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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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의 판본. 게이초 4년(1599) 발행.
1. 개요
2. 구성
3. 특징
3.1. 고사기와의 비교
3.2. 내용
4. 평가
4.1. 위서가 아니다
4.2.2. 한국 사학계의 입장과 연구관점
5. 언어학적 가치
6. 국내 번역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본서기(日本書紀[1])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로, 후대작인 《속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도네리 친왕(舎人親王)이 덴무 덴노의 명을 받아 편찬하기 시작하여 720년(요로 4년)에 완성한 칙찬 역사서이다.

일본에서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를 아울러 기기(記紀)라고 부르기도 한다.[2] 일본서기는 일본의 6대 정사집인 육국사(六国史: 릿코쿠지)[3] 가운데 첫 번째 역사서이며, 중국식 한문체[4]에 편년체로 기록했고 권수는 총 30권이다.


2. 구성[편집]


일본서기(日本書紀)

[ 펼치기 · 접기 ]

||<-2><tablewidth=100%><tablebgcolor=#AF001F><width=33%> 1권 「신대(神代) 상」 ||<-2><width=33%> 2권 「신대(神代) 하」 ||<-2><width=33%> 3권 「신무기(神武紀)」 ||
||<-2><rowbgcolor=#fff,#191919> 신대 ||<-2> 신대 ||<-2> 언화화출견 ||
||<-2> 4권 「수정, 안녕, 의덕, 효소, 효안, 효령, 효원, 개화기」 ||<-2> 5권 「숭신기(崇神紀)」 ||<-2> 6권 「수인기(垂仁紀)」 ||
||<-2><rowbgcolor=#fff,#191919> 결사팔대 ||<-2> 어간상존 ||<-2> 활목존 ||
||<-2> 7권 「경행, 성무기」 ||<-2> 8권 「중애기(仲哀紀)」 ||<-2> 9권 「신공기(神功紀)」 ||
||<-2><rowbgcolor=#fff,#191919> 대족언존 · 성무천황 ||<-2> 중애천황 ||<-2> 기장족희 ||

추후 추가 예정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F001F><tablebgcolor=#AF001F>
}}}




  • 권1(卷1)
  • 권2(卷2)
  • 권3(卷3)
    • 신무기(神武紀) - 신일본반여언천황(神日本磐余彦天皇)
  • 권4(卷4)
    • 수정기(綏靖紀) - 신정명천이천황(神渟名川耳天皇)
    • 안녕기(安寧紀) - 기성진언옥수간천황(磯城津彥玉手看天皇)
    • 의덕기(懿德紀) - 대일본언사우천황(大日本彥耜友天皇)
    • 효소기(孝昭紀) - 관송언향식도천황(觀松彥香殖稻天皇)
    • 효안기(孝安紀) - 일본족언국압인천황(日本足彥國押人天皇)
    • 효령기(孝靈紀) - 대일본근자언태경천황(大日本根子彥太瓊天皇)
    • 효원기(孝元紀) - 대일본근자언국견천황(大日本根子彥國牽天皇)
    • 개화기(開化紀) - 치일본근자언대일일천황(稚日本根子彥大日日天皇)
  • 권5(卷5)
    • 숭신기(崇神紀) -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
  • 권6(卷6)
    • 수인기(垂仁紀) - 활목입언오십협모천황(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
  • 권7(卷7)
    • 경행기(景行紀) - 대족언인대별천황(大足彦忍代別天皇)
    • 성무기(成務紀) - 치족언천황(稚足彦天皇)
  • 권8(卷8)
    • 중애기(仲哀紀) -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
  • 권9(卷9)
    • 신공기(神功紀) - 기장족희존(氣長足姬尊)
  • 권10(卷10)
    • 응신기(應神紀) - 예전천황(譽田天皇)
  • 권11(卷11)
    • 인덕기(仁德紀) - 대초료천황(大鷦鷯天皇)
  • 권12(卷12)
    • 이중기(履中紀) - 거래수별천황(去來穗別天皇)
    • 반정기(反正紀) - 서치별천황(瑞齒別天皇)
  • 권13(卷13)
    • 윤공기(允恭紀) - 웅조진간치자숙녜천황(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
    • 안강기(安康紀) - 혈수천황(穴穗天皇)
  • 권14(卷14)
    • 웅략기(雄略紀) - 대박뢰유무천황(大泊瀨幼武天皇)
  • 권15(卷15)
    • 청녕기(淸寧紀) - 백발무광국압치일본근자천황(白髮武廣國押稚日本根子天皇)
    • 현종기(顯宗紀) - 홍계천황(弘計天皇)
    • 인현기(仁賢紀) - 억계천황(億計天皇)
  • 권16(卷16)
    • 무열기(武烈紀) - 소박뢰치초료천황(小泊瀨稚鷦鷯天皇)
  • 권17(卷17)
    • 계체기(繼體紀) - 남대적천황(男大迹天皇)
  • 권18(卷18)
    • 안한기(安閑紀) - 광국압무금일천황(廣國押武金日天皇)
    • 선화기(宣化紀) - 무소광국압순천황(武小廣國押盾天皇)
  • 권19(卷19)
    • 흠명기(欽明紀) - 천국배개광정천황(天國排開廣庭天皇)
  • 권20(卷20)
    • 민달기(敏達紀) - 정중창태주부천황(渟中倉太珠敷天皇)
  • 권21(卷21)
    • 용명기(用明紀) - 귤풍일천황(橘豐日天皇)
    • 숭준기(崇峻紀) - 박뢰부천황(泊瀨部天皇)
  • 권22(卷22)
    • 추고기(推古紀) - 풍어식취옥희천황(豐御食炊屋姬天皇)
  • 권23(卷23)
    • 서명기(舒明紀) - 식장족일광액천황(息長足日廣額天皇)
  • 권24(卷24)
    • 황극기(皇極紀) - 천풍재중일족희천황(天豐財重日足姬天皇)
  • 권25(卷25)
    • 효덕기(孝德紀) - 천만풍일천황(天萬豐日天皇)
  • 권26(卷26)
    • 제명기(齊明紀) - 천풍재중일족희천황(天豐財重日足姬天皇)
  • 권27(卷27)
    • 천지기(天智紀) - 천명개별천황(天命開別天皇)
  • 권28(卷28)
    • 천무기 상(天武紀 上) - 천정중원영진인천황(天渟中原瀛眞人天皇)
  • 권29(卷29)
    • 천무기 하(天武紀 下) - 천정중원영진인천황(天渟中原瀛眞人天皇)
  • 권30(卷30)
    • 지통기(持統紀) - 고천원광야희천황(高天原廣野姬天皇)

3. 특징[편집]


이 책은 비록 8세기 당시의 역사책이지만, 초기 기록이 신화에 기대었거니와 편찬 목적 중 하나가 선대 황실의 권위를 알리고 칭송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많은 과장과 주작이 들어갔다.[5] 일본서기를 편찬한 8세기 당시의 일본은 한반도의 통일신라와 점점 관계가 불편해지고 있었고, 서로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던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6][7] 이렇게 자국의 왕실의 권위를 무작정 높이기 위해 타국을 무조건 낮추거나 사신 파견을 무조건 조공 기록으로 보는 주관적인 시각은 중국 사서들에서 볼 수 있으며 일본서기 또한 순한문체로 중국계 인물이 최종적인 윤문 과정에서 깊이 개입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된 바 있다.[8]

그렇기 때문에 일본 왕실이 훨씬 오래됐음을 주장하기 위해 이주갑인상으로 계보를 끌어올리거나, 실제로 있었던 전쟁 및 외교 활동이라도 그 주체를 일본이 주도했다는 식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바꿔 적었으며, 한반도 왕조는 일본의 신하라는 식으로 변조했다는 의심 등 여러 가지 논쟁이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실린 내용은 중국 사서와 마찬가지로 묘사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동시대의 사료나 고고학적 근거로 교차검증하여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일본서기는 각 지방 국가[9]에서 전해지는 구전을 집대성하고, 후대에 마치 통일된 단일 왕조에서 벌어진 사건들인 양 소급 적용해서 기록한 것이다. 대개 학자들은 일본의 정치적 통합 시기[10]가 5~6세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왜5왕 중 한 명인 무(武)[11]가 478년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는 자신의 조미(祖禰)가 통일을 이룩했다고 하는데, 일부 임나일본부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일본 학자들 중에는 이를 근거로 4세기 말엽쯤에는[12] 일본이 통일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일본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도 근거로 활용하여, 391년 즈음에 신라와 백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일본 열도가 4세기 말에 통일을 이룩했기 때문이라며 전제조건을 깔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통일을 이룩한 뒤 막대한 중앙 권력으로 군사력을 강화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주류 학설이 아니고, 5세기 중반에야 통일이 아닌 왜국 중심으로 정치적 통합을 이룩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이에 대해 한일공동역사연구회 1기에서는 노중국 교수와 5세기에 일본이 어느 정도 중앙집권적인 나라를 이룩했다고 주장하는 이시이 마사토시 및 하마다 고사쿠 교수가 토론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노중국 교수는 춘추좌씨전연남생 묘지석의 문장을 용례로 들어 조미(祖禰)를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해석했고, 일본이 통일 왕조를 이룩한 시기를 상대적으로 낮추어 봤다.[13] 반면 일본 학계에서는 조미(祖禰)가 조상을 뜻하는 일반명사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5세기경에 큐슈 일대가 통합되었다는 일본 사학계의 주장은 최근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통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아래는 김태식 교수의 주장이다.

