 모방함에 따라서 황권이 엄청나게 신장되었다. 그리하여 북조가 중국식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효문제는 직접 농사를 시범삼아 지어서 유목생활을 하던 선비족에게 농업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한화정책은 결과적으로 선비족을 한화 선비와 비한화 선비로 나누는 결과를 낳았고, 낙양 천도로 인해 황제를 따라 이동한 한화 선비족은 중앙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지만, 천도를 반대하며 원래 있던 곳에 남아있었던 비한화 선비족은 그만큼 입지를 잃게 되었다. 이와 함께 효문제의 치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문성문명황후 섭정하에 실시된 삼장제와 균전제의 실시였다.

2.2.4. 토지 개혁[편집]


삼장제는 황제의 신민에 대한 일신지배를 한데 모아 1당이라는 단위를 설정한 다음 각각 인장, 이장, 당장을 두어 호구 조사와 조세량 지정 등 행정 업무를 맡기는 제도였다.

균전제는 당시 황폐화된 화북의 토지를 정비하여 국가가 일반 백성에게 노동력을 기준으로 토지를 하사한 제도였다. 여기에는 토지 공유주의와 균분주의라는 원칙이 투영되어 있었다. 즉 한족의 전통과 유목민의 전통이 어우러진 이 제도는 전란으로 황폐화된 화북 지방의 토지를 개간하는 한편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해 시행되었다.[8]

균전제의 내용을 보면 먼저, 일반 성인 남성인 정남에게 환수전인 노전과 불환수전인 상전이 지급되었다. 이 점에서 정전제 이래 중국의 토지 사상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남의 부인에게도 토지가 지급되었고, 이외에 농우에까지 지급된 것으로 봐서 여자와 가축의 노동력을 중시하는 유목민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노비에게도 토지가 지급되었다.

이 균전제는 북제와 북주,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 시기까지 지속되었다가 토지 부족 문제로 안사의 난을 전후에 사라지게 되었다. 점차 인구는 늘어갔고 이로 인해 불환수전도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대체적으로 북위 멸망 이후에 실시된 균전제가 토지 지급에 대한 제한이 걸려 부인이나 가축에겐 토지가 지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관리들에 대한 토지는 일반 정남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균전제의 특성상 노비와 농우를 많이 가진 권세가들이 토지를 더 많이 지급받았으며, 노비와 농우의 세금도 정남에 비해 적었다.

결국 당나라의 중후기가 되면 지급되는 토지는 규정의 절반 이하인 농가가 급증했고, 그 소출로 무장을 해야 했던 농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군역 부담이 커지는 꼴이 되면서 도호화, 즉 토지를 이탈해 숨어버리는 농민들이 증가했다. 그 결과 안사의 난을 기점으로 균전제는 끝을 맺게 되었다.

2.2.5. 한화정책의 결과[편집]


이런 한화정책은 단순히 5호 16국시대 이전의 한족 풍습을 복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발달시킨 것이었다. 중국식 고대국가의 완성형이라고 볼 수 있는 당나라의 제도 또한 북위 효문제의 제도에 뿌리가 닿아 있을 정도로, 효문제의 개혁은 철저한 것이었다.

이러한 한화정책의 결과 황제권은 강화되었고, 국가체제는 정비되었다. 하지만 단기적, 장기적으로는 이런 개혁에 동반되는 보•혁 간의 갈등이 일어났다. 한족의 등용이 늘어나고, 문인을 우대하는 풍토가 일어나자 소외된 무장들과 비한화된 선비족 내 족장들의 불만이 누적되어갔다. 496년 실제로 효문제의 장남이었던 황태자 원순(元恂)이 부황의 한화정책에 반발해 옛 수도였던 평성(平城)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진압되었다. 진압 후 효문제는 원순을 폐태자시키고 주살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고, 499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효문제가 붕어한 후 누적된 불만은 523년 육진의 대란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이런 한화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해 단기적으로는 지배층인 선비족 내에서 한화 정책파와 전통 고수파와의 상당한 갈등이 있게 되었고, 이것이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5호가 중심이 된 북조는 왕조가 교체되더라도 이런 한화정책을 지속했으며, 이런 정책에 따르는 보혁갈등으로 은 있었지만 개혁이 효과를 보면서 정치가 안정되자 더욱 부강해졌다. 결국 수나라 고조 문제 양견의 치세때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유일한 패자가 될 수 있었다.

