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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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약 1600 ~ 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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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7 ~ 현재 ]




대원
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ᠦᠯᠦᠰ| 大元


1271년 ~ 1368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몽골 제국
북원
남송

이칭
예커 몽골 울루스(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ᠦᠯᠦᠰ(yeqe mongɣul ulus), 대원이라 불리우는 예커 몽골 울루스(ᠳᠠᠢ ᠦᠨ ᠺᠡᠮᠡᠺᠦ 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ᠦᠯᠦᠰ(dai ön qemeqü yeqe mongɣol ulus), 대원 예커 몽골 울루스(ᠳᠠᠢ ᠦᠨ 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ᠦᠯᠦᠰ(dai ön yeqe mongɣul ulus), 카안의 울루스(ûlûs-i qânî, ûlûs-i qâ’ân), 황원(皇元(huángyuán), 원조(元朝(yuáncháo)
위치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수도
다이두(칸발릭) / 샹두(상도)[1] (1271 ~ 1368)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ᠬᠠᠭᠠᠨ)(황제)
국성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
주요 카안
세조 쿠빌라이,(1260~1294),
성종 테무르,(1294~1307),
인종 아유르바르바다,(1311~1320),
혜종 토곤테무르,(1333~1368),
언어
중세 몽골어, 중세 중국어, 티베트어
문자
몽골 문자, 파스파 문자, 한자
종교
티베트 불교, 대승 불교, 유교, 백련교
민족
몽골족, 한족, 고려인, 후이족, 티베트족, 색목인, 여진족
통화
교초(交鈔) 등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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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년 고려 쌍성총관부 설치
1267 ~ 1273년 양양 공방전
1271년 건국
1274, 1281년 일본 원정
1275 ~ 1295년 마르코 폴로, 원 체류
1276 ~ 1282년 시리기[1]의 반란
1279년 남송 멸망, 천하 통일
1280년 곽수경, 수시력 편찬
1284 ~ 1287년 대월 원정
1285 ~ 1301년 카이두의 반란
1287년 나얀의 반란
1292 ~ 1293년 자바 (인도네시아) 원정
1307년 화림행성 설치
1310년 오고타이 칸국 해체
1314년 과거제 실시
1323년 남파의 변
1328년 양도전쟁
1329년 천력의 변, 문종 즉위
1351년 홍건적의 봉기 시작
1361년 백련교 중심의 반란
1368년 지정 원년 1월 원 선인보효황제 수도 대도에서 도망
1368년 멸망
1388년 북원 멸망


1. 개요
2. 소개
2.1. 역사
2.2. 사회
2.3. 행정
2.4. 문화
3. 황실
3.1. 역대 황제
3.2. 계보도
3.3. 추존 황제
4. 미디어에서
5. 여담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271년부터 1368년까지 97년간 몽골 제국중국 대륙(중원)을 지배, 통치하는 시기를 말한다. 수도는 칸발리크 (대도).


2. 소개[편집]


아시아의 역대 국가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한다. 청나라의 영토보다 더 넓다고 보기도 한다. 참조

원나라는 97년간 지속되어 오래 가지는 못했는데, 애초에 군사력만으로 세워진 나라여서 과거 로마 제국이나 중화권 국가들과는 달리 소프트 파워가 부족했고, 지배계급 상당수가 문맹이었으며[2],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애당초 오래 갈 수 없었다.[3] 게다가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한 중세 흑사병까지 돌아서 결정타를 먹였다.[4] 또한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흑사병에 의해 원의 인구가 급감한 것은 아니며, 이미 흑사병이 유행하기 전에 몽골의 잔혹한 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 이미 인구가 많이 감소한 상태였다. 여기에 사치를 일삼는 몽골 지배층의 과도한 수탈, 이에 따른 하층민들의 궁핍, 사회 체제의 모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다른 왕조들과 달리 이 왕조는 현재도 후신을 자칭하는 민족이 독립 국가를 유지하는 데다[5]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와 달리 한족을 노골적으로 노예 취급했기 때문에[6] 몽골의 할하 몽골인들은 이 시기의 중국몽골식민지로 평가한다.

그에 반해 중국칭기즈 칸을 세계를 지배한 중화 몽골의 대영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우면서 본인을 중화 황제라고 칭했고 본격적으로 한족화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또한 중국 내몽골 지역의 차하르 몽골족도 원나라를 몽골족이 중심이 된 중국 왕조라는 중국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7]

하지만 원나라 지배층이 한족화되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사실과 다르다. 원나라 지배층은 계속 변발과 자신들의 관습과 문화를 유지했다. 심지어 그들은 새로운 수도에 중국식 궁궐을 지었지만 이는 한족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였으며, 실제로 원나라 황제들과 지배층들은 여전히 게르에서 생활했다.[8] 물론 원나라를 세우고 몽골 지배층들의 생활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이는 한족화라기보다 원래 물욕이 강했던 몽골인들의 습성이 정복을 통해 극대화되며 사치에 탐닉했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그들은 유교, 도교 등 중국 교유의 사상과 문화를 접하기는 했지만 이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중국 정복 후 접하게 된 티벳 라마교에 심취하는 등 중국 한족 문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변해갔다. 애초에 유목민의 문화는 유교로 대표되는 정주민, 농경민의 문화와 너무 달랐고 정반대라 할 만한 요소가 많았다. 충, 효, 분수에 맞는 행동 등 유교의 질서는 그들로서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철저히 힘의 논리에 따라 행동하고 막내아들에게 가문을 물려주는 말자상속 전통이 있는 그들에게는 연장자를 우대하고 장남을 우대하며 명문에 따른 충성을 강요하는 유교는 이해하기 힘든 문화였고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몽골 제국의 제5대 쿠빌라이 칸이 국명을 중국식인 대원(大元)으로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국호는 주역의 건원(乾元)을 설명하는 대재건원 만물질시(大哉乾元 萬物質始, 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의 시작이로다.)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9]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중원 왕조로서의 전환은 아니었고, 서역의 4대 칸국[10]을 포함한 몽골 제국의 명목상 대칸으로서의 정체성도 계속 유지했다.[11][12]

중세 몽골어로 예해 몽골 올로스라고 불렀으며, 이는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이라는 뜻이었다. 황성은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

남송 등을 정복해 중국을 통일했고, 고려를 침공해 부마국으로 만들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일본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지로 쳐들어갔다가 태풍과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후퇴하기도 했다. 잘 안 알려졌지만 아이누가 살던 사할린을 침공하기도 했다.