그 상표문에서 더욱 중시되어야 할 것은 왜왕 무(武)의 자부심으로서, 일본 열도의 각 지역 수장을 통합한 최고 권력자라는 사실의 연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이타마현(埼玉縣)과 구마모토현(熊本縣)에서 출토된 철검명(鐵劍銘)에 등장하는 '擭加多支大王' 문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로, 왜왕 무의 통치 범위가 관동(關東)부터 큐슈에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대왕의 아래에서 특정 직장(職掌)을 분담하는 중앙 호족과 그 직장(職掌)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지방 수장의 독립성은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즉, 상표문을 통해 5세기 혹은 그 훨씬 이전에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였고 큐슈 일대를 통일하였다는 주장은 고고학적 연구로 증명할 수 없으며, 다만 큐슈 일대의 수장으로서 연합체의 정치적 지도자급 위상을 지녔다고 추정한다. 당대 무(武)가 자신의 작위도 황제에게 요구하는 한편, 자신의 세력과 연합한 지방호족들에게 평서정로관군보국장군(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의 관직도 하사할 것을 황제에게 요청하였는데, 이는 사가제(私假制)적 질서를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며 그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려는 시도로 보인다.[14]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당대에 왜왕의 왕권이 몹시 불안했으며, 중앙집권제를 공고히 수립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등장하는 일본서기의 외교 관련 기사는 통일왕조가 성립되기 이전의 일이므로, 통일왕조가 병합된 지방국가들에서 전해오는 구전을[15] 취합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주갑인상과도 아주 연관이 짙은데, 이주갑인상이 끝나는 시점이 왜가 통일을 이룩한 시점(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죽은 시점)과 절묘히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로 이주갑인상은 한반도 왕국들의 역사를 의식해 천황의 위엄을 세우고자 연도를 조작한 것 같다.

이것은 하마다 고사쿠 규슈대 교수의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 투고한 논문에서 발췌한 일부이다.

일본서기 중에서 4세기에 상당하는 기사로 표현된 천황이나 일본은 4~5세기에 아직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천조의 칭호도 중국 남조로부터 책봉을 기본으로 하는 백제의 외교자세를 고려하면, 백제가 일본에 대해 주창하는 호칭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이것도 8세기 초반의 일본서기를 편찬하기 전후의 천황의 왕건을 수식하는 용어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씨족 시조의 업적을 '이야기'화하고 또 후세의 백제 관련 기록도 일본서기 편찬시의 '지금', 즉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율령국가의 성립과정에서 씨족 국가에 대한 기여를 현시하면서 '이야기화'가 계속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화가 전혀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기억'을 이야기했던 점은 유의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내용은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학자들[16]이고, 하마다 고사쿠 교수 등은 일본에서도 통일왕조에 의해 병합된 지방국가들이 옛부터 전해지는 구전[17]을 후대에 취합해서 마치 통일 왕조의 역사처럼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단지 전혀 거짓의 이야기는 아니고 어느 정도 사실을 바탕으로 전한 구전이라는 것. 즉 과장은 되었지만 임나일본부설의 가치와 여지는 어느 정도 열어둔 것이다. 이렇게 일본서기와 일본이 통일을 이룩한 시기,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은 매우 강력하게 논리적으로 엮였다.

일본서기에서는 웅략천황 기록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직접 충돌하고 신라를 공격하는 기사가 나온다.

일본의 역사책이지만 주로 백제 측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대한 한국사 관련 정보도 들어 있는 덕분에 사료의 절대량이 절실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도 참고가 되는 귀중한 사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웃나라의 사서라고 하더라도 《일본서기》는 편찬연대가 《삼국사기》보다 4세기나 이르다.(일본서기 720년, 삼국사기 1145년) 백제가 멸망한 지 수십 년이 채 안 지난 시점에서 편찬된 사서인 만큼 아무래도 백제 측 기록이나 전승이 풍부하게 반영되었을 수밖에 없다. 한국 측의 고대사 주요기록인 《삼국사기》는 신라가 남긴 기록 위주로 수록되었다. 당연히 신라가 삼국시대의 승리자이고 그에 따라 수백 년간 나라가 더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같은 사건도 일본서기의 기록이 훨씬 자세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관산성 전투 부분은 삼국사기에선 간략하게 서술된 편이지만 일본서기는 고구려와 신라가 손을 잡았다는 배경 설명, 성왕이 죽기 전 상황부터 도도와 한 대화,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까지 세세하게 적었다.

백제뿐 아니라 많은 가야계 소국들 등 당시 일본이나 백제와 관련이 있었던 나라들에 대한 기록도 한국 사서들보다 훨씬 풍부한데, 예를 들면 안라회의, 사비회의 같은 주요 사건이나, 탁순국아리사등 같은 인물들이다.

다만 일본서기의 가야 기록이 국내 계통 기록보다 자세하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백제계 사서를 통해 전해진 것이고 '백제의 입장'을 거쳐서 남은 기록이므로 이를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또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자주성과 천황 가문, 일본 조정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고대 역사서 특유의 서술 태도 때문에 일본의 신화시대와 한국 관련 서술 등은 이 책에 쓰인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비록 그 바탕에는 귀중한 사료가 가득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일본을 상위에 놓는 방향으로 심각하게 과장됐다는 것이 문제다.

  • 647년 김춘추가 일본에 인질로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국제 정세와 김춘추의 지위상 절대 신라가 인질로 보낼 사람도 아니고, 다른 걸 다 떠나서 그냥 물리적으로 인질이라기엔 김춘추는 금방 신라로 멀쩡히 돌아와 계속 활동하기도 한다. 즉, 김춘추가 647년 일본에 간 것 자체는 맞는데 인질은 과장이고, 실제로는 642년 고구려에, 648년 당나라에 간 것처럼 외교관으로서 갔다고 이해한다.[18]

  • 백제 성왕이 541년 가야 각국 국왕과 일본 사신을 사비성에 초청한 사비회의 기록도 일본서기에만 있는데, 일본서기 원문에서는 가야 국왕과 일본 사신이 긴메이 덴노의 조칙(詔勅), 즉 명령을 들으러 백제에 갔다고 적어놨다. 일본부 요인들은 당연히 천황이 내리는 명령을 직접 받아야 정상이지, 상식적으로 가야 땅에 머물던 자들이 본국 일본 반대편인 서쪽 백제까지 가서 성왕에게 얻어들을 필요가 없다. 즉 백제에 각국 요인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것 자체는 사실인 듯하지만, 회의를 주관한 주체는 백제 성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일본서기 흠명 4년, 548년 기사를 보면, 왜왕이 백제왕에게 고구려의 임나 침공에 대비해, 방비를 당부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자신들이 임나를 직접 통치하는 상국이었다면, 직할령인 임나를 통해서 백제의 왕에게 시키면 된다. 하지만 부탁은 모조리 백제왕을 통하여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임나일본부설의 모순이 나타난다.

六月辛酉朔壬戌, 遣使詔于百濟曰, 德率宣文, 取歸以後, 當復何如. 消息何如. 朕聞, 汝國爲狛賊所害. 宜共任那, 策勵同謀, 如前防距.
6월 신유삭 임술(2일)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 조를 내려 "덕솔 선문(德率宣文)이 돌아간 후에 잘 도착하였는가? 소식은 어떠한가? 짐이 듣건대 너희 나라는 박적(狛賊)[19]의 침해를 받았다고 한다. 임나와 함께 잘 논의하여 전과 같이 막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백제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당부함
시기상, 다음으로 등장하는 기사는 冬十月, 遣三百七十人於百濟, 助築城於得爾辛로써 왜국이 인부 370명을 파견해 백제의 득이신(得爾辛)에 성을 쌓는 것을 도왔다는 것이다.