3. 평가[편집]


고조 효문제 탁발굉은 북위의 최전성기를 일궜으나 사실상 북위 멸망의 씨를 뿌린 것으로도 평가되는 황제이다. 한족의 입장에서는 중화주의에 입각해서 오랑캐 군주가 중화문명을 받아들여 한화를 한 것을 높게 평가했지만 만주족 군주였던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는 선조들의 전통을 너무 잊어버렸다고 혹평했다. 이와 같이 효문제는 침투왕조 북위의 장점과 단점을 고루 보여준 군주였다.

강희제는 효문제를 비판했지만, 강희제의 만주족 역시도 북위의 길을 걸었다. 북위와는 달리 민족 자체가 사라지진 않았지만 언어,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된 채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만 간신히 지켜내는 상황이라서 그게 그거의 수준이 된 게 현실이다. 인구에서 밀리는 정복민족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피정복 민족을 장기간 다스리려면 유화정책이나 어느 정도의 동화는 불가피하다. 자신들의 문화와 민족적 정체성을 지킨다는 목적과 성공적으로 피정복 민족을 장기간 다스리는 걸 동시에 한다는 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어느 문화권이든 존재한다. 인도의 경우, 델리 술탄 왕조무굴 제국의 튀르크계 무슬림 지배층 후손들이 현재는 종교만 이슬람교일 뿐 언어·문화적으로 인도인에 동화되었고, 영국의 경우 노르만 왕조플랜태저넷 왕조노르만족 지배층 후손들이 현재는 잉글랜드인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반면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했던 몽골족의 원나라는 오래 못가서 멸망해버렸다. 원나라 지배층도 바보는 아니라서 이대로는 오래 못간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있었고, 때문에 제5대 영종 게겐칸이 한족과 어느정도 동화되려는 노력을 했었지만(영종신정) 몽골 기득권층에게 살해당했고(남파의 변), 제11대 혜종 우카가투칸과 메르키트 토크토아(탈탈)가 개혁을 시도했지만 승상 메르키트 바얀(백안)이 행했던 한문화 탄압정책으로 이미 한족 백성들의 민심이 악화되어 버스 떠난 뒤에 손흔드는 일이 되어버렸다.

한반도의 신라도 삼국통일 이후 왕들이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을 동화시키려고 골품제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진골 기득권층이 개혁을 엎어버렸고 결국 신라는 붕괴하고 후삼국시대가 왔다.

현대도 마찬가지로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로디지아의 지배층이었던 백인들은 인종적인 문제로 피지배층인 흑인과 섞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흑인들을 계속 지배하려고 하는 등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고 했다. 결국 로디지아는 건국한지 15년만에 흑인들의 저항으로 멸망하게 되었고, 흑인이 주류가 된 짐바브웨가 성립되었다.

4. 황후[편집]


효문제는 생전에 두 명의 황후를 두었는데 모두 문성문명황후 풍씨의 조카들이었다.

본래 풍윤이 입궁하여 효문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피부병에 걸리자 문성문명황후 풍씨가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여동생인 풍청이 문성문명황후의 명령으로 황후가 되었다. 문성문명황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풍윤을 계속 그리워하던 효문제는 풍윤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풍윤을 다시 입궁시킨 후 풍청을 폐위하고 풍윤을 황후로 봉했다. 하지만 풍윤은 고미인을 독살했고, 그 아들을 양자로 삼았으며 남편인 효문제가 출병할 당시에는 고보살이라는 가짜 환관과 사통까지 했다. 이후 효문제의 누이인 팽성공주 원씨가 효문제에게 풍윤의 사통을 알렸고 이에 풍윤은 폐위되진 않았으나 연금되었다. 효문제는 황후의 악행에 충격을 받아 병석에 눕게 되었고, 죽을 날이 오자 풍윤을 자신을 따라 순장시키라고 명령한 후 붕어했다.

5. 여담[편집]


484년과 488년, 490년에 제24대 동성왕 치세하의 웅진백제를 침공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하지만 양국 사이에 육지로는 고구려가, 바다로는 황해가 있어 접근하기도 어려운 백제를, 그것도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왜 침공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동성왕 항목 참고.

