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서 (문단 편집) == 의의와 평가 == [[당나라]]는 당시 통일제국으로 발돋음하고 있었고, 당나라 이전 중국은 [[후한]] 이후로 수백년간 분열시대('''[[위진남북조시대]]''')를 겪은 혼란기였기 때문에 이전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수서》가 편찬된 것이다. 《수서》는 <제기>와 <열전> 그리고 <지>까지 편입시켜서 《오대사지》(五代史志)라고도 불린다. 《수서》는 분명 이념적인 성격이 강한 역사서였으며, 그래서 수나라의 멸망을 당 고조 [[고조(당)|이연]]이 수 공제 [[양유]]로부터 선양받은 618년으로 정하고 있다, 이는 당나라의 정통임을 어필하기 위한 서술임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진 《북사》를 제외한 나머지보다는 그 내용이 풍부하다. 따라서 《수서》의 사료적인 가치는 상당하다. 다만 한국 고대사와 관련해서는 잘 안 알려진 떡밥의 요람이다. 신라를 고구려 패잔병이 세웠다느니, 신라 왕이 백제 출신이라느니(...), 신라가 백제에 복속되어 있었다느니, 백제와 신라가 왜를 대국으로 섬겼다느니 하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멀리 중국에서 입수한 불분명한 소식들을 쓴 것'''으로, 특히 괴상한 뜬소문이 많은 신라의 경우, 6세기 중반 제24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기 이전까지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황해]]에 항구가 없어, 중국과 교류한 역사가 삼국 중 가장 짧았다.[* 몇 차례 고구려나 백제 사신단에 딸려 간 적은 있는데, 백제 사신은 신라 사신이 중국어를 모르는 점을 이용해 신라를 백제의 속국이라고 중국에 이야기하기도 했다. <[[양직공도]]>에서 신라(사라)가 백제 속국 중의 하나로 나온 것도 이런 일방적인 언플 때문이었다.] 때문에 《수서》의 기록은 한국 현지의 사서들이나 금석문과 상충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즉, 잘못 알려진 잘못된 사실들과 기록, 오해들도 전부 기록되어 있는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한 사서라고 보는 게 옳다. 이는 바다 건너의 반대편 《[[일본서기]]》도 마찬가지이다. 패잔병들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시절에 [[위(삼국시대)|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격파하자, 남쪽으로 도망간 이들이 옥저에 거주하다가 후에 더 남하하여 신라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모용선비족의 침입으로 동부여가 세워진 연유와 비슷하다.] 또 후에는 백제에게 고구려가 침략 당하자, 고구려인들이 신라로 도망갔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 출신의 사람이 진한에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추정컨데 이 기록들을 재편집하면서 마한=백제, 진한=신라로 확대해석하여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닐까 하는 해석도 있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서》의 내용들 중 일부는 오해와 오류를 바탕으로 기록을 했다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