또한 백제에 가려 부각되지 않을 뿐,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도 일본서기는 중요한 사료이다. 예를 들어 일본서기에는 연개소문이 '이리카스미'로 나오는데, 실제 고구려인들의 음차를 적었기 때문에 고구려어 발음 연구에도 꽤나 도움이 된다. 또한 장수왕대나 안원왕대 등에 발생한 고구려의 내부 반란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와 중국 기록에 없는 내용들이 기재되어 있어 고구려사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료이다. 이는 왜의 동맹인 백제가 고구려와 육로로 접해 있어 백제를 통해 전해들은 내용들을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왜국 역시 고구려와도 사신을 자주 주고 받아 비교적 고구려 내부의 상황에 대해 왜가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 다른 시대 역사서도 다 그렇겠지만, 그 중에서도 일본서기는 위와 같이 '무조건 일본이 짱이다'라는 성향이 매우 강한 편이다. 19~20세기 초중반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는 일본서기의 과장된 내용을 신뢰하여 제국주의적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기도 했지만, 현대에는 일본 역사학자들조차도 일부 사이비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 일본서기의 내용에서 터무니없는 과장들은 당연히 거르고 본다. 즉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하지만, 엄밀한 사료 비판과 교차검증과 고도의 연구를 필요로 하는 신중을 기해야 하는 역사서다.

그 유명한 임나일본부설은 과거 일본서기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결과[20]와 다른 여러 가지 근거들[21]을 모아서 완성된 것이다. 이런 임나일본부설을 본격적으로 반박하는 계기가 되었던 1970년대 천관우의 주체교체설[22] 이전까지는 국내 학계에서도 일본서기를 한국사 연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과장된 임나일본부설 관련 기록을 간파하고, 교차검증이 가능한 상황으로 해석이 가능해지고서야 이런 금기에 가까웠던 분위기가 반전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 사서 삼국사기삼국유사 외에 한국사를 알기 위해 일본서기의 기사를 해석하고 활용한다는 개념은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대다수 고문헌들이 그러하듯 최초의 원본은 현존하지 않고 사본만 현전한다. 가장 오래된 사본이 헤이안 시대 초기인 9세기 무렵의 것이라고 한다.

3.1. 고사기와의 비교[편집]


고사기》가 먼저냐 《일본서기》가 먼저냐를 두고 논란이 있으나 고사기가 가장 오래된 역사서임을 인정하되 일본서기가 최초의 정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고사기는 과거의 구전으로 전해지는 역사를 문자화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681년 40대 덴무 덴노가 "옛 기록들을 모두 정리하여 새로이 만들어라." 하는 명을 내린 후 고사기(712년)와 함께 완성된 일본서기(720년)는 과거에 중구난방으로 전해지던[23] 역사를 통일하라는 덴무 덴노의 지시로 편찬된 책으로 고사기(712년)와 함께 편찬되었다. 고사기는 내부의 결속을 위해서, 일본서기는 대외적으로 내세우기 위해 순수 한문체를 사용했고, 고사기보다는 신화적이지 않고 사서적 성격이 강하다.

신화성과 내용 왜곡이 짙기 때문에 4세기 더 나아가서는 5세기 전반 중반까지의 기사는 대체적으로 역사로 인정 되지 않는다. 사실 3세기 즈음부터는 가뭄에 콩나듯 역사적 사실들이 중간중간 튀어나오기는 하는데[24], 다만 이 시기가 하필이면 이주갑인상이 적용된 시기인 데다가 그 있는 사실들마저 일본에 유리하게 왜곡해 놓아서 사실과 왜곡의 구별이 쉽지가 않다. 따라서 중국과 한국 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부정하며, 교차검증을 통한 기록만을 인정한다. 물론 5~6세기의 기사들도 문면 그대로 수용 된다는 뜻도 아니다. 5~6세기 이전의 기사들은 역사적 사실적 가치를 전혀 지닌 게 아닌 신화나 창작으로 여겨지고, 그 이후의 기사들은 어느 정도 사실을 기반하되 윤색 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3.2. 내용[편집]



  • 심지어 531년의 기록에는 일본 국내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백제본기를 인용하고 있다(...)
마가리노오에 황자(안칸 덴노)에게 양위했는데, 기록상으로는 일본 역사상 첫 양위 사례이다. 케이타이는 아들이 즉위한 날에 사망했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기록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인용해 "일본의 천황과 태자, 황자가 한꺼번에 죽었다.(日本天皇及太子皇子 倶崩薨)"고 기록하였다.

  • 중국 측 기록은 삼국지와 진기거주(晉起居注)를 인용했다. 그 외의 기록들은 후한서 등 중국 역사서를 다른 역사서들을 통해 간접인용했다고 현재 학계에서는 추정한다.

  • 일본이 한자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시점이 5-6세기이므로, 일본은 그 이전에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 전의 기록은 구전에 기초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25] 그러므로 4-6세기 이전의 기록으로 갈수록 신화나 전설이라고 부를 정도로 기괴한 내용이 많으며, 일본 국내 기록이 많지 않으므로 백제의 기록을 대거 인용했다.

  • 백제삼서를 차용한 부분은 상당한 신빙성을 지닌 것으로 맹신하기 쉬운데, 백제삼서를 인용해놓고, 왜왕을 백제 삼서가 작성된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명칭인 천황으로 고쳐놓는 등, 윤색이 없다고 할 순 없다. 고로 백제 귀족층이 기록한 백제삼서를 왜 조정에서 집대성하기 위해 제출할 때 이미 한번 윤색하고, 일본서기가 작성될 때 재윤색하여 원출처의 내용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 다양한 필진이 대거 참여했다고 추정한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의 글귀 중에는 왜색이 짙은 한문 구성이 있고 문법도 일본어 어순을 따른 조악한 문장이 많은데, 이런 부분은 왜계 편판자가 작성한 듯하다. 반면에 중국어 어순으로 작성된 한문은 대체로 백제계와 중국계 사료를 참조하거나 백제, 중국계 필진이 작성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즉 문체를 참고하여 작성된 기사가 어떤 맥락에서 작성되었는지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평가[편집]


《일본서기》는 고대 천황제국가 건설을 기념하여 8세기 초 일본의 지배층이 천황가의 유구성과 존엄성을, 나아가서는 일본열도 지배의 정당성을 천명할 목적으로 편찬한 고도의 정치성을 띠고 있는 역사서이다. 그 결과 국내 관계 기록이나 대외관계 기록에서 많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개작과 왜곡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서기》에서 백제와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의 근거가 된 《百濟記》·《百濟新撰》·《百濟本記》라는 이른바 백제 3서는 백제가 망한 뒤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 조정에서 일하던 백제 사람들이 가지고 건너간 본국의 역사 기록을 당시 사정에 의해 개서하고 수식하여 일본 당국에 제출했다고 짐작한다. 이들에 의해 제출된 내용들은 일본인들의 손을 거쳐 다시 윤색되어 《일본서기》에 인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일본서기》의 백제 관계 기록으로부터 백제와 왜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한 사료비판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양적으로 풍부하지 못한 《삼국사기》의 내용과 양적으로는 풍부하나 내용상에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사료비판을 통해 어떻게 조화롭게 해석하느냐 하는 점이 백제와 왜의 관계를 밝히는 데 가장 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들 자료에 대한 연구가 일치된 해석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일본서기는 사실상 일본이 국가적으로 역사를 정리한 최초의 사서라고 볼 수 있지만, 애시당초 편찬의 목적이 역사 정리도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천황과 고대 일본 및 유력 씨족의 위엄을 높이자는 차원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통치계급 중심으로 원사료 수집과 서술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 일본서기 자체에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아...'하는 말이 있는데, 즉 야마토 정권프로파간다를 퍼트리겠다는 목적의식을 드러낸다.