명나라에 의해 중원에서 추방된 이후 만주 북부와 내몽골에서 북원으로 이어졌다. 북원은 겨우 3대에 천원제가 대칸위를 조리그투 칸에게 찬탈당하였는데, 이때 실질적으로 "원나라"로서는 멸망한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몽골"로서는 이후 한참 더 존속하다가 청나라에게 내·외몽골이 차례로 복속되었다.

한족을 정복 왕조 내의 다른 백성들처럼 대하지 않고 하층 계급[13]
【고려사 세가 기사 】
몽골은 고작 병졸들의 첩을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도감 외에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관청도 두었는데, 훗날 귀부군행빙별감(歸附軍行聘別監)으로 명칭이 바뀐다.">[14]으로 강제 편입시킨 건 이 왕조가 유일하며, 또한 역대 중국 통일 왕조 중 한민족 전체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간접적으로 통치했던 왕조이기도 하다.

종교는 티베트 불교였는데 라마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티베트 불교는 동아시아 국가들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성행한 밀교와는 전혀 다른 후기 밀교였고, 탄트라 좌도 밀교였다. 티베트 불교(후기 탄트라 좌도 밀교)는 한국, 중국, 일본에는 전파된 적이 없는 종교였는데, 딱 원나라 시기에만 중국인들에게 전파되었다. 원나라의 경우 중국 대륙에 존재한 몽골계 국가였기 때문에 당시 중국에 티베트 불교(좌도 밀교)가 성행하였고, 원나라가 사라지자 중국에서 티베트 불교도 사라졌다가, 나중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몽골인티베트인이 중요한 대접을 받았다 보니 다시 중국에 티베트 불교가 활성화되었다.


2.1. 역사[편집]


1259년 몽골 제국의 제4대 칸 몽케 칸이 사망하고 그의 동생들인 쿠빌라이아리크부카가 다음 대칸 자리를 두고 내전을 벌이게 된다.

1260년 쿠빌라이가 스스로 대칸을 칭했고, 1264년 아리크부카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정식으로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이 내전의 여파로 몽골 제국은 일 칸국, 우구데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킵차크 칸국과 같은 4칸국, 그리고 쿠빌라이의 원나라로 분열되어 버린다.[15]

쿠빌라이 칸은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교체하고 원나라 초대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그 이전인 1267년부터 남송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1276년 남송의 수도 임안을 함락시켰고 1279년 애산 전투에서 남송의 잔당세력을 정리하면서 중원을 완전히 정복하게 된다.

쿠빌라이 칸은 차남 칭김을 황태자로 임명했으나 칭김이 사망하면서 그의 삼남 '테무르'를 황태손으로 세웠고 1294년 쿠빌라이 칸의 뒤를 이어 테무르가 원 2대 황제 성종으로 즉위한다.

성종은 아들 '테이슈'를 황태자로 임명했지만 테이슈가 요절해버리고 1년 뒤인 1307년 성종도 사망하면서 이후 원나라는 25년 동안 9명의 황제가 연달아 즉위하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성종이 죽자 그의 황후 '불루간'이 성종의 사촌동생 '안서왕'을 다음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나 이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귀양을 가있던 성종의 조카들인 형 카이산과 동생 아유르바르와다에게 거사를 일으킬 것을 부추겼고 수도 대도에 먼저 도착한 아유르바르와다가 블루간과 안서왕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왕족들 대부분이 카이산을 지지하였고 그의 군사력도 막강하였기에 결국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형 카이산에게 제위를 양보하여 1307년 카이산이 원 3대 황제 무종으로 즉위한다. 무종은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제로 책봉하고 자신이 사망하면 제위를 물려줄 것을 약속하였고 4년 뒤에 무종이 사망하자 1311년 아유르바르와다가 원 4대 황제 인종으로 즉위한다.

인종은 자신이 제위를 받는 조건으로 자신이 죽으면 황위는 형 무종의 아들이 잇기로 약조하였으나 인종은 자신의 어머니 흥성태후와 결탁하여 무종의 장남 '쿠실라'와 차남 '투그테무르'를 추방하고 자신의 아들 '시데벨라'를 황태자로 임명하였다.

1320년 인종이 붕어하고 시데벨라가 원 5대 황제 영종(英宗)으로 즉위한다. 영종은 인종 때부터 전횡을 일삼던 할머니 '흥성태후'와 그녀의 세력들을 숙청하고 한화정책 추진으로 황권강화에 힘썼으나 이에 대한 반발에 부딪혀 1323년 시해당하고 만다.

영종이 죽자 흥성태후 일파 중 하나였던 테시는 쿠빌라이칸의 증손자이자 칭김의 장남 카말라의 아들이었던 '예순테무르'를 다음 황제로 추대하였고 그가 원 6대 황제 진종 태정제이다.

1328년 태정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장남 '라기바흐'가 8세의 나이로 원 7대 황제 천순제가 되는데 이를 두고 원조정은 천순제를 지지하는 상도파와 황위를 무종의 후손이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엘테무르를 주축으로 한 대도파로 나뉘게 된다. 대도파는 무종의 차남 투그테무르를 황제로 추대하였고 1328년 원 8대 황제 문종이 되었다.