한화정책을 기업 한화한화 이글스와 엮는 개그가 있다. EBS 수능 세계사 강사 류성완은 효문제를 다룰 때 암기 방법의 일종으로 자신이 한화 이글스의 팬임을 강조하며 한화 이글스와 김성근으로 통하는 인터넷 방송인 케인의 팬층도 종종 개그로 쓴다.

6. 미디어에서의 등장[편집]


<뮬란: 전사의 귀환>에서 남자 주인공으로 비중있게 등장한다.

2018년 드라마 <봉수황>의 마지막회에 등장한다.

우리나라에 <쑨원의 중화민국 건국>편까지 정발된 《만리중국사》 12권에서 나름 비중있게 등장하는데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미소년으로 그려놓고, 나름 긍정적으로 묘사되었다. 다만, 이 효문제가 중국을 지배했던 이민족 왕조에서 계속 반면교사의 일종으로 거론되는데,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지배층이

'효문제와 선비족의 전례가 있소. 한족들과 필요 이상의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펴면 우리 인구가 한족에 열세라서 저들과 완전히 동화되었을 경우, 우리 민족이 아예 한족에 흡수되어 사라질 수 있단 말이오'

라며 지나친 한화정책을 지양하는 걸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9]


7. 둘러보기(계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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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여(黎) ·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7·18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19권 「문성5왕·헌문6왕·효문6왕전(文成五王·獻文六王·孝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약(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20권 「위조등전(衛操等傳)」
위조 · 막함 · 유고인 · 울고진 · 목숭 · 해근 · 숙손건 · 안동 · 유업연 · 왕건 · 나결 · 누복연 · 염대비 · 해목 · 화발 · 막제 · 하적간 · 이율 · 해권
21권 「연봉등전(燕鳳等傳)」
22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연봉 · 허겸 · 최굉 · 장곤 · 등언해
장손숭 · 장손도생 · 장손비
23권 「우율제전(于栗磾傳)」
24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우율제
최영 · 왕헌 · 봉의
25권 「고필등전(古弼等傳)」
고필 · 장려 · 유결 · 구퇴 · 아청 · 이후 · 을괴 · 주기 · 두대전 · 거이락 ·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내대간 · 숙석 · 만안국
주관 · 울발 · 육진 · 여락발 · 설표자 · 울원 · 모용백요 · 화기노 · 순퇴 · 우문복
26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허언 · 조옹(刁雍) · 신소선 · 위랑 · 두전
27권 「굴준등전(屈遵等傳)」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두근 · 이흔 · 한연지 · 원식 · 모수지 · 당화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 유숭
28권 「육사등전(陸俟等傳)」
29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육사 · 원하 · 유이 · 설제
사마휴지 ·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28권 「노현등전(盧玄等傳)」
29권 「고윤등전(高允等傳)」
노현 · 노부
고윤 · 고우 · 고덕정 · 고익 · 고앙
32권 「최감등전(崔鑒等傳)」
33권 「이령등전(李靈等傳)」
최감 · 최변 · 최정
이령 · 이순 · 이효백 · 이예 · 이의심
35권 「왕혜룡등전(王慧龍等傳)」
36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왕혜룡 · 정희
설변 · 설치 · 설징
37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 전익종 · 맹표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요훤 · 이숙인
38권 「배준등전(裴駿等傳)」
39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배준 · 배연준 · 배타 · 배과 · 배관 · 배협 · 배문거 · 배인기
설안도 · 유휴빈 · 방법수 · 필중경 · 양지
4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41권 「양파등전(楊播等傳)」
한기린 · 정준 · 이표 · 고도열 · 견침 · 장찬 · 고총
양파 · 양부양소
42권 「왕숙등전(王肅等傳)」
43권 「곽조등전(郭祚等傳)」
44권 「최광등전(崔光等傳)」
왕숙 · 유방(劉芳) · 상상
곽조 · 장이 · 형만 · 이숭
최광 · 최량
45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음중달 · 장당 · 이묘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장열 · 이숙표 · 노시경 · 방량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46권 「손소등전(孫紹等傳)」
손소(孫紹) · 장보혜 · 성엄 · 범소 · 유도부 · 녹여 · 장요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47권 「원번등전(袁翻等傳)」
48권 「이주영전(爾朱榮傳)」
원번 · 양니 · 가사백 · 조영
이주영
49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후심(2) · 하발승 · 후막진열 · 염현 · 양람 · 뇌소 · 모하 · 을불랑
50권 「신웅등전(辛雄等傳)」
신웅 · 양기 · 고도목 · 기준 · 산위 · 우문충지 · 비목 · 맹위