일본서기의 내용은 일본 내부 자료로서의 신빙성은 높지만, 외교에 관한 부분만큼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외교적인 내용 중에서 한국과 중국의 자료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은 오직 하나, 금강 전투(일본 측 기록은 백촌강 전투)에 관한 기록이다. 이 부분은 사상자 숫자까지 똑같이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그 이외의 국제 뉴스 부분은 칙찬 사서의 편찬 동기에 따라 서술하는 관점부터 다르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은 일본서기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나온 역사서에도 제기되는 비판인데, 특히 외교 부문의 사료를 해석할 때에는 정치적 의도를 배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중국 측의 자료와 겹칠 경우 상당히 충돌하는 부분이 많다. 중세로 넘어오면 명나라에서 아시카가 막부에게 일본 국왕이라고 쓴 것도 있는데 이 부분마저 왜곡하는 사례가 발생하니 비단 일본서기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사서 중 외교 부분은 주의하면서 봐야 한다. 이는 이미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우리 일본이 최고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 조성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좀 더 서술하자면 일본서기에서 처음으로 '귀화'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귀화라는 의미는 '무언가를 흠모하여 자연스레 그리되다.' 하는 의미로 수당 교체기와 신라의 통일사업 기간 동안 많은 중국인,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넘어갈 때가 있었다. 이들을 가리키면서 일본서기에서는 귀화인(歸化人)이라고 칭했었는데, 이 귀화인이 앞서 이야기한 개념의 '귀화'를 통해 일본인이 되었다는 한국 ≤ 중국 < 일본 이라는 일종의 개념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는 것.[26] 또한 중국측을 무시하고 열악한 족속들로 묘사하고 싶었는지, 초기 3-4세기 기록을 보면,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녀를 받아온다던지[27]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기사를 적어놨다. 6세기 성왕 치세기 이후부터 백제에서는 고구려와 본격적으로 다시 전쟁을 시작했는데, 마치 일본호족이 전쟁에 참가해서 평양성을 불태우고 고구려의 평원왕은 난리 통에서 궁궐담을 넘어 도망갔다는 등의 구라를 쳐놓고 있다. 물론 이는 당시에 전쟁에 참여한 백제 측 호족의 전승이었는데 후에 백제가 망하고 도일하여 자랑스럽게 가보마냥 부풀려 내려오던 내용이 일본서기에 수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신화시대까지도 편년체로 기록한 탓에 역사서로서의 정확한 기술성도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왜곡사례로는 진구황후가 돌로 주술을 행하여 출산을 늦추고는 배를 타고 단 두 달 만에 삼한을 평정했다는 황당한 기록이다.[28] 대체로 학자들은 이런 황당한 서술이 진구황후를 히미코와 동일시해 히미코와 종녀(宗女)인 토요의 치세를 숨기려는 의도로 일본 역사를 2갑자(120년) 앞당긴 데서 나온 것으로 본다.[29] 일각에서는 가뜩이나 당대에 문자가 없었던 일본은 인용할 단편적인 문헌도 압도적으로 부족했는데 천황의 위엄을 세우려고 120년을 뻥튀기했으니 그 빈 자리는 당연히 외국기록 특히 백제삼서가 자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30] 하지만 의도적으로 2갑자를 당긴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는데, 일본서기가 여러 개의 다른 기록들을 참조하는 과정에서 기록이 뒤섞이며 혼돈이 생겼다는 것. 백제사를 연구하는 쪽에선 주어를 일본에서 백제로 바꾸고 2갑자를 당기면 백제역사와 일본서기가 딱 들어맞는 점을 들어서 백제의 사서를 일본서기 편찬자가 보고 주어를 일본으로 바꾸는 얕은 수의 조작을 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31]

과거 일본 사학계는 한때 이 주장만을 굳게 믿고 내부의 반론을 무시한 채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웠다가 현재는 축소되었다.[32] 다만 진구황후 이야기 자체는 일본 민속학계에서는 타계(他界) 귀환 신화와 태양신 재생신화의 결합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 말고, 진구황후를 다룬 다른 기록을 보면 진구황후가 배며 군사들을 붉게 칠하고 삼한을 정벌했다고 하는데, 붉은색이 영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33]

사실 일본서기 내에서도 웃긴 게 있다. 일본서기 내 기록에서 신라구의 피해를 받는 기록을 보면 일본은 제대로 된 정식 군대가 있던 적이 없어 맨날 당한다느니, 그래도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신국이니 앞으로는 안 오겠지 하며 자기위안만 하고 있는 내용이 무더기로 나온다는 것.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최소한 정신적 위안용으로라도 진구황후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올 만한데, 안 나온다. 심지어 신라구로 인해 신라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일본에 살던 신라인들을 일본인들이 공격하는 일도 기록되어 있으면서 신화시대 기록 이후에는 안 나온다. 또한 백제와 관련된 부분에서도 백제를 아랫나라로 보면서도 일본서기 곳곳에서 심지어 진구 황후 시절 일본이 쳐서 백제에게 주었다는, 지금의 전라도 지역에 있던 소국 침미다례국은 일본 입장에서는 서쪽이나 북쪽이지 남쪽이라고 볼 여지는 하나도 없는데도 남쪽 오랑캐라고 '남만(南蠻)'이라 적고, 출병과 전투 시에도 일단 쓰기는 일본이 상국이고 시키는 식으로 쓰는데 모든 면에서 백제가 주력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케이타이 천황대의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백제본기를 인용하며 일본의 천황 및 황태자 황자들이 모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국내 사서나 문헌에는 없는 내용을 백제의 사서가 전하는 것이다.

일본서기가 신화시대를 벗어나면 사실적이지만 그러한 기록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일본서기의 모순이 극에 달하는 부분은 긴메이 덴노에 관한 기록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긴메이 덴노의 분량에서는 긴메이 덴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80% 정도가 백제 관련 기록들이다. 대놓고 백제기를 인용했다고 쓰여있다. 특히 백제 성왕 관련 기록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어서 그냥 백제 사서다. 일본서기답게 성왕이 긴메이의 신하라서 마치 아바타처럼 긴메이는 계속 지시를 내리고 성왕은 행동하는 식으로 쓰였다.

즉 일본서기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그것을 이리저리 짜맞춰서 왜국에 유리한 식으로 재구성했다고 추정한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초기 신화시대는 말 그대로 그냥 신화다.) 따라서 한국 관련 기록들은 조공, 인질 같은 일본이 상국이라는 뉘앙스를 발라내고 주체를 백제로 바꾸거나, 관계를 역으로 생각하면 해결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자면 삼국이 일본에 조공을 올린 것은 사실 선물이고, 백제가 가야 땅 어디를 하사해 달라고 왜국에 요청하는 건 실제론 백제가 그 가야 땅을 점령했다는 뜻이며, 왜국이 고구려를 친 기록은 사실은 백제가 고구려를 친 것을 바꿔 써놓은 기록이었다는 식이다. 애초에 항해기술이 백제와 신라보다 낙후되어 4~8월경에만 도해가 가능했고, 항해에 소요되는 세월도 상당했는데,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당시 일본에게 도움을 청하고 머리를 조아렸다는 것은, 백번 양보해서 일본의 군사력이 실제로 강대했다해도, 유사시 긴급 지원이나 지원군 동원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말이 안 된다.[34][35] 예를 들자면,

三月甲申朔戊子, 遣大伴連囓于高麗, 遺坂本臣糠手于百濟, 以詔之曰, 急救任那.

3월 갑신삭 무자(5일)에 대반련설(大伴連囓: 오도모노무라지쿠이)를 고구려에 파견하고, 판본신강수(坂本臣糠手: 사카모토노오미누카테)를 백제에 각각 파견하여 고하기를 "급히 임나를 구하라."고 말하였다.

《일본서기》 추고 9년(601년) 3월 5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신라로부터 임나를 구하라고 백제와 고구려에게 급히 사신을 파견해 명령을 하는데, 왜왕의 조칙을 보낸 발송지는 가까운 임나가 아니라 일본 본국이다. 차라리 그렇게 조칙을 보낼 정도라면 일본 본국에 있는 정규군을 파병하는 게 나을 뻔 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군대가 주둔하는 직할령인데 왜 백제와 고구려에게 부탁하며, 고구려에게 사신을 보내어 부탁할바에야 자신들이 직접 구원병을 파견함이 더 빠르고 안전한 방법인데, 역사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는 일반인조차도 논리적로 납득하기 어려운 엉터리 윤색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부여곤지가 도왜에 소요된 기간은 1-2개월이다. 일본서기에는 부여곤지가 461년 4월에 파견 되었으며, 무령왕이 태어난 시기는 같은 해 6월1일이다. 물론 여름에는 일본쪽에서 한반도 방향으로 부는 계절풍의 영향을 고려해야 하지만, 무령왕 또한 왜국으로 항해하는 중도에 태어났다고 했다. 정확히는 사가현 인근의 섬에서 태어났는데, 완전히 당도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앞선 601년 기사에 급박하게 임나를 구하라고 백제와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면, 백제의 경우에는 한두 달, 고구려 같은 경우에는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실제로 관산성 전투 전후로 파견된 백제의 사신들은 한 달이 넘어야 나라지방에 도착한다. 백제은 당시에 급박한 상황에 원군을 요청 했기 때문에 사신들이 돌아오기 전에 계속 다른 사신들을 보낸다.