상도파와 대도파 두 세력은 전면전을 벌여 상도가 점령되고 천순제가 실종됨으로써 문종의 대도파가 승리하게 되었으나 문종의 형 쿠살라가 군대를 이끌고 오자 위기감을 느낀 문종이 쿠살라에게 제위를 양보하여 1329년 쿠살라가 원 9대 황제 명종으로 즉위한다. 명종은 무종 때와 같이 자신이 죽으면 다시 동생에게 제위를 물려준다고 약조하였고 6개월 뒤 사망하자 다시 문종이 복위하게 된다.

1332년 문종이 붕어하면서 형 명종의 아들이 대를 이으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엘테무르는 이를 무시하고 문종의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하려 하였다. 하지만 황후의 반발로 결국 명종의 차남 6살 '린친발'이 원 10대 황제 영종(寧宗)으로 즉위한다.

하지만 영종이 2개월만에 사망하면서 고려 대청도로 유배를 가있던 명종의 장남 '토곤테무르'가 1333년 원 11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혜종으로 즉위한다.

혜종이 즉위하면서 황제가 연달아 교체되는 혼란기는 종식되었으나 이미 원나라는 권신들의 권력다툼, 홍건적과 같은 한족들의 반란, 흑사병의 창궐 등으로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결국 1351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홍건적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1368년 명나라 건국을 선언한다. 주원장은 명나라 건국 직후 대규모 북벌를 단행하여 원의 수도 대도를 함락시켰고 혜종은 북쪽 몽골 고원으로 달아나면서 북원이 성립되었다.

북원은 중원을 되찾기 위해 명과의 전쟁을 끊임없이 벌였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북원의 제3대 황제 천원제에게서 황위를 찬탈한 조리그투 칸이 원나라의 황제직을 버리고 몽골 대칸의 지위만 잇기로 하면서 1388년 원나라는 완전히 멸망해버리고 만다.


2.2. 사회[편집]


정복활동 초기, 몽골 제국은 한때 실제로 한족들을 모두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아 논밭을 목장으로 바꿀 계획이 있었다. 그러자 야율초재의 "근데 얘들 죽이면 세금은 어디서 걷어요?" 이 한마디에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중국 쪽에 있긴 한데, 스기야마 마사아키 같은 학자들은 거짓말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몽골족들도 세금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도시 한두 개도 아니고 화북의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는데 그런 계획을 했을 리가 없었다.[16] 목초지 발언은 몰라도, 일단 야율초재에게 거란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들을 모두 죽여주겠다고 한 말은 진심으로 보인다.


원나라의 통치는 영주분봉제로 기본적으로 봉건적 신분제 사회였다. 원나라는 몽골인 → 색목인 → 한인 → 남인 이렇게 계급순으로 구성된 신분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때 한족들은 3~4 등급의 피지배층으로 분류되어 생활하였다.[17] 그리고 원나라에서는 호적상 이들의 신분층을 계관호(係官戶)와 투하호(投下戶)로 나누었는데, 투하호는 귀족에 사적으로 배속된 백성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양민층이었으며 노예층은 '구구'라고 따로 불리었다. 원나라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켜 양민층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 외에는 대략 다음과 같다.

  • 원나라의 법률은 "'노예[18]는 물건과 같다"'라고 규정했는데, 주인은 임의로 노예를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었다. 또한 원나라에는 인시(人市)라는 이름의 노예 시장이 존재했는데, 여기서 노예들을 사고 팔 수 있었다. 원나라의 중급 관리는 백 명 이상의 구구(노예)를 보유했고, 대사장(大使長, 노예주)의 구구는 왕왕 수천수만이었다. 쿠빌라이 칸의 총신인 아하마는 7,000여 명의 구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 20가구를 1갑(甲)으로 편성하였다. 각 갑마다 한 명의 갑주(甲主)를 두었다. 갑주는 몽골인으로, 20가구가 1명의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19]

  •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20]은 몽골 병사의 몫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중국 민속학 개척자인 주작인 같은 학자는 절강성 규방 풍습을 논하면서 초야권과 연결짓기도 하였다.

  •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회를 열지 못하게 했다. 열더라도 대부분 어용 집회.
    •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다. 10가구에 하나의 부엌칼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21]. 무술을 배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몽골족의 동의를 받은 후에 가능했다.

  • 노예는 사유물로 그 재산은 주인 마음대로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

  • 전부는 아니지만 노예인 한족에 한해 전통적인 한족 성명을 가질 수 없었다. 출생 일자를 가지고 이름을 삼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주중팔.

  • 과거제도에 있어서도 계급별로 할당량을 정해두어 최하계급인 남인의 경우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 《몽올아사기(蒙兀兒史記)》에서도 4등인제가 언급되고, 서방 수도사 오도릭의 글에도 한족을 차별하는 정책적인 도구인 보갑제가 등장한다.

또한 직종에 따라서 10등급으로 나누었다. 관리, 아전, 도사, 승려, 의사, 기술자, 목공, 창녀, 유생, 거지가 그 순서다.[22] 또 원대 중기부터 과거가 시행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유학적 지식보다 실무 행정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실무 중시 경향은 원나라뿐만 아니라 금나라와 신법 이후의 송나라에서도 그랬다.[23]

《진여록》(燼餘錄)에 의하면, '원나라가 개국한 뒤에 20가구를 ‘갑’으로 개편하고, 젊고 튼튼한 사람을 ‘갑주’로 하였으며 의복, 음식을 하고자 하는 대로 다 하였다. 동자나 소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칠경록》에 의하면 '몽골인과 색목인의 포로 중 남자는 '노'라 하였고 여자는 '비'라 하였다. 이들을 통칭하여 구구라 하였다.' 왕서노의 《중국창기사》에 의하면 원나라때 거의 모든 한인이 노예였고 외족(몽골/색목인 등)에 의한 한족 여성 수탈은 전 중국에 두루 퍼졌다고 한다.