51·52권 「제종실제왕전(齊宗室諸王傳)」
고침 · 고악 · 고성 · 고영락 · 고현국 · 고사종 · 고언귀 · 고령산 · 고준 · 고엄 · 고유 · 고환(高渙) · 고육 · 북제 · 고식 · 고제 · 고응 · 고윤
고흡 · 고효유 · 고효연 · 고효완 · 고장공 · 고연종 · 고소신 · 고소덕 · 고소의 · 고소인 · 고소렴 · 고백년 · 고량 · 고언리 · 고언덕
고언기 · 고언강 · 고언충 · 고작 · 고엄 · 고곽 · 고정 · 고인영 · 고인광 · 고인기 · 고인옹 · 고인검 · 고인아 · 고인직 · 고인겸 · 고각 · 고선덕
고매덕 · 고질전
53권 「묵기보등전(万俟普等傳)」
묵기보 · 가주혼원 · 유풍 · 파륙한상 · 금조 · 유귀 · 채준 · 한현 · 울장명 · 왕회 · 임상 · 막다루대문 · 사적회락 · 사적성 · 장보락
후막진상 · 설고연 · 곡률강거 · 장경 · 요웅 · 송현 · 왕칙 · 모용소종 · 질열평 · 보대한살 · 설유의 · 모용엄 · 반락 · 팽락 · 포현 · 피경화
기연맹 · 원경안 · 독고영업 · 선우세영 · 부복
54권 「손등등전(孫騰等傳)」
손등 · 고융지 · 사마자여 · 두태 · 울경 · 누소 · 사적간 · 한궤 · 단영 · 곡률금
55권 「손건등전(孫搴等傳)」
손건 · 진원강 · 두필 · 두태 · 울경 · 장찬 · 장량 · 장요 · 왕준 · 왕굉 · 경현준 · 평감 · 당옹 · 백건 · 원문요 · 조언심 · 혁련자열 · 풍자종 · 낭기
56권 「위수등전(魏收等傳)」
위수 · 위장현 · 위계경 · 위난근