처음에 신라가 임나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면, 한반도 내의 왜국 사신이나 임나에서 구원 요청을 왜국에 했을것이고, 1-2달이 걸려 도해하여 왜왕에게 보고 했을 것이다. 여기서 또 두세 달이 걸려서 그런 긴박한 상황에 다시 도해하여 백제나 고구려에게 조칙을 전달 했다면, 벌써 반 년이 허비되는 셈이다.

일본서기의 사관들이 이리저리 왜국에 유리한 대로 백제기 등의 기록물을 짜맞췄지만, 근본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잘 판별하면 실제 사건에 대해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누가 봐도 어설픈 마무리 때문에 일본서기의 사관들이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라는 상부의 지시에 무언의 저항을 한 것이 아니냐는 식의 반응도 있지만, 근거는 없는 이야기다.)[36]

본문 외에도 다른 전승을 일서의 형태로 정리한 덕분에 여러 가지로 유용한 고대 전승을 간직했다. 하지만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표준'으로 간주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본문이고, 그와 다른 전승을 '일서에 말하기를'[37] 하는 형식으로 주를 달았다. 신화시대 부분에서 아마테라스니니기를 강림시키며 '천하는 너와 네 자손이 영원히 다스릴 땅이다.'라고 말했다는, 그 유명한 '천양무궁의 신칙' 또한 일본서기에 기록됐는데, 그게 본문이 아니라 일서다. 본문에는 다카미무스히와 아마테라스가 공동으로 니니기를 파견했으며, 천양무궁의 신칙 또한 없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일본서기의 본문이 아닌, '천양무궁의 신칙'을 담은 일서의 내용을 표준판으로 가르쳤다. 그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상술했던 천황, 일본등에 대한 표현과 덧붙여 일본을 귀국(貴国)이라고 표현하고 신라나 백제의 사신이 자신의 나라를 칭할 때는 신국(臣國)이라고 칭하는 등, 천황의 신격화가 본격화된 시점의 명칭을 사용하는 등 걸러 들어야 할 것이 많다.

또한, 일본은 한자를 수용하기 이전에는 문자가 없었으며, 한자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5~6세기라고 파악된다.

沒水捕魚 無文字 唯刻木結繩 敬佛法 於百濟求得佛經 始有文字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글자는 없고 나무에 균열을 만들거나 새끼줄을 묶어 기록할 뿐이다. 불교를 숭상하여 백제에게 불경을 구하니 비로소 글자가 생겼다.

수서》 〈동이전〉 中 왜국


고로, 일본서기에 문자가 생기기 이전의 일들 즉 5~6세기 이전의 기록은 구전에 의존한 것이며, 사전적 정의로 역사라고 정의하기 어렵다. 따라서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각색되고 살이 붙어 과장 내지는 없던 사실을 신화마냥 부풀려서 전해진 거라고 추정할수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 일본서기 항목의 서술도 수서의 기사를 인용하며 5~6세기 이전의 문자는 없으며 단지 口承(구전)에 의존한 기록이라고 한다. [38] 문자가 생긴 시점은 놀랍게도, 일본서기에서 대략적으로 사료로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5~6세기 일이다.

이에 한술 더떠서,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원래 기억과 구전으로 전해진 것들을 6세기에 집대성해서 8세기에 이르러 편찬했다고 말하고 있다.

『日本書紀』は日本の現存最古の「正史」とされるが、その編纂までには日本における文字の使用と歴史的記録の登場の長い歴史があった。日本(倭)における歴史、即ち過去の出来事の記憶についての記録としてまず言及されるのは「帝紀」(大王家/天皇家の系譜を中心とした記録)と「旧辞」(それ以外に伝わる昔の物語)である。これらは津田左右吉が継体・欽明朝(6世紀半ば)の頃に成立したと提唱して以来、様々な議論を経つつも、元々は口承で伝えられていた伝承が6世紀にまとめられたものと一般的には考えられている。さらに、文字に残された系譜情報を「史書」として見るならば、雄略朝(倭王武、ワカタケル大王、5世紀後半)にはその種のものが存在していたことが稲荷山鉄剣銘の存在によってわかる。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로 여겨지지만, 그 편찬까지는 일본에서 문자의 사용과 역사적 기록의 등장의 긴 역사가 있었다. 일본(왜)의 역사, 즉 과거의 사건의 기억에 대한 기록으로 먼저 언급되는 것은 「제기」(대왕가/천황가의 계보를 중심으로 한 기록)와 「구사」(그 외에 전해지는 옛 이야기)이다. 이들은 쓰다 쏘우키치가 계체 흠명조(6세기 중반) 무렵에 성립되었다고 제창한 이래 여러 논의를 거치면서도 원래는 구전으로 전해지던 전승이 6세기에 정리된 것으로 일반적으로는 생각되고 있다. 게다가 문자에 남겨진 계보 정보를 「사서」로 본다면 웅략조(왜왕 무(武), 와카타케루 대왕, 5세기 후반)에는 그런 종류의 것이 존재했음을 이나리야마 철검명의 존재로 알 수 있다.



4.1. 위서가 아니다[편집]


한국 국내에서는 천황 중심주의 및 일본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성격 등을 이유로 위서라 주장하는 견해를 찾아볼 수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일본서기는 위서가 아니다. 국사편찬위원회를 포함한 한국 사학계도 일본서기를 연구 자료로 참조, 인용하며, 위서라 여기지 않는다. 기술적으로 많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일본 조정의 공식적인 역사서로 편찬된 그 서책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전 필사본이 존재하며,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서도 천황 계보를 확인할 수 있고, 야마토 정권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사서이기 때문에 정사에 해당하고 야사조차 아니다.

百濟弔使傔人等言、去年十一月、大佐平智積卒。

백제 조문사의 종자(從者) 등이 말하기를, "지난해 11월 대좌평 지적이 죽었습니다."…(후략)

《일본서기》 〈고교쿠기〉 원년조

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

갑인년 정월 9일 내기성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이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후략)

사택지적비》 비문, 충남 부여 출토

백제 인물인 사택지적은 한국 사서에는 기록된 바 없이 일본서기에만 나타나는데, 후일 사택지적비의 발견으로 실존성이 교차 검증되었다.


다만 위서가 아니라고 해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이 모두 사실인 것은 또한 아니다. 이 책은 기록의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기에 황실을 칭송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으며, 이에 사관(史官)이 중립성을 의도적으로 포기하고 날짜와 부대상황을 조작하는 등 광범위한 문헌오염을 저지른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기에 기록된 내용 자체는 대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편찬 방향도 저자 나름대로 설정한 서술 원칙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정제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서기는 고대사 관련 문헌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사 연구에도 필수적인 책이라,[39] 역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책에서 사실을 적은 부분과 사관이 의도적으로 신격화・왜곡한 부분을 구별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가 상식적 왜곡[40]이나 신화적 요소[41]가 많고 한반도 관련 기술에서 편향된 시각으로 서술되어 있어 특히 논란이 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당대 편찬된 다른 사서들 역시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삼국유사》의 경우에도 편찬자인 일연승려였던 탓에 불교적 상징과 신화가 그대로 기술되어 있으며, 《삼국사기》는 저자인 김부식삼국시대 관련 서술에서 유독 신라만 편애했다는 논란이 있다(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중국 명나라의 《명실록》과 청나라의 《청실록》 또한 지나친 황제 중심적 서술로 역사적 가치가 희석된 면이 없지 않다. 그나마 조선의 《조선왕조실록》 정도가 왕조차 생전에 기록을 들여다보지 못했을 정도로 사관이 왕의 간섭을 받지 않고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려 노력했기에[42]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아마추어 역사가들종교 단체, 기타 비합리적인 국뽕들은 일본서기가 소설이라거나 반대로 환단고기 등의 재야사서를 일본서기랑 비교하면서 재야사서가 왜곡되지 않은 진실을 담은 역사서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단순히 저술연대나 저술자 같은 서지정보를 속이지 않아서 좁은 의미의 위서에만 부합하지 않을 뿐이며 책의 사실여부와는 무관하다. 특히 이러한 책들은 "왜곡되지 않은 진실을 담았다"라는 주장이 거짓이며 따라서 이러한 책들이 위서라는 말은 그 내용 자체로 "거짓 책"이라서 거짓 위(僞)를 써서 위서가 되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비록 거짓이나 과장된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을 서술한 부분도 있으며 무엇보다 당대의 사료 절대량이 부족하기에 엄격한 교차검증의 전제하에 대접을 받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모르고 출판이 넘쳐나는 20세기에 가짜 역사책을 내밀면서 이것도 진실된 부분이 있으니 검증해봐야한다는 주장은 수많은 역사가들의 오랜 노력과 연구 성과를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4.2. 한국사와 일본서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일본서기/한반도 관련 기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본서기에는 한반도 관련 기사가 매우 많으며, 이 때문에 한반도의 고대사 연구에도 필수적인 사서로 여겨진다. 내용을 살펴보면, 4세기 이전의 기록에는 백제가 아닌 신라에 관한 기사만이 등장하고, 이후에는 백제에 관한 기사가 주로 등장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를 놓고 내선일체 연구관이 작용하던 시기에는 일부에서 '진무천황이 신라인'이며, 일본인이 신라에서 도래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고사기에는 대놓고 진구황후는 천일창의 여식에게서 나온 모계 후손이라는 서술이 등장한다.