홍익희 세종대 교수의 책에서 초야권에 대한 글이 나온다.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중국학자 신력건도 초야권을 말하고 있다. 신력건의 원조에 대한 글

일부 중국 학자들에 의하면 초야권이라는 법령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원나라 통치 기간 동안 카안들은 오히려 순결을 강력하게 장려했다고 한다. 당시 중원 지역에 온 몽골인은 겨우 30만 명에 불과했고, 이들은 주로 군인인지라 편제 유지에 집중해야만 했으며 나머지 지역으로 흩어진 몽골인들의 숫자도 매우 적었다는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 초야권에 대한 중국측 논의1 초야권에 대한 중국측 논의2

강남 지역에서는 남송대부터 터를 잡은 일부 지주층들이 원대에 그 기득권을 인정받아 자치를 행했다는 설도 있다. 이들은 관할 구역 내에서 봉건 영주처럼 군림하면서 몽골 정부에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주민을 농업 생산이나 산업 일꾼으로 부리는 한편 향촌 사회를 유지하며 과거제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원말 한족 군웅으로 궐기하여 원나라 붕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중국 역사의 영어권 권위자인 미카엘 딜런 교수에 의하면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한족들이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몽골 문화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해 수백만 명의 몽골인 남성들과 색목인 남성들을(Israeli, Raphael (2002). Islam in China.) 한족 여성과 강제결혼을 시켰을 정도라고 한다. # 반대로 몽골인 여성들과 색목인 여성들 또한 한족 남성과 강제결혼을 당했다.

서울대학교 김호동 교수의 논문 《팍스 몽골리카와 중국》에 의하면 일본학자 舩田善之가 '색목인'이라는 명칭을 연구하면서 색목인이라는 명칭은 한족을 차별하기 위한 구분이 아닌 구별을 하기 위함이라 하면서 나아가 4등인제에 오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호동 교수는 이 설에 호의를 보이면서도 '이러한 견해는 이제까지 색목인에 대한 이해가 몽골 지배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의 영향을 받은 것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이라는 구분이 처음부터 민족 차별을 위해서 도입된 분류는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한인이나 남인에 비해 색목인들에 대해 우대정책을 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며 한족이 차별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원말, 주원장을 비롯한 여러 실력자들이 강남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원나라를 칠 여력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유복형이나 조양필 등 한족 간부들도 원나라 황실을 위해 많이 봉사하곤 했다. 특히 유복형은 고려인인 홍다구와 함께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선봉장으로 섰다.

또한 당시 원나라의 인구비를 살펴보면 몽골인 100만 명, 색목인 수백만 명, 한인 1,000만 명, 남인 6,000만 명가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몽골군이 강하다고는 해도 몽골인과 색목인으로 6,000만 명을 지배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 제3계급인 한인을 활용했다. 고려인은 3계급에서 우대받은 편이라(처음부터 우대받은 건 아니었고, 고려가 부마국이 되고난 뒤 세월이 지날수록 지위가 나아졌다.) 고려인만을 대상으로 뽑는 과거제도(괴과-魁科)를 시행하기도 했고, 여기서 장원급제한 전원발[24] 같은 경우는 병부상서까지 오르는 일도 있었다. 그 밖에 이곡, 최해 같은 이들이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는 등 고려인 관리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사서를 보면 몽골인들이 군사 부문 외엔 행정에서 별로 한 것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점령지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 상당히 위태로웠다. 비유하면 군대는 있으나 경찰이 없어서 몽골인이 적대적인 점령지에 소수로 여행을 다니기에는 매우 위험했다. 조공을 바치면서도 자기들끼리는 대놓고 몽골인을 '타타르'라고 부르며 경멸한 러시아 같은 지역들은 몽골인을 죽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안전책도 없이 갔다가는 사망 확정이었다. 몽골 제국을 고평가하는 학자들은 "처녀가 금화 자루를 갖고 홀로 카라코룸에서 사라이까지 여행해도 아무 일이 없었다.'라는 기록만 갖고 몽골의 치안이 좋았다고 주장하나, 이 기록은 몽골 제국 측에서 기록한 것이고 역참들이 지키고 있는 대로에만 해당한 것이다. 유목민이 선조인 나라들을 봐도 특이한 케이스다. 물론 농경국가적 성격이 있는 경우다. 몽골의 경우도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만주족과 몽골인을 비교하면 몽골인 쪽이 밀리는데 사실 묶어서 분류하기에 원나라는 너무 특이한 나라다.

명목상으로는 몽골인이 중요한 행정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몽골 제국에서 여러모로 우대를 받던 색목인들의 기록에서는 잉여다. 물론 페르시아인처럼 몽골인들에게 털린 사람들도 있어서 폄하로 볼 수도 있으나 거란족인 야율초재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반론을 하려고 해도 몽골 출신의 학자나 심지어는 글을 제대로 알던 사람도 극히 적기 때문에 반론도 거의 불가능하다. 학문적 스펙이 뛰어나지 않았던 사람들도 좋은 결과를 낸 적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일단 학문을 알아서 학문적 능력을 기른 사람들이나 그렇고 몽골인들은 학문 자체를 모르니 답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수학적 업적을 남기려면 일단 학벌이 좋지는 않아도 수학을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몽골인은 자기가 직접 학문하는 것보다 다른 민족들을 이용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통수를 맞을 위험이 항상 있었다. 이런 문제점 때문이라도 메이저 민족들 중에서 유목민 출신 선조들을 가진 경우를 살피면 유목민들도 본인들이 어느 정도 학문에 관심을 갖고 국가를 운영하는데,[25] 특이하게도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자기가 직접 공부하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운영하던 국가였다. 그러나 각 지역에 동화된 이후에는 지역문화에 능통해진 몽골인들도 많으니 일반화는 다소 위험하다.

