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대도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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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사
新羅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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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역대 계림주대도독
4. 함께 보기


1. 개요[편집]


鷄林大都督府 / 계림주(신라) 대도독부

당나라백제를 멸망시킨 후, 남은 신라까지 지배하기 위해 설치하려고 시도했던 통치 기관으로, 끝내 신라에게 패배당해 실패했다.


2. 역사[편집]


660년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은 그 지역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옛 백제 지역을 통치하려 했다. 백제 잔존 세력은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며 저항하였으나 백강 전투로 끝끝내 분쇄되었고, 이후 고구려의 멸망과 나당 전쟁 이전까지 당나라의 실질적 지배를 잠깐 받기도[1] 했었다.

663년까지 백제부흥군을 토벌하던 당시 신라가, 옛 백제 영토를 어느 정도 흡수했기 때문에, 이때 당나라는 신라 지역에까지도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663년)하였는데, 백제와 달리 신라는 아직 건재했기에 이는 이북 5도와 비슷하게 이름만 있는 명목 상의 조치에 불과했다[2]. 이는 사실상 ‘웅진주도독’ 부여융과 '계림주대도독' 문무왕이 동격으로 당나라 장수의 주재 아래 취리산 회맹(665년)을 맺었으니, 결국 신라도 이미 멸망한 백제와 동급으로 당나라에게 규정된 것이고, 또 [[신라]도 장차 백제처럼 될 수 있다는 협박인 셈이었다.

옛 고구려의 땅을 통치하기 위해 만든 안동도호부나 백제 땅의 웅진도독부와 달리 실체가 없는 명목뿐인 기관이었고, 당나라나당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사실상 없던 일로 되었지만, 계림주도독의 작위는 명목 상의 작위로 성덕왕대까지 계승되다가 733년발해가 당나라를 침략하자 신라가 다시 당을 도와 발해를 공격하여 나당 간 관계가 회복되었고, 이후 명목 상의 작위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당이 신라를 인정해준 것과 같았다.

참고로 발해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는데, 이는 당현종고왕 대조영에게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이란 작위를 내렸던 것으로, 이는 신라의 경우와 유사하게 신흥 국가였던 발해를 회유(를 가장한 공격 협박)하기 위해 홀한도독부(忽汗都督府)을 명목 상으로만 설치한 것이었다.


3. 역대 계림주대도독[편집]


대수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김법민
663년 ~ 681년
문무왕
2
김정명
681년 ~ 692년
신문왕
3
김이홍
692년 ~ 702년
효소왕
4
김흥광
702년 ~ 733년(?)[3]
성덕왕

보다시피 그냥 신라왕들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실어 놓은 것뿐이다. 성덕왕에 이르면 아예 사라져 신라를 망할 나라 취급한 것도 끝난다.

4. 함께 보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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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 백제 땅의 전체가 당나라의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라, 웅진 주변 일부 지역에 해당.[2] 비슷한 예로 당나라는 실제로 지배력이 닿지 않는 일본도 일본 서부의 역사적 지명 츠쿠시에서 따온 츠쿠시도독부(筑紫都督府:축자도독부)를 명목상 설치하기도 했다. 다만 츠쿠시도독부 관련 기록은 왜국 측에서 중국식 도독부를 설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3] 733년 발해가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자 신라가 당을 도와 발해를 공격했다. 이에 당은 성덕왕에게 개부의동삼사 영해군사의 작위를 제수했는데 이때부터 계림주도독의 작위가 기록에서 사라진다.