오늘날에는 내선일체 연구가 더 이상 주류가 아니며 동계 이론 역시 학계에서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지 않으나, 야요이인이 한반도에서 도래한 이후 삼국시대까지도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존재했다는 것이 다양한 사료와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입증된다. 일본 신화타카마가하라가 고령이나 거창이라는 설,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이 먼저 도착한 곳이 신라이며,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는 전승이나 가야왕자 쓰누가 아라시토 등의 에피소드에서 많은 연관성을 찾고 있다. 고언어학적 부문에서는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이 진한어와 고일본어를 반도 일본어로 비정하기도 했으며, 마르티너 로베이츠와 벡위드 등이 고구려 및 부여를 중심으로 한 예맥어와의 관계를 추정하기도 했다.


4.2.1. 임나일본부설 관련[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임나일본부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야마토 정권은 임나에 대한 의사를 전부 백제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다. 그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고 일본서기에서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토 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하는 기록은 거의 없고, 하나같이 백제를 통해서만 의사를 전달한다는 것은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토 정권은 단순히 백제를 지원하는 위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김현구,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일본서기의 기록을 분석하면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는커녕 오히려 반박하는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백제가 야마토 정권의 수하'였거나 제국과 제후국 식으로 한반도 남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모습(상국이 하국에게 종속되어 있는 등)이 나타나기 때문에, 실제로는 백제가 상국이고 일본이 백제 아래에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실제 김현구는 일본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 保和)[43]와 임나일본부설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스에마쓰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자 일본서기를 근거로 들어 임나일본부설 자체를 반박했다. 일본서기를 근거로 든 주장이었으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고.

김현구의 주장과 같이 왜왕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자신이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백제왕에게 부탁하는데 몇가지 예를 들자면,

548년 긴메이 덴노(흠명천황)가 백제왕에게 서신을 보내, 고구려의 침공을 대비해 임나와 힘을 합쳐 방어해 달라 당부

544년 흠명천황이 백제 성명왕에게 임나를 세워달라고 요청

543년 11월 왜왕이 임나에 있는 백제의 군령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


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김현구 교수가 직접 예시를 들었던 기사는 일본서기/한반도 관련 기사에서 찾을수 있다. 각각 541년 4월, 543년 11월, 544년 2월, 544년 11월 기사이다.

파일:543년11월.jpg

요약하면, 일본서기에는 소위 '삼한정벌'이나 '임나 4현을 주었다'는 내용 등 당시 일본이 반도 국가와 동등하거나 그보다 위에 있었다는 뉘앙스로 서술하려 시도한 흔적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왜왕 자신의 힘이 한반도에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에게 외교적으로 부탁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로, '일본부' 같은 식민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정황적 증거가 된다.


4.2.2. 한국 사학계의 입장과 연구관점[편집]


일본서기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태도는 미묘복잡할 수밖에 없다. 일본이 한반도의 삼국 모두를 복속시키고, 종주국으로 행세했다는 굉장히 거북한 주장이 실려 있는데, 일단 이건 한국 측 사료와 전혀 들어맞지 않고 중국 자료까지 갖다놓고 비교해보면 혼자 삼천포로 빠지는 일본서기 내용에 막막해진다. 사실 일본서기의 내용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술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정도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삼국사기나 여타 다른 사서도 오류와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44] 일본서기에 있는 한반도 기록은 당대 한국과 중국에 남은 어떤 사료보다도 자세하기 때문이다.[45]

예컨대 일본에 문화를 전파했다는 아직기나 왕인, 고구려에서 양원왕 즉위시에 왕위계승을 놓고 도성에서 '추군' 세력과 '세군' 세력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은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그 외에 삼국사기에는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고간 도도가 백제 성왕의 목을 베었다고만 기술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그 전후의 상황을 주고받은 대화까지 자세히 서술하는 등[46] 백제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기록들도 제법 실었다. 여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그나마 삼국사기에서 다뤄주지만 가야에 대해서 제대로 다뤄주는 건 일본서기가 거의 유일하다.[47] 이러니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어서 대략 난감한 것.

물론 삼국사기나 고고학적 자료들과 대조해서 평가해봐야 되겠지만, 삼국사기의 내용이 훨씬 간략하고 일부가 중국 사서를 복사 붙여넣기 하다보니 한계가 있으며, 과연 삼국사기가 더 정확한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생긴다. 그대로 믿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한일 역사학계는 일본서기 내용 중 신뢰할 만한 부분을 추출하려고 노력해왔다.[48] 이는 풍납토성 발굴과 신라 나정 발굴, 고구려사 연구 발전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신뢰도가 올라간 지금도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마찬가지다.[49]

이런 '복어' 같은 책으로까지 불리던 일본서기를 그나마 '교차검증이 가능한' 정도로 끌어올리는 전기가 마련된 것이 1970년대 천관우가 가야사연구를 내놓으면서였다. 천관우가 낸 결론은 임나일본부는 백제의 임나 주둔 군사령부였다는 이른바 가야 백제군사령부설이었는데, 천관우의 주장은 일본서기 안에서 임나일본부가 백제군사령부라면 왜 임나일본부 소속 인사들이 백제 본국의 말을 명령을 듣지 않고 버티는지, 그리고 임나일본부 소속 왜계 인사들에 대한 인사권을 왜왕이 쥐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천관우가 해당 주장을 발표하면서 제시한 일본서기 해석 방법, 일본서기 기록 속 한반도 관련 사건[50]의 주체를 일본 천황이 아니라 백제로 바꾸어 해석한다[51]는 관점이 일본서기의 왜곡을 발라내고 교차검증을 통해 사서로써 써 먹을 수 있는, 나아가 식민사학이 제공해 오던 한일 고대사 해석의 구도를 깰 수 있는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것이다. 《일본서기》의 한반도(특히 백제) 관련 기록들을 그 주어를 왜가 아닌 백제로 바꿔 해석한다는 논리 자체는 100%까지는 아니라도, 사용하면 한국 측 사료나 고고학과 딱 들어맞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서 김현구노중국, 이도학, 이희진 같은 한국의 사학자 대부분이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으며, 과거와 달리 일본서기를 과장을 발라내고 백제, 가야사 연구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되었다.

유튜브에 일본서기 강의가 있으며, 구글 지도로 본문에 나오는 지명을 표시해둔 지도를 띄워놓고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번역한 판본을 읽으며 내용을 해설하는 방식이다.링크


5. 언어학적 가치[편집]


일본서기는 역사학 사료로서뿐만이 아니라 고대 일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적 자료로서도 매우 이름이 높다. 언어학적 연구 결과 일본서기는 α군β군의 두 군으로 나눌 수 있음이 밝혀졌는데 14~19권, 24~27권은 α군이며 속수언(續守言)[52]과 살홍각(薩弘恪) 등의 중국계 인사[53]가 정통 한문으로 쓴 부분이다. 1~13권과 22~23권은 β군이며 야마다노후히토 미카타(山田史御方) 등의 일본계 인사가 한문으로 썼으되 일본식 어법, 이른바 왜습(倭習)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미카타는 통일신라에 유학했던 경험이 있는 학승으로, 당대 신라는 당나라와 교류가 많아서 일본보다는 좀 더 한학이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54] 미카타 본인이 당나라에 직접 유학한 경험은 없어 한문을 완벽히 구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우선 당시 일본의 노래를 기록한 대목에서 두 군의 차이가 드러나는데, α군은 당시 한자의 중국음에 기반하여 일본 노래를 전사했고, 다른 한쪽은 한자의 일본음으로 일본 노래를 전사했다. 중국계 인사는 한자의 아음(牙音, 한국 한자음 기준 ㄱ 계열음)과 후음(喉音, 한국 한자음 기준 ㅎ 계열음)의 구별이 명확했기에 일본어의 か(ka)행 소리를 아음 한자로만 옮긴 반면, 일본음을 사용한 부분은 か(ka)행 표기 시 아음 한자와 후음 한자를 섞어서 표기하고 있다.