한편 유복형은 고려인인 홍다구와 함께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선봉장으로 섰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 중세사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프린스턴대의 Frederick W. Mote 교수에 의하면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몽골인들이 존재한 반면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더 많은 몽골인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


2.3. 행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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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중국 통일 왕조들 (명,청 제외) 중 가장 영토가 넓었지만 행정력이 가장 취약했다. 그야말로 군현제를 1,000년 전 봉건제로, 근세기 중앙집권국가를 중세 봉건제도로 되돌린 수준이었다. 허구한 날 주나라 시절 봉건제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유학자들의 꿈 실현 사실 이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원나라의 지방 행정 제도는 중서성이 승상부 역할을 맡아 전 지역을 총괄하고[26], 그 아래에 11개 행성을 하남, 강남, 섬서, 사천, 요양, 감숙, 운남, 영북, 정동[27]에 두어 지방을 통치했다.

그 지역의 3분의 1이 정복 활동 도중에 분봉된 왕공제후들 및 정복전쟁 당시 원나라에 붙은 군벌들의 영지가 되어 곳곳에 왕부가 설치되었다. 이들 지역에 대해 원 황실은 간섭은 할 수 있었어도 통치는 사실상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징세, 징병, 행정력 행사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하기 힘들어 중앙집권보다 봉건제에 가까웠다. 이건 현대의 기준에서 봐도 자치국이나 마찬가지다. 거기다 중서성 관할 지역에서도 왕공제후들 및 귀족들의 영지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거기다 정규군으로 화북에는 4개 몽골 도만호부,[28] 강남에는 22익, 후광 및 쓰촨 지역에 각각 6익의 한군 만호부[29]들을 배치했는데, 영지까지 분봉시켜놓고 지휘관은 세습이었다. 거기다 이들은 지방 행정 체계인 행성 밖에서 존재했다. 따라서 얼마 못 가 죄다 군벌화되었다.

황실 직할군은 시위 군단과 케식 합쳐서 1개 도만호부 수준이었다. 여기에 유목민 특유의 문화와 관료제의 미비 등으로 인하여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특히 더 낮았고, 이 때문에 다른 왕조들처럼 지방 세력의 발호를 억제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일은 쿠빌라이 칸이 남송 원정군을 장악하기 위해 이것저것 이권을 막 퍼줘서 가능했다. 쿠빌라이 칸은 왕공제후들의 자제들로 구성된 케식을 인질삼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원 황실은 이걸 통제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회를 열어 달랬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심심하면 반란과 쿠데타가 일어났다.

다만 행정이 미비했다고 하더라도 정보 연결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강남의 한족 부호층은 천자만 열 수 있는 과거 시험을 감히 열고 여기에 서생들이 많이 참여하는 걸 알고 있었으나 몽골 지배층은 이걸 그냥 일종의 유치한 코스프레쯤으로 인식했기에 너그럽게 웃으며 넘어가주는 대범함도 있었다. 걍퍅한 훗날의 청나라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진정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이런 과감한 관용이 멸망의 원인이라고 보는 엉뚱한 시각도 있으나, 청 말[30]과는 달리 원말 때는 유학적 사고로 무장하여 원나라에 충성하다가 죽어간 한족 지식인들도 생각보다 많았음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31] 이렇게 원나라에 충성한 한족들 중 살아서 몽골족과 함께 몽골 초원으로 도망친 이들은 몽골족에 동화되어 현대 몽골인의 조상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2.4. 문화[편집]


근본적으로 몽골 지상주의였으나 청나라처럼 한족의 문화를 탄압하지 않았기에 이 나라도 한족화는 피하지 못해 후대로 갈수록 몽골 귀족들이 중국식 문화에 젖어 몽골식 성명을 중국어로 치환했다. 물론 변발호복은 이 시기부터 북중국에 한해서만 강제했다는 말이 있으나 명목상에 불과했으며, 남중국은 사실상 한족 신사층을 중심으로 자치제를 유지해 터치도 안 하고 내버려 뒀다.[32]

이름만 중국식으로 바꾼 게 아니라 중국의 제도 등을 도입하고, 후대로 갈수록 중국색이 강해지게 되지만 다른 이민족 국가들에 비하면 그 강도가 약했다. 중국 특색을 지양하며, 몽골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골인의 숫자가 너무 적다보니 유지하기가 매우 까다로웠고 그 성격도 매우 이질적이라 오래가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그들의 문화는 그 시대를 지탱하는 데만 유효했다. 그나마 청나라의 만주족과 달리 그 정책 때문인지, 아니면 북방에 근거지가 건재해서인지 나라 자체는 망하지 않고 몽골 공화국으로 계승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물론 그전에 할하, 차하르, 부랴트, 오이라트 등 부족별로 분열되었고 외몽골은 청대에도 반 독립지역으로 놀았기 때문에 독립이 가능했으나 내몽골만주족과 일체화되어 현재까지 중국의 일부로 남아있고 부랴트 역시 일찍이 러시아인들에게 점령당해 자연스레 러시아화되었다.