57권 「주종실전(周宗室傳)」
우문호 · 우문련 · 우문낙생 · 우문중 · 우문측 · 우문신거
58권 「주실제왕전(周室帝王傳)」
우문진 · 우문직 · 우문초 · 우문검 · 우문순 · 우문성 · 우문달 · 우문통 · 우문형 · 우문강 · 우문현 · 우문정 · 우문실 · 우문찬 · 우문지
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
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왕세적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유방(劉昉) · 유구 · 황보적 · 곽연 · 장형 · 양왕 · 배온 · 원충 · 이웅
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라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마자결 · 이흥업 · 양원의 · 풍위 · 장매노 · 유궤사
포계상 · 형치 · 유주 · 마경덕 · 장경인 · 권회 · 장사백 · 장조무 · 곽준 · 심중 · 번심 · 웅안생 · 악손 · 기준 · 조문심 · 신언지 · 하타 · 소해 · 포개 · 방휘원 · 마광 · 유작 · 유현 · 저휘 · 고표 · 노세달 · 장충 · 왕효적
83권 「문원전(文苑傳)」
온자승 · 순제 · 조홍훈 · 이광 · 번손 · 순사손 · 왕포 · 유신 · 안지추 · 우세기 · 유변 · 허선심 · 이문박 · 명극양 · 유진 · 제갈영 · 왕정 · 우작
왕주 · 유자직 · 반휘 · 상덕지 · 윤식 · 유선경 · 조군언 · 공덕소 · 유빈
84권 「효행전(孝行傳)」
장손려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 형가 · 진족 · 영선 · 황보하 · 장원
왕반 · 양경 · 전익 · 유인 · 유사준 · 적보림 · 화추 · 서효숙
85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마팔룡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곽염 · 지용초 · 을속고불보 · 이상 · 두숙비 · 이악 · 유원 · 장수타 · 양선회 · 노초 · 유자익 · 요군소
진효의 · 두송지 · 곽세준 · 낭방귀
86권 「순리전(循吏傳)」
장응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두원 · 소숙 · 장화업 · 맹업 · 소경 · 노거병 · 양언광 · 번숙략 · 공손경무 · 신공의 · 유검 · 곽현 · 경숙
유광 · 왕가 · 위덕심
87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니 · 이홍지 · 장사제 · 조패 · 최섬 · 저진 · 전식 · 연영 · 원홍사 · 왕문동
88권 「은일전(隐逸傳)」
휴과 · 풍량 · 정수 · 최곽 · 서칙 · 장문후
89·90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심(1)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이순흥 · 단특사 · 안악두 · 왕춘 · 신도방 · 송경업 · 허준 · 유준세 · 조보화 · 황보옥 · 해법선 · 허준 · 위녕 · 기모회문 · 장자신 · 육법화 · 장승 · 강련 · 유계재 · 노태익 · 경순 · 내화 · 소길 · 양백추 · 임효공 · 유우 · 장주현 · 주담 · 이수 · 서건 · 왕현 · 마사명 · 요승원 · 저해 · 허지장 · 만보상 · 장소유 · 하조
91권 「열녀전(列女傳)」
난릉공주 · 남양공주 · 초국부인
92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중흥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구락제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유등 · 가찬 · 양범 ·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곽수 · 화사개 · 안토근 · 목제파 · 고아나굉
93권 「참위부용전(僭偽附庸傳)」
혁련발발 · 모용외 · 요장 · 풍발 · 걸복국인 · 저거몽손 · 소찰
94권 「고려등전(高麗等傳)」
고려 · 백제 · 신라 · 물길 · 해족 · 거란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오락후 · 류구 · 왜국
95권 「만등전(蠻等傳)」
만족(蠻) · 요족(獠) · 임읍 · 적토 · 진랍 · 파리
96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 · 등지국 · 당항 · 부국 · 계호국
97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포산국 · 실거반 · 권우마국 · 차사국 · 우전국 · 고창 · 차미 · 언기 · 구차 · 고묵국 · 온숙국 · 울두국 · 오손국 · 소륵국 · 열반국 · 토호라
소월씨 · 아구강국 · 속특국 · 파사국 · 복로니국 · 색지현 · 가색니국 · 고창 · 차미
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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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조(公調)[2] 조외(調外)[3] 업성으로 천도하자는 견해(황하 북쪽에 위치해 있고, 식량과 작물이 많이 생산된다는 장점이 있다는 이유로)도 있었고, 태원으로 천도하자는 의견도 있었다.[4] 다만, 이 두 사람은 효문제의 개혁은 지지했지만 남조와의 전쟁은 반대하는 입장이라 나중에 효문제가 전쟁을 하려하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5] 당시 제나라에 상을 치르고 있어서, 상중불벌이라는 핑계를 삼아 낙양에 자리 잡았던 것이 맞다.[6] 낙양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북쪽으로는 황하가 있고 주변에 적절한 산이 있으며 분지도 어느 정도 되어서 방어하기 좋을 것 같지만, 황하는 건너올 수 있는 곳이 너무 많고, 산은 간격이 넓어서 방어진을 차려야 하는 곳이 너무 많았다. 몇 십 년 뒤 양나라의 명장 진경지가 낙양을 수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700년 전 한고제 유방도 항우를 멸하고 통일한 직후에는 낙양을 수도로 삼았다가 유경으로부터 방어에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장안으로 수도를 옮겼다.[7] 하지만 북조는 이후 유교 못지않게 불교의 영향도 강하게 받게 된다.[8] 한때 균전제에 대해 그 실시 여부에 대한 찬반논란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균전제 시행에 대한 사료는 이안세의 상소문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투르판 지역과 돈황 지역에서 균전제 실시에 관한 토지 문서가 발견되어 균전제가 실시되었다는 쪽에 의견이 강하게 실렸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지 않아 귀추가 주목된다.[9] 다만, 이는 유화정책을 필 명분이 되기도 했다. 폭정이나 강경책을 계속 사용하면 인구빨에서 밀리는 이민족 왕조가 장기적으로 한족 백성을 지배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한족 관료를 등용하거나 강경한 탄압 등을 지양해야 한다는 설득에 힘이 실리기도 하는 걸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