또한 α군 내에서도 일부 기사[55]에서 왜습이 다수 발견되어서 이 부분이 후대에 모종의 이유로 가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다. 이를테면 긴메이 덴노 2년 4월 기사에는 "被誑新羅(피광신라)"라는 표현이 있는데, "신라에 속임당하여(=속아)"라는 의미에 맞게 쓰려면 "被新羅誑(피신라광)"으로 써야 옳다. 한반도 관계 기사에서 왜습이 다수 발견된다는 점에서 일본식 천하관에 기반하여 상당한 윤색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한자를 이용한 당대 일본어 표기법인 만요가나가 일부 인명, 주석 등에서 발견되기에, 고사기, 만엽집과 더불어 만요가나 연구에 있어서 굉장히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6. 국내 번역[편집]


1987년에 성은구가 발췌번역본을, 1997년에 심리학자 전용신이 완역본을 내놓았다. 전용신의 번역본이 널리 읽혔는데 그러다가 2013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사학계에서 제대로 된 번역본을 내놓았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사학자들이 모여 번역한 것이니 사실상 오피셜. 3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격은 각 3만 원 정도. 동북아역사재단 자료실에서 pdf로 볼 수 있다. 링크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운영 중인 동북아역사넷에서 온라인 열람도 가능하다.

다만 주석을 달 때 참고한 자료가 너무 오래돼 본문의 지명과 주석에 달린 현재 지명이 전혀 맞지 않고, 학설 또한 오래돼 폐기된 학설이 버젓이 실려있다는 문제가 있다. 일본의 행정구역은 심심하면 이합집산하니 어느 정도 참작할 여지가 있다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주석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
  1. 1921년 폐지된 이래 행정구역으로서 존재하지 못한 '군'을 행정구역으로 실어두었다. 현재 일본에서 '군' 단위는 옛날부터 불러왔으니 그냥 존치 중인 지리적 구분에 불과하다. 주석에 실린 무수한 군郡은 지금 거진 다 시市로 승격되거나 정町, 촌村으로 갈라진 지 오래다.
  2. 동북아재단의 역주서가 나온 2013년 당시 대구광역시 현풍면이었던 현풍읍을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도 아닌 '경상북도 현풍군'으로 게재했다. 현풍군달성군으로 편입된 게 1914년인데 1번의 군 행정구역과 같이 생각해보면 주석 달 때 참고한 문헌이 보통 구닥다리가 아니다.
  3. 大字雷[56]를 大宇雷로 적지를 않나, 大和郡山市(야마토코오리야마 시)를 군(郡)이 들어갔다고 大和郡 山市라고 띄어 써버리는 등 오기도 수두룩하다.

이렇게 지명 주석만해도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오류 투성이니 인물 주석이나 관련 학설 주석의 내용에 신빙성에 의심이 가도 재단 측에서 뭐라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이외에도 일본서기 관련 연구서가 몇 권 출간되어 있다. 읽어볼 만한 책들은.
  •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 (전 3권): 사학자들이 모여서 쓴 책으로 학계의 입장을 견지할 수 있는 책
  • 일본서기의 비밀
  • 일본서기와 천황제의 창출[57]

일본서기적 관점을 정리한 책을 보고자 한다면 도쿄대학에서 발행한 《일본역사》를 읽으면 그 개략이나마 알 수 있으니 관심있는 역사 지망생들은 참고하도록 하자. 단 한중 측 사료도 같이 보는 NPOV적 입장은 필수.


7. 관련 문서[편집]