물론 원나라가 남긴 문화적 영향도 있긴 하다. 아니, 꽤 많다. 대표적으로 매우 인기있는 중국인들의 간식인 북경 양꼬치가 바로 원나라와 명나라 때 북경에 잔류한 몽골인들에게서 유래한 것. 그리고 명나라 초•중기의 복식도 한동안 몽골식 복장의 영향을 받은 형태였고[33] 베이징의 지역색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줬으며 베이징의 여러 지명도 몽골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작곡가 가오샤오숭(高晓松)이 방송에서 베이징의 명칭이 촌스럽다는 말에 몽골인이 글을 몰라서 그랬다는 무개념 발언을 했다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변발과 모자는 청나라대에 널리 퍼졌지만 기원은 원대다. 소소하지만 휴지 문화 또한 원나라 때에 생겼다. 원나라 이전에는 일을 본 뒤 얇게 가공한 나무 조각으로 닦았다고 하며 또한 북방 중국인(북부 한족)의 혈통에는 적잖이 북방계(몽골) 혈통이 섞여있는데 몽골 통치하에 혼혈되어 태어난 것이다.

또한 원은 훗날의 명, 청과는 달리 기록 문화 자체에 관심이 적었기에 적어도 문자옥 같은 무시무시한 일은 자행한 바 없었다.[34]


3. 황실[편집]



3.1. 역대 황제[편집]


원나라 건국(1270년) 후의 군주들만 다뤘다. 그 이전과 이후의 칸들은 몽골 제국이나 북원 항목을 참고. 국성은 보르지긴(孛兒只斤)이다.

아래의 역대 황제란을 보면 알겠지만, 국가가 존속했던 97년(1271-1368) 중 첫 번째 쿠빌라이(25년)와 마지막 토곤 테무르(36년)를 빼고 나면 39년(1294-1333)에 황제가 9명이 있었던,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했던 막장 나라다. 평균 약 4년. 그마저도 13년 동안 재위한 2대 테무르를 제외하면 26년간 8명에 1대에 3년.

대수
묘호
시호/연호
칸호

연호
재위 기간
비고
1대
세조
성덕신공문무황제
세첸 칸
쿠빌라이
중통(中統, 1260~1264)
지원(至元, 1264~1294)
1260~1294
5대 대칸
2대
성종
흠명광효황제
올제이투 칸
테무르
원정(元貞, 1295~1297)
대덕(大德, 1297~1307)
1294~1307
6대 대칸
3대
무종
인혜선효황제
퀼뤼그 칸
카이샨
지대(至大, 1308~1311)
1308~1311
7대 대칸
4대
인종
성문흠효황제
부얀투 칸
아유르바르바다
황경(皇慶, 1312~1313)
연우(延祐, 1314~1320)
1311~1320
8대 대칸
5대
영종
(英宗)
예성문효황제
게게엔 칸
시디발라
지치(至治, 1321~1323)
1320~1323
9대 대칸
6대
진종
흠인대효황제
예순테무르 칸
예순테무르
태정(泰定, 1321~1328)
치화(致和, 1328)
1323~1328
10대 대칸
7대
-
천순제
라기바흐 칸
라기바흐
천순(天順, 1328)
1328
11대 대칸
8대
문종
성명원효황제
자야아투 칸
투그테무르
천력(天曆, 1328~1329)
1328~1329
12대 대칸
9대
명종
익헌경효황제
후투그투 칸
쿠살라
천력(天曆) : 1329년
1329
13대 대칸
복위
문종
성명원효황제
자야아투 칸
투그테무르
지순(至順, 1330~1332)
1329~1332
복위
10대
영종
(寧宗)
충성사효황제
린칠반 칸
린칠반
지순(至順) : 1332년
1332~1333
14대 대칸
11대
혜종[35]
선인보효황제 /
순황제[36]
우카아투 칸
토곤테무르
원통(元統, 1333~1335)
지원(至元, 1335~1340,
1368~1370)
지정(至正, 1341~1368)
1333~1368
15대 대칸


3.2. 계보도[편집]




3.3. 추존 황제[편집]


묘호
시호
성명
비고
희조(熙祖)
의현황제(毅玄皇帝)
보돈차르(孛瑞察兒)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9대조
선조(宣祖)
공철황제(功哲皇帝)
카불(合不勒)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증조부
열조(烈祖)
신원황제(神元皇帝)
예수게이(也速該)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생부
목종(穆宗)
도녕황제(道寧皇帝)
주치(朮赤)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장남
성종(聖宗)
충무황제(忠武皇帝)
차가타이(察合台)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차남
예종(睿宗)
인성경양황제(仁聖景襄皇帝)
툴루이(拖雷)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4남
유종(裕宗)
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
칭김(眞金)
성종 추숭, 세조의 차남
순종(順宗)
소성연효황제(昭聖衍孝皇帝)
다르마발라(答剌麻八剌)
무종 추숭, 무종, 인종의 부친
현종(顯宗)
광성인효황제(光聖仁孝皇帝)
카말라(甘麻剌)
진종 추숭, 진종의 부친


4. 미디어에서[편집]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칭기즈 칸이 나올 때 후일담으로 잠깐 언급되거나, 전성기인 쿠빌라이 칸 시대에 활발한 해외원정에 딸려서 언급되거나, 말기에 개판오분전이 되어 국가 막장 테크를 타는 상황이 나오거나 셋 중 하나다. 대한민국의 경우 대몽항쟁기의 사건이 사극 등에 자주 나온다.

  • 신의에서는 공민왕 때까지의 고려왕들이 전부 줄줄이 무능했다는 이유로 원나라가 고려를 합병하려고 했다.

  • 기황후에서는 기황후, 고려의 가상왕 왕유, 토곤 테무르(혜종)의 관계를 초반에 가상적으로 설정한 스토리로 시작하여 이후 원나라에서의 스토리를 다룬다.

  • 중국 드라마인 건원풍운(국내명은 칭기즈 칸의 후예)에서 쿠빌라이 칸에 대해 다루었다.

