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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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書
중국의 24사 중 하나이며, 정관 5사(貞觀五史) 중 하나이기도 하다. 622년, 영호덕분(令狐德棻)이 남북조시대의 역사와 수나라의 역사서 편찬을 주청했다. 이러한 국책사업은 정관 연간에 결실을 맺게되는데 《양서》(梁書), 《진서》(陳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등과 함께 동시에 《수서》가 편찬되었다. 《수서》는 636년,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위징(魏徵) 등이 완성한 <제기>(帝紀) 5권, <열전>(列傳) 50권으로 구성된 것과 656년. 우지녕(于志寧) 등이 완성한 다섯 왕조의 <지>(志) 30권으로 구성된 것을 합간하여 부른다.
<제기>(帝紀) 5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0권으로 총 8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나라는 당시 통일제국으로 발돋음하고 있었고, 당나라 이전 중국은 후한 이후로 수백년간 분열시대(위진남북조시대)를 겪은 혼란기였기 때문에 이전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수서》가 편찬된 것이다. 《수서》는 <제기>와 <열전> 그리고 <지>까지 편입시켜서 《오대사지》(五代史志)라고도 불린다. 《수서》는 분명 이념적인 성격이 강한 역사서였으며, 그래서 수나라의 멸망을 당 고조 이연이 수 공제 양유로부터 선양받은 618년으로 정하고 있다, 이는 당나라의 정통임을 어필하기 위한 서술임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진 《북사》를 제외한 나머지보다는 그 내용이 풍부하다. 따라서 《수서》의 사료적인 가치는 상당하다.
다만 한국 고대사와 관련해서는 잘 안 알려진 떡밥의 요람이다. 신라를 고구려 패잔병이 세웠다느니, 신라 왕이 백제 출신이라느니(...), 신라가 백제에 복속되어 있었다느니, 백제와 신라가 왜를 대국으로 섬겼다느니 하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멀리 중국에서 입수한 불분명한 소식들을 쓴 것으로, 특히 괴상한 뜬소문이 많은 신라의 경우, 6세기 중반 제24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기 이전까지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황해에 항구가 없어, 중국과 교류한 역사가 삼국 중 가장 짧았다.[1] 때문에 《수서》의 기록은 한국 현지의 사서들이나 금석문과 상충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즉, 잘못 알려진 잘못된 사실들과 기록, 오해들도 전부 기록되어 있는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한 사서라고 보는 게 옳다. 이는 바다 건너의 반대편 《일본서기》도 마찬가지이다.
패잔병들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시절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격파하자, 남쪽으로 도망간 이들이 옥저에 거주하다가 후에 더 남하하여 신라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2] 또 후에는 백제에게 고구려가 침략 당하자, 고구려인들이 신라로 도망갔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 출신의 사람이 진한에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추정컨데 이 기록들을 재편집하면서 마한=백제, 진한=신라로 확대해석하여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닐까 하는 해석도 있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서》의 내용들 중 일부는 오해와 오류를 바탕으로 기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을 만드는 지식에서 수서 전체를 완역하였다.
수서 번역본
1. 개요[편집]
隋書
중국의 24사 중 하나이며, 정관 5사(貞觀五史) 중 하나이기도 하다. 622년, 영호덕분(令狐德棻)이 남북조시대의 역사와 수나라의 역사서 편찬을 주청했다. 이러한 국책사업은 정관 연간에 결실을 맺게되는데 《양서》(梁書), 《진서》(陳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등과 함께 동시에 《수서》가 편찬되었다. 《수서》는 636년,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위징(魏徵) 등이 완성한 <제기>(帝紀) 5권, <열전>(列傳) 50권으로 구성된 것과 656년. 우지녕(于志寧) 등이 완성한 다섯 왕조의 <지>(志) 30권으로 구성된 것을 합간하여 부른다.
2. 구성[편집]
<제기>(帝紀) 5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0권으로 총 8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3. 의의와 평가[편집]
당나라는 당시 통일제국으로 발돋음하고 있었고, 당나라 이전 중국은 후한 이후로 수백년간 분열시대(위진남북조시대)를 겪은 혼란기였기 때문에 이전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수서》가 편찬된 것이다. 《수서》는 <제기>와 <열전> 그리고 <지>까지 편입시켜서 《오대사지》(五代史志)라고도 불린다. 《수서》는 분명 이념적인 성격이 강한 역사서였으며, 그래서 수나라의 멸망을 당 고조 이연이 수 공제 양유로부터 선양받은 618년으로 정하고 있다, 이는 당나라의 정통임을 어필하기 위한 서술임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진 《북사》를 제외한 나머지보다는 그 내용이 풍부하다. 따라서 《수서》의 사료적인 가치는 상당하다.
다만 한국 고대사와 관련해서는 잘 안 알려진 떡밥의 요람이다. 신라를 고구려 패잔병이 세웠다느니, 신라 왕이 백제 출신이라느니(...), 신라가 백제에 복속되어 있었다느니, 백제와 신라가 왜를 대국으로 섬겼다느니 하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멀리 중국에서 입수한 불분명한 소식들을 쓴 것으로, 특히 괴상한 뜬소문이 많은 신라의 경우, 6세기 중반 제24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기 이전까지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황해에 항구가 없어, 중국과 교류한 역사가 삼국 중 가장 짧았다.[1] 때문에 《수서》의 기록은 한국 현지의 사서들이나 금석문과 상충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즉, 잘못 알려진 잘못된 사실들과 기록, 오해들도 전부 기록되어 있는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한 사서라고 보는 게 옳다. 이는 바다 건너의 반대편 《일본서기》도 마찬가지이다.
패잔병들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시절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격파하자, 남쪽으로 도망간 이들이 옥저에 거주하다가 후에 더 남하하여 신라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2] 또 후에는 백제에게 고구려가 침략 당하자, 고구려인들이 신라로 도망갔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 출신의 사람이 진한에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추정컨데 이 기록들을 재편집하면서 마한=백제, 진한=신라로 확대해석하여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닐까 하는 해석도 있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서》의 내용들 중 일부는 오해와 오류를 바탕으로 기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4. 국내 번역[편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에서 수서 전체를 완역하였다.
수서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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