[1] 일본어 독음은 '니혼쇼키'. 훈으로 '야마토부미'라고도 읽는다.[2] 한자의 순서를 바꾸어 紀記라고 쓰는 경우도 없진 않으나 드물다. 고사기가 더 먼저 쓰였기 때문에 고사기의 기(記)를 앞에 두는 듯하다.[3] 일본서기를 포함해 속일본기(続日本紀), 일본후기(日本後紀), 속일본후기(続日本後紀), 일본 몬토쿠 덴노 실록(日本文徳天皇実録),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을 통틀어 육국사라 부른다.[4] 다만 부분부분 정통 한문이 아니라 왜습이 가미된 한문체로 쓰인 부분도 있다. 아래 언어학 단락 참조.[5] 사실 객관적 실증주의가 부족했던 전근대의 다른 역사 기록들도 왜곡이나 과장, 신화적 수사가 많이 들어가지만 일본서기처럼 기본적인 서사구조마저 의도적으로 짜맞추는 정도는 아니었다.[6]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2, p8[7] 당시 성덕왕이 재위 중이었던 신라는 삼국통일전쟁의 후유증 수습을 끝낸 뒤 나당전쟁 이후 사이가 멀어졌던 당나라와 화해하였다. 반면 일본과는 왕성국 사건을 비롯하여 관계가 악화되는 정황이 이 시기부터 많이 등장한다. 성덕왕 문서 참조.[8]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892349&cid=60611&categoryId=60611[9] 당시 일본은 정치적 호족 연합체였던 시기였고, 여러 지방 분국들이 병존하던 시기였다.[10] 호족이 연합하여 왜국을 주축으로 모인 시기이지, 지방 분국들이 완전히 소멸된 시기는 아니다.[11] 이러한 관념으로 왜5왕 중 한 명인 무(武)을 웅략천황에 비정하는 학설이 있다.[12] '사망한 부친'을 뜻하는 조미(祖禰)라고 기록되었으니 일본에서는 통일을 이룩한 시점을 3~4세대 정도 앞으로 당겨오는 것이다.[13] 노중국 교수의 논지는 일본은 5세기 이르러 통일의 초석을 마련했으므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왜군의 존재를 축소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된 왜군의 실체를 왜국 정규군이 아닌, 일개 지방에서 파병한 용병 내지는 해적 집단으로 보는 해석을 따랐다. 이는 광개토왕릉비를 연구한 중국인 고구려사 연구자 왕건군의 의견과도 일치한다. 왕건군은 왜군이 북큐슈 일대의 해적일 것으로 봤다. 일본서기에서 교차검증할 수 없는 이유가 왜국의 정규군이 아닌 이합집산의 해적이나 지방국가의 소규모 군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일본의 주장은 일본 열도가 통일된 시기를 최대한 빠르게 잡아 왜군의 영향력을 인정받으려는 취지다.[14] 자신보다 낮은 관직을 주어 수직적인 주종의 관계를 공고히 하며, 대내외적으로는 연합체의 수장으로 인정받으려는 취지이다.[15] 당연히 사료보다 객관성이 매우 결여될 수밖에 없다.[16] 전통적인 의미의 임나일본부설이 아닌,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막대하게 끼쳤다고 해석하는 학자들.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이시이 마사토시나 사토 마코토 같은 학자들이다.[17]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5~6세기 이전에 문자가 없었다.[18] 그러나 이는 일본서기의 왜곡이 아니라, 일본어에서 받아들여지는 인질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어에서 인질에 해당하는 질의 훈독은 무카하리(人力)라고 읽는데, 그 뜻은 왕의 대리인이라는 뜻이므로 일본에서 당대 받아들여지는 인질의 개념은 인신공납의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19] 狛은 글자 외관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곰이라는 뜻의 貊과 일맥상통한다. 백제나 고구려는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곰을 숭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웅진이라는 지명을 당대 백제인들이 어떻게 불렀는지 알 수 있는데, '고마나리'라고 일본서기에 기록 되어있다. 고마는 웅진의 웅(熊)=곰에 대응되는 단어이며, 일본에서는 Kuma이며. 공교롭게도 일본어에서도 고려=고구려를 Koma라고 부른다. 백제와 고구려 모두 맥족이라는 의식이 당대에도 투철했던 것 같다. 또한 狛의 일본어 훈독 또한 koma이다. 안장왕의 후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그들의 성씨가 狛이며 실제로 koma라고 읽는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고구려의 일본어인 koma 박적=곰 이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것은 백제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이 일본어에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20] 사실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모순이 많다.[21] 임나일본부설 문서에 하나하나 반박되고 있다.[22] 요약하자면 '일본이 했다'는 부분을 '백제가 했다'로 주체를 바꿔서 읽으면 말이 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23] 고사기에 따르면 이전까지 제왕의 역사를 담은 기록인 제기(帝紀)와 임금의 말씀을 기록한 본사(本辭) 등이 통일되지 않고 기록되어 있어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제황의 일과 과거 있었던 사건들을 암기하는 신하가 있다고 되어 있다.[24] 대표적으로 근초고왕의 마한 정복 기록, 삼국사기에서도 교차검증되는 석우로 관련 기록들, 대놓고 히미코를 의식한 위나라 조공 기록 등이 있다. [25] 고로 문자가 생기기 이전의 사건을 기록한 내용은 구전을 기초로 했으며, 역사라고 부르기에 어렵다. 역사는 기록이 있어야 성립한다.[26] 이 때문에 한중 사학계에서 귀화인 대신 바다를 건너 넘어온 사람이라는 '도래인'을 쓰도록 권장한다. 물론 일본 측에서도 이 도래인을 쓰기는 하는데, 귀화인도 병용하는 형편.[27] 그마저도 고구려를 통해 육로로 오나라와 통교한 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오나라는 중국의 남쪽 지방인데 고구려를 통해서 육로로 교류한다는 건 억지다.[28] 진구황후 문서에 반박하는 문단이 존재한다.[29] 여왕의 지배를 숨기려 한 것이라면 스이코 덴노, 고교쿠 덴노 등의 기록도 삭제되어야 하는데 그건 또 아니다. 이에 대해 히미코와 토요가 중국에 조공했기 때문에, 혹은 일본의 정통 천황족이 아니기 때문에 숨기려 했다는 시각도 있다.[30] 물론 삼국지 정사, 한서 등 중국의 사서도 인용 했지만 압도적으로 차용을 많이 한 것은 당연 백제삼서다.[31] 이 때문에 반 우스개로 일본서기의 본명이 백제서기라는 말도 있다. 우스개치고는 너무 잘 맞아서 문제지만. 실제로 백제사 연구 시 많이 참고하는 주 사료 중에 일본서기가 있다.[32] 다만 임나일본부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설은 출선기관설로 이미 80년대에 사실상 폐기된 학설이다. 현재 임나일본부가 외교적 기능을 수행했다고 보는 외교 사신설이 대세. 여기서 찌그러졌다고 표현한 설은 출선기관설.[33] 참고로 진구황후의 기록을 이주갑인상 문제와 결부시키면 근초고왕 시기가 되는데, 이 때문에 근초고왕이 삼한을 정벌한 것을 일본서기가 왜곡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34] 당시 일본의 항해기술 수준은 임나일본부설을 참조바람.[35] 백강 전투만 보더라도 일본은 준비에 긴 세월과 항해기간이 필요했고, 그동안 모든 것을 파악한 나당연합군은 백제부흥군과 일본 정규군을 철저히 농락하여 궤멸시킨다.[36] 이런 점 때문에 삼국시대, 특히 백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일본서기를 적절히 인용한다. 위에 나타난 점 때문에 일본서기의 기록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기록이라도 써놓은 게 어디냐.[37] 대표적으로 무령왕의 출자에 대한 기록이이다. 무령왕의 생물학적 친부로 인식되는 부여곤지의 후손 비조호조(飛鳥戶造)가 남긴것으로 추정하는 백제신찬과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가 남긴 기록이 상충 되기 때문에 이런식으로 기럭을 남긴게 아닐까 하고 학자들은 추정한다.[38] 『日本書紀』は日本の現存最古の「正史」とされるが、その編纂までには日本における文字の使用と歴史的記録の登場の長い歴史があった。日本(倭)における歴史、即ち過去の出来事の記憶についての記録としてまず言及されるのは「帝紀」(大王家/天皇家の系譜を中心とした記録)と「旧辞」(それ以外に伝わる昔の物語)である. これらは津田左右吉が継体・欽明朝(6世紀半ば)の頃に成立したと提唱して以来、様々な議論を経つつも、元々は口承で伝えられていた伝承が6世紀にまとめられたものと一般的には考えられている[39] 특히 백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한국의 경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제외하고는 삼국 시대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국내 사서가 아예 없다. 비석 등의 금석문이나 지방의 향토 사료, 몇 가지 종이(민정문서 등)나 목간 유물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으로, 나머지는 당대 중국이나 일본의 기록을 참조하여 추정해야 하는 형편이다. 당대 삼국에서도 많은 사서가 편찬되었지만 모두 소실되어 전하지 않기 때문.[40] 이주갑인상의 경우 왜곡이 규칙적이기에 이를 역으로 추적하여 실제 연도를 추정하기도 한다.[41] 일본 신화는 신화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진구 황후는 아예 허구의 인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이다.[42] 다만 조선왕조실록 또한 완벽한 것은 아니다. 특히 1차 왕자의 난과 관련하여 태종을 중심으로 왜곡이 의심되는 부분이 있고 계유정난과 관련하여 세조를 중심으로 왜곡이 의심되는 부분도 있으며 일제가 개입하여 서술한 고종실록순종실록은 정도가 심해 국보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빠져있다.[43] 김현구는 자신의 책에서 그를 S씨라고 칭했다.[44]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수정론)'이라 한다. 대표적으로 고이왕 이전의 백제 왕들이 당대 인간으로서 달성하기 어려운 수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나, 삼국의 건국 연도를 두고 이견이 있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 이희진은 순서와 연대도 완전히 뒤바뀌는 일본서기와 순서는 다른 사서, 자료와 거의 비슷하고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 삼국사기와 같이 비교할 수 없다는 얘기를 했다.[45] 아쉽게도 한국에는 이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가 현재까지 남아있는 게 아예 없다.[46] 일본서기에는 말 먹이는 종 고도(苦都) 또는 곡지(谷智)라고 기록했다. (삼국사기에는 김무력의 비장이라고 서술됨) 이름이 비슷하기에 본래 말 먹이는 종이었으나 왕을 참하여 비장으로 인생 역전 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47] 일본서기가 가야를 자세히 서술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주민들이 가야와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았느냐는 추측도 한다.[48] 이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일본서기를 '복어'로 비유한 적도 있다. 그만큼 까다롭고 다루기 곤란하다는 뜻. 이영식, "《일본서기》 활용의 성과와 문제점" 에서. 《한국고대사연구의 새 동향》(한국고대사학회편, 서경문화사, 2007)[49] 다만 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실질적인 국가로서 삼국이 정립된 때는 훨씬 후대라고 본다. 백제의 국가성립과 관련된 풍납토성이 3세기 중엽에 축조되었다고 본다. 한때 방사선탄소연대치로 삼국사기와 일치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 신뢰도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있었고 최근에는 실제 측정을 했던 기관에서도 그런 말이 나왔다. 게다가 상대편년에서는 풍납토성 아래 발견된 전문도기(錢文陶器: 동전 문양을 새긴 도기) 때문에 3세기 중엽으로 보는 것이 고고학계에서는 대세다.[50] 대표적으로 근초고왕 때의 가야 7국 평정 기사.[51] 즉 원래는 해당 사건들이 백제가 주도한 정벌인데 훗날 《일본서기》가 편찬되면서 천황의 권위를 위해 주어를 백제에서 왜로 바꾸었다는 것. [52] 660년 나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 당시 왜에 포로로 끌려갔다고 한다.[53] 둘은 당나라의 한자음(북방음)에 정통하여 일본 최초로 다이가쿠료(大学寮, 율령제 시대 일본의 최고 교육 기관) 소속 음박사(音博士, 온하카세)에 임명되었다.[54] 삼국사기에 인용되어 전문이 실려있는 '답설인귀서'를 봐도 7세기 신라인들이 중국인들이 흠 잡을 수 없는 고급 한문 문장 구사가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55] 특히 다이카 개신을사의 변 관련 기사[56] 오아자 이카즈치. 오아자(大字)는 한국의 동 정도 되는 행정구역이다.[57] 이 책에서 저자인 오야마 교수는 기기신화를 지토 천황과 후지와라 후히토, 특히 후히토가 주도적으로 '창작'했다고 주장한다. 기기신화의 성립에 있어서 덴무, 지토 천황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됐으리란 설은 이미 기기신화에 관한 학자들간 논의가 있으나, 이 책의 저자인 오야마 교수는 이러한 논의를 극단적으로 주장하여, 기기신화와 관련된 다른 연구성과를 무시하는 단점이 있다. 기기신화 성립 이전 일본의 종교적 토양과, 지토 천황 무렵의 정치적 상황이 기기신화에 반영된 바를 정리, 연구한 책으로는 김후련 교수의 《타계관을 통해서 본 고대 일본의 종교사상(2006, 제이엔씨)》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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