  • 김용의 문학작품인 의천도룡기에서 원나라의 말기의 주원장을 비롯한 대대적인 한족들의 대몽 항쟁이 그려진다. 이를 진압하려는 원나라 측 인물로는 히로인 조민과 그녀의 아버지 차칸 테무르 등이 등장한다.

  • 미국 드라마 마르코 폴로도 이 시대가 배경. 다만, 실제 역사와 안 맞는 부분이 많으니 드라마 내용을 사실로 판단하지는 말자.


5. 여담[편집]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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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칸발리크는 겨울 수도, 새너두는 여름 수도로서 기능하였다.[2] 원나라 황제들이 문맹이라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는 오고타이 칸 때까지만 그랬고, 그 이후부터는 원나라도 중국 문화를 열심히 받아들여서 적어도 황제들은 모두 한문에 능했다. 문종(원) 같은 경우는 스스로 한시를 지을 정도로 문인이었다.[3] 같은 이민족 통일 왕조인 청나라는 건국 초부터 황제들이 한화되기 시작하면서 만주족 황제부터 만주족 관료들까지 전부 소프트파워가 생기고 268년 동안 지속되었다. 단, 청나라 역시 말기까지 만주족과 한족의 결혼금지, 한족의 만주 이주 금지, 한족의 고위직 진출금지, 한족 여자는 황후가 될 수 없는 등 어떤 면에서는 원나라보다 더한 면도 있었다.[4] 원나라보다 단명한 세 왕조는 존속시간이 고작 10~30여 년 수준으로 급이 다르다. 게다가 측천무후의 무주나 왕망의 신나라는 너무 단명해서 아예 왕조로 쳐주지도 않는다.[5] 외몽골의 할하 몽골족 한정. 내몽골중국, 부랴티아러시아의 소수민족으로 잔존하고 있는 형편이며 내몽골인의 경우 내몽골 내에서조차 소수다.[6] 물론 후대의 정복 왕조인 청나라에 비해서는 한족들을 노예 취급하면서도 대단히 자유방임적이고 관대한 편이었다. 그들의 문화와 의식을 존중해주고, 한족들이 치르던 과거 시험 의례를 마치 현대의 코스프레 의식으로 보듯 몽골족들은 즐겨보면서 좋아했다. 그만큼 타민족의 문화에도 관심이 많으면서 관대한 나라가 원나라였다. 정확히 말하면 한족의 취급이 대중에 의해서 과장된 게 있다.[7] 사실 내몽골인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 아무리 내몽골이 중국 내에서 (심지어 내몽골 자치구 안에서도) 다수 민족이 아니라고 한들, 내몽골 자치구의 몽골족 인구가 민족불문 외몽골 전체 인구보다 많다. 외몽골 단독으로 몽골제국의 계승자가 되면 그 외몽골을 압도하는 내몽골 몽골족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이 된다. 게다가 내몽골의 몽골족인 차하르인은 몽골의 할하인 및 러시아의 부랴트인, 오이라트인과 원래 사이가 나빴다. 유목민에게 부족이 다르단 건 그냥 다른 나라라는 것이다. 현재도 내몽골인과 외몽골인의 키배는 살벌하다.[8] 원나라 황제의 경우 궁성에 게르를 설치하고 여기서 살았다.[9] 비슷한 이유로 북위를 세운 탁발씨도 한화 개혁을 추진할 때 황족의 성을 원씨로 선택했다.[10] 일 칸국, 킵차크 칸국,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11] 그러나 명목상으로만 몽골 제국을 아우르는 대칸이지 실질적으로는 오고타이 칸 사망 이후 몽골 제국은 4개의 칸국으로 분열되어 사실상 독립되거나 분열되어 떨어져나갔고 각자 멸망하는 시기도 다르다. 킵차크 칸국은 현대 러시아의 전신이 되는 모스크바 공국에게, 일 칸국은 이집트 맘루크 왕조와 전쟁을 벌이다가 국력을 소진하여 내부 분열로 멸망하고 티무르 제국에게 흡수, 차가타이 칸국은 이슬람 세력과 몽골 기득권 간의 대립으로 혼란이 발생한 와중에 티무르 제국에게 역시 흡수, 멸망당하고 원나라도 명에게 멸망함으로써 몽골 제국의 멸망은 청나라 만주족 황제들이 옥새를 가져간 17세기로 보긴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 실질적으로 멸망했다고 봐야 한다.[12] 그래도 원나라 우위의 몽골 제국 연대는 유지되었다. 각 칸국이 붕괴되기 전까지 지배층 교류도 활발했으며 원황제의 통행증만 있으면 명목상 몽골제국 영역을 안전하게 여행이 가능했다.[13] 다만 의외로 원명 교체기에 원나라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한 한인 사족들이 굉장히 많았다. 중앙의 조정이 몽골인과 색목인 위주로 구성되었던 것과 달리 사실 원나라의 지배체제는 기본적으로 향촌 자치적 성격이 매우 강했다. 즉, 자신들에게 바칠 것을 바치면 향촌 세력가들이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향촌을 어찌 다스리든지 방관하는 자유방임적인 통치체제였던 것이다. 향촌의 사족들이 사실상 동네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원나라가 대도를 버리고 초원으로 후퇴한 시점에서도 끝까지 따라가서 충절을 지킨 한인 관료들이 많았고 원나라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족들이 많았다.[14] 다만 그것보다는 의외로 몽골인들이 자기들 마음에 든 사람들에겐 대우를 해줘서 그렇다. 그래서 뭔가를 받은 사람들은 의외로 충성했다.
【고려사 세가 기사 】

원(元)에서 양중신(楊仲信)을 파견하여 폐백(幣帛)을 가지고 와서 귀부군(歸附軍)(몽골에 귀부한 남송군) 500인의 아내를 구하게 하였다. 왕이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인 정랑(正郞), 김응문(金應文) 등 5인을 여러 도(道)로 파견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2년(1276), 3월 29일 ㅡ

몽골은 고작 병졸들의 첩을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도감 외에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관청도 두었는데, 훗날 귀부군행빙별감(歸附軍行聘別監)으로 명칭이 바뀐다.
[15] 물론 원나라의 영향력이 명목상으로나마 몽골 제국 영토 전체에 미치기는 하였다.[16] 칭기즈 칸은 생전에 몽골족이 아닌 이민족이라도 자신을 따른다면 관대하게 받아주었다. 이는 단순히 창업군주로서의 비범함뿐만 아니라 건국 초기에 국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야율초재가 칭기즈 칸에게 임관했을 때에는 엄연히 송나라가 건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족을 모두 죽이고 비옥한 농토를 목초지로 바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알아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었고, 몽골족들은 그런 것을 모를 정도로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다.[17] 여진인이나 고려인은 한인 계급으로 분류되었다.[18] 구구(驅口)라고 불렀다.[19] 이 갑주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최우선적으로 즉결 처분되었다.[20] 여자 노예가 결혼할 경우 영주가 먼저 여자와 동침하는 권리.[21] 중국 요리들 중에서, 커다란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칼로 조금씩 잘라가면서 나온 조각을 삶아서 면을 만드는 방식인 도삭면이 이때 처음 나왔다. 요리용이라도 함부로 칼을 소지했다가는 목이 달아났으므로, 굴러다니는 쇳조각으로 밀가루 반죽을 잘라서 면을 만들어 먹던 것에서 유래했다.[22] 이것은 정사초의 《대의략서》란 글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 정사초가 반몽감정을 아주 강하게 가졌던 전형적인 인종차별주의자라 《대의략서》란 글 자체에 차별주의적인 논조가 스며들어있어 단지 제색호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 사회적 신분의 서열로 탈바꿈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출처: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김호동).[23] 잡과 등이 이에 해당한다.[24] 나중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려로 귀국할 때 당시 황제인 순제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고려의 공물을 줄여달라고 답했고, 황제가 이를 들어주어 고려의 공물 상납이 크게 줄어들었다.[25] 당장 중국의 후대 유목민계 왕조인 청나라도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적극적으로 학문을 연구했다. 인도의 무굴 제국과 유럽 및 중동의 오스만 제국도 마찬가지였으며, 원나라가 특이한 케이스였다.[26] 사실 중앙의 중서성은 지방의 행성들과 동일하게 수도 인근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던 곳으로 원칙상 중서성의 승상과 행중서성의 승상은 '동렬'에 위치했다. 그러나 울루스의 수장인 '카안'을 바로 옆에서 보좌하기에 어느 정도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다.[27] 한국사에서 나타나는 '정동행성'을 말한다. 정동행성은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한 기관이었지만 2차례의 일본 정벌이 무산된 이후에도 존치되어 고려 내정을 간섭하는 기관으로 기능했다. 이름에서 보이듯이 이 기관은 원나라의 지방 관청 형식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한반도가 원나라의 영토였는지 아니면 고려가 그대로 존속했으되 심하게 간섭만 받았는지 여부를 논할 때 정동행성의 성격은 매우 중요하게 거론된다.[28] 만호들을 총괄하는 군단급. '몽골'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이들은 몽골인이었다. 병력 정수 60,000~70,000명.[29] 1익 = 만호. 단, 사이 사이에 '상만호'라는 도만호부의 절반 수준의 크기를 가진 부대도 있었다. '한군'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계급상 3번째인 한인으로 구성되었다. 원나라는 남인들을 경계하여 군대에서 이들을 철저히 배제했다.[30] 물론 이때도 청나라에 충성하다가 죽어간 한족 지식인들은 엄연히 존재했다. 단지 원나라만큼은 아니었을 뿐... 청나라도 원나라와는 다른 쪽에서 한족들에게 관용을 베푼 측면이 있으며, 특히 청나라 말기에는 청나라 황실이 외세를 막기 위해 한족들을 고위직에 대거 등용하여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한족들을 늘려나갔기 때문이다.[31] 애당초 원나라의 지배층은 자기들이 원하는 이익만 챙기면 남방의 한족들이 자기들끼리 뭘 어쩌고 지내든 별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야말로 자유방임적인 향촌 자치가 보장되었던 것. 이후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이갑제를 도입해서 향촌을 강력하게 통제하려들었던 것과 비교해보라.[32] 다만 훗날의 청나라는 강남의 한족들까지 호복과 변발을 강요하고 안 하면 참수까지 시킬 정도로 의무화했고 이를 멸망할 때까지 유지했다. 어찌나 심하게 탄압했는지 태평천국 운동 때는 한족들이 변발을 자르기는 했으나 이미 상투가 실전되어 어떻게 묶을지를 몰라서(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산발을 하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다행인 것은 청나라 때에도 그나마 유학자들과 도사들은 상투를 트는 게 가능했다.[33] 정확히 고려양의 영향을 받은 몽골의 복식이었으며 이것도 명나라 홍치제 시기에 그의 선포로 한족 복식이 전통적인 한푸로 바뀌게 된다(15세기 후반).[34] 원은 훗날 쿠빌라이 칸에 의해 파스파 문자를 새로 만들어야 했을 정도로 기록 문화가 약했다.[35] 북원이 내린 묘호. 말그대로 묘호이기 때문에 묘가 없는 명나라에서는 따로 묘호가 없다.[36] 선인보효황제는 북원이 내린 시호이며, 태조 주원장은 하늘의 순리대로 몽골로 물러가면서 자신에게 황위를 양위했다며, 순황제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원순제가 바로 이 시호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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